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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이 시린 어느 겨울날,
긴장한 표정의 경찰들이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곧이어 사방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여기도 있습니다!” “여기도요!”
땅속에서 찾아낸 것은 다름 아닌 시신!
그 모습은 잔혹 그 자체였다.
한 구덩이에서 무려 여덟 구의 시신이 한꺼번에 나오기도 하고,
갓난아기를 업은 채 그대로 매장된 시신도 있었다.
놀랍게도 이날 나온 시신만 40여 구!
모두 살해 후 암매장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전국에 이런 암매장 현장이 수십 곳에 달했고,
무려 300구가 넘는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수사 결과, 살인에 가담한 사람만 18명!
“1월에 20세가량 된 남성을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
“모릅니다. ‘대원님’이 죽이라고 해서 죽였습니다.”
살인의 이유는 오직 하나, ‘대원님’의 뜻이었다는 것!
잔혹한 학살의 배후에 있는 ‘대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한번 발을 들이면 죽어서야 빠져나올 수 있다는 ‘이곳’!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한 동굴에서 펼쳐진 잔혹한 살인 트릭의 진실과
대한민국 최악의 연쇄 살인 사건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친다!
장도연, 장성규, 장현성, 세 이야기꾼이 전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40회 – 죽음의 동굴 –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2022.8.4 방송)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풀영상 다시보기
▶ 꼬꼬무 홈페이지 : https://programs.sbs.co.kr/thetail/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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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나무위키: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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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삼청교육대 참혹한 현실 파헤친다 – 전국매일신문

꼬꼬무 시즌3′ 삼청교육대 참혹한 현실 파헤친다(사진=SBS).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삼청교육대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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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무료 다시보기 – 피클 :: peekle.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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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달리 [SBS 교양 공식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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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8.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RZJu_E2ZpPo

‘꼬꼬무 시즌3’ 삼청교육대 참혹한 현실 파헤친다

‘꼬꼬무 시즌3’ 삼청교육대 참혹한 현실 파헤친다(사진=SBS)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삼청교육대를 조명한다.

9일 방송될 ‘꼬꼬무’는 ‘1980 불량배 소탕 작전’ 편이다. ‘순화’, ‘갱생’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삼청교육대의 가혹행위를 파헤쳐보고, 지금도 또렷이 새겨져 있는 그날의 공포를 피해 당사자들의 절절한 호소를 통해 들어본다.

특히 지난 7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삼청교육 피해 사건’을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발생한 대규모 인권침해 사건이라 판단하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기에, 이번 ‘꼬꼬무’ 방송은 시청자에게 더 의미있게 다가올 전망이다.

때는 1980년 서울. 무더운 여름, 평범한 이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평소처럼 일상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놀던 고등학생 이승호(18, 가명), 동네 아이들과 물놀이를 즐기던 한일영(23), 형과 함께 사진관을 운영하던 박이수(24) 역시 한순간에 사라졌다.

사라진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너희는 하늘을 볼 자격도 없다”, “너희 같은 인간쓰레기들은 죽어 나가도 눈 깜짝할 일 없어” 등의 폭언과 함께 ‘탕! 탕! 탕!’ 귀가 찢어질 듯한 공포탄 소리가 들렸다. 또 빨간 모자를 쓴 군인들의 몽둥이세례가 쏟아졌다. 이곳은 바로 ‘군부대’였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중학생 정도 되는 앳된 소년에 여성들까지, 이렇게 갑자기 군부대로 끌려가게 된 사람들이 무려 4만 명에 이른다. 이 많은 사람은 도대체 왜 이곳으로 끌려온 걸까.

1980년 8월, ‘사회악 일소 특별 조치’ 일명 ‘불량배 소탕 작전’이 발표됐다. 사회악을 제거하고 새 사람을 만든다는 명분 아래 대대적인 홍보가 진행됐다. 그런데 그 아래 숨겨진 진실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훈련과 쏟아지는 매타작, 끔찍한 가혹행위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까지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은 따로 있었다. 가축보다 못하면 고기도 먹지 말라는 이곳의 끔찍한 규율. 인간의 존엄성을 지우고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해야만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불량배 교육장의 24시간을 ‘꼬꼬무’가 낱낱이 공개한다.

당시 18살 고등학생이었던 이승호 씨가 ‘꼬꼬무’ 카메라 앞에 섰다. 걱정돼 전날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방송에 나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겠다고 하니 주위에서는 극구 말렸다고 한다. 사회가 아무리 좋아졌어도 여전히 인식이 안 좋은데 굳이 나가서 말할 필요가 있냐고 했다.

무려 43년이 지났는데도 승호 씨가 털어놓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승호 씨가 카메라 앞에 앉은 이유는 뭘까.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승호 씨가 전한 ‘그날 이야기’는 ‘장트리오’와 이야기 친구들 모두의 마음을 울렸다.

이번 이야기에 함께 한 친구들은 개그맨 정성호, 배우 임지연, 윤균상이다.

