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감사절 설교 | [2019추수감사절] 감사는 하늘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 한홍목사 설교 새로운교회 : 갓피플Tv [공식제휴] 2159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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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시100:1-5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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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설교10편 – 다음블로그

1. 추수감사절을 지켜라 (본문 : 신명기 16:13-17) 안재은 목사(충신(북가좌)교회) 본문 신명기 16장은 구약의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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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4/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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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 mission – 온전한 감사 (신 16: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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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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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 설교] 추수감사절의 진짜 의미 – 크리스천투데이

2019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본지에 ‘신앙문답’을 연재하는 미국 남침례교단 박진호 목사의 지난해 추수감사절 예배 설교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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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5/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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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추수감사절 설교-김주헌 목사 – 한국성결신문

2020 추수감사절 설교-김주헌 목사 …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감사할 것을 신·구약 성경에서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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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설교 : 에베소서 5:18-21,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추수감사주일설교 : 에베소서 5:18-21,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19 시와 찬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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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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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 설교를 위한 좋은 예화 소개 – 기독일보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설교자들의 고민은 깊어진다. ‘이번 감사절 설교는 어떤 본문을 가지고 어떤 감동적인 예화로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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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베리타스

하나님의 이름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십시오. 겸손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그 감사의 예배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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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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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주일 설교말씀] 내가 감사해야 할 이유(시편 136:1-9)

안녕하세요.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 설교 말씀 중에서 내가 감사해야 할 이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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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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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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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지구촌 교회

1. 추수감사절을 지켜라 (본문 : 신명기 16:13-17)

안재은 목사(충신(북가좌)교회)

본문 신명기 16장은 구약의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1-8절은 유월절에 관한 규례이며, 9-12절은 칠칠절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리고 13-17절에서는 초막절에 관한 규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미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모세는 본 장에서 이에 관해 다시 한 번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신명기서 자체의 목적이 그러하듯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절기를 지킬 때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와 교훈을 보다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추수감사절의 뜻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3대 절기

( 신 16:12 신 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지켜야 될 3대 절기를 명하셨는데( 출 23:14-17; 34:18-24 출 23:14-17; 34:18-24 레 23:4-8, 15-21, 34-43 레 23:4-8, 15-21, 34-43),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이 그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의 모든 어른은 1년에 세 차례씩 반드시 중앙 성소에 올라가 절기를 지켜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選民)으로서 지녀야 할 참된 신앙과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 신 16:16 신 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것이며, 칠칠절(七七節)은 맥추절로서 봄 농사를 통해서 얻은 수확과 풍작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초막절(草幕節)은 모든 가을 농작물의 수확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드리는 절기입니다.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각종 일들을 기념하기 위해 공휴일을 정하거나 날을 정하여 축하하고 축제를 베품으로 그 의미를 가슴속에 되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절기를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결속을 다지고, 영적 각성의 계기를 삼고자 함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사항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절기에 연락하라'(14절)고 했습니다.

( 신 16:14 신 16: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宴樂)하되 이것은 절기에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면,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이 절기를 보내면서 기뻐할 뿐 아니라 ‘영원히 주안에서 언제나 즐거워하는 것’을 의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 집에 잔치가 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어떤 사람이나, 심지어는 초청 받지 않은 거지라도 와서 식사를 하게 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우리 자신이 즐거워 할 때 우리는 자녀와 노비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 즉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쓸 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의 귀천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또한 빈부의 차이도 물론하고 이 절기를 지키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기쁜 절기로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둘째로, ‘온전히 즐거워하라'(15절)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음껏 즐거워하라’, ‘충분히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는 것이고, 그 때에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 됩니다.

( 신 16:15 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모든 일에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을 인하여 온전히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믿음으로 주실 복을 바라보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감사는 즐거워하는 마음이고 서로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상대적 빈곤감을 가질 뿐더러, 끊임없는 탐심을 갖고 만족치 못하고 불평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는 일평생을 병마와 싸워가면서 근근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ARS(자동응답시스템)로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는 불평이 얼마나 사치스런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복 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화란의 아덴에서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란 곳에 도착한 청교도 105명은 한 해의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는 참으로 악조건 속에서였습니다. 그들 중의 거의 반이 험한 환경과 질병으로 인해 희생되었고, 추수물도 그리 풍족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주일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2. 구약 절기의 의미

그러면 오늘날의 성도들이 구약의 절기를 같은 방법으로 철저히 준수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폐지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렇게 구약에 나타난 규례들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까지도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미와 정신은 신약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맞춰서 이것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의미를 확인,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도덕법(Moral law), 시민법(Civil law),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 구분됩니다.

도덕법은 신?구약시대를 막론하고 영구히 지켜야 하는 법인데 십계명이 이에 속합니다. 그리고 시민법은 대부분 그 시대와 상황에 국한하여 주어진 것으로 결혼 제도나 이혼, 금기된 음식 및 생활 습관 그리고 종에 관한 규례 등이 이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식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로 각종 제사 제도나 절기에 관한 규례가 이에 속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부활, 승천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그 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정결법( 레 11:1-15:33 레 11:1-15:33)이나 이스라엘의 3대 절기와 같은 의식법을 여자적(如字的)으로 지킬 필요는 없으나, 그 안에 있는 속뜻은 신약에 예수님의 정신과 의미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보다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 골 2:16,17 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와 같은 의식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결된 삶’의 원리와 정신을 오늘날의 성도들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이나 십일조 절기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날과 절기에 관한 규례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지켜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롬 14:5 롬 14:5)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의문(儀文)의 율법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서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그 근본 정신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마 5:17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폐한다’는 것은 없애 버리는 것으로 ‘완전케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완전케 하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깊은 뜻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희미한 그림자적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목적은 율법이 목적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 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

3. 추수 감사절

초막절은 40년 광야 생활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하며 가을에 농작물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이를 창고에 저장한 후 7일 동안 지킵니다( 출23:16; 34:22 출23:16; 34:22). 이 때는 히브리 민간력으로 1월인데, 오늘날의 태양력으로는 9,10월경에 해당됩니다.

‘초막절’이라는 단어는 소출을 위하여 포도밭에 초막을 지은 것에서 유래되었고, 또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였던 사실을 되새기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새로운 장막을 짓고 그 곳에서 7일 동안 거처하며 지키므로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 이 때 모든 곡식이 창고에 수장되어 있으므로, 일명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출 23:16; 34:22 출 23:16; 34:22).

이 때에는 본래 3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곡식을 거두어들인 다음에 제일 좋은 곡식으로 추수(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10은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 말 3:10 말 3:10). 이것은 자신의 원천적인 소득 중 1/10을 모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된 의무( 신 14:22 신 14:22)로서, 충성과 순종의 표시로 신약에서도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주일과 절기 및 헌물은 우리의 삶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적인 사고와 함께 구원의 감격과 감사와 기쁨을 동반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채가 있는 사람은 추수감사절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갚고 깨끗한 마음으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셋째,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곡식을 나누면서 추수 감사절을 보냈습니다.

( 신 16:16,17 신 16:16,17)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 하나님을 형식적으로만 섬기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3번 절기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팔레스틴의 풍습에 백성이 왕 앞에 나아갈 때 예물 없이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뿐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것입니다( 딤전 6:15 딤전 6:15).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권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중심한 신본주의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출 23:14; 34:23 출 23:14; 34:23).

( 골 3:17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결론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 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기쁨과 감사로 나아와야 합니다. 또한 주신 복과 은혜를 인하여, 또 앞으로 주실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나올 뿐만 아니라, 정성스런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절기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이 과거 죄의 장막에 거하며 죄의 종노릇하던 자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전 가운데 온전히 거하게 된 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 신 16:15 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2. 이 사람의 감사 (본문 : 누가복음 19:1-10)

곽선희 목사(소망교회)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 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 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 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이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년 12월, 추운 때입니다. 긴 긴 항해 중에 백열명으로 출발한 사람이 배 안에서 다 죽었습니다.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죽고 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이만큼 건강을 지킨 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입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 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입니다. 또한 음식으로 말하면 Plymouth 라고 하는 곳에 도착은 했지만 낯선 땅에 아무 것도 없는데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으로,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이 음식을 놓고,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가서 지내면 Thanksgiving 이 때쯤 되면은요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아무리 먹어봐도 칠면조는 별 맛 없더라구요. 그래 나도 나만 그런가 해서 물어봤어요. 미국 학생들한테 “너희들 칠면조 맛있냐?” 그러니까 맛없데요.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 내가 여러 사람한테 물어 봤어요. “아 거 닭이 맛있지.”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는 거라 그래요.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바로 거기에서 눈물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Courage to Be 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 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이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니에요.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이냐구요? 끝없는 욕심 때문이요. 더 가지려는 마음이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에 요것 가지고는 못 살아요. 또 교만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사람은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을 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런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가진 독특한 성격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세리장입니다. 로마 사람이 유대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로마를 떠나서 살 수 없구요. 로마를 피해서 살수가 없어요.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에 유대나라 역시 로마 권력 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이요. 세상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는 세리의 장이요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실세올시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로마를 대표한 총독 이하 군인들은 이 세리장 같은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정치도 못합니다. 로마 세력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리장이라는 이 사람은 부자요. 누구든지 어느 군인이든지 마을에 들어서면 세리장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있어요. 왜요? 그는 실세요 그는 부자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권력자하고 친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세리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권력 있죠. 부귀하죠. 돈 있지요. 자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구요.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또 그리고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만한 고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름의 독특한 의식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왜요? 이대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현실대로는 안 된다는 거야. 이대로 세상이 오래갈 수는 없다. 어서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갔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려하는 생각은 독특합니다. 왜요? 그는 소문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열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마태입니다.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어요. 도대체 어떻게 어떤 분이면 저렇게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는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세리를 제자 삼은 그 사람이 누구냐? 세리의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세리를 사랑한 그분이 누구냐고. 그런 분이 누구냐고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자기도 세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어요. 많은 사람이 옹위해 가지고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는 뭐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갔어요. 그리고 지나가는 일행 속에 있는 예수님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는 이 은총적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요. 이 한 번 있는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가 기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세요. “우러러보시고” 그랬어요. 쳐다보았어요. 오히려 이상하게 됐지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게 됐지요. 보셨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ersonally,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거예요.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이게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에요. 지명하여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보신거예요. 삭개오를 보신 거예요. 즉 나를 보셨단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주고받는 말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왜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민, 그의 깊은 관심, 그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다 아셨어요.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 이만하면 알지. 충분히 알았죠.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그의 말을 통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깊은 고민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여기에 감격하고 있는 거예요.

또 한 가지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여기에 긴긴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할 것이라. 세리의 집입니다. 온 유대 사람이 상종하지도 않고 인사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았답니다. 받았다가도 도로 던져 버렸답니다. 이렇게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은 오늘 밤 너희 집에서 자겠다. 원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가장 큰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물질을 주시는 분입니까? 내게 지식을 주는 분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 의인이 죄인의 집에 오시고 메시아가 죄인의 집에 오심으로써 그의 신분을 바꾸어 놓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요.

이조 시대에 있었던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난리가 나서 왕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같이 몰래 도망을 해서 어느 시골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촌부의 집에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점잖은 어른들이 몇일 유하시겠다고 해서 그대로 묻지도 않고 정성껏 참 잘 대접을 했더랍니다. 대접을 받고 왕은 상황이 바뀌어서 환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다음에 생각하니 그 촌부가 너무 고마워요. 이 난리를 피하게 해 주었느니 말이요.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아 불러들이고 보니까 아이고, 이서방이라고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지체 높은 왕이에요. 그 왕은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었으니 무슨 소원이든지 말하게. 딱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마.” 뭐 땅이든 벼슬이든 뭐든지. 그럴 때 이 천부는 “아니에요.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며칠 후에 제 환갑날이 되는데 애들과 함께 환갑 잔치를 하게 되는데 환갑잔치에 한 번 저희 집에 와 주시지요.” 이제 왕이 거절하게 됐습니까? “그러지.” 왕이 천부의 환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요새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요, 얼마나 많은 뇌물이 들어왔는지 그냥 그냥 부자가 됐답니다. 왕이 우리 집에 한 번 오신다. 한 번 모신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이냐?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내 의가 달라지는 것, 사람이 달라지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완전한 의롭다함을 얻는 엄청난 복을 내리십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사람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바로 이 시간, 이 은혜 가운데서 첫째가 “즐거워했다” 그랬어요.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고맙다는 말도 억지로 하는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죠. 감사, 기쁨. 그 기쁨 자체가 은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이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만족한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접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영접하고.

또 하나는 마음이 열렸습니다. 당장 입이 터졌어요. 마음이 열리면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삭게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돕는 분이다.’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내 재산 절반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라고 마음이 열립니다.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Think, Thank 라는 말은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 못합니다. 얻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이에요.

어떤 식물인간 된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십년 동안을 시중을 해도 아무 보답이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없어요.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이렇게 말하더만요. 눈을 한 번 뜨고 “여보 고맙소” 딱 한마디만 하는 것을 들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어요. 반응이 없어요. 말이 없어요. 느낌이 없어요. 깨달음이 없어요. 이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지요. 감사하는 마음, 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 깨달음 속에 있어요.

인간이 무상하다, 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 인간의 삶에 도리를 알면 유교인입니다. 은혜를 알면 기독교인입니다. 오직 은혜를,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 인이요, 신앙인 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에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특별히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하는 실천상황이 여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베푸는 마음, 이것이 감사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깊이깊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감격하고 이 감격한 마음을 행동에 옮겨 보세요. 이제부터 새로운 삭개오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에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이것은 죤 뉴우톤(John Newton)이라고 하는 분이 본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극악한 사람이었는데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 감격 감격합니다. 그 감격으로 주를 찬양하며 피곤 없이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성공이 뭐겠습니까? 감사하는 것이 성공이요 기뻐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종은 울려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그 마음에 벅찬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바로 그가 행복한 자요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넉넉히 감사할 만큼 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었건만 우리는 이루지 못한 것, 못다 한 것, 얻지 못한 것만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주여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주의 은혜를 깊이깊이 깨닫고 저 삭개오와 같이 즐거워하며 감격하며 주를 영접하며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베푸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사람들 되고 감사로 원망을 이기고 기쁨으로 모든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본문 : 시편 136:1-4)

최성규 목사(인천순복음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다시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잔치 날입니다. 더 많이 감사하는 날입니다.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절입니다. 또 2천년대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바쁜 일상으로 인해서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 수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바쁜 일에 좇기다 보면 감사를 잊어먹고 있습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은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은 것이요, 예수님을 놓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잃어버린 감사가 회복되고,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감사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 감사는 고라신과 벳새다 고을에서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로 26절 말씀에 그 말씀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가장 많은 권능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실패한 것입니다. 속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기에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5절,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 말씀인 것입니다.

또 두 번째 감사는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있을 때입니다( 요 11:41 요 11:41). 깊은 슬픔과 절망이 사람들을 감싸고 있을 때 예수님은 감사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40절로 41절에서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요,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감사하는 조건이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을 때,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언제 감사했느냐고 하면서 불평해버리고 맙니다. 원망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뜻이 이루어질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니까, 나는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있으니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시편 37편 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 우리가 생각할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돌보심에 우리는 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할 말씀을 주신 것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또 받을 말씀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 이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일까,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산 예배, 산 제물 되는 것

첫째로, 산 예배드리고, 산 제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산 예배, 역동적인 예배, 성령 충만한 예배, 말씀 충만한 예배. 예배를 산 예배로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산 제사로 드려져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 요 4:24 요 4:24) 그랬습니다. 그렇게 드릴 때,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예배의 제사”를 드리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의 제사”를 드려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몸과 마음을 드려 “산 제사, 산 예배”로 드리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봉사의 산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드려지는 예배와 봉사의 산 제사는 기적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 소년의 정성어린 “감사의 헌신”이 그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 중 남자만 오천명입니다.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빌립에게 “저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가 주라”고 했습니다. 그 때, 빌립은 계산했습니다. “예수님,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합니다.” 그랬습니다. “장정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본다면, 이백 명이 일한 것을 가져야 떡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광야에서, 또 황혼 저녁에 그런 돈도 없고,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6:7 요 6:7).

그러나 그 제자 안드레는 먹을 것을 찾으러 갔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말을 합니다. “소년아, 우리 예수님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너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나에게 주어서 이것을 예수님께 갖다드리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단다.” 그 소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고민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 점심 먹으라고 싸 주신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인데, 예수님 말씀을 듣다가 먹을 시간이 없어서 먹지 못했는데, 그런데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면하고 배를 채울 수 있고 힘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 집까지, 먼 집까지 갈 수가 있는데…”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의 기적을 그는 똑똑하게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 소년이 헌신하는 겁니다. “그래요. 내가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채울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기운을 차릴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 드리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드리는 일이라면, 내가 내놓을게요. 아저씨 가져가세요. 가져가세요.” 어린 소년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내놓는 헌신의 제사, 헌신의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먹여야 하는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 어떻게 생각하면 “야! 제자 안드레야, 가져오려면 많이 가져오고 적게 가져오려면 가져오지 말지, 나만 왜 괴롭게 하느냐?”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여야 할 사람이 수만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우러러, “하늘을 우러러 축사했다” 그랬습니다. 그 축사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요 6:11 요 6:11의 ‘축사’란 헬라어 ‘유카리스테오’로 ‘감사하다’는 말). 먹어야 할 사람은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가지고 불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떼어 주었더니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배불리, 원대로 먹게 하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 기적을 믿으시면 “아멘”하겠습니다. 이 기적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그대로 일어나기를 원하시면 “아멘”하겠습니다.

