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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 – 나무위키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 본명은 마르쿠스 로스코비츠.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예술가이다. 거대한 화폭에 단순한 사각형의 색면을 칠한 판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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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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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코 작품을 보고 왜 눈물을 흘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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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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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년 ~ 1970년)는 추상회화의 본질과 형상에 혁명을 일으킨 미국인 화가 세대에 속한다.[1] 45년에 걸친 마크 로스코의 활동 시기는 리얼리즘 시기(1924~1940), 초현실주의 시기(1940~1946), 과도기(1946~1949), 고전주의 시기(1949~1970) 넷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두 시기에 로스코는 전원풍경화, 실내화, 도시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뉴욕의 지하철 그림들을 그렸는데, 이 중 마지막 주제는 이후의 작품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차 대전과 전쟁 직후에 그린 작품들은 상징적이며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적 모티브에 기반을 둔 것들이다. 로스코는 순수추상회화로 옮겨가던 과도기 시절에 소위 ‘멀티폼’이란 것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한, 직사각형의 색면, 즉 유명한 고전주의 시기 작품으로 점차 발전해 나갔다.[2]

작품 세계 [ 편집 ]

마크 로스코는 1940년을 전후해 미국에서 일었던 급격한 화풍의 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해외에서의 전쟁으로 인한 폐해와 혼란을 피해 뉴욕으로 온 마크 로스코와 동시대 화가들의 회화는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이행한다.

1923년 뉴욕으로 온 뒤 전설적인 예술 학생 연맹에서 수학한 것을 제외하면 마크 로스코는 정식 미술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다. 마크 로스코에게는 화가 밀턴 에버리(Milton Avery)라는 중요한 스승이 있었으며, 에버리의 절제된 형상, 미묘한 색감은 젊은 로스코의 작업 방향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젊은 시절 드라마에 가졌던 관심을 발전시켜 신화와 심리 분석서들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고, 렘브란트의 그림, 모짜르트의 음악, 니체의 철학은 마크 로스코의 사상에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1940년대에 이르러 마크 로스코는 ‘추상 표현주의 화가’라고 알려져 있으면서 때로는 ‘뉴욕 학파’라고도 불리는 느슨하게 구성된 일군의 화가들과 함께 활동한다. 그러나 이들 화가들이 전부 뉴욕에 기반을 두고 활동한 것은 아니며, 또한 추상화에 대한 접근방식도 서로 큰 차이를 보였다. 특히 밝은 시각 효과를 내는 색면이 일깨우는 신체적 감각을 탐구했다. 마크 로스코는 추상 이미지가 “휴먼 드라마”의 근원적 속성을 직접 반영할 수 있고, 회화가 비극, 환희, 숭고함과 같은 영원한 주제들과도 때로는 맥을 같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초기: 1920년대 – 1930년

1920년에서 1930년대 시기동안 마크 로스코는 누드, 자화상, 인물이 있는 내부정경, 도시와 자연경관 등을 그린 수백 점의 그림을 종이와 캔버스에 남기고 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형태의 고의적 변형과 물감의 엄격한 적용은 몹시 선망한 아프리카와 대양주 미술, 어린이 미술과 같은 몇몇 비서구 시각 전통이 공유한 특징들이다. 드로잉과 회화의 재료와 도구에 대한 초창기 실험적 시도는 흑연, 잉크, 투명/불투명 수채, 유채를 포함한 많은 소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마크 로스코의 초기 전시회에는 야외 풍경을 그린 ‘무제’(풍경화)와 같은 수채 풍경화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자연의 유기적 곡선 묘사는 재빨리 도시의 기하학적 구도로 대체된다. 동시에 형상은 갈수록 뒤틀려 나타나고, 이런 특징은 1930년대 말 그려진 두 작품 ‘거리 풍경’과 ‘지하철 환타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후자는 마크 로스코가 뉴욕 지하철을 인간 소외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탐구한 대표적 작품이다. 평면적이고 무표정하면서 지극히 연약한 인물들은 그물망 같은 답답한 지하세계에서 건축적 배경과 뒤섞인다.

과도기: 1940년대

자신의 예술이 인간조건의 비극성을 표현하기를 원했던 마크 로스코는 “이제 누구도 형상을 훼손하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는 때가 왔다”라고 말했다. 1940년 즈음 마크 로스코는 면 분할된 영역 속에 위치한 반복되는 형태와 심하게 분절된 인간 형상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 ‘무제’와 같은 일련의 회화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진행될수록 마크 로스코의 이미지는 더욱 상징성을 띠고, ‘근원’, ‘물속 드라마’처럼 신체적 변형을 그린 회화로 이행하면서 추상화에 더욱 근접한다. 이 그림들은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받아 종이와 캔버스를 이용해 그려진 많은 그림들의 일부분이다.

1947년은 바야흐로 마크 로스코의 회화에서 모든 구상적 이미지는 다 사라지고 대신 느슨하게 정의된 “다층 형상”이라 불리는 색면의 비객관적 구도가 등장한다. ‘작품 9번’이 대표하는 다층 형상의 시기는 1947년에서 1949년까지 지속되며, 이 시기 마크 로스코의 작품 세계는 가장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캔버스화의 방향과 모양, 그 위에 창조된 형태, 색조 범위는 구도상 절제되고 극도로 복잡한 색면을 특징으로 하는 마크 로스코 독특한 양식의 기초가 된다.

