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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분당우리교회 특별새벽부흥회
애통하는 자 (마태복음 5:4)
이찬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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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Faithlife Sermons
오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애통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물으십니다. 진정한 회개와 매일 매일 삶 속에서 …
Source: sermons.faithlife.com
Date Published: 4/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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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께서는 곧 이어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는 다른 …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3/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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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목사]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① … – 기독교한국신문
이렇듯 야곱의 비통함으로 통곡하는 모습이 바로 주께서 마태복음 5:4절에 사용하신 ‘애통’이다. ‘애통’의 의미가 이처럼 강하다고 해서 예수님이 ‘애통 …
Source: www.cknews.co.kr
Date Published: 3/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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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목사칼럼 – 팔복 해설(2)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특별기고-8복 해설(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 함) 이동휘 목사(바울선교회 …
Source: www.bauri.org
Date Published: 3/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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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자기 잘못을 애통해하는 복 있는 자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직장 동료, 학생, 환자, 고객, 상사나 부하, 거래처 사람에게 실수 …
Source: www.theologyofwork.or.kr
Date Published: 1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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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좋은친구교회
곁으로 불러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생겨난 영혼의 궁핍함을 다시 하나님 곁으로 불러서 관계를 …
Source: goodfriendchurch.com
Date Published: 4/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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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목사 설교] 애통하는 자 – 크리스천투데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다 쓰는 용어를 빌려서 쓰신 것인데, 여기 ‘애통’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백성답게 사는 데서 오는 애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3/2/2022
View: 1126
[오늘의 설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국민일보
주님께서는 애통해하고 우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육신적이거나 세상적인 애통이 아니라 영적인 애통입니다 …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2/22/2022
View: 718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캘거리순복음중앙교회
이것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이나 죄에 대한 통탄함을 나타내는데 쓰여지는 말입니다. 즉 죄악의 세력이 하도 강하여 아무리 애써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수 없이 …
Source: www.calgarychurch.org
Date Published: 8/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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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애통 하는 자는 복 이 있나 니
- Author: 분당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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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0.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CGTLmks7Hok
[황인찬 목사]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①
▲ 황 인 찬 목사
현대인은 무겁고 진중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눈물, 애통’과 같은 말을 싫어할 뿐 아니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말이나 단어가 주는 어감이 마음에 부담을 주고, 그 부담을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성경에 많은 역설이 있지만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의 역설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성경 말씀이 아닐까 싶다.
성경에는 눈물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가 대충 9가지 정도가 있다. 그 가운데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애통하다’는 용어는 가장 그 강도가 높고, 그 감정이 짙은 단어에 속한다.
애통(哀慟)은 슬피 울부짖음 또는 슬퍼하고 가슴 아파함이다.
마태복음 5장4절의 애통함이 헬라어 ‘펜데오’인데 펜데오는 고통으로 몸부림칠 정도로 철저하게 탄식하고, 슬퍼함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창세기 37장에 늙은 히브리 족장 야곱이 통곡을 한다. 열두 아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이 행방불명이 되어 생사는 물론이고, 행방도 도무지 알 수가 없을 때, ‘죽었다.’는 형들의 거짓보고에 늙은 아버지 야곱은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땅을 치며 식음을 전폐하고, 날마다 통곡을 한다. 이렇듯 야곱의 비통함으로 통곡하는 모습이 바로 주께서 마태복음 5:4절에 사용하신 ‘애통’이다.
‘애통’의 의미가 이처럼 강하다고 해서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실 때, 우리 모두가 야곱처럼 늘 통곡하고, 울어야 복이라는 의미로 받지는 않는다. 우리가 야곱처럼 그렇게 통곡하고 울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이 말씀과 별 관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가슴을 쥐어짜며 하늘이 무너지듯 하여 통곡하는 일은 평생에 그저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할 것이므로 이 말씀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제쳐놓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는 무엇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토하는 영혼의 거룩한 탄식’을 ‘애통’이라고 표현하신 듯하다.
