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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동 목사(3분) – 항상 기뻐하자 – C채널
웃으며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
장경동목사의 행복플러스 – 뜻
FULL영상 : https://youtu.be/Q900owNPeK4
문의 : C채널 02-3153-0906
C채널 홈페이지 : http://www.cchannel.com/
유튜브 채널 : https://www.youtube.com/user/cchannel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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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 묵상노트

‘항상 기뻐하라'(판토테 카이레테, Πάντοτε χαίρετε)는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기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렵거나 힘든 일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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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ybiblenotes.tistory.com

Date Published: 1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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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칼럼] 하나님의 뜻 세 가지 – 크리스천투데이

(1) “항상 기뻐하라” 기복이 심한 우리들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기뻐하다’는 헬라어로 ‘카이로’인데, 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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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3/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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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 …

그 말은 표면적으로는 복음을 두가지의 길로 잘못 비칠 수 있는 바울서신이 말한 ‘오직 믿음’과 야고보서에서 말한 ‘행함’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믿음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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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3/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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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오히려 슬프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항상’ 이라는 말은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돈이 있을 때나 떨어질 때나, 경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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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algarychurch.org

Date Published: 9/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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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자 | Facebook

첫째,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의 헬라어 판토테 카이레테(πάντοτε χαίρετε)는 조건 및 상황에 따른 인간의 감정적 기쁨이 아니라, 주 예수님 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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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acebook.com

Date Published: 6/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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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의 원어는?

그래서 성구사전을 살펴보았는 데,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 단어가 사용이 된 것을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던 일을 그치지 않고 계속한다 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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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5/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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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하나님의 뜻(1):항상 기뻐하라 – 뉴스파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가운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할, 범사에 감사하라”를 권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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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power.co.kr

Date Published: 8/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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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 4:4) – 유평교회

또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이 명령은 주님 안에서만 기뻐하라는 의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고 추구하다가 더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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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4/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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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라’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 꽃자리

신동숙의 글밭(43) ‘기뻐하라’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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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fzari.com

Date Published: 9/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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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C채널방송 :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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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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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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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판토테 카이레테, Πάντοτε χαίρετε)는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기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렵거나 힘든 일에도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기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해서 나타날수 없는 바,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다(롬 14:17;갈 5:22). 혹자는 빌 4:4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와 같이 본절도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의미한다고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엡 6:18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도 눅 18:1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셨다. 또한 롬 12:1에는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혹자는 이 구절이 본절에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한편 ‘쉬지 말고 기도하라'(아디알레이프토스 프로슈케스데, ἀδιαλείπτως προσεύχεσθε)는 말은 24시간 입술을 움직여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단히 의지하는 자세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를 갖추는 것 등 항상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라는 의미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의 헬라어 ‘엔 판티(ἐν παντὶ)’는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라는 의미이다(in all circumstances, NIV). 성도는 이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였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한편 감사는 1: 2에 기록된 대로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빌 4: 6에는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신자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

혹자는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 성령께서 신자들을 성화시키는 내적인 역사로 본다. 한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이며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신자들의 성화나 하나님의 뜻은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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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성령님은 기쁨을 주시나요?

*기쁨은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샘 스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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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시작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5:16 πά́ντοτε χαί́ρετε,

항상 너희는기뻐하라,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기뻐하라’의 헬라어로의 기록은 카이레테(원형은 g5463 기뻐하다, 기쁨으로 가득차다, 만날 때 주고받는 인사)입니다. 이 카이레테라는 말은 2인칭동사,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쓰여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항상 기뻐해라! 라는 말씀인데, 현상적으로 전혀 할 수 없을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의미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할 때 살펴 볼 것은 ‘기뻐하다’ 또는 ‘기쁨으로 가득차다’의 동사의 유래가 된 명사 ‘기쁨’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카라(g5479, 기쁨의 대상)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참 기쁨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하나님, 육화체의 당사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지칭함일 것입니다(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가르침의 총체인 성경을 통하여 가르치신 말씀 밖에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를 ‘기뻐하라’고 명령조(명령법)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듯 표면적으로의 기쁨을 누리는 의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더 실체적인 내용 즉, ‘기뻐하라’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뜻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깊은 성찰의 빌미를 제공해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조금 더 본 말씀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뻐하다, 기쁨이 가득차다’라는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g5463, 카이로 : 기본동사: ‘행복하다’, ‘유복하다’, 특히 인사와 같은 것(만남이나 헤어짐에 있어) ‘안녕’, 인사하다. 환영하다.