원숙기: 1950년 – 1970년

1950년경 마크 로스코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여 ‘단순한 표현 속의 복잡한 심정’이라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이들 작품은 보통 1955년작 ‘무제’에서 나타나듯이 두개에서 네개의 직사각형이 큰 색면 위에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는 구도를 보인다. 이런 형태 안에서 마크 로스코는 폭넓은 색채와 색조, 여러가지 양식적 관계를 활용해 극적이고 소박하며 시적이기도 한 다양한 분위기와 효과를 자아낸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1957년 ‘무제’에서 볼 수 있듯이 1950년대에 상당히 어두워졌다. 1958년 무렵에는 화려한 색상 대신 붉은색, 갈색, 고동색, 검은색 등 어두운 색을 선택하여 사용하였고, 특히 생애 마지막 10년동안 몰두했던 벽화작업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1968년 대동맥류가 발병한 후 마크 로스코는 주로 커다란 캔버스에 그리던 것을 그만두고 종이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 중 상당수는 판넬이나 직물 위에 설치되어 틀이 없는 캔버스화처럼 보인다. 1969년작 ‘무제’는 마크 로스코가 생애 마지막에 그린 고동색 혹은 검은색과 회색의 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그의 작품 구도는 기본적인 색채, 색조, 색면의 대치구도로 한층 집약된다. 하지만 선명한 붉은색으로 가득찬 1970년작 ‘무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오로지 어두운 색채만이 그의 작품을 압도했던 것은 아니다.[3]

연보 [ 편집 ]

1903년트코비치가 9월 25일 러시아 드빈스크에서 안나 골딘과 야콥 로트코비치 사이에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1910년 아버지 로트코비치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정착하다.

1913년 마르코와 어머니, 누이가 미국으로 이주함으로써 가족들이 다시 모이게 된다.

1914년 아버지가 사망하다.

1921~23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번에 위치한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다.

1924년 뉴욕 시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ASL)에서 조지 브리지먼의 해부학 강의를 듣다.

1925년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맥스 웨버의 회화 수업을 듣다. 웨버의 영향으로 표현주의의 양식으로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다. 채색하기 전에 언제나 밑그림을 그리곤 했다.

1926년 웨버 밑에서 계속 회화 공부를 하다.

1929년 브루클린의 유대인 센터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다.

1932년 밀턴 에이버리와 아돌프 고틀리브를 만나 친구가 되다. 이디스 사샤와 결혼하다.

1933년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다. 센터 아카데미에서 드로잉과 수채화를 제자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하다.

1935년 독립 미술가 협회 ‘더 텐’을 공동창립하다. 벤 자이언, 아돌프 고틀리브, 루이스 해리스, 잭 쿠펠트, 루이스 샹거, 조지프 솔먼, 나훔 차즈바조프 그리고 일리야 볼로토프스키 등이 회원이었다. 로스코는 1940년 그룹이 해체되기까지 ‘더 텐’과만 전시회를 열었다.

1936년 뉴욕의 공공사업촉진국(WPA) 회화부에서 일하다.

193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다.

1940년 이때부터 마크 로스코라는 이름만 사용하다.

1941년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로 종이나 캔버스에 그리다.

1944년 초현실주의 양식의 추상화를 수채, 구이슈, 템페라로 종이에 그리다. 이디스 사샤와 이혼하다.

1945년 마리 앨리스(‘멜’) 비스틀과 재혼하다.

1946년 초현실주의 양식의 마지막 작품을 종이에 그리다.

1947년 멀티폼의 등장으로 점점 더 추상화 경향을 띠고, 이것은 몇 달 후 후기작을 특징짓는 사각형 색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에 종이에 그리는 일이 적어진다. 뉴욕의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다.

1948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현대 미국 조각, 수채, 그리고 드로잉 연례 전시’에 참가하다. 어머니 케이트가 가을에 사망하다.

1949년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가르치고 현대미술 강의를 맡게 되다.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성숙기 작품을 처음으로 발표하다. 이후 작품 제목은 모두 번호와 제작 연도로만 이루어지게 된다.

1950년 여객선을 타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하다. 딸 케이트가 태어나다.

1951년 브루클린 대학의 드로잉 교수가 되다.

1952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유명한 ‘15인의 미국인전’에 참가하다.

1954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개인전을 열다.

1955년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다.

1958년 뉴욕의 시그램 빌딩 벽화 제작을 맡게 되다.

1961년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홀리요크 센터의 식당 벽화 주문을 받다.

1964년 존과 도미니크 드 메닐에게 고용되어 휴스턴의 새 예배당을 위한 기념비적 벽화를 제작하다.

1966년 세 번째로 유럽을 여행하다.

1968년 동맥류를 앓아 3주간 병원에 입원하다.

1970년 2월 25일에 자살하다.

1971년 텍사스주 휴스턴의 로스코 예배당의 봉헌식이 거행되다.[4]

대표 작품 [ 편집 ]

《무제》, 1956년

《무제(지하철》, 1937년경

《무제(하양과 빨강 위의 바이올렛, 검정, 오렌지, 노랑)》, 1949년

《전조》, 1943년

《무제》, 1948년

《무제(빨강 위의 파랑, 노랑, 초록)》, 1954년

《No. 61(녹빛과 파랑)[파랑 위에 갈색, 파랑, 갈색]》, 1953년

《사프란》, 1957년

《무제(노랑, 빨강, 파랑)》, 1953년

《패널 1(하버드 3면 벽화)》, 1962년

《무제》, 1968년

《No. 207(짙은 회색 위의 빨강과 짙은 파랑)》, 1961년

《No. 14/No. 10(황록색)》, 1953년

같이 읽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색면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생애

Regarding: Mark Rothko

마크 로스코(Mark Rothko)에 대하여

마크 로스코(1903-1970)와 201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8200만 달러에 팔린 ‘오렌지, 레드, 옐로'(1961).

