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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이광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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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에세이 5]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부띠크 대표 ④
아프리카의 척박한 땅 남수단 톤즈에서 어머니와 닮은 봉사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대표. 영상과 패션 결합한 새로운 예술장르 …
Source: www.sbiztoday.kr
Date Published: 2/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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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수놓았던 이광희의 과거와 현재 – 노블레스닷컴
앙드레김과 함께 한국의 하이엔드 패션을 선도하던 이광희 디자이너가 한창 활동하던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은 선 자리나 상견례, 약혼식 그리고 …
Source: www.noblesse.com
Date Published: 2/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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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 디자이너·홍성태 교수 부부의 아프리카 지원 사업
전·현직 영부인과 재벌가 안주인, 여성 최고경영자 등 국내 상위 1%의 옷을 만드는 ‘톱 디자이너’ 이광희씨는 직함이 하나 더 있다. 외교통상부 산하 사단 …
Source: futurechosun.com
Date Published: 2/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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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광희 – 신동아
소녀의 이미지를 간직한 단아한 패션 디자이너 이광희(李光熙·55)씨. 상류층이 가장 선호하는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그이지만, ‘찾아가는 패션쇼’ …
Source: shindonga.donga.com
Date Published: 8/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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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한국 0.1%’ 위한 디자이너 이광희, 대중 브랜드 내놓는다
이광희.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그다. 한국 사회의 0.1%도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옷을 만들던 그가 대중을 위한 저렴한 브랜드 …
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2/12/2022
View: 8982
이광희 디자이너 “대단하다, 바늘로 바위를 뚫었구나!” > SPECIAL
‘희망고(희망의 망고나무)’는 이광희 디자이너가 남수단 톤즈 주민들을 돕기 위해 만든 비영리법인. 남수단은 오랫동안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Source: fpost.co.kr
Date Published: 4/24/2022
View: 5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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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광희 디자이너
- Author: 새롭게하소서C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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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2. 5. 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1mLjry6iR04
[인물 에세이 5]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부띠크 대표 ④
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어머니는 내 인생 최고의 디자이너’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아프리카의 척박한 땅 남수단 톤즈에서 어머니와 닮은 봉사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대표.
영상과 패션 결합한 새로운 예술장르 개척
이 대표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늘 등대원 식구들과 어울리며 놀았다. 당시 등대원 식구만도 200여 명이 넘었다.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오히려 자신보다 고아들을 먼저 챙긴 어머니였지만 단 한 번도 불만을 제기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마저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로 전학을 가면서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힘들거나 외로울 땐 어머니가 더욱 그리웠다는 이 대표의 회고다.
함석헌 선생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름에 들어간 ‘잠잠할 묵(默)이 좋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이 대표는 혼자 지내면서 침묵의 의미를 깨달았고, 그래서 언어에 대한 절제가 습관이 됐다. 그는 이화여대 비서학과를 졸업하고 뭘 할까 고민하다 패션 분야에 눈을 돌리고 국제복장학원을 다니면서 이론과 실기를 연마했다. 1979년 하얏트호텔 지하에 의상실을 열면서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선 이광희 대표. 그의 패션 감각은 타의 추종을 허락지 않았다. 의상실 문을 연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패션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30대 중반에 이미 상류층 여성들이 찾기 시작했고, 대기업 오너 부인들은 물론 퍼스트레이디들까지 찾아 들었다.
이 과정에서 앙드레김과 함께 ‘오트 쿠튀르’를 상징하는 최고의 디자이너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984년 당시 드라마 ‘사랑과 진실’에서 배우 원미경이 이 대표가 만든 옷을 입고 출연하면서 ‘이광희’ 열풍이 불었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났다. 어머니가 등대원 식구들에게 손수 만든 옷을 입힌 DNA에다 자신만의 치열한 고민과 열정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아닐까. 이 대표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패션을 예술로 승화시키겠다는 새로운 시도에 들어간다.
1986년 ‘이광희 룩스’라는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대규모 패션쇼를 연데 이어 88서울올림픽 기념 초청 패션쇼에선 ‘살아 움직이는 전시회’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의 파격을 넘어선 시도는 센세이션으로 돌아왔다. 당시 가로 15m, 세로 9m에 달하는 무대 위 대형 배경막(백드롭)에 재불 화가 이항성 화백의 순수 회화작품 40여 점을 올린 뒤 국내 최정상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패션쇼로 진행, 패션계에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줬다. 93대전엑스포 공식초청 패션쇼 및 F/W 정기 콜렉션 ‘사랑의 한빛’, 우제길 화백의 ‘빛’시리즈 작품과 패션의 만남을 진행하면서 당시 ‘패션이 예술이냐’는 비판을 뒤집었다. 이런 창작활동을 인정받아 1994년 아시아패션진흥협회가 정한 ‘올해의 아시아 디자이너상’ 국내 첫 수상자로 선정됐고 2000년엔 산업포장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미 30년 전 패션을 다른 문화예술 장르와 콜라보로 시도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바 있지만 이 대표는 여기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2000년대 들어와서는 패션을 디지털기술과 결합하는 콜라보를 시도하는 등 그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드디어 2009년 서울 그랜드 하얏트에서 개최한 희망의 망고나무 심기를 위한 ‘패션과 디지털의 만남; 이광희 패션쇼’는 그야말로 새로운 예술장르를 선보인 특별한 무대로 패션예술계에 오랫동안 각인된 행사로 기록되고 있다.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2010년에는 디지털 영상에서 한 단계 진일보한 4D기술과 홀로그램을 이용한 희망의 망고나무 자선콘서트 ‘Journey To The African Moon’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어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대표는 연예계 인맥 또한 두텁기로 유명하다. 사진은 탤런트 김수미씨와 함께 한 모습.
