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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복’의 어의(語義)부터 알아보자. 히브리어 베라카는 ‘좋은 것'(good)을 뜻하는데, 주로 물질적 은택(material good)을 의미한다. 희랍어 율로기아(eujlogiva)는 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영적 선/유익을 의미하지만, 때로 물질적 유익을 가리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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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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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하나님 의 복

  • Author: 진약사의 10분성경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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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8.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zf416Datztw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우선 ‘복’의 어의(語義)부터 알아보자.

히브리어 베라카는 ‘좋은 것’(good)을 뜻하는데, 주로 물질적 은택(material good)을 의미한다.

희랍어 율로기아(eujlogiva)는 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영적 선/유익을 의미하지만,

때로 물질적 유익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에 비해 마카리오스(makavrio)는 복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복은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선의(善意, good will)로서 영적·물질적 은택을 통하여 나타나고

또 그로 인해 향유하는 행복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복과 연관한 성경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복은 성경에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구약의 초두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복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부각되는 가장 획기적인 계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1~3)

이러한 복의 향유는 아브람뿐만이 아니고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창 26:12~14)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28:3~4)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은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으로서

△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정점은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실현되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 3:25~26)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8~9, 13~14)

상기 구절을 통해 우리는 복과 관련해 다섯 가지 중요한 사항을 발견한다.

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절정은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는 것이었다. (창 12:3; 갈 3:8)

② 땅의 모든 족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씨)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

(창 22:18; 행 3:25; 갈 3:14)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 (갈 3:13)

④ 우리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 (행 3:26; 갈 3:9)

⑤ 이러한 구원의 은택이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이다. (행 3:26; 갈 3:12, 14)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왜 바울이 구원의 은택을 설명하면서

그토록 ‘복’이란 단어를 강세적으로 사용했는지 납득이 간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3~5)

바울은 예수를 믿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확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과 관련해 네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 “하늘에 속한”이라는 표현이 말하듯, 이 복은 근본적으로 땅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둘째, 복을 묘사하는 형용사로서 “신령한”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이 복이 “자연적 복들”과 구별됨을 말하고 있다.

셋째, “모든” 복들이라고 함으로써 복의 포괄성과 총체성이 강조되고 있다.

넷째, 문장 구조를 보면 “복 주다”라는 동사에 다시금

“복으로써”라는 부대(附帶) 성격의 부사구가 따라붙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복 받은 사실은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이라는 표현과 개념이 이 구절만큼 심층적으로 등장하는 곳은

아마 성경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복의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실현(“거룩함,” “흠이 없음,” “아들들이 됨” (엡 1:4~5) 등)에 있다.

이렇듯 신약 시대의 복은 구약과 달리 철두철미하게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3. 구약의 복 vs 신약의 복

그렇다면 복의 특징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왜 이런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일까?

왜 구약의 복이 주로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인 반면,

신약에서는 복의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근본적 답변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특징지운 종교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종교가 주로 인간의 표면에 치중하는바 형식적이고 외양적인 것이었다면,

신약에 와서는 종교의 핵심이 인간의 중심에 초점을 맞춘 신령하고 내면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물론 구약은 표면적·형식적일 뿐이고

신약은 내면적·영적이기만 하다는 식으로 대조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이 두 면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공히 나타나는 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전자에 신약은 후자에 착념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내면적 차원,

곧 ‘마음’에 대한 강조는 이미 구약 시절부터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인간 내면의 심층적 변화를 미래의 어느 시점,

곧 새 언약의 시대에서 찾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을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1~33)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율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갖는 근본적 제약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9~10)

바울 사도 역시 복음 사역의 차이점을 구약 시대와 대조시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3)

바로 이 시점에서 필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의미 구조의 문제를 도입하고자 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적 주제는 그 의미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용’은 어떤 주제가 속에 담고 있는 영적·내면적 알맹이 혹은 정수(精髓)이고,

‘형식’은 그러한 주제의 의미를 실제로 발현시키는 가시적·외형적 얼개나 틀을 말한다.

그리하여 구약 시대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요소가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고,

또 내용은 반드시 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복’의 의미에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이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의[내용]는 반드시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물질적 은택(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을 한껏

누렸고, 그렇게 향유하는 물질적 은택은 그가 하나님의 선의를 누리고 있다는 표시가 되었다.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신적 작동 원리였다.