둘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

두 번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은혜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고전 10:31)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녀들은 그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입니다.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32절에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와 어른들을 통해 생명을 탄생하게 합니다. 출생하게 합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고, 보존합니다. 하나님이 아담 한 사람만은 직접 흙을 가지고 빚으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후~’ 불어넣어서 사람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들 때는 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인인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하나님은 단 한사람도 직접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낳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하나님이 함께 일하셔서 우리를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저나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실 때, 여러분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여러분의 어머니가 없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이 땅에 낳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생명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 가인과 아벨에게 예배에 대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아벨은 그 아버지,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버지 아담, 어머니 하와의 말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불순종과 불공경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형제를 살인하는 살인자의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며 사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국은 오천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입니다. 작은 나라입니다. 지하자원도 없는 나라입니다. 외침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내란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 땅에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기독교도 들어오기 전에 한국, 우리 민족은 효 정신이 있었습니다. 가족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효 정신과 가족제도가 이 작은 나라, 힘없는 나라, 이 선한 나라, 외침도 많이 받은 나라,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안타깝게도 효 정신이 죽었습니다. 가족제도가 파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착각했습니다. 서구문화가 몽땅 다 성경문화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효 정신도 버리고, 가족제도도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대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식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보고, 다시 보니까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가 할 일이 뭐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우리가 추수감사 주일을 맞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면, 그 감사하는 것 중에 우리가 감사할 것이 뭐냐? 그 감사의 조건이 무엇이냐? 감사하는 행위가 무엇이냐?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 주신 은혜, 하나님 주신 사랑, 하나님 주신 복을 빼앗기지 말고, 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렇습니다. 이웃을 향한 감사는 그 이웃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주셔서 영혼구원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불신 이웃이 있다면,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이 있다면, 이는 전도의 상급을 위해 하나님이 붙이신 것이다. 그렇게 알아야 됩니다. 만약 주위에 나를 괴롭히는 이웃이 있다면, 그는 나의 인격과 삶을 연단 시키는 “가시”( 고후 12:7 고후 12:7)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시편을 많이 기록한 다윗, 목동이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 많은 시편을 기록한 다윗, 그 많은 시편은 그가 왕이 되어서 호위호식 하면서 왕궁에 있을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광야에서 연단 받을 때, 고통 당할 때, 아픔을 당할 때, 시험을 당할 때, 괴로움을 당할 때 지은 시편이 다 그 은혜로운 시편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웃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웃이 나에게 아픔을 준다면, 고통을 준다면, 모난 나의 삶을 부드러운 삶으로, 둥근 삶으로, 원만한 사람으로, 은혜로운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예수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것으로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출애굽기 16장 8절입니다.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우리가 사람에게 원망하는 것은, 그것은 곧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마 22:39 마 22:39) 그랬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이냐?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 말인 것입니다.

넷째, 어려움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것

그 다음 네 번째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제의 특징은 모든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특히 추수감사 절기에, 특히 감사절기 때는 어려움 당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너만 먹지말고, 네 가정만 먹지말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과 함께 먹어라. 함께 즐겨라. 함께 잔치를 하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1절입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돕도록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물질을 주셨습니까? 물질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은사와 영적인 능력을 주셨습니까? 전도하고, 그들을 신앙인으로 잘 돌보아주고, 보살펴 주라고. 지금 이 땅에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하다가 부도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직장에서 일하다가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 그 뿐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없이 가족을 이끌고 나가는 소년 소녀 가장이 있습니다. 고아가 있습니다. 과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보호 대상자, 자녀 없는 독거 노인. 자녀가 있어도 부모를 돌보지 못해 생긴 독거 노인이 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외국에서 한국에 가면, 돈 좀 벌어보겠다고 왔다가 직장을 잃어버렸거나 직장에서 노동을 착취당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외국 근로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움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할 때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외로운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내 밥이 남으니까 좀 먹을래?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돈 자랑하기 위해서 내가 좀 사줄게 먹을래? 그것이 아닙니다. 도와준다는 것은 뭐냐?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필요해서 주는 것. 이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어려운 중에서도 자원하여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로 3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힘들어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또 구약에서 잠언서 11장 24절로 25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것이 뭐냐구요?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다섯째, 자연을 잘 돌보는 것

다섯 번째입니다. 자연을 잘 돌보는 것, 자연을 잘 돌보는 것. 그렇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그 은혜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에덴동산을 지어서 아담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이 삼라만상을 다 지으셔서 인간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마음대로 공기를 마시며, 햇빛을 받으며, 물을 먹으면서, 꺼지지 않는 땅에서, 땅에서 나오는 생물로 말미암아 먹고살게 만들어 주신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증거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우리 예수님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이 자연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수도 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난 일년간도 자연을 통해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또 입히셨습니다. 또 돌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을 파괴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는 자연을 보존합니다. 자연을 아낍니다. 자연을 돌봅니다.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도록 돌보아 주는 이런 삶. 이것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 자연의 주인은 하나님. 자연을 섭리하시는 분도 하나님.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의인이 누구냐구요?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이 있는 것. 나무나 풀이나 새들이나 짐승이나 어족이나, 이런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 의인이다, 그랬습니다. 악인은 누구냐구요? 그런 것에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사는 삶, 이것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연을 보호해야 의인답게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자연을 보호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그것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죽여버린다면, 꺾어버린다면, 못살게 만든다면, 그것에 대해 성경은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악인이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주일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문턱에서 맞는 2000년에 첫 번째로 맞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우리는 감사로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받은 은혜가 다 쏟아집니다. 엎어집니다. 빼앗깁니다. 잃어버립니다. 우리 모두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시편기자가 말을 합니다. 시편 136편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 모두 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마음껏, 힘껏, 재능껏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시다. 사람들에게도 감사합시다. 자연에게도 감사합시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은혜 베풀어주시는 주님, 고맙습니다. 진실로 오늘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 2000년대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수감사 주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귀한 음성을 듣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함으로 은혜를 담는 그릇들을 다 준비하게 하여 주옵소서. 받은 은혜를 누리며, 베풀며, 주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4.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다 (본문 : 에베소서 5:20-21)

옥한흠 목사(사랑의교회)

오늘은 일년에 한번씩 지키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매우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여러분이나 저나 이 말씀을 읽으면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 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의미를 가진 말씀을 읽으면서 가책 받지 아니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 가운데는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은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또 감사도 많이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이 요구하는 선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을 느낍니다. 저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잘못하면 이런 말씀도 그저 쉽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남의 말 할 때는 쉬운 겁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해도 가르칠 때는 쉬운 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1988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라는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그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쇼에는 유명한 버나드 쇼라는 앵커가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이 버나드 쇼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 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그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이 사람은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하고 얼마든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 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놓고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꼭 깨달아야 됩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지, 왜 항상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때문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변명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한번 여러분 마음에 되새겨 보십시오. 그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저 무지하고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만에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 받으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 말은 “내가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기가 막힌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 한 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이 나에게 없다 할 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설혹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이 말씀이 나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밀치면 안됩니다. 만약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옥 목사가 가슴에 가책을 받고 여러분에게 고백하듯이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고쳐야 됩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여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 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수준에 저 자신이 도달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수준에까지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저는 수만 명을 상대하고 삽니다.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뒤따라 보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잔소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해. 내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줄게.”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항상 감사합니까?” “할 수 있어. 내가 네게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명을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만큼 믿습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옵니까? “하나님, 제 앞길 캄캄하지만 주님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니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은 알아줘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고 계십니까?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00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무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 심합니다. 불평은 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계속 감사가 나옴으로써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습니까? 그러면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강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천성적인 장애를 안고 나온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자매의 말을 들으면서 저 자신이 자주 도전을 받습니다.

“목사님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실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복은 무슨 복인가?’ 우리는 당장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애 때문에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 모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 아빠가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애가 저러지 않았으면 아빠는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애 때문에 세상에서 천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이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꺾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세상 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오늘부터 돌아가셔서 의도적으로 감사하십시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어.’ 하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불평하던 것을 감사하면,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하던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날보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감사해야 돼.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돼.’ 하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좋아집니다.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집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매력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런 멋있는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아멘.

5. 감사하는 생활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박희민 목사(나성영락교회)

오늘은 1년에 한 번씩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우리의 삶에서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일상생활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잊어버렸다. 감사하다는 말보다는 서로 원망하고 불편하며 비판하고 상처 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문명은 더 발달되고 살기는 더 편리해지고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해졌지만 그 내면적인 삶은 더 깡마르고 행복하지는 못하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드는 심금을 울려주는 말씀인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항상 삶을 즐겁게 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감사하며 사는데 있다.

이 세 가지,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셋이 아니고 하나이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항상 감사하는 삶과 일맥상통한다. 우리의 삶에서 기쁨이 사라질 때 감사도 메마르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 참된 감사가 없으면 기쁨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기쁨과 감사는 행복한 삶의 양면이요 안과 밖이다. 우리 마음 깊숙이 에서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이 용솟음 칠 때 우리는 자연히 우리의 삶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감사는 결국 기도하는 삶에서 싹튼다. 우리의 기도만이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기쁨의 유일한 샘터요 감사의 물줄기이다.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가? 아니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살아가며, 모든 사건을 기도하는 정성으로 처리하는 사람에게는 손실과 실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용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유명한 성경주석가 메튜 헨리는 그가 도적을 만났을 때 이런 간증을 하였다.

첫째, 전에는 도적을 만난 일이 없는데 처음으로 도적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둘째는, 그들이 내 지갑만 훔쳐가고 내 생명을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셋째, 그들이 비록 내 물건을 가지고 갔지만 별로 많은 것을 잃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넷째, 내가 도적질을 하지 아니하고 도적을 만난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도적을 만난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우리도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실패와 손실 속에서도 여러 가지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스위스의 격언에는 ‘항상 노래하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노래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보다 더 풍성한 감사의 삶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8세 때 소경이 되었지만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된 Fanny Crosby는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노래로 읊었다.

‘비록 내가 보지 못하지만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영혼인가! 이 세상에서 나는 만족하기를 배웠노니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축복을 내가 누리는가! 소경이기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탄식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노라’고 감사했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감사의 삶을 터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백할 수 없는 삶의 간증이다. 사실 그렇다. 눈으로 보기 때문에 갖고 싶어하고 욕심을 부리고 시기질투 하며 범죄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떠한 환경과 삶의 조건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감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물질적인 감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축복이라든가 이익을 얻었을 때 기뻐하고 감사한다. 어린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 주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그러나 그 장난감을 빼앗길 때 온 세상을 잃은 듯이 슬퍼한다. 이것은 어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우리는 물질적 감사 또는 경제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감사를 항상 물질적인 측면에서 측정해 보는 감사이다.

둘째는 철학적 감사이다.

철학적 감사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 그러나 일어나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고 감사했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철학적 감사 또는 사변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더 큰 손실을 생각하므로 적은 손실에 대해 위로 받으려는 소극적인 감사이다.

셋째는 크리스천의 감사이다.

물론 크리스천의 감사에도 위에서 말한 물질적인 감사와 철학적 감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감사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보다 더 깊은 곳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삶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삶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고 굶주림과 매맞음과 역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기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그는 풍부에서뿐만 아니라 가난과 궁핍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어떻게 그러한 삶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삶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감사의 근거를 두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의 근거를 영원한 생명이시오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둘 때 우리는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실패와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6.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본문 : 골 2:6-7)

남서울중앙교회 피종진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바울은 자기 서신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 생활을 고백하면서 또 모든 그 메시지를 듣는 분에게 「감사가 넘치게 하라」는 호소를 26회나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가 귀하면 ‘감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고, 감사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제거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감사할 일이 너무 너무 많지만 오늘 이 본문을 중심해서 바울의 골로새서를 통하여 감사한 내역을 보면

1. 바울의 감사

첫째,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일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1:13 )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일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흑암」이란 ‘어두움’을 말합니다. 이 어두움의 세계란 ‘죄악과 죽음, 안 믿는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은 흑암과 상관이 없도록 위치를 옮겨주신 것을 말합니다. 신분의 위치도 옮겨주시고, 또 우리의 거처도 옮겨주시고, 또 우리의 목적지도, 삶의 의미, 모든 사상, 성품, 우리의 모든 신분까지도 하나님이 옮겨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어두움의 세계로 점점 더 짙어가게 인생들을 충동하고, 유혹하고, 미혹하며 이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든지 깨어서 이런 어두움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사탄이 할 수 있는 대로 지옥의 멸망의 자식이 되게 하기 위하여 마귀가 인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성령의 인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승리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흑암을 이기는 길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빛 되신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꾼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일꾼은 특별히 목사나 혹은 직분을 받은 분들만 일꾼인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다. 일을 하면 일꾼이고, 직분을 맡아도 일을 안하면 일꾼이 아닙니다. 여러분, 다 그리스도의 일꾼 되기를 원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일꾼(디아코노스)이란 ‘사명을 수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일꾼을 선택했을 때에 그 생활을 돌봐주고, 또 그 일할 여건을 제공해 주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의 사명을 주실 때는 그 직책만 주신 것이 아니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도 주시고, 일을 하려고만 하면 감당할 수 있는 일터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의 환경 여건 조건을 보고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자신이 있다, 자신이 없다, 성공한다, 실패한다’ 이렇게 속단하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할 수 있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포기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항상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도 더 낮아지는 이런 것이 겸손인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는 정말 밑바닥에까지 우리가 엎드리고, 또 엎드려지고, 겸손해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것을 깨달은 것만큼 채워주시고, 연약함이 있는 것만큼 채워주시고, 할 수 없는 여건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이 채워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된 것을 골로새서 1:25에 보면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했고, 그는 골로새서 1:24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일꾼이 되되 교회를 중심한 일꾼, 언제나 교회관이 뚜렷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관이 분명해야 됩니다. 교회에 뿌리가 내려져야 됩니다. 교회에 정착이 바로 될 때 그 성도는 잘 양육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혼자 잘 믿는 것같이, 아무리 큰 은혜 받은 것같이 자기가 판단하고 착각할지 몰라도 교회에 정착이 되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뿌리가 내리지 않고 이상한 집단에 이리 저리 밀리는 그런 사람들은 열매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항상 뿌리내린 신앙 즉,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바른 복음 신앙에 뿌리고, 바른 말씀에 뿌리를 내려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는 이런 일꾼이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성도의 감사한 글을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여섯 가지를 중심으로 감사했는데, ①구원받은 것이 너무 감사했고, ②주님께서 피흘려 세우신 교회를 주신 것을 감사했으며, ③신앙을 성숙시켜 주신 것을 감사했고, ④가족을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자기 가정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교회도 돌볼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이웃에게도 기본적인 선은 베풀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할 줄 알고, 자기 남편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밖에 나가서 공동체 속에서도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⑤식물을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식물을 받을 때마다 정말 감사해야 됩니다. 먼저 우리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양식과 물에 복을 주셨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생활의 여건과 환경도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⑥직분을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이 직분을 감사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일은 육신의 호흡이 그치는 순간에 다 함께 무너지고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만이 우리 자손에게까지도 축복으로 안겨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를 주로 받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6,7절) 여기에서 ‘주’라는 말은 ‘상전,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상전이 바꿔지고, 주인이 바꿔지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은 순간부터 이제는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그 순간부터 내 사업장도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삶 전체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소유하면 실패가 없습니다. 주님이 소유하면 책임을 져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백성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녀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단체는 하나님이 이 지구의 역사를 통해서 그대로 다 영화 필름처럼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보여주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고, 돼지머리를 갖다 놓고 절을 하며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 물질과 부귀 영화, 향락, 오락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참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는 잘 되어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잘되되 열심히 사업도 해야 됩니다. 하되 주님을 위해서 하면 실패해도 하나님이 일으켜 줍니다. 세상은 밤이 있고, 낮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도 평탄한 길도 있고, 터널도 지나갑니다. 울고 웃는 성공 실패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따르지만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실패도 실패가 아닙니다. 지나놓고 보면 이런 실패 속에서 어떤 때는 영적인 부자가 되기도 하고, 영적인 부자가 되었을 때는 또 물질의 부자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섬기고 모시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개인 업체나 국가 기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제단을 쌓을 때에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무엇보다도 자기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것을 감사했고, 자기가 하나님의 일꾼 된 것을 감사했으며,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게 되 것을 감사했습니다. 이런 감사한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이제 감사를 드려야 되는가에 대해서 바울은 크게 세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2. 감사를 드리는 자세

첫째,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7절) 믿음이 있을 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엔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을 앞세울 때 예수님이 앞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사하되 믿음이 잘 기초가 되어 있을 때 드리는 감사는 황금의 생각이 되어지고, 그리고 그 기도도 순금의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 열납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행동할 때 기적이 따릅니다. 믿음으로 소원할 때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이는 줄 믿습니다.