‘꼬꼬무’에 매주 오고 싶다는 ‘찐 팬’ 정성호가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다시 찾아왔다. 초반 신들린 성대모사로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그는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순식간에 몰입하며 장성규와 눈시울을 붉히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임지연이 ‘꼬꼬무’를 방문했다. 임지연은 증언자들의 끔찍한 이야기에 연신 깊은 충격을 받았고 “이 이야기를 몰랐다는 게 죄송스럽다”라며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현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윤균상이 이번엔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를 찾았다. 장현성에 이어 장도연은 얼마나 잘할지 기대하고 왔다는 유쾌한 장난으로 녹화를 시작했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윤균상은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날 이야기를 듣고 “나도 ‘삼청교육대’ 에 대해 잘 모르고 무심코 했던 말과 행동을 반성한다”며 진한 울림을 전했다.

진실화해위가 위법으로 결정 내린 ‘1980 불량배 소탕 작전’은 과연 무엇인지, 삼청교육대를 조명할 ‘꼬꼬무’는 9일 밤 10시 30분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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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27회 대구지하철 참사 (전융남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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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27회 대구지하철 참사

(전융남 씨 이야기)

5월 5일 방송되는 SBS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전하지 못한 목소리, 지화(火)철 1080호 미스터리’ 편이다. 너무도 안타까운 이야기,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야기.

[꼬꼬무 시즌3] 27회 대구지하철 참사 (전융남 씨 이야기)

대구지하철 참사

발생일 –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발생위치 –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탑승인원 – 471명

*사망 – 192명 (이 중 186명은 신원이 확인되어 유가족에게 유해를 전해 줄 수 있었지만, 시신이 완전히 소실된 3명, DNA는 확보했으나 연고자를 찾지 못한 3명은 미신고자로 남아있다.)

*실종 – 6명 (사망자는 시신이 없더라도 사망이 인정되었지만, 이때는 사망이 인정되지 않은 경우다. 시체를 찾지 못하는 사망자인 셈이다. 그리고 시신은 있는데 훼손 상태가 심하여 신원 확인은 물론이고, 더욱 심한 경우에는 성별마저 판별이 불가능한 시신도 존재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신원 확인이 안 되어서 코드명으로 있다.)

*부상 – 151명

범인 – 김대한

대구 지하철 참사를 일으킨 방화살인 범죄자.

출생 – 1947년 2월 8일 경상북도 예천군

사망 – 2004년 8월 30일 (향년 57세) 경상남도 진주시

사인 – 뇌졸중

직업 – 무직 (前 택시 기사, 화물차 기사.)

가족 – 부인, 슬하 1남 1녀

1947년에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태어났다. 범행 이전에는 대구시에 거주했다. 운송업과 같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으나, 2001년 4월 20일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지적 장애 2급 판정을 받은 후 백수로 지냈다. 그러다 2003년 2월 18일에 범행 도구인 라이터와 휘발유가 담긴 샴푸통을 준비한 뒤, 근처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입해 샴푸통에 담고, 대구 도시철도 1호선의 송현역에서 운행 번호 1079호에 탑승하여, 맨 첫 번째 경로석에 앉아있다가 열차가 중앙로역에 정차하자 열차에 불을 질렀고, 자신의 몸에 불이 붙자 당황하여 탈출했다. 그리고 이것은 대구 지하철 참사의 불씨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맞은편에 정차한 운행 번호 1080호 열차는 사전 통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승객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대피가 늦어졌고, 그 결과 192명 사망, 151명 부상, 21명 실종이라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범행 동기는 “뇌졸중 치료를 받았음에도 전혀 회복되지 않자 자살을 생각했는데, 혼자 죽기엔 너무나도 억울해서였다고. 그래 놓고 본인은 화상을 입게 되자 겁을 먹고 도망갔다.

대구광역시 북구 소재의 한 병원에서 피해자인 척 치료를 받다가 긴급 체포되어 1심과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진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듬 해인 2004년 8월 30일 오전 8시 45분 뇌졸중으로 인한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진주 의료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사망했다.

피의자 김대한은 당시 화상을 입어 달아나던 중 북구 노원동 3가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범죄 사실이 드러나 검거, 구속된 것.

그는 마치 정신 이상처럼 굴려는 듯 진술이 뒤죽박죽이었으며, 정신이상자가 저지른 사고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부채질하는 거 아닌가 우려도 나왔지만 정신과 의사들의 판단에 의하면 정신이상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심신장애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1심에서 현존전차방화치사죄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항소하였으나 2심에서도 항소를 기각,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러나 상고는 포기하고 교도소 안에서도 횡설수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주교도소로 이감됐다가, 2004년 8월 30일 지병인 호흡 곤란과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김대한은 2001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상반신, 하반신 모두 장애가 와서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김대한의 방화 사유는 심한 우울증 후 정신 질환이 심해진 데 따른 판단력 상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한의 아들은 대구 중부경찰서에 출두하여 ‘아버지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남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등 정신적으로 심한 문제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병인 뇌졸중으로 인한 울분을 방화로 토한 사건이라는 분석도 있어 방화 사유에 대한 의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김대한의 직계 가족은 사건 이후 곧 경북 지역을 떠났다. 친척들도 이쪽 집안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 당시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 중인 전융남씨 (왼쪽사진)

전융남 씨 이야기

범인 김대한을 최초로 목격하신 분.

출근시간이 지나 다소 한가로웠던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0분경 전융남 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중앙로역 근처에 있던 대구우체국으로 컴퓨터 교육을 받으러 가는 중이었다.

