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의 뜰 | [144] 마가복음11장/2부/헤롯 성전 구조/이방인의 뜰/성전 청결 사건/산헤드린의 위치/찾아가는 성경/유병성 목사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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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번째 입성하시던 날 성전 청결 사건을 행하십니다.
몇가지 궁금증이 있습니다
첫째 : 성전의 어느 부분을 청결케 하셨을까요?
둘째 : 성전 전체일까요? or 일부일까요?
셋째 : 구약의 어느 말씀과 연관이 있는 사건일까요?
실제 헤롯 성전의 모형을 통해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두개의 모델을 참고했습니다.
– 이스라엘 박물관 모형
– 통곡의 벽 터널 모형
그리고, 예수님께 찾아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영상을 통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BGM
✔️Track – Seed – 파체위소(破涕爲笑)
✔️YouTube – https://youtu.be/G9BJjBkFXnM
✔️나눔뮤직 – https://tv.naver.com/v/123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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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 구역의 ‘[이방인의 뜰]에 대한 오해 – 드림투게더

이곳이 [이방인의 뜰]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이곳은 성전과는 관련이 없는 곳, 즉 일종의 관광구역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전산에 오는 사람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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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dreamtogether.com

Date Published: 5/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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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뜰 | Biblia

이방인의 뜰 … 성전의 뜰은 안뜰과 바깥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안뜰은 유대인에게만, 그리고 바깥들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안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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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ia.co.il

Date Published: 1/20/2022

View: 598

마가복음 11:12-17 <이방인의 뜰> – 마라나타99

마가복음 11:12-17 <이방인의 뜰>. 때도 아닌데 무화과 나무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발견할 것을 기대하셨을까? 무화과의 때는 본격적 수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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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rosslife.tistory.com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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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뜰 – 다음블로그

유대인만을 위한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의 뜰이 있는 것은, 이방인들도 성전 안에 들어올 수 있고, 또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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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5/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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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뜰

하나님은 성막의 뜰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막은 안 뜰(마당)이 있고, 바깥뜰이 있는데 바깥뜰을 일컬어 이방인의 마당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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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v1611.net

Date Published: 5/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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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마가복음11장/2부/헤롯 성전 구조/이방인의 뜰/성전 청결 사건/산헤드린의 위치/찾아가는 성경/유병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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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방인 의 뜰

  • Author: MEM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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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2. 2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lhqip6dGhg

예루살렘 성전 구역의 ‘[이방인의 뜰]에 대한 오해

권영진 목사의 정언향 칼럼

Giotto di Bondone(1304-06), Scrovegni Chapel, Padua, Italy

어떤 글을 읽는데 그 내용 중에 ‘예수님 시대의 성전(헤롯성전을 의미-필자 주)에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명칭의 장소가 있었는데 여기는 이방인들도 들어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도록 배려를 한 곳이다. 이것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곳을 장사와 환전하는 곳으로 만들어 더럽히면서 이곳을 이방인들의 예배와 기도 장소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분노를 이끌어냈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몸소 증명해 보이셨다’는 논지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글쓴이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성도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나보다 하고 처음엔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내용을 가르쳐 주었다는 사람이 성경공부 간사님이라 하는 내용이 있어서 이게 그냥 웃고 넘길 일이 아니구나 싶어서 잠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의 상당 부분의 글들이 ‘이방인의 뜰’을 그런 의미로 해석해 놓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간사님도 아마 이런 글들을 보았겠지요.

이런 해석을 누가 최초로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의미를 살펴보건데 개인적으로는 [이스라엘 회복 운동]과 관련된 쪽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자주 쓰는 가르침 중 하나가 (이스라엘에 새롭게 세워질) 성전을 통해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오해와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이 ‘이방인의 뜰’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참고로 인터넷에 있는 성경과 신학에 관한 글은 위험한 내용이 많으니 검증된 신뢰할 만한 저자와 명확한 출처(reference)가 없는 글은 어지간하면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1. [이방인의 뜰]은 본래 성전에 속한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헤롯이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을 개축, 확장하면서 소위 [성전산]이라고 불리는 확장된 형태의 [대규모 성전 테마파크]를 지으면서 늘어난 공간 중 하나입니다. 이는 헤롯이 자신의 위세도 과시하면서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봐라 내가 사실은 이렇게 끝내주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용 시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헤롯에 잔인한 정치에 만정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로마의 ‘윗 분’들에게 들어갔다가는 헤롯의 정치적 생명도 위태롭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했던 것입니다. 즉 민심을 잡기 위한 일종의 [전시행정]을 한 것입니다.