그러나 신약으로 오면서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 사이의 이와 같은 긴밀한

연접 현상은 종지부를 찍는다. 오히려 신약 시대에는 내용(하나님의 선의)만이 극명히 드러나고,

형식(물질적 은택)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약은 신앙의 자태에 있어 내면과 영적 실상을 현저히 드러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형식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내용의 노정을 유도하는 긴밀한 수단이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를 충만히 누리면서도 물질적 은택은 전혀 향유하지 못하는 수가

있는가 하면, 물질적 은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의와는 거리가 한 없이 먼 삶의 모습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먼저, 하나님의 선의를 심령으로 충만히 누리면서도 외적 번영 조건이 결여된 경우부터 살펴보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0~12)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벧전 3: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4)

또 물질적 은택은 상당한 정도로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선의

(곧 구원의 은택 및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는 거리가 먼 경우도 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많이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1)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약 5:5)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노라.” (계 3:17)

4.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구절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발전에 무지하고 무관심할 뿐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꿈을 이루거나 성공과 번영을 기약해 주는 것 같은 성구 내용에 대해서는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그런 경우 인용되거나 회자되는 구절들은 성경의 문맥이나 정당한 해석의 과정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뽑혀 나와 우리의 욕망을 한껏 부추기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절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이요,

둘째는 번영의 욕구와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절들이다.

엄밀히 말해서 첫 부류의 구절들은 기복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 성취를 지향하도록 자극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다루고자 한다.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

자, 그러면 먼저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부터 하나씩 고찰하도록 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이 구절은 우리가 욕망의 성취를 희구한다면 적극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감초처럼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명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결코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본문에 의하면 어떤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께 데리고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막 9:17),

이는 제자들이 못 고쳤기 때문이었다 (18절).

그 아버지는 예수께 “…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2절) 라고 외쳤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평가 절하의 멘탈리티가 깔려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 (막 1:24) 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막 5:7)로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고, (마 12:28)

심지어 그 권능을 사도들에게 부여하기까지 하셨다. (마 10:1)

그런데도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께 무엇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귀신 쫓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불신과 의문의 마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정황에서 마가복음 9장 23절의 언명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9장 23절에 언급된 믿음은

“예수께서 자기 아들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을 내쫓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든 큰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그런 식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이 구절도, 우리가 가진 꿈과 욕망을 이루어 주십사 하며 끈질기게 매달리면 성취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데 자주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오직 그의 뜻대로 구할 때만 그렇다 (요일 5:14).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응답이란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예수님 자신의 기도(마 26:39)나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바울의 간구 경험(고후 12:8~9)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하물며 우리의 모든 욕망과 꿈에 있어서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아마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데 이보다 더 많이 제시된 구절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주창자들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만 있으면

못 이룰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도전한다.

그러나 바울은 빌 4:10~13 사이에서

자신의 사도적 임무 수행과 재정 형편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어떠한 재정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무엇 하나 하지 못할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결코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모든 것이 아니다.

번영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

이제 둘째 부류(번영의 욕구과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로 넘어가도록 하자.

먼저,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들부터 살펴 볼 것이다.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삼하 7:29)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장식패를 채우는 단골 성구로서, 그리스도인 개인보다도

자신이 속한 가족 전체를 염두에 두고 복을 희구할 때 안성맞춤인 것으로 인용되곤 했다.

그러나 상기 절에 나타난 바처럼

다윗의 가문에 약속된 복은 소위 다윗 언약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을

언급하는 것으로써,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시된다. (눅 1:32~33)

따라서 자신의 가정에 물질적 복이 내리기를 고대하며 삼하 7:29을 간직하는 것은 빗나간 처사요,

무의미한 종교 행위이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를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상기 내용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구절이다.

야베스의 간구를 보면 ‘복’이 언급되어 있고 그 구체적인 사항으로서

“땅의 확장,” “환난에서 벗어남” “근심이 없음” 등으로 되어 있다.

이구절에는 구약적 의미 구조의 패턴(하나님의 선의[내용]가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드러나는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문제인즉 신약 시대에는 이 두 가지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야베스와 달리 구원의 사실과 은택에 초점을 맞추어

복 얻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히 6:14)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창 22:17)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각 개인에게 물질적 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없다.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또 다른 구절들

이제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데 기여해 온,

몇 가지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호와께서는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신 28:13)

위 성구는 필자가 우스개로 ‘머리-꼬리 콤플렉스’라 명칭을 붙이게 된 근거 구절이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자녀들의 입학, 취직, 결혼 등과 연관하여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적용은 두 가지 면에서 그릇되었다.

첫째, ‘머리’와 ‘꼬리’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을 가리킨다.

신 28:1에 보면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라고 되어 있고

11절에도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로 되어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성실한 관계가 외적 은택을 발현시킨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가르침이다.

누차 말하거니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밀한 연접은 구약 시대로 끝났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7)

이 구절도 장식패의 단골 내용인데 주로 사업장에 많이 걸려 있다.

보통 가게나 업소가 새로 생겨 출발을 할 때,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보잘 것 없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크게 번성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사용되곤 한다. 이 내용은 원래 욥의 친구인 빌닷이 욥에게 하는 충고(욥 8:1~8)

가운데 들어 있다. 그런데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자녀들의 범죄 때문이므로(4절)

그런 영적 문제를 해결하면 머지않아 물질적 은택이 도래할 것(5~6절)이라고 설명한다.