하나님 앞에 우리 심령을 비우려 한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애통이 따라온다. 심령을 비우지 못한다면 그는 이 “애통하는…” 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지금부터 약 반세기 전만해도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애통하는 공동체였다. 식민지 교회의 처절함, 광복이후 너무나 가난하고 무질서하도록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눈으로 보면서 살아야했다. 게다가 6.25와 그 이후의 상황이란 그야말로 사람 사는 꼴이 아니었다.
요즘 어려움을 당하는 시리아 난민들의 모습을 TV로 보지만 그 당시 우리의 모습은 지금 그들과 비교 불가할 만큼 더 참혹하고 처참했다. 그런 형극(荊棘)의 길을 걷는 성도들이 교회에 모이면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면 울었다.
자기 죄로 통곡하고, 불신 가족들을 위해 통곡하고, 조국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바닥과 옷을 적시며 애통의 기도를 드렸다. 눈이 붓도록 울었다. 마룻바닥의 눈물 자국이 너무 진하게 박혀 걸레로 닦아도 닦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살았다. 이렇듯 눈물로 살았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더 크고, 절대적이었다.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가 있었다. 그 재미(?)로 울고, 더 울었는지도 모른다.
우는 것이 기독교 일 수는 없다. 애통하는 것만이 기독교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른 눈을 가진 신자들의 교회보다 젖은 눈을 가진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훨씬 더 은혜의 세계를 깊이 알 것은 분명하다. 오늘의 교회들에서 애통하는 눈물을 보기가 어렵다. 눈물이 메마른 애통의 극한 가뭄으로 심령들이 쩍쩍 갈라졌다. 웃음이 복음으로 들리고, 눈물은 비복음으로 들릴 정도다.
어느 신문에 실린 ‘유머설교 세미나’ 광고를 본적이 있다. 설교자가 사람들을 웃기면 분위기가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진 회중에게 말씀을 전하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인데, 그럴 듯하다.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이 훨씬 좋다. 웃는 것보다 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웃는 것을 좋아한다. 교회서도 즐겁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사람들이 많이 웃고, 기분 좋게 하겠다는 것이 잘못이거나 그릇됨일 것인가.
기분 좋게 웃어야 은혜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우리 모습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거리가 상당하다는 사실이 두렵다. 이것이 현대교회의 이미지라면 눈물이 부정적이기만 한가?
우리의 짧은 인생 중에 눈물의 소중함을 알고 경험한다. 눈물은 눈물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와 무게를 가졌다. 아무리 웃음이 우리에게 매력 있고, 즐거운 것이라도 웃음이 눈물의 깊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만일 우는 것은 저주요, 부정해야 될 슬픔이라면 그의 인생은 중요하고, 값진 가치 하나가 빠져 버린 인생일 것이다.
의왕중앙교회 담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특별기고-8복 해설(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 함)
이동휘 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참된 축복으로 여덟 가지 단계가 있다. 야곱의 사다리로 비유될 수 있다. 낙원으로 갈 때는 슬프고 다루기가 즐겁지 않은 일이지만 이 황금 같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해야만 그곳에 도달해진다. 애통과 위로가 모두 귀한 과정이다.
애통하는 자가 복 받은 자다
1. 복 받도록 만들어주지 않는 애통
외적인 손실을 슬퍼할 때 그것은 육적인 애통이 된다. 세상적인 슬픔은 사망을 이룬다.(고후 7:10) 불순한 정욕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애통한다든가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지 못해 애통한 것은 마귀적인 애통이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낸 것을 몹시 가슴 아파했다.(출 14:5) 설교를 너무 많이 들었다고 후회한다면 하나님도 장차 올 재앙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2. 자신을 위한 거룩한 애통
영적인 애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죄와 그리고 비참함이다. 죄는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의 죄가 그 대상이다. 죄의 불덩어리를 지고 갈 때 그것을 끄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 크리스톰은 죽음을 슬퍼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니며, 죄를 슬퍼하는 자라야 복이 있다고 하였다. 진노로 묶일 죄과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은 선한 도리가 된다. 심판대 앞에 끌려갈 죄인이 울지 않겠는가? 죄인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도록 되어 있고 자비로 변호해 줄 사람이 없다면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 확실하다.