이 g5463 단어가 신약 행 15:23(χαί́ρειν g5463, 문안하노라), 23:26(χαί́ρειν g5463, 문안하나이다), 약 1:1(χαί́ρειν g5463, 문안하노라), 요이 1:10(χαί́ρειν g5463, 인사도 말라) 등에선 ‘기뻐하다’란 감정적 동사가 아닌 문안, 혹은 인사의 대목으로 번역된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이 말해주고 있는 바는 명사 ‘카라’의 어원이 된 기본동사 ‘카이로’, ‘기뻐하다’가 감정적 기쁨의 층위를 넘어서서 ‘만남’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헬라어 단어 ‘카이로’의 히브리 상응어로 쓰인 단어로는 대표적인 예로 ‘라차 h7521’를 꼽을 수 있겠는데, 이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h7521, 라차: 기본어근 ‘~을 기쁘게 여기다’, ‘빚을 갚다’, ‘~을 받아들이다.’ 동의하다. 주시하다, 용서하다, 성취하다. 받아들이다.

히브리어의 ‘기쁨’을 나타낸 ‘라차’는 더욱 다의적으로 사용되어, 받아들임, 동의, 빚을 갚는, 그리고 용서함 등의 의미군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러한 차원을 종합해 볼 때, 지금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상태는 단순한 감정적 측면만이 아닌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하나님과의 충만한 만남(말씀을 통하여)의 순간을 체험하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하고, 받아들이며, 그렇게 받아들인 기쁨으로서의 만남의 충만함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빚갚음, 야고보서에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의 행위가 이러한 것임)를 통해 ‘빚을 갚는’, 용서하는 행위로까지 발전되는 상태가 ‘기쁨’ 안에 포괄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적 기쁨의 의미 역시 ‘카이로’란 단어 안에 함유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볼 때 그저 활자로 기록된 의미의 내용(표면적인)보다는 더 깊은 차원의 내용(영적인)으로 접근하여 참생명이 되시는 하나님, 말씀의 깊이를 누리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항상 그리스도(하나님)와 만나라(명령법)’가 ‘항상 기뻐하라’의 본질적인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5:17 ὰ̀διαλεί́πτως προσεύ́χεσθε.

쉬지 말고 너희는 기도하라.

너희는 끊임없이 기도하라.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늘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흔히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도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전혀 지킬 수 없는 명령이지요. 그러나 산상수훈의 내용 가운데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은밀한 곳 곧, ‘골방 안’에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은밀한 곳이란 바로 내 마음 안인 것입니다. 물론 환경적으로도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기도하기에 더욱 좋은 요소가 될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것은 필요조건인 것이지 충분이나 필수조건이 아니기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기도의 공간적, 환경적인 것에 메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시끄러운 공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祭儀式을 동원하여 조용하고 경건스러운 공간이라야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 늘 마음 안에서(은밀한 골방에서, 이러한 기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주께서 유일하게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 즉,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 할 양식(영의 양식)의 끊임없는 공급하심과, 죄를 사해주는 일 등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기도’… 주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일이 없어야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잠시라도 놓치게 되면(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기에 늘 마음 상태가 그래야함을 말함) 사람이란 본래 악한 존재((사람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은 악하지 않다라고 할지언정 그것은 평가하는 대상이 사람일 경우(자기가 될 수도 있음, 자기 의)에 그렇게 평가할 뿐인 것이지 정작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예 거들떠보시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 스스로의 ‘자기의 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이기에 그 틈을 비집고 사단의 공격에 노출되기에 그렇습니다.

5:18 έ́ν παντί́ εύ́χαριστειτε, τουτο γά́ρ θελημα έ́ν χριστο ́́Ιησου είς ὺ̀μας.

~에 있어서 모든 일 감사하라, 이것이 왜냐하면 뜻이심이라 하나님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향하신 너희를.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하라.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심이라.