빌닷의 처방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의 연접이라는 구약적 공식에 입각해 볼 때, 구구절절이 타당하다.

단지 자녀들의 신앙이 욥에게 문제를 초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성경은 그의 자녀들이 범죄했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고, 혹시 범죄했다 할지라도 욥으로서는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곤 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혹시 욥과 자녀들에 대한 빌닷의 판정이 정확했다고 해도,

그것은 앞에서 몇 번이나 언급한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변화 때문에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당될 수가 없는 것이다.

5. 성경적 근거 없는 ‘삼박자 구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상기 성구는 형통 신학을 토착화한 신토불이 용어 ‘삼박자 구원’의 근거 구절이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경우 ‘영혼이 잘 되는 것'(영적 성숙)은 필연적으로

‘범사에 잘 되는 것'(경제적·사업상 번영) 그리고 ‘강건한 것'(신체적 건강)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항목으로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요삼 1:2의 내용을 잘못 나누었다.

이 구절은 흔히 생각하듯 세 부분이 아니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영혼이 잘 됨”이 한 부분이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이 또 한 부분이다.

또 삼박자 구원에서는 후반부의 내용과 관련해

“범사에 잘 되고”와 “강건함”을 별도의 사항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정당한 처사가 아니다. 오히려 “잘 되고”와 “강건함”은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

둘째, 본문에 대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조금 전에 설명했듯 “잘 되고”와 “강건함”이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면,

이 부분으로부터 경제적·사업상 번영과 신체적 건강이라는 별도의 두 내용을 도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범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전반을 지칭하는 단어이지,

꼭 경제적이거나 사업상 번영에 국한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또 “잘 되고”와 “강건함” 역시 각각 물질적 번영과 신체적 건강으로 대별해서 이해하기보다는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중복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은 마땅히 “신앙생활의 전반적 면모가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에 있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셋째, 삼박자 구원은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의 전형적 예이다.

만의 하나 이 내용들이 삼박자 구원의 주창자가 주장하는 대로라고

(즉 필자의 첫째와 둘째 비판이 틀렸다고)해도,

이 구절에서 “삼박자 구원”의 교리를 도출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아다시피 이 구절은 가이오라는 개인(요삼 1:1)에 대한 간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게 되기를 바란다”[간원]와 “~해야 한다”[당위]나 “반드시 ~하게 된다”[필연]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논리적 간극이 존재한다.

이처럼 요한삼서 1장 2절은 그저 ‘바람’의 차원이기 때문에 삼박자 구원이 요구하는

당위나 필연의 차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늘날 유행하는 ‘삼박자 구원’은 실상 성경적 근거가 결여된

가르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6.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기복신앙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

이러한 신앙의 경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 폐해는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에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삼위 하나님께서 그리도 중요시하시는 구원의 복

(특히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이 복을 주시고자 하셨는데)을 값싸게 여기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구원의 복을 등한시하면 이와 긴밀히 연관된 여타의 신앙적 면모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 고난 중 즐거워함,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감)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현저히 약화되고 급기야 자취를 감추게 된다.

본질적인 복은 ‘구원의 복’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복을 마다하면 곧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항목들(주로 경제적 번영, 세상에서의 성공, 사업의 번창, 안락한 삶 등의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 은택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cf. 약 1:17) 그러나 이것들은 복의 핵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이런 것에 마음 뺏기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처럼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또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런 신앙의 패턴에 노출될 때, 우리는 탐심의 노예가 되며 이 세상 신이 군림하는 신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기 왕국의 건설에 분주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기에 바쁠 것이다.

기복신앙 극복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이 비극적이고 비참한 개인적·공동체적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경적 개혁의 기치를 들 수 있을 것인가? 첫째, 복과 관련하여 올바른 성경 해석과 적용이 있도록 줄기차게 가르치고 순종의 마음으로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한다. 둘째, 배우고 이해한 참된 복의 내용이 실제로 우리의 심령에 내면화되도록 힘써야 한다. 구원의 복이 의미하는 신앙 내용(하나님의 자녀됨, 영생, 하나님을 앎, 성령님의 내주,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음, 주님과 친밀히 사귐 등)으로 인해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에 변화가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복의 문제와 관련하여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회개하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참된 복의 내용을 배우고 내면화했다 할지라도 실제 삶의 상황에 들어가서는 시험을 받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빈번하다. 그때마다 그 속에 질펀히 앉아 있지 말고 즉각 회개하고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방침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 해당되지만, 특히 신앙의 공동체 내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부름 받은 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그들의 가르침과 모범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복신앙, 그 내력과 연조가 워낙 깊어진 바람에 극복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좌시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 극복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요는 우리 각 개인(특히 지도자)과 공동체에 수시로 각성의 계기가 마련되느냐 하는 것과 이 거대한 내면의 적에 대해 지속적으로 투쟁의 의지를 발휘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교회용어 바로 알기] ‘하나님, 복을 주시옵소서’

