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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뇌로 인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God 이란 하나님과 개인적, 인격적, 친밀한 관계로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그 분과 개인적 사귐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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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8va [하나님을 아는 것] 여주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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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 양의문교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
Source: www.asheep.org
Date Published: 4/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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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것 – 다음블로그
하나님을 아는 것 누군가를 알아 가는 데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보의 단계로, 듣고 아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들어서 알기는 …
Source: m.blog.daum.net
Date Published: 9/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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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을 아는 것 – 네이버 블로그
3. 하나님을 아는 것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너희 마음의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9/2021
View: 8806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 (요 17:3)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 …
Source: bible.rexpia.com
Date Published: 12/3/2022
View: 6027
하나님을 아는 것 : 칼럼 : 미주 종교신문1위 – 기독일보
한계를 가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거나 어떤 틀에 맞추어 정의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인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량 밖의 것을 고집 …
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8/20/2021
View: 254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1. 하나님을 아는 것에 포함되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아는 …
Source: backbujang.tistory.com
Date Published: 1/19/2021
View: 1267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 데일리하가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아는 것’만큼 변화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Source: www.dailyhagah.com
Date Published: 8/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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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I) (Knowing God) | 아포슬 한인 침례 교회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더욱 더 충만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
Source: www.akbchurch.org
Date Published: 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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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하나님 을 아는 것
- Author: nwtv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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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2. 8.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KA8GVssZEgw
하나님을 아는 것 vs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vs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 요17장1-5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God’과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 knowing about God’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 knowing about God은 하나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혹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적인 지식, 성경적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전기, 자서전>을 통해서, 그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통해 그의 출생, 학력, 가정생활, 취미 등 저자에 관해 정보를 아는 것입니다.
제주에 처음 왔을 때 어떤 제주 사람이 자신과 친하면 영업을 쉽게 할 수 있다고 밥과 술과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으로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지나가는 건물 마다 간판을 가리키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계속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이 말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많이 안다는 것이 내가 대통령을 아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대통령에 대해서 알지만 문제는 대통령이 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어떤 사람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1백번 읽어서, 그 속에 나와 있는 내용을 달달 외우다시피 안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knowing about God) 것입니다. 즉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knowing about God)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으로 착각할 때, 바리새인들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자기들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책 <부흥>에 보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성경의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을 <죽은 정통주의>라고 그는 지적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뛰어난데, 인격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없는, 어떠한 친밀함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뛰어난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죽은 정통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회계사 개업을 했을 때 영업을 배우기 위해 영업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보험설계사(FC)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는 이상하고 재미있는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1방3콜’. S생명에 찾아갔더니 입구에 ‘1방3콜’이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져 있었고 책상과 사무실 벽에도 ‘1방3콜’의 문구가 모두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물으니 보험설계사가 나에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하루에 1곳을 방문하고 3곳에 전화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회사에서 FC에게 가르치는 영업의 기본이죠.”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고객은 회계서비스나 보험상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객들이 구입하는 것은 회계사나 FC와의 관계와 신뢰를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믿음을 제대로 구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관계가 없으면 아무리 입술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말뿐인 허공 속의 메아리가 되고 맙니다.
본문에서 ‘안다’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기노스코’이고 히브리어로는 ‘야다’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뇌로 인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God 이란 하나님과 개인적, 인격적, 친밀한 관계로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그 분과 개인적 사귐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적 지식 뿐 아니라 그보다는 하나님과 개인적 교제를 통해, 친밀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한없이 은혜로우시고 사랑스러우시고 하나님은 참으로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그 백성의 아바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심.. 등을 하나씩 하나씩 성령의 조명에 의해, 체험적으로 깨달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아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13 장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말씀요약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인데, 그 증거를 잘 받아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야 영생을 얻습니다. 그 진리 지식을 가지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계십니까?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나?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도 알 수 없습니다. 아주 하찮은 지식이라도 그것을 먼저 아는 자가 우리에게 알려주어야만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언제부터 계시는지, 어디에 계시는지, 무엇을 하시는지, 스스로 터득해서 알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없습니다. 영적 소경과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사람 중에는 아무도 온전하게 알아낼 자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계시(啓示)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때부터 여러 족장들과 모세를 위시하여 여러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찾아오셔서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히 1:1), 그들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 감동시키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인간은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만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아야 참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이것이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여기에서 참된 믿음이 생겨나며, 이 믿음으로만 사람은 구원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 지식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모르고 성경을 들고만 다닌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되 읽는 것을 이해하고 깨달아 바른 이해와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그 지식은 참된 믿음의 기초입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얼마나 귀히 여기며, 이 지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아야 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어떠하심, 곧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과 성품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관하여,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관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그 뜻에 관하여 잘 알고, 바로 알고 계십니까? 