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 교과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 1과 창조와 타락 97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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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됨 – 오목천교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됨. (에베소서 2장 11~22절). 구원을 받은 성도는 교회의 구성원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엡1:22)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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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mch.kr

Date Published: 1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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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 하나됨

진리의성경(bible.rexpia.com) = 킹제임스 성경 말씀을 통해 바른 교리와 진리를 가르칩니다. 예수그리스도만 나타내는 유기체적인 교회 지체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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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rexpia.com

Date Published: 2/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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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 조성훈 목회자의 설교와 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 주 제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 … 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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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astorcho.kr

Date Published: 5/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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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 – 다음블로그

7절에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따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됨은 “주안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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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5/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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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 – UM News

캔자스주의 한 교회는 신학적 이견, 동성애에 관한 의견 충돌 그리고 교단의 분열 가능성을 둘러싼 논란에 중용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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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umnews.org

Date Published: 3/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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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된 우리 – 양의문교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막힌 담이 허물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하나됨, 참된 통일이 있습니다(엡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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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sheep.org

Date Published: 8/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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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 됨.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 됨.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하나 됨. 하나 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자 비밀한 능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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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cc567.kr

Date Published: 10/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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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을 위한 네가지 단계 – NAC Korea

사도장께서는 하나됨의 완벽한 예는 삼위일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아버지 …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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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c-korea.org

Date Published: 9/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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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됨 (갈3:23-29) / 2002. 7. 28

갈라디아서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됨 (갈3:23-29) / 2002. 7. 28. 이상봉 | 2010.05.03 09:48:4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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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ebusan.kr

Date Published: 1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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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우리 – 주일설교 – 휄로쉽 교회

각 사람이 동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 믿음과 구원의 일로 인하여 참된 하나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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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ellowshipusa.com

Date Published: 6/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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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 Author: 류대균의 교과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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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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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 하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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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 하나됨

(요 17:21) 이것은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장차 그들을 통하여 주님을 믿게 될 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 17:11) …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21) 이것은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요 17:22)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나니 이것은 그들이 하나 안에서 완전해지게 하려 함이며…

예수님께서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고 기도하신 바가 우리가 하나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가 되기를 요구하시는 수준은 상당히 높습니다. 21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라고 했고, 22절에서는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라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같이 우리가 하나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란 각기 독립된 세 인격체가 한 하나님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three persons in one God).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각기 독립된 개개인들이지만,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지체들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전 12:12)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

그래서 비록 각자의 신분, 직업, 가정환경, 정치적 입장, 취미, 습관 등이 다르다고 할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을 돌아보면 서로 많은 차이점들이 있지만, 우리는 많은 점에서 이미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소망, 한 몸,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침례, 한 하나님이 계십니다.

(엡 4:4-6)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 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에 두루 계시며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이런 하나됨에 기초하여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행 4:32) 믿은 자들의 무리가 한 마음 한 혼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중에 아무도 자기가 소유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더라.

(롬 15:6) 너희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될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pastor, Moons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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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훈 목회자의 설교와 글

주 제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

본 문 : 롬 15:1-6

설교자 : 조 성 훈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처럼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모임은 드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또는, 출신 학교가 같다는 이유로 친하게 지내고 하나로 뭉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같은 아버지를 섬깁니다. 둘째로, 같은 소망과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는 정말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가 실질적인 면에서 어떻게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첫째로, 사도 바울은 1절에서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한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강한 자’는 육체적으로 강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강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강한 자’는 어떠한 사람을 말합니까? 사람들은 때때로 강한 자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온 지 오래된 자, 또는 구원 받은 지 오래된 자를 강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하거나,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자, 또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고, 많이 배운 사람을 영적으로 강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강한 자는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물론, 교회에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있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첫째, 영적으로 성숙한 자입니다.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교리적으로 건전하게 잘 무장하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또, 이러한 지식적인 면과 더불어 주님을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으며, 주님과의 가까운 교제 가운데서 주님을 많이 닮은 자가 바로 강한 자입니다. 둘째, 인격적으로 성숙한 자입니다.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자가 강한 자인 것입니다.

반대로, 약한 자는, 성경에 대한 이해 적고, 지적으로, 체험적으로 주님에 대해 잘 모르며, 교리적으로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자입니다. 이들에게 주님께 응답 받은 것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하면, 그들은 별 말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았던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을 체험적으로 알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린 자들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옛 삶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자가 약한 자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 방탕하게 살았던 삶을 다 돌이키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들에 자주 넘어지는 자들이 바로 약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강한 자의 의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린 자들이 주는 어려움에 대해 잘 참으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어린 자들의 연약함을 돕는 것이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짐을 지는 것 또한 강한 자들이 해야 될 의무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을 볼 때, 그들의 인내심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어수선하고, 돌아다니며, 한 번에 잘 순종하지 않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어려운 일임에도 그들은 그것을 기쁨으로 잘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사들이 그들이 돌보는 대상이 어린 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 어린 아이들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잘 돌아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강한 자들도 약한 자, 영적으로 어린 자들이 어떠함을 이해하고 그들의 연약함을 용납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