한국교회는 기복신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축복(祝福), 혹은 복(福)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하나님, 축복해 주세요’를 보자. 많은 성도들은 축복과 복을 같은 말로 생각하거나 축복을 ‘더 크고 좋은 복’으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축복과 복은 사전적인 의미와 성경에서 쓰인 의미가 서로 다르다. 축복은 복이라는 말과 ‘빌다’는 뜻의 ‘축(祝)’이 합쳐진 것으로 ‘복을 빌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 축복해 주세요’는 ‘하나님, 복을 빌어주세요’란 뜻이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 축복해 주세요’라고 한다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다른 존재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된다.

성경에는 ‘축복’이란 말이 구약 82회, 신약 18회 정도 나온다. ‘복’은 이보다 많은 400여회 나온다. ‘그(하나님)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9)’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시 109:28)’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복을 내리시는 분이시며, 복을 비는 말인 축복은 인간이 하는 일임을 성경은 분명히 전하고 있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교회와 사회를 연결하는 가교이며 동시에 기독교의 신앙과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다. 성도들은 이런 역할을 하는 교회용어를 바르게 사용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 축복해주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 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같은 말은 하나님의 속성과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표현이다.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가 아닌 ‘하나님, 복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이상윤 목사(한세대 외래교수)

삽화=이영은 기자

“우리가 받은 최고의 복”

성도는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 가지로 표현 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성도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 성도가 복 받은 자입니까? 성경이 그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3장 29절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라고 했어요. 물론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세대를 말하지만 이것은 결국 이 땅의 모든 성도를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은 성도를 누구라고 했습니까? 역시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시편이 150편인데 그 중 첫 번째 시편 곧 서론이 성도가 복 있는 자라고 선포함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성도의 삶이 복될 뿐 아니라 심지어 성도는 죽음 조차도 복되다고 합니다. 시편 116편 15절에서는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라고 했어요. 또한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서는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고 하셨습니다. 곧 삶 전체와 죽음마저도 복된 자가 바로 성도요, 우리인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어떤 복을 말하는 것입니까? 구약성경에서는 세 가지 복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창세기 12장 2절에 나오는 복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두 번 나오는 “복”은 ‘바라크’(ברד)입니다. ‘바라크’의 뜻은 ‘무릎을 꿇다, 굴복하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이런 의미입니다.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그 분을 바라볼 때 그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라크’의 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언약 백성으로 삼으시는 관계에서 우리를 부르시사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곧 언약 관계의 복입니다.

두 번째는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했어요. 여기서 “복”은 ‘아쉐르’(אשר) 입니다. ‘아쉐르’는 ‘똑바르다, 똑바로 걸어가다, 트랙을 따라가다, 경계선을 넘지 않다’ 이런 의미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신명기 4장 40절에 나오는 복인데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고 하셨어요. 여기서 “복”은 ‘야타브’(יטב)라고 합니다. ‘야타브’는 ‘좋다(to be good, well), 기쁘다(to be glad), 즐겁다(pleasing, joyful)’ 이런 의미인데 이것은 물질의 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만물을 누리는 복을 말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내가 너를 복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할 때도 이 단어가 쓰여요.

그런데 이 세가지 복이 연관이 있어요. 먼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맺는 ‘바라크’ 복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에 따라 ‘아쉐르’ 곧 인생의 바른 길을 걷는 복을 누리고, 덤으로 만물을 누리는 ‘야타브’의 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바른 순서입니다. 거꾸로 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를 합한 복이 누구를 통해서 온다고 하십니까? 창세기 22장 18절을 보세요.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했어요. 곧 아브라함의 씨 (후손)인 예수님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복이 바로 “바라크”인 것입니다. 곧 “언약의 복”을 말하는 것이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최고의 복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복인 것입니다. 왜요? 22,23절을 보세요.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고 했어요. 성도가 받은 최고의 복은 바로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복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까?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임마누엘의 영광을 누리며 사는 것이 가장 큰 복인 것입니다.

이 임마누엘 안에 ‘바라크(언약관계의 복), 아쉐르(올바른 길의 복), 야타브(만물을 누리는 복)’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영원 영원토록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는 룻을 위해 ‘야타브’의 복을 받게 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보아스를 주심으로 세가지 복을 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이 놀라운 임마누엘의 최고의 복을 충만 충만히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과 이해

성경적인 복에 대한 이해 (강사 : 박광현 목사/박사)

시 1:1-6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사람들은 복을 좋아한다. 모두가 복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복은 잘되는 것이다. 잘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복을 가장 많이 강조하는 곳이 종교계이다. 특히 기독교를 복의 종교라고 부른다. 이를 증명하듯이 성경에는 복에 대한 말씀들이 너무나 많이 나온다.

