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 2022 봄 장로 8주 찬송 – 내 마음의 노래 1055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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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말씀 – 다국어 성경 Holy-Bible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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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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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 다음블로그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나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한번 약속한 이 언약을 결단코 이루어 주리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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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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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수요성서학당 …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부활 때에는 시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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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ykcn.org

Date Published: 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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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 워치만 니

당신은 오히려 주님이 원해야 할 수 있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결정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더러 우물쭈물하고 결단력이 없는 사람이 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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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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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 국민일보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문장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뿌리를 가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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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6/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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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파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

모세가 호렙산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처음 만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칭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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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power.co.kr

Date Published: 4/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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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성경의 진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22:32구절이 죽음 뒤에 계속 살아가는 “영혼” 이론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해당 구절을 함께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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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wordofgod.kr

Date Published: 7/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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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봄 장로 8주 찬송 - 내 마음의 노래 1055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2022 봄 장로 8주 찬송 – 내 마음의 노래 1055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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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Korea Gospel Book Room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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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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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20040125(주일오전) 출6:8, 창12:1~3 정진국 목사 우리가 성경, 특히 구약을 읽다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자주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의 인물가운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외에 어떤 면에서 더 훌륭한 인물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창세기에서 야곱은 시덥지 않은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야곱 뒤에 나오는 요셉이야 말로 정말 훌륭한 믿음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자리에 다라가 [요셉의 하나님] 이라고 들어가면 그럴싸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요셉의 하나님]이라는 수식이 붙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애굽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낸 모세도 있는데, 모세의 하나님, 혹은 다윗의 하나님, 또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싸움에서 이겨냈던 엘리야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없는 것을 봅니다. 유독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이 세분의 이름이 언급되어지면서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자! 이 표현이 자주 나오는걸 보면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부르기를 좋아하시고 늘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며 이 세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무엇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시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면서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ㅇㅇ의 하나님]하면 참 좋을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표현은 있었어도 ‘내가 다윗의 하나님이다’라는 표현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기뻐하셨는데, 도대체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기에 그들을 특별대우를 하셨을까요? 그들의 실제 생애를 보면 특별대우를 받을만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보다 훨씬 위대하고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할 인물들은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사람이 하나님의 명칭앞에 ‘왜 붙는가?‘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성경이 무슨책인가?‘를 잘 아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이 비밀이 풀리게 되어집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책입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단순히 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성경에는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역사도 있고 여러가지의 우리가 미쳐 알지 못한 수많은 지식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생물학적, 물리학적, 천체적인 기타 많은 지식들이 담겨져 있는 그런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것에는 뭔가 석연치 않는 것이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신 책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노력보다는 성경 자체가 가져다 주는 역사적 교훈, 어떤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교훈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것을 배우고 익히고 발견함으로 만족해하는, 이런 경향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을 보는 기초가 덜 되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아버지의 뜻이 나와 있습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마태복음에 나와있는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을 벗어 주어라….’하는 식의 교훈들에 주목하게 되어지면 그 교훈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아버지의 뜻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20:31-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처럼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려고 하는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사람에게 계시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은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은 복음을 사람에게 계시한 책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을 통해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여러 가지의 교훈을 얻는 것은 마치 본질을 놓치고 껍데기를 붙잡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많은 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많은 성공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복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성공과 복에 주목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성공과 복은 하나님의 복음을 계시하시기 위한 모형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면 성경을 통해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 복 자체만 알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 복은 받았지만 복음은 깨닫지 못하는, 복음과는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안다. 읽는다’고 할때 이 성경 안에 있는 복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구약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구약이라는 말은 옛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은 새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깃점으로해서 갈라집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을 구약이요 오신 후는 신약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강조 점, 즉 구약에서 하려고 하는 핵심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창세기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1장부터 12장은 특별히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지으시고 창조하셨는데 이 인간들이 어리석게 사탄의 꾐에 빠져서 타락하게되어졌습니다. 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장차 ‘한 아이를 통해서 타락한 인생을 구원해 내겠다 그 구원자인 아이를 기다려라’ 이것이 구약의 강조점입니다. 이 아이는 이러 이러한 계보를 통해서 오실 것이라는 구속사적인 계보와 그 아이가 장차 이 땅에서 할 일이 이러 이러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계시해 놓은 것이 구약인 것입니다.