제 2차 세계대전, 진주만 공습, 홀로코스트… 세계의 정세가 인간의 정서를 황폐화하고 있던 1940년대 뉴욕의 화가 잭슨 폴락(1912-1956)과 마크 로스코(1903-1970)는 캔버스에서 그림과 풍경, 스토리를 제거했다. 이들은 대신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 추상표현주의 방식으로 미술에 정신세계를 도입했다.

즉흥성을 중시한 폴락이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제스추어 드립 페인팅 방식으로 그린 반면, 사색적인 로스코는 대형 캔버스를 세워놓고 사다리에 올라가 장시간 대형 페인트붓으로 그렸다. 동(動)적인 화가 폴락은 전성기에 교통사고로, 정(靜)적인 화가 로스코는 전성기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화(Color Field Painting)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다. 로스코의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로스코는 고요한 작품에서 색채라는 세계 보편적인 미술 언어로 관람객과 소통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스코 색면화는 거울이자, 예배당이며, 로스코는 테라피스트 같다.

2010년 MoMA ‘뉴욕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Abstract Expressionist New York)’ 전에서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모은 갤러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뉴욕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뮤지엄, 휘트니뮤지엄에서 로스코 회화를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로스코가 생전 원했던 것은 자신의 작품으로만 꾸며진 조그만 공간이었다. 그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걸리는 그룹전을 싫어했고, 옆에 어떤 그림이 걸리는가에 예민했다.

워싱턴 DC는 로스코의 염원이 담긴 갤러리가 두곳이나 마련되어 있다.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 of Art)과 필립스 컬렉션(Phillips Collection)엔 로스코 룸이, 텍사스 휴스턴엔 로스코의 그림으로 채워진 로스코 채플(Rothko Chaple)이 순례객들을 끈다.

혼돈과 격변의 시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그의 캔버스엔 사람도, 이념도, 종교도, 소셜미디어도 없다. 로스코의 색채로 가득한 무(無)의 캔버스는 탈종교적인 체험을 할 수 정신적인 공간인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생애를 돌이켜 본다.

“난 색채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비극, 아이러니, 관능성, 운명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만 훙미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와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Mark Rothko

# 러시아에서 미국까지

1903년 러시아(현 라트비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르커스 야코슬레비치 로스코비츠(Markus Yakovlevich Rothkowitz). 1913년 큰 아들의 징병을 피해 온가족이 이민, 뉴욕 엘리스아일랜드를 통과해 입국했다. 포틀랜드 오레곤에 정착한지 몇개월 후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한다.

# 종교와 결별

아버지 사망 후 1년간 유대교회당에서 애도한 이후에 자신의 종교인 유대교와 결별했다. 가장이 된 엄마는 캐셔로 일했고, 마르커스는 삼촌의 창고에서 일하면서 신문팔이도 했다.

# 예일대 중퇴

1921년 로스코는 예일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공학이나 법률을 전공할 계획이었다. 웨이터와 배달부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하지만, 예일대의 반유대 분위기, 인종차별과 허세에 불만을 느끼고, 이듬해 장학금 신청에서도 떨어지자 중퇴한다. 46년 후 로스코는 예일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Milton Avery, March on the Balcony, 1952, Oil on canvas 44 x 34 in. Acquired 1961, Phillips Collection

# 스승 고르키, 베버, 에버리

뉴욕에 온 로스코는 1923년 맨해튼 가먼트 디스트릭트(패션가)에서 직업을 구한다. 어느 날 아트스튜던츠리그에 친구 만나러 갔다가 모델을 스케치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파슨스에 입학, 아르메니아 출신 화가 아쉴리 고르키(Arshile Gorky)에게 배웠고, 해부학 강의도 들었다. 아트스튜던츠리그에서는 프랑스 출신 유대인 화가 막스 웨버(Max Weber)로부터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유럽 모더니즘을 배운다. 그리고, 화가 밀턴 에버리(Milton Avery)로부터는 추상에 가까운 절제된 형태, 미묘한 컬러감각에서 영향을 받았다.

# 미술 그룹 10

1930년대 로스코는 모더니스트 화가 모임 ‘Ten(10)’에 참가했다. 아돌프 고틀리브, 루이스 해리스, 벤-지온, 조셉 사몬 등이 멤버였다.

# 첫 결혼과 시민권 취득

로스코는 스승 밀턴 에버리, 아돌프 고틀리브, 바넷 뉴만 등 동료화가들과 레이크 조지와 매사추세츠주 글로체스터에서 종종 휴가를 보냈다. 1932년 레이크 조지에서 쥬얼리 디자이너 에디스 사차를 만나 그해 결혼에 이른다. 1937년 에디스와 별거했다가 재결합한다. 1938년엔 나치의 득세와 미국 내 유대인 추방 움직임으로 인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이름도 마크 로스코로 바꾸었다.

# 에디스와 이혼

1941년 로스코의 부인 에디스는 잘 나가는 쥬얼리 디자이너로 아파트(28스트릿@5애브뉴)에 공방을 운영했으며, 돈 못버는 화가 로스코는 뒤편에서 그림을 그렸다. 로스코의 스승이었던 화가 밀턴 에버리의 부인 샐리 에버리에 따르면, 에디스는 그림을 한점도 못파는 남편이 그림을 그만두기를 바랬다고 말했다고 한다. 로스코는 1943년 에디스와 다시 별거에 들어가고, 이혼에 이른다. 이후 기나긴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아내 멜, 아들 크리스토프와 함께

# 멜과의 재혼

1944년 일러스트레이터 메리 엘렌 바이슬(Mary Alice “Mell” Beistle,애칭 “멜”)을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1945년 걸작 ‘Slow Swirl at the Edge of the Sea’는 멜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 둘 사이에 딸 케이트와 아들 크리스토퍼를 두었다.