우리는 찬송가를 부를때도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면서 찬송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흔히 전도 할 때도 ‘예수믿고 복 받으라’고 한다. 그때 받으라는 복은 무엇인가? 복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찾아보니 119절에 130 여번 이상 사용되었다. 성경도 이만큼 인간들에게 관심이 많은 복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에서는 오복(五福)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수(壽), 부(富), 귀(貴)-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1. 오래오래 장수하는 것이 복이고 2. 재산을 많이 모아 가지는 것이 복이고 3. 존귀하게 되고 건강한 것이 복이고 4. 좋은 평판을 듣는 덕있는 것이 복이며 5. 죽을 때에는 객사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자녀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중에 잘 죽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잘 되어서 잘 살다가 잘 죽는것이 복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 복이란 이 이상은 없다. 인간의 육신이 살아가는 동안 그의 일생이 잘 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이 그것을 지향하고 있고, 인간의 모든 노력 또한 그 복을 향하여서 달려가고 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은 인간이 원하는 그 복을 약속하고 있을까?

성경에서 최고로 복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브라함, 욥, 요셉, 다윗 등등일 것이다. 여러분도 그들처럼 그러한 복을 받는 인물이 되고 싶은가?

그럼 먼저 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시작하는 시편 1편의 다윗의 복 있는 자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좆지 아니하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법대로 사는 자”라고 말한다.

복 있는 자를 병 없는 자라는 구절은 없다. 아들 낳거나 많이 낳는 것도 아니다. 안 죽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는 신명기나 민수기에 보니 복을 말하기를 자손을 많이 낳고 집안이 부해지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거부가 되었고,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었다.

욥도 더 큰 부자가 되었고 다윗도 왕이 되어 영화를 누렸다.

그럼 복 받은 자가 다 이렇게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한 사람씩 찾아가며 그 문제를 풀어 보고자한다.

먼저 아브라함에 대하여 창세기 12장 2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에게 복을 주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기에 우리는 먼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보면 복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 중에 누가 아브라함이 받은 육신적인 복을 이야기 해 보라. 아브람의 생애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자식을 아주 많이 낳았다는 말이 없다. 그가 아주 건강하여 무병장수 했다는 말도 성경엔 없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을 정도로 거부가 아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그에게 상급을 주는데 그 상급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즉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요,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 말할 때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복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의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의 재물, 건강, 기적을 말한 적은 없다. 그 증거로 성경 곳곳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도 복에 거한다는 말이다.

*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너의 씨로 말미암아 세상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는데 그 복은 절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육체적인 잘됨을 말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그럼 육체적으로 망했느냐? 그렇지는 않다. 때때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잘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그런 가시적인 것으로 확인케 하셨다. 그래서 민수기나 신명기이 복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의 가시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 가시적 표현 자체가 복은 아니다.

성경에서 복을 무척 좋아했던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야곱이다.

야곱은 자신의 형인 에서의 장자권을 뺏어 가지고서라도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했던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온갖 비굴한 짓을 다한다. 하나님의 복이 거부가 되고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삭에게 축복을 받아 내었으며 곧 그는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의지의 사람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쟁취하여 낸다.

그의 아내 라헬은 삼촌 라반의 가신 즉, 그 가정에 복을 내려주는 드라빔까지 훔쳐서 도망가고 야곱은 그것을 즐기듯이 눈감아 준다.

그는 많은 소떼와 양떼를 지닌 거부가 되었고 아들 자식만 열이나 넘게 낳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한마디로 부자 즉, 복 받은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잃는 지경이 되었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다시 축복을 받고 그의 인생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작된다.

그의 말년은 어떠한가? 그는 그의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 자가 되었고 그는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 약속의 땅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와야 하는 거지가 된 것이다. 아들이 열둘이 있어도 기쁨이 없었다

그는 후일에 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애굽에 내려와서 자신은 거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왕에게 축복을 빈다.

복이 있는 자가 축복을 비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복이 없는 자가 축복을 빈다는 것은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야곱은 바로에게 말하기를 나의 130년 세월은 우리 조상에 비해서 너무나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기에 바로에게 복을 비는 자가 된 것이다.

야곱은 그가 복의 사람이 되기 위해 무척 힘썼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고, 하나님의 사자에게 축복을 받은 후에도 그는 도리어 더 부유해진 것이 아니라 더욱 험악한 세월을 보내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축복 받은 사람으로 바로를 축복하는데(창세기47:7) 그는 그의 조상보다 더욱더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을 축복할 만큼 떳떳했다.

