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을 보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성품 (77) –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2022-06-03 금요성령집회) – 박한수 목사 140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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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3 / 금요성령집회 / 사무엘상 16:4-13
하나님의 성품(77) –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 제자광성교회 ] 박한수 위임목사
제1성전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일산로 462 (정발산동 1140번지)
제2성전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하늘마을1로 72 (베스트요양원 옆)
전화번호 : 031-975-4004, FAX : 070-8277-2525
헌금계좌 : 301-0170-1798-71 (농협, 제자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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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데, 무슨 뜻인가? – 갓포스팅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삼상 16:7.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다. 다른 사람에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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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p.godpeople.com

Date Published: 1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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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위로가 되는 3가지 이유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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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7/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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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5:6-13절), > 설교자료실

본문 · 1.외모와 용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베들 레헴 이새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 2.겉 사람보다 속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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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3/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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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 MY 컬처 < 문화 < 기사본문 - 더미션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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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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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삼상 16:6~7) – 말씀 속에 살자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겉모양보다 속마음을 더 귀중히 보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육신의 겉모양을 보고 그 외모에 의해 판단하는 경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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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nho0324.tistory.com

Date Published: 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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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 유평교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부분이나 그 사람을 두루고 있는 배경과 환경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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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3/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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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365-1월 27일]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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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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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 다음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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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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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의 의미 – 작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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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tnote.tistory.com

Date Published: 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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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제자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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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6. 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cuwhDfWSIZM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데, 무슨 뜻인가?

사무엘상 16장에

하나님이 받으신 한 사람의 인생이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의 인생을 받으셨다.

바로. 다윗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의 인생을 받으셨을 때, 그를 통해 얼마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다윗의 인생이 어땠기에 하나님은 그를 그토록 기쁘게 받으시고 높이 평가하셨는가? 하나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 것일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 대하 16:9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찾기 위해 두루 감찰하신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화려한 예배나 그럴듯한 고백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삼상 16:7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중심이 다윗에게는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신다는 그 ‘중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얼마나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의 감정이나 불타는 열정을 본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중심’은 원어로 ‘레프’(LEV) 혹은 ‘레바’(LEVAH)라는 단어인데, 이것을 원어의 뜻에 가깝게 번역하면 ‘동기’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다윗의 중심을 보셨다는 것은 그의 존재의 이유, 즉 그의 동기를 확인하셨다는 것이다. 왜 사는지, 왜 날마다 애쓰고 노력하는지, 왜 그 무대에 오르기 원하는지 그 인생의 동기 말이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위해 예배와 섬김과 헌신을 드렸다고 고백하지만, 그 동기를 살펴보면 자기를 위해서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하지만 사실 자기를 위해 무대에 올라가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동기는 주님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아니란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나를 위해, 내가 빛나기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이 세우시는 무대에서, 그곳이 초라한 자리일지라도 그 자리에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가?’

당신에게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가 있는가? “출세하지 않아도, 그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해도, 왕궁에 들어가지 못해도 괜찮아요. 내 영혼은 평안합니다.

오늘 이곳, 주님이 나에게 정해주신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에 대해 배우고, 주님 한 분으로 채워지고, 주님을 누릴 수 있다면 나는 이미 가장 복된 자리에 있는 것이고 목적지에 도달한 것입니다”라는 동기로 살고 있는가?

★ 말씀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 사무엘상 16:7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 사무엘상 2:3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요한계시록 2:5

★ 묵상

#다윗은 아무도 없을때 예배하면서

#이렇게 예배하면 하나님이 나를 큰 예배인도자로 세워주실거야라고 생각했을까?

