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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6 (토) [하루 한 장]“보리떡과 물고기” (요6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요한복음 6장은 4복음서가 모두
기록한 오병이어사건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이 다같이
이 사건을 기록한 이유는 이것이
뭔가 대단한 이적이거나 당시
유명한 사건이어서라기보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월절 식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사
우리를 살리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실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무리들에게 경험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온전히 행하신 복음일 뿐
오병이어가 어떤 역할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는 걸 유념합시다
당시 만 여명의 사람들에게
오병이어는 없느니만도 못한
무의미한 양의 음식이었습니다
오병이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분이 복음이십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교회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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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요한복음6장_보리떡과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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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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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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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1-71절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6장 1 – 71절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 벳세다로 가셨습니다. 디베랴는 갈릴리바다의 왼쪽에 있고 벳세다는 오른편 위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쳤던 표적을 보고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무리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빌립은 “각 사람이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하며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때 안드레가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던 오병이어를 가지고 와서 얼마나 되겠느냐고 다시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떡을 가져다가 축사하시고 떼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되었던 선지자라고 하며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으나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 후에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셨는데 이 때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표적이 말하고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만족하여 계속해서 떡을 기대하던 그들을 향해 당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말씀하고 자신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고 떠나지 않은 제자들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님께 있는데 어디로 가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긴 본문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 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이 후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후에’란 5장에서 베데스다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예수님 자신이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씀 하신 이후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상부의 벳세다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이 때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가 따른 이유에 대해서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표적을 보고 예수님께 무리들이 나왔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주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빌립은 말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그 당시 사람이 남자만 5천명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숫자에 들지 않은 여자와 아이까지 치면 2만 명쯤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떡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의 이러한 대답은 극히 정상인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당하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생각과 경험의 한계 속에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주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이렇게 물은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은 왜 아시면서 물으신 것일까요? 빌립을 망신주시기 위해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빌립으로 하여금 우리의 모두의 생각을 대변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로부터 얻은 도시락을 받아들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오병이어였습니다. 안드레는 아이로부터 받은 도시락을 가지고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빌립이 예수님께 질문을 받고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니다. 빌립은 그냥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면 안드레는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가지고 주님 역사해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살 수 있기는커녕 있는 것이라고는 어린아이의 도시락 밖에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안드레도 빌립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함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일 방법이 없다고 못 박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빌립의 믿음이나 안드레의 믿음이나 이 많은 사람들에게 떡을 구해다가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인생에서 완전한 절망이 있습니다. 인생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것에도 절망이 있지만 특별히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게 만드는 일에 있어서 완전한 절망인 것입니다.

벳세다 광야에 모인 수많은 무리들이 자신의 육신을 채울 떡을 구할 수 없었듯이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듯이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스스로는 채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 누구도 채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의나 공로로 자신을 심판에서 구원해 낼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종교적으로 훌륭하게 선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해 줄 있다고 착각하며 그에게 은혜를 구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신앙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얻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나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또한 성인이라고 추대된 사람들이 천국에서 남은 공로를 자신에게 주면 그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나, 그들이 추대한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에게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시고 그 결과 나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공로에는 단 1%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분이 주님이시기에 당신께서 우리에게 떡을 주시는 분임을 본문에서 표적을 통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0절부터 1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주님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누어주실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원대로”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배가 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대로 주어 배부르게 해주었음에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원하는 대로, 배부르게, 열두 바구니”가 의미하는 바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떡을 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조금 부족하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필요한 만큼 주셨다고 했는데 이는 각 영혼들마다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가 다릅니다. 어떤 이는 험악하게 살았었고 어떤 이는 사회적으로도 존경받으며 살았던 이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한 만큼 넘치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열두 바구니가 남을 만큼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단들이나 잘못된 가르침을 하는 사람들의 말에 유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공로를 말하고 행위를 말하는 모든 것은 거짓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이렇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의 반응이 본문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에는 병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았고 현재는 굶주린 이들의 배를 채워주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표적을 본 이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했음에도 주님은 그들을 피해 산으로 가셨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험을 할 때 그 중의 하나가 내게 절하면 만국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본문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고 그 영광을 깔고 앉아 즐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이 땅의 임금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도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들의 반응과 동일하게 반응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이 땅의 떡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에 복을 주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성도들의 간증은 이 땅의 것을 채워주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것은 표적이었을 뿐인데 그것 자체만을 추구하며 예수님을 따르니 예수님은 산으로 가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후에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이 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그들의 목적은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떡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26절과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이해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썩을 양식은 당연히 이 땅의 떡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당장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떡은 인자이신 당신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주님은 2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위하여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위하여 공로를 쌓거나 헌금을 많이 하거나 단 하나의 죄도 범하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단 하나,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만이 영생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행위가 없어도 된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에게 드러나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 열매도 절로 맺게 됩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께 붙어 있는 자들에게는 절로 과실을 맺는다는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의 증거가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행실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 따르는 표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것이 영생을 위하여 하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30절과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따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더 가관인 것은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언급하며 그에 합당한 표적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떡을 배부르게 먹었던 그들이 다시 더 큰 표적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마태복음 16장 3절에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아무리 많은 표적을 보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에 당신이 보일 표적인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나는 표적인데 이것도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표적을 보면서도 당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이 너희가 찾는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당신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으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믿지 않는 그들을 향해 왜 믿지 않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주신 자는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6-40).

