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장 8절 | [조정민 목사 설교]증인되라(사도행전1장6-8절) 최근 답변 6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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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직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조정민 목사
날 짜: 2014년 9월 21일
제 목: 증인되라
본 문: 사도행전 1장 6-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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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사도행전 1장

(행 1: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 …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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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2/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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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 KRV – Bible.com

사도행전 1:8 KRV.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KRV: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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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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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 8절 말씀 묵상 [김연희 목사] – 복음뉴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는 것처럼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내가 죽는 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교만이 죽게 됩니다. 병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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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7/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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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 6절-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 말의 의미는 바로 이제 곧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다시 세상에 심판주로 오시는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뒤에서 볼 것이지만, 주님께서 승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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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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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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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2/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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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1) 해석의 일관된 지침 1장 8절은 우리가 사도행전을 설교할 때 시종일관 유지하여야 할 해석의 지침을 제시한다. · 2) 땅끝까지 이르는 복음의 내용 땅끝을 향하여 진군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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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7/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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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 8절의 문제 < 독자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지형은 목사(서울중앙지방·성락교회) 물론, 사도행전 1장 8절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이해하는 일에서 사람들에게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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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ehcnews.co.kr

Date Published: 10/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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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민 목사 설교]증인되라(사도행전1장6-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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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도행전 1장 8절

  • Author: svcforh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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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1.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dnbYjm9Tm4c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KRV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KRV: 개역한글 번역본 취소 성경 언어 한국어 언어 바꾸기 {{#items}} {{local_title}} {{/items}} ← 언어 취소 {{#items}} {{local_name}} {{/items}}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 묵상 [김연희 목사]

제목 : ‘성령의 권능이 내게 있습니까?’

본문 :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임하는 권능을 대개는 권세와 능력, 그러니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내게 임하는 것으로 이해 합니다. 즉, 예언, 병고침, 방언, 능력행함등등…기적과 이적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권능 이전에 선행되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으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멸시키고자 합니다. 이에 모세는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한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달라는 끈질긴 중보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겨우 돌이키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관계가 예전대로 회복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같이 가지 않으시고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가도록 명하십니다(출33:1-6절). 그러자 모세는 결사각오의 심정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동행을 허락받기에 이르렀습니다(출 33:12-16) 그러자 모세는 확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된 모습까지 보여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즉, 하나님은 40주 40야를 독대해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밀한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모세를 살리시기 위함 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의 삯이 사망인 죄인과는 함께 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 자마다 죽을수 밖에 없는 것이 죄에서 태어난 인간의 몫이며,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는 것처럼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내가 죽는 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교만이 죽게 됩니다. 병든 자가 하나님을 만나면 그 병이 죽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주님을 만나면 그 귀신이 못견디고 떠나가게 됩니다. 이렇듯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자기가 죽게 되고 성령,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 중심이 죽게 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자기 의와 자기 고집이 죽게 되며 하나님의 의와 주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는 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의의 길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박혀 지게 되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이 임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징입니다.

