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의 믿음 | 믿음의조상 아브라함 205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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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중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
그는 어떻게 이 별명을 갖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
영상으로 알아보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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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 대전광역시청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창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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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ejeon.go.kr

Date Published: 5/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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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아브라함의 믿음 – 국민일보

[오늘의 설교] 아브라함의 믿음 기사의 사진. 히브리서 11장 17∼19절 창세기 22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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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6/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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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보여주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 늘푸른교회

오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제목을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믿음이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은 어떤 것이며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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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vergreenpromising.org

Date Published: 1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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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보였습니다. 본 적도 없는 약속의 땅을 향해 자기의 시선을 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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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alomarkc.org

Date Published: 4/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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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자 – 시사미래신문

가족과 함께 하란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면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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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isamirae.com

Date Published: 5/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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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 KLB –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 – Bible Gateway

이것은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 곧 율법을 지키는 사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주시는 선물이 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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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3/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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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 다음블로그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조건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집밖으로 나가라고 하니까 일단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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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6/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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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 주일설교 – 휄로쉽 교회

1)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시험 앞에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순종을 했다. · 2) 아브라함의 순종은 결국 부활 신앙으로 무장되었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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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ellowshipusa.com

Date Published: 2/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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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 – 기독일보

아브라함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표상이며 조상입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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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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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삶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고 하나님의 눈에 의롭게 여겨지게 했던 믿음(창세기 15)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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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1/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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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조상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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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브라함 의 믿음

  • Author: 하늘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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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3.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QrUKeuCpq4

아브라함의 믿음

성화 중에 두 발자국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해변을 따라 두 쌍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찍혀져 있습니다. 주님 품에 안긴 한쪽 발자국의 주인공이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 여기를 보세요 이때가 제 인생 중에 가장 어려운 때였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자기 혼자 걸었다며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발자국을 잘 보아라 이것은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네가 제일 힘들었을 때에 내가 너를 안고 걸었단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한번 이 세상에서 나서 살다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해변을 걸은 사람이 모래 위에 흔적을 남기듯이 한번 살다가 간 인생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훌륭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을 많이 했다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 후세에 귀한 믿음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지난 주 살펴보았던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에 이어 오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함께 살펴봅니다.

“믿음으로 … 나아갈 새”(11:1)

믿음은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할 때부터 믿음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1-3). 그 말씀은 아브라함의 인생여정에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에게 비전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담겨진 약속을 마음에 품으며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따진다면 모태신앙도 아니요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섬긴 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공회 중에 앉은 무리들에게 증언하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7:2-3)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살던 지역은 갈대아 우르로서, 바벨론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우상을 숭배하였고, 죄악이 만연한 곳이었기에 아브라함도 어려서부터 우상에 둘러싸인 채 살아 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있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더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되어 하란을 떠납니다. 아브라함 가족이 하란에 60년을 머물렀으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을 때는 15세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의미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섬기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데라가 죽은 후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믿음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사람들이 자기의 삶의 터전을 떠나 잘 알지 못하는 곳으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칫하면 낭패를 당하거나 삶이 불안정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지금까지 살아온 이 세상의 방식을 떠나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무조건 떠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대가가 있다고 하시며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약속이 담겨 있습니까?

1) 너는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하실 때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습니다. 노년이 된 지금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지 알 수 없었지만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자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네 이름이 창대해질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물질의 복, 현세의 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복, 신령한 복, 영원한 복을 포함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됨으로 그가 얻을 명예와 영광을 있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메시아가 날 것이며 그는 온 인류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3)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이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아브라함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갈 3:9)는다고 했습니다.

