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의 자녀 | [빛의자녀교회] 2022년 8월 17일 (수) 새벽기도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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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엡5:1-14 – 네이버 블로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경계를 나누는 분수령입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예수를 거부하고 믿지 아니하면 어두움의 자식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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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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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가 되려면 (엡 5:8~13) – 말씀 속에 살자

빛의 자녀가 되려면 [에베소서 5장 8절~13절] 8절 –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절 – 빛의 열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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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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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 – 말씀의 실재

성령님은 에베소서 5:8(한글킹제임스)에서 동일한 생각을 나타내셨습니다. “너희가 한때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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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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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답게 행하라 – 다음블로그

히브리 사람들의 변증에 따르면 빛의 자녀들은 빛의 상태 안에 있는 자들이며, 지식과 거룩함을 부여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제 이러한 사람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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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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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자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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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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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효 목사 설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크리스천투데이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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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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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강) 빛의 자녀 – 은석교회

빛의 자녀라는 것도 용서로 인해 거룩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어둠이었던 우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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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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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빛의 자녀/그루터기 – 벅스

가사. 너 빛의 자녀 하나님이 너를 빛으로 부르셨네 생명의 빛이 내 안에 창조의 빛이 내 안에서 영원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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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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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광성교회

2005. 8. 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84)본문 : 엡 5:8-9제목 :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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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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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자녀교회] 2022년 8월 17일 (수) 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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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빛 의 자녀

  • Author: 빛의자녀교회김형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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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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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엡5:1-14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엡5:1-14/ 이기복목사

본문을 통하여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물과 함께 모든 생물이 생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빛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첫날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하고 3-5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천지창조에 있어서 빛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신약에 와서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오신분이라고 소개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장의 스토리입니다. 세례 요한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왔다고 했습니다(요1:7).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8복을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마 5:14-16).

오늘 본문 8절에 “너희가 이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희망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서로 대조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빛과 어두움입니다(dark and light). 빛은 생명과 의와 희망과 번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죽음과 불의와 죄와 절망과 지옥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경계를 나누는 분수령입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예수를 거부하고 믿지 아니하면 어두움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처럼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1.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1-2절). 즉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란 말의 뜻은 “사랑을 입는 자녀 같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려면 먼저 사랑을 입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빛의 자녀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본받고 행해야 할 사랑은 그리스도가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일까요? 2절 하반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즉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십자가 위에서 죽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요1서 2:9에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에 있는 자요”라고 말씀했고 10절에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요1서 3:14에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1서 3:10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1서 4:20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은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서 5:21).

2. 복된 말을 해야 합니다(3-4절).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아 빛의 자녀가 되었으면 언어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본문 3절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은 빛의 자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언어입니다.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언어생활에는 온갖 음행과 더러운 말과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말들을 함부로 합니다. ①음행: 헬라어 “포로네이아”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성적인 부도덕을 의미하는 말, 성령의 열매와는 대조되는 육체의 열매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거스리는 행위입니다. ②탐욕: 헬라어 “플레오넥시아”인데 그 뜻은 “욕심” “탐욕” “탐심” 등으로 번역, “이기적인 수익”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모은 부당한 수익” 더 경계해야 할 의미는 “이웃을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③더러운 것: 헬라어 “아카다르시아”, 성적인 것과 연관된 것으로 성적 방종, 더럽고 추한 말들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악은 빛의 자녀들에게는 입에도 올리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4절에는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세 가지 금지한 언어 즉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은 모두가 3절에 언급한 성적인 범죄와 관련된 언어들입니다. “누추하다”는 말은 추잡하다는 뜻이고 어리석은 말은 성에 대한 어리석은 말을 뜻합니다. 희롱이란 말은 “경박하거나 무례한 말”, 농담”을 뜻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좋은 인격을 소유한 사람의 말에는 품위가 있고 덕이 있으며 그의 말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들은 4절에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감사를 헬라어로 “유카르스티아”라고 합니다. 즉 은혜를 “카리스”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해야 할 말은 감사의 말입니다. 감사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3.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9절).

빛은 열매와 직결 됩니다. 모든 열매는 빛을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나무, 튼튼한 나무라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면 빛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오늘 본문 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goodness)과 의로움(righteousness)과 진실함(truth)”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선함과 올바름과 진실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 열매는 대단히 중요한 열매입니다. 빛의 열매로 말씀한 세 가지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그리스도인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거듭난 자녀들에게 이 성품을 물려주십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대표하는 이 세 가지 열매는 구약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함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다고 칭찬을 하였습니다(대하 31:20).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외치길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선을 행하고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미가 6:8절)

