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필도 목사 아들 | [Cbs 뉴스] 17년 동안 키운 아들, 알고보니 목사님 아들 162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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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ㅇ교회에 다니던 김 집사는 최근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17년 동안 금이야 옥이야 키웠던 아들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담임목사님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 아들과 담임목사의 유전자가 99.99% 일치하다니..\”
김 집사의 아들과 조 목사의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99.99%가 일치로 나왔다. 조 목사의 유전자를 검사한 병리사는 \”간혹 돌연변이가 나올 수는 있지만, 99.99%라는 수치는 친자와 다름 없다는 결과\”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의사 역시 \”유전자 검사는 매우 정확하다\”며 \”99.99%는 사실상 아들이라는 이야기\”라고 했다.
김 집사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며 \”몇날며칠을 통곡하고 울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한 것도 있지만, 아들이 불쌍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김 집사는 자신의 아들과도 유전자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친자가 아닌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김 집사의 주장을 들어보자.
\”저와 아내는 ㅇ교회에서 만났습니다.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까지 약속했죠. 목사님께 말씀 드리러 가니 이상하게 축복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넘어갔죠. 그런데 아들이 크면서 주변 사람들이 자꾸 저랑 안 닮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의심할 수는 없으니 넘어갔습니다.\”
김 집사는 아내가 결혼한 뒤에도 기도를 핑계로 교회에 가는 일이 잦았다고 말했다. 새벽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김 집사는 아내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내의 행동에 의심은 더해져만 갔고, 결국 목사의 집에서 나오는 걸 몇 차례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의심은 깊어졌고, 부부싸움은 잦아졌다. 김 집사는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아내가 더 이상의 결혼 생활을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2년 전부터 별거에 들어갔고, 이혼소송을 시작했다.
\”담임목사 때문에 가정 깨졌다\” 주장
김 집사는 담임목사 때문에 가정이 깨졌다고 생각했다. 법정에서도 그렇게 주장했다. 법원은 조 목사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조 목사도 법원에 나와서 몇 차례 증언을 했다. 김 집사는 2015년 자신의 아들과 친자확인 검사를 했다. 친자가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김 집사의 주장에 따르면 법원은 조 목사에게도 친자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조 목사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조 목사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유전자 검사를 받지 않으면, 친자라고 보겠다고 했다. 결국 조 목사는 유전자 검사를 했고, 결과는 99.99% 일치라고 나왔다.
하지만 조 목사의 주장은 김 집사와 전혀 다르다. 김 집사는 아내를 줄곧 의심했고, 폭력까지 행사했다고 했다. 또 유전자 검사와 관련해서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기자가 유전자 검사 결과 99.99% 일치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자, 조 목사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 집사는 유전자 검사를 한 기관은 법원에서 지정해준 곳으로, 조작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 자신은 교회에 충성해왔다며, 교회 일이라면 팔을 겉어붙이고 나섰다고 했다. 폭력 역시 단 한 번도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다고 했다.
일단 상황은 조 목사에게 불리하다. 유전자 검사 결과가 너무 확실하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는 법원에 제출한 상태.
김 집사는 \”20년 동안 교회에 충성했는데, 목사에게 속았다는 생각뿐\”이라며 \”억울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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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정필도 목사님(박신실 사모)가정탐방

가족소개; 정필도 목사님, 박신실 사모님, 은애(장녀), 은영(차녀), 성은(장남) 아침 일찍 한 전화를 받았다. 내일이면 집안과 교회의 큰 대사를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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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mofriends.org

Date Published: 4/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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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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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 후임 내정 < 교회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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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2/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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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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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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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뉴스]  17년 동안 키운 아들, 알고보니 목사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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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정필도 목사 아들

  • Author: CBS크리스천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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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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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필도 목사 아들 | 부산성시화 이사장 정필도목사 원로목사추대예배 상위 196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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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현 목사. (사진 제공 <새순신문>)

이후 정필도 목사의 후임으로 하마평에 오르내렸던 몇 명의 목사들 중 가장 유력한 인물로 이 교회 부목사 출신의 이규현 목사가 떠올랐고 최근 열린 청빙위원회가 이를 확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규현 목사는 수영로교회가 후임 선정을 앞두고 내세웠던 선발 기준인, 본교회 부교역자 출신이자 해외 선교 사역 경험자라는 두 가지를 충족하고 있다.

이규현 목사는 지난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약 6년간 수영로교회 부목사로 임직했으며 당시에도 정필도 목사와 친분을 유지하면서 교인들에게도 리더십을 인정받은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목사, 수락 과정 순탄치 않았을 듯

현재 이규현 목사는 시드니 새순교회의 담임으로 재직 중인데 이 교회도 이 목사가 개척을 한 후부터 현재까지 약 2,000여 명의 교인들이 모이는 대형 교회로 키웠다. 이런 점도 수영로교회 담임목사로서 검증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 이규현 목사는 처음부터 선뜻 확답을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정필도 목사의 후임이라는 자리 자체가 주는 부담과 본궤도에 올려놓은 시드니 새순교회를 떠난다는 부담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를 의식했는지 정필도 목사는 시드니 새순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면서 그 교인들에게 이 문제를 언급했다고 교인들이 전했다.

이제 남은 절차는 오는 10일 열리는 공동의회의 투표 결과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이 교회 안팎의 분위기다. 정필도 목사가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고 이런 뜻을 청빙위원회가 받아들였으니 교인들 또한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라는 것.

이규현 목사, 선임 목사 꼬리표 떼어 낼 수 있을까

한편 최근 불거지는 대형 교회의 목사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일종의 ‘세습’이 관행처럼 번지고 있는 이때에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의 후임 내정은 의외라는 반응이다. 그만큼 지역과 교계에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고 이 또한 이규현 목사에게는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이규현 목사와 친분이 있는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도 자신의 사례를 들면서 이 목사에게 신중할 것을 주문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그만큼 선임자의 독보적인 리더십을 어떻게 이어 나갈 것인지가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수영로교회 한 집사는 “어느 누가 후임이 돼도 정필도 목사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어렵겠지만 이규현 목사는 한때 수영로교회 부목사로 재직했던 경험도 있고 후임 결정 과정에서도 잡음이 없었으니 크게 부담을 가지지는 않아도 될 것”이라고 했다. 정필도 목사의 시대를 마감하는 수영로교회는 지금 조용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故 정필도 목사 “주님을 향한 일사각오의 마음으로 사셨다”

눈물만큼 은혜… 응답 있어야 움직여

인기 영합 직함 거절하고 오직 복음만

세습 유혹 뿌리치고 건강한 계승 이뤄

사적인 소유 버리고 공적인 삶 이어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에녹처럼 동행한 삶

21일 82세를 일기로 별세한 故 정필도 목사의 위로예배가, 그가 설립한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22일 열렸다. 설교를 전한 수영로여자신학원장 이정삼 목사는 “무릎으로 교회를 세우고, 무릎으로 목회하신 분”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특히 개인적인 욕심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만 바라며 살았던 고인의 삶을 증거하며 그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 목사는 “회복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천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큰 어른을 잃었다는 생각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 몰려왔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1941년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태어난 목사님은 창신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다. 학교에 갈 때도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마치고 돌아오면서 또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셨다. 어릴 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신 분”이라고 했다.