그의 영원하심과 광대하심, 그의 자존하시며 무소부재하심, 그의 능력과 권세, 그의 사랑과 자비, 그의 거룩과 공의, 그의 지혜와 진실하심에 대해 여러분은 얼마나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여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잘 알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행하시는 일과 행하실 일들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모르고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의 일과 섭리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의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지혜와 전능의 섭리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잎새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이 모든 것들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문).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권으로 다스리시고 섭리로 주장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인데, 구원은 순전히 우리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의 주권적 뜻과 작정과 은혜로 값없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죄를 전혀 씻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그리고 완전히 치러 주시고, 성령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우리를 또한 의롭게 하시고, 성령과 진리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새 성품과 새 소원을 넣어주시고, 이제부터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거룩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친히 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우리가 구원의 길로 들어가 영생에 이르게 되며,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할대로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모르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도리,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다 가졌다고 하더라도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자가 없다고 하셨고(요 14:6),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행 4:12).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서 하나님을 안다, 믿는다, 영생을 가졌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온 세상을 그의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11). 장차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9:28).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히 9:27). 장차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오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관하여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감사하고 있으며,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든 신앙의 기초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그의 창조, 성자 하나님과 그의 구속, 성령 하나님과 그의 성화에 대해서 그 내용 하나하나를 알아야 하고, 그래야 믿는 것이고, 믿어야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과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모르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고 생명이 없고,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다 안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를 모르는 사람이요, 인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이요, 구원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요,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요, 장차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도, 그 영원한 운명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를 신뢰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그가 주시는 영생이 있습니까? 아무리 이 세상 지혜와 지식으로 아무리 충만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러한 세상 지혜와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어떤 놀라운 과학지식, 의학지식, 인문, 언어와 철학지식으로도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그것으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운동감각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세상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그런 것으로는 자기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고 천국과 영생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귀히 여기고 읽고 배우며,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누군가를 알아 가는 데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보의 단계로, 듣고 아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들어서 알기는 하지만, 그저 머리로만,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관심의 단계입니다. 상대방이 한 말이나 행위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작은 파동을 일으킨 상태입니다.
셋째는 깊은 배려의 단계입니다. 이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순종의 단계입니다. 순종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을 넘어 그에게 온전히 속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방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단계로, 어떤 존재를 안다는 것의 완성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알다’라는 단어의 히브리어에는 관계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대상을 ‘알다’라고 할 때는 그 대상을 머리로만 아는 것을 넘어 전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알아 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대화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그분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분과 하나 되는, 그분께 온전히 속한 순종의 단계로 나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불러내실 때에도 먼저 “나 여호와를 알라. 내 목소리를 들으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생명이요 기쁨입니다.
/조정민
* 기도: 말씀의 다림줄 앞에 서니 제가 하나님의 과녁을 벗어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거룩한 두려움과 진정한 회개로 하나님께 나아가오니 저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소서. 제가 속한 공동체 지체들에게 변화된 삶과 말씀 청종의 본을 보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출처] 생명의삶▣ 하나님 알기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잘사는 집이 아니었으나 당시 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 지방에서 힘들게 살고 있을 친척들을 위해 우리가 가진 것들을 우편으로 보내 주곤 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말린 과일과 잼, 견과류 등을 큰 상자에 가득 담고 잘 포장하여 독일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친척들에게 부쳤다.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소포를 보냈는데, 그것들이 친척들의 손에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고, 나는 매번 아버지를 도왔다. 50년이 흐른 후, 나는 프랑스와 독일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수십 년 전 우리가 소포를 보내 주던 친척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는 사촌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2차 세계 대전 때 얘기가 나왔다. 궁금해진 나는 당시 아버지와 내가 보냈던 소포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갑자가 말을 잃었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나를 다시 바라보았을 때는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어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이 보내 준 소포 때문에 살아 남았어요. 그게 없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나를 힘껏 포옹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전하자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마음과 수고가 비로소 가치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날 일로 아버지에 대한 나의 신뢰와 존경은 몇 배로 깊어졌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분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그분을 신뢰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따라 가야 할 길로 걸어가는 것과 같다.
– 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 / 폴 J. 마이어
▣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주어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이어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정확한 성경 지식과 그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지식은 은혜 안에서 성장을 거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성장이 없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난쟁이와 같은 삶을 면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똑같은 책이 두 권 꽂혀 있었습니다. 한 권은 저의 책이고 한 권은 아내의 책입니다. 신학공부를 할 때 이 책에 매료되어 두세 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알고 보니 아내도 그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더군요. 처녀, 총각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들이 주인을 따라와 서로 사이좋게 10년 넘도록 나란히 꽂혀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책의 자세한 내용은 자세히 생각이 안 납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새삼스럽게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 거리면서 찾아봐야 헛일입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에, 속임수에, 욕심이 덕지덕지 쌓인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을 하고, 소리 높여 기도해봤자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무엇보다도 삶의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정직하고 정의로운 태도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어떤 분이 신지 알 수 있습니다.