악한마귀는 어떤 성품 입니까? 악함(wickedness)과 불의(unrighteousness)와 거짓(untruth)입니다. 어두움의 자녀들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마귀의 성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악이 몸에 배어 있고, 독한 말만 골라서 하며 근본이 불의합니다. 의를 싫어하고 교활하며 불의의 편에 섭니다. 그리고 간교하고 거짓말을 즐겨합니다. 요즈음 교회에 혼란을 가져오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들의 바로 이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데 믿는 사람들에게만 전도를 하며 교회를 망치려고 하는 사탄 마귀의 하수인들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로 엄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4. 어두움에 참여하지 말고 주를 기쁘시게 하라(10-11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11절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삶은 우선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빛의 열매는 있어도 어두움의 일은 열매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본래 우리는 어두움의 자식들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빛의 자녀로 변한 것입니다. 빛이 되시는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어두움은 물러가고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시 어두움의 일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어두움의 자녀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요 3:19에 “빛이 세상에 왔으되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의 종노릇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특권을 주셨고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빛의 자녀가 되는 우리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1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너희는 무엇이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시험을 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빛의 자녀 된 우리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여기 시험해 보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도키마조”인데 “시험하다” “검토하다” “탐색하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시험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롬 12:2).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험해 보며 탐색해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빛의 자녀들의 본분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과 동기로 말씀하였습니다(롬 14:8, 고후 5:9, 빌 4:18, 골 3:20).

5. 빛의 자녀들이여 일어나라(14절). 하나님은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길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이 말씀을 원문에서 옮긴다면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그리고 너는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주실 것이다” “Wake up, O sleeper, rise from the dead, and Christ will shine on you” 이 부분은 시로 되어 있고 찬송가의 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스타”인데 부활이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입니다. 즉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는 말은 “죄로 인한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주님의 부활하심과 같이 단번에 일어나야 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60장 1절에도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빛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합니다. 선하고 의롭고 진실한 빛의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음문을 열고 빛으로 임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예수님 안에 거합시다. 우리 안에서 어두움은 물러갈 것이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듯, 잠에서 깨어나듯 일어납시다. 예수님과 함께 빛의 자녀답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시대적으로 지금이야 말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할 때입니다.

빛의 자녀가 되려면 (엡 5:8~13)

빛의 자녀가 되려면

[에베소서 5장 8절~13절]

8절 –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절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절 –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절 –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절 –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절 –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오래 전 어느 교회의 부흥회에 갔다가 교만으로 꽉찬 장로님 한 분을 만나보고 놀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장로님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만은 성경 말씀대로 살아온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성경을 하도 많이 보고 환하게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성경을 읽을 필요도 없고, 어떤 목사가 설교를 해도 들을 필요가 없지만 그저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만을 예수님의 후계자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사람이었습니다. 마귀 중에도 제일 무서운 교만 마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꽉찬 것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빛의 자녀가 아닙니다. 아무리 나에게 좋은 점과 착한 점이 있다해도 그것이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면, 강도, 창녀, 도적질의 죄를 지은 자보다도 더 나쁩니다. 비록 지은 죄가 많다하더라도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고 회개하는 겸손한 이만 못합니다. 하나님의 참 빛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훌륭하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기의 추함과 연약함과 죄악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엡 5:13절에서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내지는 것마다 빛이니라”고 했고 현대인의 성경에는 ‘빛이 그들의 죄를 비추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빛의 자녀가 됩니다’라고 빛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취면, 과거에 훌륭해 보였던 것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악한 것으로 드러나고, 선하다고 느꼈던 것까지도 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빛이 비칠 때 일어나는 가장 큰 현상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빛의 자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리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지만 이 세상의 누구도 자기 스스로 자신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렘 17: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 거짓되고 부패했기 때문에 자기성찰과 자기조사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시편에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아는 지식은 꼭 필요한 것인데 자기를 아는 그 지식이 자기 관찰을 통하여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 26:2절에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잘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깊은 속비밀까지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임해야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됩니다. 물 떠난 고기는 혹시 살지 몰라도, 주님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빌리 그레함(Billy Graham) 목사는 설교하기 전에 ‘주여! 성령의 능력으로 나를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진흙덩어리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아 알게 한 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고 따라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후 12: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임해야 우리의 죄악됨을 알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선하고 훌륭한 존재로 생각하다가도 참으로 하나님의 빛이 비취면, 자기가 얼마나 부패하고, 누추한 자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유대인 부인이 전도하면서 어떤 사람에게 구원받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하였더니, 싫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 부인이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인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정결하지 못한가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보며, 자기의 죄가 얼마나 많은지 그는 땅이 입을 벌려 자기를 삼켰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빛이 임하면 우리가 얼마나 죄악되고 추악한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지식만 많으면 하나님의 빛을 많이 받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빛과 지식은 다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전 8:1)라고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임하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성경지식은 풍부한데 하나님의 빛은 전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발견된 지식만이 하나님의 빛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빛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바로 깨닫는 축복이 임하길 바랍니다.