선한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이 대표는 2009년 평소 친하게 지내던 탤런트 김혜자씨를 따라 남수단 아랍주 톤즈를 갔다. 하지만 남수단은 30년 넘게 내전을 치르는 동안 생명의 온기는커녕 풀 한 포기조차 구경하기 힘든 절망의 땅이었다. 그래서 계란 하나 사기도 어려웠다.
이 대표는 “어렵사리 계란을 구해 그릇에다 쳤더니 계란이 힘없이 주르륵 쏟아졌다”며 “암탉이 뜨거운 날씨에다 영양까지 부실해 노른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톤즈의 모든 생명체는 고통 그 자체였다. 이 대표는 강물을 마시고 콜레라로 800명이 죽었다는 톤즈의 어느 강가에서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났다. 그 소년에게 이 대표는 “그 물고기 나 줄래”라고 물었더니 불쑥 물고기를 건네는 게 아닌가. 물고기 한 마리면 한 끼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을 텐데…
이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순박한 그 소년을 와락 끌어안았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사막의 땅이지만 톤즈는 왠지 살가웠다. 한국전쟁 후 자신이 고아들과 어울렸던 땅끝마을 해남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선한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돌아가신지 6년이 지난 어머니가 왜 갑자기 톤즈에서…” 이 대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때 망고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망고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한 가정을 살린다는 말을 들었다. 망고나무는 묘목을 심은 후 5~7년이면 수확이 가능하고 무려 100년 동안 열매를 맺는다. 망고나무를 가진 사람들은 망고를 따 시장에 내다 팔아 학교를 다니고 염소나 소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망고 묘목 한 그루는 우리 돈으로 약 2만~3만원. 그는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털어 100그루의 묘목을 사서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며칠 동안 톤즈의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렸고 어머니의 말씀도 더욱 생생하게 들려왔다.
2011년 국제 NGO단체인 (사)희망의망고나무를 만들어 망고나무 심기 운동은 물론 ‘희망고 빌리지’를 설립해 톤즈 사람들의 자립을 돕고 있는 배경이다. 톤즈까지는 비행기만도 네 번을 갈아타야 하는 고된 행군이다. <계속>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부띠크 대표’ 주요 이력 <학력 및 경력>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 ▲헬싱키경제경영대학원 KEMBA 수료 ▲이화여대 비서학과 졸업 ▲희망의 망고나무 자선콘서트 ‘Journey To African Moon’ ▲희망의망고나무 심기 ‘패션과 디지털의 만남: 이광희 패션쇼’ ▲창립 20주년 컬렉션 ‘20 in 2000’ ▲대전엑스포 `93 문화행사 공식 초청 패션쇼 ’사랑의 한빛‘ ▲88서울올림픽 기념 패션쇼 ‘패션유토피아’ <수상> ▲‘올해의 이화인’ 수상(2004)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 부문 ‘산업포장 대통령상’(2000) ▲삼우당 섬유진흥대상 ‘디자인개발부문’ 수상(2000) ▲산업통상자원부 신지식인상(1999) ▲이달의 중소기업인상(1999) ▲아시아패션진흥협회 제정 올해의 아시아 디자이너상(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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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수놓았던 이광희의 과거와 현재
앙드레김과 함께 한국의 하이엔드 패션을 선도하던 이광희 디자이너가 한창 활동하던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은 선 자리나 상견례, 약혼식 그리고 결혼식에서 이광희의 옷을 입지 않으면 소위 주류에 끼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녀가 지은 옷을 한 번이라도 입어봤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수준’이 갈렸고, 나아가 예복의 대명사로 자리 잡으며 “선 자리에 이광희의 옷을 입고 나가면 혼사가 잘 이루어진다”는 말까지 돌았다.
영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3김 시대를 연 정치인 아내, 영부인 김윤옥 여사 그리고 국내 굴지의 기업가 안주인까지 이광희 옷을 찾으며 ‘이광희’라는 브랜드는 상류층의 복장을 대신하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의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87년 인기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원미경이 그녀의 옷을 입고 등장하면서부터다. 당시 셀럽과 시청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사회 유력 인사의 아내까지 그 인기 대열에 합세하며 이광희는 자연스럽게 톱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의 나이 고작 30대 중반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비서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졸업 후 국제복장학원에서 본격적으로 패션을 배운 후 1979년 하얏트호텔 지하에 의상실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데뷔한 것이 스물여덟 살 때니 누가 봐도 빠른 성공이었다. ‘당신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드립니다’라는 모토로 시작해 한국 대표 디자이너로 88 서울 올림픽과 93 대전엑스포에서 기념 패션쇼까지 담당해 성대하게 치른 것 또한 마흔 즈음이니 이 정도면 천운의 주인공이 따로 없을 정도. 2000년에는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과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의 파라디아 명품관에 진출하며 국내 명품 브랜드의 인지도를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디자이너로서 삶은 생각만큼 즐겁지 않았다. “패션 디자이너로 살면서 이 일을 내가 왜 하는지 회의가 들 때가 많았어요. ‘상류층이 찾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도 조용한 제 성향과 맞지 않았죠.” 퍼스트레이디와 여성 국회의원, 여성 CEO들이 단골이고, 상류층의 예복과 재벌가의 웨딩드레스를 도맡으면서도 그녀는 사적인 자리나 네트워크를 갖지 않았다. 먼저 전화하는 법도, 친한 척하는 법도 없었다. “일반적 기준으로 보면 제가 시대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제가 사는 방법과 맞지 않았어요. 저는 당시에도 사적인 네트워크보다 그들이 원하는 옷을 잘 만들어내자, 옷으로 승부하자는 생각뿐이었거든요. 실력에 정성을 더하다 보니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매일 고객을 응대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했지만, 브랜드 대표로서 사업가적 기질과 영업, 판매 능력이 요구되는 것도 힘든 부분 중 하나였다. 남들은 그녀를 잘나가는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매일 ‘오늘 그만둘까 내일 그만둘까’를 고민하며 살았다고.
