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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7 (화) [하루 한 장]“시험을 받으시더라” (눅4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고난주간 특별 내 삶 바꾸기2]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이 당하신
세 가지 시험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영광의
자리 요단강을 스스로 떠나
시험받는 자리인 광야로 가십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만족을 누리는
교회에만 머물기를 원하기보다
시험이 난무하는 삶의 현장으로
스스로 옮겨가야 합니다
그렇게 이번 고난주간 한 주는
[특별 내 삶 바꾸기]가 되어서
모일 수는 없지만 정말 특별한
내 신앙의 성숙을 이루는
은혜로운 한 주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세 가지 시험은
식욕, 안목의 정욕, 탐욕인데
이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실패했던 첫 번째
시험 과목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같은 시험을 통과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보기 좋게 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믿음으로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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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장 주석 – Daum 카페
누가복음 제 4장 =====4:1 <요단강과 여리고전경> 예수께서…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이 구절은 3:22에 연결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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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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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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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4.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4znbqZgr5MM
누가복음 4장 주석
누가복음 제 4장
=====4:1
<요단강과 여리고전경>
예수께서…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이 구절은 3:22에 연결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 구절은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준다. 예수는 ’40일 동
안 광야’에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
(wander)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모세가 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40일간 있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신 9:9).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호 11:1)로 비유한다면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개인적 또는 단일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
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인도했다. 전
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셨으나 여기서는 사단이 그의 아들을 시험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았을 때 실패하고 말
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시험 가운데서 거의 매번 시험에 져 엄청난 죄악들을 범했지만 예수는 광야에서의 몇
차례의 시험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내내 많은 시험들을 당하셨지만 그 모든 시험에
서 승리하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 똑같은 유년기, 똑같은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바로 이
런 흠없고 순전(純全)한 어린 양 같은 예수께서 온갖 시험을 이기시면서 우리 인류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한편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구절에서도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 3:22에서 성령이 예
수께 강림하시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식적(公式的)으로 모습을 드러내 메시
야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하더
라도 세례식 이후에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
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 역시
이 가운데 성령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에게 있어 행동 동
기였고, 그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폭발적 복음운동의 주요 동인(動因)
이었다(행 2:4;10:44;13:4).
=====4:2
마귀에게(* , 디아볼루) – ‘마귀’ 또는 ‘사단’을 나타내는 이 단어
는 ‘비방자’, ‘고자질장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70인역(LXX)은 비난자나 적이나 유혹
자로서 마귀를 지칭하는데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대상 21:1;슥 3:1). 한편 이와 유사
한 내용의 단어로 ‘사타나스'(* , ‘대적자’, ‘적’)를 들수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사탄(* )에서 유래하였다(삼상29:4).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
시록에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은 대개 ‘사타나스’를 사용하며 평행구절인
막 1:13도 ‘사타나스’를 사용하고 있다. 사단이 세상의 왕이요 신이다(6절;고후 4:4).
그러한 존재로서 사단은 하나님의 것인 영광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사단의 통치 아래 있게 되며(마 6:13;막 3:27;요 6:70;8:44;행
13:10;26:18;골 1:13) 그들이 하는 일은 ‘디아볼로스’의 일이다(요일 3:8). 결국 사단
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것이며 사단의 궁극적 무기는 사망이다(히
2:14).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마귀의 왕국을 멸망시키게 되고 결
국 사단은 하늘로부터 쫓겨나게되며(10:18;요 12:31;계 12:9) 그 결과 사단은 더이상
비방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사단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共同體)를
상대로 계속된다(고전 7:5;엡 4:27).
시험 –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
이 필요할것이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은 이 세 가지의 경우를 구분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고 모두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사단은 사람들을 ‘시험
‘(temptation)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하
나님은 그와 같은 시험을 하시지도 않으며 그 자신이 그런 방법에 의해서 시험을 받으
시지도 않는다(약 1:13). 게다가 모든 시험(temptation)이 직접 사단으로부터 온다고
말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시험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약1:14, 15). (2)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앙과 어긋나는 그릇된 요구들을 하므
로 하나님을 시험(test)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 6:16을 인용한 의도도 아마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
다(12절). (3)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 것과 마찬가지
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다(신 8:2).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가 광야에서 경
험한 것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이 포함되어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
는 하나님은 ‘율법의 준행(遵行) 여부’를 보시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
셨다(출 16:4). 한편 사단의 시험에 마주쳤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
가 너를 기뻐하노라'(3:22)고 하신 말씀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예수는 구
약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주리신지라 – 본 구절이 보도하는 바는 예수께서 금식을 하는 40일 동안 전혀 배고
픔을 느끼지않았다거나 또는 배고픔에 대해 전혀 자유했었다(Shurmann)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예수께서 계속 주리신 가운데 극도의 배고픈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마귀
가 유혹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마귀는 예수의 배고픔이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그 배
고픔을 더윽 자극하여 먹는 것으로 예수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이다.
=====4:3
마귀가…떡덩이가 되게 하라 – 여기서 사단이 떡덩이를 언급한 것은 구약에서 하
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을 연상시킨다(출 16:31). 그 당시 사람
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던 것과 같은 이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
했었다(요 6:30). 결국 사단이 예수에게 이와 같은 시험을 했던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
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촉구의 목적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객관적 증거를 보려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을 신실하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기는테 있었다. 즉, 이 사단의
간악한 시험 배후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사이를 와해(瓦解)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예수가 수행할 메시야적 사명을 방해하려는 사악하고도 교활한 간계가 숨
어있는 것이다. 결국 애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겨내는데, 사단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그 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해 준다(I.H. Marshall).
=====4:4
예수께서…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신 8:3
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를 40년 동안 유랑하
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
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것이다(신 8: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
를 주신 이유는 그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준
수함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신 8:3).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동안에 예
수는 줄곧 신실했다. 예수께서 보여준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했을때
그들이 행동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답변한 내용은 예수
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철두철미 순종한
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가 시험받을 때 모범이 되는 것이다(히 4:
14-16;5:80. 한편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하심을 갖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는 떡부스러기 하나를 취하시는 것조차도 인류 구속을
위해 거부하시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셨다(22:19;요 6:48-51).
따라서 우리는 시험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 수 있다.
=====4:5
마귀가…천하 민국을 보이며 – 이 두번째 시험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세상
권세에 대한 정치적 시험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시험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여기서 누가는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라
고 기록해 어디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평행구절인 마 4:8은 ‘산’이라고
기록하여,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장면
을 연상시킨다(신 34:1-3). 그러나 혹자(I. H. Marshall)는 ‘산’이라는 표현이 상징적
(象徵的)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나 육신의 몸을 입고 계
신 예수께서 모든 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때
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일이 심
리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수께서는 실지로 시험을 받기 위
해서 모든 세상을 구석구석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
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간 곳이 산이든 아니든 천하 만국을 보기위해서 설정된 장소
였다는 정도로 보면 무난할것이다.
=====4:6
이 모든 권세와…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이
다. 인류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 소유권, 양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그러한 권한
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조만간 모든 ‘권세와 영광’을 되
찾게 될 것이며, 또한 온전한 공의와 사랑으로써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
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는 예수께 세상 전체를 소유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귀
의 주장에 대해서 예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며 그렇다고 마귀의 주장을 인정하시
지도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궁극적 지배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단
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단은 하나님을 정면
으로 모독하는 행위인 우상 숭배를 조건부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시험
은 성도들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크고 작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이냐 신앙적 진
리냐 혹은 사단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적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만
국의 권세를 초개처럼 버리시는 예수의 단호한 결단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마 6:24).
=====4:7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 마귀가 요구하는 절은 단순한 인사형식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들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들의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이
다. 왜냐하면 (1)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므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희생 제물로 자신
을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2) 성경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 다음에야 ‘영광
에 들어간다'(24:26)고 가르친다. (3) 마귀는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스스
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 시험은 예수가 왕국을 즉시에 받으므로
십자가를 피하게 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挫折)시키려는 것이었다.
=====4:8
주 너의 하나님…그를 섬기라 –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은 우리에게 좋은 본
보기를 제시해 준다. 예수는 사단을 대적함에 있어 신 6:13을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
께 순종한 마지막 아담(고전 15:45), 곧 완전한 인간으로서 마귀를 대적했다. 즉 예수
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구약에
서 인용한 말씀들은 마귀를 대적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려는 그리스도와(요 5:30;6:38) 항상 그 뜻을 대적케 하
려는 사단의(창 3:1)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4:9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뛰어내리라 – 마귀는 세번째 시험을 위해서 예수를 예루살
렘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마태는 이 시험을 두번째로 제시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마 4:5-7). 이것은 누가가 예루살렘 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
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험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의 자기 과시욕을 부추켜
그러한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게끔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꼭대기’라는 말의 헬라어 ‘프테뤼기온'(* )은 ‘날개’
라는 뜻의 ‘프테류스'(* )에서 온말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세푸스(Jos, Antiq. 15, P. 411)에 의하면 이는 성전 바깥뜰 남쪽에 있는 주광
을 뜻한다고 한다. (2) 예레미야스(J. 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성전문 위로 가로지르
는 인방(lintel)이라고 한다. (3) 게르하드슨(B. Gerhardson, Testing Gods son, P.
54)에 따르면 시 91:4(LXX은 제 90편)의 ‘프테뤼가스'(날개들)와 본문 9절의 ‘프테뤼
기온'(꼭대기) 사이에는 일종의 언어 유희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종의 성전을 보호해
주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이중 어떠한 견해를 취해본 구절을 이해하든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끌고 갔다는 것
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랍비 문헌에 보면
메시야가 성전의 꼭대기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비록 랍비문헌에는
뛰어내린다는 언급은 없지만 마귀는 그러한 배경에서 이 시험을 예수께 제기했을 가능
성도 있다.
=====4:10
하나님이…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
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한다(시 91:11, 12).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
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마귀는 시
91:11, 12을 인용하면서 고의적으로 ‘네 모든 길에’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게다가 여
기에 인용된 시편은 택한 백성을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섭리를 방해하는 일이나 충동적으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엄히 징계하신다고 가르쳤지만(신 6:16;18:20;사 45:9) 마귀는 이런 진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않았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
한 신앙을 변색시키기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킨다(마 22:29;고후 2:17). 사실 세계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허다한 이단들은 성경을 그들의 경전으로 내세우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다만 문
제는 이 성경 말씀을 자신의 거짓된 사상을 세우고 은폐시키려는 목적에서 아전 인수
(我田 引水)격으로 짜맞춘다는데 있는 것이다.
=====4:1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 예수의 대답은 다시 성경의 인용으로 주어진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맛사에서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출
17:1-7)를 배경으로 하는 신 6:16을 인용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마귀의 시험에 응한
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격분(激忿)케 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사단의 시험에 대한 결론적 말씀이라 할 수 있
는 본절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의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
=====4:13
미귀가…떠나니라 – 사단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
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NIV)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즉
22:3에서 마귀가 다시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은
본서를 살펴보면 사단이 예수의 전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
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
해 볼 때, 이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더한 듯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곧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때문이다. 예수
께 있어서의 사단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것을 기
록하지 않고 있다(마 4:11;막 1:13). 이것은 각 제자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
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14
성령의 권능으로…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 저자 누가는 철저하리 만큼 성령에 대
해서 강조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한 사실(3:21, 22)과 성령에 이끌
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일(1절) 등에서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두
드러지게 부각(浮刻) 시킨다. 그런데 이 곳에서도 누가는 재차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
고 있는 바 예수께서 새로운 사역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
되었음을 재삼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으로 본서(10:21)와 사도
행전(행 1:8;10:38) 등에서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1장에서 4장까지 오면서 예수의 잉
태에서 사역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개입했던 성령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
다. 이제 예수의 능력이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나 그의 명성이 널리 퍼
지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몇몇반응들(22, 28, 32,
36, 42절) 중에서 우선 예수에 대한 소식이 퍼져 나갔다는 것을 언급한다. 한편 마태
와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신 이유를 그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들으셨기때문
이라고 기록하였다(마 4:12;막 1:14).
=====4:15
가르치시매…칭송을 받으시더라 –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내
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예수가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쳤고 그 가
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칭송했다고만 전할 뿐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칭송을 받은
이유는 그의 가르침에 생동력, 권위, 논리 정연함, 실제적 적용, 흥미, 진리 등이 담
겨 있기 때문이다(31, 32절;마 7:28, 29).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의 칭송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열심으로 찾아왔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의 선입견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
거나 심지어 적대적 행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장에도 기록되어
있다(28, 29절). 한편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골격을 이루며(마
4:23;9:35;11:1), 그 가르침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자신에 관한 계시(마 6:32,
33;요 14:6) 및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17:20, 21;마 21:31) 등으로 요약된다. 복음
서에는 병자 치유등을 위시한 예수의 놀라운 이적들이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
만 이 모든 이적들도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메시야의 여러 교훈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4:16
예수께서…자기 규례(規例)대로 – ‘그가 자라나신 곳’은 예수가 자신의 고향에 있
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표현이다. 예수가 회당을 방문한 것은 예수의 어렸을 때부터
의 습관이다. 누가는 예수가 ‘자기 규례대로’ 곧 ‘전에 하던대로’ 회당에 참석했음을
시사함으로써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을 강조한다. 이와같은 누가의 강조는
예수께서 이처럼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철저하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있다.
회당에 들어가사 – 유대에서는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유대인 율법생활의 일부분이다. 유대인들의 회당의식은 성경에
나타난 바 없지만 유대 전통에 따르게 되면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개인
기도를 한다. 그 다음 ‘쉐마'( , 신 6:4-9;11:13-21)를 고백하고 열 여덟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소위 18기도문을 낭송한다. 그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
하게 되는데 보통 모세오경이 중심된 고정된 성구집(lectionary)의 구절을 읽는다. 성
경은 몇사람이 교대로 읽는데 아람어로 돌아가면서 읽는 경우도 있다. 성경 낭독 후
기도를하고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하게
된다(행 13:15). 한편 성경을 낭독할 사람은 선정(選定)되었는데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진해서 성경을 낭독하였는지 아니면 그전에 비공식적인 요청이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다(W.Schrage, TDNT VII, 798-841).
성경을 읽으려고 – 예수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시작되어 성경으로 끝난다. 이는 그
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예수는 구약
말씀, 특히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거부감을 나타내신 적이 없다. 다만 예수는 율
법의 자귀자체에 얽메이지 않고 그 율법 규례들 속에 함축된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
써 사람들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생명력있는 교훈을 베푸신 것이다.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찾으시니 – 저자 누가는 예수 자신이 사 61장을
선택해서 읽었는지 아니면 그 구절들이 그 날 안식일에 읽혀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
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드리거늘'(* , 에피
디도미)이란 말을 예수가 특정한 책을 요구하고 그 책을 사람들이 넘겨주었다는 뜻으
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찾으시니’에 해당하는 ‘휴렌'(* )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뜻보다는 예수의 의도적 발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자유케 하고 – 예수께서 낭독하신 사 61:1, 2의 말
씀은 예수의 두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다. 먼저
예수는 신 18:15, 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
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한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
음을 받은 자’곧 메시야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
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임을 증거한다(6:20, 21;7:18-23). 본문의 ‘임하셨으
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리세'(* )는 ‘기름붓다’, ‘기름바르다’의 뜻
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이러한 직분을 모두 수행하실 것을 시
사한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는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
복음의 선포자이며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신 것이
다. 한편 ‘가난한 자’란 순수한 은혜와 자비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소유케 하실 것을 가리
킨다(마 5:3). 그리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란 일차적으로 유대 백성이 바빌론에
서 귀환(歸還)할 것을 가리켰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께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
에서 해방시킬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육
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란 표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예수께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가리킨다.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주의 은혜의 해’는 레 25:8-55에 나
타난는 ‘희년'(year of iubilee) 곧 여호와께서 매 50년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
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뜻한다. 나아가 이 해방의 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은
혜로 죄와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사(歷史)의 시기를 가리킨다. 바로 이
와 같은 시기는 메시야가 선도할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이사야
의 이 놀라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그가 당신의 사명을 똑똑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
실을 말해준다. 한편 이사야서의 인용 부분인 본문을 누가는 결국 예수의 사역에 대한
표제적(標題的)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지자이며 메시야로서 예수는 성령의 능
력으로 사회의 소외자들, 가난한 자들 및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하실
것이다.
=====4:20
책을 덮어…주목하여 보더라 – 읽기를 마치신 예수는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
것을 ‘맡은 자’에게 건네주셨다. 여기서 ‘맡은 자'(attendant)는 헬라어로 ‘휘페레테
스'(* )인데 흔히 ‘섬기는 자’, ‘배 젓는 자’를 말한다. 이 ‘맡은 자’
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이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일을 선언하는 은나팔을 불며 주중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다. 이들이 관리하는 성경 두루마리는 보통 함이나 궤에 보관된다. 한편 낭독자가 성
경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넘겨주고 나면 낭독자는 자리에 앉게 된다. 랍비적 전통
에 따르면 앉는 것은 가르침의 시작이다. 낭독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낭독한 구절에 관
한 교훈적 강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예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로 시
작해서 결국은 적대감으로 끝이나고 만다.
=====4:21
오늘날 – ‘오늘날’을 나타내는 헬라어 ‘세메론'(* )은 다분히 긴박감
을 띤 표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에 해당하는 ‘하루’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람에
게 허용된 일정기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이 ‘오늘날’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야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이 그
메시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있는 그 날로 볼 수 있으며 둘째, 그날 예수
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동시대인들이 맞게 되는 시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셋째,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는 모든 시대 곧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를
뜻한다고 볼 수있다. 결국 오늘날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생생히 들려오는 하나
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날인 바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 완성되
는 ‘주의 은혜의 해'(19절)를 뜻하는 것이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인 것이다.
=====4:22
그를 증거하고..요셉의 이들이 아니냐 – ‘증거하고’에 해당하는 ‘에마르튀룬'(*
)은 ‘칭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speak well of, NIV). 따라서
우리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예수의 강론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의 ‘은혜로운 말’에 대한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후로도 예
수가 말씀을 증거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20:26). 청중들이 기이하게 여긴 것
은 예수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긍정적반응을 보인 청중들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부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본문은 청중들이 왜 적대
적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
의 아들로 자라 이토록 엄청난 주장을 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너무도 당돌
한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즉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 즉 목수 요
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염두에 둘 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따
라서 예수를 기이히 여기며 칭찬하던 분위기가 쑥덕공론과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돌
변하여 급격하고도 과격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4:23
의원아 너를 고치라 – 본래 이는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
는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의 속담으로서 의사인 누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이
다. 다시 말해서 이 속담은 예수께서 메시야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가버나움과 기타 등
지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시험기 깃든 요
청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회당에서 그의 강론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이 나타
낼 반응을 미리 간파하고 계신 셈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기간중 계속해서 표적을 보
이라는 요구들을 받곤 했다(11:16, 29).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
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적을 행하시지는 않는다.
=====4: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 , 아멘 레고 휘민) –
이 말은 엄숙한 단언을 내리고자 할 때 사용된것으로 누가복음에서 여섯 차례 사용되
었다(12:37;18:17등).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A )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각
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1) 하나님의 뜻에따라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
라다(왕상 1:36) (2)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가 내림을 확증하다(민 5:22) (3)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참여하다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1) ‘아멘’은
예배시의 환호로서 적극적응답을 의미하며(계 5:14) (2) 기도와 송영에서(갈 1:5;엡
3:21;딤전 1:17) 아멘은 그 기도와 송영의 내용에 대한 온전한 공감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처럼 예수가 아멘을 자기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 그 목적은 그 말씀의 진정성
과 타당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없느니라 – 이 속담 자체는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 자기 고향
에서는 오히려 냉대받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으
로 인해 타인의 탁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며 자신의 평범한 수준으로
타인을 격하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속담을 자신에게 적용하신것은 자
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만, 나아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당한 선지자들의 계보(系譜)에 속한
다는 것이다.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본 구절은 ‘…위에’를 나타내는 ‘에피'(*
)의 축소형 ‘에피’와 ‘진리’를 나타내는 ‘알레데이아’로 서두가 구성되어 ‘그러
나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근거 위에서 말하노니’라고 다시 번역할수 있다. 이것은 이
어지는 구약상의 두 가지 실례가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확증해준다. 나사렛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있고 또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오직 이방인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일이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Lenski).
=====4:26
엘리야가…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 왕상 17:8-24에 나타난 내용이다. 3년 6개월동
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을 때 온땅에 흉년이 들어 그 상황은 매우 참담했
었다. 더욱이 뚜렷한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과부들의 생활상은 매우 극심해
그들 중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는 가뭄에 고생하며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을 남겨두고 베니게의 큰 도시 시돈에있는 작은 마을 사
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그 집을 구원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엘리야가 단독
적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룬 일이라고 명백히 밝히
고 있다. 한편 사렙다의 과부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신 경우와 유사하다(막 7:26-30).
=====4:27
엘리사 때에…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 왕하 5:14의 내용이다. 엘리사의 경우도 엘
리야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문둥이가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리아의 장수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얻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예수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속사의 새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명확하게 알
려주는 것이다. 즉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서 진실되게 ‘예수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
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되었음을 의미한다(마 8:11;요 6:37). 오늘날 성도들에
게 있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당시 배타적 선
민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다. 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처음 선포된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미 4:1, 2;슥
8:20-23). 한편 나아만 장군의 치유사건은 예수께서 로마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경우와
유사하다(7:1-10).
=====4:28
회당에…분이 가득하여 – 예수의 말씀이 선민 의식에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도 같은 언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회당은 일시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
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해야 할 청중들은 냉소적이고 불신에 찬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의 태도로 돌변한다.
=====4:29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살의(殺意)를 띠게 된다. 처음엔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어느새 폭도가 되었다. 이는 예수를 향하여 호
산나 찬양을 외치던 군중들이 종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적대
무리로 돌변하는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사렛
은 갈릴리 구릉의 남쪽 경사면의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이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배척과 살해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예
수가 민족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몰아 유태 전통상 반역자를 처단하는 형벌 제도인(대
하 25:12) 벼랑에서 아래로 사람을 밀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
나 예수는 후에 십자가의 형장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무리가 자신을 마
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묵묵히 허락하셨다.
=====4:30
예수께서…지나서 가시니라 – 아직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가 아니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므
로 그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기적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저자 누가
는 단지 무리가운데로 걸어서 지나 가셨다고 전한다. ‘가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류에토'(* )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가시고자 하
시는 길로 계속 가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던간에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난관에 봉착(逢着)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를 보게 된다. 또한
선교활동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혀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후에 지속적
으로 봉착하게 될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예측도 가능케 한다. 아울
러 사역 초기에 당한 어려움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도 감지하게 된다. 한편 나사렛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예수는 가버
나움으로 행로를 잡는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는 예수가 이후 다시는 나사렛으
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4: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 나사렛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갈릴리 연안에 위
치한 도시로 예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이다(마 8:5, 14;요 6:55-59). 예
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회개치 않음으로인해 가버나움에는 장차 화가 임할
것이 예언되기도 했다(마 11:23).
내려오사 – 이 표현은 갈릴리 바다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약 200m 정도가 낮기 때문
에 높은 곳에 위치한 나사렛에서 해변의 평지에 이르는 길이 내리받이 경사였음을 보
여준다.
가르치시매(* , 엔 디다스콘) – 본 구절의 원문 표현은 완곡
한 미완료 시제로서 그 뜻이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가 된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한다(33, 38절;막 1:21). 한편 우리는
31-41절에서 예수의 사역이 하루종일 쉴틈없이 진행되었음알 수 있다. 예수는 오전에
회당에 들어가서 권세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시고 귀신을 축출하셨으며, 오후에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로부터 밤 늦
도록까지는 몰려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치유하시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4:32
권세가 있음이러라 – 마가복음 평행절(막 1:21, 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
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전한다. 랍비 정도도 못되는 사람이 독특한 권위로써 가르치
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을 누적된 전승(tradition)의 기초 위에 세
웠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
체에 독자적인 권능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예수의 말씀 전파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
하여 항상 권세와 능력을 수반하고 있다(36절).
=====4:33
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 )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
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
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
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34
아(* , 에아) – 이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는 감탄사이며 본 문
장에서는 악마적인 무서운 비명을 나타낸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수사적 용구인 본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이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등의 의미이다. 즉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귀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긴장과 불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
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이다. 즉 하나님
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권위 아래 사단의 어두운 지배와 군림이 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
에는 사단이 떨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러 가지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귀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으로 놀
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은 마 8:2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막 5:7에
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말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과도 대조를 이룬다.
=====4:35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을 금하는 예수의 행동 가운데 그 첫번째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함
구령을 거듭내리신(마 8:4;막 1:34)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갔으며 더욱이
예수의 교훈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초월한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교 지
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께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나타내었다. (2) 호의적인
무리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거의
가 육신상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 중에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
터 구원해줄 위대한 민족적 영도자(領導者) 곧 정치적 메시야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
들도 있었다. (3) 예수는 자신이 입으로 증거되기 이전에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
님의 신령한 권능으로 인해 자연히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본문의경우 예수는
굳이 더러운 귀신의 입을 빌어 당신의 신분을 중거케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이 분명하
다.
넘어뜨리고…상하지 아니한지라 – 예수의 행동은 소위 전문적인 ‘악령 추방’
(exorcism)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
들이지 않은데서 알 수 있다. 대신 예수는 단 한마디 명령하는 말씀으로써 귀신을 내
어 쫓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권세있는 것인가 알 수 있다. 하나님
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써 죽은자를 살려내기도
하시는 등(8:49-56) 인간의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4:36
다 놀라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 )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과 권세와 능력에 대한 놀
라움이다. 귀신을 축출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통한 예수의 신적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범접(犯接) 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된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귀신을
달래거나 위로하는 주문과 주술적 행위를 통하여 일시적 또는 거짓으로 악령추방이 행
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잠시 잠들게 하는 것 뿐으로 오히려 또
다른 귀신의 힘을 비는 경우도 있어 귀신들린 사람으로 하여금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귀신에게 던졌다.
그것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적인 명령이었다.
=====4:37
소문이…퍼지니라(* , 여세포류에토 에코스) –
‘퍼지니라’를 나타내는 ‘여세포류에토’는 원형 ‘여포류오마이(*
)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문’을
나타내는 ‘에코스’에서 영어의 ‘메아리’를 나타내는 ‘에코'(echo)가 파생되었다. ‘에
코스’는 해변가의 파도 소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단어이다. 즉, 예수의 소문은 자
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퍼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예수의 권능과 말씀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이 경험을 이야기했
을 것이다.
=====4:38
시몬의 장모 – 저자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본서를 기
록하다가 본 구절에서 갑자기 아무런 소개없이 베드로를 언급한다. 그것은 누가가 본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언급해도 별
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같다. 한편 본 구절과 고전 9:5은 베드
로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의 이름은 컨콜디
아(Concordia)나, 또는 펄페튜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
멘트는 그녀가 베드로보다 일찍이 순교당하였다고 전한다.
중한 열병 – 문자적 의미로는 ‘높은 열병'(high fever)이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것으로 보아 그는 열병의 정도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의학적 관습을 따
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누가가 전문 의사였음을 차증해준다.
붙들린지라(* , 쉬네코메네) – 이 동사는 헬라 의학 저술에서
흔히 사용이되는 동사로 의학 전문 용어이며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는 뜻인 ‘쉬
네코'(* )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 열병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마
시몬의 장모는 만성병(慢性病)에 시달린 듯하며 당시에는 매우 중태였던 것 같다. 베
드로의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또한 예수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 원문상으로는 예수께서 환자의 머리 곁에 서서 허리를 굽
혀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주술적 행위나 무당의 무속적 행위에
의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에 의거한 정확한 진단과 완전하고
도 즉각적인 치료를 하신다.
열병을 꾸짖으신대 – 본 구절을 두고서 혹자는 이 열병의 배후에는 악한 귀신이 자
리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 하늘과 홍해를 꾸짖으셨다고 해서(욥 26:11;시 106:9) 하늘과 홍해 뒤에 귀신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열병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열병을 내모는 행위 자체를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기 위해 열병을 의인화시키거나 아니
면 누가가 예수의 말에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만성 질병이었던 열병은 사람을 탈진(脫盡)시키고
매우 심약하게 만드나 환자는 치료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든다. 이는 예수의 치유 권능
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병상에서 일어난 환
자가 예수 일행을 위해 수종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의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4:40
해질 적에 – 해가 지기를 기다려 환자들이 예수께 몰려든 것은 안식일 때문이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노동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환자를 운반하는 일이나 치료 행위
를 행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안식일에 발이 묶여 환자들은 예수께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녘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다(창 2
:2, 3;출 34:21).
손을 얹으사 – 원래 안수란 첫째, 제사드리는자가 희생당할 동물에게 손을 얹음으
로써 자신의 죄악을 전가시키거나(출 20:15, 19) 둘째, 신성모독자를 돌로 칠 때 신성
모독의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더러워진 인격, 죄악등을 전가시키거나
(레 24:14) 셋째, 병을 고치는 역사를 행할 때 예수님 혹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그 병자들에게 전가시키거나(막 6:5;행28:8) 넷째, 사도들이 사도적인 권위로써 성령
이 임하지 않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한몸이 되
었음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행 8:18, 19) 등의 이유에서 사용되었다. 결국 안수란 공
통적으로 무엇인가를 전가시킨다는 의미가있다. 이중 본문에서는 세번째의 의미로 사
용된바 이러한 예는 예수 뿐만 아니라 여러 사도들의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께서 안수하심으로 병을 고치신 행위는 어떤 마술적인 요법이 아니라 단
지 그분의 능력이 그 환자에게 전가됨을 외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본 구절에서 예수께서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 것은 예수가 치유능력의 근원이라
는 것과 그가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하신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4:41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더러운 귀신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신앙고백적 차원이 아니며 다만 예수 앞에서 그들의 패배와 예
수의 권능을 인정하는 말로 이해된다. 한편 간악한 귀신들조차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
었다는 사실과 무리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서로 역설적(逆說的)인 대조를 이
룬다.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사람들, 심지어 불신자들이나 귀신들까지도 예수의 정
체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서들이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폭넓은 증거 구실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분명히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4:42
한적한 곳에 가시니 – 평행 구절 막 1:35에서는 예수께서 아직 동이 트기 전에 기
도하셨다고 전한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모습은 단순히 쉽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장면이지만 여기에 예수의 사역의 비결이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
습을 눈여겨 보지않았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작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2:39-46). 예수는 언제나 기도를
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고 하나님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4:43
하나님의 나라 – 이는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주제이다(8:1;9:2). 예수
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죄인들을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다(골 1:1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
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왕이신 예수께 대해서도
오해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예수의 사역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다(마 12:28).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
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라.
전하여야 하리니 – ‘…해야 한다'(* , 데이)는 말은 예수 사역의 필연성과
긴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누차 사용되었다(2:49;13:33;24:7, 26, 44).
=====4:44
갈릴리(* , 테스유다이아스) – 본 구절은 학자들 간에 논
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서 각각 ‘갈릴리’나 또는 ‘유대’로 표기되고 있
기 때문인데 특히 ‘유대’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이 계속해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NIV 난외(欄外)에서는 ‘유대인들
의 땅'(the land of the Jews)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전달해 주려는 것 같다. 즉 ‘땅'(land)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고향인 팔레스틴 전부
를 의미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다. 누가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유대'(Judea)
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광의(廣義)에서 ‘유대’라는 말을 쓰면
그 속에서 갈릴리가 자연스럽게 포함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셈이다. 어쨌든
예수의 이 첫번째 전도 여행 기간은 대략 4, 5개월 정도로 추측된다. 또한 당시 갈릴
리 지방에는 1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 200개 정도나 있었고 전체
인구수는 3백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헬라어 누가복음 4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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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스 데 플레레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휘페스트렢센 아포 투 요르다누 카이 헤게토 엔 토 프뉴마티 엔 테 에레모
개역개정,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새번역,1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해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영어NIV,1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 the desert,
영어NASB,1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around by the Spirit in the wilderness
영어MSG,1 Now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left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wild.
영어NRSV,1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 the wilder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 ιησους δε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πληρης υπεστρεψεν απο του ιορδανου και ηγετο εν τω πνευματι εις την ερημον
라틴어Vulgate,1 Iesus autem plenus Spiritu Sancto regressus est ab Iordane et agebatur in Spiritu in desertum
히브리어Modern,1 וישוע שב מן הירדן מלא רוח הקדש וינהגהו הרוח המדברה׃ 개역개정,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새번역,1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해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영어NIV,1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 the desert,
영어NASB,1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around by the Spirit in the wilderness
영어MSG,1 Now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left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wild.
영어NRSV,1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 the wilder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 ιησους δε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πληρης υπεστρεψεν απο του ιορδανου και ηγετο εν τω πνευματι εις την ερημον
라틴어Vulgate,1 Iesus autem plenus Spiritu Sancto regressus est ab Iordane et agebatur in Spiritu in desertum
히브리어Modern,1 וישוע שב מן הירדן מלא רוח הקדש וינהגהו הרוח המדברה׃
성 경: [눅4: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예수께서…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이 구절은 3:22에 연결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 구절은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준다.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에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wander)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모세가 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40일간 있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신 9:9).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호 11:1)로 비유한다면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또는 단일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인도했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셨으나 여기서는 사단이 그의 아들을 시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았을 때 실패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시험 가운데서 거의 매번 시험에 져 엄청난 죄악들을 범했지만 예수는 광야에서의 몇차례의 시험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내내 많은 시험들을 당하셨지만 그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 똑같은 유년기, 똑같은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바로 이런 흠없고 순전(純全)한 어린 양 같은 예수께서 온갖 시험을 이기시면서 우리 인류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한편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구절에서도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 3:22에서 성령이 예수께 강림하시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식적(公式的)으로 모습을 드러내 메시야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세례식 이후에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 역시 이 가운데 성령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에게 있어 행동 동기였고, 그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폭발적 복음운동의 주요 동인(動因)이었다(행 2:4;10:44;13:4).
헤메라스 테쎄라콘타 페이라조메노스 휘포 투 디아볼루 카이 우크 에파겐 우덴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에케이나이스 카이 쉰텔레스데이손 아우톤 에페이나센
개역개정,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새번역,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우리말성경,2 그곳에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간이 끝나자 그분은 배가 고프셨습니다.
가톨릭성경,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영어NIV,2 where for forty days he was tempted by the devil. He ate nothing during those days, and at the end of them he was hungry.
영어NASB,2 for forty days, being tempted by the devil. And He ate nothing during those days, and when they had ended, He became hungry.
영어MSG,2 For forty wilderness days and nights he was tested by the Devil. He ate nothing during those days, and when the time was up he was hungry.
영어NRSV,2 where for forty days he was tempted by the devil. He ate nothing at all during those days, and when they were over, he was famished.
헬라어신약Stephanos,2 ημερας τεσσαρακοντα πειραζομενος υπο του διαβολου και ουκ εφαγεν ουδεν εν ταις ημεραις εκειναις και συντελεσθεισων αυτων υστερον επεινασεν
라틴어Vulgate,2 diebus quadraginta et temptabatur a diabolo et nihil manducavit in diebus illis et consummatis illis esuriit
히브리어Modern,2 וינסהו השטן ארבעים יום ולא אכל מאומה בימים ההם ואחרי אשר תמו וירעב׃
성 경: [눅4:2]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마귀에게(*, 디아볼루) – ‘마귀’ 또는 ‘사단’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비방자’, ‘고자질장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70인역(LXX)은 비난자나 적이나 유혹자로서 마귀를 지칭하는데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대상 21:1;슥 3:1). 한편 이와 유사한 내용의 단어로 ‘사타나스'(*, ‘대적자’ *, ‘적’)를 들수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사탄(*)에서 유래하였다(삼상29:4).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은 대개 ‘사타나스’를 사용하며 평행구절인 막 1:13도 ‘사타나스’를 사용하고 있다. 사단이 세상의 왕이요 신이다(6절;고후 4:4). 그러한 존재로서 사단은 하나님의 것인 영광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사단의 통치 아래 있게 되며(마 6:13;막 3:27;요 6:70;8:44;행 13:10;26:18;골 1:13) 그들이 하는 일은 ‘디아볼로스’의 일이다(요일 3:8). 결국 사단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것이며 사단의 궁극적 무기는 사망이다(히 2:14).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마귀의 왕국을 멸망시키게 되고 결국 사단은 하늘로부터 쫓겨나게되며(10:18;요 12:31;계 12:9) 그 결과 사단은 더이상 비방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사단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共同體)를 상대로 계속된다(고전 7:5;엡 4:27).
시험 –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은 이 세 가지의 경우를 구분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고 모두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사단은 사람들을 ‘시험'(temptation)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시험을 하시지도 않으며 그 자신이 그런 방법에 의해서 시험을 받으시지도 않는다(약 1:13). 게다가 모든 시험(temptation)이 직접 사단으로부터 온다고 말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시험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약1:14, 15). (2)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앙과 어긋나는 그릇된 요구들을 하므로 하나님을 시험(test)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 6:16을 인용한 의도도 아마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12절). (3)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다(신 8:2).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것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이 포함되어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율법의 준행(遵行) 여부’를 보시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다(출 16:4). 한편 사단의 시험에 마주쳤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고 하신 말씀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예수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주리신지라 – 본 구절이 보도하는 바는 예수께서 금식을 하는 40일 동안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거나 또는 배고픔에 대해 전혀 자유했었다(Shurmann)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계속 주리신 가운데 극도의 배고픈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마귀가 유혹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마귀는 예수의 배고픔이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그 배고픔을 더욱 자극하여 먹는 것으로 예수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이다.
에이펜 데 아우토 호 디아볼로스 에이 휘오스 에이 투 데우 에이페 토 리도 투토 히나 게네타이 아르토스
개역개정,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새번역,3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우리말성경,3 마귀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시오.”
가톨릭성경,3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3 The devil said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tell this stone to become bread.”
영어NASB,3 And the devil said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tell this stone to become bread.”
영어MSG,3 The Devil, playing on his hunger, gave the first test: “Since you’re God’s Son, command this stone to turn into a loaf of bread.”
영어NRSV,3 The devil said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command this stone to become a loaf of bread.”
헬라어신약Stephanos,3 και ειπεν αυτω ο διαβολος ει υιος ει του θεου ειπε τω λιθω τουτω ινα γενηται αρτος
라틴어Vulgate,3 dixit autem illi diabolus si Filius Dei es dic lapidi huic ut panis fiat
히브리어Modern,3 ויאמר אליו השטן אם בן האלהים אתה אמר אל האבן הזאת ותהי ללחם׃
성 경: [눅4:3]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마귀가…떡덩이가 되게 하라 – 여기서 사단이 떡덩이를 언급한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을 연상시킨다(출 16:31).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던 것과 같은 이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했었다(요 6:30). 결국 사단이 예수에게 이와 같은 시험을 했던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촉구의 목적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객관적 증거를 보려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기는테 있었다. 즉, 이 사단의 간악한 시험 배후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사이를 와해(瓦解)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멸망시키고 예수가 수행할 메시야적 사명을 방해하려는 사악하고도 교활한 간계가 숨어있는 것이다. 결국 애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겨내는데, 사단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그 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해 준다(I.H. Marshall).
