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 번제 헌금 이란 |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천번의 제사가 아니다! 254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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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와 교사들을 위한 배움의 공간, 감리교교육마당입니다.]
교회에서 헌금을 드릴 때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일천번제를 숫자적으로 이해해서 천번의 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 예배 때마다 숫자를 표기해서 천번의 헌금을 일천번제라는 명목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천번제는 숫자적으로 천번의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일천번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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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번제 헌금 – 네이버 블로그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일이나 바르게 믿는 일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은 진리의 말씀을 믿는 것이지 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일천번제 헌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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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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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을 핑계대는 일천번제 헌금은 성경적인가? – 바른믿음

성경의 일천 번제 성경의 일천번제는 헌금 이야기가 아니다. 즉 소위 헌금을 일 천번 나누어 드린다는 “일천번제헌금”이란 것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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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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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일천번제헌금”은 성경적인가? – 크리스찬 투데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불교와 같이 1000일 3개월 열을 동안 기도한 것이 같이, 1000일 동안 희생을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즉 일천 마리를 번제로 태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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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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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번제 헌금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것에 해당하는 것을 구태여 찾는다면 헌금 봉투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목회자들이 일천번제헌금이란 명목으로 돈을 거두어서 버젓이. 자기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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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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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칼럼] ‘일천번제헌금’은 성경적인가? – 크리스천투데이

소위 헌금을 일천 번 나누어 드린다는 “일천번제헌금”이란 것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일천 번제 이야기가 성경에 단 한 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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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5/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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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번제’ 사용 정확해야 – 기독신문

교회마다 ‘일천 번제’를 잘못 이해해 이것을 예배나 헌금에 적용하는 일이 숱하다. …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일천’이란 수를 제물의 많은 수량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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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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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번제는 일천 번 드리는 헌금이 아니다 – 역사랑

일반적인 일천번제 헌금 봉투. 출처: 갓피플몰. 한국 개신교회는 타락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 그 구체적인 타락상 가운데 하나는 ‘일천번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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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istoryrang.tistory.com

Date Published: 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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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글] \”일천번제 헌금\” 유감 – 길성남 교수 > 기고|저서|논문

일천번제 헌금 봉투를 판매하는 기독교 서점들도 있습니다. 일천번제 헌금이란 대체로 일정액을 매일 천 번에 걸쳐 새벽기도 시간에 내거나, 매일 모은 것을 주일 예배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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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ts.ac.kr

Date Published: 5/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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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천번제헌금을 설교하고 강요하는 목사에게 보내는 서신

목사님의 설교가운데 주장하시는 일천번제 헌금이란 성경에 기록된 바도 없으며, 기독교의 역사에도 ㅤ찾아 볼 수 없는 한국 기독교에서만 유일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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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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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적용 5] 일천번제 – 리폼드뉴스

일천 번제 헌금이란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고 나서 큰 축복을 받았듯이 우리들도 솔로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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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reformednews.co.kr

Date Published: 6/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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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천번의 제사가 아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천번의 제사가 아니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일천 번제 헌금 이란

  • Author: 감리교교육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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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2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vSVk2J4TX8s

일천번제 헌금

간혹 개(個) 교회에서 운용하고 있는 연보 봉투를 보면 아예 ‘일천 번제 헌금’ 이라고 인쇄해서 헌금항목으로 운용하는 교회도 있고, 교회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하고, 목사님의 명성이 있는 큰 교회에도 일천번제 헌금봉투가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교회에서 그와 같은 헌금항목을 제도적으로 운용하고 있지 않는데도, 또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배웠는지 성도들 스스로가 헌금 봉투에 일련번호를 적어가면서 1,000회가 될 때까지 ‘일천 번제 헌금’을 꼬박꼬박 하는 것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심한 경우 어떤 사람은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도중 한 번이라도 예배나 기도회에 빠지게 되면, 일천번제 헌금은 효력을 잃으므로 처음부터 다시해야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이상한(?) 믿음도 있었습니다(필자 경험)​.

