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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카라마조프는 돈 문제로 장남 드미트리와 다퉜는데, 그날 밤 표트르는 누군가에게 피살되고 장남 드미트리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이 미완성 대작은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신과 악마, 선과 악의 두 원리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야심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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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 열린책들
00:00 책소개
1:44 등장인물
2:43 주요줄거리
9:15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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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줄거리와 선과 악 – 네이버 블로그

19세기 러시아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벌어진 친부 살해 사건을 통해 선과 악을 생각해본다. 두꺼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책의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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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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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 나무위키:대문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 55세. 돈을 늘리는 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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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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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줄거리 / 도스토예프스키 – 건축광장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 시대 한 지방의 지주 집안인 카라마조프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변론을 다룬 소설입니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주요 인물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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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sgyoo.tistory.com

Date Published: 6/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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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담고 있는 사회성 – 예스24 블로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대표적으로 아버지 표도르와 그의 아들들 드미트리와의 갈등 사건을 줄거리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안좋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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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yes24.com

Date Published: 5/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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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줄거리 – 글랜필드

소설 속 주요 사건은 19세기 중반 카라마조프가에서 일어난 친부 살인사건이다. 1860년대 러시아 소도시의 지주인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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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lenfield.tistory.com

Date Published: 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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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요약]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줄거리, 등장인물, 갈등구조

도스토예프스키가 지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줄거리, 등장인물, 갈등구조 등을 쉽게쉽게 정리했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gobooki.net

Date Published: 7/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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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 브런치

그러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대단히 긴 소설’을 넘어 ‘대단히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스타일 자체에 기인한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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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0/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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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해설 – 커뮤니케이션북스

작품의 주요 인물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랑의 삼각관계에 빠져 있으며, 연관된 이들이 모두 부자 또는 형제간이다. 요약한 줄거리만 본다면 가장 큰 사건은 아버지 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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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mmbooks.com

Date Published: 8/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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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카라마 조프 가 의 형제 들 줄거리

  • Author: 문학줍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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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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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카라마조프의 형제(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이다.

카라마조프가의 친부살해를 소재로 한다. 표트르 카라마조프는 돈 문제로 장남 드미트리와 다퉜는데, 그날 밤 표트르는 누군가에게 피살되고 장남 드미트리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이 미완성 대작은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신과 악마, 선과 악의 두 원리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야심작이다. 이 두 원리의 대결은 이반의 극시 <대심문관(大審問官)>과 장로 조시마의 수기와 대비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결국 두 원리의 통일이 성취되지 않은 채 끝나고 있어, 작자 자신의 자아 분열이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소설이 너무 난해하고 방대하다면 만화로도 읽을 수 있게 출간되어 있다.[1]

등장인물과 줄거리 [ 편집 ]

카라마조프가(家)의 가장 표트르 : 골수까지 광대 근성이 밴, 미천한 계급으로부터 입신양명한 사람으로 탐욕스럽고 음탕하기 이를 데 없는 지주였다.

장남 드미트리 : 부친의 음탕방자한 피를 이어받아 청년의 정열에 탐닉하여 이를 전혀 제어할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풍부한 시적 감수성이 뛰어나 영원한 것에 대한 순진한 동경심을 품고 있다.

차남 이반 : 철저한 무신론자·합리주의자이다. 그의 왕성한 지적 탐구는 “불사(不死)란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은 허용되고 있다”고 하여 도덕적 허무주의를 도출해 낸다.

서자 스메르자코프 : 간지(奸智)에 뛰어난 비열한으로 이반의 심오한 이론에 대해 자기 나름의 비속한 해석을 내리고 유산을 한몫 차지할 생각에서 부친살해를 결행한다.

막내아들 알료샤 : 종교심이 두터운 순결 유화한 사람으로 그의 맑고 선의에 찬 마음은 타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동정에 넘쳐 있다.

아버지 표트르는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번 졸부지만, 탐욕스럽고 방탕하게 살면서 3명의 아내에게서 4명의 아들을 얻었다.

서자 스메르자코프는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받는 차별 때문에 아버지 표트르를 증오한다.

또한, 아버지 표트르와 아들 드미트리는 그루셴카를 사이에 두고 애욕의 투쟁을 벌인다.

한편, 드미트리는 동생 이반과 함께 두 여성 카테리나와 그루셴카와 사랑와 질투의 관계를 형성한다.

어느날, 드미트리는 돈문제에 쪼들리면서 아버지와 몸싸움까지 하며 다툰다.

그리고 표트르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서자 스메르자코프가 진범이었으나 살해되던 날 간질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의심을 받지 않게 된다.

결국 장남 드미트리는 살인범으로 체포, 투옥되고 재판을 받게 된다.

차남 이반의 추궁을 받던 스메르자코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털어놓지만, 이반이 말했던 “신만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사상이 자신의 범죄를 부추겼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다.

더군다나 드미트리가 카테리나에게 보낸 편지에 ‘평소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라는 내용이 공개되면서, 그는 마음 속으로 저지른 살인도 살인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기 죄를 인정하고 유죄 판결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의의 [ 편집 ]

러시아 소설의 대가로 칭해지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소설로써,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고민해 온 인간 존재의 본성과 다양한 사회적/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고가 집약된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정수이다. 또한 당시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정확하게 투영한 내용으로 베테랑 작가의 사회 비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각주 [ 편집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줄거리와 선과 악

부친 살해 용의자로 3명의 아들이 지목된다.

용의자로 장남인 드미트리가 지목받는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음탕한 피를 이어받아 주색에 빠져 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살인동기는 어머니의 유산상속에 대한 불만과 아버지의 여자를 흠모한 점이다.

용의자 두 번째인 차남 이반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지식인으로 살인동기는 인간을 멸시하는 아버지를 증오한 점이다.

세 번째 용의자는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로 표도르가 거리의 여자와 관계해 낳은 아들이다. 카라마조프가의 성실한 하인이다.

살인동기는 다른 형제들과의 차별대우에 불만이 있었다.

세 아들 중 아버지 표도르를 죽인 진범은 과연 누구일까?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인 범인은 바로 스메르자코프로 둘째 형 이반의 꾐에 빠져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줄거리 / 도스토예프스키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 시대 한 지방의 지주 집안인 카라마조프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변론을 다룬 소설입니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주요 인물은 아버지인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그의 장남 드미트리, 차남 이반 , 막내 알료샤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차남인 이반과 막내 알료샤 사이에 있었던 대화인 대심문관이라는 내용입니다.

냉철한 지식인으로 철저한 무신론과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둘째 이반은 신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실존주의적 무신론을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 막내인 알료샤는 예비 수도승으로 조시마 장로라는 위대한 스승이자 수도자를 통해 현명한 자로 인정받으며 세상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빼 놓을수 없는 또 다른 인물로 아버지의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를 등장시킵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그루센카는 장남인 드미트리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역시 이소설을 이끌고 가는 긴장과 갈등의 주요 내용입니다.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장남 드미트리 간의 재산과 유산 분배문제로 갈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복잡한 집안 사정을 논의하기 위해 아버지는 수도원에서 가족회의를 제안하고, 수도원이라는 엄숙한 분위기가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권위에 유리할 것이란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남인 드미트리는 아버지의 이런 속셈을 알았기 때문에 이 제안이 못마땅했지만 그동안 아버지에게 무레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해서 이번만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합니다. 가족회의를 통해서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이고 다양한 성격 묘사를 통해서 갈등과 사건은 전개 됩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백미에 해당하는 대심문관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단에 대한 심판과 심문이 한창이던 15세기 스페인 세비아 지역 천국에 있던 예수는 잠시 이 세상의 일이 궁금해서 지상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 지역은 전날 난폭한 대심문관이 화형대에서 100여명의 이단자를 화형에 처해 죽였기 때문에 불길이 유난히 높이 치솟아 올랐기 때문에 이곳을 예수가 온것입니다.

마침 그때 예수는 죽어 있던 한 소녀를 부활시키는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대심문관은 예수를 구금한 후 자 심문을 하게 됩니다. 예수는 광야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요구하는 악마의 유횩도 모두 거부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택했지만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 오히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기적, 신비, 권위가 있어야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자유보다 빵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악마의 유혹에서 빵을 선택하지 않고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빵에 대한 욕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믿음과 질서를 가질 기회를 박탈하였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예수를 유혹한 악마와 손을 잡고 지상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제공함으로써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빵을 제공하고, 예수가 제시한 신앙의 자유를 교모하게 이용해서 현실의 질서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제 예수가 재림하여 질서를 흐트린다면 이곳은 지옥이 될 것이라고 대심문관은 예수를 다그쳤고 결국 화형까지 시키겠다고 협박합니다.

이 모든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예수는 대심문관의 말이 끝나자 그에게 가볍게 입맞춤하고 대심문관은 예수를 풀어주면서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말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차남인 이반이 막내인 알료샤에게 해주고, 알료사는 이에 대해서 반박하지만 대화는 결론을 맺지는 못하게 됩니다. 한편 아버지 표도르와 장남인 드미트리는 그루센카라는 여성을 사이에 두고 서로 연적관계가 됩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자신의 집으로 찾아 오면 3000루블을 주고 청혼까지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드미트리는 그루센카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 주위를 감시하다 옛 여인인 카체리나에게 3000루불을 빌리지만 모두 술과 향략에 탕진하게 됩니다. 드미트리는 그루센카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예전에 그녀를 버리고 떠나버린 폴란드 남자를 만나러 가버린 뒤였습니다.

아버지를 찾아간 드미트리는 멀리 창밖에서 아버지의 탐욕스런 얼굴을 본 순간 분노가 치솟아 오릅니다. 그 순간 갑작이 간질 발작을 일으킨 스케르자코프의 신음 소리에 밖으로 나온 이집의 하인인 그리고리와 마주하게 되고 우발적으로 그리고리를 흉기로 내치치고 담장을 넘어서 도망치게 됩니다.

다음날 아버지인 포도르는 죽은채 발견됩니다.

용의자로 몰린 드미트리는 검찰 조사를 받게되고 누구 하나 드미트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검사는 계속 드미트리를 심리적으로 악박하고 모욕하면서 수사를 하게 됩니다.

수사가 진행 됩에 따라 처음에는 강경하게 죄를 부인하던 드미트리는 차차 자신을 성찰하게 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오늘날 우리가 격을 수 있는 모든 인간의 군상을 등장인물을 통해서 묘사 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 쾌락, 죄의식, 종교, 선, 악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감정과 사상들을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사유를 통해서 현실감있게 묘사합니다. 이것이 이 작품의 훌륭한 점이고, 오늘날까지 읽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도스토옙스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에 반해 잔혹한 아버지의 성격은 어린 도스토옙스키에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은 모두 무능하거나 잔인한 인물로 묘사된다.

유년시절 아버지가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많은 대화를 즐겼고 이들의 어려운 삶을 공감했던 그는 평생 현실적이지 못했고 자신의 경제력을 감당하기 어려운 삶을 살게된다.

그의 작품 가난한 사람들에서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지 그리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작품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젊은 시절 정치적 운동을 하다 체포되서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간신히 형 집행을 모면하고 시베리아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인간관 및 세계관의 변화가 오게된다.

평생 부채와 노름으로 일관했던 그의 생 가운데서 “노름꾼”과 “죄와 벌”이라는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가 죽기 한 해 전에 발표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소설을 발표하게 된다.

소설과도 같았던 그의 일생은 1881년 1월 28일 마감하게 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담고 있는 사회성

지금까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제목의 소설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우선 이 책의 작가는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합니다. 그는 1882년 11월 1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그는 대부분 인간의 심리, 현대의 사회성이나 철학, 그리고 종교를 주제로 쓰는 러시아의 소설가로 알려져있습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외에도 ‘죄와 벌’, ‘가난한 백성들’, ‘지하생활자의 수기’ 등등 여러 소설 작품들을 지은 러시아의 뛰어난 작가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대표적으로 아버지 표도르와 그의 아들들 드미트리와의 갈등 사건을 줄거리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안좋은 아버지와 아들들이 돈 문제로 큰 싸움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 표도르는 그의 사생아, 스메르쟈코프에게 살해당했지만 그 날은 그가 간질 발작을 일으킨 날이라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고 최근에 표도르와 싸웠고 가장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드미트리 미챠가 범인으로 지목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드미트리 이반은 노력했지만 결국 미챠는 유죄판결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으로 떠나버렸다는 결말의 스토리입니다. 저는 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가장 기억남은 두 명의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인상깊게 느꼈던 두 명의 인물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표도르의 네 아들들 중 하나인 드미트리 미챠가 가장 인상깊게 느껴졌습니다. 드미트리 미챠는 저희 조가 만든 과제의 인물들로 중심적으로 등장해 기억에 남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표도르의 살해혐의에 대한 재판의 용의자로 스토리의 흐름 즉, 줄거리와 사건의 전개의 중심을 잡고 있는 주요 인물입니다. 드미트리의 재판으로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독자들에게 재미와 관심을 주는 동시에 책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이해시켜주며 인물이라 생각하여 이 인물이 인상깊다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그가 언급한 ‘나는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로 드미트리 미챠의 자신을 신뢰했던 사람들의 고마움과 감정을 잘 느낄수 있어 인상깊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표도르의 셋째 아들이자 막내인 드미트리 알료샤도 인상깊게 느껴진 인물이었습니다. 표도르의 아들들 중 막내로 종교심이 많고 선한 마음을 가진 설정의 인물입니다. 이 소설은 미챠의 재판을 토대로 스토리가 흐르는 거지만 다른 면에서 봤을때는 드미트리 알료샤가 이 소설배경인 기독교와 무신론과 종교의 대립속에서 살아나가는 성장의 스토리의 면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카라마조프 소설의 독특한 설정과 또하나의 줄거리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여 드미트리 미챠와 같이 인상깊게 느껴진 인물이었습니다. 이 두 인물들은 모두 소설에서 대표적으로 표도르의 살해혐의에 대한 누명으로 평등하지 않은 재판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사회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회성은 이 카라마조프 소설에서뿐만이 아니라 현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있는 사회성입니다. 저는 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작가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사회성을 독자들에게 소설로 구체적으로 보여주어 이 사회성으로 인해 발생할수 있는 사건이나 영향들, 그리고 이 사회성의 사건들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들에 대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근본으로 전해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소설이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스토리에 대한 재미도 주면서 재판의 사회서에 알려주려고 하는 표도르 작가의 전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에 소설에 관심이 없었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소설은 수업을 진행하고 과제를 만들면서 꽤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인물들에 대한 개성들이나 스토르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책에 잘 표현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주었습니다. 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소설에 그닥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던 저에게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의미나 재미 등을 알려준 또다른 경험이자 소설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고 알아볼 수 있게 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에 대해 생각하거나 느낀점들에 대한 서평을 써보았습니다. 아직은 카라마조프 같은 소설들은 어려워 읽는데 생각보다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릴거라 생각하지만 시간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이런 소설을 읽어보고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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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있는 아이유

소설 속 주요 사건은 19세기 중반 카라마조프가에서 일어난 친부 살인사건이다. 1860년대 러시아 소도시의 지주인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등장한다. 그는 졸부로, 술집과 고리대금업 등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인물이다. 아버지 표도르, 그는 타락한 인간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타락을 권하곤 한다. “러시아는 돼지우리다. 러시아의 백성들은 두들겨 패 줘야 한다.”라고 곧잘 떠들어댄다. 이런 탐욕적인 성격의 아버지인 표도르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다.

