삼위 일체 뜻 | [김진혁 교수의 신학이야기 4강] 삼위일체 하나님! 아는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23191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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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크리스천들이 알지만 확실하게 설명은 못하는 바로 그것!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는 신비다.
신앙을 바로 세우는 맛있는 신학이야기. 김진혁 교수의 신학 강의를 추천합니다 🙂

김진혁 교수:
연세대학교 신학학사 (BA)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석사 (ThM)
하버드대학교 Divinity School 목회학 석사 (MDiv)
옥스퍼드대학교 신학부 철학 박사 학위 (DPh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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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 나무위키

세 가지 요소가 뭉쳐 잘 조화될 때, 혹은 3개가 같이 있어야 구색이 맞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어원은 1에서 유래. 비슷한 용어로는 삼신기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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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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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위일체(三位一體, 고대 그리스어: Τριάδος 트리아도스, 라틴어: Trinitas 트리니타스)란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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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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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란? (삼위일체의 뜻과 의미) – 다음블로그

삼위일체란 무슨 뜻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구별되어 존재하고 계십니다. 삼위란 세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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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7/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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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이란? – Manna 24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란 유일하신 하나님(본질)이 3인격(위격)으로 존재하시고 사역하신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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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anna24.com

Date Published: 6/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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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일체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삼위”이라는 말은 세 분을 가르키지만 “일체”라는 말은 하나의 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것인데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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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verykoreanstudent.com

Date Published: 1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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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뜻은? (Trinity) – 목양연가(牧羊戀歌)

삼위일체란 용어는 성경 안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시나, 이 한분 안에는 성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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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ake123172.tistory.com

Date Published: 9/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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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일체론] 삼위 일체 뜻 – 복음 빵집

삼위일체란, 하나님의 한 본질(本質) 안에 구별(區別)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삼신(三神)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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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dk153.tistory.com

Date Published: 1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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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일체에 대하여 – 패스티브

성삼위일체 (聖三位一體)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이 한 몸이라는 뜻이다. 즉, 성부 여호와, 성자 예수, 성령이 각각 개체가 아니라 한 분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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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asteve.com

Date Published: 4/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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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nity(삼위일체) 단어 설명 – 네이버 블로그

그러므로 Trinity의 한국어 번역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분리된 세 하나님들(the three Gods)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the God)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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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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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 가톨릭대사전 – 가톨릭정보 – 굿뉴스

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적 신비를 지칭한다. 하느님의 육화(肉化)와 은총(恩寵)과 함께 그리스도의 3대 신비를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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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ria.catholic.or.kr

Date Published: 9/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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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교수의 신학이야기 4강] 삼위일체 하나님! 아는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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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삼위 일체 뜻

  • Author: CBS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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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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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위일체(三位一體, 고대 그리스어: Τριάδος 트리아도스[*] , 라틴어: Trinitas 트리니타스[*] )란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본질에서 한 분이시며 위격(位格, 고대 그리스어: ὑπόστασις 휘포스타시스[*] )에서는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1] 삼위일체에 대해서 동방교회는 본질에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되는 신비를 지지했고, 서방교회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동일본질로 한 분 하나님이 되는 신비를 지지하며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보였다.[2]

기원 [ 편집 ]

삼위일체 방패(Scutum Fidei). 아버지(Pater)와 아들(Filius)과 성령(Spiritus Sanctus)은 동일한 인격이 아니나(non est) 한 하느님(하나님)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났고, 신약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문구가 증거되었다.[3] 그러나 신학적으로 정립이 되지는 않았다. 기독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초기 기원은 그리스도론(기독론)의 확장에서 시작되었다. 막 태동되었던 기독교에게 70년 유대 전쟁에서 다른 유파가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바리사이파 유대교와 인성을 강조하는 에비온주의, 신성의 영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의 등장으로 기독교 뿌리를 흔든 자극이 되었고, 육체를 가지신 제2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논리적인 설명인 신학이론이 필요했다. 이 즈음에 형성된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론과 그 그리스도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인 삼위일체가 등장하였다. 삼위일체는 점차 발전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는 세계관과 신학적 지침으로서 기독교에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4]

기독교 [ 편집 ]

기독교에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은 삼위(3 Persons, 세 위격, 세 신격, 세 분, 三位)로 존재하지만, 본질(essence)은 한 분 하느님이라는 교리이다.[5]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교회에서 구약이라고 부르고 있는 타나크는 다양한 방식으로 간접적인 삼위일체가 나타나며, 신약성경 2고린 13:13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라는 표현에서 삼위일체가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후대 교회에서 사용하였다. 또 신구파를 막론한 대다수의 기독교는 삼위에 대한 개념이 요한 복음서 등에서 간접적으로 암시함(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옴)을 주장하며 옹호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기원후 200년경 라틴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가 신을 설명하기 위해 트리니타스(trinitas)라는 말을 만들어낸 게 그 시초다. 그리스도교 찬송가는 주로 삼위일체를 세 행으로 꾸며 성부, 성자, 성령에 각각 한 행씩 배당한다. 구약성서에는 삼위일체의 ‘예고편’이 있다. 아브라함 족장을 방문한 ‘사람 셋’은 ‘주’라고도 지칭되는데, 그리스도교도들은 이것을 가리켜 삼위일체가 아브라함을 방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성자가 예수라는 세속의 형태로 태어나기 훨씬 전이다. 동방정교회의 화가들은 아브라함과 이 ‘구약성서의 삼위일체’를 여러 차례 그림으로 표현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다윗의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시편 110:1의 말씀을 번역본대로 비교한 것이다.

공동번역 야훼께서 내 주께 선언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

개역한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개역개정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새번역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야훼 하느님(성부)께서 다윗의 또 다른 주(主)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에배소서 1:20 하느님께서는 그 능력을 떨치시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공동번역)

사도행전 7:56 그래서 그는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외쳤다. (공동번역)

마태복음 14:62 예수께서는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공동번역)

마태복음 12:36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스스로,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하지 않았더냐? (공동번역)

로마서 8: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공동번역)

신약과 비교해 해석해 보았을 때 주(主)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결정적인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구절은 요한의 첫째 편지 5장 1-8절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세례로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증언자가 셋 있습니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서로 일치합니다.”

요한은 요한1서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계명을 지키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한 그것을 증거하는 분이 성령이라고 시사하고 있으며, 그 셋은 하나라고 명확히 함으로 삼위일체론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기록해 놓았다.

