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무지개와 십자가\”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빠른 답변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무지개와 십자가\”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https://you.charoenmotorcycles.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you.charoenmotorcycles.com/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CBS성서학당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16,017회 및 좋아요 343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무지개와 십자가\”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무지개와 십자가\”
본문 – 창세기 9:8-17
성경읽기는 지루하다? 성경공부는 어렵다? No!\r
\r
좋은 선생님과 좋은 학생들이 함께 하는 즐거운 성경공부시간!\r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CBSBibleschool).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 Daum 블로그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창(9: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한 …

+ 더 읽기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28/2021

View: 4000

무지개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 – 큐틴(Q-Teen)

무지개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 2021년 01월 임준섭 목사 (사랑의교회, 분자생물학 이학 박사). 비가 내린 후, 맑게 개인 하늘에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가 걸 …

+ 더 읽기

Source: www.qteen.co.kr

Date Published: 3/3/2022

View: 1464

Không có tiêu đề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 약속밖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무지개 언약 …

+ 여기에 보기

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6/28/2021

View: 8323

왜 무지개를 주셨는가? – 두란노

하나님은 홍수 심판 이후에 노아와 계약(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계약을 맺으시면서 다시는 물로 모든 육체들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으로 무지개를 두셨다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12/20/2021

View: 2542

9무지개와하나님의약속

하나님께서무지개를볼때마다사람과모든동물들에게약속하신그영원한언약을기억할. 것이라고말씀하셨습니다. 방주에서나온노아의세아들, 셈과함과야벳은온세상사람들의조상이 …

+ 여기에 표시

Source: school.jbch.org

Date Published: 3/19/2022

View: 6657

무지개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표다 – 아이굿뉴스

어린 시절에 친구와 약속을 할 때는,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서로서로에게 약속하였다. 또는 친구와 땅 따먹기 놀이를 할 때는, 어떤 특별한 모양 …

+ 더 읽기

Source: www.igoodnews.net

Date Published: 2/5/2022

View: 6987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 키바스 | 노아의 방주와 무지개 – MAXFIT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창(9: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한 …

+ 여기를 클릭

Source: you.maxfit.vn

Date Published: 11/6/2021

View: 9020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무지개와 십자가\”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무지개와 십자가\”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 Author: CBS성서학당
  • Views: 조회수 16,017회
  • Likes: 좋아요 343개
  • Date Published: 2020. 3.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0EROUHDDZU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창(9: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홍수심판 이후,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비록 세상은 멸망했지만 너는 나와 함께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자’는 격려과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9장 1~7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복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받았던 복은 완전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에 받은 복은 똑같은 복임에도 불구하고 미완성이요, 불완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세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생존보전의 복을 주셨습니다.

또 지금까지는 채소만 먹었는데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죄를 짓기 전과는 달리 죄를 지은 후, 세상에는 서로 죽이고 속고 속이는 심각한 상황이 생겨났습니다. 모두가 적(賊)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서로 살인하지 못하도록 ‘보호장치’를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계약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8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복을 주시며 계약을 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약속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지 않고 일을 이루시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구약’, ‘신약’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 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까지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세우십니다. 구약에서의 모든 약속은 신약에서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모든 약속은 이제 곧 머지 않아, 역사의 마지막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실수없이 그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일방적인 계약

8~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계약’은 서로 쌍방간에 만족하여 서명을 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한일합방과 같이 폭력이나 무력으로 맺은 일방적인 계약은 그 효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에서 일방적이거나 강요에 의한 것이라면 그 계약은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일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계약을 합니다.

그러나 절대자와의 계약은 일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사랑이요, 복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와 계약을 하고 키우지는 않습니다. 부모는 조건없이 일방적인 사랑을 베풉니다. 2천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사람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계약에는 문제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방적인 계약은 복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창조주의 권위를 가지고 사랑과 은혜와 복된 계약을 일방적으로 하십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네가 사랑하기 때문에 나도 사랑한다’고 합니다.

‘네가 나에게 혜택을 주기 때문에 나도 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이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 없어도,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어도,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없어도,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를 일방적으로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계약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찬양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여러가지 일을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2천년 전에 그분이 나를 위해 먼저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아니, 창세 전에 그분은 나를 택하시고,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내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복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은혜와 복을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 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고, 너희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이며, 이제 육식을 허락할 것이며, 동물들이 너를 해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서로 죽이고 살인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겠다. 그리고 난 너와 새로운 특별한 계약을 만들어 줄 것이다. 이 계약은 네가 요청해서 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 때문에, 나의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는 복의 계약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움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격려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영광스러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에 부합된 성경말씀이 로마서 5장 8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몰랐을지라도 하나님께서 2천년 전에 여러분을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건없이 노아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보호해 주시고, 그를 지켜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노아를 안심시키는 하나님

그렇다면 노아와 하나님께서 맺은 계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왜 이 말이 이렇게 중요할까요? 이 말에 어떤 의미가 있기에 노아와 계약을 해야만 했을까요?

