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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강” – Daum 블로그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할렐루야!오늘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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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강 – 네이버 블로그
은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이고 평강은 하나님의 의도인 은혜의 결과이다. 이 단어들은 정통적 축복기도라기 보나든 오히려 간절한 바램 또는 기도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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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2) 은혜와 평강
‘은혜와 평강’은 바울 서신의 인사에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전 포스팅에서도 설명을 몇 번 한 바 있습니다.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
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3/5/2022
View: 8704
설교말씀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 – 양의문교회
이런 우리를 향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라고 하였습니다. ‘평강( …
Source: www.asheep.org
Date Published: 2/19/2021
View: 2997
[신앙Q&A]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1.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앞부분에서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인사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은혜(카리스-동사형(카이로))는 …
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2/8/2021
View: 6161
은혜와 평강의 하나님 – Faithlife Sermons
은혜는 히브리어에서는 헤세드라고 해서 값없는 긍휼을 말합니다. 이런 은혜의 결과로 은혜와 함께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이 평강입니다. 평강이라는 것은 …
Source: sermons.faithlife.com
Date Published: 1/1/2022
View: 169
(2강) 은혜와 평강 – 은석교회
엡 1:1-2http://onlycross.net/veos/eph/eph-010102(2).wmv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
Source: onlycross.net
Date Published: 5/27/2022
View: 7618
은혜와 평강의 유래와 의미
이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으로부터 오는 육적, 정신적 평안을 의미한다. 따라서 ‘은혜’가 죄 가운데 멸망할 자들을 구원하셔서 성도가 되게 하신 …
Source: mdkumc.org
Date Published: 11/6/2021
View: 9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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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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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14일 목요일 말씀묵상 ♣.hwp
♣ 2016 년 7 월 14 일 목요일 말씀묵상 ♣
성경 : 고로새서 1:1-2( 신 324P)
제목 : 은혜와 평강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할렐루야!오늘부터 묵상하게 될 골로새서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충만히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제목 }***“ 은혜와 평강 ”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자그마치 13권이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편지의 인사말을 보면 한결같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는 말씀으로 바울은 인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라는 말씀으로 인사를 끝맺고 있습니다 .
바울은 이렇게 은혜와 평강이란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겉치레로 사용하는 인사말이 아닙니다. 그의 진심어린 마음이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한마디 한마디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함축된 말씀 속에서 많은 사실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인사말이라도 그저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한 은혜와 평강이란 말은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요?
오늘은 이 은혜와 평강이란 말씀을 통해서 귀한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만 말씀하거나 평강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 , 그는 “ 은혜와 평강 ” 이라고 은혜와 평강을 함께 묶어서 사용하기를 즐겨했습니다 .
마치 기차 레일처럼, 바늘 가는데 실이 따라가는 것처럼,
“은혜와 평강” 을 항상 함께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쓴 편지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편지에는 이 “은혜와 평강” 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7 절 말씀에 보면 , “”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그랬습니다 .
고린도전서 1:3 절에서도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그랬습니다 .
고린도후서 1:2 절에서도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그랬고 ,
갈라디아 1:3 절 말씀에서도 “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그랬습니다 .
에베소서 1:2 절에서도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말씀했고 ,
디도서 1:4 절에서도 “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그랬습니다 .
빌레몬서 1:3 절 말씀에서도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그랬습니다 .
바울은 이렇게 “은혜와 평강” 을 항상 함께 묶어 놓았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바울 사도는 이 은혜와 평강을 함께 놓을까요?
그것은 은혜라고 하는 것은 평강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 은혜가 샘이라면 평강은 그 샘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은혜는 시작이고 평강은 은혜가 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없이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는 평강의 원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는 곳에 반드시 평강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은혜와 평강” 을 함께 놓았습니다.
오늘은 이 “은혜와 평강” 속에 담긴 귀한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1. 은혜
그럼 , 먼저 “ 은혜 ” 란 무엇입니까 ?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남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혜의 그 위대함과 영광스러움을 모른 채 그저 “은혜, 은혜” 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기쁘고 즐거우면 “은혜 받았습니다!” 그럽니다.