오늘도 오직 성령이 임하는 자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권능인 자기를 부인하는 권능이 내게 있는 지를 살피며, 나는 죽고 내게 임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필수 주건인 성령 충만함을 힘써 구합니다. 마침내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증인들로 든든히 세워져, 주께서 명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확장하는데 드려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1장 6절-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도행전 1. 6-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1: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1: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바로 앞 절에서 예수께서 요한의 물세례를 말씀하시고 난 후 성령세례를 말씀 하신 사실을 살핀 바 있다. 그런데 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시작을 “그래서”(μὲν οὖν)라는 접속사로 연결을 하고 있어, 5절과 6절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 모인 제자들은 성령이 오시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명령과, 이 명령의 성취를 곧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연결 짓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τὴν βασιλείαν τῷ Ἰσραήλ)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 여기서 말하는 “회복하는”(ἀποκαθιστάνεις) 말의 의미도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 나라를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나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금 로마의 박해 아래 있는 현실의 이스라엘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생각건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사실 앞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얼마나 슬픔과 절망에 싸였을까? 그리고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베드로는 또 어땠었나? 그 역시 이전의 자기 직업을 좇아 고기 잡으러 가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여러 과정을 거쳐 지금 여기 주님 앞에 서 있는 제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부활사건 이전이라면 아마 현실의 이스라엘을 말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부활사건 이후의 이들의 모습 속에 여전히 이전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주님께서 사역을 하시던 중에 제자들이 후자와 같이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현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을 때, 그 사실을 여러 차례 바로잡아 주셨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여기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회복은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나라” “메시야 왕국”은 언제 도래하는 것일까? 지금 제자들이 묻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답을 하신다. 우선 우리는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회복”의 의미가 “도래”라고 한 바와 같이, 그 도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살펴보자. 이 말의 의미는 바로 이제 곧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다시 세상에 심판주로 오시는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뒤에서 볼 것이지만, 주님께서 승천하시며 다시 오실 것을 천사들을 통하여 전하고 있는 것이다(1:11).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때”와 “시기”는 각각 χρόνους와 καιροὺς로 표기되어 있는데, 앞의 Chronos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면, 후자의 Kairos는 의미적인 시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기간(duration)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시간의 길이와 시간의 종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위 본문의 “때와 시기”에 적용한다면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을 것임이라는 “때”와 그 재림의 기한은 얼마나 걸릴는지 모른다는 의미의 “시기”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아버지의 권한”(Πατὴρ…ἰδίᾳ ἐξουσίᾳ)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알 바 아니라”(Οὐχ ὑμῶν ἐστιν γνῶναι)고 하시면서, 너희들은 “때와 시기”를 알려고 노력하지 말고 8절과 같이 이 명령을 지켜 행하라고 당부하신다. 우리는 4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을 살핀바 있는데, 여기서는 사실 떠나라는 명령을 접하게 된다. 이것에 대하여 이미 우리는 상호 모순된 것이 아니라 순차적인 명령이라 말한 바 있는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ἐπελθόντος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ἐφ’ ὑμᾶς)이라는 말 속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 강림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성령이 너희들에게 임하시면, 그 다음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권능을 받고”(λήμψεσθε δύναμιν)라 하는데, 여기서 권능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 능력은 이미 예수님의 이적 베푸시는 것에서 볼 수 있었으며(마 11:20), 모든 성도들을 부활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능력인 것이다(고전 6:14; 빌 3:10). 그리고 머지않아 사도들도 성령의 임재와 증거를 위한 새로운 차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행 2:4; 고전 6:19, 20; 엡 3:16, 20). 그리고 이와 같은 능력을 힘입게 되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한다. 여기서 “내 증인이 되리라”(ἔσεσθέ μου μάρτυρες)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말하는 사람으로(요 14:26; 벧전 3:15 참조), 본래 증인이란 헬라어 뜻에 따르면 “자신의 믿음을 위하여 죽는 사람”을 말한다.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바로 여기 증인이라는 martus에서 유래된 것이다. 마지막 하나 짚고 가야 할 것은, 여기 “되리라”라고 한 이 말이 서술어인가 아니면 명령어인가의 문제다. 지금 우리 성경대로 보면 마치 서술어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미래명령형이다. 따라서 오늘날 모든 성도는 참되고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계 1:5, 3:14). 그러므로 당시의 땅 끝은 로마였겠지만, 세계 방방곡곡에 주의 복음이 전하여지도록 martus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지상생애 이후, 즉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계속되는 복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복음의 내용은 “예수”이고, 이 복음이 향하고 있는 궁극적 종착점은 “땅끝”이요, 이 역사를 이루어야 할 주체는 예수님의 “증인”들과 “성령”이다(행 1:8).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통하여 복음이 땅끝을 향해 진군해 나가는 현장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독자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유발하는 시각적 이야기 언어, 앞뒤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고리처럼 이어지는 전개방식, 그리고 메시지를 강력하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정교하게 구사하는 아이러니 수사법 등은 사도행전 기록에 있어서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표현방식이다. 설교자는 누가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사도행전 해석의 열쇠와도 같은 이러한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행전을 접근할 때, 누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많은 메시지들에 새롭게 귀가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각에 의한 신선한 설교의 아이디어들을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설교자가 사도행전을 접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만한 몇 가지 지침을 개괄적으로 제안해보고자 한다.

1. 해석의 열쇠(key); 사도행전 1장 8절

1) 해석의 일관된 지침

1장 8절은 우리가 사도행전을 설교할 때 시종일관 유지하여야 할 해석의 지침을 제시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으로, 이것은 그 이후의 사도행전이 펼쳐 보이는 역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열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누가는 이 말씀과 더불어 사도행전의 기록을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지금부터 기록할 사도행전의 핵심 내용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누가는 이 말씀으로써 독자에게 지금부터 전개될 사도행전의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될 것인가 하는 지침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는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끝을 향하여 진군해가고 있는가, 즉 복음의 땅끝을 향한 진군의 과정을 추적하는 관점에서 읽을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1장 8절은 예수님 자신에 의하여 제자들 앞에서 만천하에 공포된 승천 이후에 진행하실 복음의 역사에 대한 예수님의 설계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예수님의 이 설계도가 현장에서 실제 역사로 이루어져가고 있는가에 대한 보고라 할 수 있다.