「중앙로 역 바로 전 승강장인 반월당 역에서부터 앞에 앉은 사람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오른쪽에는 청색 가방을 끼고 있었는데 안에는 플라스틱 우유통이 들어있었으며 오른손이 불편한 듯 왼손으로 뚜껑을 만지작거리는데 제대로 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 씨는 「목이 타서 우유를 마시려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오래전부터 부인이 중풍으로 앓아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었기에 이 사람 또한 그러는 것 같아 측은한 마음이 들어 도와주려 했다.

「한데 그 사람이 왼쪽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더니 켰다 껐다 하더군요」 「저는 깜짝 놀라 왜 거기서 위험하게 라이터를 켜느냐고 소리쳤어요」

전동차가 반월당을 지나 중앙로 역으로 진입하던 때였다.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이 안고 있던 플라스틱 통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 사람이 들고 있던 통은 바닥에 던져졌고 그 자신도 다리에 불이 붙어 고통스러운 나머지 승강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불길은 지하철 의자부터 순식간에 타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우선 이 사람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웃옷을 벗고 불을 끄기 시작했습니다」

객차 안의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순간 지하철 구내역의 전기는 나가고 암흑에 휩싸였으며 매캐한 연기가 전 씨의 코를 파고들었다.

「독한 냄새 때문에 겨우 옷으로 입을 막고 엉금엉금 기다시피해 지하철을 빠져나왔습니다. 정말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악몽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전 씨는 경찰에 자신이 겪은 일을 진술함으로써 사고 발생 2시간 여만에 용의자를 검거하게 됐다.

당시 대구지하철 2호선에서 방화미수범을 제압한 김형석, 최고영, 주세별(왼쪽부터)군.

사건이 커진 이유

1079 열차 기관사는 화재 발생 이후 초기 진화에 실패하자 중앙사령실에 통보하지 않은 채 대피했고, 결국 이로 인한 지하철 사령실의 오판으로 9시 55분에 원래 역을 무정차 통과해야 했던 1080열차가 중앙로역 반대편 선로에 정차했다.

* 당시 1080이 출발 후 도착한 중앙역-대구역 사이의 거리는 700m, 기관차가 아무리 천천히 출발해도 2분 남짓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운전사령이 판단을 달리 했다면 1080차의 피해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중앙 사령실에서 119에 신고를 늦게 했고, 1080열차 기관사가 출입문을 열어주었지만, 이후 마스터 콘트롤 키를 뽑고 탈출하였다. 기관사가 일부러 마스터키를 뽑고 탈출한 것이 아니고 사령실의 지시였다.

사실 위의 경과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비상상황 종료 이후 열차탈취를 막기 위해 기관사는 탈출 전 마스터키와 제동 핸들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1080열차 기관사는 역사내 연기로 인해 1079열차에 불이 붙은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지하철은 가연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배웠기에(불량 내장재로 인해 화재가 커졌다) 이렇게 심각한 화재였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였기에, 1080열차 기관사는 사후 안전 관리 문제로 금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흑역사] 대구지하철 참사, 당시 통신녹음 공개

사건 확대의 원인으로는 다음 내용들이 꼽힌다.

마스터키가 뽑히는 바람에 출입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전동차의 경우에는 대체로 이렇게 생겼다. 마스터키가 뽑히면 비상제동/브레이크 등 일부 기능을 제외하곤, 열차의 모든 기능이 그 즉시 정지된다. TGV의 경우, 마스터키가 감지되지 않으면 즉시 제동이 체결된다. 물론 기관사는 기관차 탈취를 막기 위해 운전실을 떠날 경우 무조건 마스터키와 제동 손잡이를 뽑고 탈출해야 하지만, 그 당시 기관사가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조치를 취했거나 운전사령의 정확한 지령을 통해 마스터키를 제거하지 않고 출입문 개방 시도를 하거나 직접 수동으로 열었다면 더 큰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비상시 문을 수동으로 열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갇힌 사람들이 많았다. 지하철 문은 보통 문 옆 의자 아래나 벽면에 있는 뚜껑을 열고 그 안의 레버를 당기면 손으로 열 수 있는데, 사고 전에 이 방법이 시민들에게 홍보가 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레버 위치와 사용법에 대해서 아주 조그맣게 써놨기 때문에 관계자나 철덕, 지하철 타면서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들었다. 당시에는 비상레버 사용법이 지금처럼 전동차 문짝과 의자 옆면에 크게 적혀있지 않았고 레버 주변에만 작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2003년 당시에 국내에서 운용되던 전동차들은 공압식 문으로, 밸브 코크가 모두 의자 밑에 위치해 있어서 진짜로 방법을 아는 사람 아니면은 문 여는 비상코크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이 비상코크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아서 공기가 모두 빠지기 전까지 몇 초 정도의 대피 지연이 불가피했다. 대피 지연으로 인해 열차 안에서 호흡곤란에 빠진 승객들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참사 이후 이런 심각한 문제가 지적받으면서, 이후엔 개방 레버가 출입문 바로 옆으로 옮겨지고 전자식 도어의 보급이 확산됐다. 하도 홍보를 많이 해서 이제는 지하철 문과 스크린도어를 수동으로 열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방화 셔터가 일찍 닫히면서 나오려던 사람들도 나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화재가 난 1079열차에 비해 훨씬 많은 인명피해가 1080열차에서 발생하였다.