_

#아니_다윗은 하나님 사랑해서 찬양 드렸어

#슬프고 눈물나도 함께 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_

#똑같아보여도 동기는 다를수있어요

#나를위해 vs 주를위해

_

#하나님 진짜 만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됩니다

#계속된 회개가 죄를 이기게한다 _찰스스펄전

#내힘으로 살아온 삶을 회개하며 나를주께_드립니다_나 주의 것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5:6-13절), > 설교자료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6-13절, 93.204.415장.&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선택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사람이 갖추지 못한 완전성과 전지성이 있기에 완벽합니다. 그리하여 불완전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속담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사람의 마음 속을 헤아리기가 심히 어렵다”는 뜻의 속담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 속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들은 흔히 사람의 겉모양을 보고 먼저 상대방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겪어 본 후에야 그 사람의 속을 알게 되어 자기의 오해와 잘못된 판단을 후회하게 됩니다.또한 사람들은 서로 외모에 따라 상대방을 취하게 됨으로 가식과 위선 등의 죄로 자기 자신을 거짓되이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1.외모와 용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베들 레헴 이새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의 아들들 중에서 장차 왕 될 자를 예택(豫擇)하여 기름을 부으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이를 시행하려고 왔습니다. 이새의 아들들이 사무엘 앞에 나오는데,장자 “엘리압”이나 둘째 “아비나답”이나 셋째 “삼마” 그리고 그 아들 일곱이 다 사무엘 앞에 나왔으나 불합격되었습니다. 사무엘도 처음에는 외모만 본고로 장자 엘리압을 보고(특히 이스라엘 민족은 장자의 전통을 세우는 나라입니다.) 외모의 풍채도 좋고 장자의 특권을 생각하여,여호와의 기름 부을 자로 여겼으나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문별, 이력서, 학력, 용모, 지능, 언변, 기타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을 보고 가볍게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외모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너무나 외모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결혼을 앞둔 젊은 청년들은 대부분 여자의 외모를 먼저 봅니다. 요즈음은 결혼을 해도 이기적이 되어 학벌, 능력, 직장, 심지어는 재산까지도 따지고 결혼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외모일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문벌, 학식, 재물 같은 외모를 보려고 합니다. 외모는 반듯하고 보기에 좋으나 중심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외모는 좀 부족하고 미비되었다 할지라도 마음이 바르고 좋으며,선하고 곱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죽음이 올지라도 변함 없이 한 길로 가며 한 뜻과 한 정신과 한 생각과 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사람이어야 쓸모 있고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2.겉 사람보다 속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밀한 눈으로 우리를 살펴보십니다. 마음이 진실한가, 거짓된가, 깨끗한가, 더러운가, 교만한가, 겸손한가, 허영 적인가, 참됨인가, 바른가, 그릇 된가, 하나님에게 속한 자인가, 마귀에게 속한 자인가,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세상을 사랑하는 자인가를 보십니다. 마음은 기본이요 행실은 그 열매입니다. 1)겉은 보지 않으시고 속을 보십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첫 인상이 좋고 외모가 잘 생긴 사람은 많은 덕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마음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하나님 앞에서는 외모보다 마음의 상태, 심령 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신다”는 것은 또한 “형식보다 내용을 중히 보신다”는 뜻입니다. 요엘 선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패역하고 타락하여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데 겉으로만 웃을 찢으며 회개하는 체하고중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므로, 요엘1:23절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마23:27-28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찼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제일 가증히 여기시고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양보다 속 중심을 보시고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요히 여깁니다. 2)행위의 결과보다 동기를 보십니다.사람들은 동기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인정해 줍니다. 심지어 공산당들은 목적과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행위의 결과보다 그 동기를 더 살펴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제를 할 때,”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금식을 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모든 선행의 결과보다 그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3)진실성을 보십니다. 겉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겉과 속이 같고 말과 행실이 같아야 합니다. 겉으로만 착한 사람이 있고 중심이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을 원하십니다. 다니엘은 그 중심이 진실하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그 마음먹은 대로 하루 세 번식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습니다.사사 “입다”는 승전하면 가장 귀한 것이라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을 바치겠다고 서약한 대로 외동딸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갚기를 기뻐하시는 것은 진실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민30:2절에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마음을 제어하기를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기로 서원한 것, 즉 약속한 것이나 마음에 제어하기로 약속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도 중심에 진실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했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비록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진 바른 마음, 곱고 아름다운 마음을 보시고 어렸을 때에 그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위대한 시인,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왕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도 어려서 형제들의 악의로 팔려 애굽에서 종노릇하였고 억울한 누명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바른 마음, 그의 고운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보시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그러므로 비뚤어진 마음을 고치고,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불의한 마음을 새롭게 하며, 거짓된 마음은 진실하게 하며, 속이는 마음은 참되게 하여야겠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백성을 잘 다스리던 사무엘은 자신의 관심으로, 자신의 관점으로 사람을 선택하려고 했습니다.그리하여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을 볼 때 신장과 용모를 먼저 보았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일꾼을 택하려 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이러한 실수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우선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먼저 살펴보신다고 하셨습니다.우리의 겉모습을 치장하기 전에 먼저 중심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과장됨이 없이 진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합니다.3.하나님은 순종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일할 일꾼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큰 교회나 개척 교회 할 것 없이 일할 일꾼들에게 직분을 감당하라고 하면 “아직 나는 신앙이 미숙하기에,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 실력이 없어서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그야말로 순종의 아름다움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라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삶입니다. 다윗은 거친 들에서 양들을 치는 어려운 일을 아버지로부터 맡게 되었을 때막내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순종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11절).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선택되어지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의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약1:25절).다윗이 일생 동안 은혜 받은 믿음의 축복이 어디서 왔는지 아십니까? 그는 한 나라의 왕이 되고 부귀와 권세를 누리면서도 늘 자기를 보잘 것이 없는 가운데 말째 아들이며 양이나 치던 목동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내가 무엇이 관대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며 높여 주시나이까?” 하고 겸비했습니다.4.하나님은 그 중심에 믿음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다윗은 어렸을 적부터 믿음이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왜소하지만 믿음은 담대하여 양을 치면서 사자를 찢어 죽였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아무도 상대할 수 없는 골리앗 장군을 물 맷돌 닷 개로 완전히 처치해 버렸습니다.많은 사람들이 골리앗의 덩치 큰 모습에 위압을 당하고 있었으나 다윗은 골리앗이 저리도 덩치가 크니 물 맷돌로 맞추기가 참 좋겠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의 외모는 작았으나.그 중심에 놀라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외모는 작았으나 그 중심에 믿음이 켰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그는 너무너무 기뻐서 하나님 법궤 앞에서 춤을 추는데 어찌나 흥겹게 추는지 사울의 딸이자.자기 아내인 미갈이 왕으로서 체통 없이 모든 신복들 앞에서 몸을 드러냈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섭섭해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기뻐 춤을 춘 것이라 그가 나를 택하사 왕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어 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천하게 보일지라도 기뻐하리라” 미갈은 사람을 외모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5.성령 충만한 점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헌신하려고 해도 성령이 충만하지 않고는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후에 그의 생애는 헌신적이요 기적적인 승리가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삼상16:13절).사울은 여호와의 신이 떠나므로 그는 그때부터 완전히 악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헌신을 보면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간다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행20:22),”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전 9:16) 하였습니다. 다윗은 일생동안 그에게 가장 큰 소원이 있었다면 여호와 집에 영원히 거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시23:6). 호화로운 궁전이 있고 안락한 침상이 있어도,여호와 궁전에 있는 것만 같지 못했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시84:1),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속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하였습니다.7.솔직하고 정직함을 보십니다. 본문을 보면 사울 왕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 는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책망 받으면서도 구제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솔직하고 정직하지 못해 안타깝게도 기회를 놓쳐 벼렸던 것입니다.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소와 양은 물론 사람까지도 다 진멸하라고 했는데 사울 왕은 탐욕 때문에 살진 것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을 방문할 때 소와 양의 울음소리를 듣고 “웬 울음소리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이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사울 왕은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남겨 놓았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왜 이것을 먹었느냐”고 물으시자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가 먹으라고 했다”고 핑계를 댔습니다.또한 하와는 “하나님이 만드신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변명을 했습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이 “제사를 왜 드렸냐”고 물을 때 “백성이 흩어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솔직하고 정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더 무서운 죄를 범했는 데도 솔직하고 정직하게,잘못을 고백했기에 “내 종 다윗은 정직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솔직하고 정직하게 사는 자를 보십니다. 또한 그 자에게 주님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8.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외모를 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외적인 면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치중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그러나 인간이 외모에만 치중하면 할수록 성적인 타락도 심해집니다. 아름다움의 가치를 외적인 것에서만 찾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이 식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기를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속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순종심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중심에 믿음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는가를 보십니다. -솔직하고 정직한 성품인가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에 합당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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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상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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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삼상 16:6~7)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16장 6절~7절]