그리고 별 감동이 없고 무덤덤하면 은혜를 못 받은 줄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 은혜의 뜻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더 큰 감사를 할 것입니다 .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더 열정적이 되고 , 신앙의 다양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
본문에 나타난 골로새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골로새서 1:6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 그랬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골로새 교인은 복음을 들고, 그리고 그들은 은혜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열매를 맺으며 자라갔던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자 그들은 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 적극적이 되었습니다 . 능동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 그래서 신앙의 다양한 열매를 맺으며 성장해 갔다는 말씀입니다 .
우리도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에게 변화가 올 것입니다. 소극적인 신앙이 적극적인 신앙으로 변하고, 수동적인 신앙이 능동적인 신앙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 은혜 ” 가 무엇일까요 ?
“ 은혜 ” 는 헬라어로 “ 카리스 ” 라고 합니다 . 이 “ 카리스 ” 는 헬라사람들의 인사말이기도 했습니다 . 그들은 만날 때마다 “ 카리스 !” 라고 인사했습니다 .
그런데 이 “카리스(은혜)” 란 말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호의 ” 란 뜻입니다 .
그래서 헬라 사람들은 자기의 진실된 호의와 자기 마음 속의 중심을 표현하고자 할 때 이 “카리스” 라는 말을 썼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당신에 대해 ‘카리스(은혜)’ 로 대하기를 원한다” 그러면 그것은 그가 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마음으로, 가장 최선의 자세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 당신에 대한 최고 , 최선의 호의를 가지고 있다 ” 는 것이 바로 “ 카리스 ( 은혜 )” 란 말입니다 .
그래서 이것은 “ 자기의 마음을 다해 호의를 베풀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 ” 입니다 .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자기의 모든 선함을 베푸는 것입니다 . 이것이 “ 은혜 ( 카리스 )” 입니다 .
그리고 두 번째는 “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 예상치 못했던 호의 ” 를 은혜 ( 카리스 ) 라 합니다 ..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이제 그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되는데 죽음으로써 자기의 죄 값을 치뤄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카리스(은혜)” 를 얻었습니다. 그의 죄 값을 완전히 용서받고 새 삶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 카리스 ( 은혜 )” 인 것입니다 .
그는 형벌을 기대했는데 용서를 받았습니다.
죽음을 기다렸는데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전적으로 다른 어떤 호의를 받은 것이 “카리스(은혜)” 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 “ 보는 자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아름답고 훌륭한 행동 ” 을 카리스 ( 은혜 ) 라 합니다 .
어떤 성도는 보기만 해도 “카리스(은혜)” 가 됩니다.
그 분의 신앙생활이 너무도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기만 해도 “카리스(은혜)” 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을 보면 기쁩니다. 즐거워요. 행복합니다. 이것이 “카리스(은혜)” 입니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것이 “카리스(은혜)”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묵상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되고 기쁨이 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은혜” 는 바로 이런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지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호의,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주시는 “카리스(은혜)” 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충격적이고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우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기만 해도 은혜가 되어 기쁘고 감사가 넘친 것입니다 .
그래서 그는 감사와 감격에 찬 기쁨으로 “카리스(은혜)” 란 말씀을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감사와 감격이 넘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평강 .
두 번째로 , 사도 바울은 “ 평강 ” 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
이 “ 평강 ” 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 샬롬 ” 입니다 .
이 샬롬은 옛날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 카리스 ( 은혜 )” 가 헬라 사람들의 인사였다면 “ 샬롬 ( 평강 )” 은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였습니다 .
바울 사도는 이 두 세계, 헬라와 이스라엘의 인사말을 통해서 이 두 세계의 사람들 모두가 한 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 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
“평강” 이란 말은 “평화” 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 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강은 싸움하던 사람들이 완전히 화해하고 서로 얼싸 안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부부가 싸움을 하다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동안 내가 20년 동안이나 참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 그럽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건 참은 게 아닙니다. 참은 것을 내세우면 그것은 참은 게 아니라 20년 동안이나 벼른 것입니다. 마음속에 잔뜩 앙심을 품고 “언제 이걸 폭발할까?” 하면서 벼르고 벼른 것입니다.