/최용우
▣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갈급하라
한 젊은이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는 지혜와 학식을 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물이 허리에 찰 때까지 바닷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갑자기 그의 머리를 잡더니 물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한참 후 소크라테스는 그를 데려다 해변에 눕히고는 돌아왔습니다. 정신을 차린 젊은이가 소크라테스에게 다시 찾아와 이유를 묻자 대답 대신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물 속에 있을 때 당신이 가장 갈급 했던 게 무엇이었는가?”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자네가 물 속에서 공기를 원했던 것만큼이나 지혜와 학식을 원한다면 그걸 가르쳐 달라고 그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없을 걸세.”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무능력과 무지를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아굴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잠언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이 너무나 크시고 원대하시고 심오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도 미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겸손한자)을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알기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잘사는 집이 아니었으나 당시 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 지방에서 힘들게 살고 있을 친척들을 위해 우리가 가진 것들을 우편으로 보내 주곤 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말린 과일과 잼, 견과류 등을 큰 상자에 가득 담고 잘 포장하여 독일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친척들에게 부쳤다.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소포를 보냈는데, 그것들이 친척들의 손에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고, 나는 매번 아버지를 도왔다. 50년이 흐른 후, 나는 프랑스와 독일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수십 년 전 우리가 소포를 보내 주던 친척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는 사촌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2차 세계 대전 때 얘기가 나왔다. 궁금해진 나는 당시 아버지와 내가 보냈던 소포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갑자가 말을 잃었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나를 다시 바라보았을 때는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어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이 보내 준 소포 때문에 살아 남았어요. 그게 없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나를 힘껏 포옹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전하자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마음과 수고가 비로소 가치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날 일로 아버지에 대한 나의 신뢰와 존경은 몇 배로 깊어졌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분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그분을 신뢰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따라 가야 할 길로 걸어가는 것과 같다.
– 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 / 폴 J. 마이어
▣ 하나님의 뜻 알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고민할 때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기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삶의 근본적인 자세이다. 조지 뮬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6가지 단계를 소개한다. 첫째,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관한 나의 의사가 있지 않도록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 둘째, 결과에 대해서는 나의 감정이나 이상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노력한다. 셋째,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고자 하는 방향을 깨달으려고 노력한다. 넷째, 주변 상황을 고려한다. 종종 상황과 말씀과 성령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밝혀준다. 다섯째,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내게 보여주시기를 간구한다. 여섯째, 앞에 열거한 대로 하나님께로 향한 기도를 통하고, 성경 말씀과 묵상을 통한 뒤에 심사 숙고하여 다다르게 된 결론에 따라 행한다. 이때 내 마음에 평안이 따르면, 두세 번 더 기도한 다음 진행한다. 죠지 트루엣은 이런 말을 했다.“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은 비록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영원한 행복과 풍요로움이 보장되어 있다. 매일 매순간의 삶 가운데 우리의 무릎을 꿇고 주님의 뜻을 구하자.
24시간 그리스도인 / 홍영기
▣ 지식, 앎에 관한 성경 말씀
0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
0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잠8:10)
0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잠10:14)
0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12:1)
0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 두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잠12:23)
0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잠15:7)
0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잠15:14)
0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잠18:15)
0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잠19:2)
0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찌어다(잠22:17)
0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24:4)
0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잠24:5)
0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18)
0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이사야33:6)
0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4:6)
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0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로마서10:2)
0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8:1)
0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 8)
0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0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0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벧후1:6)
0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1:8)
0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요1서 2:21)
3. 하나님을 아는 것
3. 하나님을 아는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엡 1:17-18
아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아는 것이다.
1)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 아는 것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
– 성경을 읽고 교육과 공부를 통해 지식적으로 아는 것.
(지적인 동의: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
–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함
– 삶이 변하지 않는다.
– 이런 지식은 귀신도 가지고 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 2:19
2) 주님을 인격적으로 경험을 통해 아는 것
–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가능
– 근본적인 삶의 변화 수반
내가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을 책을 통해 지식적으로
알 수 있다. 그의 나이며, 취미, 성격 등을 외워서
논문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그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지식만 가지고 내가 엘리제궁에 들어가기 위해
입구에서 그를 안다고 우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자녀가 아니겠는가 ?
이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실제적 경험을 통한
관계적, 개인적인 앎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대한 이해가
갸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 지식이 이론적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조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실제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며 자라는 것이
참 신앙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 어려운 문제에 빠지면 믿음이 없는게 금방 들어난다.
바로 신앙이 실제가 아니고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관계가 아니라 의식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능력과 교제, 변화가 없다면
자신을 돌아보자.