6절 –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절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본문 말씀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키가 크고 인물이 잘났던 사울 왕이 교만하고 고집이 세서 범죄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이 버리시고 후계자가 될 왕을 골라서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을 받고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장자 엘리압이 나오자 장자인데다가 인물이 좋고 키가 커서 사무엘이 마음에 들어하며 기름을 부으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둘째 아비나답을 지나게 해도 아니라고 하고, 셋째 삼마를 지나게 해도 아니라고 하고, 일곱이 다 지나가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외에 아들이 더 없느냐?’고 묻자 이새는 신통지 않게 생각하면서 ‘막내가 하나 남았는데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당장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들에서 양을 치던 막내 아들 다윗을 보였더니 그를 보고 당장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택함을 받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후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 중심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 중심이 아름다우니까 사람들이 깔보고 부모님까지도 알아주지 않던 목동 다윗이었지만 역대 열왕 중에 가장 훌륭한 왕이 되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겉모양 보다 속마음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겉모양보다 속마음을 더 귀중히 보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육신의 겉모양을 보고 그 외모에 의해 판단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은 겉모양보다 속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첫인상이 좋고 외모가 잘 생긴 사람은 많은 덕을 봅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을 때도,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낼 때도, 취직을 할 때도 첫인상과 외모의 작용이 많은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하나님께서는 외모나 겉모양은 흉하게 못생겼어도 속마음이 아름다우면 하나님께서는 귀히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모보다 마음의 상태, 심령의 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신다는 것은 또한 형식보다 내용을 중히 보신다는 뜻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하는 모습을 보니까 굉장한 까운에다 찬란한 후드를 한 것까지는 좋은데 교활들처럼 가슴에는 커다란 금십자가를 달교 설교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외모를 잘 꾸몄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 상태로 어떤 내용의 메시지를 전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고(요 4:24) 하셨습니다.

요엘 선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패역하고 타락하여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데도 겉으로만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체하고 중심으로 회개하지 않는고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화와께로 돌아오라”(요엘 1:23)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겉모양만 거룩하고 깨끗하게 꾸미고 속에는 썩은 송장같이 죄악이 가득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보고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제일 가중히 여기시고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양보다 속마음을 보시고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히 보십니다.

2. 결과보다 동기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동기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인정해 줍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행위의 결과보다는 그 동기를 더 살펴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많은 양의 헌금을 드리는 부자보다 그날 생활비 전부를 털어 바친 과부의 엽전 두푼을 더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신 것은 그 바치는 동기와 정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구제를 할 때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서 영광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사람 앞에 나팔을 불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해야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금식을 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하고 머리도 빗지 않기 때문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모든 선행의 결과보다 그 동기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같은 액수의 헌금을 해도 마땅히 바쳐야 할 때 순수하게 바치지 않고 자기 영광을 나타내는데만 쓴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3. 진실함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즉 마음의 진실함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마음이 진실한가를 보십니다. 겉과 속이 같고 말과 행실이 같아야 합니다. 겉으로만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심이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학 박사라도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요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진실한 사람은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의 소유자는 거짓말 같은 진리의 말씀이 확실히 믿어지고 위선자나 거짓된 사람은 진리의 성경 말씀이 거짓말처럼 안믿어집니다. 대체로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진실되지 못하기 때문에 미혹케 하는 영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늘 진실해야 하고 예리한 양심으로 늘 반성해야 됩니다. 설교도 진실한 심령에서 하면 말 재주가 없어도 사람들의 심령을 움직이지만 진실치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말 재주가 좋고 웅변술이 좋아도 사람들의 심령에 와 닿는 것이 없고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다니엘은 그 중심이 진실했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그 마음 먹은대로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사사 입다는 승전하면 가장 귀한 것이라도 먼저 만나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한대로 외동딸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갚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중심이 진실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신 23:21-23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기로 서원한 것, 즉 약속한 것이나, 마음에 제어하기로 약속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도 중심에 진실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했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4. 충성심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충성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忠자는 가운데 中, 마음 心자요. 誠자는 말씀 言, 이룰 成자 즉 말한대로 이루어 나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충성이란 조석으로 그 사람 감정과 기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변하지 않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계 2: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엡 6:2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사도 바울은 축원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충성심을 귀중히 보십니다. 때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도 있고 중상모략을 받을 때도 있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만 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게 해 주시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송도, 기도도, 설교도, 헌금도 중심을 기울여 할 때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기울여 생활함으로써 축복된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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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이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사울왕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시겠다고 말씀하신 새 왕을 찾아

