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 한 자는 복 이 있나 니 | Official 팔복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김우현감독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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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소개글 ]
하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삶
영상을 편집하며 몇 번을 울었습니다. 담배와 욕설과 허무를 먹고 살던 친구가 성령님을 만나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지켜 보며 오히려 제가 큰 은혜와 변화를 겪은 것입니다.
밑바닥의 그 외진 풍경들과 시퍼런 농담, 아스라한 추억의 그림자들…그 한 줌 햇살 같던 나날들이 놀라운 하늘의 생수로 변화되는 기적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 아버지의 그 나라…그 풍경… 이 과정에서 우리 주님의 측량 못할 깊고 따스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심각하고 거창한 열정과 탐구의 여정은 아니지만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사8:6)같은 안식과 생수, 코끝이 짠 해지는 감동을 누렸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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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힘을 행사하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그 힘을 쓰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라는 말로 시작해 “온유한 자들은 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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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ologyofwork.or.kr

Date Published: 7/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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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크리스찬리뷰 ㅣ The Christian Review

주인이 없는 거친 야생마처럼 제 마음대로 날뛰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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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review.com.au

Date Published: 2/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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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목사칼럼 – 팔복 해설(3)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8복 해설(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 함) 이동휘 목사 하나님을 향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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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auri.org

Date Published: 1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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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5) – 새벽기도 설교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애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애통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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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tynch.kr

Date Published: 5/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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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셋째 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

셋째 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 아더핑크 (팔복) 온유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상당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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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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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온유한 자에겐 복이 있습니다 – 국민일보

즉 온유한 자란 하나님을 기다리며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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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10/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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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아둘 점은, 온유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와 애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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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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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2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주일예배 – 정필도목사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20120422 본문 / 마태복음 5:5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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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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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5:5) 온유의 뜻과 의미

종종 ‘너무 순해빠져서, 약해빠져서, 나약하고 부족해보여서’ 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할 정도로 지금의 시대에서는 강함을 좋아하고 존경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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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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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목사 설교] 온유한 자 – 크리스천투데이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신 이 말씀은 시편 37:11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신 말씀인데, 거기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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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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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온유 한 자는 복 이 있나 니

  • Author: 김우현의 버드나무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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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5. 9.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q28SUbCgJ8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팔복 중 세 번째 복에서 상당수의 직장인은 어리둥절해진다.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그 한 가지 이유다. 많은 사람이 온유함을 ‘약함’, ‘길들여짐’, ‘용기 없음’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온유함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통제하에 있는 힘’을 뜻한다. 구약에서 모세는 이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된다(민 12:3). 예수님도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묘사하셨는데(마 11:28-29), 그것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그분의 활력 넘치는 행동과 부합한다(마 21:12-13).

통제하에 있는 힘은 두 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부풀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 주장하는 걸 삼가는 것이다. 바울은 그 첫 번째 모습을 로마서 12장 3절에서 완벽하게 찾아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볼 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다.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최대한 각광을 받기 위해 자기 모습을 꾸미려고 계속 애쓰는 대신,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장점과 능력까지도 부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6). 자기 이미지를 부풀리지도 않았고 열등감 콤플렉스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종의 마음을 가지셨다. 후에 바울은 이것을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롬 12:3)이라 표현했다.

종의 마음은 온유함이 갖는 두 번째 측면의 핵심이다. 그것은 ‘우리들’을 위해 ‘우리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보다 신중하는 것이다. 힘을 행사하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그 힘을 쓰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라는 말로 시작해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로 끝나는 시편 37편 1-11절 전반부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우리한테 잘못한 것에 대해 복수하려는 우리 의지에 재갈을 물리고, 대신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팔복의 두 번째 복인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슬퍼하는 데서 흘러나온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슬퍼한다면, 과연 다른 사람의 죄에 복수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 힘을 하나님의 통제하에 둔다는 건 우리로선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앞서 가려면 공격적으로 살고 자신을 널리 알려야 할 것만 같다. ‘당신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는 게 아니라, 당신이 협상해서 얻어 낸 것만 얻는다’라는 표현에 담겨 있듯이 말이다. 직장에서는 거만하고 힘을 갖는 게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진다.그들은 대인관계에서 이기지 못한다. 거만하고 자기만 아는 친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어라 권력을 좇는 사람은 대부분 외롭다. 그들은 심지어 금전적으로도 안전한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세상이 그들을 소유하고 있다. 돈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들은 재정적으로 더 불안을 느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앞에서 본 것처럼, 땅은 천국이 위치하는 곳이다. 우리는 천국을 지금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곳과는 완전히 다른 ‘하늘’(heaven)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황금 길, 진주 문, 산꼭대기 저택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계21:1)이다. 자신의 힘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사람들은 이 땅에 오는 완전 한 나라를 물려받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만한 자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열렬히 추구해도 얻지 못하던 좋은 것들을 받고, 더 많이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장래에 생길 일만이 아니다. 지금 깨어진 이 세상에서도 자신의 참된 강점과 약점을 인정하는 사람은 실상에 맞게 삶으로써 평안을 누린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힘을 사용하는 사람은 보통 칭송을 받는다. 온유한 자는 다른 사람을 의사결정에 참여시켜 더 나은 결과와 더 깊은 관계를 경험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8복 해설(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 함)

이동휘 목사

하나님을 향한 온유

하나님을 향한 온유는 두 가지를 포함한다.

