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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도 부끄러운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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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중국뿐 아니라 한국도 역사왜곡 한다 – 한겨레
김병훈씨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출간.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매한가지로 한국 역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은 ‘역사 …
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7/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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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사 역사학의 특성과 역사 왜곡의 방식
이들은 식민주의 사학에 항한다고 자임하며, 한국사가 반도가 아닌 륙에서 전개된 역사임을 증명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는 반도의 역사가 륙의 역사보다 열등하다는 …
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4/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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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의 역사왜곡 – 인터파크 도서
한국사 교과서의 역사왜곡. 김병훈 저 반디출판사 2015.12.22. 판매지수 11. 별점9.7. 할인가. 11,700 원 정가13,000원 10%↓할인.
Source: mbook.interpark.com
Date Published: 9/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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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바로알기]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8) – 증산도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제 뿌리 역사를 부정하는 이 땅의 매국사학賣國史學 일제 강점기 시대의 아픔, 賣國奴와 賣國史學일제 강점기를 …
Source: m.jsd.or.kr
Date Published: 2/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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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게임에 나타난 한국 역사의 왜곡사례와 대응방안 연구
이는 그동안 왜곡된 역사 교과서로 한국의 역사를 교. 육 받은 남코사의 개발자들이 ‘이씨조선'(李朝)이란 잘못. 된 명칭을 올바른 역사로 인식하고 있어 일본의 역사교.
Source: koreascience.or.kr
Date Published: 10/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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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반크 “일본이 왜곡한 한국 역사, 파친코로 바로잡아”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세계 어느 나라도 일본만큼 왜곡을 일삼는 국가는 없습니다. 오늘 인터넷 상에서 한국 알리기에 진심인,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 …
Source: dgmbc.com
Date Published: 8/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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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사 왜곡과 역사치유 – 한일관계사학회 : 논문 – DBpia
이후 한국사에 대한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여 한국에 대한 침략의 정당을 확보하려고 식민사관을 조성하고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 하였다. 이러한 일제 침략의 정당성을 …
Source: www.dbpia.co.kr
Date Published: 1/30/2022
View: 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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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한국 역사 왜곡
- Author: 거꾸로한진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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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7cR3Cj1BomM
“일본·중국뿐 아니라 한국도 역사왜곡 한다”
김병훈씨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출간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매한가지로 한국 역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은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반디)이 출간됐다.
일간스포츠와 한국일보 기자로 일한 저자 김병훈 씨는 현재 고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국정 국사교과서와 신문 방송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역사인식이 상식에 벗어난 왜곡된 역사를 담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체로 한국의 역사가 주로 일본 깎아내리기, 위대한 단일민족의 역사 만들기, 비극적인 현대사 모른 체 하기라는 왜곡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
저자는 하인즈 워드의 방한을 맞아 도마에 오른 ‘단일민족론’이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며 기존의 인식에 반론을 펼친다. 중국의 망명인이 왕의 자리에 올랐던 위만조선에서 보듯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건너와 한민족을 구성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국제적인 교역이 두드려졌던 고려 시대에 중국 송나라, 거란, 위구르, 아랍인 등이 한민족의 일원이 됐고, 조선시대에는 여진족과 함께 일본인, 네덜란드인(박연)까지 한국인이 됐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또한 교과서에는 없지만 신문ㆍ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일본 천황이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인”이라고 반박한다. 백제 혈통임이 유력하다는 일본 천황들이 모두 6세기 이전 인물인데 반해, 노대통령의 선조는 877년 한국에 건너온 중국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국사교과서가 1945년 해방 후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양민 학살과 같은 현대사의 비극을 모른 체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제 36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은 자세히 열거하면서 그보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람이 학살된 역사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외에도 신라 화랑, 고려시대 민중과 삼별초의 항쟁도 ‘역사 꾸미기’라고 비판하며, 객관적인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344쪽. 1만2천원.
김용래 기자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한국 유사 역사학의 특성과 역사 왜곡의 방식
역사학계는 1970~1980년 유사 역사학자들이 주도한 몇 차례의 역사 파동을 거치며 그들이 논리와 화로는 설득이 불가능한 집단임을 깨달았다. 이에 그들 의 도발을 무시하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역사학계가 방치하는 동안 유사 역사학자들은 끊임없이 중화 작업에 집중하였고, 결국 이들의 주장은 일반에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말았다. 한국의 유사 역사학이 확산되는 데는 안호 상, 문정창, 박창암, 임승국과 같은 극우 파시스트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는 유사 역사학의 사상적 뿌리를 보여 준다. 유사 역사학은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존재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Ronald H. Fritze의 분석을 참고하면, 미국의 유사 역사학은 ①증거의 선별적 채택, ②유통기한 지난 연구 이용, ③가능성과 개연성의 혼선, ④실재성에 한 집착, ⑤예외적 증거에 한 선호와 같은 특성을 보인다. 이는 한국의 유사 역사학이 보이는 양태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최근 유사 역사학자 이덕일을 중심 으로 제시되고 있는 부분의 주장은 상기한 특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왜곡물 이다. 이는 학술 행위라기보다는 중 선동의 영역에 속한다. 유사 역사학은 확증 편향적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영토 문제에 이상 집착한다. 이들은 식민주의 사학에 항한다고 자임하며, 한국사가 반도가 아닌 륙에서 전개된 역사임을 증명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는 반도의 역사가 륙의 역사보다 열등하다는 식민주의 사학의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 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정작 일제 강점기 식민주의 사학은 침략 상이 확장됨에 따라 만주와 한반도 의 역사를 묶은 滿鮮史나 몽골까지 포함한 滿蒙史 같은 관점을 창출한 바 있다. 또한 이란 동부 평원에서 발원한 ‘상상의’ 민족 집단을 상정한 투란주의 (Turanism), 이에 입각한 아시아주의를 주창하는 한편 일본․조선․만주․몽골이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주장도 만들어냈다. 한국 유사 역사학의 뿌리는 일본 제국 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 같은 아시아주의에 닿아 있다. 유사 역사학은 파시즘의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는 역사상이며, 반지성주의의 산물이다. 