사무엘이 이새의 집으로 내려갔을 때,

뛰어난 용모와 키를 자랑하는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삼상 16:6)

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부분이나

그 사람을 두루고 있는 배경과 환경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했던 말과 같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그들이 묘사한 예수님의 성품은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잘 드러내주었습니다.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막 12:14)

하나님이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신약성경에

계속해서 나옵니다(롬 2:11; 갈 2:6; 엡 6:9; 골 3:25; 벧전 1:17).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 합니다.

동성애자들이 이 말씀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목사는 TV토크쇼에 나가서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믿는다면

다른 종교, 이슬람, 몰몬, 힌두교, 불교에는 구원이 없냐고 묻자

자신은 모른다며

하나님은 외적인 종교의 형식보다는

그들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말합니다.

교회 출석하기보다 일을 선택하고,

아이들에게 학생회 모임보다는 학원을 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교회 출석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기도도 잘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중심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트로트로 찬양하는 목사가 TV에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던 성경 구절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판단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구약시대로 돌아가 한 번 생각해봅시다.

어떤 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라고 하면서

집에서 입던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라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가진 예배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말 1:8)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관심이 있었다면

자신들의 제물이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싫어한다고

아주 오래 전에 밝히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레 22:22)

만약 오늘날 그들이 우리 앞에 있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판단하지 마세요! 내 마음의 중심에 뭐가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내 마음은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넘친다구요!”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을 당신은 모를꺼에요!”

”주님은 아세요. 주님은 내 마음의 중심을 보시니까요.”

사실 이러한 말들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이미 그들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마음을 아셨습니다.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 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1:13)

사랑은 그 사람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중심”은 지극히 감정 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을 떠올리면 마음에 차오르는 뜨거운 열정,

흐르는 눈물이나 벅차 오르는 가슴, 전율, 감동, 순수한 마음…

대부분 그것은 감정 중심적이며

더 자세히 말하면

자기 자신의 감정 중심적 입니다.

내가 느끼는 나의 감정이 풍성하고 충만하면

내가 보기에 만족스러울 만큼 적당하면

그것으로 나의 중심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그분을 대하며 높이고 예배하는 것이

그분의 속성에 합당한 것인지 고민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말씀에 어떻게 나와있는지

부지런히 찾고 묵상하기 보다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감정과 열정이 충만하면

중심이 바르게 되어있다라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며(잠 1:7), 인간의 본분이라고 말합니다(전 12:13).

우리가 가져야 하는 올바른 중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 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베드로가 고백한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찾는 분이셨습니다.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 이니이다(막 12:14)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바른 중심은 항상 하나님의 진리와 일치합니다.

즉 올바른 중심은 항상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남편이 아내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너무 좋아하는 열정과 뜨거움으로 가득 차서

평소에 아내가 그토록 질색하는 물건을

선물로 사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혹은 아내의 성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찮은 물건을 준다고 생각 해보십시오.

선물이 어찌 되었든 중심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싫어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판단하지마! 내 중심은 아주 순수하고 옳았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중심은 내 감정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과

상대방이 원하는 것,

상대방의 성품에 어울리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서 바른 중심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알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풍부함을 만족시키기 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이

바른 중심이 갖는 특징입니다.

동성연애자들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로

자신들의 죄악을 무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것을 싫어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정말 마음에 바른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만족시키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욕망을 죽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말씀하신

진리의 말씀을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고 높이기 위해

다른 이들의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외치는 것이

바른 중심입니다.

교회 출석보다는 일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보다 취미생활과 오락을 즐기면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로 마음의 바른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형제 자매들과 함께 모이기를 즐거워하는지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기를 원하는지

얼마나 깨어 기도하기를 기뻐하는지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 마음의 중심을 아십니다.

한 가지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트로트 목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트로트라는 장르는 음악의 한 장르에 불과합니다.

락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로트라는 장르 자체가 더러운 음악이거나

락음악이 마귀의 음악이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다양한 장르의 크리스챤 노래를 좋아합니다.

클래식, 재즈, 팝, 발라드, 때로는 소울이나 R&B, 랩도

상황에 따라 즐기는 편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이야기 해온

바른 마음의 중심을 말하기 원합니다.

많은 CCM가수들이나 음악사역자들이

마음의 중심을 이야기 할 때,

저는 그들이 말하는 마음의 중심이

자신이 가진 감정의 중심을 말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의 진리로 알기 원하는

바른 중심을 말하는지 궁금합니다.

