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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2,1-12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있습니다. 집의 문은 열려 있고, 집 안에도 사람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 안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들려주고 계셨습니다. 그 때 중풍병 환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군중들 때문에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집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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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강해]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01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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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누가복음 5:17-26)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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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예배강설 –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마9:1-8)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자주 불렀던 복음송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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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 – 중풍병자를 고치다 – N D 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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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 :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 참빛교회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에서 내려보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
Source: sfschurch.org
Date Published: 7/10/2022
View: 5046
[마태복음 9장 주일설교말씀]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마 9:1-8)
나의 질병과 원죄를 모두 치료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을 믿고 열심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제목: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Source: kihonsam153.tistory.com
Date Published: 10/19/2022
View: 6392
예수님의 말씀(3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미션매거진
오늘 본문은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Source: www.missionmagazine.com
Date Published: 8/13/2021
View: 6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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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중풍 병자 를 고치신 예수님
- Author: 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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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3. 2.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yz_F3dHNvV4
황찬호 목사의 강해설교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막 2:1-12)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종으로 오셨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셔야만 하는 그런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십니다. 내 말을 들어야 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셔야 하실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분은 우리가 절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분도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만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만났지만 중간에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나아갔고 결국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정말 아는 참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말 중요한 분, 능력을 가지신 분,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오라 가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구하고 최선을 다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이라고 절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밤이 이렇게 예수님을 찾고 만나는 복된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절박하게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 (1-5절)
● 막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오늘 본문은 “수 일 후에”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앞에 1장 말씀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 끊임없이 사역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사역하시다가 다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사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마을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었고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 집은 예수님의 집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집을 베드로의 집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시니 예수께서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 막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여기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집안 뿐 아니라 문 앞에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이 집에 계시니 이 집에 순식간에 유명한 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집이 좋은 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 아닙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좋은 집이 많아도 거기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몰려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냄새나고 초라한 집이라도 해도 예수님이 계시면 그 집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설을 탓하고 환경을 탓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것 때문에 안 되고 저것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여기에 예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화려한 시설에 웅장한 예배가 없어도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거기에 참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여기에 “도”라는 단어는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생명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보러 온 사람들을 향해 이처럼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자신이 바로 그 “로고스”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고, 지금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말씀”으로 번역된 것이 로고스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것이 곧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이 분명하게 선포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분명하게 만날 수 있는 교회가 되면, 그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성장과 부흥을 경험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막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그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왔다고 말씀합니다. 중풍병자라는 말은 뇌출혈과 같은 증상으로 몸의 일부분 혹은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서 예수께로 옮겨졌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엄청난 질병을 갖고 있었는데 왜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중풍병 때문에 예수님을 필요로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풍이 없었다면 이처럼 절박하게 예수님을 찾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예수께로 데려갈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는 예수께로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께로 데려오려고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믿음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중풍병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찾게 되었고, 친구들 때문에 예수께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고통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며, 고통 때문에 진실한 친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변장된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와도 예수를 찾지 않는다면 그 고통은 아무 소용없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고통이 와도 진정으로 나를 챙겨주고 섬겨주고 이끌어주는 진실한 친구가 없다면 불행한 고통이 될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예수를 찾아야 생명이 되고, 고통 때문에 진정한 친구를 만나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목장은 이처럼 문제와 고통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입니다. 우리가 목장모임을 하는 이유는 이 고통이 그냥 고통으로 끝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야 되고, 이 고통 때문에 진정한 친구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목장모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 막 2: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환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는 왔는데 더 이상 예수께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 앞까지는 데리고 왔는데 더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영혼을 반드시 예수께로 데려가야 한다는 그 절박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그 집의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일반 서민들의 지붕은 평평한 옥상을 갖고 있었고, 외부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옥상은 들보를 중심으로 작은 나무들을 걸치고, 짚으로 덮고 진흙을 발라 놓았습니다. 그래서 방수가 잘 안 되어서 우기에 폭우가 쏟아지면 빗물이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잠 27:15에 “다투는 여인은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시 지붕은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뜯어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멀쩡한 지붕을 뜯어내면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흙먼지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짜증을 내었을 것입니다. 뭐가 저렇게 극성스럽게 예수를 믿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만나면 누구라도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중병 환자를 데리고 왔는데도 길을 비켜주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 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절박한데 자기들은 편하게 앉아서 조금 불편하게 했다고 짜증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모든 걸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상황들을 만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친구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또한 사랑이 없었다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께로 데려가면 예수님이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친구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어떤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도 중단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기적을 경험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분명한 믿음과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 목장이 기적을 경험하고 간증이 쏟아지는 모임이 되려면 우리에게도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과 형제자매를 향한 진정한 사랑입니다.