일주일 동안 새벽 기도회 7회, 주일 낮과 저녁 예배 2회, 수요 예배 1회, 금요 철야기도회 1회, 구역예배 1회 이렇게 모든 모임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일주일에 총 12회를 꼬박 꼬박 헌금을 넣어 일천 번을 드리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교회에 올 때마다 빠짐없이 일천 번 횟수의 헌금을 드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 헌금봉투에는 1,000회에 이르는 일정한 번호와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실로 대단한 정성과 끈기, 열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이상한 모습들이 있는 것은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정의가 성경에는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앎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이루고 싶은 소원의 욕심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일천번제 헌금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헌금 금액과 헌금하는 정성을 보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를 신자들의 지극한 정성과 거래하시는 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이라는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도, 자녀가 효도를 다해서 그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효도하기 전에 먼저 부모는 지극히 자녀를 사랑합니다. 부모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더 그러하시겠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심으로 인정하고 나의 죄됨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지 세상에서의 소원과 욕심을 이루고 싶은 열심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례 요한처럼 억울한 사람이 없고, 스데반 집사처럼 재수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 수준에 머문다면, 나의 욕심과 소원 성취만을 위해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라면 다른 우상을 섬기는 신앙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타락한 제사장들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거룩하다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성전을 우상시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5)고 하셨습니다. 헌금을 많이 거두고 싶은 제사장의 욕심과 어쨌든 소원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의 욕심이 성전 우상이라는 합작품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일천번제 헌금이 헌금을 많이 거두고자 하는 교회의 욕심(또는 믿음이 연약한 신도들을 열심히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붙잡아 두고자 하는 욕심)과 어쨋든 소원을 달성하고 보자는 성도의 탐심이 만든 합작품이라면 이는 복음의 심각한 훼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이 오직 세상의 소원 성취를 위해서 열심을 내는 신자들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지적하고 나무랐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0-13).

그래서 신자들이 지극 정성으로 드리는 일천번제 헌금과 관련하여서는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의 내용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신앙은 신앙의 힘으로 세상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는데 있고, 하나님을 닮으려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아는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번제는 말 그대로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내 죄악 된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드리는 제물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열왕기상 3:4의 ‘일천 번제’와 역대하 1:6의 ‘일천 희생’은 일천 번 드렸다는 횟수를 말하거나 1,000날 동안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천 마리의 제물을 드렸다는 의미이며(이 일천 마리의 숫자에 대해서는 성경 번역본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1), 이 제물을 다 드리는 데는 칠 일이나 팔 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는 오늘날 성도들이 하는 일천번제 헌금 하고는 그 의미가 너무도 다릅니다(보다 상세한 것은 필자의 블로그 ‘오해와 정독 사이에서’ 중 ‘일천번제’ 편 참조).

오늘날 개 교회에서 드리는 일천번제 헌금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 정신 및 내용과도 맞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지극과 정성을 다한 열심으로 오해한 탓입니다. 헌금의 제목만 성경에서 그럴듯하게 차용(借用)했을 뿐입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신자의 열심과, 소원을 이루고 싶어하는 욕심을 자극하기 위한 일천번제 헌금이라면 이는 탐심을 자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일이나 바르게 믿는 일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은 진리의 말씀을 믿는 것이지 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일천번제 헌금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기도응답 받는다고 하는 것은 생각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믿고 드리는 욕심에 불과합니다.

간절한 소원을 담아 일천 번의 예물을 드려도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일천 번의 헌금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도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일천번제 헌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헌금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가 무엇인지 등을 복합적으로 모르는 무지의 소산(所産)이고 욕망의 소치(小致)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복음을 벗어나 여느 종교의 하나가 되는 순간, 기독교는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신앙으로 여겨지지만, 눈이 조금 열린 자들에게는 거짓으로 보이며,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교회가 권력과 재산, 치부(致富)의 수단이 됩니다. – 끝 –

1. 쉬운 성경(왕상 3:4) “솔로몬 왕이 제사를 드리려고 기브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가장 유명한 산당이 있었는데, 솔로몬은 천 마리의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새 번역 성경(왕상 3:4) “기브온에 제일 유명한 산당이 있었으므로, 왕은 늘 그곳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이 그 때까지 그 제단에 바친 번제물은, 천마리가 넘을 것이다. 한 번은, 왕이 그리로 제사를 드리러 갔는데,”현대어 성경(왕상 3:4) “한번은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1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기브온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스라엘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산당이 있었다. 솔로몬은 그곳에 있는 제단에서 수백 마리의 짐승을 잡아 희생제물로 바쳤다. 그가 이렇게 북쪽 지파의 영토에 가서 제사를 드린 것은 그곳 백성의 지지를 얻고 통치에 필요한 계시를 꿈 속에서 받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솔로몬을 핑계대는 일천번제 헌금은 성경적인가?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1,000회의 제사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교회들이 다양한 비성경적인 것들을 일천번제와 연관시키는 목회 이베트들을 만들어서 성도들을 더욱 우매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성경의 일천 번제