각설하고, 이곳은 본래 성전과 확장된 [성전산] 사이에 존재하게 된 공간입니다. 본래의 성전 즉, 스룹바벨 성전(제2성전)이 소위 [내벽]이 되고 헤롯이 새롭게 조성한 성전산이 [외벽]을 이루는 구조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공간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이방인의 뜰)은 헤롯이 조성한 별개의 공간 중 하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전의 본래 구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오리지널 성전에는 애당초 [이방인의 뜰]이라는 명칭의 공간 자체가 없습니다.

이곳이 [이방인의 뜰]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이곳은 성전과는 관련이 없는 곳, 즉 일종의 관광구역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전산에 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방인(특히 로마인들)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이들을 위한 각종 편의들이 제공되었습니다(요즘으로 말하면 노점 같은 것들). 또 멀리서 성전에 제사하러 오는 유대인들을 위한 행정적 편의(성경에 나오는 환전, 제물로 사용할 동물들의 매매 등)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이게 나중에 예수님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2. [이방인의 뜰]은 예배나 기도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 없는 곳이고 당연히 예배 장소도 아닙니다. 여기는 앞서 말씀 드린대로 관광지 비슷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온 이방인들은 대부분 ‘여기가 헤롯이 이번에 조성한 성전을 컨셉으로 한 테마파크래 돈 무지하게 퍼부었네…’ 이러면서 요즘 말로 [셀카 찍고 인증샷 남기는 곳] 정도의 공간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았구요. 그런 어수선한 곳에서 무슨 기도며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만일 이방인들 가운데 실제로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사람은 유대교로 개종을 하고 소위 안뜰(스룹바벨 성전)로 들어가 정해진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 종교적 제의를 했습니다.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실제 사례도 있었던 일들입니다.

이스라엘 박물관의 예수시대 예루살렘 모형중 성전 부분.

3.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공존을 말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심각하게 왜곡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방인의 뜰]은 오히려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방인을 끔찍히 경멸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곳과 성전 사이에 약 1.5미터 정도의 담을 쌓아두고 ‘여기 넘어가면 이방인은 죽을 줄 알아라!’ 하고 무시무시하게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치졸한 일인데 담의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실제 성전 안쪽을 훤히 볼 수 있고 실제로 들어갈 수도 있게 해 놓고 막상 들어가면 죽인다고 협박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방인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잘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혀 있는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성경에서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성전 내에 이방인들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고소당해 집단린치를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행 21:27-36) 이것을 봤을 때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방인들을 사람 같이 생각하지 않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의 뜰]과 성전을 격리하는 것은 결코 이방인들을 향한 호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이방인들의 뜰]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집어엎으신 까닭은 이곳이 원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곳인데 거기를 장사하는 곳으로 바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긴 원래 장사도 할 수 있는 곳이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소통하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화가 나신 이유는 거기서 장사를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나와서 같이 장사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제사와 관련된 제물을 팔고, 거기에 필요한 환전을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나와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분노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장사를 하면 안 되는 인생들이 나와서 장사를 – 그것도 어마어마한 폭리를 남기는 절반은 사기에 가까운 짓들을 – 하고 있었으니 성전의 본래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은 이에 대해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그들의 비리에 대해 분노하신 것을 넘어,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성전은 이제 그 기능과 목적을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성전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의미를 완성하시고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학적]인 것이라고 예수님의 행동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이와 같이 간단하게 [이방인의 뜰]을 둘러싼 일련의 왜곡된 해석에 따른 오해의 내용을 교정해 봤습니다. 처음의 글을 읽은 독자들은 ‘아하 [이방인의 뜰]에 저런 은혜스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하고 오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런 글이 많은 경우 교회 홈페이지나 기독교 단체의 자료실 같은 곳에 있어서 성도님들을 더욱 이런류의 글을 믿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은혜스러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은혜스럽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사실을 왜곡한다면 그것은 결국 거짓일 뿐입니다. 이는 단지 [이방인의 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에 많이 돌아다니는 각종 [예화]와 [간증]을 포함한 모든 소위 [은혜로운 글(심지어는 신학적 글도)]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가 교회 내에서 좀 더 개선되기를 바랍니다.