정말 주님만이 지금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때, 정말 이 형제의 고통이 나의 고통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최선을 다해 이 고통 속으로 함께 뛰어드는 사랑이 있을 때, 그 목장에는 기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고 능력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목장이 이런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가족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목장, 정말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목장, 그래서 어떤 장벽이 가로막고 있어도 함께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며 결국 문제를 해결 받는 기적이 일어나는 목장이 주님을 경험하는 행복한 목장이 되는 것입니다.
● 막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많은 장벽들이 있었지만 예수님께 능력 있음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에, 형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믿음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뭐라고 선포하십니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에 “작은 자야”라고 말씀합니다. 작은 자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자녀(테크논)”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자신을 따르는 자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고전 4:17에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여기서는 영적인 아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성도들을 가리킬 때 “나의 자녀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냥 “작은 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자녀”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중풍병 환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단지 병을 고침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을 만나면 질병이 고침 받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영혼이 구원받고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질병만 고치고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참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목적은 예수님 자신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대부분 인간은 고통 때문에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이 고통이 없었다면 예수를 찾지 않았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사람들도 질병 때문에 예수께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질병을 고침 받는 것이 참된 문제가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참된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질병과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이 고침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질병이 고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먼저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목장에도 이런 질병과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질병 때문에 예수를 찾았지만 결국에는 구원 때문에 예수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질병 때문에 예수를 찾았지만, 예수를 만나서 모든 죄가 용서받고 영혼이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만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는 참된 구원자가 되심을 그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질병이 고침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질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참된 구원을 얻어야 함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목장이 절박하게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목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에는 문제 때문에 예수를 찾았지만, 나중에는 죄 때문에 예수를 찾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를 만나고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결론
오늘 이 네 친구들은 이 중풍병자를 예수께로 데려가야 할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능력을 분명히 믿었고, 친구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께로 나아갔고 결국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환자의 질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죄 문제까지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예수를 찾았는데, 고통 때문에 참된 생명을 얻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절박하게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참된 예수를 보여주기 위해 교회는 항상 참된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분명하게 선포될 때 분명한 예수가 그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은 절박한 문제가 없었다면 절박하게 예수를 찾지 않았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고통 때문에 예수를 찾았기 때문에 이 고통은 도리어 축복이 되었습니다. 고통 때문에 예수를 만나 생명을 얻게 되었고, 고통 때문에 진정한 친구를 만나 참된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목장이 이처럼 예수를 보여주는 목장이 되고, 고통 때문에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곳, 고통 때문에 진정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그들이 예수를 만나 고통이 해결되고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기는 목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목장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목장에서 영혼이 구원받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인 분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반드시 만나야 할 참된 생명이시며 참된 구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목장이 그냥 인간적인 교제와 만남으로 끝나는 모임이 아니라, 절박하게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참된 기적을 경험하고, 참된 생명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는 복된 만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누가복음 5:17-26)
누가복음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누가복음 5:17-26) 청지기 ・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공유하기 신고하기 [ 성경묵상 ] 병행구절 ; 마 9:1-8 ; 막 2:1-12 5:17-26 ;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그것이 기적이라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나타내는 데 그 초점이 있다. 곧,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죄를 사할 수 있는 구원주이심을 보여 주셨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5:17-26은 예수께서 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는 공관복음서 중에서 독특하게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그 사건의 현장에 갈릴리 및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모여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음을 미리 밝히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초기임에도 벌써 예수에 대한 소문이 팔레스틴 온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을 시사하며, 한편으로는 예수의 인기와 소문이 커짐에 따라 기존의 종교 지도자 세력이 예수님의 사역에 위협을 느끼고 경계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해 준다. 이 문단에서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사람의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셨다는 것 이상의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예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중풍병자에게 사죄(Forgiveness of Sins)를 선포하셨다는 점이다. 이에 죄를 사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여기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예수의 행위가 곧바로 신성 모독적 행위라고 여겨졌으나, 오히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성(神性)을 명백히 나타내 보이셨다. 즉 예수께서는 죄를 사하는 것이 더 어렵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보다 중풍병자를 고치는 것이 더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앞에서 중풍병자에게 치유를 선언하여 낫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까지도 가지신 분이신 것을 입증해 보이신 것이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 질문 1 ] 사람들이 지붕 기와를 뜯고 중풍병자를 침상 채 달아 내린 이유가 무엇인가?(19-20절) [ 질문 2 ]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먼저 선언하신 이유가 무엇인가?