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의 확신 | 로이드존스 [구원의 확신] 로고스묵상 \”위기의 그리스도인\” 28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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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은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당당하게 표시하고 빛을 드러내십시요.
어둠의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빛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평화와 기쁨의 광채가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로이드존스 #배경락목사 #신동수목사 #구원의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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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을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 – GotQuestions.org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적인 삶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 우리의 영적 성장, 선행들 및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서 구원의 확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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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4/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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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 브런치

우리는 설교말씀을 통해 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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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9/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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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교육 – 2과 구원의 확신

당신은 지금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 구원의 확신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영생)을 얻었음을 조금도 의심이 없이 완전히 믿는 상태를 뜻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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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etheliumc.org

Date Published: 6/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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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 다음블로그

구원은 믿음으로 얻었는데, 확신은 자기 의로 얻으려고 합니다. 나의 어떤 행위, 나의 어떤 선함, 나의 의로움을 기초로 확신을 얻으려고 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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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3/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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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 알쓸잡

하나님을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너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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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123.tistory.com

Date Published: 6/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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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을 얻는 2가지 방법, “분명한 확신을 구하라” – 기독일보

자신을 나타내주셔야 이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구하십시오. 계속 순종하면서 그를 찾으십시오. “분명한 확신”을 달라고 하십시오. 주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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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6/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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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확신 1 – Korea Times

정성국 목사(횃불트리니티 총장 어시스턴트/횃불재단 DMIN 스태프). 구원의 확신은 구원의 본질에 속할까? 구원받으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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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icagokoreatimes.com

Date Published: 5/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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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 – 리폼드뉴스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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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reformednews.co.kr

Date Published: 5/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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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칼럼] 구원의 확신은 사랑의 확신입니다 – 크리스천투데이

구원의 확신은 내게 구원받을 만한 실력이나, 내 안의 구원받을 만한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사랑의 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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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5/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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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구원 의 확신

  • Author: 로고스교회 – Logos Evangelical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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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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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을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

질문

구원의 확신을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변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방법으로 구원의 확신을 찾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적인 삶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 우리의 영적 성장, 선행들 및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구원의 증거는 될 수 있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구원에 대한 확신의 기반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객관적인 진리 안에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표하신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신뢰해야 합니다.어떻게 당신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5장 11-13절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들이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아들을 믿은 자들입니다(요 1:12). 만일 당신에게 예수님이 있다면 당신은 임시적인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매일 궁금해하고 염려하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구원의 계획을 분명하게 세운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요 3:16; 행 16:3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당신은 회개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치르기 위해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롬 5:8; 고후 5:21)? 당신은 구원받기 위해 오로지 그분만을 의지합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네”라고 한다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확신은 의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예수께서 친히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8-29).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 자신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우리는 주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둡니다(시 119:11). 주를 향한 범죄 중에는 의심의 죄가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하는 말씀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의심하는 대신에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말씀으로부터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완전하고 온전한 구원에 근거합니다.

구원의 확신

우리는 설교말씀을 통해 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질문에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는가?

‘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아직은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있다고 믿으면 확신이 있는 거라고 해서 있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대답이 솔직한 대답일 수도 또는 아닐 수도 있으며, 정말 모르는 경우일 수도 있다.

구원의 확신은 무엇일까?

언제 죽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그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100% 확신한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오늘 이 시간 이후 에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 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 은 상태로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죄가 있다는 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 자신이 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를 물어볼 때 대부분 확신이 있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항상 일관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주님 안에서 항상 바로 서있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길 게 얘기했지만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의미라면 ‘ 그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가 솔직한 나의 대답이다.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구 원의 확신을 ‘내가 언제든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나는 그렇다. 언제 어디서든 죄를 짓고 주님과 멀어질 수 있는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한번 이상은 들어보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질문 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라고 답해야 하는가?

로마서 10장 9절 10절에는 구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10)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이어야 한다.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막연한 확신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상관없이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 그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어야 한다. 우리가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100% 보장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는 것이 구원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여 매일 쓰러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 죄를 짓고 연약함이 보일 때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내가 확실하게 믿는 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구원에 대한 내용, 즉 하나님을 믿고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 사실과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대로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뿐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하나님을 떠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으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그 순간에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한번 믿었으니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보다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내 맘대로 살아가면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갖고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 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 에 대한 확신을 갖고 매 순간 매 순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 는 믿음이 필요하다.

새신자 교육 – 2과 구원의 확신 – Bethel International United Methodist Church

● 만일 당신이 오늘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실 수 있으신가요?

당신은 지금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 구원의 확신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영생)을 얻었음을

조금도 의심이 없이 완전히 믿는 상태를 뜻합니다 .

Ⅰ. 구원의 확신은 가능한 것인가?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 (로마서 10장 10절)

1. 일부 믿음이 있는 것 같은 그리스도인들도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는 영생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에 놀랄 뿐 아니라, 분노를 느끼기조차 합니다. 물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이 세상에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2. 믿는 자의 특권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점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초대 신자를 향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5장13절). 요한은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이 서신을 썼습니다. 믿는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가능한 것이며, 확실한 것입니다.

Ⅱ. 왜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게 되나?

신앙이나 구원을 상실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흔들리거나 감소되거나 일시적으로 중단되어질 수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확신을 아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 6장 18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참되신 분이십니다(로마서3:4). 그 분은 결코 거짓말하실 수 없으시며(히브리서6장18절) 한번 약속하신 것을 취소하거나 배반하시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미쁘신(믿음직스러운) 하나님이십니다(민수기23장19절)

2. 하나님께 아직 고백하지 않은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의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장 1절)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장 9절)

죄는 확신의 큰 장애물입니다. 신자가 죄를 지으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근심하십니다. 또한 범죄한 신자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시편51편12절).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즉시 돌이킨다면 잃어버린 구원의 확신을 되찾게 됩니다(요한일서1장9절)

3.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확신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 까닭은 성령께서 기도를 통하여 신자의 심령을 깨우쳐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여 확신시켜 주시고 또한 받은 구원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Ⅲ. 구원의 확신을 얻는 방법 : 믿음, 성령의 내적 증거

1. 구원의 확신은 믿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믿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단편적인 면만을 말하거나 자기 나름대로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또 믿는다는 말만 나오면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선입관을 발동시키기도 합니다. 가장 흔한 오해는 무엇이 있나요?

1) 믿음에 대한 오해

① 믿음은 맹신이다 : 믿음은 무식한 시골 할머니처럼 아무 비판없이 “지성이면 감천”식으로 믿어 버리는 맹목적인 굴종의 행위라는 생각

② 믿음은 자기최면이다 : 믿음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자꾸만 그렇게 시인하는 반복적 노력이라는 주장

③ 믿음은 막연한 희망적 기대이다 : 믿음은 인간이 나약하고 괴롭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면”하고 동경하는 연습이라는 주장.

④ 믿음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다 : 믿음은 자기의 의지를 강하게 발동시켜 마음만 먹으면 다할 수 있다는 신념의 훈련이라는 주장.

2) 올바른 믿음 : 계시 의존신앙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 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한복음 8장 24절)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장 21절)

믿음은 항상 어떤 사실과 연관이 됩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예 :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등등)과 관련하여 출발하는 것이지 결코 막연하고 공허한 “무한에의 동경”이 아닙니다.