죄는 사람을 두꺼비나 뱀보다 더 흉악하게 만든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죄가 얼마나 큰 변질을 가져 왔는가? 영혼이 한때는 환한 하늘색이었으나 죄가 새까만 색깔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죄들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 일에 애통해야 하지 않겠는가?
3. 바른 복음적 애통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나무를 베거나 쥐어짜지 않고도 저절로 흘러 떨어지는 몰약과 같아야 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주께 올 때 손에는 향유를, 마음에는 사랑을, 눈에는 눈물을 가지고 왔다. 그분은 억지로 받아내는 것을 사랑하시지 않는다.
복음적 애통은 영적이어야 한다. 죄가 그를 괴롭혔고 그래서 다윗은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말했다.(시 51:3)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눅 15:18)의 고백이다. 죄는 하나님을 싫어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든다. 죄는 하나님께 심술부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죄는 하늘에 대해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죄는 자비의 가슴을 발길로 찬다. 배은망덕 하는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자비의 보석을 받아서 죄를 짓는 데 사용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보석과 귀걸이 등을 받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출 32:4) 죄는 결핍을 가져온다. 좋은 것들을 다 빼앗아 간다. 주님까지 빼앗아 간다. 주님의 인자한 모습도 가져간다. 의의 태양이 우리의 지평선에서 사라짐과 우리의 평화가 사라졌음을 슬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을 애통해하는 것이, 그의 은혜를 다시 찾는 최선의 방법이다.
4. 복음적인 애통을 가져야 한다
⦁복음적 애통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다.
속이는 자들은 일반적인 죄를 가지고 어물어물하고 만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상처가 난 사람과 같다. 의사에게 모든 상처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참된 회개자는 낱낱이 죄를 슬퍼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삿 10:10) 우상숭배를 고백하면서 애통하였다. 개개의 죄에 대해 해결하고 지나가야 한다.
⦁복음적인 눈물은 믿음의 눈에서 떨어져야 한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막 9:24) 믿음의 눈물은 값진 것이다. 그 눈물이 땅에 떨어질지라도 그 믿음은 하늘에 도달한다. 믿음의 눈물은 병에 담는다.(시 56:8) 눈물은 흘리지만 어떤 경우 마음은 완고할 수 있다. 베옷은 입었으나 슬픔은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적인 애통은 자신을 증오한다.
오물 속에 떨어진 사람은 자신을 몹시 싫어한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괴로워하고 싫어한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불순한 눈을 증오한다. 악이 감추어져 있는 이 마음이여! 죄를 떠날 뿐 아니라 죄를 증오해야 한다.
⦁복음적인 애통은 정결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죄를 몰아내기 위해 애통할 뿐 아니라 죄 자체 때문에 울어야 한다. 애통할 뿐 아니라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욜 2:12) 마음에 깔려있는 독을 뱉어내라. 죄를 깨뜨려 버려라.
⦁복음적인 애통은 죄를 미워함과 연관이 있어야 한다.
죄를 금할 뿐 아니라 죄를 소름이 끼칠 만큼 싫어해야 한다. 비둘기는 매의 작은 깃털이라도 증오한다. 작은 동작의 죄라도 증오해야 한다.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여겨라.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평생 전쟁이 있었던 것처럼 이 둘 사이는 어떤 조건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평생 전쟁이었다. 참된 애통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하고 죄를 미워함으로 끝난다.
복음적인 애통은 빚을 갚는 것이다.
삭게오는 남에게 빼앗은 것을 4배로 갚겠다고 하였다.(눅 19:8) 다른 사람의 재산을 축내었으면 되돌려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의 명예를 더럽혔으면 용서를 빌어야 한다. 되돌려 줌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
⦁복음적 애통은 서둘러 해야 한다.
회개를 늦추다가 죽을 때까지 연기될 수 있다. “이제 우는 자가 복이 있다.”(눅 6:21) 우리에게 다른 날이 준비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순간에는 왜 안 되는가? 미루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복음적 애통은 지속적이다.