우리 사회에 역사적 반동이 도래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Academia of history realized that pseudo historians were a group that could not be persuaded by logic and dialogue, going through a few historical crises in the 1970s-1980s. Thus, it coped with that in the way of ignoring them. In the meantime, the pseudo-historians constantly focused on popularization, and finally, their claims became widespread as a result. In the expansion of Korean pseudo history, fascists as extreme rightists, including Ho-sang Ahn, Jeong-chang Moon, Chang-am Park and Seung-guk Lim played a major role. This shows the ideological root of the pseudo-history. The pseudo history exists in other countries as well as in South Korea. To sum up what was analyzed by American historian, Ronald H. Fritze, the pseudo-history has characteristics as follows: ① selective adoption of evidence; ② the use of research past expiration date; ③ the mixture of possibility and plausibility; ④ obsession about substantiality; and ⑤ preference for exceptional evidence. This is completely consistent with the aspects of the Korean pseudo history. Most claims recently suggested by pseudo-historian, Lee, Deok-il are products of distortion, which contain all above-mentioned characteristics of the pseudo-history. They belong to the area of demagoguery, and it is difficult to acknowledge them as a sincere academic category. The pseudo-history has a thinking structure with a confirmation bias and is obsessed with territorial problems. They pose themselves against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and make an effort to prove that the Korean history is a history developed from the continent, instead of the peninsula. However, this has a fundamental problem in that it uncritically accepts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that the peninsular history is inferior to continental history.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had produced the Manchu-Korean history that combined the history of Manchuria with the history of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Manchu-Mongolian history that included Mongolia as the invasion targets expanded. In addition, Turanism appeared, which assumed an ‘imaginary’ ethnic group, which rose in the Eastern plain in Iran, and Pan-Asianism was claimed based on that. Even, a claim that Japan, Korea, Manchuria, and Mongolia had the same ancestors emerged. The root of the Korean pseudo history reaches Pan-Asianism made by Japanese imperialists. The pseudo-history is the concept of history in which the genes of the fascist forces as extreme rightists are carved and a product of anti-intellectualism.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society as a whole in order to protect from the advent of fascism.
추가 적립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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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과서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왜곡의 수단 역시 사실을 말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여러 사실 중에서 특정한 사실만 말하고, 여러 사료 중에서 특정한 사료만 소개한다. 다른 사실은 모른 체한다. 깜빡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다. -8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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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종의 교과서 중 4종이 본문에서《동국통감》의 기록을 근거로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했다.(중략)《동국통감》에는 뭐라고 적혀 있을까? ‘이가 단군이며 나라 이름은 조선이었는데, 바로 요 임금 무진년이었다’라고 쓰여 있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중국의 전설시대 요 임금 때의 무진년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요 임금은 언제 사람인가? 현대 중국의 역사학계는 알지 못한다는 입장이다.(중략) 중국의 교과서가 밝히지 못하는 요 임금의 즉위 연대를 한국의 교과서가 분명히 밝힌 것이 된다. -9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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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서는 단 1종의 국정 국사 교과서만을 사용했다. 국사 교과서의 국가 독점 시대가 30년 넘게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독점의 폐해를 잘 안다. 비교할 대상도 없고 경쟁도 없어 건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국정 국사 교과서가 그랬다. -1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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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교육출판사의 교과서는 ‘기원전 약 2070년, 우 임금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왕조 하나라를 건립했다(約公元前2070年, 禹建立我國歷史上第一個王朝-夏).’고 적었다. 중국 교과서들은 황제, 요 임금, 순 임금 등을 전설의 인물로 간주하며 연대를 말하지 않는다. -1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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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국사 교과서는 김한규의 반박은 모른 체하고 이병도의 주장만을 받아들여 위만이 조선인일 가능성을 은근히 제기했다. 그리고 3종의 교과서가 이를 이어받아 ‘고조선 계통의 주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왜곡을 완성했다. -93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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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종의 교과서가 사진이나 본문에서 담징이 그렸다고 한 호류 사 금당 벽화는 담징의 작품이 아님이 밝혀진 지 오래다. 이렇게 민망한 오류의 원조 역시 국정 교과서다. 2011년 발행 교과서 267쪽에 사진과 잘못된 설명을 넣었다. -137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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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려는 왕을 저지하던 임유무를 삼별초가 제거했다. 삼별초가 몽골에 항복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하다.(중략) 그런데도 교과서들이 삼별초가 몽골과 강화를 맺은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고 서술한 것은 역사 왜곡을 넘어 역사 날조에 해당한다. -177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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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들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학살이 있다. 하나는 무자비하고, 야만스럽고, 잔인하게 저지르는 학살로 일본이 조선인을 학살한 경우이다. 둘째는 무자비하지 않고, 야만스럽지 않고, 잔인하지 않은 학살로 한국이 한국인을 학살한 경우이다.-225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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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들은 왜 중요한 사실을 외면한 채 일부 사실은 부풀리고, 불리한 사실은 초점을 흐리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일까? ‘우리 역사와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우리 영토를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키울 수 있도록’이라는 교육부의 말에 답이 있는 것 같다.-242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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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편향, 우편향은 편 갈라 계속 싸우니 사람들이‘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하도록 만들기라도 한다. 싸움을 계속하다 보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판단할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질 것이다. 민족 편향은 탓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히 깊어지는 ‘중독’이다. -244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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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1세기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세계와 소통하면서 남의 시선으로 ‘우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 하고, 역사 교과서가 바뀌어야 한다. -244쪽에서
[우리역사 바로알기]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8)
[우리역사 바로알기]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8)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 제 뿌리 역사를 부정하는 이 땅의 매국사학賣國史學
일제 강점기 시대의 아픔, 賣國奴와 賣國史學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우리 사회에 매국노賣國奴와 매국사학賣國史學이라는 말이 생겼다. 매국노는 ‘나라를 팔아먹은 노예라는 뜻이고, 매국사학은 ‘자신의 모국母國인 조국을 배신해, 영토와 민족혼을 외세에 팔아먹은 역사학’을 말한다.