일을 그만둔다면 그녀는 해남으로 내려가 부모님의 일을 돕고 싶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197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으로 교단을 이끌고 7년간 한신대 초대 이사장을 지낸 故 이준묵 목사이며, 어머니는 광주제중병원(현 기독병원) 간호훈련소 출신의 우리나라 1세대 간호사 故 김수덕 여사다. 부모님은 결혼 후 중국 선교 사업, 병원 봉사 등을 통해 약자들을 돌보는 데 힘쓰다 1945년 땅끝마을 해남으로 내려가 해남읍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부모님의 관심은 지역사회를 비롯해 늘 주변 약자들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고아들이 거리 곳곳에 넘쳐나자 해남등대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마을 주변의 한센인을 비롯한 병자들과 거리의 거지 등 사회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음지를 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챙겼다. 부모님에게 어린 이광희와 형제자매는 늘 고아 다음이었다.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랐기에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구호하는 것은 이광희에게 ‘대단한 일’이 아닌 일상으로 다가왔다. 전남여중 2학년 때 전남 지역 학생 중 한 명만 뽑는 선행상 수상자로 선정될 때도 시상식에 가지 않았다. 남을 돕기는 했지만 마음이 내켜서 했을 뿐, 상을 받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광희 디자이너가 남수단 톤즈 지역에 심어준 망고나무 묘목. 지금은 수만 그루에 이른다. ©희망고
그런 성향의 이광희가 ‘상류층’의 취향을 넘어 큰 올림픽과 엑스포 기념 패션쇼를 치르며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얻고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도 얼마나 내적 갈등이 많았을지 쉬이 짐작된다. “돌이켜보니 35~36세 즈음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한 셈이었어요. 당시 많은 기자가 ‘성공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는데, 끝까지 답하지 못했어요. 그게 진짜 성공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 질문에 내가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없다. 예순 살이 되면 그때 대답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일흔이 된 지금도 성공의 진짜 의미를 잘 모르겠네요.”
대신 이광희는 그런 질문 끝에 늘 ‘인내’라는 단어로 마무리한다. “성공보다 인내에 관한 이야기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있나요. 일의 방향을 잘 설정한 후 누가 그것을 참고 끝까지 하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내 브랜드, 내 옷의 방향을 정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키포인트 같아요.”
그녀를 평생 지탱해온 ‘인내’라는 단어는 어머니에게 배웠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회의가 들어 해남으로 내려갈까 고민할 때도 어머니 김수덕 여사는 “오늘도 참아봤느냐?”라고 물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기신 일이 있다. 해남등대원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일이고, 너의 일은 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일을 잘 해나가는 것이다.” 그녀는 그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고백한다. “디자이너로서 내 일에 충실한 것, 그리고 이것으로 돈을 벌어 부모님이 하는 일을 돕는 것이 내 몫이겠구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일에 자신감이 생겼고, 더 잘하려고 애썼죠.”
주변과 협력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도모하는 자세도 부모님에게 배웠다. 그중 하나가 패션 디자이너의 삶을 살며 꾸준히 해온 예술 장르와의 협업과 자선 패션쇼다. 요즘은 패션과 아트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이광희 디자이너가 성공 가도를 달리던 1980년대에는 대중의 인식 면에서 패션과 아트의 격차가 컸다. 하이엔드 패션과 명품이 사치로 분류되던 시절에 이광희 디자이너는 패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없애고, 그것이 우리 생활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임을 알려 패션의 격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당시 기자들은 우리 숍에 드나드는 손님이 누구인지 궁금해했어요. ‘그 사모님은 평소 어떠세요?’라고 묻는 기자도 있었죠. 고급 패션을 소비하는 손님을 사치나 과소비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다분했죠. 패션의 위치를 재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패션 또한 어느 예술 분야 못지않게 국가의 격을 보여주는 요소가 될 수 있으니까요.”
위쪽 2019년 톤즈 한센인 마을에 지어준 교회.
아래쪽 희망고 13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브로셔.