카이 아페크리데 프로스 아우톤 호 예수스 게그랖타이 호티 우크 엪 아르토 모노 제세타이 호 안드로포스
개역개정,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새번역,4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신 8:3
우리말성경,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기록됐다.” 신8:3
가톨릭성경,4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영어NIV,4 Jesus answered, “It is written: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영어NASB,4 And Jesus answered him, “It is written, ‘MAN SHALL NOT LIVE ON BREAD ALONE.'”
영어MSG,4 Jesus answered by quoting Deuteronomy: “It takes more than bread to really live.”
영어NRSV,4 Jesus answered him, ‘It is written, ‘One does not live by bread alone.'”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απεκριθη ιησους προς αυτον λεγων γεγραπται οτι ουκ επ αρτω μονω ζησεται ο ανθρωπος αλλ επι παντι ρηματι θεου
라틴어Vulgate,4 et respondit ad illum Iesus scriptum est quia non in pane solo vivet homo sed in omni verbo Dei
히브리어Modern,4 ויען אתו ישוע הן כתוב כי לא על הלחם לבדו יחיה האדם כי על כל מוצא פי יהוה׃
성 경: [눅4:4]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예수께서…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신 8:3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를 40년 동안 유랑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것이다(신 8: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그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준수함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신 8:3).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동안에 예수는 줄곧 신실했다. 예수께서 보여준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했을때 그들이 행동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답변한 내용은 예수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철두철미 순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가 시험받을 때 모범이 되는 것이다(히 4: 14-16;5:80. 한편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하심을 갖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는 떡부스러기 하나를 취하시는 것조차도 인류 구속을 위해 거부하시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셨다(22:19;요 6:48-51). 따라서 우리는 시험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 수 있다.
카이 아나가곤 아우톤 에데잌센 아우토 파사스 타스 바실레이아스 테스 오이쿠메네스 엔 스티그메 크로누
개역개정,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새번역,5 그랬더니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말성경,5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이끌고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 모든 나라를 보여 주었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영어NIV,5 The devil led him up to a high place and showed him in an instant all the kingdoms of the world.
영어NASB,5 And he led Him up and showed Him all the kingdoms of the world in a moment of time.
영어MSG,5 For the second test he led him up and spread out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on display at once.
영어NRSV,5 Then the devil led him up and showed him in an instant all the kingdoms of the world.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αναγαγων αυτον ο διαβολος εις ορος υψηλον εδειξεν αυτω πασας τας βασιλειας της οικουμενης εν στιγμη χρονου
라틴어Vulgate,5 et duxit illum diabolus et ostendit illi omnia regna orbis terrae in momento temporis
히브리어Modern,5 ויעלהו השטן על הר גבה ויראהו ברגע אחד את כל ממלכות תבל׃
성 경: [눅4:5]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마귀가…천하 민국을 보이며 – 이 두번째 시험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세상 권세에 대한 정치적 시험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시험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여기서 누가는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라고 기록해 어디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평행구절인 마 4:8은 ‘산’이라고 기록하여,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신 34:1-3). 그러나 혹자(I. H. Marshall)는 ‘산’이라는 표현이 상징적(象徵的)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나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신 예수께서 모든 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일이 심리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수께서는 실지로 시험을 받기 위해서 모든 세상을 구석구석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간 곳이 산이든 아니든 천하 만국을 보기위해서 설정된 장소였다는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카이 에이펜 아우토 호 디아볼로스 소이 도소 텐 엨수시안 타우텐 하파산 카이 텐 돜산 아우톤 호티 에모이 파라데도타이 카이 호 에안 델로 디도미 아우텐
개역개정,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새번역,6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우리말성경,6 그러고는 마귀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내가 저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이것은 내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오.
가톨릭성경,6 그분께 말하였다. “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영어NIV,6 And he said to him, “I will give you all their authority and splendor, for it has been given to me, and I can give it to anyone I want to.
영어NASB,6 And the devil said to Him, “I will give You all this domain and its glory; for it has been handed over to me, and I give it to whomever I wish.
영어MSG,6 Then the Devil said, “They’re yours in all their splendor to serve your pleasure. I’m in charge of them all and can turn them over to whomever I wish.
영어NRSV,6 And the devil said to him, “To you I will give their glory and all this authority; for it has been given over to me, and I give it to anyone I please.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ι ειπεν αυτω ο διαβολος σοι δωσω την εξουσιαν ταυτην απασαν και την δοξαν αυτων οτι εμοι παραδεδοται και ω εαν θελω διδωμι αυτην
라틴어Vulgate,6 et ait ei tibi dabo potestatem hanc universam et gloriam illorum quia mihi tradita sunt et cui volo do illa
히브리어Modern,6 ויאמר אליו השטן לך אתן את כל הממשלה הזאת ואת כבודן כי נמסרה בידי ונתתיה לאשר אחפץ׃
성 경: [눅4: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이 모든 권세와…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 소유권, 양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그러한 권한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조만간 모든 ‘권세와 영광’을 되찾게 될 것이며, 또한 온전한 공의와 사랑으로써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는 예수께 세상 전체를 소유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귀의 주장에 대해서 예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며 그렇다고 마귀의 주장을 인정하시지도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궁극적 지배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단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단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행위인 우상 숭배를 조건부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시험은 성도들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크고 작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이냐 신앙적 진리냐 혹은 사단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적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만국의 권세를 초개처럼 버리시는 예수의 단호한 결단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마 6:24).
쉬 운 에안 프로스퀴네세스 에노피온 에무 에스타이 수 파사
개역개정,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새번역,7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우리말성경,7 그러니 당신이 내게 경배하면 모두 당신 것이 될 것이오.”
가톨릭성경,7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영어NIV,7 So if you worship me, it will all be yours.”
영어NASB,7 “Therefore if You worship before me, it shall all be Yours.”
영어MSG,7 Worship me and they’re yours, the whole works.”
영어NRSV,7 If you, then, will worship me, it will all be yours.”
헬라어신약Stephanos,7 συ ουν εαν προσκυνησης ενωπιον μου εσται σου παντα
라틴어Vulgate,7 tu ergo si adoraveris coram me erunt tua omnia
히브리어Modern,7 ועתה אם תשתחוה לפני הכל יהיה לך׃
성 경: [눅4: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 마귀가 요구하는 절은 단순한 인사형식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들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들의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므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2) 성경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 다음에야 ‘영광에 들어간다'(24:26)고 가르친다. (3) 마귀는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 시험은 예수가 왕국을 즉시에 받으므로 십자가를 피하게 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挫折)시키려는 것이었다.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예수스 에이펜 아우토 게그랖타이 퀴리온 톤 데온 수 프로스퀴네세이스 카이 아우토 모노 라트류세이스
개역개정,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새번역,8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 ㉡신 6:13
우리말성경,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고 기록됐다.” 신6:13
가톨릭성경,8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영어NIV,8 Jesus answered, “It is written: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serve him only.'”
영어NASB,8 Jesus answered him, “It is written, ‘YOU SHALL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SERVE HIM ONLY.'”
영어MSG,8 Jesus refused, again backing his refusal with Deuteronomy: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only the Lord your God. Serve him with absolute single-heartedness.”
영어NRSV,8 Jesus answered him, ‘It is written,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serve only him.'”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αυτω ειπεν ο ιησους υπαγε οπισω μου σατανα γεγραπται γαρ προσκυνησεις κυριον τον θεον σου και αυτω μονω λατρευσεις
라틴어Vulgate,8 et respondens Iesus dixit illi scriptum est Dominum Deum tuum adorabis et illi soli servies
히브리어Modern,8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ו סור ממני השטן כי כתוב ליהוה אלהיך תשתחוה ואתו תעבד׃
성 경: [눅4: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주 너의 하나님…그를 섬기라 –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제시해 준다. 예수는 사단을 대적함에 있어 신 6:13을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한 마지막 아담(고전 15:45), 곧 완전한 인간으로서 마귀를 대적했다. 즉 예수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들은 마귀를 대적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려는 그리스도와(요 5:30;6:38) 항상 그 뜻을 대적케 하려는 사단의(창 3:1)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에가겐 데 아우톤 에이스 예루살렘 카이 에스테센 에피 토 프테뤼기온 투 히에루 카이 에이펜 아우토 에이 휘오스 에이 투 데우 발레 세아우톤 엔튜덴 카토
개역개정,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새번역,9 그래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우리말성경,9 마귀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더니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
가톨릭성경,9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영어NIV,9 The devil led him to Jerusalem and had him stand on the highest point of the temple. “If you are the Son of God,” he said, “throw yourself down from here.
영어NASB,9 And he led Him to Jerusalem and had Him stand on the pinnacle of the temple, and said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throw Yourself down from here;
영어MSG,9 For the third test the Devil took him to Jerusalem and put him on top of the Temple. He said, “If you are God’s Son, jump.
영어NRSV,9 Then the devil took him to Jerusalem, and placed him on the pinnacle of the temple, saying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throw yourself down from here,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ηγαγεν αυτον εις ιερουσαλημ και εστησεν αυτον επι το πτερυγιον του ιερου και ειπεν αυτω ει ο υιος ει του θεου βαλε σεαυτον εντευθεν κατω
라틴어Vulgate,9 et duxit illum in Hierusalem et statuit eum supra pinnam templi et dixit illi si Filius Dei es mitte te hinc deorsum
히브리어Modern,9 ויביאהו ירושלים ויעמידהו על פנת בית המקדש ויאמר אליו אם בן האלהים אתה התנפל מזה מטה׃
성 경: [눅4: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뛰어내리라 – 마귀는 세번째 시험을 위해서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마태는 이 시험을 두번째로 제시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마 4:5-7). 이것은 누가가 예루살렘 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험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의 자기 과시욕을 부추켜 그러한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꼭대기’라는 말의 헬라어 ‘프테뤼기온'(*)은 ‘날개’라는 뜻의 ‘프테류스'(*)에서 온말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세푸스(Jos, Antiq. 15, P. 411)에 의하면 이는 성전 바깥뜰 남쪽에 있는 주광을 뜻한다고 한다. (2) 예레미야스(J. 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성전문 위로 가로지르는 인방(lintel)이라고 한다. (3) 게르하드슨(B. Gerhardson, Testing Gods son, P. 54)에 따르면 시 91:4(LXX은 제 90편)의 ‘프테뤼가스'(날개들)와 본문 9절의 ‘프테뤼기온'(꼭대기) 사이에는 일종의 언어 유희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종의 성전을 보호해 주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이중 어떠한 견해를 취해본 구절을 이해하든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끌고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랍비 문헌에 보면 메시야가 성전의 꼭대기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비록 랍비문헌에는 뛰어내린다는 언급은 없지만 마귀는 그러한 배경에서 이 시험을 예수께 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게그랖타이 가르 호티 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 엔텔레이타이 페리 수 투 디아퓔랔사이 세
개역개정,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새번역,10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하였고 / ㉢시 91:11; 12
우리말성경,10 성경에 ‘그가 너를 위해 천사들에게 명령해 너를 지킬 것이다.
가톨릭성경,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영어NIV,10 For it is written: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to guard you carefully;
영어NASB,10 for it is written,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TO GUARD YOU,’
영어MSG,10 It’s written, isn’t it, that ‘he has placed you in the care of angels to protect you;
영어NRSV,10 for it is written,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to protect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0 γεγραπται γαρ οτι τοις αγγελοις αυτου εντελειται περι σου του διαφυλαξαι σε
라틴어Vulgate,10 scriptum est enim quod angelis suis mandabit de te ut conservent te
히브리어Modern,10 כי כתוב כי מלאכיו יצוה לך לשמרך׃
성 경: [눅4:1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하나님이…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한다(시 91:11, 12).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마귀는 시 91:11, 12을 인용하면서 고의적으로 ‘네 모든 길에’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게다가 여기에 인용된 시편은 택한 백성을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섭리를 방해하는 일이나 충동적으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엄히 징계하신다고 가르쳤지만(신 6:16;18:20;사 45:9) 마귀는 이런 진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한 신앙을 변색시키기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킨다(마 22:29;고후 2:17). 사실 세계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허다한 이단들은 성경을 그들의 경전으로 내세우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이 성경 말씀을 자신의 거짓된 사상을 세우고 은폐시키려는 목적에서 아전 인수(我田 引水)격으로 짜맞춘다는데 있는 것이다.
카이 호티 에피 케이론 아루신 세 메포테 프로스콮세스 프로스 리돈 톤 포다 수
개역개정,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새번역,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우리말성경,11 그들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라고 기록돼 있소.” 시91:11-12
가톨릭성경,11 ‘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영어NIV,11 they will lift you up in their hands, so that you will not strike your foot against a stone.'”
영어NASB,11 and, ‘ON their HANDS THEY WILL BEAR YOU UP, SO THAT YOU WILL NOT STRIKE YOUR FOOT AGAINST A STONE.'”
영어MSG,11 they will catch you; you won’t so much as stub your toe on a stone’?”
영어NRSV,11 and ‘On their hands they will bear you up, so that you will not dash your foot against a ston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οτι επι χειρων αρουσιν σε μηποτε προσκοψης προς λιθον τον ποδα σου
라틴어Vulgate,11 et quia in manibus tollent te ne forte offendas ad lapidem pedem tuum
히브리어Modern,11 וכי על כפים ישאונך פן תגף באבן רגלך׃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아우토 호 예수스 호티 에이레타이 우크 에크페이라세이스 퀴리온 톤 데온 수
개역개정,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새번역,12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 ㉣신 6:16
우리말성경,12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기록됐다.” 신6:16
가톨릭성경,1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 ‘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영어NIV,12 Jesus answered, “It says: ‘Do not put the Lord your God to the test.'”
영어NASB,12 And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It is said, ‘YOU SHALL NOT PUT THE LORD YOUR GOD TO THE TEST.'”
영어MSG,12 “Yes,” said Jesus, “and it’s also written, ‘Don’t you dare tempt the Lord your God.'”
영어NRSV,12 Jesus answered him, ‘It is said, ‘Do not put the Lord your God to the test.'”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ειπεν αυτω ο ιησους οτι ειρηται ουκ εκπειρασεις κυριον τον θεον σου
라틴어Vulgate,12 et respondens Iesus ait illi dictum est non temptabis Dominum Deum tuum
히브리어Modern,12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ו נאמר לא תנסה את יהוה אלהיך׃
성 경: [눅4:1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 예수의 대답은 다시 성경의 인용으로 주어진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맛사에서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출17:1-7)를 배경으로 하는 신 6:16을 인용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마귀의 시험에 응한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격분(激忿)케 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사단의 시험에 대한 결론적 말씀이라 할 수 있는 본절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의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
카이 쉰텔레사스 판타 페이라스몬 호 디아볼로스 아페스테 앞 아우투 아크리 카이루
개역개정,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새번역,13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우리말성경,13 마귀는 이 모든 시험을 마치고 때가 될 때까지 예수에게서 떠나갔습니다.
가톨릭성경,13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영어NIV,13 When the devil had finished all this tempting,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영어NASB,13 When the devil had finished every temptation,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영어MSG,13 That completed the testing. The Devil retreated temporarily, lying in wait for another opportunity.
영어NRSV,13 When the devil had finished every test, he departed from him until an opportune time.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συντελεσας παντα πειρασμον ο διαβολος απεστη απ αυτου αχρι καιρου
라틴어Vulgate,13 et consummata omni temptatione diabolus recessit ab illo usque ad tempus
히브리어Modern,13 וככלות השטן כל מסה וירף ממנו עד עת׃
성 경: [눅4:1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마귀가…떠나니라 – 사단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NIV)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즉 22:3에서 마귀가 다시 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은 본서를 살펴보면 사단이 예수의 전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더한 듯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곧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때문이다. 예수께 있어서의 사단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 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마 4:11;막 1:13). 이것은 각 제자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카이 휘페스트렢센 호 예수스 엔 테 뒤나메이 투 프뉴마토스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카이 페메 엨셀덴 칻 홀레스 테스 페리코루 페리 아우투
개역개정,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새번역,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우리말성경,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시자 그분에 대한 소문이 전역에 두루 퍼졌습니다.
가톨릭성경,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영어NIV,14 Jesus returned to Galilee in the power of the Spirit, and news about him spread through the whole countryside.
영어NASB,14 And Jesus returned to Galilee in the power of the Spirit, and news about Him spread through all the surrounding district.
영어MSG,14 Jesus returned to Galilee powerful in the Spirit. News that he was back spread through the countryside.
영어NRSV,14 Then Jesus, filled with the power of the Spirit, returned to Galilee, and a report about him spread through all the surrounding country.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υπεστρεψεν ο ιησους εν τη δυναμει του πνευματος εις την γαλιλαιαν και φημη εξηλθεν καθ ολης της περιχωρου περ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4 et regressus est Iesus in virtute Spiritus in Galilaeam et fama exiit per universam regionem de illo
히브리어Modern,14 וישב ישוע בגבורת הרוח אל הגליל ויצא שמעו בכל הככר׃
성 경: [눅4:1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도의 시작]
성령의 권능으로…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 저자 누가는 철저하리 만큼 성령에 대해서 강조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한 사실(3:21, 22)과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일(1절) 등에서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부각(浮刻) 시킨다. 그런데 이 곳에서도 누가는 재차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 새로운 사역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되었음을 재삼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으로 본서(10:21)와 사도행전(행 1:8;10:38) 등에서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1장에서 4장까지 오면서 예수의 잉태에서 사역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개입했던 성령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 예수의 능력이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나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몇몇 반응들(22, 28, 32, 36, 42절) 중에서 우선 예수에 대한 소식이 퍼져 나갔다는 것을 언급한다. 한편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신 이유를 그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들으셨기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마 4:12;막 1:14).
카이 아우토스 에디다스켄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아우톤 돜사조메노스 휘포 판톤
개역개정,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새번역,15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우리말성경,15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가톨릭성경,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영어NIV,15 He taught in their synagogues, and everyone praised him.
영어NASB,15 And He began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was praised by all.
영어MSG,15 He taught in their meeting places to everyone’s acclaim and pleasure.
영어NRSV,15 He began to teach in their synagogues and was praised by everyone.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αυτος εδιδασκεν εν ταις συναγωγαις αυτων δοξαζομενος υπο παντων
라틴어Vulgate,15 et ipse docebat in synagogis eorum et magnificabatur ab omnibus
히브리어Modern,15 והוא היה מלמד בבתי כנסיותיהם ויהללהו כלם׃
성 경: [눅4:15]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도의 시작]
가르치시매…칭송을 받으시더라 –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예수가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쳤고 그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칭송했다고만 전할 뿐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칭송을 받은 이유는 그의 가르침에 생동력, 권위, 논리 정연함, 실제적 적용, 흥미, 진리 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31, 32절;마 7:28, 29).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의 칭송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열심으로 찾아왔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의 선입견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적대적 행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장에도 기록되어 있다(28, 29절). 한편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골격을 이루며(마 4:23;9:35;11:1), 그 가르침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자신에 관한 계시(마 6:32, 33;요 14:6) 및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17:20, 21;마 21:31) 등으로 요약된다. 복음서에는 병자 치유등을 위시한 예수의 놀라운 이적들이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적들도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메시야의 여러 교훈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카이 엘덴 에이스 나자라 후 엔 테드람메노스 카이 에이셀덴 카타 토 에이오도스 아우토 엔 테 헤메라 톤 삽바톤 에이스 텐 쉬나고겐 카이 아네스테 아나그노나이
개역개정,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새번역,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우리말성경,16 예수께서 자신이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영어NIV,16 He went to Nazareth, where he had been brought up, and on the Sabbath day he went into the synagogue, as was his custom. And he stood up to read.
영어NASB,16 And He came to Nazareth, where He had been brought up; and as was His custom, He entered the synagogue on the Sabbath, and stood up to read.
영어MSG,16 He came to Nazareth where he had been reared. As he always did on the Sabbath, he went to the meeting place. When he stood up to read,
영어NRSV,16 When he came to Nazareth, where he had been brought up, he went to the synagogue on the sabbath day, as was his custom. He stood up to read,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ηλθεν εις την ναζαρετ ου ην τεθραμμενος και εισηλθεν κατα το ειωθος αυτω εν τη ημερα των σαββατων εις την συναγωγην και ανεστη αναγνωναι
라틴어Vulgate,16 et venit Nazareth ubi erat nutritus et intravit secundum consuetudinem suam die sabbati in synagogam et surrexit legere
히브리어Modern,16 ויבא אל נצרת אשר גדל שם וילך כמשפטו ביום השבת אל בית הכנסת ויקם לקרא בתורה׃
성 경: [눅4:1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예수께서…자기 규례(規例)대로 – ‘그가 자라나신 곳’은 예수가 자신의 고향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표현이다. 예수가 회당을 방문한 것은 예수의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이다. 누가는 예수가 ‘자기 규례대로’ 곧 ‘전에 하던대로’ 회당에 참석했음을 시사함으로써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을 강조한다. 이와같은 누가의 강조는 예수께서 이처럼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철저하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있다.
회당에 들어가사 – 유대에서는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유대인 율법생활의 일부분이다. 유대인들의 회당의식은 성경에 나타난 바 없지만 유대 전통에 따르게 되면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개인 기도를 한다. 그 다음 ‘쉐마'(*, 신 6:4-9;11:13-21)를 고백하고 열 여덟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소위 18기도문을 낭송한다. 그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하게 되는데 보통 모세오경이 중심된 고정된 성구집(lectionary)의 구절을 읽는다. 성경은 몇사람이 교대로 읽는데 아람어로 돌아가면서 읽는 경우도 있다. 성경 낭독 후 기도를하고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하게 된다(행 13:15). 한편 성경을 낭독할 사람은 선정(選定)되었는데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진해서 성경을 낭독하였는지 아니면 그전에 비공식적인 요청이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다(W.Schrage, TDNT VII, 798-841).
성경을 읽으려고 – 예수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시작되어 성경으로 끝난다. 이는 그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예수는 구약 말씀, 특히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거부감을 나타내신 적이 없다. 다만 예수는 율법의 자귀 자체에 얽메이지 않고 그 율법 규례들 속에 함축된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생명력있는 교훈을 베푸신 것이다.
카이 에페도데 아우토 비블리온 투 프로페투 에사이우 카이 아낲튘사스 토 비블리온 휴렌 톤 토폰 후 엔 게그람메논
개역개정,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새번역,17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우리말성경,17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으시고 두루마리를 펼쳐 이렇게 기록된 곳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가톨릭성경,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영어NIV,17 The scroll of the prophet Isaiah was handed to him. Unrolling it, he found the place where it is written:
영어NASB,17 And the book of the prophet Isaiah was handed to Him. And He opened the book and found the place where it was written,
영어MSG,17 he was handed the scroll of the prophet Isaiah. Unrolling the scroll, he found the place where it was written,
영어NRSV,17 and the scroll of the prophet Isaiah was given to him. He unrolled the scroll and found the place where it was written: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επεδοθη αυτω βιβλιον ησαιου του προφητου και αναπτυξας το βιβλιον ευρεν τον τοπον ου ην γεγραμμενον
라틴어Vulgate,17 et traditus est illi liber prophetae Esaiae et ut revolvit librum invenit locum ubi scriptum erat
히브리어Modern,17 ויתן לו ספר ישעיה הנביא ויפתח את הספר וימצא את המקום אשר היה כתוב בו׃
성 경: [눅4:1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찾으시니 – 저자 누가는 예수 자신이 사 61장을 선택해서 읽었는지 아니면 그 구절들이 그 날 안식일에 읽혀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드리거늘'(*, 에피디도미)이란 말을 예수가 특정한 책을 요구하고 그 책을 사람들이 넘겨주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찾으시니’에 해당하는 ‘휴렌'(*)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뜻보다는 예수의 의도적 발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프뉴마 퀴리우 엪 에메 후 에이네켄 에크리센 메 유앙겔리사스다이 프토코이스 아페스탈켄 메 케륔사이 아이크말로토이스 아페신 카이 튀플로이스 아나블렢신 아포스테일라이 테드라우스메누스 엔 아페세이
개역개정,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새번역,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 ㉤사 61:1; 2
우리말성경,18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못 보는 사람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나를 보내셨다.
가톨릭성경,18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영어NIV,18 “The Spirit of the Lord is 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freedom for the prisoners and recovery of sight for the blind, to release the oppressed,
영어NASB,18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ANOINTED ME TO PREACH THE GOSPEL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RELEASE TO THE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SET FREE THOSE WHO ARE OPPRESSED,
영어MSG,18 God’s Spirit is on me; he’s chosen me to preach the Message of good news to the poor, Sent me to announce pardon to prisoner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set the burdened and battered free,
영어NRSV,18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release to the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헬라어신약Stephanos,18 πνευμα κυριου επ εμε ου ενεκεν εχρισεν με ευαγγελιζεσθαι πτωχοις απεσταλκεν με ιασασθαι τους συντετριμμενους την καρδιαν κηρυξαι αιχμαλωτοις αφεσιν και τυφλοις αναβλεψιν αποστειλαι τεθραυσμενους εν αφεσει
라틴어Vulgate,18 Spiritus Domini super me propter quod unxit me evangelizare pauperibus misit me
히브리어Modern,18 רוח אדני עלי יען משח אתי לבשר ענוים׃
성 경: [눅4:1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자유케 하고 – 예수께서 낭독하신 사 61:1, 2의 말씀은 예수의 두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다. 먼저 예수는 신 18:15, 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한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곧 메시야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임을 증거한다(6:20, 21;7:18-23). 본문의 ‘임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리세'(*)는 ‘기름붓다’, ‘기름바르다’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이러한 직분을 모두 수행하실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는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 복음의 선포자이며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신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 순수한 은혜와 자비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소유케 하실 것을 가리킨다(마 5:3). 그리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란 일차적으로 유대 백성이 바빌론에서 귀환(歸還)할 것을 가리켰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께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란 표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예수께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가리킨다.
케륔사이 에니아우톤 퀴리우 뎈톤
개역개정,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새번역,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말성경,19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61:1-2
가톨릭성경,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영어NIV,19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영어NASB,19 TO PROCLAIM THE FAVORABLE YEAR OF THE LORD.”
영어MSG,19 to announce, “This is God’s year to act!”
영어NRSV,19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ηρυξαι ενιαυτον κυριου δεκτον
라틴어Vulgate,19 praedicare captivis remissionem et caecis visum dimittere confractos in remissionem praedicare annum Domini acceptum et diem retributionis
히브리어Modern,19 שלחני לחבש לנשברי לב לקרא לשבוים דרור ולעורים פקח קוח לשלח רצוצים חפשים לקרא שנת רצון ליהוה׃
성 경: [눅4:1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주의 은혜의 해’는 레 25:8-55에 나타난는 ‘희년'(year of iubilee) 곧 여호와께서 매 50년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뜻한다. 나아가 이 해방의 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죄와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사(歷史)의 시기를 가리킨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는 메시야가 선도할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이사야의 이 놀라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그가 당신의 사명을 똑똑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편 이사야서의 인용 부분인 본문을 누가는 결국 예수의 사역에 대한 표제적(標題的)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지자이며 메시야로서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회의 소외자들, 가난한 자들 및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하실 것이다.
카이 프튘사스 토 비블리온 아포두스 토 휘페레테 에카디센 카이 판톤 호이 앞달모이 엔 테 쉬나고게 에산 아테니존테스 아우토
개역개정,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새번역,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우리말성경,20 예수께서는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자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회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일제히 예수를 주시했습니다.
가톨릭성경,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영어NIV,20 Then he rolled up the scroll, gave it back to the attendant and sat down. The eyes of everyone in the synagogue were fastened on him,
영어NASB,20 And He closed the book, gave it back to the attendant and sat down; and the eyes of all in the synagogue were fixed on Him.
영어MSG,20 He rolled up the scroll, handed it back to the assistant, and sat down. Every eye in the place was on him, intent.
영어NRSV,20 And he rolled up the scroll, gave it back to the attendant, and sat down. The eyes of all in the synagogue were fixed 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πτυξας το βιβλιον αποδους τω υπηρετη εκαθισεν και παντων εν τη συναγωγη οι οφθαλμοι ησαν ατενιζοντες αυτω
라틴어Vulgate,20 et cum plicuisset librum reddidit ministro et sedit et omnium in synagoga oculi erant intendentes in eum
히브리어Modern,20 ויהי כאשר גלל את הספר וישיבהו אל החזן וישב ועיני כל אשר בבית הכנסת נשאות אליו׃
성 경: [눅4:2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책을 덮어…주목하여 보더라 – 읽기를 마치신 예수는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것을 ‘맡은 자’에게 건네주셨다. 여기서 ‘맡은 자'(attendant)는 헬라어로 ‘휘페레테스'(*)인데 흔히 ‘섬기는 자’, ‘배 젓는 자’를 말한다. 이 ‘맡은 자’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이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일을 선언하는 은나팔을 불며 주중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 이들이 관리하는 성경 두루마리는 보통 함이나 궤에 보관된다. 한편 낭독자가 성경 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넘겨주고 나면 낭독자는 자리에 앉게 된다. 랍비적 전통에 따르면 앉는 것은 가르침의 시작이다. 낭독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낭독한 구절에 관한 교훈적 강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예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로 시작해서 결국은 적대감으로 끝이나고 만다.
에릌사토 데 레게인 프로스 아우투스 호티 세메론 페플레로타이 헤 그라페 하우테 엔 토이스 오신 휘몬
개역개정,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새번역,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우리말성경,21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가톨릭성경,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영어NIV,21 and he began by saying to them, “Today this scripture is fulfilled in your hearing.”
영어NASB,21 And He began to say to them, “Today this Scripture has been fulfilled in your hearing.”
영어MSG,21 Then he started in, “You’ve just heard Scripture make history. It came true just now in this place.”
영어NRSV,21 Then he began to say to them, “Today this scripture has been fulfilled in your hearing.”
헬라어신약Stephanos,21 ηρξατο δε λεγειν προς αυτους οτι σημερον πεπληρωται η γραφη αυτη εν τοις ωσιν υμων
라틴어Vulgate,21 coepit autem dicere ad illos quia hodie impleta est haec scriptura in auribus vestris
히브리어Modern,21 ויחל ויאמר אליהם היום נתמלא הכתוב הזה באזניכם׃
성 경: [눅4:2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오늘날 – ‘오늘날’을 나타내는 헬라어 ‘세메론'(*)은 다분히 긴박감을 띤 표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에 해당하는 ‘하루’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허용된 일정기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이 ‘오늘날’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야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이 그 메시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있는 그 날로 볼 수 있으며 둘째,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동시대인들이 맞게 되는 시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셋째,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는 모든 시대 곧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를 뜻한다고 볼 수있다. 결국 오늘날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생생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날인 바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 완성되는 ‘주의 은혜의 해'(19절)를 뜻하는 것이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인 것이다.
카이 판테스 에마르튀룬 아우토 카이 에다우마존 에피 토이스 로고이스 테스 카리토스 토이스 에크포류오메노이스 에크 투 스토마토스 아우투 카이 엘레곤 우키 휘오스 에스틴 요세프 후토스
개역개정,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새번역,22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우리말성경,22 그러자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물었습니다.
가톨릭성경,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22 All spoke well of him and were amazed at the gracious words that came from his lips. “Isn’t this Joseph’s son?” they asked.
영어NASB,22 And all were speaking well of Him, and wondering at the gracious words which were falling from His lips; and they were saying, “Is this not Joseph’s son?”
영어MSG,22 All who were there, watching and listening, were surprised at how well he spoke. But they also said, “Isn’t this Joseph’s son, the one we’ve known since he was a youngster?”
영어NRSV,22 All spoke well of him and were amazed at the gracious words that came from his mouth. They said, “Is not this Joseph’s son?”
헬라어신약Stephanos,22 και παντες εμαρτυρουν αυτω και εθαυμαζον επι τοις λογοις της χαριτος τοις εκπορευομενοις εκ του στοματος αυτου και ελεγον ουχ ουτος εστιν ο υιος ιωσηφ
라틴어Vulgate,22 et omnes testimonium illi dabant et mirabantur in verbis gratiae quae procedebant de ore ipsius et dicebant nonne hic filius est Ioseph
히브리어Modern,22 וכלם העידהו ותמהו על דברי חן אשר יצאו מפיהו ויאמרו הלא זה הוא בן יוסף׃
성 경: [눅4:2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그를 증거하고..요셉의 이들이 아니냐 – ‘증거하고’에 해당하는 ‘에마르튀룬'(*)은 ‘칭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speak well of, NIV). 따라서 우리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예수의 강론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의 ‘은혜로운 말’에 대한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후로도 예수가 말씀을 증거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20:26). 청중들이 기이하게 여긴 것은 예수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청중들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부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본문은 청중들이 왜 적대적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자라 이토록 엄청난 주장을 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너무도 당돌한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즉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 즉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염두에 둘 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를 기이히 여기며 칭찬하던 분위기가 쑥덕공론과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돌변하여 급격하고도 과격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카이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판토스 에레이테 모이 텐 파라볼렌 타우텐 야트레 데라퓨손 세아우톤 호사 에쿠사멘 게노메나 에이스 텐 카파르나움 포이에손 카이 호데 엔 테 파트리디 수
개역개정,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새번역,23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우리말성경,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틀림없이 너희는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이대며 ‘우리가 소문에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 보시오’라고 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는 틀림없이 ‘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영어NIV,23 Jesus said to them, “Surely you will quote this proverb to me: ‘Physician, heal yourself! Do here in your hometown what we have heard that you did in Capernaum.'”
영어NASB,23 And He said to them, “No doubt you will quote this proverb to Me, ‘Physician, heal yourself! Whatever we heard was done at Capernaum, do here in your hometown as well.'”
영어MSG,23 He answered, “I suppose you’re going to quote the proverb, ‘Doctor, go heal yourself. Do here in your hometown what we heard you did in Capernaum.’
영어NRSV,23 He said to them, “Doubtless you will quote to me this proverb, ‘Doctor, cure yourself!’ And you will say, ‘Do here also in your hometown the things that we have heard you did at Capernaum.'”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παντως ερειτε μοι την παραβολην ταυτην ιατρε θεραπευσον σεαυτον οσα ηκουσαμεν γενομενα εν τη καπερναουμ ποιησον και ωδε εν τη πατριδι σου
라틴어Vulgate,23 et ait illis utique dicetis mihi hanc similitudinem medice cura te ipsum quanta audivimus facta in Capharnaum fac et hic in patria tua
히브리어Modern,23 ויאמר אליהם הן תאמרו לי את המשל הזה רפא רפא את עצמך וככל אשר שמענו שנעשה בכפר נחום עשה כן גם פה בעיר מולדתך׃
성 경: [눅4:2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의원아 너를 고치라 – 본래 이는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의 속담으로서 의사인 누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속담은 예수께서 메시야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가버나움과 기타 등지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시험기 깃든 요청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회당에서 그의 강론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이 나타낼 반응을 미리 간파하고 계신 셈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기간중 계속해서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들을 받곤 했다(11:16, 29).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적을 행하시지는 않는다.
에이펜 데 아멘 레고 휘민 호티 우데이스 프로페테스 뎈토스 에스틴 엔 테 파트리디 아우투
개역개정,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새번역,24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우리말성경,24 예수께서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법이다.
가톨릭성경,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영어NIV,24 “I tell you the truth,” he continued,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hometown.
영어NASB,24 And He said, “Truly I say to you, no prophet is welcome in his hometown.
영어MSG,24 Well, let me tell you something: No prophet is ever welcomed in his hometown.
영어NRSV,24 And he said, “Truly I tell you, no prophet is accepted in the prophet’s hometown.
헬라어신약Stephanos,24 ειπεν δε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ουδεις προφητης δεκτος εστιν εν τη πατριδ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24 ait autem amen dico vobis quia nemo propheta acceptus est in patria sua
히브리어Modern,24 ויאמר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כי אין נביא רצוי בארץ מולדתו׃
성 경: [눅4:2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 , 아멘 레고 휘민) – 이 말은 엄숙한 단언을 내리고자 할 때 사용된것으로 누가복음에서 여섯 차례 사용되었다(12:37;18:17등).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A )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각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1) 하나님의 뜻에따라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다(왕상 1:36) (2)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가 내림을 확증하다(민 5:22) (3)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참여하다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1) ‘아멘’은 예배시의 환호로서 적극적 응답을 의미하며(계 5:14) (2) 기도와 송영에서(갈 1:5;엡 3:21;딤전 1:17) 아멘은 그 기도와 송영의 내용에 대한 온전한 공감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처럼 예수가 아멘을 자기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 그 목적은 그 말씀의 진정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없느니라 – 이 속담 자체는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는 오히려 냉대받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해 타인의 탁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며 자신의 평범한 수준으로 타인을 격하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속담을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은 자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만, 나아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당한 선지자들의 계보(系譜)에 속한다는 것이다.
엪 알레데이아스 데 레고 휘민 폴라이 케라이 에산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엘리우 엔 토 이스라엘 호테 에클레이스데 호 우라노스 에피 에테 트리아 카이 메나스 헼스 호스 에게네토 리모스 메가스 에피 파산 텐 겐
개역개정,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새번역,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우리말성경,25 그러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과부들이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있었다. 그때 3년 반 동안 하늘 문이 닫혀 온 땅에 극심한 기근이 들었다.
가톨릭성경,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영어NIV,25 I assure you that there were many widows in Israel in Elijah’s time, when the sky was shut for three and a half years and there was a severe famine throughout the land.
영어NASB,25 “But I say to you in truth, there were many widows in Israel in the days of Elijah, when the sky was shut up for three years and six months, when a great famine came over all the land;
영어MSG,25 Isn’t it a fact that there were many widows in Israel at the time of Elijah during that three and a half years of drought when famine devastated the land,
영어NRSV,25 But the truth is, there were many widows in Israel in the time of Elijah, when the heaven was shut up three years and six months, and there was a severe famine over all the land;
헬라어신약Stephanos,25 επ αληθειας δε λεγω υμιν πολλαι χηραι ησαν εν ταις ημεραις ηλιου εν τω ισραηλ οτε εκλεισθη ο ουρανος επι ετη τρια και μηνας εξ ως εγενετο λιμος μεγας επι πασαν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25 in veritate dico vobis multae viduae erant in diebus Heliae in Israhel quando clusum est caelum annis tribus et mensibus sex cum facta est fames magna in omni terra
히브리어Modern,25 ואמת אני אמר לכם אלמנות רבות היו בישראל בימי אליהו בהעצר השמים שלש שנים וששה חדשים ורעב גדול היה בכל הארץ׃
성 경: [눅4:25]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본 구절은 ‘…위에’를 나타내는 ‘에피'(*)의 축소형 ‘에피’와 ‘진리’를 나타내는 ‘알레데이아’로 서두가 구성되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근거 위에서 말하노니’라고 다시 번역할수 있다. 이것은 이어지는 구약상의 두 가지 실례가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확증해준다. 나사렛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있고 또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오직 이방인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일이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Lenski).