–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가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보였습니다. 본 적도 없는 약속의 땅을 향해 자기의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그의 떠남이 대단했던 것은 그가‘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노아도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순종했습니다. 가야할 곳을 미리 보고, 가야 할 길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기꺼이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75세가 된 할아버지가 정든 고향,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이 커다란 모험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 그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모험을 하게 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몰랐습니다. 요즈음처럼 internet를 통하여 갈 곳을 미리 알아볼 수 없습니다. 친구에게 물어보거나 지도를 찾으며 사전 조사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오직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믿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아직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것처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에 담겨진 약속을 붙잡습니다.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루어 질 때까지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그러나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다림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의 갭이 너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눈앞에 놓인 현실을 인하여 의심하거나 그 약속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여정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같이 길을 떠났는데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 길을 가는 동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그저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사람을 좇아갔던 롯은 낭패를 당했습니다. 나중에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져 소돔 땅에 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비가 내릴 때 도망쳐 나오던 롯의 아내는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고, 소알이라는 작은 성에 피신했던 롯의 두 딸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부끄러운 관계를 통하여 모압과 암몬이라는 두 아들을 낳고 영원히 저주받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에 기초한 소망을 가지고 길을 떠났기에 그는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 장막에 거할 새”(11:9-10)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을 떠난 것도 믿음의 행위였지만 지시한 땅에 도착해서 삶을 시작한 것도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였을 때 가나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 땅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고 말한다고 가나안 거민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아브라함에게 호락호락 내어줄리 없습니다. 아내인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할 곳을 확보하기 위해 헷 족속에게서 400세겔을 주고 막벨라 동굴을 구입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첫 소유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거주한 것은 그곳이 그의 땅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 집을 짓고 정착한 것이 아니라 ‘장막에 거했다’고 합니다. 텐트를 치는 것은 언제든지 걷고 떠날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그가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살이를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자와 건축자가 되셔서 지으실 성(하나님 나라)이 있음을 믿었기에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절을 보면 누가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까? 사라입니까? 아브라함입니까? 개역성경은 사라가 믿음이 있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을 사용하였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집니다. 많은 성경들이 사라를 주어로 번역합니다. 성경에 따라서는 사라를 주어로 하거나 아브라함을 주어로 할 수 있다고 하며 두 가지 번역을 다 소개하기도 합니다. NIV가 그렇고 표준새번역이 그렇습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사라의 믿음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라는 그의 몸종인 하갈과 갈등을 벌어다가 두 번씩이나 그를 쫓아냅니다. 사라가 내년 이맘때에 그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내가 늙었고 아브라함도 늙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며 웃다가 들켜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창 18:9~15). 또한 ‘잉태할 수 있는’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전형적으로 남성의 생식 능력을 가리키는 관용구입니다. 12절에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이라 할 때 ‘죽은 자’나 ‘한 사람’은 다 남성명사를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주체로 하여 표준새번역에서 번역한 것을 보면 ‘비록 그는 늙고 그의 아내 사라 역시 단산하였지만, 믿음으로 그는 생식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아브라함)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수많은’후손이 생겨났습니다. 히브리서는 수많은 후손이 생겨난 것이 기적적인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늙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를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면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라도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길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밝히 보여주실 때 믿음으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11:13-16)

‘믿음을 따라 죽었다’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계속 믿음을 지녔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말할 때 주로 땅과 자손의 복을 뜻합니다. 그런데 족장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즉 땅과 수많은 후손을 죽기 전에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끝내 그 땅의 주인이 되지 못했고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원래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사기 위해 헷 족속에게 한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 23:4) 하면서 매장지를 팔라고 하였습니다. ‘외국인’이란 외지인을 뜻하고, ‘나그네’란 그 땅에 사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임시로 거주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들이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살면서도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본향을 찾는 사람의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족장들의 믿음과 히브리서 공동체의 신앙을 동일시합니다. 족장들의 믿음도 이 땅에서는 완성되지 않을 미래의 소망에 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족장들이 바라본 것이 사실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떠나온 본향을 생각했더라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성은 아브라함이 족장으로 살던 장막과 대조되는 영원한 성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1)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 명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부족사회였습니다. 부족원들의 숫자가 많아야 힘이 강헤서 부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향과 친척 아버지 집은 아브라함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였습니다. 따라서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믿음은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정함에 있어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땅의 번영과 명예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않고, 장차 뵙게 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산 그들을 하나님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자기의 갈 바를 알지 모를지라도 자기를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2)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

하나님은 이미 늙어 경수가 끊어진 사라의 몸에서 약속의 씨가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사라가 잉태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얻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죽은 자와 같던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와 같은 후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아무리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믿음을 가지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은 나라를 만들고 민족을 이루는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3)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붙들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기업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은 여전히 이방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떠나온 고향에 비하면 불편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탱해 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점입니다. 그는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기업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족장들뿐 아니라 바로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에 들어갈 자격도, 능력도 없는 인간을 위해 그분을 믿을 때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갔듯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새 예루살렘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은 참된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리라는 것과 자신이 믿음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 믿음의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며 하늘의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의 삶을 깨닫습니다. 우리도 이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진다면 세상을 향한 미련과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단지 나그네요 외국인임을 고백한다면 지금 정리하고 비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확신하는 참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 올바른 교제가 있을 때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믿음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기도하고 헌신하는 가운데 때를 따라 임하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함께 모든 성도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삶을 통하여 주님과 동행하며 훌륭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자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자(창세기12:1-9)

우리가 보통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갈라디아서 3장 7절에서 유래되었는데요, 거기에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유된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또한 믿음생활에 모범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나 믿음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이 모범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11장 27절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갈데아 우르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이주를 합니다.