①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그 대상, 내용, 목적 면에서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요20:30,31)

* 믿음의 대상 : 하나님

* 믿음의 내용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 믿음의 목적 :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함

② 믿음은 자기최면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역사적인 사실 위에 기초하고 있다.(요19:31-35, 20:1-8, 요일1:2, 고전15:12-17)

③ 믿음은 인간 편에서 나약한 희망적 기대, 단순한 동경의 산물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선포에 전인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빌3:4-6, 행9:1-7, 고전15:8)

④ 믿음은 적극적 사고의 훈련이나 신념의 마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것들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신뢰하는 것이다.(엡2:8-9)

3) 구원의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기록한 성경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후서 3:15절)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읽는 자에게 감동을 받고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믿음의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2. 성령의 내적 증거(요한일서3:24, 고후1:21-22, 엡1:13-14)를 통해서 구원의 확신이 가능합니다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 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로마서 8장 15-16절)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3절)

당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줄을 압니까? 예수께서 당신 안에 사시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아 알게끔 됩니다(요한일서3장24절)

또한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십니다(롬8:16)

< 복습문제 >

1. 구원의 확신은 가능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2.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3. 믿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어떤 것들이고 왜 잘못되었습니까?

냉수한그릇 창고

◈구원의 확신 요일5:6~13 2015.08.30.설교스크랩, 녹취, 출처

※여기 블로그에서는 평소에 ‘구원의 확신’이 미치는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설교를 자주 소개했는데,

아래 설교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루두루 보아야지요.

▲요한일서가 기록된 목적은,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일서는 예수님을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편지이죠.

예수님을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는바

그 믿음의 도리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고, 더 깊은 확신 가운데 거하게 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안다’는 단어가 계속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너희가 알다시피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이렇게 안다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를

진정 아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잘 설명해 주는 구절이 바로 본문입니다.

5:13 ‘내가 하나님이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그러므로 편지를 읽는 독자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후반부에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

그러니까 뒤집어보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구원 받는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확신은, 구원 얻는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때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존 라일 청교도 목회자는, 믿음과 확신을 이렇게 구별해서 설명했습니다.

믿음은, 뿌리와 같다면

확신은 꽃과 같다.

뿌리 없는 꽃은 있을 수 없으나, 꽃이 없는 뿌리는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믿음이 없이는 확신에 이르지 못하지만, 확신이 없는 믿음은 때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많은 군중들 틈에 끼어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잡았던 여인과 같다면,

확신이란, 자신을 대적하고 돌로 치려는 살인자들 앞에서, 하늘이 열리고

보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던 스데반과 같습니다.

믿음이란, 십자가 상에 한 강도가,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간청했던 한 강도와 같다면,

확신이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건강마저 상실한채, 먼지 더미에 앉아서 내가 알기로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다 고 고백했던 욥과 같습니다.

믿음이란, 베드로가 물에 빠져 주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 라고 간청했던 그런 모습과같다면,

확신이란, 그 베드로가 후에 성령을 받고서, 공회와 수많은 사람앞에서 담대하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이름이 없다’라고 그렇게 담대하게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란, 다메섹 도상을 가던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강한 빛으로 만나 눈이 멀어 어느 집에서 슬픔과 충격속에서 기도하던 모습과 같다면,

확신이란, 그가 노년에 자신의 무덤을 생각하면서, 감옥 속에서 ‘나의 갈려갈 길을 다 마치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으니,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라고 고백한 것이, 바로 확신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믿나이다. 그러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간청하는 그런 간곡한 음성이라면,

확신이란, 그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있으리요, 누가 나를 정죄하고 송사하리요? 라고 고백하는 담대한 외침과 같습니다.

이렇게 믿음과 확신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 받지 못한 것이다.. 라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파 이단이 그런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고 현혹시켰습니다.

당신은 구원 받았음을 확신합니까?

확신이 아직 없는데요.

그러면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확신이 없는 채로 구원 받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게 아니라,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여러 가지로 놀랄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오직 않았을 것 같은 사람이, 천국에 와 있는 것에 놀라고

-올 것 같았는데, 그가 안 보이는 것에 대해 놀라고

-나 같은 죄인이 거기에 있는 것에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작은 불꽃도 진짜 불입니다.

한 방울의 물도, 저 넓은 바다에 있는 물과 동일한 물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믿음, 확신이 있는 믿음으로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연약한 믿음, 한 굵은 가지로만 수액을 빨아들이는게 아니라, 작은 싹도 그 뿌리로부터 수액을 빨아들이듯이, 우리 작은 믿음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거죠.

그러므로 ‘확신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은, 잘못된 명제입니다.

확신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확신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성경에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구절이 처음 나온 곳이 창15:6절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을 평가하는 구절인데요.

창15:5~6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을 세어보아라. 과연 셀 수 있겠느냐?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도이와 같이 될 것이다.

6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그런 믿음 때문에,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성경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첫 번째 구절이 여기입니다.

‘의롭게 된다’는 말은 창6장에 하나님이 노아를 의롭게 여기셨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그 표현은 창15장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그 믿음이

언제 나왔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15장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건의합니다. ‘하나님, 다메섹에서 데려온 이 엘리에셀을 제가 아들로 상속자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이 건의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느냐면

창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데

약 10여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종을 양자로 들이는 것도 자식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건의했죠.

그 배경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의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밖으로 아브람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에 저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그 별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랬더니 아브람이, 이상하게도 그 별을 보고서 믿음이 생깁니다.

그냥 하나님의 약속만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았는데,

별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생긴 겁니다.

보고 믿는 거죠.

사람은 말로 하면 잘 못 믿는데, 뭔가를 보여주면 잘 믿습니다.

저는 이런 믿음을 가리켜 ‘시청각 믿음’, 뭔가 봐야 믿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연약한 믿음입니다. 기본단계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금방 쓰러집니다. 별이 보이지 않으면, 또 쓰러집니다.

16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래가 또 쓰러집니다. 계속해서 믿음의 시험에서 쓰러집니다.

그러니까 15장의 단계는 확신 단계가 아니라, 연약한 단계요,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이 섞여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더 나아가 창22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확실하고 견고한 믿음으로 이삭을 바칩니다. 하나님은 그때는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15장에서는 별을 보여 주셨는데, 22장에서는 아무 것도 보여주시지 않고, 시나리오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우리는 이 대목을 연극으로 만들면, 그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중지시킬 것을 알기 때문에연극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실제입니다.

아브라함은 확신을 가지고 순종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믿음으로 의롭게되었다 하는 말씀을 하실 때, 창22장에 만일 이 멘트가 붙어있다면, 우리 모두는 다 탈락할 것입니다. 그런 확실한 믿음, 견고한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다 의롭지 못한 것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22장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 여기신게 아니라, 15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기신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지극히 연약한 믿음, 때로는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의심이 섞여있는 그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이 없다고 해서 내가 구원 못 받았다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2부 예배가 끝나고, 교회에 나온지 몇 주 안 된 어느 형제가 제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제가 믿음은 있었는데, 확신이 없어서 늘 고민이었다고. 오늘 저를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 고민이 있는 분들은, 구원 받은 분들입니다,’

내가 정말 구원 받았나, 안 받았나.. 고민이 없는 분은

구원 못 받은 사람은, 그런 고민을 하지도 않습니다.