첫째,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언성을 높이거나 투덜거리지 않고 조용한 자세를 취하여 “여호와이시니 선하신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 해야 한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하고자 하시든, 무슨 조건을 새기고자 하시든지 그가 기뻐하시면 나는 순종하겠다. 하나님께서는 비옥한 땅이든지 불모지든지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아신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그분의 일을 마음대로 하시게 하자. 하나님이 그것을 하셨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선지서에 하나님과 다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온유하지 못한 마음이다.(욘 4:9)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유순함이다.

말씀이 기꺼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도록 하고 모든 율법과 훈계에 유연하게 대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고 말씀의 가르침과 다투지 않고 자기 마음의 부패와 다투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온유한 마음으로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위엄 있는 말씀을 온유한 말씀으로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1. 사람을 향한 온유

온유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격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은혜이다. 철학자들은 덕으로 부르지만 사도바울은 은혜로 불러서 성령의 하나의 열매로 취급한다.(갈 5:23) 본성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거친 바다와 같아서 화와 노의 거품을 내뱉는다. 그때 온유함이 그 격정을 가라앉힌다. 그것은 영혼의 중재자로 앉아서 병적인 행동들을 조용하게 하고 견제를 한다. 달이 태양의 열을 완화하고 가라앉히듯이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은 격정의 열을 가라앉힌다. 마음의 온유함은 하나님과 사귐에 있어서도 적합할 뿐 아니라 사람과의 세속적인 교제에 있어서도 필요해서 모든 은혜 가운데서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온유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부드러우심이 들어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대한 신뢰를 가져다주며 모든 것을 이긴다.

2. 해를 참는 온유

쉽게 성내지 아니하는 것이다. 젖은 불쏘시개와 같이 온유한 마음에는 쉽게 불이 붙지 않는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변박할 말이 없나이다.”(시 38:12-14) 온유는 화를 내는 것에 재갈을 먹이는 것이다. 격정은 성미가 거칠고 고집이 센 데서 나오는데 온유는 이것을 억제한다. 온유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혀를 좋은 습관으로 돌아갈 때까지 묶어놓는다. 온유는 참고 견디라는 표어를 준수한다. 온유는 네 가지에 반대한다.

첫째, 온유는 성급한 마음과 반대한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마음에 격정이 끓어오르고 화가 눈으로 불꽃을 튀기면 이것은 온유와는 거리가 멀다. 노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으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항상 머문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폭약과 같아서 건드리기가 무섭게 불을 뿜는다. 성 바질은 성내는 것은 술 취한 것이라고 불렀고, 제롬은 포도주로 취하는 것보다 더 격정적이라 했고, 세네카는 성내는 것을 짧은 발광이라 불렀다. 그것은 때때로 이성의 사용을 보류케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충분히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경건할 때는 얼음같이 차지만, 말다툼을 할 때는 불같이 뜨겁다. 성급한 분노가 성도들에게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가? 얼마나 보기가 흉한가? “나는 격정을 누그러뜨렸을 때는 신을 닮았다. 그러나 격노할 때는 짐승 그대로였다.”(호머) 얼굴이 분노로 부풀어 오르면 핏줄의 피가 검어질 것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우리가 어떤 경우에나 화를 낼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거룩한 분노가 있다. 죄에 대한 분노는 죄가 없는 분노이다. 온유함과 열심이 함께 있을 수 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엘리야의 마음을 옷 입고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야 한다.(렙 6:11) 그리스도는 온유하셨으나(마 11:29), 또한 열성적이셨다.(요 2:15)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심이 그를 삼켰다.

둘째, 온유는 악의와는 반대가 된다.

악의(惡意)는 마귀의 모습이다. 악의는 정신적인 살인이다. 악의에 찬 사람에게 어떻게 주기도문을 할 수 있느냐 물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부분을 빼고 한다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이 사실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을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내 기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를 듣지 않겠다.” 사람이 먹는 것마다 독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슬픈 심판인가? 악의에 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모두 독으로 바뀐다. 주님의 식탁이 올무가 되고 그는 자신의 저주를 먹고 산다.

셋째, 온유는 보복과 반대가 된다.

보복은 악의에 가득 찬 사람이 마귀를 위하여 조리한 맛있는 고기이다. 성경은 보복을 금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 하였다. 보복하는 자는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마귀와 싸우는 일과 자신과 싸우는 일은 합법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결투는 불법이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다.”(잠 19:11) 자기 방어는 그리스도인의 온유와 모순되지 않는다. 자연의 법과 종교의 법이 정당하다고 본다. 판사가 유죄 판결을 내려 벌주는 것도 보복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땅에서의 하나님의 보조자이다. 비록 개개인이 악을 악으로 갚도록 두어서는 안 되지만(롬 12:17) 치안판사는 범죄의 악을 형벌의 악으로 다스릴 수 있다.

