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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진리 입니다.
나누고 싶은 귀한 찬양이 있어, 이렇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들으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
사랑과 평안이 깃드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 송정미 [2005년 Anytime Anyplace 앨범]

(모든 수익은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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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 기독신문

큰 위기를 만날수록 서로 격려하며 사랑으로 기도합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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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2/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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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요13:34~34) – 유평교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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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3/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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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 본헤럴드

국민일보 가족예배에서 전한 메시지 ·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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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nhd.net

Date Published: 4/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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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성경 구절 : 서로 사랑하라 – 블로그 – 네이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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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5/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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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오피니언/칼럼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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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8/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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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 - 송정미 (Feat. 김현철, 강명식, B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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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서로 사랑 하라

  • Author: 진리 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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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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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큰 위기를 만날수록 서로 격려하며 사랑으로 기도합시다

▲ 맹일형 목사(왕십리교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 : 34-35)

오늘 이 시대를 신앙적인 면에서 한 마디로 말하면 혼란과 고통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으로 바뀌어졌고, 이제 신앙인의 입지도 과거와는 달리 아주 열악해졌습니다. 좀 더 극단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지금은 총체적인 위기의 때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지금은 서로 사랑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통의 때를 이기는 힘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위기를 넘어서는 능력도 서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본문을 말씀하신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성만찬을 들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식사 도중 가룟 유다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30절) 잠시 후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게 되고, 대제사장의 군사들이 가룟 유다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절)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예감하시고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영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제 그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예수님께도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라

잠시 비장한 분위기가 침묵 중에 흐릅니다. 걱정스럽게 주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34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제자들은 당시 예수님의 신변에 어떤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일전을 불사하시겠다는 각오로 중대한 명령을 하시려나 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말씀하지 않은 대단한 명령을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주님이 드디어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사랑하라”는 말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율법의 대전제요, 지금까지 예수님이 수없이 말씀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기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있습니다. 위기에 직면한 제자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서로 사랑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세우는 능력이 서로 사랑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여기 ‘새 계명’이라고 할 때 ‘새’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본질적인 면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문학적이거나 예술적인 감정 속에서 움직이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차원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새 계명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랑이 옛 사랑이라면 하나님께 속한 사랑이 새 사랑입니다. 물질적인 사랑이 옛 사랑이라면 하늘에 속한 사랑이 새 사랑입니다. 나 중심의 이기적인 사랑이 옛 사랑이라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움직이는 사랑이 새 사랑입니다. 받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옛 사랑이라면 주면서 행복해 하는 사랑이 새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라”라는 말이 56번 나옵니다. 이 56번 가운데 주님의 마지막 고별 설교인 13장에서 21장 사이에 44번이나 나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지금 제자들 곁을 떠나가야 할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잃고 방황할 것이며, 그 충격으로 제자 공동체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힘이 서로 사랑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위기의 공동체를 위하여

한국교회가 지금 위기를 만났다면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면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찾아온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천지 우주만물을 운행하시는 원리로 두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의 옆구리를 찢어 가정 공동체를 만드시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찢어 교회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을 깨뜨리기 위해 가정을 깨뜨리려 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헤치려 합니다. 공동체를 세우려는 우리의 투쟁은 하나님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계획을 세우는 거룩한 몸부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 당연한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셨을까요? 우리가 그대로 이행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자됨의 근거

본문의 마지막 절인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절)는 말씀은 요한서신서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제자는 초대교회 성도의 다른 말입니다. 그 제자됨의 기준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됨의 기준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며 여러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공동체를 늘 부정적으로 말하며 욕되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비난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그들까지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이후 제자 공동체를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자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 일어나 누군가를 비난하고 불평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침묵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공동체를 지키는 것입니다. 불평은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용서는 공동체를 세우는 접착제입니다. 비난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러나 격려는 공동체에 생기를 줍니다. 원망은 공동체를 나누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위로는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합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 있는 현대 교회는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때는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땐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난하면 안 됩니다.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서로의 약점과 상처를 보듬어 안아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가만히 두어도 무너집니다. 각자 서 있기도 힘이 들 때입니다. 세상에 지쳐 교회에 찾아오고, 직장의 아슬아슬한 위기 속에 불안한 얼굴을 하고 교회에 왔을 때 꼭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입니다. 서로가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보여 주십시오. 나 대신에 울어주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 주십시오.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모임이 있는 자리마다 함께 기도함으로 새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나라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기 위해 울며 기도할 때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하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지금은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교회를 사랑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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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요13:34~34)