내게 그런 고민이 있다는 자체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확신에 이르지 못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라는 것을 거기서부터 출발할 때, 우리가 확신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ㅅ브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었는데, 확신은 자기 의로 얻으려고 합니다. 나의 어떤 행위, 나의 어떤 선함, 나의 의로움을 기초로 확신을 얻으려고 하니,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것 같을 때는 확신을 얻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의 행위에 기초해서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는, 무너지고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합니다. 믿기는 믿는데 확신이 없는 것은, 그 확신을 나의 의로움에 기초해서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확신은 영어로 assurance라고 합니다. 이 단어와 비슷한 말로 insurance/보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확신을 보험처럼 얻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보험은 내가 얼마나 디파짓을 많이 했느냐에 따라, 그 대가를 많이 얻는 거죠. 내가 많은 것을 투자하고, 예치하면 그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보험 드는 것처럼 믿음 생활하시는 분이 있는데, 여러 종교에 가능한 많은 보험을 들어놓아야 안전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보험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확신이 아니라 assurance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확신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찬옥 이라는 청교도가 쓴 글이 있습니다.

“믿음은 마음에 새겨졌으나 먼지로 잔뜩 뒤엎여 읽을 수 없는 편지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먼지 때문에, 그 편지 내용이 지워지지 않는다.” Stephan charnock

편지가 있는데, 편지로 가득해서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의 내용이 엄청난 유산의 상속자라는 편지였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자기에게 약속된, 그가 왕국의 후손일수도 있습니다. 그 엄청난 유업을 잇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편지라고 했을 때, 그 편지 내용을 먼지가 뒤덮여 알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먼지가 뒤덮여있기 때문에, 그 편지를 명확히 읽지 못해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읽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편지 내용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이는 구원 받지 못하지만 확신이 없이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받을 수 있습니다. 저도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지만, 고2때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운데, 확신 있는 질문 가운데, 제가 갑자기 불안해 졌습니다.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믿어요. 그러나 확신은 없어서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고2때 학교 기도실에 가서, 점심을 안 먹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보여주세요. 제가 좀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분명히 믿는데, 예수님이 나타나 주셔야 확신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또한 제가 중고등부 회장인데, 확신이 없어서 되겠느냐고

이렇게 점심을 거르고 열심히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 때 점심을 한끼 안 먹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그냥 배가 고픈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확신이 언제 임했느냐면 대학 1학년 때, 성령의 세례와 함께 큰 확신이 임했습니다. 만일 그러면 제가 고2 직후에 어떤 일이 생겨서 제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제가 구원 못 받았을까요?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아니요, 예수님을 믿었지만 단지 확신이 없었을 뿐인데, 만약 확신이 없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그러면, 그 당시 제 같은 사람은 다 구원을 못 받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 거죠. 확신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그 믿음이

견고해지고 확실해지는 것이 확신인데,

확신 없다고 해서, 구원 못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까지만 듣고, 아 확신 없어도 되는구나.. 하시면 안 됩니다.

아 나는 믿으면 되었지, 확신은 안 가져도 되는구나.. 하시면 안 됩니다.

믿음과 확신이 별개이고, 확신이 없어도 구원 받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부인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또한 더 큰 잘못입니다. 요즘 가톨릭 교회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공개적으로 부인했습니다.

구원의확신은 공허하고불경건한 확신이다. 죽음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아무도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이것은 이단 중의 이단이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들의 가르침에 반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성경에 수없이 많은 확신이 등장하지 않는가. 순교자들은 확신으로 순교한 거죠. 확신 없이 어떻게 순교하겠습니까. 놀랍게도 믿음의 성도들 가운데서도, 확신을 인정하지 않거나 거부하거나, 때로는 위험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느 정도 불안해하며 의심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제가 뭐 아직 구원까지나..

뭐 이렇게 자기자신의 의심과 불안을 마치 겸손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내가좀 더 의로워져야, 내가 더 선해지고, 내가 더 당당해져야 내가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확신을 나에 근거해서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확신이 아닙니다. 확신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은, 마치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 안에 영적인 새생명이 있으므로 확신하십니까?

있으면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갓 태어난 아기들은, 아직 엄마 얼굴도 잘 구별 못 합니다. 늘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부모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다가, 그 엄마 아빠가 얼굴을 비치면 아기들은 낯선 사람인줄 알고 놀랍니다. 내 부모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새생명이 출생했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가운데 자라가지 않으면 낯선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대요리문답 81번에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질문) 모든 진실한 신자는 자신이 현재 은혜의 상태에 있고 장차 구원 받으리라는 것을 항상 확신하는가?

대답) 은혜와 구원의 확신은 신앙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진실한 신자도 확신을 얻기까지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요일5:13)

확신을 얻은 후에도 혼란과 죄와 유혹과 실족으로 인해 그 강도가 약해지거나 아예 중단되기도 한다. (시77:7, 98:31~32)

그러나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시며 도우시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절망에는 이르지 않는다. (시93:13~15, 23, 요일3:9, 사54:7~11)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믿음과 확신은 다를 수 있고, 또 어떤 성도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제가 보니까 저는 2년 걸린 것 같습니다. 고2때 간절히 기도하고, 대학 1학년때 확신을 얻었습니다. 오래 걸릴 수도 있고, 확신을 얻은 이후에라도 그 확신이 약해질 수도 있고, 중단 될 수도 있습니다. 진짜 내가 믿고 있나? 라고 여길 정도로, 그렇게확신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거듭난 사람은 완전히 절망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확신이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때로 우리 확신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는 다 믿음으로 다 믿음으로 구원 얻게 된다. 완전히 우리가 절망에 이르지는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주의 5대교리가 있습니다.

TULIP이란 영어 이니셜로 설명하지요.

Total depravity and inability 인간의 전적타락과 무능력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imited and particular atonement 제한적이며 특별한 속죄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들의 견인

여기서 5번째 ‘성도들의 견인’이 구원의 확신과 연결됩니다.

성도들의 견인, 이것은 진정으로거듭난 사람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끌고 가시기 때문에, 끝까지 지키게 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끝까지 내 믿음을 지키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끌어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10: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주님의 견고하심, 보호하심. 성도의 견인이 가능한 것은, 주님의 보존하심 preservation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존하심 preservation 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히6장에 한번 비췸을 얻고 은혜를 맛본 자가 이제 구원에서 떨어진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건 애당초 진정 거듭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 거듭난 자라면, 때로 시험에 들고, 믿음을 떠난 것 같고, 때로는 방황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돌아오게 됩니다.

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것을 우리가 믿기에, 구원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견고하기 때문에, 내가 강하게 믿기 때문에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존하심이 떠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확신 있는 믿음으로 더 나아가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요일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왜 확신이 없습니까?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증거를 확인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음을 잘 속아 넘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니죠. 진정한 믿음은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다른 말로 증언책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행하신 일을 증언하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 증언을 계속 읽다보면, 우리 마음속에 뭔가 쌓입니다. 믿음이 쌓입니다. 왜냐하면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 그랬습니다. 물과 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

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되었죠.

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죠.

요일5: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모든 것을 증언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우리 각자에게 깨닫게 하시고, 확신하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증언이 바로 성경입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확신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확신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증언을 깨닫게 하시고, 증거를 믿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인은 도장입니다. 여러분, 어떤 문서에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보증한다,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많은 계약 내용이 있는데, 도장이 찍히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문서가 됩니다. 도장이 찍혀야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우리 마음속에 도장을 찍어주시는 겁니다. 이 증언(성경)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확실하다고 도장을 찍어주시는 겁니다.