넷째, 온유는 악한 말과 반대가 된다.

우리의 말은 부드럽게 흐르는 실로암의 물과 같이 온화해야 한다. 많은 사람의 혀가 불붙는데 그것은 마귀가 성냥불을 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옛 뱀에서 은혜롭지 못한 욕설로 서로 독을 내뿜는 것을 배웠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마 5:22)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 1: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다른 사람을 헐뜯어서는 안 되지만 바울이 베스도에게 함같이 변명할 수는 있다.(행 26:25)

3. 해 받음을 용서하는 온유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막 11:25)라 하신다. 그를 용서하기 전에는 기도에 별로 효과가 없다. 온유한 마음은 용서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친절은 잊어버리지만 해를 입은 것은 기억한다. 우리는 용서하되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해야 한다.

* 용서는 실제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시늉만 하시고 우리의 죄를 그대로 잡고 계시지 않는다.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다.(사 43:25) 대 사면령을 내리신다.(렘 31:34) 그분은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신다. 용서하는 모양을 보일 뿐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여야 한다.

* 용서는 완전히 하여야 한다.

우리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사해 주셨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시 103:3) 얼마쯤의 허물은 덮어주지만 다른 것은 그대로 가슴에 품고 산다면 반 용서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원하는가?

* 하나님은 자주 용서하신다.

우리는 죄를 자주 짓는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기록의 죄를 남기지만 하나님은 자주 용서 하신다. 그래서 큰 긍휼이라고 말한다.(사 55:7) 온유한 사람은 한 용서를 한 후에도 다른 용서를 계속해 보낸다. 베드로가 질문을 하였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마 18:21) 주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 하셨다. 당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죄를 생각해 보라. 당신의 이웃이 당신에게 과오를 범할 때에는 사람에 대하여 짓는 것이지만 당신이 그를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오늘 밤에 죽는다면 당신은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는 것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4. 악을 선으로 갚는 용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높은 수준의 사랑으로 이끄신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롬 1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 3:9)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 같은 것이고,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마귀 적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은혜가 마음에 들어올 때 그것은 이상한 변화를 가져온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한 때 돌 감람나무의 성질을 가져 앙갚음이나 하던 사람도 하늘 감람나무의 수액에 한 번 참례하게 되면 그는 너그러운 열매를 맺는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게 된다.

5. 온유는 참 성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쉽게 성을 내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고 악을 부드러움으로 정복한다. 하나님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 은혜로 번쩍거려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복을 입을 때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알려진다. 성품이 너무 온유하게 되어 편협한 생각을 질식시켜 버릴 수 있고 불친절을 묻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성도이다.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이 노를 잘 내는 사람보다 더 빨리 그리스도인이 된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아 4:8) 온유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길이다. 만일 신부에게 어떤 해가 가해지면 그녀는 자기 신랑에게 복수를 맡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주먹으로 치는 것은 보기에 흉하다.

6. 그리스도인이 온유해야 할 이유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옷처럼 그것을 입고 결코 몸에서 벗어버리지 말라. 온유는 모든 것의 필수 요소다. 그것은 훈육에도 필요하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딤후 2:25) 온유는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을 정복한다.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도 필요하다.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격정 또는 편견을 가지고 말씀에 접근하는 사람은 좋은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마음만 다칠 뿐이다. 그는 음료수를 독약으로 바꾸고 성령의 검으로 스스로를 찌른다. 온유는 꾸중할 때도 필요하다.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갈 6:1) 헬라어의 뜻은 뼈를 제 위치에 도로 집어 넣는다는 뜻이다. 어떤 형제가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맹렬하게 덤벼들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고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7. 온유를 완성하자.

1) 온유의 본보기가 있다.

* 예수님의 본보기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 21:5)

그리스도는 온유의 견본이자 모형이시다. “욕을 받으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며.”(벧 2:23) 그의 원수들의 말은 쓸개보다 썼지만 그리스도의 말은 기름보다 더 부드러웠다. 그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우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하셨다. 기적을 배우라는 말씀을 안 하셨지만, 온유를 배우라 하셨다.

* 성도들의 본보기

모세는 비길 데 없이 온유한 사람이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을 털어놓을 때 그는 분노를 터트리는 대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들은 폭풍 속에 있었으나 모세는 고요 속에 있었다. 엘리야의 마음이 엘리사에게 있었던 것처럼, 땅 위의 천사라 할 모세의 마음이 우리에게 머물렀으면!