“ 평강 ” 이란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참는 것도 아니고 , 완전히 용서하고 완전히 화해를 이룬 그런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
서로 치고 받고 싸우다가 너무 힘이 드니까 서로 휴전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젠 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잠시 쉬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지 않습니까? 남과 북이 서로 전쟁을 하다가 잠시 그만 두자고 휴전했습니다.
서로 선을 긋고 서로 못 넘어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싸움은 끝난 것 같지만 완전한 평화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평화가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전쟁상태입니다. 서로 적대 감정이 있습니다. 서로 대적합니다. 그래서 평강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평강” 은 서로 적대시하던 사람들이 모든 적대 감정을 다 풀고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왕래하며 서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강” 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된 인간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드리는 것 없이 미워합니다.
죄인들은 본질상 하나님을 거스립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평강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임했습니다. 적대 감정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바로 이것이 평강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묵상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이런 “ 은혜와 평강 ” 은 누구로부터 옵니까 ? 이런 은혜와 평강이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
오늘 본문 2 절에 보면 “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그랬습니다 .
원문에 보면 “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그랬습니다 .
즉 ,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와 평강” 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야 합니다. 다른 길은 결코 없습니다.
어떻게 이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오게 되었습니까 ?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으로부터 오게 되었습니다 .
즉 ,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 ,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주셨습니다 .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거저 자기 아들을 주셨습니다 .
은혜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호의입니다. 그리고 전혀 기대할 수 없던 것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3:17 절 말씀에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했습니다 .
본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습니다. 그 분의 거룩하심을 침해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받을 것은 지옥의 형벌 밖에는 없었습니다(롬3:23, 6: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 가운데 멸망아래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시려고 보낸 것이 아니라 , 놀랍게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호의를 얻었습니다. 기대하지 않던 호의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4 절 말씀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그랬습니다 .
우리는 마땅히 저주를 짊어지고 죽어야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을 분깃은 저주와 사망이요 지옥의 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왔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우리가 받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죽을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사라지고 도리어 우리는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참으로 기대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도저히 믿기지 않은 은혜, 기대하지 않았던 은혜, 그래서 이런 일을 행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은혜를 받습니다. 마음의 감동과 기쁨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은혜” 로부터 “평강” 이 옵니다. 은혜는 평강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의 샘에서 평강이 흐릅니다. 그러므로 은혜없이 평강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평강을 얻었습니까? 이 평강이 무언지 아십니까?
이 평강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평강입니다. 하나님과의 은혜가 준 열매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전엔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젠 그런 것이 사라졌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모든 적대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런 일을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교회생활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의욕이 생기고 교회를 위하여 몸된 제단을 위하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에는 무덤덤하고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더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를 받으니 우리의 심령에 샘솟는 평강이 임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와 평강이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이 말씀하는 평강은 삶의 어떤 형편과 환난 속에서도 모든 염려 근심을 “뛰어 넘는 평강” 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6-7절 말씀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그리하면 ‘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평강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염려와 근심, 그리고 두려움을 뛰어넘는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평강” 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일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좌절하거나 놀라서 쓰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평강을 아십니까? 이런 평강을 가졌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면 이런 평강도 받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은혜가 나에게 임합니까? 그것은 너무 쉽고도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져 주시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너무 쉬운 나머지 사람들은 그걸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8절 말씀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랬습니다.
어려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2절 말씀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평강도 받았을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마치 바늘과 실과 같아서 은혜가 있는 곳엔 평강도 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는 모든 믿음의 권속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 : 골로새서 1:1-2 절입니다 . 오늘부터 묵상하는 골로새서의 말씀을 묵상하시고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소원합니다 .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골 1:1-2)
은혜와 평강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로 시작을 하고 은혜와 평강으로 마친다.