우리가 항상 감사해야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파도, 슬퍼도, 괴로워도, 화가나도, 악을 봐도 ‘항상 감사할 수 있음’의 ‘감사’란 무엇이기에 감사하라고 하실까요. 도대체 ‘감사’란 무엇이고 또한 어떤 것일까요. 감사라고 표현 된 유카리스테오는 유카리스토스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로써 ‘유(선하게, 좋게 라는 부사)’와 ‘카리조마이(거저 주다, 아낌없이 주다)’라는 동사의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아낌없이 좋게 하라, 선하게 하라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결국 “말씀으로 좋게 인도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뜻하신 바 대로 참복음으로 넘겨주어(전하여) 좋은 것, 선한 것으로(좋은 것, 선한 것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 뿐이시며 그분의 뜻을 오롯이 품고 계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이것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인간차원의 감정적 얘기가 아니라, 아직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한 이들을, 아직 복음에 대하여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화가 된 자가 말씀(참복음)을 증거해서(전해서) 절대선(아버지 하나님 외에는 선한 분이 없음)으로 인도하라! 는 말입니다(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이러한 뜻에 합당한 자들이 되어야 함이 우리를 향하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사적 총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일’이라고 한다면 오직 영생에 이르는 단초에 기인하는 모든 일을 말할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함에 이르는 사안들 일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에서 언급하시기를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로 있는 상태여야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있을 때라야 만이 열매를 맺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참복음을 내 이웃에게 넘겨주어야, 좋게 인도하는 것이지요. 참복음을 받은 자가 그 복음이 그 안에서 차고 넘치게 돼서 이제는 타자에게도 그 참복음(말씀)을 전해주어서 절대선(하나님)으로 인도하라!는 말입니다.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본 구절에 대해 말한다고 하면 주로 그냥 사람의 감정차원으로 변질시켜 그렇듯 감정에 호소하며 분해도, 억울해도, 화가나도, 스트레스가 쌓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뻐하라고, 기도하라고, 감사하라고 했으니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고, 인내심을 훈련시켜야한다고 인간차원의 가르침으로 하나님 말씀의 의도하심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차원의 말씀을 땅적차원의 인간의 감정으로 말이지요.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그 어떤 존재라도 땅적차원의 감정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슬프고 화나고 그런 일들이 수없이 많은 사람의 일상인 것을….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숨도 쉬고 먹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좀 해야 하는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 지금 지인이 막 숨을 거두려는 찰나인데, 중병에 들어 고통당하고 있는데 감사가 나옵니까? 특히 요즘과 같은 폭우로 인한 물난리로 온통 고통가운데 지나면서도 과연 감사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말씀에 그렇게 기록하셨으니까.. 하고 인간차원의 해석으로 받아들여 기뻐한다고, 기도한다고, 감사한다고 몸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답시고 하는 그러한 실천강령으로 실천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율법을 문자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며 율법을 다 이루셨다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아예 이 땅에 오셨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모든 신앙이 율법시대의 차원으로 회귀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의 짐(율법이라는)을 대신 지시기 위하여 오셨고 대신 지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의에 이르는 믿음인 것이며 점점 장성하여 열매를 맺어야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은 성도들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묵상도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니까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또한 그런 모습으로 살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기록된 말씀에 대해 아무런 살펴봄도 없이 교회에서 늘 들어온 대로, 스스로가 그렇게 들은 토대에서 묵상한 대로 윗 구절의 말씀을 지키려고, 짜증나는데도 억지로 웃음 지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며, 참지 못할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맡긴다는 핑계아래 기도만 하면서, 그나마 제대로 풀리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원망이나 하고, 아니면 나의 때가 아직은 멀었는가 보다 하고 믿음이 깊은 양 ‘낙심하지 말라’라는 성경구절을 되새기며 또 같은 맥락의 말씀을 찾아보며 위로받으려 하고, 몸이 아파도 감사, 집안에 우환이 생겨도 감사, 좋으나 좋지 않으나 오직 감사의 마음만을 떠올리며 스트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라며 맹목적이고 율법적인 믿음으로 점점 견고해져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가 아니겠습니까?

일단의 사람들은 정말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분들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인내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이라면 말이지요. 그렇다고 기쁨, 기도, 감사의 본질적 의미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 좋게 여기실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절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영혼의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고 있을진대 그런 존재들에게 복음이라는 기쁜소식이 있을까요? 점을 잘치는 점쟁이에게 갔더니 ‘예수 믿을 사람이 왜 여기에 왔어!’ 라고 한다면, 예수께 전도를 한 것이니 그 점쟁이를 주님께서 기쁘게 보실까요? 그렇지가 않지요. 만일 그렇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사단의 속임수에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차원의 감정으로, 인내심으로 극복하여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갈 수 있다면 티벳에서 오체투지의 고행으로 수행하는 수행자가, 산속에 칩거하며 오직 도를 닦는 존재가 더 빠르게, 확실하게 천국에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우면 아파하고, 슬프면 슬퍼하고, 기쁘면 기뻐해야합니다. 그것이 적어도 차라리 자신에게 정직한 모습입니다. 왜 애써들 억지로 몸부림으로 그토록 처절하게 기뻐라혀고, 기도하려고 감사하려고 하는 건지요. 모두가 헛된 자존심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니 남에게 그렇게 보여야한다 라는 정직하지 못한 거짓된 ‘자기 의’를 쌓는 수고, 그러니까 성경말씀의 바른 의미를 모르면, 자기가 자기를 끝없이 속이고 합리화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지요. 자기자랑과 자기속임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항상 바르게 풀어진 성경에 기록 된 말씀(하나님)을 대함으로써(읽음으로써, 들음으로써, 볾으로써, 깨달아 앎으로써) 항상 기뻐하는 것이요,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요, 또한 그 분께서 주신 말씀으로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 구원을 모르는, 영생을 모르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영혼들을 참좋으신, 선하신 분에게로 인도하라는 메시지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임이 오늘 살펴본 말씀의 본질족인 차원의 가르치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믿음이 있는 행함의 모든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항상 같이,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은 표면적으로는 복음을 두가지의 길로 잘못 비칠 수 있는 바울서신이 말한 ‘오직 믿음’과 야고보서에서 말한 ‘행함’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 이 둘 중에 하나라도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기만적인 믿음이며 가짜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성품으로서의 기쁨, 기도, 감사가 아닙니다. 자기감정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그러한 차원의 기뻐함과 기도와 감사의 행동으로 믿음과 동일시 하지 말라는 것이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차원자체가 다르다’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역자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공부는 합니다만 그저 거쳐야하는 과정으로서 임하기에 구체적으로 성경말씀의 내용(본질)을 살펴보는 데에는 모두가 뒷전인 것이 한국신학교에서 신학을하는 사람들의 현주소입니다. 말씀의 본질을 찾기보다는 현실에서 쓰일, 본질의 의도야 어찌됐든 사람들이 긍정할 수 있는 세상과 타협한다는 말이지요.