물론 방화 셔터에는 화재가 발생한 쪽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닫히는 경우를 대비해 문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자주 이용하는 역이든 아니든 평소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아니라면 찾기 힘들다. 찾는다 해도 좁은 문으로 다수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화재 당시 중앙로역은 연기가 발생하여 시야가 극도로 차단되어 있는 데다가 단전 상태였기 때문에 전등까지 모두 나가 문 손잡이를 찾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손전등 기능이 많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엔 그런 기능이 없었고, 피처폰의 저열한 화면 밝기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구지하철 공사의 거듭된 인력 감축 때문에 안전요원이 없었고, 역사 상주 직원이 4~5명뿐이었으며 안전 교육을 제대로 이수받지 못했다. 때문에 신속한 대피 안내가 불가능했다.

다행히도 탈출 방법을 알고 있던 사람이 몇몇 객차에 타고 있었기에, 그나마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예컨대 많은 인명피해가 난 1080 열차의 경우 4호 객차에 타고 있던 승객 중에는 당시 철도청 공무원이었던 권춘섭(당시 금호역 역장)이 사태를 직감하고 비상 코크를 취급하여 출입문을 수동 개방하였다.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당시 반대편 차선에서 중앙로역에 들어온 1080호 전동차의 한 객차 안에서 연기가 차오르자 승객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불안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공개됐다. 당시 이 전동차에 탄 사람들은 ‘잠시 기다리라’는 내용의 안내방송을 들은 뒤 전동차 출발이나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이 사진을 언론 등에 제공한 류호정 씨는 이 전동차를 타고 있다가 두 컷의 사진을 찍은 뒤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으나 연기에 질식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겨레신문, 2003년 2월 19일 치) 사진/ 류호정

희생자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화상보다는 유독가스에 의한 기도 화상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지만, 그렇다 해도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유해들은 형체도 못 알아볼 만큼 처참한 상태였다. 심지어 뼛가루조차 못 찾아들고 있던 지팡이 하나만으로 사망이 인정되기도 했다. ㅠ

사고 이후

사고 다음날 정부는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고, 당월 25일 대구광역시 당국은 윤진태 대구광역시 지하철 공사 사장을 해임시키면서도 그다음 날 시청 공무원, 지하철 종사자, 대민지원 온 육군 병력들을 동원해 현장 및 월배 차량기지로 실려온 사고 열차들을 물청소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해 유족들과 주변인들을 기겁하게 만들고 분노케 했던 사건도 있었다.

이 사고로 국내외에서 구호 성금으로 668억 원이 모금되었다. 중앙로 일대 도로의 지반 구조물이 손상되며 2003년 2월 26일부터 버스 및 차량 통행이 일시적으로 금지되었다가 2003년 4월 10일이 되어서야 해제되었고 사고로 운행이 중단되었던 대구지하철 1호선은 2003년 10월 21일 전 구간 운행을 재개하고, 2003년 12월 31일 중앙로역이 10개월 만에 복구를 마치며 정상화되었다.

참사 12주기 추모벽이 중앙로 역 지하 2층에 마련되었다고 한다. 국민성금 5억 2,000만 원을 들여 길이 27m, 폭 3m, 340㎡ 넓이로 조성되었으며, 추모 공간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벽과 사건 당시 불에 그을린 벽과 그리고 화재의 열기에 수화기가 녹아내린 공중전화, 당시에 있었던 매점, 혈압측정기, 지하철 사물함, ATM기와 희생자의 유류품 등도 전시하고 있다.

팔공산에 위치한 대구광역시 시민안전테마파크에는 당시 불에 탄 1079 열차 전동차 몇 량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건을 가정해서 인체에 무해한 짙은 연기를 뿌려놓고 당시의 사건을 체험할 수 있다.

2014년 8월에 대구광역시의 한 취객이 문재인 당시 의원을 죽이러 간다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가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문재인 의원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위해선 열심히 뛰면서 정작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사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구 지하철 참사가 벌어졌을 당시에도 유족들을 비밀리에 도왔음이 유족 중 한 명인 박성찬 씨에 의해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금고 5년형을 받은 기관사는 2008년 출소 후, 설령 그때로 돌아간들 다시는 전동차에 오르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 사건 이후로 강화된 지하철 역사 내 인화물질 반입 통제가 시행됐다.

희생자들의 마지막 메시지

각종 매체들을 통해 희생자들이 휴대전화를 통해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대화하던 내용들이 알려져 눈시울을 적셨다.

「잘 잤어요. 여긴 날씨 맑음. 오늘 하루 보고 싶어도 쬐금만 참아요.」

사고 발생 7분 전(오전 9시 46분) (사고 발생 9시 53분) 예비 신부 송혜정이 예비 신랑 이호용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 좀 있으면 중앙로역을 지난다. 곧 갈게. 조금만 기다려.”

사고 발생 3분 전(오전 9시 50분) 서동민이 선배 송두수에게 한 통화기록 중

“지금 지하철인데 거의 사무실에 도착했어. 저녁밥 맛있게 준비해 놓을 테니깐 오늘 빨리 퇴근해요!”

사고 발생 4분 전(오전 9시 49분) 김인옥이 남편 이홍원에게 한 통화기록 중

“여보, 여보! 불이 났는데 문이 안 열려요. 숨을 못 쉬겠어요. 살려줘요… 여보 사랑해요, 애들 보고 싶어!”

사고 발생 8분 후(오전 10시 01분) 통화기록 중

“지현아 나 죽어가고 있어. 나를 위해 기도해줘.”