은혜와 평강!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염원했던 은혜와 평강
은혜와 평강은 바울과 사도들이 사용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천상의 인삿말이다.
할렐루야가 천국의 인사이듯이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바울이 전한 은혜와 평강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데 은혜(grace)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헬라적 인삿말이고 평강(peace )이란 말은 히브리적 인사말이었다.
이 둘을 바울은 합쳐서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말로 승화시킨 것이다.
은혜와 평강은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관계되어져 있다.
은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이고 평강은 하나님의 의도인 은혜의 결과이다.
이 단어들은 정통적 축복기도라기 보나든 오히려 간절한 바램 또는 기도로 보인다.
원래에는 이런 단어들이 쓰이지 않았다.
은혜( χάρις ) 카리스라는 단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을 지칭하는데 세명의 여신을 복수로 카리테스( Χάριτες ) 라고 하며 로마신화에서는 그라티아이( Gratiae )라고 한다.
이 세명의 여신 하나 하나를 카리스 라고 부른다.
세명의 여신들은 유프로시네 (Εὐφροσύνη 환희 축제 명랑, 유쾌) 아글라이아(Αγλαΐα 아름다움) 탈리아(Θάλεια 발랄, 풍요) 이다.
유프로시네는 그리스의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시녀로 축제를 주관하는 여신이다.
아글라이아는 역시 아프로디테의 시녀로 우아함을 맡는다.
탈리아도 역시 아프로디테의 시녀로 개화를 맡는다.
아프로디테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 제우스의 딸이며 미와 사랑의 여신이라고 한다.
아프로디테의 미와 사랑을 받쳐주는 세 여신을 삼미신 즉 카리테스(카리스의 복수)라고 하며 그 각자를 카리스라고 부른다.
이 삼미신 즉 카리테스는 신과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기쁨과 아름다움과 환희 풍요를 주는 여신들이라고 그리스인들은 숭배하는 것이다.
로마신화에서는 카리테스를 그라티아이라고 부르며 신의 은총 무상의 선물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신과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삼미신의 아름다움과 기쁨과 환희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 새 여신은 각각 결혼했는데 그 남자가 추남이었다.
그래서 추남이 완벽한 여신과 결혼한 것을 과분한 대접 즉 은총(카리스)이라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완벽한 조화를 여성과 아름다움과 우아함과 향락에서 찾으려는 그리스 로마사람들의 세속적 사고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완벽한 여성과 결혼한 남자가 신의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주신 거룩하고 흠이 없으신 그리스도가 곧 우리 인간들에게 과분한 대접이며 은총이며 무상의 선물이란 뜻으로 카리스란 단어를 바울이 사용한 것이다.
은총(카리스)는 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은혜의 지고의 표현 즉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로 쓰여지게 되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지고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 예수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과분한 은혜이며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undeserved )은혜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온유(친절과 순종) 인내(참고 견디기) 긍휼(사랑)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순종하며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진리안에서 참고 견디며 이웃에 대해서 긍휼이 있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온전히 하나를 이루는 영적 비결이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가 임하여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게 누리는 평강에 이르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바랬던 것이다.
평강 ( εἰρήνη )
평강(에이레네)는 에이로(εἴρω )에서 파생되었는데 결합하다( to join) 는 뜻이 있다.
둘이 하나가 되어 평강 (peace) 평온( quietness) 안식( rest )을 누린다는 뜻이다.
“에이레네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평화의 여신이며 로마신화의 팍스( Pax )와 같은 것이다.
팍스 로마나 또는 로마의 평화는 로마 제국이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1세기와 2세기경의 시기를 말한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로 불리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기원전 27년에서 기원후180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는 고대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누렸다.”(위키백과)
로마는 전쟁을 통해 진정한 평화를 누린다고 여겨서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다.