믿음이 앞설 때 하나님의 역사가 앞섭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이 앞서면 안됩니다. 우리의 생활 여건 조건이 잘 되어 있어도 그것이 믿음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오늘까지 참 부족하지만 신앙의 경험을 하나님께서 많이 깨닫게 해주시고,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마다 성공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실패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믿음이 전제되어 있고, 믿음이 중심이 되어 있고, 믿음이 기초가 되어 있고, 믿음의 터가 잘 쌓아졌을 때는 절대로 하나님이 실패도 성공으로 바꾸어줍니다. 기적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여건 환경 조건이 앞서 있어도 믿음의 기초가 세워져 있지 않았을 때는 많은 실패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둘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4 ) 여러분 감사하는데 사랑이 불타는 마음, 사랑이 담겨진 마음에서 감사하는 말은 참 뜻이 있고 생명이 있는 감사입니다. 사랑이 없는 감사한 행동은 하나의 의식에 불과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있는 감사 속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여집니다. 긍휼히 여겨집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당한 분들도 많이 봅니다. 이런 일을 우리는 강 건너 불 구경하는 것처럼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얼마 전에 어린 귀한 생명들이 불에 타 죽었는데, 그들이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절대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뭐라고 했습니까? 망대가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을 때, 그분들이 죄가 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살피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연약함을 회개해야 됩니다. 충성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그럴 때 자신도 살뿐만 아니라 이웃도, 민족도 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죄가 적어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엄청나게 큰 죄가 있더라도 회개하는 사람을 지극히 사랑해 주시고,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셋째, 깨어 기도하며 감사해야 됩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 기도가 있는 감사가 참 소중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늘 기도로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높은 사람과 대화하기가 어려운데, 만왕의 왕, 전능하신 하나님, 왕중의 왕이 되시는 우리 하나님은 누구든지 기도만 하면 대화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주셨습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차별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성공하고 있을 때도 기도로 대화하도록 하나님께서 창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도, 성공했을 때도, 언제든지 기도할 때마다 우리와 함께 대화하시는 주님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 자기의 맡은 사명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또 생활의 모든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볼 때에도 너무 애절하게 기도할 때에 좋은 길이 없을까 참 앉으나 서나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의 도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안타깝게 기도하고, 애써서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좋은 길을 열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들에게 기도가 있는 감사를 요청하면서 몇 가지 그 종목을 정해 주었습니다. ①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기도로 도우라고 했습니다( 골 4:3 ).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기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1에 보면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자기가 몸을 바쳐서 육탄용사같이 그렇게 일하는 것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도와주는 기도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이 주의 종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주는 일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지금도 우리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국내 전국에서 또 해외에서 이 방송을 듣지만 이것이 우연히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눈물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영혼이 축복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기도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어제 100% 모든 일에 완벽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다든지, 몸을 바쳐서 일하는데 좋은 일이 착착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오늘 기도하지 않고 하면 오늘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어제는 실패했어도 오늘 하나님 앞에 기도로 매달리고 부르짖고 간구하고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서 승리케 해주실 줄 믿습니다.

②주의 종과 자기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낳아서 먹여 주는 것만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짐승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 부모로서 가장 귀한 것 중에 하나는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가 쌓여 있는 자녀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자녀를 위해서 쌓아 놓은 재산이 있다면 눈물의 기도보다 더 큰 재산이 없습니다. 부모의 선한 신앙의 행위는 그대로 자식에게 축복의 유산이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고 말씀했습니다.

③나라의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딤전 2:1,2 ) 정말 사건이 터져서 조사해보면 전부다 부정 부패가 악취가 날 정도로 쌓여 있습니다. 이런 부정과 부패가 있는 지도 체계에서는 나라가 평안해지고 국민이 잘 살 수가 없습니다. 돼지머리 갖다 놓고 고사나 지내면서 한 쪽에서는 모든 국가의 세금을 착취하는 이런 분들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하나님이 이 땅에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정직하게 이 백성을 다스리고, 자기의 수고한 열매의 보람을 먹고 살 수 있는 이런 기쁨을 가지고 사는 이런 사회로 개혁되고 회복되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할 때 반드시 좋은 정치가가 되어지고, 지도자가 되어질 줄 믿습니다.

넷째, 찬양하며 감사해야 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6 ) 찬양이 살아있는 교회들은 교회가 부흥됩니다. 찬양이 살아 있는 교회는 악한 사탄 마귀가 도망갈 줄 믿습니다. 다윗이 거문고를 탈 때 사울 왕의 악귀가 물러갔습니다. 오늘날 감사한 것은 한국 교회가 찬양이 살아 있습니다. 그 수많은 복음성가 속에 얼마나 신앙고백이 많고, 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은혜로운 찬양이 많습니까? 찬양을 듣다가 회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양을 하고 듣다가 성령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양을 하다가 자기 사명을 새로 개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찬양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여러분, 예배 시간 딱 되어서 모여 가지고 정확하게 끝나는 그런 것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정말 예배 30분전 혹은 1시간 전에 나와서 열심히 찬양하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마음 문을 열고, 은혜로운 찬양을 드리며 예배드려보세요. 얼마나 더 은혜가 갑절이나 오겠습니까? 예배를 마치고도 찬양을 하면서 기도해보세요. 기도하면서 또 찬양해보세요. 그 속에 하나님의 큰 축복이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는 ①은혜가 넘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고후 9:8 ) ②축복이 넘치게 해주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눅 6:38 ) 여러분, 심는 자, 바치는 자, 줄 수 있는 이런 자에게는 하나님이 눌러서 흔들어서 넘치게 하여 안겨 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안겨 준다는 것은 많이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끝없이 주는 것을 말합니다. ③소망이 넘치게 하여 주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 15:13 ) 이 축복이 그대로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④사랑이 넘치게 하여 주십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살전 3:12 ) 오늘 하나님 사랑 받기를 원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사랑을 받으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웃음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 남편과 아내의 사랑, 부모 자식 사랑, 이웃 사랑 우리 온 성도 사랑으로 꽉 채워지기를 축원합니다.

7.큰 은혜 큰 감사 (본문 : 눅 7:36-50)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인류의 앞날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푸른 신호등이 켜질 수도 있고, 붉은 신호등이 켜질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사회나, 가정이나, 우리가 섬기는 교회도 역시 똑 같습니다. 우리 교회의 앞날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어떤 신앙과 인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교회의 새 시대가 좋아 질 수도 있고, 더 좋은 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귀합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살릴 수도 있고, 사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새 사람으로 만들고, 위대한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교회를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우리로 좋은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려도 좋은 성품만 잃지 아니하면 다시 건짐을 받습니다.

재산을 잃었다가나 불행을 당한 그런 집이 망한 집이 아닙니다. 저희 마을에도 어렸을 때부터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집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재산은 없고, 멸시 천대받고, 공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집이 망한 집은 아닙니다. 그 집안에서 크는 아이들이 하나님을 잘 경외하도록 가르치고. 예의와 도덕을 어려서부터 잘 가르쳤습니다. 좋은 성품을 가지고, 좋은 일 할 수 있는 착한 사람으로 잘 길렀습니다. 그 집은 살았습니다. 그 가정은 복 받은 가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사람들에게는 존경받는 잘 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을에 제일 잘 살고, 먹을 것과 입을 것 많고, 재산을 마당과 방안에도 쌓아 놓고, 지역 유지로 온갖 영광을 누린 집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동네에서 모이면 그 집 이야기를 수군거리고, 말하였습니다. 그 집 아이들은 성실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망한 집은 그 잘 사는 집입니다. 가난한 집은 일어난 집이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멀쩡해도 병든 집이 있고, 겉으로 보아서는 온 몸과 생활이 상처를 받아도 건강한 집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집이 있습니다. 사람은 겉을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다 잃어 버려도 안에 갖고 있는 집이 있고, 다 가져도 안이 텅 빈집이 있습니다.

영국은 18세기 즉 1700년대에 와서 경제적인 큰 위기를 만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총체적으로 부패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1720년경에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 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스잔나라고 하는 믿음 있는 어머니였습니다. 참으로 교회사에 빛나는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19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가 보통 어머니가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굴하지 않고, 약하지 않고, 자식을 영적 부유함으로 길렀습니다. 말씀으로 길렀습니다. 이 아이가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서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대로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대학이 오늘 우리 대학처럼 타락했습니다. 대학이 지성의 탑이 아니라 방종과 방황과 음란과 타락의 탑이었습니다. 그 당시 거리의 아이들은 거의가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때에 요한 웨슬레와 형제 찰스 웨슬레가 옥스퍼드에 다니면서 성경 읽기 운동을 하고, 기도하는 홀리 클럽 (HOLY CLUB)을 만들었습니다. 많이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몇 천명이 모인 대학에 4명이 모여 공부했지만 놀라운 일을 일으켰습니다. 원래 큰 일을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원래 적은 것입니다. 귀한 운동은 원래 적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위대한 인물은 외로운 곳에서, 적은 곳에서, 남이 외면하는 곳에서 일어나지만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4명이 일어나 성경공부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옥스퍼드 대학으로 번져나갔고 영국은 서서히 저주와 어두움과 방황의 땅에서 빛이 비추기 시작한 땅이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미국에 선교사로 갔다가 돌아와서 영국에 영적 부흥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영국은 살아났습니다. 의회가 살아났습니다. 영국의 경제가 살아났습니다. 세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영국의 정치가 정직한 정치로 돌아가서 정직한 신사의 나라로 만든 힘은 옥스퍼드의 홀리 클럽(Holy club)과 요한 웨슬레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 힘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18세기말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나서 그 이후로 영국은 모든 일에 앞서가는 나라가 되고, 질서 있고, 존경받는 나라가 되었는데 이렇게 최고의 민족을 만든 것은 바로 영적 운동이요, 영적 부흥인 것입니다. 21세기가 어떠한 시대가 될 것입니까? 지금 잘사는 나라 흥청거리는 나라들도 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하 자원이 아닙니다. 지하자원은 지금 중동이 아주 많지요. 돈이 땅 밑에서 그냥 펑펑 올라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세계에 영향을 끼칩니까? 세계적인 인물이 납니까? 문화적으로 찬란한 문명을 쌓아 갑니까? 학문적으로 무슨 공헌을 합니까? 지금 가난할 지라도, 영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일어날 때에 가정도 일어날 것이고, 국가도 일어날 것이고, 세계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1875년 미국에서 7남 2녀 중 6남으로 태어난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무디(D.L.MOODY)라고 하는 분입니다. 나라마다 이런 지도자와 이런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무디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아버지는 석공으로 일을 했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무디는 학교 공부를 여섯 달밖에 하지 못하고 더 이상 다니지 못합니다. 10살 때 출판사의 직공으로 일하며 종이를 나르면서 어머니를 돕는 자리로 나갑니다. 16살 때에는 친척이 운영하는 보스턴에 있는 구두 깁는 공장의 직공으로 취직을 합니다. 그때에 그는 구두 깁는 직공으로 있으면서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 가난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겠어요. 은혜를 받은 거예요. 변한 거예요. 세계를 다 안을 수 없지만 예수를 안으면 세계를 다 안은 거예요. 세계를 다 소유할 수 없지만 예수를 소유하면 참 부요한 자입니다. 온 세계가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예수님 사랑 받으면 행복한 자입니다. 능력 있는 자입니다.

무디는 힘이 났어요.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일을 하려해도 기회를 주지 않는 거예요. 교회 학교 교사가 너무 하고 싶었지만 일을 시켜 주어야 지요. 그래서 교회에 사정을 했어요. 아이들을 맡겨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을 자신이 데려다가 교회 신발장 앞에서 가르칠 테니까 허락만 해달라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허락을 받아 아이들을 데려 오는데 100명의 교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보다 더 많아지는 거예요. 전도를 누가 합니까? 교회 봉사를 누가 합니까? 은혜 받은 자가 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은혜, 구원의 은혜, 주님을 만난 기쁨을 가진 사람이 전도하고 봉사합니다. 기쁨이 없는 교인은 종교인이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이 아이가 미국을 변화시킵니다. 미국의 새로운 청교도의 정신을 다시 불 지펴주는 분이 무디입니다. 일년에 200만 명을 전도할 만큼 세계적인 부흥사로 일어나게 되고, 이분이 일어나는 것과 함께 미국이 다시 힘을 얻어서 일어납니다. 정치, 경제, 교육이 다 일어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나라의 앞날은 누가 일으킬 것입니까? 이 민족의 앞날은 누가 좌우 할 것입니까? 우리는 영적 부흥 운동을 일으켜야 할 줄 믿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가정의 소망이요. 민족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영적 축복의 근원이 될 줄 믿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능력은 지위나 계급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힘있게 살고, 권력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이 살아 갈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 국민이 화장을 하고 예뻐지려고만 하는데 인간의 아름다움은 얼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루블 박물관에 가면, 그곳에서 가장 자랑하는 것이 두 가지라고 합니다. 비너스 상과 레오날드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이 두 모델의 나이가 16살이라고 합니다. 소년 다윗의 동상이 있는데 그것도 16살이라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16살 때 제일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지위와 관계없이, 나이와 관계없이, 어떤 환경과 건강과 관계없이, 아름다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농부는 농부이기에 아름답습니다. 땀 흘리고, 화장도 안하고, 얼굴하나 씻지도 못하지만 농부는 농부로서의 아름다움이 있고, 군인은 군인으로서 그 모양이 아름답습니다. 운전 기사는 기사로서 아름답고, 바다의 어부, 선장 그대로 너무 아름답고 멋집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저의 외할아버지가 수염이 허연 어른이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나타날 때 그 할아버지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꼭 높은 지위, 권력, 돈이 많아서 외모를 꾸밀 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아이대로 말할 줄 몰라도 너무 아름답고 금방 태어난 아이는 아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아름답습니다. 건강하나 건강하지 못하나, 배우나 배우지 못하나, 인간은 제각기 아름다움을 다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인간 됨에 있습니다. 인격에 있는 것입니다. 성품에 있는 것이고, 인간이 인간성을 그대로 갖고 있을 때 아름다운 것이지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람은 제 아무리 위대한 지위와 복장과 지성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는 아름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점은 못 입은 것도 아니요. 가난한 것도 아니요. 인간의 참 가치인 인간성을 상실한 데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입니까? 사람은 짐승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여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비인격화되고, 비인간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므로 변화를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요, 다윗이요, 이삭이요, 야곱이요, 또 마리아예요. 이것이 바로 우물가의 여인이예요.

우리는 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모습 이대로 나와야 합니다(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적어도 예배 드릴 때는 화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에 화장하지 말고 오히려 죄인이 왔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영혼이 소생하고 주님을 그 자리에서 만나고, 옷자락을 잡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에 효자동이라고 있는데 그 유래가 이렇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자다가 그만 손자가 죽었어요.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남편에게로 갑니다. 사정 이야기를 합니다. 남편이 아이를 보고 야단을 합니다. “이 나쁜 놈아 네가 어찌하여 할아버지 마음을 근심되게 하느냐? 이런 불효막심한 놈이 어디 있느냐? 앞으로 할아버지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며 죽은 자식의 뺨을 때립니다. 그러자 아이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잘 살았다는 겁니다. 그곳이 효자동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람이잖아요. 오늘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연세 많아 살길이 없는 시대에 잘해도 자식 눈치보는 시대입니다. 밥 한 그릇 얻어먹기도 어려워서 나가서 공짜로 주는 곳에서 이리 저리 헤매이며 먹는 것이 오늘의 노인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선진국이다. 대단한 민족이다 G.N.P가 얼마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인간의 극히 본질적인 기본적인 사랑과 효와 애정과 겸손과 인간 됨의 참된 진실을 다 버리고서 무슨 지상의 낙원이 온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예수님의 삶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셨지만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죄인 친구 만드시고, 삭개오의 집에 가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창녀 같은 여인을 가까이 하시면서 위로해 주시고, 간음한 여인 살려내시는 하나 하나의 장면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공부 많이 해서, 실력이 있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빨리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음악가가 지휘만 잘하고, 작곡을 잘하고, 노래 잘 불러서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하 헨델이 모든 음악적으로 훌륭해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하나님을 겸손하게 믿는 그 믿음에서 그 작품이 나왔고 평생동안 그 표정과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신앙 관리를 잘 했습니다. 유명한 화가들 즉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밀레, 미켈란젤로, 이런 분들이 그림만이 아닙니다. 그림만 잘 그렸다면 그분들이 잘 그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 인간다움이 그 작품을 값있게 해서 세계와 인류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는 줄 믿습니다. 지난주에 노벨 평화상 받은 분들 보세요. 이름 없는 천사들이예요. 이름 없는 곳에 노벨 평화상 주는 거예요. 자기 이름 드러내지 않고 좋은 일 하는 이분들을 향해서 세계가 박수를 하고 상을 주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 중에 다윗을 드는데 다윗이 싸움을 잘하고 정치를 잘해서 훌륭하게 봅니까? 그것이 아니예요. 다윗의 삶은 얼마나 멋이 있고 인간적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회복된 참 신앙과 진실로 살았고, 약한 자들과 함께 약하게 살아갔습니다. 한 번은 다윗이 적에게 포위를 당해서 산에 완전히 갇혀 있었습니다. 밑에는 사울의 군사들이 꽉 차 있습니다. 산 위에서 목이 말라서 살수가 없는 거예요. 죽을 지경 이예요. 그때 부하 3명이 산 아래 베들레헴에 내려가서 적이 가득 차 있는 그 사이를 뚫고 내려가 물을 길어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너무 목이 마르니까 먹으려고 하다가 다윗은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물이 아니다. 내 사랑하는 부하 세 명의 생명인 그물을 내가 먹는 것이다. 이것은 물이 아니고 피다. 물이 아니라 생명이다.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이것을 먹을 수가 있느냐” 라고 말하고는 물을 버립니다.