히브리말로 ‘눈’이란 말은 ‘샘’을 나타낸다. 죄 때문에 눈물이 샘과 같이 계속 흘러서 그치지 않는 것을 말해준다. 바울이 ‘날마다 나는 죽노라’ 함과 같이 ‘날마다 애통하노라’ 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을 매일 회개의 소금물에 씻어 병의 재발을 막거나 치료제가 되어야 한다. 회개가 새로워짐에 따라서 용서도 새로워진다.
5.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도 애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으셨다.(마 23:37)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해 탄식하셨다.(막 3:5) 다윗도 악인들의 악을 인하여 눈물을 흘렸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 나라가 죄의 무게 때문에 쓰러지려 하는데 애통해야 하지 않을까? 신앙의 자유가 죄를 짓는데 특허를 내주어 저주받은 의견들이 득세하고 변덕쟁이들의 말장난이 개방되어 하나님을 향해 불경건하게 불리는 이때에, 울어야 하지 않을까? 애통하는 자가 거의 없는 것에 애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온을 기억하고 울었다.(시 137:1) 예배드리는 곳에 가는 것을 금지당하고 강가에 앉아서 울었다. 예배드릴 수 없이 신앙의 박해 속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민족이 가득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포도즙 틀처럼 밟히는 것을 볼 때 애통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눈물을 그리스도께서 마실 음료로 드려라. 그분의 긍휼로 불붙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의 골방으로 들어가라. 보다 작은 죄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만 보다 큰 죄는 성령을 괴롭힌다. 엘리 선지자는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애통이,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는 애통보다 컸다.(삼상 4:18) 영적인 슬픔은 모든 슬픔보다 커야 한다.
애통에 반대되는 것은 굳은 마음이다. 성경은 돌 같은 마음(겔 36:26)이라 한다. 무감각이다. 돌은 눌러도 빻아도 느끼지 못한다. 죄와 진노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신장에 돌이 끼면 느낄 수 있어도 마음의 돌은 느끼지 못한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가 되어…”(엡 4:19) 지옥은 굳은 마음으로 가득한 자들이 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도 없다. 거기에는 우는 것은 있으나 부드러움은 없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회개는 죄를 풀고 죄가 죄 되지 않도록 만든다. 마음이 굳어진 죄인은 회개가 불가능하다.
6. 불평자는 많은데 애통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이 습기가 부족한 돌밭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때문에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는 울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피를 흘리셨는데 당신은 죄를 가지고 흥겨워하는가?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 당신의 희락거리인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서 배가 파산 당할 위험에 있는데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다. 하나님이 칼을 잡고 계시는데 비파와 수금을 잡는다면 얼마나 시기에 맞지 않는 우스운 일일까? 죄인이 웃으면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비참한 광경 중의 하나다.(데오필락트) 회개를 헐뜯는 사람은 은혜의 성령을 헐뜯는 것이다. 죄에 대한 애통은 진노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길이다. 회개를 헐뜯는 것을 회개하라.
7. 거룩한 애통의 동기
⦁죄를 위한 눈물: 외적인 손실 때문에 운다면 그것은 마치 바위 위에 쏟아부은 소나기 같아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죄를 위한 눈물은 소금물이 벌레를 죽이듯이 우리의 부패를 소독한다. 짭짤한 회개의 눈물은 양심을 갉아먹는 죄의 벌레를 죽이는 데 도움이 된다.
⦁복음적인 애통은 은혜의 증거: 비둘기는 슬피 우는 새이다.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눅 3:22) 비둘기 같이 우는 것이 있으면 성령이 내려오시는 좋은 증거가 된다. 죄를 위한 울음은 새로운 출생의 표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운다.