로마는 팍스로마나를 이루기 위해 소수민족이나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시민권의 혜택을 주어 로마시민의 자부심을 가지게 하고 그로 인해 로마의 영역과 세력을 확장하여 영구적 평화를 꾀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로마는 멸망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제국들이 전쟁을 통한 강탈과 점령 지배로 평화를 누리려고 하지만 멸망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세상역사이다. 그래서 그리스신화나 로마신화에는 전쟁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전쟁을 통해 세상을 통합하려는 수법은 가인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바울은 그 시대의 권력자들이 꿈꾸는 평화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확신했고 전파했던 것이다. 에이레네(평강)은 히브리적 의미가 있는데 샬롬( שָׁלוֹם )이다. 샬롬은 유대인들의 대표적 인사말이다. 샬롬은 평화, 평강, 평안을 의미한다. 히브리적 샬롬은 전쟁으로부터 평안이다. 과거로부터 유대인들은 많은 전쟁을 벌였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 즉 메시야의 시대를 꿈꾸어 왔다. 바울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 독립 그리고 평화를 갈망했다. 그러나 바울은 히브리적 샐롬과 로마적 팍스에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에이레네(평강)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평강은 번영과 발전 성공을 통한 평안이 아니다. 번영 발전 성공을 통한 번영은 로마적 사고방식인 팍스이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에이레네는 히브리적 샬롬 즉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전천후적인 평안이다. 아들을 타지에 떠나보내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샬롬(평강)으로 작별한다. 이는 아들이 타지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하늘의 평안으로 흔들리지 말것을 부탁하는 축복의 말이다. 아버지가 마지막 임종을 맞이할 때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샬롬으로 마지막 인사를 한다. 그 샬롬은 아버지가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의 자리에 들어가더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기원하는 축복의 말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평안은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번영하고 잘될 때만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평안은 햇빛이 비출 때나 비가 올 때나 돌풍이 불때나 순풍이 불 때나 눈이 올때나 추울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사업이 잘 될 때나 어려울 때나 외부적 요인과 상관없이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위로와 고요함을 누리며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 εἴρω to join)해야 한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2:16-18)
바울이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항상 빠뜨리지 않고 축복하는 말은 은혜와 평강이다. 은혜는그리스도이며 평강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지고의 평화 안식이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서 누리는 평강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누리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위대하며 풍성한 은혜인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 성도들은 은혜와 평강이 임하면 세상을 이기고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승리하여 영원한 평강의 나라 천국으로 입성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평강외에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복된 인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것중에 모든 것(all in all) 그리고 모든 것중에 바로 그 하나(the only one of all)가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1:1-2) 은혜와 평강
‘은혜와 평강’은 바울 서신의 인사에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전 포스팅에서도 설명을 몇 번 한 바 있습니다.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 주어진 것을 말하고, ‘평강’ 곧 평화 혹은 평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없는 것 중의 하나로 ‘공짜’를 듭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인생 그 자체는 자기 힘으로 얻지 않은 공짜인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공짜인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든 사실 모든 것이 공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소유하고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인데. 더욱이 어떤 미련한 이들은 하나님께 가서 또 자기가 원하는 삶을 기도하니 참 가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에서부터 누구나 벗을 수 없는 죽음을 이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은 공짜를 이야기할 때와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가장 크고 유일한 일은 오히려 존재하게 된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은혜, 곧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생이란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요 신실한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의“ 곧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로 구분하면 완연하게 다른 것이 됩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소비하는 것에 온전한 존재로 보는 이들이 있고, 육신의 소비가 아니라 평안이 하나님의 복인데 삶이 그렇지 않은 것은 육신이 부정하기 때문에 이것을 신앙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기독교인이란 아쉽게도 거의 다 후자에 속합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는 것에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인생이 소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비된다는 것은 그것에 사용됨으로 약해지고 낡아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급적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치라 여겨지는 것들을 많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가장 흔하나 말로 세상에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어서 교회가 또 선교사나 주의 일에 헌금하는 것이 자기 은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단정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자로서 교회나 주의 일에 기부하듯 하는 자리에 이른 것을 영광으로 아는 것은 육신을 소비하지 않는 자리, 평안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는 것이 아니라 발 씻기는 자들에게 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 모호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이 구분되니 않으면 거듭난 생명이 아닙니다. 