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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 이상학목사 설교] 비유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삶(8) – 잃은 양의 비유 (누가복음 15:3~6)제 목 : 비유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삶(8) – 잃은 양의 비유 (누가복음 15:3~6)
설교일 : 2019. 12. 15
말 씀 : 이상학 담임목사
◈ 새문안교회 홈페이지 : http://www.saemoonan.org
◈ 오늘의 말씀 (누가복음 15:3~6)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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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잃어버린 양은 단순히 불신자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있는 가장 소외되고 비천한 자들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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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의 비유가 말하는 것(눅15:1-10) – 대구성서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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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rosslif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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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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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잃은 양 비유 설교
- Author: 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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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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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설교 4강 – 잃은 양의 비유 (99+1=100) (눅15:1-7)
눅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야기의 줄거리
예수님은 당대에 가장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을 살았던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셨습니다. 그러자 가장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리며 “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밥을 함께 먹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와 내가 한 가족이며, 한 공동체라는 언약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겸상은 곧 너와 나가 하나라는 것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행동으로 보여준 진리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복음의 진리를 그의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비유적 행동 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지 너희들처럼 스스로 의로운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당대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의 진의를 이해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종교 신념으로 예수님을 정죄하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렇게 행동을 보여주는데도 이해 못하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비유로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15장에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잃은 양 비유 , 잃은 드라크마 비유 , 잃은 아들 비유 입니다. 사실 세 개의 비유는 하나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설명합니다.
잃은 양 비유
세 개의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라고 하십니다. 5절, 9절, 32절은 찾는 것 을 말하고 있고, 7절, 10절, 32절은 회개 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앞부분에 “잃은 양”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양이 백(100) 마리 있는데 한(1) 마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99마리를 그냥 들에 놓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낸즉 즐거워서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이웃들과 함께 한 마리 찾는 것으로 잔치를 한다고 합니다. 7절은 잃은 양 비유의 결론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시면서 첫 번째 비유가 끝납니다.
잃은 양은 누구인가? 여기서 말하는 “잃은 양”은 누구를 비유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잃은 양 하면 생각나는 것이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잃은 양 찾기 행사가 생각납니다. 교회 출석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출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잃은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잘 설득하고 교화하여 교회로 다시 인도하는 것을 “잃은 양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잃은 양은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 출석을 안 하는 사람 , 혹은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하여 이제는 믿지 않는 사람 등을 “잃은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잃은 양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일까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인데, 소위 종교인들이라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하고 곡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못 알아먹고 있는 진리를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잃은 양 비유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으셔서 이 비유를 하시는 것일까요? 잃은 양이 누구인지 아니? 너희가 잃은 양이야? 그런데 너희의 문제는 너희가 하나님께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이야? 그런 보이지 않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자기 인식: 잃어버린 양
그럼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이 본문의 의도와 진의를 정확하게 이해한 독자는 잃은 양을 누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 한 마리의 양 이구나? 하나님이 잃어버린 나를 찾으시려고 예수로 오셨구나?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99마리의 양 그러면 99마리는 누구이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양인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당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99마리의 양이라는 것입니다.(우리의 옛 자아) 교회 안에서 난 하나님 잘 섬기고 있고, 봉사 열심히 하고 있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섭섭지 않게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들이 곧 99마리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아홉수 성경에서 10, 100, 1000은 꽉 찬 것, 온전한 것, 완성된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계명을 10으로 주신 것이고(10계명) 열매가 30배, 60배, 100배가 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를 1000년 왕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 99, 999는 십으로 가기 바로 전의 수입니다. 소위 말해 아홉수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아홉은 소위 삼재(三災)가 있는 수입니다. 그래서 9는 불완전의 수, 재난의 수로 상징됩니다. 인생의 재난이 9년을 주기로 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천을 떠돌아다닌 양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아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100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99마리를 들에 두고 양 주인이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면, 99마리를 들에 그냥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들에 두고”가 원문으로 보면 “엔 호 에레모스 카탈레이포”입니다. “들”이 “에레모스”인데, “버림받은, 황폐한”이란 뜻으로 “ 적막하거나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지역 ”을 의미하는 황무지 , 광야 를 의미합니다. 고대 시대에서 광야는 물과 식물이 없으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버려진 유기된 지역을 의미하였습니다.
들에 있는 99마리의 양 99마리를 “들”(에레모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간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 양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의 상태를 “들”에 있는 “99마리”의 “양”이라고 하십니다. 황폐하여 어떤 생명력과 생기가 없는 그들 영혼의 상태가 바로 “황무지”인 것이고, 100이라는 온전의 자리에 도달되지 못한 “99”의 상태인 것이며, 목자 없이는 도저히 생존 불가능한 “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이 “들”에 “99”로 존재한다는 것은 곧 사망이고 , 절망이고 , 죽음 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귀신에게 사로잡혀 그의 세간으로 있는 그 절망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들에 있는 99마리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 까지
그런데 “들에 있는 99마리의 양”과 반대되는 “한 마리의 양”은 어떻게 설명되고 있습니까? 주인이 “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 라고 합니다. 하나를 찾아내기까지 찾는다고(휴리코스) 합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주인이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까? 잃은 양이 주인을 찾는 것입니까? 당연히 주인이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양은 이런 측면에서 수동적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주인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 그런데 성경을 잃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명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 라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 찾을 것이요 ]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 발견한 후 ]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하나님이 찾아 오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근본적인 한계는 창조주를 먼저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사람이 발견한다는 것은 내가 천국을 능동적으로 찾고 발견한다는 것이 아니라 , 내 안에 하나님의 씨 , 그 천국이 실현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 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네,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내가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내 역사와 인생 속에 진주가 심겨져 있기 때문에 그 진주를 발견한 것입니다. 진주는 내가 조작하거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밖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휴리코스)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는 이유 그러니까 성경이 하나님을 찾으라. 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묵시 속에서 이미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 속에서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6절은 주인은 이렇게 찾아서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합니다. 그리고 7절에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합니다.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6절까지는 주인이 양을 찾았는데, 양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갑자기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회개라고 하면, 나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것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회개의 지극한 작은 한 부분입니다.
회개는 고해성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지난날을 후회하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종교적인 다짐이 아닙니다. 회개는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술 마시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 욕 했던 사람이 욕하지 않는 것 이런 행동 몇 가지를 바꾸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 자꾸 교회에서 목사들이(신부) 지난날의 삶과 행동을 회개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그러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기도 생활 못한 거요? 아니면 다른 사람과 싸운 거요?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한 거요? 좋아요! 진심으로 회개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시는 그런 행동 안합니까? 성범죄 회개했던 목사가 다시 성범죄 일으키고, 교회 재정 횡령했던 목사가 다시 그 행동합니다. 개신교에서 가장 종교적인 그 위치에 있는 목사가 그 정도면 성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 많던 회개와 다짐이 정말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 시켰습니까 ? 회개는 그런 반성과 후회나 다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런 것으로 변화될 존재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삶의 질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서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손해 보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본질적인 의미: 하나님의 찾으심
회개의 본질적인 의미 는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찾으심을 통해서 자각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어두움이라는 것을 언제 자각합니까? 빛이 임할 때 내가 어두움에 있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 아는 것이 아니라, “의”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찾고 있음을 알 때 그 때 비로소 내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내가 아직 100으로 완성되지 못한, 99마리의 양이라는 것을 알 때, 여전히 황무지, 광야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양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1)하나가 주어진 자로 99에서 100이 되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찾아진 자)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를(진리) 알게 되어서 백이(온전함) 되는 것입니다. (99+1=100)
제목 : 잃은 양 비유가 주는 교훈
성경 : 누가복음 15 : 1- 7 / 제목 : 잃은 양 비유가 주는 교훈
2019. 8. 4
1991년 3월26일 대구성서 초등학생 5명이 뒤 산에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한 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이 있은 후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하고, 군인과 경찰 공무원, 학생, 전 국민이 동원되어 수년 동안 찾았지만, 사건이 일어난 11년 만에 학생들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면서 전 국민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세상에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는데,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돈, 직장, 건강, 가족 등이 그러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데 잃어 버린 세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잃은 양 비유”가 주는 교훈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믿음의 기초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본문, 잃은 양 비유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고 비난할 때 하신 것입니다.(1-2절) 유대사회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식사를 하는 것 이상의 의미, 한 가족이나 식구, 공동체의 일원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잃어 버린 양은 누구를 가르칩니까? 우리가 보통 “잃은 양” 이라고 할 때 “믿던 사람이 여러 이유로 교회출석하지 않거나, 혹은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 출석을 안 하는 사람, 혹은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한 사람” 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잃은 양은(1절)“세리와 죄인”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난을 받았지만 자신의 부족하고, 죄인인줄 알았습니다. (눅18: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런데 비유에서 목자가 잃어 버린 양을 다시 찾았다는 것은 (7절)“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즉 세리와 죄인들이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잃어 버린 자를 찾으시는 사역이었습니다. (눅19:10)“인자의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세리 마태, 사마리아 여인 또한 잃어 버린 자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달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할 때 주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눅5:4)“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그물을 내린 결과 심히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많은 고기를 잡은 후 “주님!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기를 많이 잡아 너무 기쁩니다.”하지 않고 (눅5:8)“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바다 속에 있는 고기의 길을 아신다면, 나의 생각뿐 아니라 나의 행위도 아실 것이며, 허물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십자가의 피로 용서해 주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할 때에 용서 받을 필요를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일1서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자백”은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이해하겠지?”생각하고 속으로 “미안해요”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른도, 부모도, 가르치는 선생과 목사도 잘못했을 때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세리와 죄인과 같이 자신의 허물을 자각하고 죄인임을 고백할 때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할 때 시작됩니다.