이렇게 여러 말씀을 하시고 사람들이 받아 드릴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47절부터 51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것은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떡, 즉 당신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셨고 그 떡을 더 구체화하기를 당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야 이해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신의 살을 먹으라는 말은 정신병자의 말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서로 다투며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군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좀 더 설명해 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주님은 한 술 더 떠서 말씀하셨습니다.

53절부터 5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도 이해 할 수 없어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제는 피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당신의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만나를 언급하셨고 조상들은 만나를 먹었어도 죽어지만 나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유는 이 땅을 떡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떡이 풍성해지는 말씀을 좋아하고 이 땅의 떡을 모으고 그 떡으로 배부른 방법을 교회 내에서 추구합니다. 만약 그것에 대해 채워주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일, 즉 예수님의 사셨던 방법을 말하고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을 가라고 하면 더 이상 그곳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두 떠나 갈 때 주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아주 중요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68절과 6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드로의 입을 통해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신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나아가 그 말씀으로 배부르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십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하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에 오병이어같은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 핵심이 아닌 것입니다.

어리석고 세속적인 인생들은 떡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땅의 떡을 주시는 것으로 진정한 떡에 대해 알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보게 하기 위해 주님은 이 땅의 떡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생들은 떡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그림자인 이 땅의 떡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회의 아픔이고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고 그 떡을 알고 먹게 하는 것은 바로 말씀인 것을 알려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께 주신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생명을 소유하게 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말씀을 더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양식을 공급받고 더 받게 되며 영혼이 성장하고 더욱 건강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우리가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6장 22-40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히딩크와 박지성의 이야기

요한복음 6:22~40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개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우리의 삶의 목표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목표’와 ‘목적’은 비슷한 것 같지만 완연히 다릅니다. 목표는 삶의 방향을 말하고, 목적은 ‘왜’라는 삶의 이유, 곧 의미와 가치를 뜻합니다. 사람에게 삶의 목표, 방향도 중요합니다. 삶의 목적이 잘못되면 가치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몇 년 전, 교육대학원생들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저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 스승의 사표가 되는 게 꿈이고 목표라고 대답할 것을 내심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수강생 중의 한 원생이 건물주가 되는 게 꿈이요 목표라고 해서 내심 놀랐습니다.

교사가 건물주가 되는 게 꿈이라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왜 건물주가 되고자 하는가?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건물주가 되고자 하는 목적이 단순히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라면 설령 건물주가 되었다고 해도 그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다윗의 삶의 목적도 분명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주시리이다(fulfill his purpose for me, NIV).”(시 138:8) 다윗은 나를 위해 보상하여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목적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 기도문에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본문은 이런 그들에게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목적과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나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기를 기도합니다.