우리가 노아의 입장으로 돌아가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방주에서 노아와 그 가족들과 짐승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첫번째로 목격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겠습니까? 폐허입니다. 집, 논, 밭,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처참하고 상상할 수 없는 폐허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와 그 가족들이 그러한 현실을 보고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집을 짓겠다든지, 농사를 짓겠다든지 하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갖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좌절과 절망 뿐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폐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노아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복을 주시면서

‘너는 다시 할 수 있다.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동물들이 너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육식을 허락하겠다. 그리고 살인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노아의 두려움을 하나님께서 없애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는 일, 잠자는 일, 옷을 입는 일, 직업을 갖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마음 속에서 두려움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암에 걸려 보십시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사업에 실패를 했을 때,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자라지 않고 제멋대로 자랐을 때 부모가 갖는 두려움, 남편에 대한 공포감, 아내에 대한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두려움입니다. 미래는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와 좌절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돈이 있다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권력이 있다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노아가 가졌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파괴된 현실을 보면서, 세상을 보면서 그가 가졌던 감정은 두려움과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노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상담학자요, 심리학자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심정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네가 나를 신뢰하고 나를 바라보면 이 모든 불안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은 다 사라질거야. 그리고 새로 시작해. 나를 의지하고, 나를 바라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라.’ 그것이 11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안심입니다. 구원의 복은 죽음과 미래에 대해 안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안심하고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병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냥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특권은 ‘안심’입니다. 이것이 노아에게 필요했습니다. 두려움, 공포, 절망, 좌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함께 미래의 세계를 향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십니까? 사후 세계에 대한 평안함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이것을 줍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안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하고, 실패하고, 건강하고, 병드는 것 때문에 감정이 얼마나 요동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두려움을 치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노아는 이 말씀을 듣고 미래에 대한 꿈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사랑

성경을 보면 놀랍게도 성경 도처에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늘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쫓기는 것같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계속해서 용기와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이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 18)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 성경말씀들이 님에게 들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당신의 두려움이 다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두려움, 인간관계의 두려움, 부부관계의 두려움, 직장에 대한 두려움, 이런 두려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 몰아 내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 속한 단어가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18절을 보십시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불안, 근심, 좌절 같은 것들은 마귀가 몰래 우리의 영혼에 심어놓은 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내 안에 가득했던 안개와 같은 두려움은 사라지고 대신 가득한 평안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사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선택하는 것은 전부 실수투성이입니다. 공포와 쫓김, 당황함, 안절부절한 가운데서 무언가를 선택해 보십시오.

오늘날 이런 두려움과 불안으로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이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뉴스들을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사로 잡혀서 그러한 결과로까지 가는 것입니다. 사단의 결과는 항상 비극적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두려움은 예수님이 완전히 해결해 주셨음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노아에게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4~7절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다시 시작하십시오.

오늘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어제까지의 좌절과 두려움에 미련을 갖지 마시고 하나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여러분에게 전개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언약의 증거’

세번째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물로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약속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가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여기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개’입니다. 무지개가 이때 생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를 증거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무지개를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14,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3절에 ‘언약의 증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지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의 증거’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무지개가 내 언약의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과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면서 약속을 기억하십니다.

그런데‘왜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계속하실까?’ 마치 노아가 어린아이, 혹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한번만 말해도 다 알 것 같은데 자꾸만 반복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언약의 증거’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는 무지개를 보면서 구원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약속을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미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가 이미 마음에 와 있습니다. 이미 내 마음 안에 2천년대에 일어날 일들이 와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무지개를 볼 때마다 이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월절은 그들의 믿음을 회복시키는 절기였던 것입니다. 위기 앞에 섰을 때 그들은 유월절떡을 먹었습니다. 절기를 지키면서 그날 밤 죽음이 지나가고, 홍해가 갈라지고,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던 이 놀라운 영적 감격을 회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 여러분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기를 축원합니다. 노아시대에는 언약의 증거가 ‘무지개’였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구약의 무지개가 노아와 가족들에게 평안을 주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던 사건이 마귀를 쫓아내며, 음부의 세력을 몰아내며, 병을 물리치며,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내게서 다 떠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구원의 증거는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증거는, 바로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무지개를 바라보며 약속을 기억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증거입니다.