이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작은 가게에서 장사하실 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 여러 가지를 놓고 파셨는데, 목사님은 어린 학생이었지만 가게에서 팔아선 안 될 상품이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께 가게 문을 닫으라고 하셨다. 먹고 살아야 되니 문을 닫지 않으시자, 집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나오지 않으셨다”고 했다.

이어 “그때 어머니의 요청에 창신교회 부목사님이 찾아왔는데도, 가게 문을 닫기 전에는 방문을 열지 않고 그냥 죽겠다고 하셨다더라”며 “어릴 때부터 이미 주님을 향한 일사각오의 마음이 뿌리 깊이 내렸다. 결국 어머니가 가게 문을 닫으시고 가정교사를 하시며 가정을 꾸려나가셨다”고 전했다.

▲22일 수영로교회에서 열린 故 정필도 목사 입관예배 및 위로예배에서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다. ⓒ교회 제공

이 목사는 “원래 목사님의 이름은 정필도가 아니었다. 반드시 도를 깨닫고 끝까지 전하리라는 뜻으로 개명을 하셨다”며 “군에 가서도 그곳을 복음으로 완전히 물들게 하리라는 위대한 복음의 열정을 갖고 사셨다”고 했다.

이후 다섯 교회에서 청빙을 왔지만, 부산에 개척한 고인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무릎으로 교회를 세우고 무릎으로 예배당을 짓고 무릎으로 목회를 했다고 한다. 이 목사는 “눈물이 채워지는 만큼 은혜가 채워진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며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릎 꿇고 기도를 먼저 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있어야 그 다음에 움직이셨다”고 전했다.

또 “성도를 매우 사랑하셨다. 미운 성도가 있으면, 그저 입을 다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만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것을 본인이 체험하고 성도들에게 늘 전하셨다”고도 했다.

이어 “(교단) 총회장 출마나 대외적으로 인기가 있는 것들을 모두 한 마디로 거절하셨다. 은퇴 후에는 세계 방방곡곡으로 다니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고 했다.

아들과 사위가 모두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목회 계승을 이뤄낸 점도 증거했다. 그는 “웬만하면 물려줄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이 한국교회에 너무 많았음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길 바라시며 기도하신 후 호주에 계셨던 이규현 목사님을 후임으로 세우셨다. 교회가 안정되고 더욱 부흥됐다”고 했다.

그는 “목사님도 사람이신지라 욕심이 없을 수 없으셨을 텐데, 전혀 그런 것들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복음 전파만을 바라셨다.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바라셨던 것을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알고 하나님도 아실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또 “교회마다 은퇴금으로 시끄러운데도, 정 목사님은 본인의 사택도 교회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고 차도 마찬가지다.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가지지 않고 오직 교회 이름으로 하셨다. 후원금이 들어오면 선교비로 다 보내셨다. 선교지에서도 관광은 하나도 하지 않으시고 방에서 계속 기도하셨다. 늘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에녹처럼 동행하신 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셨다. 사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 오직 성령, 오직 믿음, 오직 성령 충만으로 사신 목사님이 지금은 주님의 품 안에서 영광 중에 계실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22일 수영로교회에서 열린 입관예배 및 위로예배에서 설교를 전한 수영로여자신학원장 이정삼 목사는 “무릎으로 교회를 세우고, 무릎으로 목회하신 분”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교회 제공

이어 조사를 전한 부산성시화 여성기획단장 조금엽 권사는 “생을 마감하는 많은 이들이 장례예배에서 모두 잘 사셨다고 손뼉을 치지는 않는다”며 “평생을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교회를 사랑하시며 하나님나라의 전진과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신 목사님의 삶을 보며, 나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전했다.

조 권사는 “단순하고 선명한 삶을 사신 목사님의 뒷모습을 면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선한 모범이 되어 주셔서 감사하다”며 “그저 기도와 선교를 위한 삶은 어떤 가치를 좇아야 할지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신 멋진 스승이셨다”고 회고했다.

한편 고인은 올해 2월 24일부터 급성폐렴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 위로예배는 22일(화)부터 24일(목)까지 오전 11시 수영로교회 본당 은혜홀에서, 천국환송예배는 25일(금) 오전 11시 수영로교회 은혜홀 대예배실에서, 하관예배는 25일(금) 창원공원묘원에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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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

큰 바다 목회자

정필도 목사, 그는 큰 바다였다. 거대한 항공모함도 가뿐하게 정박할 수 있는 안전한 포구이기도 했다. 청탁(淸濁)을 다 넉넉히 수용할 큰 그릇이었다. 그의 아이콘은 기도하는 모습과 안아주는 모습으로 새겨질 수 있었다. 그는 서둘지도 않고 쉬지도 않은 장거리 마라토너였다. 그러나 그는 도전자였다. 그가 이룬 도전의 기록들은 짜릿하다. 일월산에서 공군 군목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연히 ‘전 장병의 복음화’를 목표로 세웠다. 첫 주일을 맞아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교회에 갔다. 전 장병이 아니라 단 한 장병도 나오지 않았다. 장병들이 선뜻 교회로 발을 뗄 수 있는 부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정성들여 준비한 설교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전략을 바꿨다. ‘기도 최우선 전략’을 세웠다.

▲ 한강 이남 지방 교회에서 최대의 교회를 일군 정필도 목사가 제9회 대양주 목회자 부부 세미나 주강사로 참석해 새순수양관 호숫가 주변을 산책하고 있다. ⓒ Christian Review

“주님께 날마다 울면서 ‘전 장병이 예수 믿게 해주세요’라고 매일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울면서 기도하면 응답이 빨라요. 하나님 앞에 우니 주님께서 ‘내가 너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달린 다음에야 비로소 너를 구원할 수 있었다.