성경의 일천번제는 헌금 이야기가 아니다. 즉 소위 헌금을 일 천번 나누어 드린다는 “일천번제헌금”이란 것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에는 일천 번제 이야기가 단 한번 기록되어 있다. 그 만큼 일천 번제 이야기는 아주 희귀한 경우였다.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다윗으로부터 솔로몬으로 이스라엘의 왕권이 이양되고 솔로몬이 그 왕권을 강화해 가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일천 번제 이야기는 솔로몬의 초기 통치 모습을 보여주는 열왕기상 3장(역대하 1장에도 동일한 번제를 기록하고 있음)에 나타나 있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반대파들(아도니야, 아비아달, 요압, 시므이 등)을 모두 제압한 솔로몬은 먼저 정략결혼 등을 통해 애굽과 동맹을 맺는 등 대외 관계를 정비한다(왕상 3:1).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배경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세력 기반을 다진 솔로몬이 다음으로 할 일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여호와의 성전은 완공되지 않은 관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위에 쌓은 여러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실정이었다. 산당은 인간 제물(왕하 16:3-4; 렘 19:4-5), 종교적 음행(왕상 14:23-24), 복술(왕하 17:17) 등과 관련된 제거되어야 할 장소(민 33:52)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도 성전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윗의 신앙과 교훈을 따랐으나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다. 당시 가장 크고 유명한 산당은 기브온(Gibeon)에 있었다. 여호수아 시대 “큰 성”으로 불려지던(수 10:2) 예루살렘 북서쪽 약 8km에 위치한 기브온 성읍은 본래 가나안 족속의 큰 고을이었으나 뒤에 베냐민 지파에 할당되었으며(수 18:25) 레위 사람들의 성읍으로 주어진 이스라엘의 땅이 되었다(수 21:17).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이곳 기브온에는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대상 16:39; 21:29; 대하 1:3, 13). 솔로몬은 바로 그 기브온으로 가서 놋제단 앞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왕상 3:4; 대하 1:6). 성전 재건은 바로 이 이후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만난 솔로몬

하나님은 그 날 밤 솔로몬에게 나타나 솔로몬에게 필요한 것을 자신에게 친히 구하라고 명하신다. 솔로몬이 여호와 하나님께 많은 백성을 다스릴 지혜와 지식을 구하니, 하나님은 솔로몬이 부나 재물이나 명예나 원수를 저주해 달라거나 장수(長壽)할 것을 구하지 않고 백성을 통치할 지혜와 지식을 구했음을 칭찬하고 지혜와 지식뿐 아니라 이전 어떤 왕도 가져보지 못한 부와 재물과 명예까지 선물하였다. 이 같은 경우는 온 세상 어떤 왕도 누려보지 못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대하 1:12). 이것이 일천 번제와 관련된 성경의 유일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 일천 번제의 해석

첫째, 성경에 나타난 일천 번제는 한국교회에서 일부 유행하는 총 일천 번 헌금을 드리는 ‘일천번제 헌금’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역대상 29장 21절에 보면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을 각각 1천 마리씩 가지고 와서 여호와께 불로 태워서 번제를 드리고 또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술을 부어 전제를 드리고, 그 밖의 다른 제사도 드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는 다윗의 죽음이 그리 멀지 않은 때였다. 따라서 다윗이 수송아지, 수양, 어린양을 각각 1천 마리씩 1천 일 동안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닌 단번에 1천 마리를 드렸다고 해석하는 것이 순리이다. 물론 이 많은 가축을 바치려면 단숨에 바친다고 해도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역대하 7장에 보면 성전봉헌식 때 솔로몬은 소 2만 2천 마리와 양 1만 2천 마리를 제물로 드렸다. 당연히 2만 2천 일이나 1만 2천 일 동안 드린 제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솔로몬이 드린 1천 번제도 불교처럼 1천일 기도를 하거나 1천일 동안 희생을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1천 마리 짐승을 불로 태워 번제를 드렸다는 구절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둘째, 기브온 산당에서 드린 제사는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드린 특별한 번제였다. 이 제사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제사가 아니었다. 시기와 규모와 의미에 있어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 왕 솔로몬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였다. 만일 이 제사를 매일 한번씩 1천 번 드리려면 안식일을 제외하고도 3년 이상을 꼬박 드려야 했을 것이다. 제사장도 아닌 국정을 돌보아야 할 국왕이 쉬지 않고 1천 번을 드린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제사는 1천 일 동안 번제를 드린 게 아님이 분명하다. 이 번제는 솔로몬이 기브온 제사에 동참한 모든 백성들과 함께 참여한 국가적 번제였으며(대하 1:6) 또한 이 번제를 통해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특별히 찾아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통치를 위해 솔로몬에게 지혜와 지식과 부와 재물과 명예를 부어주신다. 하나님은 앞으로도 온 세상에 솔로몬 같은 왕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선포하였다(대하 1:12). 1천 마리를 불에 태워 드리는 이 국가적 번제는 아무나 드리는 번제가 아닌 특별한 사건이었던 셈이다.