주님의 음성듣는 것
그분의 형상을 보고 닮아가는 것
기쁨과 평강과 사랑이 없는 것 등의
현상이 나타나면
성령이 조명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더 이상 속지말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도록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하자.
더 늦기 전에…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
RexLuna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
(요 17:3)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진시황은 춘추전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 전역을 통일한 제황입니다. 그는 자기가 얻은 권력과 부귀 영화를 영원히 누리기 위하여 영생을 얻는 비결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도사들에게 선단을 만들게 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내어 신선들이 먹는다는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죽어서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본 만화 영화 [은하철도 999]에서는 철이라는 소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주 횡단 열차를 타고 수많은 모험을 하고 고난을 겪으면서 우주 여행을 합니다. 마지막에 그가 확인한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의 실제 몸은 유리관 속에 보관하고, 인조 신체, 인공 장기 안에 인간의 기억과 의식을 집어넣어 안드로이드(인간형 로봇)가 되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황당한 결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작가의 머리로 영원한 생명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면 천년 만년 죽지 않고 오래도록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들어가서 결코 늙지도 죽지도 않고 계속 살아서 고통을 겪으며 영원토록 형벌을 받습니다. 그들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으니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영생이라고 하지 않고, 영원한 형벌 혹은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막 9:44)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몸이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교제하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어 생수의 샘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렸고 또 자기들을 위해 물 저장고들 즉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들을 팠느니라.
(엡 2:1)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러나 죄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요일 5:11-12) 또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날마다 그분과 함께 교제하며 생명의 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공급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명을 누리는 삶은 구원받은 그 순간부터 영원토록 지속됩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고전 1:9)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요일 5:20)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
pastor, Moons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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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것
한계를 가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거나 어떤 틀에 맞추어 정의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인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량 밖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겸허하게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르게 무신론자들이 가지는 불가지론적인 이성이 있다. 무신론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우월한 가치로 인정하는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철학적 사변의 대상으로만 간주할 때는 완전주의에 기반한 무기력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이는 이성만을 맹신하는 미혹과 교만의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속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나는 어떤 별에 살고 있는 얼굴이 시뻘건 양반 하나를 알고 있어. 그는 꽃 향기를 맡아본 일도 없고, 더하기밖에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어. 온종일 아저씨처럼, 나는 착실한 사람이다, 나는 착실한 사람이다, 하고 되뇌이고 있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잔뜩 교만을 부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야. 그건 버섯이야!”
역사상 수 없이 많은 예술적 사상적 엘리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불행한 인생을 마감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체질과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당신을 계시하셨고 또 알 수 있게 하셨다.
구약에서는 창조와 외적으로 행하시는 관계 안에서, 신약에서는 가장 완전한 계시의 양식인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보이시고 또 인간을 찾아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그의 삶(Act)과 말씀(Word)으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되셨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가 되시는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7-9)”하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한 자신을 알리실때 요구하시는 것은 앎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으니 바로 이성을 초월한 믿음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만 아는 ‘무엇에 관한 지식’을 뜻하지 않는다. 구원사적으로 영생이 보장된 앎이며, 가슴이 동반된 전 인격적으로 체험된 앎을 말한다.
하나님 편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믿는 것을 뜻한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0-11)”
의심하는 도마에게 부활 후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고 말씀하셨다.
현재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최대한 만족스런 방법은 성령의 영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미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고 밝히 알려 주셨다.
특별한 경우엔 성경을 읽다가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는 실재가 되어 시공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의 역사를 체험할 때도 있다. 성경의 말씀은 죽은 문자나 의사 전달 매체의 하나가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살아있는 생명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이와 같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며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고 계속 진보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시고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옘33:2)의 역사와도 동행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엡4:13)”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성경 속 인물들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주님을 이모저모로 점점 알아가게 된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아1:7)”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빨리…오는구나(2:8)”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2:10)”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4)”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경험의 대상이 아닌 사유의 대상으로만 삼는다면 우리에겐 메마름과 공허와 회의만이 남게 될 것이다.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은 친구의 목소리가 어떠하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나비를 수집하느냐?’ 라고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나이는 몇이냐? 형제는 몇이냐? 몸무게는 얼마냐? 그 친구 아버지는 얼마를 버느냐?’ 하는 것이 고작 묻는 말이다. 그래야 그 친구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곱고 고운 붉은 별돌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생각해 내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하나님께선 우리가 이성이나 지혜로 하나님 알기를 포기하고, 우리의 한계와 무지를 인정하고, 오로지 맹목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님만을 의지할 대상으로 기댈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알게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
욥은 극심한 고난 속 회개 중에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이 부숴지고 깨어질때 더욱 우리의 영안을 밝히 열어 주신다.