첫째 아들은 드미트리.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드미트리는 아버지 표도르와 재산 문제, 여자 문제로 격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는 약혼녀인 카테리나를 무시한 채 구르센카라는 여인을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 여인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 표도르와 싸움을 벌인다.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이다. 둘째 이반은 논리와 지성을 갖춘 수재이다. 그는 ‘신’과 ‘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이자 허무론자이다. 셋째 알료사는 수도원에서 신앙의 길을 걷는 진실한 청년이다. 그는 긍정적이며 인산의 사랑을 강조하는 박애주의자이다. 그리고 아버지 표도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아들이다.

사생아이자 막내인 스메르자 코프. 그는 아버지 표도르와 마을을 떠돌던 한 백치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간질병을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카라마조프가의 하인으로 일을 하고 있다. 다른 세 아들과는 다르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만큼 아버지 표도르를 증오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강한 인물이다.

카라마조프가의 네 형제들과 아버지 표도르는 잦은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친부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된 채 발견돼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네 형제들에게는 나름대로의 혐의가 있었다. 사건 날, 첫째 드미트리의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고 3000 루블로 추정되는 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공연하게 아버지를 증오하던 드미트리는 정황상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막내 스메르자 코프는 그날 밤, 간질병 발작이 있었다는 이유로 혐의에서 제외된다.

이제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살해한 살인범을 찾아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모든 정황은 첫째 드미트리에게 불리하기만 하다. 그러나 진범은 간질병 환자인 막내이자 사생아인 스메르자 코프였다. 그는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하였지만 간질병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평소 무신론자인 둘째 이반이 ‘신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둥의 자신의 신념을 스메르자 코프에게 설파하며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메르자 코프는 이반에게 끔찍한 일이 발생하기 전에 고향을 떠나 있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를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조만간 간질병이 발작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고 이반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서도 고향을 떠난다.

그 후 운명의 날 밤, 첫 째 드미트리가 좋아하던 그루센카가 아버지 표도르를 만나러 집으로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드미트리는 이성을 잃고 구리 절구공이를 집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드미트리는 굉장히 흥분해있긴 했지만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다. 범인은 바로 스메르자 코프였다. 그는 서자로써의 삶이 괴로웠고 그간 표도르가 자신을 대하는 행동에 분노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평소 둘째 이반의 ‘산이 없다면, 모든 것은 용서된다’라는 말에 탄력을 받고 표도르를 결국 살해하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이반은 스메르자 코프와의 세 차례 만남을 통해 그가 진범임을 확신한다. 그는 이반에게도 이반도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냐며 이반이 살인을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격분한 이반은 모든 사실을 알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스메르자 코프는 자살을 하고 만다.

얼마 후 드미트리의 재판이 열렸다. 두 명의 동생과, 아버지와 삼각관계에 놓였던 그루센카는 드미트리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하인들과 그의 약혼녀 등 대부분의 증인들은 모두 유죄를 주장한다. 결국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20년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둘째 이반은 자신의 신념을 인한 살인이 발생했고 형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큰 병까지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미트리의 유죄를 주장했던 약혼녀 카테리나와 둘째 이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완전 막장이다. 아무튼 덕분에 카테리나도 마음을 고쳐먹게 됐고, 그래서 셋째인 알료사와 힘을 합쳐서 감옥에 있는 드미트리를 탈출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다시 만난 드미트리와 카테리나는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2021.07.29 – [독서/도스토예프스키] –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대심문관

2021.06.28 – [독서/도스토예프스키] –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양파 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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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요약]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줄거리, 등장인물, 갈등구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목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저자 : 도스토예프스키 원작, 김숙희 엮음, 오기철 그림

출판사 : 지경사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명작이라는 시리즈를 ‘당근’마켓에서 구매했습니다.

초등학생용이라 어른이 되며 수 차례 읽으려 했지만 포기했던 명작들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만, 심하게 요약하다보니 내용의 비약이 일어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중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소설을 읽고 정리했습니다. 책의 제목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지만 검색 최적화를 위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사용합니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과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더 심도있고 좋은 글도 있습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배경

러시아 거장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로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가 배경입니다.

출판된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작가가 구상한 3부작 중 프롤로그였으나 1부 출간 후 작가가 사망해 나머지 2부작은 출간되지 못했습니다.

2부는 둘째 알렉세이가 혁명 세력에 가담해 황제를 암살하고 처형당하는 줄거리였다고 합니다.

줄거리

까라마조프가의 아버지 포도르 까라마조프는 고리대금업으로 자수성가했지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다.

표도르는 어머니가 다른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서자를 뒀다.

표도르는 장남인 미챠와 그루센카라는 여자를 두고 다투게 된다.

둘째인 이반은 미챠의 약혼녀인 카테리나를 사랑하게 된다.

상속과 재산 분배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던 일가족은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가족회의를 시작한다

조시마 장로의 중재를 기대했던 까라마조프가 가족들은 표도르(아버지)와 미챠가 크게 싸우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어느 날 미챠는 자신이 방탕하게 사용한 카테리나의 돈을 갚고 그루센카와 함께 떠나기 위해 아버지와 다툼을 벌이게 된다.

어느 날 표도르가 살해되고 아버지 표도르의 살인범으로 첫째 아들 미챠가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미챠가 약혼녀 카테리나에 보낸 편지 내용에 평소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는 내용이 공개되자, 미챠는 평소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었다는 충동을 가졌다는 것으로 유죄를 인정한다.

사실은 둘째 아들인 이반의 “신은 없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무신론적인 사상에 영감을 받은 사생아 스메르자코프가 유산을 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다.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의 추궁을 받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만 이반의 사상이 자신의 범죄를 부추겼다고 밝히고 자살한다.

등장인물 정리

표도르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

까라마조프 4형제의 아버지

자수성가해 돈이 많고 방탕하게 살아가다 아들에게 살해당한다

그룬센카라는 여성을 두고 첫째 아들 미챠와 경쟁한다

미챠(드미트리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 28세)

표도르의 첫째 아들이며 전직 장교. 아버지의 생명력과 원시적인 감성을 물려받음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에 유죄판결을 받아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반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24세)

표도르의 둘째 아들. 대학을 나온 무신론자. 큰 형 미챠의 약혼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를 사랑하게 됨.

알료샤(20세,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

표도르의 셋째 아들. 수도사가 되려고 했으나 존경하는 조시마 장로의 죽음으로 수도원을 떠남

순수함을 상징

스메르자코프(파벨 표도로비치)

표도르가 거지 여인과 정을 통해 낳은 사생아로 비열하고 잔꾀가 많음

갓 태어난 후 하인인 그리고리의 양자로 자라 표도르가의 하인 겸 요리사로 일함

조시마 장로

알료샤의 스승으로 이 소설에서 긍정적인 사상의 핵심

대중들이 성인으로 믿고 있으며 조시마 장로가 죽으면 수도원에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함.

알료샤는 아픈 사람들이 조시마 장로에 와서 병이 나았다는 사례들을 보기도 함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미챠의 약혼녀지만 나중에 이반을 사랑하게 되는 신경질적인 귀족

그루센카(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

첫사랑인 폴란드 장교에게 버림받은 후 늙은 상인의 아내가 됨. 이후 표도르와 미챠의 구애를 동시에 받지만 미챠를 선택함

무샤로비치

그루센카의 첫사랑으로 비열한 폴란드인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

표도르의 첫째 처이며 미챠의 어머니. 남편의 방탕함에 질려 가출

소피아 이바노브나

표도르의 두번째 처이자 이반과 알료샤의 어머니. 두 아들을 낳고 신경쇠약으로 사망

등장인물 갈등 구조 정리

사랑으로 중심으로 한 갈등 구조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사랑을 중심으로 갈등구조

돈을 중심으로 한 갈등 구조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돈을 중심으로 본 갈등구조

(끝)

#48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내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손에 든 것은 오징어잡이 배들이 낮잠을 자는 제주의 한적한 작은 포구 마을이었다.

삼다수처럼 투명한 공기와 바닷바람처럼 맑은 새 소리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행운’이라는 말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담겨있겠지만, 그중에서 많은 분들이 공감할만한 한 가지를 꼽자면 이 사실이 아닐까 싶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대단히 길고, 대단히 어렵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2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이다. 평생에 걸쳐, 소설만 계산해도 무려 4만 장의 원고를 써낼 정도로 다작을 했던(수많은 에세이들은 제외하고) 도스토옙스키가 필생의 역작으로 빚어낸 작품이니 그 양이 방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대단히 긴 소설’을 넘어 ‘대단히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스타일 자체에 기인한 바가 크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은 그의 하버드대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에서 소설가의 스타일을 두 가지로 나눈다. 그림을 그리듯 이미지로서 소설을 보여주는 ‘시각적’ 소설가와 지식과 관념을 전달하는데 무게를 두는 ‘단어적’ 소설가가 그것이다. “붉은 기와를 얹은 하얀 지붕의 뾰족한 집들이 언덕의 비탈길에 늘어서 있으며…”로 시작하는 <적과 흑>의 스탕달은 ‘시각적’ 소설가의 좋은 예를 보여주는 반면, 우리의 도스토옙스키는 (안타깝게도) ‘단어적’ 소설가의 전형이다. 이를테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출발한다.

“나의 주인공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전기를 시작함에 있어 나는 다소간 의혹에 빠져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비록 알렉세이 표도로비치를 나의 주인공이라 부르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전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들이 불가피하게 튀어나올 것임이 미리부터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어휴.

이미지를 상상하기 쉽지 않은 ‘단어적’ 문장. 선과 악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 프로이트 같은 최고의 심리학자가 경탄했던 치밀한 심리분석.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2000페이지의 높은 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더욱 험준하게 만드는 절벽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파도의 발끝이 닿는 곳에 쌓아 올린 모래성처럼, 끊임없이 집중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일상의 한 가운데서 이 책을 폈더라면 얄팍한 인내력의 소유자인 나로서는 끝까지 읽어서 깨뜨려 낼 수 있었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여유로운 시골 바닷가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난 ‘행운’이란 이런 의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출퇴근 지하철에 시달려야 하는 직장인으로서는 ‘시간을 따로 내지 않으면’ 읽기 힘든 책인 까닭에, 나는 시작부터 많은 기대를 안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기대를 품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질문이 샘솟는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손에 든 나에게도 이런저런 질문이 떠올랐다. 작가는 2000페이지나 되는 긴 여정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것인가. ‘대문호’라 불리는 소설가의 문장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 작품이 문학사에 불멸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어떤 까닭에서인가. 그리고 과연 이 책을 나는 끝까지 ‘흥미’를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하여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했다.

첫째, 막장과 걸작 사이. 이 책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한 구원과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셋째, 이 책의 서두에 인용된 요한복음 12장 3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의 의미는 무엇이며, 밀알은 과연 누구인가.

#1 막장과 걸작 사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위대한 이유

카라마조프 가의 아버지 표도르는 꽤 성공한 지주(地主)다. 그는 대단히 탐욕스러운 인물이라, 여자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족을 못쓰는 호색한이며, 돈을 움켜쥐기 위해서라면 자식과의 불화도 불사하는 탕아다. 표도르에게는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사생아가 있는데, 이 네 명을 중심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진행된다.

첫째 아들 디미트리는 현직 장교로서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전형적인 러시아인이다.

그는 열정(그리고 욕망)이 가득한 인물로서 돈을 쓰거나 사랑에 빠지는 일에도 왕성한 행동력을 보여준다. 높은 명예심 역시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성격이다. 불같은 욕망에 끄달려 저지르는 잘못과 그 잘못에 대한 수치심이 디미트리가 심리적인 갈등에 시달리는 내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역사의 이곳 저곳에서 장성한 큰 아들이 그 아버지와 충돌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디미트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금전과 여자 문제로 아버지 표도르와 갈등 관계에 놓이며,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중심 사건을 형성한다. 디미트리를 상징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러시아인, 욕망, 명예다.

둘째 아들 이반은 지극히 이성적인 인물이다.

교양과 지식의 유럽인을 상징한다. 그는 논리와 사색을 추구하고, 논리적인 사유를 통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허용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차가운 이성을 바탕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뜨거운 디미트리와 대비되고, 논리를 통해 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믿음으로 가득한 알렉세이와도 다르다. 이반의 키워드는 유럽, 이성, 논리다.

셋째 아들 알렉세이는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선한 인물’의 전형이다.