락이라는 음악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에,

혹은 재즈라는 장르를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묘사하고 표현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취향을 고집하는 것은

바른 마음의 중심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레이스 교회에 참석하면서 한 가지 놀란 것은

그들이 후렴을 반복하는 것을 결정할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볼 때 합당한지 고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흥에 겨워서

감격하고 가슴이 벅차서 무한 반복하듯 후렴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본문으로 만든 찬양의 경우는

실제로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 주위를 돌며 반복적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치기 때문에

반복을 조금 많이 해도 좋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단조와 장조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표현할때 웅장하고 근엄한

연주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노래할때

부드럽고 따뜻한 반주와 함께 편안하게 제창할 수 있는 곡을 선정하고

무엇보다도 가사가

하나님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표현하는지 꼼꼼하게 살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위해 400여 곡들 중에서 6, 7곡을 선정하는 과정 가운데

그들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그들의 음악스타일이나 취향, 반주의 코드나 멜로디의 선호도, 대중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얼마나 잘 담고 표현하는가”였습니다.

그들은 때로 드럼도 사용하고, 일렉기타도 사용했습니다.

때로는 관악기만 사용하거나 현악기만 사용했고,

하프부터 많은 북들이 함께 나오는 풀오케스트라로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부지런히 알기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트로트 목사는 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이 트로트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교회 안에 나이 드신 분들이 즐길 수 있는 기독교문화가 없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이 다른 성도를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하나님 앞에 바른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분의 열정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을 무시하거나

트로트라는 수단을 통해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헌신된 마음을 평가절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진정으로 성경,

즉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외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 그분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 전지하심과 편재하심,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 주권과 지혜와 힘과 능력과 권세를 알기 원하며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예배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바른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나이 드신 부친님 모친님께도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표현으로 찬양할 기회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예배 365-1월 27일]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찬송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455장(통 50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무엘상 16장 7절

말씀 :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으라고 하시면서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사악하고 간교한 인간들에겐 무섭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한 구절이 우리 마음속에 깊게 임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진실하고 능력 있는 삶으로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능력이 풍성하게 나타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기의 마음 중심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한 다윗에게 약속됐던 하나님 나라의 임금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요한복음 1장 48∼49절은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홀로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 주께서 알고 계셨음을 알려줍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때는 홀로 있는 시간입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그 시간을 하나님은 보시면서 우리의 마음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다.

다윗은 양치기를 하며 얼마든지 사람을 속일 수 있었습니다. 게으를 수 있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악하고 못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홀로 있는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그 후 다윗의 그 부분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조롱할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께 쓰임 받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있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를 보십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삶의 부분을 오직 주님은 보시기에, 행여 사람은 외모를 보고 그 사람에게 속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홀로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홀로 있을 때 어떤 계획을 합니까. 홀로 있을 때 얼마나 하나님과 깊은 시간을 나누고 있습니까.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주만 의식하며 진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주 하나님, 주께서는 우리의 세상적인 지위나 자격이나 외모를 보시기보다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하니 더욱 주께 진실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이 보시는 제 마음 중심이 언제나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의와 평강과 희락과 사랑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본문: 삼상 16:6~13

얼마 전 저는 교회의 한 자매로부터 선물 상자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 상자는 최고급 꽃 종이 포장지에 예쁜 리본과 조화 한 송이로 아주 잘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그 자매가 보는데서 그 선물을 풀었습니다. 그냥 찢어 버리기에는 아까웠지만 내용물이 궁금하여 포장지를 벗기니 또 다시 포장되어 있어서 다시 포장을 뜯으니 조그만 상자 속에 줄무늬 넥타이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에게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 자매는 저를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목사님, 죄송해요. 사실은 모 백화점을 갔더니 넥타이를 오천 원에 세일한다고 해서 하나 고른 후 포장코너로 가서 포장을 부탁했더니 포장한 후 포장비 칠천 원을 달라고 하여 내용물 보다 포장비가 더 비싸구나. 차라리 합해서 더 좋은 것으로 사드릴 걸 그랬어요”하고 후회하는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겉포장을 잘 하려고 합니다. 최고급의 옷에, 다이아반지, 금시계, 금목걸이 등으로, 혹은 지식이나 권력, 명예, 돈 등으로 물론 이러한 것들도 필요하겠으나 그것이 진정 우리의 속 사람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까?

어떤 철인(哲人)은 말하기를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첫째는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며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미적 존재가 있는데 이는 자칫 저속해지기 쉽고, 둘째는 지식으로 꾸며진 인생이 있는데 이는 조금 고상 하려고 할 뿐이요, 셋째는 자기 중심 속에 절대적 신(GOD)을 모시고 그 존재 속에 사는 자로 가장 고상한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한 강도가 졸도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내용인즉 은행에서 금고를 털어 집에 와서 돈을 세는데 글쎄 돈 다발의 맨 앞과 맨 뒤만 진짜 돈이고 중간은 모두 가짜 종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강도는 너무 기가 막혀 졸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2: 11)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 34- 35)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1 -4)

우리는 외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속성이 변해야 하겠습니다. 겉포장보다는 속 포장이 제대로 잘 되어있는 사람다운 사람을 이 사회는 더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름다움은 힘이 셉니다. 아름다움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 숨어 있습니다. 미인은 가정생활을 더 잘하고, 미인은 더 빨리 승진하며, 미인은 폭넓은 대인관계를 가지고, 미인은 돈을 더 잘 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미인에게 관대하다고 합니다.

성 안셀름 대학 심리학과에서는 2005년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데에 외모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재미있는 모의재판 실험을 했답니다.