카이 프로스 우데미안 아우톤 에펨프데 엘리아스 에이 메 에이스 사렢타 테스 시도니아스 프로스 귀나이카 케란
개역개정,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새번역,26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우리말성경,2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과부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엘리야를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 보내셨다.
가톨릭성경,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영어NIV,26 Yet Elijah was not sent to any of them, but to a widow in Zarephath in the region of Sidon.
영어NASB,26 and yet Elijah was sent to none of them, but only to Zarephath, in the land of Sidon, to a woman who was a widow.
영어MSG,26 but the only widow to whom Elijah was sent was in Sarepta in Sidon?
영어NRSV,26 yet Elijah was sent to none of them except to a widow at Zarephath in Sidon.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προς ουδεμιαν αυτων επεμφθη ηλιας ει μη εις σαρεπτα της σιδωνος προς γυναικα χηραν
라틴어Vulgate,26 et ad nullam illarum missus est Helias nisi in Sareptha Sidoniae ad mulierem viduam
히브리어Modern,26 ולא נשלח אליהו אל אחת מהנה זולתי צרפתה אשר לצידון אל אשה אלמנה׃
성 경: [눅4:2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엘리야가…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 왕상 17:8-24에 나타난 내용이다. 3년 6개월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을 때 온땅에 흉년이 들어 그 상황은 매우 참담했었다. 더욱이 뚜렷한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과부들의 생활상은 매우 극심해 그들 중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는 가뭄에 고생하며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을 남겨두고 베니게의 큰 도시 시돈에있는 작은 마을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그 집을 구원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엘리야가 단독적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룬 일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한편 사렙다의 과부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신 경우와 유사하다(막 7:26-30).
카이 폴로이 레프로이 에산 엔 토 이스라엘 에피 엘리사이우 투 프로페투 카이 우데이스 아우톤 에카다리스데 에이 메 나이만 호 쉬로스
개역개정,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새번역,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 ㉥나병을 포함한 악성 피부병 ㉦그, ‘깨끗하여지다’ ㉧그, ‘깨끗하여지다’
우리말성경,27 또 많은 나병 환자들이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시리아 사람 나아만 외에는 깨끗함을 받지 못했다.”
가톨릭성경,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영어NIV,27 And there were many in Israel with leprosy in the time of Elisha the prophet, yet not one of them was cleansed–only Naaman the Syrian.”
영어NASB,27 “And there were many lepers in Israel in the time of Elisha the prophet; and none of them was cleansed, but only Naaman the Syrian.”
영어MSG,27 And there were many lepers in Israel at the time of the prophet Elisha but the only one cleansed was Naaman the Syrian.”
영어NRSV,27 There were also many lepers in Israel in the time of the prophet Elisha, and none of them was cleansed except Naaman the Syrian.”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πολλοι λεπροι ησαν επι ελισσαιου του προφητου εν τω ισραηλ και ουδεις αυτων εκαθαρισθη ει μη νεεμαν ο συρος
라틴어Vulgate,27 et multi leprosi erant in Israhel sub Heliseo propheta et nemo eorum mundatus est nisi Neman Syrus
히브리어Modern,27 ומצרעים רבים היו בישראל בימי אלישע הנביא ולא טהר אחד מהם זולתי נעמן הארמי׃
성 경: [눅4:2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엘리사 때에…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 왕하 5:14의 내용이다. 엘리사의 경우도 엘리야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문둥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리아의 장수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얻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예수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속사의 새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즉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서 진실되게 ‘예수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마 8:11;요 6:37).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당시 배타적 선민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다. 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처음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미 4:1, 2;슥 8:20-23). 한편 나아만 장군의 치유사건은 예수께서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경우와 유사하다(7:1-10).
카이 에플레스데산 판테스 뒤무 엔 테 쉬나고게 아쿠온테스 타우타
개역개정,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새번역,28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우리말성경,28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가톨릭성경,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영어NIV,28 All the people in the synagogue were furious when they heard this.
영어NASB,28 And all the people in the synagogue were filled with rage as they heard these things;
영어MSG,28 That set everyone in the meeting place seething with anger.
영어NRSV,28 When they heard this, all in the synagogue were filled with rage.
헬라어신약Stephanos,28 και επλησθησαν παντες θυμου εν τη συναγωγη ακουοντες ταυτα
라틴어Vulgate,28 et repleti sunt omnes in synagoga ira haec audientes
히브리어Modern,28 וימלאו כל אשר בבית הכנסת חמה בשמעם את אלה׃
성 경: [눅4:2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회당에…분이 가득하여 – 예수의 말씀이 선민 의식에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도 같은 언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회당은 일시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해야 할 청중들은 냉소적이고 불신에 찬 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의 태도로 돌변한다.
카이 아나스탄테스 엨세발론 아우톤 엨소 테스 폴레오스 카이 에가곤 아우톤 헤오스 오프뤼오스 투 오루스 엪 후 헤 폴리스 오코도메토 아우톤 호스테 카타크렘니사이 아우톤
개역개정,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새번역,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우리말성경,29 그들은 일어나서 예수를 마을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마을이 세워진 산 벼랑으로 끌고 가서 그 아래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영어NIV,29 They got up, drove him out of the town, and took him to the brow of the hill on which the town was built, in order to throw him down the cliff.
영어NASB,29 and they got up and drove Him out of the city, and led Him to the brow of the hill on which their city had been built, in order to throw Him down the cliff.
영어MSG,29 They threw him out, banishing him from the village, then took him to a mountain cliff at the edge of the village to throw him to his doom,
영어NRSV,29 They got up, drove him out of the town, and led him to the brow of the hill on which their town was built, so that they might hurl him off the cliff.
헬라어신약Stephanos,29 και ανασταντες εξεβαλον αυτον εξω της πολεως και ηγαγον αυτον εως της οφρυος του ορους εφ ου η πολις αυτων ωκοδομητο εις το κατακρημνισαι αυτον
라틴어Vulgate,29 et surrexerunt et eiecerunt illum extra civitatem et duxerunt illum usque ad supercilium montis supra quem civitas illorum erat aedificata ut praecipitarent eum
히브리어Modern,29 ויקומו וידיחו אותו אל מחוץ לעיר ויביאהו עד גב ההר אשר נבנתה עירם עליו למען השליכו מטה׃
성 경: [눅4:2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살의(殺意)를 띠게 된다. 처음엔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어느새 폭도가 되었다. 이는 예수를 향하여 호산나 찬양을 외치던 군중들이 종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적대 무리로 돌변하는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사렛은 갈릴리 구릉의 남쪽 경사면의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이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배척과 살해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예수가 민족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몰아 유태 전통상 반역자를 처단하는 형벌 제도인(대하 25:12) 벼랑에서 아래로 사람을 밀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후에 십자가의 형장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무리가 자신을 마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묵묵히 허락하셨다.
아우토스 데 디엘돈 디아 메수 아우톤 에포류에토
개역개정,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새번역,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우리말성경,30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떠나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영어NIV,30 But he walked right through the crowd and went on his way.
영어NASB,30 But passing through their midst, He went His way.
영어MSG,30 but he gave them the slip and was on his way.
영어NRSV,30 But he passed through the midst of them and went on his way.
헬라어신약Stephanos,30 αυτος δε διελθων δια μεσου αυτων επορευετο
라틴어Vulgate,30 ipse autem transiens per medium illorum ibat
히브리어Modern,30 אך הוא עבר בתוכם וילך לדרכו׃
성 경: [눅4:3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예수께서…지나서 가시니라 – 아직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가 아니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기적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저자 누가는 단지 무리가운데로 걸어서 지나 가셨다고 전한다. ‘가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류에토'(*)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가시고자 하시는 길로 계속 가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던간에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난관에 봉착(逢着)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를 보게 된다. 또한 선교활동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혀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후에 지속적으로 봉착하게 될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예측도 가능케 한다. 아울러 사역 초기에 당한 어려움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도 감지하게 된다. 한편 나사렛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예수는 가버나움으로 행로를 잡는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는 예수가 이후 다시는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카이 카텔덴 에이스 카파르나움 폴린 테스 갈릴라이아스 카이 엔 디다스콘 아우투스 엔 토이스 삽바신
개역개정,3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새번역,31 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로 내려가셔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우리말성경,31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버나움 마을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자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가톨릭성경,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영어NIV,31 Then he went down to Capernaum, a town in Galilee, and on the Sabbath began to teach the people.
영어NASB,31 And He came down to Capernaum, a city of Galilee, and He was teaching them on the Sabbath;
영어MSG,31 He went down to Capernaum, a village in Galilee. He was teaching the people on the Sabbath.
영어NRSV,31 He went down to Capernaum, a city in Galilee, and was teaching them on the sabbath.
헬라어신약Stephanos,31 και κατηλθεν εις καπερναουμ πολιν της γαλιλαιας και ην διδασκων αυτους εν τοις σαββασιν
라틴어Vulgate,31 et descendit in Capharnaum civitatem Galilaeae ibique docebat illos sabbatis
히브리어Modern,31 וירד אל כפר נחום עיר הגליל וילמדם בשבתות׃
성 경: [눅4:3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 나사렛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갈릴리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예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이다(마 8:5, 14;요 6:55-59).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회개치 않음으로 인해 가버나움에는 장차 화가 임할 것이 예언되기도 했다(마 11:23).
내려오사 – 이 표현은 갈릴리 바다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약 200m 정도가 낮기 때문에 높은 곳에 위치한 나사렛에서 해변의 평지에 이르는 길이 내리받이 경사였음을 보여준다.
가르치시매(*, 엔 디다스콘) – 본 구절의 원문 표현은 완곡한 미완료 시제로서 그 뜻이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가 된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한다(33, 38절;막 1:21). 한편 우리는 31-41절에서 예수의 사역이 하루종일 쉴틈없이 진행되었음알 수 있다. 예수는 오전에 회당에 들어가서 권세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시고 귀신을 축출하셨으며, 오후에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로부터 밤 늦도록까지는 몰려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치유하시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카이 엨세플레쏜토 에피 테 디다케 아우투 호티 엔 엨수시아 엔 호 로고스 아우투
개역개정,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새번역,32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으니, 그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2 그분의 말씀이 얼마나 권위가 있었는지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가톨릭성경,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NIV,32 They were amazed at his teaching, because his message had authority.
영어NASB,32 and they were amazed at His teaching, for His message was with authority.
영어MSG,32 They were surprised and impressed–his teaching was so forthright, so confident, so authoritative, not the quibbling and quoting they were used to.
영어NRSV,32 They were astounded at his teaching, because he spoke with authority.
헬라어신약Stephanos,32 και εξεπλησσοντο επι τη διδαχη αυτου οτι εν εξουσια ην ο λογο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32 et stupebant in doctrina eius quia in potestate erat sermo ipsius
히브리어Modern,32 וישתוממו על תורתו כי עצום דברו׃
성 경: [눅4:3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권세가 있음이러라 – 마가복음 평행절(막 1:21, 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전한다. 랍비 정도도 못되는 사람이 독특한 권위로써 가르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을 누적된 전승(tradition)의 기초 위에 세웠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체에 독자적인 권능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예수의 말씀 전파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항상 권세와 능력을 수반하고 있다(36절).
카이 엔 테 쉬나고게 엔 안드로포스 에콘 프뉴마 다이모니우 아카다르투 카이 아네크랔센 포네 메갈레
개역개정,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새번역,33 그 때에 그 회당에 ㉨악한 귀신의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 ㉨그, ‘더러운’
우리말성경,33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가톨릭성경,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영어NIV,33 In the synagogue there was a man possessed by a demon, an evil spirit. He cried out at the top of his voice,
영어NASB,33 In the synagogue there was a man possessed by the spirit of an unclean demon, and he cried out with a loud voice,
영어MSG,33 In the meeting place that day there was a man demonically disturbed. He screamed,
영어NRSV,33 In the synagogue there was a man who had the spirit of an unclean demon, and he cried out with a loud voice,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εν τη συναγωγη ην ανθρωπος εχων πνευμα δαιμονιου ακαθαρτου και ανεκραξεν φωνη μεγαλη
라틴어Vulgate,33 et in synagoga erat homo habens daemonium inmundum et exclamavit voce magna
히브리어Modern,33 ואיש היה בבית הכנסת ובו רוח שד טמא ויצעק בקול גדול לאמר׃
성 경: [눅4:3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에아 티 헤민 카이 소이 예수 나자레네 엘데스 아폴레사이 헤마스 오이다 세 티스 에이 호 하기오스 투 데우
개역개정,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새번역,34 “아, 나사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우리말성경,34 “아, 나사렛 예수여!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가톨릭성경,34 “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영어NIV,34 “Ha! What do you want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the Holy One of God!”
영어NASB,34 “Let us alone! What business do we have with each other,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 the Holy One of God!”
영어MSG,34 “Ho! What business do you have here with us, Jesus? Nazarene! I know what you’re up to. You’re the Holy One of God and you’ve come to destroy us!”
영어NRSV,34 “Let us alone! What have you to do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 the Holy One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34 λεγων εα τι ημιν και σοι ιησου ναζαρηνε ηλθες απολεσαι ημας οιδα σε τις ει ο αγιος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34 dicens sine quid nobis et tibi Iesu Nazarene venisti perdere nos scio te qui sis Sanctus Dei
히브리어Modern,34 אתה מה לנו ולך ישוע הנצרי באת להאבידנו ידעתיך מי אתה קדוש האלהים׃
성 경: [눅4:3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아(*, 에아) – 이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는 감탄사이며 본 문장에서는 악마적인 무서운 비명을 나타낸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수사적 용구인 본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이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등의 의미이다. 즉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귀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긴장과 불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권위 아래 사단의 어두운 지배와 군림이 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사단이 떨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귀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은 마 8:2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말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과도 대조를 이룬다.
카이 에페티메센 아우토 호 예수스 레곤 피모데티 카이 엨셀데 앞 아우투 카이 맆산 아우톤 토 다이모니온 에이스 토 메손 엨셀덴 앞 아우투 메덴 블랖산 아우톤
개역개정,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새번역,3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귀신이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다가 쓰러뜨려 놓고 그에게서 떠나갔는데, 그에게 상처는 입히지 않았다.
우리말성경,3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습니다.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 그러자 귀신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을 땅에 내동댕이치고 떠나갔는데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35 예수님께서 그에게 “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영어NIV,35 “Be quiet!” Jesus said sternly. “Come out of him!” Then the demon threw the man down before them all and came out without injuring him.
영어NASB,35 But Jesus rebuked him, saying, “Be quiet and come out of him!” And when the demon had thrown him down in the midst of the people, he came out of him without doing him any harm.
영어MSG,35 Jesus shut him up: “Quiet! Get out of him!” The demonic spirit threw the man down in front of them all and left. The demon didn’t hurt him.
영어NRSV,35 But Jesus rebuked him, saying, “Be silent, and come out of him!” When the demon had thrown him down before them, he came out of him without having done him any harm.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επετιμησεν αυτω ο ιησους λεγων φιμωθητι και εξελθε εξ αυτου και ριψαν αυτον το δαιμονιον εις το μεσον εξηλθεν απ αυτου μηδεν βλαψα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35 et increpavit illi Iesus dicens obmutesce et exi ab illo et cum proiecisset illum daemonium in medium exiit ab illo nihilque illum nocuit
히브리어Modern,35 ויגער בו ישוע לאמר האלם וצא ממנו ויפילהו השד בתוכם ויצא ממנו לא הרע לו׃
성 경: [눅4:35]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을 금하는 예수의 행동 가운데 그 첫번째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함구령을 거듭내리신(마 8:4;막 1:34)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갔으며 더욱이 예수의 교훈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초월한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께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나타내었다. (2) 호의적인 무리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거의가 육신상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 중에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위대한 민족적 영도자(領導者) 곧 정치적 메시야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 예수는 자신이 입으로 증거되기 이전에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령한 권능으로 인해 자연히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본문의경우 예수는 굳이 더러운 귀신의 입을 빌어 당신의 신분을 중거케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넘어뜨리고…상하지 아니한지라 – 예수의 행동은 소위 전문적인 ‘악령 추방'(exorcism)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들이지 않은데서 알 수 있다. 대신 예수는 단 한마디 명령하는 말씀으로써 귀신을 내어 쫓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권세있는 것인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시는 등(8:49-56) 인간의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카이 에게네토 담보스 에피 판타스 카이 쉬넬랄룬 프로스 알렐루스 레곤테스 티스 호 로고스 후토스 호티 엔 엨수시아 카이 뒤나메이 에피타쎄이 토이스 아카다르토이스 프뉴마신 카이 엨세르콘타이
개역개정,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새번역,36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서로 말하였다. “이 말이 대체 무엇이냐? 그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니, 그들이 떠나가는구나.” / ㉩그, ‘더러운’
우리말성경,36 모든 사람들이 놀라며 서로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가르침인가? 저 사람이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이 떠나가 버렸다.”
가톨릭성경,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영어NIV,36 All the people were amazed and said to each other, “What is this teaching? With authority and power he gives orders to evil spirits and they come out!”
영어NASB,36 And amazement came upon them all, and they began talking with one another saying, “What is this message?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
영어MSG,36 That set everyone back on their heels, whispering and wondering, “What’s going on here? Someone whose words make things happen? Someone who orders demonic spirits to get out and they go?”
영어NRSV,36 They were all amazed and kept saying to one another, “What kind of utterance is this?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out they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36 και εγενετο θαμβος επι παντας και συνελαλουν προς αλληλους λεγοντες τις ο λογος ουτος οτι εν εξουσια και δυναμει επιτασσει τοις ακαθαρτοις πνευμασιν και εξερχονται
라틴어Vulgate,36 et factus est pavor in omnibus et conloquebantur ad invicem dicentes quod est hoc verbum quia in potestate et virtute imperat inmundis spiritibus et exeunt
히브리어Modern,36 ותפל אימה על כלם וידברו איש אל רעהו לאמר מה הדבר הזה כי בשלטן ובגבורה מצוה לרוחות הטמאה והמה יצאים׃
성 경: [눅4:3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다 놀라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과 권세와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다. 귀신을 축출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통한 예수의 신적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범접(犯接) 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된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귀신을 달래거나 위로하는 주문과 주술적 행위를 통하여 일시적 또는 거짓으로 악령추방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잠시 잠들게 하는 것 뿐으로 오히려 또다른 귀신의 힘을 비는 경우도 있어 귀신들린 사람으로 하여금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귀신에게 던졌다. 그것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적인 명령이었다.
카이 엨세포류에토 에코스 페리 아우투 에이스 판타 토폰 테스 페리코루
개역개정,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새번역,37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모든 곳에 퍼졌다.
우리말성경,37 그리하여 예수에 대한 소문은 그 주변 지역까지 두루 퍼져 나갔습니다.
가톨릭성경,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영어NIV,37 And the news about him spread throughout the surrounding area.
영어NASB,37 And the report about Him was spreading into every locality in the surrounding district.
영어MSG,37 Jesus was the talk of the town.
영어NRSV,37 And a report about him began to reach every place in the region.
헬라어신약Stephanos,37 και εξεπορευετο ηχος περι αυτου εις παντα τοπον της περιχωρου
라틴어Vulgate,37 et divulgabatur fama de illo in omnem locum regionis
히브리어Modern,37 ושמעו הולך בכל מקמות הככר׃
성 경: [눅4:3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소문이…퍼지니라(*, 여세포류에토 에코스) – ‘퍼지니라’를 나타내는 ‘여세포류에토’는 원형 ‘여포류오마이(*)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문’을 나타내는 ‘에코스’에서 영어의 ‘메아리’를 나타내는 ‘에코'(echo)가 파생되었다. ‘에코스’는 해변가의 파도 소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단어이다. 즉, 예수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퍼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예수의 권능과 말씀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이 경험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아나스타스 데 아포 테스 쉬나고게스 에이셀덴 에이스 텐 오이키안 시모노스 펜데라 데 투 시모노스 엔 쉬네코메네 퓌레토 메갈로 카이 에로테산 아우톤 페리 아우테스
개역개정,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새번역,38 예수께서 회당을 떠나서,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앓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 여자를 두고 예수께 청하였다.
우리말성경,38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예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가톨릭성경,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영어NIV,38 Jesus left the synagogue and went to the home of Simon. Now Simon’s mother-in-law was suffering from a high fever, and they asked Jesus to help her.
영어NASB,38 Then He got up and left the synagogue, and entered Simon’s home. Now Simon’s mother-in-law was suffering from a high fever, and they asked Him to help her.
영어MSG,38 He left the meeting place and went to Simon’s house. Simon’s mother-in-law was running a high fever and they asked him to do something for her.
영어NRSV,38 After leaving the synagogue he entered Simon’s house. Now Simon’s mother-in-law was suffering from a high fever, and they asked him about her.
헬라어신약Stephanos,38 αναστας δε εκ της συναγωγης εισηλθεν εις την οικιαν σιμωνος η πενθερα δε του σιμωνος ην συνεχομενη πυρετω μεγαλω και ηρωτησαν αυτον περι αυτης
라틴어Vulgate,38 surgens autem de synagoga introivit in domum Simonis socrus autem Simonis tenebatur magnis febribus et rogaverunt illum pro ea
히브리어Modern,38 ויקם מבית הכנסת ויבא ביתה שמעון וחמות שמעון אחזתה קדחת חזקה וישאלהו בעדה׃
성 경: [눅4:3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시몬의 장모 – 저자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본서를 기록하다가 본 구절에서 갑자기 아무런 소개없이 베드로를 언급한다. 그것은 누가가 본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언급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같다. 한편 본 구절과 고전 9:5은 베드로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나, 또는 펄페튜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녀가 베드로보다 일찍이 순교당하였다고 전한다.
중한 열병 – 문자적 의미로는 ‘높은 열병'(high fever)이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는 열병의 정도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의학적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누가가 전문 의사였음을 확증해준다.
붙들린지라(*, 쉬네코메네) – 이 동사는 헬라 의학 저술에서 흔히 사용이되는 동사로 의학 전문 용어이며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는 뜻인 ‘쉬네코'(*)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 열병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마 시몬의 장모는 만성병(慢性病)에 시달린 듯하며 당시에는 매우 중태였던 것 같다. 베드로의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또한 예수가 그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카이 에피스타스 에파노 아우테스 에페티메센 토 퓌레토 카이 아페켄 아우텐 파라크레마 데 아나스타사 디에코네이 아우토이스
개역개정,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새번역,39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서서 굽어보시고,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열병이 물러가고, 그 여자는 곧 일어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었다.
우리말성경,39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를 굽어보시고 열병을 꾸짖으시자 열병이 사라졌습니다. 장모는 곧 일어나 사람들을 시중들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성경,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영어NIV,39 So he bent over her and rebuked the fever, and it left her. She got up at once and began to wait on them.
영어NASB,39 And standing over her, He rebuked the fever, and it left her; and she immediately got up and waited on them.
영어MSG,39 He stood over her, told the fever to leave–and it left. Before they knew it, she was up getting dinner for them.
영어NRSV,39 Then he stood over her and rebuked the fever, and it left her. Immediately she got up and began to serve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39 και επιστας επανω αυτης επετιμησεν τω πυρετω και αφηκεν αυτην παραχρημα δε αναστασα διηκονει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39 et stans super illam imperavit febri et dimisit illam et continuo surgens ministrabat illis
히브리어Modern,39 ויתיצב עליה ויגער בקדחת ותרף ממנה ותקם מהרה ותשרת אתם׃
성 경: [눅4:3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 원문상으로는 예수께서 환자의 머리 곁에 서서 허리를 굽혀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주술적 행위나 무당의 무속적 행위에 의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에 의거한 정확한 진단과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치료를 하신다.
열병을 꾸짖으신대 – 본 구절을 두고서 혹자는 이 열병의 배후에는 악한 귀신이 자리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홍해를 꾸짖으셨다고 해서(욥 26:11;시 106:9) 하늘과 홍해 뒤에 귀신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열병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열병을 내모는 행위 자체를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기 위해 열병을 의인화시키거나 아니면 누가가 예수의 말에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만성 질병이었던 열병은 사람을 탈진(脫盡)시키고 매우 심약하게 만드나 환자는 치료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든다. 이는 예수의 치유 권능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가 예수 일행을 위해 수종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의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뒤논토스 데 투 헬리우 하판테스 호소이 에이콘 아스데눈타스 노소이스 포이킬라이스 에가곤 아우투스 프로스 아우톤 호 데 헤니 헤카스토 아우톤 타스 케이라스 에피티데이스 에데라퓨엔 아우투스
개역개정,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새번역,40 해가 질 때에 사람들이 온갖 병으로 앓는 사람들을 다 예수께로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셨다.
우리말성경,40 해질녘이 되자 사람들이 온갖 환자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영어NIV,40 When the sun was setting, the people brought to Jesus all who had various kinds of sickness, and laying his hands on each one, he healed them.
영어NASB,40 While the sun was setting, all those who had 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brought them to Him; and laying His hands on each one of them, He was healing them.
영어MSG,40 When the sun went down, everyone who had anyone sick with some ailment or other brought them to him. One by one he placed his hands on them and healed them.
영어NRSV,40 As the sun was setting, all those who had 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kinds of diseases brought them to him; and he laid his hands on each of them and cured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40 δυνοντος δε του ηλιου παντες οσοι ειχον ασθενουντας νοσοις ποικιλαις ηγαγον αυτους προς αυτον ο δε ενι εκαστω αυτων τας χειρας επιθεις εθεραπευσεν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40 cum sol autem occidisset omnes qui habebant infirmos variis languoribus ducebant illos ad eum at ille singulis manus inponens curabat eos
히브리어Modern,40 וכבוא השמש הביאו אליו כל אשר להם חלים חליים שונים וירפא אותם בשומו את ידיו על כל אחד מהם׃
성 경: [눅4:4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해질 적에 – 해가 지기를 기다려 환자들이 예수께 몰려든 것은 안식일 때문이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노동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환자를 운반하는 일이나 치료 행위를 행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안식일에 발이 묶여 환자들은 예수께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녘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다(창 2 :2, 3;출 34:21).
손을 얹으사 – 원래 안수란 첫째, 제사드리는자가 희생당할 동물에게 손을 얹음으로써 자신의 죄악을 전가시키거나(출 20:15, 19) 둘째, 신성모독자를 돌로 칠 때 신성모독의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더러워진 인격, 죄악등을 전가시키거나(레 24:14) 셋째, 병을 고치는 역사를 행할 때 예수님 혹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그 병자들에게 전가시키거나(막 6:5;행28:8) 넷째, 사도들이 사도적인 권위로써 성령이 임하지 않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한몸이 되었음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행 8:18, 19) 등의 이유에서 사용되었다. 결국 안수란 공통적으로 무엇인가를 전가시킨다는 의미가있다. 이중 본문에서는 세번째의 의미로 사용된바 이러한 예는 예수 뿐만 아니라 여러 사도들의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께서 안수하심으로 병을 고치신 행위는 어떤 마술적인 요법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능력이 그 환자에게 전가됨을 외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본 구절에서 예수께서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 것은 예수가 치유능력의 근원이라는 것과 그가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하신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엨세르케토 데 카이 다이모니아 아포 폴론 크라우가존타 카이 레곤타 호티 쉬 에이 호 휘오스 투 데우 카이 에피티몬 우크 에이아 아우타 랄레인 호티 에데이산 톤 크리스톤 아우톤 에이나이
개역개정,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새번역,41 또 귀신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떠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가 ㉪그리스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다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41 게다가 귀신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떠나가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귀신들을 꾸짖으시며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신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NIV,41 Moreover, demons came out of many people, shouting, “You are the Son of God!” But he rebuked them and would not allow them to speak, because they knew he was the Christ.
영어NASB,41 Demons also were coming out of many, shouting, “You are the Son of God!” But rebuking them, He would not allow them to speak, because they knew Him to be the Christ.
영어MSG,41 Demons left in droves, screaming, “Son of God! You’re the Son of God!” But he shut them up, refusing to let them speak because they knew too much, knew him to be the Messiah.
영어NRSV,41 Demons also came out of many, shouting, “You are the Son of God!” But he rebuked them and would not allow them to speak, because they knew that he was the Messiah.
헬라어신약Stephanos,41 εξηρχετο δε και δαιμονια απο πολλων κραζοντα και λεγοντα οτι συ ει ο χριστος ο υιος του θεου και επιτιμων ουκ εια αυτα λαλειν οτι ηδεισαν τον χριστον αυτον ειναι
라틴어Vulgate,41 exiebant autem etiam daemonia a multis clamantia et dicentia quia tu es Filius Dei et increpans non sinebat ea loqui quia sciebant ipsum esse Christum
히브리어Modern,41 וגם שדים יצאו מרבים צעקים ואמרים אתה הוא המשיח בן האלהים ויגער בם ולא נתנם לדבר כי ידעו אשר הוא המשיח׃
성 경: [눅4:4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더러운 귀신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신앙고백적 차원이 아니며 다만 예수 앞에서 그들의 패배와 예수의 권능을 인정하는 말로 이해된다. 한편 간악한 귀신들조차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리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서로 역설적(逆說的)인 대조를 이룬다.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사람들, 심지어 불신자들이나 귀신들까지도 예수의 정체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서들이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폭넓은 증거 구실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분명히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게노메네스 데 헤메라스 엨셀돈 에포류데 에이스 에레몬 토폰 카이 호이 오클로이 에페제툰 아우톤 카이 엘돈 헤오스 아우투 카이 카테이콘 아우톤 투 메 포류에스다이 앞 아우톤
개역개정,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새번역,42 날이 새니, 예수께서 나가셔서, 외딴 곳으로 가셨다. 무리가 예수를 찾아다니다가, 그에게 와서, 자기들에게서 떠나가지 못하시게, 자기네 곁에 모셔두려고 하였다.
우리말성경,42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나가셔서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찾다가 어디 계신지 알아내고는 자기들에게서 떠나가시지 못하게 붙들었습니다.
가톨릭성경,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영어NIV,42 At daybreak Jesus went out to a solitary place. The people were looking for him and when they came to where he was, they tried to keep him from leaving them.
영어NASB,42 When day came, Jesus left and went to a secluded place; and the crowds were searching for Him, and came to Him and tried to keep Him from going away from them.
영어MSG,42 He left the next day for open country. But the crowds went looking and, when they found him, clung to him so he couldn’t go on.
영어NRSV,42 At daybreak he departed and went into a deserted place. And the crowds were looking for him; and when they reached him, they wanted to prevent him from leaving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42 γενομενης δε ημερας εξελθων επορευθη εις ερημον τοπον και οι οχλοι εζητουν αυτον και ηλθον εως αυτου και κατειχον αυτον του μη πορευεσθαι απ αυτων
라틴어Vulgate,42 facta autem die egressus ibat in desertum locum et turbae requirebant eum et venerunt usque ad ipsum et detinebant illum ne discederet ab eis
히브리어Modern,42 ויצא וילך לו כאור הבקר אל מקום חרבה והמון העם בקשהו ויבאו עדיו ויפצרו בו לבלתי סור מהם׃
성 경: [눅4:4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한적한 곳에 가시니 – 평행 구절 막 1:35에서는 예수께서 아직 동이 트기 전에 기도하셨다고 전한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모습은 단순히 쉽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장면이지만 여기에 예수의 사역의 비결이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눈여겨 보지않았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작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2:39-46). 예수는 언제나 기도를 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고 하나님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호 데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호티 카이 타이스 헤테라이스 폴레신 유앙겔리사스다이 메 데이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호티 에피 투토 아페스탈렌
개역개정,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새번역,43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43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다른 마을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영어NIV,43 But he said, “I must preach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towns also, because that is why I was sent.”
영어NASB,43 But He said to them, “I must preach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cities also, for I was sent for this purpose.”
영어MSG,43 He told them, “Don’t you realize that there are yet other villages where I have to tell the Message of God’s kingdom, that this is the work God sent me to do?”
영어NRSV,43 But he said to them, “I must proclaim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cities also; for I was sent for this purpose.”
헬라어신약Stephanos,43 ο δε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οτι και ταις ετεραις πολεσιν ευαγγελισασθαι με δει την βασιλειαν του θεου οτι εις τουτο απεσταλμαι
라틴어Vulgate,43 quibus ille ait quia et aliis civitatibus oportet me evangelizare regnum Dei quia ideo missus sum
히브리어Modern,43 ויאמר להם הן עלי לבשר גם לערים האחרות את בשורת מלכות האלהים כי לזאת שלחתי׃
성 경: [눅4:4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하나님의 나라 – 이는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주제이다(8:1;9:2).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죄인들을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다(골 1:1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왕이신 예수께 대해서도 오해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예수의 사역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다(마 12:28).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라.
전하여야 하리니 – ‘…해야 한다'(*, 데이)는 말은 예수 사역의 필연성과 긴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누차 사용되었다(2:49;13:33;24:7, 26, 44).
카이 엔 케뤼쏜 에이스 타스 쉬나고가스 테스 유다이아스
개역개정,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새번역,44 그리고 예수께서는 ㉫유대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갈릴리’
우리말성경,44 그런 뒤 예수께서는 유대의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영어NIV,44 And he kept on preaching in the synagogues of Judea.
영어NASB,44 So He kept on preaching in the synagogues of Judea.
영어MSG,44 Meanwhile he continued preaching in the meeting places of Galilee.
영어NRSV,44 So he continued proclaiming the message in the synagogues of Judea.
헬라어신약Stephanos,44 και ην κηρυσσων εν ταις συναγωγαις της γαλιλαιας
라틴어Vulgate,44 et erat praedicans in synagogis Galilaeae
히브리어Modern,44 ויהי קורא בבתי הכנסיות אשר בגליל׃
성 경: [눅4:4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갈릴리(*, 테스유다이아스) – 본 구절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서 각각 ‘갈릴리’나 또는 ‘유대’로 표기되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유대’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이 계속해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NIV 난외(欄外)에서는 ‘유대인들의 땅'(the land of the Jews)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전달해 주려는 것 같다. 즉 ‘땅'(land)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고향인 팔레스틴 전부를 의미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다. 누가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유대'(Judea)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광의(廣義)에서 ‘유대’라는 말을 쓰면 그 속에서 갈릴리가 자연스럽게 포함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셈이다. 어쨌든 예수의 이 첫번째 전도 여행 기간은 대략 4, 5개월 정도로 추측된다. 또한 당시 갈릴리 지방에는 1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 200개 정도나 있었고 전체 인구수는 3백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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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 4장 주석
4:1-13 예수께서 시험받음
4:14-15 사역의 시작
4:16-30 회당에서의 증거와 고향에서의 거절 당하심
4:31-37 귀신을 쫓아냄
4:38-41 베드로 장모의 열병 고침
4:42-44 여러 회당에 복음전파
시험을 받으시다(마 4:1-11; 막 1:12-13)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다(마 4:12-17; 막 1:14-15)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시다(마 13:53-58; 막 6:1-6)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막 1:21-28)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다(마 8:14-17; 막 1:29-34)
복음을 전하러 떠나시다(막 1:35-39)
1. 헬, 사환에게 2. 어떤 사본에는, 유대
ㄱ 신8:3 ㄴ 신6:13 ㄷ 시91:11 , 12 ㄹ 신6:16 ㅁ 사61:1 이하
마4:12-17
막1:14-15
갈릴리
요2:13-4:3
마4:12-17
갈릴리
눅4:14-30
가버나움
눅4:31-44
제자들
눅5:12-26
문둥병
눅5:12-26
눅5:27-39
안식일
눅6:1-11
눅6:12-16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4장
4:1 시험 받는 예수 (누가복음 4:1-13) 앞 장(章)의 마지막 말은 예수는 “아담의 자손”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가 “여인의 후손”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약속에 따라서,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하고, 온갖 시험을 통해서 악마를 물리치고 좌절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악마는 단 한 가지의 시험으로 우리의 첫 조상들은 거꾸러뜨린 적이 있는 자이다. 이리하여 전쟁의 초반부터 그리스도는 그에게 앙갚음을 했고, 정복자를 다시 정복해 버렸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유혹 기사 속에서 이런 것을 관찰할 수 있다. Ⅰ. 그는 시험을 위해 “준비해”있었고, 또 “적합했다.” 그에게 시련을 계획하신 그분은 또한 그에 따른 힘도 부여하셨다. 우리는 비록 우리 앞에 어떤 사태가 다가오고 있으며,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 맞게 예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예비하신다. 우리도 거기에 따라 능력을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1. 그는 “성령에 충만해” 있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강림”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위대한 은사의 방편, 곧 성령의 은총과 위로를 이전 보다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자가 최강의 유혹을 이기는 최선의 무장을 한 자이다.
2. 그는 이제 막 “요단 강에서 돌아왔다.” 그곳은 그가 세례 받은 곳이요,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라는 인정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는 이 전투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성령에 충만해” 있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강림”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위대한 은사의 방편, 곧 성령의 은총과 위로를 이전 보다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자가 최강의 유혹을 이기는 최선의 무장을 한 자이다.그는 이제 막 “요단 강에서 돌아왔다.” 그곳은 그가 세례 받은 곳이요,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라는 인정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는 이 전투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가장 즐거운 교제를 누렸고, 하나님의 가장 뚜렷한 은혜를 입은 때에라도, 사탄은 우리에게 다가서며(가장 값비싼 배가 해적의 목표물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런 일을 허락까지 하신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총의 권능이 빛나게 되는 법이다. 3.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갔다. 즉 선한 영의 인도를 받아서 갔다. 그 성령은 그리스도가 참피온인 양 그 전장으로 내어 몰았다. 그것은 분명코 이기리라고 확신되는 그 적을 무찌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광야로 끌려” 갔다는 사실은
(1) 유혹자에게 이점을 “주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그리스도가 홀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친구도 없게 된다. 유혹(시험)의 시간에는 친구들의 기도와 조언이 있다면, 그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홀로 거하는 자에게 화 있도다 !” 그는 사탄에게 이점을 줄 “수도 있었다.” 그는 자기의 장점을 잘 알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는 데에 “유리했다.” 아니 그 동안 줄곧 적당한 명상에 잠길 수 있었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과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자기의 모든 시간을 직접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에 썼다. 산에 있던 모세가 아무런 방해 없이, 중단 없이 교제했던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계셨던 생애 전체 중에서, 이 기간이 아마 거룩한 완전과 신성한 생활에 가장 가까웠던 시기로 보인다. 이로써 그는 사탄의 고발을 대비했고, 나아가 그것에 대해 무장을 했다.
