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넬료 의 가정 | 19850227 고넬료 가정의 구원(1) (사도행전 27/64), 사도행전 10장 1~23절, 옥한흠 목사 최근 답변 27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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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 가정의 신앙생활(사도행전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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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0:24-48 / 고넬료의 가정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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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고넬료 가정이 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 한국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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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주 고넬료의 가정 > 목장자료실 | 장산교회

제목> 고넬료의 가정 성경> 행10:1-6 찬송> 301, 558. ○들어가면서 – 명절에 생각하는 ‘가족’. 설날 연휴를 강건하게 잘 보내셨나요? 명절이 다가오면 기독교 가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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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의 가정 – 다음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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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0227 고넬료 가정의 구원(1) (사도행전 27/64), 사도행전 10장 1~23절, 옥한흠 목사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넬료 의 가정

  • Author: 말씀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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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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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0:24-48 / 고넬료의 가정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가정은 인간에게 소중하고 평온한 쉼터를 제공합니다. 가정은 행복을 만드는 발전소입니다.

가정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계절 5월에는 어린이 날(5일), 어버이 날(8일), 부부의 날(21일)이 다 모여 있습니다. 특별히 5월은 서로 우리 가족들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달입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가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온전한 가정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가정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 없듯이 완전한 가정 또한 없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가정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라고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위로만 받을 것이 아니라 모범 가정을 통해 도전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 가정은 로마 백부장 고넬료 가정입니다.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니고 로마 군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넬료와 그의 가정을 소개하는데 사도행전에서 48절이 되는 긴 한 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결코 흔하지 않은 믿음을 보여 주었고, 그의 가정 또한 보기 드문 이상적인 가정이었고, 온전한 가정이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면 고넬료의 가정은 어떤 가정이었을까요?

첫째로,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고넬료 이야기는 사도행전 10장 1절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라고 고넬료의 신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자기 나라의 종교도 아닌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다른 나라의 신을 믿는다는 것은 로마에 대한 불충성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24절을 보면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가정예배를 드리고자 할 때 가족뿐 아니라 그의 친척, 그리고 그의 친구들까지 불러 모았던 것입니다.

남편만, 아내만, 자녀만이 주님을 섬기는 가정이 아니라 전 가족이, 나아가 그의 주변 모든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부장적인 고대 사회라 할지라도 전 가족이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넬료의 가정을 기뻐하셨고 그의 가정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좋은 집은 늘어나는데 좋은 가정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호화로운 집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평안과 쉼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리 초라해도 쉼이 있고, 평안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웃음이 있고, 행복이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정이 붕괴되고 있는 이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온 가족이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우리 가정에 필요합니다.

둘째로,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2절을 보면 베드로를 찾아간 고넬료의 종들은 베드로가 왜 왔느냐고 물을 때 베드로를 향하여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라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을 보면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아래 엎드리어 절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종들이 베드로를 초청하는 모습과 고넬료가 베드로를 영접하는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큽니다. 고넬료의 종들은 거만하게 베드로를 불렀지만 고넬료는 하나님을 대하듯 베드로를 영접했습니다.

고넬료는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인사했고, 본문 33절을 보면 가정예배가 시작될 때에 고넬료는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씨앗도 필요하지만 좋은 밭도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바울의 설교를 들었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 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 자세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언제, 누구에게 역사하실까요?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말씀은 그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무수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크게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듣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을 거울로 삼아 우리의 말씀 듣는 자세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할 때, 기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 앞에 있다는, 하나님 임재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셋째로, 고넬료의 가정은 성령이 임한 가정이었습니다.

본문 44-45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고넬료 가정은 성령이 함께 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본문 46-47절을 보면 베드로는 이 사건에 놀라고 감동하여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리고 교회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적용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 삶 전반에 관여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가정에도 함께 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성령이 함께 하는 가정의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 가사가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가정은 이 땅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는 가정에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중요한 역사는 하나 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가정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가족들 간에 유기적인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가족들이라고 해서 항상 관계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의견 차이가 있고, 갈등이 있고, 때로는 다툼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도 한 지붕 아래서 함께 뒹굴며 사는 것이 가족이고, 그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가정 공동체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서로 편하게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져, 1인 가구가 날고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정 공동체를 지키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가정이 공동체로서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필요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모든 인간관계, 특히 가족 관계의 윤활유입니다. 온 가족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이 함께 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정을 잘 이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 가정다워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고넬료는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과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 고넬료 가정을 본받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는 성도들이 됩시다.