글쓴이 권영진 목사는 , 정언향 ( 正言香 : 바른 말씀의 향기 ) 교회를 섬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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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뜰

성전의 뜰은 안뜰과 바깥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안뜰은 유대인에게만, 그리고 바깥들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안뜰로 가기 위해서는 바깥뜰을 지나갈 수 밖에 없으니, 이 바깥뜰은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뒤석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바깥뜰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들까지도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는 겁니다.이방인이 출입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곳이 성전같지 않게 마냥 시장통 같은 곳은 아니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이방인의 뜰에는 회당같은 기능을 하는 모임 장소도 있었고, 이방인의 뜰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율법을 토론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의 뜰과 경계를 이루는 안쪽 뜰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전의 뜰에는 안뜰과 바깥들을 구분하는 담장이 있습니다. 이방인이 출입할 수 있는 경계가 되는 담장 안으로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담장에는 화강암으로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이방인은 안쪽 뜰과 성소 주변의 난간 주변으로 들어올 수 없다. 들어오다가 잡히는 모든 사람들 (이방인들)은 죽을 것이다.”

이방인의 뜰

Day 12. 이방인의 뜰(요 2:13-17) 2010.6.16. 목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다. 성전 제사가 유대인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성전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방인의 뜰’이 양과 비둘기, 장사꾼들로 난장판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제사를 위해 이방인의 제사 권리를 침해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상을 엎고, 채찍을 들어 장사꾼들을 몰아내셨다.

성전세를 내기 위해 동전을 바꾸어주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인 소나 양을 파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가 한 건물로 지어졌고, 그 주위에 뜰이 있고 뜰은, 성소와 가까운 쪽이 있는 뜰은 제사장의 뜰,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뜰, 다음에는 여인의 뜰, 다음에는 이방인의 뜰의 순서로 구분이 되었고, 이방인의 뜰 다음에는 바로 성전 담 벽이 있었다. 그러니까 성전 담 벽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이 이방인이 뜰이었다.

이방인의 뜰이 성전 안의 뜰의 맨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래도 성전의 뜰 가운데, 이방인의 뜰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묵상하고, 예배 하도록 허락된 장소였는데, 이곳이 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데려다 놓고, 장사를 하는 장소로 변했다.

유대인만을 위한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의 뜰이 있는 것은, 이방인들도 성전 안에 들어올 수 있고, 또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예배드리는 장소를, 각종 짐승들을 갖다 놓고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이방인들의 뜰을 회복시키심으로,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도록 만드는 사건이다. 즉 이방인들을 위한 예배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지만 이방인의 뜰이 더럽혀졌을 때 채찍을 들고 노발대발 하셨다. “이방인의 뜰이 더럽혀진 너는 이제 성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해져야 하는 것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로 시작하여, 전 세계의 백성으로, 그 대상이 넓어지는 것이다. 성전은 출애굽 당시의 성막으로 시작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연결되고, 예수님의 몸으로 적용되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려졌던 예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 세계, 어디서나 드려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구원의 복음이 온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을 계획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의 뜰의 일부분이, 이방인들에게 열린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그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것인데, 이것이 성전정화를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를 ‘하나님의 성전’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분명 성도의 삶에도 ‘이방인의 뜰’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성도의 삶 24시간 중에는 비신자를 위한 시간이 마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비신자의 시간을 찾아볼 수 없다. 비신자를 위해 할당되어야 할 시간이 공부와 데이트, 여가생활이라는 명목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자기의 편의를 위해 불신자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현상이 아무 죄책감 없이 자행되고 있다.