요한일서 5장 5~8절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렇습니다. 구약에는 무지개가 약속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이후에는 십자가가 증거입니다. 성령이 증거입니다. 말씀이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증인이 되시고, 그 십자가의 능력을 모든 분들이 체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은 떠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미래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천국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1~13)

이어서 ‘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라는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이 무지개가 무엇인지 알고 무지개와 관련된 이야기도 들어 보았다. 성경에 나온 무지개와 관련한 이야기를 어떤 이들은 믿고, 어떤 이들은 전설로 간주하며, 또 어떤 이들은 아예 믿지 않는다. 어쨌든 무지개와 관련해 전후로 발생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이 행했던 일이자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 일들은 있는 그대로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기록 속에 당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들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들을 하였을 때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기 전후의 생각이 말씀의 행간에 드러나 있다. 말씀의 한 글자 한 글자를 통해 당시 하나님의 생각이 모두 생생하게 표현된 듯하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류가 가장 관심을 갖고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는 사람의 생명 진입에 있어서 절대 없어선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일들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는, 하나님이 보기에 매우 좋고,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한 인류였지만, 하나님을 거역한 후 홍수로 멸망했다. 이런 한 인류가 순식간에 소멸되었을 때 하나님은 마음 아프지 않았을까? 당연히 마음이 아팠다! 그가 마음 아파하는 모습이 어디서 나타났느냐? 성경에는 어떻게 기술되어 있느냐? 성경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간단한 말씀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그는 그때 세상을 멸한 것이 무척 마음 아팠던 것이다.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참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한 뒤 원래 생기로 충만했던 땅이 어떻게 변해 버렸을까? 인류로 가득했던 땅이 어떻게 변해 버렸을까?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생물도 없이 도처에 물만 있는데, 물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그런 광경이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본의였을까? 분명 아니다! 하나님의 본의는 곳곳에 활기가 넘치고, 그가 창조한 인류가 그를 경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노아 한 사람만이 그를 경배하고 그의 부름을 받아 그가 준 사명을 완수하는 것, 이건 적어도 하나님의 본의가 아니었다. 인류가 사라지자 하나님이 보게 된 것은 그가 애초에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닌, 정반대의 광경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품을 나타냄과 동시에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면서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어떤 결정이었을까? 구름 속의 무지개[주: 우리 눈에 보이는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인류를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에게 하나님은 일찍이 홍수로 세상을 멸했었던 적이 있다고 알려 주며,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했는지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그렇게 세상을 멸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했을까? 분명 하나님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을 멸한 뒤 땅의 참상을 조금은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하나님의 눈에 비친 장면이 어땠을지, 우리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지금이나 당시의 그 누구도 하나님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때, 즉 홍수로 멸망한 뒤의 세상을 봤을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인류의 패역으로 인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했지만 그때 홍수로 세상을 멸한 것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 사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느낄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운 언약, 즉 맹세로 하나님이 그런 일을 행한 적이 있음을 사람에게 기억하라고 알려 준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앞으로 영원히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준 것이다. 그 ‘언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멸했을 때 마음이 아팠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고 인류가 사라진 상황을 봤을 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인류가 사람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들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언어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 이런 언어로 하나님의 심정과 느낌을 묘사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리 잘못되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것 같다. 최소한 당시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너희가 아주 생생하고 적절하게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너희가 다시 무지개를 보면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최소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함으로 인해 느꼈던 아픔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류를 증오했지만 자신이 친히 창조한 인류를 멸할 때 하나님은 마음이 아팠음을, 차마 버릴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었음을, 견디기 힘들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그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노아의 여덟 식구였다. 노아의 협력으로 그가 만유를 창조할 때 기울인 심혈이 그나마 헛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상심한 와중에 유일하게 그의 상처를 메워 준 일이었다. 그런 뒤로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노아 가족에게 걸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그들이 다시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광경을 보지 않기를 바랐고, 그들이 멸망되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성품의 어떤 부분을 알아야 할까? 하나님이 인류를 증오한 것은 인류가 하나님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근심과 긍휼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인류를 멸했지만 그의 이 마음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인류가 심히 패괴되어 하나님을 극도로 거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과 본질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원칙대로 인류를 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로 인해 여전히 인류를 불쌍히 여긴다. 심지어 인류가 계속 생존해 가게 하려고 각종 방식으로 인류를 되돌리려 한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대립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부르고 깨우쳐 주고 공급하고 도움을 주고 관용을 베풀어도,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히 여기지 않으며 등을 돌려 버린다. 하나님은 상심했을 때에도 여전히 사람에게 최대한도의 관용을 베풀면서 사람이 돌이키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그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겠다고 계획하면서부터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기한이 있고 과정이 있었다. 이 과정은 인류가 돌이키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최후의 기회였다. 그러니 인류를 멸하기 전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했을까? 하나님은 대대적으로 깨우쳐 주고 권면하는 사역을 했다. 하나님은 아무리 상심하고 괴로워도 인류를 끊임없이 염려하고 보살피고 크게 긍휼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우리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함을 분명히 보았다.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닌, 실질적이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거짓이나 가식, 기만, 불순물이 없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지금껏 그 어떤 거짓된 수단이나 허상으로 인류에게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보인 적이 없다. 또한 하나님은 지금껏 거짓 증거로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보여 자신의 사랑스러움과 거룩함을 과시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런 측면들의 성품은 사람이 사랑할 만하지 않느냐? 사람이 경배할 만하지 않느냐? 사람이 귀하게 여길 만하지 않느냐? 여기까지 말을 했는데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이런 말을 듣고 난 후에도 너희는 하나님의 위대함이 속 빈 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이 빈말에 불과하느냐?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고지상함, 위대함, 거룩함, 관용, 사랑 등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본질의 면면은 매번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구체화되었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구현되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서 구체화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구현되었다. 네가 일찍이 그 느낌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세심히 보살피고 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그의 지혜와 다양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모든 사람의 영을 일깨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와 사랑스러움과 관련해 나름대로의 경험과 느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경험, 느낌, 혹은 인지 모두 결국 이런 모든 긍정적인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종합하고, 거기에 우리가 오늘 언급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을 결합하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더욱 진실하고 더욱 적절한 인식을 갖게 되지 않겠느냐?