고넬료 가정이 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559장의 노랫말을 지은 전영택 씨는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요, 언제든지 쉼을 얻을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모든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갈등을 겪으며 서로에 대해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성경 속에 묘사된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가정의 모습을 보길 원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으로 로마 장교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긴 모범적인 신앙인이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으면 나와 가정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그의 가정도 경건한 가정이었습니다. 온 식구가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온 가족이 말씀대로 살고 온 식구가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그 가정이야말로 진정한 천국 가정입니다.

두 번째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집에 천사를 보내십니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말합니다. 고넬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기억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고넬료 가정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저금한 돈은 언제, 어디서, 얼마를 저금했는지 이자까지 다 찍혀있습니다. 우리가 구제하고 남을 도와준 것은 시간이든 물질이든 마음이든 정성이든 전부 다 하늘나라에 입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보물을 쌓아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 달라고 구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4절에 “하나님이 기억하신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고넬료가 한 일을 전부 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고 수평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많은 백성에게 구제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넬료의 가정은 의로운 가정이고 칭찬받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유대인과 그들이 부리는 종들도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우리 가정도 고넬료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께 칭찬 받는 가정이 됩시다.

2월 2주 고넬료의 가정 > 목장자료실

제목> 고넬료의 가정

성경> 행10:1-6

찬송> 301, 558

●들어가면서 – 명절에 생각하는 ‘가족’

설날 연휴를 강건하게 잘 보내셨나요? 명절이 다가오면 기독교 가문이 아니면 영적인 갈등을 겪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처럼 주일과 명절이 겹치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 혼자 살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가장 가까이에 혈연을 중심한 우리의 가족과 친척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가족, 가정,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고넬료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1. 이방인 가정으로서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인 가정입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 간부로 유대의 가이사랴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이 뭐 그렇게 대단한 지위냐고 할지 모르지만 식민지에서 지배국이 파송한 치안담당 장교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신문의 로마인으로서 식민지 국가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2절에 보니, 그 로마인 이방인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지배국의 고관이라고 하면 식민지 종교는 더욱 천하게 보고 무시하는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넬료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는 유대에 와서 유대인들이 믿는 독특한 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다른 어떤 신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느 샌가 그 종교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유대인들이 하는 기도시간에 함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2b-3a.)

이런 고넬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고넬료는 기도중에 천사를 만나게 되고 천사는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합니다. 24절에 보니, 초청할 때 자신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친척까지 다 모아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여기서 가문의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이들이 모인 곳에 성령이 임합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베드로도 놀랍니다. 그렇게 하여 이 가정은 예수 믿는 최초의 이방인의 가정이 됩니다.

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이후 세계 선교에 놀라운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로마 교회의 설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의문을 가집니다. 그것에 대해 또한 많은 사람이 답을 제시합니다. 그 중에 가장 타당한 답 중에 하나가 가이사랴에서 파송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고넬료 가정입니다. 고넬료가 로마교회의 태동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집안이 신앙으로 하나 되지 못하여 가슴 아픈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명절만 되면 신앙문제, 종교문제 때문에 걱정이 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집안 어른과 형제를 만나기가 부담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 이 문제가 해결되나 숙제인 가정이 있을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을 몰랐던 가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가문이 변할 것입니다.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삶의 증거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2)

고넬료에게 여호와 신앙이 들어오고 난 뒤에 그가 했던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2절을 다시 봅시다. 첫 번째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고넬료의 경건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구제는 이웃을 향한 것입니다.

고넬료는 여호와 신앙을 수용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점점 더 깊어갑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하나님이 삶 속에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에 있는 헐벗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제를 털어 구제하기 시작합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런 경건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4절.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구제를 하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면 그 구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구제입니다.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으면 그 기도는 위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의 귀에 하는 기도입니다.

고넬료는 어쩌다 한 번 구제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한 번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경건은 지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건이 열매를 맺습니다.

1)먼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7절을 보면, 고넬료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기 위해 그의 하인과 부하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미 그의 부하는 경건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로마의 군인입니다. 백부장의 신앙이 이미 그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2)또 24절을 다시 봅시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해 놓고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과 친구들까지 모아 놓고 기다립니다. 이들이 왜 고넬료의 집에 와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고넬료의 평소의 삶 때문입니다. 기도만으로 초청에 응해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의 인격이 포함될 때 초청의 역사를 큽니다. 고넬료의 집에 모여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고넬료의 인품과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메시지를 요약하여 한 단어로 말한다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을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마22:37-40)

사랑하게 되면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둘째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즐겨할 것입니다. 어떻게 있는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가 무엇을 구하여서 얻는 것이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요? 그 사랑하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주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이 질문에 정확한 답을 제시하셨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의 이웃입니다.