1.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요 6:26~27)

사람들은 오랜만에 포식하여 포만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고 나니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날 빵을 배부르게 먹던 생각이 나서 그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실만한 곳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혹시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반가워 코가 땅에 닿기까지 “선생님,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인사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면 영적인 소원과 예수님께 대한 열심히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전날처럼 환영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요한복음에서 표적(Sign)은 그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 뒤에 숨겨진 의미가 중요하며 그것이 본래의 목적입니다. 무리는 오병이어의 표적에서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인격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반사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반응과 응답은 다릅니다. ‘응답(response)’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라면, ‘반응(reaction)’은 반사 신경으로 나타나는 동물적인 현상을 뜻합니다. 무리들은 반사적으로 예수님을 이용해 빵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요 6:2). 그들은 예수님을 병 고치는 의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떡을 먹고 배부른 후에는 아예 예수님을 빵공장 사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배가 부르자 예수님을 이용해서 계속 빵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한 것이 아니라 육의 양식만을 구하는 동물과 같은 물질 차원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전락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고 가진 것이 없으면 마음이 가난하고 순수해집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유하게 되면 영적인 송원을 잃고 타락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았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부유해졌을 때 우상을 섬기다가 타락하여 북이스라엘을 B.C.722년에 망했고, 남유다는 B.C.586년에 바빌론에게 멸망했습니다.

서구 유럽도 예외는 아닙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언덕 위의 교회를 세워 세상을 복음으로 섬기고자 하는 거룩한 소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50세 이상 살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미국을 제사장 나라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유하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죄의 온상이요, 죄를 수축하고, 전쟁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60년대 우리 부모님과 선배 세대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절규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도시락을 가지고 갈 수 없어 점심 시간이 되면 물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는 5,000년 만에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세계 경제 10위 권에 드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좀 먹고살 만하니 일은 안 하고 놀 생각만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꼰대 목사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축배의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우리교회도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개척 초기에 믿음의 선배들의 눈물과 땀과 헌신의 결과입니다. 우리 선배들은 양 한명을 얻기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심방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교회 건축을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지 모릅니다. 밤을 지새우며 말씀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근거 없이 배가 불러 양들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얘기하는게 아니고 제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고 현상유지나 하고자 하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 서구유럽 교회와 같이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위기의식을 깨닫고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짐승과 같이 전락한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썩을 양식’이란 없어질 육의 양식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명예, 권세, 타이틀 등을 포함합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고상하고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모두 쇠하고 썩어져 없어질 것들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하산길에 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우리의 목적과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거짓된 소망이요. 목적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수단이지 진정한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수단을 진정한 목적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고귀한 존재인 만큼 삶의 목적도 귀해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약속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 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값지고 고결한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살면 그 인생도 영원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8~29)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the works God)’은 복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주체가 되어 많은 일을 해서 많은 업적을 남기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거래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할 테니,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거래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하나님의 일(The works of God)’은 단수로,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일을 하고, 일을 많이 해도 내가 주체가 되면 그것은 자기 의와 행위에 기초하여 자기 일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행위보다도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롬 1: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을 축복하시고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주목하시고 그를 귀히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은 인간 편에서 보면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생명을 보존했고, 이스마엘을 낳았고, 피해의식에 빠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나님께 데모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정의 순간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때 그는 믿음의 거목,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신앙이란 처음도 믿음이요, 과정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입니다.

3.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이니(요 6:30~40)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40년 동안 만나를 먹인 것 같이 그들에게도 한 번만 아니라 계속해서 양식을 주면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만나를 주신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위함이었습니다(신 8:3). 또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올 메시아의 모형입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육의 양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참 양식을 주고자 하심입니다. 그것도 40년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하는 영생의 양식을 주고자 하심입니다(요 6:32~33).

그러자 사람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 6:34)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양식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양식은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음식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배고픔과 영적인 배고픔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떡이 필요합니다. 떡은 고상한 용어로 경제 문제입니다. 떡 문제는 사람의 기본욕구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떡보다 절실한 현실문제는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 “사흘 굶어 담 안 넘어 가는 사람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도 배가 고파 빵 한조각을 훔쳐 먹지 않았습니까? 맹자도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란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여야 윤리와 도덕이 선다는 뜻입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는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돈이 필요합니다. 이 기본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돈의 필요성을 인정하셨습니다.