2. 올바른 길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 이끌어 줄 올바른 길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8: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 많은 하나님의 빛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추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05, 시 119:130)라고 시편 기자는 빛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했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때 하나님의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마 5: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달이 햇빛을 받아 반사하여 빛을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빛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해 주고 두려움까지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이상하게 자기의 수치를 느끼게도 됩니다. 나아가서는 자기의 교만과 부정직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님의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본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뛰어난 인물들도 하나님의 빛을 보는 순간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지금 자기가 스스로 거룩하고 죄가 없고 완전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욥입니다. 욥은 스스로 정직하고, 의롭고, 자비를 많이 베푼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세 친구가 그의 죄를 깨우쳐 주려고 노력하였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났을 때에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 6)하면서 회개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말로는 욥을 깨닫게 할 수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빛이 나타날 때 욥은 자신이 얼마나 가증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둘째, 이사야입니다. 훌륭한 이사야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볼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라”(사 6:5)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여호와를 뵙고 이사야는 저절로 신앙고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스스로 입술이 깨끗하지 못한 자라고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기 전에는 자기의 부정함을 실감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날 때 자신의 부정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셋째, 다니엘입니다. 성경에 죄에 대한 기록이 없는 사람이 둘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다니엘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니엘이 얼마나 은총을 많이 입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하나님을 뵙고 나서 말하기를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사람도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얼굴을 땅에 대었던 것입니다.

넷째, 베드로입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고기잡이에 관해서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바다에서 밤이 깊도록 수고했으나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드러난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면서 죄를 고백했습니다.

다섯째,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삼층천까지 올라가 본 사람입니다. 바울만큼 하나님의 빛을 받은 사람이 없는데, 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을 본 사람들은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본래의 영광을 육체 속에 감추시고 계실 때, 요한은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고 예수님의 품에 기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밧모섬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주님의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고 하였고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계 1:16, 17)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과 교회 역사를 통하여서 보면, 경건한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빛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들의 연약함과 타락상을 깨닫게 되어 자기 자신을 심히 낮게 보았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 또 목사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강한 빛이 비치기를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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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실재

빛의 자녀

Children Of Light

“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 살전 5:5)

오늘의 본문 구절에서 성령님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이며, 당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빛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났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빛이므로 당신은 빛의 자녀입니다.

성령님은 에베소서 5:8(한글킹제임스)에서 동일한 생각을 나타내셨습니다. “너희가 한때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행하라” 얼마나 흥미로운지요! 당신이 어둠 가운데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당신이 어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빛입니다. 이는 당신도 이제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빛은 밝힙니다. 당신은 당신의 세상에 빛을 가져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2:15은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빛은 리더십과 방향성을 줍니다. 당신은 이 땅의 어둠과 상관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성공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둠과 문제들이 무엇이든지, 당신이 소망이며 세상이 필요로 하는 해결책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문제들과 어려움은 당신이 빛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러한 의식으로 날마다 살아가십시오.

고백

나는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넘치도록 빛나며, 영광과 덕으로 나의 세상을 밝힙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나를 통해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듣고 받게 되며, 어둠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빛으로 옮겨지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참고 성경

마 5:14-16)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엡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옵 1:21)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1년 성경읽기/롬 5:12-21, 시 52-55

2년 성경읽기/눅 12:13-21, 삿 6

Children Of Light

Ye are all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the day: we are not of the night, nor of darkness (1 Thessalonians 5:5).

In the verse above, the Spirit, writing through the Apostle Paul, was addressing Christians; He’s talking to you, and He minces no words in describing you. He says you’re light! You’re born of God, of His Word, which is light, so you’re the offering of Light.

The Spirit expresses the same thought in Ephesians 5:8. It reads, “For you were once darkness, but now you are light in the Lord. Live as children of light” (NIV). How interesting this is! It doesn’t say you were in the darkness; it says you were darkness, but now, you’re light. This means you can also declare with audacity, as Jesus did, “As long as I’m in the world, I’m the light of the world!”

Light illuminates. You have a calling in this life to bring illumination to your world. Philippians 2:15 says, “That ye may be blameless and harmless, the sons of God, without rebuke,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perverse nation, among whom ye shine as lights in the world.” Light gives leadership and direction; it describes. You’re the one to show the world how to live, what to do, and how to be successful, irrespective of the darkness in the world.

It makes no difference the darkness and problems in the world, you’re the hope and the solution that the world needs. The problems and hardship in the world today are your opportunities to shine and manifest the glory of God. Live with this consciousness every day.

Confession

I’m a child of light, a child of the day. Therefore, I shine forth effusively, illuminating my world with glory and virtue. Through me, the unsaved hear and receive the light of the glorious Gospel and are transferred from darkness into God’s marvellous light, and from the power of Satan unto God. Praise God!