올해 나는 매주 목요일 전도특공대로 모여 1시간 반에서 2시간가량을 전도한다. 또 교회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여 얻은 열매다. 이렇게 해서 개인적으로 6명을 예수 영접 시켰고, 4명이 성령을 받도록 도왔다. 하루 30분만 투자하면 1명에게 사영리를 읽어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러면 1년 365명, 10년 3,650명이다. 우리 교회 성도가 어린이, 청소년까지 70명이 이 거룩한 사역을 매일 감당하면 10년이면 255,500명에게 복음을 들려줄 수 있다. 또 한국 교회가 86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전체가 매일 30분만 투자하면 5일 만에 4300만 명에게 복음을 들려줄 수 있다. 그럼 믿지 않는 모든 한국 사람에게 복음을 다 전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름다운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 성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방인의 뜰이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 성도가 자기네들만 끼리끼리 모여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나아가 전도할 줄 모른다면 이것은 바로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정화되어 비신자가 하나님을 만나 예배할 수 있도록 항상 전도하며 깨어 신앙생활하자.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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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뜰

말씀

말씀: 출애굽기 27:9-19

요절: 출애굽기 27:9

하나님은 성막의 뜰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막은 안 뜰(마당)이 있고,

바깥뜰이 있는데 바깥뜰을 일컬어 이방인의 마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막 밖의 전 지역이 이방인의 마당입니다.

이방인들은 이곳까지는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이곳은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도둑질, 여러 가지 불의와 악이

행해지는 죄의 처소입니다. 사죄의 은총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요, 버림받은 자의 거처입니다. 바깥뜰에서 문을 통과해

성막 안으로 들어서면 성막 안 뜰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안 뜰에 대한 것입니다. 성막의 뜰은 회중의

성막이라고 불립니다. [뜰의 현수막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밑받침들과 뜰 문의 현수막과 그 줄들과 그 말뚝들과 회중의

장막 곧 성막에서 섬기는 일에 쓸 모든 기구와](출39:40).

회중의 성막은 번제 헌물이 드려지고 주님을 경배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반 회중들의 예배는 모두 이곳

성막의 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너희 대대로 주

앞에서 회중의 성막 문에서 항상 드릴 번제 헌물이니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인하여 회중의

성막이 거룩히 구별되리라.](출29:42,43). 성막 뜰은

백성들이 주님께 헌물을 드리고, 주님께서 열납하시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지성소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응답하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뜰의 너비는 남쪽 길이가

100큐빗인데 약 45미터요, 세마포로 현수막을 치게 했습니다.

현수막 기둥이 20개였고, 놋 받침이 20개였습니다.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들었고 북쪽은 남쪽과

동일합니다.

서쪽은 길이가 50큐빗의

현수막을 치고, 기둥이 10개였으며 놋 받침도 열 개였습니다.

동편 역시 50 큐빗의 현수막이 기둥 셋과 놋 받침에 걸려

있었습니다. 뜰 문 이편에 15큐빗의 현수막이 기둥 셋과 놋

받침에 걸쳐 있었습니다. 뜰 문을 위해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는 아마포로 수놓아 짠 휘장의 길이가 20큐빗, 기둥이 넷,

놋 받침이 넷이었습니다.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세마포 현수막의 높이는 5큐빗입니다.