그가 바로를 축복할 때 과연 돈을 더 해 달라고 했겠는가? 병이 없게 해 달라고 했겠는가?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성경은 표현하기를 형통한 자라고 한다.(창 39:2,3,23)

그러나 우리가 그가 당한 일을 보면 형들에게 버림받아 노예로 팔려 온 것을 보고 형통하게 되었다고 하고 또는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힘을 보고 형통케 했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성경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한다. 그것은 화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은 복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말이다. 왜 그에게 그것이 형통이고 복인가?

그의 그 험난한 길을 통하여 그는 점점 하나님을 뜻을 향하여 나아가고 그 뜻을 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복의 사람 욥을 통하여 우리는 이 문제를 풀어보자.

성경에 등장하는 욥은 우리가 부러우리 만큼 육신 적인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시험 후에도 그 소유와 재산이 배나 되어 모든 신앙인 들이 그를 부러워한다. 그는 자녀까지 다 보상받았다.

이런 본문을 보고 역시 하나님은 시험을 잘 이기는 자를 버리지 않고 끝내는 더 큰복으로 갚아주신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욥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결론이 더 큰복을 받으려면 인내하면서 신앙생활 잘하라는 것일까?

과연 욥이 받은 육신적인 복만 가지고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이 만약 신앙생활을 잘하면 지금 자식을 다 죽이고 배나 더 준다고 하면 그럴 테니 배나 더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욥이 시련을 통해서 참으로 복된 자가 되었으나 그 복됨은 소유의 많아짐과 건강함이 아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욥기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환난과 시련을 통해 욥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더 큰 재물이 아니라 욥의 고백처럼 주를 더욱 가까이 알게 됨이다. 그것으로 욥은 기뻐하고 있다.

환난 전에 욥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귀로만 들었던 정도였다면 이제 환난 후에는 눈으로 확실히 보는 상태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후로 얻은 재물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가시적인 증거로 주신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전에는 라디오 방송만 들었는데 얼마나 궁금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텔레비젼을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인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불러내실 때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렇게 약속하다.

거기에서 너희에게 복을 줄 것이라고. 과연 아브라함도 기대했었고 이스라엘 백성도 기대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창12장에 보니 거기는 기근이 있는 땅이었고 그것도 상당히 나쁜 땅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가 바랬던 축복이 아닌지라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와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그 땅에서 놀고 먹으며 건강하고 오래 살지 못했다.

그 땅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못사는 땅이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약속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면 그가 역사하는 땅이기도 했다.

축복의 땅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다윗을 우리는 복된 인물로 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다윗은 육신적인 복을 누리다가 죽은 인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곧 바로 왕위에 앉지 못하고 많은 세월을 이방 땅으로 피해 다니면서 돌아다닌 방랑자였다.

그는 왕이 되어서도 자신의 아들들로부터 배반을 당했고 늘 울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서 복된 자의 정의를 내리니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자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즐거워하는 자가 복된 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 되었다.

구약의 모든 가시적인 복의 형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한 표현이다.

우리가 알듯이 이사야, 예레미야, 하박국, 요나, 말라기 등등 주의 선지자들이 인간적으로는 불행했다. 그렇게 큰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므로 세상에서 따돌림받는 인생이 되는 것을 즐거워했다.

무엇이 복인가? 이제 신약을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은 복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복의 실체를 그의 산상설교 첫 부분에서 밝히고 계시다. 무엇이 복인가?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복된 자라고 한다. 복이 있으라. 심령이 가난한자여 천국이 너희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정의하는 복된 자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민중들 그들의 관심은 복이었다.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을 복으로 알았다.

그리고 먹고 입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복으로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복을 가져다줄 인물을 고대했으니 그가 곧 메시야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줄 자신들의 육체적인 복을 만들어줄 메시아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말하시기를 요한복음 6장 나는 너희에게 이런 육신적 문제를 해결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 분이 그것을 주러 오신 분이라면 그분부터 배부르게 사셔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말하시기를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고 그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그분이 풍성하게 채워주시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너희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를 믿어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된다면 또 잘되기만 한다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그렇게 성취된 삶을 살아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 믿어 부자가 되었다든지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나 메시지 어떤 부분을 보아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이야기하는 부분은 없다. 초대교회는 너무나도 가난했었다. 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핍박을 받아야 했고 예수를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가야만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니어도 사도바울은 잘되어야만 한다. 그는 예수의 믿음대로 산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그러나 그의 일생에 있어 그러한 복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도리어 예수를 믿어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는 예수를 믿어 죽을 위기를 수없이 넘겼다. 그가 죄수로 잡혀 베스도의 심문을 받을 때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이미 바울을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왕과 신임총독 베스도 앞에선 바울이 자신을 변명해보라고 그들이 말했을 때 그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다. 그러자 베스도와 아그립바는 말했다.

