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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삶 속의 기도 – 성경의 진리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리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예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희망사항이 이루어지기를 …
Source: www.thewordofgod.kr
Date Published: 5/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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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배경 설명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예수님은 자신의 의도를 밀어붙이시거나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무언가를 얻고자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오히려 주러 오셨다.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
Source: ko.ligonier.org
Date Published: 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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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7] 기도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시다 (눅 11:1-2)
[예수님의 기도7] 기도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시다 (눅 11:1-2) · 1. 아버지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라고 …Source: ssub2.tistory.com
Date Published: 3/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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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배우라(마가복음 1:35-39)
현대 교인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바쁘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빠서 쉴 시간이 없다고 하잖아요. 바쁘다 보면 피곤합니다. 피곤 …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9/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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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론 – 다음블로그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 더니” (막 1:3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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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예수님의 기도(4)(요 17:20~26) – 기독신문
예수님과 함께 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기를 기도하셔“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6/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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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기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예수 기도(그리스어: Η Προσευχή του Ιησού)는 동방 정교회 내에서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짧은 기도이다. 기도문의 내용은 무척 짧고 단순명료한데, 다음과 같다.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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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도 – YES24
예수의 기도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 기독론! “예수의 기도는 우리 주님이 참으로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
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10/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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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소통, 예수의 기도 < 문화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이 책에서 소개된 ‘예수의 기도’는 독특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을 속으로 쉬지 않고 하는 것이다. 특히 심장 박동에 맞춰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6/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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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예수님 의 기도
- Author: 여호와로이2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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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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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삶 속의 기도
성경의 진리
예수님 삶 속의 기도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살펴본다. 성경 속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전서 4:7),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1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로새서 4:2) 등 많은 구절에서 쉽게 볼 수 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자주 잊혀지거나 뒤로 밀려나곤 한다.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살펴봄으로써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우고자 한다.
1.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누가복음 5:15-16
예수께서 기도하는 모습을 기록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누가복음 5장 말씀을 살펴보자. 이 때, 문맥과 배경, 즉 글의 흐름을 고려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시기와 상황적인 환경에 대해 알 수 있으므로 눈여겨 보는 것이 좋겠다. 누가복음 5장 12절부터 13절은 간질병을 앓고 있던 자가 치유를 받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 뒤를 잇는 15장 말씀은 예수께서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 물러나셨으나 끊임 없는 인파가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를 향해 몰려들었다고 이야기 한다 (누가복음 5:15). 이렇듯 예수께서는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 요즘 보통 사람들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하셨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기 쉽다. 비슷한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살펴보자.
누가복음 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한적한 곳에 혼자 물러가사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도 예수께서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셨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구절을 원문에서 읽어보면 문법적인 시제를 통해 예수께서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번역문은 간단한 기본적인 시제를 사용하여 마치 예수께서 과거에 한 번쯤 이와 같은 행동을 하셨던 것 같이 받아드려지기 쉬우나 예수께서는 반복적으로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해 기도를 드리셨다2. 좀 더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매번]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이렇듯 15-16절 말씀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단 한 번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인파에 쫒겨 바쁜 나날을 보내셨으나 이 와중에도 항상 기도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께 기도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도 생활은 예수의 삶 속에서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한 사역으로 바쁜 와중에도 미루거나 게을리 하지 않으셨을 정도로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또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기도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 만큼의 우선 순위가 주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 할 시간이 충분했던 이유는,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이에 적당한 우선 순위를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여러 가지 활동에 시간을 투자 한다. 시간이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는 하루에 24시간이라는 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기도 생활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큰 우선 순위를 차지하느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 속에 기도가 우선 순위인지 혹은 모든 하루 일과(일, 취침, 학교, TV 시청 등)를 마친 후 남는 시간을 차지하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기도는 우리 삶 속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해 마땅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남는 시간”을 투자하지 말고, 기도를 위한 시간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이를 위한 시간을 비워둘 수 있어야 하겠다.
2.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가복음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교훈적인 모습을 담은 구절이 또 있다 – 마가복음 1장 35절. 이번 또한 글의 흐름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21절은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침을 전파하시는 모습, 그리고 마귀를 퇴취하시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해,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28절). 회당을 나선 후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으로 향하시어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셨다 (30-31절).
마가복음 1:32-34
“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앞에서 살펴 본 구절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이 날 또한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더군다나 다음 날은 먼 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었으며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 다음 날 또한 많은 인파에 쫒겨 바쁜 하루를 보낼 것이 분명했다. 36-37절은 예수를 찾는 많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 1:36-37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찾았다. 생각해보라. 바쁜 하루를 마치고, 또 하루의 바쁜 날을 앞두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다음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릴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린다 하면, 이 사람은 기도를 자신의 생활 속 가장 높은 우선 순위로 여긴다는 의미로 받아드릴 수 있지 않은가? 바로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분이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께서는 다음 날이 아주 바쁜 하루가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기도 할 시간이 많이 없을 것을 예감하시고 예수께서는 그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 하루를 시작하기에 참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의 하루를 시작하기에도 참 좋은 방법이 아닐까? 그 날의 고통과 압박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대신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면 하루 동안 하나님의 보살핌과 능력을 느끼고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실 수 있는 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해 한다면 다음 날 아침 기도를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날 의지가 생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저 생각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우선적으로 중요시 여기셨기에 그러한 의지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여부가 아니라 우선 순위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태복음 14:23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담은 다음 구절은 마태복음 14장 말씀이다. 앞에서와 같이 글의 배경을 살펴보자. 이 날은 시작부터 아주 슬픈 날이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사형 소식을 접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사형에 대한 설명은 마태복음 1-11절 말씀 참고). 뒤를 잇는 14장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4: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더 나아가기 앞서 잠시 다음 상황을 고려해 보도록 하자. 만약 당신을 위해 항상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던 친척이 사형을 당했다면 당신은 기분이 어떻겠는가? 아마도 슬픔에 젖어 한 동안 혼자 떨어저 있고 싶을 것이다. 예수님 또한 같은 마음이셨다.
