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인 삶 | 주체적인 삶을 사는 가장 쉬운 방법 | 주체적인 사람들의 공통점 161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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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온라인에서 인기가 많은
맛집에 갔다가 실망한 적이 있나요?
오늘은
주체적인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가장 쉬운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개성을 잃기 쉬워요.
나만의 취향을 갖고 경험을 쌓고 공부를 하며
축적된 나만의 방향과 방법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함께 나눠보아요.
————————————————————
Background Music
Polaroid by extenz https://soundcloud.com/extenz
Creative Commons ? Attribution 3.0 Unported ? CC BY 3.0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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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삶 – 브런치

대식가와 미식가 | 주체적인 삶 철학자는 대식가보다 미식가에 가깝다. 식탁 위에 수많은 개념들이 요리로 완성되어 있어도, 철학자는 미식가의 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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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사는 방법을 찾고 있나요? – 아트인사이트

주체적인 삶이란 내 삶의 모든 것의 시작이 나인 사람이다. 진정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은 단순히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안 쓰고의 차이가 아니라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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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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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삶과 한국 그리고 한류 – 나를 지키는 공간

주체적인 삶이란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지금부터 나는 남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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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삶 – 고도원의 아침편지

주체적인 삶. 그저 스스로가 그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그 판단에 대해 믿고 따를 것을 결단하고, 그 결단을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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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삶

주체적인 삶. YC. 2022. 5. 3. 07:26. 나. 자아. 자기. 자신. 신체. ‘나’라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있을까.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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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이유와 주체적으로 사는 삶

그리고 그러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순간 깨어있는 의식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의도하고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설계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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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본 우리 교육] ‘주체적인 삶을 위한 교육’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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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삶을 사는 가장 쉬운 방법 | 주체적인 사람들의 공통점
주체적인 삶을 사는 가장 쉬운 방법 | 주체적인 사람들의 공통점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주체적 인 삶

  • Author: 토크한잔 TALKOH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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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8. 1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kx74tHFMwgo

주체적인 삶

주체적인 삶

철학자는 대식가보다 미식가에 가깝다. 식탁 위에 수많은 개념들이 요리로 완성되어 있어도, 철학자는 미식가의 감각을 발휘하여 음식들의 뉘앙스 차이를 섬세하게 구별한다. 207쪽

《세상물정의 사회학(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사계절, 2014)

# 아무거나 먹지 말고, 아무거나 보지 말고, 아무거나 말하지 말자. 돈이 된다면 아무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 미식가가 아니라 대식가이다. 우리의 재벌들은 모두 대식가들이다. 외국처럼 특정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보다는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다.

“주체적인 삶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출세와 성공을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를 하라. 그것이 진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은 타인들에 의한 삶을 살아왔고 주체적인 행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대식가가 되기보다는 미식가로 살자.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를 하라. 그것이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나’로 사는 방법을 찾고 있나요?

나는 주체적인 삶과 자존감에 대한 열망이 아주 크다. 나서길 좋아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릴 줄 알고, 주변시선도 좀 신경 쓰는 ‘보통’의 한국 사람인 나에게 자존감과 주체적인 삶은 현실의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 도달해야 할 목표였었고, 학창시절부터 시작된 아주 오래된 목표이자 고민이었다.

근데 이 오랜 목표로 한가지 강박관념이 생겨버렸는데, 바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아라”라는 주체성에 대한 기준이었다. 이 문장을 보는 누군가에게는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당연한 거 아니야?”라는 질문이 먼저 머릿속에 떠오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고통의 고뇌(?)와 괴리감을 안겨주었던 명제였다.

이 긴 고민의 발단은 나에게서 시작된다. 나는 나의 자존감과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시선에 대해 아주 근본적인 거부감을 가졌고, 그건 좀 더 발전되어서 ‘사회가 인정하는 기준과 가치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나에게 나다운 삶은 그 누구의 기준도 아닌 독보적인 ‘나만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안정적인 삶은 주체적인 삶과 반대되는 수동적인 삶이라는 이미지였고, 안정적인 삶을 위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나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주체성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라고 되뇌었지만, 반대로 안정적이기도 싶었고, 그 안정적인 삶은 사회의 시선에서 인정받는 성공이라는 기준을 수반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연결고리 사이에서 큰 괴리감을 가졌었다.

그러다 유튜브에서 일명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안정적인 삶을 살며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인터뷰를 보고, 순간 확 머리가 맑아졌다. 그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인’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의 모든 눈빛과 몸짓에서 (자만심 말고) 자존감이 높고 주체적인 그의 삶의 색이 아주 찬란하게 뿜어져 나왔다. 사실 아주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다. 주체적인 삶은 안정적인 삶, 현실적인 삶과 이분법적인 반대개념이 아니다. 양립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당연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매체는 ‘자신의 삶을 사는 멋진 사람’을 ‘현실과 남의 시선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꿈과 이상을 쫓아 떠나, 심지어는(플러스 알파로) 성공까지 한 엄청난 사람’으로 묘사한다.

예를 들자면 주로 이런 식이다.

“꿈에 다가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선과 이겨내고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도 꿈을 놓지 않는 엄청난 사람들”

최근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삶을 살며 멋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리틀빅히어로’라는 프로그램의 예고편에서 “안정적인 삶보다는 즐거운 삶”이라는 문구를 보기도 했다.