여러분! 정치를 꼭 잘해야 훌륭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훌륭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앞날도 이런 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야 목말라 타 죽든 자기만 먹으려고 하는 목사는 자기도 죽고, 교회도 죽고, 교인도 죽고 다 소망 없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남이야 어찌하든 누구의 것이라도 나의 목마름만 채우겠다 라고 하며 남의 피를 빼앗아 먹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려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는 거예요. 색깔이 바뀌어야지요. 예수의 사랑과 겸손을 본받아야 되는데 그 큰사랑을 받으면서 변하는 것이지요. 예배는 변하려고 드리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고 교만함 강퍅함, 불의함, 정욕의 마음, 음란한 마음들이 예배드리면서 변하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부요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똑같은 아이였지만 예수 믿으면서 너무 주님의 사랑이 크시기에 앞날을 염려하지 않게 되었고 저도 욕 많이 했지만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제 입에서 욕이 떠나가게 되었고, 목회하기 전에 이미 이런 것들이 떠나가더라구요. 너무 귀한 분을 만나니까 변하였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며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변해야 우리 집이 변합니다. 변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변해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꿈에 하나님을 만났어요. 천국으로 안내되어 천국을 보니 얼마나 좋은지요. 정말 이리 와서 살면 좋겠다하고 하나님 앞에 물었어요. “하늘나라와 이 땅을 비교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땅에서 백 만년이면 하늘나라 몇 년하고 맞먹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거야 하루하고 맞먹지” 성경에도 나오지요.”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비교가 안되지요. 그곳은 영원한 나라이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나라예요. 거기에는 시간이 없어요.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요. 또 물었어요. “하나님 나라는 전부가 보화인데 땅의 백만원 돈이면 하늘나라의 금과는 얼마정도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거야 먼지와 같다. 하나님 나라는 도로도 다 금이다” 그래서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 그러면 나에게 먼지만큼만 주세요”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루만 기다려라”라고 하였답니다.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인간은 이런 크신 하나님, 부요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위만 하나 올라가도 변하고 의젓해 집니다. 아이들도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달라지구요. 중학교 가면 또 달라지는 거예요. 사람은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린 대로 우리 고향에 친구 한 분이 저보다 몇 년 선배이신데 가정이 좋아서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어요. 방학이 되어 내려오는데 어려서 학교 다닐 때는 코흘리개였어요. 온 몸이 코예요. 흐르는 코를 입으로 마시고는 또 흘리고 하여튼 코가 많았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내려온 이 친구가 교복을 입고 내려 왔는데요. 코가 간 곳 없는 거예요. 너무너무 멋있는 거예요. 국문학과를 다녔는데 말도 다르구요. 어떻게 의젓하고 멋이 있는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시는 거예요. 네가 달라지라는 거예요. 네가 달라지면 가정이 달라지고, 네가 달라지면 세계가 달라지고, 네가 달라지면 이 민족이 달라질 수가 있다는 거예요. 누구로 말미암아 그렇습니까?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나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변화 받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창녀였습니다. 과거에는 더러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워진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과거에 이런 잘못이 있을지라도 새로워진 한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란 점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사람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과거를 위장하고, 숨기고,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 높은 마음을 품고 자기를 뉘우치거나 반성함이 없는 사람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죄인인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야 참 예배가 되고, 찬송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감격스러운 찬송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건지시기 위하여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죄인이라고 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주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주의 공로의 피를 가져다가 씻음을 받은 자가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 어디 있습니까? 깨끗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많은 분들이 저에게 와서 우리 아이가 문제라고, 아이가 나쁘다고, 애가 큰일 났다고 하고, 아이를 탕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 아이를 낳은 당신도 탕자입니다. 언제까지 아들을 나쁘게 보고, 당신은 거룩하게 볼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죄인과 같이 되어 오셨습니다. 남편을 보고 언제까지 정죄하고 거룩한 체 살아가시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아야 주님과 나와 하나 되고 나와 네가 하나 될 줄 믿습니다. 나는 나를 모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모릅니다.

교회는 나를 들여다보는 곳입니다. 나를 고치기 위하여 나오는 죄인이 고침을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인줄 믿습니다.

어떤 경찰서에는 저녁마다 술 먹고 형편없이 들어오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술이 깨어 물어보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르겠다 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럴리 있습니까? 웃기지 마세요라고 부인합니다. 그래서 경찰 서장님이 지혜를 얻어 그 사람을 잡아온 후 모든 행동을 비디오 촬영을 했어요. 소리를 지르지요. 욕을 마구 하구요. 토하지요. 아무데나 소변을 보는 그런 것들을 다 찍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그것을 보여 주었어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이상한데요 라고 말합니다. 자기 발걸음을 정확하게 돌아보면서 잘못된 발걸음이었다라고 뉘우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발걸음만 손가락질하는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 시몬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은혜의 길이 열리는데 은혜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나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25년 전 목사님들과 함께 설악산에서 수련회를 하고 돌아오면서 경포대에서 해수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 해수욕장에는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옷을 벗고 누워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볼 때는 소돔과 고모라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우리는 저 죄인들 같이 옷을 벗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팬티 위에다 파자마를 다 입었어요. 그런 상태로 해수욕을 하고, 벗은 죄인들 사이로 다녔습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였습니다. 내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 더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자기를 시인하고 “내가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가정도 평화를 찾고요, 심령에도 평화가 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오늘 이 여인과 같은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눈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새 은혜를 받고 영혼이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시대는 지하자원의 시대도 아닙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선진국으로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회복되고 새 사람 되어서, 새 시대를 준비할 때에 이 나라의 앞날도 여러분의 앞날도 하나님의 빛으로 비추어 주실 줄 믿습니다.

8.감사할 수 없는 자의 감사 (본문 : 눅 17:12-19)

갈릴리교회 인명진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저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제 그렇게 인사를 합니다. 아마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두가 다 궁금한 모양입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느냐. 하는 그런 인사를 받을 때마다 ‘예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서는 뒤돌아서서 혼자 생각해봅니다. 내가 정말 재미있게 살고 있는가? 내가 정말 잘 지내고 있는가? 내 인생이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가? 하며 새삼스럽게 저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세상을 사는 재미가 넘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되는대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마 혹시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은 목사님 요즈음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아마 그렇게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요즈음 IMF이후에 세상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다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그리고 우수에 그늘이 얼굴 얼굴마다 짓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텔레비전 방송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게 되면 요즈음 쇼 프로그램이라든지 코메디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뚝 떨어졌다고 합니다. 사실 내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야 누가 춤추는 것을 보면 기쁘고, 누가 웃기면 깔깔대고 웃기도 하는 것이지 내 마음이 편치 않고 고민이 가득하고 불안이 가득하고 그래서 도대체 웃을 기분이 나지 않는데, 누가 우스운 소리를 한다고 억지로 웃어 지는 것이겠습니까? 아마 오히려 더 역겨운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웃고 떠들고 춤추고 그러는 것을 볼 때마다 저놈들 미친놈들이지. 철딱서니 없는 놈들이지, 뭐가 좋다고 저 야단인가? 텔레비전의 채널을 확 바꾼다고 그럽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고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한 것이 오늘의 우리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신문에 소개된 어떤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난 수요일 11월 4일자 국민일보에 난 이야기입니다. 36살 된 송명희라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신문에 난데로 혹시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저 간단하게 그 내용을 소개해 드리면 이 송명희라는 여성은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태어날 때 의사가 집게로 뇌를 건드려서 소뇌를 손상했다고 합니다. 이 신체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소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서 이 송명희라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똑바로 고개를 하고 싶어도 자꾸 옆으로 기울어지고 7살이 되도록 누워만 있었다고 합니다. 10살이 되서야 숟가락을 스스로 간신히 쥘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이 송명희라는 여인의 집은 너무도 가난해서, 찢어지게 그런 가난한 집이었고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는 그런 엎친데 덮친격인 그런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부모님과 하나님을 수없이 원망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운명을 저주하기도 했고 그래서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왜 안그렇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17살이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죽더라도 한 번 하나님을 만나서 따져보고 죽어야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주 작정을 하고 목숨을 걸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한 번 단단히 따져 봐야겠다. 도대체 왜 이 모양으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며 도대체 이런 몰골로 내가 세상을 살아야 될 의미가 무엇이냐. 하나님께 마구 대어들며 따졌다고 합니다. 결국 오랜 기도 가운데 이 송명희씨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녀는 계속 기도를 하는 가운데 수많은 시를 쓰게 되는데 그 시를 모아서 시집을 내게 되었고 또 그 시에 곡을 붙여서 음반을 내게 되었고 그 음반이 아주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이 분이 낸 곡 중에 대표적인 곡이 ‘그 이름’ 이라는 그런 복음송입니다 만은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음반으로도 나와 있고 CD로도 나와 있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 이후 이 송명희씨는 전국각지의 교회를 다니면서 뒤틀린 입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간증했습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송명희씨의 간증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고 감사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변화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송명희씨의 이 “나” 라는 시를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 가진 제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 송명희 씨가 지은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참으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송명희씨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적어도 세상의 기준으로 그렇습니다. 마음대로 걸을 수가 있는 사람입니까? 자유롭게 말을 할 수가 있는 사람입니까? 찢어지게 가난하죠,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이가 서른 여섯입니다 만은 남들처럼 무슨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가정을 꾸미고 애를 낳고 무슨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아니 그런 희망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가능성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보통 우리들은 그런 사람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 거참 불쌍한 사람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동정을 하기가 일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는 본인은 그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몰골이 이렇고 내 처지가 처절하고 그래서 당신들이 나를 동정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주었다. 당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로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 송명희 시인은 믿음의 눈으로 보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 송명희씨의 감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서도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양 늘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말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송명희 라는 여인은 우리들 모두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입니다. 최근에 신문사 기자가 이 송명희 시인을 인터뷰를 했는데 만나보니 지난해 말부터 목 디스크가 와서 온 몸이 저려서 잠도 제대로 잘수 없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자들 만난 그녀는 뜻밖에도 노숙자들을 걱정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길거리를 헤매이는 이 노숙자들 거리에서 그냥 놔두면 얼어죽을텐데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노숙자들을 걱정하고 있더래요. 이 송명희씨를 인터뷰한 기자가 마지막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신문 기사에 썼습니다. 10월의 마지막날 올림픽 공원에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 촬영에 열중하는 신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화려하게 치장한 그 어떤 신부도 휠체어에 앉아서 고개를 흔들며 절규하듯 하나님의 은혜를 얘기하고 이웃을 걱정하는 이 여인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감사라는 말을 자주 내용이요 신앙의 표현입니다. 감사가 없는 신앙을 진정한 신앙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신자를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까? 보통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뜻밖의 무엇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감사합니다. 우리가 염려하며 걱정하던 것이 잘 풀렸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감사를 합니다. 물론 그것도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겨우 하는 일입니다 . 여러분 우리의 감사의 생활을 가만히 따져 보면 이 감사에도 급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할 것이 있어서 하는 감사, 그것은 아주 초보적인 감사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의 감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어떤 사람이 무슨 특별히 좋은 일이 없어도 감사하는 것, 예를 들면 일상적인 일, 그냥 하루 세끼 먹고 출근해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식구들과 저녁 먹고 텔레비전 보고 잠자고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자라고 공부는 좀 못해서 그렇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칭찬 받을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들 모두가 다 경험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런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별로 흔하지 않거든요. 뭐 으레히 그런 것들이라는 것은 으레히 그냥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니 뭐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물론 어느 날 갑자기 그런 것들을 빼앗겼을 때 ‘아! 그게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뒤늦게 깨닫게 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평상적인 때, 일상적인 우리의 삶에서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일은 별로 많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만약 어떤 사람이 불행을 당했는데 그 불행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감사한다고 한다면 예를 들면 오늘 제가 말씀드린 이 송명희씨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신앙이라고 우리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차원 높은 감사입니다.

우리가 송명희씨 얘기를 들었습니다만은 여러분 이 사람의 어떤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집안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식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서른 여섯 살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아니 결혼할 희망조차도 가지지 않고 가지지 못하고 사는 이것이 감사의 조건입니까?

여러분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무엇이 감사의 조건이겠습니까. 이 사람에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이 송명희씨는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많이 받은 사람이다. 넘치게 받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 그 어떤 사람보다도 절대로 덜 받지를 않았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 주신 것…다른 것을 주셨다. 이렇게 스스로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자살하기 딱 좋은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스스로의 삶을 살펴보았을 때 자신의 삶, 자신의 인생 속에 깃들여져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있었음을 이는 발견한 것입니다. 신앙적 입장에서 봤을 때 그 속에서 무한한 행복과 기쁨이 숨겨져 있음을 봤습니다. 인간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불행이요, 비극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는 이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외형적인 조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아니, 지금이 옛날보다 더 조건이 나빠졌습니다. 똑같은 조건인데 옛날에는 그것 때문에 불평하고 그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했고 그것 때문에 죽으려고 했고 그런데 지금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행복해하고. 주어진 조건은 변하지 않았는데 그의 눈이 변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감사라는 것은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자세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느냐, 무슨 눈으로 인생의 일들을 보느냐에 감사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조건이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의 마음가짐입니다. 사람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세상의 눈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라도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감사를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우리들 믿는 사람들이 당연히 모두가 다 그와 같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8절 이하의 말씀,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말씀입니다만은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면하시기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기쁠 때만이 아니라 슬플 때에도 감사하라. 성공했을 때만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에도 감사하라. 건강했을 때뿐만 아니라 건강했을 때에도 범사에 감사해라. 태어났을 때뿐만 아니라 죽었을 때에도 감사하라. 취직을 했을 때뿐만이 아니라 실직을 했었을 때에도 감사하라.

얼마 전에 김원 집사님, 김애련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딸이 지금 입원 중에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감사했느냐. 그 감사를 잊지 말고 지금도 감사하라.” 그 말이 얼마나 머릿속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게 감사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사실 이렇게 권면하시는 사도바울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감사할 만한 조건에 있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젊었을 때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학문도, 지식도 명예도 권력도 그 어마어마한 배경도 가문도 그는 다 잃어버리고 지금 그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집도 없이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신세입니다. 손수 천막을 지어서 겨우 먹고사는 막노동자 신세입니다. 장가도 못 들었고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홀홀 단신 외로운 사람입니다. 게다가 몹쓸 병까지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다 찬성을 받는, 환영을 받는 그런 처지도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기도 하고 붙잡혀서 갇히기도 하고 세 번씩이나 감옥에

를 갔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모략을 받기도 하고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인간적인 배신이 사도 바울을 더욱 힘들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적인 조건으로 볼 때 무엇하나 감사할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삶이 늘 기쁘다고 했습니다. 기뻐하라. 나와 함께 기뻐하라.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 자신은 더없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래서 감사할 수 없게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도 바울,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감사를 하며 산 사람입니다.

여러분, 저는 생각합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부끄러움은 정말로 감사를 해야 될 사람은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불만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정작 감사할 조건이 없는 사람들,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그런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부끄러움입니다.

저는 이제 저의 말씀을 마치려고 생각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요즘 은행구조조정으로 수천 명의 은행원들이 지금 직장을 쫓겨나고 있지 않습니까. 은행마다 인사고가를 매기는데 이 D급 판정을 받은 그런 사람들을 다 해직을 한다고 그럽니다. 외환은행에 다니는 장모라는 과장이 D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 은행에서 밀려나게 됐는데 신문에다가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긴 여행의 종착역에 내려 이제는 정말 홀로 서기를 해야한다는 부담감에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엄동설한에 하나님이 옷을 발가벗기실 때에는 나에게 더 좋은 옷을 입혀주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어제저녁 집사람과 두 아이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서 이 장 과장님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사람이라야 감사할 수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지금의 내 처지가 불행하고 힘들고 그래서 하나님께 도저히 감사 드릴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니 나의 이 불행과 나의 모든 처절함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고 절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잘못되게 하실 분이 아니시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니 내가 살아왔던 지난날들도 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봐주셨고 좋으신 하나님이셨고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앞으로의 나의 삶도 지켜 주실 줄로 믿고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우리가 믿을 진데 그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의지할 진데 지난날들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진데 지금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불행하고 어렵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의 감사. 이 귀한 은혜가 오늘 이 아침 여러분들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9. 감사, 감사, 감사 (본문 : 롬 8:28)

순복음인천교회 최성규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감사, 감사, 감사입니다. ‘감사’를 한 번만 할 수가 없어요. ‘감사, 감사, 감사’. 사실 ‘감사’라는 말을 일곱 번 하려고 마음을 먹었더니 너무 길 것 같아서 세 번만 해서 ‘감사, 감사, 감사’예요. 여러분, 정말로 감사해요, 안 감사해요? 감사해요. 그래요. 우리는 지금 어렵고 힘든 1998년 한 해를 이제 마감하게 되었어요. 묵은해를 잘 정리해야 돼요. 그래서 씻을 것은 씻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치고. 그래서 한 해를 마감을 잘 해야 돼요.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각오로 다짐해야 돼요. 그래서 희망과 꿈을 가져야 돼요. 만약 혹이라도 희망이 없다면, 꿈이 없다면 우리는 안돼요. 기도해야 돼요. 그래서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 나에게 희망을 주시옵소서. 나에게 꿈을 주옵소서.”

여러분, 돈은 세금이 붙어도 꿈은 세금이 안붙어요. 그렇지요? 희망은 세금이 안붙는다구요.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가져야 돼요. 자산 중에 제일 큰 자산이 뭐냐구요? 희망이에요. 꿈이에요. 소망이에요. 이런 자산을 가지고 살면 이 세상을 실패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렇게 말했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들에 대하여 감사해야 돼요. 앞으로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또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돼요. 감사로 사는 사람은 분명히 기쁨이 있어요. 미래가 있어요. 희망이 있어요.