아마 성경말씀에 대해서 정말 바른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이제껏 믿음의 삶이라고, 신앙인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전부가 헛것이었고 거짓된 것이었구나 라는 한탄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속에서는 엄청난 갈등을 겪게 되겠지요. 그러한 현상들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눅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와 같이 기존에 소유하고 있는 땅적차원의 복음과 새로이 듣게 된 참복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서 갈등할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불세례라는 것은 뜨거운 감정이 아니라 심판을 의미하지만 부정한 것을 태우는, 태워서 소멸시키는 즉, 바로 내 안에 있었던 하나님 보시기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치 않은 생각, 마음, 가치관, 율법적 요소…’등을 태우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 안의 버릴 수 없는 ‘자기의 의(자기의 옛존재성)’를 불로 소멸시켜 정결케 하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그렇듯 불로 세례를 받아야 정금같이 단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비록 비교적 짧은 구절에 대해 묵상해봤습니다만, 성경말씀의 수많은 부분이 이처럼 표면적인 내용을 가지고서 복음의 삶이라고 서로가 속이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내용을 가지고서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가볍게 사람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믿는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 진정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느냐, 아니면 복음을 차용한 세상의 가르침만이 있어서 믿음이라고 살고 있느냐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섞여서 있느냐를 진정으로 깊이 묵상해 봐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마음(유일한 것, 모노게네스) 외에는 받으시지를 않으시는 분이니 정금과 같이 제련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받으시기에 합당한 내가,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아브라함이 드렸던 의, 인, 신의 믿음이요, 우리가 드려야 할 십일조의 모든 것이요, 참된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 안으로 들어가 그 말씀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나는 없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제 목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본 문 ; 살전 5:16-18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분명한 뜻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말은 평범한 권고같이 들리지만 여기에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always, continually, in all circumstances)라는 일맥상통한 부사를 첨부하면 우리에게 참으로 큰 도전이 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를 하라고 권면을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환경에 지배를 받는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그 교회에 보낼 당시에 그는 로마 옥중에 투옥되어 심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옥중에서도 기뻐하고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신병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자신은 지도자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또한 자기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하려고 억지로 기뻐하려고 애쓴 것도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바울 자신에게는 기쁨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 어떠한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그리고 그 일로 근심하거나 슬퍼하거나 우울해하거나 분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물론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러한 기쁨이 없으므로 조금만 환경이 어려우면 금방 우울해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환경을 초월한 기쁨이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슬퍼할 때도 기뻐할 수가 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을 대도 우리는 오히려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유명한 종교 개혁자 칼빈도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믿는 성도들이 어떠한 상황 변화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근거이시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세상을 살다보면 염려와 걱정과 문제가 다가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인생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기쁨이 세상의 문제와 환난보다도 더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고 치료하십니다. 평안과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우쳐 줍니다.

고로 우리는 어떤 환경 중에도 성령을 통해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21에 보면 예수님도 성령으로 크게 기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6에도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패배한 자 같으나 오히려 이미 큰 승리를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은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죽은 자 같으나 결국 사는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오히려 항상 기뻐하는 자입니다.(고후6:10)

그리고 우리의 그 기쁨은 이곳 외국 땅에서도 계속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일을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은 이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얻은 것보다 더욱 큽니다.

사도 바울도 죄인 중에서도 괴수였던 자기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용서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 귀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는 늘 환경을 초월한 벅찬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 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도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하고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얻을 수 있는 크나큰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천사도 부러워하는 특권인 주님의 일꾼이 되어 헌신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외국 땅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슬퍼하지 말라는 작은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슬프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항상’ 이라는 말은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돈이 있을 때나 떨어질 때나, 경사가 생겼거나 문제가 닥쳤어도,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이 외국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좇아가려고 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전능자로 인정하는 행위요,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 마음 속에, 생활 속에 모셔들이려고 하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고로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기도하는 자를 위해 일을 하시고, 기도하는 자에게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실을 아신 예수님도 온 밤을 기도로 보내셨고(마14:23), 사도 바울도 자신은 밤낮 기도를 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살전3:10, 딤후1:3) 또한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삼상12:23)

여러분,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인은 살았다 하나 죽은 교인이요, 기도가 떨어지면 마치 공기가 통하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장소처럼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답답해지고 맙니다.