다윗의 온유함 역시 흠모해야 한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였을 때 아비새가 그의 목을 자르려 했다. 다윗은 오히려 그의 죽음을 막고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했다.(삼하 16:11) 사울왕의 진지에 밤에 돌입하여 원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때에도 하나님께서 심판자 되어 주시기를 맡기고 물병만 가지고 돌아왔다.(삼상 26:12) 그의 손에 피를 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들에게 내려졌다.

2) 온유는 그리스도인의 장식품이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벧전 3:4) 성도가 이 보석으로 꾸밀 때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붙임성 있는 모습일까? 아무 의복도 온유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의복을 입으라고 명령을 받는 것이다.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골 3:12) 온유는 신앙생활에 명예를 가져오고 악을 잠재운다.

3) 온유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성나게 하시는 자들에게도 온유하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찢어놓고 그의 성령을 괴롭게 하고 그의 아들을 다시 못 박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벧후 3:9) 하나님이 죄인들을 박살 내시고 지옥으로 던지시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분은 위엄으로 가득 차시지만 온유로도 가득 차시다. 온유가 결핍되면 사람답지 않지만 우리가 온유하면 하나님을 닮는다.

4) 온유는 고상하고 훌륭한 마음을 입증한다.

온유한 사람은 용맹스러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싸워 이긴다. 격정은 우둔하고 약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격노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강하고 승리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격정을 따라가는 일은 부패한 본성의 물결을 따라 헤엄치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에 대항해서 돌아서는 것, 격정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 이것이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이다. 영적인 기사도다.

5) 온유는 원수의 마음을 녹이고 정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윗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사울이 누웠는데도, 다윗이 다만 그의 옷자락만 베었을 때 사울이 다윗에 대해 얼마나 감동되었을까?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한 방도 쏘지 않고 이기는 것은 가장 큰 승리가 된다.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그들의 대적으로부터도 감사장을 받는다. 이스라엘 왕이 포로로 잡아 온 포로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칼보다 그의 온유에 정복되었다. 이로부터 아람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다.(왕하 6:23)

6) 온유하지 못한 자의 재난을 생각하라.

분노와 성냄은 마귀가 마음속으로 들어올 여지를 주고 그것을 차지해 버리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마귀와 한 침대를 쓰는 자이다. 격정은 영혼을 어지럽게 만든다. 이성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양심을 흩트려 놓는다. 격정이 사로잡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사로잡지 못한다. 분노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성령님은 결국 떠나신다. 우리는 연기가 가득한 집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님도 병적이고 격정의 수증기와 연기가 가득한 마음에 계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7)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라.

시므이가 왕을 저주할 때 다윗이 다 받아들인 이유가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삼하 16:10, 12) 사람들은 흔히 돌을 던진 손은 보지 않고 돌멩이에 으르렁거리는 어리석은 잡종 개와 같다. 욥은 그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눈여겨 바라보았고 그것이 그의 마음을 온유하게 하였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심이 빌라도나 유다 때문이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보통 주님께서 우리에게 현저한 은혜를 베푸시고자 할 때에는 어떤 두드러진 시험을 하신다. 모세의 손이 구원의 사역을 하기 전에 먼저 나병이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출 4:6)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요히 기다려야 한다.

8) 온유함이 모자라는 것은 은혜가 모자람을 입증한다.

참된 은혜는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고 분노를 가라앉힌다. 은혜는 거친 쇠를 부드럽게 갈아주는 줄과 같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거칠게 튀어나온 것을 줄로 갈아 없앤다.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성난 파도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에다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은혜가 있으면 그것은 격정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계속해서 미쳐서 날뛰면서 분노와 사악의 고삐를 풀어놓는 사람은 결코 달콤한 은혜의 효과를 느끼지 못한 사람이다. ‘무자비’는 이방인의 죄 중에 하나였다.(롬 1:31) 마귀의 마음이다. 옛 뱀은 악독과 복수의 독을 뿜어낸다.

9) 노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고침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잠 22:24) 분노에 가득한 마귀를 잠재우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과도 친분을 가져서도 안 된다. 뱀을 가슴속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 일단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을 분별하자. 이런 변명도 내밀고 싶어 한다. “그것은 내 본성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성깔 사나운 본성이다”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잘못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런 본성을 주시지 아니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전 7:29) 하나님은 당신을 곧게 만드셨으나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굽게 한 것이다. 원래 좋은 본성을 주셨음에 감사하라. 본성의 샘은 죄가 독약을 풀어 넣기 전에는 순수하였다. 본성이 나빴으니 내 행동도 나빠도 된다는 변명이 성립될 수 있을까?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천사의 모습으로 바꿔질 수 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 15:50)

8.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악인은 그가 잡은 행운 때문에 오히려 병들었다. 오염된 공기 속에 사는 사람처럼 기름진 땅을 가짐이 죄를 확대시켜 나간다. 땅의 축복을 누릴만한 심령을 가지지 못할 때 땅의 평안은 이미 손실된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 37:11) 온유한 자는 땅을 잠시 동안 머무는 집으로 소유할 뿐만 아니라 천국은 그들의 영원히 머물 집으로 소유하게 된다. 온유는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고 하나님은 구원으로, 그들을 아름답게 꾸며 줄 것이다. 온유한 자는 구원을 수놓은 왕의 옷을 입을 것이다. 온유한 자는 그에 해당하는 축복된 삶을 살기 때문에 땅의 소유주가 되고 구원의 상속자가 된다. 구약의 성도들이 약속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됨을 약속하신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들이 질서를 떠나 땅을 많이 소유하지만 더 좋은 하늘나라의 소유권은 다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의 것이다. 하늘의 상속권자들이다.