……

우리가 오늘 교제한 성경 이야기를 포함해 모든 성경 구절에서 너희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느냐? 하나님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거나 인류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을 표명한 적이 있느냐? 인류를 얼마나 염려하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솔직한 언어로 표현한 기록이 있느냐? 없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 중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나 다른 서적을 읽으면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느냐? 답은 분명하다. 없다! 하나님 말씀 혹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실제 기록을 포함한 성경 기록에 보면, 하나님은 그 어떤 시대나 시기에도 그의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인류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을 표현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말씀이나 다른 어떤 방식의 행위로도 자신의 마음과 느낌을 서술한 적이 없다. 이는 사실이 아니냐?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왜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일까? 이 속에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하나님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한 후, 인류가 패괴된 이후든 인류가 그를 따랐던 때든 상관없이 인류를 자신의 절친한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니까 인류가 말하는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여겼지, 장난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스스로는 창조주이고 인류는 피조물이라고 한 이 말씀은 계급이 나뉘어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인류를 위해 한 모든 행사는 이런 관계를 한참이나 넘어서 있다. 인류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염려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인류에게 공급하는 일까지, 그의 마음은 이런 것들을 가욋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공로가 큰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에게 공급하며 베푼 모든 것이 인류에게 엄청난 공헌을 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으로 조용하고 묵묵히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공급과 도움을 받았든지 그는 사람에게 공을 요구할 생각이나 행동이 전혀 없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로 인한 것이자 진실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나 다른 서적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그래서 사람의 감사와 찬미를 받아 내려고 인류를 향해 하나님 자신이 왜 이렇게 행했고, 왜 이렇게 인류를 보살피는지 설명하거나 표현한 부분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상심하거나 극심한 아픔을 느낄 때에도 인류에 대한 책임과 염려를 잊지 않고 그런 ‘상심’과 ‘아픔’을 홀로 묵묵히 감내한다. 오히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이렇게 인류에게 공급한다. 비록 인류가 자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증거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잘 대해 준 것을 가지고 사람의 은혜에 대한 감사나 보답을 받으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과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자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 쪽에서 이 축복은 조금의 아낌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은 흔히 사람의 상상을 넘어서고, 사람이 한 행위와 사람이 들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의 심정이 어떨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이 받은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느냐? 정확히 말하자면, 없다! 노아를 포함해 인류가 당시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왜 그런 언약을 세웠는지 느낄 수 있느냐? 느낄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거나 지위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감정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독립적이어서 사람의 관심과 이해와 헤아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픔도 희로애락도 없고, 괴로워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어떤 감정적인 표현도 필요치 않고, 그 어떤 감정적인 위로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연약하고 어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안과 공급과 격려가 필요하며, 나아가 언제 어디서든 감정적인 위로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이런 마음이 숨겨져 있다. 즉, 사람은 ‘약자’이니 하나님의 지극한 보호가 필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돌봄’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다. 반대로 하나님은 ‘강자’이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의 수호자이자 축복자가 되어야 하고,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통력이 굉장해서’ 사람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나타낸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실을 훤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고,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고, 인도해 빛을 비춰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이 모든 것과 들인 모든 대가에 대해, 성경이나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분명히 요구하는 말씀을 찾을 수 있을까? 없다! 반대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끊임없이 인도하고 공급하며 도움을 준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행하게 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그의 소유와 어떠함, 은혜와 긍휼과 모든 상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하지만 지금껏 그가 받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그의 마음을 사람에게 드러내 보인 적은 없다. 또한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지 않고,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나님 쪽에서 원망한 적도 없다. 그는 묵묵히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하며, 사람이 깨달을 그날을 기다릴 뿐이다.