강한 자와 약한 자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로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는 약한 자, 즉, 영적으로 어린 자입니다. 어린 아이일수록 자기중심적이듯이, 영적으로 어린 자들의 특징 또한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닮지 못한 자이며, 주님의 제자로서 매우 미숙한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어린 자들은 많은 문제들에 있어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들은 음식 문제(제사 음식 등), 율법, 제사나 장례, 날이나 절기 등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마음대로 이사 가지 못하고, 음식을 먹지도 못합니다. 또 율법에 메여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강한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이며, 영적으로 성숙한 자입니다. 또한 깨어 있는 자이며,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들은 많은 문제에서 자유롭습니다. 물론, 믿는 신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자유롭지만, 아직 많은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사상에 올려졌던 음식을 먹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한 예입니다. 이는 그들의 양심이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아직 다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구원받고 나서 율법이 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아직 그들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서서히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주일을 안식일로 생각하여 주일에 무엇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주일이 안식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연약한 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메여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강한 자들에게 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연약함을 감당하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연약한 자들을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것에 메여 있지 않아도 연약한 자들을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이러한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고, 이해할 때,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많은 예들을 통해 하나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첫째,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돌아본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 투정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불평을 했습니다. 물이 없어서, 날씨가 더워서, 또 길이 좋지 않아서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계속해서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들의 모든 불평과 원망들을 감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장성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모세 뿐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러했고, 사무엘이 그러했으며,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감당하는 것은 장성한 자의 증표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누가 모세의 삶을, 사도 바울의 삶을 망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고, 참된 복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성경은 고난 가운데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주고, 그분을 떠난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도 보여줍니다. 이 뿐 아니라 섬김을 받는 삶보다 섬기는 삶이 얼마나 더 복된 것인가도 보여줍니다. 섬김을 받기만 하며 살았던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은 섬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정말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 그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이 기록된 또 다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고, 하늘의 영광스러운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또한 새로운 몸에 대한 소망, 즉,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며, 하늘의 기업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네 번째 방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의 몸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항상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막 14:36에서 우리는 주님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땅에서의 주님의 삶은 아버지를 위한 삶이었고, 또 우리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자세를 본받을 때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저는 어렸을 때, 제가 맏이였기 때문에 동생들을 업어서 키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여간 힘들고, 귀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등에 업힌 동생이 오줌을 싸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생을 버려두지 않게 되는 것은 그가 내 형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역시 한 형제, 자매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조금 장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린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의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장성한 사람들이 어린 사람들의 짐을 져주고, 연약함을 담당해주고, 사랑으로 감싸주며,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바람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6절)”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바람 또한 교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감싸주며, 세워주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광야의 소리(윤삼중 목사의 외침)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

성경본문: 엡4:1-6절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면 축구공 하나로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도 뭉쳐 지구촌 축제를 이룹니다. 월드컵은 각 나라와 사상과 신분이나 인종을 뛰어 넘어 온 세상의 젊은이들이 하나로 모여 하나가 되는 놀라운 축제를 만들어 냅니다. 특히 프랑스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의 언어, 문화 풍습, 사상, 종교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같기에 하나가 되어 모이고 힘을 쏟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대표선수를 보면 정말로 다양한 색깔, 인종들이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팀을 이루며, 세계를 재패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고 신기합니다. 축구공 하나로 온 세상들이 하나로 모이고 지구촌 축제를 이루듯이 우리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뛰어 넘어 세대차이가 없는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건강한 교회입니다. 시편133편을 보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형제들이 같이 동거하게 됨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하나님의 아들들이 함께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선함의 극치입니다. 자기들끼리, 몇 명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나라의 문화와 전통, 사상과 인종과 색깔과 신분을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거룩한 성전을 함께 지어져가며,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는 정말로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에베소서의 기록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교회는 사랑이 넘쳤던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 듣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어 신앙의 열심을 내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가장 큰 교회며, 재정적으로 힘있고, 사회적으로 신분과 위치가 높고, 똑똑하고 잘난 인물이 많은 교회입니다. 기독교 교리에 관한 밝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비판의식이 강한 지성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각종 분쟁과 다툼이 많이 일어나며,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며, 겸손과 온유함을 잃어버리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들이 공동체 내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는 영적으로 평안하지 못하였고, 법정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하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교회의 분열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감옥에서 그 상황을 듣고 더욱 하나됨을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교회속에 담겨져 비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며,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어지며, 주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성령님께서 우리속에 내주하시면서 성도들을 하나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함께 만나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은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어주시고 그의 몸으로 삼으시고 우리와 하나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시고 내주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됨을 이루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힘써야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하나될 수 있도록 이미 기본적인 틀을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에서 이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행2:1-4절을 보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이미 저들이 하나가 됐습니다. 그들이 능력을 받고 밖으로 뛰어나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나중에 합류한 사람들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먼저 성령 받은 사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 됨을 이루게 하는 놀라운 사역을 행하십니다. 바벨탑이 무너지는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반역 행위를 할 때 분열되고 흩어지게 하셨으나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은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기도하던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자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니 그 자리에 있던 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바울은 “성령안에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이것을 지킬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상전, 남자나 여자, 부모와 자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오직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사명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우리가 왜 하나되기를 힘써야 합니까? 또한 우리가 하나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에게 가장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라는 단어를 엄청나게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와 연합된 관계 즉 함께 하는 관계가 되어집니다.