기독교의 경전 중에서 요한의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선재와 성령의 오심을 설명하여 삼위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사상적 개념으로는 기독교 초기의 환경이었던 유대교, 다신론, 영지주의 등의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로 보내졌고, 아들이 이 땅에 존재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후에도 함께하시는 주, 즉 기독교가 고백하는 주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요청되었다. 특히 영지주의의 유출설과 마르키온주의의 이원론은 그리스도론을 뒤흔드는 사건이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신학적 개념이 필요했다.[6] 이 새로운 개념은 흔히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호모우시우스라는 예수와 성부가 동일 본질이라는 관념을 더욱 발전시키고 논리적으로 체계화 시켜 삼위일체로서 확정했다. 니케아 공의회 이전부터 교부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던 호모우시우스의 “동질적이고 하나의 실체로 된 아들과 아버지”라는 관념에 도전하여 삼위일체를 부인한 아리우스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의하여 파문되었다.

공의회의 결정 이전에 1세기 사도 교부인 로마의 클레멘스의 삼위 언급 즉 “하느님의 사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 성령으로”[7]라고 고백하는 문헌과 성육신 이전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를 받아들이는 기록이 있다. 사도 교부인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도 이미 존재했던 세례의 문구와 요한복음서를 활용하여 삼위 개념을 언급했다.[8] 2세기를 맞으며 기독교 변증가들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틀을 신학적으로 마련하고자 애썼다. 로고스 개념을 활용하여 유스티아누스에서 타티아누스, 안디오키아의 테오필루스로 이어지며 발전하였다. 2세기의 신학자 이레니우스의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등장과 이후 초대 기독교 전승을 기록한 사도전승에서 이미 삼위일체 개념을 따라 서품되는 감독자의 기도문이 있으며[9], 그 후 3세기 신학자 히폴리투스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4세기 공의회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일부 종교 학자들은 4세기 즈음에 확정된 삼위일체설은 기독교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고, 또 이는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초기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10], 기독교 선교 이전 플라톤이 주장하던 성 삼위일체의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1] 다른 학자는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고대 이집트, 힌두교를 비롯한 고대 신앙의 영향을 받아 혼입된 교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2][13][14][15]

현재는 대다수의 기독교 종파들이 삼위일체를 중심적인 교리로 이해하고 있다. 요한의 복음서 14장에서 설명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통하여 자신이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성부의 독생자로서 성부와 영원한 관계에 있다는 것과, 성령도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하느님은 ‘절대단독주체 (Absolute Singleness)’가 아니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하나이며 이를 통하여 예수는 삼위일체의 그 자체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모든 기독교 종파의 주요 교리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니케아 신경과 보편교회의 세계공의회 전통을 거부하는 회복주의 계열의 일부 교파에서는 비성경적 논리에 불과하다며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기도 한다.

찬성 견해 [ 편집 ]

삼위일체 찬성 교파와 교단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구약성경, 신약성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보편교회 시대의 신학적 기준을 사도적 지침이라 여기고 수용하는 교단들이다.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 개신교회 교단들인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다.

삼위일체의 요소는 성부, 성자, 성령인데 마태오 복음 11장 27절과 마르코 복음 10장 22절에서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 마태오의 복음서 11장 27절 (공동번역)

또한 28장 19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가르쳤고, 요한 복음서 14장은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서술하고 있다.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장 6절에는 대구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창조주와 동일함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이고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장 6절 (공동번역)

반대 견해 [ 편집 ]

삼위일체 반대 교단들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교파로, 현재 주류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배교라 여기고, 초대교회에서 보편교회 시기를 지나며 현재 교회가 배교로 단절되었으며, 삼위일체 역시 단절의 이론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이 단절을 잇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니케아 신경과 보편교회의 세계공의회 교리를 거부하는 회복주의 성향들로 여호와의 증인,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 유니테리언 등이다.[16]

구약성경 신명기 6장 4절에서 나오는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하나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라는 구절과 신약성경 마태오의 복음서 4장 10절에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라는 구절 등 성서의 여러 면을 살펴보면 삼위일체와 관계되지 않는 듯한 내용도 담겨져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유니테리언, 그리스도아델피안 등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종파는 이 점 또한 지적하며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의 일부분이었다면 “오직 그분에게만”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신 가톨릭 백과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 1967년판) 제14권 299면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로마 가톨릭교회도 삼위일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삼위일체 교의는 4세기 후반에 가서야 고안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어떤 면으로 볼 때 그것은 사실이다. (중략) ‘세 위 속의 한 하느님’이란 교리는 4세기 말 이전에는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으며, 온전히 그리스도인 생활과 신앙 고백의 일부가 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영문, 1970년판) 제6권 386면에는 보편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채택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20일에 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으며, (중략) 공의회가 발의한 신경에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라고 표현한 결정적인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직접 제안하였다. (중략) 주교들은 황제에게 위압감을 느껴 단지 두 명만 제외하고 신경에 서명하였는데, 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유일신 사상을 가지며, 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혐오하는 반응이 그들의 경전 코란에 나와 있다.(수라 4:171, 5:73) 이러한 유일신 사상이 전투적이며 호전적인 이슬람을 나타내기 위한 기본적인 뼈대로 보기도 한다.[17]

다양한 해석 [ 편집 ]

삼신론: ‘세 인격의 세 하느님’이라는 이론이다.

양태론(modalism): 하느님이 시대에 따라 성부·성자·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 인격의 한 하느님’이라는 이론이다. 간단히 말해서 구약의 시대에는 성부로, 신약의 시대에는 성자로, 신약 이후에는 성령으로 활동한다는 주장이 양태론적 이론의 일례이다.

종속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온전히 하나인 주체이나,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양자론 : 양자론은 하느님이 예수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기독교 전통 [ 편집 ]

삼위일체가 포함된 신조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에벤에셀선교단John

삼위일체란? (삼위일체의 뜻과 의미)

삼위일체란 무슨 뜻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구별되어 존재하고 계십니다.

삼위란 세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르시고, 구별되신다는 것입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스스로 독립되어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를 의미합니다.

성부는 성령이 아니시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며, 성부는 성자가 아니십니다.

