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회 | 재속 프란치스코회 소개 최근 답변 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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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 – 나무위키:대문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가톨릭교회의 수도회다. 프란치스코회의 회원과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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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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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란치스코회. 언어 · 주시 · 편집.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엘 그레코. 목차. 1 개요와 기원; 2 한국 현황. 2.1 로마 가톨릭교회; 2.2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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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7/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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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Copyright© 1937-2012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OFMKOREA, All rights reserved.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홍보팀. sketchbook5, 스케치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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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fmkorea.org

Date Published: 5/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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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속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재속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 T 공지사항. 2022년도 2학기, 2023년도 1학기 … ; T 국가/지구 소식. 대전지구 가톨릭기후 행동(8.11~12) ; T 최근 게시글. 자유게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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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fskorea.org

Date Published: 3/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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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 – 가톨릭대사전 – 가톨릭정보 – 굿뉴스

이 세 갈레의 수도회가 프란치스코회의 제1회이다. 프란치스코회는 성인의 영성을 완성시켜 제2의 창설자로 불리는 성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 of Bagnorea)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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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ria.catholic.or.kr

Date Published: 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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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역사 – 네이버 블로그

프란치스코회는 1209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복음적 생활 양식을 구두로 인준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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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9/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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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오늘날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15일 재속 프란치스코회 총회의 참석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러분은 밖으로 나가는 교회의 일원이 되라”며 “가식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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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vaticannews.va

Date Published: 3/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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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속 프란치스코회  소개
재속 프란치스코회 소개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프란치스코 회

  • Author: 김민수미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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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8. 2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wpOtqhASCI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엘 그레코.

개요와 기원 [ 편집 ]

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는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천주교 탁발수도회다. 프란치스코회의 회원과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무리를 간단히 “프란치스칸”이라고 부르며, 프란치스칸 가족에는 1회(작은형제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카푸친 작은형제회)와 2회(클라라수녀회) 그리고 3회(수도3회, 율수회, 재속프란치스코회)와 재속회 등이 있다.

프란치스칸의 기원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립한 초기 형제들과 교회사적으로 탁발 수도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거리의 설교자로서 복음적 삶의 형태를 기본으로 우선적으로 일을 하고 필요에 따라 애긍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가난한 사람이나 병이 든 사람, 특히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데 주력하였다.

한국 현황 [ 편집 ]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같이 보기 [ 편집 ]