데라는 본래 가나안 땅까지 가려고 했는데(31절) 거기까지는 가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 205세의 생을 마치게 됩니다. 가족과 함께 하란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면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에 대한 여러 가지 요소를 만나게 되는데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일까를 살펴보며 나눌 때 크신 은혜와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Ⅰ.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러주시는 데서 시작합니다.

성경은 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셨는지, 거기에 무슨 자격이 있고 무슨 이유가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여 섬겼다는 말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할 때 세상의 많은 종교 중에서 내가 기독교를 택하였다, 세상의 많은 신들 중에서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여 섬긴다는 말을 합니다만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환경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였다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의 진리입니다.(행7:2-4, 수24:2-3))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시고 예수를 믿게 하셨다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섭리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으며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하나님을 믿어야하겠다는 마음도 주셨고 믿는 마음으로 교회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람, 아니면 매체가 중간역할을 하였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요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바울도 그렇고 저와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Ⅱ. 믿음은 떠날 것을 떠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여호와가 하신 말씀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떠날 것을 떠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옛 신앙을 떠나야 하고 옛 생활을 떠나야 하고 옛 습관을 떠나야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떠날 것을 떠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도 고향에서 그들에게 매여 있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장사라고 합니다(수24장 참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도 나의 옛 신앙과 옛 생활과 옛 생활방식을 떠나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하기 위해서도 신앙에 방해되는 것을 과감하게 떠나는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익숙했던 것하고 헤어진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이 정말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결단이었겠습니까?

당시 아브라함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5절에 아브라함의 일행을 소개할 때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었다는 말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매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이 안정되어서 이대로 살면 평안하고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떠나야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75세에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는 지금보다 오래 살던 시절이었고 아브라함도 그로부터 100년을 더 살고 175세에 죽었습니다만 그렇다 할지라도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떠났던 고향도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적지 않은 나이에 고향땅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대는 씨족 중심사회였기 때문에 가족들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어려운 결단을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Ⅲ. 믿음은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떠나야 할 것들을 떠날 뿐 아니라 아울러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고 가라는 곳에 가는 순종이 또한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나중에 보면 그곳이 가나안 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을 향해 어렵고 힘들고 위험해도 가야하고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을 위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책임져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는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야 합니다.

가는 길에 함께 하셔서 지켜주시고 위험 속에서도 보호하시고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야 합니다. 함께 하심의 은혜가 우선할 때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일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위험한 여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심을 확신을 가질 때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마28:20)는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을 믿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지 않으면 떠나야 할 것을 떠날 수 없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모두가 이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 믿음으로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믿음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물리치고 약속하신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 믿음으로 골리앗과 대항하여 그를 넘어트리고 나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믿음으로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을 이기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떠날 것을 떠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포기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붙잡기 위함이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축복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떠나지 않고 새로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갖기 위해서는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떠날 것을 떠나라고 하고 새로운 곳에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미 복이 되었습니다. 복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복을 확신하면서 여러분의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Ⅳ. 믿음은 복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복 주심을 믿고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 다시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든든하였겠습니까?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이제까지의 힘듬과 어려움도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와 함께 하셨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셨고 현장에서 나를 축복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예배는 사실 쉬운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넘어 체험의 신앙 순교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6절 하 반절에 보면,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드린 예배는 가나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과 다른 제단을 쌓고 그들과 다른 신께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선교사들이 와서 우리와 다른 예배를 드리고 다른 신을 섬긴다고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까?

아브라함의 경우도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땅에 왔으면 우리가 섬기는 신을 섬기고 우리가 섬기는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브라함은 그들과 다른 신을 다른 방식으로 섬겼습니다.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 일을 한 번이 아니고 가는 곳마다 가나안의 똑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고 이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가끔 달리다가 잠시 멈추게 될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과 가고 있는 길이 바로 가고 행하고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기본과 처음 그리고 조상을 생각해 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믿음의 선진들과 예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떠날 것을 떠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복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보여준 올바른 믿음의 모습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우리 가는 길이 아브라함이 갔던 믿음과 복된 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미지의 곳으로 가십시오.

믿음은 모험이고, 도전이고, 시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십시오.