참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바 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너무도 감격스런 축복이며 감사이다!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 한다는 점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되고, 한편 은혜와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어린 왕자는 말한다:
“‘누가 양을 가지고 싶어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라고 어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어깨를 들먹이며 우리를 아이로 취급할 것이다…어른들은 그렇게 되어 먹었다. 그것을 가지고 어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못 쓴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대해서 아주 너그러워야 한다.”
그렇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순수한 어린이들로서 세상의 다른 많은 것들을 의지하는 어른들에 대해 좀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품고 가까이 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자: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싶어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고…
박현숙 목사(프린스턴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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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 목적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이해하는 것
이 땅에서 해야 할 주된 일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삶의 문제들 대부분은 저절로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1. 하나님을 아는 것에 포함되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아는 일의 특성과 범위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그들을 아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알려고 시도한 결과라기보다는 그들이 우리에게 그들을 알도록 허용해 준 결과다.
인간 관계 안에서도 상급자 혹은 위대한 사람이 내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면 그만한 기쁨이 없는데, 마찬가지로 온 우주의 통치자이자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내게 성경의 말씀과 진리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그런 관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분의 마음을 열어 보이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시고, 당신을 동료로, 언약의 동반자(칼 바르트)로 삼아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3:9)]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떤 활동을 포함하는가? 1)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해석해 주시는 대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2)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에 주목하는 것 3)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4) 하나님이 이처럼 가까이 오사 당신을 이러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
2. 예수님을 아는 것
1) 성경이 주로 사용하는 유추 :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왕과 신하, 목자와 양
– 아는 자가 대상을 ‘바라보고’ 그 대상은 아는 자의 복지에 책임을 지는 관계
2) 성경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덧붙임
cf) 제자들과 현대 그리스도인들 간의 차이점 : 1)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시므로 육안으로 볼 수 없다. 2)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의 증거에 의해서, 원래의 제자들이 일정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이해했던 예수님의 신성과 속죄의 희생에 대한 진리를 처음부터 안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들에 기록된 자신의 말씀을 다른 성경적 증거들과 함께 우리의 양심에 적용하심으로써 말슴하신다. / 개인적 제자도의 관계라는 사실은 동일함!!
3. 인격적 문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1)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 다.
–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
2)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관련되는 일 이다.
–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관련됨
3)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 다.
–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셔서 우리와 사귀시는 것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갈4:9)]– ‘안다’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며 구속하시고 부르시고 보존하시는 일에 주도권을 쥐시는 것을 가리키는, 주권적인 은혜의 단어가 된다.
4. 아신 바 되는 것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저에 있는 더 큰 사실 곧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 이다.
죄인된 우리의 상태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격차를 본다면..
아는 것이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1.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Knowing About God)’과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God)’은 다르다. 공부와 설교를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에 관해(About God)’ 알 수 있다. 심지어 사탄도 ‘하나님에 관해’ 잘 안다. 하지만 ‘하나님에 관해’ 많이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생명이며 인격이다. 생명과 인격은 지식으로 아닌 관계로 알아야 한다. 아이들이 공부와 지식을 통해 부모를 아는가? 그렇지 않다.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이 먼저다. 동화책에 나오는 강아지 그림을 보고 ‘강아지에 관해 아는 것’과 실제 강아지를 품고 그 생명과 관계를 맺으며 ‘강아지를 아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도 그 이상 큰 차이가 있다.
많은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통찰과 깨우침이 클 수록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생명과 생명의 교감이 없는 ‘앎’은 ‘~에 관해 안다’고 생각하는 ‘착시현상’일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아는 것’만큼 변화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 변화란 내 자신은 줄어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만큼 나타나는 가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관해 아무리 탁월하게, 깊이,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크리스천으로 인해 세상이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크리스천만 많아서일 것이다.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하면 더 알고 싶어진다. 친밀해질 수록 서로 영향을 미친다. 가까워질 수록 서로 닮아 간다. 그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하나님과의 사랑은 교과서로 배우는 지식이 아닌 실제다. 거듭난 자 안에 하나님의 ‘진짜 생명’이 내주하신다. 이 생명은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만큼 실제다. 만일 내게 변화가 없다면 생명과 생명의 접촉이 없다는 방증이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신다.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망하고 있다… (호세아 4:6 上)
My people are being destroyed because they don’t know me… (NLT)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파멸의 길로 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로 번역했다. 이때 ‘지식’의 히브리어 원어는 ‘다아트’다. 이 단어는 ‘알다’를 뜻하는 어근 ‘야다’에서 온 명사형이다. ‘야다’는 단순히 ‘아는 것(to know)’만이 아닌 훨씬 더 깊은 의미를 포함한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창세기 18:19)
For I know him… (KJV)
개역개정은 ‘택하였나니’로 번역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알다’를 뜻하는 ‘야다’다. 그래서 KJV 버전은 ‘I know him’으로 번역했다. 특급 기밀을 요하는 중요한 일을 맡길 때 몇 번 봐서 아는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겪고 경험하여 ‘아는(야다)’ 사람을 ‘택할 것’이다. 창세기 18:19 KJV 버전은 내가 아브라함을 ‘안다(야다)’로(I know him) 시작한다.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길 만큼 ‘알기(야다)’때문에 ‘택하였다(야다)’고 번역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 ‘아브라함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닌 직접 사귀고 교제하고 경험하고 겪어서 ‘아브라함을 아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 창세기 18:19 앞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세기 18:1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야다(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아는 것처럼)’로 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야다’의 관계다. 하나님이 말씀에서 ‘나를 알라’고 말씀하실 때는 이 정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야다’는 부부간의 단어이기도 하다
결혼한 부부가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 ‘아는 것’이 ‘야다’다. 하나님이 ‘나를 알라’고 하실 때 ‘야다’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1)
And Adam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from the LORD. (KJV)
개역개정은 ‘동침하매’로 번역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야다’다. KJV 버전은 이 부분을 ‘아담이 이브를 알았다(Adam knew Eve)’로 번역했다. ‘야다’는 단순히 ‘~에 관해서 아는’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야다’는 부부만이 알 수 있는 이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포함한다. 이런 근원적 의미를 알 때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내 백성이 지식(야다)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다.