자제해야 할 한국의 소위 “일천 번제 헌금”

1천 마리 짐승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를 드린 솔로몬의 제사를 모방하여 한국교회 안에 ‘1천 번제 헌금’이란 것이 등장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솔로몬의 1천 마리 짐승 희생제사는 한국교회의 “일번번제헌금”과는 전혀 그 의미가 맞지 않는 것이다.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자원하여 연보를 드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성도들의 열심을 이끌어내거나 기복 신앙의 만족을 유도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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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번제 헌금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 배너를 클릭하면 새창으로 카페를 열수 있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에서 일천번제 헌금이 자행되고 있다.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자들이다. 즉각 멈추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말려야 한다. 나는 교회개혁연대 플레비언에서 이것을 폐지하자는 운동에 적극 찬성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즉각 금지되어야 한다. 첫째는, 동기가 불순하다. 일천번제 헌금은 솔로몬왕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것에 근거한다. 그 일천번제가 어떤 번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일단 솔로몬은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을 왕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일천번제 헌금은 댓가를 바라고 드려지는 것이다. 이것은 흥부와 놀부가 똑같이 제비다리 고쳐주었지만, 놀부는 흥부와 그 동기가 다름으로써 오히려 벌을 받았음을 우리는 잘 안다. 일천번제 헌금을 통해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는 것은, 마치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능력을 사려고 한 것과 같다. 베드로가 무어라고 말했는가?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돈을 드려서 하나님께 소원함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둘째는, 헌금은 번제가 아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양이나 소를 모두 남김없이 태우는 것이다. 가죽을 제외하고는 고기 한점 제사장 몫으로 가는 일이 없다. 모든 고기는 태워져야 했다. 그런데 일천번제 헌금은 누구에게로 가는가? 그것은 한푼도 제사장의 몫으로 가면 안되는 것이다. 만일 구약식으로 확대 해석한다면 제사장의 몫은 가죽에 불과한데, 아마도 일천번제 헌금에서 이것에 해당하는 것을 구태여 찾는다면 헌금 봉투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목회자들이 일천번제헌금이란 명목으로 돈을 거두어서 버젓이 자기들의 멋대로 사용하고 있다. 만원짜리 한장을 봉투에 넣고 “번제”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경을 알고 있는 자라면 양심에 꺼릴 일이건만, 소위 성경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목회자들이 성경에 무지한 성도들을 하나님 모독하는 범죄에 빠뜨리고 있다.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들이 제사의 참뜻을 잊은채 병든 소나 절름발이 소로 제사를 적당히 때운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라고 하나님께서 질책하셨다.(말 1:7,8) 또한 구약의 번제 자체가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불과한데, 그런 그림자를 실체로 보고 본받아 그림자의 그림자를 만드는 것은 소경이나 할 짓이다. 예를 들어, 구약의 속죄제는 그림자에 불과하며 참형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자가 속죄제사를 본받아 오늘날 돈을 드려 속죄하고자 한다면 그는 이단이다. 그림자의 그림자는 존재하면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그림자에서 참형상을 찾아내야 한다. 번제의 참형상이 돈인가? 어디 헌금에 번제라는 이름을 함부로 붙이는가? 셋째는, 하나님은 한번도 일천번제헌금에 대해 약속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일천번 헌금을 바치면 복 주시겠다는 식으로 한번도 약속한 적이 없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그 후의 어떤 왕도 일천번제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일천번제헌금을 드리고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안지키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결국 일천번제 헌금은 하나님을 돈이나 밝히는 맘몬신으로 오해케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돈으로 사게 하려는 악마적 아이디어이다. 일천번제 헌금은 교회의 재정에 도움을 될 지 모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결국 실족케 하고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갖게 할 것이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일천번제헌금을 요구하신 적도 없고, 기뻐하시지도 않는다. 이것으로 복을 얻어내려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자들은 축복은 커녕 오히려 화를 입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말리고 싶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무엇이 필요하면, 단지 믿음으로 구하면 되는 것이다.(요 15:7)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이용할 수 없고, 그에게 뇌물로 달랠 수도 없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 진실된 믿음을 드리고, 그를 사랑함으로 더욱 긴밀해질 수 있을 뿐이다. 부디 하나님의 은총을 물질로 사려는 모독적이고, 어리석은 행위를 당장 중지하길 바란다. 아…언제나 한국교회에서 형제사랑을 위한 연보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어볼 수 있을까? 숭사리개혁포럼 대표 – 최승호 (최야곱)