그래서 성부께서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자는 성부에게 순종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은 성부하나님도, 성령하나님도 아닌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삼위 하나님은 서로 다르시며, 구별되는 세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둘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뜻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모두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분 모두 다 하나님으로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이 세분은 구별되는 세 인격이지만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이 같고 능력과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 모두 100% 신성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모두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셋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구별되시면서 모두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으로서는 동등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성은 셋이 아니요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고 할 때 ‘일체’는 숫자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동등하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는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 3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지만, ‘신성과 능력과 본질로서 동등하며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듯 나도 하나님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삼위라는 말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이 세분이 모두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라는 말은 수적 개념이 아닌 ‘동등하다’라는 개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란 유일하신 하나님(본질)이 3인격(위격)으로 존재하시고 사역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교리이기 때문에 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이단이 됩니다. 그럼에도 정통 기독교신자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은 자주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실제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신학적으로 정립이 된 용어이지, 성경에 직접 나타난 용어는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진리일 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장 잘 계시하여준 성경 중에 하나가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사도요한은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의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 가운데서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님, 그리스도의 영이 오셨는데 그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에게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3위격으로 존재하시고 사역하신다는 사실이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2위이신 예수님이 1위인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냐 아니면 아버지보다 작으냐의 논쟁입니다. 동등하다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작다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은 아버지 보다 작은 분이고 종속되어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이 이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파는 예수님은 아버지와 100%동등하다고 믿었습니다. 이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리우스파는 요한복음14:28 “아버지는 나보다 크다”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도를 많이 합니다. 예컨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지 않습니까? 얼음, 물, 수증기는 같지 않습니까? 태양이 있고, 빛이 있고, 열이 있지 않습니까? 태양, 빛, 열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도 이렇게 이해 할 수 있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는가에 대한 이런 숫자 놀음은 우리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점 더 고상하게 말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위 삼신론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버지, 예수님, 성령이 모두 하나님이기 때문에 결국 삼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분뿐이십니다. 또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시대마다 다른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이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며 역사한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예수님이 신약시대에, 성령님은 교회시대에 존재하시면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이단입니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시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우리에게 계시 된 만큼만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신비는 남겨두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론을 어떻게 이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신론이 나타내는 진리가 무엇일까?를 알고, 그 진리에 감사와 감격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시면 안 됩니다. 초월자이셔야 합니다. 초월자이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초월자이시지만 우주와 역사 가운데 내주하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 내주 하셔야 합니다. 초월하시면서,인류의 역사 가운데 내주하시고, 인간의 영혼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세 인격이 어떻게 한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를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초월자이시지만 역사 가운데 내주하셔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 내주 하셔야 함을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해 안 되면 그대로 두세요. 그 대신 하나만 명심하십시오.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는 초월하시면서, 내재할 수 있는 신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삼위 일체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삼위 일체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질문: “삼위 일체란 무엇입니까?”

답변: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온 하나님에 관해서 분명하게 설명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할 때 분명하게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이라는 말은 세 분을 가르키지만 “일체”라는 말은 하나의 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은 세 분, 즉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이 있지만 세 분 모두 같은 신의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삼위일체를 H 2 O 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H 2 O는 물, 얼음, 수증기의 세가지 형태를 갖고 있으나 모두 H 2 O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설명은 바로 계란이 껍질, 노른자, 흰자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부분적이 면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예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는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도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제한된 경험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처음 시작인 창세기 1:26의 내용을 에서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유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고 써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을 지칭할 때,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은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명기 6:4)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5:5)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고린도전서 8:4)

예수꼐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6-17)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태복음 28:19)

예수님이 말씀하시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한복음 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한복음 14:9)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2:45)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태복음 1:20)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누가복음 1: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여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기키리니 내 아버지꼐서 저를 사랑하실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16-17, 23)

삼위일체의 뜻은? (Trinity)

1. 삼위일체의 뜻은? (Trinity)

삼위일체란 용어는 성경 안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시나, 이 한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3인격이 각각 다르며, 역사는 함께 하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인격(person)이란 위(位)를 말하므로 세 인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떻게 한 하나님이 셋으로 나누어지는가 하고 의심이 생기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따지려고 들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깨닫는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비하더라도 얼마든지 믿어진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삼위일체 만큼이나 흥미롭고 확실하며 은혜가 넘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고후 13:14, 요 1:14)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없지만 2세기경에 교부였던 “터툴리안”이란 사람이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타내셔서 그때그때마다 구원 사역을 이끌어 나가시는가를 많이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안에 세 인격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하나이시며 그의 영광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며 영원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 여기서 말하는 셋 ( 三位 ) 이란 각각 완전한 인격이 다르신 하나님이시면서도 한 ( 一體 ) 하나님이지 여러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

※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기에 힘을 씁시다. (엡 1:17)

본체인 영광의 광체시며 초월적인 하나님 (히 1:3)

본체의 형상이시며 물질로서의 객체화되신 말씀의 하나님 (요 1:14)

본체의 영이시며 감 잡으시는 주체적인 하나님 (요 14:26)

이렇게 신비의 삼위일체를 성경의 조명을 받아 말할 수가 있습니다.

※ 인간도 삼위일체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속사람은 마음이요 초월적이므로 영적인 세계를 마음으로 감 잡을 수가 있고, 겉 사람은 객체화된 몸 즉 오감 각을 통해서 감 잡을 수 있고, 감 잡는 인생 즉 미래의 감을 잡을 수 있는 자는 장래에 소망이 있으므로 이런 사람을 선각자라고 하며, 그때그때 감 잡는 자를 현실주의자, 지나간 다음에 감을 잡는 자를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 마음도 나요, 몸도 나요, 내 인생도 나입니다. 그러나 마음도 몸도 인생도 완전히 다르면서 나라는 하나의 존재를 볼 때 역시 신비한 삼위일체가 아닌가요?

*<이 다음에 큰 식당을 경영하고자 꿈을 앉고 지금껏 힘써 왔는데 결국 포장마차 사장이었더라.>

※참고 성구(창 1:1-2, 1:26, 마 3:16-17, 28:19, 요 14:26, 고전 12:4-6, 벧전 1:2, 엡 2:18)

※ 이단적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이단적 교리는 “터툴리안”에 의해 사용된 그 후로부터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교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데서부터 비롯하여 일어났습니다. 3세기에 나타난 이단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샤벨류즈”란 신학자인데 그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기 위해 성자나 성령은 별개의 신격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이 구약시대 때는 성부로 나타나시고 신약시대 때 잠깐 성자로 변모하여 나타나셨으며 오늘날은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더 쉽게 예로 든다면 “나 김 목사는 생명샘교회 성도들에게는 담임목사요, 신학교 학생들에게는

교수요 집에서 사모에게는 남편이요, 딸 한나에게는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 는 그럴듯한 학설입니다.