개신교 모임 강사 허현이 강사 강지현에게

“엄마가 여기 와도 못 들어와!”

오전 9시 54분(사고 발생 1분 후), 대학생 딸이 어머니 김귀순에게 한 통화기록 중

“아… 안 돼… 안 돼!”

오전 9시 58분(사고 발생 5분 후), 이현진이 어머니에게.

이현진은 이해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이해 서울대학교 입학식에서는 식전에 추도 의식을 가지고 예정된 신입생 환영 행사를 취소했고, 유족은 보상금으로 서울대 측과 협의하여 장학기금을 조성하였다. 이현진 양은 사망 전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동생에게 ‘누나가 잘 못해줘서 미안하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도 남겼다.

“불이 났어. 나 먼저 하늘나라 간다.”

김창제가 부인에게

“엄마 지하철에 불이 났어.”

“영아야, 정신 차려야 돼.”

“엄마 숨을 못 쉬겠어.”

“영아, 영아, 영아…”

“숨이 차서 더 이상 통화를 못하겠어. 엄마 그만 전화해.”

“영아야, 제발 엄마 얼굴을 떠올려 봐.”

“엄마 사랑해…”

장계순과 딸 이선영의 마지막 휴대전화 통화 내용

“어무이! 지하철에 불이 나 난리라예.”

“뭐하노, 빨리 나온나.”

“못 나갈 것 같아예. 저 죽지 싶어예. 어머이 애들 잘 좀 키워주이소.”

아들 박정순이 노모 황점자에게. 이날 그는 직장을 얻으러 가는 중이었다.

“열차에 불이 났다.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으니 꿋꿋하게 살아라.”

어머니 최금자가 아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게 커야 해. 아빠가 미안해.”

“오늘 아침에 화내고 나와서 미안해. 진심이 아니었어. 자기야 사랑해 영원히”

“오빠 없어도 밥 꼬박꼬박 챙겨 먹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알겠냐. 그리고 기다리지마 나 안간다.”

“너 정떨어진다ㅋㅋ 우리 그냥 헤어지자 ㅋㅋ”

죽음을 예감한 한 남성이 자신이 죽은 걸 연인이 알면 슬퍼할까봐 일부러 기분 나쁘게 이별 메시지를 보낸 것.

2003년 2월 20일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 대통령은 16대 노무현 대통령(2003년 2월부터~ 2008년 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재임기(~2월 24일)이자 동시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첫 해(2월 25일~)이다.

2003년 2월18일 대구 지하철 화재로 3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을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고발생 사흘만인 2월21일 대통령직 인수위 회의에서 “희생자 가족들과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과한다. 하늘을 우러러 보고 국민에게 죄인된 심정으로 사후 대처하겠다”고 밝혔었다.

사진출처, 글참고 : 꼬꼬무, 유퀴즈, 그때그뉴스, 가톨릭신문, 나무위키, 한국강사신문

ⓒ곰곰지영의 글, 사진 [무단도용, 복제금지, 링크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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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무료 다시보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하는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시즌 3 25회 1943 지옥의 문 콩깻묵과 검은 다이아몬드 하시마 섬, 군함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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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시즌 3 25회 1943 지옥의 문 콩깻묵과 검은 다이아몬드 하시마 섬, 군함도 사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시즌 3 하시마 섬 군함도 사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시즌 3 25회 기본 정보

방송시간 : 2022년 4월 21일 저녁 10시 30분

방송채널 : SBS

회차 : 꼬꼬무 시즌 3 25회 방송분

출연진 : 장성규, 장현성, 장도연

게스트 : 이은형, 송영규, 이이경

시청률 : 5.2%

소재 : 1943 지옥의 문, 콩깻묵과 검은 다이아몬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시즌 3 25회 1943 지옥의 문, 콩깻묵과 검은 다이아몬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5회 지옥의 섬 군함도(하시마 섬)

1943년 전라북도 익산의 15살인 최장섭 군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줄곧 우등상을 타면서 뛰어난 머리를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어느날,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옵니다.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는 소년 연쇄 납치사건의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납치된 소년들은 영문도 모른채 어딘가로 실려갔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시즌 3 하시마 섬 군함도 사건

그들이 내린 곳은 바다 한가운데 였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섬의 모습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나무나 숲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회색빛 콘크리트가 높게 쌓아져 있고, 섬을 둘러싼 옹벽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습니다. 이 섬의 입구에는 ‘영광의 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섬은 일본의 만행이 이뤄졌던 하시마섬, 즉 군함도였습니다. 하시마 섬은 현재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이 조선인을 강제 납치하여 석탄을 캐었던 곳입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 필요한 석탄 공급을 위해서 죄없는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었던 곳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5회 지옥의 섬 군함도(하시마 섬)

태평양 전쟁이 한창 치뤄지던 1943년 어느날 식민지의 주민들과 전쟁포로들은 하시마섬에 강제 징용당했습니다. 요시다 합숙소 노동자는 500~600명 가량 있었습니다. 1986년 일본 시민단체의 내용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하시마 탄광에서 숨진 노동자 수만 1295명에 달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시즌 3 하시마 섬 군함도 사건

하시마 섬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섬이라고 해서 지옥의 섬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영광의 문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문 또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지옥의 문으로 불렸습니다. 조선인들은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층에서 거주해야만 했으며, 군함도를 탈출하는 조선인들은 바닷물에 휩쓸리거나, 총살당했습니다.