‘일천번제’ 사용 정확해야

교회마다 ‘일천 번제’를 잘못 이해해 이것을 예배나 헌금에 적용하는 일이 숱하다. 일천 번제는 일천 번의 제사니까 신약적인 관점에서 일천 번의 예배를 드리도록 성도들에게 온갖 열심(?)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열정은 좋지만 성경을 곡해해서 평신도들로 하여금 곤경에 빠지도록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더군다나 최근 <기독신문> 목회 현장 관련 지면을 보면 개 교회의 일천 번제에 대한 잘못된 사례가 기사화되는 경우도 보았다. 이 문제는 성경의 낱말 해석과 신학적 관점에 비추어 잘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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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 번제는 일천 번(番)의 제사를 드림으로 인해서 솔로몬의 기도가 응답받은 것이 아니다. 숫자적인 의미의 일천 번의 제사 혹은 제물이 아니다. 왕상 3:4절, 대하 1:6절에 의하면, 기브온에 산당이 크기 때문에 일천 마리의 제물을 7~8일 내에 번제로 태워 드릴 수가 있었다. 일천 마리를 번제로 드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일천’이란 수를 제물의 많은 수량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솔로몬은 최소한 하루 이상 칠일 내지 팔일 동안 약 일천 마리에 달하는 많은 희생을 하나님께 바쳤던 것이다. 번제(燔祭)는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제사이다. 이 번제(燔祭)를 숫자적인 번제(番祭)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게다가 교회는 교회대로 일천 번제를 일천 번 헌금을 작정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강요(?)하고 있다. 이것 역시 온당한 방법이 아니다. 필자는 과거 교육 전도사 시절에 어떤 교회의 새벽 기도회에 갔다가 일년 동안 일천 번 제사를 드린다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일천 번의 예배와 일천 번의 헌금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매번 예배 참석 때마다 일천 번제 중 몇 번째 헌금을 냈다며 목사님이 기명하고 축복기도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그래서 본인도 우선적으로 천 번의 예배를 채우기 위해 새벽기도, 주일 낮, 오후예배, 구역예배, 심방예배, 가정예배 등 닥치는대로(?) 참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번을 채우지 못했다. 그 수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 앞서다 보니 너무 힘든 일이었다. 이런 기계적인 방법 역시 비성경적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우리는 철저한 예배 중심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요 3:23절의 주님 말씀같이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강력한 요구이시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특히 교회 모든 교역자는 성경 해석에 있어 정확하게 뜻풀이를 해서 신도들을 지도해야 할 책임이 크다고 본다.

일천번제는 일천 번 드리는 헌금이 아니다

일반적인 일천번제 헌금 봉투. 출처: 갓피플몰

한국 개신교회는 타락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 구체적인 타락상 가운데 하나는 ‘일천번제’라는 헌금이다.

열왕기상 3:4에 기록된 솔로몬의 ‘일천번제’에서 명칭을 따와 일천 번 동안 헌금을 하는 것이 일천번제 헌금이다.

일천번제 헌금은 특정 기도 제목을 놓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녀들을 위해 이 헌금을 드리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일천번제 헌금’이 명칭을 따온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결코 ‘일천 번’을 드린 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일천 번제(燔祭)’이지, ‘일천 번(番) 제’가 아니다.

먼저 원어인 히브리어 성경에서 ‘일천번제’에 해당하는 단어를 보면

אלף עלות 이다. 이 말은 ‘일천 개의 번제’ 내지는 ‘일천 개의 번제물’을 뜻한다.