Further Study

Matthew 5:14-16

Ephesians 5:13

Obadiah 1:21

coram Deo

빛의 자녀답게 행하라

본문 : 에베소서 5: 1- 14

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14

두 농부가 한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 농부는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농부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논은 지형상 항상 물이 고여 있도록 된 논이고, 불신자의 논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밤중에 몰래 그리스도인의 논에서 물을 빼서 자기 논에 채웠습니다. 아침에 논에 나갔다가 자기 논의 물이 다 빠지고 옆의 논에 물이 차있는 것을 본 그리스도인은 그 불신자에게 따졌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자기가 물을 끌어간 것이 아니라 저절로 흘러 들어온 거라고 잡아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화가 나서 불신자의 논에서 물을 빼 자기 논에 다시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당연히 취할 권리를 취했는데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왜 정당한 것만 주장하느냐? 왜 네 논의 물이 필요한 이웃에게 스스로 물을 대주지 못하느냐?”

그리스도인에게 깨우침이 왔습니다. 그날 저녁에 그리스도인은 자진해서 자기 논의 물을 불신자의 논에 대주었습니다. 밤에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나왔던 불신자는 이미 물이 찬 것을 보고 금방 영문을 알아차렸습니다. 다음날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본문에서 바울은 불신 상태와 예수를 믿은 이후의 변화를 어둠과 빛으로 이야기합니다. 불신상태는 어둠이요, 예수를 믿은 이후의 상태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둠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빛 되신 주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받고 그 빛을 반사하기에 우리는 빛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빛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함에도 세상은 여전히 어둡기만 합니다. 이는 우리가 빛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컬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며, 그 속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며, 맛을 내야 합니다.

열왕기상 18장 3,4절 말씀에 나오는 오바댜를 보십시오. 그는 악독했던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궁내 대신을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호와를 크게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세상에 뛰어들어 그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주십니까?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6)

우리 다함께 찬송가 502장(통) 259장 ‘빛의 사자들이여’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2. 선한 역사 위하여 힘을 내라 주 함께 하시겠네 주의 넓은 사랑을 전파하며 복음의 빛 비춰라

3. 주님 부탁하신 말 순종하여 이 진리 전파하라 산과 바다 건너가 힘을 다해 복음의 빛 비춰라

4. 동서남북 어디나 땅끝까지 주님만 의지하고 어두워서 못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후렴]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빛이라는 우리 자신의 신분과 빛으로서의 사명과 그 역할을 일깨워 보겠습니다.

첫째, 빛의 자녀들은 빛 되신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2절).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과 주님의 사랑을 닮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너희를 위해 희생하셨듯이 너희도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자신을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빛의 자녀들은 어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3~7절)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어둠의 세력이었으나 빛이 들어왔으므로 어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어둠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본문은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도덕한 삶입니다. 즉,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의 삶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부적절한 언어생활입니다.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 빛이 들어왔으므로 다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으면 믿지 않았을 때 가졌던 부도덕한 생활이나 더럽고 추한 말들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이런 어둠의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공존한다는 데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우리는 과거 어둠을 다 버려야 합니다. 이 사회가 어두운 것은 우리가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어둠의 일을 다 물리쳐야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죄악 곧 어둠에 있는 자의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19- 20)

셋째, 빛의 자녀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8~14절)

본문에서는 빛의 열매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여기서 ‘착함’은 너그러움, 관용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너무나 각박하며 이기주의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 속에서 이웃을 향한 착함과 너그러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선행을 통하여 착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의로움’은 도덕적으로 악, 부정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의롭지 못하며, 불법이 성행하며, 도덕적 부패가 극에 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며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은 허위와 위선의 반대 개념입니다. 우리는 허위와 위선이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참됨과 진실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신이 팽배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믿을 수 있다는 신뢰성과 진실성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바뀌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혹시 우리는 꺼진 등이 아닌지, 우리의 빛을 밝히 비추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고 빛의 자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신앙은 목숨을 건 모험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난관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때는 모험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청교도들은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그들은 신대륙 아메리카의 건설자가 되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건너가 탐험하며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톤은 만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미개한 대륙에 폈습니다. 그는 그의 일생을 아프리카 선교에 바쳤습니다.

중국 내지 선교에 담대히 들어가 선교회를 조직하고 복음을 전파한 허드슨 테일러는 아무 후원자도 없이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 믿음으로 중국 내지 선교를 성사시켰습니다. 이것은 모험적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홀로 아프리카 정글 속에 들어가 흑인들의 병을 고쳐 주며 봉사하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백인들의 흑인들에게 저지른 죄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선교와 봉사에 생애를 바친 성자입니다.