△ 반증

듣기에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무서운 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인격자로서 3직분을 맡은 김 목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3직분을 담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리를 보고 “천부 수난 설”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니까 하나님도 성령님도 모두 죽었다”는 무서운 뜻이 들어있는 말입니다. 주후 325년 당시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파문당한 학설입니다.

오늘날도 유명하고 신령하다는 부흥사들이 부흥회 때 침 튀겨 가면서 이렇게 고함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삼위일체를 올바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교인들은 “삼위일체가 뭐 그리 대단하며 중요하단 말이냐? 그냥 예수만 믿으면 됐지…”하고 편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자식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땅을 잘 정리하여야 하며, 그 위에 주춧돌을 세우는 것과 같이 예수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축복과 징계의 말씀을 공부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잘 정리해 놓은 다음 그 위에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말씀을 잘 쌓아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이 밝히는 삼위일체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밝혀주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만을 골라서 그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1) 구약성경

(창 1:26) “우리”라는 복수의 단어를 사용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 18:1-21)여호와의 사자 (천사) “셋”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출현으로 알 수가 있습 니다.

(이사야 48:16)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2) 신약성경

(마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마 3:16-17)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예수께서…성령이…하늘에 소리가 있어”

(고전 12:4-6) “성령은 같고…주는 같으며…하나님은 같으니…“

(고후 13:13) 축복기도 중에서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예수 그리스도의…“

(엡 2:18) “저로 말미암아…한 성령 안에서…아버지께 나아감을…“

…이 외에도 (사 6:3, 요 14:16, 요 1:1-4, 4:10, 히 4:12, 롬 4:17, 요1서 5:6-8)

※ 삼위일체 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그 논쟁과 변증이 끊임없었습니다.

옛날 (주후 325)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 “아리우스”라는 말 잘하고 똑똑한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말하기를 “예수는 하나님과 다르다. 예수는 육신을 태어난 피조물이다. 신성은 전혀 없다.”고 온 천지를 향해 떠들어댔습니다. 그 문제로 기독교계에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논쟁이 일어나자 황제는 교계의 대표 300명을 소아시아에 있는 “니케아”란 도시로 소집을 시켜 놓고 친히 종교 회의를 열었으니 그것이 유명한 “제1차 니케아 회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학식으로 믿는 머리 좋은 기독교 대표자들이 말 잘하는 아리우스의 웅변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보다 열등한 피조물”이라는 그의 설교에 많은 종교 지도자, 즉 박,목사들이 고개를 끄떡이고 있을 때 한쪽 구석에서 초라하게 보이는 촌사람이 “아니요!” 하고 소리치며 일어섰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집사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라는 30세밖에 안된 시골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호모우시아(Homousia,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시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는 “성자 예수님은 본질이나 영광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신 동일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신성을 단호하게 주장하면서, 삼위일체를 말하였습니다.대세가 아리우스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사전에 준비한 사람 아타나시우스의 추상같은 표호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적의 순간이었습니다. 비록 말에는 능하지 못한 초라한 시골 띠기였지만 진리에 굳게 섰으며 성령 충만한 청년 아타나시우스! 콘스탄틴 황제와 니케아 종교 회의는 그의 정통 변증에 완전히 압도당한 채 회의는 끝났습니다. 소수의 진리가 다수의 이단을 격파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아리우스는 완전히 이단으로 파문당하였고, 그때로부터 ”니케아 신조“가 작성이 되었으며, 뒤이어 ”아타나시우스 신조(AD 295-373)” 같은 정통 신조가 뒤를 이었고, 후에 천주교에서 고백한 ”사도신경“이 천주교에서 나왔고, 후의 “톨트 신조(AD 1618-1619),” “웨스트민스터 신조(AD 1643)” 등 유명한 신조들의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삼위일체 부분만,

…정통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곧 삼위로서 일체이시고, 일체 가운데 삼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 삼위를 혼돈하거나, 한(유일) 본질을 분리함이 없이 성부의 한 위(位)가 계시고, 성자의 다른 한 위(位)가 계시며, 또 성령의 다른 한 위(位)가 계신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하나이시며 그의 영광도 같으며, 그의 존엄도 동일하게 영원 하신다. 그러나 세 분들로서 영원한 분이 아니시며, 한 영원한 분이시며 한 전능자이시며 한 주이시다.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어느 한 위(位)가 다른 한 위(位)보다 크거나 작거나 할 수 없다.

※ 이단자 아리우스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를 완강히 반대할 때 그는 “아리우스여 요단강에 가라 그리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것이라”하고 일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통쾌한 표현입니까?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위로 올라 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위에 임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 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6-17)”

이 글을 쓴 김영빈<벤허> 목사가 한마디 한다면, “셋은 구별이 되나 분리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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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빈 목사 지음

흙에서 천국까지 (From Dust to Heaven) 평신도 신앙교재 중에서

[삼위 일체론] 삼위 일체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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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삼위일체의 뜻

이 세상에는 말로나 입으로 다 설명(說明)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基督敎)의 진리(眞理)인 삼위일체 교리(三位一體敎理)역시 인간의 지력(智力)으로 완전히 이해(理解)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敎理)는 성경전서(聖經全書)에서 가장 난해(難解)한 교리이므로 충분한 설명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삼위일체 교리(三位一體敎理)는 인간이성(人間理性) 영역밖에 있으므로 사람의 지혜(知慧)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인간이 성경에 계시된 외에는 하나님의 대해서 전부(全部) 알 수 없듯이 삼위일체도 전부 알 수 없으며 또한 삼위일체에 대한 충분(充分)한 이해와 설명을 시도(試圖)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찻잔으로 큰 바닷물을 되어보려는 것과 같은 어려운 신비의 교리이다.

어거스틴(Augustinus)의 거작 De Trinitate 마지막에 그는 말하기를 ‘주 우리의 하나님이여,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진리는 가서 세례를 베풀고……운운 하는(마28:19)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주여, 한 분 하나님이신 당신이여, 성 삼위일체시여, 내가 한 분이신 당신의 영감으로 이 책에 기록한 모든 것을 삼위이신 당신이 받아 주소서. 만일 그 속에 나의 생각이 포함되어 있거든 한 분이시면 삼위이신 당신이 그것을 간과해 주소서’ 어거스틴의 이 말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억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으므로 설명을 다 못하나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用語)는 아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용어로 표현된 역사상의 교리를 비성서적이요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직접(直接) 표현(表現)된 곳은 없으나 삼위일체를 나타내고 있는 성경구절(聖經句節)들은 많이 있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의 한 본질(本質) 안에 구별(區別)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삼신(三神)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세 가지 양태(樣態)나 세 부분(部分)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신격(神格)에는 삼위(三位)가 계시는데 이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이시며, 이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고 본체(本體)도 하나이시고 권능(權能)과 영광(榮光)도 동등(同等)하시다.