우리가 힘들었던 한 해를 마감하면서 감사로 마감할 수 있다면 다가오는 새해는 희망차게 우리 앞에 다가올 거예요. 또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거예요.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감사를 잘하는 사람은 복 받는다고 그랬어요. 시편 50편 23절에 보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랬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그랬어요. 그 천냥 빚 갚는 말이 어떤 말일까? 난 그 말일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우리말에 그런 말이 있지요. ‘빚은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 빚 얻어 가는 사람은 와 가지고 뭐 “주세요. 주세요. 주세요.” 그래요. 다 다가 그래요. 그런데 빚 갚을 때는 공짜 갚는 것처럼 안 갚아. 그렇지요? 가서 달라고 그래, 오히려 빚 준 사람이 가서. 그때는 “빚 갚아 주세요. 빚 갚아 주세요.” 그러잖아요. 그리고 자기가 쓴 것 갚으면서도 투덜투덜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이 있었나보죠. 빚 갚을 때가 되었는데 미리 하루쯤 먼저 와서, “빚을 주셔서 참 잘 썼습니다. 그 때 그 때 안 주셨으면 우리가 큰 일 날 뻔했는데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마 그랬나봐요. 그런데 돈이 많은 사람이 빚을 많이 주고 살았는데, 수십 명 수백 명에게 빚을 주고 살아봤어도 그렇게 감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빚준 사람이 감동이 온 거예요. 그 빚 안 갚아도 그 사람은 돈이 있으니까, “야, 너 같은 사람 처음 봤다.” 말 한마디에, 무슨 말? ‘감사합니다.’ 말 한마디에 빚 청산. 뭐, 그런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요.

자, 우리는 감사해야 되는데, 1998년을 마감하면서 감사 감사해야 되는데, 무엇을 감사할까?

첫째, 고난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시다.

여러분이 아마 쉽게 이해가 안될지 모르겠어요. 고난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 그렇지요? 고난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많은 고난이 있었어요. 그렇지요. 뭐, 직장에서 퇴출된 사람, 퇴직된 사람, 중소기업이 부도난 사람, 더 어려워서 살 길이 없어서 가족끼리 흩어졌어요. 그렇지요? 남편이 가출했어요. 아내가 가출했어요. 자식들이 가출했어요.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더 심한 가정은 어떤 가정이 있었어요? 가족이 다, 가족이 다 자살까지 했잖아요. 그런 어려움이 다 있었어요. 이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때는 절망과 좌절밖에 가질 게 없어요. 그러나 이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요. 그렇지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이 많이 쓰시는 말씀이 있어요. “울어보고 웃어보니 웃는 게 더 좋더라.” 똑같은 조건에 불평해 보고 감사해 보니 뭐가 좋겠어요? 감사가 좋더라. 감사.

IMF에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잘 생각해야 돼요. 어떤 사람들은 IMF가 무슨 사악한 단체나 혹은 악마가 되는, 이런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지요. IMF는 어떤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돈을 빌려줘요. 원조해 줘요. 달러를 빌려줘요. 그래서 나름대로의 이익을 얻게 되고, 그래서 그렇게 유지되는 국제적 원조 기구인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IMF를 통한 구조 조정을 할 수밖에 없도록 그 나라가 경제가 막 어렵다는 것, 그게 문제인 거예요. 사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축복하셨어요. 모든 국민이 많이 일했어요. 경제성장 했어요. 그런데 그걸 지키질 못했어요. 못 지켰어요.

제가 20년 전에 전도사일 때 성남에 있는 어느 공원 묘원에 이제 장례 때문에 가게 됐었어요. 큰돌에다가 이런 글을 새겼어요. ‘돈을 벌기가 힘들다고 하나 지키기보다는 쉽고, 지키기가 힘들다고 하나 돈을 쓰기보다는 쉽다.’ 난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어, 뭐 저런 말이 있어.’ 그랬어요. 우리가 언뜻 생각하면 돈벌기가 힘들지요. 또 지키기가 뭐가 힘들어. 아 또 쓰는 건 더 신나지. 그런데 정반대로 써놓은 거예요. 돈을 벌기가 힘들다고 하나 지키기보다는 쉽다. 돈을 지키기가 힘들다고 하나 쓰기보다는 쉽다. 그러니까 제일 힘드는 게 뭡니까? 돈을 쓰는 거고, 그 다음에 힘드는 게 뭐예요? 돈 지키기는 거고, 제일 쉬운 게 뭐예요? 돈 버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이 이해가 될 겁니다. 처음에는 순간 ‘어머, 저런 말이 있어.’ 그러는데 가만히 내가 음미해 보니까 ‘아하, 그렇구나.’ 우리말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 그래요. 우리는 그 동안 많이 경제가 성장했었어요. 무얼 못했어요? 지키지를 못했어요. 지키지를 못해서 어떻게 됐어요? IMF 경제 체제 속에 들어왔어요. 너무나 많은 빚을 얻어왔어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 나고 곪은 부분을 수술로 도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곪음에 살 안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곧 살이 썩어져 버리고 말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IMF를 통해 신속히 이 나라의 곪은 곳을 도려낼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보세요. 정말 우리나라 좋은 나라, 우리 국민 정말 착한 국민. 그래서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랬어요.

여러분, 고난을 통해서 인내심을 얻어요. 고난을 통해서 삶의 소중함을 배워요. 일찍이 한국의 역사를 가리켜 ‘고난의 역사’라고 했던 함석헌 씨가 이런 말을 했어요.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갈 때 마음속에 깊은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에 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다. 생명의 깊은 뜻은 피로 쓰는 글자로만, 눈물로 그리는 그림으로만, 한숨으로 부르는 노래로만 나타낼 수 있다.” 그랬어요. 또 성경은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시편 119편 71절에 보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고난 당하지 아니하면 방종하게 살아요. 그렇지요? 고난 당할 때 우리는 인내해요. 고난 당할 때 우리는 겸손해져요. 고난 당할 때 삶의 의미를 알아요. 고난은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또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하고, 그래서 고난으로 인해 다가오는 물질적 손실보다는 정신적 유익이 더 큰 거예요.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요.

시편 34편 19절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에요. 우리는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이 고난은 불평이 아닙니다. 고난은 감사. 고난 때문에 불평하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오더라도 감사하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고난을 당해본 사람은 철이 들어요. 인생이 바꿔져요.

둘째, 신앙을 회복한 것에 대해 감사합시다.

왜 감사합니까?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감사해요. 고난이 안 왔더라면 방종할 것인데, 고난이 안 왔더라면 예수를 멀리 떠났을 것인데, 고난 때문에 오는 거예요. 어린 아기가 엄마 젖을 먹고 배가 부르면 더 먹으라고 그러지요, 엄마가. 그때는 그렇게 배고플 때 빨아먹었던 젖을 ‘응’ 물어버려요. 그러고 엄마 싫대. 그러고 제 신발 신겨주면 제 마음대로 돌아다녀. 그러다가 배고프면 또 찾아와. 어딜 찾아와? 엄마 찾아와. 왜? 엄마에게 자기가 먹을 젖이 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거예요. 배고프면 찾아와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참 인생이 간사해요. 뭔가 되는 듯 하면 주님을 떠나. 그러나 배고프면, 고난을 당하면, 고통을 당하면 찾아오는 거예요. 우리는 그 동안 많은 고난을 당했을 때 주님을 찾았어요. 6.25전쟁 때 주님을 찾았어요. 보릿고개 때 주님을 찾았어요. 나라가 어려울 때, 데모 많이 할 때, 화염병 많을 때, 이 나라 민주화 달라고 우리는 기도했어요. 부르짖었어요. 그것이 다 얼마만큼 오다보니까,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다 주님 떠나는 거예요. 신앙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고난 때문에 신앙을 회복했잖아요.

금년에는 우리는 정말로 더 많은 신앙, 주께로 돌아오게 됐어요. 더 많이 기도했어요. 더 많이 신앙을 회복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금년에 우리의 마음을 더욱 하늘을 향하게 되었어요. 십자가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어요. 세상에 두었던 소망이 사라져 버리고, 또 이 세상의 재물이 아무런 평화도, 아무런 기쁨도, 만족도 주지 못했어요. 그런 많은 재물이 그냥 순식간에, 독수리가 창공을 날아가는 것처럼 훌쩍 다 떠나버렸어요. 갑자기 만 불 소득이 5천 소득으로 뚝 떨어졌어요. 집 값이 반으로 떨어졌어요. 재산이 반으로 다 줄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야, 이게 아니구나.’ 이제 모두가 어떻게 됐어요?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는 거예요. 오직 우리의 소망은 물질이 아니에요. 건강도 아니구요. 명예도, 권세도 아니에요. 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골로새서 1장 3절로 5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질 수 있어요. 또 영원한 가치는 땅에 있지 않아요. 하늘에 있어요. 물질 속에 있지 않습니다. 정신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언제 깨달았습니까? 우리가 이제 고난을 통해서 기도하다가 깨달았어요.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잃어버린 신앙을 찾았어요. 주님을 멀리 떠났다가 주께로 가까이 돌아오게 되었어요. 우리는 더욱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어요. 우리는 금년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게 되었어요. 우리는 신년 초에 한달 동안 “빚 청산을 위한 전성도 하루 한끼 금식하며 새벽기도”를 했어요. 또 “IMF 극복을 위한 기도부흥성회”도 했어요. 너무 어려우니까 “3개월 연속 축복과 기적의 부흥성회”도 가졌어요. 그래서 잃어버렸던 신앙을 회복했어요. 전도하는 신앙, 새벽 기도하는 신앙, 십일조 하는 신앙, 주일성수 하는 신앙, 가정예배 드리는 신앙을 절실히 느끼고 여기에 도전을 받았어요. 잃어버린 것을 찾았어요. 또 우리의 신앙은 고난을 통해 더욱 강화되는 것입니다. 활발히 일을 하고 있을 때보다는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요. 그래서 고난을 참아내면 여전히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어요. 우리의 신앙은 점점 커지고 강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시편 119편 6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말씀을 떠나서 살았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니까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는 정지 표시가 아니에요. 실패는 끝이 아니에요. 실패는 뭐냐구요? 방향을 돌리는 표시예요. 변장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실패는 변장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만 좋게 주지 아니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쓴맛도 주시는 거예요. 그렇지요? 입에서 단 것은 몸에 나빠요. 그러나 입에서 쓴 것은 몸에 좋아요. 오늘 받는 은혜, 좋은 은혜는 오늘 좋아요. 그러나 오늘 쓴 것은 장차 좋은 거예요. 우리는 오늘만 잘 되면 안돼요. 장차가 잘되어야 해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서리가 내리면 약한 풀은 다 죽지만 들국화는 더욱 향기를 발합니다. 그렇지요? 보통 사람은 평소에 빛나지만 성공자는 실패 앞에서 반짝이는 것입니다. 인정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축복을 주실 때 가시가 돋친 보자기에 싸서 주신다, 그런 말이 있어요. 예쁜 장미꽃, 향기 좋은 장미꽃은 가시가 있잖아요. 우리의 성장은 밤과 폭풍우 속에서, 또 역리의 거센 환경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공은 그냥 되는 게 아니에요. 곡식은 해와 비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람도 있어야 잘 익을 수 있습니다. 곡식이 자라기 위해서는 여름에 뜨거운 뙤약볕이 필요해요. 또 많은 비도 필요해요. 그러나 그건만 가지고는 안돼요. 가을에 바람이 불어야 익는 거예요. 가을 바람이 불어야 벼가 결실 하는 거예요. 대추가 빨갛게 익는 거예요. 밤이 영그는 거예요. 사과가, 배가, 감이 잘 익는 거예요. 뭐 때문에? 가을 바람 때문에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다 그런 거예요.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우리는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1998년 한 해 고난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게 되었어요. 잃어버린 정신을 다시 찾게 되었어요. 그렇게 하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거예요. 그러니 어찌 감사, 감사하지 않겠어요.

셋째, 내게 지금 있는 것으로 감사합시다.

감사는 내게 지금 있는 것으로 감사해요. 우리는 지금 있잖아요. 우리는 지금 있잖아요. 살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1년 전에 같이 만났다가 지금 못 만나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우리 주위에 많아요. 살았잖아요. 우리는 살았잖아요. 살아있잖아요. 살아있잖아요. 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신앙이 살았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금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감사보다는 불평하기를 참 좋아해요. 그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보는 대신에 없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거예요. 남이 가진 것 더 좋아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남의 입장에서 나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나에게는 아직도 있는 게 있어요. 우리는 그것들을 찾아서 일일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예요. 금년에 이만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아직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이만큼 된 것, 작년 연말, 신년 초에 미국 돈 1불에 한국 돈이 1900원 이상 갈 때 우리는 괴로웠어요. 얼마나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요. 그래서 나라 살려보자고, 달러를 벌어보자고 우리 했잖아요. 금 모으기 했지요. 우리 교회에서도 금 모으기 했어요. 다 내놨어요. 다 내놨어요. 저도 다 내놨어요. 금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갖다 파는 것은 아니잖아요. 나만 냈어요? 아니에요. 우리 성도 전 성도가 다 냈어요. 금 모으기 했어요. 또 달러 모으기, 외국 돈 모으기 다 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기도했어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 이 나라가 망하게 됐어요. 6,25전쟁 이후로 최고로 어렵다고 그래요. 하나님, 이 나라 안 망하게 해주세요. 이 나라 안 망하게 해주세요. 이 나라 망하면 안돼요. 이 나라 망하면 안돼요. 이 나라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 그렇지요? 어떻게 이어온 나라인데. 이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가 우리 세대에 망하면 이 우리 꼴이 뭡니까? 우리 후손들에게 이 나라를 넘겨줘야 하는데 왜 우리 대에 와서 이 나라가 망하게 됩니까?” 얼마나 많이 울었어요. 그렇지요? 우리는 교회에 와서 땅을 치며 가슴을 치며 울었어요, 나라를 살려달라고. 그래도 이만큼 살게 되었잖아요. 여러분, 감사해요 안감사해요? 이제 미국 돈 1달러에 1200원대까지 내려왔어요. 이제 우리 정부는 야단났다는 거예요. 왜? 수출해봐야 돈 벌게 없거든요. 바이어가 자꾸 떠나거든요. 그래서 정부는 1300원대까지 되어야 되겠다. 저는 경제를 잘 모르지만 저도 볼 때는 1300원대까지 되어야 수출도 되고, 또 국민도 방종하지 않고 잘 될 것 같아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금년에 크게,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이만큼 결신자가 생겼고, 또 여전히 사회적 위치를 확고하게 하면서 이웃을 위한 교회, 지역을 위한 교회, 나라를 위한 교회로써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주춤하지 않았어요. 어려워도 다했어요. 다 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 교회가 이만큼 유지되는 것, 이만큼 성장하는 것, 대 사회를 향해서 이만큼 할 수 있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 지 몰라요. 우리 교회뿐이 아닙니다. 나라뿐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 각자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지금 나에게 있는 것 있잖아요. 누구나 나에게 있는 것을 헤아려 보면서 우리가 감사해야 됩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는 것 감사해야 되고, 나에게 가족과 부모가 있는 것 감사하고, 또 나에게 조국이 있잖아요. 대한민국이 있잖아요. 또 뿐 아닙니다. 교회가 있잖아요. 아직도 일자리가 있다면, 월급을 그전 보다 반밖에 못 받더라도 지금 일자리가 있잖아요. 우리는 감사해야 돼요.

그러므로 우리는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는 거예요. 감사.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할 때 그것들은 더욱 쓸모 있고 아주 거룩해 지는 거예요. 디모데전서 4장 4절로 5절에 보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감사하면 평강과 기쁨과 축복이 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어요.

시편 50편 23절에 보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말을 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기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해를 어떻게 마감할까? 지난 간 날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지금도 아직 괴롭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부정적인 눈으로 보지말고, 불평하며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인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성령의 눈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그랬지. 범사에 감사하라고 그랬지. 이렇게 감사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그랬지. 감사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축복이 있고, 은혜가 있다고 그랬지. 맞아. 내가 지금 환경적으로는 감사할 수 없어도 내 마음은 내가 감사해야 돼. 내 입술은 감사해야 돼.” 그래서 우리는 환경이 막 나를 울게 만들어도 울면서라도 “감사”, 막 울면서라도 “감사합니다”, 고통 중에서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로 한해를 마치면 다가오는 새해 1999년은 분명히 희망차게, 소망 차게, 꿈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10. 감사의 이유

영락교회 이철신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시 30:1-12

가정에 심방을 가서 찬송을 하게 되면, “좋아하는 찬송 은혜 받은 찬송이 있으면 같이 하십시다”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상당히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찬송이 너무 많아 가지고, 뭐 찬송가를 보면 동그라미를 쳐놓기도 하고 접어놓기도 하고 해서 그런 좋아하는 찬송이 너무 많아서 그 중에 하나만 부르자니 뭘 불러야될지 한찬 뒤적뒤적 찾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그 때에 맞는, 은혜 받은 찬송이 다 있는 것이지요. 다들 그런 찬송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애창하는 찬송, 은혜 받은 찬송이 참 많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농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농촌교회로 목회를 하러 갔습니다. 이맘때쯤이었습니다. 시골 건넌방에 짐을 풀고, 그 날 밤에 잠을 자는데, 연탄을 때는데 아궁이는 뜨끈뜨끈하고 방안은 싸늘해요. 그래서 하루 밤을 얼마나 춥게 잤는지 지금도 기억이 선합니다.