우리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먹은 이완용 등을 대표적인 매국노로 칭한다. 그런데 9천 년 대한의 역사 정신으로 볼 때 구한말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버금가는 매국노가 매국사학자들이다. 그들은 개인의 출세와 안위를 위해 외세의 역사 왜곡에 동조하였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대한독립군과 이름 없는 민초의 혈성으로 매국노가 팔아먹은 나라를 되찾는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은 광복 75년이 넘어선 지금까지도 매국사학자들이 묻어 버린 대한인의뿌리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환웅의 배달국, 단군왕검의 삼조선 체계와 가르침(8강 령)을 평생 접해 보지 못한 사람도 많다. 진정으로 대한인으로 성공하고 싶다면, 조상과 후손에게 떳떳한 대한인이 되고자 한다면 대한의 국통맥과 상고사 왜곡의 실체부터 깨쳐야 한다. 왜냐하면 뿌리 기운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대자연의 섭리이자, 역사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대한의 세 가지 역사맥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한의 원형 역사책은 고구려가 망하면서 당나라 이적 장군에 의해 불태워졌고, 견훤의 후백제가 망하면서 신라와 백제의 역사 서적이 태워졌다. 이것이 대한의 원형 국통맥을 찾기가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원래 대한의 바른 역사맥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 고려 시대에 인식했던 세 가지 역사맥을 현존하는 기록 순서대로 간략히 검토해 보자.
우선 첫 번째 맥은 고려 충렬왕 재위 7~9년(1281~1283) 사이에 집필된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가 전하는 맥이며, 두 번째 맥은 충렬왕 13년인, 1287년(충렬왕13)에 이승휴의 『제왕운기』로 대표되는 유학자의 맥이다. 세 번째 맥은 고려 공민왕 때 행촌 이암을 필두로 한 삼인동맹이 전한 역사 맥이다. (이암, 이명, 범장 등 삼인三人이 경기도 양주 천보산天寶山에서 소전거사로부터 환단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신서神書를 얻어 각기 낭도郎徒정신으로 배달과 단군, 북부여, 고구려의 계승맥을 전했다.)
제1맥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가 전한 맥 전조선(단군조선) – 후조선(기자조선) – 위만조선·한사군
제2맥
이승휴의 『제왕운기』로 대표되는 유학자의 맥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한사군
제3맥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가 전하는 국통맥 단군조선(삼조선 체계) – 해모수 북부여 -주몽 고구려
먼저 1, 2맥을 검토해 보면 두 서적(『삼국유사』, 『제왕운기』)은 공통적으로 지나支那족과 다른 동방의 독자적인 단군의 역사를 기술했지만 아쉽게도 후조선(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을 덧붙인 내용을 대한의 국통맥으로 잡았다. 그들은 불교와 유학이라는 외래사상에 경도되어 원형문화를 제대로 인식하고 볼 수 있는 안목이 부족했고, 불교와 유교식 소중화사관으로 주석을 달았다.
집필자의 사료 확보와 정신맥이야말로 역사 기술의 관건이 된다. 같은 내용도 기록자의 인식에 따라 다르게 기술된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9천 년 대한의 원형맥을 간직한 낭도郎徒 정신으로 기술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아마 두 기록자는 원형역사로 기술된 사료를 제대로 얻지 못했을 것이고, 자기 나름으로 들었던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기술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려 말 제3의 맥이 전수되었다. 바로 서기 1363년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에서 전수한 대한의 국통맥이다. 행촌 선생은 고려 26대 충선왕 5년(131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공민왕 11년인 1362년까지 만 50년 동안 관직에 봉직했다. 행촌 선생은 소전거사素佺居士를 통해 배달과 단군조선의 기록을 남긴 고서古書를 얻어 1362년 2월 강화도로 들어가 10월에 『단군세기』를 지었다.
한마디로 고려 공민왕 때 대학자이자 현 국무총리 격인 행촌 이암에 의해서 단군조선의 원맥과 북부 여 해모수 단군으로 전수된 국통맥, 그리고 한 무제의 동방전쟁의 실상이 전수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일연 스님의 「고조선」 조 기록과 이승휴의 『제왕운기』 그리고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를 통해 종합적으로 대한의 원형맥의 숨결을 찾아야 한다.
小中華와 일제식민사관의 연장선에 불과한 현 국통맥國統脈
지금 자녀가 있다면 중·고등 한국사 교과서를 보라. 광복 75년을 지나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만든 교과서가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 읽어 봤으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현 교과서는 ‘단군신화? – 기준왕(기자조선) – 위만·우거왕(위만조선) – 한사군(평양 낙랑군 표기)’를 뼈대로 하고 있다. 모든 교과서가 평양에 낙랑을 표기하고, 황해도에 대방을 비정한다. 대한의 모든 중·고등 교과서가 이 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고려와 조선 시대의 여러 가지 국통맥 중 자신들의 목적에 의해 선택한 것인데 아직도 이를 추종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일제가 만든 교과서와 21세기 현재 교과서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한반도 북쪽은 지나족 식민지였고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그들의 논리에서 단지 임나일본부 하나가 빠졌을 뿐이다. 그런데 신채호, 윤내현, 이덕일, 문성재 등은 1차 사료를 분석해 기자와 위만이 온 땅은 한반도가 아님을 밝혔다.
그러나 강단講壇, 학교 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병도를 머리로 한 매국사학이다. 과거 이 땅의 매국사학의 머리인 조선총독부 사학자들, 이병도의 일본 스승들은 멋대로 한반도 북부 평양에 낙랑을 비정했다. 그리고 순진한(?) 이병도는 일제가 왜곡, 날조한 평양 유물을 그대로 믿어 버렸다.
낙랑군에 관해 상고한 이병도의 「낙랑군고樂浪郡考」는 큰 문제를 파생시킨다. 조선인의 입장으로 그것도 서울대 교수의 글에서 ‘한사군의 낙랑은 평양 일대이고, 만리장성의 시작점은 황해도 수안이다’는 빌미를 남겼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기자조선’을 신봉한 과오와 같다. 고려 숙종 때 유학자들은 송나라 사신의 기자 발언에 놀라 평양에 기자묘를 만들고, 단군보다도 기자에게 더 자주 제사를 올리게 된다. 동방 조선의 문명을 기자의 덕으로 칭송하며, 이 땅에 오지도 않은 기자를 대한의 국통 중심에 세우게 된다.
그런데 이병도는 조선 유학자보다 한 술 더 떠 만리장성이 황해도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 북한 땅을 전부 중국에 넘겨주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이병도는 새로운 학설을 통해 자기 학문을 자랑하고자 한 것인가? 횡설수설하며 쓴 글이 이렇게 큰 파장이 될 줄은 알고 있었을까?