전 장병을 구원하려면 네가 얼마나 희생해야 되는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이 장병들을 구원하기 위해 네가 죽을 수 있느냐?’는 질문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예, 주님!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장병들이 예수님만 믿게 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의 응답으로 그는 비장의 각오를 했다. 부대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부인과 아이를 친정으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장교 숙소로 들어갔다. 다행히 처가 형편이 넉넉한 편이라 군목 월급은 아예 장병들을 위해 쓰기로 작정했다.

“군목 봉급으로 과자봉지도 만들고, 커피 끓여 군종병과 함께 밤 1시든 2시든 초소를 돌며 과자도 커피도 권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다 먹은 다음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하지요. 먹여놓고 전도하면 제일입니다. 거절못하지요. 딱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귀한 아들이 군대 와서 얻어터지고, 잠도 못자고 고생하는데 눈동자처럼 지켜주소서. 이 아들이 예수 믿어서 예수 믿는 가문되게 하시고, 성공해서 지도자가 되게 하소서. 힘들고, 배고파도 잘 견디게 해주소서…’ 아무도 안보는 산중에서 막 축복하면 이 아이가 울어버립니다. 이등병들입니다. 그렇게 일 주일을 도니 이등병만 열 명 정도 교회 나왔습니다.”

기적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새로 부임한 젊은 군목이 새벽 한두 시에 밤잠도 자지 않고 수상하게 초소를 돌아다닌다는 보고가 보안대를 통해 부대장에게 들어갔다. 이미 조사를 마친 부대장이 어느 주일 아침, 교회에 나타났다. 불신자로 무섭기로 소문난 부대장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배 드리러 왔지.”

예배드리러 온 부대장이 한 마디 했다. “왜 이렇게 없어? 전 장병 다 모여!”부대장 한 마디에 외출나간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 장병이 5분 내에 다 예배드리러 모였다. 이것이 전장병이 처음으로 모인 예배였다.

“예수 안믿는 부대장에게도 성령이 임하니, 그분 덕분에 일 년 뒤에는 전 장병에게 합동세례를 주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부대장이 예수는 안믿으면서 신앙생활에 필요한 십계명, 주기도문 사영리를 외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준비만 되어있으면, 주님의 큰 손이 나를 붙잡고 쓰시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 그는 경건의 문제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역시 군목 때, 소령 목사가 음란한 글을 써놓고 음담패설을하며 막 낄낄대고 웃어댔다. 그보다 높은 계급이었지만 분연히 일어섰다. “목사님, 그 입으로 설교할 수 있어요?”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호통을 치니, 나중에 그가 새파랗게 벌벌 떨더라고 하였다. 그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군목으로 3년 있으면서 어느 부대를 가든지 전 장병, 문관들 가족들까지 다 세례를 주는 쾌거를 이루었다. 심지어 불교회장인 부대장이 도와줄 정도였다. 사랑으로 기꺼이 자기를 희생할 마음이 있는 종, 기도하는 종, 경건한 종이면 아무리 환경이 안좋아도 상관없음을 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공군 군목시절‘기도 최우선 전략’을 세워 전 장병, 문관들 가족까지 세례를 주는 쾌거를 이룬 정필도 목사. 그는 군목생활을 마감하고 75년 6월 1일 부산 수영로교회를 개척, 부산을 복음화하는 성시화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 Christian Review

주님과 함께 하는 목회

그렇게 군목 생활을 마감하고 부산에서 수영로교회를 75년 6월 1일 개척했다. 개척 과정은 아주 원활했다.

“수영로교회는 초량교회 정우창 장로님께서 ‘서원기도를 들어주시면 예배당을 지어 바치겠습니다’하여 서원이 다 이루어져 서원한대로 성전을 지어바치면서 시작된 교회입니다. 제대할 때 쯤 ‘예배당 지어줄게 서울 가지 말고 부산에 개척교회 하자’하여 수영로 로터리에 500명 들어갈 수 있는 교회를 2층으로 지어주셨습니다. 장소가 로터리라 좋았습니다. 모든 버스가 다 서는 곳입니다.”

부산 전체를 복음화하는 비전으로 개척한 장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절대로 부산에서 천 명 이상된 교회는 안나온다”는 역사와 경험이 입각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이 경험과 역사에 도전하며, “절대로 죽어도 우리 교회는 1천 명이 넘습니다”하며 믿음의 말을 했다. 교회를 지어 입당하고 보니 170여명이 어디서 몰려왔는지 몰려왔다. 그리고 해마다 2배씩 늘어나 4-5년이 되니 4부 예배를 드릴 정도였다. 3-4년 후에 이미 천 명이 넘었다. 믿음의 말이 증명되는 기간이었다.

그렇게 나이스한 출발, 소위 ‘쭉쭉빵빵’ 성장 일로에 있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전환점과 맞아야 했다. 그렇게 급성장하고 보니 ‘내가 목회를 잘하구나, 설교를 잘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가면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를 하겠구나!’하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수요일 상상치도 못할 큰 이변이 일어났다.

“그날, 피아노 반주자와 집사람만 어른이었고, 애들만 몇 명 오고 어른은 한 사람도 안나왔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큰 문제였다. 그는 문제를 문제로 풀지 않고, 기도 최우선전략의 생활철학에 따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지난 주일에 꽉 찼는데 수요일엔 왜 나오지 않습니까?’하며 주님께 답을 얻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목요일에도 집에 안가고 계속 기도했다. 새벽예배 끝나고 ‘말씀 좀 해주세요’하고 매달렸다. 급하면 딴청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을 각오하고 주님의 응답에 매달려 끝장을 내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주님, 말씀 좀 해주세요, 제 잘못이 무엇인지요?’하고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갑자기 ‘니가 해? 내가 하지. 니가 해? 내가 하지! 니가 해? 내가 하지’하는 책망을 주님께서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주님의 책망에 당황하여 ‘주님 잘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줄을 몰랐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못한 말, 제가 잘 하면 되는 줄만 알았지, 주님이 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세요’고백했더니,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니가 세운 것이 아니고 내가 세운 것이다. 니가 설교 잘 해서 목회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양을 모아주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 이후, 그는 ‘주님이 많이 모아주시면 대교회 되고, 조금 모아 주시면 작은 교회, 흩뜨려버리면 없어진다’는 교회론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머리털 하나도 참새 한 마리도 안떨어집니다. 교인 하나도 그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으시면 한 주에도 몇백 명씩 들어옵니다. 일 년에도 7천 명씩 들어왔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이 담임목사님입니다. 나는 교육전도사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예배 때도 너무 안나왔다. 앞으로 나와 앉으라 하니 뒤에는 텅 비었다. 찬양 인도하는 중에 기도했다. ‘주님. 심방 좀 해주세요, 누가 저같은 설교 들으러 오겠습니까? 저같은 목사 설교 들으러 누가 옵니까? 주님이 메추라기 몰아오듯이 몰아오십시오, 심방해 주십시오’기도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표기도하는 집사가 기도 끝나고 아멘하고, 뒷문이 활짝 열리면서 지각생이 몰려오는데 꽉 찼다. ‘주님 수고하셨습니다.’여러 차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그는 완전히 ‘주님과 함께 하는 목회’로 좌표를 설정하고,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며 목회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저는 목회를 완전히 ‘주님과 함께하는 목회’를 합니다. 많은 일들을 제가 직접 만나고, 회의를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빈자리가 있네요, 주님께서 몰아와 주십시오’하고 주님께 의지합니다. 완전히 제 머릿속에는 주님이 하신다는, 주님이 보내주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 사도 바울이 전도하고 교회 세우고, 아볼로가 목회했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 열매 맺게 하시고, 변화․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수고한 것에 대해서는 상을 받습니다. 주를 위해 산 것에 대해서는 행한 대로 상을 받습니다. 목회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것, 생명의 역사, 열매 맺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목회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잡고 계신 것이지요.”