신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수도사로서 구도의 길에 몸을 바치려는 확고한 열정을 갖고 있다. 마을의 존경받는 어른인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대로 ‘사랑’의 높은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노력한다. 알렉세이는 어디를 가든 누구에게든 사랑받는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지만, 마을의 아이들이 그를 흠모하며 따른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알렉세이의 삶이 러시아적인 욕망이나 유럽의 지성에 기대기 보다는 실제 민중의 구체적인 현실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알렉세이는 이야기 내내 카라마조프 가의 갈등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알렉세이의 키워드는 선, 믿음, 민중이다.

스메르자코프는 표도르의 사생아(로 추정된)다.

표도르가 떠돌이 여자를 임신시켜 낳게 한 인물로 카라마조프 가의 요리사이자 하인으로 살고 있다. 그는 순수한 악의 캐릭터로서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싫어하고’ ‘모든 사람을 경멸했다.’ 스메르자코프는 어릴 적부터 잔인한 면모를 보인 바 있는데, 고양이를 목매달아 죽인 뒤 장례식 놀이를 하곤 했던 것이다. ‘누구 하나 좋아할 줄 모르는’ 그에 대해 도스토옙스키는 작중 인물의 말을 빌려 “너도 사람이냐”고 평가하기까지 했다. 스메르자코프의 키워드는 악이다.

사실 이 책의 줄거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독 한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문학, 심리학, 철학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으며 그만큼 많이 주인공의 이름과 주요 사건들이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 가에서 벌어진 사건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아버지 표도르에게 세 아들이 모인다. 첫째 아들 디미트리가 돈 문제로 아버지에게 담판을 짓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의 현로, 조시마 장로가 동석한 가운데 가진 카라마조프 가의 회합은 합의는커녕 추잡한 스캔들(특히 표도르와 디미트리의)로 끝나고 만다.

금전 문제가 카라마조프 가에 드리워진 그늘에 불씨로 작용했다면, 그 위에 기름까지 끼얹은 것은 다름 아닌 여자 문제.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디미트리는 아버지 표도르가 점 찍어 놓은 여자(그루셴카)에게 한 눈에 반해버리고, 둘째 아들 이반은 버림받은 디미트리의 약혼자에게 사랑에 빠진다. 그루셴카가 표도르와 디미트리 사이에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여우짓을 하는 동안 아버지와 아들의 불화는 주먹다짐으로 폭발하여 디미트리가 표도르를 ‘넘어뜨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지경에 이른다. 아버지의 여자를 뺏으려는 첫째 아들. 첫째 아들의 약혼자를 사랑하는 둘째 아들. 돈과 여자로 카라마조프 가는 풀릴 수 없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이 때 악한 스메르자코프가 등장한다. 스메르자코프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하는데, 돈과 여자 문제에 이성을 잃은 디미트리를 함정에 빠뜨려 마치 그가 친부를 살해한 듯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마침내 디미트리는 존속살해범으로 체포되고 모든 증인과 정황 증거가 디미트리를 유죄로 몰아간다. 디미트리는 비록 방탕하고, 돈을 훔치고, 이웃 사람들을 모욕하는 망나니 짓을 저질렀을지언정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건만, 배심원들의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재판은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스메르자코프는 사실 ‘신은 없고,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둘째 이반의 생각에 기대 범죄를 저질렀다.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이 자신과 한 편이 되어주리라 바라면서 범행 사실을 털어놓지만, 진범을 알게 된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의 고백에 경악하고, 법정으로 달려간다. 마지막 공판일. 이반이 디미트리의 무죄를 주장하고 표도르의 살해범은 스메르자코프임을 주장하지만, 이반의 반응에 낙담한 스메르자코프는 간밤에 이미 아무런 유서 없이 목을 매어 자살한다. 스메르자코프가 진범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배심원들은 디미트리의 유죄를 인정하는 오심을 저지른다. 디미트리는 시베리아의 유형지로 떠날 운명에 처하고 이반과 알렉세이는 그를 구출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줄거리만 훑어보면 흔하디 흔한 막장 드라마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2013년 일본에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높은 인기를 얻었는데, 요즘 써낸 각본이라 알고 본 사람들도 많았다 한다. 호색한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의 금전 갈등, 친부 살해와 출생의 비밀(사생아)까지. 막장 드라마에 들어가는 요소는 빠짐없이 들어있다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전업 작가로서 늘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글자 수가 곧 수입’인 경제적으로 각박한 삶을 삶았다. 훗날 도스토옙스키가 남긴 육필 원고를 보면, 좌우의 여백에 ‘이 원고를 팔면 얼마를 벌 수 있는지’에 대한 계산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돈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디미트리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는 실제로 감옥에서 4년의 유형 생활을 했고, 사형집행 직전에 기적적으로 집행이 취소된 일도 있었으며, 간질병에도 시달렸고, 도박에도 어느 정도 빠져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가난, 유형, 간질, 도박로 점철된 피폐한 삶이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삶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의 피폐한 어둠 때문이 아니라, 그 많은 곤란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같은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글을 쓰고, 또 써서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소원대로 ‘발자크에 필적하는’ 대문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생의 숱한 어둠에 그치지 않고, 그 어둠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 우리가 도스토옙스키의 파란만장한 어둠에 보내는 경탄은 단지 그가 겪어야 했던 어둠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어둠이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의미 있는 경험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이와 같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단순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가장 중요한 물음을 담아내는 도구로 가장 통속적인 소재를 택했다.

표도르의 네 아들은 각각 선과 악, 뜨거운 욕망과 차가운 이성을 상징한다. 우리에게는 순수한 선(알렉세이)과 순수한 악(스메르자코프)이 존재한다. 그 둘은 늘 양쪽 귀 주변을 날아다니며 속삭이는 천사와 악마다. 이들은 순수함 그 자체이므로 인간적인 고뇌가 거의 없다. 끊임없이 사랑받고 지침 없이 사랑하며, 이유 없이 미워하고 고민 없이 괴롭힌다. 하지만 인간은 선과 악으로 깨끗이 나뉠 수 없는, 보다 복잡한 존재다.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디미트리) 임과 동시에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이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욕망과 이성 중 한쪽만 옳다고 일방적으로 손을 들어주어서도 안된다. 도스토옙스키에 의하면 악이란 욕망과 이성 어느 쪽에도 깃들 수 있는 것이다. 절제하지 않은 욕망이 디미트리를 파멸로 이끌고 갔다면, 인간성이 배제된 이성의 추구 역시 이반으로 하여금 내면의 죄(‘모든 것은 허용된다.’)를 저지르게 했다. 따라서 욕망과 이성의 외줄 위를 걷는 한 인간은 언제나 양쪽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짊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네 아들을 낳은 아버지, 표도르를 주목하게 된다.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의 뿌리를 더듬어가면 결국 하나의 지점, 표도르에 이르게 된다. 지극히 선한 것과 지극히 악한 것, 인간적인 욕망과 이성적인 판단은 물과 기름처럼 깨끗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두가 한 명의 아버지가 낳은 자식이고, 하나의 시원(始原)에서 출발한 물줄기다. 표도르는, 검사의 말을 빌리면 ‘우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우리 모두는 언젠가 아버지가 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언젠가 아버지가 된다. 그러므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 표도르는 곧 우리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은 우리의 마음 그 자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 탐구 과정의 문학적 도구로서 막장 드라마를 택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위대한 걸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와 진배없지만, 그 안에 깃든 의미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줄거리만 훑은 채 의미를 곱씹지 않으면 이는 껍질만 뜯어먹으면서 ‘오렌지의 맛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피폐한 인생을 살면서도 그 피폐한 인생의 경험을 토대로 위대한 글을 써낸 도스토옙스키처럼, 통속적인 막장의 소재를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탐구했기 때문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위대한 작품이다.

#2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한 구원과 희망.

도스토옙스키가 탐구한 바, 인간이란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이 흙탕물처럼 뒤섞인 복잡다단한 존재다.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복잡한 것이기에, 우리 역시 언제든 표도르처럼 방탕한 삶을 살 수 있고, 디미트리처럼 돈 때문에 아버지를 들이받을 수 있으며, 스메르자코프처럼 철저한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알렉세이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같은 계단에 올라서 있는데, 다만 누구는 몇 계단쯤 위에, 다른 사람은 그 아래에 있을 뿐’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벗어날 수 없는 죄악으로부터 구원은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다.

구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죄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죄를 지음으로 해서 벌을 받게 되고, 그 고통을 전제로 하여 구원과 희망을 모색하게 되는 까닭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기본적으로 법정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카라마조프 가를 둘러싼 인물과 갈등 관계가 제시되고,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며,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디미트리는 3000 루블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법정 공판을 통해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법정 소설과 같이 ‘진범은 누구인가’, ‘범행 동기는 무엇인가’, ‘결국 정의는 바로 서는가’의 질문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즉, 디미트리는 누명을 벗고, 잃었던 명예를 회복하며, 스메르자코프의 파렴치함이 널리 알려지면서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마무리될 가능성도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위대하다 평가받는 것은 이 책이 단순히 형사적인 유무죄의 문제로 카라마조프 가의 비극을 귀결시키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마음으로 저지른 잘못’ 또한 유죄라고 본다.

스메르자코프가 표도르를 살해하는데 기댔던 것은 둘째 이반의 사상이었다. ‘신은 없고,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이반의 논리적 사유에 그는 범행의 이론적 당위성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스메르자코프는 자신의 범행 의사를 일부분(간질 발작 시간을 미리 예고하는 등) 이반에게 털어놓는다. 물론 이반에게는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도, 살해를 교사할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이반 역시 마음속으로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날 밤’ 아버지 곁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감으로써 결과적으로 범행을 돕게 된다. 스메르자코프는 이런 사실을 들어 ‘이반 역시 아버지가 살해당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라 주장한다. 물론 이반이 범행을 알았거나, 눈치챈 것은 아니다. 스메르자코프의 범행 의사를 사전에 명확히 알았다면 그에 찬동했을 리도 없다. 다만 이반은 ‘이따금’ ‘마음속으로’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한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법정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증인석에 서서 “저는 그냥 살인자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하고 만다. 물론 재판에서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주장이다.

‘마음으로 저지른 잘못 역시 유죄’라는 생각은 형사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명제다. 형법의 처벌 대상은 행위이며, 행위가 없는 부작위(不作爲)라 할지라도, 행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의 적극적 행위나 마찬가지로 간주될 수 있는 부작위만이 처벌의 대상인 까닭이다. 범행을 준비하는 ‘예비’나 여럿이 범행을 모의하는 ‘음모’ 조차 예비하는 ‘행위’와 공모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다. 즉, 정의의 여신 디케의 저울에는 마음으로 저지른 잘못이 올라갈 자리가 없다.

그러나 저 유명한 말, ‘법은 도덕의 최소한’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마음의 잘못’에도 들이대 온, 보다 눈금이 촘촘한 잣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십계명 중 일곱째는 “간음하지 말라.”다. 간음의 의미에 대해 마태복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범주에서 악업을 짓는다. 뜻으로 저지르는 잘못도 몸과 말로 짓는 악업과 마찬가지다. 온 우주의 인과 법칙은 마음으로 품은 악한 뜻에도 에누리가 없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법치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형사법상 규정된 행위만을 죄라고 여긴다. 법전으로 울타리를 세워놓고 그 담장을 넘지 않는 한 ‘나는 무고한 사람’이라 자신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언급한 대로 우리는 ‘식탁 위에 놓인 돈을 훔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자기가 대단히 정직한 사람인 양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울타리를 뛰어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가 닿을 수 있는 최선의 자리인가.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이 뒤섞인 우리 마음이 지향해야 할 이상향이 고작 그것뿐인가. 2500년 전 공자는 말하길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라. 법으로 이끌고 형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벌은 면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온갖 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낯짝 두꺼운 생각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마음의 잘못’도 유죄라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가슴 안에 항상 촘촘한 잣대를 품은 채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의 스메르자코프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의 잘못조차 유죄로 받아들인다면, (거의)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죄에는 벌이 따르고, 벌은 고통스럽다. 벗어나기 힘든 이 굴레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구원은 무엇을 통해 가능하며,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도스토옙스키는 그 답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불신(不信)’으로 ‘죽도록 괴로워하는 여인’에게 도스토옙스키는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어 길을 알려준다.

“사랑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그럴 수 있습니다. 부인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실천적으로, 끊임없이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사랑’을 통한 구원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전체를 관통하여 각 인물들을 통해 몇 번이나 반복하여 드러난다.

수도원의 회합에서 스캔들이 있던 날, 골칫덩어리 가족과 영적 스승 조시마 장로 사이에서 고된 하루를 보낸 수도사 알렉세이가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은 병약한 소녀 리사의 갑작스런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리사가 손에 쥐어준 편지를, 알렉세이는 그 자리에서 세 번이나 거듭하여 읽는다.

“한 순간이 지나자 다시 조용하고 행복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천천히 편지를 봉투에 접어 넣고 성호를 그은 뒤 자리에 누웠다. 영혼의 혼란이 갑자기 사라졌다.”

수치심과 좌절감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려 마음먹었던 디미트리를 생명을 붙들어준 것도 사랑에 대한 희망이었다.

“새벽 5시, 이곳에서 동틀 녘에 스스로를 죽이겠노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지요. 야비한 놈으로 죽건 고결한 놈으로 죽건 어쨌거나 매한가지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매한가지가 아닌 게 돼 버렸어요. 믿으시겠습니까…(중략)… 때가 어느 때입니까. 내 사랑이 결실을 맺어 바야흐로 내 앞에서 천국이 다시 펼쳐진 때가 아닙니까.”

논어에 이르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선 살기를 바라는 것’이라 했다(愛之欲其生).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시비를 가리고자 했던 이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알료샤, 나는 살고 싶어, 논리를 거역해서라도 살고 싶어. 내가 비록 사물의 질서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봄이면 싹을 틔우는 끈적끈적한 잎사귀들이 소중하고, 파란 하늘도 소중하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내게는 너무 소중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어떤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인가.