여러분, 이번 명절에 특별히 우리의 가족과 일가친척을 가슴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 가운에 나를 필요로 하는 자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위로와 격려, 나의 시간, 나의 물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섬김의 희생이 없이는 가족구원, 가문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가문이 온전한 그리스도인 가족, 가문(Family)가 되기 위해 먼저, 거룩한 뜻, 비전을 소유하십시오. 그리고 또 그들을 위해 섬기십시오. 여러분의 당대에, 아니 멀지 않은 시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 되지 못한 가정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어봅시다. 우리에게 믿음의 가문을 세우기 위한 소원을 품읍시다. 모두 함께 간절하게 자신을 위하여 다른 가정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YoonTube

고넬료의 가정

사도행전 10:1-2, 24-35절

Yunity

하나님은 인간의 편견을 뛰어넘어서 역사하신다. 편협한 유대주의 사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베드로를 환상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성령께서 명하셔서, 이방인인 고넬료 백부장의 집에 방문하게 하셨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했다(2절). 가장이 중심이 되어, 온 식구들이 마음을 합해서 하나님을 섬겼다. 신앙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며, 축복인줄 모른다. 교회도 주님을 섬기는 뜻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뜻과 고집은 서로 십자가에서 죽이고, 주님을 높이며, 성경 말씀이 으뜸이 되게 해야 한다.

기도하는 고넬료를 중심으로 사랑을 나누는 가정이었다. 고넬료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다(2절). 여기서 ‘항상’이란 말은, 시간적으로 쉬지 않고, 계속이란 뜻보다는, 규칙적으로 계속 기도했다는 뜻이다. 효과적이며, 응답받는 기도는 우리 영혼이 얼마나 열심히, 뜨겁게 기도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의 가정은 이웃을 구제하는 가정이었다. 예수님이 베푸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양의 나라와 염소의 나라를 구분하는 예수님의 심판대 사건, 즉 이 땅에 사는 예수 믿는 소자 하나, 불우한 이웃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행한 것이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는 고넬료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리라.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은혜받기 위해서 이런 준비를 했다. 그는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갈망했다. 고넬료는 주님의 종을 극진히 존경했다.‘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25절). 고넬료는 로마 제국의 고급장교로서, 속국 유대의 무명인사인 베드로에게 절한 것이다. 머리를 숙이는 가벼운 인사나 가벼운 키스정도가 아니라, 발 앞에 엎드리어 겸손히 절했다. 이웃과 친지들을 초대하여 같이 은혜 받게 했다. 고넬료처럼 이웃을 향한 영혼 구령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어야 하겠다. 영혼 구원을 가장 기뻐하시는 주님은 전도자에게‘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을 주시기에…

[가정의달] 고넬료의 가정처럼 … (행 13:1~8)

– 설교 :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5월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을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의 달 행사로 분주합니다. 정신없이 사는 현대인들이기에 이렇게 해서라도 가정을 챙기는 게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행사들이 연례적인 겉치레로 지나간다면,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 이상의 유익이 없습니다. 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대한 깊은 성찰입니다. 우리 가정의 형편을 잘 살펴보고 반성하면서 더 좋은 가정으로 만들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가정의 달로서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은 성경 안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정 중 하나인 ‘고넬료의 가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가정과 우리 가정을 비교해 보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더 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고넬료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제국의 도시인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이달리야대)의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100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군인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중대장에 해당되지만, 그 지위와 권세는 비교가 되지 않게 컸습니다. 대개 식민지 주둔군이 그렇죠. 옛날 일제 치하에 일개 순사만 되어도 얼마나 세도를 부렸습니까? 그런 점을 감안하면 백부장은 그 당시 상당한 지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은 아주 잔인했습니다. 정복자로서 횡포를 부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넬료는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유의할 사항입니다. 당시 1세기는 과도기였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넘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이었으므로 개중에는 그 신앙이 아직 구약의 상태로 머물러 있던 신앙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 뒷부분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혹시 처음 믿는 초신자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 예수님을 소개받지 못했지만, 이미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 받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될 정도로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가정 중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고넬료의 가정에 앵글을 맞추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본문을 보면 고넬료의 가정이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고 저와 여러분의 가정도 고넬료 가정처럼 좋은 가정들로 만들어 가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 신앙이 있는 가정