더구나 이 말세에 기도가 떨어지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받지 못해 쉽게 짜증이 나오고, 원망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에 빠트리고 맙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기도가 떨어지지 아니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고로 우리는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때로는 기도하기가 싫고, 기도가 매우 힘이 든다 할지라도 기도에 더욱 매달려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골4:2)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여러분, 아시다시피 다니엘은 바벨론과 메대와 파사 나라의 국무총리였습니다. 바쁘기로 말하면 당시 그보다 더 바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 세 번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합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에 매달린 이유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는 도저히 자신의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을 너무나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쉬지 아니하는 기도가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사자굴 속에서도 살아 나올 수 있었고, 말세의 비밀에 대한 계시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이민 생활이 아무리 바빠도 다니엘처럼 시간을 정하여 매일 매일 기도하십시오. 수시로 무시로 기도하십시오.(엡6:18)

주님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눅18:1)

기도 외에는 다른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막9:29)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약5:15) 의인의 기도와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말씀을 하십니다.(약5:16)

또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여기에 나오는 ‘범사에’라는 헬라어 ‘엔 판티(en panti)’는 영어로 말하면 `in all circumstances` 즉 모든 상황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인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자기가 의도한 대로 일이 잘 풀리고, 기도하는 것이 응답을 받을 때만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요, 설사 매사가 꼬이고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상대적이고 비교적인 감사가 아닌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조건부의 감사가 아닌 무조건적인 감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인 불만과 불평 때문에 기쁨과 감사와 행복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분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일억을 가졌어도 다른 사람이 십억을 가졌으면 불평을 터트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모습 그 대로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좋은 집이 없고, 좋은 차가 없고, 좋은 육체를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무리 슬픈 일, 아픈 일을 당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감사의 조건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했어도 믿음의 눈을 들어서 살펴보면 감사의 조건이 많이 보이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심히 얻어터지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니 감사할 조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는 감옥 문이 열어지며 착꼬가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고, 또 다른 감사의 제목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욥이라는 사람은 열 자녀가 한날에 죽고, 모든 재산을 오랑캐에게 약탈을 당하고, 자신은 악창이 들어 기와 조각으로 몸을 북북 문지르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욥을 향해 하나님은 “내 종 욥은 참으로 의인이구나 !”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여러분, 마귀는 우리에게 다가와 날마다 속삭이며 말을 합니다. “항상 슬퍼하라. 쉬지 말고 비방하라. 범사에 불평하라.”

그러나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의 원어는?

살전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16πάντοτε χαίρω 17ἀδιαλείπτως προσεύχομαι 18ἐν πᾶς εὐχαριστέω

영어로 된 헬라어 사전입니다. 기본적인 의미가 그치지 않고, 건너뛰지 않고 임을 알 수 있습니다.

adialeiptós: incessantly

Original Word: ἀδιαλείπτως

Part of Speech: Adverb

Transliteration: adialeiptós

Phonetic Spelling: (ad-ee-al-ipe’-toce)

Short Definition: unceasingly

Definition: unceasingly, without remission.

이제 부족하나마 해석을 해 보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받아 들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될 듯 싶습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이유는 범사가 다 감사할 일만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통치자로서, 그리고 우리 인생의 주관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 삶의 부분 부분을 다스리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선이 되게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불가능해 보이고 힘이 들지만, 성경에서 주시는 말씀이니까요.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기쁜 일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살다보면 슬픈 일, 괴로운 일도 많이 겪지만, 그런 것들을 모아 모아서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시고[롬8;28]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안배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음으로 보고 기뻐하라는 의미같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이 땅이 아니고 주님가신 천국과 영생이기에 잠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여행하다 다리 아프면 쉬는 것처럼 생각하고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낙심할 필요가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제가 되는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말로는 그렇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 잠도 자야하고 일도 해야 하고 쉬기도 해야 하는 데, 어떻게 쉬지않고 기도를 할 수가 있을까 하고 의문이 드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성구사전을 살펴보았는 데,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 단어가 사용이 된 것을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던 일을 그치지 않고 계속한다 라는 의미 같습니다. 즉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하는 사람은 그것을 그치지 말고 계속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으로 혹은 묵상으로 항상 중얼거리며, 일할 때나 다른 일을 할 때도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그치지 말고 계속하라는 의미입니다. 직접확인을 해 보시려면, 이 아디아ㄹ레이프토스 라는 말이 사용된, 롬1;9, 살전1;3, 2;13 절을 올립니다.