이덕일 교수는 ‘이나바 이와기치稲葉岩吉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것을 해방 후에도 이병도가 그대로 추종하면서 남한 고대사학계에서 아직껏 정설로 떠받들고 있다’(『동아시아 고대사의 쟁점』 97쪽)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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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사학의 두 뿌리, 중화사관中華史觀과 일제日帝 식민사관植民史觀
이 땅의 매국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을 잘 알아야 한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수천 년간 단군조선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 지나족은 단군조선의 국호를 지우려 했고, 단군조선으로부터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수받은 우임금의 역사가 『서경』과 『오월춘추』에 살아 있음에도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 왜곡했다.
또한 일본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개척한 나라임에도, 백제가 망한 후 제 조상의 고향 땅인 한반도로 쳐들어왔다. 일본 학자들은 환국과 배달 그리고 단군조선을 부정하려 했다. 일본인들의 단군에 대한 연구책자를 보면 ‘단군사화’를 ‘단군신화’라고 칭하며, 단군을 없는 역사로, 고려 때 만들어진 역사로 매도했다.
그런데 외세에 의한 역사왜곡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은 소중화小中華사관과 일제 식민사학에 물든 이 땅의 식민사학자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보다 한 수 더해 동북아의 종주인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도적 위만을 칭송하며 선진문명을 받아들인 영웅처럼 받들어 왔다.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라는 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광복했지만 대한의 뿌리의식을 부활시킨 독립군의 역사관을 중심에 세우지 못했다. 미군정기에도 일제에서 배운 학자들이 여전히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들에 의해 미군정 시대의 교과서인 『국사교본國史敎本』이 1946년 5월 26일 발행되었다.
잘 알다시피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의 대치라는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반민특위의 해체가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그 결과 일제 식민사학은 매국사학으로 되살아났고, 서울대를 장악하며 당당히 제도권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다. 그들의 머리가 이병도와 그의 제자 이기백이다. 이들을 통해 일제 식민사학의 변종인 매국사학賣國史學의 바이러스가 전파되었다.
이병도와 한국사대관
이병도는 누구인가?
일제 식민사학 바이러스를 붓대에 묻혀 이 땅에 씨 뿌린 인물이 있다. 바로 강단사학에서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泰斗로 숭상하는 이병도李秉道(1896~1989)다. 이병도의 본관은 황해도 우봉이고, 이완영의 조카로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해 3년 과정을 마쳤으며, 이어 1915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여 1919년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해 약 7년간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지리·역사를 가르쳤다. 뒤이어 조선사편수회 촉탁(1925~1929)을 지냈다. 이병도는 강의와 연구를 계속 진행하며 역사 관련 논문을 사학잡지史學雜誌를 비롯한 여러 학술지에 발표했다. 1934년 한국인 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고 『진단학보』를 간행했는데 이병도는 「삼한문제와 신고찰」을 발표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진단학회를 재건했고,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될 때에는 사학과와 문리과대학 창설에 참여했다. 교수 활동을 하면서 정년퇴임까지 16년간 도서관장·박물관장 및 대학원장(1954~1961)을 지냈다. 1960년 4·19혁명으로 과도내각이 구성될 때 문교부 장관에 취임했고,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이병도는 1948년 『조선사대관』을 출간했고, 1954년 『국사대관』으로 증보하였다. 1959년에 진단학회가 편찬한 『한국사』의 고대 편을 저술했으며, 1976년에는 『한국고대사연구』를 간행하여 자신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책자를 발간했다.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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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일본인 스승들
와세다대학은 1882년 개교한 도쿄에 있는 종합대학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명문 사립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1915~1919) 이병도에 지대한 영향을 준 두 교수가 바로 ‘요시다 도고吉田東伍(1864~1918)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이다.
요시다 도고는 누구인가? 요시다 도고는 1893년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를 집필했고, 1895년에는 청일전쟁의 종군기자로 참가했다. 일본으로 돌아가 그의 대표작이 된 『대일본지명사전』을 1900년부터 1907년까지 출간했다. 1911년에 와세다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역사와 지리 등을 담당했고, 1915년 유학 온 이병도를 가르쳤다. 1918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병도의 또 다른 스승이 쓰다 소키치다. 쓰다 소키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사관을 미화시키기 위한 역사학, ‘일본 단일 민족상’을 창조하기 위한 역사학을 했다. 1902년 29세 때 지은 『일본사 교과서』를 보면 “우리 일본 민족은 커다란 가족이다. 황실은 우리의 종가이며 우리는 황실의 지류라 할 수 있다. 양자가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것은 실로 국체의 정화이다.”라고 하였다. 쓰다는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정립하기 위해 힘썼고 일본 왕을 천황이라 높이고, ‘현인신現人神’으로 칭송한 극렬 천황주의자였다.
천황중심주의로 무장한 쓰다 소키치는 ‘일본제국이 침략하여 차지한 땅은 일본제국의 천황가에 해당하기 때문에 천황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쓰다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내용 중 허구로 유명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설화’를 수용하여 일제의 대조선 침략 및 식민정책을 부추겼다. 이를 위해 그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만들어 『일본서기』를 앞세우는 역사관을 펼쳤다. 또한 고려의 국경선을 축소해 멋대로 비정했다.
한마디로 쓰다는 동방의 중심을 일본천황으로 삼고, 침략한 식민지를 일본제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날조된 역사이론을 만들어 낸 대표적인 침략사학자였다. 이러한 쓰다가 길러 낸 한국인 식민사학자들이 바로 이병도(1896~1989), 손진태(1900~?), 이상백(1904~1966) 등이다.
또한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 촉탁(1925~1929)을 하며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1922년)과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1925년)이었던 이나바 이와기치(1876~1940)의 영향도 받았다.
이병도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조선사를 파괴하기 위한 조선인으로 길러졌다. 실제로 이병도는 스승들이 자신을 잘 대우해 주고, 보살펴줬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과연 이병도는 천황가를 칭송하는 일본 제국주의 학자들의 침략의도를 몰랐을까?