신앙은 이 같은 모험을 감행할 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생의 험한 길을 무릅쓰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지 않는 신앙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빛의 열매(The fruit of light)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장래의 심판에 대해서 말한 다음, 과거와 현재의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진 에베소 교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와 정직한 자의 기도(대상29:17, 잠15: 8)와 의와 공평을 행하는 자(잠11:1, 잠21: 3), 선행(구제)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렘22:16, 시112:9, 잠14:31, 잠19:17, 행20:35)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죄인들이 행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여기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이전의 상태를 추상적으로 어두움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어두움이란 말과 빛이란 말은 상징적인 말입니다. 어두움은 무지와 과오, 그리고 악을 상징한 것이고, 빛은 진리와 의를 상징한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상태는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어두운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죄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며 알려 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대로 패역한 세대입니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untoward)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데 사는 사람은 좌충우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영혼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주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구원의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급격한 변화는 주안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5~7).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 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9~11). 요한 사도는 빛을 사랑으로, 어두움을 미움으로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본문의 전에는 이란 말을 물론 예수를 믿지 아니할 때의 일을 말하고, 이제는 이란 말은 예수를 믿게 된 지금이란 뜻입니다. 전에는 예수 밖에서 어두움이요, 절망이더니 이제는 예수 안에서 빛으로 소망 중에 살게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변증에 따르면 빛의 자녀들은 빛의 상태 안에 있는 자들이며, 지식과 거룩함을 부여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제 이러한 사람들이 되었으니 우리의 언행에서 우리의 처지와 특권에 맞도록 살라는 권면입니다. 이제는 주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선으로 그리고 진리로 우리의 삶을 빛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성령의 열매를 말씀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그 밖의 모든 아름다운 성령을 통한 열매는 다른 말로 말하면 빛의 열매입니다.

햇빛이 비추어야 곡식이 자라고 열매 맺고 그 열매가 익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심령을 비추어야 선과 진리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고 하면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 된 사람들은 본문 10절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본문 11절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잎은 무성 한데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말은 잘 하는데 아무런 행위가 따르지 아니할 때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님은 믿음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에 대해서 말해 내려가다가 에녹에 대해서 말하면서 히브리서 11장 5~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뻐하신 것도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믿음 있는 사람은 칭찬하시며 기뻐하시었고, 믿음 없는 사람은 책망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 우리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이 귀신들려 고생하는데 그 여인이 너무 안타까워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없으시더니 나중에는 그 여인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계속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했더니 예수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흡족해 하시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입니다.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하인 이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실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백부장은 한편으로는 감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송구스러워서 주님, 주님께서 제 집에 오심을 저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저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제 밑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그러니 그저 말씀만 하시옵소서 했습니다. 이 백부장의 말을 듣고 있던 예수님께서 너무 감격하셔서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시면서, 백부장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반면에 믿음 없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셔서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어부 출신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웬만한 바람이 부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갑자기 바람이 부는 것은 그 날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기술로 배를 저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바람은 보통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세차게 불었습니다. 물결이 일어나고 그 파도가 배 안에까지 들어옵니다.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제자들은 겁이 났습니다. 이러다가 전복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저희들의 경험을 가지고 되지 않았습니다. 기술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결국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고물에서 일어나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것을 볼 때 섭섭해하십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제사보다도 순종을 기뻐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삼상15:22) 사실 순종도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순종은 한 수레의 두 바퀴 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순종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지시 할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 그저 예 하고 떠났습니다. 100살 나서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 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 따지지 아니하고 예 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애썼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고기를 잡았느냐? 밤새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이 갈릴리 바다에서 하루 이틀 산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아마 이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라면 저만큼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겁니다. 하늘나라 진리에 대해서야 선생님이 우리보다 낫기 때문에 가르치시지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은 일만은 제가 선생님보다 나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대로 그리고 제 경험으로는 깊은 데는 고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깊은 데 던지겠습니다. 여기 주께서 말씀하시니 한 것은 내 경험이나 상식으로는 맞는 것이 아니지만 주님께서 명령하시니까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말씀대로 깊은 데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이 기뻐하셔서 축복을 안겨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찾고 시험하며 우리 자신을 주의 뜻에 적합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뜻을 받아들였음을 나타내도록 하라는 권면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없이 할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믿음 아닌 것 가지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산다고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오는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리고 너희 스스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할 생각도 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다 찍어 불에 던질 것이라 했습니다.