▲ 황혼이 깔린 새순교회 수양관 호숫가에서. ⓒ Christian Review

좋은 사람과의 만남

정필도 목사, 그는 예수를 믿는 첫 해인, 초등학교 6학년 때 사명을 깨달았다. 판잣집에서 편모 슬하에 자라면서도 구김살 하나 없이 공부 하나는 기막히게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어느 날 강원도에서 전학온 한 친구(이범호)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전학 온 그 친구가 마침 반장이던 그의 자리가 비어 짝지가 되면서 그에게 전도한 것이 물이 스펀지를 빨아들이듯 복음이 그의 영혼 속에 쑥쑥 스며든 것이다. 그 친구가 인도한 창신교회가 그렇게 좋았다. 좋지 않은 게 하나도 없을 만큼 천국과 다름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공부하는 목적도 ‘훌륭한 목사’가 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려면 공부를 잘 해야 되겠다고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목적을 다 세워놓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중고등학교 6년을 어떻게 신앙생활 할까 걱정되어 3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 어떤 일이 생겨도 교회는 안빠진다. 언제나 어떤 사건이 생겨도 교회는 안 빠진다. 둘째, 하루에 세 번 이상 기도한다. 등하교 때 기도하고, 저녁 먹으면 기도하고, 일 있으면 철야하고, 학교 가서는 졸아도 기도는 한다. 그것도 모자라면 삼각산에 가서 기도한다. 셋째, 성경을 한 장 이상씩 꼭 읽는다.’ 이렇게 정해놓고 중고등학교 때 항상 지켰습니다. 이 세 가지 결심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성령이 가르쳐주신 대로 꼭 지켰습니다.

옛날 예배당 돗자리에 무릎 꿇고 기도하자마자 성령이 확 뒤엎고, 철야기도할 땐 추운 겨울이라 제일 피곤했는데도, 갑자기 따뜻한 담요로 씌워주듯이 따뜻했습니다. 갑자기 따뜻하니 은혜 받는 날이 많았지만, 못받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기도하니 평생의 축복이었습니다.”

경기중고등학교 시절, 좋은 멘토가 생겼다. 사람을 잘 만나는 게 축복이었다. 주변에 인격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문제가 있을 때 의논했다

“저를 전도한 친구의 형(이문호 장로, 미국에서 최근에 목사가 됨)이 당시 서울공대생으로 성령충만했어요, 그 형이 산기도 가면 따라가기도 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믿어라’고 멘토링을 해주었습니다. 처음부터 그 형을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면, 반드시 보너스를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도도 열심히 하고…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계획이었습니다, 은혜를 일찌감치 받으니 공부도 잘하고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그 형이 공부를 잘 했으니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에게 햇볕같이 맑은 날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교 2학년 때, 그의 가정은 너무 가난하고 못살고 빚만 가득했다. 사면팔방으로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세상 살아서 뭣하노?’하여 이런 세상 살기 싫어 죽을 길이 없나 연구해보니 길이 있었다. 바로 ‘금식기도하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름 방학 때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이렇게 죄 많고 음란하고 악한 세상 살기 싫어요. 하나님, 이런 세상 싫으니 저를 불러가세요?하며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지만 안죽었다. 창자가 달라붙는 것같았다. 불현듯 ?모세도, 예수님도 40일을 금식하며 지내도 안죽었다. 사흘 굶어도 죽겠는데, 고생하기 싫어서 죽으려 하니, 고생만 죽도록 하게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을 안넘기려고 있는 힘을 다해 죽으려고, 살기를 포기하고, 죽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는데, 주님이 그 자리에 찾아오셨다. 현실 가운데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때 저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너는 죽으면 안된다! 나를 위해 살아줄 수 없겠느냐?’고 세 번이나 애원하듯이 말씀 하셨습니다. 인격을 가지신 분이 오셔서, 말씀하시는데 도저히 그 말씀을 거절할 수 없어서, 금식을 중단하고 그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주님이 ‘날 위해 살아달라’고 애원하셨으니, 세상 것 다 포기하고 주님만 위해서 살리라 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기적같은 삶이 열리기 시작했다. 서울대에 합격한 그에게 입학하기도 전에 4년 학비가 다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장학금이 들어왔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제적인 궁핍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학 4년 동안 입시생들 입주과외를 해야 했다. 12시에 자면 5시에 일어나 두 시간 가르쳤다. 그리고 4·19, 5·16 등이 일어났을 때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동생을 대학에 보내야 하니 시간이 없었다. 5시간밖에 못자니 살이 다 빠졌다.