아무튼 이병도는 일제가 만든 역사조작을 실증사관으로 알고 배운 조선인 유학생이 되었다. 1919년 대한인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때에 그는 일본인 스승들에게 논문을 올리며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식민사학의 태두, 이병도의 대표적인 주장
이병도가 일본인 스승들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고, 새롭게 자신이 발굴한 몇 가지 지엽적인 자료를 덧붙여 기술한 발언을 살펴보자.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기점으로 삼다
(낙랑군) 수성현 (중략)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에 후대 소축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수성현 조에는 – 맹랑한 설이지만 –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 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낙랑군고」, 『한국 고대사 연구』 148쪽)
이병도는 “진秦 장성의 동단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의 강역에서 기하여 (중략) 개원 동북 지역으로 나온다는 사실은 『한서』 「지리지」에 의해서 의심할 바 없다.(이나바 이와기치,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 1910년, 41쪽)”라는 스승 ‘이나바 이와기치의 발언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낙랑군고」를 낸 것이다.
대동강 남안 토성리 일대를 조선현의 중심지로 비정
낙랑군은 (중략) 그 수부首府(수현首縣)의 이름이 조선현인 만큼 지금의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종래에 별로 이론이 없었다. 또 낙랑군이 한사군 중의 중추적인 구실을 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낙랑군고」 133쪽)
과연 일제 초기로부터 일인日人 조사단에 의해서 대동강 남안南岸인 (대동면) 토성리 일대가 낙랑군치인 동시에 조선현치朝鮮縣治 임이 그 유적·유물을 통하여 판명되었다. (중략) 낙랑의 유적과 유물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만, 특히 이 대동강 토성리를 중심으로 한 부근 일대에 집중된 감이 있다. 이로써 보더라도 이 일대가 낙랑군치인 조선현의 소재지였던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낙랑군고」 140~142쪽)
“고조선의 중심 지역은 서북 해안 지대인 대동강 유역(평양)” (『조선사 대관』 20쪽)
“한나라 수군이 지금의 산동반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열수(지금의 대동강)로 들어와 왕험성을 치다가 ······ 한은 위씨조선 땅에 본 주민의 국가를 말살하고 자국의 군현제를 실시하여 원原 조선에는 낙랑군” (『조선사 대관』 30쪽)
“왕험성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인 것을 알 수 있다.”(「위씨조선흥망고」 『한국 고대사 연구』 91쪽)
이병도 발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차 사료에 없는 말을 일본인 스승 ‘이나바 이와기치’의 1910년 발언을 그대로 추종해 ‘수안현으로 비정하고 싶다’고 무책임하게 기술 한 것이다.
둘째, 열수를 대동강으로, 고조선의 중심과 위만조선의 왕험성을 대동강 평양으로 비정한 것이다. 이는 ‘왕험성은 낙랑군에 있으며, 패수 동쪽에 있다’는 것과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던 왕험성에 요동군 험독현을 세웠다는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기록을 무시한 것이다.
즉, 패수가 대동강이면 왕험성은 패수 동쪽에 있어야 한다는 1차 사료를 무시하고, 대동강 남단의 토성리를 치소治所로 비정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그리고 우거왕이 한나라 대군에 1년을 버틸 만한 험한 지역이 없는데도 평양을 위만조선의 왕험성으로 비정했다.
셋째, 일제가 발굴한 유물만 믿고 1차 사료에 부합하지 않은 ‘대동강 남단 낙랑군 중심지(조선현치)설’을 편 것이다. 즉, 이병도는 ‘토성리 일대가 낙랑군치인 동시에 조선현치임이 유적·유물을 통하여 판명되었다’고 믿고, ‘이 일대가 낙랑군치인 조선현의 소재지였던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라고 단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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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은 누구인가?>
이기백(1924~2004)은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으로 이병도의 후학이다. 이기백은 1941년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이기백과 한국사신론
이기백은 이병도와 같이 와세다대학과 서울대 사학과를 나와 『국사신론』(1961), 『한국사신론』(1967), 『한국고대사론』(1975) 등을 집필했다.이기백의 대표작인 『한국사신론』을 통해 그의 역사관이 어떤 문제점을 가졌는지 3가지만 살펴보자.
1)단군왕검의 건국을 믿을 수 없는 역사(신화)로 본다
고조선사회의 성장
청동기의 사용과 더불어 형성된 성읍국가를 기본으로 하고 각지에 정치적 사회가 탄생하였다. 북쪽 송화강 유역의 부여扶餘, 압록강 중류 지역의 예맥濊貊, 요하와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古朝鮮, 동해안에 있는 함흥평야의 임둔臨屯, 황해도 지방의 진번眞番, 그리고 한강 이남의 진136 국辰國 등이 그러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BC 4세기경에는 이미 중국에까지 그 존재가 알려질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청동기의 유물을 제일 많이 남기고 있는 요하와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던 고조선이 가장 선진적인 것이었다.
성읍국가로서의 고조선은 아사달阿斯達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아사달은 곧 훗날의 왕검성일 터이지만, 그 위치는 원래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었던 것으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요하 유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대두하고 있으며, 혹은 처음 요하 유역에 있다가 뒤에 대동강 유역으로 옮겼다는 설도 나타나고 있다. 이 고조선 성읍국가는 아사달 일대의 평야를 지배하는 조그마한 정치적 사회였을 것이다. (이기백 저, 『한국사신론』 30~31쪽)
이기백은 청동기와 더불어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는 이유로 서기전 2333년 단군왕검의 건국은 믿을 수 없고, 한반도 북부의 소국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성읍국가’라는 용어를 통해 국가가 아닌 작은 성 정도의 소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미 폐기됐어야 할 ‘청동기 국가 창건설’을 내세워 대한 상고사의 뿌리인 단군조선을 부정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단군조선이 신화가 아닌 사화임을 알 수 있는 부루 태자 도산회의 참석 등의 1차 기록은 무시했다.
서구식 틀을 세우기 위해 성읍국가라는 형식을 빌어와 단군조선을 한반도 평양 지역의 소국으로 축소시켰다. 그러나 이는 고인돌과 비파형 청동검 등의 표지 유물로도 거짓임이 판명된다.