나뭇잎이 무성하고, 얼른 볼 때 좋은 나무 같아 보이는데, 좋은 열매를 맺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기 세례 요한의 말에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 버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 믿는 사람이 나쁜 열매, 그러니까 적극적인 죄를 범하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것이 죄라고 지적합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이 죄입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는 것은 다 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스스로 거룩하다고 다른 사람을 천시하던 사람들을 향해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만 생각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도 바로 거기에 속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열매가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열매 없는 이란 말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을 말합니다. 어두운 세상의 일을 아무리 해보아야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솔로몬이 말한 대로 헛되고 헛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열매 없는 일들과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스스로 죄악된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과 상관해서는 안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축복 받은 사람은 불경건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피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숯을 가까이 하면 나도 모르는 동안에 숯가루가 몸에 묻습니다. 먼지 구덩이에 들어가면 자연히 먼지가 묻습니다. 축복 받은 사람, 빛의 자녀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쾌락을 위해 생활합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는 세상적인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적인 것이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만족의 근원을 세상에서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미가 달라서 그럽니다. 세상 사람들,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은 만족의 원천을 세상에서, 죄악된 길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주안에 사는 사람은 모든 가치관이 이전과 달라집니다. 주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그리고 빛의 자녀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도 앉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됨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의분을 금치 못합니다. 전에 다윗과 같은 소년은 그 나이 비록 어리고 전쟁의 경험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덤벼드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볼 때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를 쳐서 물리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교회가 욕을 당할 때 의분을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참예하는 것은 마귀와 짝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는 어두움의 일을 책망해야 합니다. 왜요?

본문 12절에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너무 더럽기 때문에 꾸짖는 길 외에는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며, 더구나 그런 사람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만 안겨 줄뿐입니다. 저희들의 죄는 사도 바울이 말씀한 대로 은밀히 행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마 이방인들이 우상 섬기는 것과 그들의 무서운 비밀스런 행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사람들, 죄악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행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그런 일들을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의 악한 것이 표면으로 드러날 때 선한 사람들은 그것을 책망해야 합니다. 어두움에 거한 자는 깨닫지 못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9:7, 8)

13절에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어두움의 열매 없는 일들을 공개하라. 너희는 이 어두움의 일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두움의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너희의 모범적 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을 있는 그대로 보이게 하라는 뜻입니다.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전에 어두움 가운데서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빛인 빛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로 그들의 죄를 발견하게 하고, 이 세상을 비추는 빛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악함과 위험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애통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겔18: 23, 32, 눅15:7)

찬송가 552장 (통) 358장 ‘아침 해가 돋을 때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아침해가 돋을 때 만물 신선하여라 나도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2. 새로 오는 광음을 보람있게 보내고 주의 일을 행할 때 햇빛 되게 하소서

3. 한번 가고 안오는 빠른 광음 지날 때 귀한 시간 바쳐서 햇빛 되게 하소서

4.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맘을 드리고 주의 사랑 나타내 햇빛 되게 하소서

[후렴]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아멘

끝으로 14절 말씀을 같이 보십시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서 60장 1 절에서 참고한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 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주의 사자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죄인들을 부르시고 계신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어나라. 이 말씀은 죄인들의 비참한 안락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합니다.

죄인들은 자기들의 위험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어서 일어나라고 부르실 때 그 말씀의 뜻은 죄인들이 회개함으로 자기의 죄를 벗어버리고 거룩한 순종에 들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이 말씀은 주께서 우리를 지식과 거룩함과 위로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주의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며 마음에 즐거움과 평안으로 활력을 주시며, 종내는 영원한 영광으로 상을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죄인들은 그들의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영적인 무감각 상태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빛의 자녀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여기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성경말씀 가운데 우리는 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도 모르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은, 육신은 살았지만 그 영혼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심령이 죽지는 않았지만 깊이 잠들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심령이 있습니다. 묵은 밭처럼 되어 열매 없는 심령이 있습니다. 전에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잠들어 있었습니다. 요나 같은 선지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요,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깊이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선장을 시켜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라고 깨웠습니다. 왜 일어나야 합니까? 우리의 사명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은 옛날 모세를 바로의 궁중에서 불러 깨웠습니다. 그래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게 하셨습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궁에 있을 당시 유대 민족이 멸망 직전에 있을 때, 모르드개를 통해 에스더를 깨웠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내가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라고 깨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민족을 어둠(죄악)의 자리에서 건지기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안락한 자리에 도취되어 있는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육신적 향락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사명이 정말 큽니다. 빛을 나타내야 합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8:16)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1)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일어나 이 시대의 사명을 다하십시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빛으로 오신 주여, 빛 되신 주님의 삶을 따르지 못하는 저희의 용기 없음을 용서하소서. 이제라도 우리의 삶이 선한 행실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영혼을 밝게 비추시고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님의 불이 당겨져 나의 몸과 마음이 주를 향한 열정으로 타오르게 하시고 우리의 주위에 이 빛을 비출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를 죄악가운데서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71강) 빛의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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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8.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설교>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신자를 ‘주 안에서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빛이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여 자신이 빛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빛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힘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빛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빛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라고 말한 것처럼 어둠에 익숙하고 길들여진 존재가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가 빛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둠을 어둠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을 좇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사도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 이 말이 고상한 윤리와 도덕적인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고상한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본을 보이셨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 영광을 얻고자 하는 길로 가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영광됨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길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빛의 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께 속한 자로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야 할 빛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윤리나 도덕과 무관했던 것처럼 신자 역시 윤리, 도덕과는 무관한 길로 가야 할 사람입니다. 즉 빛으로 사는 것은 훌륭한 행실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빛은 어둠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어둠의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도와 구제를 힘써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어둠이 물러가고 빛의 세상이 되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향한 환상일 뿐입니다.