마태복음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세례요한의 사형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예수께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계획하고 계시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후, 충격에 쌓여 이후 결정된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긴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다. 그를 기다리는 인파에 동정심을 느끼시고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 (마태복음 14:14). 치유는 물론 기적을 행하시어 그들의 배를 채워주시기까지 하셨다 (마태복음 14:15-21). 22절은 그 이후 일어난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여기서 “즉시”란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해 주신 후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제촉”하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제촉”이란 그리스어에서 “anagkazo”라는 단어의 과거 시제로서 “억지로라도 어떠한 일을 시키다”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약 성서에서 아홉 번이나 쓰인 단어이다 (참고: “Vine’s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달가워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들 또한 돌려보냈다.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을 “제촉”하시어 그들을 멀리 떨어뜨려 보냈을까? 그 이유는 23절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 이유는 바로 예수께서 혼자 머물러 “기도”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루 하루에서 기도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제자들과 인파를 제촉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기도는 단연 예수님의 삶 속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지켰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새겨듣고 우리의 삶 가운데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한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누가복음 6:12-13
성경 말씀을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자.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의 중요성은 물론 기도 내용을 눈여겨 보도록 하겠다. 정확한 기도 제목은 알 수 없지만,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누가복음 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정확히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그 다음 날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음에 미뤄보아 열 두 제자의 임명이 기도 제목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결정을 내리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할 필요성을 느끼셨다면, 우리들 또한 이런저런 선택을 하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 자신의 제한된 지식으로 결정에 도달하기보다 하나님께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간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결정이 무엇인지 알고 계심은 물론 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 또한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를 알려주실 성령 또한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를 통해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이다.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 문제 또한 같은 문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 할 필요는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한된 지식을 가진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주실 것이다. 이 중 몇 가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 이는 이미 성경에 적혀있는 조언이자 명령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좀 더 세부한 결정 – 어느 곳에 가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할 것인가 – 등의 문제는 하나님께 직접 의논하고 하나님의 의견을 여쭈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를 통해 간구하도록 한다. 하나님께서는 정작 당신을 다른 곳에 보내거나 다른 일을 하도록 하고싶어 하실지도 모른다. 직장에 빗대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사와도 같다 – 최고의 결정권을 가진 상사 말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태복음 26:36-44
다음 보기는 잘 알려진 마태복음 26장 36절부터 44절의 말씀이다. 이 부분은 예수께서 구속되어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밖히시기 직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36절 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마태복음 26:36-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께서 슬퍼하신 이유는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지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 아주 힘든 시기였음과 동시에 우리에게 치명적인 일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 우리의 구원이 달린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는가? 다음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태복음 26:39-4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인류 구원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으셨다. 이에 대한 기도를 무려 세 번이나 드렸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가짐은 참으로 좋은 본보기를 제공한다.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먼저 자신의 희망 사항을 하나님께 내려 놓았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희망 사항을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꼭 이루어주셔야됨은 물론, 우리가 원하는 시기와 방법에 맞추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오해하는 자들이 많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만 사실이 된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성경은 많은 예를 기록하고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성경이 이야기하는 약속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의 예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일종의 차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보자. 성경에는 내가 그 차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그 차를 꼭 가져야만 하며,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어떠한 차를 원하는지 하나님께 나의 희망사항을 간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인가? 그렇다! 내가 그 차를 소유하는 것이 정작 좋은 일인지 좋지 않은 결과를 나을 것인지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것은 올바른 기도인가? 물론이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좋고 완벽하다고 (로마서 12:2),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신다고 (베드로후서 2:7) 이야기 하는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할까? 이 말씀들을 믿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믿고 따라야 할까? 물론이다! 예수께서 하신 그대로 말이다.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간구한 것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러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자신의 희망사항(“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욱 더 간절히 바랬다.“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리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예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희망사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흠잡을 데가 없는 하나님의 완벽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욱 더 간절히 바랄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보기로 돌아가보자면, 비록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간구한 것들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무시하신 것을 아니다. 누가복음은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기록을 제공한다.
누가복음 22:41-43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더해주기 위해 천사를 보내주셨다. 가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희망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깨닳곤 한다 (로마서 12:2). 만약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더해주실 것이다.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용기와 힘을 얻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8:3-11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 원하셨던 가장 큰 희망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었다. 이에따라 예수께서는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셨다 – 우리 또한 이를 본받아야 하겠다.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듯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아시고 슬픔에 가득차 계셨으나 기도를 한 후 힘을 얻어 정작 잡혀가실 때에는 대담함과 굳은 의지를 보여주신다. 자신을 고문 할 자들을 만나러 가는데에는 대담함과 굳은 의지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두려움에 쌓인 자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미루고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려워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들을 직접 찾아가셨음은 물론 제자들의 안전까지도 책임지셨다. 게다가 베드로로 인해 뜯겨진 하인의 귀까지 치유해 주기까지 하셨다 (누가복음 22:51). 이 모든 힘 – 대담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굳은 의지는 오로지 기도를 통해 얻어진 결과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결말
혼자 더 공부 할 성경 구절이 더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이 글에서 살펴 본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제자들과 인파를 제촉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해 결정에 도달하고, 어려움을 극복하셨다. “시간이 남으면 기도하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바쁜 와중에도 기도할 시간을 마련하셨다. “우리자신의 뜻에 따라 최선의 방법을 따르라”는 세상적인 조언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도록 하자.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타소스 키울라초글루
각주
1. 참고: 고린도전서 14:14-15, 에베소서 6:18, 빌립보서 6:6, 골로새서 4:12, 디모데전서 2:1, 야고보서 5:13, 16-18 그 외 복음 말씀과 구약 성서.
2. 참고: “Adam Clarke’s commentary of the Bible”과 “John Wesley’s explanatory notes”.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배경 설명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두 번째 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전통적으로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린다. 어떤 이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가장 장문의 기도 중의 하나라는 이유로 본문의 기도를 “주기도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목할 점은 “주기도문”이 요한복음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은 원래 제자들의 요청으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제자들의 기도”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마 6:9~13; 눅 11:2~4). 요한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내용을 인지 한 채로 자신의 복음서를 쓰고 있었다면, 그가 다른 두 복음서의 주기도문을 단순하게 차용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드린 마지막 기도를 기록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직후,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드온 시내 건너편에 위치한 동산에 들어가신 일을 요한이 언급한 것도 특이하다. 예수님이 로마 군인에게 붙잡히신 바로 그 동산이다(요 18:1~2). 요한이 동산의 이름까지 밝히지는 않지만, 다른 두 복음서를 읽어본 독자라면 그곳은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직전에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마 26:26~46; 막 14:32~42; 눅 22:40~46).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세 번에 걸쳐 다음과 같은 간구를 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42, 44; 막 14:36, 39, 41; 눅 22:42).” 그렇기에, 요한이 기록은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시기 전 하셨던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이해를 현저하게 확장시킨다.
전후 배경 이해하기
세 복음서에 등장하는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성경적 배경을 보여준다. 일단, 요한복음의 전체 흐름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크게 두 가지의 극적인 상황으로 나눈다. 학자들은 이를 “표적의 책(2-12장)”과 “영광 또는 찬미의 책(13~21장)”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요한복음을 반반씩 읽는 것은 축구나 연극관람 중에 휴식 시간을 갖는 것과 흡사하다. 1막은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표적(2장)부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11장)까지 놀랄만한 표적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그려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대 백성들은 그들의 메시아를 배척한다(요 12:36~41).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세족식은, 자기 백성을 위한 그 분의 사랑,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드러내실 참사랑의 본을 보여주신다.
요한복음의 2막 또는 후반전이 시작되면서 이야기는 현격히 변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메시아적 공동체를 모으신다(13장 1절과 1장 11절에서 ‘자기 사람들’이라고 표현). 그리고 요한은 부활 후 시점과 찬미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의 “찬미의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요한복음 1장 1~18절의 서막과 비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요 13:1~4)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세족식은, 자기 백성을 위한 그 분의 사랑,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드러내실 참사랑의 본을 보여주신다(요 19:30; 3:16). 이처럼, 예수님의 세족식은 마치 십자가의 예고편과 같은 역할을 한다(13장 1절의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할 때, 이는 “최종” 또는 “최대”의 의미가 있다).
요한복음 13~17장은 독특하다. 열두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역시 독특성을 가지고 묘사한다(요한은 다른 공관복음과 달리, 성찬을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의 제정으로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떡에 대한 논의가 최후의 만찬에 반영된다고 볼 수는 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에게 전해지는 예수님의 고별사만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성령의 오심에 대한 설명과(요 14, 16장) 예수님의 승천 후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요 15장)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의 수난 바로 앞에 나오는 13~17장 전체 구조는 다음과 같다(고별 설교 또는 다락방 설교라고 불린다). 요한복음 13장 1~30절에서는 고별 설교 및 (예수님의 수난을 다룬 18~21장까지를 포함한) 찬미의 책 전체의 서문처럼 세족식이 등장한다.
세족이 끝나고 배신자 유다가 자리를 뜨자(요 13:30), 예수님은 13장 31절부터 16장 33절에 걸쳐 열 한 가지의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에 의해 때때로 중단되기도 하지만 (요 13:36~37[베드로]; 14:5[도마], 8[빌립], 22[유다 다대오]), 대부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떠나신 이후에 제자들의 삶을 대비하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주님을 잃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더없이 슬픈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이 더 나은 일임을 확신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에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신자 안에 내주하실 성령을 보내신다. 이렇게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는 대신, 성령께서 그들 안에 계시어 신자의 마음 중심을 더욱 강력하고 신령한 임재로 이끄신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는 대신, 성령께서 그들 안에 계시어, 신자의 마음 중심을 더욱 강력하고 신령한 임재로 이끄신다.
