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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이야기 – 아우내장터
2013.06.27
아우내장터에 관하여 청소년들의 역사 인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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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독립운동가 중에서 교육에 이바지한 분들을 선정해 그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교육메시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합니다. 이 캠페인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 올바른 교육의 중요성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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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장터 만세운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제 경찰은 총검을 이용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4/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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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EBSCulture (EBS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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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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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제 경찰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제지를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홍일선이 만세운동을 발의하였으며 김교선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9일 한동규와 이순구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으며 한동규는 이백하에게 함께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찬동을 얻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 그리고 숙부 유중무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하자 이들은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밤 자정에 아우내 장터를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이,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현재도 병천면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3.1절 전날에 봉화 축제를 열고 있다.
만세시위 [ 편집 ]
음력 3월 1일 홍일선과 김교선 등은 아우내장터에 나가 만세시위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은 시장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시장 군중들이 크게 외쳤다. 시장에서 약 50보 정도 떨어진 병천 헌병주재소의 소산 소장 등 일경 5명은 만세 소리에 놀라 시장으로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즉시 발포하였다.
사상자들의 친지는 시신을 헌병 주재소에 옮기고 항의를 하였고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등이 군중 100명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으며 사망자에 대한 조치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유중권은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이르렀는데 동생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를 요구하였다. 군중이 점차 늘어나서 1500명이 이르렀을 때 헌병들이 권총을 발포하였다.
시위대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와 정수영에게 동족으로 같은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의를 하였고, 유관순은 주재소장을 잡아 낚아채면서 항의를 하였다.
피해 [ 편집 ]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7]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일경은 김구응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씨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 아우내 만세운동 > 유관순열사 ]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동지를 규합했다. 유관순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머니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면서 병천(竝川), 목천(木川), 천안(天安), 안성(安城), 진천(鎭川), 청주(淸州)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음력 3월 1일에 총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종용하여 약속을 얻어냈다. 드디어 거사일로 정한 음력 3월 1일의 하루 전인 2월 그믐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렸다. 이 횃불이 내일의 거사 신호이며 밀약된 동지들과의 연락 신호였다. 매봉을 중심으로 구밋들 우각산, 강단산, 백전리 돌산, 세성산, 아우내 장터 뒤 갓모봉, 봉화대, 개목산 등 일곱 개의 산에서 불길이 솟아 올랐다. 거의 같은 시간에 광덕산, 덕산, 화산, 진천의 덕유산, 구도산,서림산 동남편의 약사산, 청주방면의 수리봉, 남쪽의 백석봉, 남산, 발산, 망경대, 연기지방의 율산, 서남으로 마산, 장명리의 장산에서 또한 횃불이 치솟았다. 모두 24개소나 타 올랐다고 한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3,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자주 독립 쟁취를 위한 연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이 동하여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감격에 휩싸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고 이 소식을 듣고 온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다. 이날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총공격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죄없는 주민 3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1920년 상해에서 간행된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상)에도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의 기사가 실렸다.