GoodNews 가톨릭정보

약칭 O.F.M. 1223년 9월 27일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에 의하여 창설된 최초의 탁발 수도회 .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 의 부유한 집에 태어나 귀족적인 환경 에서 자랐으나, 어느 날 다미아노 성당 에서 기도 하던 중 “무너져 가는 주님 성전 을 고쳐라”는 계시 를 받고, 모든 재산을 버린 뒤 거룩한 복음 에 따라 1206년부터 기도 회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의 모범적인 수도생활 을 따르려는 형제자매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자 결국 공동생활이 필요하게 되어 1209년 4월 16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간단한 회칙 을 구두로 인준받기에 이르렀다.1. 초기에는 프란치스코 자신이 살아 있는 규범이었으나 수도자 가 많아지고 경험이 쌓임에 따라 새 회칙 이 요청되어 1223년 11월 29일에는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대칙서(Regula fullata)에 의해 회칙 이 인준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수도생활 의 기초가 되고 있는 형제회의 회칙 >이다. 프란치스코 성인 은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릴 만큼 철저히 가난 겸손 의 길을 걸었으므로, 다른 수도회 와는 달리 명칭도 겸손 하게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라고 하였던 것이다.이 회의 정신은 복음 을 완전무결하게 생활화하는데 있다. 즉 가난 하고 십자가 에 못 박힌 그리스도 께서 성인 에게 계시 하신 것처럼 하느님 에게 반대되는 모든 이기적인 경향, ‘육의 정신’을 버리고 주님 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형제들의 이상인 것이다. ‘작은 형제’란 주님 의 정신에서 흘러나온 성인 의 독특한 영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과 형제적인 일치가 될 수 있는 가난 겸손 의 뿌리이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성인 과 작은 형제들은 ‘평화의 사도’로 불렸고, ‘평화의 기도 ’는 프란치스코 성인 기도 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정신이 함축된 기도 이다. 그 정신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이웃과 더불어 복음 을 실천하는 데 있다.그러나 육체노동과 걸식을 통해 생활한다는 그의 청빈 (淸貧)정신은 프란치스코 성인 세상 을 떠난 뒤부터 수도회 내부에서 엇갈린 두 의견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에 이르러 프란치스코회 내에는 세 수도회 가 분립(分立)되었는데, ① ‘작은 형제회 ’는 원시 회칙 파(Observant)에서 발달한 수도회 로 공동재산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② 1517년에 독립한 ‘꼰벤투알회’(O.F.M. Con.)는 공동재산의 소유를 인정하였으며 ③ 1528년에 독립한 ‘카푸친회’(O.F.M. Cap.)는 철저한 가난 과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이 세 갈레의 수도회 가 프란치스코회의 제1회이다. 프란치스코회는 성인 영성 을 완성시켜 제2의 창설자로 불리는 성 보나벤투라 (St. Bonaventura of Bagnorea)를 비롯하여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윌리엄 오캄(William Ockham) 같은 훌륭한 신학자와 대중적 사랑 을 받은 성 안토니오(St. Anthonius of Padua) 등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였다. 수도회 의 활동상황을 보면 유럽 , 아메리카의 전지역은 물론, 인도 필리핀 , 일본, 중국 등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도 수많은 형제들이 하늘나라를 증거하고 있으며, 100개 관구에 2만7,000명의 가족이 세계에 퍼져 있다(1983년 현재). 주로 가난 한 자와 소외당한 이를 위해 봉사 하는 이 수도회 교육사업 은 물론, 구라사업 , 양로원, 고아시설 등에 힘쓰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서 연구 신학교 도 운영하며, 성지 예루살렘 에는 순례 자들을 위한 속관구(屬管區)가 있어 현재 한국 형제도 파견 되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2. 제2회 :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는 글라라 관상 수녀 회(Poor Clare Nuns)이다. 성녀 글라라(1194∼1253)가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1212년 이탈리아 의 아시시에 창립한 수녀 회로, 글라라 동정 수녀회라고도 한다. 