매체의 표현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매체에서 주체적인 사람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우리는 주체적인 삶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개념을 볼 수 있다. 위에 적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저 화려한 수식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체적인 삶을 동경함과 동시에 거리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

주체성을 현실, 안정, 타인의 시선과 정반대되는 또 다른 ‘완벽한’것으로 여기는 흐름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나’라는 가치에 대해 무지했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되어온, 그래서 ‘내’가 없는 집단주의적 삶에 진절머리가 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시대가 변함과 함께 이제는 자존감과 주체성을 강하게 열망한다. 동시에 나에게 없는 것이기에 자존감과 주체성에 하나 둘 기준을 부여하고, 보다 완벽한 것으로 생각해버린다. 내가 쉽게 닿을 수 없고, 어려운 준비기간과 결단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그리고 멀게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얻을 가능성이 없다 여겨, 자주 여우와 신 포도이야기처럼 대상을 하찮게 보거나 혹은 반대로 신격화한다.) 그리고 자존감과 주체성을 강하게 열망하는 사람일수록 ‘완벽한 그것들’에 대해 본인이 세운 ‘좋게 말하면 기준, 나쁘게 말하면 틀’을 자기 자신에게 씌운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던 나처럼 말이다. 정작 우리는 ‘나’를 찾으면서까지 나에 대한 틀과 기준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주체적인 삶이라는 가치에 대한 고민을 너무나도 쉽게

1. ‘내’가 없어진 집단에서 현실에 끌려 다니며 살거나,

2. 집단의 모든 기준에서 벗어나려 완벽한 주체성을 위해 살거나

라는 단, 2가지 선택지 중에서 한다.

선택지를 두 개로 놓는다면 나는 뭘 생각하든 두 개의 선택지 ‘안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주체적이기를 포기한 1번이나, 주체적이기 위해 나의 주체성에 기준을 정하는 2번이나 어차피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한 틀에 갇혀 있을 뿐이다. 나의 경우를 봐보자.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면서 어떻게 완전히 타인의 시선 밖에서 생각할 수 있을까. 이미 타인의 시선이란 모호한 개념에 대해 기준을 만들고 판단하고 재단하면서.

애당초 ‘주체성’과 ‘자존감’이란 ‘대상’이 아니다. 나의 밖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소리다. 몇몇 가치와 선택지들의 반대지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와 문화에 따라, 개개인에 따라 어떤 가치와 비교적 자주 대립하게 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주체성’의 가치와 개념이 대상화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진 않는다.

우리는 나다운 삶을 위해 쉽게 현실적인 무엇인가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다. 주체적인 삶이 저 ‘조건’들을 충족해야만 가능한 것인가. 혹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 것인가.

나 역시도 그랬다. 계속해서 아주 오랫동안 주체적인 삶, 나다운 삶을 꿈꿨지만, ‘틀’이 있었다. 나는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 시작점을 나에게 두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는 내가 되고 싶어서, 방법과 기준을 밖에서 찾아 다시 나에게 들이댔다. 가장 간단하게는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그 기준 이였다. 결국 타인의 시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은 내 맘속 깊은 곳에 있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너는 얼마나 나다운 사람이니?”

나는 나답기 위해서 얼마나 나다운가에 대해 스스로를 검열의 잣대에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체성(자존감)에 대한 이 길고 긴 고민에서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주체적인 삶이란 내 삶의 모든 것의 시작이 나인 사람이다. 진정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은 단순히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안 쓰고의 차이가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틀 ‘밖’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래야 해서”라는 시작점이 하나도 없이 오롯이 나를 시작점에서 두었을 때 가능하다.

‘나’를 선택지가 아닌 시작점으로 두었을 때, 내 세계의 완벽한 중심이 나일 때 나는 보다 단단하고, 유연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주체적인 삶은 우리가 다가가야 할 ‘대상’이 아니라 ‘중심’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어떤 기준과 방법으로 도달 가능한 것이 아닌 내 모든 삶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어야 한다. 마치 선분의 양 끝 중 한 끝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 원의 중심처럼.

혹여나 위에서 예시로 든 사회가 자주 말하는 ‘주체적인 완벽한 삶’을 목표로 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오해는 마시길.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짜 중요한 건 “나의 삶이 얼마나 주체적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한 고민과 나의 선택과 답이 “남을 신경 쓰든 안 쓰든, 현실과 타협하든 아니든,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든 아니든, 안정적이든 도전적이든, 일상을 벗어나든 일상 속에 남아있든, 변화하든 변화하지 않든” 진정으로 나에게서 나온 답이냐는 것이다.

‘내가’ 가치들을 고민하고 선택하고, 진짜 ‘내가’ 내 삶의 길들을 선택하는 것.

내 삶의 모든 시작이 진짜 ‘나’인 것. 이게 내가 내린 주체적인 삶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얼마나 주체적이니?”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남의 시선을 벗어나야만 해”라는 기준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그 모든 주체성에 대한 틀을 내려놓고, 그냥 단순히 ‘나’에 대해서부터 모든 선택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시작하니,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삶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나만이 낼 수 있는 ‘내 삶에’ 최적화된 답이 너무 쉽게 나왔다.

나답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나다운 삶이라는 이름의 평가대’에 올리고 있는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나답게 살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냥 스스로로 살아가면 된다. 언제나 답은 가장 심플하다.