약속이 있는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약속이 있다면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불릴 만큼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1절) 믿음은 내가 바라고 기대하고 꿈꾸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실체란 내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미래에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믿음의 현재는 내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실체와 같은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증거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증거가 내 마음에 있습니다. 증거가 있고 실체가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현실에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막연하게 생각하고, 막연하게 믿는 것.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희미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믿음을 진짜 가지고 있다면 그 실체가, 증거가 내 안에 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

2절에 보면 믿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없는 사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니고 봉사를 많이 해도 방황하고 흔들거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조상들은 이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2절) 나는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대해 사명을 주시고, 그 계획하신 일을 정확하게 시키시는 그런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구체적이고 정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어떻게 믿습니까. 이성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으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천지창조는 믿음으로 믿는 것입니다.(3절) 믿음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과학보다 한 단계 위고, 이성보다 한 단계 위에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과연 누구며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습니까.

히브리서 3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됐고 따라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압니다.” 여러분, 꽃 한 송이를 볼 때, 하늘의 구름을 볼 때, 하늘의 별을 볼 때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보십시오. 내가 이성으로 만들어졌겠습니까. 내가 과학으로 만들어진 로봇이겠습니까. 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어주신 아주 고귀하고 가치 있고 매력 있는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인간입니다. 오늘 성경은 믿음의 조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 조상마다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믿음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똑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특징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특징을 다른 말로 하면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에게 이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믿음을 내가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하는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뒷바라지하는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질서 지키는 은사가 있듯이 모두 은사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은사가 다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일 먼저 아벨이라는 믿음의 사람을 소개해 줍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이로써 그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예물에 대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으로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도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 사람들의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죽어서 이름을 안 남긴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계속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동은 이렇게 위대하고 값진 것입니다. 믿음은 예배드림 아벨에 의하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더 나은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예배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예배를 드릴 줄 압니다. 정성 없이 교회 오지 않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오기 위해 깨끗이 옷을 갈아입고 목욕도 하고 마음과 정성을 모읍니다. 미리 헌금도 준비하고 먼저 와서 기도로 준비합니다. 이것이 다 믿음입니다. 더 나은 제사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태도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경건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냥 막 교회에 오는 것보다 준비가 다 돼서 교회 오는 사람들은 사람들도 존경을 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믿음의 첫 번째 특징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성경 가지고 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교회 가면 찬송가가 있겠지’라는 태도는 정성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몸도 마음도 태도도 다 잘 준비해서 가야 합니다. 뭐든지 그렇습니다. 준비가 잘 된 사람은 대학시험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준비가 잘 되고 제 시간에 간 사람들은 허둥 되지 않습니다. 준비가 잘 된 사람들은 무엇이 빠졌는지 정성스럽게 생각하면서 기다릴 줄 압니다. 이것이 바로 아벨이 보여준 믿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두 번째는 에녹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들려가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에녹은 들려가지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교제라고 다 교제는 아닙니다. 건성으로 교제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인간이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습니까.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웠던지 죽음을 보지 않고 바로 직통으로 승천해 버렸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한 걸음을 걷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가고, 걸어가도 버스를 타도 잠을 자도 밥을 먹어도 늘 하나님께 껌같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에녹의 믿음처럼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지거나 동행을 하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조건 없는 순종

네 번째 노아입니다. 7절입니다.“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고 자기 집안의 구원을 위해 경외함으로 방주를 지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세상을 단죄했습니다. 또한 그는 믿음으로 인해 의의 상속자가 됐습니다.”믿음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인간의 화려한 말과 설득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어느 날 어느 시점에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셨을 때 어떤 사람은 그 말을 소홀히 여기고, 어떤 사람은 그 음성을 아주 귀하게 여깁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었습니다.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으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대로 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을 아무 조건도 붙이지 않고 하나님이 시켰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미쳤고 정신 나간 행동이지만 순종했습니다. 조건 없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는 미리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지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쓸어버리기로, 심판하기로 결정했는데 노아는 그런 일들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조건 없는 순종이며 또한 불가능한 일이라도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순종의 영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을 만나게 됩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해 장차 유업으로 받을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8절에서 12절까지 5가지 사실이 나타납니다. 그는 순종으로 장차 유업으로 받을 곳으로 나아갔지만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조건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집밖으로 나가라고 하니까 일단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가라고 할 때 순종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믿음과 비슷합니다. 방주를 지으라고 하시니 무조건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고 수많은 세월을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순종한 사람이 노아가 아닙니까. 그러면 아브라함을 통해 보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

첫째, 믿음은 부름의 응답입니다.