2.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성품인 사랑을 교훈하고 있다.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99마리를 들에 남겨 두고 찾아다녔습니다. 이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목자가 들에 남겨둔 99마리는 언제 어디에서 곰과 사자와 같은 맹수가 나타나서 희생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목자에게 잃어 버린 양은 100마리 중 하나이며, 경제적인 가치로는 1% 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목자는 “나에게 99마리의 양이 남아 있으니까 한 마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손실은 겨우 1%일뿐이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보면 “1%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큰일을 위해 몇 사람 정도의 희생은 당연한 거야”라고 한 두 사람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반응입니다. (6절)“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잔치의 성격을 잘 모르지만, “모든 사람을 향해 나와 함께 즐기자”라고 한 것을 보면, 찾은 양의 값보다 잔치 비용이 더 많이 지불 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 아닌가? 생각될 수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 잔치를 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목자는 경제논리로 잃은 양을 찾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생명을 많은 물질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한 생명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 5월 9일, 북한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3명을 데려오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 국무장관을 시켜 특별 전세기와 함께 북한으로 보내 3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세 사람이 공군 기지에 도착했을 때 대통령이 직접 마중을 나가 그들의 귀환을 환영했습니다.
주님은 거라사에 귀신 들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돼지 2천 마리도 아까워하지 않고 희생시켰습니다. 그러자 거라사 사람들은(막5:17-18)“그들이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거라사인은 돼지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주님은 한 사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잃은 양 비유”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한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랑을 가장 잘 표현 곳은 고린도전서 13장과 요한일서 4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의 의미를 말한 것이라면, 요한일서 4장은 사랑의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요일4:7)“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유효 기간이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혼 초에 부부가 밥을 먹다가 방귀를 끼면 남편이 “깜찍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0년쯤 지나 아내가 방귀를 끼면 “냄새난다.” 야단입니다.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며, 사랑의 유효기간이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스마트 폰을 계속 충전해야 하듯이 우리 또한 계속적으로 사랑을 충전을 해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잃은 양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를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길 바랍니다.
3. 교회와 성도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목자가 잃어 버린 양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은 한 생명의 소중함 때문이긴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한 마리 의 양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양들과 분리 될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레고나 퍼즐과 같이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의 각 지체들은 상호 보완적이며, 각 지체들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잃은 양 비유”는 성도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 양은 99마리 양들과 유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한 마리를 잃어 버린 것은 전체를 잃어 버린 것과 같은 것이며, 동시에 한 마리 양을 찾은 것은 전체를 찾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스페인 남부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는 지브롤터 해협은 지리적으로는 스페인 본토 안에 있지만, 영국령입니다.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브롤터는 스페인 땅이었는데 1713년 펠리페 5세가 위트레흐트조약을 통해 왕위를 인정받는 대신 지브롤터를 영국에 공식 양도했습니다.
스페인은 지브롤터를 “발에 박힌 가시”라며 못내 아쉬워하지만, 엄연히 영국의 통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스페인이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체는 살과 피로서 결합되어 있지만, 교회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생명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상 교회가 부족하고 약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오늘 잃은 양 비유는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인임을 깨달은 자”를 “회개한 자”라고 했고, 잃어 버린 자를 찾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주님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 사랑의교회를 통해 잃은 자들이 날마다 돌아올 수 있도록
힘쓰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잃은 양의 비유 (눅 15:4-7)
성경에 나오는 수 많은 비유 가운데 잃은 양의 비유 만큼 잘 알려진 것 도 드물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누가복음 15장 4-7 절까지의 말씀을 통 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서로 나누고자 합니다.
잃은 양의 비유를 알기 전에 먼저 , 전체 장에서 이 잃은 양의 비유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하나의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15장에 나오는 3개의 비유를 통해 분명해 집니다. 즉 잃은 양의 비유, 잃은 은돈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들 속에서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가지게 되는 기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세번째 비유인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잃었던 사람의 상황과 , 탕자 의 돌아옴에 기쁨 대신 분노를 표현한 떠나지 않은 아들의 상황이 표현됩니 다.
이것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올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를 손가락질 할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비유입니다.
그 비유중의 하나인 잃은 양의 비유는 목자가 다른 양들을 떠나 혼자 길 을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비유가 끝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과 비교할 때 회개하는 죄인이 더 큰 기쁨을 가지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즉 회개하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있고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의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에게 이 기쁨을 가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가 장 거룩했던 무리들인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가장 천대의 대상이었던 세리, 죄인들을 대상으로 하였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발견할 때까지 찾아다닌다고 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 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려본 적이 있는 부모님들은 그 심정을 아실 것입니다. 자녀들이 아닐 찌라도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수많은 고통은 당해 보신 분들만 아실 것입니다.
바로 목자의 심정이 그런 심정입니다. 잠은 물론이고 맛난 음식조차 입 에 댈 수 없는 심정, 만약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다 해주고 싶은 심정, 이런것이 목자의 심정이기에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의 그 기쁨은 6 절의 잔치까지 차릴 정도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양이 돌아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찾아다니는 것은 목자이지만 15장 전체를 보면 그 양이 돌아올 결심을 해야 함이 분명합니다. 7절에도 보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 이라고 했 고, 바로 뒤에 있는 비유인 잃은 은전의 비유에서도 10절을 보면 “죄인 하 나가 회개하면 …”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의 잃은 아들의 비 유에서도 아버지는 기다리셨지만 결코 사람들을 동원하여 찾아 다니지 아니 했습니다. 오직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잃은 양의 비유가 죄인을 사랑하시고,세리와 죄인들을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예케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나의 의지도 필요한 데 그 것을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그들이 들을 마음을 가지고 왔기에 그 일이 가능했습니 다. 만약 우리의 의지가 없이 오직 모든 일은 하나님에 주관 하신다면 우 리는 힘써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찾고 구하고 인도하 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 본문 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말은 무슨 말입니까 즉, 우리의 사명을 말 해주는 것입니다. 누 군가가 세리와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고 그 결과 그들은 영생의 주님을 소유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잃은 양들이 자신의 불행도 모르는채 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우 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마치, 생수를 경험하지 아니한 사마리아 여인은 그 필요를 몰랐던 것 처 럼,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아니하여 자신이 잃은 양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 다.
그리고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잃은 양의 비유가 똑같이 나오는 마태복음 18장 10절부터의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 니다. 같은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오지만 이곳에서의 상황은 조금 다릅니 다.