신약의 신자들인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의 충만을 개인적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 사역의 완성이란 여전히 미래형이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성령 강림이 곧 일어날 것임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다(행 2;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임무를 수여하시며 성령 임재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한 제자들의 잠시 동안의 근심을 여자의 해산과 비교하시며 가르침을 마치신다. 해산 때의 고통이 있으나 아기를 낳으면 기쁨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잊힌다(요 16:16~33). 이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슬픔에 젖게 되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머지않아 보게 되므로 큰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16:33).” 예수님은 앞으로 다가올 환난에 대해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세상과 사탄, 그리고 “이 세상의 임금” (12:31; 14:30; 16:11)으로부터의 승리를 바라보게 하신다.
기도의 내용 이해하기
신약 성경 중,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직분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약 전체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세가지 직분을 묘사한다. 선지자 직분에 관하여 먼저 생각해 보자. 요한복음에도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유월절에 즈음한 예루살렘 첫 방문에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면서 선지자로서의 행동을 취하셨다(요 2:13~22). 시편 기자의 묘사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배의 순결을 사모하는 열심에 휩싸이셨다(요 2:17; 시 69:10). 성전은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집 (요 2:16; 눅2:49)”이요, “아버지의 집”은 신랑 되신 메시야(요 3:9)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예비하실 장소이다(요 14:2~3).
또한, 메시아적 표적으로 오병이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 6:14)”고 고백 했다. 이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신 18:15~19)”의 도래에 대한 기대였다. 그러나 성전 정화 사건으로 예수님은 배척되셨고, 유대 민족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다. 사람들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예수님을 인정할 때도 예수님은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요 6:14-15)” 가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또 다른 표적을 행하시기 이전에도 요한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요 4:44; 마 13:57; 막 6:4; 눅 4:24)”라고 언급했다. 이처럼 요한복음 속 예수님은 진정한 선지자이시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과 갈릴리 사람들은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했다.
왕이신 예수님에 관하여서,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 직후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는 사람들을 본다 (요 6:15).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셨을 때도 예수님은 솔로몬 왕처럼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셨다(요 12:12-19; 왕상 1:38). 이는 예수님이 보이신 왕의 겸손(요 12:14)이며 스가랴 선지자의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요 12:15; 슥 9:9)”라는 예언의 성취이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마중하며 유대 민족의 전통에 따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그곳은 “종려나무 성읍”이라 불리던 여리고 부근이었고, 종려나무 가지는 유대 민족의 자부심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큰 무리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 12:13)”라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한 백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힐난하는 유대 지도자들 편에 합류한다. 예수님을 조롱하던 심문을 마치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선보이며 “보라 너희 왕이로다” 이야기했을 때, 백성들은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요 19:14~15)”라고 소리 질렀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는 빌라도의 반문에도, 대제상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15절)”라고 냉담하게 답했다. 유죄가 선포되고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명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을 3개 국어로 적은 패를 십자가 위에 붙였다(19절). 이에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유대 지도자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설득하나 빌라도가 이를 거부했다 (21~22절). 심오하고 비극적인 역설이나, 빌라도는 유대 백성들이 거부한 왕이신 예수님의 역할을 확증해 준 것이다. 배척당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참 선지자이셨듯, 백성들의 배척 속에서도 예수님은 진정 그들의 왕이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사장적 직분은 선지자나 왕의 직분만큼 눈에 띄게 전개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희생 제사로 표현한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죽음을 맞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 1:29, 36). 그분은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요 10:15, 17-18). 부지불식간이지만 그 해의 대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수님이 바로 백성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유대 민족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을 베푸시는 한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예언했다(요 11:50~51; 10:16). 대제사장이면서도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는 역설 속에서 제사장이자 중보자의 역할을 완성하신 예수님이시다. 공식적으로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던 가야바가 있었지만, 진정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반복적으로 유월절에 비유하여 묘사한다. 종 되었던 집으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함께, 유월절의 상징을 예수님께서 완성하셨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라는 바울의 말을 상기시켜준다. 이처럼 요한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으나 참된 선지자이자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예수님을 드러낸다. 사실, 이 세 직분을 가지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배척은 그분의 메시아적 사명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요 12:38~41).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예수님 자신을 위한 중보를 시작으로 (요 17:1~5), 그분의 제자들과 (요 17:6~19) 첫 증인들을 통해 신자가 되는 이들을 (요17:20~26) 위한 중보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자세 이해하기
고백 설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죄 없음과 이타적인 자세로 시작한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점은,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 완수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안녕과 앞으로의 사역을 염두에 두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중보자의 제사장적인 자세를 취하셨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요 17:2~3)” 주시는 데 관심이 있으셨다. 자신의 영광보다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사였다(요 17:4~5).
백성들의 배척 속에서도 참 선지자이신 예수님은 진정 그들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도를 밀어붙이시거나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무언가를 얻고자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오히려 주러 오셨다.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그의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게 하신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오신 것이다. 세족식에서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은 신자에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본을 보이셨다(요 13:15-16; 빌 2:1-11). 예수님의 “새 계명”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요 13:34-35). 예수님의 끝없는 자기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는 자기 홍보와 사리 추구가 (심지어 많은 신자들 사이에서까지) 최고시 되는 현시대의 풍조에 크나큰 도전이 된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신자들을 세상 속에서 영적으로 보호하기 원하셨다. 그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라고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 17: 11,14,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고, 곧 성령님도 보내실 것이다(요 17:14).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신자들을 데려가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들을 보호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는 기도이다(요 17:15).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는 신자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기도이자, 하나님 말씀의 진리로 신자의 성화를 이루게 하시려는 기도이다.
더욱이, 신자를 위한 기도는 단지 그들 자신의 성화를 누리려는 독단적인 목적이 아니다. 신자를 위한 기도는 사명(요 17:18)을 목적으로 한다. 유감스럽게도 사명적 목적을 위한 신자의 거룩과 성화는 너무나 쉽게 간과된다. 성화는 사명의 결과이며, 역으로 사명은 성화된 사람들에 의해 성취된다. 성령이 내주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자,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충성하며, 세상을 향한 사역의 목적으로 연합하는 사람들에 의해 실행된다(요 17:20~26; 엡 4:1~6).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령이 부어져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묶인 믿음 공동체의 하나 된 사명이야말로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근저를 이루는 비전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7] 기도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시다 (눅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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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시다 (눅 11:1-2)
오늘은 누가복음 시리즈 속의 시리즈. [예수님의 기도] 일곱 번째 시간이다. 우리가 예배를 마칠 때마다 함께 낭독하는 기도가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바로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 본문에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치시게 된 배경이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던 중에-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기도 생활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맥락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다.
(마 6:5,6,9)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눅 11:1-2)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두 본문을 조합해 보면,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고 돌아 오셔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그때 제자 중에 하나가 “그러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면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얘기가 없는데 왜 누가복음에는 있을까? 강조점의 차이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강조점 중에 하나는 기도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보면 누가복음에는 누구누구가 기도했다는 얘기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면도 많이 기록하고 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물어 보실 때, 70명의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도하셨다. 누가는 이 사실을 빼놓지 않고 복음서에 담았다. 이번 본문 역시 마찬가지다. 그날도 어김없이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따로 시간을 내고 장소를 마련하셔서 기도 하신 후에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셨다. 제자들은 항상 기도에 힘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적잖은 감명을 받았다.