부르면 대답하셔야 합니다. 못들은 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설교 가운데, 기도 가운데, 성경을 읽는 가운데 찔림을 주십니다. 설교를 들을 때 ‘어떤 사람이 내 얘기를 목사님에게 다 일러 바쳤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특정한 누구를 두고 설교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되니까 설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에 토를 달지 마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축복이 됩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라함이 떠나야 할 곳은 어떤 곳입니까. 부모와 친척들이 사는 익숙하고 편안한 고향이 아닙니까. 믿음은 떠나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익숙한 것, 그 자리를 떠나야 믿음은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이면 여러분이 잘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미지의 곳으로 가십시오. 믿음은 이런 의미에서 순종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험이고 도전이고 시험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긴장감과 도전의식, 모험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까.

둘째, 믿음은 외국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믿음으로 그는 약속의 땅에서 다른 나라에 사는 이방 사람처럼 잠시 머물렀는데 그는 동일한 약속을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했습니다.” 믿음은 벽돌집이 아니라 장막에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걷고 떠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왕국을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그저 하룻밤 자고 떠나는 나그네처럼 괴나리봇짐을 가볍게 만드는 것입니다. 금은보화와 세상의 것으로 무장하면 못 떠납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다 걸립니다. 여러분, 집에 불이 나면 뭐부터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장롱을 들고 가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다 불타게 나둬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을 딱 붙잡아야 합니다. 믿음의 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익숙한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외국에서 10년, 20년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하면서 살아도 외국은 어차피 남의 나라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최초로 이방인으로 사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천국에 계시다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곳도 머물러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 살고 싶다”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목적지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대로 사셨습니다.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외롭고 처량하고 고독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익숙한 고향의 땅, 친척들이 사는 땅, 가족들이 사는 땅을 떠나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믿음은 여행입니다. 땅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으로의 여행입니다. 그렇지만 그 땅은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이요 하나님이 지시한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이 다 살고 있는 그런 땅으로 갔습니다. 불안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 불안함 가운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했습니다.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이방나라 땅, 내일 죽을지 모르는 그런 불편한 땅에 살면서도 마음에 평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

셋째, 믿음은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견고한 터 위에 세워진 도시를 고대했기 때문입니다.”(10절) 믿음은 막연한 것 같지만 막연하지 않고, 맹목적인 것 같지만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약속이요, 미래요, 축복입니다. 확실히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내 손에 아무 것도 쥔 것이 없지만 믿음으로 나가면 약속은 성취되는 것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희망도 없고, 꿈도 없고, 미래도 없고, 비전도 없는 것입니다. 절망과 고독과 외로움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합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맹이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입니다. 1

1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비록 그 자신이 너무 늙고 사라도 단산됐지만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불가능 앞에 휩싸여 있으며, 믿음은 절망의 한복판에 존재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이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90세인데 어떻게 임신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여기까지 그들을 끌고 오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절대 애기 못 낳는다’라고 말하고, 사라 자신도 ‘이제는 포기하자’라고 하는 나이, 즉 자타가 불가능을 인정하는 때까지 하나님이 끌고 가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하고 완전히 불가능이라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삭을 낳았을 때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능력이 좋아서, 사라의 건강이 좋아서 낳았다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특별히 주신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수많은 남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와 수많은 여자 중 한 사람인 어머니가 만나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독특하고 변할 수 없는, 바꿀 수 없는 미션이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약속이 있다면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만 입이 내게 있어도 하나님의 하신 일들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약속과 축복들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새해에는 믿음으로 살고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창22:1-5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는 믿음을 따라 이루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의미다.(창12:3) 또 하나는 말 아브라함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표본이 되었다는 말이다.

1)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시험 앞에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순종을 했다.

·성경에 나타나는 시험에는 사단이 주는 시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 있다. 사단이 주는 시험은 유혹으로서의 시험(temptation)으로, 결국은 우리를 멸망에 빠트리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연단을 통해 믿음을 세우기 위한 시험(trial)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탄이 주는 시험이든,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 주시는 시험이든, 모두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그 시험들을 이용하셔서 결국 우리의 믿음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후에는, 반드시 믿음의 시험을 하신다.(2절) 더욱 난감한 것은 그런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즉각적으로 순종한다.(3절)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출발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순종 한 것이다.

·또한 3일 간의 여정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을 텐데 그는 마음이 변치 않았다.(4절) 사실 처음 결단하기도 어렵지만, 한 번 결정한 것을 유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또한 아브라함이 칼을 내리칠 때 여호와의 천사가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불렀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적당히 시늉만 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것이다.(11절)

·사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도 이렇다. 어차피 할 거면서도 미적 미적 대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또 처음에는 순종했다가 상황 보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금방 포기하고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맞다면, 그저 적당히 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숨 다하는 수준까지 해보는 것이다.