아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동일하게 육신으로 살아가는데 어떤 것이 육신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여 십자가에 드리는 소비고, 반대로 육신의 정욕을 좇아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생명의 구분이 없는 것이기에 그것은 당연히 거듭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 사도가 은혜와 평강을 마치 한 단어처럼 항상 붙여 사용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곧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인생으로서는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이후에도 스스로 그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는데 인생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 목적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평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안이라고 하면 육신이 무탈하고 등 따시고 배부른 평안 중에 있어 하나님을 섬기러 교회에 다니는데 지장이 없고, 또 교회가 헌금이 필요할 때 여유 있게 낼 수 있는 것이 평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심으로 육신을 소비하는 것을 보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소비하신 분을 주라 믿으면서 정작 자신은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단지 구하는 평안은 같으면서 구하는 방법이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기에 세상과 다르다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회 칠한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것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눈이 어둡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눈이 어둡다는 것은 아직 빛이 없는 것이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세계가 아직 창조조차 되지 않은 것인데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기니 더 문제인 것입니다. 뭐가 바뀌고 나아지려면 현실 인식부터 바로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으니 신앙이 여전한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늘 노력할 뿐이며, 그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본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 곧 자신이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가진 평안의 가치와 다르게 육신을 소비하는 것에서 평안이 있고, 그 평안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고, 따라서 인생의 목적도 하나님께 있으며, 그 인생의 목적은 세상에서 육신이 평안하게 살면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평안하구나!’ 생각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육신으로 종이 되어 섬기는 일로 육신을 소비하는 것임을 아는 그것이 은혜고, 그것을 은혜로 여기는 사람이 성도요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욥의 세 친구와 같이 세상이 볼 때는 육신이 평안하지 않아 보이니 평안도 아니고 복도 아니며 보잘 것 없고 조롱하는 것과 같은 삶인데 그것이 자신에게 평안이 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에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시면서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말씀하신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가 항상 문안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
빌립보서 1 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 말씀요약 —-
평강을 잃어버린 세상, 평강이 없는 시대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원하지만, 그러나 이 땅에는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고, 전쟁이 없이 군사적-정치적으로 평화가 유지되기를 바라며, 가정도 평안하기를 바라며, 마음도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나라들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하루도 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시리아의 내전은 5년째 계속되고 있고, 400만도 넘는 난민이 고향을 잃고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강대국도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의 평화도 잘 유지되지 못합니다. 이웃들과의 평화도 늘 깨어집니다. 마음의 평화도 잘 지켜지지 못합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꼭 거기에 평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염려, 근심, 걱정, 불안, 노심초사, 의심, 미움, 증오, 분노, 주의산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의 평화를 얼마나 자주 깨뜨리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평화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일시적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는 평강을 잃어버린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강을 잃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고, 이것은 우리 시대에만 일어나는 새로운 소식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늘 그래왔습니다.
하나님에게만, 그리스도에게만 참된 평강이 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라고 하였습니다. ‘평강(peace)’이라는 말은 ‘평화, 평안, 화목, 평강’ 등으로 번역됩니다. ‘평강(샬롬)’은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 걱정과 염려가 없는 상태, 불목하고 원수된 것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평강은 무엇이며 이 평강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 이 평강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에게서(빌 1:2) 오는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며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외에 참된 평강이 없습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화목과 화친과 화해에 따르는 평화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실제적이고도 치명적인 적대감과 원수된 것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화해된 것으로부터 오는 평화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더불어(with) 누리는 평강입니다(롬 5:1 참조).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화목,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누리게 된 평강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평강을 알지 못합니다.
둘째, 이 평강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빌 1:2) 오는 평강입니다. 참된 평강(peace)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로부터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평화입니다.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사 9:6)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사 53:5). 예수님이 모든 막힌 담을 허물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주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양심의 큰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이 평강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지혜롭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이 평강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빌립보의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에(행 16:24),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들에게 충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모든 것을 섭리로 주관하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자들에게 큰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자이시며, 그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신 것을(시 121편) 믿는 믿음에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모든 현실에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버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평강입니다(벧전 5:7). 이 평강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영원하며, 이 평강은 참됩니다.