제목: 서로 사랑하라

본문: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에 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이며, 또한 모든 제자가 반드시 따라야 할 필수적인 부르심, “하나 됨”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구하셨습니다(요 17:11). 동시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 13:34). 이렇게 하나 됨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엡 4:3).

특별히 많은 분들이 우리 교회 참석하면, 이 교회는 ‘참 사랑이 많은 것 같다’는 말을 해주시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더 사랑하기를, 그리고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명령하신 의미대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 새 계명(34절)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리켜 “새 계명”이라고 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새로운 계명이었을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명 중에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레 19:18).

그렇다면 예수님이 구약의 아주 오래된 이 계명을 몰라서 “새 계명”이라고 하신 걸까요? 아닙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 되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9).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구약 계명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40).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새 계명”으로 소개하셨을까요? 어떤 면에서 새롭다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아보기에 앞서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행하라고 명하신 사랑과 비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기독교 안에서만 하는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자”라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자고 독려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이 말하고 행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세상 사람들도 어떤 관계에서는 서로 끔직이 사랑합니다. 따뜻하게 품고 이해하고 배려합니다. 잘못을 덮어주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깁니다. 너그럽게 대합니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깊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대상에 따라 각각 사랑의 정도가 정해져 있습니다. “됐어,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아” 이렇게 사랑의 깊이를 정해놓고 그 선을 유지 또는 조정합니다.

사랑하기 힘든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면 이런 생각을 품습니다. “내가 이거까지 사랑해야 돼?” “내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더 사랑할 수 있겠어?” 그러고는 그 사람을 더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한계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랑의 한계를 많이 발견합니다. 모든 성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편하고 좋고 가까운 상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자꾸 부딪히고 껄끄럽고 불편한 사람은 피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사랑하기 힘든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면, “내가 이런 사람까지 사랑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더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행하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랑”은 세상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릅니다. 그래서 “새 계명”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34절)

34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가 서로 나눠야 할 사랑의 특징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바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을까요?

1) 차별 없이 끝까지 사랑(원수까지도)

13장 1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자기 사람들을. 자기 사람 중 가깝고 좋아하는 사람을요? 아닙니다. 자기 사람들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얼마큼 사랑하셨습니까? 적당히요?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2절부터 나오는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랑”을 직접 보여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어떻게 차별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계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함께 드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몇 시간 후면 곧 잡혀 그들을 위해 참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내어주실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3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주고자 자리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노예의 차림이었습니다.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노예의 차림으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하루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쓴 더러운 발을 물로 씻으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닦아 주셨는데, 그중에는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어떻게 제 발을 씻깁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로서 감히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예의가 바른 제자였죠. 반면 그들 중에는 마귀 같은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마귀의 생각에 사로잡혀 예수를 팔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습니다(11절). 그런데 어떻게 하셨나요? 유다의 발도 차별하지 않고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모든 자기의 사람들, 심지어 원수에게도 차별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사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 6:32).