“니 꼴을 보고 우리보고 그런 소리를 하라고 네가 학문이 많다더니 미쳤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미친것이 아니라 나는 바른 소리를 한다고 했다.

사실 바울은 예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몸 병든 몸 자식 없는 몸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미친것이 아니고 나는 제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지 않는다. 도리어 왕의 옷을 입고 세상의 권세와 복을 한 몸에 누리고 있는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그는 말하기를 왕이여 제가 이렇게 묶인 것 이외에 당신이 제발 나처럼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자신처럼 모두가 이런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아그립바왕이나 베스도처럼 되는 것이 복이라고 말하지만 바울은 예수를 믿어 도리어 핍박받는 것이 복이라고 한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빌립보에 보내는 편지 제3장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비해 세상의 지식과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명예와 부는 배설물과 같다고 한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에게 날마다 나아감을 기뻐한다고 한다. 이것은 보통사람이 보기에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 있는 자 라고 했다.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이니 하늘에서 그의 상이 크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에 너무나 쉽게 유혹을 당한다. 우리의 관심의 전부가 그것인지도 모른다. 아담이 사탄의 말을 듣고 보니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먹음직-이것은 곧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탄이 시험했던 첫번째 시험이었다. 돌이 떡이 배부르게 먹으라. 육체적 만족을 말한다. 그리고 보암직했다고 한다. 사탄은 예수를 성전의 꼭대기에 올려다 놓고 뛰어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따를 것이라고 했다. 명예와 인기를 말한다. 그리고 탐스럽게 보였다. 사탄은 예수께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준다고 했다. 바로 이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게 함의 유혹으로 사탄은 예수께 똑같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잘되면 복 받은 인생이다.

요한 사도는 성도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요일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오늘날 성도 또한 먹음직-육체의 정욕, 보암직-안목의 정욕, 탐스럽게함-이생의 자랑의 유혹을 동일하게 당하고 있다. 육체의 정욕을 안목의 정욕을 이생의 자랑을 누리면 그것이 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이것은 세상을 좇아서 온다고 한다. 이 부분이 잘되는 것이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 아니다.

요한 계시록에 교회들이 나온다. 일곱 교회 중에 부자인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할 정도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복 받은 교회다. 모든 교회가 부러워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교회는 주께서 책망하신 불쌍한 교회이다.

그들의 부요함이 눈을 막았고 그들의 귀를 막았던 것이다. 그 부요함은 절대로 복이 아니다.

일곱 교회 중에 참으로 가난한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는 환난과 궁핍이 있는 교회였다. 주께서는 그 교회를 칭찬했다. 환난과 궁핍으로 인하여 그들은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그들의 가난은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부자교회 부자신자 육신적인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병들었다고 해서 주님이 버리신 것도 아니다.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된 것이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무엇인가?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자. 온유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의 사람인데 이 땅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팔복에 말하는 복된 자는 예수님 자신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며 그 예수를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이다. 그 예수를 인하여 핍박을 당함이다. 그 예수의 뒤를 따름이다. 예수 외에는 어떤 복도 없다. 예수를 위하여 세상을 버리면 버릴 수록 복이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여 고생하면 천국에서 상급이 많아지고 면류관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차등이 있을까? 정말로 복된 사람은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 더 많이 받고 싶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천국에서 면류관을 몇 개 받을 것 같은가? 제가 천국을 보고 온 어떤 사람의 책을 보았는데 천국에 가면 면류관을 쓴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에 면류관을 쓰고 누가 높은가 누가 더 많이 받았나 면류관 쓰고 제고 또 면류관 따먹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면류관을 쓴 사람들이 주의 보좌를 향해 면류관을 벗어 던지면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분은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하면서 찬송을 하더란다.(계4:10,11) 천국은 참복을 누리는 장소이다. 그 복은 에덴보다 더 좋은 예루살렘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예수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 땅에서는 아니라도 천국에 가서는 복을 반드시 준다고 하는데 그 복이 바로 예수와 함께 영원히 거함이 복인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까닭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해결함을 받는 복을 받으려고 함이 아니다. 기도해서 무엇을 받는 것 이 복이 아니라 기도하는 인간이 됨이 복이다. 구제하라는 까닭 전도하라는 까닭은 전도해서 상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 인간이 되는 것 자체가 복인 것이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예배해서 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인간이 된 자체가 복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누리는 것이고 기도하는 자체가 복이고 봉사하는 자체가 복이고 전도하는 자체가 복이지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전혀 아니다. 그것 자체가 기쁨인 것이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다른 복을 원하지 않는다. 예수만이 복임을 알아 그 안에 거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한시라도 그분을 만나려한다. 예수 등쳐서 다른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예수를 위해서 무엇을 해서 다른 어떤 복을 받으려는 노림수가 성도마다 보인다. 그래서 봉사하고 헌금 내고 그래서 예배드리고 찬송하는 아주 유치한 분위기가 넘친다. 정말 복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교인들이 들끓기 때문이다. 모두다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한다.(doing)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자는 없다.(being) 세상에서도 복 받아 머리가 되어 사람들을 누르고 천국에 가서도 최고로 높은 자리에 면류관을 쓰기 위해 의지의 한국인이 되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이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욕심의 전시장일 뿐이다. 참된 복은 예수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버림이다. 마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버림같이 …. 말이다. 죄인이라고 하는 자가 무슨 복을 달라고 할 자격이 있는가? 오로지 날 죽여주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인간으로 만들어달라는 말 이외에 무슨 할말이 있는가? 그것이 참복인데….