주체적인 삶과 한국 그리고 한류

2018.12.31

주체적인 삶이란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지금부터 나는 남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 주관대로 살겠다라고 결심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서너살 먹은 아이가 자기 고집대로 뭐든지 하려고 하는 것도 주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주체적인 삶이란 우리의 결심따위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주체적이라는 것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만들고 쌓아서 이룩되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태어날 때부터 딱 던져져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씩 만들어 지고 확장되어져 온 존재다. 어떻게 말하면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프로그램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이런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자.

경우 1 : 사탕이 보이면 입에 넣는다.

이 프로그램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경우 1의 경우에는 어떻게 판단하는가가 정해져 있지만 그 이외의 모든 경우에는 답이 없다. 내 맘대로 한다고?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나는 뭘 내 맘대로 하는가.

또 다른 프로그램을 보자.

경우 1 : 사탕이 보이면 입에 넣는다.

경우 2 : 경우 1 이외의 경우에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다.

이 프로그램은 앞의 것보다는 개선된 것이다. 적어도 멈춰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다지 자주적이지 않고 자유롭지 않다. 대부분의 일에 대해서 그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예들에서 프로그램은 우리의 정신을 상징한다. 나는 우리가 이런 단순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프로그램들의 예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내 맘대로 한다는 결심 따위는 주체적인 삶과 아주 작은 관련만 있다는 것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떠오르는대로 맘대로 막 하면 그게 주체적인 삶인가? 아무 것도 모른다면 차라리 엄마나 선배같은 주변 사람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 아닐까?

문제는 여기에서 나온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나 시공간이라는 환경안에서 우리의 정신을 구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대비와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대비와 고민이란 그야 말로 방대한 것이라서 어떤 의미로 어떤 인간도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히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건 마치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적 성취를 처음부터 혼자서 다 이룩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한국인인 나는 한국어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주체적 생각이란 말인가. 나는 사회가 나에게 준 개념들을 제한되게만 검증하고 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 개념들의 합리성은 오직 사회공동체에 의해서만 보증되는 것이다. 누구나 어떤 사회적 권위를 받아들이고서야 세상을 살 수가 있다. 유한한 나 개인으로서는 그 모든 말들의 실체를 다 고민하고 검증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히 주체적이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해도 정도의 문제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민족은 자신의 삶의 철학을 전혀 검증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대로만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나 민족은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세상일과 자신이 쓰는 말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검증한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말을 검증해서 쓰고 때로는 작게 나마 말들을 만들고 변형시켜서 자신의 언어로 만들어 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겨우 손톱의 때만큼 더 주체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래 이제부터 주체적으로 사는거야 라고 결심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지라도 겨우 그걸로 뭐가 되겠는가? 자신을 쌓고 만들어야 그때부터 진짜 주체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프랑스 철학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공감하면서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꾸려 나간다고 하자. 그런데 프랑스철학이란 당연히 프랑스 사람의 역사와 사고가 누적되어 만들어 진 것이며 프랑스어로 된 것을 번역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프랑스 사람이 똘레랑스를 말한다던가 민주국가를 말한다던가 기표와 기의가 어떻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떤 의미로 우리는 영원히 그 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느낄 수 있는 때는 우리가 프랑스철학을 넘어서서 우리가 그들의 생각과 표현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기본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구축한 사고에 의해서 행동하기로 결정한 후에야 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프랑스철학에 얽매이는 한 우리는 우리의 사고에 혼동을 느끼면 프랑스 시민 혹은 프랑스 철학자의 행동을 보고 그냥 따라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답은 그들의 행동이니까 말이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서구권에서 당연시 되는 개인주의적인 관점이 있다. 즉 환경의 영향은 일단 개인의 성질에 비해서 사소하고 나중에 생각하면 되는 어떤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사회가 있기 전에 개인이 있고 문맥이 있기 전에 팩트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우리가 그들의 철학을 배우다 보면 그냥 사고의 한 특징이 아니라 자명한 사고의 방식으로 여기게 되어 버린다.

철학적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칸트가 유럽철학의 중심으로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독일은 다른 나라에게 종속되어 사고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유럽의 중심으로 떠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과학이나 음악같은 분야도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립적 사고가 없는 곳에 인류 문화의 첨단에 서는 발전이 있을 수가 없다. 미국도 실용주의라는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하고서야 비로소 유럽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세계의 슈퍼파워가 될 수 있었다.

오늘은 다스베이다라는 팟캐스트를 듣다보니 진행자인 김어준이 우리나라의 언론사 기자들은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마치 우리가 미국이라도 된 것처럼 미국 사람의 입장에서 사고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이 바보라고 비판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주된 이유는 결국 그 기자들이라는 사람의 사고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사고가 중국중심적이었던 조선시대에 우리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가졌던 것처럼 이제 우리나라는 미국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국 대학에서 유학파 교수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박사를 받은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지식인의 시야는 미국 중심적인 것이 당연하고 거기에서 벗어난다고 해봐야 유럽중심적이거나 일본중심적이다. 일본중심적 사고는 물론 일제 식민지 시대서 부터 내려온 전통에 따른 것이다. 한국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의 뿌리에는 바로 정신적 엘리트들의 무능이라는 문제가 있다. 돈과 권력과 정보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무능하며 그들의 머리는 오염되어 있고 주인의식이 부족하다.