사람이 가장 서러운 것은 춥고 배고픈 것입니다. 시리아 난민의 한 어린아이가 며칠을 굶주리다가 얻은 빵을 허겁지겁 먹다가 죽었다는 뉴스와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먹지못해 신장이 작고 빼빼 마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배고픔은 자체가 고통이요, 불행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굶주림보다도 더 비참한 것은 영적인 배고픔입니다. 영적으로 배고프면 영력이 없습니다. 공허하고 허무하고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그러다가 마약에 손을 댑니다. 재벌 3세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마약에 손을 댑니까? 예수님은 간식이 아닙니다. 심심풀이 땅콩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인데, 현재 생명의 양식입니다(I am the bread of life).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에게 과거의 생명의 떡이 아닙니다. 과거의 생명의 떡이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또 미래의 생명의 떡이 아닙니다. 미래의 생명의 떡이라면 생일잔치 한번 먹자고 열흘 굶는 꼴이 됩니다.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 미래에 잘 먹자고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현재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예수님께 나아와서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떡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생명의 떡입니다. 그런데 무리는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예수님을 생명을 떡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떡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와 더불어 인간에게 책임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요 1:12). 부르심의 초청에 응답해야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믿게 되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생명의 부활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이제 생명이신 예수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사람이 누구 품에 안기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일화입니다. 박지성 선수는 포르투갈 전에서 천금같은 골을 넣었습니다. 박지성은 골을 넣고 두 팔을 벌리고 감격하는 히딩크 감독으로 달려가 안깁니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 선수를 격하게 포옹을 합니다. 그 포옹에는 무명의 자기를 선수로 기용한 감독에 대한 고마움과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감독과 선수 사이에 말없는 사랑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 선수를 축구의 고장 유럽으로 초청하여 세계적인 선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한편 황선홍 선수는 박지성 선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 축구의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였습니다. 그도 폴란드 전에서 천금 같은 골을 넣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16강에서 8강, 4강까지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황선홍 선수가 골을 넣는 순간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와 똑같이 양팔을 벌리고 환호합니다. 이때 황선홍 선수는 히딩크를 선택하지 않고 박항서 코치에게 안깁니다. 황선홍 선수는 후에 자기 생애에 가장 후회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술회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품에 안겨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은 화려하지만 썩은 동아줄과 같고 거미줄과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 양식은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이 양식을 먹는자 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육의 존재이므로 육의 배고픔이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영의 존재이므로 영의 배고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육의 배고픔은 참을 수 있지만, 영의 배고픔은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이 충족될 때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그 품에 안겨 영생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제65과: 요한복음 6장

요한복음 6장 16~21절 을 요약하기 위해, 구주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도록 보내셨으며, 이후 밤에 제자들이 파도와 바람에 맞서 힘겹게 노를 저어갈 때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셨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상기시킨다. 이 사건에 대한 요한의 기록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쁘게]” 배로 영접하고 “곧”( 21절 )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우리가 구주와 그분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필멸의 삶이라는 싸움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구주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으셨는가?

15절 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왕이 되는 대신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야, 즉 이스라엘의 왕이 오시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으로 백성들을 먹이실 것이라는 이야기가 구전되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6장 14~15절 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예수께서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먹이시자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이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었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음식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빵 한 덩어리를 전시한다. 한 학생에게 구주께서 떡 다섯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이신 기사를 요약해 보게 한다.

구주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신성을 증거하시고( 요한복음 5장 참조) 갈릴리로 돌아오셨으며, 이곳에서 그분과 사도들은 복음을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 마태복음 5~13 참조)고 설명한다. 그런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시고 기적적으로 오천 명 이상의 무리를 먹이셨다.( 요한복음 6:1~13 참조)