롬 6:6절에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 함께 못박혀 죽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절에 보면 창세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6절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7절에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따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9절에는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이 뜻의 비밀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깊은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10절에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이 내용들을 하나님이 친히 다 하시는데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고 하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아야 합니다.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절대로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됨은 “주안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안에 있지 않는 자들과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안에 있을 때 한 몸이 되며, 한 성전이 만들어지며, 한 가족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며,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사명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완성하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저를 기뻐하노라”(마17:5) 하시고,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히1: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서” 와 “성령 안에서”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성령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갔다고 할 때 그것은 성령 안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영적 영역이 성령 안으로 옮겨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되기 위하여 친히 무슨 사역을 하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부르시고 한 공동생활을 통하여 하나되는 교회의 기반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오직 이 하나 됨의 사역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함께 동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피로 이 땅에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친히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17:9~11절을 보면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 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셋째, 약속하신 성령님을 우리게 보내주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님의 주된 사역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예수 안에서 한 몸이라는 인식과 함께 하나가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2.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일에 합당하게 행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저주에서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하여, 우리에게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곧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안에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각오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의 마음과 자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가 되는 비결을 에베소서는 중요한 5가지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⑴우리가 서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함을 깊이 깨닫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함을 깨달으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빌2: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길 때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⑵우리의 마음이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는 우리의 본능과 마음과 욕심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자기 기분대로 하지 않고 항상 부드럽게 대하며 성내지 않는 자세입니다. ⑶우리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는 것은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오래 참는 것도 아니고 횟수에 있어서 오래 참는 것도 아닙니다.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고 인내할 때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4)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여기서 서로 용납해 주라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 것처럼 상대방의 약점까지도, 실수까지도 받아주고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것을 용납해 줄 수 있습니다. 내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실수까지, 장애까지도, 연약함까지도 받아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 용납해 주는 것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5)우리가 성령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평화의 왕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직책은 화목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5가지는 고전13장을 보면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 양식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겸손하게 되고, 사랑이 있으면 온유하게 되고, 사랑이 있으면 오래 참게 되고, 사랑이 있으면 용납하게 되고, 사랑이 있으면 서로 평화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인격적 덕목들도 사랑이 있어야 하나로 묶여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진주 목거리를 보면 그 많은 진주 구슬이 끈으로 묶여 하나가 되는 것처럼 사랑이 바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시켜 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섬겨주며, 서로 오래 참고 용납해 줄 때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됨을 위하여, 우리들 사이의 하나됨을 위하여 친히 겸손과 온유, 인내과 사랑으로 용납하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한 형제가 될까요? 예수님의 피를 나누어 가졌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형제는 부모의 피를 나눔으로 형제가 되지만, 영적인 형제는 예수님의 피를 나눔으로 영원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의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후에 가롯유다의 배신으로 빈 사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여기서 “형제” 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하는데 이때부터 교우들을 형제라고 부르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요1:12)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갈4:6절을 보면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육신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관계일지라도 하나님을 다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부자관계가 아닌 형제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과 나이를 초월하여, 지위고하를 뛰어넘어 법적으로 다같이 형제 자매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 교우를 대할 때는 반드시 한 형제로 대해야 합니다. 형제의 마음으로 대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피를 정면에서 더럽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분이나 지위고하, 남녀노소, 나라와 민족을 초월해서 거듭난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한 성도를 위로하고 이끌어주며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형제가 무슨 뜻일까요? 먼저 ‘형제’ 에는 ‘존귀한 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주의 백성들은 당신의 피 값으로 샀기 때문에 존귀한 자입니다. 다음은 ‘나와 동등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형제는 다 한 부모에서 나와서 형 동생의 관계는 있어도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한 아버지인 하나님께 속한 동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교회는 계급도 없고, 명령도 없고, 상하구분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섬기고 세워주는 관계일 뿐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형제는 다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가진 형제들로 존귀한 자요, 나와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아시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히 여겨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어떤 칼이나 핍박이나 위협이나 고통도 끊을 수가 없고, 심지어는 죽음의 권세까지도 사단의 공격에도 우리는 영원히 한 가족이며,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한 가족이요, 한 형제로 알고 대할 때 우리 교회는 성령이 충만하여 사랑과 기쁨이 넘치고, 또 은혜가 넘쳐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3. 우리가 하나가 되려고 하면 오직 성령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고 하면 누구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결심과 능력으로 하나가 될 수 없고 오직 성령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권면합니다. 그것은 “사랑 가운데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면 평안해지고 성령이 우리를 하나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예배의 의식이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의 띠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이미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절)고 했습니다. 성령안에서 서로 연결되는 가운데 사랑으로, 화평으로 한 몸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컴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왜 교회내에서 분쟁이 일어나며, 성도들 간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상상하는 성경적이라는 교회조직을 만들어 놓고 여기와서 하나가 됩시다고 외칩니다. 그런데 내 속에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거부합니다. 성령님이 구심점이 될 때에 우리는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사회적 지위와 지적 수준을 뛰어넘어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됨은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 노력으로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르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우리를 영적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은 성령님이시며, 성령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 모임, 회중, 교회에 그리스도 예수가 온전히 왕이 되실 수 없는 제도와 분위기.서로에 대한 경쟁의식이 있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것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온전히 성령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될 때 자연스럽게 하나가 만들어지며, 영적으로 한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령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까?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입니다. 4-5절에 보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우리가 성령안에서 완전한 하나됨을 이루어 공동체를 세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며 우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목표도 하나이고, 생각도 하나이고, 한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일 것입니다. 고전1:10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분열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

40년 전, 캔자스 주의 어느 밀밭 옆, 몇몇의 연합감리교인들이 모여 한 시골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는 현재 부흥하고 있는 주택단지의 교회가 되었다.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로 통하던 오래전 비포장도로가 4차선 도로로 바뀌었고, 교회의 약 1,100명의 회중이 서부 Wichita지역에서 활발한 지역사회의 참여를 보이고 있다.

신학적 이견, 동성애에 관한 의견 충돌 그리고 교단의 분열 가능성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 교회는 Gary Brooks 담임목사의 리드에 따라 중용을 지키고 있다. Brooks 목사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의 교인은 보수적, 진보적, 민주당, 공화당 모두로 구성되어있다. “저는 이 모든 성도들의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의 하나됨은 우리를 분리시키는 이슈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를 나누는 서로의 다름을 넘어서는 존재입니다. 저의 목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구원과 심판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 이름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그의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짐을 느꼈던 1738년 5월 24일에 참석한 예배 장소인 런던의 한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웨슬리는 그때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죽으심을 느꼈다. 이와 마찬가지로 Brooks 목사도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감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는 사람들이 성서의 서로 다른 관점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Brooks 목사는 대화와 선교, 배움 그리고 기도를 통한 상호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눔으로 서로를 알아간다고 그는 전했다. “서로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단지 십자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대화의 장에 머무르는 것을 고무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관점을 고려하는 것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차단할 때 어렵게 됩니다.

우려와 대화(Concern and conversation)

목사가 예상하기로는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의 성도 중 약 12명에서 20명 정도가 LGBTQ 관련 문제에 대한 교단의 긴장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교회나 연회들이 본인을 동성애자로 밝힌 이들의 목회자 안수와 연합감리교회에서 동성혼 예식을 금하는 장정을 거역하는 것을 본다.

은퇴한 사업가인 Chuck Brodie는 1976년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의 설립을 도왔으며, 교회의 리더로서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수년간 섬겨왔다. 그는 교회들이 장정을 어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야 하며, 연합감리교인으로서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우려는 6월의 어느 월요일 저녁, 기독교 관련 비디오를 보고 토론하기 위해 모인 다른 교인들과의 회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LGBTQ 이슈에 관한 연회들의 장정 불복종 선언에 대한 대화는 우려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회의는 즉시 분노로 폭발했습니다,”라고 Brodie씨는 말했다. “저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저의 실망감을 표현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말 나빠졌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들이 교단을 떠날 것을 고려 중이거나, 다른 교회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Brodie는 이들을 오랫동안 교회 사역에 참여해온 “주요 일꾼들”이라 묘사했다. “이는 제게 아주 상처가 되는 일이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 당시 Great Plains 연회 감독인 Scott Jones 감독에게 연락을 했다. 6월 28일, 감독은 약 60여 명의 교인들을 만났다. “아주 좋은 정보를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라고 Brodie는 전했다.