무슨 일이든지 앞선 사람을 보고 따라 하는 것 만큼 안전하고 편한 방법이 없다. 기도도 동일하다. 몸소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큼 좋은 기도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스승이 자기만의 기도문을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 세례 요한도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청에 응하셔서 친히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은 모든 성도가 따라야 할 기도의 기준이자 표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눅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토시 하나 틀리면 안 된다’, ‘절대로 내용을 더하거나 빼지마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순서와 방향을 따라 기도 하는게 훨씬 더 유익하다”는 의미에서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도할 때에 일정한 순서와 방향을 잡고 있으면, 이게 없을 때 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기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도시간에 인도자가 아무런 주제 제시도 없이 그냥 “우리 다함께 기도 합시다”라고 할 때 보다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등등. 특정한 기도 제목을 정해 줄때 기도의 집중력을 높여주고, 더욱 폭넓고 깊게 기도할 수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두 번째 차이점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 보다 좀 더 간략하다는 것이다. 아마 본문을 읽어보면 어떤 내용이 생략 되었는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눅 11:2-4)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마태복음과 비교했을 때 어느 부분이 생략되었는가? 시작 부분에 “하늘에 계신 우리”가 없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시오며” 다음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없다. 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다음에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도 생략됐다. 마태복음이 좀 더 구체적이고, 누가복음은 상대적으로 간소하다.
어쨌든 지금은 누가복음이 설교 본문이니까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을 기준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순서대로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기도문은 크게 6가지 기도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아버지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셨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신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거니와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한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거룩한 분이시다. 영광스럽고 위대한 분이시다. 쉽게 말해서 감히 우리가 함부로, 쉽게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마땅한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경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3.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의 기도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삶,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나라,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4.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참 많다. 일용할 양식을 채워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자녀의 기도이다.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채워달라고 주님께 구해야 한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어려울 때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에는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 힘으로는 이 죄를 씻을 수가 없다. 아니 죄를 더 추가할 뿐이다. 우리 죄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나의 죄를 씻어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가로막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사하여 달라고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신다.
6.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우리는 정말 연약한 존재들이다. 우리 힘으로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없고, 우리 힘으로는 유혹과 시험을 물리칠 수 없다. 원수 마귀 사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유혹이 밀려 올 때, 시험에 들었을 때, 여러 가지 악한 일들이 우리를 삼키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실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제목들을 순서에 따라 기도하면 여러 가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일단 기도할 때 횡설수설 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다. 기도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내용들을 빼먹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기도를 보면, 솔직히 주먹구구식일 때가 많다. 쉽게 말해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기도한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까 항상 내가 지금 당장 필요한게 있거나, 급한 문제가 있을 때는 구구절절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일절 생략해 버린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해야 한다.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주기도문의 내용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다음으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살펴보고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다.
1. 나의 기도 생활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예수님이 기도에 힘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봐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그날도 어김없이 기도하고 오셨다. 만약 예수님이 생전 기도하지 않는 분이었다면 과연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려 했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기도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 모습을 보고 기도를 배우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제자들의 기도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기도 생활은 다른 이들의 기도 생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단적인 예로, 새벽예배에 누구도 참석하고 누구도 참석했다고 하면 아무도 안 왔다고 할 때보다 훨씬 더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된다. 기도시간에 내가 먼저 용기 내서 소리 내어 기도 하면, 다른 사람도 자연스럽게 통성 기도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기도 생활이 오로지 나만의 기도생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도 생활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러면 나의 기도도 살아나고,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의 기도 생활도 살아나게 될 것이다.
2. 기도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뒤집어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배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기도를 배우지 않는 것 같다. 말씀도 배우고, 찬양도 배우고, 이런저런 사역도 배우고 아무튼 다른건 다 배우는데 희한하게도 유독 기도는 배우지 않는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은 친히 가르쳐 주셨다. 그렇다. 기도도 배워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기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래야 기도가 깊어지고 성숙해 진다.
3. 기도는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이렇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 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도 없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에 힘쓰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이유도 결국 제자들이 실제로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잊지 말라. 신앙은 생활이다. 기도는 하는 것이다.
말씀을 맺겠다. 기도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의 제목을 따라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오로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이기적이고 철없는 떼쓰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는 성숙한 기도로 변화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의 기도생활이 다른 이들의 기도 생활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라 실제로 하는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이렇게’ 기도 ‘하는’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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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론
예수님의 기도론
Ⅰ. 서 론
얀 밀리치 로호만(Jan Milic Lochman, 1922-1982)은 그의 저서 주기도문 강해의 한국판 서문에서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과 신학활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사실 그렇다. 기도는 신앙생활 및 교회봉사와 신학활동의 생명이요, 중심이다. 그래서 기도가 끊길 때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호흡은 중단이 되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약해지고 사역의 열매가 빈약해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약해지면 그의 모든 삶과 활동이 따라서 약해지게 될 것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에 이처럼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성경에서도 상당한 분량으로 할애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조직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는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얼마나 신중하게 가르치고 있으며 어떻게 진지하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본고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기초로 하여 그의 기도론을 구성하는 것인데, 그렇게만 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기도의 모범이 빠지게 된다. 예수님은 말씀(Word)뿐만이 아니라 행동(Action)을 통해서도 가르치셨기(행 1:1)때문에 예수님의 기도론에 주님의 기도 모본(행위)도 종합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중의 기도에 관한 구절을 조사해 보면, 마태복음에는 33 구절(5:44; 6:5-13, 31-34; 7:7-12; 11:25-27; 18:18-20; 20:20-23;21:12-13,18- 22; 24:20; 26:53; 27:46)이고, 마가복음에는 29절(9:16-29; 10:35-40; 11:15-18,23-25; 12:40; 13:18; 15:34)이고, 누가복음에는 36구절(6:28; 10:21-24; 11:2-13, 12:29-31; 18:1-14; 19:46; 20:47; 21:36)이고, 요한복음에는 8구절(14:13-14; 15:16; 16:23-27)로서 총 106구절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기도는 마태복음에는 5회(11:25-27, 14:23; 19:13,15; 26:36-44,53; 27:46), 마가복음에는 4회(1:35; 6:46; 14:32-41; 15:34), 누가복음에는 11회(3:21; 5:16; 6:12; 9:18,28-29; 10:21-24; 11:1; 22:31-32; 22:39-46; 23:34,46)나 되고, 요한복음에는 3회(11:41-42; 12:27-28; 17:1-26)가 나온다.
이와같이 조사된 모든 구절을 귀납적으로(inductive) 정리하여 다시 주제별(deductive)로 정리하면, 주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은 크게 두가지로서, 말씀을 통한 가르침과 행동(모범)을 통한 가르침으로 나눌 수 있다. 말씀을 통한 가르침과 행동 즉 기도모범을 통한 가르침을 다시 세분하여 주제별로 정리하였다.
Ⅱ. 본론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여 있는 내용을 그대로 귀납적으로 정리하면 첫째,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교훈(마태복음에는 16구절, 마가복음에는 2구절, 누가복음에는 26구절,요한복음에는 7구절이다.), 둘째, 기도에 관한 간접적인 교훈(마태복음에는 15구절, 11구절, 누가복음에는 7구절, 요한복음에는 1구절이다), 셋째, 예수님의 실제적인 기도 혹은 기도 모범(마태복음에는 5회, 마가복음에는 4회, 누가복음에는 11회, 요한복음에는 3회이다.), 넷째, 기도에 관한 비유적인 교훈(마태복음에 하나, 누가복음에 셋이 있다)으로 되어 있다. 이런 네가지 내용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다 있는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기도에 관한 비유적인 교훈이 없다.
따라서 4복음서에 있는 기도에 관한 이 모든 내용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주제로 다시 정리하었다. 즉 크게 나누어 예수님의 기도의 교훈(기도의 정의, 기도자, 기도의 대상, 기도의 자세 등 15 주제)과 예수님의 기도의 모본(계시에 대한 감사의 기도, 사역후의 기도, 하루 시작전 등 20가지의 모본)이다. 이 모든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의 기도의 교훈
1) 기도의 정의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 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3-1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6).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 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 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 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3-24).