(24절) [ 복있는사람, 2018년 1,2월호 ]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어느 날 예수께서 가르치시는데, 갈릴리와 유대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교사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주의 능력으로 병을 고쳐주고 계셨다.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그런데 사람들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침대에 눕힌 채로 데려와서는, 안으로 들여서, 예수 앞에 놓으려고 하였다.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그러나 무리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여놓을 길이 없어서,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그 환자를 침대에 누인 채, 예수 앞 한가운데로 달아 내렸다.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다니,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편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그리고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침대를 거두어 들고 네 집으로 가거라.”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 누가복음에서 ‘인자’라는 표현이 처음 나오는 대목이다. 여기서 ‘인자’란 아람어로 ‘일반적인 어떤 사람’을 칭하거나, ‘말하는 사람 자신’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관용구였다. 누가가 비록 구약 다니엘서의 ‘인자'(단 7:13-14, 메시아를 가리킴)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청중들에게는 이 표현이 그저 ‘예수님 자신 혹은 다른 누군가’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그러자 곧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침대를 거두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집으로 갔다.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는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칼리스투스 카타콤에서 보이는 침상을 메고 가는 중풍병자 침상을 메고 가는 중풍병자의 모습이 처음으로 형상화된 곳이 칼리스투스 카타콤의 그리스 기도처 궁륭으로 보인다. 그리스 기도처 외에 집관실 A3에도 침상을 가지고 가는 중풍병자의 모습이 남아 있다. 예수의 수세 장면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중풍병자는 어른의 키로 시각화되어 있는데, 침상을 어깨에 지고 양손으로 잡은 채로 허리를 약간 숙이며 왼쪽으로 나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두 개의 프레스코화는 모두 3세기 초반의 것이다. 3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두라-에우로포스의 가정 교회의 세례당에도 침상을 들고 가는 중풍병자의 모습이 프 terms.naver.com 중풍병자를 고치심 ( 5:17-26 ) 1. 그리스도의 설교와 기적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그 날은 안식일이 아니라 평일이었다. 평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듣는 일을 잘 하기만 한다면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가 가르친 곳은 어느 개인 집이었다. 우리가 보통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곳이라 해서 선한 가르침을 주고 받기에 부적당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주의 능력은 그들을 치유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고치는 것, 즉 그들의 영혼을 치유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본성을 주는 것은 권능이었다. 그것은 육체의 병든 자가 치료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와서 치유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병 고칠 일이 생길 때마다 그리스도가 그의 능력을 얻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병고치는 것은 즉각적이었다. 거기에는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의 발 아래 앉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말뜻을 보면(21절), 그들은 병고침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트집을 잡았던 것같다. 그들은 비난하거나 고소할 근거를 찾아내기 위해 방관자, 혹평가, 그리고 염탐군으로서 옆에 앉아 있었다. 집회할 때, 말씀 아래 앉지 않고 말씀 곁에 앉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있어서 말씀은 그들에게 보내진 메시지가 아니라 그들에게 들려지는 이야기로서 전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설교하지 않고 그들 앞에서 설교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들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왔다. 즉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왔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바리새인들이 곁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고, 그들이 그를 멸시하며 그를 올무에 걸기 위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셨지만, 설교와 병고치는 일을 계속하셨다. 2.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18-26) (1) 이 치유의 기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확증시켜 주는 교훈. 1) 죄는 만병의 근원이며, 죄사함은 병의 회복이 편안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유일한 토대이다. 사람들은 병자를 그리스도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0절). 이것은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고 애써 찾게 될 축복이다. 우리의 죄악의 끈은 곧 고통의 굴레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땅 위에서 죄를 사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24절). 그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즉시 나았다. 그리스도는 죄 사하는 일을 하실 때 왕 중의 왕이라는 특권을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그가 그것에 대한 좋은 증거를 보여주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자, 내가 이 일을 해 보이겠다. 여기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 든 사람이 있다. 만약 내가 말 한마디로 그의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나에게 죄 사하는 특권이 없다고 말하라, 그러나 만약 내가 이 일을 해 낸다면, 너희는 내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그것은 공정한 심판대 위에 올려졌고, 그리스도의 한 마디 말씀으로 결정되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 만성적인 병이 곧 나았다.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들은 모두 이 일에 속임수나 거짓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22절). 둘째, 그들이 생각하게에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다(21절).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느냐’하고 그들이 묻자, 그리스도는 “내가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대답하셨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 이시라는 것 외에 무슨 결론이 나오겠는가? (2) 이 기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권면하는 의무: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께 구할 때, 간절하고 절박하게 구해야 한다. 이 병자의 친구였던 자들은 그리스도 앞에 그를 들여 놓을 방법을 찾았다(18절). 그리고 그 일이 허사로 돌아갔는데도 그들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너무 붐벼서 문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불쌍한 병자를 지붕을 통해 예수 앞에 달아 내렸다(19절). 이 일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20절). 백부장과 가나안 여인은, 자기들이 돌보는 병자들을 그리스도의 면전에 데려가는 일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리스도가 멀리서 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였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환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믿음이 약하다고 비난하지도 책망하지도 않으셨다. 또 그들에게 “너희들은 환자를 문 밖에 둔다고 해서 내가 그를 고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만큼 믿음이 없느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그는 그들의 행동에 만족했으며, 이 일에서도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주님이 기꺼이 우리의 최선을 보신다는 사실이다. 둘째, 우리는 병이 들면, 병이 낫는 것보다 죄를 용서받는 데에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한다. 중풍들렸던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25절). 넷째,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은 그것은 본 자들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26절). 그들은 그들의 마을에 그러한 시혜자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가득 찼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치유받은 중풍병자 /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 측랑 모자이크, 525년경, 라벤나 인쇄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마9:1-8)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자주 불렀던 복음송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왜 이런 복음송이 유행했을까? 