# 어린이는 작가의 영감

로스코는 1929년 브루클린의 유대인센터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영감도 받았다. 1933년 포틀랜드미술관에서 열린 자신의 첫 개인전에는 어린이들의 작품을 함께 걸었다. 이후엔 브루클린칼리지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1936년 어린이와 근대화가들의 유사성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지만, 집필을 끝내지는 못했다.

# 작품의 진화

로스코도 초기엔 지하철 풍경을 그린 리얼리즘, 고대 신화를 해석한 초현실주의를 시도했으며, 이후 멀티폼(다층형상)의 과도기, 그리고 색면화로 정착한 시기로 진화했다. 그의 작풍은 리얼리즘 시기(1924~1940), 초현실주의 시기(1940~1946), 과도기(1946~1949), 고전주의 시기(1949~1970)로 나뉘어진다.

# 어머니 사망, 화풍 변화

1948년 어머니가 사망했고, 1949년 뉴욕의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추상으로 가는 과도기의 다양한 형태(multiform)를 담은 작품을 선보인다. 로스코는 관람객에게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서, 관람객들 자신의 감흥에 맡기기 위해 이때부터 작품 제목을 번호와 ‘무제(Untitled)’로 쓰기 시작한다.

Henri Matisse, The Piano Lesson, 1916, MoMA/ Mark Rothko, Untitled (Portrait), 1939

# 마티스에게 경의를

1949년 로스코는 MoMA가 구입한 앙리 마티스의 ‘빨간색 작업실(Red Studio, 1911, 왼쪽)’에 매혹되었고, 1954년 이례적으로 제목이 제대로 달린 ‘마티스에게 오마쥬(Homage to Matisse, 오른쪽)’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딸 케이 트 로스코가 아버지 사망 후 소장하고 싶었지만, 말보로갤러리가 팔아넘겼다. ‘마티스에게 오마쥬’는 2005년 크리스티 경매에 나와 2200만 달러에 팔린다.

# 잭슨 폴락 Vs. 마크 로스코

미국을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옮긴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1912-1956)은 로스코보다 9살이 어렸지만, 액션 페인팅으로 먼저 스타덤에 올랐다.

라이프지는 1949년 8월 8일 “잭슨 폴락이 미국에서 생존한 가장 위대한 화가인가?”로 대서 특필하면서 1956년 8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전성기 누리다 갔다. 한편, 로스코는 구상을 시작했다가 폴락이 주목받기 시작한 1949년부터 색면화(Color Field)를 시작했다. 1950년 포춘지는 “투자 가치가 있는 화가”로 지목해 컬렉터들의 인기를 얻게 된다. 즉흥성을 중시한 폴락이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드립 페인팅을 했다면, 로스코는 대형 캔버스를 세워놓고 사다리에 올라가 장시간 대형 페인트붓으로 칠했다는 점이 대조적이다.

# 미켈란젤로의 영향

1950년 로스코는 유럽을 5개월간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미술에 심취했다. 특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미켈란젤로가 설계한 16세기 로렌조 도서관의 건축양식에서 감흥을 받았다.

# 뉴욕학파와 분노한 화가들 The Irascibles

1950년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이 12월 예정한 ‘미국 회화의 오늘(American Painting Today)’전에서 진보성향 미술에 적대적인 심사위원단에 불만을 품고, 이에 보이코트하는 공개서한에 추상표현주의 화가들로 구성된 뉴욕학파 18명이 서명했다. 이 편지에는 지미 언스트, 아돌프 고틀리브, 로버트 마더웰, 윌리엄 바지오테스, 한스 호프만, 바넷 뉴만, 클리포드 스틸, 리처드 푸세트-다트, 데오도로스 스타모스, 애드 라인하트, 잭슨 폴락, 마크 로스코, 브래들리 워커 톰린, 윌렘 드쿠닝, 헤다 스턴, 제임스 브룩스, 웰던 키스, 프리츠 벌트만이었으며, 조각가 데이빗 스미스와 루이스 부르조아 등도 지지성명을 했다.

Photo: Nina Leen

1951년 1월 라이프 잡지에 실린 The Irascibles. 잭슨 폴락, 클리포드 스틸, 로버트 마더웰, 오른쪽에 마크 로스코.

# 명예와 돈, 그리고 질투

1950년 포춘지의 찬사로 유명해지자 친구 화가 바넷 뉴만과 클리포드 스틸은 로스코를 “부르조아 열망으로 팔아먹는 작가”라고 비난했다.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은 로스코에게 주었던 자신의 그림을 모두 돌려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친구들의 질투로 로스코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며, 소외되기 시작한다. 로스코는 자신이 화가로서 오해받고, 자신의 그림이 유행으로, 데코레이션을 위해 구매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신의 작품이 컬렉터, 비평가들에게 먹히는 것이 아니라 고전 미술을 넘어서, 추상을 넘어서 감동을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로스코의 명성은 올라갔고, 돈은 쏟아졌다. 1961년 1월 존 F. 케네디의 취임식 무도회에서 아버지 조셉 케네디 옆에 앉았다. 그해 가을엔 MoMA에서 회고전이 열려 비평과 상업의 두마리 토끼를 잡는 성공을 거둔다. 로스코는 돈과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미술계는 또 다른 경향, 앤디 워홀의 팝 아트가 부상하게 된다. 팝 아트는 로스코의 철학과는 상극인 미술운동이다.

# 팝아트 증오

물질주의를 혐오했던 마크 로스코는 팝아트를 경멸했다. 로스코는 팝아티스트들을 “돌팔이, 젊은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1962년 팝아트 전시를 보면서 “이 젊은 화가들이 우리 모두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가?”라고 말했다. 재스퍼 존스의 성조기를 보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 수년간 작업해왔는데…”라고 밝혔다.