Brooks 목사는 진보와 보수 양측을 포함한 이 그룹이 정중하고 친근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묘사했다. 감독은 그룹에게 이 모든 이슈와 관련한 모든 그룹들은 하나됨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Brooks 목사는 만일 연합감리교회 총회가 장정을 개정할 경우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의 교인들은 떠날 수도 있다고 나중에 말했다. “저는 교단의 변화들이 우리 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교회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나타내기에 전념할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볼 겁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 화합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설립된 대책방안위원회(the Way Forward Commission)의 논의 결과를 심의하기 위해 2019년에 연합감리교회 특별총회를 개최할 것이 제안되었다.

올해 초 9명이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를 떠났고, 그중 일부는 교단에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목사는 말했다. 그러나, 그들 중, 두 명이 나중에 돌아왔고, 6월 이후로 그 우려는 차츰 가라앉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 해, 121명이 교회에 합류했고 그들 중 4분의 3가량이 신앙고백을 했다.

적극적인 노력(Proactive effort)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는 교단이 처한 도전에 대해 교회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려준다.

작년, 이 교회는 3주에 걸쳐 성에 관련 이슈 포럼을 다른 회중들과 합동으로 개최했다. 퍼킨스신학대학원 교수는 전통주의자적인 관점을 나누었고, 젊은 동성애자 작가는 두 번째 세션에 강의했으며, 마지막 세션은 원탁 토론으로 구성되었다.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는 그에 뒤를 이어 네 번째 주일에 교회의 성도들간의 대화의 장을 열었다.

교회는 또한 연합감리교회총회 전에 45명이 참석한 총회 미리보기 (a pre-conference briefing)와 연회와 지역총회와 관련된 지속적인 정보를 성도들에게 제공했다.

Great Plains 연회가 2015 연회에서 동성혼 허용과 “스스로 동성애자로 밝힌” 목회자를 허용하는 청원안을 총회에 보내기로 의결한 소식을 접했을 때 많은 교인들이 화가 났다. 평신도 리더십팀의 일원인 Cary Glasse는 몇몇 교회 성도들은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회중들의 다양성은 대화를 이끌고, 우려에 대해 다루는 기회가 된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한 지붕 아래 함께 예배드리고,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 성도들은 거의 모든 이슈에 폭넓은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것에 대해 개방적이라고 1976년 교회 창립 시 그의 아내 Susan과 함께 창립위원이었으며, 과거 임원회 회장이었던 Dick Bradford는 말했다.

Bradford는 거의 모든 성도들이 “보통 온건”하고 동성애는 불화의 사안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그 자신이 아마도 “조금은 더 진보진영”에 치우칠지 모르나, 교회의 결정에 따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함께 문제들을 해결(Solving problems together)

Kay Hole과 그녀의 남편인 Les 그리고 두 딸은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 창립멤버이다. 그녀의 가족은 4대째 이 교회를 다니고 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 그들의 정치적 견해나, 혼인의 여부, 성의 정체 또는 “민감한 사항”이 있을지라도 그것에 대해 묻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들의 관심사, 그리고 주일학교에 참여하고 싶은지, 집과 학교를 수리하는 Love Wichita project에 참여하고 싶은지, 또는 카톨릭 재단이 주관하는 홈리스 식사 사역인 The Lord’s Diner를 위해 일하고 싶은지 등의 관심 여부를 물어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Hole은, 캔자스와 루이지애나 홍수 피해를 위해 250여 개 이상의 홍수 구호품 양동이(flood buckets)를 성도들이 만든 일을 인용하며, 봉사활동은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회는 또한 국제적으로 말라위, 아이티 그리고 바하마 등에서도 돕는 일을 해왔다.

Hole은 교회의 약 25명의 일원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프로젝트를 감당하는 교회 여선교회 회장이다. 프로젝트는 간병인들을 위한 선물 가방을 만들고 St. Patrick’s Day에 기금마련을 위해 구운감자 세일을 하고, 도서관에 책을 공급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친절을 베풀면 그만한 보답이 있다’(‘It pays to be nice’)

Great Plains 연회와 함께 이 교회는 9월 18일에 몇 마일 떨어진 두 번째 캠퍼스인 Aldersgate Renew를 세웠다. 5번째 주일이 지난 후, 이 교회는 평균 110명에서 115명의 성인과 30명의 아이들이 출석했다.

Dick Bradford는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가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고 지역사회에 참여하게 되기를 원한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인종, 피부색 또는 신념에 관계없이 오는 모든 이들을 팔을 벌려 환영하고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교회를 넓히고, 환영의 장소로 만드는 Brooks 목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Brooks 목사는 약 40년간 목회를 해왔고 지난 3년은 Aldersgate 연합감리교회에서 사역했다. 그 사역 기간에 그가 겪은 인생 경험이 자비로운 접근법을 개발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저 친절을 베풀면 그만한 보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견뎌온 고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Brooks 목사는 그 자신을 보수적인 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다른 교회 스탭들이 그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는 모두와 일한다. “주님은 저를 사랑하시며, 저는 그들을 개의치 않고 사랑합니다.”

그는 사랑을 베풀 많은 필요를 본다. 성도들은 장애인 참전용사를 위해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가난한 이들의 집을 페인트 해주며, 그리고 “Sandwich Saturday”에 샌드위치 200개를 지역 성공회 교도와 함께 홈리스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사역들은 사람들을 모으고, 서로를 알아가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그들은 또한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Brooks 목사는 말했다: “모두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잘못되는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글쓴이 Tim Tanton은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Global Voices, News and Information 부서의 상무이사이다.