모세의 온유함의(민 12:3) 인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고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으로(마 11:29)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린다.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온유의 투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의 땅을(롬 15:19) 복음으로 점령하여 그 땅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세상에서는 땅 한 평 없는 바울이지만 복음의 땅을 넓히므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 상급을 받게 된 것이다. 땅 중에 가장 광활한 땅은 마음일 것이다. 땅의 가치는 많이 가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작하여 생산을 내는 가에 부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마음에서 모든 창조적인 생각도 생산 하고 사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 구원 받는 작업도 한다. 사도바울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고후 10:5) 일에 성공한 사람이다. ♣

팔복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5) – 새벽기도 설교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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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우리는 ‘애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애통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나의 참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은 죄인의 모습이고, 그 죄를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한 모습이고, 그래서 이러한 나의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아파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하게 되고,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만이 진정한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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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온유를 약하고 비굴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사람은 오래 참고 화를 잘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면, 자기주장이 없는 나약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부드럽지만 약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물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것도 없지만 또 한편 물처럼 강하고 큰 힘을 지닌 것도 없습니다.

물은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약하지는 않습니다.

온유한 자 또한 그렇습니다.

온유한 자는 약하고 비굴한 것처럼 보이지만 강한 자를 굴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하신 분이셨지만, 죽음과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로 그 아래 무릎 끓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온유는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온유에는 어떠한 사나움도 깨뜨릴 수 없는 강인함과 모든 것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예수님의 온유함을 소유하실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힘겹고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오른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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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는 제가 앞에서 설명한 온유와는 조금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친절하고 유순하고 원만한 성품과 자세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심령이 가난한 것과 애통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세이듯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온유’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삶을 주실 때에만 온유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순되어 보이고 불행스럽게 보이고 고난의 삶을 주실 때에도 아멘으로 순종하는 자가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의 개념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온유는 하나님께 대한 견고한 신앙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온유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욥’처럼 고난과 불행이 자신에게 닥쳐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섭리를 순종하고 찬양하는 사람(욥 2:20-22),

‘아브라함’처럼 고향을 떠나라는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고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믿고 즉각 순종하는 사람,

‘다윗’처럼 기름부음을 받은 후 오랫동안 사울에게 시달리면서도 변함없이 그 본분을 지키는 사람,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죄인의 몸으로라도 하나님이 가라는 로마로 끝까지 가는 ‘바울’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이 곧 진정한 의미의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을 지닌 사람들만이 불의를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승리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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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무엇 때문에 로마에 짓밟히고 패망당해 전 세계로 흩어진 줄 아십니까?

온유 대신 폭력으로 로마에 맞섰기 때문입니다.

온유하신 예수님 대신 무력가 바라바를 선호하고 그 방식으로 투쟁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후 70년경 수백만 명이 살육당하고,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로마의 식민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온유하게 순종하지 못한 탓에 큰 화를 당해 패망자들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회개하고 그 가르침대로 행했더라면(마 5:38-44) 이스라엘은 좀 더 일찍 독립국이 되었을 것이요, 현재 아랍 민족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분쟁도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온유함으로 순종하는 길만이 우리가 살길이요, 형통의 길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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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성품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후천적인 성품입니다.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해 주시고, 애통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형성시켜 주시는 성품이 바로 온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온유는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 그러한 선택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과 애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소유해야하는 필수적인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이 온유 또한 믿음이 자라갈수록 믿음과 함께 성장하는 성품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좋을수록 반드시 더 온유해 지기에, 온유하지 않은 믿음의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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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온유한 자가 받는 복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의 상급은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기업이라는 단어는 ‘분배받다, 몫으로 받다, 상속받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가 받을 상급인 ‘땅’은 우리가 힘쓰고 애씀으로, 노력하여 성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으로 거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산으로 상속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땅을 차지하기 위해 별도로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내 손안으로 들어오도록 되어 있는 상급입니다.

온유한 자가 받는 상급은 남의 것을 성취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때가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온유하면 처음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경쟁에서 지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것을 땅, 곧 기업으로 얻게 됩니다.

온유한 아내는 좋은 남편을 땅으로 얻게 됩니다.

온유한 부모는 좋은 자녀를 땅으로 얻게 됩니다.

가족이 온유하면 그 가정은 행복을 땅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

여러분, 혹시 비난하고 헐뜯는 이웃이 있습니까? 가족이 있습니까? 형제가 있습니까?