아마도 “당신은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개신교에서 말하는 타락으로 인해 죄로 범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그러면 과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개신교 측면에서 볼 때 좋은 노래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성탄절에 그리고 신입생 환영회 등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은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송에서 말하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더 큰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랑받기 위해 성육신으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막10: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즉 저주를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송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당신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저주받고 있지요”입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런 삶 속에서 부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자들은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당장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지상명령을 담당해야 하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백성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기 위해 오늘도 강설을 듣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고백하며 주는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믿습니다. 지난주 강설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않는 세계 즉 귀신을 알았습니다. 귀신의 정체를 통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세계도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면 귀신도 순종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타락한 마귀라도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 같지만, 마지막 날에는 심판당하는 자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준 것이 지난주 강설이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자신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발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알기에 자신들의 처지를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이 말한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의 몸에서 나왔지만, 몰살당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마도 돼지는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이 돼지의 몸 안에 들어갔지만, 돼지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로 돌진해 자살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본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시내에 들어가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말했습니다. 이런 일을 알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인 세계보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중요했습니다. 즉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세상이라도 교회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본분입니다.
오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신 후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근거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전진 기지이자 본 동네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본 동네”라고 불릴 만한 이유를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추측하면 예수님의 가족이 이곳으로 옮겨 정착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야 사역을 본격적으로 한 곳으로 마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지만,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절을 보시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적을 알기에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고쳐줄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간략하게 요약하여 기록했지만,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과(2:2-3) 누가복음은(5:17-19) 네 명의 사람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간략하게 기록했을까? 아마도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이 사건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네 명의 친구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초점을 두기 위한 것입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내려보내며 자신들의 친구를 치유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에서 내려오는 중풍병자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모든 복음서마다 중풍병자의 믿음만이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었기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작은 자라는 의미는 아이와 아들이라는 의미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어른에게도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병행본문인 눅5:20절에서는 “이 사람아”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어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전까지는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죄 사람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지붕을 뚫고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셨는가에 우리는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병은 죄로 인해 생긴 것이기에 죄 사함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죄로 인해 질병이 들어온 것입니다. 원죄가 없다면 사람은 질병에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질병의 원인은 죄의 결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로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람을 받았다고 하심으로 당신님께서는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말씀으로만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보고 있던 서기관들이 속으로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3절을 보시면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서 죄 사람을 받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속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신성모독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눅2:7절을 보시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입니다. 서기관들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이 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특권을 예수님이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죄 사람을 받았다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논쟁을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계기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왜 하셔야 하는가를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안심해야 합니다. 중풍병자야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늘 한결같은 믿음으로 주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신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관을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죄 사함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에 대한 선한 마음이 아니라 악한 마음으로 잘못된 것임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5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입니다. 우리라면 어느것이 더 쉽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 사람과 병을 고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쉽겠냐고 하셨습니다. 속으로 말하고 있던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직접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생각할 때 어느 것이 쉬운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병을 고치기가 쉽다 그와 반대로 죄 사함 받는 것이 쉽다로 나뉩니다. 