어둠은 스스로를 어둠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빛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빛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을 환영하지 않고 죽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자신들이 어둠인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어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아니 어둠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이야 말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거하여 계속 빛으로 남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빛이신 예수님이 가신 길임을 생각한다면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환영하고 인정받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세상이 곧 어둠인데 빛이 어둠으로부터 인정하고 받고 환영받는 것은 모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사도의 말에서 특별히 나타내고 실천해야 할 행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생각이 어둠이었던 우리를 여전히 어둠에 붙들어 놓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과 빛은 생활환경이나 행실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어둠의 세계는 범죄가 상대적으로 많이 발생하는 빈민가와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빛은 그런 어둠의 세계에 도움을 주어 환경을 개선하고 범죄가 줄도록 도와주는 선행을 베푸는 것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둠과 빛이라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세상에는 이미 빛의 세계가 존재했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빛이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상은 어둠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둠의 상태는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어둠은 곧 죄의 세력에 장악된 상태를 뜻합니다. 윤리와 도덕 역시 죄에 장악된 상태에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둠일 뿐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으로 살고 선행을 행하는데 어떻게 어둠일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둠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임을 생각한다면 왜 세상이 말하는 선행까지도 어둠일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선행을 뛰어 넘어서 종교 활동까지 어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반발한 것입니다.

어둠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기에 용서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둠의 특징입니다. 반변에 빛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아래 있습니다. 빛의 자녀라는 것도 용서로 인해 거룩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어둠이었던 우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용서로 이미 빛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특별한 선행이나 종교적 행함을 요구하는 의미의 ‘행하라’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어둠에 있게 되면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으로 죄를 씻고 구원 받고자하는 열심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의 행함을 보면서 구원을 확신하기도 하고 자기 구원에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빛의 자녀로 존재한다면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로 인한 용서에 마음을 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행함으로 거룩하게 되었음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고 따라서 교회의 관계로 함께 했을 때도 행함을 기준하여 형제의 믿음을 평가하거나 차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우리가 만들어 내어야 할 덕목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으로 우리가 빛으로 증거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힘과 실천으로 스스로를 빛으로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어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고 우리가 빛의 자녀라면 빛의 지녀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의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전으로 믿는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모든 의를 부인하는 그가 빛의 자녀인 것입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부인하게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전으로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율법은 자연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빛의 자녀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지켜야 할 율법은 없는 것이고 다만 율법의 완전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운 자로 여김 받는 생명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자신의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과 상관없이 의로운 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행과 종교적 실천이 없어도 이미 의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로운 자로 사는 것이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의 근거를 자신의 행함에서 찾는 습성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둠에 깊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미 그리스도로 의로워 졌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둠의 사고방식이고 고질적인 습성일 뿐입니다.

복음을 말하면 많은 신자들이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살라’는 말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라’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복음이 납득이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인한 자유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기 때문에 율법에 매이지 않은 자유자로 사는 것이 빛의 자녀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어려워합니다. 행함이 있는 것을 신앙인의 삶으로 인정하는 어둠의 습성에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자유가 되고 그 자유가 빛으로 드러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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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2005. 8. 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84)

본문 : 엡 5:8-9

제목 :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사람들이 생각할 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서로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성품이나 취미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교회라는 곳을 다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안 다니기도 하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생각을 합니다.

불교를 따르는 사람이나 기독교를 따르는 사람이 서로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차피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고 좋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길만 조금 다를 뿐이지 결국은 비슷한 사람들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선행이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같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고 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그 외의 사람들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그런 분은 아니십니다.

모든 일에 공평하시고 차별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남녀간의 차이도 없습니다.

노소간의 차이도 없습니다.

빈부간의 차이도 두지 않으십니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사이에도 차별은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차별을 두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는 사람이냐의 사이에 있는 차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사이에 있는 모든 차별을 없애시기 위해서 한가지 차별만 두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만 있으면 누구든지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못나도 잘나도 가난해도 부자라고 해도 남자도 여자도 어린아이도 어른도 아무런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잘나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선행을 하고 고행을 해도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정하셨느냐고 따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밖에서 아무리 불평을 하고 항의를 하고 데모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빛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모든 면에 있어서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현저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본문 말씀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어두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지금도 교회 밖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이 어두움 속에 있는 것입니다.