하시마 섬은 현재 나가사키현에 통합되었습니다. 주변 물살이 강해 연간 10일정도만 상륙이 가능할 정도로 진입이 힘든 곳입니다. 1970년대 부터는 석유의 등장으로 석탄채굴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섬 전체는 을씨년 스러운 풍모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당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녹아들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43년 당시의 하시마 섬의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는 시점만 해도 일본의 전선이 남태평양으로 넓어지면서 파인애플 및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이 보급선을 통해 운반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위험수당을 포함한 거금의 임금을 받기 위해 자진해서 하시마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무려 180원이라는 돈을 받고 가족에게 붙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5회 지옥의 섬 군함도(하시마 섬)

생계가 막막했던 사람들이 하시마 섬으로 가족단위로 이주하면서 사택을 배정받기도 하면서 하시마 섬의 경기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1943년 일본이 전쟁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경기는 급격하게 악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쌀 대신 만주에서 생산된 콩을 군수용 기름으로 짜고 남은 찌거기인 콩깻묵을 먹어야 했습니다. 전쟁 중 노동자가 부족해지자 조선인 소년들을 납치해 하시마 섬으로 운송시켰고, 열악한 합숙소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납치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짐승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아파서 일을 가지 못하면 무릎을 꿇여놓고 채찍질을 하거나, 가장 위험한 갱도에 투입되었습니다. 갱도의 깊이는 무려 1000m에 달했고, 경사는 60도에 달했습니다. 당시 하시마 섬에서 채굴되는 석탄은 고열량의 탄으로 질이 높았습니다. 노동자들은 무려 16시간 씩 고노동에 시달렸고, 혹여나 가스관이 터지게 되면 모두 사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시즌 3 하시마 섬 군함도 사건

사람들은 수시로 죽어나갔고, 장례식은 치뤄지지 않았습니다. 폐 가마니 껍대기로 시체를 덮고 한번에 기름을 부어 화장하기 일쑤였습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는 매일 시체를 태우는 검은 연기가 하시마 섬을 뒤덮었습니다. 이곳은 말그대로 지옥의 섬이었습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경 일본 나가사키 현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됩니다. 일보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일본을 위해 일하던 탄광 노동자들에게 계속해서 막장에서 일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해방이 되었음에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일을 해야 했던 조선인들의 한은 아직까지도 하시마 섬을 맴돌고 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5회 지옥의 섬 군함도(하시마 섬)

현재 군함도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만 폴란드의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도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있는 점을 보면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당시의 만행에 대한 사죄도 없고 보상도 없는 일본의 군함도, 하시마 섬을 부정적인 문화유산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당시 처참했던 군함도(하시마 섬)의 상황은 영화 ‘군함도’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이경영, 황정민, 송준기가 출연하였고, 당시 일본의 군함도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사실에 근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쓰시비 마테리얼 소유였던 군함도는 현재 폐광된 상태지만, 일본은 전쟁 배상에 대한 일절 언급이 없는 상황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25회 예고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시즌 3 하시마 섬 군함도 사건 예고편

꼬꼬무 25회 1943 지옥의 문편은 4월 21일 목요일 저녁 10시 30분 SBS에서 방영 예정입니다.

사진 및 동영상 저작권은 SBS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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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꼬꼬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 정리/범인 기관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꼬꼬무 시즌3, 꼬꼬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 정리/ 범인 기관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글 포스팅 순서]

1. 한 남자의 수상한 행동, 불길이 치솟은 지하철

2. 찾기 어려운 탈출구

3. 1079호 전동차 반대편에서 불어온 바람

4. 순식간에 덮친 화마, 그저 기다린 승객들

5. 애타는 실종자 가족들

6. 350명의 사상자, 탈출조차 못한 승객들

7. 사건 발생 후 지하철 공사의 은폐 의혹

8. 1080호 사망자, 인재가 만든 대형참사

9. 대형 참사의 진짜 원흉은?

10. 남은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 절대 잊으면 안 될 그날

11. 꼬꼬무 시즌3 최은희 신상옥 납치 탈출 사건, 26회 톱스타와 비밀 테이프, 재방송 시간

12. 군함도 하시마섬 시즌3 사도광산 강제징용 위치 유네스코 등재 역사 왜곡

13. 장항 수심원 사건 외딴섬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4.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화재 사건의 전말, 꼬꼬무 시즌3

15.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시즌3 재방송 다시보기 시간

5월 5일 목요일 10시 30분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꼬꼬무 시즌3, 시청률: 4.3%) 에서는 ‘전하지 못한 목소리: 지화(火)철 1080호 미스터리’ 라는 제목으로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그날 이야기를 조명했습니다.

한 남자의 수상한 행동, 불길이 치솟은 지하철

2003년 2월 18일 전융남 씨는 우체국에 편지를 보내기 위해서 우체국으로 가기 위해서 대구 지하철을 탔습니다.

그런데 그의 맞은편에 한 남성이 체육복 차림으로 가방을 가슴에 안고있고, 그의 옆에는 하얀색 물통이 있었습니다.

전융남 씨는 물통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산에 갔다가 온 남성이 약수를 떠왔다고.

그런데 맞은 편 이 남자는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만지작대더니 주머니 밖으로 꺼냈다고 합니다.