예수께서 기적적으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다

요한복음 6:22~59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가르치시다

요한복음 6장 22~25절에는 예수께서 기적적으로 먹이신 사람 중 많은 이가 그분을 찾으러 가버나움까지 간 일이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한 학생에게 조셉 스미스 역 요한복음 6장 26절의 내용을 포함한, 다음에 나오는 요한복음 6장 26~27절 문장을 읽으라고 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내가 하는 말을 지키고자 함이 아니요 기적을 본 까닭도 아니며, 다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예수께서 그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구주의 말씀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왜 그분을 찾아다녔는가? (구주께서 하신 말씀은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더 많은 음식을 얻으려고 그분을 따라갔음을 암시한다.)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27절)은 구주의 복음이 지닌 영원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성구들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왕이 되기를 거부하신 이유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6장 28~31절을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하고,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야임을 더 확실히 입증하시도록 사람들은 그분에게 무엇을 원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하시기를 원했는가? (만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주신 “하늘에서 … [온] 떡”[31절]이었다고 설명한다.)

구주께서 그 전날에 하신 일을 고려해 볼 때, 이 요구는 그 무리에 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 그 무리처럼 행동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는가?

몇몇 학생에게 요한복음 6장 32~35절을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게 하고,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구주께서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구주께서는 만나, 즉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언급하면서 자신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학생들에게 35절에 나오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에 표시하라고 제언할 수도 있다.

학생들에게 경전에 표시하고 주석을 달도록 권유하기 학생들에게 경전에 표시하고 주석을 달도록 권유하면, 그들은 배우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표시한다는 것은 핵심어나 성구에 밑줄을 치거나 음영을 넣거나 윤곽을 그려서 나타내거나 두드러지게 하거나 눈에 띄게 하거나 주목을 끌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주석을 단다는 것은 설명이나 해설을 써 넣는 것을 뜻한다. 경전에 표시하고 주석을 달 것인지,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할 것인지는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어떤 점에서 구주와 그분의 가르침을 떡에 비유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주리지 아니할” (35절) 것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35절에 나오는 구주의 가르침에서 여러분은 어떤 진리를 배울 수 있는가? (학생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더라도 다음과 유사한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면, 그분은 우리를 영적으로 키워 주실 것이다. 학생들에게 이 원리를 요한복음 6장 35절 옆 여백에 적어 두라고 제안하면 좋을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미완성 문장을 칠판에 쓴다.

우리는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간다. 그분은 …함으로써 우리를 키워 주실 것이다.

학생들을 둘씩 짝지어 준다. 그들에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몇 가지와 그분이 우리를 영적으로 키워 주시는 방법들을 짝과 함께 수업 공책이나 경전 학습 일지에 열거하라고 한다. 몇몇 학생에게 자신이 적은 것을 반원들 앞에서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반원들이 35절에서 찾은 원리의 진실성과 중요성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도록, 구주께 나아가 영적 양분을 받았을 때 들었던 느낌에 대해 몇몇 학생의 발표를 들어 보는 방안을 고려해 본다.

요한복음 6장 36~47절에 대한 요약으로, 일부 사람들은 구주께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가르치시자 그분에 대해 수군거렸다고 설명한다.

구주께서 가르치신 원리를 하나 더 찾아내도록 학생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몇몇 학생에게 교실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빵을 한 조각씩 준다. 그들에게 빵 냄새를 맡으면서 그 맛이 어떠할지를 상상해 보라고 한다.

여러분이 이 빵의 냄새를 맡고, 맛이 어떠할지 상상해 보고, 하루 종일 그것을 가지고 다니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그 빵의 영양분을 얼마나 잘 취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빵이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유익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몇몇 학생에게 요한복음 6장 49~54절을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교실 앞으로 나왔던 학생들이 빵과 관련해 했던 경험은 구주께서 이 성구들에서 가르치신 것과 어떻게 관련이 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한다.

생명의 떡은 일상의 떡과 어떻게 다른가? (짧은 시간 동안만 우리를 채워 줄 수 있는 떡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지속될 축복을 주신다.)

51절에 나오는 다음 문구를 언급한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구주께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 어떻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주셨는가?

53~54절에 따르면, 구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셨는가?

구주께서는 먹고 마신다는 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셨다고 설명한다. 반원들이 구주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실 앞으로 나온 학생들에게 그 빵을 먹으라고 한다. 그런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한다.