구약에는 용맹스러운 사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른 사건, 여리고 사건, 엘리야의 갈멜산의 승리의 사건, 요나의 물고기 사건, 다니엘의 사건, 사사, 삼손, 드보라 등등 많은 위대한 사건들이 엄청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많은 기록들의 공통분모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기록해 놓았느냐는 말입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선지서들입니다. 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의 상황을 만날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저들에게 선포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선지서입니다. 이 선지서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가운데 있을 때에 저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 차원에서 기록한 책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게 되어지면 복음의 핵심은 잊어버리고 껍데기, 이스라엘의 시대적인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경고만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서에서 오히려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빗대어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메시야를 보내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다’. 그 메시야는 어떤 유형과 형태로 올것이라는 것을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경고하고 책망하심 속에 복음의 비밀을 그 속에 풀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을 읽을때에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발견하지 못하면 이런 도전을 받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좋은데, 특히,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500년의 역사를 보면 더 흥미 진진하고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지혜들이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내용보다 더 지혜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단지 이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싸울때와 물러설 때 등등 하는 것들을 배운다면, 중국에서는 삼국지를 들고 나올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성경과 비교하면 성경의 독특성과 가치가 인정되어지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교훈이나 깨달으려고 읽는다면 성경에서 본래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성, 이삭의 특별한 삶의 유형, 야곱의 생활의 특별함이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대조, 대비하여서 우리도 그들과 같이 살자는 것을 깨닫게 되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을 놓치게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복음의 맥락,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왜 중요합니까? 성경에 많은 인물이 있어서 아브라함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정말 우리에게 믿음의 조상이 될 만큼 믿음이 뛰어났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망할 것이 많습니다. 그는 첫 출발부터 실패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을때에 처음에 부르실때에 코방귀도 안 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아비 데라가 하란으로 가면 돈벌이가 잘 될 것이라고 해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란에 머물다가 데라가 죽고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을 보여서 움직이는 것이 아브라함의 생애의 출발입니다. 출발부터 엉켜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 가서도 내려가지 말라는 애굽에 기근이 있으니까 내려갑니다. 그곳에 가서는 자기의 부인 사라를 누이라고 팔아버리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는데도 ‘엘리에셀로 족합니다. 또, 이스마엘을 통해서 그 역사를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엉뚱한 발상, 행동을 통해서하나님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왜 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느냔 말입니까?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통째로 다스려 왔습니다. 아담안에서 모든 인류를 전부 관리해왔습니다. 타락한 이후의 인생을 통째로 다스리다가 노아시대에 화가 나서 모든 인류를 지으심을 후회하시고는 싹 쓸어버리고 노아가족만 남긴 것입니다. 이 노아가족 8식구를 통해서 신 인류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아도 어떤 사람입니까?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 노아가 홍수가운데서 건짐을 받은 것은 노아의 행적, 즉 신실하고 의로운 사적 때문에 특별히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인간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보아라. 그들이 육이 되었고 죄가 관영했고 심지어 셋의 후예인 하나님의 자녀도 가인의 후예인 사람의 딸들을 보고 그들과 결혼하고 연합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 인류를 싹 쓸어버린 것입니다. 인류를 싹 쓸어버리되 새로운 인류를 세우는데에 노아의 식구를 선택한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만 하니까 그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훌륭했기 때문에 노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상이라는 것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훌륭하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결국 아담안에서의 타락한 현상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 인류를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식구, 8명을 통해서 신인류가 시작되었지만 아담의 후예, 가인의 후예가 끝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인류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습니다. 노아를 본받아 모든 인류가 의로운 삶을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 인류가 시작하자마자 노아는 술에 취해서 자식과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행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노아의 벌거벗음을 본 함을 이야기 할때에 단지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기 때문에 함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동성애가 벌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범한 것입니다. 이 비극의 역사가 거기서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의롭다고 불림을 받은 신 인류조차, 아담하고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아담의 후예였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의 본성은 아무리 개인적으로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 본성은 여전히 자손에게 계승되어지고 유전되어지고 있기에 인류에게 똑같은 일을 야기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 인류가운데 나타나는 죄의 유형이 가인의 후예가운데 나타나는 죄의 유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장 저들이 바벨탑을 짓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쫒겨나자마자 성을 쌓았던것처럼 신인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신인류조차도 바벨탑을 쌓는 일을 합니다. 결국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타락한 인간은 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방법을 통해서 이 타락한 인간을 교정하려고 교화시키려고 하려고 해도 타락한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에서 나타나는 역사인 것입니다. 이 흐름을 놓쳐버리면 우리는 엉뚱한 것을 붙잡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본받자, 노아처럼 방주를 짓자‘ 하는 이런 잘못된 신앙의 유형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노아를 부르신 이유는 아무리 선하고 똑똑하여도 타락한 인간의 그 성품은 별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히려 그런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12장에서 한 사람을 부르시는데 당시 노아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을 복음안에서 보게 되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사람을 부르듯이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른 것이 아브라함도 노아와 같은 사람이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일관성 있는 교훈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여기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하는 도시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복음의 계시의 흐름을 모르면 이것은 앞뒤가 안맞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의 형태들을 만들어 냅니다. ‘노아의 홍수시대에는 완전한 의인인 노아를 부르시더니 오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같은 이 형편없는 사람을 부르셨는가?’라고 누군가가 질문한다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성경은 논리적인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이 일관되어진 내용을 발견해 내지 못하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적인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노아시대에는 완전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완전한 삶을 살면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을 받는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인간도 결국 아담의 성품에 영향가운데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히려 노아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와서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을 부르시느냐면 ‘이제 너희가 할 만큼한 노력은 끝났다. 너희들이 타락한 후에 너희들이 하고 싶은 일은 다 했고 끝났다. 그래도 너희는 의를 이루지 못했고 거룩에 도달하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이제 최초에 약속한 대로 여인의 후손에서 한 아이가 나타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언약해 주었던 언약의 역사를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이 언약은 오히려 죄인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히 어떻게 역사되어져야 할 것인가를 증명해 주어야 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같은 우상쟁이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들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속에서 굉장히 많이 강조되어지는 것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왔다’ 그래서 복음의 시작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노아처럼 선택받을만한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의롭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을만한 사람이고 인정받을만한 사람이고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다’라고 시작하면 그건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의 출발은 ‘나는 죄인이구나’하는 데서부터 출발됩니다.