도스토옙스키는 사랑의 두 가지 원칙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실천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사랑과 대비되는 의미의 사랑이다. 우리가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인 것이다.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사람들, 즉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행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를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정작 고작 이틀도 누구와 한 방에서 지낼 수 없다, 이건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테레사 수녀는 말했다. “난 결코 대중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작은(것부터 베푸는) 사랑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양파 한 뿌리’의 우화가 등장한다. 나쁜 짓만을 저지르고 살아온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이 평생 동안 베푼 선행이라고는 떠돌이에게 못난 양파 한 뿌리를 적선한 것이 전부였다. 결국 사후에 부인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되었는데, 천사들이 그 부인을 지옥에서 건져내려 할 때에, 바로 그 양파 한 뿌리를 내려 붙들게 했다는 이야기다.

디미트리의 재판에서도 ‘호두 1푼트’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배심원 제도를 통한 형사 소송은 배심원단이 피고인에게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느냐가 유죄 판단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모든 정황이 디미트리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디미트리에 대한 여러 증언들이 그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몰아갈 때, 마을의 터줏대감인 어떤 노인이 나와 디미트리에게 도움을 준다.

노인은 디미트리가 어릴 적에 1푼트의 호두를 건넨 적이 있었는데, 마을을 떠난 디미트리가 20여 년 후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어 나타났을 때 ‘호두 1푼트’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드렸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친부를 살해한 파렴치한 인간인가’를 가리는 재판에서 노인의 증언은 배심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짓는 죄와 구원의 길로서의 사랑, 그것에 대해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정리한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우리 개개인이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이며 그것도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의 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 각각의 사람에 대해 개별적으로 유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식이야 말로 수도승의 길은 물론이고 지상의 온갖 사람의 길이 도달해야 할 월계관인 것입니다.”

#3 밀알의 의미, 밀알은 누구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가장 첫 페이지에는 요한복음 12장 34절이 인용되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에 수감된 4년 동안 오로지 <성경>만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곳곳에 있는 신과 불멸, 선과 악에 대한 깊은 논쟁들은 그가 유형 생활 동안 <성경>을 붙들고 치열하게 사유하여 도달한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므로 ‘밀알’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사상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인다.

‘밀알은 누구인가’를 고민할 때, 맨 처음 떠오르는 인물은 일류샤(일류셰치카)다.

그는 가난한 스네기료프의 어린 아들로서 침대에 누워있는 병약한 아이다. 그러나 아픈 몸, 지독히 어두운 가정환경에도 일류샤의 내면 만큼은 절대로 아프지도, 어둡지도 않다. 그는 아버지 스네기료프를 모욕하는 어른과 자신을 따돌리는 학급의 급우 전체를 상대로도 당당히 맞설 줄 아는 용감한 인물이다.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주눅 든 채 살아가는 아버지와 병들고 철없는 어머니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조숙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이 실수로 죽인(나중에 건강하게 살아 돌아온다) 개를 떠올리며 끊임없이 마음 아파할 정도로 자비심도 있다. 결국 일류샤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 학급 친구들은 일류 샤의 진심에 공감하고 그에게 사과함으로써 하나가 된다.

그런 일류 샤가 일견 ‘밀알의 상징’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일류 샤의 장례식을 그리며 마무리된다. 그를 괴롭히던 학급 급우들과 알렉세이는 일류샤를 떠나보내며 “영원히 이렇게! 평생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일류 샤의 높은 도덕성과 불굴의 용기가 ‘많은 열매’로 맺히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원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2부작으로 쓸 계획이었는데, 돌연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가 구상했던 다음 내용은 시간이 흘러 알렉세이가 혁명가가 되고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 한다. 일류샤라는 밀알 하나가 땅에 묻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밀알로 태어나게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땅에 묻힌 밀알’을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조시마 장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일류 샤의 죽음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막을 내렸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마을의 현로 조시마 장로의 죽음으로 막을 올렸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조시마 장로는 깊은 지혜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존재다. 수도원에는 장로와의 면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장로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개개인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가르침을 전한다. 생명을 다해 민중에게 사랑을 베풀어준다는 점에서 조시마 장로의 모습에 2500년 전 붓다, 그리고 2000년 전 예수가 오버랩된다.

장로의 곁에는 그를 존경하는 수도사들이 늘 함께한다. 알렉세이도 그중 한 명이다. 조시마 장로는 그를 특별히 아끼는데, 몇 시간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의식하고 알렉세이에게 유언이자 마지막 가르침을 남긴다.

“고뇌 속에서 행복을 구하도록 해라. 일을 해라,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선과 사랑의 상징인 알렉세이가 골방에 틀어박힌 유약한 수도사가 아니라, 행동을 통한 사랑을 실천하는 리더로 자랄 수 있었던 데는 장로의 영향이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조시마 장로의 오랜 경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묻혔고, 알렉세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감화되어 ‘많은 열매’로 자라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의 주인공 알렉세이는 또 어떤가.

비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알렉세이지만, 그 자신만큼은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고, 진실을 믿으며, 진실에 당장 뛰어들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 싶은 열정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불멸을 위해 살고 싶다. 어정쩡한 타협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디미트리를 진범으로 의심할 때에도 인간 본성의 선함에 대한 확신으로 형의 무죄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반이 자책감으로 시름시름 앓을 때, 건강을 되찾아 살아가야 한다고 독려한 것도 알렉세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사랑했으며,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고자 애썼다.

알렉세이의 삶에 죽음은 아직 먼 이야기일지라도(그는 스무 살이다) ‘밀알’으로서 그의 영향력은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조시마 장로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부단하게 노력했는데, 특히 아이들의 사회에 뛰어들어 일류 샤와 급우들 간의 화합을 끌어낸 것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장로가 지시한 바, 수도원을 떠나 보다 넓은 세상에서 방황하고 배우게 될 그의 앞 일을 생각하면 알렉세이 역시 하나의 ‘밀알’로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 이르러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시마 장로가 베푼 가르침을 알렉세이가 따랐고, 알렉세이가 실천한 사랑은 일류사에게 닿았으며, 일류샤가 보여준 용기는 그와 척을 지었던 여러 급우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즉, 조시마라는 밀알은 알렉세이에, 알렉세이라는 밀알은 일류샤에, 그리고 일류샤라는 밀알은 많은 친구들에게 이어져 더 ‘많은 열매’로 맺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시마가, 알렉세이가, 일류샤가,

그 모두가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밀알’이 아닐까.

앞에서 고민해 본 두 번째 질문 ‘구원과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살핀 바와 같이 도스토옙스키는 ‘우리 개개인은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이며 각각 개별적으로도 유죄’라고 했다. 모든 이가 모든 이에 대해 유죄인 것은 이 세상이 그물망처럼 촘촘한 인과 관계로 빠짐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잘못은 눈에 보이는 인과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과 관계를 거쳐 어딘가에 도달하고, 무엇인가에게 해를 끼친다. 우리가 길가에 쓰레기를 버린다 하여 우리 자신이 직접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존재는 그 쓰레기로 인하여 반드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비단 잘못과 죄악, 이 세상의 부정적인 면에 있어서만 적용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 개개인이 지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개개인은 지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밀알’이 될 수 있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묻혀 많은 열매를 맺듯, 우리가 베푼 사랑도 인과 관계를 따라 어딘가에 닿을 것이고 무엇인가에 이로움을 보탠다. 비록 밀알을 심는 우리의 눈으로는 그 결과를 볼 수 없을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존재는 그로 인하여 분명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결국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으며, 이 땅의 모든 사람들 각각의 존재에 대해 개별적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도달해야 할 월계관이다.”

대단히 길고, 대단히 어려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덮으며, 우리 모두는 하나의 밀알이 될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도스토옙스키의 격려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비록 가난과 유형 생활, 간질병과 도박에 빠져 피폐한 삶을 영위하였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끝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끝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가장 막장의 소재를 통해 온 세상에 가장 위대한 질문을 던졌듯, 도스토옙스키도 파란만장한 어둠의 삶을 토대로 휘황찬란한 밀알이 되었다.

그렇기에 도스토옙스키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기에 전적으로 행복한 자는 자기 자신에게 곧장 ‘나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서약을 이행했노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시인의 심장과

소년의 눈을 가진

벗에게 이 역서를 바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자, 이전 작품에서 다루었던 크고 작은 사상적 문제들의 총합이며 그 문제들에 대해 작가가 제시하는 가장 성숙한 답변이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두터운 분량뿐만이 아니라, 사상적, 심리적, 철학적 차원에서 너무도 방대한 이 소설을 1879년과 1880년, 2년 만에 썼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작품을 탈고한 지 두 달 만에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또 자신이 평생을 두고 옹호했던 신의 품에 안겼다. 그래서 <작가로부터>에서 밝히고 있는 초기 의도, 즉 거대한 2부작 소설로 구성했던 작가의 의도는 완성하지 못한 채 남겨지고 만다. 우리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 알고 있는 장편은 작가의 초기 의도에 비추어 본다면 ≪위대한 죄인의 생애≫라는 2부작의 1부에 해당하고, 따라서 미완의 대작인 셈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논의하겠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테마나 플롯에서 하나의 완성된 장편 소설로서 아무런 손색이 없다. 또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가 경제적인 압박이나 심리적인 불안 등에서 벗어나, 작가로서 사상가로서 굳건한 위치를 다진 상태에서 쓴 유일한 작품이다. 그는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던 당대의 귀족 작가들과는 달리 요즘 말로 “생계형 작가”였고, 언제나 돈과 시간에 쫓기며 글을 써냈다. 돈의 쓰임이나 벌이 등, 실제적인 삶의 방식에서는 거의 무능하다 할 정도였고, 또한 그런 실제적인 것에 얽매이는 그 자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돈에 대한 이런 태도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서 긍정적인 인물들뿐만 아니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긍정적인 인물인 드미트리와 알료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스토옙스키는 떠맡을 필요도 없는 형의 식솔들, 또 말도 안 되는 거짓 문서로 돈을 받아 내려는 빚쟁이들의 빚까지도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책임 능력 범위 밖의 것들까지도 주저 없이 떠안아, 재정과 심리 상태는 더욱더 엉망이 된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를 버리지 않는다. ≪도박사≫의 마감 기한을 맞추기 위해 속기사로 고용한 20세의 안나 스니트키나가 1867년 46세의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해 그의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가 된다. 그녀는 경제적인 의미에서는 아무런 개념이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작가를 대신해 모든 현실적인 일들을 효과적이고 실질적으로 처리해 만년의 그에게 경제적, 심리적으로 안정된 삶을 가져다준다. 이런 안정된 삶 위에서 쓴 유일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에게 헌정함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삶과 작품의 완성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아내에게 표현하고 있다.

1860년대

소설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작가로부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이 두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우리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알고 있는 작품인 전편에서는 소설이 쓰인 당대, 즉 1880년보다 13년 앞선 시기를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시대적 배경은 1860년대 중반이 된다. 이 시기는 러시아가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사상적인 변화를 급격하고도 강력하게 겪고 있던 때였다. 유럽식 자본주의와 함께 서구적인 사고방식이 크게 유행하며, 공리주의, 사회주의, 무신론 등이 젊은 세대에게 매우 인기를 끌었다. 이 젊은 세대가 우상으로 받들던 아이콘적인 인물이 체르니솁스키였고, 그의 사상과 이론을 형상화한 책 ≪무엇을 할 것인가?≫는 서구주의자들에게 사상의 교리서이자 행동의 지침서로서 열렬한 찬사를 받으며 마치 성서처럼 받아들여졌다. 이 책에서 체르니솁스키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며,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 안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체제와 환경 탓이라고 여겼다. 죄는 있으나 죄인은 없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으로 당대의 많은 변호사들이 범죄자들의 무죄를 주장했고, 이런 유의 변론이 (이 발췌본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드미트리의 재판 과정에서도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바로 20대의 자신이 지녔던 이데올로기의 신념을 보았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성서를 읽으며 유형수들과 함께 보낸 10년의 세월로 그는 이러한 순진한 신념이 인간의 실제 본성과는 전혀 맞지 않으며, 또 인간을 개미 떼나 가축 떼로 몰아가려는 것, 즉 인간성 박탈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자각했다. 유형에서 돌아온 1860년대 이후로, 도스토옙스키는 논문을 통해, 또 작품을 통해,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마치 성서처럼 떠받들던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의 순진한 허구성과 인간성 상실에 대한 우려를 계속해서 알리며 서구주의자들과 싸움을 벌여 나간다. 이 싸움은 유형 이후 쓴 작가의 첫 작품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의 모든 대작들에서도 반복적으로 시험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이 모든 문제가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하게 그려지고 시험되며, 이전의 작품들보다 분명한 대답이 주어진다.