성경에서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사전적으로 정의해 놓은 본문은 없다. 그러나 상기의 몇 구절에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예수님이 사용하신 “구한다”( )라는 용어의 뜻을 통해서 알 수 있다. Gustav St hlin 은 가 “요구하다” (to demand) 와 “간청(혹은 간구)하다” (to request) 의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은 이 단어를 자기의 기도를 의미하는 데에는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하는 기도에만 사용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어의 근본적인 의미는 우선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원하는 요구라고 한다. 그래서 김상복 박사는 “간구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무엇을” 혹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의 뜻을 종합해 보면 “기도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기도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 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3).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 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 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9).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 니라” (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 니라” (눅 11:10).
기도자는 누구인가? 즉 누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가? 이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cf. 롬 8:15, 갈 4:6). 그러므로 예수님이 “너희가 구하라”고 하셨을 때 “너희”는 그의 “거듭난 제자들”이거나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무리들(cf. 마 7:8, 28)”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생각할수 있는 것은 기도자의 보편성이다. 주님은 “구하는 이마다” 혹은 “찾는 이마다” 혹은 “두드리는 이마다”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 세상 누구에게나 열려진 초청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면 누구에게나 열려진 기도에의 초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 기도의 대상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 6: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눅 11:2).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4).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으로 두 분을 언급한다.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이다. 물론 이 두 분은 삼위일체로서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예수님 자신도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간구를 받으시고, 시행하시는 분 즉 응답하시는 분으로 소개하셨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Joachim Jeremias 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언사(sayings)를 “아버지(The Father, 인칭 대명사 없이)”, “너희들의 아버지(Your Father)”, “나의 아버지(My Father)” 등 세가지로 보면서 “너희들의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 대하여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친절과 사랑으로 돌보시고, 그들의 구원을 준비하시는 그런 자상하신 아버지로 보여 주신는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필요를 이미 다 아시고 스스로 채워 주시 주지만 또한 우리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채워주시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시다.
4) 기도의 자세
마태복음 6장 5절 이하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의 교훈은 4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교훈에서 맨 먼저 언급된 것은 기도의 여러가지 교훈 중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기도의 자세”이다. 기도의 자세가 중요한 것은 기도의 응답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외식하는 자의 기도는 이미 “자기 상”(마 6:5)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자의 기도에는 응답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암시하셨다. 요컨데 기도자세가 응답을 전제하는 것이라면 기도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기도의 교훈들중에서 기도의 자세는 모든 기도의 응답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유추하여 알 수 있다.
(1) 외식하는 자세를 버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 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 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5-6).
외식하는 자의 기도의 특징은 첫째,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앞에서 의를 행할려고 하는 것”(마 6:1)이다. 이런 기도는 의도하는 바 대로 이미 사람들로 부터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부터는 상을 얻지 못하는 것”(마 6:1)이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하셨다.
(2). 중언부언으로 기도하지 말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 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6:7-8).
‘중언부언하지 말라'( )는 이 말(원형은 )이 ‘무의미한’ 혹은 ‘쓸데없는’ 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 에서 유래되었는지 일종의 의성어인 (말더듬이)에서 유래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생각없이 말을 많이 하거나 같은 말을 의미없이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길게 기도하는 것이나 반복적인 기도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길게 기도를 하셨고(마 6:12), 반복하는 기도도 하셨다(마 26:44).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길게 하는 기도가 효력을 보장한다는 이교도들의 주문(呪文)형식의 기도를 금하신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효력이 있는 것은 주문형식의 무의미한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와 이방인들의 중언부언의 기도를 강력하게 금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구하라고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기도는 나의 시급한 형편에 있는 정보를 하나님께 알리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다 아시는 것을 전제하고서도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무능력함의 고백이요, 그 도움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 부터 찾을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으로 부터도 그 도움을 찾지 않겠다는 공언된 포기인 것이다. 바로 이 고백과 승인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요,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이다.
(3) 지속적으로 담대하게 구하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7-12).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5-13).
예수님은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논증법은 랍비들의 소위 “경한 것에서 중한 것으로의 논증법”(argument from minor to major)이다. 즉 인간의 아버지가 자식이 구하는 대로 주고, 인간친구가 강청하는 대로 필요를 준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기도에로 초청하시는 강력한 자애로운 권면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도에의 초청을 마음놓고 신뢰하라는 자세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4)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3-24).
이 교훈은 기도할 때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까?” 하는 회의와 의심을 가지고 기도해서는 안되며, “내가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는 것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전자는 문자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산을 바다로 옮기는 것은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러나 그와같은 기적적인 일, 즉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한 일들이 필요한 때가 있으며 이런 일은 실제로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후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요컨데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5) 낙심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1-8).
기도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 지속적으로 신뢰를 가지고 기도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여기서도 역시 랍비들의 논증법인 “경한 것에서 중한 것으로의 논증법”(argument from minor to major)을 사용하신다. 즉 이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도 한 과부의 소송을 들어준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는 응답이 늦어진다고 생각되는 때에도 실망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기도 할 것을 가르치셨다.
(6) 겸손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4).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기도응답의 원리와도 연관된다. 즉 기도응답은 율법의 규정들을 그대로 다 지킨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규정들을 다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죄인됨을 통감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이 가져야 할 기도의 영적인 자세이다.
(7) 기도에 경성하라.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 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막 14:37-38).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 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눅 22:45-4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 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눅 21:36).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이고, 육신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하지 않을 때에라도 오는 시험이 면제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심으로서 기도에 얼마나 경성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세에 있는 고난이나 세상의 쾌락의 유혹앞에서도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특히 마음이 둔하여 질 것을 경계하셨다. 그 만큼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때문에 기도에 경성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문맥으로 볼 때 유혹과 시험이 있다는 것은 마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더우기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5) 기도와 장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 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 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3).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막 11:17).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 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 19:46).
예수님께서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이루어 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공적인 장소에서 기도하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라 기도의 내적인 은밀성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공석(cf. 마 11:25-27; 19:13-15; 26:36-44; 27:46; 막 14:32-41; 15:34; 눅 3:21; 9:28-29; 10:21-24; 22:39-46; 23:34,36; 요 11:41; 12:27 17:1-26)에서도 기도하셨지만 내적인 은밀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종종 홀로 산이나 조용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cf. 마 14:23; 막 1:35; 6:46; 눅 5:16; 6:12; 9:18; 11:1; 22:31-32).
예수님은 성전을 기도의 장소로 언급하셨다. 예수님께서 은밀한 기도를 위하여 골방을 말씀하셨는데 반드시 공간적인 장소만을 언급하신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장소에 영향을 받는 것을 고려 할 때, 사람에 따라서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다른 장소 보다는 교회당이나 기도원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2장 21절에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시라는 것을 고려할 때 영적인 공간 즉 “예수님 안에서” 혹은 “성령안에서”(엡 6:18)의 기도가 필요함을 암시하셨다고도 할 수 있다.
6) 기도와 시간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 더니” (마 14:23),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 더니” (막 1:3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막 6:45-4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 5:16).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2).
예수님은 몇시에 기도해야 된다고 하는 가르침은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할 수 있는 한 자주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의 모본을 통해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유대인이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관습(시 55:17; 단 6:10,13)을 따라 새벽(막 1:35)에, 혹은 정오(눅 5:16)에, 혹은 저녁(마 14:23)에 기도하셨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고(눅 6:12), 상황에 따라 기도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군중들을 멀리 하시고 즉시 기도하시기도 하셨다(막 6:45-46).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보면 하나의 패턴 즉 주옥과 같은 하루 하루의 삶이 기도라고 하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7) 기도와 성화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 시니라” (눅 20:47).