2)위만조선을 칭송하고, 한사군의 중심을 평양 낙랑으로 비정
이기백은 1차 사료에도 없는 평양 한사군설을 추종해 ‘대동강 평양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평양을 낙랑군 치소’로 비정한다. 이는 일제가 식민사관을 심기 위해 조작한 유물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한의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그해(B.C. 108)에 위만조선의 판도 안에다 낙랑樂浪· 진번 · 임둔의 세 군郡을 두고, 그 다음 해(B.C. 107)에 예의 땅에 현도군玄菟郡을 두어 소위 한의 4군이 성립되었다. 그 위치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 지방, 진번군이 자비령 이남·한강 이북의 옛 진번 지방, 임둔군이 함남의 옛 임둔 지방,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동가강 유역의 예 지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한의 군현이 그들의 식민정책을 수행한 중심지는 낙랑군이었다. 그 낙랑군에는 군태수 이하 의 관리와 상인 등 한인이 와 살면서 일종의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상의 대략은 낙랑군치樂浪郡治로 생각되는 평양平壤 서남쪽 강 맞은편의 토성리 유적이 발굴 조사된 결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신론』 36~37쪽)
그리고 대륙백제를 무시하고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을 상정한다. 대륙백제 강역이 분명히 나오는 지나족의 기록을 무시했다.
또 위만조선을 기술하며 사마천의 『사기』에도 없는 “이 B.C. 4세기경에는 중국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므로, 고조선은 더 한층 국가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생각된다.”( 『한국사신론』 31쪽)고 했다. 한마디로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중국의 선진 철기문화를 전수받는 창구였다는 것이다. 이는 위만의 나라 찬탈과 한나라의 침략에 좋은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3)쓰다 소키치의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을 추종
이기백은 대표적인 일제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키치의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을 수용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기록을 무시했다. 일본의 역사책, 『일본서기』를 뼈대로 삼아 우리 역사를 바라본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한반도 남부에 넣기 위해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을 만들었지만, 이기백은 일본 스승의 뜻을 따라 그 의도를 알면서도 그대로 수용했다. 그리고 이기백은 왜곡된 국통맥을 바로 세우기는커녕 식민사학을 추종하면서 『한국사신론』의 첫머리에 ‘식민사학 척결’을 내세웠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사를 대표한다고 자찬하는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은 허울만 식민사학을 극복했다고 일갈할 뿐 식민사학 바이러스를 받은 이병도와 일본인 스승들의 역사학을 뼈대로 한 역사학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기백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설’로 대한의 국통의 뼈대로 잡고 있다. 또한 ‘대동강 고조선, 대동강 위만조선, 대동강 한사군’으로 숨 돌릴 틈 없이 식민사학을 주입하고 있다. 문제는 이 책이 미국에까지 번역되어 대한의 상고사를 공부하려는 한류 팬들에게 읽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보며 대한의 역사를 잘못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은 옛날에는 중국어를 사용하다 한글이 창제된 후 한글을 사용한 나라로 알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실제로 대한사람의 원맥(배달-단군조선-북부여-고구려)의 역사를 전하려 해도 그들의 첫 순정은 이미 깨어졌고, 잘못된 역사관의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지나족의 아류로 대한상고사를 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1차 사료를 멋대로 해석하고 비정한 이병도와 이기백에게서 비롯되었고,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한 잘못된 안목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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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사학을 넘어서야
해방 70년이 넘었지만 매국사학의 바이러스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대한의 강단에서 아직도 증식하며, 변이를 거듭하고 있다. 지금 이 땅의 강단사학계는 이병도, 이기백을 추종하는 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지나족과 일제가 굳혀 놓은 역사기록과 유물조작을 그대로 두고, 지엽적인 연구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는 교통사고로 척추와 목뼈가 뒤틀린 환자에게 손가락과 발톱을 수술해 주며 곧 회복된다는 거짓말을 하는 격이다. 소중화 사관과 일제 식민사관 그리고 매국사 학자들이 정해 놓은 국통맥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부 강단사학자들은 오랫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연구가 아닌 제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삭감시키는 연구를 해 왔다. 제 조상의 뿌리 역사가 결국 신화이고, 우리가 지나족의 식민지였다는 엉터리 연구를 해서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철밥통은 굳건하다. 그들이 받는 월급은 이 강토와 역사, 나라를 지키라고 주는 국록國祿이자, 백성들의 혈세 아닌가.
우리 국민의 잘못도 있다. 그동안 국록을 먹으며 우리 역사를 잘 지켜줄 것으로 그들을 너무 믿은 것이다. 그들의 현란한 붓장난에 놀아난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대한의 미래를 위해서 이 세 가지를 기억하고 실천했으면 한다.
첫째, 그들이 대한독립군의 역사관을 버리고, 일제 식민사관을 추종함을 기억하자.
둘째, 독서를 하자. 이미 신채호 선생과 윤내현, 이덕일, 문성재 교수 등이 1차 사료를 통해 그들의 잘못된 점을 충분히 정리해 놓았다.
셋째, 대한의 원형역사인 제3의 맥을 바로 알자. 고려 말 행촌 이암 선생의 『단군세기』와 그 후손인 이맥의 『태백일사』를 통해 대한의 올바른 국통맥을 바로잡아야 한다. 상생방송 〈환단고기 북 콘서트〉를 통해 큰 맥을 잡고 깨어나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일제 식민사관의 변종 바이러스인 매국사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깨어난 민초의 힘으로 ‘제 조상의 역사는 신화다. 대한인의 뿌리는 없다’는 얼빠진 매국사학을 멈춰 세워야 한다.
ⓒ월간개벽
[글로벌+] 반크 “일본이 왜곡한 한국 역사, 파친코로 바로잡아” ::::: 기사
“일본, ‘전범기’인 욱일기 홍보 열 올려···유럽에서는 처벌받을 일” “일제강점기 한국 역사 담겨 있는 드라마 ‘파친코’, 전 세계에 한국 바로 알리기에 도움”
일본의 우경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올해 일본 사회과 교과서 20종 모두에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적었습니다. 상당수가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한다고 주장하고 있죠. ‘종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부’는 ‘위안부’로, ‘강제연행’은 ‘징용이나 동원, 보내지다’ 등으로 바뀌었습니다. ‘역사 지우기’가 강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얼마 전부터는 여러 나라 유튜브 광고에서 일본 욱일기를 일본 전통문화로 홍보하는 영상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이버 외교 사절단 반크는 최근 드라마 ‘파친코’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일제 강점기에 탄압받던 조선인의 모습이 재조명되자 이를 막기 위한 ‘꼼수’라고 파악하고 있는데요, 대구MBC 시사 라디오 방송 ‘여론현장’ 김혜숙 앵커가 신지원 반크 책임연구원에게 들어봤습니다.