이 평강을 누리며, 이 평강을 구하라
참된 평강이 없는 이 세상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평강은 영원하며, 이 평강은 참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이러한 평강이 더욱 넘치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16). 우리도 이 평강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평강을 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해서, 평강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평강을 유지시켜 주시고, 증진시켜 주시고, 이 평강이 깨어지지 않도록 계속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평강으로 다스려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평강으로 다스려주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혼란해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으로 다스려주시는 곳에만 이 참된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으로 다스려 주셔야 우리 심령에도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가정과 교회도 하나님께서 평강으로 다스려주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평강의 복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평안을 빼앗아가려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우리 원수 마귀는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우리인 줄 알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계속해서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를 주장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평강은 언제나 은혜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며, 은혜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에게 그냥 아무렇게나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잘 받는 그곳에 평강이 주어집니다. 가정도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잘 받는 데에서부터 평강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방도를 떠나서는 어떤 인간관계에도 참된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기대해야 합니다.
장차 들어갈 완전한 평강의 나라를 대망하라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신 말씀은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완전한 평강의 나라를 대망하게 만들어 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금 이 평화를 누리고 사는 자들은 장차 영광스럽고도 완전한 평화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장차 우리는 완전한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사 65:25). 모든 눈물, 모든 사망, 모든 아픈 것이 다 그치게 될 것입니다(계 21:3-4). 완전한 평화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과 평화가 거기에 있으며, 거기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모든 사람들과의 완전한 화목과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전쟁이 그칠 것입니다.
이 평강을 대망합시다. 이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이 평강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이 평강이 임하기를 기도합시다. 이 평강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엡 2:14-17 참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평강을 우리 것으로 삼고 날마다 이것을 누리고 확신하며 기쁨 가운데 거하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신앙Q&A]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Question.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의 차이가 있나요? 샬롬은 이 두 단어의 의미를 모두 다 포함할 수 있습니까?
Answer
1.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앞부분에서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인사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은혜(카리스-동사형(카이로))는 헬라식 인사법이며, 평강(에이레네)은 히브리식 인사(샬롬)입니다. 바울은 서신을 쓸 때에 헬라식 인사와 히브리식 인사를 합쳐서 기독교적인 인사를 만들어냈습니다.
2. 바울의 편지 서문의 인사말에 나오는 “은혜”(카리스)는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란다’, 또는 ‘건강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가진 헬라식 인사말입니다. 이 말의 동사형인 카이로는 ‘기뻐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헬라식 인사말을 신약적인 의미를 담은 독특한 언어로 만들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은혜(카리스)는 단순히 받는 이에게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의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사랑과 구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담게 되었습니다.
3. 바울의 편지 서문에 나오는 평강(에이레네), 즉 “샬롬”은 전형적인 유대식 인사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인간)과의 관계가 바르게 될 때에 오는 평화/평강/정의/질서/조화 등의 상태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하듯이. 히브리인들은 사람을 만나면 “샬롬”하고 인사를 하고, 헬라인들은 “카리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헬라식 인사와 유대식 인사를 합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교회에 인사를 한 이유는 헬라 세계에 세워진 교회 안에 유대 문화와 헬라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은혜와 평강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은혜는 원인이고 평강은 은혜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에는 샬롬, 곧 진정한 평강이 임합니다. 샬롬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바르게 될 때에 오는 평화/평강/정의/질서/조화 등의 상태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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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은혜와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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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설교>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항상 인사말로 시작하고 본문도 편지의 형식상 인사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인사말이니까 깊은 뜻은 없을 거야’라고 지나친다면 크게 실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용어 하나하나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나타나는 사건들이고 의미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는 용어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증거하는 핵심적인 내용으로 다가오게 됨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자기 고백과 함께 ‘성도’‘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역시 예수님과의 관계 밖에서는 나와질 수 없는 고백임을 생각해 보면 비록 인사말이라고 해도 우리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고, 예수님과의 관계로 인해 어떤 복을 누리는 상태에 있는가를 말해주는 내용들입니다. 때문에 아주 익숙한 말이라고 해서 식상하다는 느낌으로 대할 수 없는 내용임을 먼저 주지해야 합니다.