2절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는 혼자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온 가족으로 하여금 다 함께 믿게 했습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정 행복의 기본입니다.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교회나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가치관이요, 인생관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방향감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들이 신앙이 있고 없고 하면 서로 다른 가치관, 인생관을 갖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불화의 요소가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집안에 원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신앙이 통일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불신앙으로 통일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죠. 그것은 다함께 멸망하는 길입니다. 신앙은 내세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고 결정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그렇지, 사실은 현세보다 내세가 더 중요합니다. 현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게 당장은 중요하죠. 그러나 내세에 관해 무지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주 어리석인 일입니다. 현세는 잠깐입니다. 반면에 내세는 영원합니다. 아무리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먹고 잘 산다 하더라도 내세에 실패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16:26 “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 ‘목숨’은 ‘영혼’을 가리키는데, 영혼이 내세에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 받으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눅16:19 이하의 말씀을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는 비참한 현세의 삶을 살았지만 신앙이 있었기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립니다. 반면에 부자는 모든 게 다 있어도 신앙이 없었기에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머리 보이는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물 한 방울만이라도 갖다가 혀에 축여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죠. 그러니까 이번에는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 비참한 사실을 알려줘서 제발 오지 않도록 전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거절당합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나 홀로 신앙은 곤란합니다. 가정 복음화를 위해 수고해야 됩니다. 제일 좋은 것은 가장이 먼저 예수 믿고 그로 인하여 차례차례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가족 중에서 위치가 어떠하든지 먼저 믿은 사람이 우선 “내가 가정의 제사장이다” 생각하고 나머지 가족들을 기도하며 인도하면 됩니다. 한 피 나누고 한 지붕 밑에서, 심지어 한 이불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 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원한 이산가족’이 되는 겁니다. 물론 가족을 전도한다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차라리 남을 전도하는 게 쉽죠. 그러나 우리가 뜻을 정하고 기도하며 수고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뤄주실 줄로 믿습니다.

물론 선조로부터 신앙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으면 더 좋겠죠. 그러나 초대신앙도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초대신앙의 경우 시험도 많고 갈등도 많지만, 그래도 보람이 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대로 내려오던 불신앙의 고리를 끊고 나로부터 앞으로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자자손손 믿음의 가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를 위해 특별히 자녀들에게 신앙을 잘 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공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 물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조금 주는 것이다. 공부시키는 것은 많이 물려주는 것이다.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또 이렇게 비유해 봅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물고기를 주는 것이다. 공부를 시키는 것은 낚시질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배와 그물을 주고, 그물질하는 법까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재산을 물려주고 공부를 시키는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죠. 우선순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우선순위를 지키지 못합니다.

한번은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대학 캠퍼스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건물 앞에 설립자 하버드 목사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다 까만데 발등만 반들반들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버드의 발을 만지면 자녀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겁니다. 저도 만졌죠, 뭐. 그런데 우리 아이들 성적이 안 올라가더군요. 물론 괜한 소리죠. 부모 마음은 다 같은 겁니다. 미국인 부모나 한국인 부모나 자녀가 공부 잘하는 것은 동일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자녀의 신앙을 위해 더 큰 소원을 가져야 됩니다. 부디 여러분의 가정이 고넬료 가정처럼 온 가족이 자자손손 예수 믿고 복을 누리는 가정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사랑이 있는 가정