결문

많은 종교들이 복 받으러 오라고 모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가 이러 저리 바삐 찾아다닌다. 여러분은 어떤 복을 원하고 있는가? 왜 교회에 오는가? 하나님 앞에 와서 운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이며 교회에 와서 기뻐하고 간증한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인가?

좋은 회사에 취직됨을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혹 좋은 대학에 붙지 못해서 좋은 가정환경이 없어서 나는 불행한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세상이 구하는 모든 복을 팔아서 예수를 산다면 그는 참으로 복된 자이다. 세상에서 미친 자로 놀림을 받아도 예수의 뜻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는 행복한 인생이다. 아브라함이 그 복에 참예했고 야곱의 삶이 그랬고 요셉도 욥도 다윗도 하나같이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받았던 인생이다. 세상사람들은 모두가 넓고 평탄한 길이 복된 길이라고 거기로 몰려들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좁은 길이 복된 길인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신이 사는 것이 복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으로 주님이 사는 것이 복된 것이다.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말자. 참복을 구하자.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송인규 교수의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 – 복(福) ②

복(福) 송인규 교수의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Ⅰ 1. 왜 기복신앙에 빠져드는가?

2.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3. 구약의 복 vs 신약의 복

4.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구절들

5. 성경적 근거 없는 ‘삼박자 구원’

6.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우선 ‘복’의 어의(語義)부터 알아보자. 히브리어 베라카는 ‘좋은 것’(good)을 뜻하는데, 주로 물질적 은택(material good)을 의미한다. 희랍어 율로기아(eujlogiva)는 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영적 선/유익을 의미하지만, 때로 물질적 유익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에 비해 마카리오스(makavrio)는 복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복은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선의(善意, good will)로서 영적·물질적 은택을 통하여 나타나고 또 그로 인해 향유하는 행복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말하는 복…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

이상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복과 연관한 성경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복은 성경에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구약의 초두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복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부각되는 가장 획기적인 계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1~3)

이러한 복의 향유는 아브람뿐만이 아니고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창 26:12~14)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28:3~4)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은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으로서 △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정점은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실현되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 3:25~26)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8~9, 13~14)

상기 구절을 통해 우리는 복과 관련해 다섯 가지 중요한 사항을 발견한다.

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절정은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는 것이었다. (창 12:3; 갈 3:8)

② 땅의 모든 족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씨)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 (창 22:18; 행 3:25; 갈 3:14)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 (갈 3:13)

④ 우리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 (행 3:26; 갈 3:9)

⑤ 이러한 구원의 은택이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이다. (행 3:26; 갈 3:12, 14)

신약 시대의 복…철두철미하게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왜 바울이 구원의 은택을 설명하면서 그토록 ‘복’이란 단어를 강세적으로 사용했는지 납득이 간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3~5)

바울은 예수를 믿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확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과 관련해 네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 “하늘에 속한”이라는 표현이 말하듯, 이 복은 근본적으로 땅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둘째, 복을 묘사하는 형용사로서 “신령한”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이 복이 “자연적 복들”과 구별됨을 말하고 있다. 셋째, “모든” 복들이라고 함으로써 복의 포괄성과 총체성이 강조되고 있다. 넷째, 문장 구조를 보면 “복 주다”라는 동사에 다시금 “복으로써”라는 부대(附帶) 성격의 부사구가 따라붙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복 받은 사실은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이라는 표현과 개념이 이 구절만큼 심층적으로 등장하는 곳은 아마 성경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복의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실현(“거룩함,” “흠이 없음,” “아들들이 됨” (엡 1:4~5) 등)에 있다. 이렇듯 신약 시대의 복은 구약과 달리 철두철미하게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쉽지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2가지’라는 글입니다. 우선 그 첫 번째 주제인 ‘복(福)’에 대한 이야기를 몇 차례 나눠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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