⦁눈물의 귀함: 정원 안의 샘은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 마음 안에 흐르는 슬픔의 샘이 있으면 하나님께 대단한 기쁨이 된다. 그 여자의 눈물이 그 여자의 향유보다 더 향기로웠다.(눅 7:38) 야곱은 울어 천사를 이길 힘을 얻었다.(호 12:4)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녹인다. “기도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도록 마음이 기울어지게 하지만 눈물은 그분에게 강요하는 것이다.”(제롬)
⦁눈물의 감미로움: 영혼이 울며 흐느낄 때보다 더 부요하여질 때는 없다. 골방의 눈물이 궁중의 음악보다 낫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그가 울 수 있을 때 그 자신이 천국의 변두리까지 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설탕은 녹았을 때 가장 달다. 그리스도인이 눈물에 녹을 때 가장 감미로운 기쁨에 참례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눈물: 회개하는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녹이고 그분의 손을 묶어 놓는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을 중보자의 눈물이 그의 손을 만류한다.
⦁거룩한 애통은 미리 막아주는 약: 지옥은 우는 곳이다.(마 8:12) 화 있을진저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눅 6:25) 여기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나중 절망의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의사는 환자의 피를 흘려 죽음을 막을 수 있다.
⦁길은 오직 하나: 도시로 가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으나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애통의 길을 통과하여야 한다.(행 26:20) 사람이 병들었을 때 스무 가지 약으로 낫게 할 수 있으나 죄는 영혼을 죽게 하는 병이다. 회개의 약 외에는 개발한 것이 없다.
⦁회개할 필요성: 특별한 악을 행하지 않은 평범한 자는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장부책에 빚만 잔뜩 채워 놓았다. 당신은 은밀한 죄 가운데 살았다. 회개하지 않는 것도 슬프지만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더 나쁘다.
⦁눈물은 끝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저희 눈물을 모든 눈에서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죄가 그칠 때 눈물도 그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영원한 햇빛을 볼 것이다.
⦁거룩한 애통의 유익: 골짜기에는 샘물이 흐르기 때문에 곡식이 번성하게 된다. 슬픔이 샘이 흐르는 곳에 마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애통은 마귀의 유혹을 막기 위해 담을 쳐 준다. 눈물은 마귀의 불과 불화살을 끄기 위한 제일 좋은 소방기구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표적: “당신 스스로가 녹아지고 애통하는 구조를 가진 것을 발견할 때 이것으로 하나님을 만났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버나드) 마음이 죄 때문에 깨어지고 거룩한 눈물에 녹아질 때 그것이 위로며 하나님이 함께 계신 표징이다.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사 38:5) 다윗의 눈물은 하나님의 귀에 음악이 되었다.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시 6:8) 회개하는 사람이 흘리는 진주 같은 눈물은 천사들이 주목하여 바라볼만하다.
8. 애통하는데 방해되는 것들
⦁죄를 사랑하는 것: 죄를 사랑하는 것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파이프안의 돌과 같다. 죄짓는 달콤함이 마음을 미혹시킨다. “죄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을 범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제롬) 죄를 사랑하는 것은 영혼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얼려버린다.
⦁절망: 절망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평가 절하한다. 절망은 자비를 시야에서 가려 숨겨버린다. 당신이 큰 죄인일지라도 우는 죄인이기만 하면 왕의 금홀이 내밀어진다.(시 103:11) 자비의 용납하심이다.
⦁눈물은 우울하게 한다는 독단: 우리의 눈물에다 우리의 모든 기쁨을 빠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한다. 자연 상태에서 무슨 기쁨이 있는지 이야기하여보라. 죄는 상한 것과 터진 것뿐인데 무슨 기쁨을 제공할 수 있는가? 죄를 지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떨리지 않았는가.
⦁성령의 활동을 막는 것이란 변명: 성령님은 온유하시고 부드러운 분이신데 그를 슬프게 할 때 오히려 눈물은 막힌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뜨거운 밀물을 일으키신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하신다.(살전 5:19) 성령이 물러가시면 애통할 수가 없다.
⦁자비에 대해 주제넘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비를 베푸셔서 친히 죽으심으로 구원을 주셨는데 내가 기도하거나 애통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여 스스로 대담한 죄인들이 되어 수렁에 빠진다. 주제넘은 죄인들이다. 죄를 버리지 않고는 자비가 없다.