2) 아브라함의 순종은 결국 부활 신앙으로 무장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이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서는 그가 자신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고 말한다.(히11:17,19) 결국 아브라함이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도, 자신이 이삭을 드린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이다.(5절)

·우리 같으면 기도를 해도 이왕이면 살려 달라 기도하고, 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텐데,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도 있고, 망해도 괜챦다고 한다.(빌1:20,21) 바울은 그분의 부활이 곧 자신의 부활을 가져올 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가 갖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 조차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임을 굳게 믿을 때이다.(히2:14,15)

·또 하나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사탄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완전히 이겨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 영으로 들어와 거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굳게 붙들 때 우리는 오늘도 사는 문제 때문에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미 승리하신 그분께서 우리 형편 처지 다 알고 살피시는 가운데 알아서 다 해주시겠다는 것을 굳게 믿을 때 우리는 모든 염려를 다 맡길 수 있다.(벧전5:7)

·실제로 우리는 순간 순간 위기 속에서 담대함으로 그 위기를 이겨낼 수 있으려면 결국은 부활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신앙의 표준은 천국 소망이요 부활 신앙인 것이다.

3) 하나님의 이끄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에비하신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사실 아브라함 역시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섭리적인 고난 앞에 실패할 때도 있었다.(창12:10)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약속의 땅에 기근이 왔을 지라도 결코 그 땅을 섣불리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창12:12,13)

·하나님의 약속을 떠날 때마다 결과는 죄를 짓는 것이었고, 결국은 그런 결정이 삶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을 겪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롬8:6-8)

·그러나 믿음의 결단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주신다.(13절)

·‘여호와 이레’ 란 원래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쓸 것을 미리 아시고, 때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14절) 다만 그 은혜들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때 보게 되는 은혜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되리라’

·하나님은 무궁무진한 수를 갖고 계시다.(시139:17) 그러니 현재의 상황에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 생각대로 좌지 우지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맡긴다는 것은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현재의 상황에 순종해 가는 것이다.

학습 및 적용 문제:

1) 하나님의 시험 앞에 아브라함의 반응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보라.

2) 아브라함이 그런 순종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되는가?(히11:17,19)

3)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어떤 결과들이 있었는 지 자신의 삶의 경험들을 나누어보자.

[성경강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

오늘은 아브라함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으며,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00년을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표상이며 조상입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을 때는 이미 하란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올라온 것은 몇 살 때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세상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60세였습니다. 그때 하란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입니다.

지금도 하란 우르파에 가면 아브라함이 태어났던 동굴이 있습니다. 그곳에 아브라함 기념교회가 있고, 욥이 살았던 곳과 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태어나서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가 혼잡해졌을 즈음에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갈대아 우르에 가서 살았습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업이 잘 안되어 고향으로 낙향했습니다.