본문 2절 다시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 ” 그랬습니다. 이 말은 온 가족이 신앙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지만 더 나아가 한 마음 한 뜻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화목한 가정이었을 겁니다. 행10:24 보면 사람을 보내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 놓고 일가친척까지 다 모여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정도면 화목한 가정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정은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창1:27 보면 인간을 창조하되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말은 가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모든 창조 세계를 보시며 뭐라고 하셨나요? 창1:31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 말씀은 창조 세계의 완벽함과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아름다움, 그 중에서도 가정의 아름다운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행복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대로만 살아가면 천국과 같이 아름답고 행복해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가면 지옥과 같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뭐겠습니까? 한 마디로 ‘사랑’이죠. 사랑은 비유컨대 ‘가정의 산소’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질식합니다. 지옥 같은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편안합니다. 천국 같은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 사랑이 있으면 지상 천국이 되고, 사랑이 없으면 지상 지옥이 되는 겁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가정들 가운데서도 과거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있다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천국 같은 가정으로 변화된 케이스가 적지 않으실 겁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도로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죄성의 기본 특징이 이기심이거든요.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이에서도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지없이 관계가 깨어지고, 불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일단 가정불화가 생기면 대책이 없습니다. 물질이 있으면 뭐하고, 명예 권세가 있으면 뭐합니까? 인생이 마냥 괴로워지는 겁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런 경우 유일한 치유책은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은 다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뜨겁던 부부의 사랑도 세월이 가면 식어집니다.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합니다. 가장 고상한 부모의 사랑조차 때로는 변질됩니다. 다 이기심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완전합니다. 사49:15 보면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인간사랑 중 최고인 부모 사랑조차 때로는 불완전하다는 겁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아가페 사랑, 이타적인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죄인들의 대신해서 피 흘려 희생하신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체험하고 배우면 인간관계가 이기적인 관계에서 이타적인 관계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행복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신 가정은 물론이고, 신앙의 가정에서조차 참 사랑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은 갖고 있으되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옛 사람의 이기적인 모습을 살아가면 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숙한 자, 즉 성령 충만한 자만이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성령 충만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 참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엡5:22~6:4에 보면 부부 사랑, 부모 자식 사랑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을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만 가르치고 … 그런데 이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왜 그래요? 인간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를 위해 달라고만 하므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됩니다. 그래서 앞에 엡5:18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럴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님이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말은 많이 하지만 때로는 막연한 느낌이 듭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양보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막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아주 간단한 것을 제안해 봅니다. 우리 가정에 행복과 불행이 말 몇 마디로 좌우될 수도 있습니다. 말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말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하나 실천해 나아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부족해서 많은 불화와 문제들이 야기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언어부터 사랑의 언어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언어를 통해 가정의 행복이 깨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사랑의 언어가 부족합니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사실은 엄청나게 큰 문제입니다. 언어에는 하나님이 신비로운 능력이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언어에는 사망의 언어와 생명의 언어가 있습니다. 생명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별로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아이들도 할 줄 아는 말입니다. 사랑, 용서, 칭찬, 격려, 감사, …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겁니다. 참 이상하게 이런 게 우리에게 아주 부족합니다. 이런 것들은 표현하지 꼭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길 때만 그런 마음을 마구 표출합니다. 그러니까 사소한 일로 엉뚱하게 가정의 화목이 깨지곤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언어를 잘 구사해야 합니다.

어느 가정에서 딸아이가 휴대폰을 갖고 문자 메시지를 합니다. 옆에 있던 엄마가 신기하게 바라봅니다. 딸이 가르쳐주니까 더듬 더듬 따라합니다. 처음 배워서 누구에게 제일 먼저 보낼까 하다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금세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긴요, 나도 문자 배웠지.” “근데 왜 ‘여보 사망해’라고 보낸 거야?” “예? 나는 ‘여보 사랑해’라고 했는데 … ” ㄹ 자판 누를 걸 옆에 있는 ㅁ 자판을 잘못 눌렀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실수였습니다. 이처럼 어색하고 서툴더라도 자꾸 표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에 사랑이 충만해 질 것입니다.

사실은 생명의 언어가 별 게 아닙니다. 몇 가지 말만 잘 해도 충분합니다.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사랑해 이 정도만 해도 됩니다. 외국어도 그렇잖아요. 이 몇 가지만 배워 놓으면 대충 통합니다. 가정에서 이렇게 쉬운 말들만 잘 표현해도 분위기가 확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가정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해져서 지상의 작은 천국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3] 사명이 있는 가정