각 수녀 원은 독립적이고 중앙집권이 아니기 때문에 총장 직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성녀 글라라의 생존 중에 이탈리아 독일 에서 자매 수녀 원들이 창설되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르는 글라라 수녀 원의 엄격성은 수녀 원 가운데 가장 철저한 것이다.그러나 일부 글라라 수녀 원 지원에서는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고 수녀 원을 위하여 가난 회칙 으로부터 면제를 얻어 공동재산의 소유가 허락되었다. 반면 아시시의 다미아노 수녀 원과 피렌체의 수녀 원 등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서 ‘가난의 특권’을 받음으로써 원시회칙(原始會則)의 전통을 지켰다.3. 제3회 : 성 프란치스코는 직접 그를 따르며 수도원 에서 함께 생활하는 수도자 들의 지도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중 속에서 그의 뒤를 따르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프란치스코 제3회 ’를 만들고, 이 재속(在俗)형제들의 제3회 를 ‘보속의 회’라고 불렀다. 완덕 (完德)의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하나의 큰 가정 을 이룬 것이다. 제3회 가 시작된 것은 1221년부터였다.한국진출 : 프란치스코회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37년 9월 캐나다 요셉 관구의 드콰이어(J. Dequire, 요한 )와 벨레로즈(M. Dellerose) 신부 가 부산에 도착한 뒤부터이다. 이들은 대전에 수도원 을 건립하기로 작정하고, 9월 30일부터 대전에서 거주하였다. 1938년 8월 피에르(Pierre) 신부 가 입국하여 가족은 3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牧洞)에 수도원 을 건립 ‘천사의 모후 성 마리아 ’를 주보 로 모시고 축성 식을 봉헌 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자 일제는 죄 없는 선교사 들까지 적으로 몰아 모진 감금생활을 겪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옥고에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한 회원은 끝내 병사하고 말았다.1947년에 한국인 안선호(安仙鎬, 베다 캐나다 로 유학길에 오르고, 남은 신부 들도 각기 수련을 위해 출국하였다가 1950년 6월에 다시 입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수도원 건물은 공산군에게 강점당하고, 유엔군이 수복한 뒤로는 피난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쓰인 것이, 현재 대성(大成)중 · 고등학교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이 땅을 떠났던 벨레로즈 신부 가 1955년 8월 한국에 다시 돌아와 폐허가 된 수도원 복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해 12월에는 이탈리아 제노바 관구 소속인 콘스탄치오(COnstancio) 신부 가 와서 경남 진주(晋州) 지방의 전교에 나섰고, 1956년 2월에 또 다른 두 신부 가 입국하여 콘스탄치오 신부 를 도왔다. 8월에는 캐나다 에 유학중인 방인 사제 안선호 신부 가 대전 목동수도원 원장 으로 임명되었다. 11월에는 박 루이스 신부 캐나다 에서 수도생활 을 하던 한국인 백 안젤로 신부 가 귀국하고, 일본에 있던 한국인 전 안드레아 신부 도 귀국하였다. 그래서 1957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대전과 진주를 중심으로 작은 형제들의 활동은 괄목할 만큼 활기를 띠었다.1957년 6월 17일 진주에 있던 콘스탄치오 신부 가 옥봉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천(泗川), 의령(宜寧) 등 하동(河東) 지방에 두루 복음 을 전파하였다. 1959년에는 4명의 이탈리아 회원들이 삼천포(三千浦)에도 본당 을 신설하여 남해(南海)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6월에는 경남 신청면 내리(內里)에 2만 8,00여평의 대지를 마련하여 성심 원(聖心院)이란 나환자 자활촌을 만들었다. 한편 대전에서는 공(恭) 안드레아 신부 가 1959년 1월 목동본당 주임신부로, 그리고 4월에는 벨레로즈 신부 주교 의 명으로 서울교구의 본당 을 맡았다. 1960년 진주 지방에서는 콘스탄치오 형제에 의하여 병실 39동과 대수술실을 갖춘 나환자들을 위한 성심 인혜병원이 개설되었다.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모여들어 수일간에 2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였다. 이 해에 사천에도 본당 을 신설하였다. 대전 수도원 에서는 1961년에 첫 단순서원이 있었다. 한편 성심 원의 원장 정(鄭) 시온 신부 는 나환자를 위한 자활부락 건설에 착안하여 현대식 주택 개량에 힘써 1964년까지 가옥 82동을 건립하고, 농토를 마련하는 한편 정미소, 축사, 목공소, 매점, 창고, 보육원 , 세탁소, 이발소, 미장원까지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게 하였다.