⦁죄를 과소평가하는 독단: 반역은 왕위에 대한 도전이므로 죄가 크다 작다 말할 수 없다. 죄는 작아도 죄이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 모든 죄에는 죽음과 지옥이 따른다.(롬 6:23) 회개가 없으면 아무리 적은 죄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떤 죄라도 피 값이 필요하다.
⦁꾸물거림: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이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적의 소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너무 이르다고 미루는 자가 어디 있을까? 병은 치료할 수 있을 때 치료해야 한다.
⦁공의를 비웃는 것: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악용하는 자들이 많다. 하나님께서 소돔에 대해 오래 참으셨으나 그들의 듣지 않는 귀에 유황불로 심판하셨다. 오래 참으신다는 것이 용서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환락과 음악: 많은 사람이 슬픔을 실어 날려 보내고 애통의 눈물을 술잔에 빠뜨린다. 사해로 즐겁게 헤엄쳐 가는 물고기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옥으로 춤추며 내려가는가. 죄는 마귀의 배설물인데 그것을 마시며 도취한다.
9. 애통하는 자에게 따르는 위로
위로 전에 애통이 먼저 와야 한다. 치료할 때 먼저 상처를 도려내야 함과 같다. 위로를 말하면서 애통은 깎아내린다. 자유사상가들은 기쁨과 위로를 너무 기뻐한다. 약은 핥아 먹고 쓴 부분은 뱉어버리는 사람이다. 반드시 눈물의 소나기 뒤에 기쁨의 햇빛이다. 씨 뿌리지 않고 수확하려는 사람과 같다. 우리 주님은 애통을 처방하시고 위안의 포도주의 마개를 빼신다. 마귀는 정반대이다. 사탄은 죄를 아름답게 꾸미고 기쁨으로 달콤하게 하며 슬픔의 계산서를 내민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그분은, 돌 항아리를 눈물로 가득 채우면 그 눈물을 기쁨의 포도주로 바꾸실 것이다. 애통자의 눈물이 부패를 씻어내는 데 도움을 주고 나쁜 것을 훑어내는 세제로 쓰인 후 하나님은 설탕물을 주신다. 위로자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영원히 흐르시게 한다. 사람들은 위로를 주는 척하지만 사기극일 수 있다.
10. 애통자가 충분한 위로를 받지 못하는 이유
① 하나님에 의해서
그분은 우리의 위로를 얼마 동안 보류하시므로 은혜의 값을 올리실 때가 있다. 돈이 너무 흔해서 가치가 떨어질 때는 왕은 돈을 거둬들여 그 가치를 올릴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보다 그분을 위한 봉사를 원한다. 남편 그 자신보다 남편의 돈 때문에 사랑한다면 창녀의 사랑이다. 위로만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것은 자신을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체만을 사랑하기 원하셔서 슬픔의 과정을 잠시 허락하신다.
② 자기의 실수 때문이다.
애통자는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므로 자유를 누릴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사명의 끈을 늦추는 수도 있고 죄를 억제하는 굴레를 느슨하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가 주신 자유는 거룩한 자유이며 죄를 짓도록 하는 자유가 아닌데도 실수를 한다. 죄로부터 해방하는 자유일 뿐이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하라.”(벧전 2:16) 우리가 성결의 영을 꺼버리면 하나님은 위로의 영을 꺼버리실 것이다. 구름이 하나님의 얼굴빛을 가려 버린다.
③ 불만과 토라진 마음 때문에 위로가 부족하게 된다.
불안한 마음은 거친 바다와 같아서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불안은 외적인 슬픔과 우울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시기나 교만으로 마음이 흐트러져 어지럽혀진다. 불안한 영에게 위로가 정착할 수 없다. 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황금 기름을 멈추지 않게 해야 한다.