그리고 이 안 마당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말뚝과 뜰의

현수막 말뚝은 다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안 마당은

이스라엘인의 마당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이 마당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외에는 절대로 출입하지

못하였으며, 또 제물을 가지고 들어와 제사드릴 자도

이스라엘 백성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안 뜰로 들어서면

문을 통과해서 놋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다음에 접하는 것이

물두멍이고, 성소의 휘장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문은 우리 주 양의 문 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놋 제단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죄 헌물이 되신 구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드러내며, 물은 말씀의 물로 씻음 받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거듭나고 중생의 씻음을 입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휘장을 통과하면 주님을 섬기는 섬김의

장소가 펼쳐집니다. 제사장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는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길을

열어 놓으실 때까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성막의 뜰에 아무런 포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솔로몬의 성전과는 매우 다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안팎으로 금으로 입혔습니다. [그 집의 마루를 안팎으로

금으로 입혔더라](왕상:6:10). 하지만 성막은 자연

그대로입니다. 이는 초림의 주님과 재림의 주님의 차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모습과 동일하게

오셨습니다. 재림의 주님은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재림의 영광을 예표하는 성전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온 땅이 주의

영광으로 충만할 것인즉](민14:21). 광야의 성막은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성막의 뜰이 자연 그대로의

땅인 것은 주님께서 땅에서 올라오신 뿌리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임이라.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53:2). 성막을 포장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막의 뜰은 성소나 지성소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곳으로 불립니다. [6그는 또 자기의

범법 헌물을 주께 가져올지니 곧 그는 네가 정한 값대로

양떼에서 흠 없는 숫양을 범법 헌물로 취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올 것이요, 16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요, 회중의 성막

뜰에서 그들이 먹을지니라](레6:6,16). 여기서 거룩한 곳은

회중의 성막 뜰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포장도 되어 있지 않는 광야의 모래 위의 뜰을 거룩한

곳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막의 뜰은 택함받은

사람들, 구속받은 사람들을 위한 곳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주께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거룩한 전(殿)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성막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죄사함을 받는 의식이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주의 뜰에 거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그분의 문들에 들어가며 찬양함으로 그분의

뜰에 들어가서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송할지어다](시100:4). 더욱 놀라운 일은 이방인들에게도

이 복이 허락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집 사람이나 너희 가운데 거하는 타국인

중에 누구든지 번제 헌물이나 희생물을 드리되](레17:8).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 헌물을

받으시며, 주의 뜰에 나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는 구약

속에 들어 있는 신약입니다. 구약의 복음입니다.

9절입니다.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곧 남쪽을 향한 남쪽 면에는 가늘게 꼰 아마 /실/로

한 면의 길이가 백 큐빗 되는 현수막들을 뜰에 달기 위해

만들고](9). 성막의 둘레는 아마 실로 짠 현수막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은 길이와 너비가 같습니다.

2:1 비율의 직사각형 모양에서 긴 부분입니다. 흰 아마포(개역-세마포)는

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계19:8). 성막 둘레로는 12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친 장막은

염소 털로 된 검은 색이었습니다. 그 한 중앙에 주님의

성막이 있습니다. 검은 색과 흰색의 선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어도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들과도 같고 솔로몬의 휘장들과도

같으니라](아1:5). 검은 장막 속에 거하지만 이들은 모두

주님의 택함받은 백성들입니다. 이들이 주님의 성막을 볼 때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졌을지는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진영 한 중앙에 있는 흰 세마포가 둘러싸인 성막의 벽만

보아도 황홀할 지경이었습니다. [오 만군의 [주]여, 주의

장막들이 어찌 그리 사랑스런지요! 내 혼이 [주]의 뜰을

사모하여 참으로 쇠약하게 되었사오니 나의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오 만군의 [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참으로 참새도 집을 찾았고 제비도 제

새끼를 둘 보금자리를 스스로 찾았사오니 곧 주의

제단들이니이다.](시84:1~3).

가늘게 꼰 아마 실은

아마포, 또는 세마포라고 하는데 성막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듯이 성막 사방으로 벽을 두르고

있는 세마포 역시 그러합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벧전2:22-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실

동안 전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의로운데 반해서 인간은 어떻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란 말씀대로입니다. 성경경이

말씀 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나 옷을 입었고, 신발을 신었습니다. 광야 생활 동안에

그들은 옷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는 기적의

연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옷과 신발은

더러웠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이들은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성막에 올 때 하얀 아마포로 사방을 두른

벽을 보았을 때,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이 더럽고 추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사64:6).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더러움을