제가 고2때, 점심밥도 먹지 않고 간절히기도 했지만, 확신이 오지 않았던 것은, 제가 그때 증언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학때 말씀을 듣고서, 그 증언을 살피는 가운데, 성령님이 도장을 꽝 찍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니므이 증언책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도장을 찍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성령체험만 간구하면 이상하게 신비주의, 감정주의, 자기 개인의 체험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성령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증언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증거로 도장을 찍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 이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안에 증거가 확인되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확신을 구하시면, 성령님께서 도장을 찍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확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담대한 확신으로 베드로처럼 사도바울처럼 다니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심을 믿고,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 그런 확신에 찬 믿음으로 살아가실 줄 믿습니다. 믿음이 걷는 것이라면, 확신은 뛰는 것입니다. 어떤 청교도는, 확신은 새 날개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새가 날지 못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요? 여러분 새에게 날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냘픈 다리로 걸어가거니 뛰어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확신이 없는 믿음의 생활은 마치, 새가 가냘픈 다리로 뛰어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날아야지요. 확신은 믿음의 날개입니다. 그런데 새장 속에 오래 갇혀 있었던 새는, 새장 문을 열어주어도, 날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날개를 펴서, 우리가 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확신 가운데 믿음의 날개를 펴서 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날지는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날개를 펴서 나는 연습을 해야지요. 그게 우리 믿음의 훈련입니다.

벧후1: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히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우리의 노력과 인내가 확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 임하는 통로가 되고 수단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 받은 감격을 누리고, 하늘 나는 새처럼 믿음의 날개를 펴서, 능력있는 삶을 사는데, 확신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확신 가운데 이르게 되는, 그리고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되는, 모든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확신에 이를 수 있는 은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믿고 확신 가운데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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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의 성경공부는 구원의 확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떤 신앙의 문제나 세상의 문제에 부딪히면 구원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1. 당신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당신의 생애에 모셔드리기로 결심(기도)을 하셨습니까?(롬10:9-10)

우리가 교회에 처음 나오면 성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때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하나님을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너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면 주님을 내 마음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먼저는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을 말씀을 들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나의 거룩한 행위가 아닙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주님을 믿어 거룩한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의인이 되기 위해서 거룩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행위는 이 세상에 한 명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은 나에게 의인이라 말씀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실까요?(요1:12, 계3:20, 고전3:16)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주님을 마음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믿으면 예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 안에 함께 존재하는 겁니다. 주님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곁에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십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지금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이 나의 마음의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문을 두드릴 때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면 주님은 내 안에 들어와 더불어 먹고 주님은 나와 더불어 먹게 됩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의 몸이 성전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으면 함부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2.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을 무엇을 근거로 알 수 있습니까?

말씀 :요일 5:13, 요5:24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내 안에 주님이 거주하게 되고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게 됩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을 깨닫게 되고 주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한 번 영생을 얻은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삶 : 고후 5:17, 갈5:17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내가 구원받고 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죄악된 것은 모두 사라졌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옛사람은 심판받고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져야 하지만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이후의 새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성령의 확증 : 롬8:16, 갈4:6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 하나님은 내 안에 계셔서 구원의 확증해 주십니다. 내가 구원받고 나면 흔들리지 않는 것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성부 하나님께 증언해 주십니다.

3. 당신이 지금껏 지은 모든 죄(현재, 미래, 과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히10:14,17,18, 시103:12, 사43:25)

히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단 번에 사라졌음을 믿게 됩니다.

히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나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의 모든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시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겨주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됩니다.

롬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는 율법 아래에 놓인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놓였습니다. 은혜 아래에 놓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4.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얻었다 잃었다 할 수 있습니까?(요10:28-29)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님이 나에게 영생을 주셨으니 나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탄도 주님의 손에서 나를 빼앗지 못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나의 신앙생활의 모습 때문에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행위가 거룩하지 못하다고 해서 구원의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구원받은 백성은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성경에서 구원의 확신을 말하는 성경구절을 알고 있습니까?

* 요5:24, 요일5:11-12, 요1:12, 요일5:13, 요3:16

우리는 위에 나오는 본문의 구절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이 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번 선택한 백성은 심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 하시고 만약 자범죄를 짓는다면 회개할 수 있도록 징계를 내립니다. 우리 모두 구원의 확신을 얻었으니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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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을 얻는 2가지 방법, “분명한 확신을 구하라” : 기독교 : 미주 종교신문1위 : 기독일보

분명한 확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위치에 대한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주변 세상에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은 특히 오늘 같은 성령강림절에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성령강림절은 오래전 1세기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사건을 겪은 후 강력한 증인으로 변모했습니다. 주님이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하고 명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그 능력을 받지 못했다면, 아무리 제자들이라 해도 주님과 그의 대의를 세상 곳곳에 전파하는 증인과 대변자가 되기에 미흡했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그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야 산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관점에서 확신의 문제를 살펴보려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는 주된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이 점에 항상 유념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추론의 과정을 거쳐 확신을 얻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사용해 온 접근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을 읽고, 그에 근거해서 추론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매우 소중한 확신의 원천이 되지만, 그에 따르는 위험도 분명히 있습니다. “믿는다”라고 말만 하는 데서 그치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적인 동의에만 그칠 위험, 안점감만 얻으려 할 위험, 자기가 편해지려고 일정한 사실을 인정하기로 결심 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형태의 확신, 사람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확신이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주이지는 직접적인 확신입니다. 첫 번째로 제가 입증 하고자 하는 사실은, 성경이 분명 하고도 확실하게 이 확신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밝히고 싶은 점은, 주님이 친히 이런 확신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 번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중대한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요 7:37~39, 요 14장). 이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성취되었는지 알고 싶으면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서신서 곳곳에, 그리고 로마서 8:16에 결정적인 진술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로 설명하지 못해도 이런 즐거움(벧전 1:8)을 경험합니다. 주님을 직접 본 적이 없음에도 이런 관계를 맺습니다. 이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직접적인 확신이 초대교회 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행 2:39). 감사하게도 이를 입증하는 증거들이 더 있습니다. 역사는 아주 강력한 증거들을 제공해 줍니다. 여기에서 역사란 무엇보다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부흥은 성령이 엄청난 능력으로 한 회중이나 한 교회나 일군의 교회들이나 떼로 온 나라에 다시 임하시는 일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부흥의 때만 성령을 부어 주셨던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교회의 부흥은 일어나진 않았지만 개인들이 성령의 부으심을 경험한 사례가 넘치도록 많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떻게 이런 확신을 주실까요? 성령이 사용하시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그중에서 더 자주 사용하시는 방식은 성경 말씀을 쓰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영혼에 직접 말씀하심으로 확신을 주시기도 합니다. 성령이 우리 영혼을 감동시키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주시는 확신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 죄가 사함받았다는 것을 절대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확신시켜 주십니다.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도 개인적으로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다고 말하는 로마서 5:5을 보십시오.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분명해집니다. 더 이상 추론할 여지가 없습니다. 부흥을 경험한 무리들이나 개인들의 생애를 읽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게 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게 해주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는 것이란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으로 반드시 따라오는 일은 영원한 세계를 느끼고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2에 나오는 “보증”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보증”은 사전에 미리 주는 할부금입니다. 미리 맛보는 것, 첫 열매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확신을 구해야 할까요? 어떻게 이 확신을 얻어야 할까요? 첫 번째로 명백한 사실은 그 가능성 자체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확신을 구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고 나면, 이제 그 확신을 구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순종함으로 그 확신을 구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까? 자신을 나타내주셔야 이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구하십시오. 계속 순종하면서 그를 찾으십시오. “분명한 확신”을 달라고 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심을 알 때까지, 주님이 지극히 복되신 성령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직접 듣고, 참으로 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마틴 로이드 존스,하나님께로 난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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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