여기에서 나는 왜 이런 말들을 할까? 이 말들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는 사람이 가장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인이나 좋은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나,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있는 ‘하나님’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심 없음이다. 사심 없음이라 하면 너는 자신도 매우 사심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네 자녀에 대해 한 번도 대가를 바라거나 셈을 따진 적도 없었고, 부모를 대할 때도 사심 없는 마음으로 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너는 최소한 ‘사심 없음’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개념은 갖고 있을 것이다. ‘사심 없음’은 긍정적이고, 사심 없는 사람이 되는 건 무척 훌륭하다고 여긴다. 만일 너 자신이 사심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아주 위대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만물 속에서나 사람, 일, 사물 속에서나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사심 없음을 본 사람은 없다. 무엇 때문일까?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사람은 물질세계에서 살고 있어서 하나님을 따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너에게 공급하고 사랑을 주고 염려하는지 영원히 보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네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네가 보는 것은 너와 혈연관계에 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너를 몹시 아끼는 그 사람이다. 네가 본 것은 너에게 육적으로 유리한 것들이고, 네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물질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사심 없음이다. 바로 이렇게 ‘사심 없는’ 사람이 오히려 그에게 생명을 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사람의 ‘사심 없음’은 오히려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심 없음’은 실제적이지 않은 공허한 것이고 불순물이 들어 있다. 하나님과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다. 사람의 ‘사심 없음’은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사심 없음’은 하나님의 본질이 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사심 없음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끊임없는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오늘 내가 말하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이 느끼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끄덕여 인정하는 수준에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면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느낄 수 있는 사람과 일과 사물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심 없음만이 진정한 것이고 실제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직 너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무조건적이고 흠결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의 소위 사심 없음도 진실이 아닌 거짓되고 표면적인 것이다. 그것은 목적과 속셈이 있고 거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검증을 이겨 낼 수 없는 것이다. 추하고 비열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너희는 이 말을 인정하느냐?

나는 이런 주제들이 너희에게 상당히 낯설다는 것을 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쌓여야 너희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낯선 문제라고 느끼거나 낯선 주제라고 느낄수록 그것이 바로 너희 마음속에 부족한 주제라는 것을 더욱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영원히 이런 주제들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너희 중 이런 내용을 알 수 있을 사람이 있을까? 너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너희가 얼마나 깨닫고 얼마나 알 수 있든, 결국 내가 말하는 이 주제들은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고,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무척 중요하다. 지극히 소중한 보물이자 생명이며, 너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말씀들의 인도가 없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서도 모른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전혀 모르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도 모르고, 하나님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며, 하나님이 어떤 일로 상심하고 어떤 일로 기뻐하는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상심할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에게 아예 등을 돌린 인류이고, 그를 따르면서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의 어떤 감정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류이다. 이러니 그가 마음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에서 하나님은 진실하게 모든 사람을 향해 사역하고 말씀하며, 조금도 아낌없이, 숨김없이 사람과 대면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그에 대해 폐쇄적이다. 자발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려는 사람이 없고, 자발적으로 그의 마음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지기(知己)’가 되고 싶다는 사람조차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으며, 그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그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해를 받을 때 그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그의 마음이 슬프고 아플 때, 그의 토로를 들으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하나님의 곁에서 함께하며 그의 희로애락을 나눌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하나님은 고독하고 고독하다! 하나님의 고독은 패괴된 인류가 그와 대립하기 때문만이 아니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려는 사람, 나아가 그를 위해 기꺼이 일생을 바치겠다는 사람들까지도 그의 생각을 모르고, 그의 성품과 희로애락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아 이야기의 결말인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평소와 다른 이례적인’ 방식으로 당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음을 보았다. 이 방식은 무척 특별했다.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것을 일단락 짓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때 ‘언약을 세운’ 일은 아주 평범한 일이다. 그것은 단지 문자의 형식으로 양측을 구속하는 일로, 일을 행할 때 규정을 어기지 않도록 양측의 이익을 보호하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형식상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한 출발점과 의미에 입각해서 보면,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각이 진실하게 나타난 것이다. 만일 네가 이 말을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는다면, 내가 일의 진상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인류는 정말로 영원히 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못할 것이다. 너의 상상 속 언약을 세우던 하나님은 웃고 있었을 수도 있고, 엄숙한 표정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상상 속 하나님이 가장 일반적인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아픔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고독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신뢰하거나 신뢰할 만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아픔을 토로할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은 간단한 일을 행하여 지난 인류와 작별했고, 과거의 일을 해결했으며,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일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의 슬픔과 아픔을 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두었다. 하나님은 그가 토로할 만한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과 언약을 세워 사람에게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무지개가 나타날 때 과거에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있음을 상기하게 했고,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하나님은 이토록 마음이 아픈 상황에서도 사람을 잊지 않고 여전히 이렇게 사람을 염려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사심 없음이 아닐까? 반면 사람은 고통스러울 때 무엇을 생각할까? 이때가 바로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이럴 때 사람은 늘 하나님을 끌어당겨 와 위안을 받으려고 한다. 언제든 하나님은 사람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되고, 사람을 곤경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에게 공급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은 안정제나 위로제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마음 아프고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떤 피조물이나 사람이 그와 함께하고 그를 위로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선 분명 지나친 바람이다. 사람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감정을 헤아린 적이 없기 때문에 그는 누군가 자신을 위로해 줘야 한다고 요구한 적이 없고, 위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뿐이다. 하나님이 약간의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 하나님이 모든 일에 기울인 심혈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될 때, 너는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사심 없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웠지만 왜 그렇게 했고 왜 언약을 맺었는지 누구에게도 알려 준 적이 없다. 즉, 그의 진정한 생각을 누구에게도 알려 준 적이 없다. 그가 직접 창조한 인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그가 인류를 멸할 때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느낌을 사람에게 알려 주더라도 사람은 그 ‘신임’을 감당할 수 없다. 그는 마음이 아픈 와중에도 여전히 그의 다음 단계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늘 가장 좋은 부분과 가장 아름다운 것을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 그러면서 자신은 묵묵히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고 기다린다. 하나님이 인내하는 것은 그가 냉혹해서도 아니고, 무감각해서도 아니며,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약함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본질이 본래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본질과 성품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자 진정한 창조주인 하나님의 신분이 진실로 체현된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떤 사람들은 나의 뜻을 오해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이렇게 상세하고 감동적으로 설명한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동정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런 뜻이 있느냐? (아뇨, 없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바로 너희가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은 사람이 빈말이나 글귀, 상상으로 묘사해 낸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 속에서 확실하게 조금씩 나타나는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본질은 분명 실제로 존재한다. 이는 그림도 아니고 상상도 아니며, 사람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사람이 꾸며 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제 너희는 이 사실을 알겠느냐? 너희가 알았다면 내가 오늘 한 이 말들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무지개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표다