줄거리

플롯 라인으로만 본다면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아버지인 표도르는 부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으로, 육욕과 정욕,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만이 남은 저열한 본능의 화신이다. 작품 진행 시 55세인 그는 두 번의 결혼으로 아들 셋을 둔다. 첫 아내에게서 난 장남 드미트리는 어머니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유일한 아들인데, 아버지라는 자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아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스물두 살의 글래머 미인인 그루셴카를 놓고 장남과 문자 그대로 피 튀기는 싸움을 한다. 장남 드미트리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라는 아름답고 오만한 귀족 여인과 약혼을 한 사이이나, 늙은 상인 삼소노프의 첩으로 있던 그루셴카에게 완전히 넋이 나가, 그녀에게로 가기 위해 카테리나를 자신의 동생 이반에게 양보하지 못해 안달이다. 이반은 형의 약혼자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를 사랑하고, 그녀도 역시 이반을 사랑하나, 이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부정하며 오히려 그를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괴롭힌다. 다리가 불편한 리자라는 귀족 아가씨는 막내 알료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하나, 후에 이반을 사랑하게 되어 고통스러워한다. 표도르에게는 이 세 아들 외에도 마을의 백치 여인을 범해서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스메르댜코프라는 아들이 있는데, 그는 표도르의 요리사 겸 하인으로 일하며, 이반의 사상에 매혹된다. 신과 불멸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은 스메르댜코프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살해하지만,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드미트리가 용의자로 지목된다. 이반에게 실망한 스메르댜코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실제 범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채, 드미트리가 죄를 뒤집어쓰고 “고통으로 정화되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난다.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표면적인 줄거리로만 본다면, 친아들에 의한 아버지 살해를 둘러싼 주요 인물들이 엮어 내는 사랑과 미움의 드라마다. 작품의 주요 인물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랑의 삼각관계에 빠져 있으며, 연관된 이들이 모두 부자 또는 형제간이다. 요약한 줄거리만 본다면 가장 큰 사건은 아버지 살해인데,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플롯 라인을 갖는 소설이 어떻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세계 명작이 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해답은 플롯 자체가 아니라 인물들 자신과 그 인물들의 성격과 사상이 서로 부딪치고 공명하는 긴밀한 구성에 있다. 작가는 가치관의 변화가 심하고 무신론 등 서구 사상이 횡행하던 19세기의 러시아 현실을 배경으로 가족의 분열을 그리면서, 하나하나의 인물과 그들의 심리 변화, 사상 변화 속에 모순적이고 복잡다단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시대적 문제들을 지성의 대변인인 이반을 통해 제시하며, 그의 분열과 파멸을 통해 인간에 대한 체르니솁스키적인 이해는 옳지 않으며, 그런 유의 답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강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 대항해, 알료샤를 통해 근본적이고 영원히 옳은 해답, 즉 작가의 사상이 집약된 종교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 신과 무신론, 자유 의지,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영원한 철학적 담론의 대상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또 너무도 도스토옙스키적인, 그래서 너무도 러시아적인 테마들 역시 어떻게 표명되고 있는지를 주요 등장인물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의 저 유명한 책에서 제목을 빌려 온 것은 드미트리가 니체처럼 인지의 측면에서 철학적인 사람이란 의미는 전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적인, 너무나 러시아적인 인물이다. 표도르의 장남이자 첫 결혼에서 얻은 유일한 아들인 드미트리는 뼛속까지 러시아적인 전형적인 러시아인의 상징이며, 이런 드미트리를 통해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인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심리적, 종교적 테마인 “고통을 통한 정화”를 형상화한다.

드미트리는 아버지 표도르로부터 육체적인 정욕을 물려받았으나, ‘치마만 두르면 어디나 달라붙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표도르의 퇴폐적인 정욕과는 달리, 그루셴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성적이고 정열적이며 진지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하다. 아버지 표도르와는 서로 그루셴카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다하지만, 정작 그녀가 5년간이나 잊지 못하고 꿈에도 그리던 첫사랑에게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자 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보다 소중히 하며, 그것을 자신의 행복보다 앞에 두는 것이리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작가에게 매우 긍정적인 자질 중의 하나이자, 불멸과 신의 세계를 향한 길, 즉 구원을 위한 필수 요소다. 드미트리의 사랑의 대상 역시 이지적이고 차갑고 오만한 카테리나가 아니라, 감정적이고 정 많은 전형적 러시아 미인인 그루셴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루셴카는 드미트리를 보고 “짐승 같은 데가 있으나 고결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억세고 뛰어난 육체적 완력과, 충동과 감정에 충실한 면을 지니고 있으며, 아버지 표도르에게서 물려받은 호색하고 방종한 생활에 기우는 면을 지녔다. 카라마조프의 저열한 본성을 나타내는 “거미”를 영혼 속에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타인의 명예도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와의 첫 만남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이 만남에 대해 그는 알료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처음에 든 생각은 역시 지극히 카라마조프적인 것이었어. 동생 알료샤야, 언젠가 한번 거미같이 생긴 벌레한테 물려서 한 2주를 열이 펄펄 끓으며 누워 있었던 적이 있어. 그러니까 그 순간도 갑자기 거미 같은 이 고약한 벌레가 내 심장을 꾹 무는 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야. 알겠니? 나는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지. 너 그녀를 본 일이 있지? 정말이지 대단한 미인이야. 하지만 그때 그녀가 아름다웠던 건 그 때문이 아니었어. 그 순간에 그녀가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녀는 고결한 여인인 데 비해, 나는 천하에 비열한 놈이고, 그녀가 너무도 관대한 마음에서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위대한 뜻으로 나선 것이라면, 나는 빈대나 다름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어. 자, 그런데 이 빈대이자 비열한 놈인 나한테, 그녀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달려 있었단 말이야. 영혼이고 몸이고 모든 것이 말이야. 한마디로 독 안에 든 쥐였지. 너한테 솔직히 털어놓는다만, 이 생각, 바로 이 거미의 생각이 내 심장을 너무도 세게 거머쥐어 그 괴로움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어. 이 정도였으니 갈등이고 자시고 할 수도 없을 것만 같았지. 타란툴라나 빈대처럼 피도 눈물도 없이 일을 해치워 버리는 거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서 거미나 독사, 파충류 등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악마적인 힘을 상징한다. 이는 ≪죄와 벌≫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지옥에 대한 묘사에 잘 나타나 있다. 경계를 뛰어넘는 악마적인 인물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지옥과 영원을 거미들이 잔뜩 살고 있는, 그래서 ‘거미줄이 가득 쳐진 목욕탕’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거미 같은 카라마조프의 충동에 지지 않고, 그녀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 돈을 주어 돌려보낸다. 그러고는 스스로의 행위에 감동해 자살을 하기 위해 군도를 꺼냈다가 그냥 칼등에 입을 맞춘 채 다시 칼집에 꽂는다. 카테리나와의 첫 만남은 그의 내부에 있는 독거미 같은 카라마조프의 부정적 본성과 동시에 명예심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감정의 격발에서 나오는 충동적인 성향 등 드미트리의 모순적인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는 무식하고 방탕한 터프가이 같지만, 시적이고 민감하며 정서적이고 부드럽다. 그는 약혼녀 카테리나의 돈으로 그루셴카와 떠들썩한 유흥을 벌일 정도로 철면피이나, 동시에 약혼녀의 돈을 갈취했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또 따로 떼어 두었던 카테리나의 나머지 돈으로 정열에 이끌려 방종으로 다시금 뛰어드는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나, 이 돈을 약혼녀에게 다시 갚지 않고서는 그루셴카와 새로운 출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 돈을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결벽증적인 명예심과 엄청난 추진력을 가진 사나이다. 그는 정직하고, 명예를 중요시하며, 무엇보다도 본능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 식으로 ‘정이 많다’는 것은 러시아식으로 표현하면, 연민할 수 있는 능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정이나 연민을 뜻하는 러시아어 ‘소스트라다니예(сострадание)’는 고통받는다는 뜻의 동사 ‘스트라다티(страдать)’에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어 ‘소(со)’가 붙어 만들어진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함께 고통 받음’, ‘함께 아파함’을 나타내는데, 전작 ≪백치≫에서 긍정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 미시킨이 말하듯, 그것은 “전 인류의 가장 중요한, 아니 유일한 존재 법칙”이다. 또 연민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고귀하다 여겼던 그리스도적인 사랑이고, 작가의 작품 속에서 연민의 능력이 있는 모든 인물들은 그것으로 구원받는다.

드미트리의 내부에서 일기 시작한 연민의 불꽃은 예심이 끝나고 지쳐 잠든 후 꾸는 “언나(아기)”의 꿈에서 보다 명백해진다. 꿈속에서 그는 농군 마부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불타 버린 마을을 지나가는데, 집이 타 버린 가난하고 시커먼 농군 여인들과 그들의 가슴팍에 붙어 파랗게 언 손을 바동거리며 울고 있는 배고픈 “언나”들을 보게 된다. 그는 마부에게 묻는다. 왜 저 여인들은 저리도 가난한지, 왜 어른도 “언나”들도 저리 가난한 건지, 왜 “언나”들이 우는지, 왜 그들은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불행으로 시커멓게 된 건지를 묻는다. 이 많은 “왜”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며, 새로운 드미트리의 탄생을 예고한다. 방향을 잡지 못해 이기적인 육욕과 방탕에 쏟아붓던 드미트리의 에너지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각으로, 더 나아가 이제는 지상에 더 이상 눈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를 위해 자신이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한다는 의무가 된다. 새로이 탄생한 드미트리가 꿈속에서 자신에게 다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 자기가 어리석고도 바보 같은 질문들을 하고 있음을, 그러나 반드시 그런 식으로 묻고 싶었고, 꼭 그런 식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음을 마음속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감동이 심장 속에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울고만 싶다. 언나가 더 이상 울지 않도록, 시커멓게 마른 아이들의 어머니가 더 이상 울지 않도록, 이 순간부터 어느 누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다. 어떠한 장애가 있더라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바로 지금 당장 카라마조프식의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인간 속에 일어난 연민과 연민에 대한 자각은 행동하는 인물인 드미트리에게 의무가 되고, 지상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는 한,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즉 모두가 모두에 대해 죄인이라는 조시마 장로의 마지막 연설을 상기시킨다. 조시마 장로는 모든 인간은 모든 사람들 앞에,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죄인이며, 전 인류적인 죄, 세계적인 죄, 개개인의 개인적인 죄 등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고, 바로 이 사실을 자각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또 이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은 전 그리스도적인 무한하고 우주적인 사랑 안에 감동하게 될 것이고, 개개인은 사랑으로써 온 세상을 얻게 될 것이고, 자신의 눈물로 세상의 죄를 씻게 될 것이고 타인을 위해 흘리는 이 눈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 했다. 죄와 벌, 연민과 고통, 그리고 이를 위한 정화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에 대한 지극히 러시아적인 해석이 잘 드러난 설교로서, 이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기독교관의 직접적인 반향이다. 러시아인은 모두가 어머니 대지의 자식이고, 그러니 하나가 죄인이면 그의 형제, 자매, 부모로서 나도 죄인인 것이다. 너, 나, 모두가 이런 죄의 연대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며, 따라서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고통 받고자 한다. 러시아의 종교적 전통에 있는 무조건 고통 받기, 고통을 위한 고통은 아주 독특하고 주요한 개념으로서, 기독교 이전에 러시아 땅에 있었던 뿌리 깊은 어머니 대지에 대한 신앙에 그 바탕을 둔다. 또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고통에 대한 경외의 표방이요 모방의 욕구이며, 고통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강력한 믿음의 표현이다.

“언나”에 대한 꿈을 꾼 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의 얼굴은 환희에 빛난다. 새로운 사람의 탄생을 느낀 드미트리는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해 벌을 받겠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 맥락이다. 그는 고통을 두 팔 벌려 껴안음으로써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죄를 정화하고 새롭고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나겠다고 한다.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길이다. 예심이 끝나고 호송되기 전에 드미트리는 언나의 꿈에서 얻은 깨달음을 일동에게 말한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잔인합니다. 우리는 모두 불한당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애 엄마들과, 젖먹이까지도 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 중에서−이젠 그렇게 결론을 내려도 좋습니다−이 모든 이들 중에서 이 몸이 가장 비열한 독사입니다. 그러면 그러라지요! 지금껏 살면서 저는 매일매일 가슴을 치며 바른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또 매일매일 똑같이 추잡한 짓을 저질러 왔습니다. 저 같은 인간들은 한 방, 운명으로부터 호된 한 방을 맞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저 같은 인간은, 올가미처럼 아주 단단하게 외적인 힘으로 꽁꽁 묶어 놔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결코,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벼락이 내리친 겁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애비 죽인 놈이라며 손가락질당하는 치욕과 모욕의 고통을 달게 받을 것입니다. 나는 고통 받고 싶고, 또 고통으로 정화될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로 정화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안 그래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꼭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전 제 아버지의 피에 대해서는 무죄입니다! 제가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것은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며, 하마터면 정말로 죽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갱생의 길로 들어선 그는 자신이 죽이지도 않은 아버지의 살해에 대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려 한다. 그가 걸어갈 십자가의 길이 고독의 길은 아니다. 그에게는 뼛속까지 러시아 여자인 그루셴카가 있다. 그루셴카는 그와 함께 가게 될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드미트리에게 “나도 당신과 함께할 거야, 이젠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 평생 동안 당신과 함께할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드미트리의 심장은 빛으로 가득하고, 삶을 향한, 존재를 향한 욕망으로 가득해진다. 그는 “살고 싶다, 살고 싶어. 가고 싶다. 길을 향해, 내게 손짓하는 저 새로운 광명을 향해 가고 싶다. 얼른, 빨리, 지금 당장!”이라고 자신에게 되뇐다.