‘나는 죄인이구나’하는 말은 단지 자신이 죄를 많이 지어서 죄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죄의 요소밖에 없는 죄인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죄의 공장이구나 하는 것에 대한 자각과 인지에서부터 복음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쟁이이며 타락한 특별한 케이스이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죄인인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가 죄인되었을때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쓸어버리시기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손수 프로젝트인 놀라운 거대한 구원의 프로젝트를 세워나가시고 하나님의 경륜을 발동시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복음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주권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특별히 선택받은 한 민족, 이스라엘을 이루어서 자기 백성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시작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구원의 서정을 우리에게 나타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루는 서정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시작하셨고 야곱을 통해서 그 이름이 완성을 이룹니다.

언약의 백성, 선민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워 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특별히 부르시는 것이냐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 그리고 한 땅-가나안 땅-을 그 민족에게 주겠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삭에게 동일하게 계승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아들가운데 야곱에게 동일하게 언약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약속,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성립하게 하는 민족의 우두머리들에게 필연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했기 때문에 ‘이것을 보증해 주리라‘라고 약속한 그 언약한 하나님임을 스스로 공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나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한번 약속한 이 언약을 결단코 이루어 주리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기필코 이루고 말것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스스로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사람이 특별히 대단한 사람이라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써 사용한 인물이고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스스로가 상기하기 위해서 부르는 이름인 것입니다. 모든 믿음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닫고 그 언약을 붙잡는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닫고 그 언약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입니다. 신념과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신념은 하나님의 언약은 없지만 자기 나름대로 자기 확신에 근거해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신념은 믿음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념가운데 있으면서 본인이 믿음가운데 있느냥 착각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꼭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는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믿음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한 이스라엘의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시작되어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나를 기억하옵소서. 이 우상의 도시에서 나를 건져내 주시옵소서’하고 외쳐 본 예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찾아오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미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한 존재이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돌이켜 깨달을 수 없는 그런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 같습니까? 모양새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 같을지 몰라도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죄인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 오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먼저 찾아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우리가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이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은혜요 긍휼이요 정말 감사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답해야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본질을 깨닫고 나면 교만해 질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고나면 우리는 더욱더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나같은 것을…’ 아브라함 시대에 잘난 사람이 하나 뿐이겠습니까? 니므롯이라는 사람은 바벨탑을 쌓는데 주역이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사람들을 리더해갔던 이런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가지 아니하고 언제나 죄인에게 찾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때도 당시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이 ‘나는 저 세리와 같이 아니하나이다. 오늘도 선한 일을 했습니다’라고 자기 착각 속에 살고 있던 교만한 인생들에게 찾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양을 치는 목동들에게, 저 멀리 있는 동방박사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특별히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들의 종교심이 너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만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 하나님의 선택하심, 하나님의 부름심,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 그것만이 온전히 구원의 시작이다’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사역속에서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시작하고 있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예수 안 믿습니다. 교회는 다녀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절대 예수님 믿지 못합니다. 왜냐면 은혜가 은혜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우여곡절 끝에 믿음의 출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오는 과정속에서 한 아이 이삭에 대한 약속을 받습니다. 이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구원은 이삭,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장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택안에 있으면서도 ‘엘리에셀로 족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엘리에셀은 자기 집에서 자기에 의해서 길러진 충성스럽고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본성적인 것, 이 세상을 살면서 길들여진 천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성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훌륭하게 살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남달리 죄 짓지 않고 살려고 했기 때문에 이 정도라면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천성적으로 착한 분들이 예수님 믿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그 착함이 착함이 아닌데 그 착함을 잘 모릅니다. 그 착함이 죄안에서 온 착함이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자기 나름대로 착하고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에셀로 길들여진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이삭,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은 포기하지만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아이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과 로마서 4장에 보면 이 하갈을 통한 이스마엘은 율법이라고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즉 육신의 노력과 자기의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삭을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하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오기전까지 엉뚱한 일을 반복을 합니다. 자신의 천성을 통해서 구원에 이루려고 하다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라고 하니까 그 방법을 찾은 것이 율법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구원에 이를줄 알고 열심히 계명을 지킵니다. 오늘날 이렇게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십일조 생활 열심히, 새벽기도 열심히, 주일성수하고 충성, 봉사. 등등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열심히 살다보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마엘이요 율법이요 육신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훗날 이스마엘 때문에 이삭이 고통을 당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때립니다. 오늘 이시대도 똑같습니다. 율법이 복음을 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쫓아 내라고 합니다. 복음은 율법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쫓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아깝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율법에 자꾸 미련을 둡니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이 함께 있으면 복음이 손해입니다. 복음은 몸이 아프면 주일날 교회에 못 올 수 있습니다. 율법은 아파서 죽는 한이 있어도 교회에 가야 합니다. 복음은 자유가 있습니다. 영안에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영을 쫓아서 믿음생활 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환경도, 입장도, 과정도 전혀 고려가 되지 않습니다. 큰자든 작은자든 모든 입장을 율법의 잣대로 재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그 잣대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경쟁을 복음과 율법이 해보면 당연히 율법이 이기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여지라는 것이 있지만 율법에는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바리새인과 같지 않고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 줄 아십니까? 바리새인의 의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들의 의는 율법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십일조는 박하와 근채와 훼양의 십일조까지 드렸습니다. 채소까지 그것의 십일조를 냈습니다. 콩나물을 얻거나 사면 그것을 헤아려서 십일조하는 사람 있습니까? 바리새인과는 게임도 안됩니다. 명함도 못 내밉니다. 옷 선물받았다면 그것에 대한 십일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십일조를 쫓아 가려면 복잡하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이스마엘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대단해 보이고 지혜로운 발상처럼 보여졌지만 하나님의 의는 이삭을 통해서입니다. 왜냐면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살아있습니다. 즉, 자기의 것으로 구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도 죽고 사라도 죽고, 둘 다 남자가 죽고 여자가 죽었을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얻은 자식이 이삭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내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복음을 이해하려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에게는 해답이 없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요 나에게는 해결책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아니고는 구원의 길이 없다‘라는 것이 이삭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 서정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 안에서 구원받았습니까? 사람의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상달되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원의 서정을 깨닫습니다. 천성도 아니요 율법도 아니요 나에게 나온 어떤 것으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그 재물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니다. 이삭은 모레아 산에서 이미 바쳐진 재물이요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모레아 산은 갈보리 언덕 임). 바로 이 이삭은 예수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피의 공로 없이는 죄가 사함받지 못하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의 능력은 ‘내가 죄인이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만 이루는 것입니다.