고향 하란에 와서 10년 정도 살고 있을 때 아브라함이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아닙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후에 205세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 데라가 장사하려고 많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모두 때려 부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랫 동안 전해 내려오는 노아 홍수의 이야기도 전해 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노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의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요? 유대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과 달을 보면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계신 것은 확실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다는 이야기가 유대 역사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는 아주 큰 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단번에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세리 마태도 역시 예수께서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하고 나온 인물들입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사명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상당히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데 당장 이삿짐부터 챙겨 가지고 대문을 나서라고 하면 당장 그렇게 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갈 길을 모르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훗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쓴 것이 아니고, 아들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요셉에서 그 후손들에게 쭉 이어져 오다가 나중에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피상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잘 모릅니다. 또한 그가 책을 쓴 것도 아니기에 우리가 아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예수님도 책을 쓰지 않았고,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도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짜 위대한 인물들은 책을 쓰지 않았고 훗날에 누군가 그의 삶을 책으로 쓰도록 살았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 이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이유는 니므롯의 선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미지가 더욱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되시며,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전능하심과 신실하신 분이심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참된 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 영화, 명예, 권세를 다 누렸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을 모르면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인들고,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대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얻은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정도의 순종의 사람이었습니.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는 서로 독생자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창세 이후로 친구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절 양보했던 자였습니다. 조카 롯과 함께 가까이 살다 보니두 집안의 목자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택권을 조카에게 먼저 양보하였습니다. 양보 정신입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양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물질 관계와 인간 관계를 어느 것을 더 중요시 하는가 하나님께서 달아보였던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세 가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첫째로 물질 관계, 둘째로 인간 관계, 세째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 세가지 관계 중 어느 관계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지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인간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면, 물질은 따라오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물질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물질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디 가든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을 쌓았다는 말은 예배를 성실히 드렸다는 말입니다. 예배에 실패하고 인생이 실패한 자가 바로 가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은 대단한 담력의 사람이었습니다. 담력이 없었더라면 타향 팔레스타인 땅에 감히 발을 붙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권이 보장되지도 않았던 시대, 치안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만일 어떤 일이 벌어지면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을 겁쟁이로 보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겁쟁이는 따라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 간다는 것은 용기와 담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살렘 왕이며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십일조의 조상은 야곱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 드린 것이 아니라, 율법이 생기기 500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 접대를 잘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예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들어오던 자입니다. 아내 사라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손님이 오면 살진 송아지를 잡아 대접을 했습니다. 어떤 남편이 그렇게 손님을 데리고 집에 온다면 이혼을 하고도 열 번은 더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반가워하고 손님을 잘 대접을 하는 것은 복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다 보면 천사도 대접하고 하나님도 대접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처음 시작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문제를 가지고 매달린 자가 아니라 남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던 자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 명까지 하다가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다가 차마 조카 롯을 살려 달라는 말을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심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엎으시는 중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조카 롯을 구해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실한 삶은 옆에서 그의 삶을 지켜 보던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랄의 아비멜렉은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 상호조약을 맺자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불신자들이 볼 수 있을까요?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비방하는 것은 우리가 전혀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과 깨끗한 삶을 살면 불신자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전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재를 키우고 사람을 키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기른다는 것은 참으로 거룩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시킨 자가 318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가 다메섹의 엘리에셀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얼마나 믿음이 신실하였는지 그의 삶을 보면 때로는 아브라함 보다 믿음이 더 좋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 목회자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그 교회 사찰 집사에게 물어보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른 318명은 아브라함과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얼마나 믿음이 충성스러웠는지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상속자가 되었을 정도로 충성스러웠던 자였습니다.

[출처: READ THE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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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삶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변