이렇듯 눈부신 발전으로 1963년 12월 10일에는 로마 본부로부터 일본과 한국 프란치스코회 총장 대리(지부장)로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李) 신부 가 임명되어 한국에 부임, 한국본부 설치를 서둘렀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수림으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 위에 수도원 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1965년 9월 8일에 낙성된 지금의 프란치스코회 본부 정동(貞洞) 수도원 이다. 이 수도원 에는 명도원(明道院)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선교사 들의 언어교육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 학원이 개설되었다.1969년 10월에는 총장 대리 관리 지역이던 한국 프란치스코회가 한국관구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 에 아폴리나리스 신부 가 선출되었다. 1971년 7월에는 성북동에 ‘평화의 모후 신학원 ’이 낙성되었으며, 1979년에는 새로 번역된 ≪성무일도서≫ 독서 집 4권이 출간되었다. 프란치스코 한국관구는 현재 8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성대서원자는 39명이고, 유기서원자는 10명, 수련자 5명, 지원자 26명이다. 또 외국인은 총 16명이며 내국인은 64명이다.현재 이 회가 맡고 있는 직접 선교의 본당 은 8개(1개 준본당 포함) 본당 이다. 이곳에서 9명의 성직자 와 6명의 평신도 형제들이 일하고 있다. 과거 이 회에서는 16개의 본당 을 관할한 적도 있었으나 8개의 본당 교구 에 이양하였다. 이것은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이 직접 선교도 중요하지만, 가난 하고 겸손 하신 그리스도 와 프란치스코 성인 의 뜻을 따라 사회 에 평화를 심고, 사회 사업과 특수사목 에 치중하는 신앙 에서 온 결과였다.한편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在俗兄弟會, 제3회 )는 1962년 1월 대흥동성당에서 다시 출발하였다. 2월에는 ‘서울 형제회 ’가 심의회를 구성하고 회원교육과 사도직 활동을 전개하여 회원수가 날로 증가하였다. 그래서 1963년 9월 17일에는 전국총회를 개최할 만큼 급속한 발전상을 보였다. 이로써 전국 각지에 산재한 단위 형제회 를 지도육성하는 데 통일을 기하게 되었고, 초대 전국회장에 장면 (張勉, 요한 ) 박사, 부회장에 노창원, 서기에 손광모, 회계에 차순각 형제가 선출되었다.그러나 제3회 인 재속 형제회 의 태동은 1937년 12월 2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백동(현 혜화동)본당의 주임신부인 오기선(요셉) 신부 의 주선과 장면 (요한) 박사, 장발 (張勃, 루도비코 ), 서 헬레나 형제 등의 협력으로 명동, 백동, 약현, 영등포 등의 4개 본당 유지 20여명이 착복식 (입회식)을 갖고 한국 최초의 준비 형제회 가 탄생된 것이다. 1939년 1월 3일 1년간의 수련을 마친 20명의 회원들은 서약 식을 마치고, 라리보 주교 의 인가를 받아 서울 형제회 는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이날 첫 서약 식에 이어 노기남 (盧基南, 바오로 신부 를 비롯하여 우재봉(요셉) 등 중견 지성인 수십명을 대상으로 제2차 착복식 이 거행되어 희망 에 찬 발전상을 보였다. 그러나 재속형제회는 발족한지 불과 2년 후인 1941년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뒤부터 1962년까지 20여년간 정치 적 배경과 시대적인 영향으로 풍전등화 같은 위기를 거듭하였다.그런 역정에서 1939년 12월말 200여명의 회원으로부터 1941년말에는 400명으로 증가하였고, 1961년에 대전(목동), 인천, 부산, 김제에 본회가 조직된 뒤, 1962년 대전 대흥동, 부여, 대구에 1963년에는 합덕, 이리에 본회가 설립되는 등 계속 조직이 확장되어 1980년 현재 전국 11개 교구 에 45개 형제회 와 4천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형제회 원들 대부 분은 각자 소속 본당 에서, 그리고 신심 단체에서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단체라기보다 개인적 수덕에 전념하는 조용한 단체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이들이 수도생활 을 통해 체험한 영성 생활을 교회 안에서 실천함으로써 사도직 활동에 좋은 표양 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선 활동으로 교회사 업을 비롯하여 성서 후원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은퇴사제후원회, 구라회, 불우이웃돕기 등에 대부 분의 형제회 가 단체 또는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 가 운영하고 있는 소년 원, 양로원, 나환자촌, 신학원 등의 방대한 사업을 돕고 있다. (⇒) 글라라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역사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역사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인준받은 회칙’ 1장-