물론 사도행전이 당시의 세계사와 전혀 무관한 딴 세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의 주안점은 세계역사의 기술이 아니라 복음과 그 복음의 땅끝을 향한 진군의 역사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그 당시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로마에 복음이 이르고, 그곳에서 복음이 거침없이 증거 되고 있는 현장을 제시하는 것을 절정으로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인 28장 30, 31절은 사실 1장 8절의 선언이 그동안의 수 없는 곡절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성취되고 있는 장엄한 장면이기도 하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복음은 결국 땅끝까지 이르렀고, 거기서 아무런 거침을 받지 않고 증거 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여기까지이고, 그것은 이미 1장 8절에서 밝힌 대로 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누가의 사도행전은 복음을 주인공으로 한 ‘복음 행전’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타당한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저자인 누가는 복음이 어디로 전파되느냐에 따라서 시야를 옮기는 방식으로 복음에 접촉하는 새로운 지역과 이 복음의 전도에 가담한 사람을 자세하게 취급한다. 초점은 복음의 전파 경로에 맞추어져 있다. 복음 행전이나 아니면 이 복음의 전파 주체가 성령이란 의미에서 성령 행전이 그 특징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다”(정훈택: 27).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설교하는 설교자는 “그래서 복음이 어떻게 되었는가?” 혹은 “그래서 복음의 진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접근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은, ‘그 사람 혹은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진군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관점을 가지고 조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누가 자신이 그러한 방식의 진술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그는 특이한 사건이나 현장을 소개하고는 번번이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다” 혹은 “…도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는 식의 직접적인 진술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그 사건이 결국 복음의 진군의 역사와 어떻게 관련을 맺었는가’하는 것을 간접적인 방식 혹은 암시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든지 하는 것이다.

2) 땅끝까지 이르는 복음의 내용

땅끝을 향하여 진군해 가는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이다. 1장 8절의 “나(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이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직후 자기를 바라보며 모여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이 증언의 내용이 될만한 상황에서도 단호히 그것을 거부하고 ‘나사렛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다. 정작 그 사건을 일으킨 베드로 자신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부활하신 예수에 대해 증언하는데 우리 설교자들은 오히려 앉은뱅이나 베드로에게 최대의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증언하는 과오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고침 받은 앉은뱅이처럼 우리도 믿음을 갖자”라거나, “베드로처럼 우리도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열심을 내자”라는 식의 설교는 거의 완벽하게 본문의 요구를 벗어나 버린 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이루어진 이후의 복음 증거의 내용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예수는 부활하셨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대립이나 핍박의 핵심은 이 내용을 부인하거나 바꿀 것에 대한 요구와 그에 대한 목숨을 건 예수의 증인들의 거부사이의 대립이라는 사실을 사도행전의 전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설교자들도 그 증인들처럼 예수에 대한 증거를 우리 설교의 핵심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는 규범적 차원에서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사도행전의 본문을 대할 때에 예수에 대한 증언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접근하고 설교하라는 본문 해석적 차원에서의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3) 땅끝까지 복음을 진군시킬 주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이러한 복음 진군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주체가 너희(증인들)와 성령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사도행전의 초반에서는 사도들이 이 증인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점차 진행되면서 결국 이 증인들은 ‘교회’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자 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그 교회는 곧바로 증인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2:47)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데반의 죽음과 더불어 닥쳐 온 교회에 대한 큰 핍박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에서도 교회의 증인됨을 간파할 수 있다. 스데반이 죽음을 당하고 이어서 큰 핍박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있고, 나머지 교인들은 핍박을 인하여 흩어져 버렸다. 이 흩어진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사마리아에 복음이 편만하게 된다. 스데반의 죽음을 계기로 복음 확산의 주역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사도라는 지도자만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모든 교인들이)가 그 일을 감당하게 되는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안디옥에서 증인의 일을 수행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교회 공동체였다. 13장에 가면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 파송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본질적으로는 교회가 증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2장까지는 주로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고 13장 이후에는 주로 바울이 이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들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에는 교회가 그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진군시키는 증인으로서의 주체는 교회이다. 교회는 그래서 ‘증인공동체’인 것이다.

땅끝을 향한 복음의 진군에 있어서 또 다른 하나의 주체는 성령이다. 예루살렘을 떠나 땅끝을 향하여 흩어지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1:4)는 명령이 동시에 주어지는 이율배반적 상황을 연출하고, 성령이 이 이율배반적 상황을 푸는 열쇠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복음의 진군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사도행전이 강조하는 성령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병을 고치는 것도 아니다. 방언을 말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큰 일’(2:11), 곧 복음을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듣게 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일 뿐이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확산하고, 복음을 증거 하시는 일이다. 즉, 예수에 대한 증거와 관련된 일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요 14~16장) 가운데 성령에 대한 언급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4) 능력의 실체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하여 성령을 능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 증인들은 능력을 받게 되고, 그 능력으로 땅끝을 향하여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시면 받게 된다는 이 능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1장 8절의 문맥은 이 능력의 실체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 능력이 주어지는 목적이 무엇인가, 이 능력은 무엇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하여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는 일과 관련하여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능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이 문맥을 가지고는 알 길이 없다.