영어로도 살펴보자.

a thousand burnt offerings(KJV)

a thousand burnt offerings(NKJV)

1,000 burnt offerings(NLT)

a thousand burnt offerings(NIV)

많이 쓰이는 영어 성경 번역본 네 개만 추려도 모두 ‘a thousand burnt offerings’로 되어 있다.

만약 한국 개신교회에서처럼 일천 번의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영어로는

thousandth offerings 라고 번역해야 맞았을 것이다.

즉 ‘일천번제’는 일천 번 드린 제사가 아니라 일천 마리의 제물을 바친 번제였다.

사실 한글 성경을 꼼꼼히 읽더라도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 를 드렸더니” (개역개정)

굵게 밑줄 친 부분에서 띄어쓰기가 어떻게 돼 있는지 보자.

‘일천 번 제’가 아니라 ‘일천 번제’이다. 전자였다면 일천 번의 제사를, 후자라면 일천 마리의 번제를 드린 것이다.

국한문 성경으로도 보자.

“이에 王이 祭祀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山堂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祭壇에 一千 燔祭를 드렸더니” (개역개정 국한문)

국한문 성서를 보면, ‘번’이 차례 번이 아니라 사를 번 자임을 명확히 알 수 있으나, 주로 보급된 성경은 한글 전용판이기에 오해가 생기기 쉬웠다.

개역 성경에서 빚어진 오해를 맞기 위해 일찍이 대한성서공회에서는 새로운 번역본에서 해당 구절을 더 명쾌히 번역하였다.

“기브온에는 큰 산당이 하나 있었는데 솔로몬은 늘 그리로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은 그 제단에 번제물을 천 마리나 바친 적이 있다.” (공동번역 개정)

“기브온에 제일 유명한 산당이 있었으므로, 왕은 늘 그 곳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이 그 때까지 그 제단에 바친 번제물은, 천 마리가 넘을 것이다. 한 번은, 왕이 그리로 제사를 드리러 갔는데” (새번역)

즉 한글 성경만 꼼꼼히 읽어도 ‘일천번제’는 결코 ‘일천 번 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일천 마리의 제물을 번제로 드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기브온 산당의 제단이 얼마나 컸을까?

해당 구절에 구체적으로 수치가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출애굽기에 기록된 성막 규격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출 27:1)

번제단은 가로 세로가 각각 5규빗, 높이는 3규빗이었다. 1규빗은 손목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인데 대략 45cm이다.

그렇다면 번제단은 가로 세로 각각 2.25m, 높이는 1.35m였다.

가로 세로만 따지면 번제단은 1평이 겨우 조금 넘는,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다.

이 공간에 일천마리의 제물을 다 올릴 수 있었을까?

성경에 등장하는 수는 상징성이 크다. 7, 12, 40, 100, 1000 등. 이를 ‘완전수’라고 한다.

예컨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7일간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창조가 완전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번성을 의미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공동체의 온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간 광야에서 떠돌았다. 완벽한 형벌이었다. 예수님은 40일간 금식하셨다. 완전한 금식이었다.

솔로몬은 일천 마리의 제물을 번제로 드렸다. 완전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지, 실제 1천 마리를 드렸다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진정 어린 번제에 감동하셔서 그에게 지혜를 주신 것이지, 일천 마리나 되는 엄청난 제물을 바쳤기에 감동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일천 번제를 일천 번의 제사로 오해할 필요도 없고, 한꺼번에 일천번의 헌금을 하라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더욱이 ‘번제’는 예수님의 완벽한 희생으로 더 이상은 드릴 필요가 없는 구약의 제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일천 번제라는 폐기된 용어를 써가면서 헌금의 명칭을 정할 필요가 있는가?

왜 구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왜 예수님의 사역을 욕 되게 하는가.

차라리 일천 번 헌금, 이라고 정직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라.

‘성경적’이라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말을 아무 것이나 끌어서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정확한 해석, 역사적 배경, 문맥의 흐름, 오늘날의 적용 등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부디 한국 교회에서 일천 번제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풍습이 사라지길 기도한다.