(63) 언약의 하나님

어린 시절에 친구와 약속을 할 때는,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서로서로에게 약속하였다. 또는 친구와 땅 따먹기 놀이를 할 때는, 어떤 특별한 모양의 돌이나, 막대기를 세워두면서 여기가 서로서로의 땅의 경계라고 말하였다. 또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다 각자 집을 짓고, 집 앞에 자기 집이라는 표시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세워놓기도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인들 또한 학교나 회사나 공공단체나 어떤 모임이나 단체들은 자기 단체를 상징하는 특별한 이름과 로고 또는 앰블럼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방송공사는 KBS, 문화방송은 MBC, 백석대학교는 BU 또는 백석대학교를 상징하는 새는 독수리 그리고 백석대학교는 ‘기독교 대학의 글로벌리더’라고 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표지를 가진다. 이처럼 모든 단체나 학교는 그것을 상징하는 상징물이나 마크나 로고를 가진다. 이 로고는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것이 상징하는 기업, 학교 또는 단체를 생각나게 해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 또한 그 언약을 기억하게 만드는 언약의 표가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2세들에게 열심히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들의 2세들이 그 표를 보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2세들에게 가르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잘 아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지개와 안식일 그리고 할례이다.

유대인들은 언약의 표로서 가장 먼저 무지개를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에덴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산을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셨다. 그 때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있는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열매를 먹으므로 인하여 행복한 땅,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사람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마침내 온 땅이 악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심판하여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코로 숨 쉬는 것들 모두를 땅위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와 너의 집 식구들은 그 심판에서 건져 줄 것이니, 내가 말하는 모양대로 방주를 만들라.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라. 그 후에 내가 홍수로 모든 땅을 심판하리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모든 식구가 방주에 들어가므로 그 심판을 피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1년 동안, 노아는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1년이 지난 후 방주 안에 있는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 방주에서 나오라. 그리고 이제 이 땅 위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나는 너와 네 후손과 언약을 세울 것이다. 언약은 이것이니 내가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절시키지 않을 것이며, 땅을 멸망시키는 홍수를 다시는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노아에게 복의 말씀을 주신 다음, 하나님은 노아에게 덧 붙여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표를 주시겠다는 은혜와 보증의 말씀이다. ‘나는 나의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다. 그것이 나와 그 땅 사이에 언약의 표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후손과 모든 생물들 사이에 약속을 하시고, 노아의 후손 대대로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표시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 이는 노아와 일대일로 맺은 언약의 표시가 아니라, 노아의 후손과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표시라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너희가 무지개를 보면, 반드시 알아 할 것이 있다. 너희가 무지개를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분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루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신다. 그러므로 네가 무지개를 보는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있다고 너에게 말씀하시는 은혜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그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하신 그분의 책임을 기억하신다는 언약의 표’이다.