어떤 가게에서 절도 사건이 일어났고, 한 여성이 피의자로 기소되었는데 총 72명의 배심원 중 36명의 배심원 앞에선 피의자는 매력적인 여성이었고, 다른 36명의 배심원 앞에 선 피의자는 평범한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답니다. 이 때 평범한 여성 피고인을 유죄라고 판결한 배심원은 한 조(12명)에 평균 6.5명이었지만 매력적인 피고인이 유죄라는 판결을 낸 배심원은 평균 4.3명에 그쳤다고 합니다.

미인은 구직에도 더 유리하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심리학자인 룩센과 바이버는 선발 상황에서 정말로 아름다운 얼굴이 선호되는지, 지원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에 따라 선호도가 다른지를 알아보는 실험해 보았답니다. 이력서에는 지원자들의 간단한 이력 정보와 증명사진만이 포함되어 있었답니다.

실험의 결과는 여성 면접관은 잘생긴 남성을, 남성 면접관은 아름다운 여성을 더 많이 선발했답니다. 여성 면접관이 잘 생긴 남성 지원자를 뽑는 경우가 월등히 많았답니다.

외모는 경제력에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대니얼 해머매시와 제프 비들은 외모의 아름다움과 경제적 능력과의 관계를 알아보았답니다.

결과는 평균 이상의 잘생긴 외모를 지닌 사람들은 평균 수준의 외모를 지닌 사람들보다 5% 정도 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고, 평범한 외모를 지닌 사람들의 소득이 못생긴 외모를 지닌 사람들의 소득보다 약 5~10% 가량 더 높았다고 합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느니라”(요7:24)

[아름다움의 권력]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움은 권력이 되어 능력과 성격, 대인관계, 결혼, 승진, 여가 등의 개인 생활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참여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예쁜 여자, 잘 생긴 남자가 인기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루키즘(look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look이라는 단어에 ism이 합쳐져서 외모차별주의라는 말입니다.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인생의 승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외모에 집착하는 외모지상주의를 뜻하기도 합니다. 옥스퍼드 1999년 판 20세기 단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루키즘(Lookism)이란 외모를 근거로 한 편견이나 차별을 의미한다.” 어쩌면 외모에 의한 차별은 인류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계급차별의 정도와 수준이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것보다 더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모지상주의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것을 타파하는 몇 가지 좋은 징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차별하는 ‘루키즘(Lookism)’은 대중매체의 발달로 홍수처럼 확산되어 성형 시장을 한여름 강물처럼 불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냄새가 고약한 아름다운 꽃을 집안에 장식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외모가 항상 최고의 덕목은 아닙니다. 마음의 아름다움도 힘입니다.

하나님은 사울 대신 이스라엘의 2대 왕을 세울 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외모로만 판단하여 실수하고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사회는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채용하면서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말입니다. 조선 사대부 집안에서 사위를 고를 때에도 이 기준을 가지고 골랐습니다. 신언서판의 신(身)은 얼굴과 외모와 신체의 건장함을 보는 것입니다. 언(言)은 언변, 곧 말솜씨를 뜻하고, 서(書)란 글씨와 글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판(判)이란 사물의 시비를 바르게 가릴 수 있는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전자보다는 후자로 갈수록 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외모의 그럴듯함보다는 말씨가 더 중요합니다. 언변보다는 글로 표현되는 교양이 더 중요합니다. 사물과 사람을 보는 판단력과 지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세태를 보면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지혜보다는 외적으로 보이는 외모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고의 천박성이 드러나고 삶의 비천함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서울과 경기지역에 사는 18세 이상의 여성 810명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굴이 25.8%, 몸매가 18.6%로 둘만 합쳐도 40%가 넘습니다. 그리고 마음씨가 13.5%, 매너가 10% 되는 것을 보면 여성이 여성을 볼 때도 얼굴과 몸매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남성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얼굴과 몸매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70%~80%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잡지를 보면 남자를 보는 눈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에 남자배우들에게 ‘꽃미남’이라는 외모에 치중하는 말이 유행했다면 최근에는 그 말과 더불어 또 다른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는 ‘훈남’이라는 단어입니다. ‘완소훈남’이라는 단어는 ‘완전 소중한 훈훈한 남자’라는 말로 여성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울왕의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새 왕을 세우십니다. 성경에서 사울이라는 왕에서부터 다윗 왕으로 역사의 변화가 한 인물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쉬운 말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꽃미남과 같은 사울 왕에서 훈남 같은 다윗 왕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은 처음에는 그것을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요구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좋은 사람을 택하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울 왕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좋아하는 기준에 의해 얼굴이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건장하며 늠름한 인물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울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사무엘상 9:2)

사울은 남들보다 목이 하나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고 겉모습이 아주 준수한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얼짱과 몸짱의 요소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사울 왕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왕의 역할을 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 거짓말을 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엄성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누려야할 명예와 영광이 점점 무너지며 몰락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택한 것을 탄식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사무엘상 15:35)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후회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놓았을 때 그의 외면과 내면은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차지하고 돈과 재물을 가졌을 때, 세상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인물이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을 찾습니다. 역사의 변화에 있어서 환경의 변화, 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는 사람, 내면의 세계를 존중하는 사람,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들 중 이런 사람이 있으니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가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드디어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인도하십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모두 모아 두었는데 8번째 아들인 다윗을 제외시켰습니다. 다윗은 들에 나가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은 다 불러서 사무엘 선지자 앞에 세웠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축복해주기 위해서 유명한 선지자가 집에 왔다면 흩어진 자녀들을 다 불러 모아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은 이 자리에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이새에게 여덟 번째 아들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딸만 일곱 명 낳다가 마지막 8번째 아들을 낳았다면 애지중지하는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들만 일곱 명을 낳다가 여덟 번째도 또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별 볼 일 없는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버지가 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을 보면 아버지 눈에도 띄지 않는 평범한 존재였습니다. 드디어 이새는 사무엘 선지자 앞에 아들을 한명씩 소개했습니다. 첫째 아들인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 사무엘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사무엘상 16:6) 아마도 사무엘은 사울 왕을 연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왕으로 사울처럼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체격도 좋고 키가 장대한 청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니까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는지라.”(사무엘상 16:7)