그 시작은 1986년 ‘이광희 룩스’라는 브랜드를 런칭하며 진행한 대규모 패션쇼에서였다. 이광희는 윤형주 씨에게 패션쇼 총감독을, 김중만 작가에게는 사진 작품을 부탁했다. 의상에 맞는 무대 장식부터 테이블 세팅까지 디테일하게 신경 쓰며 패션쇼를 종합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호암아트홀과 당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88 올림픽 기념 초청 패션쇼에서는 무대 위 대형 배경막에 이항성 화백의 회화 작품 40여 점을 함께 올려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 라이브 음악을 배경으로 쇼를 진행했고, 93 대전엑스포에서는 우제길 화백의 작품 주제 ‘빛과 그림’을 의상과 무대장치에 도입하며 한국 작가들을 전 세계에 알렸다. 2006년에는 김점선 작가와 협업해 <뮤제 드 이광희> 전시와 패션쇼를, 2009년에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 미디어 퍼포먼스 ‘봄의 제전III’에 참여해 새로운 스타일의 패션쇼를 선보였다. 2년 전 코엑스 대형 전광판에 ‘웨이브’ 작품으로 이슈를 모은 한 미디어 아트 그룹 ‘디스트릭트’와도 11년 전이던 2011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함께 쇼를 선보일 정도이니 국내에서 패션과 아트 협업의 트렌드를 이끈 선구자라 일컬어도 손색없을 정도다. “제 쇼를 찾는 사람들은 정재계 인사를 비롯해 오피니언 리더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분들께 패션과 예술이 만나면 하나의 종합 예술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녀는 많은 자선 패션쇼를 진행하며 무의탁 노인, 신장병 어린이 돕기 등 소외된 이웃을 도우며 나눔을 실천했다. “어차피 제 패션쇼에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분들이 모이니 그 기회를 활용해 도네이션 행사를 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행사를 하나씩 치를 때마다 신경 쓸 일은 더 많아지지만, 많은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데 동참할 수 있다면 감내할 가치가 있는 고생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프리카 톤즈의 주민을 돕는 NGO ‘희망고(희망의 망고나무)’도 쉽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계속되는 내전과 홍수로 국가 기근을 선포한 남수단의 톤즈 마을을 처음 찾은 것은 2009년 3월 월드비전 홍보대사인 김혜자 씨를 따라 봉사 활동을 나서면서부터다. 처음 해외 구호 활동을 나선 그녀가 마주한 것은 톤즈 강물을 마신 주민 800여 명이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 그곳에 탐스럽게 자란 망고나무였다. 망고나무 열매는 현지인의 유일한 먹거리였다. 나무 한 그루가 슈퍼마켓 하나와 비슷한 재산 가치를 지니는 그곳에서 망고나무는 희망의 나무, 생명의 나무였다.
“망고 하나에 온 가족이 붙어 나눠 먹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 그 자리에서 망고나무 100그루를 심어주고 왔어요. 망고나무는 한번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100년 동안 열린다고 해요. 한국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전하니 많은 분이 동참해주셨어요.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1만5000그루를 심었죠.” 세 번째 방문 이후 남수단 정부는 1만 평의 대지를 무상으로 대여해주었고, 그녀는 2011년 남수단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로 국제 NGO 인가 남수단 남톤즈 카운티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사단법인 희망고 대표로 정식 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열다섯 번 이상 톤즈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10년 전 100그루로 시작한 희망고의 망고나무는 현재 4만 그루가 됐다. 3만 원을 투자하면 100년을 먹고살 수 있는 망고나무 한 그루를 심어줄 수 있는 희망고에 대부분 좋은 마음으로 동참했지만, 인색하게도 “나무가 죽으면 어떡할 거냐?”라고 되묻는 사람부터 사사로운 시비를 거는 이가 많았다. “혹시라도 나무가 죽으면 다시 한 그루 심어주면 안 되나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함께 하자고 설득하는 과정이 이렇게 어려운지 미처 몰랐어요.” 묘목이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는 대략 6~7년 걸린다. 열매가 처음 열리기 전까지는 그녀 또한 불안한 마음이 클 수밖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를 보면 마을도 순식간에 없어지는 판이니, 톤즈의 기후나 자연재해 걱정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거의 불면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희망고를 설립한 후 지금껏 톤즈 지역의 주민들의 자립자족을 위해 힘쓰는 이광희 디자이너는 톤즈에서 ‘마마 리’라고 불린다. ©희망고
2011년에는 증여받은 1만 평 대지에 톤즈 주민의 교육과 자립을 위해 복합교육문화센터인 ‘희망고 빌리지’를 준공해 남성에겐 목공 기술을, 여성에겐 재봉 기술을 가르쳤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을 위해서는 희망고 유치원을 설립해 교육시켰다. 10년이 지난 지금, 유치원은 초등학교 5학년 교실까지 있는 교육기관이 되었다.