[기고글] \”일천번제 헌금\” 유감 – 길성남 교수 > 기고|저서|논문

\”일천번제 헌금\” 유감

한국 개신교 안에는 \”일천번제 헌금\”을 복 받는 비결로 여기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일천번제 헌금 봉투를 판매하는 기독교 서점들도 있습니다. 일천번제 헌금이란 대체로 일정액을 매일 천 번에 걸쳐 새벽기도 시간에 내거나, 매일 모은 것을 주일 예배시간에 내는 식으로 천 번을 채우는 헌금입니다. 정성을 다해 일천 번 헌금을 하면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발간하는 여러 신문에는 일천번제 헌금을 드린 뒤에 사업이 번창했다거나 병이 낫는 체험을 했다는 간증 기사가 종종 실립니다. 지난 4월 23일 K일보에는 희귀 뇌질환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을 위해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어느 여성도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병원 지하에 있는 기도처에서 767번째 기도와 헌금을 드린 그 성도는 “얼마 안 되는 헌금이지만 작은 정성이 모여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일천번제 기도와 헌금을 드림으로써 아들의 병이 낫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관행은 솔로몬 임금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뒤에 지혜와 함께 부귀와 영광을 받은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역사적 사실은 열왕기상 3장 2-15절과 역대하 1장 1-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대하 1:7; 왕상 3:5). 솔로몬이 백성을 재판하는데 필요한 지혜와 지식을 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와 지식은 물론 부와 재물과 영광을 주셨습니다(왕상 3:12-13; 대하 1:12).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솔로몬 임금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함께 부와 재물과 영광을 받은 것에 주목합니다. 그리고는 이 본문을 복 받는 비결을 가르치는 것으로 간주하고,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것에 복 받는 비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성경읽기는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려서 복을 받은 것처럼, 신약시대의 신자들도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요컨대,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오늘날의 일천번제 헌금의 성경적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관한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일천번제 헌금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의 성경해석은 타당할까요?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면 솔로몬처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 본문을 읽고 해석해도 괜찮을까요? 이 본문에 근거해서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일까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살기를 원하는 신자라면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기 전에 성경적 근거를 살펴보고, 일천번제 헌금이 성경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일천번제 헌금의 근거 본문 중 하나는 열왕기상 3장 2-15절입니다. 이 본문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무엇보다 본문이 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읽고 본문 전체의 흐름을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 가서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2-4절).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무엇이든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5절). 솔로몬은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듣는 마음(an understanding mind)\”을 구합니다(6-9절). 여호와께서는 솔로몬이 장수나 부나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를 구하지 않고 백성들의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한 것을 기뻐하시고(10절),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뿐 아니라 부귀와 영광도 주십니다(11-14절). 솔로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자신에게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립니다(15절).

이 성경 기사의 흐름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것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귀와 영광을 주신 것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기사의 내용이 이렇게 전개됩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림(2-4절) →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심(5절) → 솔로몬이 지혜를 구함(6-9절)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지혜와 함께 부귀와 영광을 주심(10-14절) → 솔로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감(15절). 사건 전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함께 부귀와 영광을 주신 것은 그가 일천 번제를 드린 직후가 아니라, 지혜를 구한 직후입니다. 솔로몬이 지혜와 함께 부귀와 영광을 받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그가 일천 번제를 드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혜를 구한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10절을 주목하십시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이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혜를 구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장수나 부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한 것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함께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까지 주신 것입니다(11-13절).

이런 사실은 무엇을 알려줍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보다 그가 지혜를 구한 것을 더 기뻐하셨다는 점입니다. 솔로몬은 장수나 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장수나 부를 받으려는 마음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일천 번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자가 복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천번제 헌금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기에 앞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하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입니다(5절). 이런 내용은 오늘날에도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거나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의 세부적인 내용에 주목하고, 그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기보다 본문 전체를 차근차근 읽으면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최대한 저자의 의도에 맞게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에서 자신이 듣고 싶은 말씀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 2-15절 전체를 차근차근 읽으면, 이 본문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의 강조점은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귀와 영광을 주신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혜를 구한 것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신 사실에 있습니다(12절). 이 본문에서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왕의 신분으로 기브온 산당에 갔고 거기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4절). 또한 왕의 신분으로 백성들의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습니다(9절). 백성들의 송사 문제를 잘 해결하여 억울한 사람이 생겨나지 않게 함으로써 나라의 공의를 세우는 것이 왕의 중요한 직무였습니다(참조. 시 72:1-4; 렘 22:3). 하나님은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간구에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열왕기상 3장 2-15절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에게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같은 사건을 기록한 역대하 1:1-13의 요점도 동일합니다).