빵을 먹을 때, 그 빵과 그것의 영양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비타민과 영양소는 몸의 일부가 되어, 힘을 내게 하고 건강을 유지하게 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분의 가르침과 속죄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구주께서 이후에 제정하실, 성찬을 취하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54절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속죄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즉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면, 우리는 어떤 축복을 받을 수 있는가? (학생들이 대답하고 나면, 다음 원리를 칠판에 적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속죄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즉 적용한다면 우리는 영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학생들에게 다음 질문을 숙고하라고 한 뒤, 몇몇 학생에게 자신의 답을 말해 달라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속죄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가? (가능한 답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 매주 성찬을 취하는 것, 계명을 지키는 것, 의롭게 생활하며 끝까지 견디는 것이 포함될 수 있다.[Bruce R. McConkie,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358] 참조)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 영원히 그분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6장 56~57절을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하고,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속죄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우리는 어떻게 그분들과 같이 될 수 있는지를 찾아보라고 한다. 그리고 찾은 것을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구주께서 실제로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영향력이 우리와 함께 머물면서 우리가 좀 더 그분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학생들이 찾은 진리들에 대해 여러분의 간증을 전한다. 학생들에게 구주의 속죄나 그분의 가르침 중 하나를 어떻게 더 잘 받아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해 수업 공책이나 경전 학습 일지에 목표를 적으라고 한다.

요한복음 6장 16절-29절, 풍랑이 멈추지 않아도 – 매일성경큐티 새벽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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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매일성경본문에는 두 가지의 사건이 연속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풍랑 속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찾아 다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내용들 중에 예수님이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풍랑이 멈추지 않았던 사건을 묵상하고 새벽예배설교로 정리하여 나눕니다.

요한복음 6장 16절-29절, 풍랑이 멈추지 않아도

매일성경큐티 새벽예배설교

요한복음 6장 16절-29절, 풍랑이 멈추지 않아도

설교 전 찬송

새 찬송가 542장, 구주예수 의지함이 / 새 찬송가 201장, 참 사람 되신

닉 부이치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인 질환으로 인하여 양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를 아실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닉 부이치치는 어린 시절, 자신의 장애로 인하여 우울증을 겪고 자살까지 시도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목사로서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만일, 양쪽 팔이 없고 오른쪽 다리가 없는 닉 부이치치가 하나님께 자신의 장애가 해결되어 정상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실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팔다리가 자라나게 될 수도 있고, 아무런 변함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낙 부이치치는 지금 그런 기도를 하지 않으며 팔과 다리에 심각한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믿음 가운데 기도하면 모두 응답하시는가

닉 부이치치의 경우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고난과 아픔 속에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항상 그 기도의 제목대로 응답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한 대로 응답하시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기도해도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치 닉 부이치치의 팔다리가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팔다리가 생겨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때로 성도가 믿음으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수 있습니다.

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팔다리가 생겨나게 하는 일을 하실 능력이 없어서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성도가 간절히 기도해도 기도 제목대로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그 기도 제목이 전혀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개인의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장애가 있어도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조금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자신의 사역은 충분히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불편함 때문에, 그는 더욱더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대로 기도 응답하지 않으셔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주께서 물 위로 걸어 오셨지만

오늘 본문에는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풍랑 속에서 제자들은 힘껏 노를 젓고 배가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 오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 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20절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예수님께서 20절의 말씀을 하신 후에 갈릴리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풍랑으로 배가 휘청거려도 다른 복음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풍랑 가운데에서도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풍랑이라는 상황이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 배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배 안에 함께 하셨을 때, 풍랑이 잔잔해지지 않고 여전히 휘몰아 치고 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안전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을 지도 모릅니다.

풍랑이 멈추지 않아도

풍랑이 멈추지 않아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풍랑 중에도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난과 아픔이 우리에게 찾아와도 우리는 안전함을 누리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아픔 때문에 더욱 주님을 붙들고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닉 부이치치처럼 말입니다. 오늘 하루, 내 기도의 제목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아도, 주님이 내 안에 여전히 함께 하시니 제자들처럼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려는 땅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함께 할 기도

인생의 풍랑 가운데 기도하게 하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기뻐하는 신앙을 주소서. 우리 교회와 가정이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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