18장 전체를 훑어보면 1절부터는 어린아이처럼 낮추라는 말이 나오고, 6 절부터는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말라고 하며, 10절부터는 작 은자를 업신여기자 말라는 내용이고, 12절 부터는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 다. 그리고 그 뒤에는 죄 짓는 형제에 대한 용서, 끝 없는 용서,용서하지 않은 악한 종의 비유가 계속 나옵니다.
즉 18장의 잃은 양의 비유의 주제는 18장 전체의 주제와 일치합니다.
즉 1절의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과 6절부터의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 짓게 하지 말라”와 10절 “작은 자를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는것은 14절의 결어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라 도 잃어버리지 않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으로 종합이 됩니다.
누가 복음에서는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하지만 , 마태복음에서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길을 잃은 것을 원치 아니하시는 다는 것을 말 해 줍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의미 만큼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에는 열심이지만 (그것도 하는 사람만 하겠지만요) 전도 해서 앉혀 놓으면 이젠 끝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목자의 심정을 생각해 볼 때 ,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치유문제는 꽤나 갈급한 것이고, 이것을 제대로 하 지 않았을 때, 즉 공동체 안에서 어느 적은 자라도 소홀히 되거나 무시되거 나 잃게 되는 사례가 있게될 때,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때 계산할 것이 무 척 많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마태복음은 제자 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중에서 적은 자 하나라도 결코 소홀히 되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제 자들에게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 비유와 교훈은 우리들에게도 적용 이 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의 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비유이고 , 우리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우리는 오늘 두가지 형태의 잃은 양의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아까 말 씀 드린데 누가 복음의 잃은 양의 비유는 우리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이야기 해줍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 함께, 잃은 돈의 비유,잃은 아들의 비유가 같이 잃은 것의 찾음에 대한 기쁨을 말해줍니다.
잃어진 곳과 찾아야 할 곳은 바로 교회 밖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라 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 서기관들이 외면하며, 비난하며, 멸시하는 이방인 들, 세리, 죄인들이 바로 잃은 자들이며, 그들을 교회에 돌아오게 하며, 회 개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잃은 양 비유는 이같은 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이야기임으로 우리 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인 잃어진 자들에게 눈을 돌려야 함은 마땅합니 다.
오늘날 교회지도자격인 남선교회,여선교회,청년회 회원들이나 교인들이 불신자를 멸시하며 무관심하면 하나님의 기쁨은 사라질 것입니다. 목자는 바깥에 잃어진 양들을 찾아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를 찾을 때까지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다 겪을 것입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찾고야 마는 목자 의 정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굶주리며, 헐벗으며, 죄로 비참해 진 인생들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이방인들인 불신자들을 향한 선교 정책을 보다 강 하게 세우고, 한 영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가지고 교회 일을 해야 할 것 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영혼이 있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 대외선교, 즉 공산권 선교, 타 종교 선교, 언어 풍습 전통 이 다른 타 문화권 선교, 교포 선교 등 해외 선교에까지 확대시켜서 누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계 복음화 과정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 말한 것 처럼 교회 안에 들어온 제자의 무리 즉, 교 인들을 잘 관리하고 돌봄으로 어느 한 생명도 잃어지게 말도록 즉, 오도되 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14절의 말씀처럼 소자중의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 대교회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교회는 옷잘입는 사람, 돈 많은 사람, 권세 가진 사람이 오면 크게 환영해 주고 보 잘 것 없는 사람이 오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례, 한 교인에 대한 교육 프 로그램 즉 교인 양육 계획에 대한 무관심, 몇 천명씩 모이는 큰 교회는 한 교인이 타락해도 마음에 충격이 없는 무관심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린이 또는 작은자 에 대한 관심은 극소하고 모든 것이 어른 위주의 목 회, 교인과 교역자 사이에 대화가 없어 교인 한 사람의 문제가 전혀 고려 되지 않는 대량주의 목회, 1년에 한번도 담임목사와의 대면이 없는 교회,교 회 밖에서 인사를 하면 성도인줄 알아볼 수 없는 목회, 교인들이 탈선을 해 도, 이단에 빠져도, 어디에서 무슨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 하는 현대판 대교회 목회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교역자들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남선교회 내의 일 이고, 여선교회 내의 일이며, 청년회 내의 일이고, 교회학교 내의 일인 것 입니다. 평신도도 마찬가집니다. 하루라도 먼저 온 신도는 모범이 되고 늦은 신도의 교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자는 것이 오늘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교회는 절대로 타락한, 안일한 ,무성의한, 세상을 사랑하는 그런 교 회가 되서는 안됩니다. 오직 대내적으로는 사랑과 아낌과 겸손, 순종, 봉 사로 화목하고, 대외적으로는 세리와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본 받아 최선을 다하여 전도해야 할것입니다.
물론 이로 인하여 얻어지는 손해도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 혹은 서 기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지탄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바리새인 과 서기관은 누구일까요 오랜 , 그리고 형식적인 종교적 생활로 습관화 된 그런 사람이 오늘날의 바리새인일 것이고, 종교를 지식으로만 이해하려 는 지식화된 그런 사람이 오늘날의 서기관일 것입니다.
박사가 높은지 목사가 높은지를 모르고 박사까운을 입고 당당하게 단 위 에서 설교하시는 그런 분들이나 , 영혼구원 보다는 정치나 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 분들에게서 우리는 손가락질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세무소 직원은 언제나 최고의 불법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를 욕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은 정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정당함을 보지 않으셨고 영혼의 구원을 최고의 목표로 보셨기 때문 에 세리를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신 것입니다.
영혼구원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였습니다. 이 귀중한 영혼 구원의 사명이 결코 악세사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온몸과, 정성과, 힘과 , 모든 열심을 다하여 주님이 명령하신 이 명령들 을 지켜 나갈 때 우리는 하늘의 기쁨과 소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랑스러운 귀한 자녀가 될 것입니다. 아멘
설교 하는 마음으로 작성하라고 하셔서 대지,소지는 따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화는 상황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삽입하지 않고 본 문만을 사용했습니다.(상황에 따라 예화를 넣을 것입니다.) 대예배를 설 교하는 마음으로 작성했습니다.
잃은 양 비유
누가복음 15:3-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
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
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
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되는 이 잃은 양 비유는 많은 사람들이 일컬어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그 많은 비유의 말씀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들의 귀에
가장 익숙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비유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비유가 이처럼 귀하게 받아
들여지는 데에는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그 깊
은 뜻을 계시해주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비유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가는 목자, 그것은 곧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갖은 고생과 어려움
을 무릅쓰고 찾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적인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
께서는 친히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도 그 목자는 바로 나라는 의미로 말씀하고 계시는 줄
압니다. 이와 같은 의미들이 있기에 이 비유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높고 귀한 사랑을
그려 보이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모두가 다 아는 익숙한 소재를 들어 비유로 말씀
하셨다는 것입니다.