4. ‘손’과 ‘아는 것’은 깊은 관련이 있다
히브리어로 손을 뜻하는 ‘야드’는 ‘야다’와 어원이 같다. ‘손(야드)’으로 어떤 물건을 자주 만지고, 잘 다루면 그 물건과 친밀하여 잘 ‘안다(야다)’는 의미다. 그래서 ‘야다’에는 ‘잘 알아 ~을 잘 다루는(be skillful in)’이란 뜻도 들어 있다. ‘야드’는 기념물로도 번역을 한다. 사랑하던 사람의 ‘손(야드)’ 때 묻은 물건은 남은 자에게 귀중한 기념물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야드)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사 56:5)
하나님은 ‘손(야드)’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에베소서의 이 부분을 NLT 버전은 ‘우리는 하나님의 명작이다(we are God’s masterpiece)’로 번역했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손’ 때 묻은 ‘명작(masterpiece)’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10)
For we are God’s masterpiece… (NLT)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야다’로 아신다. 우리는 주의 손바닥에 새길 만한 ‘기념물(야드)’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야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야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야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야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1~4)
5. 예수님도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기노스코)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마태복음 7장 23절의 ‘알다’는 헬라어로 ‘기노스코’다. 히브리어 ‘야다’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예수님은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자에게 도무지 알지(기노스코, 야다)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수많은 예배, 기도, 찬양, 성경공부, 제자훈련, 헌신, 순종, 충성, 전도, 선교, 귀신 쫓음, 방언, 예언, 각종 은사 행함, 심지어 순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야다) 없이 종교적으로 행해질 수 있음에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 당시에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에도, 초대 교회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의 형태를 띠고 벌어지고 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야다)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I want you to show love, not offer sacrifices. I want you to know me more than I want burnt offerings. (NLT)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부부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기노스코)’,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기노스코)’이라고 단언한다. 영생은 죽음 이후 누리는 삶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영원한 생명과 관계를 맺는 것(야다)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And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ESV)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야다(또는 기노스코)’로 아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 생명에 연결되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에 ‘야다’로 연결된 자가 영생한다. 현재 영생하는 자가 죽어서도 영생한다. 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될 때 그 생명으로 인한 변화가 있다. 이 변화가 바로 ‘성화(聖化)’다.
피조물은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비례하여 자신을 안다. 바울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본다고 했다. 주의 영광을 보려면 수건이 벗겨져야 한다.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는 것. 그것이 곧 계시다. 계시를 통해 주의 영광을 볼 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아 가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 모든 신앙 여정의 핵심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하나님을 아는 지식” (I) (Knowing God)
“하나님을 아는 지식” (I) (Knowing God)
“하나님을 아는 지식” (I)
(Knowing God)
8-1-21
본문말씀: 호세아 (Hosea) 4:6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My people are destroyed from lack of knowledge. Because you have rejected knowledge, I also reject you as my priests; because you have ignored the law of your God, I also will ignore your children.)