삼위(三位)는 세가지 모양(模樣)이거나 가면(假面)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직분(職分)이나 기능(機能)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즉 한 사람이 세 가지 기능(機能)이나 직분(職分)을 의미(意味)하지 않는다.

삼위(三位)는 ‘세위격’(三位格) 또는 ‘세격위’(三格位) 세분의 인격적(人格的) 존재(存在)를 가리킨다. 삼위(三位)는 세분이라는 뜻이다. 한 분이 아니시고 세 분이시다. 이것은 상식(常識)이면서도 지극히 성경적이다. 삼위(三位)는 세 분이 계신다. ‘본체는 하나이나 세분으로 계신다’가 아니고 세 분이 계시는데 그 세분의 신성(神性)은 단일(單一)하시다. 왜냐하면 모두 동질(同質)이시기 때문이다. 삼위(三位)가 다른 질(質)의 신성(神性)이시면 세 하나님들이지만, 신성(神性)이 동질(同質)이시므로 한 하나님이시다.

삼인격(三人格)이 일체(一體)란 것은 우리 이성(理性)의 지력(智力)으로 이해하려고 볼 때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비다. 그러나 기독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理解)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전서가 그렇게 계시(啓示)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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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nity(삼위일체) 단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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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서 우리나라의 신학이 외국신학의 번역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번역의 과정에서 본래의 뜻을 명확히 파악하지 않음으로 인해 교리의 이해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삼위일체(Trinity)일 것이다. ​

영어의 Trinity는 라틴어 trinitas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tres(고어 tris)와 unitas의 합성어이다. tres는 ‘셋(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고 unitas는 ‘하나(one)임’을 뜻한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분리된 세 하나님들, 곧 완전히 분리된 세(三) 신(神)들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one God)이심을 표현한다.

문제는 unitas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는 ‘존재적 의미의 하나(one)’와 ‘집합적(연합적) 의미의 하나(one)’가 있다. 이는 어느 언어권에서나 거의 같을 것이다.

김종택(Z^_stevision)은 두 사람들(two men)이 아니라 ‘한 사람(a(one) man)’이다. 이때의 하나(한)는 존재적 의미의 하나다.

그 선수들은 ‘하나’가 되어 상대팀을 이겼다. 여기서 하나는 집합적 의미의 하나다.

unitas에는 ‘존재적 의미의 하나’와 ‘집합적 의미의 하나’ 둘 다 있다고 봐야 한다. 라틴어 사전에 unitas는 영어로 unity, oneness의 뜻이 있다.

unity: 단일, 단일성, 개체, 단일체, 통일, 통일체, 조화, 일치

oneness: 단일성, 동일성, 통일성, 일치

즉 unitas는 존재적 의미로는 ‘단일, 단일성, 개체’, 집합적 의미로는 ‘통일, 일치’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Trinity의 한국어 번역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분리된 세 하나님들(the three Gods)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the God)이시다’라는 뜻과, ‘성부, 성자, 성령께서 온전히 하나가 되신다’라는 뜻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뜻이 삼위일체론에서 다 유효하다고 본다. 그런데 unity 혹은 oneness의 ‘존재적 의미의 하나(one)’를 간과하고 단지 ‘집합적 의미의 하나(one)’만 취해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이시지만 이 세 분들이 한 분의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면 그릇된 삼위일체 이해일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본래 Trinitas가 ‘삼위의 독자성’과 ‘기존의 유일신 신앙’을 다 표현하기 위해 조어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절대 신조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를 지키기 위해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는 한 하나님(the God)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이 꼭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 설명에서 unity와 oneness는 일차적으로 ‘단일개체성’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정통 교리에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들 안에는 오직 단 하나의 의지(Will)만 존재한다’라고 규정해 놓은 것도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분의 여호와이시다’라는 교리를 뒷받침한다.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and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ght. (Deut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You believe that God is one; you do well. Even the demons believe – and shudder. (Jas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야2:19).