“대학 졸업식 끝내고 교회 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대학 4년을 왜 이렇게 보내야 합니까?’했더니, ‘내가 너를 그렇게 묶어놓지 않으면 네가 목사가 될 것 같으나?’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한가하면 경건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면 같이 공부하자고 착 달라붙은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학교 길목에 지키고 있는 여학생도 있고요. 그래서 속으로 ‘이 암사탄아!’ 하고 모른척하며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주의 종 만드시려 시간을 안주시고, 졸업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경건하게 살려면 시간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한가한 시간에 사탄이 가장 잘 공격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느라, 성경 보느라, 좋은 책 보느라, 심방하는데 바빠야 합니다. 다윗도 낮잠 자고, 한가한 시간에 뭘 했습니까? 한가한 시간에 사탄이 역사하기 쉽습니다. 한가할 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 강의를 마친 후 망중한에 빠진 정필도 목사(왼쪽)와 이규현 목사. 이규현 목사는 수영로교회 부목사를 지냈다. ⓒ Christian Review

눈물이 차야 교인이 찬다

경기중고, 서울대 – 소위 KS 정통파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신학교로 진학했다. 신학교 2학년 때, 30여 명 모이는 개척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없어 그에게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새벽기도 7번, 수요예배 등 기본적으로 10번의 설교를 해야 하니 신학교 2년차로서는 힘에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울부짖는 기도밖에 할 게 없었습니다. 그렇게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어린애도 울면서 부르짖으면 엄마 아빠가 내버려 두지 않지 않습니까? 안아도 주고 뭐라도 줍니다. 인간도 그러는데,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으시더군요. 제 설교가 부족한데도 주일마다 새신자가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특별히 낯선 어머니뻘 되는 분이 고개를 끄떡 끄떡 하더군요. 마음속으로 ‘큰 물고긴가?’ 생각하며 예배 마친 후 그 사람 놓칠까봐 나가는데, 아 ‘내가 이 교회 계속 나오기로 결정했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기도대장이었고, 돈 걱정 없이 사는 분이었습니다. 기도대장! 하나님께서 돕는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가 있는데 우리 개척 교회에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이 분이 시간도 많고, 가난한 총각 전도사가 심방도 같이 갈 수 있으니 제가 마음껏 심방할 수 있었습니다.

심방할 때 택시값, 점심값 다 내셨습니다. 기도 부탁하면 결사적으로 기도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심방 다니면서 설교마다 은혜를 받아요. 한 번은 따라오지 않아 돌아보니, 저 나무 밑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집사님, 왜 거기 계셔요?’

‘전도사님, 내가 너무 좋아 꿈인가 생신가 너무너무좋습니다’하는 겁니다.”

신학생 정 전도사는 이 ‘기도대장’에게서 어느 날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영감있는 말을 들었다.

“전도사님 예배당에 교인이 꽉 차길 원합니까?”

“그럼요. 당연히 차기를 바라지요.”

“그럼, 눈물이 차야 교인이 찹니다.”

그렇다! 눈물이 차야 교인이 찬다! 그에겐 그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배당은 못채워도 설교하는 단은 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부터 울면서 기도했다, 많이 울어야 한다고 밤새도록 콧물 눈물 흘리면서, 눈물이 쌓이면 옆으로 돌아가면서 기도하고, 또 옆으로 옮겨가면서 설교하는 강단만은 기도로 채웠다. 4개월 째 주일예배 때 107명이 나왔다. 일 년에 3번 이사해야 할 정도로 교회가 부흥했다. 그보다 2배 되는 장소로 옮겨야 했다.

“그때 저는 목회를 몰랐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것도 몰랐습니다. 다만 눈물로 기도한 것뿐입니다.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전도사가 부교역자까지 두었습니다. 주일학교, 중고등부까지 있었습니다. 20대 총각 전도사가, 결혼 못했으면서도 결혼식 주례도 하고, 장례도 집례했습니다. 그때 훈련받은 것이 평생 힘이 됩니다. 개척교회하면서 새로 오는 사람이 어떤 요구를 하는가도 이때 이미 경험했으니 수영로교회 때는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때 경험했기 때문에 기도하면 이 교회는 될 것이고, 아니면 안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강도사 고시 앞두고,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준비하는데, 그는 목사 되는 것이 걱정이었다. 그렇게 훌륭하다던 사람들도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안수받는 것이 두려웠다. ‘하나님 영광가리는 일을 했다면 빨리 데려가 주세요’하며, 청계산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했다. 금식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먹기도 싫었다. 월요일에 시작했는데, 목요일에는 기도하는 중에 비가 왔다. 비 맞아가면서 ‘말씀하소서! 순종하겠습니다’하며 부르짖었다. 그 한 말씀을 들으려고 비를 맞아가면서 부르짖는 순간, ‘목사가 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할렐루야!’하는데, 하늘을 보니, 비가 오는 새카만 하늘에 조그만 빛줄기가 비쳤습니다. 이 빛이 마치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본 것과 같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해 170명이 시험을 보았는데, 11명 붙었습니다. 예상문제를 못맞춰도, 공부를 안해도, 주님이 말씀하시면 책임을 지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 경험 역시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순간에 끝난다, 아무 것도 염려할 게 없다. 그렇게 수지맞는 일이다’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그렇게 한번 목숨 걸고 기도해 보십시오. 날 거두시든지, 불을 내려주시든지… 아주 끝장을 내야 합니다. 그런 체험을 하면 생애가 바뀌고, 삶이 달라지고, 목회가 달라지고, 희한한 일들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학교 때는 개척교회만 집중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한국 최고의 교회였던, 충현교회, 영락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등을 모델화하여 연구했다. 각 교회 담임목사님들께 한 시간만 내달라고 부탁하여 예약했다. 질문지를 만들어, 그들의 ‘비밀과 비장의 카드’ 등 알고 싶은 것을 철저히 연구하여 그들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 리서치팀의 동역을 이루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로는 신성종(전 총신대 신대원장, 충현교회 담임목사), 예종탁(동현교회 담임목사, CBS 이사장) 목사 등이다. 신학교 수업 때도 항상 맨앞에 세 명이 앉았다. 공부도 다 잘했다. 월요일마다 모여서 스터디 그룹도 했다. 이들이 나중에 한국 교계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 대양주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서 아내 박신실 사모에게 축복기도하는 정필도 목사 ⓒ Christian Review

바보 사모

목사 안수를 앞둔 그에게는 또 하나의 숙제가 떨어졌다. 노회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총각에게는 목사안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든 결혼을 해야 했다. 그때 교회 여전도사가 한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어떠냐고 물어 “글쎄요. 뭐 좋죠”라고 한 말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혼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알고 보니 당시 부교역자로 섬기고 있던 신현교회 장로의 딸이었다. “교역자니 소문이 나기 전에 빨리 약혼식을 치르자”라는 전갈을 해왔다.

"당시 아내는 학교 다니는 학생으로, 학교만 다녔으니 결혼할 준비가 전혀 안돼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목요일에 ‘예스’했는데, 바로 그날로 월요일에 약혼하자고 했어요. 당사자는 만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토요일에 당사자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주일 지난 다음날인 월요일에 약혼식 했으니 얼마나 웃겼습니까?