잘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아오면 우리는

자신의 더러운 죄성을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 섰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이요, 죄 덩어리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누구신지 알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눅5:8). -I am a sinful man. 그는

평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 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접하게 되자 자신의 죄성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에

내가 이르기를,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망하게 되었음이니 곧 내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면서 내 눈으로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음이라, 하였더라.] (사6:5).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을

본 후에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망하게 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욥은 주님을 만난 후에 천하에

자신보다 의로운 사람은 없다고 주장하다가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보고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서 이런 자아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기꺼이 내어 놓으며,

장사 지내 버리지만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십자가의 언저리에 머무는 신앙 생활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 박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었는데 나는

살아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묻혔는데,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면 주님이 부활할 때 함께

일으킴을 받지 못한 것이요,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힌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나의 부활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 뜰의

기둥 스무 개와 기둥 밑받침 스무 개는 놋으로 만들고 그

기둥들의 갈고리들과 띠들은 은으로 만들 것이며](10).

성막을 둘러싼 담장은 시멘트, 철근, 목판이나 벽돌이

아니라 아마포로 된 현수막입니다. 마치 우리의 몸을 감싸고

있는 육신은 얇은 피부인 것 같이 성막의 외부 둘레는

천이었습니다. 100(남), 50(서), 100(북), 50(동)큐빗으로 성막

사방을 두르자면 5큐빗마다 기둥을 박아야 합니다. 남쪽과

북쪽은 20개씩 박았고, 서쪽은 길이가 50큐빗이므로 10개를

박았습니다. 동쪽 가운데는 문이 있습니다. 문 좌우로 각각

15큐빗의 현수막을 치고 기둥 세 개를 박고, 문은 기둥 네

개를 세운 뒤에 20 큐빗의 현수막을 쳐서 바깥 담을

형성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막의 뜰을 두르는 현수막의 총

길이는 300 큐빗이 되고, 매 5큐빗마다 기둥이 있음으로 전부

60개의 기둥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성막에 사용된 각 기둥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지성소에 세워진 4개의 기둥은 싯팀 나무에 금을 입혔고,

밑받침은 은입니다(출26:32). 성소에 세운 5개의 기둥은 싯팀

나문에 금으로 입힌 다음 밑받침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출26:37).

반면 뜰 둘레의 60개의 모든 기둥은 은으로 띠를 두르고

밑받침들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60개의 기둥이 성막의

둘레에 견고하게 세워진 것은 죄인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거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기둥은 주의

견고한 망대와 같습니다. [주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로운 자는 거기로 달려가 안전을 얻느니라.](잠18:10).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약속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보라, 앞으로 한 왕이 의로 통치하며

통치자들이 공의로 다스릴 터이니 한 사람이 바람을 피해

숨는 곳 같이 되고 폭우를 피하는 은밀한 곳 같이 되며 마른

땅의 강물 같이, 지친 땅의 큰 바위 그늘 같이 되리라.](사32:2).

60개의 기둥은 5×12입니다. 60은 정부의 통치를 나타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뜰

둘레의 모든 기둥은 은으로 띠를 두르고 그 갈고리들은

은으로, 그 밑받침들은 놋으로 만들지니라.](출27:17).

그런데 주님은 무슨 나무로 기둥을 만들어서 은으로 띠를

두르라는 명령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지성소와

성소에 쓰인 것과 마찬가지로 싯팀 나무였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는 있지만 주님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 사용된 기둥은 우리 인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가에 대해 전혀 말씀하지 않으시며, 언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주님의 집을 이루는

건축 재료가 됩니다. [그분 안에서 모든 건물이 서로 꼭

맞게 뼈대를 이루어 {주} 안에서 거룩한 전(殿)으로 자라가고](엡2:21).

뜰 둘레의 모든 기둥은

은으로 띠를 둘렀는데, 은은 구속의 몸값을 나타냅니다.

요셉은 은 20개에 몸이 팔렸고, 주님은 은 30개에 몸이

팔리셨습니다. 은 반 세겔은 성전 세금으로 바치는 자기

몸값이었습니다.