[설교 요약]만약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면, 여러분의 삶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더욱 더 충만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선언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v.6a)라고. 그렇다면 무슨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망한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요,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왜 우리 크리스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되는 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광활한 우주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머리로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으시고 스스로를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성경을 통해서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 ‘모든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성경은 특별히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음으로 그분과 더 깊은 신뢰와 교제를 누리게 됩니다. 그 지식에서 자라기 위한 몇가지 질문을 통해 그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는 의미는 ?: 하나님은 창세기를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 1:26) 라고.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영광스럽게 만드셨다는 것은 대표적으로 ‘자유의지’ (free-will)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를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라고.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영광스럽게 만드셨다는 것은 대표적으로 ‘자유의지’ (free-will)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 열매를 주셨는가 ?: 하나님께서 첫 인간을 그분의 형상을 따라 창조했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금지한 선악과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악과 열매가 없었다면 인간은 범죄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과 열매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최소한의 도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인간을 그분의 형상을 따라 창조했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금지한 선악과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악과 열매가 없었다면 인간은 범죄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과 열매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최소한의 도구인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실패를 의미하는가 ?: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의 실패가 아닌 것은 하나님은 이미 그 사실을 아실 뿐 아니라,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를 구원코자 계획하셨고(엡. 1:4~5), 2천여년 전에 그 구원을 성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의 실패가 아닌 것은 하나님은 이미 그 사실을 아실 뿐 아니라,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를 구원코자 계획하셨고(엡. 1:4~5), 2천여년 전에 그 구원을 성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어야 하는가?: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이유는 우리 인간의 창조가치가 천사를 비롯한 그 어떤 피조물로도 대신 아담의 그 죄를 대신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예수님짜리로 재창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갈. 2:20).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영광스러우심으로 우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멘.
[설교 전문]19세기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그의 책 ‘환영의 미래’ (The Future of Illusion)에서 그의 무신론적인 관점을 피력했습니다. 즉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 종교’라고 말하면서, 인간이 신을 만든 3가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자연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예측 불가능하고, 비인격적이고 냉혹한 자연의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인간 상호간에서 오는 불평등과 차별에 의한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이것을 의롭게 심판해줄 신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인간의 죽음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신의 나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무신론자였던 프로이드의 종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인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면, 여러분의 삶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사함 받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닐 것입니다. ‘죄사함 받아 영생 얻는다’는 뜻은 거듭남을 통해 구원받은 자의 ‘영적 출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더욱 더 충만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그 뜻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의미요, 이렇게 자라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으로 더욱 더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뜻일까요?”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번 주와 다음 주, 2번에 걸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이 지식에서 자라갈 것인지를 함께 말씀을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말씀 가운데 우리를 창조하실 뿐 아니라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셔서 복된 자녀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서 풍성하게 자라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선언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v.6)라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무슨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요,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 곧 이방민족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망하게 된다고 하나님은 그의 종을 통하여 준엄하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되는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먼저 한가지 점을 먼저 성도 여러분과 구별함으로 말씀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말과 ‘하나님에 관해서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안다’ (knowing about God)는 뜻은 ‘하나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혹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여러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안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비해 ‘하나님을 안다’ (knowing God)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헬라어>는 ‘기노스코’이고, <히브리어>는 ‘야다’입니다. 이 ‘안다’는 단어의 뜻은 단순한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로 맺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교리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한 친밀한 관계로 깊어짐으로써 그분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먼저 하나님의 대표적인 특성을 생각해 보자면, ‘영원성’과 ‘불변성’, ‘그분의 유일하심’ 그리고 그분의 ‘공의’ 와 ‘사랑’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에게 적용되는 법칙이 공의 입니다. 즉 죄를 허용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용서, 은혜)을 통해 자신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주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주제만큼 방대하고 힘든 주제도 더 없을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은 누구신지?’에 대한 메세지에 있어서 ‘힘든 주제’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알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분은 자신을 분명히 밝히고 드러내시지만, 우리 <인간의 유한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무한함>을 다 담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하나님의 창조의 무한하신 능력에 대해 설교하면서 광활한 우주에 펼쳐진 은하수를 비롯한 수 없는 운하계의 끝없음을 나눈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속해 있는 나선형 모양의 은하계는 그 직경이 10만 광년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광속’ (the speed of light) 이라 함은 ‘빛의 속도’의 기본 단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빛의 속도는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도는 엄청난 속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빛의 속도로 달려도 ‘10’만년을 가야 겨우 나선형 모양의 우리 은하계의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은하계 안에는 태양과 같은 별이 무려 4,000억개 존재하고, 또 이와 같은 어마어마한 은하계가 1000억개 존재한다고 천문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지으신 이 우주만물을 우리의 머리로 모두 상상하는 것 자체 만으로도 한계에 다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우주의 기원이 ‘대폭발’ (The Big-Bang theory)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할 것인지? 혹은 ‘정상 우주론’ (steady state cosmology) 또는 ‘인플레이션이론’ 과 같은 이론 등으로 주장할 것인지? 그리고 만약 우리가 빛의 속도로 끝없이 달려가 우주의 가장 마지막에 다다른다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인지?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상상’과 ‘이론’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무한하신 전능의 하나님을 우리의 머리로 다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조차도 우리가 다 파악해 나가기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좋은 소식’ (the good news)가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향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스스로 침묵하시고 숨으신다면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고 깨닫을 수 없겠지만, 하나님은 정반대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그분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참된 행복과 축복인지?’