천안군의 병천장에서 의사 김구응이 남녀 6천4백 명을 소집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일본 경찰이 우리 민중의 기수(旗手)를 찌르고자 하자, 기수는 맨손으로 칼날을 잡으니 유혈이 임리(淋璃)할 때에 적이(기수의)복부를 연거푸 찔러서 치사시켰다. 이에 김구응이 적의 잔인무도함을 힐난하여 변박(辨迫)하니 적은 이치에 굴복하고 말에 궁하게 몰려 문득 그 총으로 자살코자 하더니 도리어 그 총을 김구응에게 발사하니 김구응이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적은 시체가 된 김구응의 머리를 때려 부수고, 시체의 사지를 칼로 난자하였다. 이윽고 김구응의 늙은 어머니가 와서 시체옆에 이르러 혼도(昏倒)하여 쓰러지며 적을 크게 꾸짖으니 적은 또한 그의 늙은 어머니를 찔러 죽였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6개월이 지난 1919년 9월 29일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타로가 본국의 육군대신 다나카에게 3.1운동 중의 사상자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를 하였는데 다음은 그 가운데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에서 일어난 시위 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천안군 병천은 소요 당일(4월 1일)수일 전부터 밤마다 읍내 주의의 고지에서는 모닥불을 피우고 만세를 고창하고 또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형세가 불온하였는데 4월 1일은 장날에 해당하여 아침 이래 현저히 다수의 선인들이 들어왔으므로 시장이 심히 잡답하여 매우 불온한 형세가 되었다. 헌병 등은 크게 경계 중 오후 2시경 군집 약 3천 명은 시장에서 한국 태극기를 선두로 5,6백 개의 한국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고창하며 크게 소요하면서 드디어 헌병 주재소로 몰려와 제지를 궁락하지 않았다. 헌병은 부득이 격투를 개시하게 되었는데 중과부적이라 발포하자 일시 사산하였으나 그래도 폭동하여 위험에 임박해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곧 당시 천안철도 엄호대장이던 키네대위 이하 6명은 자동차를 타고 동지로 급행하였다. 오후 4시경 동지에 도착하였을 즈음 선민은 아직도 사산하지 않고 시장 부근은 크게 잡답하고 있었고 또 폭동선민은 군집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감히 제지를 듣지 않을 뿐 아니라 폭행하여 틈만 있으면 엄습하려는 형세이었다. 이에 있어 출동한 병졸로 하여금 이에 대해 병기를 사용하여 적극 진압에 힘써 겨우 동소에서 사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부근 고지상에는 묵묵으로 산재해 있으나 다시 군집하여 몰려 올 형세는 없게 되었다. 일몰 후 천안으로부터 증원한 상등병 이하 5명을 잔류하고 헌병과 협력하여 경계에 당케하고 타(他)는 천안으로 철퇴 귀환하였다. 사모탄(파견병만) 실탄 14발 피해의 정황
헌병주재소는 구내1면에는 소석이 투입되어 있고 창유리는 파손되고 주위의 조망 담은 전부 파괴되고 또 유치장 뒷벽은 가래로 파괴해 있었다. 우편소 부근에서 전화선이 절단해 있었고 면사무소의 입구에는 미닫이가 약간 파괴되었다. 부상자 선인 61명 그중 18명은 부상 후 사망하다. 대부분 키네대위 도착 전에 지방 관헌이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일제는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축소 보고한 것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우내 기미독립만세운동 순국자 명단
순국자 명단
순국자 명단 이름 거주지 생년(나이) 사망 년월일 서훈 김구응(金球應) 갈전면 가전리 1887(32)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77 김상헌(金相憲) 수신면 복다회리 1893(26) 1919.04.01. 애국장 1977 대통령표창 1991 박병호(朴炳好) 동면 화계리 1877(42)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68 박상규(朴相圭) 1871(48) 1919.04.02.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77 박영학(朴永學) 수신면 발산리 1878(41) 1920.07.07. 애국장 1995 대통령표창 1982 박유복(朴有福) 수신면 복다회리 1869(50) 1919.04.02. 애국장 1991 박준규(朴俊圭) 충청북도 청원 1862(57)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63 방치성(方致成) 1874(45) 1919.04.02.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77 서병순(徐丙舜) 1885(34) 1920.08.1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77 신을우(申乙雨) 1919.04.01. 미포상 유관순(柳寬順) 동면 용두리 1902(17) 1920.09.28. 건국훈장 독립장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2019 유중권(柳重權) 동면 용두리 1863(56)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63 유중오(柳重五) 1888(31) 1919.04.01. 애국장 1990 대통령표창 윤태영(尹泰永) 동면 송연리 1850(69)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82 윤희천(尹熙千) 갈전면 봉두리 1894(25)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82 이성하(李星夏) 동면 수남리 1859(60)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82 이소제(李少悌) 동면 용두리 1875(44)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63 전치관(全致寬) 갈전면 도원리 1871(48)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82 최정철(崔貞徹) 갈전면 가전리 1853(66) 1919.04.01. 애국장 1995 한상필(韓相弼) 갈전면 매성리 1879(40) 1919.04.01. 애국장 1991 대통령표창 1982
참고문헌
이정은, 『유관순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김병조,『한국독립운동사략』상, 상해 선민사,(한글판)
姜德相,『現代史資料-朝鮮』(三一運動篇조)「조선소요사건에 있어서의 사상자의 건」(밀수 제102호 조부제 941호)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 소요진압 정황”
아우내란 ‘2개의 내를 아우른다’는 뜻이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3000명이넘는 군중이 모였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자주 독립 쟁취를 위한 연설과 함께 독립만세를외치자 군중들이 동하여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감격에 휩싸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행진했고 이 소식을 듣고 온 일본 헌병들은평화로운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닥치는 대로총을 쏘아댔다.
유관순 열사가 독립 만세를 외치던 아우내(병천) 장터에는 수십곳의 “순대 전문점”이있다. 큰창자(대창)를 쓰는 함경도 아바이순대와 달리, 병천 순대는 작은 창자(소창)를써서 특유의 돼지 누린내가 적다.