우리는 자주 성경이 어떤 중요한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에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집어넣어서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쓸 때가 많이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능력’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한 개념은 무엇인가? 많이 가진 것은 적게 가진 것보다, 큰 것은 작은 것보다, 높은 것은 낮은 것보다, 또 감옥에 가두는 사람은 갇히는 사람보다 언제나 더 큰 능력이요, 죽이는 사람은 죽는 사람보다 언제나 더 큰 능력이라는 것이 능력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개념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약속한 능력은 그러한 의미에서의 능력일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의 고별설교에서 성령을 말씀하실 때에는 성령이 누구인가,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등을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능력을 말씀하실 때에는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는다는 것과 그 능력의 역할만 말씀하셨지 그것이 어떤 능력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 능력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실제로 성령이 임하시고 능력을 받자 그 능력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보고 나서야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임하고 그리하여 그 능력을 받은 다음 그들에게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사도행전 전체를 통하여 살펴보고 나서 내려지는 그 능력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은 우리가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개념에서의 능력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능력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이 능력은 어찌 보면 고난을 당하는 능력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는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기대하는 능력은 예를 들면, 누가 나를 잡으러 오면 눈만 한번 크게 떠도 그 사람이 나가떨어지고, 내가 손을 펴면 나를 향하여 날아오던 돌이 다시 되돌아 날아가서 돌을 던지는 자의 이마에 박히고 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능력을 받은 사도들은 한번도 그런 식의 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때리면 맞고, 가두면 갇히고, 빼앗으면 빼앗기고, 끌고 가면 질질 끌려가고, 그러다가 돌을 던져 죽이려 하면 그 돌에 맞아 죽어버리고 만다.

물론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셨던 그 능력의 핵심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다음 베드로는 그것을 계기로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붙잡혀 가서 갇혀 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표적과 기사들이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그것들이 1장 8절에서 약속하신 능력임을 입증하는 차원에서 나타난 것은 아닌 것이다. 결국 성령이 임하심으로 받은 능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 증거의 사역을 포기하지 않는 능력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증인의 일을 포기하거나, 증언의 내용을 바꿀 수 없어서 어디라도 갈 수 있고, 어떠한 일이라도 당해낼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전한다고 잡아 가두는 자들에게 그냥 잡혀가는 능력이다. 죽음이 생명을 위협하며 닥쳐올 때에도 차라리 죽음을 당해버릴망정 증인됨을 포기해버리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는 ‘죽는 능력’인 것이다. 얼마 전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고 부인했던 사람이 ‘내가 목숨이 아까워서 너희 말을 들을 것 같은가?’ 하고는 그들의 협박을 거부하고 그냥 가고, 그러다가 또 잡혀 들어가는 그런 능력인 것이다. 두려움에 휩싸여서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불과 사 오십일 사이에 이렇게 바꾸어 뒤집어진단 말인가? 이것이 성령이 임하시고 그리하여 권능을 받은 결과인 것이다.

사도행전을 설교할 때 1장 8절이 말하는 능력에 대한 확실한 관점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설교는 많은 부분에서 본문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혹은 메시지의 본질을 놓칠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시각적 이야기 언어에 주목하라