4. 그는 금식을 계속했다(2절). “이 모든 날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았다”고 했다. 이 금식은 전혀 기적 같은 것이다. 마치 모세나 엘리야의 금식과도 같았다. 그것은 그들처럼 그도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처럼 보이게 했다. 아마 그 금식은 모세나 엘리야가 금식했던 호렙의 광야였을 것이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갔다. 즉 선한 영의 인도를 받아서 갔다. 그 성령은 그리스도가 참피온인 양 그 전장으로 내어 몰았다. 그것은 분명코 이기리라고 확신되는 그 적을 무찌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광야로 끌려” 갔다는 사실은유혹자에게 이점을 “주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그리스도가 홀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친구도 없게 된다. 유혹(시험)의 시간에는 친구들의 기도와 조언이 있다면, 그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홀로 거하는 자에게 화 있도다 !” 그는 사탄에게 이점을 줄 “수도 있었다.” 그는 자기의 장점을 잘 알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는 데에 “유리했다.” 아니 그 동안 줄곧 적당한 명상에 잠길 수 있었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과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자기의 모든 시간을 직접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에 썼다. 산에 있던 모세가 아무런 방해 없이, 중단 없이 교제했던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계셨던 생애 전체 중에서, 이 기간이 아마 거룩한 완전과 신성한 생활에 가장 가까웠던 시기로 보인다. 이로써 그는 사탄의 고발을 대비했고, 나아가 그것에 대해 무장을 했다.그는 금식을 계속했다(2절). “이 모든 날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았다”고 했다. 이 금식은 전혀 기적 같은 것이다. 마치 모세나 엘리야의 금식과도 같았다. 그것은 그들처럼 그도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처럼 보이게 했다. 아마 그 금식은 모세나 엘리야가 금식했던 호렙의 광야였을 것이다. 그는 “광야”로 물러가심으로써 “세상”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금식은 “몸”에 전혀 애착이 없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이처럼 “세상”과 “육체”에 대해서 해방되었거나 죽은 자들은 쉽게 범접하지 못한다. 우리가 “몸은 제어”하여 복종시키면 시킬수록, 사탄은 그만큼 우리에게 대해서 불리해지는 법이다. Ⅱ. 그리스도는 차례 차례로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매번 유혹자의 의도를 꺾으셨고, 보다 큰 승리자가 되셨다. “40일” 동안 그는 “악마의 시험을” 받았다(2절). 그 시험은 어떤 내적 암시에 의한 시험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군주가 그리스도 안에다 무엇인가를 주입하여 역사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적인 속삭임, 아마 첫 조상들을 유혹할 때처럼 어쩌면 뱀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 유혹의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40일이 끝나자. 유혹자는 그에게 다가와서 친근한 사이인 양 가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렸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2절). 아마 그때 우리 주 예수는 나무들을 둘러보기 시작했으며, 어떤 먹을 만 한 게 없나 하고 살폈을 것이다. 바로 이때를 이용하여 악마는 그리스도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1. “아버지의” 돌보심을 “불신하게끔” 유혹했다. 그래서 “제 발로 서라”고 유혹했다. 즉 아버지께서 그에게 지정하시지 않은 방식으로라도 빨리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라고 했다(3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치 하늘에서 선포되는 음성과도 같았다. “이 돌에게 떡이 되라고 명하라.”
(1) “내가 네게 할 일을 일러주겠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라면, 너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가 네게 먹을 것을 주려고 까마귀나 천사를 보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라.” “아버지의” 돌보심을 “불신하게끔” 유혹했다. 그래서 “제 발로 서라”고 유혹했다. 즉 아버지께서 그에게 지정하시지 않은 방식으로라도 빨리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라고 했다(3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치 하늘에서 선포되는 음성과도 같았다. “이 돌에게 떡이 되라고 명하라.””내가 네게 할 일을 일러주겠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라면, 너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가 네게 먹을 것을 주려고 까마귀나 천사를 보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조리사가 되려 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지도 않은 채 스스로의 예상으로 생활해 나가려 하고, “우리 손의 권능과 권세로” 건강을 누리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그것은 사탄의 유혹(시험)이라고 여기고 거부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의 독립을 꿈꾸게 하는 것이 사탄의 계획이다.
(2) “나는 네게 그것을 해 보라고 도전한다.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할 수 없다면, 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리라.” 얼마 전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즉 하나님은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로 만드실 수 있느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은 네게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필요한 때에, 작은 일을 못한단 말인가 !” “나는 네게 그것을 해 보라고 도전한다.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할 수 없다면, 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리라.” 얼마 전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즉 하나님은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로 만드실 수 있느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은 네게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필요한 때에, 작은 일을 못한단 말인가 !” 하나님도 친히 이처럼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하나님)가 우리에게 양식을 줄 수 있을까? 그가 우리에게 떡을 줄 수 있을까?”(시 78:19, 20)
[1]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그는 “돌을 떡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배가 고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그는 “돌을 떡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배가 고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첫째, 사탄이 명하는 것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그리스도와 악마의 주군 사이에 무슨 맹약이라도 있었는 듯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마에게 틈을 타게 하는”(엡 4:27)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기적은 신앙을 확증하기 위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악마는 확증해야 될 아무런 신앙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사탄)를 위해서는”기적을 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는” (요 20:30) 자기의 표적을 보이셨다. 특히 물을 포도주 만드는 “처음 기적”을 행하셨고, 그것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믿는 신앙을 주었을 것이다(요 2:11). 그러나 여기 광야에서는 사탄에게 아무 것도 가르칠 것이 없었다. 둘째, 그는 자기의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기” 까지는 기적을 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굶주림”을 못 견디는 자로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기쁘게”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으러”온 것이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대신 지러온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기 친구들의 위신과 편의를 위해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려 했으나, 자신의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 “돌을 떡으로” 만드는 일을 해 서 “자기를 즐겁게”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넷째,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를 차후로 보류하고 싶었다. 또한 차라리 사탄에게는 약자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조소를 받을망정, 사탄에게 설득되어 부당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자라고 원수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또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라고 했을 때에도 내려 올 수는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니, 그것은 그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자기 아버지(하나님)를 불신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하나님과 “유리된 행동” 혹은 자기의 현재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따위의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기” 때문에(히 2:17 참조), 하나님의 다른 아들들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그의 약속에 의지하여, 또 하나님이 광야로서 먹을 것을 보내 주실 것이라든가 “인도하사 거할 성으로” 보내시리라는 것(시 107:5-7)을 신뢰하면서 살고자 했다. 그러면서 비록 배가 고프지만, 지나간 40일 동안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부지해 주시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2] 그는 그 요구에 말씀으로 답변했다. “기록되었느니라…”(4절). 이것은 그가 예언자적 직능에 임하면서 하신, 기록된 첫 마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 성서의 인용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 확고한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지지해주기 위해 그가 오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는 무한한 말씀이 있고, 전파할 자신의 교리와 또한 세워야 할 종교가 있었지만, 그 말씀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저작을 자신의 규율로 삼고, 우리에게도 사탄과 그의 유혹에는 성경 말씀으로 대항할 것을 권유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요구에 말씀으로 답변했다. “기록되었느니라…”(4절). 이것은 그가 예언자적 직능에 임하면서 하신, 기록된 첫 마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 성서의 인용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 확고한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지지해주기 위해 그가 오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는 무한한 말씀이 있고, 전파할 자신의 교리와 또한 세워야 할 종교가 있었지만, 그 말씀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저작을 자신의 규율로 삼고, 우리에게도 사탄과 그의 유혹에는 성경 말씀으로 대항할 것을 권유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검”이다. 또 그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방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안에서 권능을” 얻어, “그 권능 안에서 나가고” 들어오며, 우리의 영적 상태가 어떠하든 “기록된 바”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은 바로 우리를 “교훈하고”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인용한 성경 본문은 신명기 8장 3절의 인용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돌을 떡으로 만들 필요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처럼, 내게도 영양을 위해서라면 만나를 보내 주실 수 있느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곧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삶을 위해서 지시해 주시는 모든 것에 의해서 살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는 이 40일 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평안히 살았을 것인가? “떡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 그 말씀에 대한 명상과 교제에 의해서, 그리고 그 말씀 속에 또 그 말씀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지냈다. 그는 다시 “배가 고프기” 시작했지만,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일상적인 방식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식량을 조달해 주신다. 그러므로 어느 때든지 그를 불신해서는 안 되며, 언제든지 의무를 지키는 가운데 그를 의지해야 한다. 식사가 모자라면, 하나님은 식욕을 제거하시든가 “파멸과 기근을 비웃을 수 있는” 그런 강인한 인내력을 주실 수 있다(욥 5:22). 또는 “채소와 물”을 “왕의 진미보다” 더 영양가 있게도 하실 수 있다(단 1:12, 13). 또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무화과나무가 꽃피지 않은”때에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게도 하실 수 있다(합 3:17). 떡이 없을 때에 자신은 약속으로 여러 끼니의 식사를 했다고 말한 그녀는 참으로 실제적인 신앙인 이었다. 2. 사탄은 “자기에게서” 나라를 “인수 받으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그 나라를 물려받을 수 있었고, 또 “아버지에게 절해야” 했던 것이다(5-7절). 사탄은 “자기에게서” 나라를 “인수 받으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그 나라를 물려받을 수 있었고, 또 “아버지에게 절해야” 했던 것이다(5-7절). 누가복음 기자는 이 유혹을 두 번째에 놓았으나, 마태는 제일 마지막에 놓았다. 아마 실제는 마지막에 있었던 유혹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가는 이 시험에 대단히 관심이 컸다. 그것이 그 시험이 가장 속 검고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문제를 서둘러 취급한 것이다. 악마가 우리의 첫 조상들을 유혹할 때에, 그들에게 그 금단의 열매가, 먼저 “먹기에 좋다”고 제안했고, 그 다음에는 “눈에 즐겁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두 가지의 매력에 다 넘어가고 말았다. 사탄은 여기서 먼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했다. 떡은 먹기에 좋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세상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보기에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시험에서 그리스도는 사탄을 물리쳤다. 아마 누가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순서를 바꾸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1) 사탄이 그리스도를 이겨 자기의 부하로 만들고, 자기의 파견으로 자기의 나라를 인수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시험을 어떻게 “이끌어 나갔는가”를 보자.
[1] 사탄은 그에게 “순식간에 세상 모든 나라들”의 전경을 찬란하게 제시했다. 그것이야말로 사탄이 가장 환상(fancy)에 충족할 것이요, “참된” 세계처럼 보이는 그런 광경이다. 사탄은 자기의 목적을 보다 쉽게 달성하기 위해 “그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 시험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요단 강 건너편에 가 계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혹자는 사탄이 데리고 간 산은 비스가 산꼭대기라고 본다. 그 곳은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았던 곳이다. 사탄이 그리스도를 이겨 자기의 부하로 만들고, 자기의 파견으로 자기의 나라를 인수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시험을 어떻게 “이끌어 나갔는가”를 보자.사탄은 그에게 “순식간에 세상 모든 나라들”의 전경을 찬란하게 제시했다. 그것이야말로 사탄이 가장 환상(fancy)에 충족할 것이요, “참된” 세계처럼 보이는 그런 광경이다. 사탄은 자기의 목적을 보다 쉽게 달성하기 위해 “그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 시험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요단 강 건너편에 가 계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혹자는 사탄이 데리고 간 산은 비스가 산꼭대기라고 본다. 그 곳은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았던 곳이다. 그러나 공중 권세의 왕인 악마가 여기서 우리 구주께 제시한 것은 하나의 환성(phantasm)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누가가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그 주위 사정을 보아서 밝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람이 만일 어느 한 나라의 전경을 본다고 할지라도, 성공적으로 보자면 처음에는 이쪽을 보고 그 다음에는 돌아서서 저쪽을 보면서 두리번거려야 하기 때문인 까닭이다. 이처럼 악마는 우리 구주를 거짓으로써 속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악마 자신이 그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함으로써 자기(악마)가 그 모든 나라를 “그(그리스도)에게 줄”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으려 했던 것이다. [2] 사탄은 이 나라들을 “그에게 모두 넘겨주겠다”고, 즉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영광”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고 하는 대담한 제안을 했다(6절). 혹자는 이 때 악마가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했으며, 나아가 나라들을 주관하도록 파송된 천사 중의 하나처럼 다른 모든 천사들을 싸워 물리쳤으므로, 자기가 그 모든 처분권을 “넘겨받았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나라들을 그에게 줄 것인데, 그것은 나라들이 그에게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조건 때문에 방해물을 놓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무릎을 꿇어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은 선한 천사라면 허락도 하지 않을 그런 요구였다. 선한 천사라면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여주었더라도 그런 요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계 19:10; 22:9 을 보라). 사탄은 이 나라들을 “그에게 모두 넘겨주겠다”고, 즉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영광”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고 하는 대담한 제안을 했다(6절). 혹자는 이 때 악마가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했으며, 나아가 나라들을 주관하도록 파송된 천사 중의 하나처럼 다른 모든 천사들을 싸워 물리쳤으므로, 자기가 그 모든 처분권을 “넘겨받았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나라들을 그에게 줄 것인데, 그것은 나라들이 그에게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조건 때문에 방해물을 놓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무릎을 꿇어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은 선한 천사라면 허락도 하지 않을 그런 요구였다. 선한 천사라면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여주었더라도 그런 요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계 19:10; 22:9 을 보라). 그러나 나는 그가 사탄이기 때문에 이런 권능을 주장했다고 본다. 그 권능은 “주님이” 그에게 넘겨 준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들의 왕들과 그 백성이 넘겨 준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과 영광을 악마에게 넘겨주었다(엡 2:2). 따라서 악마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운다. 또 “이 세상 임금”이라고도 불리운다. “이방인들을 자기의 유업”으로 받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사실이다(시 2:8). 악마는 말한다. “왜 그러냐? 이방인들은 나의 것이요, 나의 백성이요, 내 숭배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내게 주겠다. 내가 그들을 네게 주겠다. 다른 사람들이 네 앞에서 그리하듯이 그들은 내가 네게 준 보상이라고 말하자(호 2:12). 그리고 나에 의해서, 나로부터, 내 밑에서 그들을 가지고 장악하기로 동의하라.” [3] 악마는 그리스도에게 충성과 경배를 요구했다. “네가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7절). 악마는 그리스도에게 충성과 경배를 요구했다. “네가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7절). 첫째,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경배하게 하려 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나란히 악마를 경배하라는 것이다. 악마는 그리스도가 단 한 번만이라도 자기의 동역자가 되어 준다면, 둘도 없는 충신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가 계약하기를 바랐다. 즉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이 세상 나라들의 소유권을 잡을 때에, 그 나라 안의 종교를 변경시키지 말고,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제 민족들에게 “악마에게 제사하는”(고전 10:20) 것을 묵인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마귀 숭배(demon-woship)를 존속시켜 주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그 나라들의 모든 권력과 영광을 넘겨주리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취하려는 자들은 모두 사탄의 노예가 되리라. 사탄은 단지 사람들의 마음과 애착과 경배를 갖기만 하면, 그 모든 것도 가질 수 있게 되고, 불복종의 “자식들에게” 역사 할 수 있다. 그 때에는 실상 사탄이 “그들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2) 우리 주 예수는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쳤는가? 그는 단호하게, 크게 혐오하여 거부했다(8절). “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난 참을 수가 없노라. 뭐라고 ! 내가 받들려고 온 그 하나님의 원수를 경배하라고 ! 내가 구원하러 온 인간의 원수를 경배하란 말이냐? 아니다 난 도무지 그럴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은 유혹에는 이유를 따져서는 안 된다. 즉각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는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쳤는가? 그는 단호하게, 크게 혐오하여 거부했다(8절). “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난 참을 수가 없노라. 뭐라고 ! 내가 받들려고 온 그 하나님의 원수를 경배하라고 ! 내가 구원하러 온 인간의 원수를 경배하란 말이냐? 아니다 난 도무지 그럴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은 유혹에는 이유를 따져서는 안 된다. 즉각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말씀 한 마디로 당장 사탄의 뒤통수를 쳤다.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을 예배하라 하였느니라.” 또 그럴 뿐만 아니라 “그분만” 경배하고, “다른” 자를 경배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탄을 경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아버지가 자기에게 “넘겨 준 세상 나라”들을 차지하게 되면 – 이것은 곧 있을 일이었다 – 그 나라들 속에 있는 악마 예배를 더 이상 묵인하지도 않을 것이다. 절대 그럴 수 없다. 그의 복음이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악마 예배가 좌절되고 괴멸되리라. 그리스도는 결코 사탄과 협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신론”과 “우상 숭배”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면, 무너져야만 한다.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되며, 악마 예배에서 떠나 오직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예배로 돌아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간들 중에서 재수립할 위대한 신법(神法)이요, 그의 거룩한 종교가 사람들을 복종하게 할 그 법이다. 즉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해야 한다”는 법이다. 따라서 어떤 피조물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든 – 그것이 성도이든 천사이든, 동정녀 마리아 일지라도 – 그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정면으로 도전한 자들이요, 다시금 이방 종교로 돌아간 자들이다. 3. 악마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를 믿는다는 구실 밑에 그리스도를 자살자로 만들려고 유혹했다. 그런 보초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악마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를 믿는다는 구실 밑에 그리스도를 자살자로 만들려고 유혹했다. 그런 보초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관찰하자.
(1) 이 시험에서 악마가 노린 것은 무엇인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리라”(9절).
[1]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위한 새로운 증거를 요구했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하늘로부터 나온 음성으로, 또 그 위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보여 준 증거는 불충한 듯이 말했다. 이 시험에서 악마가 노린 것은 무엇인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리라”(9절).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위한 새로운 증거를 요구했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하늘로부터 나온 음성으로, 또 그 위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보여 준 증거는 불충한 듯이 말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입증한 방법이 가장 합당한 방법이 못되기라도 한 듯이, 하나님의 명예를 깍아내리는 그런 것을 요구한 것이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성령의 내재하심을 불신하라는 주장이었다. 성령의 내재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또 가장 중대하게 그리스도에게 증거해 주는 자료였다(히 1:8, 9). [2] 악마는 이 사실을 세상에다 알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라고 그리스도에게 요구했다. 사실상 악마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곳은 “어두컴컴한 한 구석”에서였고, 요한의 세례를 받던 평민들 속에서 되어진 링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에서,” 즉 성전 예배에 참례하는 높은 자들 중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제 증거 한다면, 그리고 그 증거로 거기서 뛰어내리고도 다치지 않게 된다면, 그리스도는 즉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온 사신임이 인정되어지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그리스도 자신의 궁리를 영예롭게 만들고(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준 방법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회개한 자들에게 더욱 모습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계획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제사장들에게보다는 그 회개자들에게 더 잘 수용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3] 아마 악마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넘어뜨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피해는 끼칠 수 있으리라고 다소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져 버린다면, 그 추락은 그의 죽음이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악마는 보기 좋게 그리스도를 이탈시킨 셈이 된다.(2) 악마는 이 시험을 더욱 후원하고 강화시켰다. “기록된바…..”라고 제안을 했다(10절). 그리스도가 성서를 인용하여 악마를 대항했다. 그리고 악마는 그리스도와 대등하 게 되고자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역시 성서를 인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려 했다. 성서를 왜곡시키고, 성스런 저작들을 최악의 일로 이용해 먹는 것은 이단자들이나 유혹자들에게는 통상적으로 있어 왔던 일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하나님)가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를 명할”것이요, 그래서 “그들이 손으로 받들어 주리라.” 이제 그리스도는 성전의 첨탑에 올라가 있다. 따라서 천사들의 그러한 수종을 기대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으리라.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은 그가 들어가 있기에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2:46). 그리고 태양 아래 있는 모든 장소가 끊임없이 천사들의 수호를 받고 있다 할진대, 성전은 반드시 천사의 감시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시 68:17). 하나님은 천사들의 보호를 약속하시사, 우리로 하나님을 믿고 시험하지 말 용기를 주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한은 천사들의 수종도 함께 약속된다. 그러나 그 이상일 수는 없다. “네가 네 길이 있는 땅에 다닐 때에는 그들이 너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네가 공중을 나르겠다는 망상은 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3) 악마는 이 시험에서 어떻게 패배당했는가?(12절) 그리스도는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했다. 거기에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주었는데도, 하나님의 계시의 증거가 될 표적을 구하는 시험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런 시험을 했다. 즉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다.” 그 때 그들을 하나님이 “바위에서 물을 내 주셨도다.” “그러나 고기까지 줄 수야 있겠는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악마는 이 사실을 세상에다 알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라고 그리스도에게 요구했다. 사실상 악마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곳은 “어두컴컴한 한 구석”에서였고, 요한의 세례를 받던 평민들 속에서 되어진 링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에서,” 즉 성전 예배에 참례하는 높은 자들 중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제 증거 한다면, 그리고 그 증거로 거기서 뛰어내리고도 다치지 않게 된다면, 그리스도는 즉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온 사신임이 인정되어지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그리스도 자신의 궁리를 영예롭게 만들고(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준 방법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회개한 자들에게 더욱 모습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계획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제사장들에게보다는 그 회개자들에게 더 잘 수용될 것이기 때문이었다.아마 악마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넘어뜨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피해는 끼칠 수 있으리라고 다소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져 버린다면, 그 추락은 그의 죽음이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악마는 보기 좋게 그리스도를 이탈시킨 셈이 된다.악마는 이 시험을 더욱 후원하고 강화시켰다. “기록된바…..”라고 제안을 했다(10절). 그리스도가 성서를 인용하여 악마를 대항했다. 그리고 악마는 그리스도와 대등하 게 되고자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역시 성서를 인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려 했다. 성서를 왜곡시키고, 성스런 저작들을 최악의 일로 이용해 먹는 것은 이단자들이나 유혹자들에게는 통상적으로 있어 왔던 일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하나님)가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를 명할”것이요, 그래서 “그들이 손으로 받들어 주리라.” 이제 그리스도는 성전의 첨탑에 올라가 있다. 따라서 천사들의 그러한 수종을 기대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으리라.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은 그가 들어가 있기에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2:46). 그리고 태양 아래 있는 모든 장소가 끊임없이 천사들의 수호를 받고 있다 할진대, 성전은 반드시 천사의 감시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시 68:17). 하나님은 천사들의 보호를 약속하시사, 우리로 하나님을 믿고 시험하지 말 용기를 주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한은 천사들의 수종도 함께 약속된다. 그러나 그 이상일 수는 없다. “네가 네 길이 있는 땅에 다닐 때에는 그들이 너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네가 공중을 나르겠다는 망상은 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악마는 이 시험에서 어떻게 패배당했는가?(12절) 그리스도는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했다. 거기에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주었는데도, 하나님의 계시의 증거가 될 표적을 구하는 시험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런 시험을 했다. 즉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다.” 그 때 그들을 하나님이 “바위에서 물을 내 주셨도다.” “그러나 고기까지 줄 수야 있겠는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그리스도도 만일 “하나님은 실로 내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약속을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은 더 큰 자이다. 그러나 그가 이제 나를 위해 자기 천사들을 명할 수도 있겠는가? 이들은 더 작은 자들이다”라고 했더라면, 죄를 짓고 말았을 것이다. Ⅲ. 이 투쟁의 결과와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13절) 승리를 거둔 우리 구주는 자기의 터전을 지켰고, 정복자(우리 조상을 정복한 자 – 악마를 이름. 역주)를 격퇴시켰다. 그 자신에게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서도 격퇴시켰다. 1. 악마는 자기의 화살통을 다 비워 버렸다. 그리스도는 악마가 자기에게 도전하여 말로나 행동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악마에게 온갖 발악을 다 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악마는 패배 당했다. 그리스도는 시험받으심으로써 모든 시험이 종식되기까지 수단을 받으셨는가? 또한 우리도 우리에게 할당된 “유혹(시험)의 시간”이 지나가기까지 우리들의 온갖 시련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되겠는가?
2. 그러나 그는 전투를 중지했다. 악마가 “그를 떠나갔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공격한다는 일이 소득 없는 짓임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맹열한 창을 던졌지만, “그에게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스도에게는 눈먼 곳이나 어디 한 곳 허점이 없었다. 그러므로 결국 사탄은 그 사건을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가 악마를 대항하면 악마가 우리를 떠나 달아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약 4:7 참조).
3. 그러나 악마는 계속 그리스도에게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고, 다시 공격하리란 결의를 품고 떠났다. 악마도 단지 “잠시간만” a;cri kairou/ 즉 한동안까지만 떠났다. 즉 다시금 해방되어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지만 떠난 것이요, 그 때는 “유혹자”(시험하는 자)로서가 아니다. 유혹자는 그를 “죄짓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치려한다. 그것이 악마가 지금 목적하고 있는 바요, 완전히 패하고 만 지점이다. 그 때에는 “박해자”로서 등장하여 유다와 그 밖의 다른 악의 도구들 – 이들은 악마가 부리는 자들이다 -을 통하여 그를 “고난받도록” 만들고, “그의 발뒤꿈치가 상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이미 옛날에 악마에게 허락된 일(창 3:5)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물론 “그(악마) 자신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건이 된다. 악마가 “지금은 떠났다.” 그리스도께서 “흑암의 권세”를 부르는 시간이 오면(22:53), 그 때는 다시 이 세상 임금이 “오리라”(요 16:30). 악마는 자기의 화살통을 다 비워 버렸다. 그리스도는 악마가 자기에게 도전하여 말로나 행동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악마에게 온갖 발악을 다 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악마는 패배 당했다. 그리스도는 시험받으심으로써 모든 시험이 종식되기까지 수단을 받으셨는가? 또한 우리도 우리에게 할당된 “유혹(시험)의 시간”이 지나가기까지 우리들의 온갖 시련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되겠는가?그러나 그는 전투를 중지했다. 악마가 “그를 떠나갔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공격한다는 일이 소득 없는 짓임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맹열한 창을 던졌지만, “그에게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스도에게는 눈먼 곳이나 어디 한 곳 허점이 없었다. 그러므로 결국 사탄은 그 사건을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가 악마를 대항하면 악마가 우리를 떠나 달아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약 4:7 참조).그러나 악마는 계속 그리스도에게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고, 다시 공격하리란 결의를 품고 떠났다. 악마도 단지 “잠시간만” a;cri kairou/ 즉 한동안까지만 떠났다. 즉 다시금 해방되어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지만 떠난 것이요, 그 때는 “유혹자”(시험하는 자)로서가 아니다. 유혹자는 그를 “죄짓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치려한다. 그것이 악마가 지금 목적하고 있는 바요, 완전히 패하고 만 지점이다. 그 때에는 “박해자”로서 등장하여 유다와 그 밖의 다른 악의 도구들 – 이들은 악마가 부리는 자들이다 -을 통하여 그를 “고난받도록” 만들고, “그의 발뒤꿈치가 상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이미 옛날에 악마에게 허락된 일(창 3:5)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물론 “그(악마) 자신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건이 된다. 악마가 “지금은 떠났다.” 그리스도께서 “흑암의 권세”를 부르는 시간이 오면(22:53), 그 때는 다시 이 세상 임금이 “오리라”(요 16:30).
4:14 나사렛 회당 안의 예수 (누가복음 4:14-30) 그리스도는 악령을 쳐부수고 난 뒤, 성령의 강한 힘을 힘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악마의 고발을 스스로 방어하신 그는 이제 공세적 “행동을” 개시하여, 말씀 전파와 기적을 통해서 악마에게 공격을 가한다. 그것은 악마가 저항하거나 격퇴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다음을 관찰해 보자. Ⅰ. 그의 전파에 대한 일반적 서술과 “갈릴리에서” 접하게 된 사건 –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다 – 에 대해 살피자. 그리스도가 거기에서 자기의 사역을 개시했다는 것은 그의 겸비의 일례이다. 1. 그러나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예언자적 직능의 시행을 위한 자질을 갖추어 주었던 바로 그 성령이 다시금 그를 그곳으로 강하게 인도해 갔다. 그는 사람들이 불러주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빛과 생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거기에 간 그는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즉 공중 예배당이었다. 거기서는 그들이 성전에서처럼 의식적 예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건적인 도덕 행위, 즉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응용하며, 기도와 찬송을 드리며, 교인 훈련을 받기 위해 모였다. 바벨론 유배 사건 이후로는 이런 일이 더욱 잦았다. 그때에는 의식을 갖춘 예배가 거의 사라져 버린 때였던 것이다.
3. 그는 마치 위대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자처럼 가르쳤다. “그에 대한 소문(명성)이 사방에 퍼졌다”(14절). 그리고 그것은 좋은 소문이었다. 그는 “뭇 사람에게서 칭송을 받았다”(15절). 모두가 그를 경모했고 환성으로 영접했다. 그들은 생전에 그런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예언자적 직능의 시행을 위한 자질을 갖추어 주었던 바로 그 성령이 다시금 그를 그곳으로 강하게 인도해 갔다. 그는 사람들이 불러주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빛과 생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거기에 간 그는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즉 공중 예배당이었다. 거기서는 그들이 성전에서처럼 의식적 예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건적인 도덕 행위, 즉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응용하며, 기도와 찬송을 드리며, 교인 훈련을 받기 위해 모였다. 바벨론 유배 사건 이후로는 이런 일이 더욱 잦았다. 그때에는 의식을 갖춘 예배가 거의 사라져 버린 때였던 것이다.그는 마치 위대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자처럼 가르쳤다. “그에 대한 소문(명성)이 사방에 퍼졌다”(14절). 그리고 그것은 좋은 소문이었다. 그는 “뭇 사람에게서 칭송을 받았다”(15절). 모두가 그를 경모했고 환성으로 영접했다. 그들은 생전에 그런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아무런 멸시나 반대에 부딪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칭송했다.” 그리고 아직은 그를 헐뜯는 자들이 없었다. Ⅱ. 나사렛, 곧 그가 자라난 마음에서 전파한 일에 대해서 보자. 그는 거기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가 거기서 어떻게 “전파하셨고,”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를 알게 된다. 1. 그는 거기서 전파했다.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1) 기회를 어떻게 잡았는가? “그는” 다른 지역에서 명성을 얻고 난 연후에 “나사렛으로 갔다.” 그러므로 동향인들이 가할 경멸이나 편견이 최소한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갔다. 거기서 그를 기회를 잡아 전파했다.
[1] “회당” 곧 적절한 장소에서 전파했다. 그가 사적 인물로 있을 때 늘 참례하는 것을 “자기의 규례(관습)로” 삼던 바로 그곳이다(16절).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중 예배에 참례해야 한다. 그는 거기서 전파했다.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자.기회를 어떻게 잡았는가? “그는” 다른 지역에서 명성을 얻고 난 연후에 “나사렛으로 갔다.” 그러므로 동향인들이 가할 경멸이나 편견이 최소한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갔다. 거기서 그를 기회를 잡아 전파했다.”회당” 곧 적절한 장소에서 전파했다. 그가 사적 인물로 있을 때 늘 참례하는 것을 “자기의 규례(관습)로” 삼던 바로 그곳이다(16절).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중 예배에 참례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기의 공적 직무를 띠고 거기서 전파했다. 거기에는 많은 고기들이 있었다. 이 지혜로운 어부는 자기의 그물을 거기에 던졌다. [2] 안식일, 곧 경건심이 있는 유대인들이 세상 노동을 떠난 단순한 의식적 휴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예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전파했다. 마치 그들이 옛적에 “월삭”과 “안식일”에 예언자 학교에 모이곤 했던 습관과 같은 것이었다. 안식일, 곧 경건심이 있는 유대인들이 세상 노동을 떠난 단순한 의식적 휴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예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전파했다. 마치 그들이 옛적에 “월삭”과 “안식일”에 예언자 학교에 모이곤 했던 습관과 같은 것이었다. 안식일에 엄숙한 집회를 열어 지키는 것은 좋은 일임을 기억하라.(2) 그는 그곳을 방문했다.
[1] 그는 성경 말씀을 “읽으려고 섰다.” 그들의 회당에는 매 안식일마다 7명의 낭독자가 있었다. 첫째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레위인이요, 다른 다섯은 그 회당에 소속된 일반 이스라엘인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끔씩 다른 회당에서도 말씀을 “전파”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나사렛 회당을 제외하고는 “성경을 읽었다”는 기사를 보지 못한다. 그는 그곳을 방문했다.그는 성경 말씀을 “읽으려고 섰다.” 그들의 회당에는 매 안식일마다 7명의 낭독자가 있었다. 첫째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레위인이요, 다른 다섯은 그 회당에 소속된 일반 이스라엘인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끔씩 다른 회당에서도 말씀을 “전파”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나사렛 회당을 제외하고는 “성경을 읽었다”는 기사를 보지 못한다. 이제 그는 아마 종종 해 오던 대로 자기의 직무를 거행했다. 그는 예언서 중에서 한 과를 읽었다(행 13:15). 경건한 집회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도 자기가 그런 일에 부려지는 것을 위신 손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자. [2] 회당 지도자나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그 사역자가 “이사야서를 그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pro hac vice ─즉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아무런 방해자도 없었고 당연한 인정을 받았다. 그날 읽을 성경의 제2과는 이사야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3) 그는 그 본문을 설교했다. 그는 “읽으려고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일”을 존중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에스라가 율법서를 폈을 때, “모든 사람이 일어섰다”(느 8:5). 이제 그리스도도 예언서를 읽으려 할 때 그렇게 하신 것이다. 회당 지도자나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그 사역자가 “이사야서를 그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pro hac vice ─즉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아무런 방해자도 없었고 당연한 인정을 받았다. 그날 읽을 성경의 제2과는 이사야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그는 그 본문을 설교했다. 그는 “읽으려고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일”을 존중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에스라가 율법서를 폈을 때, “모든 사람이 일어섰다”(느 8:5). 이제 그리스도도 예언서를 읽으려 할 때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제 그 책이 “그에게 건네”지자,
[1] 그는 그것을 “폈다”(열었다). 구약 성서는 어느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것을 열기까지는, 줄곧 “닫혀”있는 것이다(사 29:11). “그 책을 받아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는 “죽임당한 여린 양”이었다. 그는 그 책을 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차례를 따라 “그 날”에 읽기로 지정된 곳을 “찾았다.” 물론 그가 그 차례를 지켜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즉시 그곳을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의 본문으로 취했다. 그리하여 그의 본문은 이사야 61장 1, 2절에서 취한 것이 되었다. 그 본문은 여기에 자세히 인용되어 있다(18, 19절). 그는 그것을 “폈다”(열었다). 구약 성서는 어느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것을 열기까지는, 줄곧 “닫혀”있는 것이다(사 29:11). “그 책을 받아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는 “죽임당한 여린 양”이었다. 그는 그 책을 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그는 차례를 따라 “그 날”에 읽기로 지정된 곳을 “찾았다.” 물론 그가 그 차례를 지켜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즉시 그곳을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의 본문으로 취했다. 그리하여 그의 본문은 이사야 61장 1, 2절에서 취한 것이 되었다. 그 본문은 여기에 자세히 인용되어 있다(18, 19절). 그 날에 그 본문이 읽을 순서가 된 데에는, 섭리의 역사가 있었다. 그 부분은 아주 분명히 메시야를 말해 주고 있었고, 더욱이 메시야를 증거해 주는 성경을 “매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음성”을 듣고도(행 13:27) “그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곳이었다. 그 본문은 그리스도의 과업을 충실히 설명해 주고 있고, 또한 그가 세상에 와서 할 일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사실을 주목하자. 첫째, 그는 그 일을 위한 자격을 어떻게 구비했는가? 그것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했다”는 것이었다. 성령의 온갖 은사와 은총이 그에게 부여되었는데, 다른 예언자들에게서처럼 한도껏 부여된 것이 아니라 무한히 부여된 것이다(요 3:34). 이제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들어갔다(14절). 둘째, 그는 어떻게 위임받았는가? “그가 내게 기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의 비상한 자격이 위임장이 되었다. 그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할뿐더러 그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무슨 일로 “지정하시면,” 그 일을 위해 그는 그들에게 “기름 부으신다.” “그가 나를 보내셨으므로, 그는 또한 성령을 보내시사 나와 동행케 하셨다.” 셋째, 그의 과업은 무엇인가 ! 그가 자격을 갖추고 위임을 받은 것은, 1. 위대한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는 “전파하기 위해서 기름부음 받았다.” 그것이 3번이나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이제 개시한 일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는 “전파하기 위해서 기름부음 받았다.” 그것이 3번이나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이제 개시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1) 그는 누구에게 전파했는가?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즉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유대 학자들은 그들을 경멸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거절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죄로 인하여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에게이다. 그들에게 복음과 그 은총이 영접될 것이요, 그들은 그것을 받으리라(마 11:5).
(2) “무엇을” “전파”했는가? 한 마디로 하면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euvaggeli,zesqai ─즉 복음화하기 위해서 보냄 받았다. 그들에게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 전파가 효력을 내게 하기 위해서 왔다. 복음을 그들의 귀에만이 아니라 마음에다가도 전하여, 그들이 복음으로 재주형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세 가지를 전파했다.