사람으로서는 병을 고치는 것이 쉬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 사하여 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처지에서 볼 때 둘 다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마도 죄 사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처지에서 볼 때 신성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당신님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전까지는 병자를 고치셨지만, 오늘 이 사건을 통해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협을 무릅쓰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공개적으로 서기관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다는 권세는 중풍병자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일어나 집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죄 사함과 눈에 보이는 세계 즉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인자로 오신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완전히 반박하심으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중풍병자는 7절을 보시면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집으로 갔습니다.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이라고 마태는 기록했습니다. 죄의 용서도 받고 치료도 받은 중풍병자는 집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가는 길을 상상 이상의 평화롭고 즐거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종말이 오기 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신도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돼지에게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때를 알기에 더 살기 위해 예수님께 애원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지금은 은혜받을 때요 구원받아야 할 때입니다. 중풍병자가 믿음으로 죄 사함과 치유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죄로부터 돌이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예수님께 순종했던 것처럼 우리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구원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모든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8절을 보시면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입니다. 무리들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과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예수님의 권세를 보고 놀랐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을 본 무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재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자신의 삶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삶을 위해 재물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창조주 위에 건물주라고 합니다. 그만큼 재물이 나의 행복을 지탱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중풍병자를 통해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일어난 일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죄 사함을 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자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것이 더 좋았던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경계하며 핍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 받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께서 감당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영생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많이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병을 많이 고침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육체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즉 당신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우리는 기적보다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사모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만 보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보았습니다. 친구들도 믿음이 있기에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믿고 지붕을 뚫었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볼 수 있도록 침상을 내려 보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간절한 것입니다. 교회는 간절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두 가지 기적을 보여줍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한 사람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셨듯이 첫 번째 기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두 번째 주장은 예수를 바리새인과 대립시켰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구성했습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구하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 모여들었다. 예수 그리스도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머물면서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아마도 어떤 일을 경험하려고 하였다. 기적적 그들이 들은 것은 치유의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무리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돗자리에 앉혀서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을 때, 그를 고쳐달라고 예수님께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들은 군중을 헤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풍병자의 단호한 친구들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했습니다. NS성경마태복음 9:1-8, 마가복음 2:1-12, 누가복음 5:17-26에서 이 유명한 이야기를 설명합니다.
지붕에 구멍
이야기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갈 방법을 찾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5:17-19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가르치실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거기 앉았더라. 그들은 모든 곳에서 왔습니다. 갈릴리 마을 그리고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주님의 능력은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돗자리에 메고 와서 그를 집으로 데려다가 예수 앞에 눕히려고 하였다. 무리 때문에 이 일을 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지붕에 올라가 돗자리를 깔고 기와를 뚫고 무리 가운데 예수 바로 앞까지 예수를 내려 놓으니라.’
천정의 구멍에서 매트를 타고 아래 바닥으로 내려오는 한 남자를 본 군중 속의 사람들의 충격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남자의 친구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남자 자신도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실 치유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만약 그 남자가 아래로 내려오다가 매트에서 떨어졌다면, 그는 지금보다 더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고, 그는 다시 매트에 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낫지 않았다면, 그는 거기 누워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는 가운데 굴욕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께서 자신을 고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용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다음 구절은 말한다. 그 남자와 그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큰 믿음 , 예수님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치유 과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야기는 누가복음 5:20-24에서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친구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하느냐?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중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그는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자리를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예수께서용서하다병을 고치기 전의 죄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죄가 병 고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 그리고 군중 속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에게 다음과 같은 권한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다 .
본문은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심판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음을 지적합니다. 생각 . 마가복음 2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을 속히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생각을 하느냐’ 종교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표현합니다.