저작권자 © 아이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하나님의 약속ㅡ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1~13)

많은 사람들이 무지개가 무엇인지도 알고 무지개와 관련된 이야기도 들었다. 성경에 나온 무지개 이야기에 대해 어떤 이들은 믿고, 어떤 이들은 전설로 간주하며, 또 어떤 이들은 아예 믿지 않는다. 어쨌든 무지개와 관련해 전후로 발생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이 행한 일이자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그 일들은 있는 그대로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기록 속에는 당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려 주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였을 때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기 전후의 마음은 말씀의 행간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 말씀의 한 글자 한 구절을 통해 당시 하나님의 마음이 모두 생생하게 표현된 듯하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는 하나님이 보기에 매우 좋고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한 뒤에 홍수로 멸망했다. 그런 인류가 순식간에 소멸되었을 때 하나님은 마음 아프지 않았을까? 당연히 마음이 아팠다! 그가 마음이 아픈 모습이 어디서 나타났느냐?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성경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단순한 말씀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그때 세상을 멸한 것에 대해 그는 무척 마음 아팠던 것이다.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참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한 뒤 원래 생기로 충만했던 땅이 어떻게 변해 버렸을까? 인류로 가득했던 땅이 어떻게 변해 버렸을까?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생물도 없이 도처에 물만 있고, 물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인 것이다. 그런 광경이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본의였을까? 분명 아니다! 하나님의 본의는 곳곳에 활기가 넘치고, 그가 창조한 인류가 그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또한 노아 한 사람만이 그를 경배하고, 그의 부름을 받아 그가 준 사명을 완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의가 아니었다. 인류가 사라지자 하나님이 보게 된 것은 그가 애초에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닌, 그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품을 나타냄과 동시에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면서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어떤 결정이었을까? 구름 속의 무지개[주: 우리 눈에 보이는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다시는 홍수로 인류를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함으로써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행했는지 사람에게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알려 준 것이다.