잘 손질한 소창에 배추, 양배추, 당면 등을정성껏 넣어 만든 야채순대는 담백하고 쫄깃한맛으로 수십 년 전부터 아우내 장터를 찾는사람들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병천 순대의 또 한 가지 맛의 비결은 돼지뼈를여러 시간 고아 뽀얗게 우려낸 국물에 있다. 기름기를 걷어낸 국물은 야채순대와 어우러져병천 순대 특유의 담백하고 깊은 맛을 낸다.
장 서는 날 1일·6일·11일·16일·21일·26일병천순대로 유명한 병천 5일장!
1, 6일마다 서는 병천 장날에서는 시골 할머니의훈훈한 인정과 맛있는 병천 순대도 맛볼 수있어 타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천안 아우내 장터, 병천 5일장 놀러오세요
오늘은 5일장인 아우내 장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전부터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을 보니
가는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생각나며 흥이 납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하시고
이래 저래 안부를 물으시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이곳 장날은 만남의 날인가봅니다.
예전과 달라진 풍경이라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
장날 어디 가게 앞에서 만나자
약속을 잡는 모습이겠지요.
봄철이라 이런 저런 모종이 많이 보이네요.
시골 5일장에서 볼수있는 풍경이라 더욱 정겹습니다.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정의]일제 강점기인 1919년에 충청남도 천안군의 아우내 장터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운동.
[역사적 배경]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성에서 3·1 운동 을 목격한 천안 출신의 유관순(柳寬順)은 3·1 운동 직후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3월 13일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인 유중권(柳重權), 숙부인 유중무(柳重武) 등에게 경성의 상황을 전하고 4월 1일 아우내장의 장날에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경과]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에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이백하(李伯夏)·김상철(金相喆) 등의 20대 청년들을 비롯한 조인원(趙仁元)·조병호(趙炳鎬)·유관순·유중권·유중무·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 다양한 마을에서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운동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1919년 4월 1일, 갈전면[지금의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는 약 3,000여 명의 장꾼들이 모여 3단계로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1단계는 4월 1일 오후 1시 무렵 시작되었다.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에 태극기를 달고 이를 앞장세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누비는 큰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들은 주재소를 향하여 오는 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헌병과 수비대가 급히 출동하여 총을 쏘고 총검으로 마구 찌르는 만행을 벌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두 번째 단계는 오후 4시 경에 일어났다. 사망자의 시체를 주재소로 옮기면서 항의하는 군중을 향하여 일본 헌병은 총을 쏘는 것으로 응대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군중이 부근의 산과 시장에 모였다가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시위를 벌였다.
[결과]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은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이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가 부상이나 투옥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날 체포된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도 법정 투쟁을 벌이며 재판 결과에 항고하였다. 그리고 조인원(趙仁元)·유관순·유중무 각 3년 형, 김용이·조병호 각 2년 6개월 형, 김상훈·백정운(白正云) 각 1년 6개월 형, 조만형·박제석 각 8개월 형, 박봉래 기각, 신씨(申氏) 무죄,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 각 2년 형, 김상철 6개월 형 등의 판결을 언도받았고, 유관순은 부당한 재판 결과를 거부하면서 저항한 끝에 법정 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⑥유관순 거사 천안 아우내장터
조선의 잔 다르크·구국의 소녀, 3·1운동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옥중에서도 만세운동…갖은 고문 끝에 18세 순국
유관순 열사기념관의 옥중 모습 [촬영 이은중]
(천안=연합뉴스) 이은중 기자 = ‘조선의 잔 다르크’ ‘구국의 소녀’ 등 3·1 독립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유관순 열사를 지칭하는 말은 참 많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긴 유관순 열사.
18세 꽃다운 나이로 일제 탄압에 항거하며 순국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행적은 그의 고향인 충남 천안 병천에 잘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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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충남 천안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9년 3·1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그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에 친구 몇 명과 함께 합류했다. 이어 3월 5일에는 서울역 앞에서 제2차 대규모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구금되기도 했다.
그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보내라는 선배의 지시에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모을 돈이 없었다. 이에 마을 어른들과 직접 만세운동을 벌이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4월 1일 아우내 장날 거사를 벌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3월 31일에는 사전계획에 따라 마을 주변 매봉산 정상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될 것을 알리는 횃불을 밝혔다.
거사 당일에는 3천여명의 장꾼이 모인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시위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명이 다쳤다. 유관순 열사는 시위 후 박종환의 집에서 2∼3일 숨어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빠져나오다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징역 5년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유관순 열사는 “삼천리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라며 고등법원의 상고를 포기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 계속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아서는 감옥에서 다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 갖은 고문을 받다 방광이 파열돼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이때 그의 나이 만 18세였다.