그런데 결혼식도 한 달 안에 하자고 했습니다. 둘은 이야기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야기도 안해보고 결혼을 한 것이지요. 결혼식 하니 둘만 한방에 남았습니다. 이제 큰일 난 겁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목사 부인될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학교 다니다 갑자기 시집가라 해서 시집 왔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해요?”

백지에 그림 그리듯이 ‘사모학’ 강의를 했다. ‘일대일 대화식 수업’이었다.

“사모는 ‘똑똑사모’와 ‘바보사모’가 있다. 똑똑사모는 말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여 교인들에게 인정받는다. ‘바보사모’는 그저 싱글벙글 하며, 뭘 물으면 ‘난 몰라요’ 한다. 그러면 뭘 할래?” “바보사모할래요”

이 수업은 특효약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준비된 것 없이, 교인들 만나면 그냥 싱글싱글 웃고, 뭘 물으면 ‘난 몰라요. 목사님께 물어보고 할께요’했다. 일년 후에 친구 목사들 사이에 “백년에 하나 날까말까한 사모가 났다”는 소문이 났다.

그러나 소문과 달리 부친의 ‘놀라운 추진력’으로 결혼한 박신실 사모는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다. 죽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쪽지를 써놓고 도망하려다 포기하고 17일 동안 아무 것도 안먹고 금식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했다. 그때 하나님의 놀랍게도 ‘네가 정 목사에게 시집간 것은 네가 간 것이 아니다. 내가 정 목사를 이렇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이렇게 하기 위해, 자녀들은 목사의 자녀들의 샘플처럼 세우기 위해서이다…’는 응답을 주셨다. 이 음성을 듣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담대했다.

“제가 설교준비 하는 동안 다른 방에 가서 몇 시간씩 기도해 주고, 제가 작성한 설교 원고를 다른 종이에 깨끗하게 옮겨적어 주면서 설교할 때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을 낳은 뒤에는 아이들에게까지 아빠의 설교를 위해 함께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기 시작하는데, 5천 명 모이는 자리에서 한 달 동안 세미나 할 정도입니다. 배짱이 대단합니다. 외국 나가서도 강사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변화를 준 것입니다.”

▲ 정필도 목사는 3박 4일간의 목회자 세미나에 아내와 함께 참석해 강의도 하고 강의를 듣기도 하며 대양주지역 목회자들과 우의를 돈독히 다졌다. ⓒ Christian Review

기도 최우선 전략

“하나님으로 일하게 하라, 내가 일하면 힘들지만 하나님이 일하면 쉽다.” -정 목사의 철칙이었다. ‘하나님으로 일하게 하는 그 방법’과 교회부흥도 바로 기도 최우선 전략이었다.

“모든 것 내려놓고 하나님께 부탁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하고, 말씀대로 뜻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께 부탁하며 울부짖습니다.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결혼주례도 장례식도 못합니다, 악수도 못하지요. 제가 하는 일은 기도와 설교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친해서 나오는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이 모으시는 일입니다. 새벽기도 끝나면 보통 3시간 전후로 기도합니다. 영감 주시고 아이디어 주시고 메모하다 보면 주님이 하나하나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일꾼도 사람도 보내주십니다. 헌신된 일꾼이 얼마나 많은지요… 일년에 7천 명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70%는 교회를 평생 처음 오는 사람들입니다. 20-30대가 꽉꽉 찹니다. 제가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으로 일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발버둥치지 말고 기도밖에 없습니다, 결사적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기도라는 철칙을 가지고 있다.

“어떤 문제도 하나님이 풀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문제로 풀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쉽게 해결하십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에 문제 생기는 건 엉킨 실과 같습니다. 내가 풀려고 하면 하루 종일 풀어도 더 엉킵니다. 주님께 드리면 주님이 푸십니다. 절대 문제 생기면 나서지 말고, 의논하지 말고, 말하지 말고 기도만 합니다. 한두 달이면 다 잊어버립니다.

특히 교역자는 성령께서 문제 풀어줄 때까지 충분히 기도해야 합니다. 목숨 걸고 끈기있게 기도하다 불 받고 주의 음성 들으면 영력이 생기고, 소문이 나고, 교회가 계속 부흥됩니다.”

영적전쟁에서도 기도가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역설했다.

“부흥회 인도하러 가서, 4-5차례씩 마귀가 절 넘어뜨리려고 진을 치고 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정신 안차리면 부흥회도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광지에 부흥회 가서도 관광 안하고 집회합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새벽예배 드리고 나서, 12시까지는 거의 기도합니다. 점심 먹고 나서 또 기도하고 말씀 전합니다. 먹는 것, 보는 것 희생하고, ‘사례비는 주든지 안주든지 완전히 포기하겠습니다, 그건 주님의 뜻이고 모든 것을 희생할 터이니 주님 은혜만 임하게 하옵소서’하고 간절히 매달리고 그러니 집회에 은혜가 임하고 부흥합니다.”

교회 안의 영적 전쟁도 주목해야 한다고 경험을 들려주었다. 교회 지도자, 담임목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사탄의 전술전략을 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회장만 흔들리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교회가 영력이 강하면 사탄은 머리를 숙입니다. 괴롭히는 사람들, 선동하는 사람들, 또 그걸 일러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 알려주느냐? 꼭 토요일 설교 준비할 때 일러줍니다. 이 모든 것, 다 사탄의 역사입니다. 보통 때 이야기해주지 않고, 토요일에 설교 준비시간에 말입니다. 목사를 위해주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마귀새끼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두 번 다시 이런 전화하지 마시오. 나는 그 분도 사랑합니다’합니다. 절대 정보를 들으면 안됩니다.

목회자가 해주는 일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대들거나 못된 짓하는 사람이 생기면 목회자의 영력이 떨어집니다. 그 사람 탓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몇 시간이고 목숨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강해지면 전체가 콱 숙입니다. 아무도 불평도, 반항도 하지 않습니다. 교역자는 누구든지 공격해 오면 말로 싸우지 말고, 결사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말로 싸우면 집니다. 공격하는 사람이 왔다는 자체가 위기입니다. 그 사람이 머리 숙일 때까지,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 내가 이런 인간이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목회할 수 있어요 하지요. 그럴 수 없다면 괴로워서라도 목회할 수 없습니다’하고 기도하면서 만나면 끌어안을 수 있을 때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그 사람이 변화되고 딴 사람이 됩니다. 안아주면 눈물 흘리고, ‘세상에 내가 몇 십 년 예수 믿어도 이런 목사님 처음 만났다’고 나팔수가 되어 다닙니다. 보너스이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성령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목사는 목회를 사랑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그런 자세로 목회하면 안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긴지 모릅니다.”