박혜근 교수가 들려준 신학과 신앙이야기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 구원의 확신 (1) 박혜근 | 입력 : 2011/07/31 [12:51] 입력 : 2011/07/31 [12:51]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구원의 경험 중의 하나이다. 구원의 확신은 평신도 사이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었지만 통일된 가르침 없이 흘러왔다. 그런 면에서 어떤 점에서는 생소하고 과목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책이 없다. 유일하게 있는 책이 R. Ryle 정도의 책이다. 평신도용이다. 그러나 신학적 지평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신학적인 논의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잡한 이슈들을 담고 있다. Joel Beeke 박사학위 논문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학교에서 지향하는 목회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적 목회이다. 개혁파는 칼빈 사후에 한번이라도 다른 목회를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 점을 꼭 기억하라.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이 목회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목사의 사명이다. 밥 퍼는 집사들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선교도 가르치는 것이다. 선교가 나귀타고 들판에 다니면서 성경책 나눠주는 게 선교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들이 말도 타고, 나귀도 타고 밀림도 헤치는 궁극적 목적은 가르치려는 것이다. 병원을 짓고, 학교를 만드는 것은 복지국가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라면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어 가는 사람이 선교사이고 목사이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우는 것이고, 교회 안에 교사를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직업을 갖기 위해서 소명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

과거에 솔로몬 성전에서 대제사장들이 안식일에 바톤 터치하였다. 안식일에 바꿀 때까지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잠을 자는데, 누워서 자는 사람은 선임들이고, 나머지는 벽에 기댄 채로 밤을 새웠다. 그러니까 한번이라도 그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멈춘 적이 없었다. 과거 유대인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트는 시간을 맞추어서 지평선에 해가 오르는지를 보았다. 해가 오를 때 제사를 집행하고 해가 질 때 집행을 멈추었다.

향 피우는 것도 복잡한 절차이지만 그들은 수백 년간 그것을 반복하였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있는데 성전에서 말씀을 날마다 연구하고 가르쳤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말씀 연구하고 가르치다가 인생 마쳐야 한다. 그렇게 할 생각이 없으면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말씀을 공부하고 그 공부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깨우쳐야 한다. 그것이 여러분의 사명이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고 깨우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1.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

한국교회가 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가볍게 다룬 점이 없지 않다. 사경회나 부흥회에 가면 구원받은 줄 믿습니까? 아멘! 이 말로 구원의 확신을 종결지었다. 그런데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번 학기는 구원의 확신을 다루면서 구원의 확신과 관련된 성경적 근거하든지 신학적인 것을 다룰 것이다.

책을 찾아보니까 루이스 벌코프나 후크마의 책에도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 구원의 확신은 많이 다루는 주제인데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서 안타까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에 관련된 신학에 대하여 전반적인 소개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확신이라고 말하면 이렇게 알아들어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논쟁은 종교개혁시대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논쟁점 중의 하나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시대로 돌아가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무엇을 가지고 논쟁했는지 들여다보면 논쟁점 중의 하나가 바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이 논쟁은 또 다른 양상으로 번져나갔다. 종교개혁시대에도 그랬고, 종교개혁 후 시대에도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에 관련된 논쟁은 종교개혁시점부터 오늘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핵심 논쟁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한 논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 죽고 난 뒤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약 1000년, 중세시대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한 논쟁은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관된 입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교회의 구원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냐,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구원의 확신에 관한 어떤 개인적인 시도를 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1600년대 트렌트 종교회의에 가면 뭐라고 하냐면, 그것은 사악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러니까 로마교회는 중세 1000년 동안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는 정의하면 그런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하는 시도 자체는 단순하게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그레고리 대제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에 마침내 구원의 확신의 문제가 논쟁점이 되기 시작하면서-반격했던 이유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한다- 터져나온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과거 중세시대의 교회에서 가졌던 것보다 더 강경한 것이었다. 어떤 것이냐면 만약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시도하는 것은 저주를 받을 짓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전에는 구원의 확신을 둘러싼 논쟁은 없었다.

그러면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의가 있었느냐면 있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히포의 어거스틴이었다. 또 한 사람은 Duns Scotus였다. 어거스틴이나 둔스 스커타스의 입장은 이런 것이었다. 구원에 대한 확실성은 논의하기는 어려워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구원에 대한 대략의 추정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입장은 100% 확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지 개연성 정도에서 구원의 확신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자, 이렇게 기껏해봐야 구원의 확신은 개연성 정도에 머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중세의 로마교회의 고해성사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해성사제도는 죄 용서를 베풀기 위한 교회적 절차이다. 지금도 고해성사를 한다. 죄 용서 받기 위해서는 사제를 찾아가서 자신의 죄를 개인적으로 자백을 하게 되면 그 죄의 고백을 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선포하는데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징벌적인 명령을 내린다. 그것이 헌금이든, 금식기도든 혹은 고행이든 무엇이든 간에 교회가 부과하는 소위 말하는 죄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얼마나 진실하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죄의 용서가 주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고해성사와 관계가 있다.

어거스틴은 견인의 교리를 가르치면서-구원의 확신은 견인 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견인을 어거스틴이 가르칠 때 무엇이라고 했냐면 어거스틴은 그의 생애 초기와 후기는 중기와는 다르다. 그의 사상이 절정에 이른 중기 시대에는 견인을 인정하였다. 견인의 교리를 발전시킬 때는 어디에서 근거를 찾았느냐면 예정의 교리에서 가져왔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세전 예정하시는 무궁하신 사랑 위에서 성도는 구원받는 날까지 구원받는 믿음을 간직하게 된다고 자기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데 후기에 접어들면서 무슨 말을 하면, 어거스틴이 비록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견인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입장을 후기에 보였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견인의 교리의 부정이다. 견인이란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까지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실 때에는 구원이라는 결과만 예정하시는 것이 아니다.

구원 받게 하시되 그 사이 과정은 역사적 우연에 맡겨 놓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예정행위는 목적도 결과도 과정도 구체적으로 예정하셔서 그것을 역사의 우연에 맡겨 놓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과정에 따라 진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영광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그 전체 일생은 하나님이 예정하신대로 된다는 것이 예정론의 중요한 원리이다. 그러니까 예정을 믿는 신자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여곡절을 입고, 천신만고를 당하고 정말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좌절을 경험한다.

그것을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신자들은 그것을 우연의 바다에 던져진 운명의 슬픔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우리 개인의 기대에는 벗어나는 사고이기도 하고 사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계획한대로 되는 것이다. 그런 확신 안에서 자신의 삶을 낙관적으로 보았다. 정말 여러분들이 긍정적 사고를 말하려면 예정론을 믿어야 한다. 인생의 낙관적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의 확신이 없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나중에 후기에 가서 뭐라고 하냐면, 신자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해서 끝났다면 어거스틴의 명예에 누가 될 뻔했다. 그런데 뭐라고 했느냐, 은혜에서 떨어진 신자들이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였다. 은혜에서 떨어진 신자가 어떻게 회복 하냐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은혜에서 떨어진 신자가 회복된다고 말하면서 성찬에 막강한 권능을 부여하였다. 그러니까 성찬에 참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것으로 가르쳤다. 그렇게 됨으로써 성찬은 어떻게 되는가? 한마디로 은혜의 주입이라는 기계적인 은혜의 주입이 이루어지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중세 로마교회가 성찬에 구원론적인 의미를 성경이 의도한 것 보다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것에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공헌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제도, 고해성사 같은 로마교회의 시스템의 일정한 공로자가 누구냐? 사실 어거스틴이다. 지금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찬이 사람들에게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통로가 성찬이라고 보는 것이다. 미사의 중심이 성찬이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예배에 언제나 성찬을 행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은혜의 수단이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라는 로마교회의 교리적인 시스템은 궁극적인 확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를 하고, 그리고는 은혜의 회복을 위해서는 성찬에 참여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회복하고 용서를 받는다. 이것이 로마교회의 시스템이다.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해야 하고, 고해성사하면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것이다. 상찬을 하게 되면 무엇이 일어나느냐? 은혜의 주입이 일어난다.