이렇게 말하는 드미트리 내부의 새로운 인간이 이반이 제시한 아메리카로 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최초의 장편 소설 ≪죄와 벌≫에서부터 십자가의 길과 대립각을 이루는 길로 아메리카를 내세우는데, 이는 책임과 벌을 회피하고 자기 파괴로 향하는 길의 상징이다. 아메리카로의 도피는 달콤한 듯 보이나 결국은 자멸하게 되는 악마의 제안이며 지옥으로의 초대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러시아와 대립각을 이루는 서구는 무신론자들이 사는 신이 없는 악마의 세계이며, 그중에서도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아메리카는 악의 축이다. 아메리카에 발이라도 담그고 왔거나, 동경하거나, 아메리카와 일말의 관계가 있는 모든 인물들은 작품 속에서 죽음을 면치 못한다.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소냐로 상징되는 십자가의 길(시베리아) 대신에 아메리카로 도망할 것을 제안하고, 또한 자신이 자살하러 가는 것을 “아메리카로 간다”고 표현한다. 그가 표현했던 ‘거미줄이 잔뜩 쳐진 목욕탕’ 같은 지옥이 아메리카와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악령≫에서 동료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샤토프와 자살을 종용당하고 결국 그로테스크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는 키릴로프 둘 다 미국에서 여러 달을 살다 왔다.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에게 아메리카로 도망가기를 권한 이반도 역시 섬망증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러시아인인 드미트리는 아메리카에 대해 본능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역시나 뼛속까지 러시아 여자인 그루셴카도 그곳에서 매우 불행하리라 말한다. 그에게도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제시되었던 아메리카로 가는 길(스비드리가일로프의 길, 이반의 길)과 십자가의 길(소냐의 길, 알료샤의 길)이 제시된다. 정신적인 어머니 소냐와 함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의 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드미트리에 대한 사랑을 자각하고 그와 함께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정신적으로 새로이 태어난 그루셴카가 있어 드미트리 역시 시베리아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죄와 벌≫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들의 발아한 정신적 갱생의 완성은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죄와 벌≫에서는 페테르부르크가 논리적 법칙, 이성, 인간에 대한 과학적 정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도시, 길은 작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숨 막히는 관처럼 막혀 있는 도시,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이고 추상적이며 인공적인 도시, 유령과 같은 죽음의 도시를 의미하기에 정신적 갱생은 이 도시를 벗어난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진다. 시베리아는 러시아 종교사에서 상징적인 순교의 공간이며 고통의 공간이자 고통을 통한 구원의 공간이고, 신에 대한 본성적인 믿음을 가진 이상화된 민중의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사건의 배경이 되는 스코토프리고니옙스크(Скотопригоньевск)는 돈과 권력, 성적인 방탕함이 만연한 곳이다. 그러니 그들의 정신적인 갱생의 완성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성경의 이름들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매우 상징적인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공간적 배경인 마을 이름 역시 그렇다. 스코토프리고니옙스크는 ‘스코트(скот, 가축)’와 ‘프리곤(пригон, 가축 등을 몰아넣는 장소, 또는 가축 등의 머릿수)’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방탕과 정욕에 물든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자식에게 살해당하는 곳, 실연의 슬픔에 빠진 어린 그루셴카를 데려와 첩으로 삼은 자린고비 삼소노프 같은 인물이 사는 곳. 그루셴카에게 침을 흘리는 수많은 남자들의 정욕이 넘쳐 나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짐승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새로이 태어날 그루셴카와 드미트리의 정신적 갱생의 완성은 스코토프리고니옙스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저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루셴카가 드미트리에게 돈 같은 것은 다 두고, 저 먼 곳으로 가서 노동으로 땅을 일구며 정직하게 살자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알료샤가 그녀에게 제안한 정직하고 명예로운 삶의 구현이다. 그리고 이는 종교적이고 신성한 공간인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20년의 유형이란 엄청난 고난의 길을 앞두고 있지만, 드미트리와 그루셴카는 삶에 대한 의지가 넘쳐 난다. 넘치는 삶에 대한 의지, 삶에 대한 찬양은 도스토옙스키에게 신에 대한 갈구와 긍정과 다름없다. 작가에게 종교는 거룩하고 숭고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에 러시아인으로서 갖고 있는 본성적인 신에 대한 믿음과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연민으로 드미트리는 구원의 길을 걸으나, 세 형제 중 가장 이지적이고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이반은 세계 질서와 신에 대한 회의, 살아 숨 쉬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부족으로 자멸한다. 이들의 상반된 운명에서 작가의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이반: 이성과 논리의 화신인 무신론자

드미트리를 갱생의 길로 들어서게 한 어린아이의 눈물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한껏 발달한 그의 동생 이반에게는 반역의 사유가 된다. 이반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우 재능이 뛰어나고, 동생 알료샤와는 달리 자신이 남의 밥을 얻어먹고 살고 있음을 날카롭게 자각하며, 과학과 수학의 신봉자이나 일반 범죄에 대한 교회의 재판권에 대한 논문을 써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주로 이반의 이야기를 다룬 제5장 <프로와 콘트라(Pro and Contra)>는 작가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썼다고 얘기하는 부분이며, 작품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4. <반역>과 5. <대심문관>의 서사시는 소설의 플롯 라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매우 약해서, 따로 떼어 하나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관할 정도로 독립적이며, 실제로 <대심문관>만 따로 출판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미약한 외적 관계 대신에 주제에서, 또 작가의 주된 의도에서 그 내적인 관계는 <반역>과 <대심문관>의 서사시를 작품 전체의 중심이자, 다른 모든 테마의 주된 연결고리로 자리매김한다.

우선 <반역>을 살펴보면, 이반은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죄 없는 어린아이들의 고통과 눈물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은 유클리트적인 3차원적 인간이기 때문에 4차원의 세계에 속하는 신이나 저 세계에 속한 것은 볼 수도 증명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으니 그냥 받아들인다, 하지만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어린아이들이 죄 없이 고통 받고 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신의 세계는 거부한다, 또한 이 모든 것이 신이 계획한 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영원한 조화의 세계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그러한 조화는 죄 없는 어린아이의 눈물 한 방울만 한 가치도 없기에 영원한 조화의 세계라는 신이 준비한 세계로 가는 “입장권을 서둘러 반환한다”라는 것이다. 만약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죄 없는 고통을 야기한 자들이 저 마지막 시간에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의 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흘린 죄 없는 눈물에 대한 보상은 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만약 지옥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조화도 평화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성적으로는 참으로 부정하기 힘든 논리다.

다음 장인 <대심문관>에서 대심문관의 입을 빌려 이반은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지성적 논리적 종교적 문제들을 논한다. 대심문관과 예수의 대결이다. 그는 예수가 사막에서 있었던 악마의 세 가지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인류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고 비난한다. 예수가 거부한 악마의 세 가지 제안은 기적으로서 지상의 빵, 기적으로서 신비, 카이사르의 검으로 대변되는 지상의 권위다. 그는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하여금 지상의 빵, 신비, 권위 등에 의해 강요된 선택 대신에, 자유로운 의지로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따르기를 바람으로써 인간을 큰 고통 속에 빠트렸다고 비난한다. 인간은 너무 약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지상의 빵, 신비, 권위를 내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따라서 예수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자유로운 선택’, 즉 자유 의지를 너무 과하게 줌으로써 인간을 혼란과 고통에 빠트렸고,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고 비난한다.

“인간을 너무도 존중했기 때문에 오히려 너의 행위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 꼴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너는 인간에게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자신보다도 더 많이 사랑했던 자가 한 짓이란 말이다! 만약 네가 그들을 그렇게까지 존중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이것이 오히려 사랑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짐이 더 가벼워졌을 테니까. (…) 이렇게 해서 불안과 혼란과 불행, 바로 이것이 사람들의 현재 운명이다.”

또한 지상의 빵, 신비, 권위 등을 물리치고 자유 의지로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자는 성서에도 쓰여 있듯이 겨우 1만 2000에 지나지 않으니, 그 수가 그 정도라면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운 자들이다. 따라서 예수가 선물이라고 생각한 선악 선택의 자유는, 일반적인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선물이 아니라 커다란 고통이요 짐이 되었다. 그래서 강한 몇 사람이 악마가 제시한 이 세 가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유 의지의 짐을 대신 지고 감으로써, 인류는 비로소 자유 의지와 그에 따르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어린애 같은 보편적이고 전 인류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또한 무덤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는 인류에게 그 사실을 숨기며, 영생이란 희망을 품게 해서 행복하게 그곳을 향하도록 할 것이다. 이 모든 악마의 제안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실현된다는 주장이다.

또다시 인간의 자유 의지, 선악 선택의 자유에 관한 테마다. 유형 이후 쓴 첫 작품인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그토록 처절한 형태로 논의했던 인간과 자유 의지의 문제다. 자유 의지가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선물이 아닌 영원한 짐이요, 고통이요, 혼란이라는 주장이다. 대심문관은 말한다.

“너는 인간이 너에게 매혹되어 사로잡힌 채 자유로이 너의 뒤를 따르도록 인간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랐다. 그래서 앞으로 인간은 확고한 고대의 율법 대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자유로운 양심으로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도 네 형상만을 길잡이로 삼으며 말이다. 만일 선택의 자유라는 이토록 무서운 짐으로 인간을 짓누른다면, 결국에 가서 인간은 네 형상과 네 진리를 거부하고 논박하리라는 것을 너는 정녕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냐? 그리고 종국에 가서 그들은 진리는 네 안에 있지 않다고 외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그들에게 그토록 많은 근심거리와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을 부여함으로써, 무엇보다 그들을 더할 나위 없는 혼란과 고통 속에 방치했으니까.”

이러한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니,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에 가까운 자들이며, 예수는 신에 가까운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신이지 자유 의지를 감당할 힘이 없는 대부분의 인간들을 위한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너의 위대한 예언가가 환영과 비유로 말하길 부활의 첫날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보았는데, 그 수는 지파마다 각각 1만 2000명씩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가 그것밖에 안 된다면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너의 십자가를 참아 냈고, 또 수십 년간이나 굶주리고 헐벗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풀뿌리로 연명해 왔다. 그러니 물론 너는 이 자유의 아이들, 자유로운 사랑의 아이들, 네 이름으로 자유롭고 훌륭한 희생을 한 이 아이들을 자랑스레 가리킬 수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고작해야 몇 천 명에 불과했고, 신이나 마찬가지인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한 자들이 참아 낸 것을 참아 낼 수 없었던 나머지 약한 자들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그토록 무시무시한 선물을 받아들일 힘이 없는 나약한 영혼들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이야? 그렇다면 너는 정말로 선택된 자들에게만,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만 온 것이냐?”

예수가 자유 의지를 감당할 수 있는 선택된 자들의 신이라면, 대심문관 자신은 나약한 영혼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신해 선악 선택의 자유 의지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그들을 대신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선택해 보여 주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도 대신 져 주겠다고 한다.

대심문관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이 모든 대립과 비난은 도스토옙스키를 일생 동안 괴롭혀 온 대립이자, 작가 스스로도 이성적으로는 부정하기 힘든 논리였다. 대심문관은 이반이요, 지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자아다. 허무주의, 무신론, 윤리적 합리주의, 공리주의와 그리고 무신론적 사회주의라는 선의 얼굴을 쓴 악에 대한 묘사와 그것과의 싸움 그리고 추상적 인류에 대한 사랑과 고통이 이토록 적나라하고 명백하게 표현된 다른 문학을 나는 알지 못한다. <대심문관>을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지성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작품을 구상하며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가 “일생 동안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고민해 왔던 문제, 즉 신의 문제”가 대심문관에서 극화된다.

대심문관이 이 모든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심한 사랑 때문이다. 인류에 대한 사랑이 지극히 심하기 때문에 그는 영생으로 인류를 속여서라도 그들에게 잠시간의 행복감을 주고, 그들의 자유를 대신 지고 가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들이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자유에 동반한 책임의 부담을 없애 주고자 한다. 대심문관의 미래 왕국은 무신론적, 유물론적 사회주의와 다름없다. 그것은 악마가 제시한 지상의 빵, 기적, 신비, 카이사르의 검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값싼 일시적인 가짜 행복의 대가로 정신적 자유의 상실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심문관은 인간에 대한 동정으로 충만해 있으며, 인류를 위해 진심으로 고통 받는다.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에 따른 고통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깡마른 외모, 살아 번뜩이는 눈, 아흔 살이라는 길이와 깊이가 가져다주는 삶의 무거움. 그의 고통을 알고 인정하기에 예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대심문관>의 서사시를 다 들은 후, 알료샤가 이반에게 입을 맞추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사뭇 대립되는 듯한 이반과 알료샤, 하지만 이 둘의 상반되는 사상의 출발점은 같다. 이에 대해 이반이 말한다.

“신은 있는가, 불멸은 있는가? 뭐 이런 것들 말이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니 무정부주의니, 새로운 체제에 따라 전 인류를 개조하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죄다 거기서 거긴 거야.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다른 끝에서 시작한 같은 문제라는 거지.”

신과 불멸의 이야기와 무신론과 사회주의의 이야기가 다 비슷한 이야기이고 “다른 끝에서 시작된 같은 문제”라는 점은 결국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 두 개의 다른 해결 방안이라는 얘기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가 전혀 반대되는 듯한 성향의 무신론자 지식인 이반과 신심 깊고 선한 알료샤를 같은 어머니의 두 아들로 설정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또한 이반의 이 말은 무신론과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젊은 날의 경험과 시베리아 유형 이후의 깨달음 등,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대심문관, 즉 이반의 인류애는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큰 문제는, 알료샤의 지적대로 그는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는 선의 탈을 쓰고 나타난 악의 구현이라는 점이다. 적그리스도적인 악의 원리와 그리스도의 선의 원리 사이에는 언제나 유사점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혼란과 대체의 위험을 낳는다. 가짜는 비슷하다. 아니, 가짜일수록 더욱 그럴싸하다. 진짜를 닮지 않으면 가짜라 할 수 없다. 진짜는 외려 질박하고 덤덤하고 단순하다. 악마는 절대로 추한 모습을 띠지 않는다. 놀랍게도 악마는 광명의 천사의 얼굴을 지니고 있고(고린도후서 11:14), 샛별처럼 아름답고 매력적이다(이사야 14:12). 사랑이란 이름으로 인류를 개미 떼로 만들려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대심문관 속에서 명확히 그려 낸 혼돈과 혼란이며, 작가가 경고하는 무신론적인 악마의 가짜 사랑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경험한 러시아 민중의 혼과 또 신약성서 속 희생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인 예수를 알게 된 후로는, 이전에 그를 매혹했던 사회주의, 무신론 등은 비록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나, 결국은 도덕적, 사상적 질병과 다름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작가는 교회와 정신과 신의 힘으로 이런 가짜 사랑의 유혹을 이겨 내야 하고, 혁명의 길로 치닫고 있는 러시아를 그 유혹에서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또 하나, 이반의 인간에 대한 정의를 보면, 그가 말하는 대부분의 인류는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하찮고 한심한 존재다. 그에게 인간은 ‘원래 반역자로 태어난 배은망덕한 존재이며, 지상의 빵, 기적, 신비, 권위를 거부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고, 자유 의지를 감당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고, 조롱받기 위해 창조된 미완성의 시험적 존재’다. 이런 인간관 뒤에는 자신은 이런 개미 떼에 가까운 인간이 아니라 선택받은 초인과 같은 힘을 지닌 자라는 오만함과 다른 인간들에 대한 경멸이 전제되어 있다. 동등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다보는 오만한 적선과 같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가짜 사랑이다. 그렇기에 동생 알료샤에게 토로했던 것처럼, 이반은 추상적 인류를 사랑할 수는 있으나 가까이에 있는 살아 있는 이웃은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도 이반은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오로지 알료샤만이 예외다.