우리 눈이 우리 중심적인게 아니라 미국 중심적이고 서양 중심적이며 심지어 일본 중심적이고 중국 중심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필연적으로 한국을 팔아 먹는 매국을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판단하는 때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같은 정치가나 기업인들이나 법조인들이나 지식인들을 종종 본다. 재벌들이 나오는 막장드라마에 중독되어 재벌중심적으로 사고하는 빈민들이 빈민을 희생시켜 재벌들을 부자로 만드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한국에서 주체적인 사고를 하려면 오히려 학벌이 높을 수록 어렵다. 왜냐면 앞에서 말한대로 대학이야 말로 진정으로 외국에게 더 많이 장악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이건 대학이건 언론이건 한국에서 권위를 자랑하는 것중에 한국의 역사적 뿌리에서 자라나온 것이 얼마나 있는가. 다 일제시대로부터 이어져온 것이거나 미국같은 곳과 연결되어 권위를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고로 채워진 곳에서 우리가 주체적 삶과 사고를 배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이제껏 한국교육과 학문의 핵심은 흔히 ‘이해는 안되겠지만 무조건 많이 외워’라던가 ‘더 발전한 저들을 배우자’라는 것이었다. 실은 지식인의 정점에 있다는 교수들 조차도 이공계건 인문계건 비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교수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주체적 사상가가 되려고 시도하는 한국인은 대개 사이비 약장수쯤으로 내몰리기 쉽다. 감히 어디서 주체를 논하는가 외국의 누구누구가 이랬다 저랬다라는 말을 줄줄이 늘어놓아야 옳은 것이다.

이제까지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가득했지만 나는 긍정적인 이야기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제 엄연한 선진국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류가 세계 여러곳에서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철학적 주도권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칸트같은 철학자 혹은 아인쉬타인같은 과학자만을 떠올릴지도모르지만 문화가 팔린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 우리가 수동적으로 문화와 정신을 수입만 하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한국사회는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그것도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대중의 힘이며 한민족의 저력이다.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분야에서 바라보면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을 떠올릴 정도의 문화강국으로 성장했고 더욱 커져가고 있다. 문화상품이란 다르게 말하면 정신적 매력을 말한다. 즉 우리의 사고방식에 매력적인 부분, 합리적인 부분이 없으면 그것이 상품이 되질 못한다. 아름다운 배우가 한국에만 있겠으며 멋진 컴퓨터 그래픽이 한국에만 있겠는가. 뭔가 한국이 만들어 낸 어떤 부분이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고 삶에 대처하게 해주기 때문에 음악이건 영화건 드라마건 팔리게 된다. 이것은 분명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부분이다. 반도체나 자동차를 파는 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사실은 문화적 경쟁력이란 것이 더욱 대단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의 문제일뿐 중국이 한국의 노하우를 배워가면 과거에는 일본문화물이 인기가 있었고 홍콩 문화물이 인기가 있었듯 한류는 지나가고 중국 문화가 세상을 채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럴 수도 있다. 중국은 분명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뒤집어 말할 수도 있다. 중국은 저렇게나 거대한 내수시장과 돈을 가지고도 문화적으로는 매력을 풍기고 있지 못하고 일본의 인기도 떨어져 버린 면이 많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이 모두 어떤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정신적 변방이었던 한국이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과연 중국과 일본이 한국만큼 자국의 역사를 직시하는 날이 올까? 일본은 나라에 생기가 없어서 정말 완전히 망하기 전에는 새로운 변화가 없을 것같고 중국이 세계적 보편성을 가진 문화적 매력을 가지는 날이 정말 올지는 알 수가 없다. 유튜브도 페이스북도 못하게 닫아 걸고 커진 나라가 그런 걸 시도하다가 거꾸로 망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시진핑이 아예 종신으로 권력을 가지려고 한다. 그게 될까? 그들이 양자컴퓨터를 만들고 인공지능을 발달시켜도 사람과 문화가 그래서는 오히려 스스로를 해치게 될지 모른다. 즉 스스로 발전시키는 경제와 그들의 정치가 언젠가는 정면충돌해서 자해를 하게 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한류가 강해질 수록 한국 사람이 사는 것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의 외모가 새로운 미의 기준으로 평가되고 한국 음식이 새롭게 평가되며 한국식의 우정과 사랑이 새롭게 평가된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 수록 우리는 파리사람이나 뉴욕사람 혹은 런던 사람이 어떻게 한다더라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자신있게 한국 사람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은 이렇게 한다더라라고 참조하는 일이 생긴다. 한국인의 주체성은 분명 확대되고 있다. 이 힘이 종국에는 한반도의 평화도 가져오고 경제적 번영도 가져오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

다만 아직도 숙제는 많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대로 지식과 권력과 돈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의 무능과 비주체성이다. 단순히 그들이 착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주인인척 하면서도 실제로는 주인같은 사고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한국을 털어먹고 도망갈 도둑처럼 사고하는 면이 있다. 진정한 엘리트 정신은 주인의식에서 나오고 그래서 외국에서는 전쟁나면 엘리트들이 먼저 나가서 싸우는 것이다. 내 나라니까 그렇다. 한국의 엘리트들은 전쟁나면 제일 먼저 도망갈 것같은 사람들 투성이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주체성은 별로 없고 외국의 권위를 너무 따라 하려고먼 한다. 이게 한국의 위기고 한국의 숙제다. 이런 비주체성이 대중이 모처럼 만들어 내는 좋은 에너지를 끝없이 낭비하게 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상황이었다. 그것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한계를 정했고 지금의 문재인 정권을 흔들고 있기도 하다. 아무쪼록 앞으로는 좋은 흐름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주체적인 삶

주체적인 삶

강다현님께서 보내주신 아침편지입니다.