사도행전은 서신서처럼 직설적인 교훈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시각적 이야기 언어, 혹은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말함으로써 그것을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유발해서 그 현장을 보게 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메시지를 깨닫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유상현 교수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구사하고 있는 이러한 표현 방식을 아주 잘 포착하여 지적하고 있다. “누가는 자신이 강조하여 전달하려는 ‘내용’을 단순한 추상적 개념어로 정리하는 평면적 진술을 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저자는 어떤 개념이나 사실을 제시함에 있어서 건조한 명제적 서술구조에 담아 나열하는 ‘논리성’에 익숙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 개념이나 사실을 설명조의 사화(史話) 속에 용해시켜 이야기로 풀어놓음으로써 시각적 그림을 그려내게 만든다. 그러고는 그 이야기의 그림을 통한 생생한 기억과 독자가 갖는 내면적 이미지의 형성을 통해 메시지의 전달과 설득의 힘을 가중시키려 한다. 추상화된 개념어를 연쇄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기억에 도움이 되지 않는가를 알고 있는 저자는, 자신의 작품 곳곳에서 효과적인 전달의 방책으로서 ‘이야기 담론’을 펼쳐 보인다.”(유상현 1996:95)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는 서신서에서와 같은 직설법적인 메시지나 추상적인 개념어들로 선포되는 교훈의 진술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는 어떤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도록 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유발하고, 그 장면을 생생하게 실감하게 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듣게 한다. 누가는 독자에게 “슬프다”고 말하기보다는, 슬프게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저자의 이야기 그림과 상상력(imagination) 유발의 의도를 포착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단순히 글자를 읽을 것이 아니라, 그 글자가 가리키고 있는 현장을 연상하고 그 상황을 실감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곧 당사자가 되어보고, 그리하여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메시지를 포착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는 “너희는 고난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복음을 위하여 처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당하는 스데반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 보여주고, 그리고는 그가 “잔다”는 이해할 수 없는 표현으로 그 사건을 마감하고 만다. 복음을 위하여 처참한 죽음도 당하는 현장과 그 죽음을 잠자는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누가는 독자로 하여금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고난을 오히려 사모하도록 촉구하는 설득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또한 누가는 “복음은 유대인과 헬라인,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의 담을 헐고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번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사도 베드로가 부정한 피장이의 집에 머물고 있고, 피장이의 집에 베드로와 고넬료의 집 사람들이 한 지붕 밑에서 같이 기거하며 밤을 지내고 있고,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함께 기거하며, 고넬료 집의 이방인들이 유대인 사도 베드로에게 며칠을 더 머물라고 요청하고 있는 장면(9:43~10:48)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부정한 자와 거룩한 사도가, 더러운 자와 유대인이 함께 먹고 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야 말로 복음의 능력이 아닌가!”하고 충격을 받는 것은 독자의 몫인 것이다(우리는 이 대목을 다음 호에서 해당 본문을 다루며 더 상세히 살펴 볼 것이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장엄한 장면이다. 복음이 드디어 땅끝에 이르러 거침이 없이 증거 되고 있고, 이로써 1장 8절에서 보이신 복음의 역사에 대한 예수님의 설계도가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복음의 진군의 역사가 드디어 종착점에 이르러 완성되고 있는 이 감격적인 순간에도 누가는 그러한 선언이나 감격을 직접 설명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다만 복음이 땅끝에 이르러서 증거 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0, 31). 누가는 이 장면을 보고 “드디어 복음이 땅끝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으며 거침을 당하던 복음이 드디어 거침을 받음이 없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있다! 그것 봐라, 복음의 역사는 반드시 승리하고야 만다!” 며 감격의 선언을 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설교하면서 본문이 의도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이러한 생생한 현장묘사나 상황 설명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생략해버리고,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첫째,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은 반드시 승리하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는 식의 주제 요약으로 곧바로 가버린다면 그것은 누가의 의도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는 것이 될 것이다. 본문을 존중하는 설교자라면 청중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설교를 시도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것은 본문이 구사하고 있는 시각적 이야기 언어에 대한 감각에 예민함으로써 가능하게 될 것이다.

3. 사건 상호간의 인과관계적 연결에

주목하라

표현 방식뿐만 아니라 사건의 전개 방식에 있어서도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앞뒤 사건들이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것이다(cf. Tannehill: 5~7). 정훈택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련의 사건들이 전에 일어난 일과 비교되고 후에 일어나는 일들로 연장되는 것이다”(정훈택 1996:26). 때로는 앞뒤 사건이 인과 관계를 갖고 관련을 맺기도 하고, 때로는 앞 사건이 뒤 사건의 의미를 함축하며 연결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한 사건이 복음의 진행 역사 전반에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며 등장하여 그 이후의 사건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3장 1~10절의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은 군중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는 원인이 되고, 그것은 다시 베드로가 설교할 기회의 준비가 된다. 그 설교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자신을 향하여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군중들의 시선을 나사렛 예수에게로 돌리고 자기는 물러나는 훌륭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설교는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체포의 원인으로 연결되고, 이 체포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고 더 이상 복음을 설교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받고, 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다시 제2차 체포로 연결되어 다시 복음을 설교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사건은 서로 인과관계를 제공하기도 하고, 혹은 다음 사건 또는 이전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암시나 힌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설교할 때는 각 사건을 독립적으로 분리해내어서 각 개별 사건이 갖는 단편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사건이 앞뒤의 사건 혹은 복음의 진군의 역사 전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갖는 의미나 역할 등을 잘 살펴서 드러낼 필요가 있다.