알료샤: 한 알의 밀알

이반이 얼굴 없는 추상적인 인류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무신론자의 가짜 사랑, 공상적 사랑의 대변자라면, 알료샤는 살아 숨 쉬는 이웃에 대한 능동적이고 진정한 실천적 사랑의 체현이다. 이반의 사랑이 머리와 말로 된 것이라면, 알료샤의 사랑은 가슴과 행동으로 하는 사랑이다. 이반의 사랑이 “개미 떼”와 같은 인류에 대해 적선해 주는 듯한 오만한 가짜 연민이라면, 알료샤의 인간관은 한배를 탄 인류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다. 이반은 모두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비난하고, 판단하지만, 알료샤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모든 것, 모든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의 앞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꼭꼭 숨겨 놓았던 상처 받은 자아도 드러내 놓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긍정적 인물들은 말하는 자가 아니고 듣는 자들이다. 알료샤도 예외는 아니다. 작품 속에서 그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경우가 많다. 간혹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듣는 자, 지켜보는 자에 가깝다. 이렇게 눈에 띄지 않고 목소리를 내거나 앞에 나서지 않지만, 그의 이런 자질은 이전의 긍정적 인물인 소냐나 미시킨처럼 소극적이지 않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밝고, 적극적이며, 무엇보다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굳은 심지 같은 것을 지닌다. 그는 모든 인물들의 구심점이자, 타인들을 움직이고 그들을 지배하는 중심인물이다. 모든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한 지성인 이반조차도 알료샤가 있어 삶을 사랑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만약 내가 정말로 끈적거리는 새 이파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널 상기함으로써만 그렇게 될 거야. 이 세상 어딘가에 네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내겐 충분하고, 삶에 싫증도 나지 않을 거야. 이 정도면 네게 충분하겠니? 뭣하면 사랑 고백이라고 해도 좋아.”

이반의 말처럼, 알료샤는 긍정과 삶의 전도사다. 그루셴카도 알료샤를 타락시키기 위해 그를 초대하지만, 오히려 그를 통해 정신적인 갱생의 길을 걷게 된다. “누이”라는 알료샤의 말 한마디는, 그녀에게서 표독스럽고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라는 마스크를 벗기고, 관대하고 부드럽고, 사랑할 줄 알고, 연민할 줄 알며, 희생적인 자아를 살아나게 한다. 음탕하고 이기적인 노인인 그의 아버지 표도르조차도 ‘머리보다 가슴이 좋은 사람이라는’ 알료샤의 한마디에 진심으로 감동하며,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알료샤는 남녀노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성적인 오만한 사람, 감정적이고 직정적인 사람,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개개인 안에 있는 아름다운 자아를 이끌어 내도록 도와준다. 그는 만나는 모든 인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인물 하나하나가 그에겐 똑같이 소중하고 가까운 존재들이다.

이반이 회의하고 묻고 질문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성적인 자아라면, 알료샤는 회의하는 자아에 종지부를 찍는 순종하고 사랑하고 답하는 신앙심 깊은 도스토옙스키의 종교적인 자아다. 예수는 초인에 가까운 몇 명만의 신이라는 이반의 비난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 가나에서의 혼인에 대한 알료샤의 꿈에서 주어진다. 알료샤는 꿈을 꾼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일으킨 가나의 결혼식이다. 많은 이들이 초대되어 있다. 그곳에서 방금 전에 세상을 뜬 조시마 장로가 알료샤에게 말한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은 파 한 뿌리를, 그것도 아주 작은 파 한 뿌리를 건넸을 뿐”이라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그의 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이반의 대심문관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과 같은 초인일 필요는 없다. 그저 파 한 뿌리, 즉 작은 연민의 행동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히 포도주가 마르지 않는 하느님의 왕국으로 초대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파 한 뿌리, 파 두 뿌리가 모여 후에 위대한 과업이 되는 것이다.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우리에 비하면 그분은 두려울 정도로 위대하시고 두려울 정도로 지고하시지만, 무한하게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며, 손님들의 기쁨이 끊이지 않도록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며, 새로운 손님들을 기다리고, 또 정말로 세세토록 끊임없이 새로운 손님들을 청하고 계시는 거란다.”

대심문관이 이반의 사상의 체현이라면,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가 대변하는 사상의 체현이다.

가나의 결혼식 꿈은 또 하나의 의미에서 이반의 명제를 반박한다. 가난한 자의 결혼식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꾼 것이 아니고, 기쁨에 기쁨을 배가한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린 것도 아니요, 병든 자를 고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결혼이란 기쁨에 좋은 포도주를 더함으로써 기쁨을 배가한 것이다. 이반이 주장하듯, 세상은 고통과 슬픔, 죄 없는 아이들의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을 위해 세워져 있는 것이고, 예수가 지상에 온 것은 인간의 눈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알료샤도 수도원이란 안전한 곳에 머물기보다는 세상에 나가 온갖 시련과 고통을 극복해 내고, 작은 파 한 뿌리의 선행을 쌓으며 사람들의 가슴속에 사랑과 희망을 심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작가의 이른 죽음으로 알료샤의 이런 활약이 그려질 2부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1부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에서 독자는 이미 많은 것을 읽어 낼 수가 있다.

“한 알의 밀알”, 그것은 죽음 속에 포함된 새로운 생명의 부활이다. 그것도 많은 생명의 부활이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 고통이 없으면 정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에피그라프의 의미다. 죽음, 부패, 고통, 이것은 바로 더 많은 새 생명의 보증이다. 죽음은 종말이 아닌 더 나은, 더 많은 삶의 탄생이라는 것, 역사를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다. 이것이 바로 유한한 인간이 시간의 힘을 극복하는 강력한 힘이다.

난폭할 정도로 강렬한 삶에의 의지와 영원에 대한 뜨거운 동경, 바로 이것이 카라마조프적인 습성이다. 때로 그것은 방향을 잡지 못해 미쳐 날뛰는 정욕과 방탕(드미트리)으로, 저열하기만 한 육욕(표도르)으로, 추상적 인류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증오(이반)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알료샤가 보여 주는 것처럼 이웃에 대한 능동적이고 희생적인 사랑, 즉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사랑이 될 것임을 작가는 보여 준다. 그래서 작품의 초반과 중반에 그토록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그려지던 카라마조프적인 힘은 작품의 미래를 위한 밀알이 될 알료샤의 열두 제자들에 의해 “카라마조프, 만세!”라는 긍정적인 환호를 얻게 된다. 예수와 그의 열두 사도가 인류를 위한 밀알이 되어 더 많은 밀알을 낳았듯, 알료샤와 열두 소년들도 자신들의 희생으로 인간과 신 사이에 귀중한 가교가 되어 더 많은 밀알을 탄생시킬 것이다. 마지막 설교에서 조시마 장로가 말했듯,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것을 다르게 말한다면, 천국은 사랑할 수 있는 기쁨 속에 있는 것이다. 연민, 희생적인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라면, 삶에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랑의 기본이요, 출발점이다.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하느님은 다른 세계에서 씨앗을 가져와 이 세계에 심었고, 그분의 정원을 키워 나가셨고, 싹 틔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싹 틔우셨으나, 그 안에서 자라난 모든 것들은 오로지 다른 신비스런 저 세계와 접촉하는 감각을 통해서만 살아 있고 또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대 내부에서 이 감각이 약해지거나 사라져 버린다면, 그대 안에서 자라난 것도 죽을 것이다. 그때는 삶에 무관심해질 뿐만 아니라 삶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

대지에 엎드려 입 맞추는 것을 사랑하라. 끊임없이 대지에 입 맞추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퍼붓고, 모든 사람들과 세상 만물을 사랑하라, 환희와 열광을 구하라.

삶에 대한 사랑은 삶을 주는 어머니 대지에 대한 사랑이요, 또 다른 세계에서 씨앗을 가져와 이 세계에 심어 준 신과의 연결 고리다. 그래서 신을 잃으면 삶의 의미를 잃게 되고, 무관심하게 되며, 결국은 자멸에 이른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다. 신비스런 저 세계는 말, 즉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이성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유형수들 속에서 인간의 비합리적인 힘의 우위를 보고, 이런 비합리적인 힘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식으로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는 것을 본 작가의 체험은 명백한 ‘진리’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말은 비합리적인 양심이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본래의 윤리성 앞에서 무력화되고, 그의 합리적 정당화는 실패한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에서도,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도, 이반에게서도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사상과 사상의 실현인 행동을 지지하고 수행 가능케 했던 천재적인 변증법, 완벽한 논리 등은 이러한 이성적 인물들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비합리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은 영혼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고, 이반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이 변화들에 대해 알료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오만한 결정에서 나온 고통이며, 깊은 양심의 가책이다!’ 그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가 여전히 복종하고자 하지 않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진리가 그의 마음을 점령한 것이다”. 결국은 “하느님이 승리하실 것”이라고 알료샤는 확신한다. 이는 작가의 확신이자 모든 이성적인 인물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성적 자아를 향한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된 작가의 최후 메시지다.

도스토옙스키처럼 풍부하고 복잡하고 심오한 천성을 지닌 작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세속적인 삶의 모든 현상에 대해 비범한 감수성과 깊은 동정심으로 신의 세계와 신의 의도를 보았고, 하나의 현상 속에서 온갖 다양한 감정과 사고의 격정을 보았다. 그는 신과 인간의 문제, 자유 의지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 책임의 문제, 추상적 인류에 대한 사랑과 뼈와 살로 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문제, 사회주의와 무신론, 그리스도교와 신에 대한 사랑의 문제, 영원과 불멸에 관한 문제, 미의 문제, 인간적인 사랑으로서의 열정과 신적인 사랑인 연민의 문제를 논했다. 그의 작품들은 방대하다. 그 방대함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단연 으뜸이다. 솔로비요프가 도스토옙스키를 기념하는 강연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철저히 그리스도교인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자유로운 사상가요 탁월한 예술가다. 참으로 공존하기 힘든, 어쩌면 거의 모순적이라 할 수도 있는 측면들의 공존자이며, 이 위대한 측면들은 그 안에서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매우 이상한 조화를 이루어 낸다. 그는 작품 속에서 철학, 종교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이 모든 것을 문학으로 버무려 놓았고, 그가 다룬 주제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소설의 확장은 인물을 넘어, 주제를 넘어, 시공을 넘어 언제나 현재화한다. 인간적인 사랑(passion)과 신적인 사랑(compassion), 사랑과 증오의 변증법적 관계, 신학과 철학, 당대 정치와 역사,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천재성이라는 신비한 직조기를 통해 하나의 소설로 녹여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떠난 지 100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더없이 모던한 그의 작품과 더불어 그는 항상 현재를 산다. 그것도 지극히 분명한 현재를 산다. 저 유명한 니체의 초인 사상은 말할 필요도 없고, 형편없는 존재, 불완전하고 허약하고 불량품인 존재라는 이반의 인류에 대한 관점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에게서, 신이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라키틴의 무신론적 사상은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저자이자 21세기 회의론적 지성의 대표자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에게서, 인류에게 주어진 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짐이자 저주라는 사상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쓴 에리히 프롬에게서 볼 수 있다.

산술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공리주의적이고 실질적인 증거들을 내세우는 도스토옙스키의 무신론자들의 논거는 2×2=4처럼 이성과 논리로는 반박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영감을 받은 많은 무신론적 사상가나 철학자들처럼, 역자 역시 그들의 논리적인 명징성, 이론적인 완벽함에 동감하고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대심문관의 논리에 예수는 논리로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런 말 없는 입맞춤을 할 뿐이다. 마치 이반의 <대심문관>을 들은 후, 알료샤가 논쟁 대신 형의 입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말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다.

무신론적인 사상가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무신론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그들의 사상과 논리에 영감을 받고, 종교적인 사상가들은 도스토옙스키의 긍정적인 인물들에게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보고 영감을 받는다. 비단 위대한 사상가들에게서만 도스토옙스키를 보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디즈니가 만든 최근 영화 <겨울 왕국>을 보았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안나에게 여름을 꿈꾸는 눈사람 올라프가 말한다. “그것은 자신보다 사랑의 대상을 앞에 두는 것이고, 그 대상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 앞에 두는 것”이라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까지 나아가는 사랑, 그것은 바로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이자, 작가가 자신의 긍정적 인물들, 소냐, 미시킨, 알료샤를 통해 반복해서 강조하는 중심 메시지다. 밀알 한 알의 희생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생명을 낳는 것처럼, 엘사에게 내려치는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은 안나의 희생적인 사랑은, 엘사의 생명을 살려 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활도 가져온다. <겨울 왕국>에서 심장에 박힌 얼음을 녹이는 길은 하나다. 현명한 트롤 할아버지가 알려 주듯, 그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진정한 사랑’뿐이다. 그것은 조시마의 말이고, 알료샤의 말이며, 도스토옙스키의 말이다.