확장 열람: 노아의 때가 이르렀는데, 어떻게 하면 말세의 방주에 오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세상을 멸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했을까? 분명 하나님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멸한 뒤 땅의 참상을 우리가 조금은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하나님의 눈에 비친 장면이 어땠을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지금이나 당시의 그 누구도 하나님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때, 즉 홍수로 멸망한 뒤의 세상을 봤을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도 할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다. 인류의 패역으로 인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지만 그때 홍수로 세상을 멸한 것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이 사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느낄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운 언약, 즉 맹세로 하나님이 그런 일을 행한 적이 있음을 사람에게 기억하라고 알려 준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후에 영원히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준 것이다. 그 ‘언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멸했을 때 마음이 아팠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고 인류가 사라진 상황을 봤을 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언어는 인류가 사람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언어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 이런 언어로 하나님의 마음과 느낌을 묘사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리 잘못된 표현도 아니고 지나친 것도 아닌 것 같다. 최소한 당시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너희가 아주 생생하고 적절하게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너희가 다시 무지개를 보면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최소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함으로 인해 받았던 아픔을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류를 증오했지만 자신이 친히 창조한 인류를 멸할 때의 아픔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떼어 내버리기 어려우면서도 어쩔 수 없고 차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말이다. 그나마 그가 위안을 받았던 것은 노아의 여덟 식구였다. 노아의 협력으로 그가 만유를 창조할 때 기울인 심혈이 그나마 헛되지 않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이 상심한 와중에 유일하게 그의 상심을 메워 준 일이었다. 그런 뒤로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희망을 전적으로 노아 가족에게 두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그들이 다시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상황을 보지 않기를 바랐고, 그들이 멸망되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부분의 성품을 알아야 할까? 하나님이 인류를 증오한 것은 인류가 하나님과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근심과 긍휼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그가 인류를 멸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인류가 극도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극도로 거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과 본질로 인해 자신의 원칙대로 어쩔 수 없이 인류를 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로 인해 여전히 인류를 불쌍히 여긴다. 심지어는 각종 방식으로 인류를 구하고 계속해서 생존하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대립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호의를 기어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부르고 깨우쳐 주고 공급하고 도움을 주고 관용을 베풀어도,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히 여기지도 않으며 등을 돌린다. 하나님은 상심할 때에도 여전히 사람에게 최대한도의 관용을 베풀면서 사람이 돌이키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극한으로 치닫고 나면 그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겠다고 계획하면서부터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기한이 있고 과정이 있다. 이 과정은 인류가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최후의 기회다. 인류를 멸하기 전의 기간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했을까? 하나님은 대대적으로 깨우쳐 주고 권면하는 사역을 했다. 하나님은 아무리 상심하고 괴로워도 인류를 끊임없이 염려하고 보살피고 크게 긍휼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분명 우리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함을 보았다. 그 사랑은 입에 달리기만 한 것이 아닌 확실한 것이다. 충분히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으며, 거짓이나 가식, 기만도 없고 불순물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껏 거짓된 수단이나 허상으로 인류에게 자신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보여 준 적이 없다. 또한 하나님은 지금껏 거짓 증거를 하여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보여 준 적도 없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사랑스러움과 거룩함을 과시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사람이 사랑할 만하지 않을까? 사람이 경배할 만하지 않을까? 사람이 귀하게 여길 만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말을 했는데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이런 말을 듣고 난 후에도 너희는 하나님의 위대함이 빈 종잇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이 빈말에 불과할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지고지상함, 위대함, 거룩함, 관용, 사랑 등 모든 성품과 본질의 면면은 하나님의 매번의 사역 속에서 구체화되었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구현되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서 구체화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구현되었다. 네가 그 느낌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세심히 보살피고 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과 자신의 지혜와 다양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모든 사람의 영을 일깨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와 사랑스러움과 관련해 나름대로의 경험과 느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경험이든, 느낌이든, 아니면 인지든, 결국 이런 모든 긍정적인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종합하고, 거기에 우리가 오늘 언급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을 결합하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더욱 진실하고 더욱 적절한 인식을 갖게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후, 인류가 타락한 이후든 인류가 그를 따랐던 때든 상관없이 그는 인류를 자신의 둘도 없는 가까운 존재로 삼았다. 즉, 인류가 말하는 가장 친한 존재로 여겼지 장난감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창조주이고 인류를 피조물이라고 한 이 말씀은 듣기에 조금 등급의 차이를 띠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한 모든 것은 이런 관계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염려하고, 또한 끊임없이 인류에게 공급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그런 것을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공로가 큰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인류를구원하고 인류에게 공급하며 베푼 모든 것이 인류에 대해 엄청난 기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본질과 속성으로 조용하고 묵묵히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공급과 도움을 받았든지 그는 사람에게 공을 바라는 생각이나 행동이 전혀 없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로 인한 것이자 진실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나 다른 서적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행했는지, 왜 이렇게 인류를 보살피고 있는지를 사람에게 표현하거나 표명해 사람이 그에게 깊이 감사하고 그를 찬미하게 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상심하거나 극심한 아픔을 느낄 때에도 인류에 대한 책임과 염려를 잊지 않고 그런 ‘상심’과 ‘아픔’을 홀로 묵묵히 감내한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그렇게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다. 설령 인류가 늘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더라도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잘 대해 준 것을 가지고 사람에게 은혜에 대한 감사나 보답을 받으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과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자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 입장에서 그 축복에는 조금의 아낌도 없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은 흔히 사람의 상상을 넘어선다. 또한 사람이 한 행실과 사람이 들인 대가 이상으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의 심정이 어떨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이 받은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느냐? 정확히 말하자면 없다! 노아를 포함해 인류가 당시의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왜 그런 언약을 세웠는지 느낄 수 있느냐? 느낄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미처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거나 지위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감정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독립적이어서 사람의 관심과 이해와 헤아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픔도 희로애락도 없고, 괴로워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눈물을 흘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감정적인 어떠한 표현도 필요치 않고, 위안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이 필요하다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여리고 약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공급과 격려가 필요하며, 나아가 언제 어디서든 감정적인 위로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이런 마음이 숨겨져 있다. 즉, 사람은 ‘약자’이니 하나님의 지극한 보호가 필요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배려’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받아야 할 모든 것들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강자’이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의 수호자와 축복자가 되어야 하고,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통력이 굉장해서’ 사람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나타낸 모든 것에 대해 본체만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사람의 모든 행실을 하나님은 훤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고,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도하고 빛을 비춰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모든 것과 들인 모든 대가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 사람은 성경이나 오늘날의 하나님의 모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요구하는 분명한 말씀을 찾을 수 있을까? 없다! 반대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끊임없이 인도하고 공급하며 도움을 준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게 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그의 속성과 은혜와 긍휼과 모든 상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하지만 그가 받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그의 마음을 지금껏 사람에게 드러내 보인 적이 없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이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한 적도 없다. 그는 묵묵히 그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 있고, 사람이 깨달을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본문 출처: 하나님의약속

추천 내용:

키워드에 대한 정보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다음은 Bing에서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See also  쇼핑몰 검색 기능 | Psd To Html 39 [ Shopy 쇼핑몰 #5 ] 장바구니 숫자, 검색창 구현, 부트스트랩V4 5446 투표 이 답변
See also  코웨이 정수기 렌탈 | 렌탈계약 3년? Vs 5년? / 렌탈약정 3년 추천이유 / 렌탈료할인💰 / 렌탈클리닉 162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See also  구월동 성형 외과 | 쌍꺼풀 수술종류 \U0026 수술방법(매몰Vs절개Vs눈매교정)/인천구월동성형외과/ 10922 투표 이 답변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무지개와 십자가\”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 성경공부
  • 성서학당
  • CBS성서학당
  • 성경강해
  • 성경해설
  • 성경일독
  • Bibleschool
  • Biblestudy
  • Biblelesson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무지개와 #십자가\”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YouTube에서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우인목사 창세기24강 \”무지개와 십자가\”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