④ 주의 약속에 마음을 덜 쏟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의 가슴에서 젖이 나온다. 그 약속을 믿고 사모할 때 받는다. 애통과 위로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
⑤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흙이 불을 끄듯이 세상적인 것은 영혼 가운데 피어오르는 거룩한 기쁨의 기름을 끈다.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땅에서 습기가 올라오는데 그 습기가 등불을 끈다고 한다.
11. 하늘나라에서 베풀어지는 은혜의 위로잔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큰 잔치를 기다리자. 호화롭고 웅장한 왕의 장엄한 잔치다. 만족을 주는 잔치다. 하늘의 음료, 불사의 음식, 모자람이 없는 풍성함,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를 초청한 연회장소로, 다시 목마름이 없는 생명잔치다. 성도와 천사,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잔치, 희락의 만찬이다. 사랑의 깃발을 꽂으시고 천사들의 찬양이 있고 성도들의 승리의 노래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만찬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다 지불하였으므로 계산서를 받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눈물을 뿌리고 죄를 위하여 심하게 울지만 눈물이 포도주로 바뀔 것이다. 기도와 금식으로 몸을 쳐 복종시키지만 낙원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것이다.
할렐루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팔복 가운데 두 번째 복은 슬픔이라는 감정적 반응을 더함으로 우리 심령의 가난함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삶에서 직면하는 악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즉 우리 직장 안에 있는 악을 포함해서, 세상 가운데서 악에 부딪칠 때 슬픔이라는 우리 감정이 건드려진다. 그 악은 우리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서, 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근원에서도 올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악한 말과 악한 행위, 직장에서의 악한 정책들을 정직하게 애통해할 때, 하나님은 우리 슬픔을 보시고, 상황이 늘 그렇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자기 잘못을 애통해하는 복 있는 자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직장 동료, 학생, 환자, 고객, 상사나 부하, 거래처 사람에게 실수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해 슬퍼하는 감정적 복이 없이는, 결코 우리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이는 배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사람들이 우리를 용서해 줄 마음이 있는지 깨닫고 깜짝 놀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이용할 경우, 우리는 첫 번째 팔복에서 흘러나오는 ‘교만하지 않음’의 복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한 회사가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경영에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걸 찾아냈다. 트랙터와 잔디 깎는 기계를 생산하는 ‘토로’(Toro)라는 회사는 자사 제품을 사용하다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자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누군가 부상당했다는 걸 회사가 아는 즉시, 부상당한 사람을 찾아서 슬픔을 표하고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제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런 접근 방식은 해를 거듭할 수록 소송을 제기하던 고객의 수를 실제로 현저히 줄여 줬다. 버지니아 메이슨병원(Virginia Mason Hospital)의 의료진들도 환자가 사망한 것에 대한 병원의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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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4절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할 때가 아니라 참된 부흥을 위해 애통해하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언젠가 반드시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에 절실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애통해하고 우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육신적이거나 세상적인 애통이 아니라 영적인 애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애통해하는 사람입니까.
첫째, 자신의 죄악 된 모습 때문에 애통해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애통은 심령이 가난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는 사람이기에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고, 극도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굳게 붙잡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가기를 소원하며 끊임없이 추구하며 살게 됩니다.
둘째, 다른 사람들의 죄악 된 모습 때문에 애통해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그들이 회개하지 않기에 받을 무서운 심판을 보시면서 슬퍼하며 우셨습니다. 사람들의 죄악을 바라보면서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는 주님의 애통해하시는 모습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애통해하시는 마음을 체험하여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악과 허물을 보면서 슬퍼하고 애통해하면서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잃어버린 영혼들의 비참한 모습 때문에 애통해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악과 허물을 보면서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사람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우리 주님의 애통해하시는 마음입니다. 십자가는 이런 잃어버린 영혼들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애통해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온전히 드러난 사건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주님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 애통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면서 지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럽힌 자신의 이름을 열심을 내어 거룩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겔 36:21∼23, 39:25).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애통해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복을 허락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애통해하는 마음을 가진 복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깊이 경험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김영민 목사 (고양 길벗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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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애통하는 자 | 이찬수 목사 | 분당우리교회 특별새벽부흥회 | 20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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