그저 스스로가그것이 옳다고 판단하고,그 판단에 대해 믿고 따를 것을 결단하고,그 결단을 스스로에게 명령하는삶의 실천을 행한 것일 따름입니다.자기 판단과 선택, 그리고 결정과 실천이어우러지는 그야말로 내 삶을내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김연숙의《나, 참 쓸모있는 인간》중에서 -* 내가 내 삶의 주체입니다.내 삶을 내가 살 때에는 시선은 나에게 두고,귀는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살짝 열어두는 것이 좋습니다.나를 알고나를 믿고나를 사랑하는 나는,나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주체적인 삶

나. 자아. 자기. 자신. 신체. ‘나’라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있을까.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 물 61.8%, 단백질 16.8%, 지방 1.49%, 질소 3.3%, 칼슘 1.81%… 를 섞는다고 ‘나’가 되지 않는다. 인체는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들 한다. 나의 체내 수분을 체성기관들이 밀리초단위로 측정해서 목이 마르게 만들고 땀을 내게 만들고 있다. 이걸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생리학적으로는 모르는 게 맞다. 바이러스가 체내에 들어오면 엄청난 전쟁이 일어난다. 수천억의 면역세포와 바이러스 간의 전쟁. 전신이라는 거대한 전쟁터. 그 전쟁을 세계의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병리학적으로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몰이해가 아직도 심한 것이다. 인류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과학과 의학은 작은 바이러스 하나도 정복하지 못하고 전세계의 문화 사회 경제에 치명타를 입었다. 인간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대체 얼마나 모르고 사는 것인가? 아니 아는 게 뭐냐?

내가 나에 대해 아는것. (안다고 착각하는 것) 그것이 자아다. Ego. 내가 나 스스로에게 심리적으로 부여한 이미지.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래야 한다. 나는 저래야 한다. 그 믿음. 이미지와 믿음은 효율적이며 무섭도록 강고하다. 도구이면서 감옥이다. 나와 세상을 마구 베는 칼이다. 교류분석이라는 상담심리학의 일파가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Eric Berne에 의해 생겨난 망상이다. 그는 나 라는 것을 자아와 주체로 구분했다. 자아는 또 어버이, 어른, 아이의 세 단계로 또 구분했다. (이런 구분을 한 거 보면 엄격한데 성숙하지는 못한 부모 밑에서 자랐나 보다.) 오늘은 이 망상에 대한 내용에다 칸트와 융의 Self에 대한 추가적인 망상과 나의 망상도 몇 줄 덧붙이려고 한다. (말이 좀 심하지만 망상이 맞다. 어떤 권위가 있든 간에.)

에릭에 의하면 세 가지의 자아가 있다고 한다. 선천적인 욕구와 감정, 그 욕구와 양육자의 요구가 충돌하여 결과로써 안정된 것을 어린이 자아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욕구와 감정은 무의식으로 쫓겨난다. 양육자의 말과 행동을 내면화한 자아가 또 따로 있다. 그것이 어버이 자아다. 꼭 양육자는 아니고 중요한 타인의 목소리도 포함한다. 여기에는 보호하는 양육의 목소리도, 비판적이고 비난적인 윤리적 채찍도 있다. 보통 이 자아는 양육자의 의도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 가난이 고통이었던 양육자는 자식에게 어떻게든 가난을 피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식의 마음에는 인생은 고통이고 돈이 최고라는 자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자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어른 자아가 있다. 자신에 대한 자각과 독창적 사고로 자립할 수 있음을 깨달은 자아다. 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이 자아가 지나치게 두드러지면 약삭빠른 사람이 되고, 부족하면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이 세 가지의 자아는 서로 혼합되어있고 편견과 왜곡으로 뒤섞여 있다. 서로 배타적으로 싸우고 있기도 하다. 그 통합이 교류분석학의 정신분석, 상담 목적이 된다.

교류분석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상담심리학에서는 꽤나 유명하고 유용한 도구이다. 이 설명이 얼마나 맞다고 생각되는가? 인간이 만든 모든 관념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망상인데, 인간심리를 분석하는 유용한 scope로 보인다. 정신이라는 ‘나’를 분석하려는 노력. 물 61.8%, 단백질 16.8%, 지방 1.49%, 질소 3.3%, 칼슘 1.81% 등으로 구분 지으려는 노력. 그렇게 구분하고 그것을 다 더한다고 절대 내가 아니며 알 수도 없다. 알 수 없지만 실존하는 존재 자체. 그것이 Self 이다. 칸트가 말한 물자체이다. 칸트라는 위대한 망상가는 물자체와 현상을 구분하였다. 물자체는 객관적 본질 자체이다. 이것은 관념적으로만 존재함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절대 인간은 물자체를 온전히 다 알 수 없다. 현상, 표상으로만 파악한다. 빛의 스펙트럼으로 눈에 들어온 파장으로서의 현상. 소리와 냄새의 현상. 촉감의 표상. 내 마음속의 이미지. 칼 융은 이런 망상을 발전시켜 또 다른 멋진 망상을 만들어냈다. 그 이름도 멋진 분석심리학이다.