치유를 축하하다
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그 사람은 즉시 치유되었고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십시오. 누가복음 5장 25-26절에 보면, ‘곧 그들 앞에 서서 자기가 누웠던 것을 가지사 하나님을 찬미하며 집으로 가니라. 모두가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경외감에 가득 차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9:7-8은 치유와 축하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 집으로 갔다. 군중은 이것을 보고 경외감에 가득 찼다. 사람에게 그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마가복음 2장 12절은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습니다. 이는 모두를 놀라게 하여 ‘우리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없다’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태복음 9장 주일설교말씀]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마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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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9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옆에 있던 서기관들은 속으로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신성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인간이 죄를 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육으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육적인 질병도 고쳐주시고 영적인 죄도 사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며 인간이십니다. 나의 질병과 원죄를 모두 치료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을 믿고 열심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제목: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마 9:1-8
요 절: “군중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 9:8)
주 제: 사람의 최고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자
마 9: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 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 9: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마 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야 합니다. 바른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정확하게 지은 후 구름이 회막(=성막)에 덮이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여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출 40:34-35).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헤롯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이지 않고 파괴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교회냐 그렇지 아니한가 가 중요합니다. 많은 부속건물이나 지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천막이든 초라한 곳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찬송가 438장(통495장) 3절에 있는 대로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천군 천사들의 찬양의 주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대언자의 소명을 받을 때 성전에서 보고 들은 천사들의 찬송이 “서로 소리 질러 말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님,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3)였습니다. 에스겔도 그발(Chebar) 강가에서 본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주님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겔 1:28) 예수님의 나심을 전하는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Glory to God in the highest)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 말입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여 수석 입학하거나 상을 받으면 그를 키운 부모님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부모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자식은 효자, 효녀입니다. 반대로 부모에게 욕을 끼치는 자녀는 불효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은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께서 욕을 먹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우리에게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100%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영생수를 공급하셨는데 연회장은 이를 가장 좋은 포도주로 알았습니다.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요 2:11). 이처럼 예수님의 모든 기적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치신 목적도,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목적도,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목적도. 말씀을 전하신 목적도, 말씀을 가르치신 목적도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셨습니다.
나면서 소경이 된 자를 두고 제자들이 묻기를 ‘누구의 죄 때문에 이렇게 나면서부터 실명되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불교의 윤회설처럼 전생에 죄를 지어 현생에 벌을 받고 있다는 사상과 비슷한 내용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주님의 대답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3) 참으로 깊이 있는 명답입니다.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 누이동생들이 급하게 주님의 심방을 요청했을 때 주님께서는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요 11:4) 하시고 죽은 지 나흘째 되던 날 나사로를 살려주심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입니다.
두 번째 주기도문(Second Lord’s Prayer)으로 알려진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기도”라고 별명을 붙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강화를 하신 후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4 I have glorified thee on the earth: I have finished the work which thou gavest me to do. 5 And now, O Father, glorify thou me with thine own self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thee before the world was.” (요 17:1-5) 여기서 4-5절 말씀에 보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세와 태도 및 방법이 다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다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일을 다 이루는데 완벽하게 훌륭하게 이루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좋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무익한 종은 하여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We are unprofitable servants: we have done that which was our duty to do.”(눅 17: 10) 하며 그 칭찬과 영광을 주인에게 돌려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국 예배를 보여주는 계시록 4장에 보니까, 주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봉사한 24 장로들이 천국에서도 주님의 보좌 둘레에서 섬기고 있는데 이들은 흰 옷을 입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상급인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있습니다.
네 천사들이 밤낮 쉬지 앉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하고 생물(천사)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영영토록 사시는 분에게 돌릴 때, 너무 감격한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분에게 경배(예배)하고 자기들이 상급으로 받은 금 면류관을 벗어 보좌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계 4: 4-11)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바울 사도은 고린도 교회에서 음식 문제로 질문을 해 올 때에 정신이 중요함을 상기시키면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Whether therefore ye eat, or drink, or whatsoever ye do, do all to the glory of God, 고전 10:31)고 권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가버나움(그분 자신의 도시 his own city)에 도착하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마비병 palsy)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Thy sins be forgiven thee. 마 9:2) 이 자리에 있던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This man blasphemeth 신성모독.) 