6장 1~6절은 교회에 원망의 문제가 발생하므로 사도들이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안하고 교회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일곱 집사를 택하여 그 일을 전담하게 하고 사도들은 말씀사역과 기도에 전념하도록 함으로써 하마터면 교회를 큰 궁지에 몰아넣을 뻔했던 사건을 잘 처리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7절은 이제 복음이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을 때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러한 연결 고리에서 우리는 앞에서 교회가 직면한 원망의 문제를 그렇게 해결한 것이 복음의 진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본문이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암시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이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을 때가 되었다는 7절의 선언은 곧바로 다음 사건들과 또 다른 연결고리를 이루는데, 그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복음의 확장이 아니라, 복음의 확장에 대하여 생명을 요구하며 닥쳐온 스데반 사건이다. 장애의 절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6장 8절에서 시작된 이러한 연결이 8장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스데반은 죽음을 당하고, 그로 더불어 유사이래 최대의 박해가 일어나서 온 교회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흩어짐은 복음이 사방에서 전파되는 계기로 연결되어 결국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이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점점 왕성하기 시작하고, 빌립이 그 주도적인 일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빌립에게 황금어장과 같은 사마리아 지역을 떠나서 사람이 없는 사막지역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순종하여 간 빌립은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남으로서 결국 사마리아 한 지역이 아니라 이디오피아 국가 그리고 나아가서는 아프리카 대륙에 복음이 이르게 하는 큰 일을 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즉 복음이 지금까지의 경계를 넘어 진군을 할 시점이 되었음을 밝히고(6:7) 그래서 결국 복음은 사마리아로, 그리고 이디오피아 내시에게로(이디오피아로) 진군하게 되었는데, 사마리아로의 확장은 스데반과 교회의 큰 핍박을 통하여, 이디오피아로의 확장은 빌립의 황금어장을 버리고 사막으로 가라는 어이없어 보이는 말씀에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 고리들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이 땅끝까지 진군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편은 결국 교회의 고난과 교회의 순종이 될 것이라는 암시를 포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6장 7절~8장까지의 연결이 복음이 어떻게 해서 땅끝을 향하여 진군해 가는가를 밝힘으로써 복음의 진군의 역사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본다면, 9장의 사울의 회심 사건과 10장의 고넬료 사건은 또 다른 차원에서 서로 연결을 맺으면서 중요한 의미를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복음이 땅끝을 향하여 진군해가면서 이루어내는 일의 내용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경력으로 보아 복음의 은총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복음의 은총권 안으로 들어온다는 선언이고(사울의 회심 사건), 그의 신분으로 보아 복음의 은총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 한 것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복음의 은총권 안으로 들어온다는 대 선언(고넬료 사건)의 의미를 갖고 나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두 사건은 그 진행의 패턴이 흡사하고, 또 사도행전 안에서 세 번씩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위와 같은 해석의 관점을 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Tannehill은 특히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연결고리의 시각으로 사건들을 접근하는 것의 정당성과 효과에 대하여 잘 지적하고 있다(1990:5~7). 그러므로 설교자는 누가는 사도행전의 각 사건들을 마치 서로 연관 없는 커트 사진을 한 장씩 진열하듯이 나열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그 본문의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앞의 혹은 뒤의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4. 자연스럽지 않은 표현(irony)의 의도를

포착하라

의도한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본문이 사용하는 문학적, 수사학적 전략(strategy)은 다양하다. 그중 설교자(해석자)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성경 본문이 자주 사용하는 강력한 수사학적 전략 가운데 하나가 아이러니(irony)이다. 특히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아이러니 수사법을 통한 메시지의 전달 방식을 자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 방법과 개념으로 아이러니를 설명하거나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지 기본적으로 분명한 것은 아이러니는 말(표현)과 그 말이 실제적으로 가리키거나 의미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어서 그 차이가 부자연스러움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 부자연스러움은 언어적 부자연스러움, 개념적 부자연스러움, 경험상의 부자연스러움, 논리적 부자연스러움, 상황적 연결의 부자연스러움 등으로 다양하게 감지될 수 있다. 아무튼 이 부자연스러움은 독자의 주의를 끌어내게 되고, 여기에 주목한 독자는 본문이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의 전략을 구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은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혹은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의 의미 혹은 의도가 무엇인가,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이 가능한 근거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품고 본문 속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본문이 의도한 메시지를 찾아내는 희열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강력하고 신선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성경이 자주자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 전략이라고 보여지는 ‘자연스럽지 않은 본문’을 설교자들은 많은 경우에 자연스럽게 지나쳐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사도행전 자체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전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복음이 땅끝을 향해 진군해 가는 역사이다. 그런데 그런 장엄하고 권세 있는 복음의 진군이 누구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가? 때리면 맞고, 가두면 갇히고, 묶으면 묶이고, 죽이면 죽는 그런 정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정말 나약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 권세 있는 역사가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확인되는 자연스럽지 않은 표현의 실례들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사도행전 7장 57~60절

“…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의 최후의 모습에 대한 이와 같은 표현은 자연스러운가? 자기를 향한 증오심에 불타서 이를 갈며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질질 끌려 성밖에 내쳐지고 급기야는 그들이 던져대는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나자빠져 있는 스데반의 죽음의 현장을 본문에서 실감하는 설교자라면 이 사람의 최후의 모습을 “잔다”는 말로 마무리짓고 있는 이 자연스럽지 않은 표현을 결코 자연스럽게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을 주목하고 이렇게 표현하는 본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설교자는 ‘사람이 죽으면 잔다고 하는 것을 일반적인 현상’이라거나, ‘죽은 사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 성경은 영혼 휴면설을 지지한다’는 식의 엉뚱한 해석은 본문이 제시하는 실제 상황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심한 불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누가는 스데반의 죽음의 참혹성을 몰라서 이렇게 낭만적인 표현으로 그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면 우리는 누가는 지금 참혹하게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는 스데반의 주검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의 길을 가다가 참혹하게 죽은 이 죽음의 의미(어쩌면 기가 막히게 평화롭고 아름다운)를 보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그러한 표현을 씀으로써 지금 스데반이 어떤 모습으로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의미의 죽음을 죽었는가를 강조하고자 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으로 접근한 설교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식의 메시지에서 나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당하는 어려움들은 그 모습이 아무리 비참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얼마나 아름다운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드러내는 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2) 사도행전 6장 1~6절