올린날: 2016년 12월 31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된 우리

갈라디아서 3 장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 말씀요약 —-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으로 잠겨서 세례를 받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입니다(갈 3:27). 갈라디아서 3:28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면, 그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가 된다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된 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교회(부르심을 입은 자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자들은 교회 안으로 부르심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우선 사람들 사이에 서로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벽, 하나가 되지 못하도록 했던 모든 차별과 원수된 것이 다 허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차별과 장벽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은 사랑으로 서로 연합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내 형제자매요, 골육지친이요, 내 자녀요 내 동무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든지 한 성도일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인종, 민족, 언어, 나라, 배경, 돈, 명예, 지식 등과 같은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람 사이의 차별과 장벽이 다 허물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집니다. 이 장벽은 가장 크고 결정적인 장벽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과 사람)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불렀습니다(엡 2:1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막힌 담이 허물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하나됨, 참된 통일이 있습니다(엡 1:10). 하나님과 원수된 것, 모든 막힌 담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다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통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언제나 교회 안에 거해야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언제나 이 하나의 교회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의 맨 처음 성도들로부터 시작해서 신약의 맨 마지막 회심자에 이르기까지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받아가진 성도들의 총수를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 교회는 하나이며, 우리는 이 하나의 교회를 공교회 또는 보편교회, 무형교회, 우주적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 교회는 한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역사에 걸쳐있고, 또한 한 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 전역에 걸쳐 존재하고 있어서 사람의 눈으로 다 볼 수도 없기 때문에 불가견적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라고도 부릅니다. 이 교회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교회입니다.

이 공교회는 이 지상에서 시대마다 지역마다 보이도록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마다 지역마다 보이도록 드러나는 교회를 “가견적 교회(보이는 교회)”, 또는 지역교회, 유형교회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보이는 교회를 중시하고 교회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교회에는 나가지 않겠다, 나는 얼마든지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개인적이고도 은밀하게 믿어서 구원을 얻을 것이고, 복잡하게 교회에 가서 사람들과 얽혀서 피곤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로 이끌림을 받아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통상적으로 교회로 이끌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교회 안에 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교회는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원리상,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교회 안에 거하고자 해야 합니다. “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지역교회에 속해서 공예배를 드리거나 교인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 말은 마치, “나는 머리는 사랑하지만 몸은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몸의 지체로서 머리와만 교제하고 몸의 다른 지체들과는 교제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 거해야 합니다.

지금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이야기한 뒤에(27절), 곧바로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는(28절)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과 교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교회를 중시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께로 이끌림을 받을 때에, 우리는 또한 지역마다 세워진 지역교회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고전 1:2).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또한 교회와 연합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복락들을 은사기관인 교회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인 신자들에게 흘러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부르시고, 교회에서 성도들이 나게 하십니다. 시온 곧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출생지(出生地, birthplace)입니다(시 87:5). 시온에서 나지 않은 성도가 어디에 있습니까?(시 87:6) 교회는 성도들의 기쁨이 머무는 곳이고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이 깃든 곳입니다(시 87:7; 16:3). 참으로 교회는 복된 곳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교회를 떠나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25장 2항)고 했습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생각하고,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

셋째로, 우리는 교회의 영광스러운 하나됨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교회를 세워주신 것을 인해서 언제나 깊이 감사하고, 교회의 한 지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하나의 교회의 지체로서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지상교회는 여전히 연약함을 가지고 있고 변질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들은 모두 다 유약합니다. 지상교회는 복음을 가르치는 면이나 성례를 시행하고 공예배를 드리는 정도에 따라 더 잘 보이기도 하고 덜 순수하기도 하며, 아무리 순수한 교회라고 하더라도 지상교회는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지상교회는 극도로 변질되고 타락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을 예배하는 교회가 항상 있을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4-5항).

교회는 하나의 교회이니,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모든 교직자들이 힘써 기도하며 행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기 위해서 은혜의 방도인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 신실하게 지키고 바르게 시행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는 진리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파수하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신실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온 교인들은 이를 위하여 함께 협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모든 무질서와 세속주의를 막아내어야 합니다.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행 2:46; 히 10:24-25). 우리는 교회를 중시해야 하며, 우리의 자녀들도 교회를 중시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자녀들로 양육해야 합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모든 시도를 배격해야 합니다. 마귀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깨뜨릴 수도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지만, 보이는 교회들의 연합과 하나됨을 깨뜨려서, 진리운동, 구원운동을 약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면서 한 교회의 교인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과 인내가 요구됩니다. 그렇지만 좋은 교인이 되지 못한 채 좋은 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지역교회 안에서 먼저 좋은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나의 태도가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태도와 그리 멀지 않고, 나와 교회와의 관계가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는 교회 안에서 나고 교회 안에서 자라고 양육을 받으며 살다가 교회 안에서 죽습니다. 교회 안에서 좋은 교인으로 태어나서 좋은 교인으로 살다가 좋은 교인으로 죽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됨

에베소서 4:3~6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라.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장은 1~3장에 걸쳐 나누었던 신학을 신앙으로 살아낼 것을 도전하며 시작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정체성과 부르심에 따라 합당히 행하기 위한 태도와 삶의 방식으로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요소는 3절의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높은 부르심을 받은 자로, 우리가 행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령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지켜내는 것 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 됨.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 됨.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하나 됨. 하나 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자 비밀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마치 가라지를 뿌리듯 교회를 분열시킬 거짓들을 뿌리고 다닙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 됨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사상과 잡신들을 뒤섞은 ‘가짜 하나 됨’을 만들어 교회들을 찢어놓고 분열시려 합니다. 이 시대, 진정한 교회의 하나 됨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 신부, 곧 하나 된 교회와 연합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됨 – 4절

본문 4~6절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한 요소들을 보게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됨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4절은 우리가 왜 하나인지, 그리고 왜 하나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성령님’을 말합니다. 우리는 한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의 외모, 가정환경, 직업, 기질은 모두 다르나 우리가 구원받도록 복음을 증거하신 분이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우리 안에서 구원을 유지하십니다. 그렇기에 다른 영을 받은 자들은 ‘가짜 하나 됨’에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주의하고 있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 됨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얼핏 교파를 초월한 아름다운 연합을 말하는 듯하나, 실상 성령님이 아닌 온갖 귀신들을 불러 모은 거짓 하나 됨을 말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18장에 등장하는 바벨론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성경을 말하는 듯하나, 성령이 없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과 교제할 때면, 우리 안의 성령께서 불편한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의 하나 됨은 한 성령 안에서 임을 기억합시다.