11절입니다. [그 북쪽

면에도 마찬가지로 길이 방향으로 길이가 백 큐빗 되는

현수막을 치되 그 기둥 스무 개와 그 밑받침 스무 개는

놋으로 만들고 그 기둥들의 갈고리들과 띠들은 은으로

만들지니라.](11). 북쪽 면은 남쪽 면과 똑 같이 만들면

됩니다. 여기서는 놋 받침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성막 뜰에

박힌 60개의 기둥은 반드시 놋 받침 위에 세워야 합니다.

놋은 이미 놋 제단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죄와 저주가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둥이 사람을

예표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2:7). 대부분의 사람들은 밑받침이 엉뚱한 곳에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세움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높고, 화려하게 세워졌다 해도

금방 무너져 버립니다. 집은 견고한 반석 위에 지어야 하는

것처럼 뜰의 모든 기둥은 반드시 놋 받침 위에다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라는

무섭고도 이상한 단어가 제일 바탕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 즉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자기가 배운 학문이나 철학이나

지식의 기반 위에 있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을 체험이나 감정 위에 세운 사람 역시 잘못된 곳에

기둥을 세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을 자기의

행위에다 세워서 행위가 좋을 때는 믿음이 견고하게 서

있지만, 행위가 나빠질 때는 믿음도 흔들리면서 나빠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우리의 죄로 인해 피를 흘리시고, 죽음을 맛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그 어떤 것도 밑받침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세우십니다.

넘어진 기둥은 기둥이 아닙니다. 기둥은 똑바로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의

서거나 넘어짐이 자기 주인에게 달려 있은즉 참으로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능히 서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롬14:4). 우리가 구원받은 형제라 해도

여전히 범죄할 수 있으며, 넘어질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 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놋 받침 위에 서

있으면 우리의 죄는 모두 사해지고, 모든 허물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우리 생명의

뿌리이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정결하게 해 줍니다. 놋 받침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거나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받으신

주님 위에 서 있을 때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둥이 흔들려서는 건물이 유지될 수 없듯이 우리가

흔들리면 지역 교회는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간교한 술수로 속이고자 하는 자들의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엡4:14).

속임수, 간교한 술수, 온갖 교리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더욱 갈보리 십자가에 깊이 뿌리내리는 성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 부활의 사실을 흔드는

바람이 교회에 불어 닥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고전15:58).

● 박해의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아무도 이런 박해로 인해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런 박해를 받도록 세우심을 받은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아느니라.](살전3:3).

● 재림의 교리의 바람은

광풍처럼 몰아닥칩니다. [너희는 영으로나 혹은 말로나

혹은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서신으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살후2:2).

● 기도의 응답에 대한

불신으로 흔들립니다. 불신과 두 마음은 밖에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이 아니라 속에서 이는 바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말라. 이는 흔들리는 자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기 때문이니](약1:6).

● 자의적 성경 해석으로

인해 흔들립니다. [또 그의 모든 서신에서도 이것들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배우지 못하여 흔들리는 자들이 다른 성경 기록들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라.](벧후3:16).

우리는 더 이상 이런

것들에 흔들리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셨고,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기의

의지나 결심, 선한 행위에 서 있다면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겠지만, 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보혈에 세워져 있다면 결코

흔들릴 수 없습니다.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그

북쪽 면에도 마찬가지로 길이 방향으로 길이가 백 큐빗 되는

현수막을 치되 그 기둥 스무 개와 그 밑받침 스무 개는

놋으로 만들고 그 기둥들의 갈고리들과 띠들은 은으로

만들지니라.](11). 밑받침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갈고리들과 띠들이 있어야 합니다. 기둥과 기둥을 서로

붙들어 주고 연결해 주는 갈고리와 띠는 은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우리는 복음 위에 견고하게 세워져야 하고, 동시에

같은 형제들끼리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화평의 메는 띠로 견고하게 이어져 있어야 합니다.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엡4:3). 분리와

분열은 안 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덧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니라.](골3:14). 성막에 나타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또 다른 면으로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기둥이 튼튼하게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기둥과 기둥사이를 갈고리들과 띠가 연결시켜

주어서 기둥들이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데 모두 은으로

되어 있습니다.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고, ‘나무’

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놋’은 심판을 의미하는데, ‘은’

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상징하는 금속입니다.