포시즌 레스토랑의 풀룸에 로스코의 그림이 장식되었더라면…

# 포시즌 씨그램 벽화, 1958

로스코가 돈 잘버는 화가가 되었지만, 부르조아 의식에 저항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1958년 맨해튼 파크애브뉴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필립 존슨이 설계한 씨그램(Seagram) 빌딩 내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Four Seasons)용 벽화를 위임받았다. 로스코는 이후 3년 반 동안 진홍색과 갈색을 테마로 한 3가지 시리즈로 30여점을 완성했다. 로스코의 의도는 포시즌에서 식사하는 부르조아들의 식욕을 떨어트리기고, 그들이 덫에 빠져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상한 벽화였다.

어느날 아내 멜과 포시즌에서 럭셔리 식사를 하면서 고객들의 허세에 분노한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이 그곳에 전시되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느끼고,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그리고, 선금을 돌려주었다. 로스코는 씨그램 벽화 시리즈를 1968년까지 창고에 보관했다. 1970년 씨그램 벽화 9점은 런던의 테이트모던에, 1990년 7점이 일본의 카와무라메모리얼뮤지엄에, 나머지는 내셔널갤러리(DC)로 들어갔다.

1958년 로스코는 제 2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미국 대표로 참가한다.

# 로스코 룸, 필립스 컬렉션(DC), 1961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이 형제들처럼 한곳에 모이기를 원했다. 자신의 뮤지엄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 1961년 로스코는 워싱턴 D.C.의 필립스 컬렉션(Phillips Collection)에 룸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컬렉터 던칸 필립스가 4점을 구입한 후 미술관 내에 로스코 룸을 실현했다.

# 로스코 예배당(휴스턴), 1971

1954년 로스코는 화가 친구 에델 K. 슈와바처에게 시골 곳곳마다 길가에 외로운 여행자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며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을 짓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10년 후, 휴스턴의 아트 컬렉터 존과 도미니크 드 메닐이 필립 존슨에게 예배당 설계를 위임하고, 로스코에게 14점의 회화를 의뢰했다. 로스코는 씨그램 벽화로 충돌했던 필립 존슨과 다시 의견이 맞지 않아 건축가가 바뀌게 된다. 1971년 로스코 예배당(Rothko Chaple)은 완공됐고, 로스코의 검은색면 회화가 설치된다. 로스코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 18인치 앞에서 보라

로스코는 생전에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때 캔버스에서 18인치(45센티미터) 정도 떨어져서 보라고 추천했다.

예일대 미술관의 마크 로스코 작품. Yale University Art Gallery

# 그림은 소통, 종교적인 체험

로스코는 관람객이 그림에 대한 액면 그대로의 반응, 즉 비극, 절정, 운명 등 기본적인 인간의 정서에 집착했다. 색면회화는 인간의 관심과 인간적 대화의 무대였다. 이야기가 있는 독백이라기 보다는 상호작용하는 초월적인 드라마를 위한 공연의 공간이다. 그의 그림은 희망, 관능, 긴장, 아이러니, 죽음, 인생무상 등 여러 감정을 촉발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무너지거나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면, 자신이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과 소통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림을 그릴 적에 느끼는 것과 같은 종교적인 체험이라고 말했다.

# 테크닉의 비밀

로스코의 색면화에는 조수들에게까지 비밀이었던 특별한 테크닉이 있었다. 아크릴릭 레진, 페놀 포말드하이드, 알카이드 외에도 달걀과 풀을 믹스해 사용했다. 덧칠 하기 위해서는 물감이 빨리 말라야 했기 때문에 개발한 것.

# 멜과 별거

멜(메리 앨리스)과는 케이트(1950년 생)와 크리스토퍼(1963년생)를 낳은 후 1969년 1월 1일 별거를 시작, 69스트릿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 로스코 죽음, 1970

1970년 2월 25일 로스코는 피바다가 된 맨해튼 작업실 키친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항우울제를 다량 복용해왔던 로스코는 팔을 면도날로 그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발표됐다. 로스코의 딸 케이트는 당시 19살, 아들 크리스토퍼는 6살이었다. 그의 가족은 소통을 중시하는 로스코가 유서 한장 없이 자살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화가 아그네스 마틴은 로스코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으며, 로버트 마더웰은 그의 죽음이 제의적이라고 밝혔다. 로스코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거부하듯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설명도 거부한 것일까?

# 부인 멜 사망, 1970

같은해, 1970년 8월 아들 크리스토퍼가 TV 만화영화를 보고 있던 중 아내 멜이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한다. 로스코처럼 알콜중독이었던 그녀 나이 48세였다. 케이트와 크리스토퍼는 졸지에 고아가 된다.

워싱턴 D.C.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 동관(East Building)의 마크 로스코 룸.

# 미술사 최대의 법정소송

딸 케이트 로스코는 아버지 사망 후 마크로스코 재단의 유산 집행자 3인과 말보로 갤러리(Marlborough Gallery)를 고소했다. 이들이 아버지의 주요 작품 100점을 시세보다 현저하게 낮은 가격에 넘기고, 698점은 판매 위임하면서 수수료를 50% 책정하면 유산을 빼돌린 것. 결국 이 소송은 1986년 15년만에 로스코 자녀의 승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작품 절반의 상속권이 자녀에게 돌아갔고, 말보로 갤러리는 900만 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 딸과 아들

케이트 로스코 프리젤은 의대에 진학해 병리학자가 되었으며, 아들 크리스토퍼 로스코는 이후 12살까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이모네 집에서 자라다가 볼티모어의 누나 케이트와 남편의 집으로 들어갔다. 미시간대 졸업 후 임상 심리학자로 근무하다가 1994년부터 아버지의 전시 지원과 강연을 하고 있다. 2015년엔 ‘Mark Rothko: From the Inside Out’를 출간했다.