성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됨 – 5절

두 번째, 우리가 마땅히 하나인 이유로 5절은 성자 예수님을 말합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님 한 분 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한 분 왕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굴복함으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왕이 오직 예수님이시기에, 우리 역시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 가운데 예수님보다 높아져 있는 것이 없는지 점검하길 축원합니다. 내 안에 말씀이 기준 되지 못한 마음과 생각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과 맞서 외치고 주장하는 정의가 무엇으로 말미암았는지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위배된 세상의 일들로 인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북한 주민들을 위하여 소리를 발하고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인해, 주님의 뜻을 위해 교회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의 몸이 되었다면, 주님의 정렬 안에 놓이도록 기도합시다. 나의 사심이 버려지고 머리되신 주님의 뜻에 순복되어지길 축원합니다. 하나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개인의 욕구들을 채우기 위한 사조직처럼 공동체가 운영되고 있다면, 이는 악한 합동 모임일 뿐입니다. 때로 우리가 희생할지라도, 주님의 머리되심 안에서 질서를 따라 하나 됨을 이룹시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될 때 흘러오는 능력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할 것입니다.

성부 아버지 안에서 하나 됨 – 6절

세 번째로 6절은 우리가 하나인 당위성에 대해 성부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지음 받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흙으로 빚으셨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한 분 이십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시고 간절한 기도로 주님의 소원,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에는 하나 된 우리가 있습니다.

하나 됨 안에서 지켜지는 평강

하나 됨을 나누는 오늘, 우리 교회가 맞이한 새로운 시즌 속에서 주님께 더욱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담임목사인 저와 2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동역하던 사역자들을 또 다른 교회의 담임 목회자와 사역자로 파송하며, 교회의 하나 됨의 신비를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하나 됨은 우리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비밀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평강이 흔들리고 있다면,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유일한 왕, 예수님의 온전한 다스림 안에서 그에게 의탁됨에 의해 흘러오는 평강이 곧 샬롬이라 했습니다. 이 평강이 하나 됨을 지키며 하나 됨이 평강을 지킵니다. 내 심령을 불안하게 하고 하나 됨에서 갈라지게 하는 요소가 있다면, 떠나가길 기도해야 합니다. 뱀 같은 지혜를 기억합시다. 뱀은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결코 적에게 머리를 내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내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머리되신 예수님보다 우선시 된다면, 실상 가장 큰 곤경과 실패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의 하나 됨을 사수하길 축원합니다. 하나 됨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며, 하나 됨으로 인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전진할 수 있습니다.

하나됨을 위한 네가지 단계

세 분은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같은 목표를 위해 함께 사역하십니다.

발단: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

사도장께서는“하나됨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다소 제한되어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전하며 인류인 우리를 위한 자신의 관점을 피력하셨습니다. “갈등이나 언쟁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됨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더 큰 열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께서 하나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사도장께서는 말씀을 이어 “우리 함께 하나됨이 결여되는 그 기원을 살펴봅시다.” 라고 말씀하시며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완전한 친교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에 빠진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손들에게도 계속이어졌습니다. 그곳에는 서로에 대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하나됨을 이루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인간 사이의 하나됨이란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첫 번째 단계의 초점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상황을 나누려고, 우리와 함께 느끼고 우리와 함께 고통 받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하셨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만찬을 주시고 그럼으로써 우리 안의 성스러운 삶이 발전될 수 있습니다.”

사도장께서는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인간 안의 하나님 이십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나머지는 우리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만 합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예를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됨 (갈3:23-29) / 2002. 7. 28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주자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얻은 큰 구원, 큰 축복 중 하나는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여 [하나의 새 사람]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그리스도가 우리 옛 사람을 십자가 안에서 다 처리하고 지금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한 새 사람으로 다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 또는 자유인이나 종,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다는 것은 이런 차별만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사람은 다 다른데 차이는 없고 차별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차이는 있는데 다만 판단이나 차별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차이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데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 물론 육체적 차이는 여전히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의 육신적 형편이 다 같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실제적 변화가 없는데 말만 하나다 하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생명이 바뀌고 생각과 행동이 바뀌어 다 하나로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한 새 사람이 있고 그 안으로 우리가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 다 하나가 되더라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라는 큰 몸에는 아브라함도 들어와 있고 모세도 들어와 있고 다윗도 들어와 있고 베드로도 들어와 있는데 우리도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안으로 들어오면 이전의 모든 차이는 없어지고 다 예수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몸이 되게 된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있는데 서로 같아지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없어지고 너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없어지고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만 남게 되므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인데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나타낼 자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대표자 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새로운 하나의 사람이요 새로운 종류의 인류이다. 예수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처음이요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있는 것이다. 그 숫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숫자와 같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따로 따로 그리스도(하나님을 대표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의 큰 그리스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와 몸의 각 부분(지체)을 이루는 각 성도들의 단체로 구성되는 하나의 거대한 새 사람이 된다.

성경은 부활하기 전의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지만 부활 후에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른다. 그것은 예수가 부활 후에 교회의 머리 곧 단체적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셨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의 이전 성분이 어떠했든지 상관없이 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새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소유하게 되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의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위치에서 옆의 사람을 보면 점점 자기와 닮아지며 또한 자신도 옆의 사람과 닮아져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을 때 사람은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사람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며 판단케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으면 사람은 서로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서로 차별하고 마음에 안 들어서 미워하고 멀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적 마음은 따지는 마음이고 판단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으로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다른 사람을 율법으로 판단하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담은 처음에 하와를 볼 때 ‘나는 남자인데 저 사람은 여자이니 나와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든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보다 더 낫다든지 네가 나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가 싫다거나 너와 나는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서로 (율법으로) 판단하고 차별하고 분리하며 다투게 된 것은 사탄이 사람 안에 선악과를 넣어준 이후부터이다.