프란치스코회는 1209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복음적 생활 양식을 구두로 인준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교회 안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회개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형제애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로 뚜렷이 확장되고 발전되게 된다. 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성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회칙을 최종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이 회칙이 바로 [인준받은 회칙](Regula Bullata)이다.

성 프란치스코에 의해 수도회가 설립될 당시는 세속화되어가는 교회를 비판하던 청빈 운동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청빈 운동에 참여하던 이들 대부분은 이단적이고 반교회적인 사상과 결부되어 이단으로 파문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들과 달리 교회 안에서 교회 쇄신을 위해 청빈 운동을 전개해나갔고 많은 열매를 맺었다. 많은 이들이 작은 형제들의 삶에 감화되었다. 이로 인해 작은 형제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고 세상 안에서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살고자 하는 평신도들의 단체인 재속 프란치스코회(O.F.S.)도 생겨나게 되었다.

1274년 7대 총장 성 보나벤투라가 세상을 떠나자, 수도회는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도시 안에 공동체를 세우고 살아가는 ‘꼰벤뚜알(Conventuali)’ 과 엄격한 가난과 프란치스칸 영성 가운데 은수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열성파(Zelanti)’ 또는 ‘영성파(Spirituali)’로 불리는 수도회로 나눠지게 되었다. 수도회의 분열은 이후 여러 교황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못하였다.

결국 1517년, 교황 레오 10세는 ‘꼰벤뚜알(Conventuali)’과 개혁 그룹들이 단일한 조직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법적으로 완전히 분리시켜 모든 개혁 그룹을 ‘옵세르반티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하였고, 1528년에는 ‘옵세르반티(Osservanti)’에서 ‘카푸친(Cappuccini)’이 개혁되어 다시 분리되어 나왔다.

현재와 같은 세 개의 수도회로 나뉜 것은 1897년 교황 레오 13세 때이다. 당시 ‘옵세르반티(Osservanti)’는 ‘리포르마티(Riformati)’, ‘알칸타리니(Alcantarini)’, 레콜레티(Recolletti)’ 등 많은 분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이들을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여 살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시는 수도회는 작은 형제회(O.F.M.),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O.F.M. Conv),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 Cap)로 모두 세 개가 있다. 작은 형제회는 갈색 수도복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검은색 수도복을 입는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

작은 형제회 Ordinis Fratrum Minorum-O.F.M.의 한국 진출

1937년 캐나다 선교사 도 요한(Deguire), 배 쥐스땡(Bellerose)이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한국 내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평화와 착함(Pax et Bonum)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Ordinis Fratrum Minorum Conventuali-.O.F.M.conv)

꼰벤뚜알’은 ‘공동의, 수도원의’라는 뜻으로, 회원들은 ‘꼰벤뚜알 작은 형제들’이라고도 한다. 이라도 한다. 한국 진출은 1958년 이탈리아 파도바 관구의 프란치스코 팔다니(한국명: 범덕례) 수사가 부산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민중의 형제들(Frati del Popolo)

카푸친 작은 형제회(Ordinis Fratrum Minorum Capuccinorum-O.F.M.Cap)

성 프란치스코의 인준받은 회칙(수도규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려는 이상, 즉 성 프란치스코의 실제 모범과 알려진 의도와 특히 성인의 유언에서 표현한 의도로서 그 회칙(수도규칙)을 해석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번째 동료들을 엄격하게 닮고자 하는 프란치스코회 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수도회이다. 1528년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의 대칙서 ‘Religionis Zelus’에 이어 교황 바오로 5세(재위 1605~1621)에 의해 작은 형제회의 하나로 인가받았다.

카푸친 개혁은 1525년 준수회(Obsebantes)의 마르케(Marche) 관구 바시오(Bascio) 의 마태오 형제가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회칙(수도규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할 것을 구두로 인준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제 준수회의 장상들이 반대하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인 카메리노 공작부인인 카타리나 치보의 보호와 중개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528년 대칙서 ‘Religionis Zelus’를 발표함으로써 카푸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수염을 길렀고 성 프란치스코가 입었던 수도복이라고 생각한 길로 뾰족한 모자(Cappucino)가 달린 수도복을 선택했다. 카푸친이란 이름은 고깔같은 모자(Cappucino)에서 나왔다.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는 1536년 9월 8일 카푸친 작은 형제회를 승인했으나 이듬해 준수회의 요청으로 카푸친 형제들이 이탈리아 밖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는 1574년까지 지속되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1608년 교서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가 성 프란치스코의 직접적인 영적 계승회임을 설명했고, 1627년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카푸친 작은 형제들이 성 프란치스코의 아들임을 공포했다.

한국 진출은 1986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아일랜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 파트리시오 관구 소속 수도자 4명의 입국으로 시작하였다.

교황,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오늘날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람들 가운데 있으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15일 재속 프란치스코회 총회의 참석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러분은 밖으로 나가는 교회의 일원이 되라”며 “가식 없이 단순한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정의, 선교 사명, 통합 생태론을 위해 힘쓰길 당부했다.