특히 2절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는 말은 바울의 모든 서신서에서 동일한 내용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우리가 서로 만났을 때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하는 것처럼 형식적인 인사말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형식적인 인사로 교회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말을 대개는 모든 일이 잘 되고 가정이 평안을 누리는 의미로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겨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인사말의 모든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디 서신서의 인사말뿐이겠습니까?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 모두가 은혜와 평강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은혜와 평강, 이 용어를 결코 식상하다는 느낌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늘 새롭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은혜와 평강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의 우리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환경과는 무관한 내용입니다. 만약 환경적인 내용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환경 안에서 은혜와 평강의 새로움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매일 반복되는 환경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환경이 매일 변화되지 않은 이상 환경으로 인한 은혜와 평강의 새로움은 느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환경이 좋으면 매일 주어진 은혜와 평강에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았다 해도 결국에는 좋은 것의 좋음을 잊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가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삶의 환경과는 무관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말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은혜와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에게만 해당됩니다. 신실한 성도가 아닌 자와는 무관한 것이 은혜와 평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은혜와 평강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물음에는 항상 답하기가 머뭇거려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현재 삶과 심적 상태가 은혜와 평강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역시 은혜와 평강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대개 자신이 은혜와 평강에 있다면 무엇보다 심적 상태가 근심과 염려가 없이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심과 염려로 가득한 마음 상태를 두고 ‘나는 은혜와 평강이 있다’라고 말할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은혜와 평강에 대한 자기 이해, 자기 기준이 있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은혜와 평강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의 심적 상태를 다스려서 의도적으로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위 내적 치유라는 것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심리학에 불과합니다. 긍정적 사고방식, 마인드컨트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신앙으로 포장하여 활동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 기독교인 것처럼 여기지만 실상은 모두가 인간에게 초점을 둔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삶의 환경이 평안하고 그 마음 또한 염려와 근심이 없는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는 의미로 은혜와 평강을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말의 의미부터 생각해야 하는데, 이 말은 은혜와 평강은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도,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은혜와 평강은 세상의 것과는 무관하며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떤 결과가 일방적으로 내게 주어진 것을 뜻합니다.
사도가 은혜를 말하면서 평강을 함께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외치신 말이 ‘회개하라’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요 20장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모인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자기들이 모인 곳의 문을 닫았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두려움에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심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또 다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예수님이 가신 그 길과 동일함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께 보냄 받은 예수님의 길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낮아지며 고난과 죽으심이 있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이 보냄 받은 길도 자기 영광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 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원하지 않고 두려움이 있는 길로 보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없이 자신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힘으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평강의 의미는 제자들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부활의 주가 함께 하시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과 예수님께로부터 베풀어진 은혜 안에 있습니다. 이 은혜가 평강이 됩니다. 신자가 은혜의 세계 안에 있음을 자각한다면 두려움과 근심, 염려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성공이라고 할 소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내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과 염려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일치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뜻은 항상 욕망을 기초로 합니다. 낮아지기보다 높아짐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낮아짐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낮아짐에 뜻을 두게 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뤄지는 것이고 평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원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평강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악한 영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에 붙들려 생명에서 떠난 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아래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평화롭다고 해도 평강의 상태는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평강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심판에서 건지신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한 자로 구별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 은혜가 평강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의 신실한 성도 되었다는 것으로 신자는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세상에서의 행복과 풍요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행복과 풍요를 모두 누린다고 해도 그 결국이 심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평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모두 심판으로 끝날 때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로 생명에 거하게 된다면 그것이 곧 평강인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는 신자는 자기를 위하여가 아닌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길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임을 압니다. 그래서 낮아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도 순종하게 됩니다. 낮아짐으로 인해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은혜와 평강이 있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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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은혜와 평강 – 김윤진 간사 [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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