[1]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이다. 복음은 애굽이나 바벨론에 있던 이스라엘에게처럼 자유의 선포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죄인들은 죄책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그의 성령과 은총에 의해서 부패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그것이야말로 죄악의 굴레에서의 해방이다. 그 해방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머리로 삼고자 하며 기꺼이 그의 지배를 받으려는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다. [2] “눈먼 자들에게 시력의 회복”이다. 그는 복음의 말씀으로 “암흑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 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은총의 권능으로 “눈먼” 자들에게는 시력을 주기 위해서 왔다. 이방인들은 물론이요 중생하지 못한 모든 자들은 삼손이나 시드기야 처럼 “속박”을 받고 있는 자일 뿐만 아니라 “눈먼” 자들이다. 그는 자기가 우리들에게 “안약”이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러 왔다. 그 약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약이다. “주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라면, 그의 응답은 “너의 시력을 받으라”하는 것이 될 것이다. [3] “주의 은혜의 해”의 선포이다(19절). 그는 세상 사람들이 거역하고 있던 그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새로운 조건으로 그들을 “용납”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 주려고 왔다. 또한 아직도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수락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 왔다.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에게는 자비”의 때이다. 그는 누구에게 전파했는가?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즉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유대 학자들은 그들을 경멸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거절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죄로 인하여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에게이다. 그들에게 복음과 그 은총이 영접될 것이요, 그들은 그것을 받으리라(마 11:5).”무엇을” “전파”했는가? 한 마디로 하면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euvaggeli,zesqai ─즉 복음화하기 위해서 보냄 받았다. 그들에게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 전파가 효력을 내게 하기 위해서 왔다. 복음을 그들의 귀에만이 아니라 마음에다가도 전하여, 그들이 복음으로 재주형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세 가지를 전파했다.”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이다. 복음은 애굽이나 바벨론에 있던 이스라엘에게처럼 자유의 선포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죄인들은 죄책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그의 성령과 은총에 의해서 부패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그것이야말로 죄악의 굴레에서의 해방이다. 그 해방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머리로 삼고자 하며 기꺼이 그의 지배를 받으려는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다.”눈먼 자들에게 시력의 회복”이다. 그는 복음의 말씀으로 “암흑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 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은총의 권능으로 “눈먼” 자들에게는 시력을 주기 위해서 왔다. 이방인들은 물론이요 중생하지 못한 모든 자들은 삼손이나 시드기야 처럼 “속박”을 받고 있는 자일 뿐만 아니라 “눈먼” 자들이다. 그는 자기가 우리들에게 “안약”이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러 왔다. 그 약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약이다. “주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라면, 그의 응답은 “너의 시력을 받으라”하는 것이 될 것이다.”주의 은혜의 해”의 선포이다(19절). 그는 세상 사람들이 거역하고 있던 그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새로운 조건으로 그들을 “용납”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 주려고 왔다. 또한 아직도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수락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 왔다.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에게는 자비”의 때이다. 이 구절은 “면제(석방)”년(年)을 비유한 것이거나 “희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 해는 종들에게는 “은혜의(용납될 수 있는)해였다. 그 때가 되면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었다. 빚진 자들에게 대한 모든 가혹한 행위도 모두 중지된다. 땅을 저당 잡혔던 자들은 땅을 다시 돌려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희년의” 나팔을 불려고 왔다. 그리고 “그 즐거운 소리”를 듣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있다(시 89:15). 그 때는 은혜의 때이다.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위대한 “의원”이 되려고 왔다. “상한 심령을 고치고,” 위로하며, 고통 받는 양심을 어루만져 주고,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겸비해진 자들에게 평화를 주며, 죄로 인하여 닥칠 하나님이 진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며, 죄책과 부패의 짐으로 고심하며, 지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안식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왔다.3. 위대한 “구속자(救贖者)”가 되기 위해 왔다. 고레스왕이 포로 된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했듯이, 그리스도는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그는 “누구든 원하는 자는” 고향 이스라엘로 “올라가도 좋다”고 선언했다), 상처 입은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 그는 그의 영에 의해서 마음을 “움직이시고”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이것은 옛날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불가능하다(스 1:5). 그리스도는 위대한 “의원”이 되려고 왔다. “상한 심령을 고치고,” 위로하며, 고통 받는 양심을 어루만져 주고,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겸비해진 자들에게 평화를 주며, 죄로 인하여 닥칠 하나님이 진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며, 죄책과 부패의 짐으로 고심하며, 지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안식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왔다.위대한 “구속자(救贖者)”가 되기 위해 왔다. 고레스왕이 포로 된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했듯이, 그리스도는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그는 “누구든 원하는 자는” 고향 이스라엘로 “올라가도 좋다”고 선언했다), 상처 입은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 그는 그의 영에 의해서 마음을 “움직이시고”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이것은 옛날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불가능하다(스 1:5).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빚진 자요 죄수들인 가난한(불상한) 죄인들을 해방시키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다. 예언자들은 자유를 선포할 수 있을 뿐이지만, 권위 있는 자로서, 또 “죄를 용서해 주는 지상의 권능을” 가진 자로서 그는 “자유케 하려고” 왔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여기에 부가되어 있는 것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 사실을 이렇게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성경 낭독자들에게 허용한 자유에 따르면, 성경을 읽는 중에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고, 그 본문을 해설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이사야 58장 6절에다 이런 것을 추가했다. 이사야서에 보면,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가게 하라”는 것이 은혜의 해에 해야 할 의무로 되어 있고, 이 구절은 칠십인역이 사용한 구절과 꼭 같은 것이다.
(4) 그리스도가 이 본문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킨 사례가 나와 있다(21절). 그는 말씀을 읽은 다음, “책을 말았다(덮었다).” 그리고는 그 일을 맡은 “사역자” 즉 “서기”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앉았다”. 이것은 유대 교사들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그는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다”(마 26:55). 그리스도가 이 본문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킨 사례가 나와 있다(21절). 그는 말씀을 읽은 다음, “책을 말았다(덮었다).” 그리고는 그 일을 맡은 “사역자” 즉 “서기”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앉았다”. 이것은 유대 교사들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그는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다”(마 26:55). 이제 이렇게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오늘 이 성경이 당신들의 귀에서 이루어졌다. 이것, 곧 이사야가 예언의 방식으로 기록했고, 이제 역사의 방식으로 너희에게 읽어 준 바이니라.”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이 시작됨으로써 실현되기 시작된 것이다. “이제.” 그들이 다른 지역에서 그가 베푼 그의 설교와 기적에 관해 들은 그 보도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바로 그들의 회당에서 그들에게 들려준 그 설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데에 대한 그의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이 성경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었을 공산이 아주 크다. 나아가 자유와 시력과 치유를 선포한 그의 전파에서, 그리고 “주의 은혜의 해”가 주는 모든 축복에서 이루어졌다고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는 그밖에도 다른 많은 은혜로운 말씀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종종 긴 설교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긴 설교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이날 이 성경이 이루어졌느니라”는 이 말씀은 새로운 도입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메시야에게서 실현되어야 할 구약 성서의 모든 말씀은 주 예수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이 사실은 바로 이분이 “오실 그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2]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성경의 실현”을 관찰해 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그의 은밀한 말씀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계시된 그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경과 하나님의(이루어진)섭리를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은 그 양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5) 청중들의 “주목”과 “칭송”이 나와 있다.
[1] 그들이 “주목(注目)”했다(20절).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의 눈(아마 그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이 그를 주목했다.” 그들은 최근에 그에 관해 많은 소문을 들었으므로, 그가 할 말에 큰 기대를 가지고 온 것이다. 사역자의 말을 들으며 눈으로 주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눈이 마음에 감동을 주듯이, 역시 마음은 눈을 따라가고, 눈에 따라서 고정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나아가 우리도 지금부터 그 사역자를 통해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법을 배우자. “내 주께서 그의 종들에게 무어라 하셨는가?” [2] 그들의 “감탄”(22절)이 있다. “그들이 모두 그를 증거 했다.” 즉 그가 감탄할 만큼 말을 잘하고, 요령 있게 한다고 증거 했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칭찬을 보냈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 의하면, 그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메시야에게서 실현되어야 할 구약 성서의 모든 말씀은 주 예수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이 사실은 바로 이분이 “오실 그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성경의 실현”을 관찰해 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그의 은밀한 말씀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계시된 그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경과 하나님의(이루어진)섭리를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은 그 양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청중들의 “주목”과 “칭송”이 나와 있다.그들이 “주목(注目)”했다(20절).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의 눈(아마 그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이 그를 주목했다.” 그들은 최근에 그에 관해 많은 소문을 들었으므로, 그가 할 말에 큰 기대를 가지고 온 것이다. 사역자의 말을 들으며 눈으로 주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눈이 마음에 감동을 주듯이, 역시 마음은 눈을 따라가고, 눈에 따라서 고정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나아가 우리도 지금부터 그 사역자를 통해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법을 배우자. “내 주께서 그의 종들에게 무어라 하셨는가?”그들의 “감탄”(22절)이 있다. “그들이 모두 그를 증거 했다.” 즉 그가 감탄할 만큼 말을 잘하고, 요령 있게 한다고 증거 했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칭찬을 보냈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 의하면, 그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훌륭한 사역자들과 훌륭한 설교를 보고 들으면서 감탄은 하나 그들 자신은 결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살펴보자. 첫째, 그들이 무엇에 감탄했는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이었다. “은혜로운 말,” 좋은 말, 인정에 넘치는 말이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은혜로운 말”이란 것을 명심하자. ‘그의 입술에” 은혜가 “부어지기” 때문에(시 45:2), 그의 입술에서 은혜의(은혜로운)말이 나온다. 그리고 이 은혜로운 말은 “기이히 여기게”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경이로운 것이요, 그는 그의 은혜, 그의 은혜로운 말, 그리고 그 말에 동반되는 그 권능에 있어서 경이롭다. 그가 우리와 같이 은혜를 모르는 천한 자들에게 그가 그처럼 “은혜로운 말”을 했다는 것은 실로 기이한(경이로운)일이다. 둘째, 이 경이감을 더욱 증가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그의 출생(기원)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므로 그의 출신이나 교육이라야 하찮은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떤 자들은 그의 “은혜로운 말”을 더욱 더 기이히 여기게 되었을 것이고, 그 사람은 필경 하나님께 대해 배워야 할 자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가르칠 수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또 어떤 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그의 은혜로운 말에 대해 가졌던 경이감을 고쳐먹고는, “실제로는” 그 말에 아무 것도 기이할 것이 없으며, 어떻든 그는 “요셉의 아들”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게 비천한 자에게서 어떻게 위대하고 중대한, 가치 있는 것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6) 그리스도는 자기의 청중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을 반대를 미리 알았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청중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을 반대를 미리 알았다. 관찰해 볼 것이 있다.
[1] 그 반대는 무엇인가? “너희는 반드시 ‘의원아, 네 자신을 고치라’고 말할 것이다(23절). 너희는 내가 요셉의 아들, 곧 너희 이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지역에서 행한 것과 같이 너희에게도 기적을 행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마치 사람이 의원에게 그가 유능하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가족들과 동포들도 고쳐야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 반대는 무엇인가? “너희는 반드시 ‘의원아, 네 자신을 고치라’고 말할 것이다(23절). 너희는 내가 요셉의 아들, 곧 너희 이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지역에서 행한 것과 같이 너희에게도 기적을 행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마치 사람이 의원에게 그가 유능하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가족들과 동포들도 고쳐야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베푼 기적의 대다수는 “치유” 기적이다 ─ “그렇다면 왜 네 자신의 고향에서는 다른 마을에서처럼 병자들을 치료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기적들은 사람들의 불신앙을 치료하는 것이었다─”왜 불신아이란 병은 치료하지 않는가? 그게 정말 중대한 병이라면, 다른 마을의 불신앙처럼 네 고향인들의 불신앙도 치료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것으로 우리가 들은 모든 것 ─ 소문이 많이 나 있었다 ─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하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을 기뻐했다. 그것은 그들이 그의 “기이한 일”을 베푸는 서론이 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뿐이다. 그들은 자기들 중의 절름발이, 소경, 병자, 또 문둥이들이 치유되고 도움을 입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마음의 부담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염두에 둔 주요 목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마을도 다른 마을처럼 기적의 무대가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마을에서보다는 바로 이 마을에 그리스도가 일단의 기적을 베풀어서 안 될 일이 있는가? 그리고 다른 어떤 마을보다도 그의 이웃들과 귀인들이 그 기적의 혜택을 받아서 안 될 일이 있겠는가? [2] 그가 취한 행동에 대한 이 반대에 그는 어떻게 대처했는가? 그가 취한 행동에 대한 이 반대에 그는 어떻게 대처했는가? 첫째, 그는 왜 자기가 자기의 본부를 나사렛에다 정하려 하지 않는지, 그 평이하고 실증적인 이유를 들었다. “예언자들이 고향에서는 환영을 못 받는다”는 것, 최소한 좋은 대우도 못 받으며, 다른 마을에서처럼 효과도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이 진리를 확증해 주고 있다. 예언자들이 자비의 전갈이나 기적을 가지고 고향에 파송되어 왔지만, 그들의 출신과 교육 내역을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은 극소수만이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했다. 하몬드(Hammond) 박사도 그렇게 말한다. 친근성이 경멸을 낳는다. 또 우리는 우리가 늘 교제해 오던 자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사적 인간”으로 있을 때 잘 알려진 자들이 “예언자”가 되면 예언자의 당연한 예우를 좀처럼 받지 못한다. 실제로는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국산”보다는 “멀리서 가져온”것, “값비싼 것”이 정평을 받는다. 이것은 사람이란 그 이웃에 대해서 질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은 언제나 자기들은 “열등한”길을 가는데 남들이 “우월한” 길을 가면 배가 아픈 법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하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비상한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구약성서 중의 가장 이름난 두 예언자들의 적절한 본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대응했다. 그들은 자기 동포들에게보다는 외국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쪽을 택한 자들이요, 그것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분명코) 그러했다. 1. 엘리야는 “시돈의 한 성읍, 사렙다 과부”의 생계를 돌봐 주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해서는 하나의 비방자였던 자이다. 그 때 “그 땅에는 기근이” 있었다(25, 26절). 이 이야기는 열왕기 상 17장 9절 이하에 나온다. 여기에 보면, 하늘이 “3년 6개월” 동안 닫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열왕기상 18장에는, “엘리야가 제 3년에” 아합 왕에게 나아갔고, 그 때 그 땅에는 “비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뭄이든지 제 3년이 아니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집에 유숙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이 “그 아들의 아버지”요 “과부들의 재판장”임을 보이셨듯이, 또한 모든 사람에게, 이방인들에게도 자비를 풍성히 주시는 자임을 보이시려 했던 것이다.2. 엘리사는 나아만이란 아람 사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다. 나아만은 아람 사람이요, 이스라엘에게는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수였던 자였다(27절). “엘리사의 시절에는 이스라엘에(도) 많은 문둥이가 있었다.” 특히 4 문둥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람인들의 사마리아 포위가 철수되자 그 소식을 황급히 알린 자들이요, 아람인들의 막사에서 노획한 것들을 가지고 사마리아를 부유하게 해주었던 자들이요, 이 때 그 성읍에 엘리사 자신도 갇혀 있었던 터였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그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었다(왕하 7:1, 3 참조). 그러나 엘리사가 그들을 고쳐 주었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다. 즉 그들이 한 수고나 전해 준 좋은 소식에도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 아람 문둥이만은 고쳐 준 것이다. 신앙을 가진 자들이 아니고는 아무도 치료를 위해서 예언자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시돈의 한 성읍, 사렙다 과부”의 생계를 돌봐 주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해서는 하나의 비방자였던 자이다. 그 때 “그 땅에는 기근이” 있었다(25, 26절). 이 이야기는 열왕기 상 17장 9절 이하에 나온다. 여기에 보면, 하늘이 “3년 6개월” 동안 닫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열왕기상 18장에는, “엘리야가 제 3년에” 아합 왕에게 나아갔고, 그 때 그 땅에는 “비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뭄이든지 제 3년이 아니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집에 유숙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이 “그 아들의 아버지”요 “과부들의 재판장”임을 보이셨듯이, 또한 모든 사람에게, 이방인들에게도 자비를 풍성히 주시는 자임을 보이시려 했던 것이다.엘리사는 나아만이란 아람 사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다. 나아만은 아람 사람이요, 이스라엘에게는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수였던 자였다(27절). “엘리사의 시절에는 이스라엘에(도) 많은 문둥이가 있었다.” 특히 4 문둥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람인들의 사마리아 포위가 철수되자 그 소식을 황급히 알린 자들이요, 아람인들의 막사에서 노획한 것들을 가지고 사마리아를 부유하게 해주었던 자들이요, 이 때 그 성읍에 엘리사 자신도 갇혀 있었던 터였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그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었다(왕하 7:1, 3 참조). 그러나 엘리사가 그들을 고쳐 주었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다. 즉 그들이 한 수고나 전해 준 좋은 소식에도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 아람 문둥이만은 고쳐 준 것이다. 신앙을 가진 자들이 아니고는 아무도 치료를 위해서 예언자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가끔씩 이스라엘인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을 접하곤 했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그 두 사례를 언급한 것은, 자기는 어떤 사적인 이유 때문에 기적의 호의를 베풀지는 않으며, 단지 하나님의 지혜로운 지시에 따라서만 베푼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나사렛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의원아, 네 자신을 고쳐라”고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나 엘리사에게도 으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 고향에서는 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인들에게 기적을 행하셨고, 반면에 이 위대한 예언자들은 이방인들에게 기적을 행하였다. 성도들의 본이, 나쁜 행동을 좋게 만들어 주지는 못하지만, 성미 까다로운 사람들의 비난에서 떠나 자유롭게 선행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2. 그는 어떻게 나사렛에서 “핍박받았는가?”
(1) 그가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 그들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해졌다”(28절). 그들이 “모두” 그래졌다. 이것은 22절 이후 커다란 변화이다. 그 때는 그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었다.” 이와 같이 군중의 견해와 기호는 불확실한 것이요 변덕이 심하다. 그들이 만일 자기들이 기이히 여긴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에다가 신앙을 배합했더라면, 그의 나중 말씀은 그들에게 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귀만 즐겁게 하고”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말이 “그들의 귀에 거슬리게 되었다.” 그들의 부패된 본성을 자극시킨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데도 그 자신을 위대한 예언자들과 비교하며, 자기들은 모든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던 저 부패한 시절의 사람들과 비교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러나 특히 그들을 노하게 만든 것은, 유대인들은 한 번도 생각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다소간의 자비를 베푸셨다고 그가 암시한 사실이다(행 22:21). 그들의 신앙심 깊었던 조상들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일(다윗의 시와 이사야의 예언 중에는 이에 대한 많은 증언이 있다)로 기뻐했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들이 그 계약을 상실해 버린 지금에 와서, 다른 사람들이 그 계약에 들어서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까지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당장 그리스도를 죽일 기도를 할만큼 심히 화가 났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활동 벽두에 당한 가혹한 시련이었고, 그가 “자기 백성에게 왔을”때 통상 접대 받는 일의 한 전조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1] 그들은 그에게 대한 소란을 일으키고 “일어나서,” 그의 설교를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예배까지 망쳐놓았다. 그들은 그 회당 예배가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 [2] 그들은 “그를 마을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는 그토록 오랜 기간을 그곳에 정착하고 살았었지만, 이제 와서는 자기들과 함께 거주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여긴 때문이다. 마치 그가 만물의 찌꺼기밖에 안 되는 양, 그들은 구주와 또 구원 자체를 자기들에게서 쫓아내고 만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다가 그들을 죽여버렸더라면 얼마나 마땅했으랴 ! 그러나 이 날은 그의 인내의 시간이었다. [3] 그들은 “그들 낭떠러지로 끌고 갔다.” 그것은 “그를 밀쳐 내리치고자” 함이었다. 마치 살려 두기에 부적합한 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오랫동안 자기들과 같이 살 때 이미 아무런 해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생활이 얼마나 빛나는 생활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 또 그들은 그에 대한 많은 소문은 들어왔었고, 지금은 자기들도 “그의 은혜로운 말을 감탄하고” 있었지만 – 또 그는 정당하게 자기를 해명하고 이야기할 여유를 허락 받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중 봉기 또는 차라리 광란에 빠져서 그를 급히 쫓아내고, 지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려 든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그가 한 “선행”(요 10:22) 때문에 돌로 쳐 죽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그에게서 선행을 실행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악한 자들의 종국에는 폭력이 돋아나게 마련이다.(3) 그러나 그는 도망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저희 가운데로”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고 “지나갔다.” 하나님께서 소돔인들이나 아람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듯이, 그가 그들의 눈을 멀게 했든지, 아니면 그들의 손을 묶어 두었거나 혼란을 일으켜, 자기들이 뭘 계획하고 있었는지를 모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그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오지 않았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아낌없이 자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는 어떻게 나사렛에서 “핍박받았는가?”그가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 그들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해졌다”(28절). 그들이 “모두” 그래졌다. 이것은 22절 이후 커다란 변화이다. 그 때는 그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었다.” 이와 같이 군중의 견해와 기호는 불확실한 것이요 변덕이 심하다. 그들이 만일 자기들이 기이히 여긴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에다가 신앙을 배합했더라면, 그의 나중 말씀은 그들에게 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귀만 즐겁게 하고”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말이 “그들의 귀에 거슬리게 되었다.” 그들의 부패된 본성을 자극시킨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데도 그 자신을 위대한 예언자들과 비교하며, 자기들은 모든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던 저 부패한 시절의 사람들과 비교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러나 특히 그들을 노하게 만든 것은, 유대인들은 한 번도 생각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다소간의 자비를 베푸셨다고 그가 암시한 사실이다(행 22:21). 그들의 신앙심 깊었던 조상들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일(다윗의 시와 이사야의 예언 중에는 이에 대한 많은 증언이 있다)로 기뻐했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들이 그 계약을 상실해 버린 지금에 와서, 다른 사람들이 그 계약에 들어서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까지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그들은 당장 그리스도를 죽일 기도를 할만큼 심히 화가 났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활동 벽두에 당한 가혹한 시련이었고, 그가 “자기 백성에게 왔을”때 통상 접대 받는 일의 한 전조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그들은 그에게 대한 소란을 일으키고 “일어나서,” 그의 설교를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예배까지 망쳐놓았다. 그들은 그 회당 예배가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그들은 “그를 마을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는 그토록 오랜 기간을 그곳에 정착하고 살았었지만, 이제 와서는 자기들과 함께 거주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여긴 때문이다. 마치 그가 만물의 찌꺼기밖에 안 되는 양, 그들은 구주와 또 구원 자체를 자기들에게서 쫓아내고 만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다가 그들을 죽여버렸더라면 얼마나 마땅했으랴 ! 그러나 이 날은 그의 인내의 시간이었다.그들은 “그들 낭떠러지로 끌고 갔다.” 그것은 “그를 밀쳐 내리치고자” 함이었다. 마치 살려 두기에 부적합한 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오랫동안 자기들과 같이 살 때 이미 아무런 해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생활이 얼마나 빛나는 생활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 또 그들은 그에 대한 많은 소문은 들어왔었고, 지금은 자기들도 “그의 은혜로운 말을 감탄하고” 있었지만 – 또 그는 정당하게 자기를 해명하고 이야기할 여유를 허락 받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중 봉기 또는 차라리 광란에 빠져서 그를 급히 쫓아내고, 지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려 든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그가 한 “선행”(요 10:22) 때문에 돌로 쳐 죽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그에게서 선행을 실행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악한 자들의 종국에는 폭력이 돋아나게 마련이다.그러나 그는 도망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저희 가운데로”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고 “지나갔다.” 하나님께서 소돔인들이나 아람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듯이, 그가 그들의 눈을 멀게 했든지, 아니면 그들의 손을 묶어 두었거나 혼란을 일으켜, 자기들이 뭘 계획하고 있었는지를 모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그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오지 않았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아낌없이 자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자기들에게서 “몰아내었고,” 그는 “자기의 길을 갔다.” 그는 나사렛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으나, 그들이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집은 “황폐하게 버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나사렛 예수임이 하나의 치욕거리임을 말해 주기 위해 부가된 기사이다. 즉 나사렛이란 아무런 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요, 또한 아주 악하고 거치른 곳이며 그에게 “불친절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사렛 사람들의 존경을 크게 받지 못한 사실 속에는 섭리가 깃들어 있어. 그들이 그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와 그의 옛 친지들의 공모 사건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었다.
4:31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 (누가복음 4:31-44)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추방되자, 갈릴리의 다른 한 마을 가버나움으로 갔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보는 그의 설교와 기적에 대한 기사는 앞에서 이미 본 것이다(막 1:21 이하). Ⅰ. 그의 설교를 살펴보자. “그가 안식일에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했다(31절). 하나님의 한 규례인,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안식일”에 적합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32절). 그들이 “그의 가르치심(doctrine)에 놀랐다.” 그가 하는 모든 말에는 무게가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듣는 자들에게 놀라운 발견이 있게 된 것이다. 그 가르침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다. 그 가르침이 어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도 못한 자에게서 나와서 놀라운 것만은 아니다. “그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다.” 그 말씀 속에는 강력한 호소력이 있었고, 살아 있는 권능이 그 말씀과 동반되어 사람의 의식에 와 닿았다. 그러므로 “성령과 권능의 증거로” 한 바울의 가르침도 그 자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스스로 입증해 준다. Ⅱ. 그의 기적을 살펴보자. 1. 특히 두 가지의 구체적 기적을 살펴보자. 그 기적들은 그리스도가
(1) 인간 세계에서와 사람의 영혼의 세계에 있어서, “사탄의 통제자”요 “정복자”임을 보여 준다. 그는 자기의 권능으로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그 사람의 몸에서 사탄을 추방시켰다. “그는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특히 두 가지의 구체적 기적을 살펴보자. 그 기적들은 그리스도가인간 세계에서와 사람의 영혼의 세계에 있어서, “사탄의 통제자”요 “정복자”임을 보여 준다. 그는 자기의 권능으로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그 사람의 몸에서 사탄을 추방시켰다. “그는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관찰해 볼 것이 있다.
[1] 악마는 “더러운 귀신(영)”이다. 그의 본성은 직접 순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과 대립되며, 최초의 상태에서 타락해 버린 것이다. [2] 이 부정한 영은 사람들 속에서 활동한다. 그 때에는 사람들의 몸 속에서 활동했듯이, 역시 사람들의 영혼(soul) 속에서도 활동한다. [3] 사탄의 권능과 역사(役事)에 크게 짓눌려 있는 자들도 “회당에” 갈 수 있고, 하나님 예배에 참예 할 수 있다. [4] 악마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요,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다.” [5] 그들은 믿고 “떤다,” 더러운 영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기”(히 10:27) 때문이요,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기를 멸하러 오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정한 영들은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6] 악마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 상관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7] 그리스도는 그 악마를 제재했다. “그는 꾸짖어” 가로되 “잠잠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권능이 있는” 말이었다. fimw,qhti─ “재갈을 물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악마에게 침묵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그의 입을 닫아버렸고, 자기의 듯으로는 떠들고 싶어도 떠들지 못하도록 만드셨다. [8] 사탄의 권세를 꺾으심으로써, 정복된 그 대적은 자기의 악의를 드러내었고, 정복자 그리스도는 은혜가 넘치는 사랑을 보이셨다. 여기서 악마는 “더러운 귀신(영)”이다. 그의 본성은 직접 순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과 대립되며, 최초의 상태에서 타락해 버린 것이다.이 부정한 영은 사람들 속에서 활동한다. 그 때에는 사람들의 몸 속에서 활동했듯이, 역시 사람들의 영혼(soul) 속에서도 활동한다.사탄의 권능과 역사(役事)에 크게 짓눌려 있는 자들도 “회당에” 갈 수 있고, 하나님 예배에 참예 할 수 있다.악마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요,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다.”그들은 믿고 “떤다,” 더러운 영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기”(히 10:27) 때문이요,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기를 멸하러 오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정한 영들은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악마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 상관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그 악마를 제재했다. “그는 꾸짖어” 가로되 “잠잠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권능이 있는” 말이었다. fimw,qhti─ “재갈을 물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악마에게 침묵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그의 입을 닫아버렸고, 자기의 듯으로는 떠들고 싶어도 떠들지 못하도록 만드셨다.사탄의 권세를 꺾으심으로써, 정복된 그 대적은 자기의 악의를 드러내었고, 정복자 그리스도는 은혜가 넘치는 사랑을 보이셨다. 여기서 첫째, 악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공개했다. 그 때 악마는 마치 그 사람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이, 맹렬한 분노로 “그 사람을 무리 중에서 넘어뜨렸다.” 그러나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가 악마를 떠나게 함과 동시에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이별의 타격과 고통도 주지 않은 채 고이 떠나게 함으로써, 악마를 다스리는 권능을 가지고 계심을 보이셨다. 사탄은 자기가 “멸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할 수 있는 한 “상처”를 주려 한다. 그러나 그도 그리스도가 허락한 한도 이상으로 피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위안이 된다. 아니, 악마가 사람들에게 어떤 실제적인 피해를 끼치지는 못하리라. 그는 “나왔다.” 그리고 “그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즉 악마가 그 가엾은 사람을 얼마나 심하게 쓰러뜨렸든지, 사람들은 그가 박살나는 줄로 알았으나, 그 사람은 순간적으로 완전히 건강해졌다. [9] 악마를 제어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널리 인정되고 경모를 받았다(36절). 아무도 이 기적의 진실성을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명백했고, 그 영광을 감소시킬 만한 제안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놀라서, ‘이 어떠한 말씀인고 !’ 하더라” 고 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악마를 쫓아내는 듯이 가장하는 자들은 악마를 달래는, 많은 주술이나 주문으로 그런 일을 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잠시 그를 잠들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권위와 권능으로”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권위와 권능이야말로 그들이 방해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증의 권능을 잡은 임금”도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 [10] 이 사건도 다른 사건들처럼 그리스도에게 명성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경홀히 여기지만 이러한 그의 권능을 당시의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목격했고(그리고 그들은 바보들도 아니었거니와 비상한 투시력을 가진 자들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찬양했으며, 그 사건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영예롭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37절).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예수의 소문이” 전보다 더 멀리 “퍼져 나갔다.” 즉 “그 근처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악마를 제어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널리 인정되고 경모를 받았다(36절). 아무도 이 기적의 진실성을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명백했고, 그 영광을 감소시킬 만한 제안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놀라서, ‘이 어떠한 말씀인고 !’ 하더라” 고 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악마를 쫓아내는 듯이 가장하는 자들은 악마를 달래는, 많은 주술이나 주문으로 그런 일을 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잠시 그를 잠들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권위와 권능으로”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권위와 권능이야말로 그들이 방해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증의 권능을 잡은 임금”도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이 사건도 다른 사건들처럼 그리스도에게 명성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경홀히 여기지만 이러한 그의 권능을 당시의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목격했고(그리고 그들은 바보들도 아니었거니와 비상한 투시력을 가진 자들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찬양했으며, 그 사건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영예롭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37절).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예수의 소문이” 전보다 더 멀리 “퍼져 나갔다.” 즉 “그 근처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공무에 처음으로 들어섰던 사람들은 그를 많이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나중에는 신기한 사물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감탄이 메말라 버리게 되었다.(2)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병 고쳐주는 자”임을 드러내셨다. 앞에서는 인간의 비극의 뿌리에 공격을 가했다. 그 뿌리는 사탄의 적개심이요, 그것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나무의 가장 무성한 가지들, 인생에 지극히 흔한 참상─ 그것은 육체의 질병이다─을 공격하신다. 그러한 질병은 죄와 더불어 사람에게 들어온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그 죄 때문에 당하는 가장 일반적이요 구체적인 징벌이며, 그것은 많지도 않은 우리의 날을 “근심으로 가득 차게” 하는 구실을 한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는 그러한 질병의 자리를 제거해 버리기 위해 오셨고, 그 의도를 말해 주는 사건으로서 그가 지상에 오셨을 때 이와 같은 기적을 통해서 자기의 교리를 확증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 기적이란 다름 아니라 질병 그 자체까지도 제거해 버리는 기적이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병 고쳐주는 자”임을 드러내셨다. 앞에서는 인간의 비극의 뿌리에 공격을 가했다. 그 뿌리는 사탄의 적개심이요, 그것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나무의 가장 무성한 가지들, 인생에 지극히 흔한 참상─ 그것은 육체의 질병이다─을 공격하신다. 그러한 질병은 죄와 더불어 사람에게 들어온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그 죄 때문에 당하는 가장 일반적이요 구체적인 징벌이며, 그것은 많지도 않은 우리의 날을 “근심으로 가득 차게” 하는 구실을 한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는 그러한 질병의 자리를 제거해 버리기 위해 오셨고, 그 의도를 말해 주는 사건으로서 그가 지상에 오셨을 때 이와 같은 기적을 통해서 자기의 교리를 확증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 기적이란 다름 아니라 질병 그 자체까지도 제거해 버리는 기적이었다. 몸의 모든 질병 중에서도 “열병” 이상으로 어른들에게 흔하고도 치명적인 것은 없다. 그 병은 갑자기 와서, 갑자기 사람들의 생애를 잘라버린다. 즉 그 병은 때때로 “유행하여,” 순식간에 “수 천 명을 죽인다.” 이제그리스도가 말씀 한 마디로 열병을 치료한 사실을 보게 된다. 장소는 시몬의 집이요, 그 환자는 시몬의 장모였다(38, 39절).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는 그를 환대하는 자들에게 훌륭한 대가를 지불해 주는 손님이다.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마음과 집으로 영접하려는 자들은 그것 때문에 아무런 손해도보지 않는다. 그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방문하신 가정에도 질병이 방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특별한(구별되는) 은혜를 축복 받는 집안”에도 현생의 인간이 부닥치는 “공동 재난”이 닥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를 환대하는 자들에게 훌륭한 대가를 지불해 주는 손님이다.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마음과 집으로 영접하려는 자들은 그것 때문에 아무런 손해도보지 않는다. 그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 방문하신 가정에도 질병이 방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특별한(구별되는) 은혜를 축복 받는 집안”에도 현생의 인간이 부닥치는 “공동 재난”이 닥칠 수 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다. “주여, 보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3]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남들보다 더 가혹한 고통에 시달릴 수 있다. 그의 장모는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 즉 아주 고통이 심하고 열이 높으며 무서운 열병에 걸렸다. 아마 열병이 머리를 덮쳐서, 정신착난에 빠졌었을 것이다. [4] 나이가 많다고 질병에서 면제되지는 못한다. 아마 베드로의 장모는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병”에 걸렸다. [5] 우리의 친척들이 아플 때는, 그 때마다 우리는 신앙과 기도로써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녀를 위해 그리스도께 구했다.” 또한 신앙의 기도는 병을 물리치리라는 특정한 약속이 주어져 있다. [6] 그리스도는 자기의 백성들이 병들어 고생하고 있을 때에,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일어나 그녀에게로 갔다.” 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리스도께는 육체의 질병을 통어하는 절대권을 지니고 계셨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가 질병을 꾸짖으셨다.” 한 마디 말씀으로써 질병에게 나가라고 명했고, 그러자 “그것은 그녀를 떠났다.” 그리스도는 질병을 보고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병은 갔다. “오라”하면 온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큰 열병에게라도 지금도 “꾸짖을” 수 있다. [8] 즉각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치유가 기적임을 입증했다. “즉시 그녀가 일어났다”고 했다. [9] 그리스도께서 병에서 회복시켜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곳에는, 그가 그 생명이 참으로 새로운 생명이 되어서, 이전보다도 그의 사업과 그의 영광을 위해 그 삶을 쓰게 되기를 원하시고 기대하신다. 질병이 꾸짖음을 당하고, 우리가 참상에서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10]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리스도의 것이 된 모든 자들을 받들어 섬길 준비도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즉 자기를 고쳐 준 “그분”에게만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 그에게 구했던” 그들에게도 수종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준 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2. 그리스도께서 행한, 그와 같은 종류의 다른 많은 기적들을 일괄해서 말한 기사가 나와 있다.
(1) 그는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즉 그에게 자기 자신들을 내맡긴 모든 자들을 예외 없이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그때에” 해가 지고 있었다.(40절). 그 날, 안식일 저녁에는 회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안식일 전체를 통해서 해야 할 일을 하며, 해질 때까지라도 이런 저런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안식일과 그 날의 업무를 “즐거움”이라 부르는 자들처럼 하는게 좋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남들보다 더 가혹한 고통에 시달릴 수 있다. 그의 장모는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 즉 아주 고통이 심하고 열이 높으며 무서운 열병에 걸렸다. 아마 열병이 머리를 덮쳐서, 정신착난에 빠졌었을 것이다.나이가 많다고 질병에서 면제되지는 못한다. 아마 베드로의 장모는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병”에 걸렸다.우리의 친척들이 아플 때는, 그 때마다 우리는 신앙과 기도로써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녀를 위해 그리스도께 구했다.” 또한 신앙의 기도는 병을 물리치리라는 특정한 약속이 주어져 있다.그리스도는 자기의 백성들이 병들어 고생하고 있을 때에,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일어나 그녀에게로 갔다.” 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는 육체의 질병을 통어하는 절대권을 지니고 계셨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가 질병을 꾸짖으셨다.” 한 마디 말씀으로써 질병에게 나가라고 명했고, 그러자 “그것은 그녀를 떠났다.” 그리스도는 질병을 보고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병은 갔다. “오라”하면 온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큰 열병에게라도 지금도 “꾸짖을” 수 있다.즉각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치유가 기적임을 입증했다. “즉시 그녀가 일어났다”고 했다.그리스도께서 병에서 회복시켜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곳에는, 그가 그 생명이 참으로 새로운 생명이 되어서, 이전보다도 그의 사업과 그의 영광을 위해 그 삶을 쓰게 되기를 원하시고 기대하신다. 질병이 꾸짖음을 당하고, 우리가 참상에서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리스도의 것이 된 모든 자들을 받들어 섬길 준비도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즉 자기를 고쳐 준 “그분”에게만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 그에게 구했던” 그들에게도 수종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준 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그리스도께서 행한, 그와 같은 종류의 다른 많은 기적들을 일괄해서 말한 기사가 나와 있다.그는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즉 그에게 자기 자신들을 내맡긴 모든 자들을 예외 없이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그때에” 해가 지고 있었다.(40절). 그 날, 안식일 저녁에는 회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안식일 전체를 통해서 해야 할 일을 하며, 해질 때까지라도 이런 저런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안식일과 그 날의 업무를 “즐거움”이라 부르는 자들처럼 하는게 좋다. 그리스도는 “병든 모든 자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고쳐 주셨다. 또 그들이 “각색 병”을 앓고 있었지만 모두 고쳐 주셨다. 따라서 그를 어떤 한 가지 병을 고치는 전문의로 의심할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질병을 고치는 약이 있다. 그가 병 고칠 때 쓴 표적이란 “자기 손”을 병자에게 “놓는 것”이었다. 그들을 위해서 손을 쳐든 것이 아니다. 그는 권위를 가진 자처럼 고쳤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권능으로 치유했다. 그리고 그는 그 후 성령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용할 때 쓰는 그 표적을 영예롭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2) 그는 또한 악마 들린 많은 자들을 고쳐 주셨다(41절). 마귀들에게서 고백이 터져 나왔다. 마귀들은, “당신(주)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은 격노와 분함에 못 이겨 “소리친” 것이었다. 그것은 고문으로 나온 고백이었다. 따라서 신빙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고는 “저희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가 그리스도신 줄을 앎이더라.” 즉 그가 그들을 정복해 버렸으며, 아무런 협약도 맺지 않았음이 논의의 여지없이 밝히 드러나게 생긴 것이다.
3. 그는 가버나움을 떠나신다(42, 43절)
(1) 그는 잠시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다.” 그가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잠시간 뿐이었다. 그것은 “작은 것이 그를 섬겼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작은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안일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은 “낮이었다.” 그것은 계속하여 은둔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과 더불어만” 있기 위해서였다. 공무에 무척 바쁜 사람들도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하며, 또 그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일은 볼품없이 되고 말며, 그들 자신도 “그렇게 외로이” 있는 때가 아니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2) 그는 다시금 “집합” 장소로 “돌아갔다.” 그것은 거기서 자기의 할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한적한 곳”이 “은거”하기에는 편리하겠지만, “유숙하기에 편리한 곳”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려고” 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우리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세대를 위해 선을 행하려고 보냄 받은 것이다.