그럼. 이삭과 야곱에 관하여는 다음시간에 복음의 원리가운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아멘.

불낙지교회 / 불신자(不信者), 낙심한 자(落心者),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ㅇ나는 네 조상(祖上)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ㅈ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 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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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주 성경(貫珠 聖經)

“the living”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생명(生命, ζωή)

* 주(主, ἀρχηγός) – archégos : founder, leader

* 생명의 저자, 생명의 지도자, 생명의 창설자

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구절만 인용하는 것보다 그 말씀의 전후 배경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읽어보겠습니다(마태복음 22:23-32).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선생님이여

우리 중에 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산 자”는 “the living”이라고 합니다.”the living”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生命, ζωή)(主, ἀρχηγός) – archégos : founder, leader* 생명의 저자, 생명의 지도자, 생명의 창설자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구절만 인용하는 것보다 그 말씀의 전후 배경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본문의 배경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본문의 배경을 읽어보겠습니다().부활이 없다 하는들이 그 날에 예수 께 와서 물어 가로되선생님이여 모세 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 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 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우리 중에 칠 형제 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 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 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최후에 그 여자 도 죽었나이다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 가 되리이까

예수 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 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나는 아브라함 의 하나님이요 이삭 의 하나님이요 야곱 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유대의 전통적인 풍속에 여러 형제들이 있을 때 맏형이 결혼 후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다음 형제가 형수를 아내로 맞아 후사를 이어주는 “계대결혼(繼代結婚)” 이란 전통이 있었습니다.

계대 결혼

계대 결혼이란 고대 중근동 문화권 내에서 주로 행해지던 풍습으로서 죽은 형제에게 자손이 없을 경우 그 대를 이어주기 위해 죽은 자의 남은 형제가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는 가계의 보존과 재산권을 중시하던 당신의 상황 속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이때 그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는 법적으로 죽은 형제의 자손이 되어, 그 죽은 자의 모든 권리를 이어받게 된다.

한편 이 계대 결혼의 풍습은 사회적으로 아주 강한 구속력을 갖는 것이었으며, 만약 남은 형제가 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심한 사회적 비난과 수치를 당해야만 했다. 이후 이 풍습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하나의 율법으로 정착되어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예 / 창세기 38 : 6-11

유다는 큰 아들 엘이 죽어 둘째 아들 오난에게 큰 며느리 다말과 결혼하게 된다.

이 관습을 이행치 않은 오난은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로 보아 하나님께서도 이 관습을 허용하신 듯 하다.

룻기에 소개된 계대결혼 및 기업 무르기(고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일곱 형제가 계대결혼에 따라 모두 한 아내를 맞이했는데 만일 부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부활 때에는 시집이나 장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부활 생명의 하나님” 이란 뜻입니다.

조화(造花)와 생화(生花)

조화가 아주 멋있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조화가 잘 만들었어도 생화보다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조화와 같은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죽은 신앙이란 그 안에 부활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신앙이란 교회 안과 밖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면 별로 신앙이 없는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부활생명이 분명한 것을 말합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가사를 작사했던 “존 뉴톤” 목사님의 간증에서 천국에 올라갔을 때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있겠구나 하던 사람이 천국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사람은 천국에 없겠구나 하던 사람이 천국에 있다고 합니다.

셋째는 나와 같은 사람의 이름이 천국에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모든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열심도 없고 잘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모두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물론 직장에서 가정에서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때로는 당황하게 됩니다.

부활 생명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Sardis)란 “남은 물건” 이란 뜻입니다.

사데란 남은 물건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것은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수고했어요.

그러다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천국에서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합니까?

이런 믿음이 죽은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전도서에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전 9:4).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서 생기가 넘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생화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죽은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은 제한된 세상이지만 저 하나님 나라는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거든요.