(롬 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단상]하나님의 뜻(1):항상 기뻐하라: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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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 4:4)

주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본문: 빌립보서 4장 4절

설교: 최 종혁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9 말씀을 통해 빌립보 성도들에게 어려움 중에 굳게 설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주 안에 서라”는 명령 아래 6가지 명령이 등장하는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절),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6절),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절)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이 첫째 명령, 즉 ‘주 안에서 같은 마음(겸손)을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두 번째로 4절에서 등장하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그 자체가 주제라고 할 만큼 짧고 명료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즐거운 마음이나 느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어떤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마음에 생기는 감정이라는 말인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감정입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감정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녀가 잘 되는 것을 기뻐하지만 그것도 나의 바람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 기뻐하는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다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갖고 싶은 휴대폰이나 자동차 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기뻐합니다. 나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반대로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는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기뻐하라”는 명령은 “네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라”는 말일까요? 원하는 것을 갖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라는 의미일까요? 사실 세상에서는 이런 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뻐하라”는 명령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기뻐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은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는 것, 기쁨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현재형의 표현으로, 그것을 계속해서 선택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가 기뻐하지 않기를 선택할까요? 누구나 기뻐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내가 다시 말하노니”를 덧붙여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또 다시 너희에게 기뻐하라고 말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빌2:17-18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명했던 사도 바울은, 다시 빌3:1에서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라며 또다시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4장에 와서 두 번 더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 없는 명령인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조건 없이 기뻐하라는 명령은, 현재 뭔가 기뻐하지 못할 만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면 굳이 이렇게 명령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베드로도 같은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1-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이런 명령을 하고 있을까요? 상황이 좋지 않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성경은 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어려움이 있어도 억지로 웃으면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저 낙천적인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명령의 근거가 어디 있으며 그것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일까요?

이 명령의 타당성은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젊음이나 특출난 외모에 기뻐합니다. 승진이나 선물, 자녀들, 손주들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기쁨을 두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돈은 있다가도 쉽게 없어지고 젊음과 외모도 순식간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명예 역시 작은 실수 하나에 무너져내리고, 귀엽고 예쁘던 자녀들, 손주들은 커가면서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는 자녀가 있을까요? 그러니 이 “기뻐하라”는 명령은 공허한 말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즐거운 감정이 기쁨이라면, 우리는 상황에 따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 항상 기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욕구를 항상 충족시켜서도 안 됩니다. 인간 개개인의 악한 욕구들까지 다 충족시킨다면 세상은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구는 다 충족시킬 수도 없고 다 충족시켜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쁨을 바라보는 관점, 즉 내가 무엇을 통해 기뻐하고 무엇 안에서 기뻐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절대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곳에서 ‘주 안’이라는 곳으로 기쁨의 장소가 옮겨진 것입니다. 전에 세상에서 기뻐했다면 이제는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는 정말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쉽게 변하는 세상의 것들과 달리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 안에 만족과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주님 안에 기쁨이 없다고 말합니다. 친구들에게 전도를 해보면 ‘교회에 무슨 재미로 나가냐’고 되묻습니다. 일요일에 쉬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며 술 담배도 못하고, 부담스런 헌금과 전도를 해야 하는 것, 심지어 지루한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들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 안에 기쁨과 만족이 없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주님 안에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충만하게 있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하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만족이고 기쁨입니다.

문제는 죄가 이러한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피조물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자신에게 만족이 되는 다른 것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오직 주님 안에만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사도 바울은 ‘유익하다’는 말과 ‘해가 된다’는 말을 사용해 손익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육체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들을 유익하다고 여겨왔습니다(빌 3:4-6).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을 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의를 세워왔던 사람, 그것을 옳은 것이라 믿고 삶을 투자해왔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유익이 된다고 굳게 붙들었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지금껏 기쁨과 만족을 주던 것들을 모두 해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다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최고의 기쁨을 찾은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죽는 것을 유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당할 수 있는 해(害) 중에 가장 큰 것이 죽음인데 그는 죽음마저도 유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유익과 기쁨이 세상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주님 안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한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를 시기하던 자들이 밖에서 더 열심으로 전도하던 일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꼼짝 못하고 있을 때 더 많이 전도를 하면 그가 괴로워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생각처럼 사도 바울의 기쁨이 비즈니스적인 복음 전파에 있었다면 감옥에 갇혀 있는 현재 상황이 참 답답했을 것입니다. 더 많이 복음을 전해서 자신의 이름을 높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통해 복음을 전해지고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쁨은 주님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빌 4:10) 그는 자신의 희생을 기뻐했고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실천으로 기뻐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그는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13절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은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 비천이나 배고픔 등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7,8).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사도 바울은 그것이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는데 주님은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9,10).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어도, 능욕과 궁핍, 박해, 곤고가 있어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큰 만족을 주님 안에서 발견했고, 그것을 계속해서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기뻐할 이유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사랑, 성령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위해 하고 계시는 일들,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영적인 선물들을 세어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다가올 영광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명령입니다. 아직 이 진정한 기쁨을 모르고 세상의 만족을 찾아 헤매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속히 주님 안으로 들어오셔서 참 만족과 기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인류 역사상 실존했던 모든 사람들이 실패했던 그 길을 굳이 왜 따라가시려고 합니까. 주님 안으로 들어오셔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기쁨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그것을 제대로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뻐하지 않고 불만을 표하며 상황에 따라 기쁨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여러분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기쁨은 세상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죄입니다.