[1] 그에게 가버나움에 머물러 달라는 간청이 들어왔다.” 그 무리”는 예수를 지극히 좋아했다. 그것은 분명코 그가 그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그를 찾았다.”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그가 간 곳이 “한적한(황량한) 곳”이었지만, 그들은 “그에게로 가서 만났다.” 한적한 곳이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있으면 한적하지 않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말라고 만류했다”. 따라서 그가 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초대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옛부터 알고 있던 나사렛의 이웃들은 그를 쫓아내었다. 그러나 새로 안 이 친구들은 자기들에게 머물러 달라고 열성이었다. 그는 또한 악마 들린 많은 자들을 고쳐 주셨다(41절). 마귀들에게서 고백이 터져 나왔다. 마귀들은, “당신(주)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은 격노와 분함에 못 이겨 “소리친” 것이었다. 그것은 고문으로 나온 고백이었다. 따라서 신빙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고는 “저희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가 그리스도신 줄을 앎이더라.” 즉 그가 그들을 정복해 버렸으며, 아무런 협약도 맺지 않았음이 논의의 여지없이 밝히 드러나게 생긴 것이다.그는 가버나움을 떠나신다(42, 43절)그는 잠시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다.” 그가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잠시간 뿐이었다. 그것은 “작은 것이 그를 섬겼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작은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안일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은 “낮이었다.” 그것은 계속하여 은둔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과 더불어만” 있기 위해서였다. 공무에 무척 바쁜 사람들도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하며, 또 그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일은 볼품없이 되고 말며, 그들 자신도 “그렇게 외로이” 있는 때가 아니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그는 다시금 “집합” 장소로 “돌아갔다.” 그것은 거기서 자기의 할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한적한 곳”이 “은거”하기에는 편리하겠지만, “유숙하기에 편리한 곳”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려고” 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우리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세대를 위해 선을 행하려고 보냄 받은 것이다.그에게 가버나움에 머물러 달라는 간청이 들어왔다.” 그 무리”는 예수를 지극히 좋아했다. 그것은 분명코 그가 그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그를 찾았다.”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그가 간 곳이 “한적한(황량한) 곳”이었지만, 그들은 “그에게로 가서 만났다.” 한적한 곳이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있으면 한적하지 않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말라고 만류했다”. 따라서 그가 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초대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옛부터 알고 있던 나사렛의 이웃들은 그를 쫓아내었다. 그러나 새로 안 이 친구들은 자기들에게 머물러 달라고 열성이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기들을 쫓아내는 자들이 있다고 하여 낙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기들과 자기들의 설교로 맞아들이는 자들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빛을 어느 한 곳에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퍼지게” 하는 쪽을 택했다. 따라서 아무도 자기들이 다른 교회에 비해 “모(母)교회”라고 자칭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가 가버나움에서 환영을 받았고, 또 거기서 많은 선을 베풀었지만, 그는 “다른 마을에서도 역시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가버나움은 그의 체류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복음의 혜택을 맛보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기뻐해야 하며, 결코 “독점”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 또 한 장소에서 “쫓겨나지” 않은 사역자들이라도 더 큰 쓰임을 생각하고 다른 지역으로 “쫓겨날” 수도 있다. 그리스도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헛되이 전파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거기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전파했다”(44절). Bonum est suidiffusivum─즉 선한 것은 저절로 퍼져나간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느 한 장소나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그들과 함께 계시는데,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축복이다. 그리스도교의회당에서처럼 “이방인의 갈릴리”에서도 그의 특수한 임재가 같이한다.
누가복음 4장 강해설교
시험받으신 예수
눅4:1,2
본문은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히4:15)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는 분명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 때문이며,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의 의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꼐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습니다. 그때 성부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마귀는 바로 이 선언에 대해 예수님을 시험하려 합니다.
1)예수는 마귀를 멸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대표인 첫째 아담이 마귀의 시험에 굴복한 데서 인류의 타락은 시작되었습니다. 죄는 첫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공적 사역을 시작하심에 있어서,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의 대표이자 둘째 아담으로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드리는 예를 반드시 치루어야 했습니다. 예수의 나타나심은 ‘여인의 후손’으로서 약속된 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하고,온갖 시험을 통해서 악마를 물리치고 좌절시켜 멸망시키려 합입니다.
2)그의 인성이 시험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약1:13).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무죄한 분으로서 어떻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이 시험을 받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시험을 받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완전한 인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비록 예수께서 마귀에게 그의 인성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그는 칼빈의 말과 같이 우리의 연약함을 취하셨어도 잘못은 없으셨으며,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육신을 덧입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누를 끼치지 않듯이,시험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의 권위에는 해가 없습니다.
3)예수가 받으신 시험은 구주로 온전하게 하는 데에 필요하였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은 나사렛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 마귀의 능력에 대한 경험을 처음으로 겪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겪으시게 되는 이 시험은 주님과 죄악으로 포위된 인간 사이를 진실되게 교통하는 연결입니다. 그 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마귀에게 시험받음을 개의치 앟고 나타나실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이기시고 인류의 구세주 되심을 밝히 증거하신 것입니다.
4)예수의 시험은 고독한 분투였습니다.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곳은 고독한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의로운 광야로 물러가 계실 때 마귀에게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꼐서 시험을 받으신 그때는 사십 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은 때였습니다. 육체로는 심히 쇠약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광야로 물러가 거기서 영적 분투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겪으신 시험은 인류를 위한 고독한 분투였습니다.
2.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1)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마귀가 시험하는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은 예수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마귀는 성령 충만한 자,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를 공격합니다. 주님이 시험받으심처럼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이 충만할 때,곧 성령 충만함을 입었을 때 어려운 시험이 닥쳐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벧전4:12).
2)시험은 인간을 완전케 하는 데에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통해서 오히려 그가 오직 유일하신 인간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할 때 시험당함은 오히려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시키는 복된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3)시험은 고독한 분투입니다.
예수께서 광야로 물러가 인적이 끊긴 곳에서 고독한 40일을 지내시며 주리신 채 시험받으셨음을 기억하십시다. 시험의 순간은 고독합니다. 영적인 분투의 순간은 육신적으로 피곤하고 지칠수 밖에 없습니다. 시험에서 승리의 언덕을 향한 최후의 분투는 더욱 고독하고 힘겹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첫번째 시험
눅4:3,4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받으신 첫번째 시험이 무엇인지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첫번째 공격 무기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첫번째 공격 무기를 놀랍게도 첫째 아담에게 시도하여 성공한 바가 있는 육적 욕구의 시험 곧’먹는 것’에 대한 시험을 재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첫번째 시험 곧 ‘떡’에 대한 시험을 통하여 마귀가 유혹하는 방법과 그것을 물리치신 예수님의 태도를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마귀의 유혹 방법
1)친절을 가장한 유혹
마귀는 소리 없이 다가와 유연하게 대화하는 수단을 가지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와가 두려워하거나 경계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유혹의 대화에 응하게 한 것처럼(창3:1-5),굶주린 예수께도 그렇게 다가와 유혹하였습니다. 마귀는 육체를 가지신 예수께서 이미 사십일을 주리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식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지치고 굶주린 사람은 누구나 먹을 것에 대한 갈망을 갖기 마련입니다. 사탄은 예수의 현실 가운데 육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친절을 가정해서 유혹하였던 것입니다. 육적인 욕망을 가진 우리는 소리 없이 친절하게 다가오는 마귀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2)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태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화는 불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부조화도 결국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불신감을 갖는 데서 시작됩니다 .마귀는 놀랍게도 먹는 것을 미끼로 하여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신하게 했던 방법으로(창3:3,5)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의 사명을 박탈하려는 의도로 유혹해 왔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눅4:3).마귀는 ‘만일’이란 불신의 단어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가 영원 전부터 결속됝 사실을 불신토록 유혹했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지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예수의 자의 대로 식량을 조달하도록 유혹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탈시켜 불신 관계를 조장하려는 유혹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육적 안일을 위해서는 결코 단 한번도 기적을 사용하지 않으신 예수를 유혹하여 자신을 위해 기적을 행함으로써 고난받는 메시야의 길을 빗나가에 하려고 용의 주도하게 시험하였습니다. 즉 메시야의 길을 불복케 하려 했던 것입니다.
3)양자 택일의 제안으로 유혹
본문에 나타난 대로 마귀는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제안함으로써 예수께서 마귀의 유혹대로 시행하면 결국 시험에 드는 것이요,시행치 않으신다면 결국 무기력한 존재로 예수의 권위를 실추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양자 택일의 방법으로 도전합니다. 어느 편이든 마귀의 말을 들으면 넘어지도록 유혹합니다. 이 얼마나 간교한 방법입니까? 당신은 이런 마귀의 유혹 앞에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곧 우리는 주님께서 지혜롭게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놀라운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유혹을 이기신 예수의 태도
예수님께서 그러한 마귀의 유혹을 이기신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
예수께서는 언어의 표현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마귀의 시험을 받아 대응하신 그의 태도에는 너무나 명백하게 그러한 사실이 증명됩니다. 그것은 첫째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의 유혹을 거절함으로써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가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로 마귀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기록된 말씀대로 살아갈 태도를 보여 주심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2)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심
예수께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태돟는 우리의 귀감이 됩니다. 주님은 마귀의 도전을 다른 무엇으로서가 아닌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의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시며 능력이 있습니다. 때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살아 계신 권위로써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3)마귀의 명을 대적하심
주님은 마귀의 명에 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당히 대적하셨습니다. 결코 마귀의 틈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엡4:27).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를 보류하시고 마귀에게 약자처럼 조롱받는 한이 있어도 마귀의 명에 설득될 만한 틈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함으로 오히려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벧전5:9).
마귀의 두번째 시험
눅4:5-8
예수에 대한 첫번째 유혹에 실패한 마귀는 이제 두번째의 유혹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천하 만국의 영광을 다 보여 주면서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모두 주겟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참 인간이 경배해야 할 때상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한 분이심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이 둘째 번 시험은 정치 문제가 내포된 시험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으로 마귀의 두번째 시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시험의 장소
첫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하나님꼐서 6일 동안 창조하신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것들로 가득 찬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창조하신 일을 보시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가장 아름다운 낙원에서 아담으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유혹을 하여 넘어뜨렸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대로적으로 둘째 아담 되신 예수님께서는 들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높은 산과 거룩한 성의 성전 꼭대기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마귀의 시험은 환경을 가리지 않음을 봅니다. 좋은 환경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좋은 환경에 처한 대로 나쁜 환경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좋은 환경에 처한 대로 나쁜 환경에 처한 사람은 그 나쁜 환경을 통해서 시험이 있습니다. 첫번째 아담을 넘어뜨리고 승리를 빼앗았던 마귀는 지금 또다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이 마귀는 지금도 우리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모든 취약점을 이용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맹수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 생활에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깨어 기도하며 굳건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여 사는 무장의 삶이어야 합니다.
2.시험의 내용
마귀는 아마도 예수님이 도성 인신(道成 人身) 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의 왕국이 전복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세속적인 권력을 탈취하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천하 영광을 다 보이며 자기에에 엎드려 경배하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ㅅㄹ로 인간의 야망을 충분히 자극할 만한 유혹이요 대단히 매력적인 유혹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매우 작은 일만 양보하면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큰 것을 얻게 되는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일순간의 것으로 놀라운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 안에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이 마귀의 유혹의 덫에 희생물이 되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과 양식과 원칙이 이 세상의 권세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야의 사역이었기에 이를 단호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해 정욕적인 욕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힘쓰는 영의 일에 더욱 힘쓰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신 롬8:5,6의 말씀대로 참으로 성도 된 삶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시험의 결과
첫 아담은 시험에 패배하므로 그 좋은 환경과 장소에서 추방을 당하여 인류에게 영원한 죄업을 남겨 주게 되었고 그 자신과 후대를 불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유혹을 여지없이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털끝 만큼도 그에게 양보하지 않았고 일순간의 이익이라도 마귀에게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귀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들은 주의 말씀을 방어용 무기로 삼고 이것으로 행동과 삶의 지배 원리로 삼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 안에서 주님의 승리의 채험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4.예수께서 당하신 시험의 의미
본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교훈은 이러한 시험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께서 친히 시험을 받으심으로 그는 우리들이 당하는 시험의 입장을 이해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시험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고난과 괴로움,시험당함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실 수 있으시며 우리는 연약함을 이해하실 수 있다는 분이 계신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2:18에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은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께서 당하신 시험은 예수만의 시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시험이며 예수님께서 취하신 승리는 예수님만의 승리나 기쁨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기쁨이자 승리입니다.당하는 시험에 지혜와 용기 있게 대처하여 의미 있는 신앙의 승리의 삶을 이룩합시다.
세번째 시험
눅4:9-13
이제 마귀는 예수께 세번째 시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9절)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시험을 합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는 예수께 또한 기록된 말씀으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1.성전 꼭대기에서의 마귀의 시험
1)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려는 시험
마귀는 첫번째 시험에서’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3절) 하며 성부 하나님과의 불신 관계를 조장하려던 목적을 세번째 시험에서 같은 말로(9절) 재차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감을 초래하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져 뛰어내린다면,그 결과는 죽음일 뿐이며 그렇게 되면 마귄는 보기 좋게 그리스도의 길을 실패로 이끈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믿음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려는 목적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기록된 말씀을 사용한 시험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 예수님을 세워 놓고 뛰어내리라고 유혹합니다. 주님을 설득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인 시91:11,12을 사용합니다. 여기에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의 천사들을 명하여 모든 종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리라는 확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를 명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여기에 약속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전제 아래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가를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시험해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우리를 섭섭하게 하거나 서운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시험을 하는 행위는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간교하게 성경을 인용하여 성도를 넘어뜨리려는 시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도 성경을 인용한 이단이 얼마나 교묘하게 역사하고 있습니까?
2.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는 예수
1)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심
예수님은 감히 성경을 인용하여 시험하는 마귀를 역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어 완전히 패배시킵니다. 주님은 신6:16을 인용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꼐서 이미 충분한 증거를 주었는데도 하나님의 계시가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코자 시험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흘히 여김을 받을 분이 아닙니다(갈6:7).사악하고 거짓된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하는 행위는 곧 헛된 계교라는 사실이 드러나고야 합니다. 진리가 되시는 주님 앞에서 성경을 인용한 마귀의 궤계가 패배당하고 말듯이 진실치 못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행위는 얼마 못가 그 중심이 드러나는 조금도 용납받지 못할 죄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2)변함없는 신뢰와 경외심으로 물리치심
예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은 마귀를 꾸짖는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경외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대한 아들의 관계를 확고히 유지하면서 마귀를 물리치신 원동력은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신뢰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귀의 어떤 시험 앞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심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시험에 직면할 때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게 대한 믿음을 시험에 대한 방패로 삼아야만 합니다(엡6:16).광야에서 하나님을 신뢰치 못하고 시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로가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히3:7-13).
3.시험의 결과
1)승리자가 되심
승리를 거두신 주님은 구주로서의 자기의 터전을 확고히 하셨으며,마귀를 완전히 패배시키셨습니다. 그 승리는 주님의 승리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의 승리입니다.
2)마귀는 패배자가 됨
그리스도께 대한 마귀의 도전은 끝내 실패하였습니다. 마귀는 전투를 중단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대로 ‘얼마 동안 떠나’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귀는 계속하여 예수께 적의를 가지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말씀이며,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적의를 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온 성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엡6:13).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눅4:14-19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인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는데,본문은 그러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갈릴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갈릴리는 팔레스틴 북쪽의 남북이 약 80Km,동서가 약 40Km가 되는 지방입니다. 갈릴리라는 이름은 ‘원’이라는 뜻인데,그 이름대로 갈릴리 지방은 비유대계 민족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변의 지형적 영향에서인지 이 갈릴리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방입니다. 또한 갈릴리 지방은 인구 밀도가 대단히 조밀하였습니다.그리고 그 지방은 가장 좋은 기후와 맑은 물을 가진 곳으로 땅이 비옥한 지역입니다. 주민들은 산 사람들로서 언제든지 혁신을 좋아하며 잦은 반란이 있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은 용감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의리와 명예를 존중히 여겼다 합니다. 그리고 이 갈릴리 지방에 나사렛 동리도 있어서 사실상 예수님의 고향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복음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은 어디이며 생의 기반은 어디입니까?
2.성령의 권능으로 시작하였습니다.
14절 말씀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라고 하여 성령의 권능으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였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육신의 존재를 가능케 하신 분이십니다만(마1:18)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에도 성령의 권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은혜로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자신의 구주 됨을 알리셨으며 세상을 떠나 가신 후 이 거룩한 은사를 제자들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 여의 중생도 성령으로 시작합니다만 교회의 봉사 능력도 성령의 능력에 의해 가능케 됩니다(행1:8).우리는 보통 성령받으면 황홀한 상태에서 기분이 좋고 화끈해지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도리어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일수록 말없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때로는 순교의 고난을 받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행7:54-60).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는 그것으로 자신의 자랑을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확장되도록 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하며 또한 자신의 사역을 좀더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더 큰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3.회당에서 시작하였습니다.
회당은 팔레스틴의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은 유대인 가정이 10가정 이상 사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회당에서든지 그들은 그곳에서 성경과 토라를 강론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 없이도 장장 2,000년 동안이나 그들의 언어와 풍습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이 회당 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본문에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라고 한 대로 예수님은 거의 습관적으로 회당에 참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교회가 부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규칙적이고 조직화된 종교적 방편을 통해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질서가 분명히 변혁되어야 함을 역설하시면서도 극단적인 혁명의 방법보다는 기존의 질서 위에서의 변혁을 시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자부하면서도 교회의 조그마한 부패와 실수를 핑계로 모든 교회를 정죄하고 기존 질서를 부인하며 교회를 떠나는 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4.안식일에 전하셨습니다.
16절에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라 하신 바와 같이 안식일에 복음을 전하셨습니다.이토록 예수님은 성스러운 일을 위해 성스러운 때를 활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은 언제나 거룩하게 때와 장소에 부합했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사상,그리고 우리가 행동하는 때와 장소는 과연 우리의 거룩한 목적과 부합되고 있습니까?
5.성경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의 교재와 주제를 성경으로 하셨습니다. 16절에 ‘성경을 읽으려고 서서’,17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사역의 근거를 성경 말씀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1:14) 살아 계신 말씀이시기에 그의 삶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었으며,생명을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요6:63).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삶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는 성경을 사랑하며 받아들이고 순종함으로써 나날이 거룩해져야 하겠고 성경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 예수님을 영접토록 하겠습니다. 성경 없이는 진정한 교육이나 복음 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해방과 자유의 복음
눅4:18,19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안식일에 강론하시기 위하여 택하신 성경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본문을 택하신 것은 자신이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한 메시야임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21절).그러므로 본문에는 메시야의 사역 성경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그런데 이러한 구속 사역의 중요한 요소들이 ‘성령의 임재'(18절)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유의해야 하며,메시야의 구속 사역 전반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구속 사역의 이 요소들은 오늘날 그대로 복음 속에 나타나 있으며,교회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상고해 보겠습니다.
1.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18절).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도의 전제가 ‘성령의 임재’이고 복음 전도의 대상은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 없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언어 도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벧후1:20,21 ;딤후3:16,17) 성령의 임재 없이 이해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전파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으로 능력으로'(고전2:4) 했다고 말했습니다. 전도의 대상이 ‘가난한 자’로 되어 있는 거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라기보다 ‘심령이 가난한 자'(마5:3)를 뜻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비율은 부한 자들보다 높긴 하지만 가난한 자들이라고 해서 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부한 자라고 해서 복음을 다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든지 진심으로 겸손하여 어떤 신적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고 믿는 자들이 곧 가난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 곧 가난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도 복음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전파되고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전파됩니다.
2.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18절).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면 피조물의 어떤 것에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욕의 포로로,어떤 사람은 애욕의 포로로,어떤 사람은 권력의 포로로,어떤 사람은 명예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속박하는 이러한 모든 형태의 우상은 그 실체가 ‘죄’이며,이 죄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8:2).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고(고후3:17),그리스도의 진리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요8:32).인간의 참 자유는 대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
3.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18절).여기서 눈먼 자라 함은 육체적으로 소경인 자를 말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영혼이지 육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의 집이며 영혼의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공생애 활동에서 인간들과의 대화는 그들의 육적이고 물질적인 질문이나 관심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언제나 그 배후에 있는 실체를 깨우쳐 주심으로써 영적인 세계를 깨닫게 하는 데 힘쓰셨습니다. 인간은 원래 영적인 존재이나 죄로 인하여 육적인 존재로 타락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적인 존재로 다시 각성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소경을 고쳐 주신 일들은 그 치유를 통하여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4.눌린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18절).여기서의 ‘눌린 자’는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억압당하는 자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억압인 불안과 공포,근심과 염려 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유하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억압하고 있는 이러한 요인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은 인간들이 사회적 여건과 제도를 부단히 개선해 감으로써 제거하여야 하며,심리적인 억압 또한 속죄의 은총을 체험함으로써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하는 영에 의하여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5.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19절). ‘은혜의 해’는 구약에서의 희년을 가리킨 것으로서(레25:8-17),노예의 해방,부채의 탕감,전토의 환속 등이 이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와 천부적인 자기 권리(인권)를 되찾게 되는 은혜를 사여하는 것임을 뜻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참예하는 자
눅4:20-23
주님께서는 예언서를 봉독하신 후에 회당에 모인 회중들에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고 선포하셨습니다. 즉 예언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대로 구세주가 오셨으며,예수님 자신이 바로 인생들이 고대하던 구세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하나님의 우주적 섭리와 계획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언제나 동일합니다. 구약에서 언약하신 말씀이 신약에서 성취되고 신약에서 성취된 언약은 미래에 분명히 응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은총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되는 것입니다(고후1:20).
1.하나님의 언약에 참예해야 할 이유
1)인간은 기대감 속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예언서를 봉독하신 후 강조하시고자 의자에 앉으시니 회당의 사람들이 ‘다 주목하여'(20절)보았습니다. 인생들에게는 여러 가지 바램이 있습니다. 마치 전장의 파수꾼이 승전의 아침을 기다리듯 오늘보다는 새롭고,보장되고,발전된 내일을 기약하며 그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어느 것으로부터도 약속을 받지 못할 때 극도의 고독감과 절망감을 느끼며 허무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이나 세상의 인본주의적인 사상이나 윤리나 종교에서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탕자처럼 한계 상황에 부딪히고 말 것입니다(눅15:11-16).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들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히6:19).하나님만이 인생들의 희망을 ‘부끄럽게 아니하기'(롬5:5)때문입니다.
2)언약은 성도들의 삶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 생활이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신 것들을 믿고 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엡2:3),’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의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엡2:12) 사람들이었지만,새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언약에 참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벧후1:4).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기반으로 한 것이며,모든 신앙 행위도 언약을 전제로 해야 올바른 것이 될 수 있으며,그 언약을 이 땅 위에서 이루며,언약을 소망으로 삼아야만이 진실한 성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수단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언약은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며,따라서 언약에는 언약자의 인격과 의지가 집약되어 있습니다(히6:16-18).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언약체입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나 사상들은 인생들에게 약속을 해주지 못합니다. 문제만을 제시해 줄 뿐 항상 난해하고,공허한 사변의 숲속으로 사람을 끌고 다니다가,의문의 마른 샘가만 보여 줄 뿐입니다(행17:23).예수님이 유대의 나사렛 회당에서 인생들과 더불어 함께 거하시는 것 자체가 인생들로 하여금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요일1:1) 되게 하려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언약의 실효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기력한 타종교와는 달리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살아 있는 독생자까지 이 땅에 직접 보내신 것입니다(롬8:32).그러므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언약을 인생이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방편이 됩니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응하는 것을 항상 목격할 수 있으며,또한 언약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눅1:1,2 ;고후3:1-3).
3.언약에 참예하려면
‘저희가 다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절) 나사렛 거민들은 언약의 구세주를 이웃삼아 살았으며,또한 예수님께서 직접 저희들에게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했지만,세속적 편견으로 인해서 주님을 배척하므로 스스로 새언약을 버저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된 언약들이 이루어져 온전한 열매를 맺으려면 몇 가지 신앙적 조건이 필요합니다. ①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화해야 합니다. 저들은 주님의 가르침은 매우 은혜로운 것으로 인정은 했지만(눅4:15,22),주님의 신성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예수님의 인성만을 인정하고,그 말씀들을 윤리,철학 차원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의 요구를 절대적인 하나님의 언약으로 받아들였듯이 예수님의 신성을 믿을 수 있어야 그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언약들로서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고후5:16).②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에게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나사렛 거민들은 자신들의 당면한 삶의 문제만을 위하여 주님께서 표적을 행하여 주기를 원했습니다(23절).진리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삶의 방편으로만 여기는 것은 곧 미신입니다(약4:1-4).
고향서 배척받는 선지자
눅4:24-26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주님께서는 자신이 나사렛에서 받는 푸대접의 원인이 결코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이 간단한 한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바가 매우 큽니다.첫째로 주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인간의 어리석은 투기와 어두운 눈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둘째로는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예지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1.배척받는 선지자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인간의 사악함과 어리석음을 함께 꾸짖는 말씀입니다.
1)인간의 투기
예수께서 본문에서 이처럼 나사렛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매우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22절).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을 구주로 고백해야 했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특히 그곳에서 주님께서 읽은 성경은 사61:1 이하에 기록된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그 말씀이 곧 자신에게 응하셨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는 극구 숨기시던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고향에서는 밝히 공개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느 마을 사람들보다도 주님을 경외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절)고 조롱하며 예수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의 투기심은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동향의 한 사람으로 맞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기심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내리깎게 만듭니다.
2)거듭난 자에게만 허락되는 구원
또 하나 본문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나사렛 사람들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그들의 영안은 뜨이지 않았고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직접 메시야에 관한 성구를 인용하여 자신을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로 이처럼 영안이 뜨이지 못한 사람,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막4:12) 못합니다. 그리하여 구원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물과 성령으로’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는 자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있게 되며(고전12:3),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3)질그릇에 담긴 보화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또 하나의 교훈은 ‘질그릇에 담긴 보화’에 관한 교훈입니다(고후4:7).하나님께서는 보화가 질그릇에 담긴 관계로 보화 뿐만 아니라 질그릇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질그릇이 천한 관계로 보화까지도 천하게 여깁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말했던 나다나엘과 같이 아예 질그릇에는 보화가 담겨 있으리라고 생각을 안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겉이 번지르하면 속도 화려한 줄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간사하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요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의 절대 주권
1)예지에 의한 주권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의 가뭄으로 이스라엘 땅에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보냄을 받지 않고 이방인 시돈의 사렙다 과부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렙다 과부는 3년 6개월 동안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자기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로 보내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를 받지 않으실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당시 상황이 그러했습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절대 주권을 사용하셔서 엘리야를 시돈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주권을 행사하시되 예지에 의하여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2)이방인에게 허락되는 구원
또한 본문으로부터 얻는 교훈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열려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거절하는 자에게는 닫혀지지만 영접하는 자에게는 활짝 열려집니다. 그 예로 엘리야는 이방인에게로 보냄을 받았고 예수님을 배척한 나사렛,나아가 이스라엘로부터 복음은 이방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습니다.
3)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본문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깨닫게 되는 사실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본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추측해 보건대 주님께서는 나사렛에 오시기 전에 이미 그들이 배척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고향 사람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오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코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넓은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회학적 인식과 종교적 인식
눅4:27-30
예수께서는 나사렛에서 30년을 살으셨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목수 ‘요셉의 아들'(22절)로서만 알고 있었고 그것은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활에 근래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가출하여 가버나움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하며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있었고 예수에 대한 칭송이 급속도로 확산되어가고 있었던 것을(14,15,23절)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예수의 명성의 실체를 고향 나사렛에서도 확인해 볼 수가 있기를 그들은 갈망하고 있었습니다(23절).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의 ‘은혜로운 말씀'(22절)과 ‘요셉의 아들’이라는 인식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나사렛 사람들의 사회학적인 인식은 종교적 인식에 이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를 격렬하게 배척함으로써 예수로 하여금 영원히 나사렛을 떠나는 불행한 계기가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인간은 너무 가까운 존재는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1)인간의 사회학적 인식
일반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인식하는 것은 사회학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출신이 무엇이며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현재는 어떤 직업,어떤 직위에 있느냐가 그 인간을 인식하는 정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정신적 기저에는 이러한 사회학적 인간관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사회학적 인식으로는 예수는 다만 ‘목수 요셉의 아들'(22절)일 뿐입니다. 이력서로 사람을 평가하는 데는 한계와 맹점이 들어 있습니다.
2)인간 인식의 맹점
인간은 근원적으로 사물 인식에 대한 맹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것 같지만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은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가장 가까운 자기 속눈섭을 보지 못하며,객관화된 자기 음성을 알지 못합니다. 개발된 자기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이 미개발된 잠재 능력에 대하여 모르고 있으며,개발된 능력이라 할지라도 올바로 인식하고 있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장점에 대해서도 잘 모르며 단점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 고향에서 메시야를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예수를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관과 편견이 예수가 메시야임을 발견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적인 인식은 결코 종교적 인식에 이를 수 없음을 나타내 주는 내용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24절)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 인식의 맹점을 갈파하신 말씀입니다.
2.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1)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27절).하나님께서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으로서 아무곳에서나,아무때에나,아무에게나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이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지 아니한 은혜를 이방인에게는 베푸셨다는 말씀입니다.
2)인간의 겸손과 믿음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긍정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은 수용하는 인간의 겸손과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에게 내린 은혜와 나아만 장군에게 베푸신 긍휼은 오직 그들의 겸손과 믿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왕상17:13-16 ;왕하5:10-14).인간의 겸손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긍휼이 머물고 인간의 믿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구원)가 있습니다.
3.인간의 사회학적 인식은 종교적 인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29절).나사렛 사람들은 성경을 통하여 메시야가 곧 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이히 여겼다가(21,22절),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이방인들(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에게 내리셨다는 것을 듣고서는 격분하여 예수를 동네에서 축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사회학적인 인식이 그들의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예수에 대한 분노와 배척을 유발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사회학적 인식이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거나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인식하는 일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종교적 인식은 오로지 겸손과 믿음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으로 이루어진 ‘좁은문'(마7:13,14)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복된 일입니다.
권세 있는 말씀
눅4:31,32
권세란 말은 원어로 ‘엑수시아’라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래 헬레니즘 헬라어에서 신에 관한 초자연적인 지식과 초자연적인 능력이 결합되어 사용된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본문 외에도 권능,권한,관할,임의,자유함,힘 등으로 여러 곳에 쓰이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상실한 오늘입니다. 우리는 외치는 자가 많은 언어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생명수의 말씀은 들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신앙 인격을 바로 직시하고 권세 있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건조한 신앙 생활에 생명과 능력을 공급해야 하겠습니다.
1.권세 있는 가르치심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31절).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권세 있는 말씀에 대한 복음서 기자의 반응은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막1:27).’그 사람의 말한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막12:34).’백성들이 즐겁게 듣더라'(막12:37).’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니라'(눅21:38).’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그 근본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가 있었습니다. 헨드릭슨은 예수님의 교훈에 권세가 있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이 ① 진리를 말함이요,② 체계 있게 말함이요,③ 큰 제목을 가지고 말함이요,④ 청중의 호기심을 일으키는 비유를 많이 사용하심이요,⑤ 듣는 자들의 영혼을 사랑하여 저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로 인도코자 함이요,⑥ 그 말씀의 재료가 하나님께로 들은 말씀(성경)을 기초로 하여 자기의 깊은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목소리로 영원한 자리를 말씀하셨기에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한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신비한 음성을 듣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은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이기에 듣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기에 그 말씀은 듣는 자들의 마음에 역사하여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결단케 하고 실행케 합니다.
2.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순종
1)자연께도 순종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8:27).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즉 그때까지 미친 듯이 포효하던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뿐만 아니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자 즉시 그 나무는 말라 죽었습니다. 자연세계조차도 예수님의 권세에 순종하였습니다.
2)영계도 순종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 지라'(막1:25,26).’사탄아 물러가라 기록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떠나고’.영계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떄문에 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영계를 정복하시고 순종케 하심으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3)사람들도 순종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할 때에 제자들은 한마디도 항거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물을 저 깊은 데로 가서 던지라’ 하였을 때도 그 명령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말씀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세야말로 성도의 바른 모습입니다.
3.우리에게 약속된 권세
1)자녀의 권세입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참 놀라운 축복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에게 허락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는 자유함과 천국의 상속자가 되는 특권이 있습니다.
2)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권세입니다.
눅19:17에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습니다 .맡긴 사명을 바로 감당하고 충성한 자에게 허락된 권세입니다.
3)이기고 주님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 약속된 권세입니다.
계2:26에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권세는 사탄의 세력과 싸워서 이기고 주님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 약속된 권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귀신의 증거
눅4:33,34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중심지인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회당 안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은 처음에는 자신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이 계속되자 귀신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와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의 사역을 증거하였습니다.이제 이러한 귀신의 증거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귀신
1)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귀신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귀신은 주님이 누구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천지 창조시에 하나님과 함께 그 자리에 계셨으며 인류를 대속키 위해 귀신의 일을 멸하려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메시야 강림의 사실을 백성들은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귀신을 알아보았습니다(요1:1).그러나 귀신은 단지 안다는 사실에만 그쳤을 뿐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이것이 바로 귀신의 속성입니다. 그리스도를 알되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관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탐내고 공격하려고 합니다.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까지도 파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이러한 심판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견디지 못하는 귀신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숨어 있던 귀신은 더 이상 숨어 있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비록 그리스도를 방해하는 귀신일지라도 창조주의 권세를 견뎌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악한 귀신은 선하신 그리스도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선은 악을 견뎌낼지라도 악은 선과 견줄 수 없습니다. 의는 불의를 견뎌낼지라도 불의는 의를 견뎌내지 못합니다. 겸손은 교만을 견뎌 낼지라도 교만은 겸손을 견뎌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언제나 처음에는 불의가 의를 이기는 것 같고,악이 선을 지배하는 것 같고, 교만한 자가 겸손한 자 위에 군림하는 것 같지만 그 끝은 항상 의로운 자,선한 자,겸손한 자가 승리하게 됩니다.
2.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귀신
귀신의 증거를 토대로 그리스도의 속성을 살펴보겠습니다.
1)거룩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의 이 한마디 증거 속에는 여러 가지 진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신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인간적인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귀신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역시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이와 같이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기 떄문에 인류의 대속을 위한 흠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2)귀신을 멸하시는 그리스도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우리는 여기서 귀신이 하는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귀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파괴하는 일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을 파괴하는 일이 그들의 주된 목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황폐케 하고 육체를 망가뜨립니다. 순경을 역경으로 바꿔 놓습니다. 그래서 결국 귀신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최초에 창조하신 의도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마귀의 하는 일을 멸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오신 것ㅇ비니다.
3)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사탄을 멸하시고 그의 하는 일을 멸하시는 주님께서는 인간을 치유하십니다. 귀신에 의해 혼란되고 파괴된 것은 모두 원상태로 복귀시키십니다. 마귀를 멸하시는 데는 그 악에 대한 심판의 이유도 있지만 바로 인간을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 의도대로 살게 하시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를 멸하시는 그리스도는 인간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예수님의 권능에 의해 귀신이 쫓겨난 데는 항상 인간의 획복이 뒤따랐습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졌으며 하늘의 평안과 기쁨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영과 육을 함께 치유하시는 의사이십니다.
귀신의 사역과 예수의 사역
눅4:35
예수께서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35절)고 꾸짖으시니 귀신 이 그사람에게서 나오고 그 사람은 온전케 되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이 소문은 가버나움 근처 사방에 퍼졌습니다(36,37절).
1.귀신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1)회당 안에 있는 귀신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난 것은 안식일이며 회당 안에서였습니다(32,33절).이것은 귀신의 활동은 언제 어디서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이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합니다 .이 귀신은 사람 속에도 살고 있으며 짐승 속에도 들어가 살 수 있습니다(막5:13).그리고 귀신은 자연 만물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동원하여 역사할 수가 있습니다(욥1:13).그들은 용,옛 뱀,마귀,사탄 등으로 불리워지며 사탄은 그들의 지도자로 나타나 있습니다(욥1:6-12 ;마12:24 ;엡2:2 ;계16:13,14:20 ;2,7).귀신은 베드로에게도,갸룟 유다에게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2)귀신의 활동 목적
그러나 이 귀신들의 활동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과 그 하는 일의 한계가 주어져 있습니다(욥1:12 ;2:6).다시 말하면 이 귀신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림을 당하는 영적 존재로서 천사가 선한 일에 사용됨에 반하여 이들은 악한 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만난 이 귀신은 예수의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예수의 메시야적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람 속에 들어가 있다가 이날 그 목적을 이루고 축출된 것이며,결과적으로 예수의 소문을 온 사방에 퍼지게 했습니다. 귀신은 사람을 괴롭히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습니다(마4:3 ;살전3:5). 귀신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일꾼도 가지고 있으며(고후11:15),교리도(딤전4:1), 제사도(고전10:20),그리고 그들의 모임도 갖고 있습니다(계2:9).
2.귀신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1)육체적 질병을 유발함
귀신들은 인간의 육체에 질병을 발생케 하는 일을 합니다. 욥에게 그렇게 하였듯이(욥2:7), 대체적으로 질병은 귀신들에 의해 비롯됩니다(행5:15,16 ;고전5:5).모든 질병은 병균에 의하는 것인데 이 병균은 사탄에게부터 옵니다.
2)정신적 질병을 유발함
성경에는 귀신으로 인하여 정신 이상이 생긴 자들을 많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대로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귀신들린 자를 비롯하여,눈 멀고 벙어리 된 귀신9마12:22)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자(막5:1-20),사귀들린 아이(눅9:38-42) 등이 있습니다 .귀신이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으면 인간은 귀신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3)죄를 짓게 함
귀신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더럽고 악한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악한 말과 악한 행실을 하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악한 생각과 말과 행실이 다 마귀에게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요8:44).
4)의롭고 선한 일을 방해함
귀신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고 선한 일을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그것들과 대항하라고 했습니다(엡6:10-13).성도들은 귀신들과 싸우면서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3.귀신은 예수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1)귀신이 예수를 증거함
가버나움 회당에 있던 귀신은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한 자,즉 메시야임을 알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이 귀신은 자기를 멸하러 오신 줄 알고 두려워서 크게 소리질렀습니다(33,34절).귀신은 예수께서 자기를 멸하실 능력이 있으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악역에 동원되는 존재이나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계20:7-10).