2019년에는 후원금에 자비를 보태 톤즈 한센인 마을에 평일엔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환자를 위한 진료 센터로, 일요일엔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복합교육문화센터를 설립했다. “지금도 한센인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나요. 남수단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고, 그중에서도 상황이 심각한 톤즈에서 재차 버림받은 사람들이 바로 한센인이에요. 한센인과 그들의 가족이 모여 사는 100여 가구의 관자마을 아이들은 대부분 건강하거든요. 멋진 건물을 지어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2019년은 1979년 하얏트 호텔에 의상실을 낸 지 햇수로 40년이 되던 해였다. 희망고 활동 또한 10년이 되던 해. 패션 디자이너로서도, 희망고 대표로서도 한 번은 뒤돌아봐야 할 때였다. “톤즈는 최빈국인 데다 위험 지역으로 분류된 터라 한국인 직원을 현지에 두고 마음껏 일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어요. 사단법인 설립 이후 10년 가까이 현지인과 일하다 보니 1년 정도 톤즈에 머물며 마을과 학교 운영 등을 살피고 건물 보수도 진행하고 싶었죠.” 일흔이 되기 전 1년간 안식년을 정해 삶을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톤즈에 다녀오면 본업인 패션에 대한 영감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9년부터 안식년을 준비해 2020년 3월 톤즈로 떠나려는데, 갑자기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톤즈로 가는 길이 막혔지만, 제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재정비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어요. 그때 마침 그동안 모아둔 메모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30대부터 지금까지 생각날 때마다 적어둔 메모인데, 안식년 동안 그걸 정리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모를 글쓰기로 발전시키는 데 꼬박 1년이 걸렸고, 드디어 지난해 말 <아마도 사랑은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어머니 김수덕 여사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 형식의 글이 가득한 이 책은 가만히 읽다 보면 단순히 편지가 아닌 매일의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하소연과 투정, 그 와중에 스스로 발견하는 지혜와 깨달음으로 점철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그녀의 겉모습을 보고 화려한 삶을 살았을 거라 짐작하지만, 인생은 그리 녹록지 않다. 그녀는 70평생 동안 겪은 경험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고, 특히 30~40대가 이 책을 읽었으면 싶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 계발서를 보면 죄다 ‘행복’을 이야기해요. 행복이 지상 목표고,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장하죠. 그런데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녀는 삶의 본질이 ‘생로병사’에 있다고 본다. 생로병사에는 행복이나 기쁨보다는 많은 부분 고통을 수반한다. 고통의 연속인 생로병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내느냐에 따라 행복도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이 되려면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해 긍정적 사고로 임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발전적인 자기 계발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반복될 때 행복이 찾아온다고, 이광희 디자이너는 믿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상적인 글이 나온다. 어느 날 이광희 디자이너가 90세 어머니에게 묻는다. “엄마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사세요?” 노쇠한 어머니는 대답한다. “’너는 지금 어느 선(線)에 서 있느냐?’ 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 그렇다면 이광희 디자이너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시간을 쓰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지금까지 원 없이 옷을 만들었고, 패션쇼도 많이 해봤고, 일찌감치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하고 싶은 건 다 해봤거든요. 지금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책임과 사명을 다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요.”
에디터 김이신([email protected])
사진 안지섭(인물)
이광희 디자이너·홍성태 교수 부부의 아프리카 지원 사업
망고나무 3만 그루에 이어 ‘희망고 빌리지’… 부모 자립에 초점
망고나무 한그루 15달러 100년 동안 열매 맺어 장기적 도움 줄 수 있어
직업교육·문화센터·마트 등 복합 공간 ‘희망고 빌리지’
‘자선’ ‘봉사’ 아닌 ‘축제’로 자녀에게도 나눔교육 될 것
전·현직 영부인과 재벌가 안주인, 여성 최고경영자 등 국내 상위 1%의 옷을 만드는 ‘톱 디자이너’ 이광희씨는 직함이 하나 더 있다. 외교통상부 산하 사단법인 ‘희망고(HIMANGO)’ 대표다. 2009년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를 처음 방문한 이후, 이씨의 삶은 달라졌다. 수중의 돈을 털어 망고나무 100그루를 심었고, 지금까지 3만 그루를 심었다. 이제는 바느질과 농사기술을 배우는 복합교육문화센터인 ‘희망고 빌리지’를 짓느라 분주하다. 이씨의 남편인 홍성태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내의 대표적 마케팅 전문가답게 ‘희망고’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며 물심양면으로 아내를 돕고 있다. 단 한 차례의 부부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은 이들이 ‘나눔이야기’를 위해 함께 자리했다.
―유명인사들은 대개 NGO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반면, 직접 사단법인을 설립해 아프리카 지원사업을 벌이는 경우는 드물다. 왜 이 일을 시작했나?
이광희= 아마 부모님이 아니셨다면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수단 톤즈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꼭 고향에 온 것 같았다. 목사이던 아버님은 1950년대 6·25전쟁 직후에 해남 땅끝마을에 내려가서 교회를 세우고 ‘해남등대원’을 설립해서 전쟁고아와 장애아 수천명을 키웠다. 간호사 출신인 어머니도 평생 소록도 나환자와 고아, 전쟁 미망인을 뒷바라지했다. 부모님에 비하면 난 가진 게 아주 많다.
―3만 그루의 망고나무 묘목을 배분했다고 하는데, 왜 망고나무인가.
이광희= 망고나무의 개념은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망고나무 한 그루를 심는 데 15달러 정도가 든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5~7년이 지나면 수확한다. 1년에 두 번 수확하는데, 열살 나무는 200여개의 열매를 맺는다. 한 번 자라면 100년 동안 열매를 맺는다. 시장에서도 비싸게 팔린다. 망고나무는 한 번의 투자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홍성태= 마케팅 교수로서, 존재 이유와 콘셉트·미션을 중요시한다. 많은 단체가 규모가 커지면 오히려 미션을 잊어버린다. 망고만 심거나, 우물만 파주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 아프리카에서도 엄마들이 가정을 먹여 살리는 경우가 많듯이, 망고나무를 통해 엄마의 경제적 자립을 이끄는 게 가장 중요하다.
―올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한 ‘희망고 빌리지’를 보니, 여성·남성 직업교육센터, 초등학교, 탁아소, 도서관 등이 다 있다. 어떻게 이런 공간을 지을 생각을 했나.