비유란 다른 이야기와는 달라서 그 말씀의 소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언제나 비유는 듣
는 이 모두가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고아로 자란
사람이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계
시해주는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다같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이렇
게 볼 때에 이 잃은 양의 비유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이요, 특별히 2천여 년 전의 유대 사람
에게는 전부가 잘 아는 그들의 생활 현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는 척은 하지만 양도,
목자도 잘 모릅니다. 그저 들은 것으로 짐작을 할 뿐,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을 통하여 아
는 것만큼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소재를 취하셨습니다. 그리하
여 더욱 좋은 비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말이란 같은 말이라 하
더라도 그 하는 기회가 좋아야합니다. 그 때문에 같은 말이지만 아침에 하는 말이 다르고,
저녁에 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말이라도 어느 순간에 하느냐에 따라 그
반응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중요하고
적절한 계기에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계기가 어떠했는가는 15 : 1∼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 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이것이 바로 기
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죄인과 세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저들을 사
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저들을 멸시하였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저들을 아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영접하실 뿐만 아
니라 함께 식사도 하시고 그러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
님의 처신을 이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본문에 기록된 대로 바리새인
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말하는 것이나 그 가르치는 것을 보
면 지혜가 많고 훌륭한 분인데 하필이면 왜 저런 사람들하고 친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쩌자
고 저런 사람들을 영접하며 함께 어울려 다니는지 이것이 못마땅하여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원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라시며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됩니다. 참으로 좋은 기회에 가장 적절한 소재로서 이 귀한 비유를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당시 사람들의 성분을 한 번 생각해보면, 일반적으로 볼 때에 종교인이 있고
비종교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물론 양쪽 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지만 그러나 저들은
엄격히 이 둘을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전문적인 종교인이요, 하나는 보통의
평범한, 요즈음 말로 표현한다면 민중 계층의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전
문적인 종교인들이 신앙 생활의 규범과 율법을 너무도 까다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
들은 이 법대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좌우간 안식일에 대한 것만도 917가지 규례가 있었
다고 합니다. 그래서는 불을 켠 대로였으면 끄면 안 된다, 꺼 있었으면 켜면 안 된다, 또한
옷고름이 풀어진 채라도 매지 말라, 매었으면 풀지 말라는 등 하여간 이처럼 까다로운 항목
들을 많이 만들어 가지고는 이대로 지켜야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함은 물론 하루
에 세 번씩 기도해야하고 갖가지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다가보면 먹는 것, 입는 것을
비롯하여 기거 동작 전부가 미슈나(Mishnah)라고 하는 율법에 매이게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이 거미줄 같은 율법의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조금 하다가는 그만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저 안식일이나 지킬 정도에서 그치고 그 외의 것은 아무래도 지킬 자신이
없으니 아예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이 율법들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은 이것을 지킴으로 해서 교만해집니
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고는 그
대로 못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율법을 만들어서 율법주의자가 되고 그 율
법을 지킴으로서 교만하여 지키지 못한 자를 멸시하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 생활
이란 어느 한계에서 자칫 잘못되면 하지 않은 것만 못한 엄청난 과오를 낳게됩니다. 이 때
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외식주의와 율법주의 그리고 형식주의를 책망하시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지게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까지 이르게되었다 하여도 잘못된 말이 아닐 것같
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사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대단히 멸시했습니다. 심지어는 너절한 낮은 인간들이라는 뜻에서 “땅의
사람”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격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곧 바리새인이라는 말입니
다. 이 ‘바리사이오스’라고 하는 헬라말은 본래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즉 구별되게 잘 믿
고, 구별되게 종교 생활을 철저히 하며 거룩하게 산다고 하여 바리새인입니다. 그러기 위하
여 바리새인들은 이래야 한다는 입장에서 내세운 소위 거룩한 교훈에 보면, 일반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이러한 규례까지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면 “저들에게 돈을 맡기지 말라, 저들을 믿을 수가 없으니까. 저 사람
들이 어떠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 증인으로 서주지 말라, 저들은 도대체 신실하지 못하니
까. 저들 앞에서는 비밀을 말하지 말라, 그 인격이 시원치가 않아 비밀을 지키지 못하니까.
저들에게 고아를 위탁하지 말라, 처음에는 양자로 키우겠다 하고서는 나중에는 내어버릴테
니까. 구제 단체에 회원으로 넣어주지 말라, 저들은 선한 일을 끝까지 못하니까. 저들과 함
께 여행을 하지 말라, 언젠가는 손해를 볼테니까. 그뿐 아니라 같이 음식을 나누지 말라. 그
집을 방문하지 말라”는 등 참으로 이만저만 멸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토록 저들이 멸시하
는 사람들, 죄인들과 세리를 영접하며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이 저들의 마음에는 대단히
못마땅하여 원망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 그 당시의 목자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요즈음처럼 목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풀이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메마른 사막에서
사막으로 이어지는 중동 지역에서는 어쩌다 자연적으로 조금씩 있는 풀을 찾아 먹이느라 이
곳, 저 곳을 찾아 헤매며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야말로 목자와 양은 사투의 방황을 하게되는
데 어떤 때에는 험준한 골짜기를 지나야하고 또 어떤 때에는 맹수를 만나는가 하면 강도를
만나게도 됩니다. 이러한 때의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채 맹수와 더불어 싸워야하고
강도와도 싸워야합니다. 더욱이 무서운 것은 폭풍과 벼락인데, 이 때에는 자칫하면 많은 양
이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이 대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저들을 보호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목자는 풀이 있는 곳으로 양들을 인도하며, 계속해서 다
음 초장을 찾아 위험한 길을 생명을 걸고 양들을 보호하며 안내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지내는 가운데 양과 목자는 대단히 가까워지고 아주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백 마
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를 경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아
흔 아홉 마리는 그대로 있으니 “그까짓 한 마리쯤은 없어져보았댔자”하며 갈 길만 재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목자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를 생각하며 아
흔 아홉 마리를 그대로 들에다 두고 찾아 나섭니다. 이 목자가 이렇게 찾아 나서는 것은 그
양 한 마리의 값이 귀하거나 손해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가 아닙니다. 이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가 대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
서는 첫째 이유는 그 양의 생명 때문입니다. “저 양 한 마리가 그만 죽겠구나! 어디선가 맹
수에 찢겨 죽겠지! 무참하게 낭떠러지에라도 떨어졌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을
꼬!” 하는, 오직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결코 경제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양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에
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이유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지금 이 목자는
양이 처할 수 있는 갖가지의 위험과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상상하며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
것을 반드시 도와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언제나 상대편을 먼저 생각하는 것임을 우리
는 알아야합니다. 언젠가 한 번 우리 교회에서 4천여 명의 소록도 나환자들을 위해 3백만
원어치의 과자를 선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었는가 하면 그들로부터
과자가 먹고싶다는 연락을 받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과자가 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할 수
가 없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나환자라도 밥은 먹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있어서 낙이 무
엇이겠습니까? 잘 보이기를 합니까, 잘 들리기를 합니까, 아니면 운동을 할 것입니까? 아무
런 낙이 없습니다. 그저 낙이라고는 이 혀끝에 있는 감각뿐입니다. 먹는 재미밖에 없다는 말
입니다. 이제 와서 단 음식 한 쪽 먹는다고 당뇨병 걱정할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무서워할
병이 남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좋은 옷, 화려한 장신구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저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이 작은 사탕 한 알이 최고의 값진 위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래서 저의 생각에 그분들에게 실컷 한 번 과자를 대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과자만 몽땅 3백
만 원 어치를 사 보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분의 입장에서, 지금
그분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양은 제 발로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으니 내가 도우지 않으면 저는 죽는 것입니다. 이는 결정적인 사건이요 보
나 마나한 결과입니다. 이 양이라는 동물은 순하기도 하지만 멍청합니다. 그래서 갔던 길도
돌아오지 못하고 제 집도 못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이 목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저에
게 가지 않으면 저는 내게로 올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은 없습니다. 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요,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지금 목자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지금 불쌍한 처지에 있을 뿐더러 내가 가지 않으면 저
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생각할 문제는 이 양이 유독 혼자서만 왜 길을 잃었나 하는 점입니다. 그 이
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첫째, 이 양이 멍청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 큰 대열에서 떨어졌다면 이것은 어리석다기보다는 멍청한 소치란 말입니다. 그
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유혹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유혹에 빠져서 목자와 그 많은 다른 양
들이 가는 것을 몰랐습니다. 풀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는데 아무리 맛있는 풀을 먹고있다
하더라도 목자가 “가자” 하면 가야되는 것입니다. 또한 “안 된다”고 하면 가지 말아야하고
먹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저기 좋은 풀, 맛있는 풀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거기에
는 독초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얼마 전에도 제주도에서 사슴을 놓아먹이다가 고사리를 먹고 죽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좌우간 독초를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풀이 좀 빈약하
더라도 목자가 지시하면서 먹으라는 대로 먹어야지, 저기도 좋은 것이 있고 여기도 좋은 것
이 있다면서 마음대로 먹어 치우다가는 독초를 먹겠으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은혜를 사모한답시고 이상한 데를 찾아다니며 마음을 들뜨
게 하곤 하는데 이는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거기에는 좋은 말씀도 많지만 위험이 있고,
여기에는 재미가 없고 불편해도 안전합니다. 저기에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희한하게 보이지
만 거기에 위험한 독소가 있고 함정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위험한 일을 버리고 다소 불편하
더라도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안전한 길을 갈 것입니다. 사실 이리 가라, 저리 가라는 안내
가 단조롭기도 하고 때로는 거추장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전한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양은 이런 저런 유혹에 끌려 한눈을 팔다가 그만 대열에서 이탈하
게되어 길을 잃고맙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도취에서 향락을 찾았습니다마는 거기에는 위험
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목자의 인도보다 세상 즐거움을 더 좋아하며 따라갔더니 헤어나지
못할 독소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목자의 마음과 그 태도입니다.