기독교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성부도 하나님, 성자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어떤 기독교인이 ​”>하나님이 한 분이시다<라고 하면 틀린 말이고, 하나님은 세 분이시라고 해야 맞습니다"라고 한다면 사실상 삼신론 이단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믿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은 (존재적으로는) 유일하신 한 분이시지만 위격적으로는 세 분들이시다'라고 말해야 바른 표현이다. ​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다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모두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들이시라고 해서 이 세 분들께서 단순히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각자 스스로 존재하시며 의지적으로는 셋이 하나로 연합되어 계신 분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건 교묘한 삼신론 이단이다! ​이 세 분들은 세 생명체들의 깊은 연합이 아니라 >본래 분리 불가능한 한 생명체<이시다. 세 분들의 단순한 영원한 >연합(결합)<이 아니라 영원한 한 신적 생명체의 세 인격체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에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사항은 바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시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오셨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연합<만 강조하는 삼위일체 해석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세 신적 생명체들이 아니라 '한 신적 생명체'이시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태어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다. ​ ​삼위일체의 가장 적절한 해석은 "한 하나님(the one God)께서 동시에 >완전한 신성을 갖추신 세 신적 인격체들(세 위격들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로 존재하신다"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한 인간은 단 하나의 인격체만 소유하고 있으나, 인간과 다르신 유일한 한 하나님께서는 세 인격체들(성부, 성자, 성령)을 소유하고 계십니다'라고 설명해 주면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래 글들을 클릭하시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 삼위일체 인터넷 시대의 삼위일체 하나님 설명 기독론 독생하신 하나님 필리오케(filioque)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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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 (位格)으로서 존재 하는 하느님적 신비 를 지칭한다. 하느님의 육화(肉化)와 은총 (恩寵)과 함께 그리스도 의 3대 신비 를 형성하는 이 삼위일체 신비 는 내재적 삼위일체(內在的 三位一體, Trinitas immanens)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救世徑輪的 三位一體, Trinitas oeconomica)로 구별되어 파악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체적 인간 역사 와의 관계를 고려치 않고 영원으로부터 내재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하고,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인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 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한다.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이 삼위일체임을 제시하기 위해서 성서 로부터 출발한다. 성서 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계시 사(啓示史) 안에서 증언되는 하느님 성부 성령 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러한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바로 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계시 이다.1. 성서 상의 삼위일체 : ① 구약이 그리스도 를 준비하는 그늘이라고 신약에서 진술되고 있으나 (1고린 10:11, 갈라 3:24, 히브 10:1), 종교 사적으로 구약은 엄격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 교부 들이 일부 구약성서 의 본문들이 삼위일체 신비 를 암시한다고 간주한 바 있다. 창세기 에서의 ‘우리’ 형식(창세 1:26, 3:22, 11:7, 이사 68), 아브라함 에게 나타나는 세 남자들의 방문(창세 18:1-16), 민수기 에서의 야훼 의 삼중축복(민수 6:24-26), 이사야에서의 세라 핌의 ‘거룩하시다’ 삼회 찬미(이사 6:3) 등을 말하는 본문들이 삼위일체의 사전계시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신빙성이 약하다고 오늘날 간주된다. 이러한 견해보다는 구약이 엄격한 유일신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내적 생명 의 충만함이나 외부지향의 계시 를 지니고 있는 지가 주목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 역사 한가운데에서 현존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특정 중개형식(仲介形式)의 명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서는 ‘야훼의 천사 ‘(malakh Jahwe), ‘지혜'(Chokma), ‘하느님의 말씀'(dabar Jahwe), ‘성령'(ruah) 등의 실재에 대해서 기술이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바로 하느님의 직접적 작용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개념들이 ‘위격’을 그대로 지칭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신약에서 증언되는 삼위일체 신비 지향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약성서 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내재적 삼위일체’ 교리 를 명시적으로 내포 하고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내밀한 본성 계시 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 는 여기서 현시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 에서 거론되는 ‘하느님’은 구약에서 역사 하는 하느님으로서 한 아들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 을 부여하는 하느님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불렀던 예수 그리스도 신성 (神性)이 아울러 증언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며(마태 12:28, 루가 11:20) 구약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반포된 율법 을 능가하는 전권(全權)의 소유자이고(마르 2:23-28, 3:1-8 병행구), 더 이상 앞지를 수 없는 하느님의 임재(臨齋)이며(마태 11:25 이하, 요한 10:30), 성령 의 충만이다(루가 4:18). 그의 신적 선재성(先在性)이 명백히 증언되고 있다(요한 1:1-18, 필립 2:5-11). 그리고 신약성서 에서는 성령 이 하느님과 조물세계 사이에 존재 하는 우주적이거나 종교 적 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 으로서 하느님 구원 의 충만이다(루가 4:18, 디도 3:5 이하, 1고린 12:4). 예수 자신은 성령 (pneuma)에 대해서는 드물게 언급하고 있고(마르 3:28-30), 그 자신이 성령 으로 충만한 분이라고 지칭된다(마태 12:31, 루가 12:10). 부활 이후에 성령 의 출현이 보도된다. 성령 이 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된다는 증언이 이루어진다(사도 2:1-41, 4:31, 8:15-17, 10:44, 19:6). 이 성령 계시 와의 일치 안에서 역사 한다(로마 8:11, 필립 1:19, 2고린 3:17, 갈라 4:66, 1요한 4:1-3).예수 그리스도 (성자)와 성령 이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증언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 성령 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성부 파견 하고(요한 14:16·20, 15:26, 16:7, 17:3, 갈라 4:6), 성자 성부 와 각기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다(마태 11:27, 요한 1:1, 8:38, 10:38, 15:26, 1고린 2:10). 이를테면 구체적 나자렛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성부)의 현존이면서도 성부 자신은 아니다. 성령 도 하느님(성부)의 자기 전달이지만, 하느님의 파악 불가능성을 체험케 하며 따라서 성부 와의 구별을 체험케 한다. 신약성서 성령 으로서의 하느님의 단일성과 구별성을 모호하게 알고 있다. 여기서 성부 구원 작용이 구별되어 증언되고 있으며, 성자 성령 이 단순히 하느님과 조물 사이의 중간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이 배열되고 있다. 예수 세례 때의 삼위일체묘사(마르 1:9-11), 부활 한 예수의 세례명 령 속에 나타난 성삼형식(마태 28:13)과 다른 많은 삼위일체 정식(定式)들은 이러한 초기 교회 신앙 을 증언하고 있다(로마 1:3-5, 8:9-11, 2고린 13:13, 요한 14:26, 15:26).2. 삼위일체 교리 : 삼위일체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절대신비(絶對神秘, mysterium absolutum)로서 실증적 계시 와 독립해서 인지될 수 없으며, 계시 된 다음에도 이성 (理性)에 의해 온전히 간파될 수 없다(DS. 3015, 3225). 그리스도 신앙 에 절대신비가 있다면 이 삼위일체 신비 이고, 가장 기본적 신비 이다. 왜 삼위일체가 이러한 가장 기본적 신비 인지는 교리 상으로 확정된 바 없으며, 왜 이 신비 가 우리에게 중요한지, 또 어떠한 구원 실재 안에 우리를 위해 소여되어 있는 지도 명시적 사유가 교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삼위일체 교리 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① 한 하느님이 세 ‘위격'(位格, upostasis, persona, subsistentia)으로서 존재 하는데(DS. 73, 75, 88, 112, 115, 152, 501, 525, 528-531, 800, 803, 351, 1330), 이 위격 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성 (本性, phusis, natura)이고, 하나의 하느님 본질(本質, ousia, essentia)이며 하나의 하느님 실체(實體, substantia)이다(DS. 73, 75, 88, 112, 115, 152, 150, 501, 525, 527이하, 800, 803이하, 1330이하, 1337, 1880). 