본문에서 겉으로 볼 때는 산 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 내면은 죽은 자인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인들이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고수하고자 하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엣세네파들 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거부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수도사같이 사는 은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입니다.

모세오경을 믿으면서도 세속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논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종교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종교 귀족들이요, 기득권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곳, 현실이 좋았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사후 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부활도, 천사도, 내세도, 심판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 -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실제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습니다.

이 땅의 삶보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예수님은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9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세상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해서 지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을 부정하고 내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며칠동안 고민 끝에 한 가지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당시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결혼했는데 자식이 없이 죽으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부된 여자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사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분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런 일이 한 가정에서 7형제 사이에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부활과 영생, 내세와 심판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별의 별 이상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나와서 반박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세상에 불행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세상이 이처럼 불공평하고 불쌍한 사람, 장애인들이 있는가?”

자꾸 세상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영적세계를 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문의 사두개인들처럼 주로 비극적인 스토리만 늘어 놓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이나 하나님 나라의 상급, 그리고 마지막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주님, 그저 자녀들 공부 잘하고,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부처님에게 비는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제목이 자기와 현실문제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그런 것은 관심 없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기적이 나타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 척박한 오지를 개척하는 세계선교를 감당하고, 그래서 한 나라, 한 캠퍼스가 뒤집어지고.

그런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이 땅에서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을 현실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는 현대판 사두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너희가 성경을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전혀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시집도 장가도 아니가고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 후의 세계를 1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부활한 뒤에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세계입니다.

성경에서 반드시 찾아야 할 신앙의 삼대 원칙은 무엇일까요?

창조 신앙

구원 신앙

부활 신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절.

우리 하나님은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 있는 존재, 영의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신비 아닙니까?

창조의 신비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하였는데 모세오경 안에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 분명히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다같이 26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두 현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I am the God of Isaac, I am the God of Jacob.

‘I am’ 모두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00년이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신을 현재형으로 소개하신 것은 하나님이 현재,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도 지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I am’ 입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모세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항상 ‘I am’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단절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항상 살아 계시고, 항상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항상 살아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이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육체도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담고 계시기 때문에, 그에게 붙어 있으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다 있었습니다.

로마서 4:17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고자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창조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태가 말라서 전혀 임신할 가능성이 없었지만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미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활을 믿어야죠.

창세기 1:1절, 창조는 믿는데 부활은 못 믿는다.

그게 말이 됩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반쪽으로 만드는 심각한 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좁은 자기 생각, 자신의 얄팍한 경험과 이성의 세계에 가두어 두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크나큰 죄악입니다.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자기 생각의 범주에 가두어 두고, 마음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제단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때 마르시온이라는 유명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은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툭 하면 화를 잘 내시고, 심판하시고, 진멸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신경질적인 하나님, 진화가 덜 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신약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 더 발전된 하나님, 업그레이드 되고 진화한 하나님,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잘 모르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 4:6-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의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생각할 때 조금도 죽음이 두렵거나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년의 스피릿으로 복음역사를 진두지휘하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복음의 동역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다면 지금 나에게도 왜 지금 나에게도 소원있는 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근 가운데서도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왜 내 인생과 장래를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사기군같은 야곱도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로 변화시키고 키우신 하나님이라면 왜 나를 변화시키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의 뜻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의 뜻은?

부활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태복음 22장 31~34)

intro

안녕하세요! annaga입니다.

오늘은 알다가도 모르기 쉬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봐요.

1. 창세기나 출애굽기에 먼저 언급된 문구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죠?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출애굽기 3장 15)

모세가 애굽에 가서 다른 이들이 “누가 보내서 왔냐?”고 물어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고 대답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모셨던 하나님을 동일하게 모세도 모시고 있고, 그분이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명하셨다”라고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이해가 가시죠?

하나님은 신이시니까 모시는 사람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렇게 바꿔도 신은 변하지 않고 영존하는 것이죠. 지금 여러분이 모시는 분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맞죠?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뽑아내자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왕의 계보이자, 대제사장의 계보입니다.

제사장의 여럿이 있을 수 있지만, 대제사장은 그 시대에 오직 하나이고 이들은 이 직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이 계보가 모세에게로 전해졌다는 뜻도 포함이 되면서, 모세에게 제사장과 선지자로서의 권위가 주어졌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말을 왜 하셨을까?

한편 그럼 예수님은 왜 이 문구를 들어서 사두개인들에게 교훈을 주셨을까?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예수님은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이 있다’는 증거를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보면 하나님은 영원하신데 섬기는 자들이 다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들이 다 때가 되면 죽어서 온전히 하나님께 제사를 올릴 수 없으니 죽지 않는 영원한 제사장(멜키세덱)이 필요하다고 히브리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죽지않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나 하나님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히브리서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한편 예수님은 사두개인에게 “하나님이 영원하시더라도 섬기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은 이런 날카로운 말을 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그냥 머리가 좋은 언변가나 논리학자가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이 모든 것을 예전부터 이미 계획한 분이 아니면 즉흥적으로 툭하고 내어놓을 수 없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람도 부활하여 신처럼 영원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하나님은 살아있을 때만 위로와 평안을 주는 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사도들도 다 죽었지만, 그들을 기억하시고 모두를

부활시켜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치며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부활이 없다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살아있을 때만 사람들이 심취하고 몰두하는 도구들은 신앙 말고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철학과 종교, 예술, 사상, 마약, 운동과 같이 여러 가지 모티브를 따라서 달음질하며, 자기 인생을 즐기고, 스스로를 고무시키며, 심지어는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죽으면 다시는 그것들과 함께 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려면 그분과 함께 영원을 누려야 합니다.