이것은 열왕기상 3장의 후반부에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 기사(16-28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 임금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의 송사를 매우 지혜롭게 판결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을 듣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놀랍니다. 그 이유를 열왕기상의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28절).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으므로 솔로몬이 지혜로운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3장 전체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과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백성의 송사를 잘 처리했음을 증언합니다. 이런 사실은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기사의 요점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혜를 주신 것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혜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며, 솔로몬은 그 백성을 다스리는 책무를 맡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솔로몬 자신도 이것을 인정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이라고 하며(9절),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합니다(7, 9절).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지혜를 주심으로써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지혜롭고, 공의롭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런 본문 해석은 무엇을 알려줍니까? 일천 번제에 관한 성경 기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솔로몬에게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혜를 주셨음을 증언하는 본문이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일천 번제\”나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도록 가르치는 본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 2-15절과 역대하 1장 1-13절 어디에서도 일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을 모든 왕이나 성도를 위한 모범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일천 번제는 구약시대에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특별한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일반화하거나 규범화하여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일천 번제를 드리는 것이 중요했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일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기사 외에는 일천 번제에 관한 말씀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솔로몬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아사 왕의 경우에는 일천 번제가 아니라 양 칠천 마리로 \”칠천\” 번제를 드렸습니다(대하 15:11).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것을 마치 하나님의 뜻 인양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적 사기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솔로몬처럼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요? 적어도 기도 응답을 받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지만 헌금의 바른 자세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기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십시오. 또한 하나님께 복 받는 비결은 궁핍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교인들에게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도록 가르치는 목회자들이여, 진실로 교인들이 복 받기를 바라십니까? 다른 나라의 교회에는 없는 잘못된 \”일천번제 헌금\”을 바치라 하지 말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대로(행 20:35),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라고 가르치십시오(끝).

선지동산 52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19) / 길성남 교수

777tatary

일천번제 헌금을 미화시켜 설교하는 한국의 목사들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 부부와 가정을 아직도 사랑하셔서 이 서신을 보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분기탱천하시지 마시고 수신제양 하셔서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저는 현재 한국에서 교회개혁의 일환으로 일천번제헌금 폐지운동을 하는 평신도 입니다.일천번제헌금에 대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던 가운데 하나님께서 목사님께 전하시라는 명을 받고 전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가운데 주장하시는 일천번제 헌금이란 성경에 기록된 바도 없으며, 기독교의 역사에도 ㅤ찾아 볼 수 없는 한국 기독교에서만 유일하게 유행되는 편법이며 불법입니다.목사님께서는 일천번제헌금의 당위성을 구약시대에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일천번-제로 교묘하게 바꾸어서 미화시켜 성경을 모르는 미숙고 나약한 성도들에게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것과 같이 성전을 짓기 위한 수단과 목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무었을 요구하고 드리는 것과 받은 것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의 차이는 극과 극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요구하며 드리는 것은 뇌물이며 불신자들이 우상에게 행하는 미신의 바알종교이며,하나님께 받은 것이 감사하고 감격해서 자원하여 모든 것을 기쁨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물이며 예배입니다.

이두가지 이유만으로도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는 교회 안에서 성경의 진의와 진실을 성도들에게 왜곡시켜 감사헌금 외에 성전건축이라는 미명으로 일천번제헌금을 강매하시는 죄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의 번제를 무력화내지는 무효화시키는 성령 훼방과 모독 죄에 적용 되는 죄 중에 용서 받지 못할 죄이며 삼대에 걸쳐 저주받을 죄라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지요?

기독교의 교회 건물은 다른 종교의 건물처럼 신당이나 성전으로 지칭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께선 왜! 교회건물 증축을 성전증축이라는 미명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현혹해서 일천번제라는 편법을 써서 불법적으로 돈을 모금하고 있는지 양심과 신앙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가슴에 손을 얻고 찔림과 정죄가 없는지 지금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목사님의 신앙과 양심에 일천번제헌금 설교나 강요내지는 강매에 대하여 일말의 꺼리낌이나 가책이 없다면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하나님게서 요구하시지도 않은 것을 마치 그분이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처럼 거짓을 말하고 왜곡을 시켰으니 버림받는 것은 당연한 순리입니다.

목사님의 하나님과 목사님의 자녀들 앞에 일말의 신앙과 양심이 있어 이 글이 찔림이 되신다면 즉각 하나님께 불법적인 일천번제헌금 강매설교를 중단하며, 일천번제의 편법을 교회에 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이켜 회개하십시요.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게서 목사님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치도 않으실 것입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은 구약의 탐욕의 선지자 발람의 사례와 신약의 마술사 시므온의 사건과 그 결말을 통하여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롱당하시지 않습니다. 만홀히 여김을 받지도 않습니다.

출처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 mini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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