가면을 쓴 우리들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도 사람을 잘못 보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연연했고 다시 사울 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얼짱이고 몸짱인 사울 왕과 인간관계도 있었습니다. 비록 사울왕이 실수하고 실패했지만 애정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울왕의 후계자니까 당연히 그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볼 때 첫 번째 아들이 사울 왕과 비슷했기 때문에 이렇게 건장하고 잘생긴 아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생각과 판단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인간을 외모로 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얼굴과 재물, 사회적 지위와 입고 있는 옷, 학식과 소유물로 사람을 판단하여 차별대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여덟 번째 아들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아니 겉보다 내면의 세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천박한 사고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외모를 좀 치장하면 속의 검은 것을 감출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말할 때 영어로 ‘pers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사람 또는 인격이라고 번역되는데, 라틴어로 ‘페르조나(가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뭔가 가지고 있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고상한 품격을 지닌 사람,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으로 겉모습의 가면을 씁니다. 멋진 옷으로 때로는 화장품과 향수로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 섭니다. 그러나 조금만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두운 모습, 음습한 모습, 탐욕의 모습, 나도 다 알 수 없는 잘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때때로 가면을 쓰지만 마음속에 얼마나 잘못된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 얼마나 못된 것이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 7:21-23). 사람의 속에서 나온 것이 하나님 없는 인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 인간의 욕심대로 사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판한 내용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가복음 7:6) 입술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위대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에 나타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앞에 나왔을 때 다윗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사무엘상 16:12)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여기서는 얼굴을 보시며 칭찬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는 외모지상주의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윗의 외모에 대해서는 칭찬의 말로 표현하고 계신지 우리 마음속에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무슨 뜻일까요? 다윗이 혼자 들에서 양을 칠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부모님도 아니었고 형제도 아니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을 증거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마음속에 갖고 있던 내면의 생각, 가치관, 삶의 모든 것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다윗의 생을 읽다보면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토록 사랑하셨을까 질투할 정도로 다윗이라는 인물을 높이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결코 인간적으로 완전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실수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예쁘게 보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의 세계가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할 때 그의 마음속에 불타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조롱받을 때 어린 다윗이 앞으로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분임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이런 다윗의 모습을 그의 얼굴빛이 붉고 눈이 초롱초롱하고 아름답다고 기록합니다. 외모 자체가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외적인 모습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아름답습니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의 품격과 사랑, 내면의 기쁨과 평안이 겉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아름답고 멋진 사람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은혜와 감사로 인생을 사는 사람의 얼굴은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얼굴 표정에는 감사와 기쁨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나, 추한 나, 연약한 나, 욕심이 가득한 나를 주님 앞에 다 내려놓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내 죄를 용서해주셔서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슬픔 가운데 왔지만 기쁨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 가운데 나왔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가슴에 품고 나갈 수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나왔지만 주님이 주신 평안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고 예배드릴 때 얼굴의 표정도 바뀝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십시오. 근심과 걱정으로, 오기와 교만으로 얼굴이 어그러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세계, 주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얼굴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성형외과 의사와 같습니다. 다른 것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을 조금 줄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 우리의 시간을 쏟아내어 가치관이 변할 때 생각이 바꿔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꿔질 때 얼굴이 바뀝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기를 원하십니다.

* 기도: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외모로 판단하고 이해타산 관계로만 대하지 말게 하시고 이웃들을 잘 섬기고, 필요를 채워 주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외모를 가꾸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대입니다. 저의 마음을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견고한 내면의 성장을 이루게 하소서. 사람을 외모나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 판단치 말게 하시고 마음의 중심을 바로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 예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미국의 남북 전쟁이 나기 바로 전 어느 봄날이었다. 한 소년이 일터를 구하다가 오하이오주에 있는 어느 농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농장 주인은 튼튼하게 생긴 소년의 모습에 만족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소년을 채용했다. 단지 그 이름이 ‘짐’이라는 것밖에는 몰랐다. 짐은 난로에 땔 나무를 장만하고 젖소를 돌보고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하면서 밥은 부엌에서 먹고 잠은 건초 창고에서 잤다. 그 여름이 지나기 전에 짐과 주인의 딸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돈도 없고 장래도 없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거칠게 거절당하자 짐은 조용히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35년이 지난 후 어느 날이었다. 농장 주인은 창고를 새로 지으려고 헌 건초 창고를 헐다가 그 옛날 자기 집의 하인이었던 짐이 주머니칼로 서까래에 새겨놓은 이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James A.Garfield라는 이름 밑에 날짜와 함께 그의 예명 짐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 때에 그는 제 20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의 의미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의 의미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살피신다고 하셨다. 중심이란 어디에 있는가? 에 대한 물음과 구체적으로 중심을 살핀다라는 말이 쉽게 와 닿지 않는 질문이다. 중심은 무엇일까? 중심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감정, 의지, 지성이 위치하는 장소라고 사전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 있으나 성경에서의 마음은 레바브(히브리어, 854회이상 등장)라고 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출발하는 곳이다. 마음이나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보시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사무엘 상의 사울과 다윗에 다시한번 묵상해 보려 한다.