예술은 종종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치유의 힘이 된다. 박완서 작가도 그러했고, 프리다 칼로도 그러했고, 도스토옙스키도 그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말년의 몇 년만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가난, 그것도 찢어지는 가난에 허덕이며 살았던 생계형 작가였고, 유형살이를 한 정치범, 간질병 환자에 도박 중독자였다. 사랑하는 자식도 둘이나 앞세워 보낸다. 결코 순탄하지 않은 삶과 그 삶이 주었던 적지 않은 인간적 고뇌들, 그의 이 모든 삶의 재료들이 문학의 재료가 되었다. 개인적인 아픔들, 세속적이고 시대적인 문제들, 거대한 철학적 질문들, 저마다 다른 색, 다른 재질을 갖는 작은 조각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 콜라주나 모자이크처럼, 다른 목소리들이 모여 이루는 거대한 합창처럼, 그렇게 그의 작품은 다양한 면모에 다양한 차원에서 읽을 수 있지만, 자체로 하나의 위대한 걸작이 된다. 삶이 주는 고통의 마디들이 테마가 되고 인물이 되고, 그의 개인적 고통의 마디들은 당대 러시아 사회가 겪고 있던 질곡들과 맞물려 더 큰 철학적 사상적 테마를 형성해 낸다. 문학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문자 그대로의 삶(생계)이기도 했지만,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삶이었고, 영혼의 안식처였으며, 세상 족쇄로부터의 탈출구였다. 작가는 현실을 허구로 만들어 내어 삶을 바꾸어 보며 상실과 아픔을 잊기도 한다. 1878년 5월, 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시작한 지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 세 살배기 아들 알료샤가 자신에게서 물려받은 간질병 발작으로 죽는다. 그는 작품 창작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슬픔에 빠지나, 부인 안나의 권유로 여행을 다녀온 후 다시 집필에 전념하게 된다.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인공에게 죽은 아들과 같은 이름을 부여하고, 작가의 눈에 가장 긍정적이고 경탄할 만한 자질을 다 부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더 나아가 주인공 알료샤의 종교적이고 유순한 어머니에게 생후 3개월 만에 죽은 자신의 첫째 딸 소피야의 이름을 부여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알료샤를 그 이상 긍정적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으로 그려 넣는다. 알료샤는 정신적으로 부드럽고 관대하면서도 강하고, 육체적으로도 잘생기고 건강하다. 주인공 알료샤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너무 빨리 신의 품으로 간 둘째 아들 알료샤를 잃은 상처를 극복하려 한 것이리라.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 도스토옙스키의 절절한 슬픔 역시 아들 일류샤의 죽음 위에 통곡하는 스네기료프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스네기료프의 눈물과 통곡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슬픔을 토해 낸 것이리라. 또한 작가의 둘째 아들 알료샤와 스네기료프의 아들 일류샤의 죽음이 그저 상실이나 무(無)로 사라짐이 아니라, “더 많은 열매를 위한” 희망의 약속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류샤와 알료샤는 닮은 점이 많다. 그들의 원래 이름은 일리야와 알렉세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일류샤와 알료샤로 불리며 발음상 매우 가깝게 들린다. 이렇게 호칭이 유사할 뿐만 아니라, 둘 다 형제 중 막내이고, 작품의 주요 테마이자 요한복음에서 발췌해 작품의 에피그라프로 쓰인 “한 알의 밀알”의 상징이다. 현실에서 다 살지 못하고 간 어린 아들 알료샤에게 작품을 통해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자질들을 부여함으로써 죽은 알료샤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다소간 위안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반의 행동하는 분신인 스메르댜코프, 상처 받고 학대받는 어린 소녀들의 테마의 변주인 그루셴카, 오만하고 지적인 여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등 인물에 대한 해설, 이름들이 갖는 러시아적 의미와 상징성들, 더 나아가 도스토옙스키의 이전 작품들과 테마적인 연관성 등을 논의해야 하겠지만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고자 한다.

또다시 자유 의지와 신, 운명의 문제

유형 후에 쓴 도스토옙스키의 최초의 작품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번역본 해설에서 역자는 작품의 주된 테마였던 자유 의지와 신, 운명의 문제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삶의 여정을 걸어가면 갈수록, 삶 속에서 자유 의지가 차지하는 역할이 점점 줄어들어 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어디로 여행을 갈까,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누구와 영화를 볼까 하는 사소한 일상의 선택들을 하며,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며,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선택한 것들로 채워 넣을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 속에는 어디에도 우리의 자유 의지, 즉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들어설 공간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을 형성하는 데 너무도 중요한 부모와 형제, 자식, 그리고 나의 외모, 머리, 성격, 그 어디에 내 자유 의지가 들어설 공간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나의 의지로 배우자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듯,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더 적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그런 만남이 가능해지고, 그 만남들 속에서 더 많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사랑이 가능해진다. 한 번은 우연이나, 몇 개의 우연이 겹치면, 그것은 필연이요 운명이 된다. 정작 중요한 것들 속에는 내 자유 의지가 들어설 공간이 어디에도 없다. 작고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련의 선택들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라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자유 의지는 신기루이자 착각일 뿐이라는 자유 의지와 신(운명)에 대한 나의 사고를 더욱 굳건히 하는 일이 생겼다. 친구가 점심을 먹으러 왔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몸에 좋은 음식만 먹으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여인네다. 그런데 한 달 전, 소세포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녀석들은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며 22시간 만에 두 배씩 늘어난다고 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10개월을 더 살 수 있고, 치료를 받지 않으면 3개월을 산다고 했다. 많이 슬펐고 많이 아팠다. 친구는 자신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으니, 후회가 없다고 했다. 방사선 치료로 병원에서 지내며 머리카락도 손톱도 다 잃은 모습으로 10개월을 사느니, 집에서 가족과 3개월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녀의 자유 의지는 가족과 보내는 3개월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자유 의지의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중요한 삶의 길이와 그것의 시작과 끝은 우리의 선택 범위 밖의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의 범위는 고작 3개월을 살까 10개월을 살까 하는 정도의 범위뿐이다. 신기루다.

운명론자이지만 아직도 나름 지식인입네 하는 맘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 신기루 같은 자유 의지를 무슨 대단한 무기나 되는 듯 그것으로 운명에 대항해 주먹을 들어 보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나의 완패로 끝난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운명에 반기를 들어 보았다. 운명에 의해 잠시 머물게 된 이 세상.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고 힘에 겨운 이 사회인이라는 옷을 벗어 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사회인, 그것은 알료샤의 크고 긴 승복처럼 아직 내 것이 아니고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있을 성싶지도 않다. 내 자유 의지로 저 안전하고 편안한 나만의 상아탑에 돌아가려 안간힘을 썼지만, 되지 않았다. 속세가 아직도 내가 있을 곳이라 운명은 말하는 듯하다. 아직 이곳에서 아무것도 이루어 낸 것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사회인이란 옷은 몹시도 불편하다. 암묵적인 사회의 규칙이나 사교적인 가장은 아직도 낯설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어린아이가 된 듯하다. 사회에서는 내가 철석같이 상식이라 믿어 오던 많은 것들이 의심스러워진다. 마치 사람이 아닌 제복으로 대변되는 직함들이 사는 곳처럼 여겨진다. 때로 사람은 없고 직함만 있다. 자신의 생각이 없다. 자신의 욕망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고 산다.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대부분 살면서 타인에게 빌려 온 것’이라는 욕망과 자아에 대한 라캉의 정의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게 부장님, 상무님, 전무님이란 직함으로만 살다 보면, 그 직함이란 껍질을 잃게 되었을 때, 어느 날 문득 “벌레”로 변신해 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는 카프카의 ≪변신≫ 속 잠자 그리고리처럼, 그들은 거울 속에서 텅 비어 버린 “투명 인간 (hollow man)”을 발견하고 절망하지 않을까.

그런데 가끔은 이런 “직함”이란 껍질 아래에서 자신의 철학과 줏대와 욕망을 가진 “사람”을 본다. 그러면 나는 행복하다. 아주 드물지만, 그 “사람”의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시인을 본다. 그러면 나의 행복은 하늘에 닿는다. 괴물과 같은 사회 속에서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며 살면서도, 영혼을 잃지도 않고, 사회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종속시키지도 않으며, 노래하는 시인의 심장을 가진 그들은 눈이 부시도록 멋지다. 진정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혼이다. 먼 훗날, 직함이나 직급과 같은 사회적인 껍질을 벗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들은 텅 비어 버린 자아가 아닌, 눈부시도록 멋진 자아,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자아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시인이 계속해서 노래할 수 있게 해 주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사회에서 만나는 벗들의 가슴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시인을 깨워 내고 노래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일 중 하나일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인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흔적을 남기고,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게 양식이 될 밀알과 같은 희망을 남기고 떠나라고 운명은 말하는 듯하다. 속세에 남긴 작은 흔적, 밀알과 같은 희망을 되돌아보면서 미소 지으며 상아탑으로 돌아갈 수 있길 소망한다. 많이 아파하고, 많이 기뻐하고, 많은 이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하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상아탑의 꿈을 꾼다…. 언제나 내 운명이 내게 속세 대신 상아탑으로의 귀환을 선물로 주려는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나는 숙제를 하듯 세상에서의 하루하루, 세상에서의 한 만남 한 만남에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또 자신의 심장이 뛸 대상을 갖는 것, 즉 자신만의 욕망을 갖는 것, 그것이 거대하고 강력한 운명 속에서 인간이 자유 의지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이 아닌가 싶다.

봄이 오시는 소리가 들린다. 이젠 몸이 아닌 가슴으로 봄이 오시는 소리를 듣는다. 고된 노동으로 쩍쩍 갈라진 농사짓는 이의 손마냥 메마른 대지가 깨어나는 소리를 듣는다. 개나리의 보송보송한 솜털 같은 꽃망울이 맺히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이 봄이 오면 몸도 마음도 그만 아프고 싶다. 많이도 앓았다. 마악 출발하려는 한 해처럼, 봄처럼, 자연처럼, 이젠 웅크리지 말고 기지개 활짝 펴고 살아났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 속에서 갓 태어난 태양을 맞는다. 자연의 테마는 무궁무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처럼 ‘끈적이는 이파리, 파란 하늘’이 좋다. 미시킨 공작처럼, 한 그루의 나무, 새벽노을, 한 포기의 풀이 좋다. 드미트리처럼 태양이 좋다. 알록달록한 야생화가 가득한 자연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 그저 예쁘게 가꾸어진 삶보다는 태양과 같은 강하고 호기 넘치는 삶을 살다 가고 싶다. 마흔은 불혹의 나이라고 공자님이 말씀하셨다. 쉽사리 미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역자의 마흔은 유혹투성이다. 여기를 둘러봐도 저기를 가 보아도, 배우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온통 혹할 것투성이다.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무모한 치기의 제거로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 성숙과 현실에 굳건히 발을 내리는 어른스러움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열정과 욕망의 상실, 모험에 대한 두려움, 현실과의 타협을 가리키기도 할 것이다. 삶은 늘 그렇다.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른스런 마음의 평정보다는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는 열정과 욕망으로 가득한 심장을 택할 것이다. 나잇값을 하는 성숙한 어른보다는 슬프면 엉엉 소리 내 울고, 행복하면 깔깔 큰 소리로 웃고, 아프면 어루만져 달라고 떼쓰고, 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데굴데굴 구르며 그렇게 살고프다. 중용, 불혹보다는 아프고 힘들고 벅차지만, 많이 기뻐하고, 많이 슬퍼하고, 많이 아파하고, 많이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조용한 삶보다는 열병과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아 내고 싶다. 치열하게 투쟁하듯, 또 내일 죽을 것처럼 그렇게 꽉 차고 애탈 정도로 열렬하게 오늘을 살아가련다. 설렘과 살아 있는 느낌, 세상과 사물에 대한 생생한 시선, 이런 것들을 잃는다는 것, 바로 그것은 유년과 청춘의 끝이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의 끝이다. 가진 것 없어도 살아 있는 심장을 느끼고 매일 새로운 아침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삶이자 가장 살아 있는 삶일 것이다. 천성적인 명랑함, 청신한 감각,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의 정열을 잃지 않으면 나이와 세월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아름다움과 영원한 젊음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하나의 경험을 모두 새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아, 매일 새벽의 다른 맛 다른 색을 느낄 수 있는 자아로 남고 싶다. 그래서 언제나 배움에 굶주려 있다.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언제나 경이롭고 신비하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뾰족한 연필 촉처럼 그렇게 늘 감각과 사고의 날을 세우고 살아가고 싶다. 뾰족한 연필심이 삶의 무게를 실어 삶의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채우며 닳아 없어지듯이, 그렇게 생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움직이고 써 나가고 싶다. 무뎌지는 시선과 감각, 모든 것에 덤덤해지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렵다. 상아탑을 떠난 지 벌써 6년이다. 하지만 공부하기, 배우기를 멈춘 적은 없다. 어쩌면 학교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배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배움 속에서 정말이지 절절한 재미를 느낀다. 아이 같은 시선, 소녀 같은 감수성, 상상력… 이 모든 것이 내겐 더없이 소중하다. 사회인으로서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도 녹록하지도 않지만, 삶과 문학에 대한 시선이 깊어지고 넓어짐을 느낀다. 두렵지만 피하지 않으련다. 운명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건 지상에서 마지막 숨을 쉬는 그날까지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놓지 않으련다. 온실 속에서 보호받는 귀하디귀한 화초보다 거친 자연 속에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남는 야생화의 삶을 꿈꾼다. 자아의 시선을 일깨우는 것. 자아의 욕망을 알게 해 주는 것, 굳건한 자아의 시선으로 타자를 이해하는 것, 바로 그것이 문학이다. 작가가 지금 나의 말을 듣는다면, 삶에 대한 태도에서 진정으로 도스토옙스키적인 인물이라 칭찬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그는 언제나 내 심장을 뛰게 한다.

도스토옙스키, 그가 있어 내 삶은 행복하다.

여기에 번역해 소개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1956년 모스크바의 순수문학을 담당하는 정부 출판사(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издательств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й литературы)에서 발간한 도스토옙스키 전집 총 10권 중 제9권과 10권을 사용했다. 이 발췌본은 원본의 5%도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많은 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발췌본은 맛보기와 같다. 이 맛보기가 맛나서 전문을 펼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독자의 마음속에 일어난다면 이 책은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열두 번째 역서다. 매번 좀 쉬워지려나 기대하고 덤비지만, 천재 작가의 풍부하고 충만한 언어가 갖는 힘을 그대로 한글로 번역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문학적, 문화적, 언어적인 지식을 총동원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가까운 한글, 편한 한글로 옮겨 내려 노력했다. 번역, 언어와의 싸움. 그것은 힘들고 고단하지만 행복한 작업이다. 인문학 역사에 커다란 획이 될 인문학 3000권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초대해 주신 지식을만드는지식에 역자로서, 인문학도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작업을 예쁜 책으로 만들어 준 편집자에게도 감사드린다.

2014년 2월,

새로이 사랑하게 된 도시

스톡홀름의 하늘 아래서

김정아

키워드에 대한 정보 카라마 조프 가 의 형제 들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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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까라마조프가 형제들\” by 도스토예프스키 한번에 끝내기 (문학줍줍 책 요약 리뷰 | Book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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