모든 성도는 구속의 은혜로 인해 견고하게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체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각각 몸 안에

두셨느니라.](고전12:18). 이는 단순히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로서의 빈틈없는 이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들이 오히려 더

필요하고 또한 우리가 덜 귀한 것으로 여기는 몸의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나니 이는 우리의 아름다운 부분들은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 오직 하나님께서 몸을 다 같이

고르게 하사 부족한 부분에게 더욱 귀한 것을 주심은 몸

안에 분쟁이 없게 하고 오직 지체들이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게 하고자 하심이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느니라.] (고전12:22~26). 하나님은 모든

성도를 지체로 보시며, 우리는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몸 안에는 분쟁이 없는데,

만약 분쟁이 있다면 그것을 악성 종양(암)이라고 합니다.

영양이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고, 공급되지 않을 때 신체는

불치병에 걸리게 되고, 결국은 죽게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의 지체임을 기억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12-13절입니다. [서쪽

면으로 뜰의 너비에는 오십 큐빗의 현수막을 치되 그 기둥이

열 개요, 그 밑받침이 열 개며 동쪽 면으로 뜰의 너비는 오십

큐빗이 되게 할지니라.](12-13). 성막의 너비가 2:1의

비율이었기 때문에 남쪽과 북쪽이 100큐빗이라면 동쪽과

서쪽은 50큐빗이 됩니다. 5큐빗마다 기둥을 세우고, 기둥마다

밑받침을 두었습니다. 문제는 동쪽입니다. 동쪽은 길이는

서쪽과 같지만 한 중앙에 문이 있습니다. 성막에 있는

유일한 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동문을 통해서만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50큐빗의 한 중앙에 20큐빗의

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좌우에 정확하게 십오 큐빗씩

남게 되는데 거기에 현수막을 치고, 매 오 큐빗마다 기둥을

박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문

이편의 현수막이 십오 큐빗이며 그 기둥이 세 개요, 그

밑받침이 세 개며 저편에도 현수막이 십오 큐빗이며 그

기둥이 세 개요, 그 밑받침이 세 개니라.](14-15). 이미 문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했기 때문에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문 좌우 옆면에 현수막을 치는 것은 동일합니다.

16절입니다. [뜰 문에는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바느질을 해서 만든 이십 큐빗의 현수막이 있을지니 그

기둥이 네 개요, 그 밑받침이 네 개며](16). 뜰 문은 매우

넓습니다. 사방이 흰색 아마포로 된 현수막 둘레이지만

동편의 한 중앙에 있는 너비 20 큐빗(약10m)의 이 문은 높이가

2.5m인데, 4가지 실로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청색,

자주색, 주홍색, 흰색으로 만들어진 현수막이며, 역시

오큐빗 마다 기둥이 박혀 있습니다. 청색은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자주색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심을, 가는 베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종이심을 나타낸다면, 주홍색은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신 메시야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사복음서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9). 주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아버지께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이 없습니다. 종교 다원주의, 종교

간에 화해와 일치는 모두 사탄의 작품이며, 속임수입니다.

기독교를 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 버리고, 타종교와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것입니다. 구원은 종교가

아니며, 의식이 아닙니다. 구원은 생명입니다. 구원은

능력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오라고 초청하십니다(마12: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인도에서 어떤 전도자가

복음을 전했는데 힌두교도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인도에는 수 만 종류의

신들이 있지만 인간을 위해서 땀 한방울, 피 한 방울 흘린

신이 없는데, 당신이 말한 신은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하니

어찌 안 믿을 수가 있겠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17-19절은 이미 앞에서 다룬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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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마가복음11장/2부/헤롯 #성전 #구조/이방인의 #뜰/성전 #청결 #사건/산헤드린의 #위치/찾아가는 #성경/유병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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