2)예수의 명령에 복종함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35절).예수의 일갈에 귀신은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축출되었습니다. 귀신의 임무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그 임무를 해제시킬 수가 있습니다.’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신 것은 그 귀신의 임무 해제 통고이며,그것은 곧 그 귀신의 멸망을 의미합니다(34절).귀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사망과 음부의 사자인 귀신의 괴수 사탄의 세력을 근본적으로 꺾어버리는 생명의 능력이요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할 존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널리 퍼지는 예수의 이름
눅4:36,37
본문의 기적은 누가복음에서는 처음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기는 했지만 기적을 행하시기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말씀에 놀랐습니다.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은 목격자들에 의하여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 나가는 현상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권세 있는 예수의 말씀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을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이 말은 제자들이 한 말도 아니요 예수님의 말씀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건을 지켜본 군중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들의 입술로 인해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음이 획실히 입증되었습니다.
1)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권세 있는 가르침을 베푸셨던 주님은 본문에 이르러서는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는 권세도 있으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권세는 그 어떤 누구로부터 부여 받은 권세가 아닙니다. 서기관들이 말한 것처럼 바알세불로부터 부여받는 것도 아니요(막3:22-27),과거 모세나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고유하게 가지고 계신 권세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주님의 권세는 과거 구약 시대의 여느 선지자와는 달리 그의 신성을 나타내 주는 권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이미 앞서 귀신에 의해서도 증명된 바입니다(34절).
2)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본문의 귀신들린 사람은 온전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죽음의 늪에 빠져들어가던 그의 생명은 소생케 되었습니다. 비단 본문의 귀신들린 자 뿐만 아니라 이천 년의 교회사를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생명의 소생함을 맛보았습니다.성 어거스틴이 그러했으며,’벤허’의 저자 류 월리스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극받았으며,그 말씀의 공급에 의해서 생명력 있는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인간은 권세와 힘을 이용해서 사람을 억압하고 죽이는 일을 할지라도 주님은 당신의 말씀으로써 사람의 생명을 살리십니다.
2.예수의 소문을 들어야 할 인간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져 나가도록 침묵으로써 허락하시는 사실에서 이 소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처럼 당신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방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를 하나의 인격체로 비유하여 한 사람,곧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기술합니다(롬5:12).그런데 여기서 들어왔다는 말은 단순히 세상의 일부에 들어온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 전체를 향하여 쳐들어 온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상에는 의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롬3:10).선을 행하는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롬3:12).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를 철장으로 깨뜨리시는 주님의 소문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듣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의 구원의 소식을 듣고 죄의 노예 상태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2)사망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있는 인간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따라서 모든 죄인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육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혼이 죽는다는 말은 죽어 사라져버림을 의미합니다(눅16:23,24).그러므로 구원의 날이 지나기 전에 주님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 나가야 합니다(고후6:2).될수 있는 한 멀리,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야 합니다. 영원한 사망의 권세로부터 인간을 해방할 이름은 천하 인간 중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행4:12).
신유의 은총
눅4:38,39
예수의 선교 활동은 주로 갈릴리 지방이었고 그 중심지는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있는 디베랴가 대표적 로마인들의 도시인 데 비하여 가버나움은 대표적인 유대인들의 도시였습니다. 이 가버나움에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막1:29)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고향은 벳새다였으나(요1:44)가버나움에 와서 산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다음에 베드로의 가정을 방문하셨습니다. 마침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열병을 꾸짖어 낫게 하심으로 그녀가 곧 일어나 주님께 수종들었다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일에 대하여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어떤 가정에도 질병은 찾아옵니다.
1)베드로의 가정에도 질병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38절).이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회당 안에 있던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다음에 베드로의 집에 오셨습니다.그때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중한 열병’이란 원어적으로 ‘큰 열병’이란 말이고,고대 의사들은 병을 ‘큰 병’과 ‘작은 병’으로 구별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으므로 이런 점에 있어서 다른 복음서 기자와는 다른 독특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질병은 축복이기도 합니다.
질병은 원래 죄와 더불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질병의 근원은 사탄입니다(욥2:7).사탄은 질병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고통과 불행에 빠지도록 합니다. 질병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죄 때문에 당하는 일반적이고도 구체적인 질병이며,그것이 짧은 인생의 삶을 근심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나 그 긍휼의 손길을 펴시고 계십니다. 질병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축복하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질병은 곧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질병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질병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무능을 깨닫게 함으로써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하는 유익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마음자리를 삶 속에 제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상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질병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나에게 오시도록 하는 은총의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바로 이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2.예수께서 병 고쳐 주시기를 사람들이 구했습니다.
1)질병은 인간의 무능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38절).질병은 병에 걸린 본인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무능’을 실감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질병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무능의 확인,이것처럼 인간을 슬프게 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세균에게조차 대항할 능력이 내게 없고,나 뿐만 아니라 그밖의 모든 사람에게도 없다고 느낄 때,절망과 공포가 찾아옵니다. 거기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집 사람이 예수께 병 고쳐 주시기를 구한 것은 그들이 그드르이 철저한 무능과 절망과 공포로부터 구출되기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나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 모든 인생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때때로 철저한 무능감에 빠지고 절망과 공포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2)예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39절). 이미 예수의 명성은 가버나움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분이라면 이 질병을 능히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들의 호소에 즉시 응하셨습니다. 만병의 의사이신(출15:26 ;마9:35 ;막6:55,56) 주님께서 환자를 치료하시기 위하여 접근한 것입니다.죽음 앞에 생명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3.신유는 속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39절).예수께서 열병을 ‘꾸짖으셨다’는 것은 병이 마귀로부터 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열병을 꾸짖으신 것은 병마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속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질병은 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막2:5 ;눅5:20)는 말씀은 예수에게 병자들이 고침받는다는 것이 베드로의 장모처럼,속죄와 봉사(수종듬)의 이중적인 은총을 입음을 뜻합니다. 찬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며,감사할 것은 그분의 은총입니다.
치료하시는 예수님
눅4:40,41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많은 병든 자들의 육체와 영혼을 고쳐 주심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들어 고통받는 자들을 만나 주셨고,그들을 치료하여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와 같은 고통과 문제가 나사렛에서도 있었음을 보았습니다만 거기서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그 어떤 기적도 행하시지 않으셨으나 가버나움에서는 실로 놀라운 은총이 베풀어짐을 봅니다. 얼마나 대조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을 버리고 가버나움 사람들의 신앙적 자세를 본받아서 오늘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한결같은 주님의 놀라운 은총에 참여하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1.병든 인생의 불쌍한 모습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40절).참으로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지치고 피곤한 인생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삶이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짐스러운 존재입니다. 정말 불쌍하고 불행한 병든 인생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5,6)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머리는 인간의 지성, 마음의 감성,발바닥은 의지로 본다면 정말 성한 곳이 없는 병든 인생의 불쌍한 모습을 바로 지적하였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9:12)라고 하셨습니다.인생은 누구나가 다 의원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병든 인생입니다. 다만 자기의 육체와 영혼이 병든 것을 아는 병자와 병은 들었으나 병든 것을 모르는 병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파스칼은 ‘자기가 의인이면서 죄인인 줄 생각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가 죄인이면서 의인인 줄 생각하는 죄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의 차이보다 인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 하겠습니다.이 병든 머리(지성),병든 마음(감성),발(의지),곧 인간의 병든 인격은 예수님으로만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2.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
‘해질 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이었거나,그들의 친절한 이웃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병든 자의 고통을 지켜보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며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해질녁이면 한 날의 수고를 그치고 편히 쉬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피곤함도 잊은 채 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실로 주님의 마음을 닮은 자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의 사람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서 병든 자들이 고침받는 것을 보았고,이로 인해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 수고와 봉사를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봉사를 매개로 해서 일어납니다. 이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매개자가 되어 주님의 크신 사역에 쓰임받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3.고쳐 주시는 하나님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만병의 대의원이신 예수님은 실로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일일이 만져 직접 치료하요 주셨습니다. 고침받은 병든 자들은 ‘각색병으로 앓는 ‘자였습니다. 환자들은 한 가지 질병만을 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가지각색의 질병들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일일이’모두 다 고쳐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을 만나시고 아픈 부의를 쓰다듬으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세밀하시고도 자상한 치료이십니까? 마8:16에도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말쓰믕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대상이 아니라 모두 다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손을 얹으사’하신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손을 얹어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말씀만으로도 하실 수 있었습니다만 손을 얹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의 가장 가까이 계시는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의 손은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시는 손이시며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시는 손이시고 우리를 위급한 환경에서 지켜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손이십니다. 주님의 손은 순결의 손으로 그의 만짐을 받는 사람들은 깨끗함을 입습니다. 그의 위로의 손은 마음에 평화를 주시고 치료의 손은 우리의 병든 몸에 건강함을 주십니다.
복음 전도자 예수
눅4:42-44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 명백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43절).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시는 전도자로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확인하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면 전도자 예수의 삶은 어떠한 삶이었는지,그리고 전도자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기도록 시작하는 복음 전도의 사역
모든 전도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은 매일의 전도 사역을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1)새벽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먼저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사람과 만나기 전에,그리고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새벽 기도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새벽에 기도하는 전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2)사역의 순간순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전도 사역의 순간순간에도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인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 그는 기도하셨습니다(막6:41).또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주님 자신이 아버지께 보냄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을 둘러선 무리에게 증거하시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11:41,42).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다가오자 땅에 엎드려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막14:35).전도자는 복음을 전파하는 순간순간마다 겸손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3)모욕하는 자와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영혼을 화목케 하는 사역입니다. 때문에 모욕과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도하기 위해,복음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마5:44 ;눅6:27,28).
4)최후 승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그리고 모든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6:7-15).
2.세계를 향한 복음 전도의 사역
복음 전파의 사역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한 민족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본문 4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무리를 떠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주라고 하셨습니다(마28:19).
1)복음 전파는 찾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가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시며 전도하신 것처럼 전도자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어디든지 스스로 찾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2)복음 전파의 대상은 모든 족속입니다.
주님은 ‘모든 족속’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지상의 모든 인간은 복음을 수용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의무입니다. 전도자는 세계 어느 민족,어느 인종이든지 가리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여기에 세계 선교의 비젼이 있습니다. 인종,문화,이념,국경,종교까지 초월하여 전도해야 합니다.
3)제라로 삼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한 영혼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궁극적 목적은 그 영혼을 주님의 제자로 삼게 하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3.복음의 주제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언급된 것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주님은 43절에 보면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셨습니다(막1:15).주님이 전하신 메시지의 본질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바클레이는 주장하였습니다.① 과거의 하늘나라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나라에 있으며,수세기에 걸쳐서 거기서 살았습니다(눅13:28).②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하늘나라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하셨습니다. ③ 미래에 완성되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 때 완성될 것이며,성도는 도래할 그 나라를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4장: 희년의 복음
누가복음 4장: 희년의 복음
1. 1-13절: 오직 하나님에게만
세례 받으신 후에 예수님은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임하신 성령께서 인도하신 일입니다(1절).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분은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영적 생활의 아이러니는 영적으로 충만하고 깨어 있을 때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더 심해진다는 것입니다. 사십 일 동안에 그분이 겪은 일들 중에 이 이야기만 전해졌습니다. 제자들에게 전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유혹에서 사탄은 두 번이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3절, 9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의심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라는 것이 유혹의 핵심이었습니다.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라”(3절)는 것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9절)도 자신의 신분을 입증하라는 유혹입니다. 또한 악마는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합니다(7절).
이 유혹은 인간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원죄의 핵심인 이기심을 자극한 것입니다. 이 유혹과 싸우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준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거부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입니다. 이 결의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골고다까지 흔들림 없이 걸어가게 해 준 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면서 거듭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4절, 8절, 12절). 우리가 지속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 자체로 능력을 가집니다. “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고 대답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악마는 잠시 동안 물러 납니다(13절). 잠시 퇴각했던 악마는 예루살렘에서 가룟 유다를 통해 다시 다가 옵니다(22:3).
2. 14-30절: 나사렛 선언
사십 일 동안의 금식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으시고 갈릴리로 돌아 오십니다(14절). 그분은 가버나움을 거점으로 많은 병자를 고치고 권위 있는 말씀을 가르치셨는데(23절) 누가는 그 활동을 간략하게 요약하고는(14-15절) 나사렛의 회당에서 있었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고향 나사렛을 방문했던 어느 날 예수님은 안식일 예배에서 설교를 해 달라는 초청을 받으십니다. 당시 회당에서의 설교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율법과 예언서를 읽고 간단히 설명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펴시어 61장 1-2절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그것은 메시아 예언의 하나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신 메시아를 통해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풀어 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19절)는 레위기 25장에 규정된 ‘희년’을 말합니다. 50년째가 되는 해에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고 모든 종을 해방시켜 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해 ‘영원한 희년’ 즉 완전한 해방과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다 읽으신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자리에 가서 앉으십니다(20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분을 주목하자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21절)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한 편으로 놀라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 이상하게 여기기도 합니다(22절).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이상히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강한 의혹과 의심의 눈으로 그분을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영받는 예언자는 없는 법이라면서(24절)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와 나아만 이야기를 들어 그들의 의혹과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할 것이라고 책망하십니다 (25-27절).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에 분노하여 그분을 회당에서 쫓아 냈을 뿐 아니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28-29절).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30절) 떠나 가셨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둘로 가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 앞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은 자주 분열과 갈등과 거부와 배척을 불러 옵니다. 그것은 복음이 진짜라는 증거입니다. 진리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대충 살려는 태도를 흔듭니다. 좋은 거 아니면 나쁜 거, 둘 중 하나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희년의 복음을 나쁜 것으로 받고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3. 31-44절: 회복의 역사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31절). 안식일이 되어 그분은 회당에 가셔서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곳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 소리를 지릅니다(34절). 예수님은 그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십니다(35절). 그 소문이 삽시간에 그 근처의 모든 동네에 퍼져 나갔습니다.
회당을 나와 시몬의 집으로 갔을 때 그분은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38-39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온갖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40-41절).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 못하게 하시고 쫓아 내셨습니다. 귀신들이 그분의 정체를 알고 발설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르기까지 당신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사실을 비밀로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곤 하셨습니다(42절). 그 기도로 인해 그분은 영적 충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다녀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내어 “자기들에게 떠나가지 못하시게, 자기네 곁에 모셔두려고”(42절)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끊임없이 움직여 다니셨습니다(43-44절). 한 곳에 정주하여 대접받는 것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묵상: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주의 은혜의 해” 즉 영원한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희년에 일어나야 할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해방’입니다. 해방의 본질은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와 인간 세계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그것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요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온갖 어그러진 것들을 바로 잡으십니다. 병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풀어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결국 이루시려는 일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치유하여 온 세상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결국 해결되어야 할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 문제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분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희년의 현실을 당신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서 보게 하십니다.
복되어라, 예수님을 통해 온전한 해방과 회복을 경험한 이!
[마가복음 4장 주석 성경말씀] 씨뿌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마 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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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가복음 4장 주석 성경말씀 중에서 씨 뿌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옥토 밭이 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 마음이 좋은 밭이 될 때 복음의 씨가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결실을 맺으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천국은 작은 겨자씨가 떨어진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작고 미약하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마 4:1-41)
1-20절, 씨 뿌리는 비유
[1-8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예수께서는 바다 위에 배에 앉아 가르치셨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었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기회 있는 대로 가르치셨다. 그는 설교하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셨다. 그는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다. 비유는 일상적 사건이나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하셨다. 예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장애가 없는 일반 사람들은 들을 귀를 다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할 것이나, 육신의 귀는 가지고 있지만, 듣고 깨닫는 영적인 귀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은혜 주시는 자들만 가질 것이다.
[10-12절]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그 비유]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라고 표현하셨고, 또 ‘너희’와 ‘외인,’ 즉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버려두신 자들을 구별하셨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확실히 제한적이다. 비유는 예화와 다르다. 예화는 사람의 이해를 돕는 이야기이지만, 비유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뜻이 있는 이야기이다. 비유에는 표면적 내용과 이면적 내용이 있다. 비유의 표면적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이면적 진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신 자들, 그래서 불신앙과 죄악으로 그 마음이 굳어진 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께로 돌아오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의 눈이 열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13-15절]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그들의 마음에]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예수께서는 그 비유를 설명해주셨다.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처럼 생명이 있다. 마른 씨를 땅에 심으면 싹이 나듯이, 평범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 역사(役事)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마 13:37), 그의 사도들과 그 후 오늘날까지 목사들과 전도자들이 그 직무를 이어받는다.
주께서는 씨가 뿌려진 땅을 네 종류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킨다. 첫째로,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하고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을 가리켰다. 주께서는 그의 말씀을 뿌리는 일을 하시지만, 사탄은 그 말씀을 빼앗는 일을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싫어하며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생각을 흐트러뜨리고 진지하게 받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생각을 집중하고 진지하게, 졸지 말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고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될 것이다.
[16-17절]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둘째로, 씨가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지는 것을 가리켰다. 세상에는 질병이나 궁핍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 또 특히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한 환난과 핍박도 있다. 하나님 말씀의 뿌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들은 환난 중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을 위해 성경책을 주셨으므로(눅 1:1-4; 딤후 3:14),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18-19절]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재물]의 유혹(아파테)[속이는 것](KJV, NASB)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셋째로, 씨가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그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것을 가리켰다. 누가복음 8:14는 거기에 ‘쾌락’을 추가하였다. 재물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사람을 속인다. 그러나 실상 재물은 환난날에 사람들을 구원하지도 못한다(잠 11:4; 습 1:18; 겔 7:19). 돈은 어느 날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린다(잠 23:5).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9-10).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또 세상 염려를 버리고, 성경 교훈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6, 8).
[20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넷째로, 씨가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가리켰다. 누가복음 8:15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식물의 씨앗 하나는 심기어 자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한 사람은 많은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단지 인간 편에서 성실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지하게 듣고 깨닫고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그것을 지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람은 그의 충성의 정도대로 차등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진지하게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을 잘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믿음이 성경을 통해 견고해지고 성경말씀에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돈의 속임과 육신의 쾌락을 다 버리고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진지하게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그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며 그 교훈대로 의와 선을 실천하여 많은 열매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34절, 겨자씨 비유
[21-23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드러나지 않을](전통본문)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말’은 열 되짜리 큰 통을 뜻하고, ‘평상’은 침상을 뜻하고, ‘등경’은 등잔걸이를 뜻한다. 등불은 큰 통 아래나 침상 아래 두지 않고 등잔걸이 위에 걸어둔다. 이처럼,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은밀하게 전해질(秘傳) 것이 아니고 세상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지고 알려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책에 기록되어 세상 만민에게 공개되어 있다.
[24-25절]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듣는 너희는] 더 받으리니 [이는]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빼앗길 것임이니라].우리는 듣고 배운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를 취급하실 것이다.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대 하실 것이지만,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고 불신앙적이면 그는 우리를 버리실 것이다. 왜냐하면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자’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있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없는 자는 이미 가진 지식과 은혜도 빼앗길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읽고 듣고 음미하고 간직하고 실행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들은 말씀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삼가며 굳게 지켜야 한다(히 2:1; 고전 15:1-2).
[26-29절]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사람이 씨를 땅에 심으면 어느새 씨에서 싹이 나와 자라서 이삭이 생기고 그 이삭이 충실한 곡식이 되면 낫을 대어 추수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의 전파를 통해 세상에서 시작되며 처음에는 싹이 나듯이 작은 단체이지만 점차 성장한다. 이 비유는 천국의 성장성을 가리킨다. 세상에 심겨져 싹이 나며 성장하는 천국은 지상의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어지고 그의 택한 백성이 다 구원을 얻게 되면, 그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세계복음화와 복음 전도는 주께서 신약교회에 명령하신 최대의 사명이며 과제이다.
[30-32절]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성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더 증거된다. 겨자씨는 씨들 중에서 심히 작은 씨이지만, 심긴 후에 자라면 모든 채소보다 더 커지며 큰 가지를 내므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겨자씨 나무는 키가 3미터 이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천국, 즉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은 처음에는 심히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놀랄 만큼 심히 커질 것이다. 이것은 전체 교회를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성도 개인의 성화나 지교회나 교회들의 영적 건립과 영적, 수적 성장도 그러하다. 그러나 공중의 새가 깃들인다는 말씀은 세계 교회가 심지어 마귀와 악령들이 그 안에 자리를 잡을 만큼 커질 것을 암시하신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점도 교회 역사를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마귀와 악령들의 종인 많은 이단자들이 들어와 있다.
[33-34절]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예수께서는 많은 비유들로 말씀을 가르치셨다. 비유는 그의 설교 방식의 한 특징이었다. 비유들은 표면적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나, 그 이면적 의미는 해석이 필요하였다. 예수께서는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해주셨다. 이제 성경은 수수께끼 같은 책이 아니고 어려운 부분이 해석된, 이해할 만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관적으로 그 뜻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성경 자체가 밝히 보이는 뜻, 특히 성경의 전체적인 뜻을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 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경건과 도덕성의 새 삶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경의 대의를 아는 자들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은 은밀하게 전해지지 않고 세상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으며 또 간직하고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의 교훈 속에서 개인의 구원의 확신과 성화를 이룰 뿐 아니라, 세계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전도자들을 파송하고 후원해야 한다.
35-41절,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심
[35-38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아펜테스)[보낸 후에] (KJV, BDAG)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날이 저물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보낸 후에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 다른 배들도 함께하였다. 그런데 큰 광풍이 일어났고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가는데도 큰 광풍이 있었다. 이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많다. 세상의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KJV)[혹은 방석](NASB, NIV)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다. ‘고물’은 배의 뒷쪽을 가리킨다. 육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주께서는 깊은 잠이 드셨던 것 같다. 잠이 드신 것은 그가 사람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며 육신의 피곤을 느끼셨고 잠이 필요하셨음을 증거한다. 물론 그는 신성(神性)으로는 그 상황을 아셨겠지만 잠잠하셨다. 주께서는 성도의 고난의 현실에서도 때때로 잠자듯이 조용하시다.
제자들은 그를 깨우며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직 알지 못하고 그를 단지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날 밤 그들은 예수께서 신적 구주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39-41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예수께서는 깨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말씀하셨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주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다. 바람과 바다가 인격이 아닌데도, 주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자연 만물도 예수님께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계(靈界)와 인간계뿐 아니라 자연계도 다스리신다. 그는 천사들과 사람들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도 주관하신다. 사람들 가운데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큰 광풍을 제어할 자가 아무도 없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광풍을 제어할 자가 아무도 없지만, 주께서는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다. 그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고 서로 말했다. 이 사건의 중심 교훈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람과 바다를 명령하여 복종시키는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신성을 가지신 자, 곧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신 자이시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풍성한 증거들이다.
또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연환경까지도 주관하심을 증거한다. 그는 풍랑뿐 아니라, 홍수와 가뭄, 태풍과 폭설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건강이나 가정의 일들도 주관하시고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도 주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사함과 영생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도우시며 해결하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일들을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교훈하였다(빌 4:6-7).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큰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세상에 바람을 꾸짖고 큰 풍랑을 잔잔케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이 사건과 또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확신하자.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신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는데 큰 광풍을 만났다. 세상에는 사람이 예기치 못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다. 그것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자들에게도 생기며 참된 교회에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큰 광풍을 잔잔케 하셨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히 13:8). 그는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를 자연재해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다. 또 그는 우리의 건강과 경제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악을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또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시시때때로 그에게 나아가 감사하며 죄를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며 우리의 모든 소원을 아뢰어야 하고, 또 그 교훈의 말씀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 교회사 성경공부] 로마제국 내에서의 기독교의 발전반응형
누가복음 강해
누가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2월 12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누가복음 서론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5장: 죄인을 부르심 6장: 가르치심 7장: 기적들을 행하심 8장: 기적들을 행하심 9장: 제자의 길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2장: 절대적 신앙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서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휘, 문체 등의 특징 및 동일한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 등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의 ‘우리’라는 부분들(행 16:10-17; 20:5-21:18; 27:1-28:16)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반자이었음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코이네 헬라어에 익숙하였고 어휘가 풍부했다. 1) 이 두 책에는 의학적 용어와 질병이나 병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난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이었던 의사 누가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초대교회의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에는 “바울이 그의 전도 여행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의사 누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세 번째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써 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바울의 동반자인 누가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다” 2) 고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와 터툴리안(160-220년경)도 이 책을 누가의 저작으로 돌렸다. 누가는 헬라인인 듯하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누가를 유대인과 구별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4:10-11, 14). 그러나 그는 구전 자료들과 기록된 자료들을(1:1-4) 성령의 인도 아래 사용했을 것이며 사도들과 기타 증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많은 것을 듣고 확인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을 61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누가복음은 그보다 일찍 아마 주후 58년경 즉 바울이 가이사랴에 투옥되었을 때 즈음에 사도 바울 곁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세 번째 책이다. 복음서들의 목적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이를 통해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20:30-31). 누가는 이 책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데오빌로의 지식을 확실케 하기 위함이라고 썼다(눅 1:1-4).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은 참 믿음의 요소이다. 누가복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 가장 자세히 증거했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많은 언급과 교훈이 나온다.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해 15번 나오는데, 그 중 11번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또 누가복음 11,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은 찬양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넷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동정적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장), 탕자의 비유(15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3) 다섯째로, 누가복음은 여인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여섯째로, 누가복음은 복음서들 중에 가장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일곱째로, 누가복음에는 세계주의적 안목도 나타난다.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묘사되었고(2:32), 그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올라갔으며(3:38), 유대인들을 제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범으로 제시되었다(10:25-37). 4)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4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 . . . 누가복음의 인간 저자는 누가이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며 의사이었고(골 4:14; 딤후 4:11) 사도행전의 저자이었다. 그는 본문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누가는 본서의 내용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NASB, BDAG) 이라는 원어( 페플레로포레메논 프라그마톤 )는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 (KJV) 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누가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이루어진 사실들이며 초대교회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이 지어낸 말들에 근거하지 않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들과 사건들에 근거한다.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한 사역자들이 증거한 바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 중에는 그의 말씀들과 행적들에 관해 글들을 남긴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글들은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자료들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증인들과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참고함으로써 사건들과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으며 그것들을 확증할 수 있었다. 누가는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대략적인 시간 순서를 포함한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당시 어떤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자임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누가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이 귀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누가는 본서의 목적이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가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본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본서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고 확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자. 5-25절,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함 [5-7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 . . .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했던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가랴이며 그 아내도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의인은 없지만(롬 3:11),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의롭게 산 의인들은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법들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어도, 짐승 제사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들을 힘써 지킨 자들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그들을 주목하셨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그 둘의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이런 부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욱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런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어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고,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8-17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 . . .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때에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였는데,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분향단 우편에 섰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자 천사가 말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말은 사가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옛날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노아도 오랫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 생활로 믿음의 단련을 얻었고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본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에게서 잉태되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 후 그에 대해 네 가지 내용을 전하였다. 첫째,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둘째,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셋째, 그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넷째,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당신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오늘날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 . . . 사가랴가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말하자, 천사는 대답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떻게’라는 원어 ( 카타 티 )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이상(異像) 즉 환상을 본 것을 알았다. 그는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 그 직무의 날이 다 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24-25절]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 . . .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말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여인이 자녀를 잉태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그에게 잉태하는 복을 주셨다. 과거에 오랫동안 그들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자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자녀를 잉태케 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시 135:6). 1-25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확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본 증인들의 증언들과 그 글들인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확실함을 깨닫고 그 모든 진리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의롭게 살자.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2).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힘써 행함으로 실제로 의롭게 살자. 셋째로, 의인에게도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부족이었다. 의인에게도 부족과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그의 하시는 일들을 기다리자. 넷째로, 우리는 기도 응답을 믿자. 사가랴의 기도는 간절히 또 아마 오랫동안 올려졌던 것 같은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들으신 바 되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힘써 기도하자.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이었지만, 벙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잘 이해하고 의심하지 말고 다 믿고 또 힘써 행하자. 26-38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26-27절]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 . . .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나타났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이었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일이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 언급한 것(27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잉태되셨음을 증거한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34절) 숫처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순결한 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1절]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 . . . 천사는 마리아에게 들어가 말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전통본문). 5) ”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자, 천사는 말하였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생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 . . . 천사는 또 말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가 어떤 자이며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자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울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34-36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 . .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 포스 )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다. 잉태치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아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성탄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KJV, NASB, NIV) 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 . . .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 헤 둘레 퀴리우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마리아의 말은 그의 겸손과 그의 믿음과 순종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은 아름다웠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자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39-56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 [39-45절]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 . . .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북쪽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있는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팔레스틴의 남쪽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친척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잉태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그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도,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가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 할 주가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주의 모친’이 될 마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여인이 훌륭한 아들을 둔 것도 복이지만,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46-56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 . .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찬송하였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그는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말씀하셨듯이, 그의 긍휼을 기억하셔서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낮고 비천함을 고백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종임을 고백하는 자는 겸손한 자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다. 마리아는 또한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의 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말하며 그의 초월성을 고백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성결성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그의 초월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언급하며 그 긍휼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세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는 그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긍휼을 얻는 길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능력, 특히 공의로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적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셨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그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졌는지!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지식이며(신 32:39), 옛날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가졌던 지식과 믿음이었다(삼상 2:6-7). 또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그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엘리사벳은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 아마 이모쯤 되었던 것 같다. 석 달은 임신한 여자가 입덧을 할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26-5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처녀이었던 마리아(27절) 사내를 알지 못했던(34절)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35절) 하나님의 능력으로(37절)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 그러므로 천사 가브리엘이 증거한 바와 같이, 마리아가 잉태한 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며(32절) 이러므로 마리아에게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다(35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뱃속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을 체험하였다(41절). 또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실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그는 메시아이시다. 천사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했다(31절).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죄인들을 그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천사는 또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며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한다(33절).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예레미야 23:5-6도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구주이시다. 죄인은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셋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38절)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헌신하였다(38절, 45절). 그는 온갖 오해와 비난과 수치, 그리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의 능력과 긍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긍휼과 공의를 고백하며 주께 헌신하자.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57-66절, 세례 요한의 출생과 할례받음 [57-66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 . . .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고 이웃과 친족들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다. 8일이 되자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였는데, 그 모친이 대답하기를,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고 하고 그 부친에게 형용하여[손짓으로]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書板)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니 모두 다 기이히 여겼다. 이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 근처에 사는 자들은 다 두려워했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며 듣는 사람들은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고 말했다.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요한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으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중에서 더 견고해진다. 67-80절, 사가랴의 찬송 [67-71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 . . .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입이 열린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贖良)하시며[구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참된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알고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의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속량(贖良)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가리킨다(렘 23:5-6; 겔 34:23-24; 호 3:5; 사 11:10 등). 뿔은 능력의 상징이다. ‘구원의 뿔’이란 ‘능력의 구주’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가? 사가랴는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이며, 또 사탄의 도구가 된 악의 세력들과 세상 권세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앗수르, 바벨론 등 이웃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이었다. [72-75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구원얻을 영혼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맹세로 그의 긍휼을 나타내셨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불결과 죄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 될 것이다. 또 구원받아 천국 백성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79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아들 요한의 역할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의 역할은 지극히 높으신 자 곧 하나님의 선지자 즉 대언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죄를 각성시키고 그 죄를 버리게 하는 것, 즉 회개하게 하는 사역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고(마 3:2)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눅 3:3). 사가랴는 요한이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할 메시아의 사역을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 스플랑크나 엘레우스 ) [긍휼의 심정]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가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구원은 죄사함의 일이다. 사람이 죄사함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의 복을 얻을 수 없다. 에베소서 1:7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로써 돋는 해( 아나톨레 )[해의 돋음]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돋는 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슬픔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킬 것이다.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자들에게 지식과 의, 기쁨과 생명과 천국의 복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결과는 평강이다. 구원은 평강의 길이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 . . . 아이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려면 심령의 강건함이 필요하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그러한 생활은 속화된 제도적 종교 생활보다 많은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종들이, 배교되고 타협하는 교회들의 풍조에 비교적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더 적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 곧 구주를 주셨음을 찬송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의 원수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원수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며 모든 죄와 불행으로부터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죄사함의 구원이다. 죄사함은 구원의 방법이며 구원 자체이다. 죄가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마 20:28).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구원의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義)도, 조건도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 구원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 구원의 목표는 빛과 평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돋는 해로 오셨다. 그 빛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이며,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다. 이제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길 것이다.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이며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현재의 삶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구원을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자가 되자.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지옥]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의 때문에] 영생이니라.”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1-7절, 예수님의 탄생 [1-5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 . .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온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때이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역사상 옥타비아누스라는 인물이며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다. 총독 구레뇨는 두 번 수리아 총독직을 맡았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주전 10-7년경이고, 두 번째는 주후 6-9년이다. 가이사 황제의 칙령은 구레뇨가 처음 총독이었을 때 내려졌던 것 같다. 6)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마 1:16, 20)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해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약혼]한 [아내](전통본문) 7)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그 여자의 남편’(마 1:19), 마리아를 ‘그의 아내’(마 1:20, 24)라고 표현하였다. 마리아는 임신한 지 여러 달이었다. 그의 태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마 1:18; 눅 1:35).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예언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6-7절]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 . . .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었을 때(마 2:1, 8, 16)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 )는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는 말로 마리아가 예수님 출산 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나타낸다. 전통사본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의 남동생들과 또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를 부당하게 높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천주교회는 이 외에도 마리아가 평생 죄가 없었고 승천하였고 죄인들의 중보자요 기도를 들으시는 자라고 가르치는데 이것들은 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교리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은 심히 비천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구주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 탄생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제물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탄생하신 것이었다. 여기에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 1:14)의 깊은 뜻이 있었다. 8-14절, 천사의 증거와 찬송 [8-10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 . . .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 날 밤, 그 지경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은 주의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의 천사는 역사상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날 밤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곁에 섰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은 그 천사를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주의 천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연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그 천사는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였다. [11-12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 . . . 천사는 말하였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구주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 주’이시다. ‘주’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불행과 죽음에서 건져낼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셨다. 목자들은 가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고 또 표까지 주셔서 그 소식을 믿게 하셨다. 기독교는 많은 표적들로 확증된 진리이다. [13-14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 . . . 홀연히 하늘의 천사들의 큰 무리가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로다](전통본문).” 8)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나 ‘낙원’과 동일하다(고후 12:2-4). 그 곳은 태양계와 은하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구주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또 땅 위에서는 평화와,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은혜와 평화는 구원의 원인과 그 결과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죄로 인해 심령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평안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참된 평안을 얻는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도 상당한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린다.
15-20절, 목자들의 확인 [15-20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 . .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그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다. 그들은 주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였다. 또 그들은 이 아기에 대해 들은 것을 다 알려주었다. 듣는 자들은 다 목자들의 말하는 것을 기이히 여겼으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는 이와 같이 찬송이 있었다.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고 목자들의 찬송도 있었다.
1-20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다윗의 동네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약속하셨었다. 본문은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올라갔다고 말하며(5절) 또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다윗의 동네에서 구주가 나셨다고 말하였다(11절)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약속을 지키신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강보로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 7절,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2절, “너희는 가서 강보에 사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16절, “[목자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께서 외양간에서 탄생하셨고 포대기에 싸여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셨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것도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탄생 때부터 그러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했다(빌 2:5-8).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도 바울은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낮아지심이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주의 천사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하였다(10-11절). 구주께서는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쁘고 복된 일은 없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는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또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하였다(갈 1:4). 또 그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땅에 사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는 일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로다”라고 말하였다(14절).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를 통해 주신 구원의 결과는 평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안이 없는 세상에 평안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은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롬 3:16-17). 그런데 구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11:28). 또 그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요 14:27). 그러므로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살후 3:16). 우리를 죄와 불행과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자. 또 세상이 줄 수 없고 오직 그 분만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자. 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감사하며 다른 이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21절, 할례를 받으심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 . . . 할례할 8일이 되자,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그것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이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로서(창 17:10-11)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또 할례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갈 5:3).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자이시며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서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다. 22-24절, 마리아가 결례의 제사를 드림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 . . .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결례(潔禮)의 날이 찼을 때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결례의 날이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아이의 경우 출산 후 7일과 33일, 합하여 40일이 지난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율법대로 첫 남자아이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경건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케 하셨다. 오늘날도 성경말씀대로 행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가정이 될 것이다.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산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하였다. 그들이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 제물은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우리는 가난해지신 그를 통해 천국의 상속과 하나님 자녀 됨의 회복과 영생의 복을 얻었다. 25-35절, 시므온의 찬송과 예언 [25-27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 .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의 부패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가 있었다. 사람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당시에 우선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런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임함을 의미할 것이다. 천국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보내 주시는 참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그리스도이시며 시므온은 그를 보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아기 예수를 만났다. [28-33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 . . 그때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하였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요셉과 그의 모친(전통본문)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구원’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그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실 것이다(요 1:29). 그는 세상 모든 족속의 구주가 되실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사 42:6; 49:6). [34-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 . . . 시므온은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말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고’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면, 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인간은 참으로 심히 죄악되고 악한 존재이다! 36-38절, 여선지자 안나의 감사 [36-38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 . .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당시 아마 106세쯤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예루살렘에서](전통본문) 9)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9절, 나사렛으로 돌아가심 [39절]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들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도착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 관련하여,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본절(39절)의 중간 즈음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고 저술하며 증거하였다고 보인다. 21-39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주이시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함으로 다 구원을 받자. 또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사함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자.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는 죄사함받은 사실을 감사하며 이제는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경건한 성도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가치를 두고 살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자. 그는 영광의 천국을 떠나 이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마구간에서 출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출생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부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가 난해지셨다(고후 8:9). 우리는 그의 겸비하심을 본받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하자.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 . . . 본문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에 대해 “아기가 자라며 [심령이](전통본문) 10)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튼튼하게 자라셨다. 인간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이 자라셨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은 심령으로 강하여지셨다. 아기 예수님은 몸 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셨다. 아기 예수님의 심령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상태에서 점점 강해지셨다. 셋째로, 아기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라고 보인다.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로고스 )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특히 지혜와 능력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하셨던 것 같다. 넷째로, 아기 예수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그에게는 원죄의 죄성과 연약성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어린 아기들에게도 있는 불만과 저항심 같은 것이 없으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그 위에 계셨다. [41-47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 . . .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혹은 조금 자라서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그는 아기 때부터 경건 훈련을 받으신 셈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그 부모[요셉과 그 모친](전통본문) 11) 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으며 사흘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소년 예수께서는 선생[랍비]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계셨고 듣는 자들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지혜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서 엿보였다. 소년 예수께서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알 수 없으나, 본문은 삼일 후 요셉과 그 모친이 소년 예수를 발견한 것이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고 선생들이 다 소년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47절의 ‘지혜’라는 원어( 쉬네시스 )는 ‘총명’이라는 뜻이며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 소피아 )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소년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48-50절]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 . . 그 부모는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말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아이야’라는 원어( 테크논 )는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보통의 말이다. 또 마리아는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부친이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문(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에는 ‘집’이라는 말( 오이코스 )은 없고 남성 혹은 중성 복수정관사( 토이스 )만 있다. 생략된 명사는 단수명사인 ‘성전’이나 ‘집’보다 복수명사인 ‘일들’( 에르고이스 )이 더 가능하여 보인다. 이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 (KJV) 의 번역대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소년 예수의 증거이다. 소년 예수께서 12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또 그는 12살 때에 벌써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다. 그 후 30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성경 연구와 기도로 그의 사명을 준비하셨을 것이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神性)의 신비, 즉 그의 인성과 그의 신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될 수 있으신지의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고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 . . . 본문은 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니라”고 증거하였다. ‘한가지로’라는 말( 메트 아우톤 )은 ‘그들과 함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그는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시며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섬기셨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원어 12) 는 그가 계속하여 그들에게 순종하셨음을 보인다. 소년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명하였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소년 예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오늘 시대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며, 부모들도 자녀들을 예수님처럼 계명을 순종하는 자로 키워야 한다. [52절]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문은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증거한다.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셨다.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는 영혼의 활동들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40절),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자라셨던 것 같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 속에서 자라셨던 것 같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키가 자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 그의 몸은 어린아이에서 십대의 소년으로, 20대의 청년으로, 그리고 30세의 성인이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죄 없는 인격, 흠과 결함이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이셨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40-52절의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의 신성에 관해,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셨다. 또 그는 열두 살 되셨을 때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는 모친 마리아의 말에 대해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그 모친 마리아도 소년 예수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둘째로, 그의 인성에 관하여, 예수님은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성장하실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계명대로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하자.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제물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을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는 신약성경과 특히 사복음서를 통해 그를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얻기를 바란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본받고 우리 자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자. 우리는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한다. 특히 경건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과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실천함을 통해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운 자들이 되기를 기도하자. 또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고 성경말씀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모범대로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 되어야 한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6절,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 [1-2절]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사역은 명확히 역사적 사실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활동 시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되어 있다.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 되는 해는 주후 28년경일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유대의 총독이었고(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헤롯 안디바스는 예수님 탄생 때의 왕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의 분봉왕(영토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왕)이었다(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그 동생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었고(주전 4년부터 주후 34년까지),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주후 약 27년부터 28년까지).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고(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안나스는 그의 장인으로서(요 18:13) 역시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이 증거한 대로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이나 그 이전에 탄생하셨고 주후 28년 초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 곧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알리시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그것은 영생의 말씀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지자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큰 특권이며 큰 복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될 자는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대의를 파악하고 그 심령이 그 말씀으로 불붙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 곧 광야에서 요한에게 왔다. 광야는 비교적 세속 사회에 때묻거나 물들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조용히 하나님과 많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며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때때로 우리는 광야에서나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광야는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이 좋지 않은 거친 들판이다. 마태의 증거대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간 것은 아마 당시의 제사장 사회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된 사회 환경이나 심지어 부패된 교회 환경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3절]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그는 노방 전도 혹은 야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마태의 증거대로(마 3:5-7), 많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사회각계각층이 죄악되고 사람의 본성과 삶이 죄악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회개는 죄사함을 얻게 한다.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또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고 또 회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명하셨고 사람이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세례’는 회개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물론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의 표시요 고백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는 자는 세례받을 수 있고 또 세례받아야 하며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6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 . 이 일은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와 같았다. 거기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았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것은 왕의 행차시 길을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한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낮추고 불신앙과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깊은 골짜기들을 메우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과 높은 마음을 버리기 전에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될 구원의 복음이다.