또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이 명령은 주님 안에서만 기뻐하라는 의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고 추구하다가 더 이상 기뻐할 것이 없어지면 주님께로 나옵니다. 세상에서 기뻐할 상황이 없어지면 주님을 찾아와 위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모든 기쁨은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책의 저자는, 우리가 너무 작고 하찮은 것에 쉽게 만족하고 기뻐해서 큰 기쁨, 진정한 만족을 포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나 게임을 하면 그 순간은 정말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술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것도, 돈을 모으고 쓰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존경받는 것도 물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작고 사소한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면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기쁨은 찾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만족하고 큰 것을 포기하시겠습니까, 큰 것을 위해 사소한 것을 내려놓겠습니까?

세상은 이 사소한 기쁨에 만족하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 안에 우리의 참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이 진정한 기쁨, 영원히 쇠하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기뻐하라’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신동숙의 글밭(43)

‘기뻐하라’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 전서 5:16-18)

제 기억 속의 세월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입니다. 잊혀지지 않으며, 잊혀져선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땅 어디에선가 그와 같은 불합리한 일들이 모습을 달리하고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바닷속처럼 다 헤아릴 수 없는 유족들의 가슴 속으로 따뜻한 햇살 한 줄기 비추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따뜻한 말 한 마디, 따뜻한 눈길이 끊이지 않는 파도처럼 우리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일렁이기를 소망합니다.

당장에 오늘 내 곁에 우리 집안에서 일어난 일도, 함께 사는 가족의 마음 속 일도 정작 관심을 두지 않으면 먼 나라 딴 세상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곳으로 햇살이 비추듯 사랑은 흘러갑니다. 응달지고 후미진 그곳을 환하게 밝히는 것은, 햇살을 닮은 관심 어린 작고 따뜻한 눈길일 테지요.

하나님이 명령형으로 말씀하신 ‘기뻐하라’, 이 말씀 앞에선 늘 여러 감정이 일어납니다. 우리네 삶에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닮은 희노애구 애오욕(喜怒哀懼 愛惡慾) 7정의 성정이 늘 함께 합니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는 예수의 성정과도 모순이 없어야 진리의 말씀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항상 기뻐하라’의 뜻이 웃음과 즐거움의 겉모습을 뜻하는 의미만은 아님을 묵상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로 온 나라가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던 그 무렵, 다니던 교회의 주일 학교에선 예정대로 남노회가 주최하는 <신앙 그림그리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따뜻한 봄햇살을 받으며, 공원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유·초등부 주일 학교 학생들. 해맑은 몸짓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으는 교사들의 낭낭한 목소리. 알록달록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주일학교 어린이들. 그날의 주제 중 하나가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어린이 그림대회라곤 하지만, 상장이 걸린 부분이라 함께 간 부모와 담당 교사들이 알게 모르게 거들거나 큰 애들한테는 지나가는 바람처럼 훈수라도 두고 싶은 그런 날이었답니다.

슬픈 동화처럼 세월호 얘기를 들려줬더니, 유치부 아들은 회색빛 검은빛으로 노아의 방주를 그리다 말고는 다 그렸다며 뛰어가 놀기가 바쁩니다. 입상자 중에는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마트 진열대 위에 사탕껍질처럼 색색깔의 예쁘장한 그림이었습니다. 딸아이의 그림이 입상했다는 기쁨은 그때 잠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색색깔 그림의 그림자는 긴 세월 만큼이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날의 주일 학교 학생들은 세월호를 모릅니다. 저 혼자서는 세월호에 희생된 학생들과 유족들을 위한 전교인의 기도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다린 주일 예배, 주일 말씀 중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월호라는 단어가 목회자의 입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일도 지금껏 그늘이 되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주일 설교는 언제나 세상의 아픔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나서 언뜻 스치는 말에 희생자 중에 우리 교인이 없기 때문에.