본문 2절을 다시 보면 후반 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 …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 그랬습니다. 그의 가정은 받은 축복을 이웃과 나누는 가정이었습니다. 행10:24에는 베드로를 청해 놓고 일가친척들은 물론이고 친구들도 불러 모았습니다. 이웃과 복음을 나눈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넬료의 아름다운 인격은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행10:22) 이런 가정이었기에 하나님은 고넬료 가정을 사용해서 베드로의 편견(이방인을 배제하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벗겨 주는 역할을 감당하게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한 것,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 등의 배경에 고넬료 가정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가정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끼리 말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가정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가정을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십니다. 잠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구제하고 나누는데 신기하게 더욱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교회에서 에바브로 디도 집사를 통해 선교비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감사하면서 하나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빌4:17~19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복의 통로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물의 원리와 같습니다. 물을 퍼내면 밑에서 새 물이 솟아올라옵니다. 그러나 우물에서 물을 퍼내지 않으면 서서히 썩어가는 것입니다. 축복을 나눌 때 더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이 있는 가정은 늘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성합니다. 꼭 이런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고넬료의 가정은 이처럼 신앙이 있고 사랑이 있고 사명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있고, 영광이 가득한 가정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고넬료의 가정과 비교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디 고넬료의 가정 같이 지상의 작은 천국 만드시고, 행복한 인생 의미 있는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설교말씀 영상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고넬료과 그 가정에 일어난 사건은 기독교 복음전파의 역사에 획을 긋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지고, 세례를 베풀어 그리스도인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으로 시작된 10장의 내용을 보면 고넬료 혼자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고넬료의 온 집안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까지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고넬료의 가정은 어떠했기에 고넬료의 뜻을 따라 함께 하였을까요? 2절을 보면, 고넬료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다고 했습니다. 가족의 동의, 협조, 참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보통 어떤 사람을 평할 때, 그가 경건하고 존경받을 만하다고 말한다면, 그를 포함한 가족까지도 훌륭하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경건하고 존경받을 만한데, 그의 아내나 자식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토를 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괜찮은 사람인데 자식들은 좀…” “그는 구제를 많이 하였지만, 아내는 어땠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고넬료는 믿음으로 가문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넬료와 그 집안의 신앙이 전해지고,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하인을 낫게 한 백부장의 믿음이 전파되는 것처럼,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 백부장 고넬료는 신앙의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고넬료의 가정 전체가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온 가정이 복음으로 믿음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의 집에 모여 참석했던 그의 친척들과 친구들까지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넬료를 통하여 가족, 친척, 친구들이 영생을 얻었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넬료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역할, 사명입니다. 고넬료는 가정에서, 친척들 사이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각자가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삶을 책임 있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면서 사는 중요한 삶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삶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내가 가정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므로 우리 가정이 세상의 소금으로써, 세상의 빛으로써 책임과 역할과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신앙을 전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쉽게 설명하면 우리 집의 우리 자녀들, 우리 손주들이 신앙을 전수 받아 복음적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21세기는 가정의 위기 시대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문화와 세태가 가정의 문제를 부채질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시대입니다.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에게 바른 가치관과 신앙을 교육하지 않으면 미래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암담한 절망의 세상이 됩니다. 부모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교단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 교육자원부가 영락교회와 공동으로 주관하여 작년 2011년 6월 10, 11일에 “기독학부모 축제”를 개최하였습니다. 거기에서 교회의 다음 세대를 세우고 국가의 장래를 건강하게 만드는 핵심 원동력은 교회 안에 있는 기독 부모들의 확고한 자녀교육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내용이 강조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와 소통이 안 되고 학교에서는 교사와 소통이 안 되고, 사회적으로는 폭력과 음란문화에 노출되어 있어 심각한 교육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가운데 교회가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통해 기독학부모들을 깨우기 위해 개최하였습니다. 실무를 담당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못가는 이유의 22.4%가 학원 때문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주일 아침에도 학원에 보내는 것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신앙적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변하지 않는 한 기독교 교육의 부흥은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교가 아무리 좋은 건학 이념을 가져도 부모가 변하지 않고, 기독교 자녀교육관을 정립하지 않으면 자녀가 세속으로 전락합니다. 가장 중요한 존재가 부모인데 그 부모를 기독학부모로 세우는 것을 그동안 교회가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강사로 나선 박상진 교수는 모인 학부모들에게 “당신은 단지 교회만 다니는 부모인가? 아니면 기독학부모입니까?”라고 물으면서 “먼저 부모가 변하지 않는 한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기독학부모는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대학진학을 위해 노예생활 하듯이 자녀교육에 매달리고 있는데, 이 같은 상황에서 하루빨리 탈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학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두 번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첫 번째 거듭남은 부모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 거듭남은 자녀교육에서도 온전히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학부모 유형을 4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첫째, ‘기독’ 학부모 유형입니다. ‘기독’은 강조되지만 학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교회봉사형입니다. 둘째, 세속형 기독 ‘학부모’입니다. 이는 ‘학부모’는 강조되지만 ‘기독’이 약한 경우입니다. 즉 믿지 않는 부모와 다를 바 없는 부모입니다. 셋째, ‘기독’ ‘학부모’유형으로 두 가지 다 강조되지만 서로 분리돼 있는 경우입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거나 통합 돼 있지 않는 경우입니다. 넷째, ‘기독학부모’ 통합형입니다.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세속적 교육열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육원리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유형입니다. 이 유형이 기독학부모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합니까?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못 알아듣겠습니까? ‘무슨 소리인 줄은 알겠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내 방식대로 하겠다’입니까? 좋은 대학 들어가고 나서 그 다음에 신앙생활을 해도 하면 되지…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고, 출세를 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 뒤에 신앙으로 돌아올 것 같습니까? 학업을 위해 신앙을 미뤄두면, 학업으로 성공하더라도 하나님께 사용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는 말의 뜻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자녀들이 믿지 않는대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우 여러분, 가정 신앙은 모아지고 나누어져야 합니다. 통합되고, 서로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각각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봉사 열심히 하고, 집에 가서는 각각 삶을 살고, 신앙생활이 모아지지 않는다면 가정 신앙 공동체로서의 모습이 갖추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정신앙공동체의 기능과 역할, 사명과 능력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가족들의 신앙이 한 곳으로 모여서 다시 그 신앙이 서로에게 나누어지고, 함께 사용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가정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자녀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신앙교육인데, 교회학교에서 신앙교육을 잘 해야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입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학교공부, 학원공부로 바쁜 자녀들을 앉혀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교육 시킬 시간이 많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정예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시간을 조절해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안 되면 10일에 한 번이든, 두 주에 한 번이든,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가정예배를 정하여 드려야 합니다.