여러분, 당시 발을 씻기는 일은 굉장히 천한 일로 여겨져 노예가 유대인인 경우는 아무리 노예라도 그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제자들이 서로의 발을 씻기지 않았고, 예수님의 발도 씻겨드리지 않은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서로를 섬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님이자 선생이었던 예수님이 상상할 수 없던 그 일로 그들을 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적당한 사랑이 아니라 끝까지 베푸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기록을 남긴 요한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고 끝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시면 그들의 발을 다 씻으신 후, 옷을 입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왜 내가 발을 씻겼는지 아느냐고 물으신 거죠.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2~15)

이 가운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분이 계십니다.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본이 바로 이것입니다. 노예처럼 낮아져서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까? 발이 아니라 목욕이라도 시켜주고 싶은 형제, 자매가 있는가 하면, 그 더러운 발을 치우라고 말하고 싶은 형제, 자매가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세상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끝까지 사랑하십니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여러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 15:13). 그 큰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됐는데, 여러분이 형제자매에게 주는 사랑의 크기는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35절로 넘어가기 전에,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사랑의 특징 하나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2) 서로 사랑(먼저 사랑)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차별이 없고 끝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서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고 하셨고,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서로”로 시작하는 명령이 많습니다(롬 12:10, 16; 14:13; 갈 5:13, 26; 엡 4:32; 골 3:9, 13; 살전 4:18; 5:11). 많은 경우 교회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서로 ~하라”는 명령이 제대로 순종 되려면 반드시 “먼저” ~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각자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명령어가 제대로 작동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이 먼저 그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이신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너 하는 거 봐서 나도 사랑할게. 당신이 먼저 하면 그때 나도 하겠다…이런 자세로는 예수님의 의도하신 서로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상대방이 하든 하지 않든 먼저 섬기는 것, 먼저 사랑하는 것, 모두가 그렇게 사랑하려고 할 때, 예수님이 의도하신 서로 사랑이 제대로 실현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0절에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먼저 사랑하는 건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우리 옛 자아가 좋아하지 않는 일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말씀 마치고 강대상 옮기려고 하니 몇 분 남아주세요” 이렇게 요구하면, “아! 내가 먼저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기 쉬울까요? 아니면 “누군가 하겠지, 없으면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하기 쉬울까요? 후자입니다.

이런 육신의 본성은 오늘날 교회 안에 커다란 풍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소비자 중심주의”라고 부르는데, 교회를 식당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 오는 것이죠. 섬긴다는 생각보다는 섬김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온다는 얘깁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선 평가와 비판이 많이 흘러나옵니다. 손님이니까 이 집 맛이 어떻고 서비스가 어떻고 이런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렇게 말 못 합니다. 오히려 어떻게 좋은 맛을 낼까? 어떻게 손님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까?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팽배한 “소비자 중심주의”는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서비스 받는 곳으로 여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음악이 어떻고 애찬은 어떻고, 사랑이 없다느니, 주일학교 프로그램이 어떻다느니…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내가 먼저 가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왜 섬기지 않는지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다니는 소비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절대 “먼저” 사랑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먼저 하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랑은 절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27). 그런데 어떻게 주님의 제자가 그래도 나는 섬김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땅히 먼저 섬기는 자로 교회 중에 있어야 합니다.

3.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35절)

이제 마지막으로 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교회가 사랑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 사랑이 온전히 발휘될 때, 즉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때,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 차별이 없는 사랑, 끝까지 하는 사랑, 먼저 하는 사랑, 예수님께 속한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발견될 때, 세상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하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나 서비스를 갖추고 멋진 시설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사랑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바울은 천사의 말을 하거나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거나 모든 지식과 모든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 13:1~3).

사랑에 실패한 성도는 무서운 책망을 받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형제를(자매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까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성도 각 사람을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의 보혈이 얼마나 귀합니까? 보배롭습니까? 그런데 형제자매 사이의 화목을 깬다는 건 십자가의 원수, 마귀의 졸개로 행동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입니다(유오디아, 순두게-빌립보 교회).