이광희= 나는 ‘아이’보다 ‘엄마’를 포커스로 뒀다. 아이 한 명에게 3만원을 후원하는 것보다 엄마의 경제력을 갖추는 데 3만원을 쓰면 아이 10명은 먹여 살릴 수 있다. 망고나무를 키우려면 아빠들에 대한 농업기술 교육이 필요할 것 같았다. 부모들이 교육받을 동안, 애들을 돌봐줄 탁아소가 필요하다.
홍성태=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여보, 밤중에 생각났는데, 탁아소 지으면 되겠어. 남자들도 교육장소가 필요하겠어’ 하고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자고 일어나면 하나씩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웃음).
―후원자 모금과 해외 지역개발사업 등 모두 새로운 영역인데, 어려움은 없는가.
이광희= 럭셔리한 디자이너 일과 NGO 일은 극과 극이다. 부모님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의지가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푸는 방법이 있다고 본다. 외부의 어려움보다 가장 큰 어려움은 나 자신이다. ‘내가 끝까지 이걸 잘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 그다음은 다 된다.(이 대목에서 이씨는 눈물을 흘렸다.)
홍성태= 이것저것 따지는 분들은 오히려 후원에 인색하다. LG생활건강 차석용 부회장님은 단 5분 만에 후원을 결정했다. 대성 김영대 회장님도 희망고 얘기를 듣고 나서 곧바로 후원을 결정했다. 물론 개미군단이 무섭다. 학생들도 망고나무 하나씩 심겠다면서 2만원, 3만원씩 후원해준다.
―희망고 행사를 하면서 ‘자선”봉사’가 아니라, ‘축제’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특이했다.
이광희= 망고나무 심는 날이 평생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축제 같은 날이 되었으면 싶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망고나무 심는 의미를 알려주고, 이날만은 배불리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고 싶어 축제를 벌였다. 값싼 일회적인 동정심이 아니라, 같이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홍성태= 유명 영화배우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측은하게 우는 모습이 싫다.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런 모습 찍어가면 어떻겠나. 돕는 것은 희망을 주고,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나눔이 이광희씨의 ‘희망고’를 낳았듯이, 자녀들에게도 나눔교육이 될 것 같다.
이광희= 작년에는 큰아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다녀왔고, 올해는 작은아들과 함께 간다. 사람들에게도 아이들에게 탄생 기념으로,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망고나무를 한 그루 심으라고 한다. 나무가 크면서 어떤 도움이 되는지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나눔교육이 될 것 같다.
홍성태= 큰아들이 그랬다. ‘아빠! 먹을 물도 없는데 세수는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부지런한 애들은 소가 오줌 누는 걸 기다려서 그 오줌으로 세수해요. 사진에 안 나오는 게 뭔지 알아요? 냄새예요. 애들과 온 동네에서 냄새가 나서 나는 ‘억~억~’ 하는데, 엄마들은 그 애들 붙잡고 뽀뽀해요.’ 아들은 결국 귀국행 비행기가 취소되는 바람에, 회사복귀가 며칠 늦어졌다.
남수단 톤즈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서울에서 두바이로, 다시 케냐의 나이로비로, 또다시 남수단의 수도 주바에 내린 후 6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룸벡에 도착한다. 비행기만 4번 갈아탄다. 거기서 3시간 남짓 울퉁불퉁한 길을 차로 달려야 한다. 이광희씨는 “처음 패션을 시작할 때도 ‘좁은 길로 가자’가 좌우명이었기 때문에 힘들어도 계속 가다 보면 오히려 결과는 빨라진다”며 “제2, 제3의 희망고 빌리지가 많이 퍼질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디자이너 이광희
초등학교 2학년 때 오빠(이건용)와 함께.(좌) 1970년 이화여대 비서학과에 입학했을 무렵의 이광희씨.(우)
여섯 살 무렵 아버지 이준묵 목사와 함께. 1953년 전남 해남에서 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인 해남 등대원을 설립한 이 목사는 1만4000여 고아를 돌봤다. ‘맨발의 성자’로 통한 그는 1999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2000년 작고했다.(좌) 2000년 대한민국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함께한 최경자 선생은 국제복장학원 설립자로 한국 패션계의 대모이자 그의 스승이다.(우)
1990년 힐튼호텔에서 연 아프리카를 소재로 한 단독 패션쇼. 17년 전인데도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좌) 이광희씨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연말이면 크리스마스 자선 바자를 여는 등 나눔에도 열심이다. 자선 바자에 참석한 이해인 수녀와 함께.(우)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이광희씨의 옷은 특히 아나운서들에게 인기가 높다. 오른쪽은 황수경 아나운서.(좌) 1986년 이집트 전 대통령 부인 사다트 여사(왼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오른쪽 위)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남편 홍성태 교수와 시청 앞을 찾았다.(오른족 아래)
소녀의 이미지를 간직한 단아한 패션 디자이너 이광희(李光熙·55)씨. 상류층이 가장 선호하는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그이지만, ‘찾아가는 패션쇼’ ‘감동이 있는 패션쇼’ 등을 기획하며 패션 대중화에도 앞장서왔다. 그의 부티크를 찾은 날도 고객들이 직접 모델이 되어 무대에 오르는 ‘고객과 함께 만드는 이색 패션쇼’가 활기찬 분위기에서 열리고 있었다.