▲ 열강하는 정필도 목사 ⓒ Christian Review

비전이 큰 교회가 큰 교회

이런 기도의 최우선 전략은 교회 대지를 구입할 때도, 교회건축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돈이 남아돌 정도였다. 새벽기도 한 다음 로터리를 땅밟기를 하면서 기도했다. 부산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여리고성처럼 단단한 로터리 일대가 복음으로 점령되어야 했다.‘주님, 로터리를 다 주세요. 이 일대를 우리 교회에 붙여주세요!’ 몇 년을 그렇게 돌면서 기도하다가 문득 해기운쪽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하며 무서운 속도로 새카맣게 올라갔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새를 봐라. 내가 저 새를 위해 예비해 놓은 이 공간을 봐라. 얼마나 크고 넓으냐? 다만 저 새가 날개치는 만큼 올라가고, 비상하는 만큼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 예비해놓은 것이 이렇게 넓고 많다. 다만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은 얼마든지 주겠노라’는 응답을 받았다.

이 응답받은 이후 기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 만 평이 여기저기서 나왔고, 처음 예상한 것보다 3천 500평이나 더 많은 땅과 건물을 막 안겨주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었다. 응답을 받으니 믿음이 생겼다.

“교역자의 믿음만큼 믿음있는 교회가 됩니다. 돈보다 급한 게 믿음입니다. 믿음이 충만하면 헌금이 충만하고, 믿음이 없으면 헌금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성도들의 믿음을 키울까?’ 그 걱정을 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시켰습니다. 아, 24시간 기도하는 동안 병이 낫고, 사업이 일어나고 하여, 헌금이 평소보다 더 나왔습니다. 믿음이 커지니 자발적으로 헌금이 더 나옵니다. 그 땅을 사서 성전을 짓는데 일 주일에 최하 15억 많으면 30억의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믿음이 충만하면 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부터 구축해야 합니다. 믿음 있으면 해결됩니다. 믿음이 작으면 헌금 안하고, 불평하고 방해꾼만 생깁니다. 가장 강한 믿음은 목숨을 거는 믿음이지요. 순교적인 믿음, 목숨을 걸고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목숨 걸고 나가면 그 사람 앞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이나 마귀나 목숨 건 사람에겐 꼼짝 못합니다.”

▲ 대양주 목회자 부부 세미나 개회예배에서 인사하는 정필도 목사 ⓒ Christian Review

부산 성시화

정 목사는 비전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부산 전 시민에게 전 복음을 전하는 성시화가 오랜 꿈이었다. 이를 위해 이미 준비된 그릇이었다. 부산성시화 본부가 10년 전, 창립될 당시 모든 교파 모든 교단 대표들이 모였다. 거기에서 성시화본부장을 당연히(?) 그에게 맡겼다.

“제가 항상 부산복음화를 많이 외치고 하니 그분들이 정해주셨습니다. 일하기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저를 뽑아주어 제 소신껏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전교인들에게 회비내고 기도하게 하면서 성시화운동본부 예산 80% 이상을 우리 교회에서 감당합니다. 아예 부목사 중 한 명을 성시화본부 상근 사무스탭으로 두었습니다. 우리 교회 큰 빌딩 하나에 모든 선교단체에 무료로 사무실을 주었는데, 거기에 성시화운동본부 사무실도 있습니다. 큰 집회를 하면 너무 많이 모여서 헌금이 넘칩니다. 그래서 53사단 예배당 짓는다 해서 몇 억원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봉고버스도 사주면서 마음껏 일하도록 합니다.”

부산성시화에는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예수님 탄생의 참된 의미를 전하기 위해 ‘예수 탄생 사랑의 대행진 행사’를 한다. 성탄절 오후 2시 부산 전역 15개 구, 군을 비롯해 해운대 해수욕장, 광안리 해수욕장, 부산역 광장 등에서 일제히 실시된다.

“성탄절이 되면 모두들 흥겨운 캐롤송과 화려한 트리, 산타할아버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탄절의 대표적 이미지는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왜곡시킨 것입니다. 성탄절은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나누는 사랑의 날로 회복돼야 합니다.

그래서 이 행사를 통해 바른 성탄문화의 정착과 함께 기독인만의 축제가 아닌 부산시민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발전시켰습니다. 이 행사는 경배와 찬양, 통성기도, 지역별 특별순서, 말씀선포, 결의문 낭독, 거리정화운동 순서로 진행됩니다. 모든 교회가 산타클로스로 분장하여 한 장소로 걸어오면서 전도하고, 해운대 같은데서 부산시장 모시고 전체가 축하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쓰레기도 다 줍고, 연말에는 극빈자들을 위해 쌀 모으기를 하여 1만 가마 모아서, 부산시내 고아원 양로원 등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 다 나누어 준다고 한다. 그리고 부활절에는 ‘십자군 대행진’을 한다. 로마병정과 예수님처럼 분장하여 4군데서 4팀이 연합집회하는 사직동 실내 운동장으로 행진한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매년 부활절마다 하니 이제는 익숙해지고 점점 업그레이드되기도 한다.

“전국에서 모델이 될 만한 성시화운동이 아닌가 합니다. 성시화 통해서 전교회들이 하나 되니, 기독교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시장부터 국회의원들도 교회행사에 얼굴을 다 내밀 정도도 비중이 커졌습니다.”

엑기스 한 방울

부산 최대의 교회, 아니 한강 이남 지방 교회에서 최대의 교회를 일군 정 목사 생애를 몇마디 ‘농축 엑기스’로 만들어 내면 무엇일까? 기도와 사랑으로 표현해도 될 듯하다. 특히 그는 사랑의 마음이 가득 담긴 설교를 통해 성도들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교인들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A급 신자는 칭찬할 것밖에 없는 사람이지요. 저 사람만큼만 되었으면 하는 신자들입니다. B급 신자는 중간입니다. C급은 아주 고약한 신자입니다. 이중생활을 할 수 있고, 술도 한 잔 하고, 교회에서 행세도 하는 문제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들은 C급 신자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A급은 내버려두고, B급은 대충하고, C급을 박살내고 그들이 은혜 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설교 준비할 때 C급을 놓고 설교준비를 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찾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는 교인들을 전부 C급으로 바꿔 버립니다.