이런 생각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 이후 사람은 서로를 생명으로서가 아니라 율법으로서 대하게 되었다. 율법으로 보니 사람은 다 다르고 다 마음에 안 들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누구도 똑 같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결국 사람의 수준이 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 속에는 ‘다르면 하나 될 수 없다’는 사탄의 거짓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율법(선악)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세상에는 나와 연합할 수 있는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다 이런 저런 차이로 인해 ‘같이 살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류에게는 큰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율법의 요구에 온전히 부응하지 못해서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서로 율법을 지키는 수준이 다르다는 것만 본다. 그리하여 누구도 득 볼 일 없는 판단을 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가보면 두 사람만 모여도 아래 위를 따지며 줄부터 세우려는 것을 본다. 40명이 모인 반에 가보면 우리가 보기에는 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야 하는 같은 처지의 ‘동무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데도 자기들 안에서는 친구나 동무는 없고 1등부터 40등까지의 줄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 누구도 같을 수 없다. 1등이거나 30등이거나 90점짜리거나 50점짜리일 뿐이지 그냥 학생, 그냥 사람으로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 꼭 그렇게 집어서 따지거나 그렇게 줄을 세우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아도 결국은 그렇게 되는데 그것은 각 사람 마음 속에 그런 ‘줄을 세우는 본성 곧 사람을 선악으로 따지고 판단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냥 사람이 아니고 그냥 같은 피조물,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줄 가운데서 몇째냐 하는 것이 되니 어느 사람도 같이 살고 연합할 만큼 동질성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이 얼마나 뿌리깊게 작용하고 있는지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우리 마음 속에는 본성적으로 두 가지 생각이 작용하는데 그 첫째는 ‘너는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나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고 둘째는 ‘그러므로 너는 나보다 못하다. 나는 너보다 낫다’ 하는 생각이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서로 만나면 먼저 따지고 판단하기부터 한다. 누가 자기를 재판자로 세운 것도 아닌데, 그리고 자신이 완전하여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리고 어디에 누가 완전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사람 안에 본래부터 심어놓으신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사람에게 몰래 집어넣어 놓은 거짓된 생각이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지으사 서로 화평케 만드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 자유인이나 종, 남자나 여자, 어른과 아이, 지식인과 무식인,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고 있던 모든 장벽을 자기 육체로(십자가에서)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셨다.

사람을 나누게 하는 요소는 너무나 많다. 그 중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나누는 요소는 주로 종교적인 규례였다. 안식일, 성전에서의 제사, 할례, 음식을 가리는 일과 같은 종교적 규례로 인해 둘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이런 것까지 다 폐하심으로써 서로가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여셨다.

가장 근본적인 장벽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죄’이다. 주님은 이 죄를 처리하기 위해 자기가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와 나의 모든 차이와 차별과 분열을 가져오는 모든 장벽을 다 끝내고 허물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연합할 수 없는 절대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십자가를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서로 차별할 수밖에 없고 서로 갈라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은 모든 것들이 다 헛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나는 너와 서로 연합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다 헛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오래된 전통이든 최근에 생긴 원칙이든 다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덤에 가면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계획, 모든 잘난 것과 대단하다는 것이 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음 앞에 가면 인간의 모든 계획과 소망이 다 허무하다는 것을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 가서야 그것을 깨닫게 되고 그때까지는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한다면 그의 인생은 허무하게 되고 만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미리 우리를 끝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이 죽음은 우리 육신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미리 다 끝내는 것이다. 사업에 몰두해 있는 사람도 갑자기 병에 걸려서 죽음에 이르게 되면 “아 사업은 헛것이구나!”하게 되고, 고시에 몰두하는 고시생이나 연구에 몰두하는 교수도 죽음이 임박하면 “아 공부도 헛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되며, 쾌락에 도취돼있던 사람도 죽음이 다가오면 “이것도 헛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낸다. 십자가는 이와 같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끝내기 위해 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분 혼자 지신 것이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에 즉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지만 실제의 체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세례를 받으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각종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확인받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리고 날마다의 단련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끝내시고자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대표할 하나의 우주적 새 사람을 얻으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한 새 사람]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을 폐지하고 허무시는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세계다. 한 새사람이라고 표현되는 새로운 인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전적으로 새로운 성품과 본질이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교리 저런 교리, 이런 규례 저런 규례를 가지고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해보니 이런 것들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된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다른 교회처럼 어떤 규칙이나 율법이나 교리나 어떤 특별한 형식이나 의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끼리는 편하고 좋은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도 그들을 보면 이상하다. 우리가 그들을 볼 때는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들이 우리를 볼 때는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예배를 본다고 하는 자리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꼭 염불 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은 이상하다. 왜 주기도문도 외우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축복기도를 안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꼭 축복기도를 한다고 해서 축복이 되겠는가? 사람이 복된 위치에 있고, 사람이 달라지면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런 일이 허무한 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서로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서로 다른 것들이 다른 교회와 우리 사이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안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안에서 성격이 서로 다르다든가, 관습이 다르다든가, 취미가 다르다든가, 어떤 기호가 다르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긴 옷을 입기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짧은 옷을 즐겨 입는다. 어떤 사람은 이런 교제를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저런 교제를 좋아한다. 여러 가지 기호와 습성이 다를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 때문에 걸림이 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런 것들은 근본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인데, 이것으로 인해 속이 상하고, 하나님 말씀이 안 들리고, 어떤 형제의 말이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호감이 가는 형제의 말은 잘 들리는데 호감이 가지 않는 형제의 말은 듣기 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집회 때 좋아하는 형제가 나와서 간증하면 잘 들리는데 싫어하는 형제가 나오면 옆에 사람과 얘기한다든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서로 연합하는데 방해되는 것들이다. 우리 안에는 굵은 문제는 없다. 큰 문제는 이미 다 지나갔다. 그러나 지극히 사소한 아주 작은 문제들이 우리의 연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면이 다를지라도 한 본질, 한 생명을 봐야하고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은, 외부적으로 다른 것이나 그것을 획일화시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외부적으로 다를지라도 한 본성, 한 생명, 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다.