[j Special]‘한국 0.1%’ 위한 디자이너 이광희, 대중 브랜드 내놓는다
이광희.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그다. 한국 사회의 0.1%도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옷을 만들던 그가 대중을 위한 저렴한 브랜드 ‘LK’의 디자인을 맡았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싶었다. 21일과 23일 서울 남산에 있는 ‘이광희 부티크’에서 그를 3시간여에 걸쳐 두 번 만났다. 이야기는 영부인, 재벌가 사모님,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들이 입는다는 그의 정장 이야기부터 디자인을 바라보는 가치관,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꾼 아프리카와의 만남까지 폭넓게 흘러갔다.
최지영 기자
● ‘사모님’들을 주로 상대하다 보면 뒷얘기도 많을 것 같다.
“요즘은 비싼 해외 명품이 일반화됐지만 옛날에는 어디 그랬나. 부와 명성이 있는 분들은 대부분 국내 디자이너 부티크를 찾았다. 그래서 과소비의 상징처럼 죄악시됐다. 김영삼(YS) 정부 때는 내 부티크 앞에 주차된 차 번호를 (감찰 직원들이) 적어간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이광희 부티크에서 옷 샀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나는 여기 쇼핑백 말고 딴 쇼핑백에다 싸줘’라고 얘기하는 사모님들도 있었다.”
● 이명박(MB)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가 이광희 부티크 옷을 입는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이광희씨의 옷을 즐겨 입는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 위·아래 색깔이 같고, 튀지 않으면서 우아하고 점잖아 보이는정장을 좋아한다.
“김 여사는 한 사람 옷만 고집하지 않으신다. 여러 브랜드와 부티크 옷을 유연하게 골라 입으신다. 분위기 자체가 우아하고 뭘 입어도 잘 소화하신다. 우리 옷 중에선 튀지 않게 우아하고, 점잖아 보이는 정장을 좋아하신다. 위아래 색깔이 같고 라인이 똑 떨어지는 정장들이다. 첫 미국 순방 중 김 여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올 때 입은 분홍색 정장이 패션 센세이션을 일으켜 기분이 좋았다. 옷을 해 드릴 땐 가봉하러 청와대에 들어가곤 하는데 나는 ‘내가 옷 해 드렸다’고 동네방네 소문 내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 옷을 입었을 때 가장 예뻐 보이신다고 주변에서 얘기해주는 점은 기분이 좋다.”
● 고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도 단골이었다고 들었다.
“대통령 부인이 되시기 전까지 그랬다. 이 여사는 스탠 칼라에 단정한 일자 라인 스커트를 좋아하셨다. 몸매가 날씬하고 키가 커 지나치게 말라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게 유일하게 신경 쓴 점이다.”
● 다른 영부인들과의 인연은 없나.
“이순자 여사는 직접 뵌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옷을 사 갔는데 나중에 보니 내 옷을 입고 계셔서 깜짝 놀란 적은 있다. 전두환 정부 때는 내가 30대였는데 겁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누가 누구 사모님이고, 이런 걸 전혀 몰랐다. 당시 남산 부티크에 어떤 부인이 와서 사람이 많아 한참을 기다리고 앉아만 있다가 그냥 갔다. 그런데 같이 있던 다른 단골고객이 ‘누군지 알고 그리 소홀히 대접했느냐, 내가 다 무서워 죽겠다’고 얘기해줬다. 하나회 핵심 누구 사모님이라고 얘기 들었는데 또 잊어먹었다. 내가 이렇다.”
● 대기업 오너 부인들도 단골이 있었나.
“기억나는 사람이 노소영(최태원 SK그룹 회장 부인·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시어머니이신 고 박계희 여사(고 최종현 회장의 부인)이셨다. 우리 부티크 단골고객이었다. 사치해서 수입 옷 입었다는 소리 듣기 싫다고 결혼할 때 우리 옷을 해주겠다고 하셔서 예비 며느리와 함께 우리 부티크를 찾으셨다. 나중에 가봉은 청와대에 가서 해야 했는데 ‘거기까지 가는 거 불편하지? 그냥 우리 집에 와서 가봉해…’ 하고 다정하게 말씀하실 정도로 소탈하고 정이 많으셨다.”
● 옷로비 사건으로 고초가 컸다고 들었다.
“남산에 있는 L부티크가 옷로비 무대라는 언론보도 때문에 부티크에 3개월 동안 고객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언론사에 찾아가서 항의도 하고 했다.”
● VVIP만을 상대로 하다가 갑자기 LK라인을 내놓은 이유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대상으로 일하고 있다는 답답함이 항상 있었다. 힘들게 디자인해서 0.1%도 안 되는 대중만 입는다는 게 아쉬웠다. 디자인 가치의 희소성을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다. 칼 라거펠트가 H&M과 콜래보레이션(협업)해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있지 않은가.(※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인 세계 패션 디자인업계의 거두인 그는 2004년 스웨덴의 패스트패션 브랜드 H&M과의 협업 디자인을 시작으로 대중 패션과 산업 디자인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굿 디자인은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아프리카에 희망의 망고 나무를 심는 ‘희망고’ 프로젝트에 대중의 참여를 늘리기 위해서라도 대중과 가까이 가고 싶었다. 젊은 사람들이 LK를 입어 아름답고 격을 갖춘 ‘레이디’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30년 동안 생산과 영업을 함께하면서 힘들었다. LK는 내가 디자인만 하고, 생산과 영업은 이랜드가 하니 나는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다.”