# 연극 ‘레드(RED)’

로스코와 씨그램 벽화 이야기를 그린 연극 ‘레드(Red)’가 2009년 런던에서 초연된 후 2010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어 최우수 연극상을 비롯 토니상 6개 부문상을 수상했다.

# 경매 기록

로스코가 남긴 회화는 총 836점으로 예일대에서 카탈로그(1998)가 출간됐다. 2012년 크리스티에서 ‘Orange, Red, Yellow'(1961년)가 작가 최고 경매가인 8200만 달러에 팔렸다.

*마크 로스코 필립스컬렉션(DC)

*내셔널 갤러리 마크 로스코 룸

*포시즌 레스토랑의 피카소 커튼 ‘삼각모자’ 어디로 가나?

마크 로스코 (Mark Rothko)의 생애와 작품 해설 – 1부

미국의 이러한 기조 속에서 예일대 또한 고등학교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가 예일대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참고 견디며 외면하거나 적응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기존의 특권계층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폐쇄적이었고, 유대인을 비롯한 이민자 출신들은 신분상승을 노리는 위협적인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겉으로는 진보적이었던 명망 높은 기관이 알고 보니 허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그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또한 학비를 버느라 학업에 전념하기 어려웠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치닫자 그는 결국 예일대를 그만두고 맙니다.

갈 곳을 잃은 그는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재단사나 경리 등 그에게 별 의미없는 직장을 전전했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인체 드로잉을 공부하던 친구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그 장소에서 운명같은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칠, 자신이 뿌리내릴 장소를 찾은 것이죠. 그곳은 바로 예술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게 내가 살아야 할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곧바로 그는 친구가 다니던 아트 스튜던츠 리그 예술학교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초기에 그가 회화와 연극 두가지 길을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는 2달 동안 교육을 수료하고 다시 포틀랜드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지역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배웠죠. 그러나 이 극단에서 돈 문제로 더 이상 배우기 어려워졌고, 결국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그는 회화에 전념하며 화가로서 자리매김합니다. 이제부터 예술가 로스코의 첫 걸음이 시작됩니다. 물론 이때 배운 연극적 소양은 앞으로도 그의 예술관과 표현에 영향을 미칩니다.

영혼을 울리는 색면 추상의 거장 ‘마크 로스코’ – 오픈에디션

‘색면 추상’이라 불리는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1903. 9. 25 ~ 1970. 2. 25)는 거대한 캔버스에 스며든 모호한 경계의 색채 덩어리로 인간의 근본적인 감성을 표현한 화가이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화가로 러시아의 드빈스크에서 마르쿠스 로스코비츠 Marcus Rothkowitz 라는 이름으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1913년 열 살이 되던 해, 부모를 따라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그의 미국 생활이 시작된다. 1921년 예일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심리학, 법률 등을 배웠으나 특별히 미술을 공부한 적은 없었던 그는 재학 도중 장학금이 취소된 사건을 발단으로 예일대의 엘리트주의적 정서와 인종 차별적인 학생들의 태도에 반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예일대를 중퇴하고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로 전학해 해부학과 연극에 몰입했고, 정식 미술 수업을 받지 않은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64년 작업실 (출처: artribune.com)

같은 러시아 출신이면서 마티스 밑에서 배운 적이 있는 막스 웨버 Max Weber 의 영향으로 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색면 화가이자 마티스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밀턴 에이버리 Milton Avery 를 만나게 되면서 로스코는 그의 색채를 다루는 방식과 대담한 색채 사용의 영향을 받았다.

1928년에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으나 금방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35년에 그는 추상미술과 표현주의에 찬성하는 미술가들 그룹인 ‘텐 ten’의 창설 멤버로, 작업 초기에는 신화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초현실주의 양식을 실험하며 종이와 캔버스에 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다. 구상회화이지만 작품들에서 이미 로스코 회화의 특징인 수평과 수직의 구성과 색면 분할의 전조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유럽에서 나치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데 두려움을 느낀 로스코는 1938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어 법적으로도 완전한 미국인이 되었고, 1940년에는 이름도 마르쿠스 로트코비치에서 마크 로스코로 바꾸었다. 그리고 미국 미술가 협회와도 그룹전을 개최했다. 이때부터 로스코의 작품은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색면 회화의 시작

1940년대 호안 미로, 조르조 데 키리코, 막스 에른스트 등의 영향을 받고 초월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로스코는 1943년 이후에는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클리포드 스틸 Clyfford Still 과의 인연으로 색면 회화 Color-feild painting 를 발전시키게 된다. 모호하고 불분명한 경계선의 색면으로 채워진 커다란 캔버스에 환희에서 절망에 이르는 다양한 인간의 감정들을 그림으로 담아내려했다. 이제 현대 회화는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그는 재현적인 주제보다는 형태, 공간, 색채 등의 형식적인 면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말에는 화면에서 재현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캔버스에 서서히 물감을 스며들게 하여 색면을 만들어 내는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완전한 추상을 추구하려한 작품들은 거대한 캔버스를 수평과 수직으로 기하학적으로 분할한 후, 단색으로 화면을 가득 칠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구상적 이미지가 다 사라지고 다층의 색면, 구도가 등장하는 이른바 ‘다층 형상’의 시기는 1947년에서 1949년까지 지속되며, 이 시기 마크 로스코의 작품 세계는 가장 급격한 변화를 나타냈다.