1)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시편 14편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람들에게 없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깜깜한 암흑 속에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장님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모든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의 눈이 장님인 채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장님이라서 볼 수 없는 줄은 모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이 계심을 말씀해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시고 계시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서가 정연한 우주를 바라보면서도 이렇게 신비한 우리 인체의 신비를 알면서도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2)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 하나님이 얼마나 전지 전능하신 분이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어떤 형벌이 주어지는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안다면 그들이 그렇게 살수가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거나

진리를 알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거나

진리를 알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진리를 알면서 아무렇게나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3)그들은 자신들의 최후를 알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2:13절에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가는 천국을 밝은 곳이라고 한다면 죄인이 가는 지옥을 어두운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생들은 형벌을 받아 영원히 어두운 곳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거리에서 흥청거리며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고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최후를 알지 못해서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사는 것이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그들의 영혼을 망치는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저 이 세상의 삶으로 끝이 나는 줄로 알기 때문에 늙기 전에 좀 더 신나게 놀자 판을 벌리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하면 그렇게 쾌락을 즐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룻밤도 헛되게 보내지 말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4)그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삽니다.

세상의지식이나 진리나 모든 면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합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자기가 알고 있고 자기가 경험한일을 모두다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바르게 알고 바른 지식을 가르쳐 주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아는데 대한 너무나 자신이 넘치는 확신 때문에 다른 지식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 수천 개 수만 개 중에 겨우 몇몇 개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큰소리를 칩니다.

복제 양을 만들고 복제 개를 만들고 복제 인간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법칙 몇 가지를 응용해서 만드는 것 뿐이지 크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의의 기준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저들의 모습입니다.

아무 쓸데없는 것 몇 개 아는 것 가지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이 어두움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는 줄도 모르고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알량한 지식 조금 가지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어둠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밝은 빛으로 나오기를 꺼려하면서 어둠 속에서 오늘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빛 가운데서 살고 있음에 자부심을 가지고 어둠 속에서 헤매는 그들에게 이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전에는 우리가 어두움이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주안에서 빛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빛 되시는 주님 품에 왔으니 우리는 밝은 곳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빛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할 때 정말 빛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빛이 상징하는 것이 우리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1)빛은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내가 곧 세상을 비치는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빛은 바른 길로 인도하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밝은 빛이 되셔서 우리에게 길과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빛이라고 할 때 그 빛의 의미를 옳은 행실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성도라면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도록 바르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핵심은 죄인 된 우리가 어떻게 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나라인 천국으로 갈 수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것을 외면하고 우리가 빛일 수는 없습니다.

진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요 그것이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힘이 있어서 그 믿음을 가진 자는 그가 누구든지 간에 그가 강도보다 역적보다 더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하지라도 단번에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믿음을 가진다고 해도 능히 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아원을 수백 개 수천 개 짓고 모두들 변화되어 천사처럼 착한 생활을 한다고 해도 능히 이룰 수 없는 의를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할 때 이 십자가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진리는 감쳐지고 특정인에게만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환하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서 모든 사람에게 밝게 비치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행실로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것보다는 이 진리를 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2)빛은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8:12저라 말씀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할 때 우리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받고 우리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에너지를 받아 힘차게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영원한 생명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의 힘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긴 합니다.

빵 몇 개 주는 것도 아니고 돈 몇 푼 주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별로 반가워하지 않으니까 전도할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해도 도움을 받는 사람이 고마워하고 감사할 때 전하는 사람의 마음이 좋은데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면 줬던 것도 다시 빼앗아 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안다면 서로 받으려고 난리를 칠 것인데 그 소중한 것을 잘 몰라서 우리가 주는 이 귀한 생명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우리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받고 영원한 천국에서 만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할 그 모습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이 복음을 전하고 이 생명을 나누어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빛은 따뜻함입니다.

빛은 모든 사람에게 따뜻함을 줍니다

우리 성도들이 빛이라고 할 때

차갑고 인정없는 세상에서 따스함을 나누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몰인정하고 너무나 야비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자기 먹고 살기에 바쁘고 조금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 좋은 척하고 신앙 좋은 척 하는 사람들도 자기 것을 희생하고 남을 도와주는 일에는 무척이나 인색합니다.

이권이나 개입할 일이 있으면 잘난 척하고 설치지만 남을 도와주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랑나누기 운동을 벌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따뜻함을 나누어주는 것이 빛 된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본문 말씀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어두움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처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새 생명을 얻은 것으로 끝이 나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으로 끝이 나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길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복음적인 설교를 하고 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영원한 새 생명을 얻게 하고 천국에 가는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랑나눔을 통해 지역아동쎈터를 통해 사랑의 급식을 통해서 따뜻함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더욱 애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에 우리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하루 하루를 죽음의 길 멸망의 길로 달려가던 불쌍한 이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게 되었고

영원한 새 생명을 얻게 되었고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을 이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는 참된 빛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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