분석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망상이다. 무의식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담겨 있다. 무의식은 사실 현대 심리학에서는 부정되는 추세이다. 없다는 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인간 정신이 욕구 감정 이성 세 가지로 구분된다는 믿음이 현대 뇌과학에서 부정되고 있는 것과 같다. 구분이 안 되는 것이다. 구분되지 않는 것을 구분하겠다고 염병을…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효용이 있어서이다. 말이 좀 샜는데, 분석심리학에서는 자아를 표면으로 드러난 정신이라고 본다. 보이는 껍데기라는 의미다. 그 내부로 깊이 들어가면 콤플렉스, 그림자들이 나타나며 개인적 무의식, 집단 무의식으로 점점 깊이 들어간다. 그 가장 깊은 곳에는 자기, 즉 Self가 있다. 마음 전체의 중심이며 마음의 근원적인 원점이 되는 원형. 정신의 일체성을 유지하는 원동력. 융은 이 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이 꿈이라고 보았다.

교류분석학에서의 Self는 융의 Self와 좀 다르다. 칸트의 물자체에 가깝다. 깊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코어라는 이미지보다는 전체이자 객관적인 본질이기에 표상으로서 무언가를 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드러나는, 하지만 실존하는 물자체. 이미지적으로는 자아보다 더 큰 개념인 것이다. 물자체가 현상보다 큰 개념인 것처럼.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다 망상이다. 아주 재미있고 유용한 망상.)

정리하자면 Self는 나라는 존재 그 자체이고, 타인은 물론이고 나 스스로도 다 알 수 없다. 일부만 인식된다. 굳이 구분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이 나눠지는데, 의식 중에서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 Ego이다. 자아를 확장하여 자기 자신, Self 가 되면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된 (무의식조차도 모두 의식하는) 전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바로 행동이다. 머릿속에서 망상으로는 뭘 못하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 육체이다. 말과 행동. 말은 중요한 행동이자 정신과 실제 행동의 연결고리다. 자아이든 자기이든 행동에는 결과가 있고 책임이 있다. 그 결과와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주체 Subject 이다.

주체성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산다. 주체적인 행동을 한다. 행동에 책임을 진다. 주체적이지 않은 사람도 있냐? 여기서 자아로 돌아간다. 자아에는 어린이 자아, 부모 자아, 어른 자아가 있다고 했다. 어린이 자아로만 사는 사람은 주체적이지 않다. 부모 자아로만 사는 사람도 주체적이지 않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분열된 자아들이 튀어나온다.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사람. 직업을 선택하고 사는 곳을 선택할 때도 아니 심지어 먹고 싶은 음식조차도 못 고르는 불쌍한 사람들. 혹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학대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자아들의 선택을 따라 행동하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부모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책임으로부터의 도피. 남 탓.

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일치. 주체로서의 나. 원하는 것과 행동과 말이 모두 일치해야 행복하다. 여기에 타인과 세계까지 일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의 원하는 것과 나의 언어와 나의 실체로서의 행동 이 세 가지를 일치시키는 것만으로도 뼈 빠지게 어렵다. 대부분 못하고 산다. 여기에 타인의 욕망과 타인의 언어와 타인의 행동까지 일치시키려는 욕심을 부리고 앉았으니 인생이 고통이 수밖에. 더 나아가 선도 악도 아닌 현실까지 지 맘대로 바꾸고 싶어 하는 어리석음. 고통을 붙잡는 똥물 속의 인간. 비 오는 하늘을, 날 선 바람을 우러러 원망하는 어리석은 인간이여! 비와 바람은 존재 자체이고 거기엔 선악도 시비도 없다. 원망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내 고통은 내가 만든 것이다. 내가 만든 것이면 내가 없앨 수 있다. 너무 당연하게도.

나에 대해서 의식하고 탐구하여 주체성을 갖고 사는 삶은 내 맘대로 사는 삶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저항도, 반항도 아니다. 결과에 대한 허무주의도 아니다. 선택에 대한 진정성있는 고민이며, 결과에 대한 스스로의 뼈저린 책임감이다. 내가 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진다.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아가 타인까지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존중받는다. 여기에 자유와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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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이유와 주체적으로 사는 삶

우리는 삶의 매 순간순간마다 선택을 하고 그 선택 속에서 미래의 모습을 맞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서, 삶의 모습들도 매 순간 변화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순간순간 우리 자신으로부터 내려지는 선택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의미 있고 중요한지는 아마 두말해도 잔소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언제나 우리는 스스로가 원하는 선택을 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머리를 갸우뚱하거나 대답에 자신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을 타인의 판단에 맡기거나 외부의 시선 또는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서, 그렇지 않다면 가족들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여러 가지 많은 이유들을 대어가면서, 주체성 없이 외부에 내맡긴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외부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부분에서도 틀림없이 스스로 쌓아온 제한된 고정관념 등으로 인해서 ‘난 이렇게 계속 살아왔으니까’ ‘다 똑같지 뭐’라는 식의 자기 정당화를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인 통찰이 없이 자신의 주체성을 외면하고 내던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택하는 삶이고 주체적으로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매 순간순간, 외부적으로든 내부적으로든 자유롭고 그 자유의지에 따라서 끊임없이 원하는 삶을 선택해나갈 수 있는 삶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의식적인 컨트롤이 필요하고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자동화되어버린 습관과 패턴 속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목표와 결과에 대한 명확한 설정과 함께 끊임없이 그 이미지를 키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자존감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가치 평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스스로가 정말로 원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설계하고 그 이미지에 따른 가치를 스스로 높여갈 수만 있다면,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무책임한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지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고한 정체성과 함께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토대가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순간 깨어있는 의식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의도하고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설계하고 만약에 빠뜨리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에 집중하고 발견해내어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 내고 그 현재 속에서 또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내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이며 인간은 이러한 의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완성해가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진 존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체적인 삶을 위한 7가지