“…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공궤하는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 ”

돈을 계수하고, 물건을 구입하고, 배급하는 등등의 일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일군을 뽑으면서 그 일을 할 사람에게 요구된 자격 요건은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등등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예를 들어 어느 일간지에 대기업이 경리부나 창고관리 혹은 구매부의 사원 모집광고를 내면서 자격요건으로는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등등을 내걸었다면 만인의 웃음을 살만한 일이 아닌가? 설교자가 이 본문의 이러한 자연스럽지 않음에 착안한다면, 그는 본문을 향하여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게 될 것이고, 아마 누가는 교회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은 그 일의 내용은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의 본질은 영적인 일이라는 선언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일에는 세상의 합리성이나 경제성, 효율성의 원리보다도 영적인 원리가 최우선의 원리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겪는 분쟁과 고통의 핵심에는 영적인 원리를 따를 것을 주장하는 입장과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원리를 따라서 일을 처리 할 것을 주장하는 입장 사이의 갈등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3) 사도행전 8장 1~8절

“사울이 그(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 ”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전개는 이렇다. 스데반의 죽음(순교) – 그 날에 일어난 교회를 향한 핍박과 모든 교인들의 각지로의 피난 – 쫓겨다니는 교인들의 계속적인 복음 전파.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전개를 단순히 순차적인 사건 발생의 순서라는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직설법적으로 “예루살렘 교인들은 큰 핍박이 임하여 피난을 갔는데, 쫓겨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으니 우리도 어떤 어려운 처지에서라도 복음 전파에 힘쓰자”는 식의 설교를 한다면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만큼 충분히 그들의 계속적인 복음 전파 행위의 의의를 부각시키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이 제공하고 있는 만큼 오늘의 청중을 향한 강력한 적용도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사건의 전개’ 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접근하면, 본문은 특이한 수사학적 전략으로 그들의 복음 전파 행위가 갖는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본문의 사건 전개를 ‘그날(스데반의 순교)’과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큰 핍박’을 대조시키고,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 쫓겨가는 사람들’과 ‘쫓겨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며 다니는 그들의 모습’으로 대조시켜 놓고 보면 본문의 사건 전개가 이중의 부자연스러움(아이러니)을 조성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교회가 지도자를 복음을 위한 순교의 제물로 기꺼이 드렸으니 이제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의 역사가 있을 것을 기대함직한 상황에서(지금까지 그래왔다) 오히려 사상 초유의 큰 핍박이 주어져서 교회는 쫓겨가는 신세가 되고 있다는 아이러니와, 복음 때문에 큰 핍박을 받아 쫓겨다니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는 곳마다 그 복음을 전하며 다니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을 접하게 되면, 하나님께 대하여 차라리 배신감을 느끼고, 그 결과로 이제 복음과 관련을 맺고 사는 삶을 미련 없이 포기해 버리는 것이 당연해 보일 상황에서도 피난 행각을 벌이며 가는 곳마다(원망이나 탄식이나 좌절로 인한 포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받는 큰 핍박의 원인이 된 그 복음의 말씀을 여전히 전하는 그들의 행위가 갖는 의미가 더욱 생생하고 강력하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부각시킨 설교는 믿음, 봉사, 헌신, 충성 등을 다하여 이제는 은혜를 기대함직한 상황에서 오히려 더 큰 환난을 당하고 있는 처지에 있는 오늘의 청중에게도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4) 사도행전 11장 1~3절

이 본문은 베드로가 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와 그 가족이 구원을 얻는 일에 결정적인 일을 수행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은”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1절), 정면에서 베드로를 면박하고 힐난하는 내용이다. 베드로를 힐난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복음(하나님의 말씀)을 땅끝까지 진군시키는 증인의 일에 목숨이라도 걸겠다고 나선 복음의 증인들 아닌가? 누가는 이런 아이러니를 통하여 무엇을 지적하고자 하는가? “복음의 진군에 결정적 장애물이 되고 있는 복음의 증인들” 아닌가? 이 본문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고 보면 이와 너무나도 흡사한 많은 모습들을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볼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를 것이고, 그것이 설교의 좋은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을 의외로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 교회들의 모습도 누가의 이 그림 속에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5) 사도행전 12장 1~17절

12장 1~17절은 감옥에 갇혀서 야고보의 뒤를 이어 헤롯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있는 베드로와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비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천사의 인도로 기적처럼 베드로는 감옥에서 빠져나오고, 교인들이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집으로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은 그렇게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작 베드로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베드로가 돌아왔다고 소리를 치는 로데에게 그들은 “네가 미쳤다” 하다가, “그러면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다” 했다가, 여전히 들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서 문을 열고 거기 서 있는 베드로를 보고는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누가가 아주 정교한 장치의 아이러니로서 지적하고자하는 것은 “열심히 기도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절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고, 이 본문의 이러한 수사학적 장치에 주목하는 설교자는 이 메시지가 오늘날의 회중의 어디에 가서 꽂히는 화살 일 수 있는지를 감지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몇 가지 실례 외에도 사도행전의 도처에서 우리는 누가가 메시지를 강력하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아이러니 수사법을 정교하게 구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참고문헌