● 어떤 옷을 디자인하려고 노력하나. 원래부터 소수를 위한 VVIP 의상을 생각했던 것인가.
“여자들이 옷을 입는 이유는 돋보이기 위해서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옷을 통해 격을 나타낼 수 있는 날개,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낼 수 있는 옷이었으면 좋겠다. 최고로 좋은 옷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디자인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VVIP가 애용하는 브랜드가 됐다. ”
● 한때 고가 옷, 사모님 옷으로 명성을 날리던 국내 디자이너 의상이 쇠퇴하는 느낌이다. 해외 명품과는 어떻게 경쟁해야 하나.
“다른 디자이너들이 어찌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나는 내 일만 한다. 그런데 얼마 전 50대 사모님과 30대 커리어 우먼한테 똑같은 얘길 듣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광희 옷을 입으면 수입 브랜드에는 없는 어떤 격을 입는 느낌이어서 좋다고 하더라. 해외 명품과는 다른 무엇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 디자인에 대한 기본 정신이 있다면.
“정성과 혼이 담긴 디자인이다. ‘디자인 공해’ 시대라 할 만큼 안 좋은 디자인을 대중에게 입히는 괴로움도 커졌다.”
● 이광희 옷이 어울리는 명사를 꼽아달라.
“말했듯이 30대와 50대 고객이 모두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격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라 평가해준다. 숙명여대 한영실 총장도 그렇다. 우아하면서도 능력 있는 강인한 이미지에 내 옷이 잘 어울린다.”
j 칵테일 >> “많이 먹었네, 어쩌지…”
멋쟁이 손님들을 항상 대해야 하기 때문일까. 이광희 디자이너는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몸매 관리를 엄격하게 했다. 기자와 만난 날 중 하루는 “일주일 동안 채소만 먹었더니 너무 당긴다”며 일식 튀김을 주문하더니 조금만 먹고는 “어쩌지…”라며 걱정했다. 또 다른 날은 “어제 부부 동반 저녁을 많이 먹어 오늘은 저녁을 굶어야겠다”고 했다. 그는 매일 집과 남산 사무실을 걸어다닌다. 남산 순환도로를 한 시간 반 동안 걸어 다닌 지도 5개월이 넘었다. 다이어트와 운동에 대해 그는 “인생의 새 목표를 찾았기 때문에 건강하게 그 일을 오래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5개월 전까진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의 생활 습관까지 바꾼 인생 목표는 바로 아프리카에 망고 나무를 심어주는 ‘ 희망고’ 프로젝트다.
사모님들을 대하면 사교적이고 모임도 많을 것 같지만 이 디자이너 본인은 집과 부티크를 오가며 패션쇼나 희망고에 관한 일 외엔 거의 바깥 활동을 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털어놨다. 퇴근 후엔 집에 와서 마당 앞뜰에 심어놓은 포도넝쿨과 나무들을 관리하고 책을 읽는 것이 취미다. 그는 “포도넝쿨만 봐도 처음 3년간은 담을 잘 타고 가 있도록 계속 줄기를 매줘야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타고 올라가 자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는 일도 누군가는 하겠지만 그걸 기다리기보다는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으로 나섰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때 이광희 디자이너가 입은 옷은 꽃무늬가 은은히 들어간 데다가 레이스가 달린 ‘소녀풍’ 의상이었다. 여기에 흰 스타킹을 신어 소녀풍 룩을 완성했다. 그가 30대 젊은 여성들을 위해 새롭게 디자인을 맡아 선보인 브랜드 ‘LK by 이광희’ 역시 로맨틱한 정장이다. 주변 관계자는 “캐주얼과 스포틱 의상이라는 대세를 좇지 않고 오히려 니치 마켓(틈새시장) 공략을 노린 것”이라고 말했다. 1974년 이화여대 비서학과를 졸업한 이광희씨는 80년에 패션계에 입문했었다.
>> 이광희와 아프리카, 그리고 희망고
목사로 전라남도 해남에서 월드비전과 함께 보육원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 “그냥 한번 같이 가보자”는 친구 김혜자씨의 권유로 아프리카 수단을 방문한 것은 지난해 3월. 황량한 사막의 월드비전 막사에서 모기장을 쳐놓고 지냈다. 직전엔 콜레라로 800여 명이 죽었다. 주민들은 곡물 가루 한 자루를 배급받아 한 달 동안 먹었다. 장터에 파는 채소라곤 시든 양파뿐이었다. 그 와중에 뭔가를 먹고 있는 어린이들을 발견했다. 망고 열매였다. 초등학교에도 커다란 망고 나무가 보였다. 열매뿐 아니라 그늘까지 제공하는 훌륭한 쉼터였다. 제일 곤궁한 건기에 1년에 두 번씩 열매를 맺어 훌륭한 식량을 제공한다. 가구당 한 그루를 집 앞에 심어 주는데 15달러 정도가 들었다. 아프리카 주민들이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 이거다 싶었다. 신청한 지 일주일 만에 ‘희망의 망고 나무(희망고)’가 외교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됐다. 외교부 조대식 국장이 “이 선생의 그동안 인생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준비돼 온 듯하다. 인생 마지막 업으로 훌륭히 마무리하시라”고 말해줬다. 지난해 말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연 ‘희망고’ 자선 패션쇼를 올해엔 10월 국립극장에서 개최한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씨와 함께 클래식 음악과 패션의 만남으로 꾸밀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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