이 세 위격 들은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다(DS. 44, 75, 125, 162-169, 188, 501, 526이하, 800, 851이하, 1330). 여기서 사용된 개념들의 교의적 정의 는 내려진 바 없다.② 그런데 이 위격 들은 서로 구별된다(DS. 75, 531, 1330이하, 2828). 성부 는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고(DS. 75. 189, 525, 800, 1330이하), 성자 성부 의 실체로부터, 오로지 성부 로부터 출생하였다(DS. 44, 189이하, 76, 112, 125, 163, 525이하, 800, 804, 1330이하). 성령 은 출산되지 않고(DS. 75, 527), 하나의 유일원리로서의 성부 성자 로부터 발출된다.(DS. 71, 189이하, 75, 150, 527, 800, 850, 1300, 1330). ‘출산'(出産, generatio)과 ‘기출'(氣出, spiratio)은 신성 의 전달 내지는 파견 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이 전달이 한편으로는 성부 로부터 출산되고 또 다른 편으로는 성부 성자 로부터 기출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러나 ‘출산’과 ‘기출’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교리 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다.③ 하느님 안에는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關係, relatio)가 있으며(DS. 531, 573, 800),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과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하느님 위격 들 사이에 실질적 차이가 있다(DS. 73, 189, 973이하). 그런데 세 위격 들이 하나의 하느님 본질과 동일하면서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모순이 되지 않는 근거가 보다 선명하게 제시될 필요가 있다.④ 하느님의 ‘관계적’ 위격 들은 하느님의 본질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아서 (DS. 529, 580, 1330), 이 본질과 함께 하나의 사위일체(四位一體, Quaternitas)를 구성하지 않는다(DS. 534, 803이하). 하느님 안에서는 상반되는 관계(relationis oppositio)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DS. 1330), 각 신적 위격 은 전적으로 다른 위격 들 안에 존재 하며(DS. 1331), 세 위격 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다(DS. 529, 680, 790, 851).⑤ 하느님의 위격 들은 존재 (存在, esse)와 역사 (役事, operatio)면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DS. 189, 112, 501, 800, 851), 외부를 지향 해서 오로지 하나의 역사 원리(役事原理)일 뿐이다(DS 501, 531, 800, 1330). 세 위격 들의 역사 의 동일성을 말하는 공리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효능인(效能因, causa efficiens)이며(DS. 3814), 이 공리로 말미암아 오로지 로고스 (말씀)만이 인간 이 되었다는 육화 교리 와 ‘창조되지 않은 은총 ‘(gratia increata) 교리 가 부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 이 된 위격 성령 이 아닌 성자 위격 이며, 세 위격 들은 인간 과 각기 고유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교리 들로부터 파생되는 교리 인, 성부 로부터의 성자 성령 의 구세경륜적 ‘파견’ 교리 교도권 에 의해서 거의 계발되어 있지 않다(DS. 527, 536, 1523). 요컨대 삼위일체 교리 는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치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3. 삼위일체론의 신학 적 기점 : 삼위일체는 있을 수 있고 생각될 수 있는 지복(至福)의 신비 임에도 불구하고 신자 들의 신심 생활과 교의신학 에서도 삼위일체론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고, 그리스도 인들이 삼위일체의 신비 성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그리스도 교화한 유일신론자들처럼 생활하는 것같이 보인다. 삼위일체 교리 를 대할 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며, 사람들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 신비 가 왜 계시 되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사변적 삼위일체 교리 신자 들로 하여금 이 신비 에 대한 신심 을 촉진하기보다는 소원감을 느끼게 하는데 한 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 신비 에 대해 사변적 고찰을 시도하는 전통적 입장과 대조적으로 역사 (歷史)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행업(行業)을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하여 이 신비 신비 로 제시하려는 현대 신학 자들의 취지와 입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현대 신학 의 삼위일체론의 기본입장이 요약 소개될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노 에 의해 계발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심화된 이른바 ‘심리학적 삼위일체론'(心理學的 三位一體論, De Trinitate psychologica)은 사계 에서 고전적이고 전통적 삼위일체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 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 이다”라는 성서 진리 를 자신의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모상 이 원형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모상 의 본질을 구명해서 원형이신 하느님의 내적 신비 를 일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 본질의 단일성과 세 위격 들의 구별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유비(類比)를 인간 영혼(anima)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기억(mens), 인식(notitia), 사랑 (amor)이 영혼 의 세 가지 속성으로 파악되고, 이들이 삼위일체의 내재성을 특정하게 이해토록 하는 유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억하고 인식하고 사랑 하는 영혼 의 유비속에서 본질적으로 하나인 실재의 세 현실적 요소들로서의 위격 들을 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기억이 성부 에, 인식이 성자 에, 사랑 성령 에 해당된다고 설명된 것이다. 그래서 성부 성령 이 실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하느님 본질과 하나가 되는 자립적 관계(自立的 關係)라고 규정되고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노 를 따라 인간 정신생활의 성취 속에서 하나의 하느님 안에서의 세 위격 의 현존을 파악하는 유비를 보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發出, processus)의 성격을 순수정신의 내재적 행위로 규정한다. 이 발출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의 두 기능, 인식(認識, cognitio)과 의지 (意志, voluntas)가 하느님의 발출에 상응하는 유비로 등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안에서 말씀[知性]과 사랑 [愛志]의 두 발출 이외에 다른 발출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의 성격을 지성과 의지 의 성취양식을 분석하는 가운데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성의 발출이 유사성(類似性, similitudo)의 근거에 입각하여 발생하기에 출생(出生, generatio)이라고 규정한다. 출산자는 자신과 유사한 것을 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 의 발출은 유사성의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원하는 상대자에로 이끌리는 성향(inclinatio in rem volitam)에 입각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 있어서 말씀을 산출하는 지성작용은 유사성의 산출과 같아서 ‘출생’이라고 지칭할 수 있고, 하느님에게서의 의지 작용은 유사성의 출산행위가 아니라 성향적 발출행위이기에 ‘기출’로 표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신비 를 구명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신학 의 기본 통찰들은 학설이기는 하지만 교회 의 공적 가르침을 부연해서 해설한다고 볼 수 있다.② 현대 신학 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역점을 두는 전통적 삼위일체론과는 달리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계시 되는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일방성이 지양되고,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이 강조되면서 인간 과 조물 일반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행업이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인간 역사 로부터 분리된 신적 실재에 대한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서 인간 과 관계를 맺는 하느님의 역사 에 관한 실천적이고 생동적 사유가 된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양자택일적 입장을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칼 라너 (Karl Rahner, 1904-1984)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 )의 삼위일체론적 기점은 범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라너는 삼위일체를 구원 신비로 이해하려는 취지로써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그는 구원 이 하느님의 자기전달(Selbst-mitteilung Gottes)인 은총 안에서 성취되는데, 이 은총 이 삼위일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로서 당신을 자신 안에 폐쇄시키지 않고 외부로 건네준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외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 수취자(受取者)가 요청된다. 