한 본성, 한 말씀, 한 생명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우리의 외형적인 것은 서로 달라도 본질은 서로 같다. 우리는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의 주장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주장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과 서로 화합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교제를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장]이다.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옛날에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간증을 하러 나와서도 자기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99%정도는 없어졌다. 자기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열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주장을 하면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장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분열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좋은 것을 주장해도 그렇고, 나쁜 것을 주장해도 그렇다. 주장하게 되면 반드시 분열이 생기게 된다. 교회를 분열케하는 심각한 문제가 바로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자기와 다른 사람의 다른 점, 반대되는 점을 자기 입장에서 통일시키려고 하는데서 나온다. 주장이 심해지면 속이 상하게 되고, 불쾌해지게 되고, 싸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가정 안에서도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하고, 교회 안에서도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한다. 교회는 주장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되는 곳이다. 하나를 위해서는 주장을 버려야 한다. 어떤 주장이라도 주장을 버려야 한다. 내 생각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안 받아들이는 것을 기어코 설득하려 하든가 주장하려고 한다면 분열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상하게도 무엇인가를 획일화시키려고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통일시키려고 생각하니까 조화(調和)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 인간이 철저하게 만든 제도는 주장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인간이 만든 것이다. 물론 다른 것도 다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이 계획적으로 만든 것이 공산주의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주장을 갖고 있다. 가장 철저한 주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장 많은 희생을 가져왔던 것이다. 같은 정치를 하더라도 저절로 흘러 내려가면서 되어진 것과 계획적으로 설계도를 그려서 하는 것은 다르다. 공산주의는 미리 설계도를 만들어서 그대로 시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많은 희생이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열하게 하는 요소들을 끝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고 끝낸 것이다. 십자가에 갔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도, 음식을 가려먹은 것도, 안식일을 지킨 것도 아무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오직 내 자신밖에는 설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 영혼은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주장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 모든 인류를 이끌고 십자가 앞으로 가신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 십자가 앞으로 가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우리

061018(에베소서2:13~18)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우리

* 예수님은 주의 백성인 우리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켜주셔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되는 것의 가장 좋은 모델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라고 하신다.

– 예수님은 자주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고 하셨다(요 10:30).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 하셨다(요 14:24).

*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이 하나이시다. 삼위일체이시다.

–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으며, 성령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적용하시고 구원받은 자들을 지켜주신다.”

*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면서 완벽한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는 지금 하나가 되어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함께 예배하면서, 동일한 말씀을 함께 듣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원하셨던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의 모습이다.

1.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완벽한 하나로서 완성하신 최고의 작품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구원이다(엡1:3~5; 고후1:22)

– 하나님이 그 놀라운 하나 되심의 결과로 완성하신 구원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놀라운 은혜이다(엡2:8)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완전한 협력을 통해 이루신 구원을 은혜의 선물로 받은 자들로서, 우리들 역시 은혜 안에서 하나가 이미 되었고 계속해서 하나를 이루어 가야 하는 자들이다.

* 우리가 같은 구원을 받았고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되었지만, 우리는 모두가 다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과 성령님이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지만 개별적인 삼위로 계신다.

– 바울의 편지를 받은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얼마나 다른 부류의 사람인지 인정하고 말한다. 인종적으로, 신앙적으로, 언약에 관하여, 모두 다르다.

*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래부터 너무 달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우리가 서로 다름은 당연하다. 한 가족 안에서도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언어가 다르고, 집을 나가서 생활하는 환경도 다르고, 커뮤니케이션 하는 스타일 뿐만 아니라 방식도 다르다.

* 하지만 예수 믿는 가족, 또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신앙의 한 공동체는 그런 다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엡 2:14). 예수님은 화평이시므로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요소들, 때로는 극복하기 힘든 이질감과 심지어 적대감까지도 다 허물어 버리시고 하나로 화목케 하신다. 예수님 통하여 소통하자.

* 예수님은 이처럼 전혀 다른 둘로 하나를 만드신다(엡 2:15). 각 사람이 동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 믿음과 구원의 일로 인하여 참된 하나됨이 일어난다(고후 5:17)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동일한 믿음 안에서 하나된다. 우리 교회와 가정들이, 그리고 우리 각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은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믿음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데, 우리가 믿는 분이 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 된다.

* 우리는 같은 믿음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바라봄으로 하나된다. 우리가 가진 다른 요소들과 성격들과 방법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인 우리 안에서 ‘조화로움’이 되고 부족한 것에 대한 ‘보충’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 각자 처한 상황과 배경과 언어와 성격과 성향은 달라도, 바라보는 주님은 같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된다. 가변적인 것으로 하나되려 하지 말고, 변치 않는 영원한 것으로 하나되라. 한 방향을 바라봄으로 하나된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같이 바라봄으로 하나된다.

2.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간다

* 예수 안에서 하나된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결국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엡 2:18) 영혼이 함께 있는 육체이므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교회도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 교회 뿐만 아니라 믿음의 가정들도 한 몸을 온전히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모든 식구들과 함께 계심으로써 하나됨이 가능하다.

*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모든 자들과 함께 있고, 이는 우리가 한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시므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요엘2:28).ex) 고넬료 가정

– 고넬료 가정이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어른들과 자녀들 예외없이 모든 이들에게 강하게 임하셨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시고, 우리를 한 아버지 앞으로 이끌어가신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므로 아들의 영이시다(갈 4:6) 우리 안에 아들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한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그의 백성, 그의 자녀가 되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다. 그것을 힘써 지켜나가야 한다(엡 4:3~4).

– 우리가 교회와 가정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감동하여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되기를 힘써야 한다. 말씀은 가르침인 동시에 방향이다.

* 힘써 지키라… 성실하게 열심을 다하여 꾸준히 행하라는 말씀이다.

–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성실하게 열심히 서로를 섬기며, 함께 주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져 가야 한다.

학습 및 적용 문제

1)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는데,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이 삼위이시면서 하나이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믿음으로 고백하자.

2) 하나님 안에서 하나된다는 것은 우선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라 했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기 위해 어떠한 영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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