만약 목자가 생각하기를 “네가 잘못했으니 그렇게 벌을 받아야 옳지 않느냐? 인과보응이
다” 하고 만다면 그의 생명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목자는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저를 원망하거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오직 초조한 마음으로 찾아 나섭니다. 그
리고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
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험준한 골짜기를 뒤지며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
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찾은 즉 너무도 즐거워서 본문에 의하면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
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하는 말이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
은 양을 찾았노라”하며 목자의 충만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마는, 여기에서 이 기쁨의 잔치를 할 때에 무엇을 먹었
겠습니까? 별 수 없이 그들의 주식에 속하는 양고기를 먹었을터이고보면 그 잃은 양 한 마
리를 찾고 가만히 잘 있던 양 한 마리를 잡아먹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멍청해서 길을 잃었
던 시시한 양 한 마리 찾은 기쁨에 양 한 마리 값이 지불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이렇게 즐거우니 여타의 것은 많고 적고간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한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 건강할 때 건강의 감사 헌금을 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꼭 병원에 입
원을 했다 나와야 냅니다. 그것도 죽을 뻔하고 나와서 입원비가 모자라 빚까지 내었는데도,
거기에다 감사 헌금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것은 경제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닙니
다. 있다, 없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감격이 되면 집이라도 팔 수 있습니다. 죽었
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는데 여기에 무슨 타산이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따지고 계산할 것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적어도 “다 없어져도 좋아! 나는 즐
거우니까!”하는 이 정도의 감격이라면 정말 멋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합
니다.
일생 중에 이러한 경험을 한 번도 못해보았다면 그가 누구든 그 동안 살아온 것은 헛산
것이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한 번의 순수한 기쁨, 그 감격도 맛볼 수가 없
었다는 것입니까? “이제는 이대로 죽어도 좋아! 다 주어도 좋아! 다 바쳐도 좋아!” 하는 이
러한 즐거움 말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타산이나 이기주의적 생각을 다 잊어버리고 즐거워하
는 기쁨, 그것이 바로 목자의 감격이요 목자의 기쁨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비유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먼저는 하나
님은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멀리서 팔짱
을 끼시고 불쌍한 인간들이 언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
다. 찾아가시는 하나님! 찾기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기다리는 아버지로 묘사되어 기다리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지만, 그
러나 본 비유에서의 목자는 찾아갔습니다. 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모아보면, 탕자 비유 하나
만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그 외의 모든 비유는 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되어있다
는 것입니다. 이는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란 그저 감상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정도 가지고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화해를 원하신다면 내가 친히 화해하러 가야지 화해가 오기를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찾아가
세요. 찾아가서 손을 잡으세요! 기다리는 마음 정도 가지고는 안됩니다. 먼저 찾아가며 그에
따라서 행동하여야 합니다. 행동 중에는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명예를 버
려야 합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손해를 보게됩니다. 보이게, 보이지 않게 이런 저런 손해를 보면서 그리
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희생하면서 구속함
을 주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비판하는 것이 왜 그랬느냐고 잘했다, 잘못했다를 따지거나
말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묻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선 구원하여야 하
고 속량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의롭다하시는 저스티파이 러브(Justify Love)입니다.
여기에서 이 목자의 의를 지금 양에게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사랑으로 양의 전
부를 완전히 덮었습니다. 그저 찾은 것만으로 너무도 반갑고 기뻤기 때문에 책망도, 원망도,
훈계도 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둘러메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롭다하는
사랑입니다. 이 의롭다하는 사랑으로 의로울 수 없는 양의 모습을 완전히 덮었다는 사실입
니다. 이 때문에 양은 감히 주인의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복음은 한 마리 양이라는 점입니다. 이 목자는 아
흔 아홉 마리의 양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한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다는 것은 사랑은 개인적
인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하나
가 지금 필요할까, 안할까? 하는 스스로의 저울질은 다 부질없는 못난 생각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는 다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면 그러기에 하나님께
서는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은 책을 통하여 항상 귀하게 생각하는 한 이
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캐시라고 하는 한 젊은 여성이 대학 졸업 후에 연애를 하다
가 실패를 하자 집을 나간 후 10년 동안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방탕한 가운데 창녀가
되었고 알코올 중독에, 마지막에는 아편 중독까지 되었습니다. 그간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니 나이도 먹어 35세쯤 되자 이제는 아무 남자도 거들떠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강가에 나갑니다. 이제 주위를 살피며 막상 투신 자살을 하려
고 합니다. 그런데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강물을 내려다보노라니 거기에 어머
니의 얼굴이 비추입니다. 이 때에 그녀는 “죽는 것은 서두를 것이 없다. 10년 동안에 어머니
가 얼마나 늙으셨을까! 먼 빛에 숨어 어머니의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죽으리라!”는 생각으로
집을 향하여 갑니다. 무수한 생각들을 머리 속으로 스쳐 보내면서 집에까지 왔는데 무슨 일
이라도 있는지 밤인데도 불구하고 온 집이 환하게 앞뒤로 불이 밝혀져 있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살펴보아도 사람은 없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대문을 조금 밀어보았더니
대문이 열려있습니다. 조금 더 미니까 삑하고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나자마자 어
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오시면서 “캐시냐!” 합니다. 여기서 이 캐시는 꼼짝 못하고 어머니께
붙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께 물어봅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불을 켜놓으
셨으며,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계셨습니까?”라고 하자 어머니의 대답이 네가 접을 나간
지난 10년 동안 문을 잠근 적도 없고 불을 끈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캐시 자신으로 볼 때
는 나 같은 인간은 버려진 것이라고 포기해 왔었는데 그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불을 켜놓고 문을 열어둔 채 10년을 하루같이 기다렸단 말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사
랑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이 하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미 찢기고 병신이 되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상관이 없습니다. 목자는 이 하나를 사랑합니다. 극히
개인적입니다. 한 인격과 한 인격, 1대 1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개별적으
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더구나 멀리 떠나
있거나 비참한 상태에 놓였다면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그를 더욱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비
록 곁길로 갔던 한 마리의 양과 같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 죄인이지만, 이제 주님의 앞에
나와 회개할 때에 주님은 감격하시며 잔치를 베풀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
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의
그 감격스러운 기쁨! 주님의 만족하신 즐거움!
이로 인해 하늘 나라에서는 잔치가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총이 있고 여기에
구속의 기쁨이 있으며, 이것이 사랑의 복음입니다.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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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3-7) 잃어버린 양이 과연 누구인가?
(눅15:3-7) 잃어버린 양이 과연 누구인가?