특별히 서기관들은 과부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지명된자들이다. 그런데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지위를 악용하여 과부의 가산을 약탈했다. 구약성경에서 과부와 고아의 물건을 늑탈하는 것은 가장 잔인한 죄악으로 말한다. 이러한 죄악을 범하면서도 이들이 길게 기도한 것은 그들의 약탈을 위장하기 위한 위선적인 기도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의 기도는 단지 사람의 생각과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행위와 여기에다가 이들의 위선적인 죄악의 긴 기도에 무거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은 기도에 성화된 삶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을 역설적(逆說的)으로 강조하는 기도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8) 기도의 권세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 는 줄로 아느냐?” (마 26:53).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 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도응답의 결과로 완전한 평화를 가지셨을 것이다.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베드로는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침으로서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를 거부하셨다. 예수님께서 폭력을 사용하여 자신을 보호하시기를 원하셨다면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즉 기도를 통하여 천사군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볼 때,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의 권세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기도의 권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즉 기도를 통해서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들린 소년을 고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9) 기도의 목적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3).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원리는 예수님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은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셨고, 또한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하셨다(요 17:1, 4). 그래서 주님은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셨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늘의 천군천사들과 장로들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등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찬양하였다(계 5:12-13). 기도의 응답이나 기도의 역사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얻으시도록 의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 기도의 내용
먼저 “주의 기도”에 대하여 정리한다. 주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부분은 하나님을 부르는 부분(Invocation;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이고, 둘째 부분은 여섯 개의 간구(Supplications;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고, 셋째 부분은 결론부인데 신앙고백(Confession;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이라고 할 수 있다.
(1) 하나님을 위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눅 11:2).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성품이며, 그 자신이며,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그의 인격이다. 그리고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원래 구별한다는 뜻인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고 섬기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으로 높힘받고 경외받기를 소원한다는 것이다. 여기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헬라어는 로서 누가 거룩하게 하느냐? 즉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의 애매성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어느 한쪽만을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 일의 가능성은 온전히 하나님께 있는 일이나 우리들의 삶과 신앙인격을 통해서 일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같은 산상수훈에서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마 5:1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눅 11:2),
여기 나라는 “당신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것은 예수의 주된 선포내용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그 나라를 지상에 도래하게 하셨으며, 또한 앞으로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실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not yet)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하기를 소망하는 기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미(already)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측면이 나타나기를 소원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즉 복음이 증거되는 곳 마다 사람들이 변화되는 역사와 사탄과 흑암의 세력들과 질병의 세력들이 물러가는 역사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라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온전하신 것(롬 12:2)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셨고(요 6:38-39), 그의 뜻을 따라 죽으셨고(눅 22:42), 이런 점에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신앙과 삶의 모본이 되셨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목적이요, 경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체념이나 절망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나의 뜻 보다 더욱 더 선하고 온전한 뜻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열망과 소원에서 비롯되는 간구이다.
(4)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1).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눅 11:3).
이 기도는 두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음식을 비롯하여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의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관점이다. 즉 미래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양식인 생명의 떡을 구하라는 뜻이다. 예수의 선포가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관점은 그렇지 않은 비종말론적인 관점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을 참고해 보면 물질적인 의미가 훨씬 더 강하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물질적인 필요와 아울러 영적인 필요를 구하라고 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
(5) 서로의 용서를 위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 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눅 11:4).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18-20).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 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막 11:25).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용서 이전에 인간끼리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즉 내가 남을 용서하였아오니 하나님께서 저의 죄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특별히 죄의 용서를 위하여 둘 이상이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고 가르치신다.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은혜가 있고, 사죄의 은혜가 있다고 하셨다.
(6)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눅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눅 11:4).
우리는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을 얻었고, 자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된 것은 아니다. 죄와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해 더욱 더 자극될 수도 있다.
(7) 의식주 보다도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1-34).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12:29-31).
기도의 내용중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기도문의 내용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8) 원수 사랑을 위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 하라” (마 5:44).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8).
예수님은 나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주님께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은 원수에 대하여 보복하는 일반적인 자세 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을 요구하셨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한 차원 높은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다(마 5:48). 즉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성품의 반열에 갖다 놓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들을 주신 것(롬 5:8)”처럼,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므로 하나님을 본 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엡 5:1)을 갖추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므로(눅 23:34) 기도의 가르침(말)과 행동이 일치되었다.
(9) 예상되는 환란앞에서도 기도로 은혜를 구하라.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20).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막 13:18).
예수께서는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대환란에 대비하여 기도로 준비할 것을 가르치셨다. 도망하는 일이 왜 겨울에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겨울에는 피난하기가 힘들다. 안식일에도 힘든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막 2:27)고 말씀하셨고, 또한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곤란한 지경에 빠지면 얼마든지 그를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참고, 마 12:11). 그러나 그 당시에 안식일에 대한 편만한 의식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규례와 법조문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환란으로 사람들이 도망갈 때 곤경에 처한 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못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겨울에나 안식일에 피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상되는 환란앞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도로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 기도의 응답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4).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 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 16:23).
기도는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응답은 아버지 하나님이 하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도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하셨다. 즉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다.
12) 기도응답의 확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 21:22-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4).
예수님은 기도응답의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셨고,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든지 예비되어 있으나 기도라는 촉매가 올때까지는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야고보 기자도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할 것을 믿음으로 구하라(약 1:6-8)고 가르쳤다.
13) 기도응답의 원리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3-1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6).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 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 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3-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 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 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3-24).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 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 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 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6).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 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예수님은 기도응답의 원리로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둘째, 믿음으로 구하고, 셋째, 은밀한 가운데 구하고, 넷째, 예수님 안에 거하고, 다섯째, 말씀안에서 순종함으로 구하고, 여섯째 경외함으로 구할 때에 기도응답이 있다고 하셨다.
14) 기도응답의 표증(혹은 그 결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 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28).
바울은 기도응답의 표증으로 평안을 말하였고(빌 4:6), 예수님은 기쁨을 말씀하셨다. 물론 이 기쁨은 기도응답을 볼때에 비로소 생기는 기쁨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도응답의 전조로 주시는 기쁨이기도 하다. 이 기쁨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 가운데에서 얻어지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오는 기쁨이다.
15) 기도의 여러 가지 상황
(1) 죄 용서가 필요한 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18-20).
(2) 시험과 유혹이 있을 때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 26:40-41),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 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 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막 14:37-38),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이르시 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눅 22:40,46).
(3) 기도응답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1-8).
(4) 나에게 원수가 있을 때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 하라” (마 5:44).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8).
(5) 개인 및 우주적 종말에 있을 환란에 대비하여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20).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막 13:18).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 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눅 21:36).
(6) 감사 한 일이 있을 때에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5-27).
(7) 하나의 사역을 마칠 때에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 니” (마 14:2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 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막 6:45-4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 5:16).
(8) 중보기도 요청이 있을 때에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마 19:13)
(9)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눈 앞에 둘 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36-53; cf. 막14:32-41; 눅22:39-46).
(10) 고통스러울 때에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 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cf. 막15:34).
(11) 하루의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 하시더니” (막 1:35).
(12) 하루의 사역이 끝날 때에.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막 6:46).
(13) 세례를 받을 때에.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눅 3:21).
(14)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 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 (눅 6:12-13).
(15) 중요한 사안을 예상하면서.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 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눅 9:18).
(16)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에.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28-29).
(17) 전도사역의 보고가 있을 때에.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 10:21-24).
(18) 기도를 가르치기 전에.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19) 다른 사람이 영적인 위기에 처하게 되는 일이 예상 될 때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 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 를 굳게 하라” (눅 22:31-32).
(20) 임종시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 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눅 23:36).