Q.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세계 어느 나라도 일본만큼 왜곡을 일삼는 국가는 없습니다. 오늘 인터넷 상에서 한국 알리기에 진심인,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 활동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 제대로 들여다보도록 하죠.
반크 신지원 책임연구원과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A. 네, 안녕하세요?
Q. 자생적인 민간 외교관, 이렇게도 소개가 되고, 흔히 사이버 외교사절단으로 반크를 소개하는데, 반크는 이런 곳이다, 직접 한번 소개해 주시겠어요?
A. 네, 안녕하세요? 저는 반크 13년 차 회원이자 4년 차 반크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신지원입니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는 전 세계인들과 친구가 되어서 우리나라를 전 세계에 올바르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회원이 이제는 연구원으로 직접 활동을 하고 계신 거예요, 활동가로?
A. 네.
Q. 그러니까 이제 자발적으로 후원자들도 있고, 어떤 국가기관이 아니잖아요? 일본이 그렇게 호도하는 것만큼?
A. 네, 저희는 국가기관은 아니고 비정부 민간단체입니다.
Q. 그러니까요. 자생적인 민간 외교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최근에 일본이 군국주의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욱일승천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더라고요? 지난 도쿄 올림픽 때도 그렇고 최근에는 일본 외무성까지 나서서 욱일기 관련 홍보 영상 제작하고 유튜브 통해서 배포까지 하고 있는데, 이런 움직임 반크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지 않을 것 같은데요?
A. 네, 몇 년 전부터 일본 정부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를 통해서 욱일기가 일본 문화의 일부라면서 전 세계에 홍보를 하고 있는데요. 일본 정부는 욱일기 디자인이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고 현대 일본 사회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일본 정부는 욱일기가 전통 문양이라고만 강조하면서 욱일기가 침략 전쟁 범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용되었던 제국주의 전범기라는 사실은 은폐하고 있는데요.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나치 독일이 사용했던 상징)가 현재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사용이 금지되어 있잖아요? 위반하면 처벌도 받는다고 하는데 하켄크로이츠가 유럽인들에게 극단적 전체주의인 파시즘을 대표하듯이 욱일기도 아시아인들에게는 마치 하켄크로이츠와 같은 전범기입니다.
반크에서는 욱일기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카드 뉴스와 영상을 제작하여서 홍보를 하기도 했고요. 욱일기 사용을 반대하는 글로벌 청원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욱일기 의미를 모른 채 사용하고 있는 웹사이트들이 되게 많이 있어요. 이런 곳들에 항의서한을 보내서 욱일기를 담은 상품의 판매를 중단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고요.
질문 주신 것처럼 최근 일본 외무성이 전 세계에 한국어나 영어로 일본의 오랜 문화로서의 욱일기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홍보를 하고 있는데요. 심지어 전 세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도 홍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반크는 그래서 전 세계 한인 동포들과 하나가 되어서 이런 일본의 글로벌 역사 왜곡을 막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욱일기 관련해서 일본은 자국 해군 함정에도 욱일기 내걸고 국제훈련에 참가하고 있어서 우리나라도 이것에 대해서 항의를 하고 있고, 반크도 이렇게 또 지원을 인터넷상에서 하고 계신데, 사실 해군 국제훈련 행사에서 우리나라 대장 함선 표시하는 수자기(**조선수군 대장기) 있잖아요, 이순신 장군도 사용했다고 하는? 여기에 대해서 또 일본이 트집을 잡고 있는데 욱일기랑 수자기, 엄연히 그 성격이 다르죠?
A. 네,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욱일기는 침략 전쟁 범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용되었던 제국주의의 전범기인데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했던 전쟁에서 사용을 했던 수자기와 그리고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같은 전범기인 욱일기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Q. 자, 다음은 세계 각국에서 최근에 호평받고 있는 드라마 파친코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은데. 이 드라마를 활용해서 반크에서 한국 바로 알리기 글로벌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해서요.
그럼 반크에 계신 활동가들은 파친코가 필독서까지는 아니라도 드라마를 보든 작품은 읽든 하셔야 되겠네요?
A. 저 같은 경우에는 작년에 파친코 소설책을 봤었고요. 그리고 최근에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해서 드라마는 다 봤습니다.
Q. 어떻습니까, 반크가 파친코에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 어떤 걸까요?
A. 파친코는 재일교포 가족 4대의 삶을 통해서 일제강점기와 그리고 근대 우리나라의 역사를 소개를 하고 있는데요. 일본이 부정하고 왜곡하던 역사들이나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한국 역사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기도 합니다.
1화에서는 일본 순사들이 칼을 차고 조선인들을 괴롭히면서 이유 없이 잡아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요. 그리고 4화에서는 일제의 조선 쌀 수탈 관련된 내용이나 아니면 군함도나 사도 광산보다는 덜 알려진,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었던 치쿠호 광산이라는 곳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5화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되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암시하는 내용이 있고요. 그리고 7화, 최근에 했던 7화에서는 간토 대지진의 비극을 조선인에게 덮어 씌웠던 학살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Q. 거의 뭐 역사서랑 다름이 없네요?
A. 네, 이렇게 일본이 왜곡하고자 했던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해서 저희 반크에서는 기존에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중국어, 러시아어, 인도네시아어, 이렇게 7개 외국어 사이트를 구축을 했었는데요.
이 사이트들을 파친코 해시태그랑 같이 SNS에 홍보하는 글로벌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친코 드라마를 보고 한국의 역사를 더 알고 싶어 하는 외국인 친구들이 많이 생길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사이트들을 활용해서 홍보를 한다면 외국어 실력에 상관없이 저희가 이미 만들어 놓은 내용들이 있으니까요. 누구나 한국 바로 알리기 활동을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Q. 이미 해외 외신 언론에서도 파친코에 주목을 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 있고 찾아보는 외국인들, 또 이미 베스트셀러로 작품 자체, 소설 자체가 유명하기도 해서 읽은 독자들도 있는데 반크가 구축한 홈페이지랄까요? 그런 데서도 이제 쌍방향 소통이 되는 겁니까? 해외 독자들, 작품 보신 분들 반응 좀 볼 수 있어요?