Salvatore Cernuzio / 번역 이재협 신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선교 사명을 위해 협력하며, 통합 생태론을 위해 일하고, “사회정치적” 차원의 참여라는 일차적 소명을 잊지 않으며, 비극으로 점철된 오늘날 희망의 원천이 되는 복음의 명령인 “가식 없이 단순한 삶으로” 사람들 사이에 머물기. 최근 아시시에서 유럽 각지의 가난한 이들과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15일 교황청 사도궁에서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을 만나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연설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가족 수도회인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복음적 생활을 하길 바라는 미혼 남녀 평신도, 또는 혼인생활을 하는 남녀 평신도들이 속한 수도회다.

더보기 12/11/2021 교황, 아시시에서 세계의 가난한 이들 포옹…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와 존엄을 회복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1월 12일 프란치스코 성인의 도시 아시시에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 교황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움브리아와 유럽에서 온 가난한 이들 500명을 만났다. 성가와 기도, 상징적 몸짓과 증거로 가득한 3시간이었다. 교황은 “굶주린 아이들, 노예로 전락한 아이들, 난파선에 내동댕이쳐진 아이들, 온갖 …

성덕의 소명

교황은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사명과 소명이 세례받은 모든 이에게 전달되는 “성덕의 보편적 소명”에 근거한다고 말했다. 이어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칙과 지난 1978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인준한 새 회칙이 가르치듯, 이 성덕은 유일한 거룩함이시며 “선이시고 모든 선이며 으뜸선”(성 프란치스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매료되고 사로잡혀 그분을 통해 변화되는 마음의 회심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진정으로 참회하도록 이끄십니다.” 교황은 이어 “회심하는 것”과 “참회의 행위”를 혼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단식, 자선, 고행(참회의 행위)은 하느님께 마음을 열기로 다짐한 결과입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여십시오! 프란치스코 성인의 방식으로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가며 그리스도께 마음을 여십시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리스도의 거울’이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거울’이 되길 바랍니다.”

가난과 단순함,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표지

교황은 참석자들에게 “여러분은 프란치스칸 카리스마에 따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소명은 세상 안에서 아시시의 가난뱅이(성 프란치스코)의 방식으로 복음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광을 멀리하고 복음을 ‘삶의 기준이자 규칙’으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교황의 초대는 복음을 가까이 하고, 그 복음으로 삶을 만들어 나가라는 초대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다른 이들과 구별하는 표지인 가난, 작음, 단순함의 정신을 몸에 익히십시오.”

교황은 “여러분이 지닌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정체성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교회의 일원이 되라”고 강조했다. “여러분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독신자든 혼인한 사람이든,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평신도로서, 또 사제도, 주교도,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소명에 따라 가식 없이 단순한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여러분의 많은 남녀 회원들이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언제나 기쁘게 따르면서 말입니다.”

오늘날의 실존적 변방을 향해

교황은 모든 신자들에게 늘 강조했던 모습 그대로 “변방으로, 오늘날의 실존적 변방으로 나아가 거기에서 복음의 말씀이 울려 퍼지게 하라”고 격려했다. “그리스도의 몸인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주보성인인 헝가리의 엘리사벳 성녀께서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참회자 형제회(fraternità dei penitenti)’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병원, 무료 진료소, 무료 급식소 등 여러 사회적 자선활동을 펼쳐 나갔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가난이 요구하는 창조적인 사랑을 실천하도록 여러분을 보내십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친밀함, 연민, 온유한 사랑으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이 희망의 사람들이 되어, 일상생활과 인간관계 그리고 사회정치적 참여를 통해 희망을 살아내고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이 되길 빕니다. 오늘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내일의 희망을 키우는 것입니다.”

평화의 장인

끝으로 교황은 성 프란치스코가 “각 구성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확실히 존중”하면서 “온 가족의 일치”를 열망했다고 강조했다. “언제나 핵심이 되는 상호 친교 안에서, 모든 이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느끼는 세상을 함께 꿈꾸고, 그 세상을 함께 건설하기 위해 힘씁시다. 정의를 위해 싸우고, 통합 생태론을 위해 일하고, 선교 사명을 위해 협력하면서 여러분은 평화의 장인이 되고 참행복의 증인이 되십시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과 일치하고 가난을 사랑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풍요로운 제안을 따라 걷는 길, 곧 회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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