★ 주체적인 삶을 위한 7가지 습관 ★1.일관성 있는 삶의 목표가 있다.2.생각과 행동이 자발적이다.3.생각이 깊다.그래서 다른 사람이 충동질할 때 쉽게 끌려가지 않는다.4.매사에 의욕과 끈기가 있다.5.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하려는 도전의식과 모험심이 있다.6.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자신의 삶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또한 긍정적이고,자신감이 있으며,자존심이 높다.7.책임의식이 강해 결코 부모나 다른 사람을원망하거나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다.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는 자기 스스로 질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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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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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본 우리 교육] ‘주체적인 삶을 위한 교육’을 꿈꾼다

[에듀인뉴스-명교학숙 공동기획] 학생들의 인성교육 방향 정립을 위해 고전(古典)을 활용한 교육이 떠오르고 있다. ‘명교학숙’은 이러한 교육계의 움직임을 리드하는 초·중등교사 연구모임으로 동·서양 인문고전을 탐구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교육방법론을 연구하고 있다. <에듀인뉴스>는 명교학숙과 함께 고전을 통해 우리 교육 현실을 조명하고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노자(老子)의 도덕경( 道德經)을 추천하고 싶다. 정확히 말하면 읽어야 할 책이라기보다 늘 가까운 곳에 두고 수시로 봐야 할 삶의 지침서로 삼았으면 하는 책이다.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도가(道家)의 시조인 노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중기부터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대를 지닌 강국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을 패자(覇者)라 했다.

제(齊)의 환공(桓公), 진(晉)의 문공(文公), 초(楚)의 장왕(莊王), 오(吳)의 합려(闔閭), 월(越)의 구천(勾踐) 등 춘추 5패 중 하나인 초나라에서 노자가 태어났지만 출생과 사망 시기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BC 770년 주 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시대라고 하고, 그 이후를 동주시대라고라고 하는데, 이는 춘추(春秋) 시대와 전국(戰國) 시대로 나눠진다.

노자의 도덕경 제작 시기는 기원전 4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하늘과 인간, 천자와 제후, 군자와 소인의 이분법 구도가 서서히 무너져서 새로운 질서 체제의 건립이 시도된다. 그 논의의 중심 주제는 구질서가 허물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질서를 정립할 것인지가 화두였다.

노자는 새로운 질서를 정립에 있어서 공자나 묵자처럼 인위적으로 형성된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통일시키는 통치 방식을 경계했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만든 기준이 사회를 억압하거나 차별화하게 되어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킨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도덕경 제2장에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그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뜻이다.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좋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대목에서 숨어있다.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서 특정한 문화 체계로 통일하는 방식을 버리고 갈등의 요소도 없는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도덕경 전 장에 걸쳐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것을 도(道)라 부르고 이 도를 따르는 것으로 인간 세계의 질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뤄주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니 이것이 세계의 항상 그러한 모습이다./ 자연의 이런 원칙을 본받아 성인은 무위하는 일을 하며, 불언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이 잘 자라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자신이 시작하도록 했다고 하지 않고, 잘 살게 해주고도/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으며, 무엇을 하되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룬 공 위에 자리 잡지 않는다. 天下皆知 美之爲美 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 無爲之事 行 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 도덕경 2장에서

(이미지=픽사베이)

노자의 도덕경이 나온 지 약 2400년이 지난 2019년 지금의 시대 대한민국은 모습은 어떤가?

상생과 공존, 협치와 협력을 겉으로는 외치면서 자신들만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면서 분열과 갈등이 오히려 증폭되고 가속화하고 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정치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권력의 주체만 다를 뿐, 자신의 정치이념과 다르다는 이유로 분별하고 구분지어 무자비한 폭압의 시대는 여전히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혹은 권력을 빼기 위한 암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싸움은 정치에만 머물지 않고 경제, 문화, 역사, 교육 등 모든 영역으로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있다.

그런 폭주를 막을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인가. 이를 일시적으로나마 멈출 단초(端初)가 노자의 도덕경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적어도 교육문제에서부터라고 상생과 공존의 틀을 함께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특정 이념과 목표에만 경도되지 않은 협치와 협력을 통해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길 소망해 본다.

최진식 교수는 노자 강의에서 ‘공부하는 내가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 내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하고, 이 기본적인 자세를 노자는 자율이라고 했다’고 소개한다. 남에게 들은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자신의 길을 잃고 삶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공부를 멈추고 생각을 시작해야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너무 규정된 생각과 가치, 이념에 경도되지 말하는 충고이기도 하다.