사회적 명성과 두려움의 공존

열정적으로 색면 회화 작업에 몰두하던 로스코는 뉴욕 맨하튼에 페기 구겐하임이 운영하던 Thr Art of This Century 갤러리에서 1945년 개인전을 가지게 되면서 비로소 뉴욕 미술계로부터 큰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뉴욕 화파의 일원이 되었고, 1954년부터는 시드니 재니스 화랑의 전속작가가 되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61년 MOMA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며 마침내 최고의 미술가로서 그 명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성공한 미술가 로스코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창작 에너지가 고갈되어 예술적 한계에 부딪힐까 불안했고, 자본의 논리에 예술이 지배당하는 상황도 그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불편한 것이었다.

1968년 건강이 악화 된 후, 로스코는 주로 커다란 캔버스 대신 종이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판넬이나 직물 위에 설치되어 틀이 없는 캔버스처럼 보여지는 작품이다. 결국 그는 슬럼프를 겪으며 우울증과 건강의 악화로 1970년 2월 25일 뉴욕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절제된 색과 구도

작품의 성숙기가 시작되는 1950년대부터는 조금 더 절제된 색과 구도를 보여준다. 두 개에서 네 개의 직사각형이 큰 색면 위에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는 구도 안에서 마크 로스코는 폭넓은 색채와 색조, 여러가지 관계를 활용해 극적이고 시적이기도 한 다양한 분위기와 효과를 만들어냈다. 로스코의 작품은 1950년대부터 조금 어두워졌는데, 1958년 무렵에는 화려한 색상 대신 붉은색, 갈색, 고동색, 검은색 등을 주로 선택하여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어두운 색이 지배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말기에는 단 하나의 수평선으로 화면을 양분시키는 등 더욱 단순한 구성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선명한 붉은색으로 가득찬 아래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오로지 어두운 색채 만으로 채우려던 것은 아니었다.

레드와 오렌지 계열의 색상이 자연스럽게 그라데이션을 이룬 1967년, 1968년도에 제작된 대형 유화 작품들이다. 단순한 구도로 층층이 쌓은 물감층이 만들어낸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한 직사각형의 색면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수평선처럼 보이는 선은 관람객을 향해 다가오는 듯도 하고 반대로 안녕을 외치며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담다

“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나는 그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추상표현주의라는 사조로 설명되지만 로스코 스스로는 추상주의자이기를 거부했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본성을 그는 일생동안 자신의 그림이라는 도구를 통해 풀어냈을 뿐이다.

로스코의 작품은 처음 본 사람들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커다란 화면을 넓게 채운 두 세개의 면들과 단순한 색채는 추상 회화에 익숙하지 못한 감상자들에게 간혹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보면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숭고한 감정과 가슴을 울리는 슬픔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색의 공간감만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감성을 표현한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로스코가 작업하며 느낀 감정들을 함께 느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는 관람객이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는 순간 자신의 그림이 살아 숨쉬기 시작 한다고 말한다.

“나는 색채나 형태나 그 밖의 다른 것들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비극, 황홀경, 운명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가진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로스코는 추상 이미지가 회화가 비극, 환희, 숭고함과 같은 영원한 주제들과도 맥을 같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절제된 이미지 속에서 숭고한 정신과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로스코의 작품들은 그의 열정을 드러내듯 유독 많은 에디션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공간 한켠에 놓여진 그의 작품을 문득 바라보고 있자니 위로를 받는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참조

서정욱 미술토크 ‘미술이 필요없는 그림, 마크 로스코’.

501 위대한 화가 ‘마크 로스코’, 마로니에 북스, 2009

※ 인테리어 사진들은 오픈에디션 고객님들의 후기들로 구성되었습니다.

※ 본 게시물은 오픈에디션의 창작물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마크 로스코’ 오픈에디션 모두보기 ⊕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 展

전시

전시 누크갤러리, 국동완 <방향연습 SENSE OF DIRECTION>展 누크갤러리에서 2022년 5월 4일부터 2022년 5월 28일까지 국동완개인전 <방향연습 SENSE OF DIRECTION>展을 개최한다. 드로잉, 페인팅, 조각, 책 작업을 통해 무의식과 무의식에 접근하는 과정을 작업으로 전개해가고 있는 국동완은 최근 치솟은 집값을 보며 한동안 막막한 상태로 일상을 살고있는 자신의 불안한 상황을 집값 그래프의 상향, 하향 곡선의 빨강과 파랑 물결에 대입해 풀어본다. 이번 전시에는 의문과 고통의 표면을 이미지로 만들어 질문하고 손이 그에 자동으로 반응하여 그려내는 드로잉과 새롭게 선보이는 오일 파스텔 드로잉 2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방향 연습 #1, Sense of Direction #1, Colored pencil on paper, 54x65cm, 2022 방향 연습 #5, Sense of Direction #5, Colored pencil on paper, 54x65cm, 2022 불장, Bull Ma 0 Read more

‘마크 로스코’가 색깔만 칠한다고?

▼저작권 : 창작물을 만든 사람이 자신의 저작물에 대해 가지는 법적 권리.

▼범위 : 예술, 건축설계면, 컴퓨터프로그램, 영상, 폰트, 논문 등 광범위.