A. 저희가 반응을 지금 아직은 볼 수가 없는데, 그 외에 다양하게 뉴욕 타임스나 기사 나간 것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걸 통해서 외국인들도 지금 많이 주목을 하고 있구나 정도 파악을 하고 있고요. 그래서 이 파친코를 계기로 해서 일제강점기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탄압의 역사, 그리고 조선인들의 저항, 그리고 일본이 왜곡했던 한국의 역사가 전 세계에 올바르게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Q. 제대로 한국의 역사를 알리는 역할을 파친코가, 또 반크가 돕고 있습니다.
사실 이 파친코의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인 이민진 작가인데, 일본계 미국인 작가가 쓴 ‘요코 이야기’라는 책이, 그 소설이 미국 학교에서 이게 수업 자료로 활용이 되는데 파친코랑은 좀 다르게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죠?
A. 네, ‘요코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11살 일본인 소녀 요코가 어머니랑 언니랑 같이 살던 함경북도에서 일본으로 귀화하기까지의 경험담과 그리고 일본에서 힘들었던 그 삶을 담고 있는 소설인데요.
이 책은 과거 오랫동안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묘사하고, 그리고 문학성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미국 학교와 교사, 청소년을 위한 반전 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이 책은 언어, 사회 부문 추천 도서와 필독서로 추천되고 미국 교사들을 위한 지도 지침서에 소개되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이 ‘요코 이야기’ 책 속에는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인들이 한국을 떠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로부터 강간과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있고 한국인은 가해자로 묘사돼 있는 반면에 일본인들은 그냥 억울한 피해자, 그리고 전쟁 난민으로 표현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2008년에 재미동포들이 항의를 해서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서는 이 책을 학교에서 퇴출시켰지만, 작년 기준이에요, 2021년 4월 기준 여전히 8개 주에서는 여전히 필수 도서로 채택이 되고 있다고 하고요. 그래서 전 세계 청소년들이 우리의 역사, 그리고 일제 강점기 한국 역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 책을 보게 된다면 그냥 한국인은 가해자이고 일본인은 피해자인 것처럼 인식하게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을 해서 파친코 책이 이 ‘요코 이야기’ 책을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반크는 좀 어떻게 이 부분을 위해서 활동하시고 계시고, 하실 계획이신가요?
A.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희가 작년에 파친코 소설책을 보게 됐었는데요. 이렇게 저희 미국에서 직접 캘리포니아 주에서 이 책을 퇴출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셨던 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이 책을, ‘요코 이야기’의 책에 대한 내용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노력을 해 왔고요, 그리고 아마존에서 이 책을 소설이 아닌 자서전이라고 홍보했던 내용이 있었어요. 그래서 소설이랑 자서전은 정말 다른 부분이잖아요?
Q. 실화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려가 있네요.
A. 그래서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또 아마존에서는 자서전으로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작년에는 또 그를 대응하는, 아마존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하고 청원을 진행하기도 했었습니다.
Q. 파친코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배우들 의상도 주목받고 있어서 뉴욕 타임스에서도 ‘역사를 관통하는 한 의복의 여정’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통해서 한복의 진화는 한국 역사 들여다보는 렌즈라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반크에서도 한복 알리기에 힘 쏟고 있잖아요. 소개 좀 해주실까요?
A. 개인적으로 제가 반크에서 했던 활동을 소개를 해드리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한복을 좋아해서 한복을 입고 국내외 여행을 많이 다녔었는데요. 한복을 설날에만 입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서 반크 인턴으로 활동했던 2015년에 ‘우리는 아름다운 한복 홍보대사’라는 우아한 캠페인을 기획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복을 입은 모습을 SNS에 올리고 3명의 친구를 태그 해서 함께 홍보해 나가자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고 학교나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한복 입는 날을 정해서 입어보자는 취지의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대학생 시절에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사진을 남기고 강의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복을 입고 여행하던 제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낯설어했었는데 지금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곳들을 보면 한복을 입고 여행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한복 입기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또한 최근에는 중국이 한복을 중국의 것이라고 계속 주장을 하고 있는데요. 작년 2021년 4월에 저는 한복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던 영국의 옥스퍼드 콜린스 사전이나 미국의 영어 사전, 스페인어 사전 등에 한복 단어 등재를 시도했고 한 달 뒤 영국의 콜린스 사전에 한복 단어가 등재되었습니다.
이렇게 반크에서는 현재 전 세계 웹사이트, 교과서, 백과사전 등에 한국에 대해서 잘못 알려진 오류들을 바로잡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잘못된 오류를 발견하고 고치는 활동도 중요하지만 오류가 생기기 이전에 미리 방지하는 것 또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했던 활동이었습니다.
Q. 정말 전방위적으로, 또 앞으로도 활동하실 부분도, 활동 계획도 많으실 텐데요. 힘을 좀 실어드리면서 21세기 독립운동가, 또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와의 인터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A. 네, 감사합니다.
Q. 신지원 책임연구원이었습니다.
일본의 한국사 왜곡과 역사치유
일본의 역사왜곡은 한일 양국에 있어서 늘 갈등의 씨앗이 되었고, 서로의 신뢰를 허물어뜨리는 불통의 요소가 되어 왔다. 왜곡된 역사교육을 통하여 다음 세대들에게 그릇된 역사상이 심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학생들이 민족적 편견과 우월의식을 이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일시적인 문제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명치유신 이후 정한론의 논의속에서 조선후기 단절되었던 국교를 재개하면서 체결한 강화도조약 이후 새롭게 성립한 근대역사학의 일환으로 태동되었다. 이후 한국사에 대한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여 한국에 대한 침략의 정당을 확보하려고 식민사관을 조성하고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 하였다. 이러한 일제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한국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한 역사왜곡 논리는 일선동조론이나 동양평화론, 합법절차론의 모습으로 여전히 현재에도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현재의 역사왜곡의 뿌리는 일제의 침략논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양국의 발전적인 미래를 만드는 데에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극복하여 건강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치유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역사왜곡 #역사교육 #일선동조론 #동양평화론 #합법절차론 #역사치유 #歷史歪曲 #歷史敎育 #日鮮同祖論 #東洋平和論 #合法節次論 #歷史治癒
키워드에 대한 정보 한국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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