여러분, 은혜의 주입의 강조점은 개인의 어떠한 믿음의 여부보다 무엇이 중요하냐면, 교회의 권능을 강조하는 말이다. 교회가 성찬을 집행하면 집행하는 그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의 믿음이 아니고 교회의 권위라는 것이다. 교회가 시혜(은혜를 베품)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과연 확신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해야 되고 성찬을 통해 회복하기는 하지만 사람에게는 중생한 이후에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그래서 죄가 끊임없이 활동한다.

그래서 문제는 이러한 고해성사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한계가 하나 있고, 두 번째는 저런 시스템에서 용서는 어떤 것이냐면, 용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행에 상응하는 조건적 은혜이다. 용서란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선행이 있어야 한다. 그 선행이 무엇이냐면 기도, 참회, 고행, 헌신 등을 통해서 용서를 받을 만한 선행을 먼저 해야 한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도문에 잘 나온다. 로마 카톨릭의 기도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참회에 합당한 열매로서 나의 죄에 대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기도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로 인해서,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가? 그것이 뭐냐 하면 고통을 겪는다든지, 십자가를 진다든지 혹은 어떤 징벌을 받는다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뭐라고 하냐면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열매를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변상을 해야 하는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로 내 지은 죄값을 충분히 치룰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 그런데 이 은혜는 어떤 은혜인가? 그것은 고해성사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돕는 은혜이다.

그리고 뭐라고 하냐면 “나는 기꺼이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그것이 고통이든, 십자가든, 환난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사오니 그것을 통하여 내 남은 날을 지나게 하여 주옵소서. 철저하게 죄값을 치룰 각오를 해야 한다. 용서 받으려면. 그것이 사는 것이든 죽는 것이든 나의 죄책에 대한 형벌로서 기꺼이 받아들인 준비가 되었나이다. 간절히 구하옵나니.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통에 내가 연합하게 하사 그것에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난에, 십자가에 합한다는 것은 죄값을 치루기 위한 고통을 감내하는 기꺼이 감내하는 일체의 과정을 그와 같이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무엇이 주어지느냐, 마침내 용서가 선포되는 것이다. 이 때 용서는 전적 은혜가 아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전적 은혜가 아니다. 이 은혜는 한마디로 하면 그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선행에 상응하는 조건적 은혜이다. 좋은 예로 미션이란 영화가 있다. 완전히 카톨릭적인 관점이 반영된 영화이다. 형과 동생이 여자 하나를 두고 형이 동생을 죽인다.

그리고는 양심의 고통 때문에 폐인처럼 방안에 갇혀 있는 그 남자가 신부의 권면에 따라 어느 날 자신의 등에 노예생활을 하다가 썼던 갑옷이며 투구를 그물에 싸서 벼랑 위를 기어 올라간다. 그것이 바로 고해성사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그것을 지나고 마침내 용서가 선포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기준에 합할 때 마침내 용서는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서는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면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정말 나의 죄값을 지불하고자 했던 일체의 과정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도달했는지는 모른다. 그것을 모르겠는 것이다. 아까 말했듯이 중세 시대에 로마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고해성사 때문이다. 고해성사의 과정이 단순하게 내가 이런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신부가 건너편 방에서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노라, 그러면 죄를 다 용서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거기에 합당한 선행을 하도록 요구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도달하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절벽을 올라가면서 빙벽 타는 마음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동기는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겉으로 볼 때에 처절하게 용서를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마음 중심에는 그 죄를 뉘우치는,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정말 절절하게 있는지, 아니면 과거에 등산하던 마음으로 스릴 있다고 생각하고,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위해서 하는 무모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그 동기가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 동기가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그 과정을 거쳤다 할지라도 온전한 용서의 선포는 유보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해성사 시스템 안에서는 사죄의 확신(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의 의로는 절대로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히브리서에서도 가르친다.

여러분, 예술가들이 겪는 가장 고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도자기 굽는 가마에 가면 가마 옆에 도자기 무덤이 있다. 도자기를 망치로 그렇게 좋은 것을 깬다. 망치로 탁 옆구리를 깬다. 계속 깬다. 예술가가 겪는 가장 큰 고뇌는 자기 작품에 대한 불만이다. 그 작품에 대한 불만이, 예술의 경지에 오를수록 줄어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적 경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오점이나 결점을 보는 눈은 더 날카로워지고 기대치는 더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늘 좌절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만약 자신의 선행으로 이런 죄용서를 받고자 한다면 좌절감은 훨씬 더 커진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에서는 교회가 죄 용서를 선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로마교회도 사실 그것을 인정한다. 최종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의심과 의혹 속에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교회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개념이 없다. 묻지도 않고 묻는 그 자체가 사탄적이고 정죄받을 짓이다. 지옥에 떨어질 짓이다.

결과적으로 중세시대에는 확신에 대해 언급할지라도 어떤 오류없는 확신에 이른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트렌트 종교회의에서는 아까 말했듯 어떤 특별계시-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 주고 너는 천국에 들어올 자다라는 것-을 주시지 않는 한 구원의 확신을 논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고, 그와 같은 논의를 하는 것 자체가 중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믿음, 종교개혁자들은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떠한 것도 진리의 기준의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교회도 아니고, 교회의 수단인 교황도 진리의 준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만약 진리를 논하는 유일한 기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계시, 성경 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경에 대한 믿음 때문에, 소위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에 의한 중재 역할을 부정하게 되었다.

무슨 말이냐면 전부 다 고해성사, 성찬. 그중에서도 고해성사를 부정하게 되었다. Father가 중재자, 중보자인데 그래서 기도할 때도 고해성사하는 사람이 중재자에게 고백하면 중보자가 아버지께 그들의 죄를 사해주기를 구한다. 그래서 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교회란 무엇이냐면 조직으로서의 교회이다. 특별히 조직의 핵심은 성직자단이다. 성직주의가 교회의 핵심이다. 결국에는 이런 성직주의를 버리게 된다. 부정하게 된다. 칼빈이나 루터, 쯔빙글리, 부처 등등의 종교개혁 1세대들은 구원의 확신을 무엇이라고 봤냐면 구원의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의 규범적인, 본질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꼭 기억해야 한다. 시험에 나온다. 이것에 대한 어떤 학자들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The Saving faith(구원하는 믿음), 이것은 assurance와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하는 믿음을 누군가 가지고 있다면 동시에 그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구원받는 믿음은 곧 구원의 확신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을 가르쳤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다. 아까 칼빈주의자 안에서 많다고 하였다. 그 논쟁도 일단 여기에서 다 동의한다.