2. 예수님의 기도의 모본
1) 세례를 받으실 때에 기도하심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3:21-22).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대속적인 죽음을 예표하기도 하지만(눅 12:50), 메시야 직무수행의 공적인 임직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때에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눅 3:22)고 확증해 주셨고, 동시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이로써 주님은 성령에 힘입어 메시야 사역을 수행하시기 시작하셨다(행 10:38). 이렇게 중요한 세례를 받을 때 주님은 기도하셨다. 즉 예수님은 메시야로서의 공적인 직무를 임직받을 때에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2) 하루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기도하심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예수님은 하루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기도하셨다. 바로 그 전날에 있었던 사역은 매우 늦게 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막 1:32-34). 그런데도 이튼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 나셔서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여기서 기도하신 후에 새로운 사역지로 향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막 1:38-39).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로운 사역지로 떠나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볼 수 있다(막 1:36-37).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은 문맥으로 볼 때 틀림없이 병든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시고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다른 동네로 가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해 새로운 사역이나 새로운 사역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3) 사역후에 혼자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심.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 14:23).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막 6:4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 5:16).
예수님은 하루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지만 하나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도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마 14:15-21; 막 6:35-44), 그리고 문둥병을 고치신 후에(눅 5:12-15) 기도하러 가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이어서 사람들로부터 환호와 대접과 박수를 받아야 하는 시간에 무리와 작별하시고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의 사역 후에 기도로 자신을 다스리시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기도의 교제 가운데에서 사역의 새로운 방향을 의논하셨을 것이다.
4) 어린이들을 위해 축복기도하심.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마 19:13-15).
제자들은 예수님께 데려오는 아이들을 꾸짖고 위협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셨다. 물론 그 당시의 유대교는 아이들을 근본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아이들을 무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이유로 꾸짖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예수님은 그 바쁘신 사역중에서도 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5)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에 기도하심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2).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날 밤에 밤 새워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완성되면 전 세계에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또한 교회의 초석들이다. 이들을 중심해서 기독교회가 탄생할 것이고, 기독교의 역사가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는 문제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신중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정해야 했을 것이다. 특히가룟유다의 결정 문제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기도의 씨름이 필요했을는지도 모른다.
6)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전에 기도하심.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 구라고 하느냐” (눅 9:18).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로 부터 신앙고백을 받으시기 직전에 기도하셨다. 이것은 베드로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볼 때 더욱 더 자연스럽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할 때 예수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고 깨우치셨다. 즉 베드로가 이런 신앙고백을 하도록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미 중보기도를 해 놓으셨다.
7) 중요한 일이 예상될 때에 기도하심.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 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 더라” (눅 9:28-29).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시는 중에 용모가 변화되셨다. 그때 문득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담화하였는데 주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시는 일이었다. 즉 구속사역에 대한 담화였다. 예수님 자신의 용모가 변화되는 것이나 담화의 주제 모두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 중요한 일을 예상하시면서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하여 산에 올라 가셨고 기도하시는 중에 갑자기 용모가 변화하셨다. 이것은 중요한 일을 예상하시면서 하나님과 상의하신 일이라고 여겨진다.
8) 전도보고를 받으실 때에 기도하심.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눅 10:21-24).
예수님께서 70인의 전도보고를 받으시면서 성령으로 기뻐하셨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기도의 내용은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현자들이나 어른들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에게 복음이 증거된 사실과 아들(예수님)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알 수 있는자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며 감사의 기도를 하셨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다. 요컨데 예수님은 복음을 증거하고 돌아 온 자들의 보고를 들으면서 기도하셨다.
9) 계시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하심.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5-27).
10)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기도하심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예수님은 수시로 기도하셨고, 아침에 혹은 저녁에 기도하셨고,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도, 일을 마치신 후에도, 일을 하시면서도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누구 보다도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또한 배우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의 삶을 사시면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중요성과 의미를 간접적으로 깨우치시고 기도를 가르치시기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신 것 같다.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것을 아신 주님은 역시 기도로 준비하셨다. 예수님이 한곳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나오실 때 제자중에 하나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11)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기도하심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1:41-42).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그 동안 해 왔던 모든 기도에 응답하신 아버지께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 달라고 우회적으로 간구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무리로 믿도록 하기 위하여 나사로를 살려 달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기도는 사적인 욕구를 채우시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여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12) 중요한 구속사역을 생각하시며 기도하심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 12:27-28).
예수님은 자기가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항상 기억하고 계셨고(막 1:38; 막 10:45; 요 12:27; 18:37; 마 9:13; 10:34 등등), 그 목적을 향하여 대담하게 진행해 나가셨다. 따라서 때때로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셨고, 그것이 생각나실 때 기도도 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생애 중요한 목표를 두고 수시로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3) 대제사장으로서 중보기도를 하심
(1) 자신을 위한 기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1-5).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중보기도를 하실 때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즉 아들과 아버지의 영화를 위하여 기도하셨고, 자신의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신 것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기도를 드리신다. 그리고 영생에 대한 이해를 하나님과 공감하고 창세전에 가졌던 영화를 회복해 주실 것을 간구하셨다.
(2) 제자들을 위한 기도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6-19).
예수님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신 사역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시면서 자신의 말에 믿음으로 순종한 제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데, 이들의 연합과 성결을 위하여 간구하셨다.
(3) 장래신자(일반교회)를 위한 기도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0-26).
예수님은 장래에 있을 모든 신자들 즉 지상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신자들의 연합을 위하여, 모든 성도가 주의 영광을 보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성도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간구하셨다.
14) 제자가 시험에 빠질 것을 예상하시면서 중보 기도하심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기 직전에 예수님은 그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셨다. 사단은 제자들 모두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 개인을 위하여 기도한 것은 베드로 개인이 특별한 방식으로 시련에 빠질 것을 예상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베드로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를 간구하시는 것이었고, 그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 예수님의 기도의 응답은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격려속에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내 주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중보기도를 해 주어야 하는 좋은 모본이다.
15)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앞에 두고 기도하심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36-53; 막14:32-41; 눅 22:39-46).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앞에 두고 한 것이었다. 이 때의 기도는 고통중(마 26:38, 막 14: 34)의 기도였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긴 기도였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볼 때 자아와의 투쟁이었다 결국 자신을 승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실 때 새 아침이 밝아 왔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중요한 모본을 제시해 준다. 즉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상충될 때 자신의 뜻을 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이는 투쟁적인 긴 기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16)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심.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눅 23:34).
예수님은 주기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가르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직접 자신에게 죄를 짓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17) 고통스런 상황에서 기도하심.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 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상황을 맞이하셨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최악의 고통스런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인 기도를 쉬지 않으셨으며 필요하고 합당한 기도를 드리셨다. 특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말은 기도이면서도 동시에 고통의 절규이기도 한 것이다. 즉 심각한 고통을 기도형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 마지막 죽음앞에서 기도하심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눅 23:46).
예수님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어릴 때부터 몸에 베인 습관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뢰의 기도이다.