서기관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선지자나 랍비 정도로 생각하는데, 죄를 사죄한다고 하니 이는 신성모독이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서기관을 주목하시면서 “너희가 어찌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 9:6) 만약 이 이야기가 여기서만 끝난다면 서기관의 생각이 옳다고 사람들이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당시의 불치병으로 알려진 중풍병에서 나음을 얻고 일어나 침상을 메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자신이 놀랐을 것이고, 또한 침상을 메고 온 친구들이 놀랐을 것이고 물론 그 서기관도 놀라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였던 군중들이 이 일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marvelled) 여기서 두려워했다는 표현은 실은 너무나 놀라운 나머지 주님의 신성에 대한 경외감을 나타냈다는 말입니다. 그의 죄를 먼저 사해주시고 그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신 일은 모두들에게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이런 권세 즉 죄를 사해 주시고 불치병을 고쳐주신 권세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태도는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받을 때도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치유함을 받았는데 오직 이방인 사마리아인만이 주님께 다시 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영광의 예배입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주님으로부터 열병을 치유함을 받고 봉사하며 섬겼다고 했습니다. 영광의 예배입니다. 가버나움에서 한 여인이 주님의 뒤로 와서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린 것이 바로 영광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영광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매일 매주간 매월 매년을 반성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의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한 것이 많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보기 싫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말씀보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이런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서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되었습니다. 가인도 하나님의 권면을 무시하고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If thou doest well, shalt thou not be accep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unto thee shall be his desire, and thou shalt rule over him.)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아니했습니다. 죄의 소원대로 행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물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일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찬송을 드리기를 즐겨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자기 영광에 도취된 자였습니다. 초대 왕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왕위를 계승하려고 방해되는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에 빠져 정신병자로 살아갔습니다. 결국 블레셋에게 쫓겨 길보아 산에서 비참하게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언행을 절대 삼가며 살아가십시다. 이 중풍병자는 죄 용서함 받기 전에 죄의 고백이 선행되었습니다. 회개하는 자를 주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이 병자는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인정했습니다. 또한 이 병자의 친구들도 늘 중보기도에 힘썼습니다. 이들은 병자의 침상을 함께 들고 오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만 오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서기관 외에는 주님께서 사죄 선언을 하실 때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그 중풍병자를 치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늘 구걸하던 40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걷게 되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먼저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영광의 예배를 먼저 드린 것처럼 우리도 항상 중요한 때,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첫 시간에 주님께 영광의 예배를 드립시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 관리도 그러합니다. 유대인의 성인 때에 중요한 선물이 손목시계입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잘 쓰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1) 입에서 나간 말인데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2) 화살입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3) 흘러간 세월인데 흘러간 세월은 흐르는 물 같아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이 70 평생을 산다면 가정한다면 잠자는데 20년, 일하는데 20년, 먹는데 6년, 노하는데 7년, 치장하는데 5년, 전화 거는데 1년, 누워서 쉬는데 2년 반, 사람을 기다리는데 5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인터넷 하는 시간, 스포츠를 시청하는 시간, 잡담하는 시간, 남을 비방하는데 쓰는 시간, 죄짓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까? 그러나 이제부터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시간으로 사용합시다. 성경 읽고 쓰는 시간, 암송하고 묵상하는 시간, 말씀을 실천하느라 바쁜 삶,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입술, 생각, 마음가짐 등 주님을 기쁘게 하고 감동시키는데 온전히 총력을 기울입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은혜를 입은 후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올해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면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라면 절대 하지 맙시다. 이것이 승리하는 일입니다. “인생의 최고 목적이 무엇이뇨?” “인생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평생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일입니다” 소요리문답 1문과 답을 늘 기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열왕기상 17장 주일설교말씀]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기적 사건(왕상 17:8-16) [로마서 8장 주일설교말씀] 구원의 서정(롬 8: 23-30)반응형
섹션 목회, 신학 > 설교 등록일 2006-03-11 작성자 관리자 (admin) 예수님의 말씀(3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본문 : 누가복음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오늘 본문은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 앞에 나가서 칭찬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공관복음 기자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마가가 가버나움 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몇 명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4명이라고 말해줍니다. 그것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붕이 분명히 ‘기와를 벗기고’내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집들은 옥상이 평평하게 만들고 그 주변에 기와를 덮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팔레스타인의 집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당시 지붕을 쉽게 뜯어낼 수 있는 집이라고 말한 것 또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의외로 쉽게 넘어갑니다. 누가 같지가 않습니다. 누가는 의사이면서 역사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과 검증된 사건이 아니면 잘 다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루는 사건은 아주 정밀하게 기록합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자세히 기록한 사람입니다(눅 1:3). 그런데 본문은 마가보다도 더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복음서 본문을 다룰 때 비교적 상세히 소개된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다른 복음서로 정하지 않고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사건을 보는 관점입니다.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 핵심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협력자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협력입니다. 예수님 앞에 병자들이 나온 다른 사건들은 자신이 걸어나왔습니다. 아무리 중한 병자라도 심지어는 소경이나 문둥병자 조차도 직접 예수님 앞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병자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인 이 환자는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 병자를 들고 예수님께 가야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중풍병자는 이로 보아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랍비도, 제사장도, 바리세파 사람도, 서기관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친구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친구가 있습니까? 평소에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런 친구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이 사람은 친구들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 11:11)고 말했습니다.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바로 이런 친구들이었습니다.