그가 꺼낸것은 라이타.

수상한 남자는 지하철 안에서 라이터를 켜려고 했고, 이를 본 전 씨는 그에게 소리를 쳐서 그를 제지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탄 1079호 열차가 대구 중앙로역에 들어선 순간 그 수상한 남자의 바지에 불이 났습니다.

이에 전 씨를 비롯한 사람들은 다급하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그의 바지 불을 껐습니다.

찾기 어려운 탈출구

그러나 남자의 바지에서 번져 나간 불은 순식간에 지하철 좌석에 옮겨 붙었습니다.

화재가 발생하고 1분 만에 첫 신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수상한 남성이 들고 있던 하얀색 통의 액체는 휘발유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불이 번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에 승객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지하철 1079호에 타고 있던 승객들의 탈출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대구 중앙로역의 구조 때문이었습니다.

지하 3층에 있는 승강장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하 2층 개찰구를 지나 지하 1층 건물들을 지나고 해야지만 지상으로 나갈 수 있게 설계가 되어있었습니다.

당시에 지하 3층 승강장에만 2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아비규환이 되어 탈출을 했습니다.

1079호 전동차 반대편에서 불어온 바람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바람이 확 불어왔습니다.

그러더니 자동 안내방송으로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반대편 승강장으로 1080호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080호에 타고 있던 대부분의 승객은 화재 사고가 발생한 줄 모르는 평온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도착한 승강장 플랫폼은 이미 화재로 인해 발생한 연기로 가득차 시야를 가려 주변이 모두 깜깜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등이 나가서 불빛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 지하속 터널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화재를 인지 못한 1080호 열차의 문이 열리자 열린 문으로 연기가 확 들이 닥쳤다고 합니다.

열차는 승객 몇 명만 내려주고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차는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 이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사이에 연기 때문에 참지 못한 승객들 일부는 그 틈에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은 출발하면 연기가 사라지겠지하는 생각으로 인해서 열차에서 빨리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덮친 화마, 그저 기다린 승객들

계속 움직이지 않는 열차.

계속 움직이지 않고 있는 1080호 열차안은 연기로 가득찼고, 곧 이어서 최초 화재발생 열차 1079호 열차의 화재 사고를 알게 된 1080호 승객들.

그런데 이들은 대다수 열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어서 빨리 열차가 이곳을 벗어나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곧 불길이 1080호 열차로 옮겨 붙었고 이에 1080호 열차도 아비규환의 상태로 변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화재에 놀란 승객들은 119에 신고를 했습니다.

당시 119에는 신고전화가 20분 동안 150통이 넘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이에 소방본부는 초비상 상황임을 인지했고, 대구 전역에 있는 소방차와 구급차가 일제히 대구 중앙로 역으로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현장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구조를 위해 현장에 진입하는 소방대원들은 지하 3층까지 가득찬 연기로 인해서 바로 앞에 있는 동료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서 쉬운일이 아니였습니다.

연기로 시야는 가려지고 화재로 인한 뜨거운 열기는 방화복을 입은 소방 대원들이 화상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쓰러진 사람들을 옮기고 또 옮긴 소방대원들.

그런데 상황은 점차 더 악화돼었습니다.

전동차가 있는 지하 3층은 방화복을 입어도 열기가 너무 뜨겁고, 연기 즉 독가스로 인해서 접근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화염은 1시간 40분 동안 계속됐고, 본격적인 진화 작업은 화염이 조금이나마 걷힌 후에나 가능했습니다.

이에 지하 3층에서는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지하철 전동차 안에는 사람들의 뼈만 남고 모두 타버린 상황이라고 합니다.

지하철 특성상 누가 탔는지, 몇 명이 탔는지 알 수 없어서, 화재 사고가 발생한 중앙로역에는 가족들과 연락이 돼지 않는 수 많은 시민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다니며 가족들이 무사하기만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건 발생 10시간이 지나도 가족의 생사 확인이 어려운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합니다.

애타는 실종자 가족들

마지막 병원 진료를 위해서 경산에서 대구로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탄 재영 씨의 아내와 딸, 재영 씨는 처음에 대구 화재사고가 났다고 긴급 속보가 나왔을 때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화재가 난 지하철 방향과 아내와 딸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로 향하는 전동차 방향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재영 씨는 무작정 대구로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상자, 사망자 명단 어디에도 재영 씨가 찾는 아내와 딸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중앙로역 대구역 CCTV에서 아내와 딸을 포착했습니다.

딸의 손을 잡고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가는 아내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탄 것은 바로 1080호 열차였습니다.

재영 씨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가족을 찾을 방법은 많지 않았습니다.

열차 안에 남은 것은 뼈만 남은 유골 뿐, 그리고 타다 남은 물건들 뿐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비규환이 된 전동차 내부에 수 많은 유해가 뒤엉켜 누가 가족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에 경찰 감식반과 국과수 법의학자들이 총동원 돼어서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종자 가족들은 불에 타지 않을 가족들이 지니고 있을법한 소지품 목록을 적어 유해 발굴단에 전달했습니다.

이에 재영씨는 딸이 걸고 있던 미아 방지 목걸이, 아내가 차고 있던 예물 시계를 적어냈다고 합니다.

350명의 사상자, 탈출조차 못한 승객들

당시 지하철에 불을 지른 방화범은 56세(당시)의 김대한 씨.