또한 사랑에 실패한 교회는 무서운 징계를 받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 계시록 말씀으로 에베소 교회 이런 편지를 쓰셨습니다.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교회의 섬김, 수고, 인내, 가르침 등이 모두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가지 그들을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그들이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렸는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요한은 서신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데서 멀어진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도 멀어진 것입니다. 성도 사랑을 버리면 주님 사랑도 버린 것입니다. 그런 에베소 교회에게 예수님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고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증언할 교회로서 역할을 빼앗아 다른 곳에 넘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역할을 다른 곳에 주고 너희는 떠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서로 사랑하자는 말은 그저 교회 안에서 더 행복하려고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의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로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이고,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계명입니다. 교회는 사랑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랑,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세상은 대상에 따라 차별하여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형제자매를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은 적당한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맞게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형제자매를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은 먼저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봐서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참뜻이고, 오늘날 주님의 제자인 우리가 순종해야 할 계명의 의미입니다. 차별 없이, 끝까지, 먼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이 말씀의 장면은 주님의 마지막 만찬입니다. 잠시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제자들과는 이별 직전에 갖는 마지막 만찬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별 직전이나 죽음 직전에는 가장 중요한 말이나 마지막 부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남기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런데 주님의 명령에 이상한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새 계명”을 준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사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 율법에 있읍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구약을 인용하여 사랑을 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구약의 율법을 요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장면에서 주께서는 “율법에서 말하는 것 같이”, 또는 “내가 전에 말하였던 것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라” 하시며 이 계명은 분명히 새로운 계명이며 따라서 구약의 계명과는 구분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당부하시는 ‘사랑하라’는 계명은 왜 새 계명입니까?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성경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그의 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을 보면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이 계명은 “새 계명” 또는 “그의 계명”일까요?

34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가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새 계명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에 이전의 사랑의 계명과 구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 때문에 주의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 계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오셔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니, 제자들은 주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17절은 구체적으로 이 새 계명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장의 구절을 통해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는 단서 때문인 것을 확증할 수 있고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란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 즉 죽음을 통한 십자가의 사랑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많은 과실을 맺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서로 사랑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자들 모두에게 그들이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2절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의 새계명은 언제나 그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십자가에서 피를 쏟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라고 주께서는 죽음 직전에 새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새계명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고 나아가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는 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도록”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나아가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생명을 성령을 통해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이 새 계명은 천국의 유일한 계명입니다. 또한 주님과의 새 언약 속의 유일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한 요한일서 4장 7-8절은 새 계명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즉,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증거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사랑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들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으니, 그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증거, 제자로서의 증거는 오직 이 사랑이요, 이 사랑을 순종하여 행할 때, 우리가 구하는 데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이 새로운 계명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간구는 다 응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을 행하는 자를 통해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교회가 풍성해지고 직장이 변화되며 나아가 사회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과 구별시키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지킬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이 바로 이 십자가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해야만 세상과 구분되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명하시길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면서 이 사랑을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육신을 죽이고 성령을 따라 살 때에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인데, 도리어 육신대로 살면서 새 계명의 사랑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생명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도 않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육신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계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고 기도를 통하여 성령 충만을 구할 것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에만 이 사랑의 새 계명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새 계명을 알리시기 전에 몇가지 준비를 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새 계명을 교훈하기 전에 겸손한 마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이는 겸손 없이는 새계명의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 절을 보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치지 않는 끝없는 사랑!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시는 실패함이 없는 사랑! 예수님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의 상태는 정반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이제 곧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에 대해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높아지고 싶어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계하고 헐뜯고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는데, 제자들은 도리어 미움과 시기에 점점 더 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새 계명을 주시기 전의 조치로 ‘발을 닦는 일’을 생각해 내십니다. 이는 겸손함이 없이는 이 ‘새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느닷없이 대야와 수건을 가져오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면서도 교만한 제자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발을 먼저 닦아 주겠다고 나서는 제자마저 없었습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자존심을 꺾지 않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네 놈들이 먼저 굽실 거리지 않는데 내가 뭐하러 먼저 굽실거리겠는가! 네 놈들보다 먼저 내 자존심을 꺾지 않겠다!’