그러시면 온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러분의 기업, 곧 땅으로 주실 것입니다.

함께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동역자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 나는 온유한가?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스크랩] 셋째 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셋째 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 아더핑크 (팔복)

온유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상당한 견해차가 있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인내, 또는 체념의 심령으로, 어떤 사람들은 비이기심 또는 극기의 심령으로 여겼다. 또 온순 내지 비보복성의 심령, 즉 조용히 고통을 감수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정의에는 각각 어느 정도의 진리가 있다. 그러나 필자의 의견으로는 그 정의들이 충분히 깊은 뜻을 캐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 정의들이 이 셋째 복의 순서에 주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격적으로는 온유를 겸손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온유한 자는” 즉, 겸손한 자, 자기를 낮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을 입증하는 다음 구절이 있는지 살펴보자.

성경에서 처음으로 온유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것은 민수기 12:3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앞의 구절들에 기록된 것과 대조가 되는 점을 지적해 놓으셨다. 그 구절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세를 다음과 같이 비방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이러한 말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만과 오만 즉 스스로 명예를 찾고 구하는 마음을 무심코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명제로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자기 형이나 누이의 심령과는 정반대되는 심령에 의해 행동했다는 것이다.

모세는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24-26에 기록되어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는 교훈을 준다. 모세는 세상의 명예와 지상의 부(富)에 등을 돌리고서 사려 깊게도 왕의 신하의 삶보다는 순례자의 삶을 택했다. 모세의 겸손은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처음으로 그에게 나타나 주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낼 소명을 주실 때 다시 보인다.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라고 말했다. 이 말속에 얼마나 놀라운 겸손이 풍기고 있는가! 참으로 모세는 온유했다.위에서 제시한 정의를 뒷받침하며 또한 그렇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성경 구절이 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이 말씀의 뜻은 겸손하고 스스로 낮추는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하나님께서 지도하고 가르치기로 약속하신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 21:5). 여기에 성육신한 온유내지는 겸손이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분명히 이 말씀은 잘못을 저지르는 자에게 겸손의 심령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닌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후자의 말이 전자를 설명한다. 이 두 단어가 에베소서 4:2에서 다시 결합되어 있는 점에 유의하라. 여기서는 그 순서가 “겸손과 온유”로 되어 있다. 사려 깊게도 마태복음 11:29과 반대되는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 두 단어는 동의어임에 틀림없다.

이상으로 성경에서 온유의 의미가 겸손이라는 것을 확정지어 보았다. 이제 이것이 문맥 속에서 어떻게 확인되는지를 살펴보고 나서 그러한 온유가 표현되는 방식을 규정해 보자.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이 팔복에서 우리 주님께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의 순서적 발전을 영혼 속에서 체험적으로 실현되는 대로 나타내고 계시다는 것이다. 먼저 심령의 가난, 즉 나의 부족함과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는 단계가 있다. 그 다음 잃어버린 자된 나의 형편에 대한 애통과 하나님을 거역한 나의 끔찍한 죄에 대한 슬픔이 있다. 그 다음으로 영적 체험의 순서에 의해 영혼의 겸손이 따른다.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여 자신의 무가치함과 결핍함이 생겨난 자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흙속에 던져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사역에서 사용하신 자로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4-5).

사도들이 사용한 무기는 감찰하고 책망하고 겸손케 하는 성경의 진리였다. 이것이 성령에 의해 효과적으로 사용될 때, 견고한 요새, 즉 죄인들의 피난처인 강한 편견과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변명을 무너뜨리는 강한 힘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교만한 상상과 이론, 즉 구원에 대해 새롭게 거듭난 마음에 반대하던 육적인 생각의 원수들이 이제 사로잡혀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본성적으로 모든 죄인은 바리새인과 같아서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고자 한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모두 첫 조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의 수치를 가릴 것을 만드는 성향을 물려받았다. 본성적으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노동에 의해 산출된 제물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열납되려 한 가인처럼 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개인의 공로에 의거하여 하나님 앞에 서려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써 구원을 사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써 천국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너무나도 겸손을 요구하기 때문에 육적인 생각에 맞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방법이란 모든 자랑거리를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교만한 마음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구원에 있어서 한 몫을 감당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며, 구원이 오직 거룩한 긍휼의 문제이고, 영생이 그것을 오직 자비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위해 빈 손으로 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종교인들에게는 불쾌한 것이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여 자신의 악하고 가련한 상태에 대해 애통해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그의 귀에 곧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의 영생은 가난에 쪼들린 그의 조건에 적합한 것이다. 은혜 즉, 지옥에 가야 마땅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고귀한 은총이 바로 그가 가져야만 된다고 여기는 그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소견대로 스스로를 의롭게 하려는 생각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그의 교만한 반대는 이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이 거지임을 인정하고 흙속에서 하나님께 절하게 된다. 한때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종이 알려준 겸손을 요구하는 말에 반항하였지만 그는 결국 교만의 병거에서 내려와 주님 앞에서 흙속에 앉은 것을 기뻐하게 된다.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나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종이 말한 겸손케 하는 말씀 앞에 굴복했을 때였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자기이 무가치성을 인정할 때 거룩한 은총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살마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거룩한 축복을 받는다.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온유한-KJV역)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 또한 이런 말씀도 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온유한-KJV역)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첫째 축복은 우선적으로 영혼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굴복할 때 내려지지만 이 축복이 꼭 그 경우에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인에 의해 열매 맺고 그리스도인을 통해 생겨나는 “성령의 열매”(갈 5:22-23)의 한 본질적 양상이기도 하다. 훈련과 고난에 의해 온화해지도록 교육받고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기꺼이 맡기게 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성질의 심령이다.