유상현, 「사도행전 연구」, 대한기독교서회, 서울, 1996

정훈택, 「복음을 따라서」, 한국로고스연구원, 서울, 1996

Robert C. Tannehill, The Narrative Unity of Luke-Acts Vol.2, Fortress Press, 1990

사도행전 1장 8절의 문제

지형은 목사(서울중앙지방·성락교회) 물론, 사도행전 1장 8절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이해하는 일에서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이 유명한 구절이 사도행전 전체의 중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창세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는 존재의 전체 흐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심장이라면 그 심장이 사회 현상적인 실체로서 박동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다.

교회의 초기 30여 년 역사를 기록한 책이 바로 사도행전이다. 교회가 어떠했으며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려면 사도행전을 보아야 한다.

그 1장 8절이 이렇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철저하게 선교 지향적이다. 한국 교회는 이 구절을 참 좋아한다. 강력하게 복음을 전하고 그로써 양적 성장을 이어온 교회가 한국 교회다.

목회자들이 사도행전을 설교하기 좋아하는 이유가 여럿이겠지만 3000명, 5000명, 남녀의 큰 무리 등으로 기록된 양적 성장이 그중 하나일 테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사도행전적인 선교의 역동을 잃어버렸다. 까닭이 무엇일까?

1장 8절로 들어가자. 여기에서 초점은 복음 전도다. 전도에는 전도자가 필요하다. 이 구절의 표현으로 증인이다. 이 구절에서 명제 셋을 말할 수 있는데 증인이라는 단어는 끝에 나온다.

‘성령이 오신다’, ‘권능을 받는다’, ‘증인이 된다’. 관건은 증인인데 성령이 임하시고 사람이 권능을 받는 과정 없이는 증인이 생길 수 없다.

창세 이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고 결정적으로 피조세계에 개입하신 일 두 가지, 곧 당신 스스로 사람이 되신 일과 영으로서 사람들 속에서 살기 시작한 일의 목표가 증인을 만드는 것이다. 증인 없이 증언이 있을 수 없고 복음 전도에서 상당 부분 메신저가 곧 메시지다.

한국 교회가 이 점을 놓쳤다. 우리는 증언하는 데 주로 신경을 썼지, 제대로 증인 되는 일에 소홀했다. 증인 곧 복음의 전사를 만드는 데 한국 교회가 열정적이라고 반론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이해하는 복음의 용사는 주로 전투적이고 공격적이고 독선적이다. 사도행전의 증인은 사랑과 진실과 평화로 인격과 일상이 변화된 사람들이다.

윤리 도덕적으로 고결한 사람이다. 윤리 도덕이란 말이 인본주의적이라고 거부감을 느낀다면 성결한 사람이라고 하면 된다.

둘만 예를 들자. 먼저 거짓의 문제다. 거짓말하면 증인이라고 할 수 없다. 증인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진실을 숨기지 않는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 그렇다. 무슨 일이든 내편이냐 아니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내편이면 무조건 괜찮고 반대편이면 무조건 나쁘다는 사람은 증인이 아니다.

증인에게 절대 권위는 하나님 말씀뿐이다. 다른 것은 다 상대적이다. 말씀의 진리는 거짓과 상충한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의 그리스도인은 정직한가? 교단 임원 선거, 표절, 재정, 교세 통계 등 교회 내부의 문제에서 거짓을 스스로 드러내어 수술할 정도로 정직한가?

세월호 사태,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메르스 사태, 법조계 전관예우, 고위공직자의 윤리성 등의 사회적 사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느 집단을 편들지 않고 사안 자체를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많은 경우 보수 집단의 헤게모니에 셋방살이하고 있지 않은가.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추종하고 있는 것 아닌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공의의 마당을 만들고, 보수와 진보를 여기에 초대하여 함께 끌어안는 어머니의 품이 교회 아닌가 말이다.

또 하나는 사랑의 문제다. 이것도 거짓에 대해 얘기한 방식으로 생각하면 된다. 사도행전의 증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외에 어느 것도 절대 기준이 아니었다.

보수나 진보의 진영 논리에 이용되는 사랑은 더는 기독교적인 사랑이 아니다. 사랑과 공의가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고 증인은 이를 닮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 국회의원이나 기업가 중에 이런 증인이 누구인가? 공직자, 예술가, 학자, 연예인, 법조인, 교육자 중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증인이 누구인가?

그리고 슬프지만 이 점도 물어야 한다. 목회자 가운데 증인이 누구인가? 일상과 인격에서 사랑과 공의로 사는 증인 없이는 사도행전 1장 8절은 작동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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