그러니까 루터든, 칼빈이든 종교개혁 1세대에서는 구원하는 믿음이 구원의 확신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무슨 말이냐면 구원받는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동시적이고, 그런 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의 규범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라고 본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을 갖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결정적이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런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중생한 신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굳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개가 새끼를 낳으면 강아지가 되고 코끼리가 새끼를 낳으면 코끼리 새끼가 되고, 사람이 아기를 낳으면 사람이 된다. 그것은 결정적이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적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는 순간에 구원의 확신은 자동적으로, 동시적으로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결정적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 입장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런 입장을 가지게 된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 믿음에 대한 이해, 루터나 칼빈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이해와 교리가 로마 카톨릭 교회하고는 달랐다.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그런 종교개혁자들의 칭의의 이해를 우리는 이신칭의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 잘 보시라. 이신칭의라는 것은 사실,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달라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로 이신칭의가 justificatio by Faith. 이때 믿음은 수단의 원리. 그러니까 칭의는 일차적으로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받아야 한다. 무죄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칭의이다. 그런 죄용서, 의로움의 상태에까지 나아가는 일체의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느냐?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이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그들의 이해가 로마 카톨릭과는 확연히 달랐다. 믿음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고, 고해성사하는 것 필요 없는 것이다. 성찬 필요 없고, 의롭게 되는 일의 수단으로서 성찬이나 고해성사를 말하지 않았다. 왜냐, 성경에 보아도 고해성사나 성찬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롭게 한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할례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고 그 어느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유일한, 그래서 by faith only, ‘오직’이라는 말을 붙이기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으로 이렇게 말할 때 액센트는 어디 있느냐, 사실은 그들의 의식 속에는 무엇이 있냐면 로마 카톨릭의 고해성사도 아니고, 공로주의도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이 말이 only 안에 있다. 그러니까 그것을 다 배제하는 말이다. 굉장히 부정적은 접근이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받는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믿음에 대한 정의와 교리는 로마 카톨릭 그것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동시에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전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종교개혁자들이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해성사에 근거한 죄용서를 가르친 로마 카톨릭 교회하고는 근본적으로 다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가 나중에 교회론으로까지 번진다. 그러니까 칭의를 다룰 때 로마 카톨릭은 제일 먼저 무엇을 다루고 싶었느냐? 교회가 무엇인지 다루고 싶었다. 교회가 무엇인지 다루고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다루고자 하였다. 순서가 다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지를 먼저 다루고 교회가 무엇인지 다루고자 하였다.

그러니까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 사람들이 교회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 지를 먼저 대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반대였다. 교회가 규범적인 것이고, 칭의론은 그에 따른 결과로 보았다. 어쨌든 이런 이신칭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믿음에 대한 새로운 성경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하고는 극한의 논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 이렇게 초기의 종교개혁자들, 특별히 칼빈은 구원의 확신을 어디에 기초했느냐면, 그리스도 위에, 그리스도 공로 위에 놓았다. 이 믿음은 누구를 향한 믿음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성경에서 믿음은 어떤 서술적 형용사가 붙지 않은 개인 신념으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성경적 용어가 믿음이다. 어쨌든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을 성경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다가 무엇을 두었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므로 구원의 확신을 그리스도 위에 두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면 누구든지 구원의 확신은 마땅히 가진다고 보았다. 가지려고 노력할 것도 없고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은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고 믿을 때 주어지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아! 나는 이제 구원 받았구나 하나님의 자녀이다. 천국의 영광이 내 것이다. 나는 이제 이리 가나 저리 가나 하나님 나라 간다. 아무리 고난당해도 마침내 하나님 영광의 나라에 이른다.” 그런 확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후 시대, 탈 종교개혁시대에 접어들면서-그러니까 종교개혁 1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종교개혁 후 시대에 접어들면서 구원의 확신은 믿음과 결부되어 있는 구원의 확신이 무엇과 같이 논의되기 시작하냐면, 중요하다, 논쟁점의 핵심이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이 구원의 확신이 성화와 관련되어 논의되기 시작한다. 무슨 말이냐면 순종, 헌신, 도덕적인 개선은 점진적 성화. 성화에는 확정적 성화가 있고 점진적 성화가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게 될 때 그들은 이미 거룩하게 된다. 확정적이다. 그러나 확정적 성화 이후에 점진적인, 윤리적인 변화, 개선으로서 점진적 성화가 있다. 그러니까 점진적 성화와 함께 구원의 확신을 같이 다루기 시작하였다. 후대에 들어서.

그것이 무슨 변화냐고 말할 사람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변화이다. 칼빈은 믿음과 확신이 동시적이라고 가르쳤다. 나중에 가면 성화하고 확신 이렇게 되면서 성화하고 확신을 다루어지면 무드는 확실히 달라진다. 아까는 결정적으로 주어진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실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몸부림쳐야 한다. 잠자고 놀고, 기도 안하면 구원의 확신은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또 이 상태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확고부동하게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왔다 갔다고 할 수 있다고 잔 오웬이 나중에 주장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구원의 확신도 그 사람의 성화의 정도에 따라 그 수준과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성화와 확신 쪽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산기도 가야겠구나, 잘먹고 편안했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나를 스스로 채찍질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교회 안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주식시세만 보고 집 값 올라갔는지 본다. 슬픈 일이다. 한국교회에 여기에 고민이 없다. 과거에는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성화가 있느냐고 고민했는데 한국교회가 잠든 지 오래 되어서 그런 것으로 고민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자신의 점진적 성화를 위해서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죄를 끊어 버리기 위해서 기도원에 올라오는지 살펴보면 놀랄 것이다. 하나같이 기도제목이 실용적이다. 굉장히 실천적인 동기가 기도의 동기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앙의 순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관심사보다 현세적인 관심사가 너무 지배적이라고 말해도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어쨌든 성화가 확신과 결부되면서 매우 실천적인 내용이 확신과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확신을 찾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확신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 있겠는지, 어떻게 하면 잃었던 확신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지, 우리는 매우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장르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다루게 되었다. 종교개혁 후 시대에는.

따라서 후대에 가면 구원의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의 불가피한 요소로 인식되기보다는 신자 각자의 성숙에 따른 개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해하는가? 이렇게 변화되었다.

자! 이런 변화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서도 그대로 감지된다. 1647년에 작성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두 가지를 확실히 나누고 있다. 거기에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믿음 다루고, 믿음 다룰 때 확신을 같이 안 다루고 확신을 따로 다룬다. 분리했다. 후대의 발전적 경향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초기 칼빈의 사상보다는 칼빈의 후예들의 사상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일체성을 강조했다. 믿음과 확신의 일체성을 강조했는데 후대에는 개별적인 것으로 따로 다룬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1647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소위 말하면 칼빈의 원래적 사상보다는 후대의 발전된 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실제로 신앙고백서를 보면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장을 각각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비연속적인 관계 안에서 다룬다. 둘이 마치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따로 다른 장에서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다룰 때 성화를 토대로 다루는 것이 칼빈 신학에서 허용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칼빈 신학에 없던 것을 후대가 새롭게 고안한 것인지? 문제가 되고 있다.