가정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곳에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현장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예배는 온 가족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고, 온 가족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가족임을 확인하는 것이며, 가정 안에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복 주심을 경험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정 스스로에게, 세상에게, 사탄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을 모신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의 주권을 쥐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언제나 구하고, 누리면서 삽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안 되는 가정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내시려고,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중에 10번째 재앙이 무슨 재앙입니까? 이집트에 있는 모든 집에 죽음의 재앙이 임하면 그 집의 첫 아들, 그리고 그 집에 있는 가축들의 첫 태생이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이 재앙이 임하지 않도록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대문에, 문설주에 바른 집은 장자죽음의 재앙이 넘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유월하게 한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에는 장자죽음의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하나님의 백성 집이요, 하나님을 믿는 집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갈 집입니다.

여러분,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 보혈이 발라져 있으니, 사탄 마귀가 함부로 넘보지 못한다!”는 선포입니다.

여러분, 전쟁이 일어나면 육군, 해군, 공군이 모두 출동하여 전쟁을 치릅니다. 공군이 엄청난 화력을 갔다고 쏟아 부어 적지를 초토화시킵니다. 공군이 그렇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지라도, 육군이 적지에 진군하여 깃발을 올려야 이기는 것입니다. “여기는 우리 땅이다. 여기는 우리가 점령해서 접수했다.” 그리고 그곳에 본부를 차립니다. 구체적인 통치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집에 깃발을 꽂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깃발입니다. “우리 집은 예수님이 점령한 집이다! 우리 집은 십자가의 깃발이 꽂혀진 집이다.” “우리 집에 사탄 마귀가 들어오려면 우리 집의 주인이시오, 왕이시오, 통치자이신 예수님과 싸워 이겨야 들어올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또 국기 게양하는 것처럼,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라고 하는 것처럼, 여기는 하나님의 백성 집이다! 라고 가정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국기를 게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정의 중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면 “우리 가정의 중심을 하나님 중심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다짐하게 됩니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희 가정이 그동안 드려왔던 경험을 기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집은 일주일 중 한번 토요일에만 가정예배를 드립니다. 찬송 -성경읽기 – 기도 – 주기도문 순서로 진행됩니다.

저희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 찬송으로 함께 부르든지, 어른 찬송 중에 쉬운 찬송으로 불렀습니다. 21세기 찬송가 570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565장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등을 불렀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에는 어른찬송을 하나씩 배워가면서 불렀습니다. 어린 자녀와 같이 가정예배드릴 때는 어린 자녀가 아는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아이가 한글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성경을 읽을 때에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는 것도 좋습니다. 한 때는 성경을 읽고서 서로 마음속에 닿는 구절이 어떤 구절인지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던 적도 있고, 요즘에는 그냥 성경을 돌아가면서 읽기만 합니다. 꼭 설교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면 가정예배자료집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요즘 기독교서점에 가면 가정예배자료집 책들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사용하여 설교 내용을 읽는 것도 괜찮습니다.

저희 가정의 첫째 준희도 한글을 우리나이로 5살 때 자기가 깨우쳤습니다. 한글책과 가나다 카셋트 태이프을 들으면서 깨우쳤습니다. 그래서 가정예배 시 준희는 먼저 성경을 돌아가면서 읽을 때 함께 읽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재희도 한글을 우리나이로 3살 때, 생후 26개월 때부터 스스로 깨우쳤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그렇게 착각하는 것처럼 그 때는 천재인 줄 알았습니다. 여하튼 떠듬떠듬 글을 읽기 시작해서 재희가 4살 때에, 가정예배시 재희도 성경을 돌아가면서 읽었습니다. 드디어 재희가 성경을 읽는 것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형이 가정예배 때에 성경을 읽는 것을 보기만 하다가 자기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성경을 읽게 되었다는 감격과 기쁨과 만족과 성취감 등이 가득 차서, 자기 차례가 되었는데 성경책 위로 침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입이 다물어 지지도 않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광경을 우리 가족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가정예배를 드릴 때, 그 때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웃습니다.