부활과 영생이 없다면 이 신앙은 한낱 헛된 철학과 망상에 불가합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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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첨부 1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성경 : 출애굽기 3:6, 15, 16, 마태복음 22 : 31-32

I

고린도 전서 10장 11절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두 우리로 경계하게 하고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원칙상으로는 똑같다. 전에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역사하는 원칙은 동일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또한 이방인 중에서도 그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택하셨다(행 15:14). 성경은 우리가 성도와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한다(엡 2:19). 또한 우리가 참 유대인이라고 말한다(롬 2:29).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거울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 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시며, 사람은 어떤 체험을 가져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서 이 문제를 볼 것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각기의 위치가 있다.

II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두 개의 기점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는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의 부르심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다. 또 하나의 기점은 이스라엘 나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만민 중에서 그분에게 속한 백성이 되고 그분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19: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확실히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고 또한 이스라엘 나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두 개의 기점 사이에서 하나님은 세 사람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얻으셨다 아브라함이 있고 이삭이 있고 야곱이 있은 후에라야 이스라엘 나라가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위에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없다면 이스라엘 나라도 없다. 만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도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체험과 이삭의 체험과 야곱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III

한 가지 기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출 3:6)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고 신약에서 주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권의 복음서에 모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마 22:32, 막 12:26, 눅 20:37)는 말씀이 있다.

주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것을 볼 때에』(눅 13:28)라고 하셨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라고 하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특별한 위치에 있고 이삭과 야곱도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IV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왜 이런 특별한 위치에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무리를 택하여 그분의 이름 아래 두사 그들로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얻으심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이 반드시 가져야 할 체험 곧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체험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서 영적인 시작을 가지셔야 했고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을 이루셔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체험을 갖게 하심으로써 이 특별한 체험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되도록 먼저 그에게 역사하셔야 했다.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실 뿐 아니라 이삭으로 하여금 특별한 체험을 갖게 하심으로써 이 체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되도록 먼저 이삭에게 역사하셔야 했고 또한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체험을 가짐으로써 이 체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되도록 먼저 야곱에게 역사하셔야 했다. 그들 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다루심과 모든 체험이 전해 내려올 때 하나님은 비로소 백성을 얻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모든 체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응당 가져야 할 체험들이다. 그들 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얻은 것들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얻어야 할 것들이다. 아브라함이 얻은 것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에 부족하다. 아브라함이 얻은 것에다 이삭이 얻은 것과 야곱이 얻은 것을 더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 26:24). 이것은 하나님이 이삭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말씀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출 6:8).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세 사람의 기업 안으로 들어간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 자신에게는 기업이 없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기업 안으로 들어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각각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들 세 사람의 영적인 체험은 세 가지의 다른 영적 원칙을 대표한다. 이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야곱의 성분과 이삭의 성분이 있고 또한 아브라함의 성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성분들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에게는 누구나 아브라함의 성분이 있어야 하고 이삭의 성분과 야곱의 성분이 있어야 한다.

무릇 참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들도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과 이삭이라고 말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에서도 이렇게 말할 줄 알고 에서의 자손도 이렇게 말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요, 이삭이요, 야곱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곱까지 포함시켜야 굳게 설 수 있고 세 방면을 갖추어야 굳게 설 수 있다.

V

아브라함의 본명은 아브람이었으나 나중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주셨다. 이 두 이름에는 모두 「아브」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의 원뜻은 아버지이다. 아브라함 자신이 아버지였고 그가 배운 공과는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아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아는 공과를 배우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뜻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셨다. 그는 내 「하나님」이 이제까지 일하시니 라고 말하지 않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자요 유일한 발기인(發起人)이라는 뜻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오신 분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5:19).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체험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일도 발기할 수 없고 또한 발기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창세기의 시작은 『태초에 하나님이…』 라고 말한다. 태초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비롯되었다.

오,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보여 주시는 그날은 당신에게 복된 날이 될 것이다. 그날 당신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조여매고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셨느냐를 물어야 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체험이다.

그의 체험은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한 것이다. 큰 강 유브라데 저쪽 편으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그를 얻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를 불러내셨다. 아브라함 자신은 이런 일을 생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할렐루야! 그를 얻고자 하신 분은 하나님이었고 역사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아브라함 스스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그가 얻게 된 것이다. 사전에 그는 그것을 몰랐다. 그가 부르심을 받아 나올 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조차도 몰랐다(히 11:8). 그는 고향을 떠나고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이것이 아브라함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그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도 큰 확신을 갖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오히려 주님이 원해야 할 수 있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결정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더러 우물쭈물하고 결단력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의 뜻은, 당신 자신은 참으로 알지 못하고 아버지가 지시하셔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한 아들을 낳게 될 것을 몰랐다. 아들까지도 하나님이 주셔야 했다. 아브라함은 어떤 것도 발기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얻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그에게 주셔야 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았다. 이런 인식은 교리적인 인식이 아니다. 이런 인식은 참으로 하나님께 이끌리어 「내 자신이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유의 근원이시자 또한 나의 근원이시며, 그분이 없으면 시작이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아브라함의 인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할 첫번째 공과는 바로 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과 그분이 아버지 곧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VI