세례 요한은 구체적 역사 상황 속에서 일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신화적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그 기초요 그 골격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믿고 확신하자. 기독교의 핵심은 죄사함의 구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요긴한 진리는 죄가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의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며, 죄사함이 이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의 구원이다. 모든 사람은 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죄사함은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진심의 회개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서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과 악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는 자만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7-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7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 . . .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뱀이 사람을 범죄케 한 후,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거절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또 그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책망하셨다(마 23:33). 사도 요한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요일 3:8). 이것은 다 영적인 표현이다. 요한은 또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 엄하고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인류 초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나 후에 소돔 고모라 성의 심판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또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인 한 내용이다.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 . . . 요한은 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그는 회개하는 겉모습만 가지지 말고 참으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다. ‘회개’라는 원어( 메타노이아 )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참 회개는 변화된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불의와 악과 거짓의 삶을 청산하고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참된 회개가 없이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며 우리가 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큰 해가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 없는 구원의 확신은 오히려 그를 멸망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는 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이방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이 주권적 처분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그의 은혜이었다.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 . . . 요한은 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을 나무에, 하나님의 심판을 그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에 비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선한 행위들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미( 에데 )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악인들을 마지막 날 지옥불에 던질 것이다. 지옥은 사탄과 악령들 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10-13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 . . .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대답하였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먹을것과 입을 것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참 회개는 구체적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행위의 변화이다. 남을 돌아보며 없는 자와 나누는 것은 회개의 증거이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자, 그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강제로 징수하지] 말라”고 말했다. 세금받는 자들은 나라에서 정한 세금 외에 더 무엇을 징수치 말고 정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옳고 양심적인 일이다. [14절]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 . . . 군병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 그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거짓되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다. 군인들이 칼의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사람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칼의 힘을 악용하지 않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이 맺을 회개의 열매이다. 이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의와 선함과 진실의 행위들이다. 오늘날 정치가나 법조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사업가나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직, 선함, 진실이 요구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였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의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내 보이어야 한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헛된 확신을 다 버리자. 좋은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실히 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다. 주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바울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했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러해야 한다. 모든 불의와 사악과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성도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구원에 합당하게 성실히 달음질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그 구원에 합당하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었는지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15-17절,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 [15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 . . .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사 제국과 헬라 제국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정치적 불만족과 육신적 질병들과 경제적 가난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자요 구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파하시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육신적 건강까지도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모든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17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 . . .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 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요한과 장차 오실 분은 그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분은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은 분이시다. 특히 그것은 기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운동은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고후 4:7-12). 둘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이시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세례는 단지 죄씻음을 외적으로 표시하고 확증한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실제로 죄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중생(重生)시킨다. ‘성령과 불로’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불은 용광로에서 금을 제련하는 데 사용된다. 성령은 죄인을 깨끗케 하신다(고전 6:11; 딛 3:4-6).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키’는 타작할 때에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기구이다. 그의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는 이 세상의 소유주이시며 또한 심판하실 권한이 있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세우신 자가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는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실 것이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쭉정이, 즉 회개치 않고 순종치 않은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에 대하여 “거기는 [악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8).
18-20절, 옥에 갇힘 [18-20절]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 . . . 요한은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는 말은 악인들의 회개치 않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 요한은 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신적 능력의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잘 도우실 수 있다. 이 능력의 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든든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시키신 분,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분이시다. 오늘도 그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렇게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의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알곡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회개하고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은 확실히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나, 계속 죄 가운데 머무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21-22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21-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 .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죄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심을 나타내신 것뿐이다. 그것은 청년 예수께서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첫걸음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가 세례 받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 간구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볼 수 있는 형체로 내려오셨다. ‘비둘기같이’라는 말은 성령의 순결하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본체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이시지만, 두 분 간의 인격적 구별은 있다. 이제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성령께서 오셨다. 그때 하늘로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함께 나타나셨다. 하늘로서 난 소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후에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한번 더 친히 증거하실 것이다(눅 9:35). 성경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23-38절, 예수님의 족보 [23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예수께서는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셨고 13)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실제상의 사실이 아니고 단지 족보상의 사실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요셉의 부친은 헬리이었다. [24-27절]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아람](전통본문)요, 14)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주신(눅 1:4) 증거의 책에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허용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둘 다 정확한 내용임을 믿는다. 그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추측들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족보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의 어떤 부분을, 같은 사람이 다른 두 이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養子) 제도나, 또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수혼(嫂婚) 제도(신 25:5-6)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여러 주석가들의 15) 추측대로 본장의 족보는 아마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 즉 23절의 ‘헬리’는 요셉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장인이라는 말이다. 랍비들의 글에 마리아를 ‘헬리의 딸’이라고 부른 곳이 있다고 한다. 16)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킨 것은 그가 구약시대에 또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증거하였고(사 11:1, 10; 렘 23:5, 6; 30:9; 33:15; 겔 34:23; 37:24; 호 3:5), 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예언하였다(창 12:2-3; 22:18). 더욱이, 누가는 메시아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하신 선언에서도 나타나 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최초의 메시아 예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인간의 죄의 형벌은 인간이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선언하신 대로 여인의 후손을 보내셨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또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자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신약성도에게 하신 약속들, 즉 예수님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 복된 영원한 생명 등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기뻐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친 음성의 증거 곧 그의 직접적인 증거이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무엇을 증거하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때에 이 중요한 증거를 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대해 친히 하신 증거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인류를 위해 보내주셨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독생자를 죄인들의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귀한 것을, 우리의 외아들을, 아니 우리 자신을 드리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큰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차례이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독특한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분명히 사람이셨다. 그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이다. 그것은 가장 놀라운 신비이며 기적 중에 기적이다. 넷째로,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굳게 믿고 소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1-13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 . . .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고 날 수가 다하므로 주리셨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지만, 인간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후에 일하셨다면, 오늘날 성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과 봉사생활, 특히 전도의 일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며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과 풍조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로 불린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요(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다(엡 2: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3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 . . 마귀는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첫 번째 시험은 떡 시험, 즉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본적 문제이다. 사람은 먹는 것을 위해 일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대부분 먹는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이 기본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 마귀의 이 말에서 우리는 마귀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옳은 개념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신약성경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전능하신 신성이 있으시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서 몹시 배고프셨기 때문에 기적의 정당성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그의 신성을 확증하였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록하기를( 케그랍타이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전통본문) 17) ”고 하셨다.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권위로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는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하셨다. 시편 119:105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됨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 됨을 증거하였다(엡 6:17).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육신적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 존재이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으며 행복을 위해 먹지만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떡은 몸을 위해 필요하나 영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떡은 사람의 죄 문제, 평안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죽음이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을 구하며 받자(엡 5:18). 그래야 신앙생활, 봉사생활을 잘 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자. 오직 그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자.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 . . . 마귀는 또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18)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말하였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그것을 주겠으니 내게 절하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였고(고후 4:4; 엡 2:2), 또 ‘온 세상은 악한 자[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였다(요일 5:19). 또 이 세상의 권세, 부귀, 영광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러나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미혹하였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고(약 4:4), 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이다(요일 2:15).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히 그를 물리치시며 대답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전통본문). 19)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건의 순수성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험은 없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마리아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9-11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 . . 마귀는 또 그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또 하나의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진실한 교훈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겠으나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의 추구, 혹은 과장된 기적 체험의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곳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생각이 무의미할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성경 해석의 건전한 법칙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문법적 해석이고,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고, 셋째는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과 문장 구성과 문맥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해석하는 것이고,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참 저자가 성령이심을 믿는다면,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충돌시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제안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다른 부분의 분명한 말씀에 위반되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그것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실상 기적의 필요성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적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경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자.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그를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였다면, 우리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6:41),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근신하라, 깨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5:8).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충만함을 얻고 성경말씀으로 잘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성경 읽기와 성경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권세와 영광을 얻으려고 사탄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려고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14-30절,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심 [14-15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 . .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화력뿐 아니라, 그의 기적의 행위들을 뜻하는 것 같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긴 것으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또 공적 문제들도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요소이다.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는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셨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곧 고향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습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수주일, 성경 읽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에는 예배실(‘바실리카’라고 부름) 앞부분에 강단(‘베마’라 부름)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19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 . . . 예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받고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이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펼쳐서 읽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원어는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니’라는 뜻이다. 전통본문에는 ‘나를 보내사’라는 말 다음에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며’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20)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 영적 문제는 육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마귀와 죄에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죄의 결과로 외적으로,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병,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께서는 이런 인생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를 그 불행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가운데 없지 않았으나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증거하였고(요 1:17),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고후 6:2). [20-22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 . . . 예수께서 회당에서 그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은 다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주께서는 그 날 회당에서 책을 읽기만 하시고 설명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단지, 그는 앉으신 후 회당에 참석했던 자들이 다 그를 주목하자, ‘이 글( 헤 그라페 )(혹은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하신 메시아, 곧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또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를 좋게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마태복음 13:54 이하에는, 그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칠 때, 사람들은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그들은 그 요셉의 아들이 정말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를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유 없이 그를 의심했고 무시했고 배척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시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57에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믿을 만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의 긍휼을 주권적으로 베푸시되,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버려두시고 이방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의 한 장군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 . . . 회당에 있는 자들은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미움은 살인이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는 권세와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육으로 가난해졌고 상했고 포로되었고 눈멀었고 억눌렸던 인생들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곧 평강과 자유와 기쁨의 구원을 주시는 자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아, 곧 인류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이히 여겼고 마침내 분이 가득하여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의 영광을 도무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영접하며 따르자. 또 오늘날도 성도들은 교회의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들을 그들의 인간적 약점만 보거나 바른 말씀을 싫어하여서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직분과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행하며 따라야 한다. 31-37절,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일 [31-32절]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셔서 안식일에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28-29도,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증거한다. 그의 말씀은 매우 권위가 있으셨다. [33-34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 . .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들을 일으키는 악령이다.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더욱 확산되고 왕성하여진다. 그 사람은 크게 소리질러 말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였다. 귀신 혹은 악령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지는 못하나, 그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35-37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 . . . 예수께서는 꾸짖어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주께서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신 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 대한 진리가 공개적으로 증거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 사실이 아직 공적으로 증거되지 말아야 하였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으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그의 능력과 권세는 확실히 신적 능력과 권세이었다. 이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 38-39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8-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 . .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독신자가 아니고 결혼한 자이었다(고전 9:5).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께 구하자 예수께서는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증거한다(마 8:15; 막 1:31). 주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 열병은 예수께 복종하였다. 그 병은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또 완전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확실히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 즉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생명체가 그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시다. 생물계와 무생물계가 다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한다. 40-41절,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치심 [40-41절]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 . . . 해 질 적에 각종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자를 데리고 나아오니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받는 자나 보는 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그리스도] 21)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마 8:4; 9:30). 그 이유는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고치기 위해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전체적인 문제 곧 죄사함을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기독교는 외적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 기적, 곧 회개와 믿음, 구원, 인간 변화, 새 사람 됨을 전한다.42-44절, 전도하심 [42-44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말리려 했으나 그는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씀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것은 마귀의 나라와 대조된다. 마귀의 나라는 어두움과 죄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빛과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뜻과 그의 말씀을 지킨다. 자신의 전도 사명을 밝히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22)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를 믿고 구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며,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으며,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심지어 열병에게도 명령하셨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의 능력 곧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셨다. 그는 병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 오늘도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나 좀더 넓게 말한다면 밥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완전한 치료, 곧 구원을 위하여, 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주셨고 그것과 더불어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며 또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자. 5장: 죄인을 부르심 1-11절,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다. [1-2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 . . . 무리가 둘러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하나의 명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그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밤에 고기를 잡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 베드로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 . .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이었다.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형식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은 청중이 되었다. 그 자신도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다.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다. [4-5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 . . . 그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대답하였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증거를 따라 이미 예수님을 알았던 자이었다(요 1:41-42).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몬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 . . .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찢어지다’는 원어( 디에레그뉘토 , 미완료과거)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친구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8-11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 . . . 시몬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였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존칭어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진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영광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다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일 뿐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참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으셨다. 그들은 다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임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참으로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이 허무한 세상임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과 천국이 이 세상과 돈보다 귀함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택하신 영혼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는 그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셨고 배 위에 앉으셔서 가르치셨고 시몬과 그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신기한 고기잡이를 통해 시몬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나 가득차게 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속의 물고기떼를 주장하셔서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그 물고기들이 잠간 동안에 그렇게 많이 잡히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그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깨닫고 믿는 자마다 그를 따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릴 것이다. 12-16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 . .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나병, 한센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였다. 나병 혹은 한센병은 피부를 붓게 하고 모양을 보기 싫게 만들고 피부색이 변하는 병이다. 이 병은 얼굴과 팔과 다리 표면의 신경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피부가 데거나 상처가 나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플레레스 레프라스 )[나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 병은 온몸에 퍼져 몸을 보기 싫게 만들었고 온몸의 감각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에게 나아갔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렀다. 이사야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소원을 말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많은 병고침의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았거나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구원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하였다.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 . .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 그는 마치 그 일 때문에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 같았다. 그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온몸에 나병 환처(患處)가 있는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병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병이 곧 떠났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하나님의 치료만이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14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 . . 예수께서 그를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병고침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셨다. 그의 임무와 사명은 다른 데 있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인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본다. [15-16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 . . .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힘을 얻어야 한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온몸에 나병이 가득한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나병은 곧 깨끗해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나 사명은 병고침이 아니셨다. 그는 불쌍한 나병 환자나 기타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의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주된 임무와 사명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심으로 그의 사명을 수행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목사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능력을 받는 길이다. 17-26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 . . .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고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였다.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求道者)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 노모디다스칼로스 )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 노미코스 )나 ‘서기관’( 그람마튜스 )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물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진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곳에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는 병환자들이 많았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주의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성(神性)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리킨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 . .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보인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고 또한 믿음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 . . .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을 가리킨다. 아니, 거기에 그 병자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아마 그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자의 믿음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수고하였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성경에서 병과 죄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물론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이 근원적으로는 죄에서 왔다. 각종 병도 그러하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병이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병은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로 세상에 있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자들도 많고 병원들도 많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자들도, 병원들도 없을 것이다. [21-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 .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의논한다’는 원어( 디아로기조마이 )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다’는 뜻으로 그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사람의 은밀한 의논까지도 아신다.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이 참람하고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만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23-24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러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인자(人子)는 그의 인성을 보인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사람이신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신적 사역을 하셨다. [25-26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 . .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었다. 또 ‘곧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이 일은 인간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시는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죄사함의 권세를 그가 가지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병의 관련성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건강을 누릴 것이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병 낫기를 기도할 수 있다(약 5:16). 그러나 우리는 병과 죄의 관련성을 알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도 본받자. 그들에게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친구에 대한 사랑, 서로 협력함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27-32절,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심 [27절]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 . . . 예수께서는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이었다. 그가 세관에 앉은 것은 그가 세금을 받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다(삼상 16:11-13). ‘나를 좇으라’는 말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초청이 아니고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사명의 부르심이었다. 주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렇게 부르셨다(마 4:18-22). 주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일꾼들을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위이셨다. 그 부르심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다.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했을 것이다. 여하튼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였다(마 4:20, 22; 눅 5:11).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유여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과 유여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지내며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를 통해 밝히 주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대신하여 그 일을 계승할 것이다.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 . . .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 . .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잘 모를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성도의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의 차원이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교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영적 교제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심히 불경건하고 무지하고 죄악되었을 때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도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다.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인과도 만나야 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해야 한다. 전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죄인들과 만나야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그들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만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여는 빌리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방법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진리에서 탈선한 이단자들이며 그런 이단자들은 회개와 전도의 대상이지 결코 전도 활동의 협력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며, 신약 교회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힘과 물질을 다 사용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귀한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레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세상적 안정과 물질적 여유를 다 포기하였다.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 그것은 가장 큰 보화이다. 우리는 남을 잘못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잘못 비난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인하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33-39절, 금식에 대하여 [33절]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 . . .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왜] 23)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저희’는 문맥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함께 이런 질문을 한 것 같다(마 9:14).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을 본받아서(마 11:18) 또 더욱이 지금 그들의 선생님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성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요 3:29).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가장 기쁜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기쁜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절]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극기(克己)와 자기 부정의 삶이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핍박과 환난의 현실 가운데서 항상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초두에 기록된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16-17). 또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유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 장로들을 장립할 때 금식하였다(행 13:2-3; 14:23). 교회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장립식에 축하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둘 다 보존되리라]. 24) ” 이 두 비유는 새 것이 옛 형식에 적합하지 않음을 보인다.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자기 자신에 비유하셨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들은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 즉 메시아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구약의 내용은 율법이며, 그것은 율법적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들 중 대표적인 것은 성전 제도와 제사 제도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은 복음이며, 그것은 새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옛 생활 방식에 맞지 않고 복음의 새 생활 방식에 맞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려야 했으나,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진심의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뿐이다. 구약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규례들에 비하면, 신약의 형식은 아주 단순하고 영적이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영]에 있고[혹은 ‘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이나 신앙생활의 형식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 . . . 예수께서는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25)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 26) 좋다 함이니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옛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에서도 그렇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에서도 그렇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 21:21-26)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간에는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고 마셨듯이, 오늘날 그를 믿는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누리지 못하지만, 그를 아는 자마다 그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빌 4:4). 우리는 종교적 규례와 의식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신약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의 구조나 신앙 생활의 형식은 구약 교회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것들에 비교하면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진심으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섬기지만, 또 의와 선과 진실 안에서 기쁨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법을 행해야 한다. 6장: 가르치심 1-11절, 안식일 문제 [1-2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 . . . 안식일에[두 번째 첫 안식일에](전통본문) 27)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했다(눅 4:16, 31).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안식일들 말고 두 번째 언급하는 첫 안식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제자들의 행위는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그는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에게 그 떡을 주었고 그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7일이 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 . . .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 그는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품고 분노하며 함께 의논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자.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제7일 토요일 안식일은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그 날에 물건을 사고 팔거나 육신적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2-16절, 사도들을 택하심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 . . . 이 때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열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 밤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에 기도하셨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특히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산은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악되고 부족 투성이인 사람들의 사회는 항상 시끄럽고 복잡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산은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신비한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를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신 그는 참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우리는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빌 4:6, 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13-16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이었다. ‘사도’라는 원어( 아포스톨로스 )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엡 2:20).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사역의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기타 교리들과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서신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13절),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14, 15절). 여기에 사도들의 직무가 나타나 있고 그들을 세우신 주님의 의도도 드러나 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주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고 말하였다(4절).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 진리를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14).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는 일반 성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목사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위해 쓰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은 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반 성도들은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을 존중하며 복종해야 한다(살전 5:12-13; 히 13:17).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요 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요 6:70), 마침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요 13:27)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마 26:15). 어떻게 이런 사람이 열두 제자들 중에 포함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통해 배신의 고통까지 경험하실 것이다. 가룟 유다가 사도들 중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목사들과 장로들 가운데 가룟 유다 같은 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런 자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주께서는 일찍이 거짓 교사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행위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마 7:15-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실생활에서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 자신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실함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언제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종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하겠는가! 또 모든 성도는 기도로 늘 승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많이,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풍성히 거하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주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임을 자신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은 오직 그의 행위들을 통해 분별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종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들을 돕고 그들을 따르며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와 은혜와 평강 가운데 힘있게 잘 진행될 것이다. 17-19절, 병자들을 고치심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추측하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 28)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로 보이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신 후에 되어진 일이라고 보여진다. [17절]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 . .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는데, 그의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교훈을 행하며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8-19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 .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온 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를 만지는 모든 사람이 나았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가 행하신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증거들이다. 20-26절,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2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본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잘 깨닫게 된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육신적 가난과 슬픔이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고린도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으며 우는 자가 웃게 될 때는 언제인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며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복은 더욱 크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 영원히 배부름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23절]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다. 악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였고, 또 그의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고난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할 때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인데,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시대에도 참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주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24-25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 . . . 예수께서는 화가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도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義)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영원히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참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인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들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힘과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움과 고통과 찔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 바울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졌고(고후 6:8), 또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딤후 1:15-18).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병자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것들은 기적들이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선생들의 가르침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현세 중심, 세상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이었다. 주님의 제자는 육신적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또 그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항상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고 실행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27-36절, 원수를 사랑하라 [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 세상에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더러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구약의 율법 레위기 19:18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율법의 말씀보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29-30절]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그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도적질이나 강도질이나 폭력이나 살인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라일(J. C. Ryle)은, 이 말씀은 범죄의 억제를 금하신 것이 아니고 보복 정신을 정죄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29)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고 범죄의 처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다거나 그들의 직분이 부당하다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평화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하신 것이나,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가복음 22:36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심으로 칼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칼을 가지고 사회 정의를 시행함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경우에도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인권을 짓밟지 말고 그를 학대하지 말아야 하며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이 아니고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23:2). 그러나 합법적 전쟁의 경우에도, 먼저 평화를 제안하고 불가피한 폭격 외에는 자제하고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의 행위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양보를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하며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사실, 세상의 악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6:52). 우리는 악한 자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로마서 12:17-21은 이 원리를 잘 교훈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롬 5:6-8, 10).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 명령이 비록 높아 보이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행 7:60).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을 자기 아들로 삼았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잘 참았다.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야 한다.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최선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대인관계에서도,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먼저 잘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32-34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빌린다’는 말은 ‘빌려준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본문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신다. 성도들이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의 교제는 순수한 것이 좋다. [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상이 클 것이다. 그 상은 천국에서의 상을 가리킨다. 천국에서 성도가 받을 상급은 지상에서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에 대한 약속으로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신다. 또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27절부터 36까지의 말씀은 요약하면 서너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악한 자를 선대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남이 우리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남에게 먼저 잘 해주라는 것이다. 셋째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가 없이 빌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본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위요 처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 37-49절, 비판치 말고 선을 행할 것 [37-38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치 말라’는 교훈은 어떤 경우에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안디옥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판단하고 바른 길을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5:20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이 이단을 배격하라고 가르칠 때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전제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교회적 판단을 금하신 것이 아니고 개인적 판단에 대해 하신 것이며(매튜 풀), 그것도 언제든지 비판치 말라는 절대적 금지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남의 말이나 견해나 행위의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게 충고하거나 그를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비판이나 정죄 자체가 악은 아니다.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들 즉 목사나 장로들은 공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교인들을 판단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위치에 있다. 남이 비판을 받을 만하다면, 우리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야고보서 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실상 다 부족이 많은 자이다. 만일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우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둘째로,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어려운 형편도 있다. 특히 우리는 남의 은밀한 마음이나 행위에 대한 동기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고린도전서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셋째로, 우리가 비판치 말아야 할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일들의 경우도 비판치 말아야 한다. 로마서 14:1-5,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또 성경적으로 명백한 잘못인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나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일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단지 개인적으로 은밀히 충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은 또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버리고 남을 용서하고 구제하라고 교훈한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와 구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이신 명확한 뜻이다. 그것은 성도의 중요한 생활 규칙의 하나이다. 특히, ‘준다’는 말씀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주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음을 가리킨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이라는 표현은 밀가루를 되에 가득히 채워 주는 것 같은 풍성한 보상을 묘사하신 것이다. [39-40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소경이’라는 말은 무지한 인도자들을 가리키고, ‘소경을’이라는 말은 무지한 교인들을 가리킨다. 구덩이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와 그로 인한 낭패를 가리킨다. 진리의 바른 지식과 바른 삶이 없이 남을 인도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그가 인도하는 자들도 망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도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런 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도 되지 말아야 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는 말은 선한 뜻에서도, 나쁜 뜻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선한 선생에게서는 선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울수록 좋으나, 악한 선생에게서는 악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우지 않을수록 좋을 것이다. [41-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하고 ‘들보(통나무)’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고친 후에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고친 후에 형제를 권면해야 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지만(잠 27:5), 단지 자신의 큰 결함이 없을 경우에 그러한 책망이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37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교회 문제, 진리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신을 남을 용서하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지식과 실천이 없이 남을 지도하고 권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남의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큰 부족을 깨닫고 고친 자만이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을 고쳐줄 수 있다. 43-49절, 행위의 중요성 [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를 비유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같이가기 때문에, 사람의 인품은 그의 말과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평소 훈련을 통해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하고 선해야 한다. [46-49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전통본문) 30)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진대, 우리는 그의 가르치신 바들을 행하려 해야 할 것이다. 또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환난이나 재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튼튼한 기초 없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다. 그는 환난의 날에 낙심케 될 것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계명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주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중요함을 교훈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선한 말과 행위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또 순종의 행위는 집을 튼튼히 짓는 것과 같다. 평소에 행함이 없는 자는 환난 중에 실패할 것이지만, 행함이 있는 자는 실패치 않고 승리할 것이다. 7장: 기적들을 행하심 1-10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심 [1-3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 . . . 예수께서는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기를 마치신 후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과 시몬의 집에서 중한 열병으로 아파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과 해 질 때 집에 모여든 여러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하였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었다. 그는 물론 로마 사람이었다. ‘사랑하는’이라는 원어( 엔티모스 )는 ‘소중히 여기는’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이다. 충성된 종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병이 들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 종은 결국 고침을 받았다.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다. 물론 그 종도 주인에게 충성했겠지만, 그 주인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이 백부장은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5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 . .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였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두 번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과 사랑이 가는 곳에 돈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돈을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 . . . 예수께서 함께 가실 때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그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고백한 것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네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
[누가복음 4장 헬라어 설교말씀] 희년의 은혜를 선포하라(눅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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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4장 헬라어 설교말씀 중에서 희년의 은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구약에서 희년은 5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은혜의 해입니다. 잃어버렸던 땅을 다시 찾게 됩니다. 종은 다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신약에서 희년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원죄에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났습니다. 영원한 속죄를 받았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희년의 은혜를 선포하라(눅 4:18-19)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자라나신 나사렛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나사렛에 들어가서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나사렛에 들어간 것입니다.
16절 카이 엘덴 에이스 텐 나자레트 후 엔 테드람메노스 카이 에이셀덴 카타 토 에이오도스 아우토 엔 테 헤메라 톤 삽바톤 에이슷 텐 쉬나고겐 카이 아네스테 아나그노나이
눅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나사렛’이라는 단어는 נצר(네체르 5342) 나사렛이며 새로 나온 가지, 싹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נצר(나차르 5341) 지키다, 보호하다, 베풀다, 은밀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보호받으신 장소입니다. 헤롯의 눈을 피하여 나사렛에서 사시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신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목숨을 지키게 되셨고 때가 되매 사생애의 기간이 끝나고 공생애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자란 곳에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שבת(샤바트 7676) 안식일이며 שבת(샤바트 7673) 안식하다, 끊어지다, 없어지다, 폐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자란 나사렛에 들어가셔서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셔서 지금까지 살았던 원죄의 삶을 끊어주시려고 안식일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안식이 없이 살았던 인생들을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셔서 어둠의 세력들을 폐하시고 사라지게 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도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없으면 흑암에 갇혀 사는 인생입니다. 영원한 안식이 없이 고통과 환란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영원한 저주를 끊어주시고 사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주셔서 나의 영혼에 빛이 임하게 하시고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시려고 오늘 주일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의 추악하고 더러운 삶이 폐하여졌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받아들이시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사렛을 안식일에 들어가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글을 읽으려고 하시는데 이사야의 책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17절 카이 에페도데 아우토 비블리온 헤사이우 투 프로페투 카이 아나프튁사스 토 비블리온 휴렌 톤 토폰 후 엔 게그람메논
눅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우리는 예수님께 드린 이사야의 글이 우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약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이라는 단어는 נתן(나탄 5414 CW.VOIMZS 와우접속사 동사 호팔(사역수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주다, 넘기다, 구원하다, 내밀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회당에 문서를 담당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랍비들이 성경을 읽으려고 할 때에 필요한 말씀들을 알아서 찾아다가 주었습니다. 이때도 문서 담당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성경을 가지고 왔는데 공교롭게도 이사야의 글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의 뜻대로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가지고 회당에 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에 복음을 선포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주시기를 원하셔서 예수님을 안식일에 보내신 것입니다. 문서를 담당하던 사람이 예수님에게 즉시 이사야의 글을 넘겨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글은 이미 예수님에게 넘겨질 수밖에 없도록 지명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입니다. 나사렛에 있는 선택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은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선택받은 택자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사렛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택자인 한 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도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 한 명을 준비하셔서 엘리야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시고 엘리사 시대에는 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는데도 나아만 장군만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나사렛에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중에 선택된 사르밧 과부와 나아만 장군과 같은 그 한 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곳에 오셨습니다. 지금 내가 사르밧 과부와 같은 자요, 나아만 장군과 같은 선택된 자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사렛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예수님을 육적으로만 보았습니다. 요셉의 아들로만 보았기 때문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은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육적으로 축복이나 주시는 분이고 요셉의 아들로 오셔서 온 인류를 육적으로 잘살게 해주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오신 분입니다. 모든 원죄의 죄악을 끊어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고백할 때에 선택받은 자로서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18절 프뉴마 퀴리우 에프 에메 후 헤네켄 에크리센 메 유앙겔리제스다이 프토코이스 아페스탈켄 메 이아사스다이 투스 쉰테트림메누스 텐 카르디안 케뤽사이 아이크말로토이스 아페신 카이 튀플로이스 아나블렙신 아포스테일라이 테드라우스메누스 엔 아페세이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은 많은 이사야의 글에서 찾으시더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포로 된 자에게 보내셔서 자유를 주시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신다는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왜 이 말씀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이 말씀이 지금 현재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가 되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1절 루아흐 아도나이 아도나이 알라이 야안 마샤흐 아도나이 오티 레바세르 아나빔 쉘라하니 라하보쉬 레니쉐브레 레브 리크로 리쉐부임 데로르 베라아수림 페카흐 코아흐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주의 영이 예수님에게 임하셔서 기름을 부어주시고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단어는 (레바사르 1319 P.VPNG 전치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부정사연계형) 선포하다, 전파하다, 기쁜 소식을 즐겁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בשר(바사르 1320) 살, 육체와 연관이 있는 단어입니다. 아름다운 복음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대못에 박혀 고통을 당할 때에 나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선택받은 자들이 혹시 듣지 못할 일이 있지 않도록 반드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전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가난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가난한 자에게’라는 단어는 (아나브 6035) 온유한 자, 겸손한 자, 빈곤한 자, 라는 뜻이며 ענה(아나 6031) 고난당하다, 괴로워하다, 겸비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고통을 감내하고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육체를 찢어주셔서 살아나는 십자가 복음의 생명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여 천국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들은 심령이 부자입니까? 아니면 가난하십니까? 가난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이라는 단어는 (샤바르 7665 VNPPMP 동사 니팔(수동태) 분사수동 남성 복수) 깨뜨려지다, 산산 조각나다, 파괴당하다, 멸망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눈이 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이 멀어있는 자들에게 다시 보게 만들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것은 원죄에 빠져 철저하게 영혼이 파괴당하고 깨뜨려져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완전히 멸망당할 인생이며 영혼은 절대 구원을 받지 못할 만큼 망가져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이 상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상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은 이미 아담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원죄에 완전히 망가졌으며 내 힘으로는 절대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 내가 나는 아담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인류의 근원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나도 자연히 죄인이 된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죄가 없기 때문에 나에게 찾아오셔서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셔서 원죄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나의 눈을 치료해 주시고 다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원죄의 흑암에서 소경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의 원죄를 깨끗하게 씻겨주시고 눈먼 나를 이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들은 눈이 열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포로 된 자에게’라는 단어는 (샤바 7617 VQPPMP 동사 칼(능동태) 분사수동 남성 복수) 포로가 되다, 사로잡혀 가다, 빼앗아 가다, 라는 뜻입니다.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선택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사탄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행동들이 악한 행동만 나왔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선한 것들은 모두 사탄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주신 내세의 축복들 이 세상에서의 축복들을 모두 빼앗긴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간힘을 다하여 사탄의 세력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만 절대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때에 주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사탄의 죄악의 세력에 영원히 죽을 인생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시고 나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들 중에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있다면 고민하지 마시고 이 자리에 나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유 함을 얻게 됩니다. 영적인 고통에서 자유 함을 누리게 되고 육적인 괴로움에서 자유 함을 누리게 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시는 순간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갇힌 자에게’라는 단어는 (아사르 631 VQPAMP 동사 칼(능동태) 분사능동 남성 복수) 결박하다, 속박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속박을 받고 결박당하여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죄 때문에 속박을 받아 꼼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탄에게 약점을 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고통의 결박을 끊어주신 것입니다. 나에게 꽁꽁 묶여있던 죄악의 사슬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시고 나의 고통의 결박을 끊어주셨습니다. 나는 주님을 생각할 때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내가 무엇이 관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19절 케뤽사이 에니아우톤 퀴리우 데크톤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럼 은혜의 해는 어떤 해를 의미하고 있습니까? 구약에서 말씀하신 희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희년은 50년째 한 번 은혜를 받는 해입니다.
10절 베키다쉐템 에트 쉐나트 하하미쉼 솨나 우케라템 데로르 바아레츠 레콜 요쉐베이하 요벨 히 티흐예 라켐 베샤브템 이쉬 엘 아후자토 베이쉬 엘 미쉐파흐토 타슈부
11절 요벨 히 쉐나트 하하미쉼 솨나 티흐예 라켐 로 티제라우 베로 티크체루 에트 세피헤이하 베로 티브체루 에트 네지레이하
레 25:10-11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희년이 되면 노예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빚을 진 사람은 모든 빚을 탕감받는 날입니다. 또한 땅을 잃어버렸다면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내가 잃었던 천국을 다시 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기업을 잃어버리고 살았는데 은혜의 해를 선포하여 다시 돌려주는 것입니다.
‘희년’이라는 단어는 (요벨 3104) 희년, 양각나팔, 이라는 뜻이며 יבל(야발 2986) 인도하다, 옮기다, 메어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희년은 어떤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여 영원한 저주가 사라졌다고 나팔을 부는 날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나팔 소리를 들은 자들은 더 이상 원죄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의 기업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 책에서 나의 이름이 지워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나팔 소리가 선포되면 주님은 나를 천국까지 인도하여 주시며 죽음의 자리에 있던 나를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도 주님은 양을 어깨에 메어가듯이 나를 주님의 어깨에 메어 천국까지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희년은 내가 은혜를 받기 싫다고 해서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희년은 무조건입니다. 노예의 삶에서 무조건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땅을 잃어버렸다면 무조건 돌려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해가 예수님을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나에게 희년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믿으시고 나는 원죄에서 해방되었으며 천국의 기업을 받은 자라는 것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나사렛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를 냈습니다. 이 사람들이 화를 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버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택받은 자들은 너무나 기쁩니다. 모든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사렛 사람들처럼 화가 나십니까? 아니면 사르밧 과부처럼 나아만 장군처럼 은혜가 넘치시고 기쁨이 넘치시고 즐겁습니까?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희년을 마음껏 누리시고 기뻐하시면서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히브리어 설교말씀] 구약 사울 왕과 신약 사울(바울) 비교(삼상 10:1; 행 9:17-18)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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