돌아온 탕자 시리즈 (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3-7)
성경 해석상의 결정적 오류
많은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을 때 꼭 고쳐야 하는 잘못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앞뒤 문맥과 연결하지 않고 한 절씩 떼어서 읽는 것입니다. 심지어 한 문구나 단어 하나의 뜻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럼 따로 떼어낸 부분에 묶여서 전체적인 논리의 흐름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은 원래 장절의 구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이어서 저작되었기에 당연히 또 반드시 앞뒤로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비록 같은 이야기별로 문단을 나눠놓았어도 여전히 한 문단만 따로 떼서 보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결과가 됩니다. 본문의 뜻은 이해했을지 몰라도 정작 저자가 강조하려는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본문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서론 격인 1-2절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하게 된 배경과 이유조차 해석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이해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 하나만 따로 떼서 읽기에 대체로 불신자를 한 명이라도 전도하면 하늘에서 큰 잔치가 열리므로 신자는 전도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이해하고 치웁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포함해 세 비유를 말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사회가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리와 죄인과 식사 교제를 나눴습니다. 자연히 정치지도자인 사두개인들과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두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라고 했듯이 왜 당신께서 그 규정을 어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양은 단순히 불신자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있는 가장 소외되고 비천한 자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주시러 오신 메시아로서 그들을 너무 사랑하기에 끝까지 찾아서 당신께서 품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비유에서 목자는 일차적으로 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전체 내용도 신자더러 전도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들을 찾으면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뒤에서 비방할지라도 당신께선 하늘의 기쁨으로 그들을 영접하며 식사 교제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 두 구절이 별 것 아닌 내용처럼 보여도 그것과 연결시켜서 해석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성경을 나무인 본문만 읽지 마시고 그 전후를 관통하는 논리적 흐름을 파악하여서 전체 숲도 볼 수 있는 습관을 꼭 들이셔야 합니다.
비유보다 주제에 주목하라.
거기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특성을 잘 몰라서 이런저런 오역을 낳습니다. 이참에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지침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비유 자체의 의미에 집착해선 안 됩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강조하려는 어떤 주제를 쉽고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각적 체험적 사례를 들어서 보충 설명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입니다.
비유의 기능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우리말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가 그것입니다. 낫을 보면 한글 철자 기역의 모습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역 자를 기억하려면 낫을 떠올리라는 것이지 낫의 모양을 모르겠거든 기역 자를 떠올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낫에 관한 속담이 아니며 낫은 기역 자의 시각적 예시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낫의 모양은 누구나 익히 다 알고 있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이 속담에서 낫이 가진 역할로 그치고 정작 강조하려는 주제인 기역 자는 따로 있습니다. 비유 자체의 내용만 자세히 해석해서 가르쳐선 안 됩니다. 그럼 누구나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낫의 모양을 다시 설명해주는 꼴이 됩니다.
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도 현장의 청중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 추가 설명이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가나안의 별칭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목양은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직업이었습니다. 목수였던 예수님보다 청중들이 양 치는 일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유는 그래서 주님이 그 비유로 강조하려는 주제부터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이 비유와 별도로 가르쳐주셨기에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비유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에 그 주제를 언급하거나 제자들의 질문에 맞추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본문도 비유의 끝에 주제를 분명히 밝혀놓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 ‘이와 같이’라고 했는데 앞에서 말한 비유의 내용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너희가 이미 잘 알 테니 내가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잘 헤아려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보라.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 주님은 세리와 죄인과 식사 교제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당연히 세리와 죄인들을 뜻합니다. 그럼 또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그들과 밥 한 끼도 나눠먹지 않는 일반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라는 표현이 어딘지 익숙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이 제자들에게 왜 너희 선생은 율법을 어기느냐 물었습니다.
그 식사 자리를 마련한 마태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고 증언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누가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고 더 알기 쉽게 기록했습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회개시키려 왔지만 의인인, 정확하게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은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는 건강하여서 회개할 것이 없고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께 복만 받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반대로 죄가 많기에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만 소망하기에 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동일한 상황인지라 예수님은 이 비유로서 이전에 말했던 동일한 진리를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기준이 무엇인지 또 그 기준에 따라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을 베푸는 그분의 기쁨에 대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아니라 기껏 너희 스스로 제정한 규칙을 어겼다고 나를 이단으로 정죄하려 드는데 제발 내 심정이 어떠한지 헤아려 보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일일이 영적으로 해석하지 말라.
최근까지도 성경은 하나님이 그 저자들에게 직통계시로 말씀하신 것을 저자는 받아쓰기 하듯이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연히 성경의 모든 진술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령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해석하면서 비유의 단어 하나하나에 일일이 영적의미를 부여하려 들었습니다. 그 결과 정작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주제와 아무 관계없는 의미까지 해석자가 임의로 갖다 붙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를 전문용어로 알레고리칼 한, 우의적(寓意的)인 해석법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 할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기에 그런 해석 자체는 의롭고 은혜롭게 받아들여집니다. 다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에 적용하면 낫은 벼를 베는 유익한 도구이나 날카로워서 위험하니까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고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을 다시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 진술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며 유익하고 바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기역 자를 깨우치는 일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비유를 거의 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죄송하지만 성도는 물론 목회자도 이런 원리를 몰라서 그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반면에 이 비유를 들은 현장의 유대인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체험을 많이 했기에 예수님의 결론을 듣자마자 하늘에서 잔치를 벌이는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비유 자체를 그들에게 다시 설명해줄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리와 죄인이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앞으로 나아올 때에 바로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차원의 기쁨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고 영적으로도 뛰어나서 지도자가 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틀림없이 예수님이 지금 자기들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있다고 눈치 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즉,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지 않고 제사만 드리는 사람은 비유를 역으로 유추해보면 바로 자기들임을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
비유를 주제와 상관없이 일일이 별도의 영적인 의미를 붙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주제에 비추어서 역으로 따져볼 수는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비유의 더 깊은 의미를 추적하여서 신앙생활에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설명 드린 대로 비유에서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는 세리와 죄인을, 아흔 아홉 마리 양에는 유대인을, 목자에는 예수님을 대입해서 그 뜻을 살펴봅시다.
양을 한 마리와 아흔아홉의 숫자로 구분한 것은 아무래도 세리와 죄인의 숫자가 일반 유대인들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입니다. 그럼 또 예수님이 일반 유대인과 아흔아홉 번 교제했다면 세리와 죄인은 한 번만 교제했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은 일반 유대인들을 절대로 무시 혹은 경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단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이라도 너무나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천국 백성의 숫자를 늘리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당신과 동행했던 자 단 한 명이라도 천국에 데려가 함께 잔치를 벌이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덜 기뻐하신다고 했지 구원하지 않는다거나 저주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 세리와 죄인을 상종도 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그들이 당신을 조롱 멸시함에도 당신께선 그들과도 교제를 나누신다는 것입니다. 그 양들도 당신의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세리와 죄인을 포함한 백 마리의 양을 갖고 있었습니다. 백 마리이므로 충만한 숫자의 당신의 백성들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민족 전부를, 나아가 온 인류를 아무런 차별 없이 동일한 기쁨으로 바라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쪽에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은 활짝 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사무엘을 통해 백성들의 눈치를 보느라 잘못된 제사를 드린 사울 왕에게 번제보다 순종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그것은 우상에게 절한 죄와 같고 왕이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도 왕을 버릴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삼상15:22) 그런데 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교제 할 때에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뜻을 배우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런 뜻의 말씀을 그 전에 하신 적이 없고 처음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 왕에게 경고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더러 형식적 제사를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진정으로 소원하지 않으면 너희부터 잃어버린 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실체?
이전에 저에게 믿음이 좋은 신자가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만 찾으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누가 돌보느냐고 물었습니다. 교회 밖 불신자 한 명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교회 안에 남아있는 성도들의 양육도 중요한데 예수님의 비유가 조금 불합리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주 예리한 질문이나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비유의 해석 원칙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성경 해석의 첫째 원리는 저자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당시의 문화 관습 상황 등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백 마리의 양 떼를 치려면 두세 명의 목동이 필요했고 최소한 양을 치는 훈련된 개라도 있었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도 나머지 목동이나 그 개가 양 떼를 축사까지 데리고 갈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에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돌보지 않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당시 청중들도 양 치기 관습을 잘 아니까 그런 뜻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 양들도 목자의 기쁨 가운데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서 가장 주목해야할 사항은 따로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이 단순히 길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 땅은 주로 건조한 광야이고 목초지는 높고 가파른 언덕이나 산지에 있었습니다. 양들이 간혹 계곡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숲속에서 헤매다 맹수에게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하자 사울 왕이 크게 염려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는 동안에 맷돌로 사자와 곰도 쳤으니 골리앗도 그런 짐승처럼 물리칠 수 있다고 담대히 대답했듯이 말입니다.(삼상17:36,37)
따라서 양은 벌써 죽었다고 단념해도 될 정도이고 오히려 목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서 데리고 왔다는 뜻입니다. 양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것도 그만큼 사랑하기도 하지만 다른 목자들은 이미 축사로 돌아갔기에 빨리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계곡에 떨어졌거나 맹수에게 물려 크게 다치는 바람에 양 혼자 걸어갈 수 없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죽었던 양이 다시 살아온 셈이니까 비록 한 마리지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바로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졌거나 맹수의 밥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양이라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처해 있는 그들의 바로 그런 위치 때문에 혼자선 도저히 다시 목자나 기존의 양 떼를 찾아와서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들과 유일하게 교제를 나누시는 참 목자인 예수님이 아니면 도무지 구원의 가망이 없습니다.