모든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허락 없는 모방, 남용으로부터 보호하는 권리, 즉 저작권이 있다. 반면 저작권에도 만료기간이 있는데, 이는 작가의 사후 70년까지다. 이때부터 작가가 남긴 작품 공유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Copyleft”. 시리즈 기사 <만인의 그림>에서는 생전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이제는 만인의 그림으로 돌아온 저작권만료 예술가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마크 로스코 [사진제공 : Wikipedia]

본명 : 마르커스 야코슬레비치 로스코비츠(Markus Yakoslevich Rothkowitz) 출생 : 1903년 9월 25일 사망 : 1970년 2월 25일 국적 : 러시아 -> 미국 사조 : 추상회화 주요작품 : ‘지하철 판타지’, ‘Orange, Red, Yellow’, ‘Untitled’, ‘No.61’

색채화가로 불리며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은 ‘마크로스코’. 일부에서는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고 혹평하지만, 사실 그가 이런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그리기까지 다양한 작품과 과정이 있었다. 오늘 만인의 그림에서는 철학과 종교적 뿌리를 근간으로 다양한 인생의 의미를 전달한 ‘마크로스코’의 작품을 소개한다.

현재는 라트비아 국경에 위치한 다우가프필스(전 러시아영토)에서 태어난 마크 로스코는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 오리곤 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 초,중 교육을 받게 되었지만, 문화적뿌리는 여전히 독일과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였다. 주로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 독일 철학자 니체, 프로이트, 융 등의 영향을 받았다.

마크 로스코의 ‘Orange, Red, Yellow’ [사진제공 : Wikipedia]

또래 아이들에 비해 생각이 깊고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마크는 장학금을 받고 예일대학에 입학했지만, 2학년 되던 해 유태인 배척주의로 인해 장학금이 중단되자 자퇴하고 뉴욕으로 떠나버렸다. 20대 초반 혼자서 뉴욕 거리를 헤메던 마크는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23년 맨해튼 가먼트 패션거리에서 직업을 구하던 그는 어느 날 미대 친구가 모델을 스케치 하는 것을 보고 화가라는 직업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아르메니아 출신 화가 아쉴리 고르키(Arshile Gorky)에게 해부학을 비롯해 기본적인 미술을 배웠으며, 프랑스 출신 유대인 화가 막스 웨버(Max Weber)로부터 프랑스 미술사조인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을 알게 된다.

마크 로스코의 ‘지하철 판타지’ [사진제공 : Wikipedia]

1930년대부터 마크는 미국의 현대미술 화가 모임 ‘Ten’에 참여했다. 2년 후 금속공예 디자이너 에디스 사차를 만나 결혼하고 이후 1938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사실 그의 본명은 마르커스 야코슬레비치 로스코비츠(Markus Yakoslevich Rothkowitz)였는데 이때 이름도 ‘마크 로스코’로 바꿨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말까지 무명시절의 마크 로스코는 유형의 대상을 그렸다. 예를 들면 지하철의 뉴욕 시민들이다. 이른바 ‘뉴욕 지하철’ 시리즈로 불리는 ‘지하철 판타지’과 ‘지하철 입구’ 등은 대공황 이후 미국 서민들의 자화상을 그렸다. 당시 지하철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서민들은 앙상한 조각처럼 말라 있었다. 마크는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불안감과 고난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지하철 입구’ [사진제공 : Wikipedia]

그림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표정이 상당히 우울한 모습이며, 모두 각자 떨어져 거리두기를 한 상황이다. 기둥 사이에 숨어버리는 등 비극적으로 변해버린 미국 사회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치 뉴욕 빈민가 풍경을 그린 애쉬켄 학파(Ashcan school)와 대공황기 리얼리스트 작가를 연상케하는 풍경화다.

지금이야 걸작으로 남았지만, 대공황시기의 화가는 일반 회사원보다도 어려운 처지였다. 마크가 그림 한 장 팔기 어려웠던 반면 잘 나가는 공방 사장이었던 부인은 불만이 점점 쌓였다. 결국 1943년 별거와 이혼을 연달아 거치면서 마크는 1년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마크 로스코의 ‘바닷가의 느린 여울’ [사진제공 : Wikipedia]

다행스럽게도 이듬해 자신과 비슷한 업종과 자신을 이해해주는 일러스트레이터 메리 엘리스 바이슬(Mary Alice Beistle)을 만나 재혼했다. 이후 1945년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닷가의 느린 여울’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미술계에 얼굴을 드러냈다.

이후 1948년 마크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추상표현주의의 한 계열인 색면회화(Color field painting)를 하기 시작했다. 색면회화란 삼차원적인 깊숙한 공간감을 주는 색감으로 캔버스 전첼르 색채로 뒤덮는 추상 미술을 말한다. 마크로스코는 바넷 뉴먼(Barnett Newman)과 함께 색면회화의 선구자로 꼽힌다.

마크 로스코의 ‘무제(Untitled)’ [사진제공 : Wikipedia]

그리고 마크는 특이한 작명으로 유명했는데, 작품 ‘Orange, Red, Yellow’처럼 그저 색감단어를 나열하는가 하면, 관람객들의 감흥에 작품을 온전히 맡기고 싶어 제목을 ‘무제(untitled)’로 짓기도 했다. 또한 작품 각각에 숫자를 매겨 No.1부터 No.61까지 그리기도 했다. 특히 이 그림들은 마크가 색면화를 시작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밝은 붉은색에서 어두운 푸른색으로 변하는 내면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어떤 관람객은 그저 빨강색으로 구성된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관객마다 색감을 보고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마크의 추상미술은 단순히 색깔 조합에 의미를 둘 수 없다. 그는 서민들의 내면을 그림에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해 말년에는 색감을 본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까지 연구한 것이다. 미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마크 로스코의 ‘No.61’ [사진제공 : Wikipedia]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대공황, 이혼 등 온갖 고난을 겪어본 ‘마크 로스코’. 그는 자신의 내면과 타인들의 내면을 그림으로 연결해 공감이라는 결과물로 끌어냈다. 물론 같은 색감이라도 매번 느끼는 바는 다를 수 있다. 하루하루 바쁜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들. 마크의 작품을 통해 잠시라도 나를 진단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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