임박한 죽음을 앞둔 주님과 버릇 없는 제자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이라면 제자들을 꾸중하며 화를 퍼부었을 텐데, 주님은 묵묵히 열두 제자의 발을 만지시며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그들의 자존심과 교만이 부서지지 않고는 이 위대한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없으며,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 동참할 인물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때에 주께서 몸소 보여 주신 겸손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제자들의 교만을 완전히 무너지게 합니다.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도망갔던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후 부끄러움과 자기 부정의 겸손 위에 이제는 주를 위하여 주님과 똑같은 사랑으로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작은 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리의 문제가 아니면 양보하며 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회와 직장에서도 겸손한 마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둘째로 중요한 사실은, 이 새 계명은 오직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이해하고 느낀 자들만이 지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사람에게서 찾으면 안됩니다. 주님의 깊은 사랑이 목사님이나 교우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항상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감동합니다. 그후 예수님을 바라보면 참 좋을 텐데, 계속 같은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사람에게 크게 실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사람에게서 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까? 오직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따라서 예배와 설교를 통해, 기도와 묵상을 통해 이 사랑을 맛보셔야 합니다. 성경과 기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십자가의 그 사랑을 체험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오직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한 자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사랑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 속에 체험되는 주님의 사랑과 그 선하심을 아는 자의 축복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하고 큰 것인지요!

셋째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삶을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주님과 함께 한 후, 형제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놀라운 방법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할 때 닮은 꼴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랜 친구는 서로 닮습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닮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후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닮은 후, 내 형제, 내 이웃으로 나를 닮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님을 닮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로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즉, 바울을 본 받는 것이 주님을 본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새 계명은 ‘불구하고’의 사랑을 요청합니다. 새 계명은 ‘때문의’ 사랑도 아니요 ‘만일의’ 사랑도 아닙니다. 새 계명의 특징은 상대방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내게 행하신 사랑을 나도 그들에게 인내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로마서 5장 6-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의 단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괴수 같은 타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이웃이 험악하고 나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참으로 새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에 포함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계명은 자신의 육의 세력을 죽이기 위하여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새 계명은 성령의 살아 있는 역사가 우리 마음 속에 있을 때에 실천 되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평생 신앙의 연단과 훈련을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유일한 새 계명이요, 이 특이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만방에 드러냅니다. 이 사랑을 행하는 주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미소가 그들에게 비췰 것입니다. 그들 주변의 사람들이 환하게 천국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합시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은 십자가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후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난 생명 가운데 성령을 따라 행하면 반드시 새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러한 놀라운 사랑을 우리 이웃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가능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길은 내가 내 십자가를 질 때에 나타납니다. 내 십자가란 죽음을 말합니다. 즉, 내가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명은 나를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야만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를 바울은 믿음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러한 믿음의 삶이 정확하게 새계명을 지키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의 가장 분명한 정체성은 새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임을 확신한 가운데 철저하게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성경 구절 : 서로 사랑하라

성도 말씀 좋은 성경 구절 : 서로 사랑하라 후기성도광장 ・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공유하기 신고하기 좋은 성경 구절 :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과 #좋은성경구절 나누며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성경 구절을 읽으시면서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오늘 하루 동안 몇 명의 사람을 마주치게 될까요? ​ 지금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옆에 앉아있거나 지나칠 사람이 수십 명은 되겠지요. ​ 학교나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얼굴이 아니라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들… 그리고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이지요. ​ 그런데 정말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일까요? ​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 다음 #성경구절 을 나누어 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의 소중한 자녀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줘야 한다고 하셨지요. ​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낯선 이에게 다가가 축복과 기적을 베푸셨고 출신과 외모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친절과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 작은 눈웃음 친절한 말씨 먼저 건네는 반가운 인사 . . . 사랑 표현은 근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직은 친절과 부드러운 말 한마디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보일 수 있어요. 오늘 하루 옆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 한마디 건네길 지친 어깨를 토닥여주길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서로사랑하라 간단하고도 따뜻한 이 성경구절의 말씀을 실천해보는 건 어떨까요? ​ ​ 좋은 성경구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더 배우고 싶다면, ‘후기성도광장’을 검색해보세요!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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