그럼 반대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깊은 흑암의 계곡이자 무엇이든 포식하는 맹수가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그러하듯이 이 비유 또한 예리하다 못해 아주 풍자적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간의 완악함이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므로 우리 심령을 깊숙이 찔러 쪼개는 권세가 있습니다.
로마를 인정해준 예수님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이방인과 교제를 했으니 이스라엘 민족의 대적인 로마 제국을 인정해준 셈입니다. 실제로 한 번도 로마를 대적하거나 야단치거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할례하지 않은 이방인들은 식사 교제할 때 손을 씻지 않았고 부정한 음식들도 양껏 먹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함께 식사했고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고쳐줄 생각도 안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은 정말로 신성모독자요 율법을 어긴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과 이적에 드러난 신적인 권능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기껏 율법을 핑계 삼아서 말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무참히 패배해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정치와 종교지도자로서 백성들 앞에서 잔뜩 체면을 구기고 자존심이 아주 크게 상했습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은 급격히 늘어나서 아무 죄도 없는 주님을 없애버리려고 작당했습니다. 자기들이 받았던 모욕을 되갚아주려고 수치스런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려고 모든 수단을 강구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평소에는 민족의 원수라고 증오하고 정죄하던, 지금도 예수님더러 식사 교제한다고 자기들이 비방했던 세리와 죄인보다 훨씬 더 사악한 로마 당국과 헤롯왕과도 서슴없이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되어져 갈 사항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다 아시고도 십자가로 올라가는 모든 일정과 과정을 당신의 완벽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당신께서 주도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자기 생명이 위험한 줄 알고도 기어이 양을 찾아오는 참 목자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더라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너무 기뻤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세리와 죄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 랍비가 자기들을 정상인 취급해서 교제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지금 하나님은 자기들을 끝까지 찾아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유대 사회에선 평생을 하나님의 반대편인 사탄의 자식으로만 취급되어서 도무지 소망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때로는 자기들도 많은 죄를 지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구원을 소망하며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마에 분홍글씨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찍혀버렸기에 인간 세상에선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죽지 못해 그저 살아가야할 신세입니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쓸쓸히 죽거나 맹수의 먹이가 되는 길만 남았습니다. 진짜로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것은 인간의 잘못된 관습일 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아무 관계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들도 원래 백 명의 양떼에 속했다가 맹수 같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훼방으로 길을 잃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분의 백성이었다고 인정해주었습니다. 당신 앞으로 나아오면 하늘에서 큰 잔치가 벌어진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유대인들은 비방 멸시에 주눅이 들었는데 그들은 지금 예수 앞에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그들은 예수님 권세에 힘입어 당당하게 집회의 앞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 비유의 뜻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는 반대의 의미로 깨달은 그들은 주님의 기쁨에 동참했습니다. 비로소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고 또 예수님이 실현해줄 것이므로 그분만 따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 랍비와 함께 한다면 유대 사회의 어떤 비방 멸시 핍박도 견딜 수 있다는 믿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동안 유대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 되었기에 도리어 참 목자를 만날 수 있었다고 지난 고난조차 감사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소망은 없다.
코로나로 작금 모든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궁핍해졌을 뿐 아니라 정서적 혼동에 빠졌고 신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시쳇말로 표현하면 모두가 ‘멘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미국 TV에 관광을 홍보하는 광고가 부쩍 늘어났습니다. 올 하반기쯤에는 백신 접종이 완료되어 사회적 면역이 실현되면 이 사태가 종식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입니다. 정상으로 돌아가면 그동안 집에 갇혀 격리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여행부터 갈 것에 대비한 것입니다. 모두가 어서 빨리 그렇게 되도록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보도도 하나 접했습니다. 지난주 미국 CNN TV의 뉴스에서 한 여기자가 사람들이 병원 근처도 가보지 못하고 주차장에서 죽어간다고 눈물을 흘리며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스크도 쓰지 않는 코로나에 무심한 자들을 크게 원망한다고 탄식했습니다. 이번 사태로 인간의 완악한 민낯이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초기에 휴지나 손세정제와 생필품을 먼저 사재기 하려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우울증과 분노에 휩싸여 서로가 서로를 헐뜯기 바쁘고 사람들의 마음도 갈가리 찢어졌습니다.
사태가 오래 지속되어 비즈니스를 못하게 되자 정부의 비상조치가 자기들만 차별한다고 비난합니다. 그 어려운 사정은 딱하지만 모두가 힘듭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자기만 앞세우는 뿌리 깊은 인간의 이기주의만 판을 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먼저 희생해야할 교회도 그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떼들만 있는 불신 세상에 목숨 걸고 끝까지 찾으러 가야하는 목자 역할은 잊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전도에 열심을 내야 한다고 잘도 해석하면서도 말입니다. 서로 도와야만 할 비상사태의 와중에도 이런 판국인데 정상생활로 돌아간다고 과연 인간이 온전해질 수 있을까요? 그 여행 광고가 노리는 것처럼 언제 코로나가 있었느냐는 듯이 신나게 놀고먹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육신적으로 힘든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 비유에 따르면 세리 같은 직업이나, 이방인 같은 인종이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정치적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다 같이 영적으로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우리 모두가 인생이 참으로 덧없고 죽음 앞에 너무나 연약하며 무력하다고 느꼈습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과 그 십자가 은혜를 모르면 모두가 잃어버린 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완악한 인간에겐 끝까지 긍휼이 넘치는 예수님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처절한 죽음의 절망을 맛본 자만이 예수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계곡 밑에서 맹수의 아가리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던 양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찾아와 건져주셨습니다. 천국의 큰 잔치가 바로 나로 인해 벌여졌고 지금도 그분의 크나큰 기쁨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분의 영원히 변함없는 기쁨 안에 속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하나, 잃어버린 양을 향한 주님의 애끓는 심정을 헤아릴 줄 알면 됩니다. 예수님은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주변에 알게 모르게 육신적으로는 물론, 더 중요하게는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단순히 전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딱딱한 교리를 전하기만 해선 안 됩니다. 주님의 기쁨 안에서 은혜와 평강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 그 기쁨이 너무 좋고 귀해서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저절로 눈물이 나서 예수님의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기도라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바로 목자이신 주님과 멀리 떨어져 다시 또 길을 잃어버린 양이 된 것입니다.