또 그 시골집이 갈대를 엮어서 흙을 발라 만든 집이 되다보니까, 이제 그 집을 잘 관리할 수 있으면 괜찮은데 그게 안 되서 그런지 흙이 자꾸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안에 벽지는 붙였는데 흙이 없는 부분은 이렇게 훤해요. 낮에 보면 군데군데 특히 구석 같은 데가 훤합니다. 종이만 있고 흙은 없으니까. 또 쥐가 많아 가지고 쥐가 그걸 갉아서 구멍도 조금씩 나고 그럽니다. 사방 8자 조그만 방인데, 제가 딱 누우면 키가 대충 맞는 그런 방입니다. 하루는 그렇게 누워있는데 옆에서 뭔가 인기척이 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돌아보니까 구멍 뚫린 벽지 사이로 쥐가 이렇게 들여다보다가 눈이 딱 마주쳤어요. 쥐도 놀래고 저도 놀래고 둘이 같이 놀랬습니다. 도시에서 편하게만 자라고 삶을 살다가 농촌의 삶에 적응하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제가 잘 부르던 찬송, 은혜 받은 찬송이 495장입니다. 특히 그 3절을 보면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초막 같은 곳에, 들녘 같은 곳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환경은 어떠하든지 내 주 예수를 모시고 삶을 살면 그것 같은 기쁨이 없다는 것을 맛보면서 삶을 살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 것이 은혜 받은 찬송이고 애창하는 찬송인 것입니다. 제가 495장 찬송을 말씀드렸지만 그 외에도 많은 찬송이 있고, 여러분들도 은혜 받은 찬송이 있을 겁니다. 그 찬송 하나, 495장 찬송을 부르면서, 거기 그 찬송을 부르면서 받았던 은혜를 간증하자면 몇날 며칠을 얘기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오늘 시인도 하나님의 구원을 많이 경험하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합니다. 시인도 은혜 받은 찬양이 많이 있었습니다. 원수가 시인을 공격해요. 대적이 시인을 넘어뜨리려고 잡으려고, 죽이려고 쫓아오는, 그래서 도망 다니는 이야기가 1절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셔서 원수의 손에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기쁨을 얻고, 그래서 원수가 기쁨이 없어져버리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병에 걸렸습니다. 질병 가운데에서 고생고생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외치니까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질병 중에 구원받은 그런 신앙적인 체험입니다. 심지어는 죽음의 문턱에 처하는 극단적인 위험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병에서 치유하여주시고 죽음 가운데에서 구원하신 그런 간증과 찬양이 오늘 이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그 사실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높일 이유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소리 높여 부를 애창하는 찬송가가 시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다 편안해서 걱정, 근심이 없었지만, 지난날을 전부 회상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셨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이렇게 고난의 때를 회상해 보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이지요. 그게 애창하는 찬송 아닙니까? 은혜 받은 찬송이고 애창하는 찬송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편안하게 살아가면서 지난날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면서 애창하는 찬송을 부른다는 것, 참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그런데 간사하고 못 된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환경이 평안하고 아무 걱정이 없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감사하고 더 많이 찬송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하나님을 더 잘 따라야함이 마땅한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편안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 잘 잊어버리고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면서 교만해지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된 것이지요. 방자하게 된 것입니다. 6절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다. 편안하고 아무 어려움이 없이 되니까 교만해져서 ‘이제는 안심이다. 탄탄하다. 흔들릴 염려 없다. 하나님이 안 계셔도 같이 동행을 하지 않아도 나 혼자 충분히 다 할 수 있다.’ 라고 자기 삶에 다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만홀히 여기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형통하게 된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배은망덕하고 배반하게 된 것이지요. 다윗이 어려운 삶을 많이 겪어가다가 나라가 전부 편안해졌어요. 그렇게되니까 교만하고 방자해졌습니다. 자기 부하들은 전부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데 자기는 부하의 아내나 넘보는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전부 편안하고 안정되고 견고하고 탄탄해졌는데 그럴 때에 다윗에게 교만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 나라의 군대가 몇 명이나 되나, 내 나라의 국력이 얼마나 될까?’ 그런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전국에 인구조사를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편안해졌을 때에 오히려 교만해지고 방자해지는 삶을 살게 된 것이지요. 너무나 가난해서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내와 함께 땀흘려 고생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밥술이나 먹게되고 편안해 지게 되면, 함께 고생한 조강지처를 내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아 바람 피우는 어리석은 남자와 같은 것이지요. 배반하는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어려울 때에 눈보라 치는 산에서 하나님 앞에 눈물 뿌려 기도하고,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엎드려서 그 마루바닥을 두들기면서 기도했는데 그러나 편안해지고 어려움이 없어지니까, 무슨 돈을 번다고, 취미생활 한다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하는 그런 어리석은 신앙생활을 하게됩니다. 교만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그때부터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7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주의 얼굴을 가리우심에 내가 근심하였나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에는 산 위에 견고하고 탄탄하게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우시니까, 그 얼굴을 돌리실 때에는 그만 근심거리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다윗이 교만하고 방자해서 간음하게 되니까, 그 아들 압살롬이 일어나서 반역하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등 다윗은 말할 수 없는 곤욕을 겪었습니다. 다윗이 교만하고 방자해서 내 군인이 얼마가 되는가, 내나라 국력이 얼마나 되는가 인구조사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치실 때에, 온역이라는 질병으로 치셔서 많은 그의 백성들이 죽는 그런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면, 다 무너져 버리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고 울타리를 쳐주셨는데, 하나님을 떠나가게 되니까, 교만해서 하나님을 배반하니까 하나님이 그 은혜 주시던 것, 울타리를 거두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거둬버리면 그 때부터 는 들판에, 삭풍이 몰아지는 들판에 혼자 서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 보호가 없이 돌보는 것이 없이 혼자 내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지까지 쌓아왔던 것,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가리우시면, 그때부터 어려움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죽음에서 살려 주십시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합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시면, 내가 힘써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기도 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제발 그 얼굴을 가리우신 것을 중지하시고, 얼굴을 내게로 돌이켜 주시옵소서. 내가 부르짖는 것을 들어 주시옵소서.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 없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것은 교만입니다. 방자한 것이지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고난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셔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교만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 얼굴을 돌이키실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회개하며 기도하고, 서원하며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를 베풀어주시니까 다윗의 일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신앙체험을 하게 되고, 은혜 받은 찬송, 애창하는 찬송이 또 하나 추가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애창하는 찬송을 하나 추가한 것이 바로 5절입니다. 여러분 5절 한 번 보십시오. 우리 5절 말씀을 한꺼번에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 할 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찬송을 부르는데 그 다윗의 부르는 찬송의 1절이 ‘그 노염은 잠간이고 은총은 평생’이라는 것이다. 2절은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 할 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입니다. 하나님의 노염은 잠간이고 은총은 평생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방자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노여워하고 진노하셨는데 그러나 그 노여움은 잠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셔서 내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것은 잠깐 지나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 일시적, 한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평생토록 오래 길게 계속되리라는 고백이지요. ‘노여움은 잠간이고 은총은 평생이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노염과 은총을 같은 저울에 달고 저울질해보면, 하나님의 은총이 훨씬 무겁습니다. 노여움은 가볍구요. 은총이 무거워요.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사랑과 은총이 훨씬 크고 많은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교만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잠깐 진노하셨다가도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도 진노를 돌이켜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기보다,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본질적으로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노염은 잠간이고 은총은 평생이라고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부르는 찬송 2절은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어둡지 않습니까? 두렵습니다. 어려움과 고통이 산적해 있는 것이 밤입니다. 밤에 고통이 있고 두려움이 있을 때에 밤이 얼마나 길어 보입니까? 한없이 길어 보이지요. 그 어두움과 고통은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밤이 길어도 아무리 고통이 계속되어도 아침은 오는 법입니다.

밤은 끝나게 되어 있구요, 아침은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있습니다. 아침의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그렇게도 길고, 지루하고, 고통스럽던 어두움은 물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게 되면 그 밤의 고통과 슬픔이 물러가고 하나님 은혜의 기쁨과 즐거움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오고 아침에 빛이 비춰오면, 슬픔이 변해서 춤이 되고, 슬픔의 베옷을 벗고 기쁨의 띠를 입게되는 극적인 변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11절 말씀입니다. 이 11절 말씀이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고 베옷이 변하여 기쁨의 띠를 띄우게 되는 것이지요.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있을 때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서만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이 땅에서도 체험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영원토록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이 잠간이라고 하면, 고난 중에 계신 분들께는 거부반응이 일어날 지 모릅니다. “무슨 소립니까? 너무 길고 지루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겠지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오늘 성경말씀같이 고난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입니다.

일시적인 시간, 제한된 시간이 지나가면 평생토록 하나님의 은총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 영원함과 평생의 길이에 비하면, 우리가 겪는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우리가 535장 찬송을 부를 겁니다.

535장 찬송 1절을 보면,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니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4절은 ‘고통한 후에 기쁨있고 십자가 후에 면류관과 숨이 진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는 진리로다.’ 노여움은 잠간이요, 은혜 받는 것은 평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가운데에 캄캄한 밤을 지나는 분들 계십니까? 길고 지루한 고난의 때를 지나는 분이 계십니까? 분명한 사실은, 그것은 잠깐입니다. 노여움은 잠간이고 은총은 평생이지요. 하나님의 은총이 평생토록, 하나님 나라에서까지 영원토록 계속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은혜를 받았어요. 교만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처지였는데, 하나님께 회개하고 도우심을 간구하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노염은 잠간이었고, 평생토록 영원히 계속되는 은총을 받게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고,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잠잠할 수가 없지요. 잠잠히 있지 못하고 입술을 벌려서 소리를 높여서 하나님 앞에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앉으면, 그 은혜가 계속해서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갈 때에, 지금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다 그 때 그 은혜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쉴 사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은 4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찬송만 하면, 가슴이 벅차 오르고 눈물이 솟아 난다로 합니다. 죄 가운데 있는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 사랑, 그 아들을 보내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그 은혜가 너무 놀랍고 감동적이어서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번번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입니다. 애창하는 찬송이라는 것은 그 안에 자기가 받은 은혜가 완전히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내 간증거리가 완전히 다 들어가 있는 것이 애창하는 찬송이지요.

여러분이 애창하는 찬송은 몇 장입니까? 어떤 찬송을 좋아하십니까? 어떤 찬송이 가장 은혜를 많이 받습니까? 참 재미난 것은 애창하는 찬송은 고난이 있을 때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때를 살아갑니까? 그런데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여러분이 감사의 달에 애창하는 찬송을 하나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노염은 잠깐이고 은총은 평생임을 믿으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쁨을 주시고 은총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는 그 찬송, 애창하는 찬송이 이 감사의 달에 여러분의 입에서 터져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감사 (신 16:13-17)

온전한 감사 (신 16:13-17)

본문은 추수감사절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의미가 갈수록 퇴색(退色)되어져 가고, 형식도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잊혀진 절기를 다시 찾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의미 있는 절기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잊어진 계명이 “감사하라”는 계명이라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하라”는 계명은 적극적인 계명으로서 감사해도 되고 감사안해도 되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감사하라”고 명령하였기에 감사하는 성도는 은혜가 없는 분입니다. 성숙한 성도님들은 감사할 수밖에 없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음속의 기억입니다. 영어의 “생각한다”(think)와 “감사한다”(thank)라는 말은 본래 같은 어간에서 나온 것은 것으로서, 깊이 생각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생각이 욕심 품으면 기울며 불만과 다툼이 생깁니다. 생각이 하나님 쪽으로 기울면 감사와 만족이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① 회고하고 ② 살펴보고 ③ 비교하고 ④ 쳐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감사는 인간의 언어 중에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고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① 감사를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 ② 감사를 하되 옅은 감사 곧 형식적인 감사를 하는 사람 ③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 사람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감사(感謝)는 모든 절기의 핵심이요, 모든 제사의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 감사가 없는 찬양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에게 점차 잊혀져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문 14절,15절에서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온전한 감사는 온 성도님들이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여기에서 본문 14절에서 ?연락하라?는 말은 기뻐하라 혹은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초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초막절?이라고 함은 칠일동안 광야에 가서 우리 조상들을 광야에서 먹이시고 도와주시고 입히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수장절?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또한 첫 이삭을 거둠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절기의 축제에 참여하여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15절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추수의 절기는 언네나 누구에게나 기쁜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만 기뻐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시고 즐겁게 하시려고 감사절을 주신 것입니다.

일년 내내 밭에 나가 일한 농부에게 있어서 추수라는 것이 얼마나 기쁜 입니까?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햇볕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좋은 날씨를 주셔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벼를 재배하여 쌀을 추수하기까지는 여든여덟번의 손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쌀을 ?팔십팔?이란 뜻으로 미(米)자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쌀을 재배하는 농부의 손이 적지 않게 수고하지만 하나님의 손은 농부이상으로 추수의 기쁨을 위하여 수고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해에는 농사가 부진하여 인간의 감정으로 감사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신학부의 교수인 하비 콕스 박사는 세 가지의 유형의 교회에 대하여 논하였습니다. 교회는 ①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기의 교회와 ② 감사와 축제의 시편의 교회, ③ 그리고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계시록 교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출애굽기의 교회, 계시록의 교회의 모습은 가지고 있으면서 왠지 시편의 교회 모습이 결여된 듯 합니다. 그는 개신교의 예배 요소 가운데 축제성이 상실된 다음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을 다 수용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배와 신앙생활이 기쁘고 즐거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감사와 축제의 요소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축제로 나타납니다. 추수의 감사는 축제요,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인 절기인 것입니다.

인도의 한 어머니가 감사절의 감사의 예물을 들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어떤 뜻에서 예물을 드렸는지에 대하여 물었더니, 그 어머니는 아들이 아파서 열심히 기도한 대가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아들이 다 나왔냐고 물었 보았더니 오히려 아들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이 죽었지만 이제는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으니 감사해서 감사 예물을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감사의 조건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의 고백과 같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논밭의 식물,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송아지 등에 감사의 근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감사의 근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가 될 뿐만 아니라 상황에 관계없이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살전 5:18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4:4에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되, 감사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무엇 보다도 추수감사절 예배를 오늘 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와 신앙생활에 있어서 시편의 교회처럼 축제의 분위기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절은 소외된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14절)

본문 14절에서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추수감사절은 소외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감사절을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즐기는 절기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절기도 혼자 즐기는 절기는 없습니다. 우리의 식솔뿐만 아니라 나그네와 소외된 우리의 이웃까지도 우리와 함께 즐거워해야 할 절기의 동참자들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이웃과 함께 나눌 때에 진정한 기쁨이 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의 입장에서 보아도, 농사를 지을 때는 내가 짓지만 수확을 할 때는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농사는 짓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위하여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추수를 할 때에 곡물을 다 베지 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라고 하십니다(레19:9-10)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얻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옛날 농사를 지을 때 같으면 남겨 놓아야 할 것들이지만 지금은 우리가 얻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주어야 합니다. 수고는 내가 하지만 모두가 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 내 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확에는 권리와 더불어 의무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확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망각(妄覺)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수확한 것도 함께 나누어야 하며 추수의 기쁨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자신의 재산을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아래 갖다 놓았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었으며, 내 것을 가지고 함께 즐기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경건을 지나치게 정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참된 경건이란 “고와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약1:27)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는 것은 참된 경건이며,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모습입니다. 감사의 절기에 우리와 함께 감사할 대상을 찾아 감사를 나누는 것은 감사절의 중요한 의미인 것입니다.

추수의 절기를 맞이하며 우리의 농부의 수고도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농부들의 수고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라면 공산품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편의 시설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제일 먹기 싫은 음식이 김치라고 합니다. 피자나 햄버거가 자기들의 음식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쌀과 김치를 먹어야 건강합니다. 어떤 학자는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나라의 풍토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 나라 토속의 음식을 적어도 한 주간에 세 번이상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 나라의 음식이 그 나라에 사는 사람에게는 좋은 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간에 추수감사절은 수확의 기쁨도 함께 나누고, 수확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부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도시 사람들은 농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대로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17절)

본문 17절에서 “각 사람이 네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모든 남자는 일년에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여호와께 반드시 나오되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남자는 20세가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절기를 지킵니다. 그들이 성전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예물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불경건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것은 옛날 성전에 올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예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 힘대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드?라는 말로 ?능력껏, 재력껏?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감사절의 예물은 하나님께 드리되 능력껏 드리는 것입니다. 이 교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교훈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고후 8:12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때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정성껏 드려야 하며, 없는 것을 억지로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드릴 수 있는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은 잘못이며, 드릴 수 없는 것을 지나치게 드리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연보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색함이나 억지도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추수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여 우리가 즐거워 하는 만큼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시고 영광이 됩니다.