만약 칼빈이 살아있다면 이런 식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접근을 두고 동의하겠는지? 반대할 것인지? 그것을 두고 칼빈주의자들 안에서 양분되어 다투고 있다. 그래서 이런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긍정적으로 보는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면 벨카우어, 칼 바르트 이런 사람들은 그런 발전을 칼빈 신학에서 암시되고 있던 것을 자연스럽게 계승해 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후대의 변화에 대해서 칼빈의 신학을 제대로 계승했다고 보는 사상을 가장 최초로 표명했던 사람이 하나 있다. 가장 먼저 들고 나온 사람이 윌리엄 커닝햄이다. 로버트 댐리, 찰스 하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정통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하나같이 후대의 발전은 칼빈의 사상의 계승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것을 칼빈의 신학사상의 계승이라기보다는 칼빈의 신학사상으로부터의 이탈이다. 그것은 칼빈이 승인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신학적인 개조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로버트 켄달(R. Kendall), 윌리엄 리즐이다. 그래서 지금도 칼빈주의 안에서 지금도 논쟁중이다. 최근에는 누가 다수냐. 이게 다수다. 후대 칼빈주의자들의 개별적인 분리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쉽게 말하자면 믿는다고 꼭 구원의 확신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그런 입장이 칼빈이 가르쳤던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칼빈주의의 발전이라는 것은 결국 칼빈주의의 사상의 이탈이라고 보는 입장이 일반적인 학계의 주류이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 학문적 경향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발전이라 보지 않고 개조라고 보는 사람들이 주류이다.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칼빈의 사상과 달라진 것으로 본다. 그런 사람들이 학계를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논쟁 안에 뛰어 들면, 만약에 이런 논쟁 안에 뛰어들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원래 논쟁을 통하면 사상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의 성경적인 이해를 제시할 생각이다. 일단 이런 큰 그림을 이해하고 수업에 들어오도록 그렇게 하시길 바란다.

자! 그렇다면 이런 논쟁이 왜 벌어졌는가? 근데 이런 논쟁이 벌어지게 된 사실, 어떤 단초는 칼빈신학 안에 내재되어있다. 가만 보면, 칼빈신학이 그만한 여지를, 이런 식의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도록 어느 정도 여지를 준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칼빈신학을 보면, 왜냐하면 칼빈은 두 가지 사실을 다 가르쳤기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의 수동성을 가르쳤다.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 주어지는 믿음 안에 구원의 확신도 같이 필연적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끝나면 좋은데 칼빈은 동시에 무엇을 가르쳤느냐? 어떤 사실로부터 정당하게 유추된 지식으로서의 믿음의 능동성도 가르쳤다. 어떤 사실로부터 즉 어떤 A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사실 하나를 유추, 지극히 정당한 지식의 유추라고 한다면 유추된 지식도 믿음의 내용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해하는가?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

이방 여인이 자신 아들이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는가? 구할 때 내가 이방인을 위해 보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냄을 받았다라고 할 때 그 여자가 뭐라고 했는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얻어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그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었다. 그것이 사실이란 말이다. 근데 그 사실로부터 정당한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누구든지 나가서 주님께 구하면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예도 있다. 상에 들림 받아 가지고 내려온 중풍병자가 나음 받았다. 그런데 그때 낫게 하실 때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낫게 하신 것이 아니고, 침상을 지붕을 뜯어서까지 내렸던 네 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것을 잘 안다. 우린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비록 어떤 이유든 그가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 그의 친구나 그의 부모나 형제의 믿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성경적인 하나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완전히 교리로 굳히기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꼭 주의하셔야 된다. 교리화하는 것과 정당한 유추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침상에서 내려온 중풍병자의 나음을 근거로 해서 본인이 믿지 않아도 부모나 형제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을 교리화하는 것은 안 된다. 그러나 정당한 유추는 가능하다.

예를 들면 불가피한 상황 즉 어린아이, 자녀들, 아직 자녀들은 스스로 믿거나 결단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그럴 때 부모님 믿음에 의탁하고 유아세례를 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게 하는 이것은 성경적 근거가 있고 지지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믿을 수 있는데도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의탁해 구원 받는 것조차도 거기 다 포함시켜 교리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쨌든 이런 어떤 하나의 사실로부터 정당한 유추를 함으로써 그 유추를 지식의 내용물로 가지데 되는 것. 그것도 믿음이라고 칼빈이 말함으로써 믿음의 능동성을 이야기 하였다.

좀 더 쉽게 실천적 삼단논법을 보면,

1. 어떤 사람이 X를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2. 하나님의 은혜로 X를 행하였다.

3. 그러므로 나는 구원에 이른다.

이것이 실천적인 삼단논법이다. 이런 식의 접근을 칼빈이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신학 안에 이런 요소가 있다. 단순하게 예를 들면 위의 첫 번째 요소만 믿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그것으로부터 유추된 어떤 사실들을 믿음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식의, 소위 말하면 믿음의 능동성, 단순하게 믿음을 지식으로 생각하고, 칼빈이 제일 먼저 강조했던 믿음의 요소가 무엇인가하면 지식이었다.

그 지식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내가 받음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받는다고 수동성도 강조했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함으로써 그 순종을 통해 내가 성화되어가고 성화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 적도 있다. 그런데 그 행함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함으로써 일종의 신인협동설을 닮은 듯이 보이지만 아직 믿음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었다.

칼빈의 신학 안에, 그러니까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믿음의 능동성을 더욱 더 체계화하고 그것을 광범위하게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찰스 하지 같은 긍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켄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식의 발전은 칼빈이 모르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 한마디로 말한다면 칼빈은 믿음의 능동성은 가르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믿음과 확신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할 때 구약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들을 보면 지금 우리가 규명하려고 하는 믿음과 확신 사이의 관계를 구약에 있는 내용만 가지고는 제대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명확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예를 들면 그의 믿음이 여호와와 그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할 때 그의 믿음 안에 확신이 있었냐고 물으면 확신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성경이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 확신이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닌데 그의 믿음을 보면 확신이 있었다고 추정할만한 충분한 근거는 있다.

또 구약성경의 시편을 보면 시편의 저자들이 비록 불안이나 회의를 품고 있기는 해도 아브라함과 유사한 어떤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피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침내 내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은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 22편, 40편, 130편을 보라. 거기에 보면 처음에 굉장히 불안해한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언제까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이렇게 회의로 시작한다. 시편의 1/3이 회의이다. 낙심, 좌절, 이런 슬픔이다. 그러나 언제나 공통점은 끝날 때는 언제나 확신으로 끝낸다.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찬양하리이다. 이런 확신들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만해도 다르다. 신약성경에는 좀 더 명시적으로 딱 말한다. ‘믿음이 곧 확신이다’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히 11:1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 이것이 본문이 의도한 신학적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왜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사실 실상이라는 말이 문자적인 번역이긴 한데 그것이 정확하게 정곡을 못 찌르는 것이다. ὑπόστασις(휘포스타시스), ‘실상’이란 원래에 영어성경에 보면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실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했냐면 영어는 ‘assurance’라고 이렇게 번역했다.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했는데 왜 ‘실상이다’라는 말이 왜 나왔느냐 하면 이 ‘assurance’의 헬라어가 ‘ὑπόστασις’, ‘ὑπό’는 ‘under’, ‘아래’라는 말이고 ‘στασις’는 ‘to stand’ ‘서다’라는 말이다. ‘무엇 무엇 아래 서다’라는 말이다.

이 ‘ὑπόστασις’의 일반적인 고대 헬라어에서의 용법이 무엇인가 하면 ‘권리증서’, ‘보증서’ 혹은 ‘매매계약서’이다. 어쨌든 일단 겉으로 봐도 분명히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믿음은 확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하는데 이 ‘증거’가 영어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the conviction’ ‘확신’, ‘of things not seen’,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한다. 어째든 확정성을 말한다. 그러니까 두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확신이고 그건 확정이다. 그럼, 믿음이 무엇이냐? 확신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칼빈은 믿음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본 것은 이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믿음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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