모세를 제외하면 신약성경에서 아브라함보다 더 많이 언급되는 구약의 인물은 없습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야고보서 2:23)이라고 부르는데, 이 호칭은 아브라함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사용되지 않는 호칭입니다. 모든 세대의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자손”(갈라디아서 3:7)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중요성과 아브라함이 구속사에 끼친 영향력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아브라함의 삶은 창세기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1:26에 처음 언급된 뒤로 아브라함의 죽음이 기록된 창세기 25:8까지 내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탄생이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처음 등장할 때, 그의 나이는 이미 75세입니다. 창세기 11:28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페르시아 만과 오늘날의 바그다드 시의 중간쯤에 있는 유브라데(유프라테스) 강에 위치한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강한 도시인 우르에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데라가 그의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지만 가나안까지는 가지 않고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고대 바빌론에서부터의 무역로에 있으며 니느웨와 다메섹의 중간쯤에 위치)에 정착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 초입부 부터 갑자기 흥미로워집니다. 처음 세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1-3).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란에 있는 그의 집에서 부르시고 그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아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1) 아브라함의 것이 될 땅에 대한 약속, 2) 큰 나라를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 3) 복을 주시리라는 약속. 이 약속들은 향후에 아브라함 언약으로 불리게 될 언약(창세기 15에서 제정되고 창세기 17에서 비준됨)에 대한 기초를 형성해 줍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특별한 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4는 하나님께서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여러 차례 아브라함을 믿음의 예시로 사용하며, 특히 인상적었던 믿음의 행함을 언급합니다:“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브리서 11:8).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목적지도 모르는 채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모든 것을 뜻했습니다. 그 당시 가족 단위는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가족이 서로 수백 마일 떨어져 사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가족이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종교적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르와 하란 사람들은 고대 바벨론의 만신전 풍습을 따라 숭배했으며, 특히 달의 왕인 ‘신’을 섬겼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교적 문화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부르심을 알게 된 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했습니다.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그의 아들 이삭의 출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문화에서는 정말 수치스러운 상황),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가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5:4). 이 아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으로 주신 막대한 재산을 상속할 아들이 될 것이었으며, 더 중요하게는 약속의 상속자가 되어 셋의 경건한 가계를 이어갈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창세기 15:6). 하나님은 창세기 17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되풀이하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세기 21에서의 이삭의 탄생으로 보상받습니다.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아들 이삭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 꼭대기에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 명령에 속으로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방패이시자(창세기 15:1) 이때까지는 아브라함에게 매우 은혜롭고 선하게 대해주신 하나님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집과 가족을 떠나라는 이전 명령에 순종한 것처럼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습니다(창세기 22:3). 우리는 이 이야기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는 결말을 맡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떻게 느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수십 년 동안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하나님이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신 것입니다. 요점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의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이삭을 희생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데려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히브리서 11:17-19).분명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실패와 죄악의 순간들을 겪었고,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숨김 없이 밝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잠재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었던 지역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라와의 관계에 대해 거짓말을 한 적이 최소한 두 번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창세기 12:10-20; 20:1-18). 이 두 가지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보호하고 복 주십니다. 우리는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한 좌절감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사로잡았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갖자고 제의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에 동의했습니다(창세기 16:1-15). 이스마엘의 탄생은 아브라함의 어리석음과 신앙의 결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탄생을 허락하고 심지어 이스마엘에게 복을 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브람과 사래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열세 살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할례의 언약과 함께 아브람에게 새 이름을 주셨고, 사래를 통하여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다시 주시며 새라에게도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창세기 17). ‘높은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람이 ‘열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많은 육신적인 후손을 가지게 되었으며,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으로 여겨집니다(갈라디아서 3:29). “믿음의 조상”에게도 의심과 불신의 순간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삶의 예시로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습니다.아브라함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증명했던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대동해 우리를 찾아오시거나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말씀하시거나 바닷물을 가르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사건을 초월적인 관점에서 계획하시고 조율하십니다. 때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의 삶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의 실패조차도, 우리가 우리 죄의 결과를 겪게 될 수는 있으나 은혜롭게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어긋나지 않음을 입증해 줍니다.아브라함의 삶은 또한 우리에게 단순한 순종이 가져다주는 복을 보여줍니다. 그의 가족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순종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에는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우리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이런 결정들을 놓고 고뇌했겠지만, 행동할 때가 되었을 때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부르심을 알게 되거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시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행동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는 순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우리는 또한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과 적극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하되,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 부부들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 약속은 믿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는 궁금해 했습니다(창세기 17:17-23).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죄인이 있다는 이유로 의인을 멸하실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50명의 의인만 있어도 죄악된 소돔과 고모라를 구해달라고 간구했고, 그 수를 계속 줄여 10명까지 낮췄습니다. 결국 소돔에는 10명의 의인조차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해주셨습니다(창세기 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성읍들을 멸망시키기 전에 미리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질문에 기막혀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해 하나님과 소통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줍니다.아브라함의 믿음 생활에서의 실수, 특히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황과 관련한 실수는 문제를 우리 손에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약속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들이 계획해 후계자를 두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역풍을 맞았습니다. 첫째로는 사라와 하갈의 갈등이 일어났고, 그 후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서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나중에 구약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숙적이 되었습니다. 그 갈등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에 인접한 아랍 국가들 사이의 분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 교훈을 우리 삶에 적용할 구석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셨다면, 우리는 신실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삶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의 교리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본보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중요한 교리의 예로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로마서 4장 전체를 할애하여 아브라함의 삶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되됨을 설명합니다.갈라디아서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복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갈라디아서 3:6-9, 14, 16, 18, 29). 이것은 창세기 15:6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선포하실 정도였으며, 그로 인해 로마서 3:28의 원리가 입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를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으로 충분했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구약 성경의 극 초반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과 죽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이 성경에서의 복음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라고 믿습니다. 구약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셋을 시작으로 약속의 계보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역사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창세기 4:26).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구속사의 일부일 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갈라디아서 3:8)고 말씀하셨을 때 복음이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아브라함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또 다른 것은 믿음을 물려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9, 누가복음 3:8, 요한복음 8:39에서 우리는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으로는 구원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다가 아니며, 타인의 신앙에 기초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거나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무랄 데 없는 그리스도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를 구원해 주실 의무가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아브라함으로부터 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로마서 9:7).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구원을 받을 사람들을 선택하시지만, 그 구원은 아브라함이 그의 삶에서 보여준 것과 동일한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끝으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삶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시로 사용합니다(야고보서 2:21). 야고보가 사용하는 예는 모리아 산에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살아있는 신앙을 보여주는 순종의 선한 행위들을 낳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고 하나님의 눈에 의롭게 여겨지게 했던 믿음(창세기 15)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그의 믿음은 그의 행함으로 증명되었습니다.마지막 분석을 보면 아브라함이 모범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신앙심이나 삶이 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결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많은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수백만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축복의 대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구속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하셨고, 이는 예수님의 탄생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살아있는 본보기입니다(히브리서 11:8-10).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날들이 끝나갈 때 아브라함의 믿음과 닮은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유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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