이삭에게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4장은 이삭을 아들이라고 말한다. 이삭은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창세기 11장부터 50장까지를 읽어볼 때,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이삭이 특별한 점이 없는 평범한 사람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브라함 같지 않고 야곱 같지도 않다. 아브라함은 큰 강 저편에서 나온 사람으로서 창업한 사람이지만 이삭은 그렇지 않다. 이삭은 또한 야곱과 같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고 많은 고생을 하지도 않았다. 이삭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누렸다. 비록 이삭도 몇 군데 우물을 팠지만 그 우물들도 전에 아버지가 파 놓았던 것들이었다.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 26:18).

이삭이 우리에게 주는 공과는, 아버지께로부터 이어받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라고 묻는다. 이것은 내게 있는 것 중에서 한 가지도 받지 않은 것이 없고 나의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삭이다.

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이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 노릇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삭 노릇을 잘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삭의 체험 없이 아브라함의 체험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삭의 체험만 있고 아브라함의 체험이 없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보아야 하고, 또한 우리는 아들로서 모든 것을 그분이 주신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아들 될 수 있는 생명도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받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도 다만 받은 것이요, 승리, 칭의, 성화도 다만 받은 것이다. 죄 사함도 해방도 다 받은 것이다. 받는 원칙이 바로 이삭의 원칙이다. 우리는 『할렐루야! 할렐루야!』라고 외쳐야 한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삭에게도 주셨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특별히 다른 것을 이삭에게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의 부친에게 준 것을 그에게 주셨다. 이것이 우리의 구출이요 우리를 해방시킨다.

VII

이제 우리는 야곱을 보기로 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만유의 근원이심을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이 다만 받은 것이라는 것까지도 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영접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받지 않을 때 우리가 공허해지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왜 생명의 법으로 말미암아 이기려고 하지 않고 자기 의지로 이기려고 하는가? 이것은 아직 그에게 야곱과 야곱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바로 육체의 활동이 남아 있고 혼의 능력과 천연적인 생명이 거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기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스스로 무엇을 시작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이삼 주간은 교리를 기억하고 있다가도 스스로 또 무엇을 시작한다. 이것은 여기에 야곱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승리에 관한 교리, 성결에 관한 교리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주고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의 처리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 승리의 교리와 성결의 교리는 완전하지 않고 또한 실제적이지 못하다. 혼 생명을 만지지 못한 교리는 며칠 동안은 사람을 기쁘게 하나 그 후에는 끝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 활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아들의 유익을 보고 아버지의 길을 순종하게 된다. 우리가 아들의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여부와 아버지의 길을 갈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가 성령의 통제를 받아들이는지, 천연적인 생명이 그분에 의해 만진 바 되었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야곱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의 천연적인 특징은 바로 그의 총명이다. 그는 극도로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도 속일 수 있었으며, 그의 형을 속였고 아버지와 그의 외삼촌도 속였다. 그는 어떤 것이든 다 얻으려고 했고 어떤 것이든 다 해보고 어떤 것이든 다 이루려고 했다. 그는 그의 부친같이 아들이 되지 않았고 두 손이 빈 채로 외삼촌에게 갔다가 가득히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야곱이다.

야곱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이삭은 우리에게 아들에 대해 말하지만 야곱은 우리에게 성령에 대해 말한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성령을 대표한다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체험이 성령의 역사를 대표한다는 말이다. 야곱의 일생 체험은 성령의 통제를 대표한다.

당신은 여기서 교활하고 계략이 많으며 남을 속이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 사람 안에서 성령이 한 단계 한 단계 그를 통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의 발꿈치를 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동생으로 있었다. 그가 팥죽 한 그릇으로 그의 형을 속인 것은 사실이나 나중에 집을 떠난 사람은 그의 형이 아니라 그였다. 장자의 명분을 그가 탈취했지만 도망 다닌 사람은 그이지 그의 형이 아니다. 그가 아버지의 축복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밖에서 표류한 사람은 그이지 그의 형이 아니었다.

그가 외삼촌에게 가서 라헬을 취하였지만 라반이 그에게 먼저 준 사람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이십 년 동안 그는 낮에는 더위를 견디고 밤에는 추위를 견뎌야 했다. 그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고생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통제요 총명한 사람이 받은 연단이다. 계산할 줄 아는 사람도 주님의 손에 의해 눌려질 것이고, 방법을 쓰는 사람도 주님의 손에 의해 눌려질 것이며, 천연적인 생명도 하나님에 의해 눌려져 나가야 한다. 야곱의 일생 체험은 우리에게 성령의 통제를 보여 준다.

혹 어떤 형제 자매들은 특별히 남보다 총명하고 생각을 잘하며 계획과 계략과 전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은 사람의 총명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고후 1:12).