그림그리기 대회, 그날 수백 명이 모인 교회 학교 어린이들. 슬픔을 담은 그림은 눈을 씻고 봐도 아들의 그림 한 장 뿐이었습니다. 마치 하얀 종이에 튄 먹물 한 방울 같이 생뚱맞은 어둠이 드리운 슬픈 배 그림 한 척. 집 근처 대형교회의 벽면이 매끈한 유선형으로 주변의 일반 건축물과는 다른 생소한 모습이라 물었더니, 노아의 방주처럼 지었다고 합니다.

노아의 방주 같은 안전한 교회당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그저 홍수 속 출렁이는 세상의 검은 물결일 테지요. 그 험난하고 악한 바다에는 차마 들어갈 수 없다고 믿는 성도들. 그저 불쌍한 세상 속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고기를 잡듯 한 생명을 낚아올리려는 전도지와 물티슈. 세상의 아픔과 슬픔 앞에 굳게 문을 닫아 걸고, 입에 담지 않으려 애써 외면하고, 제 손으로 제 귀를 막고, 제 손으로 제 눈을 가리는, 그런 두 손을 모아 새벽기도의 재단을 쌓던 목회자와 중직자들. 그들의 손아귀에 자녀를 맡긴 성도들, 해맑은 주일 학교 어린이들. 5년 동안 제가 본 교회의 모습입니다.

물론 시멘트 틈새에도 함께 아파하는 이들의 마음이 야윈 꽃처럼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전혜성 박사의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책에서 감동을 받고, 섬기기 위해서 섬김을 배우려고 다니게 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담벼락은 세상의 물길을 막기 위한 댐처럼 높기만 했습니다. 물길이 스며들까 휩쓸릴까 두려움에 몸을 사리며 평안과 천국을 구하는 안전지대, 성도들에게 교회는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기뻐하라’, ‘기쁘다’는 우리의 입말입니다. ‘기분이 좋다’라는 말은 ‘기의 분할이 좋다’, 온몸의 기가 막힘 없이 원할하게 돌 때 우리는 ‘기분이 좋다’고 말합니다. 어느 한 곳이든 기와 혈이 막힌 곳이 있다면, 그곳은 아픈 곳, 병든 곳이 될 테지요.

가끔 성도들을 볼 때면, ‘항상 기뻐하라’의 의미를 웃음과 즐거움의 표면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한계를 짓고 마는 건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답니다. 당장에 자녀가 독감에 걸렸는데,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 하십니다. 그때의 기쁨은 달리 해석되어져야 하는 순간입니다. 자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과 나으리라는 희망이 깃든 긍정의 마음이 그 순간 ‘기뻐하라’의 의미일 것입니다. 아픈 자녀를 앞에 두고 귀와 눈과 입을 막으며 아픔을 외면하고서 해맑게 웃는 부모는 없을 테지요.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깊이 묵상을 하다보면, 세상은 나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님을 느낍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에서 파생된 개체로, 이웃은 ‘또 하나의 나’가 됩니다. 그처럼 교회 밖의 세상은 이웃이 되고, ‘또 하나의 나’가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곳입니다.

저의 헤아림으로 본 ‘기뻐하다’는 ‘깨어 있다’의 의미입니다. 삶에는 타이밍이란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 하기 위해선, 상황 판단이 정확해야 하고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눈치라도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지 않고선 어느 시점에서 함께 울어야 하며, 함께 웃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소통하는 페이스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감의 표시인 ‘좋아요’를 누르는 짧은 순간 조차도 감정을 나타내는 이모티콘의 선택을 두고 잠시 고민을 합니다. 함께 눈물 흘릴 지, 웃을 지, 화내요와 멋져요, 하트를 남길지. 깨어 있지 않고선 ‘좋아요’ 공감의 이모티콘 하나도 허투루 선택할 수 없는, 흔하고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깨어 있어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날씨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민감한 마음을 두고서 맹목적인 믿음과 순종의 미덕만을 강요하는 설교는 양심을 가리는 어리석은 무지일 뿐입니다. 물론 ‘기뻐하다’, ‘깨어 있다’의 의미가 일희일비(一喜一悲)의 가벼움은 아닙니다. 함께 아파하는 중에도 희망의 씨앗을 볼 수 있는 긍정의 마음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어진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기쁨을 기꺼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의로운 마음입니다. 이웃의 모습에서 나를 보고, 나아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밝은 마음입니다.

역사와 현실을 가린 교회 건물 안에서 자라나는 어린 영혼들에게 전깃불이 아닌 태양빛이 비추어 깨어 있는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일처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일이 기의 막힘 없이 돌아가는 기분 좋은 자연의 순환이 되도록. 늘 깨어 있음으로 곧, 항상 기뻐함으로 우리의 의식과 마음과 영혼이 깨어서 숨을 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누가복음 10 : 27) 사랑하면 믿음과 순종은 저절로 따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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