생활에 있어서 모욕과 해를 참아 견디게 하고,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성도라 하도라도 그의 훈계와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들며, 자기보다 남을 낫게 인정하도록 인도하고, 자신에게 선한 것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로 돌리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로 신자들에게 있는 그러한 은혜이다.

다른 한편으로 참된 온유는 나약함이 아니다. 사도행전 16:35-37이 이것을 증명한다. 두 사도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수감되었다. 그 다음날 관리들이 그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바울은 그 부하들에게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속 중 한 사람이 우리 주님을 쳤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 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 18:23).

온유한 심령의 완벽한 예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에게서는 이 복된 심령이 변덕을 부려 종종 솟구쳐 오르는 육신적인 것에 의해 흐려지기도 한다.

모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시 106:33). 에스겔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겔 3:14). 요나가 기적적인 구원을 받은 후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욘 4:1). 겸손한 바나바 조차도 분한 마음으로 바울을 떠나 갔다(행 15:37-39).

얼마나 큰 경고들인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가!

“온유한 자는 복인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우리 주님께서는 시편 37:11을 언급하여 사용하고 계신다. 이 약속은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라는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온유한 자는 현세의 좋은 것들을 크게 누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탐욕스럽고 악착같은 심령에서 벗어나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해 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시 37:16). 교만하고 들떠 있는 자는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을 “기업으로”받지 못한다. 악인이 궁궐에서 누리는 것보다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오두막집에서 누리는 복이 훨씬 더 큰 것이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리라”(잠 15:16).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앞서 말했듯이 이 셋째 축복은 시편37:11을 언급한 것이다. 아마도 주 예수께서는 신약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구약의 언어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요한복음 6:50-58의 피와 살 및 요한복음 3:5의 물은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 나오는 땅도 그렇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땅이라고 번역되는 주요 단어들은 문맥에 따라 문자적으로나 영적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주님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주님은 구약의 예언의 언어로 새로운 섭리의 축복을 말씀하고 계신다. 육신에 의한 이스라엘은 영에 의한 이스라엘의 모형이다. 그리고 전자의 지상적 유산인 가나안은 후자의 유산을 이루는 천상의 영적 축복 전체의 모형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것은 새로운 섭리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고유한 축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상속자 즉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롬 8:17).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엡 1:3) 축복받는 것이며 가나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통해 볼 수 있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존 브라운-

의심할 바 없이 이 축복은 온유한 자가 궁극적으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 grace

메모 :