정부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혼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아우내장터 독립 만세운동 기념공원 [촬영 이은중]
◇ 100년 전 만세 함성이 들리는 듯…아우내장터
‘아우내’란 백천천과 광기천이 합수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아우내는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길목에 있어 조선 후기 오일장이 개설돼 물류의 집산지 역할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1일과 6일 등 5일을 주기로 장날이 찾아오면 각종 토산물과 일용잡화가 아우내장에서 거래된다.
장터 주변에는 명물인 병천순대와 순대국밥을 전문으로 하는 30여곳의 식당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지금은 병천순대가 별미로 입소문을 타면서 주말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변했다.
2009년에는 장터 초입에 독립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사실을 알려주는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면적 4천430㎡)이 조성됐다.
유관순 열사 생가지 [촬영 이은중]
◇ 생가지·봉화지·초혼묘·기념관…유관순 열사 사적지
아우내장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탑원리에는 봉화대와 초혼묘(招魂墓·유골이 없는 분의 혼백을 모신 묘), 추모각, 기념관이, 산 넘어 용두리에는 생가지(生家址)가 있다.
생가지는 봉화지와 함께 1972년 10월 사적 제230호로 지정됐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일본 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 12월 복원한 것이다.
생가 작은 방에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앉아 거사를 도모하고 태극기를 손수 만드는 모습을 인형으로 재연해 놓았다.
생가 옆에는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그의 부모는 자녀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 따라 그는 앨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장학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4월 1일 아우내장터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불을 피웠던 봉화지는 매봉산(해발 210m) 정상에 있다. 매봉산은 천안시의 남동쪽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당시 그 봉화를 신호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연기, 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타올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1977년 봉화대와 봉화탑이 세워졌다.
천안시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매년 2월 마지막 날 이곳에서 유관순 열사와 만세운동을 기념하고자 아우내 봉화제를 연다.
이 행사는 1978년 봉화제를 올린 것이 시초가 됐다. 그 뒤 2005년부터 봉화 횃불을 재연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매봉산을 오르다 보면 중턱에 유관순 열사 초혼묘가 있다. 1989년 10월 12일 유관순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봉안한 것이다.
초혼묘와 봉화탑으로 오르다 보면 등산로 곳곳에 대리석으로 그를 추모하는 시와 글이 적혀 있다.
유관순 열사 초혼묘 [촬영 이은중]
열사의 시신은 옥사한 지 보름이 지나서야 인계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정동교회에서 간략한 장례의식이 거행된 뒤 그의 육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묘지는 일제의 도시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기념관은 열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사의 수형자기록표, 호적등본, 재판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과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서대문형무소 벽관체험 코너 등을 갖추고 2003년 4월 개관했다.
사적지 맨 위쪽의 추모각 열사의 영정 앞에서는 해마다 순국일(9월 28일)에 맞춰 추모제가 열린다.
추모각의 유관순 열사 영정 [촬영 이은중]
유관순 열사에게는 현재 정부의 서훈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돼 있지만 3·1독립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공적에 맞게 상훈을 격상해야 한다는 서명운동이 그의 고향인 천안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류정우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회장은 “유관순 열사가 받은 서훈은 김도현, 김마리아 등 823명 중 한 사람일 뿐”이라며 “일본의 재판권을 거부함으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어 3·1운동의 꽃이요, 민족의 누나로 추앙받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서훈등급이 3등급이라는 것은 열사의 활동과 정신을 되새기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빈약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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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경성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된다. 인사동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있을 무렵, 종로에 위치한 탑골공원에서는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라 외치는 숱한 군중의 함성 속에는 이제 막 열일곱이 된 소녀의 목소리도 끼어 있었다. 그 후 꼭 한 달이 지난 4월 1일, 고향 땅으로 내려온 소녀는 아우내의 장날에 나타나 나라의 독립 만세를 다시 한번 부르짖는다. 손수 만든 태극기를 손에 꽉 쥔 채였다. 소녀의 이름은 유관순이었다. 유관순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투옥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19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천안에서는 유독 애국 열사가 많이 났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이동녕 선생, 충무공 김시민 장군 등이 천안 태생이다. 특히 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아 있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호서지역 최대의 만세운동이었다. 당시 약 4천여 명의 군중이 참여했으며,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의 애국지사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 역시 이 일로 일본 헌병에 끌려가 옥중에서 투쟁하다 순국했다.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은 만세 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역사를 기억하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만들어진 공원이다. 이곳은 당시 병천 아우내 장터와 일제의 헌병 주재소가 있었던 터로, 4.1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에는 당시 헌병 주재소의 부지와 만세운동 참가자의 순국 장소를 보존하여 그 의미를 돋보이게 했다. 또한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 공원비, 독립만세운동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15,000여 그루의 나무로 주변을 조경하여 많은 사람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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