야곱은 항상 성령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총명이 통하지 않았다. 브니엘에서의 그 밤에 야곱은 가장 큰 공과를 배웠고 이것은 또한 일생 동안에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밤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도 다룰 줄 알고 하나님도 다룰 줄 알며 어떤 일이든지 쉽게 통과하고 하나님을 만나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의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름발이가 될 줄이야!

환도뼈의 힘줄은 온 몸에서 가장 큰 힘줄이다. 야곱의 환도뼈가 하나님에 의해 만진 바 된 것은 그의 천연적인 생명의 가장 강한 부분이 하나님에 의해 만진 바 된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절었다. 그가 다리를 절기 전에는 야곱이었으나 절은 후에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날부터는 그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속임을 당했다. 전에는 그가 부친을 속였으나 그날부터 그의 아들이 그를 속였다. 이전 같았으면 총명한 야곱은 그의 아들이 자기를 속일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남을 속이기에 능하고 남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을 속일수록 남을 믿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측정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달라졌다. 지금의 야곱은 과거의 야곱이 아니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총명을 의지하지 않았기에 그는 자기 아들에게 속임을 당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고 그의 천연적인 능력은 하나님의 처리를 받았으며 하나님에 의해 제해졌다. 바로 이런 체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우리를 이끈다.

어느 날 하나님은 당신을 비추고 당신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간사하며 계략이 많은 사람인가를 보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여주실 때 당신은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빛은 당신을 죽일 것이다. 또한 당신 자신이 끝났다는 것과 굴복하며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부터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통제이다.

VIII

총괄해서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받았을지라도 만일 성령의 통제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이다. 당신의 환도뼈의 힘줄이 끊어지고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처리를 받을 때 비로소 당신은 겸손한 사람, 두려워하고 떨면서 주님을 좇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날이 될 때 당신은 방심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주장을 내세우고 기도하지 않고도 말하고 일을 추진하는지! 또 얼마나 쉽게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지 않고서도 확신을 가지는지!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만진 바 되고 파괴되어 자신을 의지하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날 비로소 절름발이가 될 수 있다. 절름발이란 길을 걷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절름발이인 것을 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에 의해 이런 경지에까지 인도되지 못한 사람은 브니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방도가 있고 확신이 있으며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령의 통제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으사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체험의 관계를 보여주시기 바란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전일한 체험이고 또한 상호 보완적이다. 이 세 가지 중 한두 가지만 가질 때 굳게 서지 못한다. 이 세 가지 체험을 분명히 보아야만 하나님의 길에서 전진할 수 있다.

워치만 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제 1장, 한국복음서원]

[오늘의 설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문장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뿌리를 가르치려는 전통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라는 조상을 통해 승계된 하나님을 뿌리로 삼는 신앙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 국사 과목이 사라진 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학생들이 임진왜란이나 3·1운동, 광복과 6·25전쟁의 발발 시기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교육이 없이는 결코 그 나라의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막중한 사명 3가지는 선교와 교육, 봉사입니다. 어느 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일 것입니다. 유대인이 나라 없이 1900여년을 떠돌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이유는 거주할 땅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땅이 없고 나라가 없음에도 망하지 않은 이유는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포로가 되어 이방에 잡혀 갔을 때에도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웠습니다. 이곳에서 말씀교육과 가정교육, 민족교육 등이 이루어졌고, 이것을 쉐마교육이라고 합니다. 쉐마교육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교육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절대 교육을 급하거나 초조하게 시키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교육의 책임을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두었습니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가 다른 민족 사람이어도 그 아이는 유대인이라고 여깁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유대인일지라도 어머니가 다른 민족이면 그 아이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피보다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어떤 교육을 받았습니까. 자라기는 애굽의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랐지만 실제로는 쉐마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친어머니 요게벳은 유모 신분으로 모세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모세는 분명 애굽의 음식을 먹고 애굽의 옷을 입고 애굽 궁궐에서 자랐습니다. 또한 애굽의 예법으로 교육을 받았고 애굽의 문화를 익히며 자랐지만 그의 정신은 히브리인의 것이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이었을까요. 두말할 것 없이 어머니였습니다. 젖을 먹이면서 무릎에 안고 알려준 교육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디모데는 어떻습니까.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지만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성경은 디모데에 대하여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청결한 믿음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언제든 부모가 본을 보여야 살아 있는 교육이 됩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위해 어머니가 새벽마다 무릎을 꿇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면 자녀는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신앙의 뿌리를 중시하는 것처럼 우리의 후손들에게 신앙의 뿌리를 물려주는 것이 가장 위대한 교육입니다. 부디 자녀에게 올바른 신앙을 가르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진하 서울 예수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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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성경의 진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22:32구절이 죽음 뒤에 계속 살아가는 “영혼” 이론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해당 구절을 함께 읽어보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시니”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으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죽어도 살아있는 거잖아.” 그러나 이 구절을 앞뒤 내용을 파악하지 않고 읽으면 문장의 절반만 이해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일곱 번 결혼한 여자가 부활하면 도대체 누구의 부인이 되는 거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셨다.

마태복음 22:29-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예수님게서 말씀하시려고 했던 부분은 부활이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신 것은 말씀의 시작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라고 말씀하셨다. 본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죽은 사람들이 현재 어딘가에 살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시고 그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하는” 내용이다.

타소스 키울라초글루

(Tassos Kioulachogl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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