이 수취자가 바로 정신과 육신 의 합일체인 인간 이다. 라너 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참으로 인간 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 론적 구조에 상응해서 초월 적(정신)이고 역사 적(육신) 양식으로 발생한다. 인간 역사 성에서 비롯하는 전 인류사는 하느님의 계시 사(啓示史)와 구세사 와 공존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하느님이 자기전달을 통하여 인간 과 세계의 근원으로 작용하면, 구체적 인간 역사 가 바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현현이자 인간 에 의한 수용의 역사 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제공이 인간 에 의해 전적으로 수용될 경우에 신인(神人)그리스도의 출현이 발생한다고 라너 는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절정인 그리스도 의 육화를 ‘행해진 진리 ‘라고도 라너 는 부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초월 적으로 작용하여 인간 으로 하여금 다가온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수용하도록 하는 힘이 바로 성령 이라고 규정된다. 여기서 성령 의 고유성이 사랑 (Liebe)이라는 통찰이 생겨난다. 또한 라너 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진리 로 발생하는 한, 역사 를 지니며 역사 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기전달이 사랑 으로 발생하는 한, 이는 절대 미래를 지향 하는 초월 안에서의 역사 의 재현이라고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역전시킬 수 없이 나타나는 구체적 역사 로서의 역사 와 완성된 최후 미래를 지향 하는 초월 은 구별되면서 나름대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한 분 하느님이 자기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운데 파악할 수 없는 신비 로 머무르는 한, 그 분을 성부 라고 부른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인간 초월 성을 주도하는 원리로 전달하는 한, 그 하느님을 성령 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이 자기전달은 역사 안에서 현현되는데 이 분이 곧 성부 의 육화된 말씀, 성자 라고 불린다.” 한 분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세 측면이 동일시되거나 온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 온전히 주어진다고 라너 는 보고 있다. 그리고 말씀(진리)과 성령 (사랑)의 두 파견 인간 과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전달 속에서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두 소인(素因, Moment)들로 파악된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은 초월 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고 역사 적으로 성자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 는 이 이중 파견 이 바로 하느님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 성부 가 자기전달을 통해서 당신을 전달하고, 다른 편으로는 ‘진술된 것’과 ‘수용된 것’과의 실질적인 구별을 이룩한다. 그리고 전달된 것이 ‘전달자’로서의 하느님과 ‘전달된 것’으로서의 하느님 사이에 실제적 구별을 지양하지 않는 한에서, 바로 하느님의 ‘본질’로 표시될 수 있다고 라너 는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내재적 삼위일체가 인간 의 충만으로서 전달됨으로써 구원 이 성취된다고 보고 있다. 라너 파견 과 발출을 하느님의 (내재적이고 구세경륜적) 자기 전달의 발생으로 규정함으로써 삼위일체 신학 신비 로 이해한 것이다.몰트만 역시 라너 처럼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를 정관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삼위일체를 궁지에 처한 조물들의 자유 를 위한 그리스도 수난 역사의 압축으로 보면서 십자가 신학 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 신학 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것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한다. 아들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 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 로부터 죽음 에로 건네지면서 죽음 고통 을 당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 에서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 고통 당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깊이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아들의 양도 속에서 가장 깊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성령 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진술된다. 이 성령 은 아버지와 아들의 희생 성령 으로서 버림받은 인간 들에게 와서 새 생명 의 가능성과 힘을 선사하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 사랑 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종말론 적 삼위일체 사건으로, 생명 을 창조하는 사랑 의 현재적 성령 가운데서 사랑 하는 아버지와 사랑 받는 아들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몰트만은 하느님의 역사 는 바로 그리스도 죽음 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인간 의 모든 역사 를 그 속에 내포 하고 있어서 역사 역사 라고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죄와 죽음 의 성격을 지니는 인간 의 모든 역사 가 하느님의 역사 인 삼위일체안에 통합된다는 통찰이 파생된다. 그래서 인간 고난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고통 이 아닌 고통 이 없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 기쁨 에로 통합되지 않는 삶이나 기쁨 도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에게서 삼위일체가 고통 에 찬 조물의 역사 와 관련된 실재임이 적나라하게 기술되고 있다.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하느님과 조물 일반, 특히 자유 로운 조물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원리’로 제시한 것은 그리스도 신앙 의 하느님 이해뿐만 아니라 신앙 쇄신 자체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창조 이래의 역사 과정은 성령 안에서 부활 성자 를 통하여 조물, 특히 인간 을 향하는 하느님 성부 로부터의 구원 역사이자, 성령 에 의해 이끌린 인간 과 세계가 그리스도 를 통하여 성부 께로 인도 되는 귀환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 구체적 경위는 신비 로 머무르지만, 인간 과 세계의 완성된 구원 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삼위일체적 하느님의 완성된 역사 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삼위일체 신비 내포 하고 있다. (沈相泰)[참고문헌] J. Felderer, Dreifaltigkeit, in: LThK III, pp.543-560, Freiburg 1959 / M. Schmaus, Trinitat, in HthG II, pp. 697-714 Munchen 1963 / R.L. Richard, Holy Trinity, in: New Catholic Encyclopedia XIV, pp. 295-306, New York 1967 / K. Rahner, Trinitat, in SM IV, pp.1005-1021, Freiburg 1969 / R. Garrigou-Lagrange, De Deo trino et creatore. Commentarius in Summam Theologiae S. Thomae(I, 27-119), Turin 1951 / B. Lonergan, De Deo Trino, Rome 1961 / J.M. Dalma, De Deo uno et trino, Madrid 1964 / E.J. Fortman, The Triune God, London 1972 / J. Auer, Gott der Eine und Dreieine, Regensburg 1978/ J. Moltmann, Trinitat und Reich Gottes. Zur Gotteslehre, Munchen 1980 / R. Schulte, Die Vorbereitung der Trinitatsoffenbarung, in: Mysal II, pp.49-82, Einsiedelin 1967 / F.J. Schierse, Die neutestamentliche Trinitatsoffinbarung in 같은 책 pp.85-129 / L. Scheffczyk Lehramtliche Formulierungen und Dogmengeschichte der Trinitat, in: 같은 책 pp.146-217 / K. Rahner, Der dreifaltige Gott als transzendenter Urgrund der Heilsgeschichte in: 같은 책 pp.317-401 / M. Schmaus, Die psychologische Trinitatslehre des hl. Augustinus, Munster 1927 / K. Barth,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tr. by G.T. Thompson. Edinburgh 1960 / J.E. Sullivan, The Image of God. The Doctrine of St. Augustine and its influence, Dubuque 1963 / Y. Congar, Je crois en l’Esprit Saint I-III, Paris 1979-1980 / 요셉 라싱어 著, 장익 역, 그리스도 信仰 어제와 오늘, pp.122-146, 분도출판사 , 왜관, 1974 / P. 네메셰기, 부산 까르멜수도원 옮김, 성부 분도출판사 , 왜관 1978 / 심상태, 三位一體論의 어제와 오늘, 司牧, 75호 (1981. 5), pp.8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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