각자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유희하는 주체적 삶을 존중할 때 세상은 더 평화로워질 것이며 자유로워질 것이며 평등해지는 것이다. 극단의 시대, 대결의 시대, 협오의 시대에서는 자유도 평화도 평등도 신기루처럼 살아지고 만다.

일시적으로 승자의 축배는 들지 모르지만 역사는 반복되듯 새로운 승자에 의해 제압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제 포장되어 대량생산된 이념만 다시 강요받은 개인의 주체적 삶이 살아진 시대는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른 어리석은 일들을 끊어내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시대다. 포용국가 라는 추상적인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이 선언과 맞는 명확한 실천과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 편만 포용하는 시대를 청산하고 모두가 함께하는 진정한 포용을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그래야 자유와 평등, 평화가 공존하고 상생하면서 모두가 자신이 가진 고유의 역량을 발휘하는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래야 언제나 낮은 대로 흐르는 물처럼 만물을 모두 포용하는 시대가 열린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받을 일도 없습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 노자의 도덕경 8장에서

이 시대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 중에 한가지는 특정 이념과 가치로 구분된 삶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색깔과 방식을 가지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가 누구든 우리 사회는 이를 포용하고 지원하는 교육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관하는 과도한 경쟁을 걷어 내야 하며,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강요하는 교육시스템의 폭주를 당장 멈춰야 한다.

틀에 갇힌 교육시스템, 특정 이념과 기득권만을 위한 교육실험은 폐기되어야 한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할 우리 학생들을 더 이상 실험실 속의 개구리처럼 만들어 서는 안된다.

자신만의 가치와 생각,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무한한 자유를 선물해야 한다. 낡은 교육시스템, 공장같은 학교와 교실, 지나친 경쟁과 학벌사회만 지향하는 입시제도에서 해방시켜야한다.

미시적인 교육논쟁이나 이념논쟁에서 벗어나 유무상생(有無相生)하는 관점으로 교육체제를 전환해야 한다. 일반고, 특목고, 자사고로 구분 짓는 논쟁이 아닌, 입시를 위한 점수 따는 방법과 방식의 논쟁이 아닌, 가르치고 기르는 근본적인 문제,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선생님의 고민과 생각에 다가설 수 있는 교육체제를 만들 수 있는 일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학교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를 옭아매는 과도한 규제정책을 과감히 철폐하고 신나는 오늘과 내일의 꿈이 쌓여 행복한 미래가 열리는 교육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리기 위해서는 교육의 본질은 뒷전이고 힘의 논리로 정치의 논리로 이념의 논리로 대립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물처럼 겨루는 일이 없이 함께 상생해 흘러가야 한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이는 단순하고 명쾌한 원리를 알면서도 문제는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욕망과 사욕을 공공적 가치나 대의로 포장해서 모두에게 강요한다. 자기 안에 꽉 차 있는 욕심을 모두에게 발산한다. 자신의 잘못을 살피거나 인정해 반성하는 계기로 삼고, 이를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더 힘을 빼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비우고 더 가까이하며, 그 속에서 상생하고 협치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아무 쓸 때 없는 대결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모두에게 주체적인 삶을 선물하는 상생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교육이 그 선두에 서길 바란다. 교육 지도자가 그렇게하기 위해서 먼저 자기비움을 실천해야 한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만큼,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게 지도자가 취할 최고의 덕목이고 구분과 분별이 없는 무위의 삶, 자연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모두가 주체적 삶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늘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에 대해 늘 싸워야하기 때문이다. 매사에 일어나는 사소한 일에도 정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변화에 깨어 있는 사람이 나는 좋다. 바람을 느끼고 비 내리는 날에 우수에 젖기도 하고 별 보기에 설렘이 있는 사람이 좋다. 일에 관한 이야기보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 소소한 일상에 관한 이야기에 감동 받는 그런 사람이 좋다. 주체적인 삶은 곧 자기다운 삶이다. 일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자기다움을 내려놓은 일이다. 똑같은 일도 창조적일 수 있고, 주체적일 수 있다. 이는 얼마나 일을 자기답게 내재화하는 것에 달려 있다. 얼마나 자기 이야기를 담아내는냐에 죄우된다. 매일 일어나는 일을 누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 결론을 내리면 얼마나 슬프지 않나. – 마음을 깨우는 생각 여행 <생각쉼표> 중에서

모든 일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답을 찾는데 너무 시간 낭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정답도 일종에 규정짓는 일이다. 어떤 틀에 가두는 일이다. 모두에게 하나의 기준을 강요하는 일이다.

우리 교육은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하는 정책을 만들고, 이를 통해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고, 교사들에게 그 일을 강요해 왔다. 그러는 사이에 학생과 교사들의 창의성과 자율성은 박탈되고 어느새 규격화된 교실에서 죽은 교육을 끊임없이 반복해 오고 있다. 족쇄로 길들어진 코끼리처럼 주체적인 삶을 향해 한치 앞도 못 나가고 있다.

이 시대의 진정한 교육혁신은 제도의 틀을 깨고 학생과 교사가 스스로 주체적 삶을 살아갈 것을 선언하는 일이다.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고 그 주체는 교사이고 학교, 학생, 학부모이다. 늦었지만 일방적인 교육을 강요하는 갈등의 시대, 이념의 시대를 종결시킬 그런 학생과 학부모, 그런 교사와 학교가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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