옛날 상국(上國)에 사신이 갈 때에는 반드시 빈손으로 가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며, 예물을 따라 상국의 기분을 좋게도 하고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 빈손으로 나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예물의 질을 보지만 하나님은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의 감사의 마음과 정성을 보십니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귀한 예물입니다. 아무리 비싼 것을 드려도 정성과 감사가 담겨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 기쁜 예물이 되지 못할 것이고, 아무리 값싼 예물이라고 할지라도 정성과 감사가 담겨져 있으면 하나님께 기쁜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서 ?반드시?,?힘껏? 예물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크면 드리는 것도 클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이 적으면 드리는 것도 적을 것입니다. 우리는 1:9의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10명의 문둥병자는 주님께 다함께 고침을 받았지만 주님께 사례하는 문둥병자는 사마리아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러기 이 병자는 육체는 물론이고 영혼까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이 없어서 일을 못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편에서의 필요가 아니라 우리편에서의 필요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지 않아도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므로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부요 하게 되고, 우리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영국의 제상이었던 크롬웰은 다음과 같은 식사기도를 남겼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음식이 있어도 식욕이 없고, 어떤 이는 식욕이 있어도 음식이 없는데,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기에 감사 합니다” 감사의 조건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롬웰이 우리가 매일 세 번씩 하는 식탁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은 것과 같이 가장 가까운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좋은 환경에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도저히 감사할 수 악조건 가운데서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전 5:18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지내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떠난 영국에서부터 미국의 뉴잉글랜드 록키 연안에 닿을 때까지의 오랜 여행 동안 혹독한 고통을 겪었다. 뉴암스테르담에서 승선한 두척 중 하나인 ?스피드웰?호는 해안을 멀리 떠나기도 전에 부서졌다. 그들은 배를 다시 돌려야만 했고, 여전히 항해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메이플라워호로 몰려들어 그 배는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사나운 폭풍을 만났다. 항해 내내 그들은 갑판 밑에서 지내야 했다. 그들은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했다. 위생 상태와 통풍 상태도 좋지 않았다. 악취가 났다. 새로운 땅에서 처음 추수를 한 후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냈을 때는 그들의 거의 절반이 죽었다.

우리는 그들이 견디어 냈던 고난을 모두 인정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부터 그 춥고 돌 많은 뉴잉글랜드에 이르기까지, 플리머스에서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내기까지, 시편이 그들의 기도하는 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다. 그들이 고향에서 배를 타고 떠나올 때, 그들은 그 앞에 있는 어떤 일이 있든지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했다. 배 밑창에서 그 항해를 무사히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그들은 찬양과 감사의 노래를 불렸다. 그들은 위험과 고통의 와중에서도 그들의 영은 감사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조차도 하나님을 감사했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리고 이것과 관련하여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수확할 수 없으며,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없으며, 수확의 기쁨이 없기에 감사할 수도 없다?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받으시는 것을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수확할 수 없으며, 결코 감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추수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여 진정한 기쁨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 드릴뿐만 아니라, 이웃과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널리 있는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고, 일년 중에 추수 감사 주일을 하루나 추수의 계절뿐 아니라, 모든 계절이 감사의 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2020 추수감사절 설교-김주헌 목사

김주헌 목사 (북교동교회)

어느 날 어떤 임금님이 식사하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음식이 너무 맛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이 사람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솜씨가 좋은가?” 주방장이 대답합니다.

“전하 그것은 제가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고, 오늘 가게 주인이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이 가게 주인을 불러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좋은 물건을 팔았느냐고” 그러자 가게 주인이 말합니다.

“전하, 농사를 지은 것을 가져다가 파는 것이지 제 공로가 아닙니다.” 그래서 또 임금님이 농부를 데려다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농사를 잘 지었느냐고.” 그러자 농부가 말합니다. “저는 농사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햇빛 주시고, 단비 주시고 만 가지 은혜를 주셔서 거둔 것입니다. 저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감사’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항상 일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시고 건강하게 하시고 오가는 길, 사고 없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 이것이 지혜요 믿음입니다. 또 가장 훌륭한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감사할 것을 신·구약 성경에서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왜 생겼습니까? 감사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감사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감사의 보자기에 각종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년에 3차례씩 절기를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잊을 만하면 저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절기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앞으로 뭐가 잘 되려고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나를 구속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여기 나온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쉬운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감사할 일이든 불평할 일이든 기쁜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무슨 일이든지 무조건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좋으며 자신에게도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은 무엇입니까? 바로 평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에 평강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메튜 헨리 목사가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매치기는 지갑을 훔쳐 갔지만 내 생명은 훔쳐 가지 못한다. 더구나 내가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당했기에 더욱 감사하다”라고 일기장에 기록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음악가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노년이 되어 시력을 잃었을 때의 일화입니다.

그가 눈 수술을 받고 드디어 회복되던 날 눈에서 붕대를 풀었을 때, 자녀들이 “아버지, 뭔가 보이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바흐는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다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앞에 가족들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바흐는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가 작곡한 찬송가 145장 3절을 보면, “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없이 고마워 보잘것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자에게는 평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의 감사는 다 있어서, 좋아서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의 감사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죽을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도 뒤따라오는, 추적하는 죄악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시고, 사망과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그 은혜가 우리 성도들의 감사의 샘이요, 뿌리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없어도 이 하나 때문에 감사하고, 어디 가서도 이 하나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감사의 삶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아테스’라는 분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시던 하나님께 감사하면 마귀가 발을 붙일 자리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마귀는 늘 불만을 느끼는 그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어와서 마음이 무너지고, 마음이 무너지니 몸이 무너지고, 몸이 무너지니까 사업도, 가정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찾아가지만 감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마귀가 넘어뜨릴 능력이 없습니다.

겸손함이 있습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일수록 작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질수록 감사한 일들이 보여지고 감사가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편과 풍족한 삶을 누리면서도 늘 불평하며 사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병들어 누워 지내는 남편과 살면서도 그 남편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여 오래 살아달라고 기도하는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겸손과 교만입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면 감사의 마음이 없어집니다. 대신에 원망과 불평이 많아집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몸이 어떻게 움직여지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의 심장은 하루에 자그마치 10만 3,689번을 뜁니다. 몸속의 혈액은 놀랍게도 하루에 1억 6,800만 마일을 달립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루에 23,040번 숨을 쉽니다.

우리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심장은 뛰어주고 폐가 호흡을 해주기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 생명을 지으시고 유지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감사의 수준으로 그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빙점」의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반평생을 폐결핵, 척추카리에스, 습진, 파킨슨병, 암 등 갖가지 질병을 앓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위대한 작품을 발표해냈습니다.

그중에 ‘아프지 않으면’이란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 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보이지 못할 거룩한 얼굴이 있다. 아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없다.”

그녀에게 이런 아픔이 있었기에 기도가 있고, 노래가 있고, 신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픔 속에서 영광스러운 작품들이 나왔고, 그의 작품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좋은 언어는 감사라고 합니다. 열 살까지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는 7,000개 정도이고 성인이 되면 2만5,000개의 단어를 우리가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아무리 많은 단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감사하다”라는 말 한마디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최고의 웅변가가 되고 명연설가가 되고 학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감사’라는 말을 안 하면 그 심령은 죽은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제부터 남은 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주일설교 : 에베소서 5:18-21,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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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은 에베소서 5:18-21, 신약성경 315면에 있습니다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하나님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추수감사주일)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만큼 습관이라는 것은 들이기가 어렵지만, 바꾸기도 어렵습니다.

삼국 시대의 맹장 중에 한 사람이었던 김유신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화랑이었던 김유신은, 어느날 술집에서 천관이라는 기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루로 빠지지 않고 그 술집에 가서 그 기생 천관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잔칫집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던 김유신이 말 위에서 꾸벅 졸다 보니, 말이 혼자서 평소에 가던 습관대로 천관의 술집 앞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나쁜 습관이든 좋은 습관이든 우리 몸과 마음에 습관 들이기가 어렵고 또 습관을 바꾸기도 어렵습니다.

감사의 습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평만 하던 인생이 한 순간에 감사하는 인생으로 바뀌기가 어렵습니다. 작은 일에도 불평하고 원망하던 사람이 어떻게 한 순간에 바뀌겠습니까? 사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게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 입과 마음에는 불평과 원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 대기업의 임원이 점심 약속이 있어서 약속된 레스토랑에 들어가다가, 입구에서 쉬고 있던 서빙 직원의 혼잣말을 들었습니다.

그 직원은 “5만원만 있다면 참 좋을텐데…”

임원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음식을 날라다 주었던 직원의 혼잣말이 생각이 나서, 팁으로 5만원을 주었습니다.

식사 후, 레스토랑을 나오다가 입구에서 쉬고 있던 그 직원의 혼잣말을 또다시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에이, 5만원이 아니라 10만원이 있었어야 한다고 했어야 했는데…”

이 직원에게는 5만원이든 10만원이든 자신의 돈이 아니었기에, 감사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불평과 원망이 습관이 된 이 사람에게는, 10만원이 아니라 100만원이 생겨도 불평과 원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의 연습을 해야 하며 감사의 습관을 우리 인생 속에 만들어야만 합니다.

한 해를 지켜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

본문에서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는 옛사람의 행실을 하나씩 버리고 계속해서 새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는 술 취함으로 인해 방탕한 생활을 하며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의 습관을 바꾸지 않던 그들에게, 바울은 이제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합니다. 힘들지만 새로운 습관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다면, 더이상 불평과 원망의 습관이 아닌, 감사의 습관을 만들어 가라는 것입니다.

감사도 습관입니다. 입에서 주여가 자동으로 나오듯, 감사도 입에서 자동으로 나오도록 습관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20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어찌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병에 걸렸는데, 사고를 당했는데, 힘든 일을 겪는데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20절의 이 말은 감사할 수 없는 순간에도 자동적으로 감사가 나오도록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가라는 말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한 해 동안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감사가 많았는지 원망이 많았는지 우리 스스로를 살펴 봅시다. 그리고 이제는 원망이 아닌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옆구리 쿡 찌르면, 감사가 자동으로 튀어나오도록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감사 습관을 만들 수 있을까요?

1.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연습을 합시다.

원망이 나올 것 같은 순간에, 감사가 나오도록 정기적으로 감사의 제목을 찾아 보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 뜨자마자 감사의 제목을 1개 찾습니다. 그리고 점심 먹으면서 오전 중에 있었던 일들 중에 감사의 제목을 또 1개 찾아 봅니다. 저녁에 잠자리 들 때, 하루를 마무리하며 어떤 부분이 감사했는지 돌아보고 감사해 봅시다.

비판이나 원망보다도 감사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도록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혹은 장소를 정해놓고 감사해 봅시다.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볼 때,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좋은 장면, 아름다운 가을의 단풍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정말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내 인생에서 이처럼 좋은 사람을 알고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서 정기적으로 감사하다고 입으로 표현할 때, 우리의 뇌와 마음은 감사가 습관이 될 것입니다. 감사의 습관이 만들어 지면, 나쁜 일이 있어도 자연스럽게 감사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제목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나쁜 일을 바꾸어 춤과 기쁨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변의 분들과 감사의 인사를 표현하는 연습을 해 봅시다.

이렇게 좋은 날, 귀한 당신과 함께 예배 드릴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2. 모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 합시다.

바울은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5:18에서 오늘 본문처럼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왜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감사해야만 할까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내 뜻대로 잘 이루어질 때나 이루어지지 않을 때나 모든 조건 속에서 감사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전체 그림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전체 그림, 2020년도의 전체 그림, 오늘 하루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상황 속에서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올해 시작되었습니까? 아직 정리되지 않는 상태로 연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것일까요? 왜 바이러스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죽어 나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바이러스와 관련된 이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 알 수도 없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었다고 하는 보도가 있습니다. 약 90% 정도의 완치율을 보인다고 합니다. 나머지 10%는 백신을 맞아도 바이러스에 확진되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상황들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선하고 좋은 것만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나빠 보이는 상황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바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지금 현재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려가실 큰 그림을 보고 하나님을 확실하게 신뢰함으로, 감사합시다. 감사의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3.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감사를 표현하는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려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작은 감사의 표현이지만, 그것이 우리와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러합니다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 특히 가족들에게 감사하다고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 쑥쓰러워서 그런지 감사하다고 말을 잘 못합니다. 마음은 있는데 감사를 표현하지 못할 때도 있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감사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감사를 표현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 가족들이고 매일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들이며 이웃과 우리 교회 성도들입니다.

저도 감사의 표현을 가족들에게 더 많이 하고,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가기로 결단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내 주변에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먼저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감사가 넘칠 때,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힘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날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좋은 가족들, 좋은 성도들, 좋은 동료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감사 습관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자, 하나님을 신뢰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골리앗이 너무 커서 빗나갈 수가 없다!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사무엘상 17장에는,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군대에는 골리앗이라는 장군이 있었고, 그는 덩치가 어마어마하였습니다.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삼상 17:4에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으로 본다면 약 283CM 정도가 됩니다. 이스라엘 군대에서는 아무도 골리앗과 맞서 싸우지 못할 정도로 기가 푹 죽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에게, 네가 물리치기에는 골리앗이 너무 크다, 얘야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내 물맷돌이 빗나가기에는 골리앗이 너무 크기 때문이 어떻게 던져도 맞을 것에요라고 대답합니다.

감사의 습관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생깁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기점으로 하여, 감사 습관을 만들어 가면 어떻겠습니까?

하루에 시간을 정해 두고 정기적으로 혹은 정해 둔 장소에 도착하면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큰 그림을 기대하며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 특히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부터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 갑시다.

감사의 습관을 만들어 갈 때, 고난의 순간에도 우리는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의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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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 설교를 위한 좋은 예화 소개

기독일보

트윗하기 오는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이다.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설교자들의 고민은 깊어진다. ‘이번 감사절 설교는 어떤 본문을 가지고 어떤 감동적인 예화로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인가?’ 무엇보다 한 교회에서 수년이나 수십 년 설교하는 이들은 새로운 예화를 찾느라 시름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행여 청중들이 익히 알고 있는 해묵은 예화를 사용했다가는 감동이 희석될 수 있으므로 뭔가 기막힌 예화가 없을까 애쓰기 마련이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설교 준비로 고심하는 설교자들을 위해 새롭고도 감동적인 예화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이 예화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이것을 접하는 성도들에게는 틀림없이 처음 들려지는 스토리일 것이다. 예화 하나가 설교를 완전 살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예화는 설교의 부록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설교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예화의 중요성을 오는 주일 다같이 맛보길 바란다. [1] 1620년 9월 6일,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동부를 향하여 출발했다는 얘기 다 알고 계시죠?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라는 배를 타고 남미로 간 청교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시는지요? 많은 분들이 메이플라워호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만 매스터호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잘 모르고 계실 겁니다. [2] 그들은 모두 신앙인으로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사람들이었고 또한 신앙의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가던 ‘메이플라워호’와 남미로 떠나가던 매스터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동기의 차이였습니다. 물론 남미로 간 사람들에게도 신앙적인 동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3] 그러나 그들이 남미로 가려고 했던 가장 큰 동기는 황금과 같은 물질을 찾아서였습니다.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겠다는 동기 때문에 매스터호를 탔던 것이지요. 반면에 북미로 갔던 사람들은 금과 같은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맘껏 섬기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4] 그들은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메이플라워호”를 탔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교도들의 핍박으로 인해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자,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마음껏 기도를 하고 마음껏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것입니다. [5]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두 그룹이 각기 다른 동기로 각기 다른 지역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이들의 결과를 아십니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을 찾아 북미로 찾아온 그들과 그 후예들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찾아서 그 곳에 와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예배당부터 먼저 지었습니다. [6]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 둘 죽어감에도 기어코 예배당을 완공했으며 1년 동안 농사를 하고 그 추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추수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북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물질의 풍성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뿌린 감사와 희생의 씨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은 오늘의 최대강국인 미국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7] 현재 미국은 정치, 경제, 사화, 문화, 스포츠, 영화,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매스터호를 타고 황금을 좇아 남미로 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물질적인 동기 때문에 남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도 잊어버리고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8] 지금 남미 지역의 나라들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의 나라들은 인플레이션과 반목되는 경제 불안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다 그 후예들 아닙니까? 그래서 한 번은 남미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9]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God)을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찾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황금(Gold)도 선물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황금을 찾아서 이 땅으로 건너와서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조상들을 둔 당신들이 한없이 부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10] 결심의 동기의 차이가 빚은 결과는 이처럼 충격적인 대조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b)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기, 하나님과 명예, 이중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바로 그분을 말입니다. [11] 언제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만 선택함으로 감사의 조건들이 넘쳐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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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하박국 3:17-19a, 골로새서 2:1-17, 누가복음 17:11-19 –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올해는 코로나 대유행 속에 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상실, 우울, 슬픔, 고독, 고통의 어두운 색깔로 채색된 세상입니다. 이때에도 우리는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이때에도 설교자는 “범사에 감사하라” 설교할 수 있을까요?

올해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신대륙에 건너온 지 4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들의 항해는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코로나 상황보다 훨씬 더 긴박했습니다. 강풍과 눈보라 치는 혹독한 추위, 질병과 식량 부족, 들짐승의 위협, 거할 집 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절반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청교도들은 첫 추수를 하고 난 다음에 감사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올 때부터 감사가 넘쳤습니다. 메이플라워 항해일지에 따르면 그들은 온갖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플리머스 해변에 도착하던 1620년 12월 26일은 극심한 추위로 얼어붙은 날이었지만 그들은 나무와 바위를 끌어안고 눈물과 환희에 뒤섞인 채 오늘 우리가 교독한 시편 100편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습니다. 117일간의 긴 항해, 굶주림과 질병의 위협, 동료들의 죽음 가운데서도 그들은 ‘감사의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청교도들의 ‘감사의 신앙’의 바탕이 된 구약 하박국 선지자의 이 고백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감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성서의 감사는 단순히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가 아닙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시편 118:28). 시편 118편의 기자에게는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 자체가 감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편의 기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자고 노래합니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시편 97:12 / 시편 44:8, 106:47, 30:4). 또 우리가 이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영원히 주께 감사”(시편 79:13)하자고 말합니다. 이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시편 118:21) 감사하자고 노래합니다. 시편의 기자들이 여호와께 감사하는 이유는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시편 100:5, 106:1, 107:1, 118:1, 118:29). 유명한 시편 136편에는 무려 26번이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후렴구가 나옵니다.