그는 2년 전부터 시작된 건강 악화로 세상을 비관했다고 합니다.

이에 혼자 죽기는 억울하니 같이 죽자는 마음으로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시간과 장소를 노려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의 방화로 인해 350명의 사상자를 만들고 그중 사망자만 192명에 달했습니다.

1080호 사망자, 인재가 만든 대형참사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 방화 사고로 발생한 전체 사망자의 74%가 전동차 1080호에서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화재가 처음 발생한 1079호 열차에서는 사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1080호 열차에 사망자가 집중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지하철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컨트롤해야 할 커트롤 타워 종합사령실에서는 이 사고에 대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당시에 근무중인 직원이 3명인데 어느 누구도 1079호 화재 사고를 목격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1080호 전동차의 중앙로역 진입을 막지 못했습니다.

특히 종합사령실은 화재 1분만에 울린 화재경보기와 경보 문구를 오작동이라 여기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1079호의 화재 사실을 안 것은 화재 발생 3분 후, 당시 역무원이 놀라서 화재를 신고했기에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간이 9시 55분, 그리고 그 시각 1080호 열차는 중앙로역 이전 역인 대구역에 정차 중이었다고 합니다.

사령실에서는 곧바로 1080호 열차의 진입을 막아야 했지만, 막는 대신에 전체 열차에 다음과 같은 말만 했다고 합니다.

중앙로역에 화재가 발생했으니

진입 시 조심히 운전해서 가라.

이에 1080호 열차의 기관사는 무정차 통과가 가능했음에도 지령이 없었기에,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중앙로역에 진입했고 승상장에 진입해서야 연기를 발견 했다고 합니다.

화재 발생 4분 후의 시간, 승객들은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 때문에 그 자리에서 열차가 떠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기관사나 사령실은 승객들을 대피시켜야 했지만 대피 방송은 전혀 하지 않았고 열차 출발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렇게 허비한 시간이 5분, 그 사이에 전기는 다 끊어지고 사령실과 교신도 안 되던 기관사는 뒤늦게 열차 출입문 개방 버튼을 눌렀지만 전기가 끊어진 상태에서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열차 안의 유독가스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그 열차에 승객들은 탈출하지 못한채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5호칸에서는 승객들이 유리창을 깨서 몇 명이 탈출에 성공했고, 4호칸에는 마침 그곳에 있었던 역무원이 수동으로 문을 열고 탈출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동차 칸의 승객들은 수동으로 문을 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열차의 기관사는 1호칸의 출입문만 수동으로 열어주고 긴급히 탈출했습니다.

지하철역 안에 가득찬 연기로 인해서 어디가 계단인지 출구인지 분간이 안 되기에 전동차에서 탈출한 승객들도 중앙로역을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중간 중간 설치해 놓은 방화셔터로 인해서 탈출이 좌절된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검게 그으른 방화셔터에 수 많은 손자국과 발자국이 찍힌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사건 발생 후 지하철 공사의 은폐 의혹

더 충격적인 일은, 이 사건 이후 지하철 공사 측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의혹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탈출에 성공한 1080호 기관사는 11시간 잠적했는데, 이 시간 동안 지하철 공사의 간부들이 그를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경위서를 쓰도록 하는 등 사건에 대해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재 다음날 군인 200명을 동원해 화재 정상화를 위한 청소를 지시했습니다.

이에 군인들은 사고 현장의 잔해들을 쓸어 담고 물청소까지 했습니다.

유가족들이 가족을 찾기 위해 소중한 단서가 될 유품들이 모두 쓰레기 포대에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 포대에서 실종자들의 유해와 소지품이 150여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대형 참사의 진짜 원흉은?

이 사고가 대형 참사가 될 수밖에 없던 진짜 원흉은 지하철 그 자체였습니다.

방화범이 뿌린 휘발유 2리터에 전동차 두 대가 모두 소진돼었는데, 이는 당시 지하철 안전기준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하철 설비 소재에 대한 세부 기준이 없었고, 특히 화재 시 치명적인 유독가스에 관련된 기준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천 커버에 스펀지 재질로 만들어진 지하철 의자는 가장 불에 잘 탔습니다.

또한 정기적인 방염처리가 필수임에도 대구 지하철은 개통 이후 단 한차례도 방염처리를 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남은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 절대 잊으면 안 될 그날

이 화재 사고로 사법처리가 된 사람은 10명입니다.

방화범과 1080호 기관사가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불쏘시개 지하철을 만든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습니다.

현장에서 발굴한 희생자들의 유류품을 사진 찍어 모아 놓은 전시회에서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의 유품을 찾았고 이를 토대로 가족들의 유해를 찾았습니다.

딸이 살아있기만 바랐던 한 어머니는 보는 순간 내 아이의 물건임을 알고 주저앉았고, 탈출 의지를 잃고 아이만을 보호하려고 했던 아내의 마지막 흔적을 보고 눈물을 흘린 남편의 이야기.

고통은 유가족들만의 것은 아니였습니다.

생존자들도 사고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고 또한 본인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올해 19주기를 맞이한 대구 지하철 참사.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습니다.

지하철 설비 소재는 모두 불연재나 극난연재로 교체되었고, 화재 대비 메뉴얼도 마련돼었습니다.

또, 승강장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비상정지시킬 수 있는 버튼이 생겨났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전이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인 셈으로 우리 모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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