를 하나님은 숨김없이 선포하신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밝히 드러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성경’ (Bible)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 자신의 영광과 선하심을, 그리고 그의 권능과 자비하심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 ‘모든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성경은 특별히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설명 드렸듯이, ‘우리 인간이 어떻게 시작 (=창조)되었는지?’ ‘우리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어떻게 죄와 죽음이 찾아온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어졌으며, 어떻게 그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것인지?’를 하나님은 숨김없이 매우 자상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경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영광과 그분의 선하신 긍휼과 은혜를 날마다 깨닫아 갈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과연 누구신지를 알아감으로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 그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성경을 통하여 알아야 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의 첫 시작인 <창. 1:1>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의 첫 시작 말씀은 ‘하나님이 왜 하나님이신지?’에 대한 어떤 증명이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시작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무에서 유를, 즉 하늘과 땅을 무 가운데서 창조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창. 1:25>에 이르기까지 <첫째날>에서 <여섯날>에 걸쳐서 빛과 어둠, 궁창과 바다,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나무와 채소와 바다의 물고기와 육지의 각종 짐승을 만드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의 창조사역을 단지 <25절>로 요약하여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으로 성경은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도 잠시 나누었지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광활한 우주의 천체들에 대한 창조역사에 대해서 성경에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는 첫째, 그 우주에 관한 창조역사를 다 다루기에는 그 어떤 책의 분량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요, 둘째로 더 중요한 이유는 ‘성경은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집중해서 다룬 책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와 자연만물의 피조물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은 바로 ‘우리 인간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각별한 관계를 집중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이 각별하신 사랑과 은총이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라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사람을 창조하실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각별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을 따라 지음 받은 복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자유의지’ (free-will)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분의 형상을 닮은 특별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첫 인간 부부인 아담과 하와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 인간부부는 행복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허락하신 모든 풍성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가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을 반역하여 그분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처럼 죽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의 스토리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데로 아담 뿐 아니라,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한사람도 예외 없이 죄와 죽음을 피할수 없는 불행한 삶을 우리 인류는 겪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이렇게 만드셨나?’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왜 우리 인간을 죄 짓지 않게 만드실 수 없으셨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여기에 ‘하나님의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 말하자면 소나 개나 말처럼 지어실 수도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 1:26>에서 보듯이 우리 인간을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특별한 존재로 만드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자유의지’에 잘 대표된다면 하나님은 이 자유의지를 우리 인간의 본질 가운데 주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신을 가장 닮은 존재로 만들기 원한다면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딜레마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유의지는 참으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의 특성이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할 때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우리가 아는데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은 결과적으로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인간의 범죄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실패를 뜻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특성 (=성품)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첫 인간 부부의 범죄사건에 대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미리 아셨을까 모르셨을까?>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범죄할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과거 뿐 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도 아시는 <전지> (omnipotence)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대표적인 신적 특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이미 그가 범죄 (=타락)할 것을 아셨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이런 범죄함을 아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밝히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그렇게 계획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창조하기 바로 직전도 아니라, 그 어떤 창조물로 존재하지 않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그분의 사랑 안에서 택하셔서 자신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시고자 하는 <마스터플랜> (=놀라운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인간 창조사역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도리어 완벽한 창조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범죄를 아셨을 뿐 아니라 그 범죄한 인류에 대한 완벽한 구원의 계획을 창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계획 뿐 아니라, 그 계획을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그럼으로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분을 통하여 죄사함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구약 성경을 꿰뚫고 지나가는 <복음의 핵심>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나는 말씀의 기초라고 믿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을 통해 결국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꼭 필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되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은 그토록 특별한 창조물’ 임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도 살펴본 데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우리를 지으셨고, 그런 우리의 존재가치는 그 어떤 죄를 범한 인간도 하늘의 천사들 조차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 (The Son of God) 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보배로운 피로써 갚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성경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 우리 인간은 <예수님 짜리> ’임을 뜻합니다. 제가 ‘예수님짜리’ 라고 말씀 드리는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때, 여러분과 저는 단순히 죄사함 받음으로 첫 사람 아담의 첫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을 입고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라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 크리스챤의 미래의 영광을 선언한 근거가 이것입니다. 이 미래의 영광은 본질적으로 우리 크리스챤의 신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 안에 속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간증을 통해 너무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첫 사람 아담의 완전한 인간의 상태를 넘어서는 영광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의 생명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근거이자 마침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우리가 더 알아가고 그분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크리스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고, 그분의 의로움을 나의 의로움이 된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불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그분의 자녀가 결코 놓일 수 없는 영적 깨닫음이요, 영적 확신인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게 되는 더 깊은 친밀한 교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 그분과 누리는 화목된 관계, 친밀한 사랑의 교제 안으로 깊어지는 성도 여러분의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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