구약성서에는 3가지의 화목제(和睦祭, peace offering, 히브리어 제바흐)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쁨과 행복의 제사가 화목제인데, 첫째는 감사제(感謝祭, thanks offering)로 이미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둘째는 서원제(誓願祭, votive offering)로 앞으로 주실 것을 믿고 미리 드리는 감사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낙헌제(樂獻祭, freewill offering, 자원제)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감사입니다. 낙헌제는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입니다. 처음엔 조건을 바꿔 달라고 기도하지만, 신앙이 깊어지면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가 일어납니다. 시편 54편 기자는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편 54:6)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에 감사하는 이 감사가 성서의 감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감사의 신앙으로 고난을 이겼습니다. 청교도들도 이 감사의 신앙으로 고난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8)라는 하박국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감사송’이라는 복음성가에 나타난 감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감사, 그래도 감사, 그러나 감사, 그러므로 감사, 그렇지만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러니까 감사, 아주 그냥 감사, 그리 하실지라도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이래도 저래도 감사, 매일매일 감사, 항상 감사, 쉬지 말고 감사, 범사에 감사.”

이번 학기에 가르치고 있는 한 수업에서 어느 학생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에 제출한 에세이의 한 토막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때 감사 일기를 쓰는 기회가 있어서 한 달 동안 매일 감사한 것 3가지를 일기장에 쓴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숙제로 생각하고 날마다 특별하게 좋았던 일들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적곤 했다. 내게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가 왔다거나, 큰 사고가 날 뻔했는데 다행히 무사하고 다치지 않고 건강할 수 있었다거나, 큰 선물을 받았다거나… 이 정도는 되어야 감사 일기에 쓸 만하고, 감사하다고 할 만하다고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런 거창한 감사의 제목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나 하고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오늘 아침에 내가 눈을 뜬 것부터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사실 그 전날 잠이 들어 그대로 죽으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 새로운 날을 맞이했다는 것부터 내게 감사 제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감사할 것이 넘친다.”

오늘 우리 시대는 이러한 감사의 마음, 감사의 신앙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도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로마서 1:21)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한 시인도 추수감사절에 이런 마음의 흉년을 읊은 적이 있습니다. “가을 들판 노적가리 짚단에 파묻혀도 / 허기는 사철 때를 맞춰 와서 / 유리하는 탕자로 당신을 떠납니다. / 굶주리며 당신을 은금과 바꿔 / 해마다 흉년 / 어둡고 긴 겨울…”(이향아, <일용할 양식>)

누가복음 17장에는 한센병 환자 열 명이 예수께 고침을 받았으나 그중 오직 한 명만 예수께 돌아와 감사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으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 17:17)고 한탄하시며 돌아와 감사한 그 한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누가 17:19)고 선포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다시 말하면 이 한 사람에게만 완전한 치료가 이루어졌습니다.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확약이 주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네 감사가 너를 구원하였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곧 믿음이요, 그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감사’와 ‘믿음’과 ‘구원’은 하나입니다.

사실 감사는 깊은 종교적 행위입니다. 사람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 자신이 이루었다 여기는 것에는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살면서 감사라는 말에 인색한 사람들을 종종 보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들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은 그것들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주어진’ 것들이라는 깨달음에서 감사가 우러나옵니다. 시편 50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편 50:14, 23). 인간은 벌거숭이로 세상에 왔다가 벌거숭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자신을 창조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살면서 누리는 것은 모두 ‘주어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의 일부를 신에게 바칩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의 제사를 통해 겸허히 자신의 유한함을, 자신의 일시성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그 본질이 종교적입니다.

엣 앵글로 색슨 영어에서 “thankful”(감사가 넘치다)이라는 말은 “thinkful”(생각이 깊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깊이 생각하면 감사에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이 생명이, 오늘 이 하루가 당연합니까? 여기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왔습니까? 내가 누리는 것들이 다 나의 성취입니까? 아마도 인간의 품위를 가장 떨어뜨리는 것은 감사를 모르는 태도일 것입니다. 동물도 고마움을 알고 표현합니다.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그 사마리아인 한센병 환자의 이야기가 말해주는 진리는 감사가 우리를 구원하며 인간을 더 높고 품위 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고침을 받고 그냥 제 길로 간 그 아홉 중 하나입니까? 아니면 돌아와 감사함으로 구원의 축복까지 받은 그 한 사람입니까?

박인걸의 기도시 <주님 감사합니다>를 읽어봅니다. “한 쌍의 비둘기처럼 / 오래된 둥지에서 아내와 함께 / 오순도순 살아온 날을 감사합니다. // 뒷바라지 힘들어도 / 현관에 뒹구는 자식들 신발을 보면 / 마음으로 기댈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 아침마다 깨어날 때면 / 아직도 내 심장이 뛰고 있고 /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 서로 아껴주는 /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이웃들과 / 언제나 함께 있어 감사합니다. // 햇곡 밥을 지어 / 푸성귀 반찬을 얹어 먹을 때마다 / 풍성한 양식에 감사드립니다. //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 주님의 목숨과 나를 맞바꾸어 /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인 바울은 그래서 입만 열면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한마디로 ‘감사의 신학’입니다. 그는 먼저 기도할 때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4-7). 그는 또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에베소서 5:1-3). 아니 바울은 사람 자체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15-17).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도 감사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을 느낍니다. 감사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할 텐데, 감사가 넘친 바울의 신앙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골로새서 2장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로새서 2:6-7)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주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네 가지 권면이 모두 수동태로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원문을 직역하면 주 안에 ‘뿌리를 박히고,’ ‘세워지고,’ ‘믿음에 굳게 섬을 받아,’ ‘감사함이 넘치게 되게 하라’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더욱 특이한 점은 이 네 가지 중에서 맨 첫 번째 ‘뿌리를 박히다’만이 완료형 시제로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미 ‘뿌리가 박혀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결과로 우리의 믿음이 나무처럼 ‘세워지고,’ ‘굳게 섬을 받고,’ 마치 나무에 꽃과 열매가 열리는 것처럼 ‘감사함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초목의 아름다움에만 감탄하며, 그 풀과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는 뿌리의 고마움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것, 보이지 않지만 나를 나로 있게 한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노동을 우리는 ‘그림자 노동’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와 농부와 노동자들의 노동이 없다면 우리는 여기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매일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헌신과 수고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내 삶의 가지에 맺힌 꽃과 열매에 대한 찬가만이 아니라 그 꽃과 열매를 맺게 한 뿌리에 찬가를 보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만이 아니고, 고마운 사람을 떠올려 보시고 고맙다고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해보십시오.

마지막으로 감사는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린도전서 15:10)이라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하다]”(고린도후서 12:9)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은혜의 신학’입니다. 그렇게 선물처럼 받은 은혜이기에 바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라고 권면합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로마서 12:12-13)고 말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가정에는 양초와 담요 그리고 마른 빵 세 가지가 항상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도움을 요청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양초가 필요했고, 그가 굶주렸을 테니 신속히 마른 빵을 준비했다가 제공해야 했고, 그가 잠을 잘 때 덮을 수 있도록 담요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초기 모든 기독교 가정의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철저히 바울의 은혜의 신학과 감사의 신앙을 나눔과 환대로 실천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신앙의 힘으로 모진 박해 속에서도 서구 문명의 중심 신앙으로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라].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1, 17-19). 나눔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신약성서의 히브리서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브리서 13:15-16).

<가난한 부자>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작가 미상의 글인데, 해외에 거주하는 서광선 목사님의 지인이 보내준 글입니다. “굉장한 부잣집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이 어찌 사는가를 보여주려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시골로 갔다. 둘이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의 농장에서 2~3일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 ‘어때 재미있었니?’ ‘네, 아주 좋았어요.’ ‘그래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알았어?’ ‘네, 아빠!!’ 아버지가 묻기를 ‘그래 무얼 배웠느냐?’ 아들이 대답하기를, ‘우린 개가 한 마리뿐인데, 그 사람들은 네 마리더라고요. 우린 수영장이 마당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끝없는 개울이 쫙 놓여 있더라고요. 우리 정원에는 수입 전등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밤에 별이 총총히 빛을 내더라고요. 우리 패티오(patio)는 앞마당에만 있는데 그 사람들은 지평선처럼 끝이 없더라고요. 우리는 작은 정원에서 사는데 그 사람들은 넓은 들과 함께 있더라고요. 우린 하인이 우리를 도와주는데 그 사람들은 남들을 도와주더라고요. 우린 음식을 사서 먹는데 그 사람들은 직접 길러 먹더라고요. 우리 집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친구들에게 싸여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빠, 고마워,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알게 해주어서…'” 여러분은 가난하십니까, 풍요로우십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태 6:25-34 중에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감사의 신앙’이 위기 극복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상실과 우울과 슬픔과 고독과 고통의 이 코로나 대유행 시대에서도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노래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117일간의 긴 항해, 굶주림과 질병의 위협, 동료들의 죽음 가운데서도 시편 100편을 부른, 400년 전 청교도들의 그 감사의 찬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찬양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십시오. 겸손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그 감사의 예배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과 나누는 감사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그 나눔의 제사가 우리를 구원하고 세상을 치유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잃어버린 그 아홉이 되지 말고 돌아와 감사함으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주님의 축복을 받는 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그 감사의 신앙이 오늘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2020.11.15.)

[추수감사절 주일 설교말씀] 내가 감사해야 할 이유(시편 13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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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 설교 말씀 중에서 내가 감사해야 할 이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많은 일을 겪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원망이 나올 때도 과거를 추억해 보면 감사가 나옵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목: 내가 감사해야 할 이유(시 136;1-9)

시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3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4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지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6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8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요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

11월을 감사의 달로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별 추수감사주일을 추석 있는 주일로 지키는가 하면 11월 첫째 주일, 둘째 주일로 지키며, 한국의 많은 교회가 셋째 주일로 지키고, 미국에서는 넷째 주일로 지킵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로 지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다음 주일 추수감사 주일로 성수하겠습니다.

지난 주일 광고시간에 부탁한 대로 이번 11월 감사의 달에는 노트나 메모지를 준비하여(혹 컴퓨터) 1) 올해 한해동안 가장 힘들고 불평한 일들을 감사의 관점으로 변화하여 기록하며 2) 범사에 감사할 제목들을 나열하며 3) 지금 기도하고 있는 제목들을 미래에 이뤄질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면서 기록해 봅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Be careful for nothing; but in every 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unto God.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nd the peace of God, which passeth all understanding, shall keep your hearts and minds through Christ Jesus.“ (빌 4:6-7) 말씀대로 근심과 염려할 모든 일을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즉 두뇌)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의 생활을 기뻐하십니다. 시편 100편 4-5절에는 감사와 찬송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Enter into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into his courts with praise: be thankful unto him, and bless his name.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For the LORD is good; his mercy is everlasting; and his truth endureth to all generations.” (시 100:4-5)

감사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면서 주일날 예배드리러 와야 하며, 집으로 돌아갈 때도 감사와 찬양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하신 일이니 감사할 뿐입니다. 내 앞길을 주님께서 예비하시고 주님의 목적대로 인도하시니 내가 단련을 받고 연단과 시험중에 있을지라도 훗날 정금같은 승리를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eth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th tried me, I shall come forth as gold.” (욥 23:10)

또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And we know that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to them that love God, to them who are th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롬 8:28)

시작도 주님께서 하셨고 마무리도 주님께서 하시니 우리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Being confident of this very thing, that he which hath begun a good work in you will perform it until the day of Jesus Christ:” (빌 1:6)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For it is God which worketh in you both to will and to do of his good pleasure” (빌 2:13).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And let us not be weary in well doing: for in due season we shall reap, if we faint not.” (갈 6:9)

히브리성경에는 감사할 때나 찬송할 때나 그 이유를 적고 있습니다. 막연한 감사와 찬양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유와 내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히브리어로 ki, 헬라어로 hoti)으로 시작됩니다. 새로 개정된 주기도문에서 마지막 송영에서 호티를 빼버렸는데 다시 복원해야 합니다. 예전에 “대개”라고

우선 이 말은 헬라어<호티,hoti>라는 접속사를 번역한 말이 분명합니다. 헬라어에서 “호티”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그 뜻은 “왜냐하면…때문이다”(because, for)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굳이 이 말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을 한다면 “이는 …때문입니다”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1930년대에 우리말 성경을 처음 번역할 때에는 한문성경을 참조해서 번역을 했습니다. 중국어 번역본에서 초기엔 “호티”를 “大槪”, “大蓋”으로 번역을 했는데, 우리 말 성경에서 이를 참조해서 ‘대개’로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말 번역본의 경우에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서 이 말을 “대개”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이 말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뜻(대체로)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 생략하고 번역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지 찬송가 앞장에 인쇄된 주기도문에는 “대개”라는 말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경우에 예배 시에 찬송가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에 이 말을 넣어서 암송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이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최근의 중국 성경도 이 말이 옳지 않다고 해서 “以”, 또는 “因爲”로 개역을 하여 그 뜻을 바로 잡았습니다.

“대개”라는 말은 원래 “이는…. 때문입니다”라고 번역을 하면 가장 원문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36절을 시작하는 말도 ‘호티’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리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of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그래서 주기도문 송영 부분을 원문에 입각해서 번역하면,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나이다. 아멘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이 됩니다.

이처럼 감사나 찬양이나 송영 앞에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136편은 감사 시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 O give thanks unto the LORD; for he is good: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 (시 136:1) 1절 후렴만 “그분은 선하시며”가 추가되어 있고 2-26절에서 25번의 후렴은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로 되어 있습니다.

시 136:1-4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1절 선하심, 2절 모든 신에 뛰어나심, 3절 모든 주에 뛰어나심, 4절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심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시 136:5-9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5절 지혜로 하늘을 지으심, 6절 땅을 물 위에 펴심, 7절 큰 빛들을 창조하심 8절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심, 9절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심,

시 136:10-20절에서 출애굽의 하나님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10절 애굽의 장자를 치심, 11절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심, 12절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심, 13절 홍해를 가르심, 14절 이스라엘을 홍해 가운데로 통과케 하심, 15절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심, 16절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통과케 하심, 17절 큰 왕들을 치심, 18절 유명한 왕들을 죽이심, 19절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심, 20절 바산 왕 옥을 죽이심,

시 136:21- 가나안 정착을 해 주신 하나님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21절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심, 22절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심, 23절 비천한 데서 기념하심, 24절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심, 25절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심

그리고 결론에 송영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 O give thanks unto the God of heaven: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 (시 136:26)

이 시편은 모든 일을 주권적 섭리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무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하나씩 기억하며 이 후렴으로 찬양을 드립시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요 은혜를 갚을 줄 압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불 테면 불어라 겨울바람아, 눈보라가 섞어치니 사정도 없다마는 인생의 감사치 않는 마음보다 모질지는 않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아가서에서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Awake, O north wind; and come, thou south; blow upon my garden, that the spices thereof may flow out. Let my beloved come into his garden, and eat his pleasant fruits.“ (아 4:16)고 했습니다. 북풍도 감사하고 남풍도 감사하니 예수님 향기가 주님의 동산에 가득 차게 됩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두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학비가 모자라자 두 사람은 돈 벌 궁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짜낸 아이디어가 당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던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인 파데레프스키(Paderewski)를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자는 것이었습니다. 두 학생의 제의를 받은 매니저는 출연료로 2천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두 학생은 열심을 다해 음악회를 준비했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음악회 총 수입이 1600달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1600달러와 모자라는 400 달러는 앞으로 갚겠다는 증서를 만들어 파데레프스키에게 갔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세계적인 음악가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400불 차용증서는 찢어 버리고 1600불을 다시 돌려주면서 “수고들 많았소. 이 돈으로 경비를 갚고, 그리고도 돈이 남거든 둘이 10% 나눠 갖고, 그러고도 돈이 남거든 그때 나한테 돌려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파데레프스키가 폴란드의 수상이 되었고, 세계 대전이 끝나자 폴란드는 경제 공항으로 국민들이 굶주림과 싸워야 했습니다. 수상이 이 사실을 미국에 호소하기로 하고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원조 식량이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감사하기 위해 그때 불란서 파리를 방문 중인 당시 미국의 식량 국장이었던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후버를 찾아가 정중하게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후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천만에요 저는 신세를 갚을 뿐입니다. 수상께서는 기억을 못 하시겠지만 제가 대학에 다니며 어려움을 당할 때 저를 크게 도와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라고 의아해하는 폴란드 수상에게 후버는 “스탠포드 대학 음악회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때 그 학생이 바로 저랍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감사는 언제나 축복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5-17)

그리스의 법률가였던 라이피곱스는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을 벌하는 법을 따로 세우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시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를 기뻐하시며 반대로 감사치 않는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신경정신과 의사가 신경과민증 환자 1000명을 조사했더니 그들 가운데 95%가 남을 비판하고 원망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모였다 하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누구 욕하고 누구 걸고, 넘어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신경과민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날마다 감사하면 모든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 감사할 조건이 너무 많습니다.

바울서신에서 갈라디아서만 빼고 늘 편지를 수신하는 가정 교회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고전 1:4-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후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엡 1: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빌 1: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골 1:3-4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살전 1:2-4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후 1:3-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빌몬 1:4-5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살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살후 1:3-5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성도의 필수사항입니다. 에덴동산에서 감사함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라면 지금도 에덴의 생활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에 빠진 사람은 실패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 되지 말고,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Thanks be unto God for his unspeakable gift.” (고후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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