실천하는 믿음
친구들이 저를(중풍병환자) 침상에 누인 체 데리고 왔을 때는 갈릴리 여러 마을과 더 아랫마을 유대와 예루살렘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지난번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로 전국에 퍼졌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온 사람들은 신분도 높은 분들입니다. 감히 저희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평생에 한두 번 함께 지내면 영광이랄까 그런 신분 높은 양반들이 온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입니다. 이분들은 저희 같은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율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로 율법준수를 엄격하게 지키는 양반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예수님 주위에 가득 했습니다.
예수님 주의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있어 제가 정상인 몸이라도 혼자의 몸으로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한 친구라면 그냥 돌아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정말 저에게는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남의 집을 뚫는다는 것은 요즘말로하면 기물 파손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남의 물건을 함부로 파손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모르지 않았을 제 친구들은 저를 위해서 그런 부담을 감수해 가면서 기왓장을 뜯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저를 예수님께 내려놓은 것입니다. 제가 지붕에서 내려질 때 온통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로 쏠렸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그가 누구라도 꾸중을 듣지 않고 병고침은 물론이요 칭찬 받은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무리한 방법을 시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나무라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들은 행동 외에 아무 말도 예수님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는 물론이며 이 친구를 함께 달아 내린 친구들입니다. 이들이 “저희”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행동에 감격해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갈릴리 땅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자신만을 아는, 입으로만 토론하는 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저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하고는 분명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 첫 번째 말씀은 병이 아니라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말과는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마지막 만찬을 할 때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죄 사함”입니다(마 1:21). 이 말씀을 예수님께 직접들은 사람은 본문의 중풍병자와 누가복음 7:48의 시몬의 집에 들어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여자입니다. 두 사람만이 예수님께 직접 죄가 사해졌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오늘 처음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발하는 종교지도자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병고침을 받고자 나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큰 축복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러한 의논이 일어난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사용한 “참람”(blasfhmiva”:블라스페미아)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모독을 말하는 것입니다(계 13:6).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실 때는 세 가지 경우였습니다. ① 죄를 사하실 때(막 2:7) ② 메시야 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③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심리를 알고 즉시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질문은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가언적 양도논법’으로 반대자들을 꼼짝없이 만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확실한 반박을 못하시면 매우 곤란해지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적당한 불쾌감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신성모독’ 죄는 당장 끌어내어 돌로 쳐죽여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일을 행할만한 고위층 지도자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23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입니다. 표면상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병이 나아야 되고 즉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당장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생각할 때는 더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를 사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유일하게 예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눈에 보이는 병도 고쳤습니다.
인자선언
이 때 예수님이 처음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24절 “인자가 땅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 사용하신 자기표현입니다. ‘인자’(ajnqrwvpou:안드로포스)는 복음서에 90여 회 나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에만 26회 나옵니다. 이 단어는 스데반이 한번 사용한 것 위에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제일 처음으로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도데모의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오실 메시야를 소개할 때 ‘인자’가 장차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7:13). 사람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 중에 자칭 예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가짜이지요. 이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우깁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원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고 하셨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던 사람이 침상을 들쳐 매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영생의 약속과 육체의 질병도 깨끗하게 해결 받았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 해 줍니다.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역사 앞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표현한 말은 “기이한 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기이하다”는 ‘예상을 넘는다’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일을 보았다”입니다. 사람의 이해력으로는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교회를 떠나기 싫어 늘 교회에서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평일에 예배드리는 교회는 부흥회 하는 교회입니다. 그 때 부흥 강사목사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교회 2층은 관중석이고 1층은 은 자리요 교회 앞자리는 금 자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앞자리부터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거나 정체된 교회들은 앞자리가 잘 채워지지 않습니다. 음악회나 운동장에 가도 앞자리가 더 좋은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으로 다음주부터는 조금 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사건의 관중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관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를 들고 나갔던 친구들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중풍병자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병은 중풍병자만 고침을 받았지만 구원의 역사는 모두에게 일어났습니다. 병은 걸릴 수도 나을 수도 있지만 구원은 다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해 주셔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 역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예수님은 받아주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의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의 친구처럼 내가 친구를 고쳐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데리고 주님께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아파서 병만 고치러 나갔지만 주님은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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