(1/17/2021)
잃은 양의 비유가 말하는 것(눅15:1-10)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유명한 장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수록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복음 15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전도에 관한 메시지로 많이 설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으시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잃은 양을 찾는 일에 열심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많이들 설교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본문의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 유리한 대로 끌어다대는 아전인수식 성경 읽기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 이야기는 평판이 좋지 않은 세리나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 듣는 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불평한 데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1세기 유대사회는 ‘죄인들’과 ‘의인들’로 지칭되는 두 계층이 갈등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다든지, 율법적으로 더러운 질병에 걸렸다든지, 술주정꾼이라든지,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라든지, 세리와 같이 로마에 협조하는 매국노라든지,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든지 하면 죄인 그룹에 속했고, 혈통적으로 순수한 유대인이나, 더러운 병에 걸리지 않고 육체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들, 율법을 문자적으로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의인’,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자’ 그룹에 속했습니다. 자칭 의인들은 죄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의로움의 증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를 매우 불결하게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금기시했습니다. 또 자신들의 정결함뿐 아니라 유대사회의 정결함을 위해서도 죄인과 의인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인과 죄인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과 악이 뒤섞이는 것을 금기시하며 경계해왔습니다. 결국 1세기 유대인 사회는 선악을 구분함으로써 유지되는 율법적 질서, 종교적 질서가 중요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만나거나 대할 때 어떤 이유로도 차별하거나 선을 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볼 때 항상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사회적인 잣대나 인간적인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재능이나, 성품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출신 배경 같은 것으로 사람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헤롯왕이나 베드로나 가롯 유다나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나 세리나 이방 여인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람은 구원받고 회개해야 하는 존재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 주변에는 아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각종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로부터 시작해서 평판이 좋지 않은 죄인들, 로마의 앞잡이로 봉사하는 매국노들, 로마에 항거하는 열혈 유대주의자들, 진지한 구도자들, 이리저리 휩쓸리기 잘하는 생각 없는 군중들, 이방인들까지 참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었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을 듣는 것도 그렇게 낯선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1세기 유대사회의 근본주의자들이 볼 때에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동으로 보였겠습니까?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투덜거리는 게 당연했습니다. 왜 유대사회의 오랜 금기사항을 어기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저들이 불평하자 예수님이 저들의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이야기 한 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15장 이야기는 전도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재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사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논쟁이나 비판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논쟁이고 비판입니다.
예수님이 논쟁하고 비판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행동을 환기시키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이나 잃은 동전을 찾은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합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을 깨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그리고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함께 기쁨을 나누지 않겠느냐?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성정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잃은 것이 한 마리에 불과하다고 해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소홀히 하고 찾지 않는 주인이 어디 있겠느냐는 겁니다. 동전 이야기도 동일합니다. 동전 한 닢을 잃었다고 해서 찾지 않고 방치하는 여인이 어디 있겠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찾을 때까지 찾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찾으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그렇게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잃은 양 하나를 찾는 것이 주인의 보편적인 마음인데, 양뿐만 아니라 동전 하나를 잃어도 최선을 다해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너희는 사람에 대해서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찾기는커녕 골짜기로 내몬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어도 외면하고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차적인 비판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통해서 보편적인 정서에도 미치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사악함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판 속에는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만든 종교적인 잣대로 죄인들을 규정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을 빙자해서 만든 것이긴 하나 율법의 정신은 외면한 채 피상적인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율법은 본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존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를 보게 함으로써 존재가 죄에게 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율법으로 사람을 억압했습니다. 율법으로 울타리를 쳐놓고,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만 하나님을 독점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만유의 하나님을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인들을 내쳤습니다. 종교적 차원의 율법으로 종교적 차원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고 정죄하는 엄청난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동등합니다.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람은 율법 앞에 서야 하는 존재이지 율법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율법 앞에 서지는 않고 율법을 휘두르기만 했습니다. 죄인을 규정하고, 죄인을 울 밖으로 내쳤습니다. 죄인은 존재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저들의 존재는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했습니다. 눈에 보여도 보지 않았고, 옆에 있어도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양도 그렇게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들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는 놓아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 들판과 골짜기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비록 짐승에 불과하지만 그 존재를 잊지 않고 찾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내치기만 했지 찾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의 존재 자체를 아예 외면하고 부정했습니다.
여러분, 피조물인 인간이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더욱이 존재의 근원이시고 창조주인 여호와를 믿고 신앙한다는 사람들이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처럼 잔인하고 오만하고 불의한 죄악은 없습니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독하고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런데 1세기 유대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는 그런 악독함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매우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타종교인들이나 기독교 밖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사탄의 자식이라고 바라봅니다. 전도하는 일에는 열심인데, 일상생활에서는 타종교인들을 배척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슬람교나 불교 국가는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큰 재난을 당해도 긍휼의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선을 긋습니다.
또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몸을 파는 여자라든지,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든지,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시선이 어떻습니까? 매우 적대적이고 차갑습니다.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세상과 선을 긋고, 세상을 외면하고 세상을 정죄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고 과시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걸 확인합니다. 사실입니다. 1세기 유대사회의 종교인들이나 오늘 그리스도인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1세기 유대사회 종교인들의 행동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봅시다. 저들이 죄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를 좀 더 깊이 파고들면 그 속에는 좀 더 교묘하고 치사한 인간의 사악함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칭 의인들이 죄인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을 그어 놓고 죄인들을 선 밖으로 내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죄에 오염되는 게 무서워서일까요? 백로가 까마귀 노는데 가면 검게 될까봐 아예 선을 그어 놓고 함께 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칭 의로운 자들이 죄인들을 부정하고 선을 긋는 것은 선을 그음으로써 자기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과 우리는 다르다는 차별화를 시도함으로써 자기들은 특별한 사람인 것을 과시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자칭 의인들이 죄인들을 볼 때마다 어떤 마음이 들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저놈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기 만족감에 휩싸이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자칭 의인들에게 죄인은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의인들이 자기 존재감과 종교적 우월감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죄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죄인들을 멸시하고 내침으로써 자기들의 존재감과 영적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인간의 치사함이요 인간의 사악함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죄성의 어두운 면입니다.
사실 이런 치사함과 사악함은 형태는 다르지만 모든 사회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1세기 유대사회처럼 종교적인 사회에서는 의로움이 차별화의 중요한 전거였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차별화의 중요한 전거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돈 있는 자들은 자기들만의 소비 영역을 만듭니다. 돈 없는 자들이 살 수 없는 고가의 명품을 보란 듯이 소비하면서 자기들은 특별 계층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과시합니다. 명품 자체가 탐이 나서가 아닙니다. 명품을 소비함으로써 사회적인 우월감과 차별성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에 명품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도 명품이 잘 팔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참 치사하고 사악한 방식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수준에서 놉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돈이 없어서 그렇지 돈이 많으면 우리들도 대부분 그 치사함과 사악함의 수준에서 놀 겁니다. 백화점마다 명품 코너를 따로 만들고, 은행마다 vip 석을 따로 두는 것도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명품뿐 아닙니다. 지성인 사회에서는 어려운 낱말을 골라 쓰고, 학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은근히 자기 실력을 과시합니다. 무식한 놈과 차별화를 드러내고, 그런 차별화를 통해서 자기 존재감을 만끽하는 겁니다. 사실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치사한 존재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있는 치사함 하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각각의 비유 말미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늘의 기쁨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 주인처럼, 잃은 동전을 찾아 온 집안을 쓰는 여인처럼 하늘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는 회개할 필요가 있는 죄인 한 사람이 죄를 깨닫고 돌아설 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죄인들을 멸시하고 부정하는 자칭 의인들에 대한 직격탄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의 존재를 멸시하며 부정하고 있지만 하늘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직격탄을 날린 것입니다. 하나님도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데, 하나님도 인내하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너희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인을 멸시하고 부정하느냐고 통렬하게 꾸짖은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행동을 해왔다고 준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를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저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철없는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에도 아버지는 돌아오는 날까지 아들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아들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집을 나갔지만 아들의 존재는 언제나 아버지 마음속에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이 지난 오늘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존재와 죄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존재 속에 침투해 들어와 있는 죄를 분리함으로써 존재를 회복시키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죄에 먹힌 존재를 죄로부터 구출해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존재를 긍정하는 최종적인 행위가 곧 곧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잃은 양과 잃은 아들이 비유가 말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긍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존재가 죄에 오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긍정하십니다. 잃은 것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야말로 존재를 긍정하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존재를 긍정하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죄인을 판단하는 눈만 있었지 죄인의 존재까지도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눈이 없었습니다.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고,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데, 그들에게는 결정적으로 그 눈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존재를 멸시하고 부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죄악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정죄함으로써 자기들의 의로움을 확보하고 확인하는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뿐 아니라 우리 안에도 존재를 부정하려는 사악함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툭하면 등을 돌리고, 죽이겠다고 덤비고, 차별화하고, 선을 긋는 추악한 의지가 죽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존재를 긍정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눈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잃은 것을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를 긍정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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