2012-04-22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20120422본문 / 마태복음 5:5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은 참으로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믿음이 자라납니다. 믿음은 은혜를 받을 때 자랍니다. 믿음이 자라면 자랄수록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믿음이 자라나고, 믿음이 자라날수록 변화가 일어나는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됩니다.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면,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은혜 받는 사람인가를 알려면, 그 사람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품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욕을 많이 먹게 되고,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됩니다.이런 사람들 중에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회개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작은 죄를 범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고, 가슴치고 울면서 얼마나 철저히 회개하는지 모릅니다. 정말 거듭난 사람인가, 얼마나 은혜 받은 사람인가를 알려면 얼마나 철저히 회개하느냐를 보면 됩니다.그런데 이렇게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십니다. 회개하는 자가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점점 더 거룩해지고,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거듭난 사람들은 회개하기 때문에 변화가 있는데, 타락했을 때 가졌던 마귀의 성품이 없어지고,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됩니다. 어둠의 열매가 많이 나타나던 사람에게서 빛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둠의 열매는 악함과 불의함과 거짓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엡 5:9).악하던 사람이 점점 착해지고, 불의한 짓을 하던 사람이 의롭게 살게 되고, 거짓된 성품이 진실한 성품으로 바뀝니다.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그러면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종교개혁자 칼빈은 “온유한 자는 부드러운 태도로 살고, 쉽게 노하지 않고, 남에게 보복하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도 잘 참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온유한 사람은 말과 행동이 아주 부드럽습니다. 온유한 것과 약한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온유한 사람이라고 해서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아주 강한 사람입니다.잠언 25장 15절에 보면,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뼈가 얼마나 딱딱하고 강합니까? 부드러운 혀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러나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다고 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의 말이 뼈를 꺾습니다. 돌 같이 굳은 마음도 녹일 수 있습니다.동물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암사자나 암호랑이들이 새끼를 옮길 때, 새끼의 목덜미를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서 옮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새끼의 말랑말랑한 살이 어미의 이빨에 물리는 순간 피투성이가 될 것 같은데, 전혀 상하지 않고 잘 옮기는지…. 새끼를 부드럽게 잘 옮긴다고 해서 호랑이나 사자가 약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지혜롭고 성숙한 모습입니다.온유한 사람은 잘 참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쉽게 노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성질을 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화가 날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은 잘 참습니다.또 온유한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자기를 괴롭히거나 불이익을 주었을 때, 분노를 품게 되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보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합니다.요셉이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다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잘 돌봐줬습니다. 다윗도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해도 보복하거나 악하게 말하거나 사울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온유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온유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에게는 절대 순종하고, 사람들에게는 선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선한 일만 행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온유한 사람의 모델입니다.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나운 사람, 힘 있는 사람, 강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대개 어떤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까? 옛날에는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땅을 차지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그 땅도 자신의 땅이 되고, 그 땅의 백성들은 다 노예가 되고, 거기에 있는 보물과 모든 것을 다 빼앗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에서 이긴 사람이 땅을 차지했습니다.또 복 받은 사람이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잘 되어서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우리가 믿는 아버지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시고, 이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게 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오늘날 먹고사는 것이 어렵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세상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으로서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손댈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세상 사람들은 근심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져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마음에 평강이 넘치고,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에게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온유한 아브라함에게도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이 아무리 온유하고 연약해보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아브라함이 롯과 땅을 나누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의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 너무 좋고 물이 너무 좋고 숲이 우거지고 기름지니까 그 땅을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해서 사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결국 아브라함과 그 자손의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도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아무리 양보해도 하나님이 주시면 내 것이 됩니다.다윗도 온유한 사람인데, 사울은 얼마나 사나운 사람입니까. 연약한 다윗과 사나운 사울 중에서 누가 이기겠습니까. 게다가 사울은 왕으로 군사를 수천 명씩 데리고 다니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사울은 스스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왕이 되어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과 싸워서 이긴 나라가 없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셔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인류 역사를 보면,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힘으로 밀어붙여서 많은 땅을 정복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 기간은 아주 잠시뿐이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그 땅을 다 잃어버리고, 영웅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차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빼앗았다가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 잃어버렸습니다.부동산 투자를 해서 자기의 땅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에게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우리가 어떤 성품을 가지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 성품이 중요한가 하면, 성품과 수명은 정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수명이 좌우됩니다. 성품이 좋으면 수명이 길어집니다.인간이 타락해서 마음이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수명은 짧아집니다. 잠언 10장 27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한 사람에게도 선을 베풀고, 다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에 미운 사람이 없습니다. 보복할 마음도 없습니다. 싸울 마음도 없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감동받으셔서 은혜를 부어주시고,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복을 주십니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분노를 품고, 미워하고, 복수심에 불타서 이를 가는 사람들은 온갖 병이 다 생기고, 마음은 지옥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수명이 짧아집니다.성경에 보면, 처음에는 사람이 천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면서 수명이 점점 짧아졌습니다. 동물의 경우를 살펴보면, 토끼나 소, 참새 같은 온순한 동물들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나운 동물들이 나타나면 다 잡아먹힙니다. 그래서 온순한 동물들이 다 없어질 것 같지만, 온순한 동물들은 번식을 잘 해서 번창합니다.그런데 동물의 왕인 사자나 호랑이는 1년에 한 마리도 낳을까말까 합니다. 자기들끼리 싸웁니다. 그래서 씨가 말라서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나운 짐승일수록 수명이 짧습니다.마태복음 11장 28~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편 37편 7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가 이러합니다. 악인은 다 멸하셔서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악한 사람들이 다 없어졌으니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게 되고,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면서 살게 됩니다.디도서 3장 2절에 보면,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남을 비방하지 말고, 다투지도 말고, 관용하고, 너그럽게 용서하고,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면서 살아야 합니다.야고보서 3장 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혜의 온유함’이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자는 미련한 자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로 온유한 자가 됩니다.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보다 온유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습니다.여기서 ‘온유하다’라는 말에는 짐승들을 훈련시켜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모세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 모세입니다.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이런 사람들을 귀하게 쓰십니다.온유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5:5) 온유의 뜻과 의미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11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그로 살이 반이나 썩고 죽어서 모태에서 나온 자 같이 되게 마옵소서

13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았을지라도 그가 칠 일간 부끄러워 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 밖에 칠 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

15 이에 미리암이 진 밖에 칠 일 동안 갇혔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 오게 하기까지 진행치 아니하다가

16 그 후에 백성이 하세롯에서 진행하여 바란 광야에 진을 치니라

자신을 비방한 미리암과 아론을 욕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들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모세의 이야기가 잘 나타나있다.

3절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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