19)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심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 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이 기도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지상에 계실때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이 본문의 문맥이 인간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의 특성인 인간의 연약함을 설명하는 것이고, 또한 “육체에 계실 때에” 라는 말이 원문에서 ” (in the days of his flesh)” 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어느 특정한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전 기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십자가의 길이었다(막 8:34; 10:45; 눅 9:23).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는 처음부터 죽으시기로 되어 있었다(요 1:29, 36). 그래서 그는 수 많은 기도가운데에서 점점 다가오는 구속적인 사역과 더불어 오는 죽음의 공포로 인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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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예수님의 기도(4)(요 17:20~26)
예수님과 함께 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기를 기도하셔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 홍성인 목사
자신과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마치 창세기 49장의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열 두 아들을 축복한 것처럼,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을 바로 앞에 두고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축복하는 모세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제자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요 17:20)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주신 예수님의 영광을 이 땅의 성도들이 보게 되는 것”(요 17:24)입니다. 이 땅의 성도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 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이 땅의 성도들이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는 예수님의 비전은 엄청난 기적이나 신비한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말’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요 1:1)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만을 증거하게 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변화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라고 하는 구세주의 이름으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신비한 기적이나 이적으로 한 번에 3000명, 5000명을 회개시킨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대로 제자들의 입에서 선포된 ‘말’ 즉 ‘로고스’를 통하여 이 땅의 교회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먼저 하나됨을 이뤄야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변질되고 약화된 것은 ‘예수님’아닌 다른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될 때 하늘의 능력과 권세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이름의 권세와 십자가의 능력만을 붙잡게 될 때 예수님의 영광을 이 땅의 모든 자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22절)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인 십자가를 통하여 제자들은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길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져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은 영광중의 영광입니다. 하나 되어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교회가 교회되며 성도가 성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여야 될 가장 큰 이유는 “세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요 17:21)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 일은 어떤 특별한 방법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 되어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될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과,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될 것입니다.”(요 17:23)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으로 온전히 하나 된 것을 보여줄 때 세상이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될 뿐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교회를 위한 종말론적인 축복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축복의 내용을 보면 하나는 성도들이 자신과 함께 천국에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영원하신 사랑으로 예수님이 성도들 안에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26절).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다”라고 신학자들이 말합니다. ‘이미’는 오늘 본문 26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키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은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환란이 심각하고 고난이 많아도 예수님이 계신 천국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친히 그곳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면 평안이 오고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어떤 고난이라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감당할 뿐 아니라 십자가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는 인생, 하나님의 사랑이 심령 속에 머무는 인생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셨던 영광, 즉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로 인하여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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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어: Doamne Iisuse Hristoase, Fiul lui Dumnezeu, miluieşte-mă pe mine păcătosul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루마니아어 로 된 예수 기도가 들어간 크리스토그램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 기도(그리스어: Η Προσευχή του Ιησού)는 동방 정교회 내에서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짧은 기도이다. 기도문의 내용은 무척 짧고 단순명료한데, 다음과 같다.
“ Κύριε Ἰησοῦ Χριστέ, Υἱὲ τοῦ Θεοῦ, ἐλέησόν με τὸν ἁμαρτωλόν. ”
“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
예수 기도는 동방 정교회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대중적인 기도이며, 종종 개인이 금욕 생활을 할 때 계속해서 암송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 기도는 헤시카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은수자들의 전통적인 기도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유래와 역사 [ 편집 ]
예수 기도의 역사적인 기원은 시나이의 헤시카즘(Sinaite Hesychasm)에서 유래되었으며, 사막 교부들의 관상적 전통을 통해 전승되다가 14세기 전후 비잔틴 시대[1]에 제도권 동방 교회로 유입된 것으로 본다. 동방 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 가운데에 헤시카즘이 포함됨에 따라 예수 기도 역시 헤시키아적 영성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수련 방안으로 권장된 것이다.[1] 동방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 기도의 성경적인 기원은 사도 파울로스의 초기 서신인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 “늘 기도하십시오”라는 권고에 따른 것이다.[2] 또한, 예수의 산상수훈 가운데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는 예수의 주문에 합치하기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2] 절대적 고요와 평화의 상태인 헤시키아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기도는 빈말을 되풀이 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단순한 형식을 통해 마음의 단순성을 꾀하고 예수의 이름이 가진 능력을 힘입어 정념을 배제하여 단순한 마음 상태인 헤시키아에 돌아가게 도와주는 기도가 바로 예수 기도인 것이다.[1]
예수 기도의 형태가 최초로 형식화 된 것은 14세기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칼리스토스 1세였다. 그가 헤시키스트를 위한 생활 규범에서 최초로 제시한 예수기도의 형태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로서, 여기에서는 “죄인”(τον αμαρτωλόν)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루가의 복음서 18장 13절의 기도문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와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죄인”이 추가되었다.
신학적 의미 [ 편집 ]
1. 예수 기도는 신-인간이라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동시에 선언하고 있다.
즉, 기도의 전반부인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에서, 인간의 이름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난 사람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신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2. 삼위일체 세 위격을 암시한다.
삼위를 구성하는 성부와 성자가 기도에서 외현적으로 드러남은 분명하다. 한편, 사도 파울로스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예수 기도의 전반부에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은 성령에 대한 암시를 포함하는 것이다.
3. 내향적이면서 외향적인 기도이다.
이 기도는 소리를 내어 반복되는 육체적 기도라는 점에서 외향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동시에 내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쪽으로 편향되기 쉬운 외향과 내향 그리고 지성과 마음의 통합을 지향하는 묘미를 지닌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예수의 기도
추천평
이 책은 예수의 기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존스의 논점은 그저 예수의 기도에서 기도의 원리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이 들어간다.
– 도널드 S. 휘트니 (서던뱁티스트신학교 신학원 부학장 겸 성경적 경건 교수)
오늘날 다른 어떤 저자도 그렇게 깊이 있고 읽기 쉬우며 흥미를 유발하고 풍성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그토록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 주의 인성, 연약성, 권위, 영광이 책 갈피갈피에서 튀어나온다. 이 책을 읽으라.
– 댄 맥도널드 (그레이스토론토교회 담임목사)
이 책은 예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법 또한 가르쳐준다. 그대의 영혼이 메말랐고 기도가 죽었다면, 그런 그대를 소생시키고 새 힘을 북돋아 줄 생수가 바로 여기 있다.
– 데이비드 머리 (청교도개혁신학교 구약학/실천신학 교수)
마크 존스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성령의 능력으로 성부께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었는지 깊이 있게 신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우리 또한 그렇게 기도할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 리 게티스 처치소사이어티 소장 (The Forgotten Cross 저자)
그리스도를 알려는 욕구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에서 진수성찬을 접하게 될 것이다. 마크 존스는 성자의 기도 생활을 관찰함으로써 성부께 이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경건을 위한 최상급의 음식을 우리에게 대접해 준다.
– 챠드 반 딕스혼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회사 교수)
성육신을 통해 하늘이 땅과 입맞춤했기에, 여기서는 기독론이 믿음의 일상생활을 형성하고, 채워 나가며,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우리의 동료 인간인 주님에게서 가장 기본적이고 아름다운 경건 활동을 배워 나간다.
– 데이비드 매티스 (미네아폴리스/세인트폴시티즈교회 목사)
기도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 진실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기도는 우리 주님이 참으로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 책은 예수에 관한 책이다.
– 메건 힐 (Praying Together, Contentment 저자, The Gospel Coalition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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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에니멀 커뮤니케이터 하이디가 한국에 방문해서 화제가 되었다. 이제 한국에서도 에니멀 커뮤니케이터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의 역할은 동물과 주인이 서로의 마음을 알도록 전해 주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식물과 소통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나는 초등학교 때 우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는 일기장과 이야기했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제제는 나무와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소통이 유년기의 환상이 아닌 사실이라 치더라도 이것보다 더 신비한 소통이 있다. 그것은 온 세상을 지으신 분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기도라고 부른다.
▲ <기도> / 오강남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 264쪽 / 8,500원.
예전엔 사람과 소통은 쉽지만 하나님과 소통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눈에 보이고 목소리도 들리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사람과 소통하는 것도 어렵다! 제대로 하려면 전혀 쉽지 않다.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다. 도날드 밀러는 교회가 복음을 관계보다 공식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를 ‘관계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리잔 여러 개 옮기듯 어려운 일이다.
사람과의 소통에서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는 내가 하는 말을 상대가 다 알아들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상대의 생각은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상대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 보면 상대와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듣지는 않으면서 말을 많이 한다고 소통이 잘 된다고 할 수 없다. 영화 <은하해방전선>을 보면 주인공은 끊임없이 말하지만 누구하고도 제대로 통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성경에서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로 경계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문은 위안을 준다. 일상을 살다 보면 무슨 기도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그저 이 한마디를 하면 되는데, 죄인이 거룩하신 분께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이라면 분명 이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듯이 나의 죄인 됨을, 그 분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다. 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헨리 나우웬이 예수의 기도를 높은 경지로 여긴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뜻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더 깊은 소통이라는 것은 연인이 눈동자를 맞추듯, 부모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신비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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