사람은 취급하는 존재다. 멀쩡한 사람도 바보 취급하면 바보됩니다. 취급하는데 따라 바보도 되고 천재도 된다. 아이들에게도 정결한 교인으로 칭찬하고, ‘너는 시집 잘 갈거야, 밤낮 누구든지 너를 데리고 가는 사람은 수지맞을 거야!’ 해보면 말대로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C급을 상대로 설교하다보니 제일 화가 나는 사람이 A급 사람입니다. 그러니 C를 보지 말고, A급에 맞추어 설교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너무 행복합니다. 그들의 사진을 쫙 붙여놓고, 이 사람들에겐 좋은 것 주고 싶고, 나눠주고 싶고 A급 신자 놓고 사랑이 넘치는 심령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그러면 B급 C급도 A급으로 변하지요.

자기는 농땡인데 목사님이 날마다 칭찬해주니… 교인들 모두가 A급 신자 흉내라도 낸다. 아주 최고의 신자인 것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변하려고 합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 어디 가서도 사랑 못받고, 대접 못받았는데, 목사의 설교로 최고의 대우를 받으니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조는 사람, 고약한 사람보고 설교하면 목소리만 커집니다.”

기도보다 성령보다 결코 앞서지 않는 그의 삶, 설교 한편에서도 사랑으로 성도들에게 다가가 갈등과 아픔을 치유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그의 엑기스는 눌러도 눌러도 콸콸 쏟아져 나오는 진액덩어리였다.☺

수영로교회 설립자 정필도 목사 별세

부산 수영로교회 설립자 정필도 목사가 3월 21일 오후 4시 34분 별세했다. 향년 82세. 정 목사는 올해 2월 24일 급성폐렴으로 지금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신실 사모, 아들 성은, 딸 은애, 은영이 있다. 조문 장소는 수영로교회 1층 평강홀이다.

부산 수영로교회 설립자 故 정필도 목사. ⓒ교회 제공

장례는 부산성시화장으로 5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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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수영로교회 설립자 정필도 목사가 3월 21일 오후 4시 34분 별세했다. 향년 82세. 정 목사는 올해 2월 24일 급성폐렴으로 지금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신실 사모, 아들 성은, 딸 은애, 은영이 있다. 조문 장소는 수영로교회 1층 평강홀이다.

유가족 측은 고인의 뜻에 따라 조화, 조의금 등은 받지 않는다고 전했다. 장례는 부산성시화장으로 5일장이다.

위로예배는 22일(화)부터 24일(목)까지 오전 11시 수영로교회 본당 은혜홀, 입관예배는 22일(화) 오전 11시 수영로교회 본당 은혜홀, 천국환송예배는 25일(금) 오전 11시 수영로교회 은혜홀 대예배실에서 거행된다. 하관예배는 25일(금) 창원공원묘원에서 드린다.

정 목사는 서울 창신동에서 출생하여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이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했으며, 미국 리폼드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MIN.)를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명예 신학 박사(D.D.) 학위를 받았다.

부산성시화운동본부장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하고, SERVING THE NATIONS(국제NGO) 이사장, 부산기독교총연합회 전회장, 부산세계선교협의회 이사장, 부산 CTS 이사장 및 극동방송 고문, 수영로교회 원로목사로 섬겼다.

고인은 서울 신현교회와 장충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였으며, 공군 군목 시절에는 전 장병 복음화에 힘썼다. 1975년 6월 1일, 군목을 마친 후 부산 수영교차로에 수영로교회를 개척하여 36년간 몸담으며 성도 3만 5천여 명의 대형교회로 키워 냈다.

은퇴 이후 정필도 목사는 동남아시아, 중국, 러시아 등 오대양 육대주의 해외선교에 매진했다. ‘말씀 중심의 교회, 은혜 중심의 교회, 선교 중심의 교회’라는 철학으로 목회 인생을 살아온 영적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정필도 목사의 저서로는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 《교회는 목사만큼 행복하다》(이상 두란노),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상 생명의말씀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이상 목양), 《은혜 위에 은혜(상/하)》(엠마오), 《기도로 눈물로 은혜로(설교선집 10권)》(홍성사) 등이 있다.

출처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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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마스크 빼달라” 한 정필도 목사, 그러고는…

[email protected]) 기독일보 김진영 기자

트윗하기 故 정필도 목사 천국환송예배가 25일 오전 부산 수영로교회 은혜홀에서 부산성시화운동본부 및 수영로교회 장(葬)으로 드려진 가운데, 고인의 사위인 이항모 집사(사위)가 전한 고인의 임종 직전 모습이 감동을 전했다. 이 집사는 “이 슬픔의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성도님들께서 가족들과 함께 울어주시고 곁에 있어주셔서 가족 모두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고 있다. 정말 감사드린다”며 “정필도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 하는 이 순간,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와 축복과 은혜를 말하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이 집사는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 영적 스승과 동역자를 이 세상에서 이별하는 이 시간에 인간적인 슬품과 아쉬움 있지만 믿음의 경주를 다 마치고 결승선을 통과해, 그리던 예수님 품에 안기신 정 목사님을 천국으로 환송하는 이 자리가 감사와 축복과 은혜가 넘치는 축제의 자리가 되기를 유가족 모두가 진심으로 바라고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보고 계신 아버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믿는다”고 했다. 특히 지난 21일 병원에서 故 정필도 목사의 임종을 지켜봤다는 그는 “당시 (정 목사의) 산소포화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수치들이 계속해서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었다”며 “그 고통 중에 힘들어하시던 아버님께서 어느 순간 갑자기 입에 대고 있던 산소마스크를 빼달라고 하셨다”고 했다. 이 집사는 “그리고 침대 등받이를 세워 앉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신 아버님께서 ‘이제 나는 1시간 전의 정 목사가 아닙니다’라고 너무도 분명하게 선포를 하셨다”며 “그러고 나서는 병상에 앉으신 채로 두 팔과 두 다리로 온 힘을 다해 몸을 지탱하시면서 교회를 향해 설교하고 기도하시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셨다”고 했다. 그는 “그런데 그 때는 이미 산소포화도가 정상 범위에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뇌에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호흡수가 정상인의 두 배로 높았고 코에도 아직 산소 공급용 튜브가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설교와 기도를 소리 내어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이 집사는 “그래서 이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사시고 기적을 베푸신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며 “그렇게 말씀을 다 마치고 나서는 다시 침대에 누으셨고, 그 뒤로 서너 시간 동안 너무나 평온한 모습으로 주무시다 그렇게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날 저는 죄의 결과로 인한 죽음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 생생하게 목격하는 동시에 정말 예수님께서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이기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그 안에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임하실 때, 죽음 앞에서 얼마나 당당할 수 있는지 분명히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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