가정예배 시 기도는 자녀들이 아주 어릴 때에는 부모가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어린 자녀들도 아빠를 위해서, 엄마를 위해서,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특별히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관심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물론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지만, 자녀들이 부모의 기도를 듣고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만큼 관심이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모 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딘 마포삼열 선교사는,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곳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01년 평양에 신학교를 세우고,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였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격려하며 독립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은 자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아들 마삼락 박사는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가정예배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지금도 두 분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기도는 우리 형제들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신앙 교육과 영향으로 다섯 아들들도 모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가정예배시 부모의 기도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정예배를 드리므로 가정 안에서 부모의 영적 권위를 세우게 됩니다. 부모의 영적 권위는 다른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자녀를 주안에서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으로 어떻게 기도하고, 본을 보이는 지를 통해서 영적 권위가 세워집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영적 권위를 주시고, 그 권위를 통하여 복과 은혜와 능력을 행하십니다.

성장한 자녀들과 함께 예배드릴 때에는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돌아가면서 읽고 난 후에, 함께 소리를 내어 기도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마무리 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온 가족이 순번을 정하여 기도담당자가 마무리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부모와 형제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 훈련이기도 하고, 자녀가 기도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부모와 형제, 가정에 대하여 얼마만큼 관심이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에 미리 가족들과 상의하여 약속한 대로, 헌금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모아진 헌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거나 월드비전, 컴패션 등 기관에 보내어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헌금을 드리지 않고 예배만 드려도 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가정예배를 드리고 난 후, 과일이나 과자나 아이스크림과 같은 간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가정예배 드리는 것에 대해 좋은 기대를 하게 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예배 마치고 간식을 먹지 않습니다. 있으면 먹기도 하구요.

가족 중에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은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나하고는 먼 말씀이네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이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우리 집안에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지십시오. 혼자서라도 시작하십시오.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믿음으로 그려보고 기대하면서 혼자서라도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렇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라도 꾸준히 하십시오. 요셉도 혼자서 감옥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다니엘도 이방땅에서 예루살렘쪽 창문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신앙의 가족들도 처음에는 한 사람이 믿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가정을 구원하여 주신다, 그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어 복을 받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저희 내외는 아들들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 데 그중의 하나는 한 번도 토요일 저녁에 가정예배 드리자고 하면 각자 하던 일을 멈추거나, 보던 텔레비전을 꺼야 하니까 입이 쑥 나온다든지, 귀찮아한다든지, 아니면 일부러 무슨 핑계를 대든지 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애들에게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저희 아들들이 밖에 나가서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는 제가 하나님이 아니니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확신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들이 실수를 하더라고, 잠간 잘못 판단하고,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고 곧 하나님 앞에 돌아올 것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각과 믿음을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가정예배 때 그들이 기도하는 내용이나 자세를 확인했고, 평소 대화중에 그들의 신앙의 중심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열매 맺는 교회의 차영회 목사는 “가정예배만 제대로 드려도 한국 교회가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지속적인 가정예배야말로 신앙생활의 승리를 보장하는 비밀병기라고 강조합니다. 차영회 목사님은 자신의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려온 경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가정예배를 드려보니 아이들이 하나님은 누구신지, 왜 신앙을 가져야 하는지 스스로 알아가더랍니다. 그러면서 가정예배는 기적을 낳는 자녀교육법이라고 확신있게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가정예배를 시작하십시오. 가정예배를 드리면 금방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방해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하길 잘 했다!’ ‘이래서 가정예배를 드리라고 했구나!’ ‘가정예배를 드리니 우리 가정에 놀라운 일이 생겼네.’ ‘우리가정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 가정예배의 은혜구나!’라고 느끼고 깨닫고 고백하는 순간이 곧 올 것입니다.

예배가 없는 곳엔 은혜가 없습니다. 아니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내려 주셔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하는 마음이 아니면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도 그릇이 엎어져있으면 그릇에 빗물이 담기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지고, 담겨지고, 누릴 수 있습니다.

가정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가족들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돕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는 귀한 교육의 시간이 되며, 부모와 자녀 간에는 소중한 대화의 시간이 됩니다. 가정에서 가정예배 시간보다 더 귀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은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가정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정 예배는 가정을 경건한 가정으로 만드는 신앙을 실천하는 증거입니다. 교우 여러분, 가정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의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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