외모가 아닌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 즉 마음을 살피신다. 이 말씀은 사무엘상 16장 7절에 나와 있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영어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But the LORD said to Samuel, “Do not consider his appearance or his height, for I have rejected him. The LORD does not look at the things man looks at. Man looks at the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이 말씀 하나로 하나님이 살피시는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사무엘서 15장, 16장의 전체 맥락을 살펴보기로 하자. 잠시 사무엘서 15장 ~ 17장을 묵상해보자.

1. 사무엘서 15장

하나님께서는 변명이 아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심

사무엘은 사울에 대하여 아말렉을 치고 양, 낙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죽여라 하였다. 이후 사울은 아말렉을 치러 갔고 모두 없애기 보다 무가치 하고 쓸모 없는 것만 골라서 죽이는 우를 범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울을 왕으로 세운것을 후회하셨다(사무엘상 15장:10). 그 날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밤새도록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다음날 사울을 만나러 갔고 모두 없애지 않고 양과 소중에 제일 좋은것을 남겨둔 것에 대한 잘못을 나무랐다.

사무엘의 나무람에 사울은 다음과 같이 변명을 했다.

“순종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길갈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뺏은 양과 소중에서 제일 좋은것을 제물로 달라고 요구하기에 그것을 허락했다고 했다”는 것이였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번제보다 순종이 낫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을 거역하는 것은 죄와 같고 완고한 고집은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을 사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시기로 작성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가 마음이 변하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사무엘은 아말렉왕 아각을 처단하고 사무엘은 사울을 다시 찾아 가지 않았으나 사울로 인해 슬퍼하였다.

2. 사무엘서 16장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사울 대신 이새의 아들중 한명을 왕으로 삼겠다 하셨다. 그래서 이새를 베들레헴에서 찾아 제사에 초대하여 그의 아들중에 기름 부을 자를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로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용모와 신장을 보고 사람을 판든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새의 일곱 아들들이 아비나답, 삼마 등이 사무엘 앞에 지나갔지만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아무도 택하지 않으셨다고 이새에게 말했다.

다윗을 외면했던 이새

사무엘은 이새에게 이 밖에 다른 아들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새는 막내 아들이 있고 들에 양을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이 상황을 보면 이새는 다윗을 아들로 인식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새는 그 지방의 유지였고 보아스 때 부터 물려 받은 재녁이 있었음에도 막내 아들을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천시나 받는 양치기로 보냈다는 점은 아들로서 인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관련하여 시편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

막내 아들이 들어 왔는데 여호와께서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사무엘은 감람기름을 그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자 여호와의 성령께서 다윗을 사로잡아 그 날 이후로 그와 함께 하셨다. 이후로 여호와의 성령은 사울에게서 떠났다고 악령이 그를 괴롭혔다. 사울이 수금 타는 자가 필요하다고 하였고 신하가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을 추천하였다. 이후 다윗은 사울 옆에서 수금을 탔는데 수금을 탈때 하나님이 보낸 악령이 괴롭힐때 마다 사울은 상쾌하게 낫고 악령을 떠나갔다고 한다.

3. 사무엘서 17장

형제들에게 외면당했던 다윗

다윗과 형제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다윗의 맏형 엘리압은 다윗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화가 나서 ‘도대체 너 여기서 무엇하고 있는 거니?

들에 있는 양은 누구에게 맡겼어? 나는 네가 얼마나 교만한 녀석인지 알고 있다. 너는 전쟁을 구경하러 온 놈이구나!’ 하였다.

사무엘상 17:28

다윗의 중심

이새에게 있어 다윗은 아들이라는 인식이 크게 없었고 형제들에게 존중 받지 못했다. 하지만 다윗의 형제들이나 이새의 인식과는 달리 사도행전에서 다윗을 평가하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행 13:22)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의 내용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사무엘상 16장 이후의 말씀을 좀더 묵상해 보려한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나온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비웃었다.

네가 나를 개로 알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느냐? 사무엘상 17:43

비웃을 만 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태도를 명확히 한마디로 표현하였다. 중심이란 이런 것이다 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그러자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 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 사무엘상 17장 45절

영어성경은 다음과 같다.

David said to the Philistine, “You come against me with sword and spear and javelin,

but I come against you **in the name of the LORD Almighty**,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defied.

다윗은 칼이나 창이 아닌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골리앗 앞에 당당히 섰다. 아멘.

4. 결론

다윗에 대한 성경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 하나님은 이것을 중심으로 보신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신 전체적인 이유는 마음에 합한 사람이였다는 것이고 내용은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가졌던 다윗도 말세에 크게 실수를 했는데 바로 인구조사 사건이였다. 인구조사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반대되는 불순종 행위였다. 이 내용은 성경에서 비교적 크게 다루고 있는데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인지 의지하지 못하는 사람인지와 연관되어 있다.

다윗 뿐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주님을 믿음으로 행했다는 말(히브리서 11장)의 내용에는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을 받았을 때의 초심으로 돌이키는 일(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초심의 마음으로 사탄의 유혹(힘, 자랑)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중심있는 삶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묵상내용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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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 #(77) #-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2022-06-03 #금요성령집회) #- #박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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