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의 소금 | [Cts2]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 사랑의교회 故옥한흠목사 [주일예배 / 설교]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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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성경 구절 : 마태복음 5장 13절 ~ 16절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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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이 되라(마5:13) – 당당뉴스

여기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는 말씀과 함께 세상에서 성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성도들(교회)은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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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10/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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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3-16 KRV – Bible.com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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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9/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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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가. 성도는 세상의 소금과 같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절).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도의 사명이 세상을 기름지게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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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esley.tistory.com

Date Published: 5/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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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무슨 뜻인가? 성도는 부패한 세상에 …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님은 믿는 제자들은 세상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주며 세상이 부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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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6/25/2022

View: 8606

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6) – 빛과 소금에 대한 강해

그래서 소제물을 드릴 때 치는 소금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예수님의 피, 생명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의미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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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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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태복음5:13-16)/홍종일목사

소금의 기능에서 두 번째가 썩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의 기능입니다. 고기나 생선을 저장할 때도 당연히 소금에 저리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역시 세상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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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rw.kr

Date Published: 4/6/2021

View: 5639

어떻게 하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가?

(레위기 2:13 참조) 소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고기에 소금을 치듯이, 우리도 “세상의 소금”이 되어(제3니파이 12:13) 주님을 위해 세상을 준비하는 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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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28/2022

View: 7430

2012-07-29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정필도목사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어 소금처럼 살라는 의미입니다. 소금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소금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 당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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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ildo.kr

Date Published: 9/10/2022

View: 3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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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S2]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 사랑의교회 故옥한흠목사 [주일예배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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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세상 의 소금

  • Author: JOY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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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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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이 되라(마5:13)

마태복음 5장 13절 세상의 소금이 되라 가. 성도에게는 세상을 향한 사명이 있다.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본문은 세상을 향한 교회(성도)의 사명을 소개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는 말씀과 함께 세상에서 성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성도들(교회)은 세상에서, 세상을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이는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진 무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내는 일을 전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 등장하면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진 교회는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하는 것을 강조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오셨던 것처럼 교회는 세상을 위해 일해야 한다. * 교회는 세상과 대적관계에 있지 않다. 그렇지만 교회가 세상에 속하면 아니 된다. 교회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리챠드 니버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세상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참조하라. 나. 성도는 세상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여기서 ‘세상의 소금’(할라스 테스 게스)는 문자적으로는 ‘땅의 소금’을 말한다. 이것은 ‘세상의 빛’(포스 투 코스무)과 비교된다. 빛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라면 소금은 흙속에 녹아 스며드는 성질이 강조된다. 이로서 ‘땅의 소금’이 되라는 사명은 세상을 위한 밑거름이 되라는 것이다. * 물론 소금은 여러 가지 쓸모가 있다. 음식물에 들어가 맛을 내는 조미료의 기능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땅의 소금’이 되라는 사명을 주셨는데 이는 조미료가 되는 역할 그 이상이다. * 소금은 방부제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땅의 소금으로서 역할은 방부제 그 이상이다. 옛날 유대인들은 척박하고 딱딱한 땅을 부드럽고 비옥한 땅으로 만들기 위해 소금을 비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생각에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을 하셨음을 참조하라(막9:50). * 성도는 세상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죽여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성도는 자신을 녹여 세상을 아름답고 넉넉한 곳으로 만드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다. 성도는 영적 지혜로 무장해야 한다.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세상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맛을 잃으면’(모란데, 가정법과거수동)은 ‘어리석게 되다’라는 뜻이다. 성도가 지혜를 잃고 어리석게 되면 아무 쓸데없어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 지혜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웃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밖에 모르고 자기중심적으로 산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자신 밖에 모르고 현재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지적하셨다(눅12:13-21참조). 성도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현세와 더불어 내세를 준비하고 자신과 더불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 그런데 여기서 ‘맛을 잃으면’(수동태)은 외부의 힘에 의해 맛을 잃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는 성도들의 지혜를 무력하게 하는 강한 세력이 있다. 즉 육신의 정욕, 세상의 악한 풍조, 그리고 사탄의 유혹이 그것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지만 세상에 빠져서 맛을 잃으면 아니 된다. 라.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존재가치가 크다.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가 없다. 이는 성도가 어리석게 되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비유다. 그런데 ‘쓸모가 있다’(이스퀴오)는 ‘힘이 있다’ 또는 ‘가치가 있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성도가 힘이 있어 사명을 감당하면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도가 영적 지혜로 무장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밑거름으로서 힘을 발휘할 때 존재가치가 커지는 것이다. * 그런데 쓸모없는 것은 버려지고 밟힌다.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신 것은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해 버리시고”라고 하신 말씀을 참조하라(요15:2참조). * 기독교는 흥망성쇠의 길을 걸어왔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할 때는 힘을 얻었었다. 지금 개독교라고 비난을 받는 현실에서 땅의 소금이 되는 사명을 다시 일깨워야 한다.

마태복음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마태복음 5:13-16 KRV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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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부활절 5주(2016년 4월 24일)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가. 성도는 세상의 소금과 같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절).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도의 사명이 세상을 기름지게 변화시키는데 있다고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세상’으로 의역한 ‘게스’는 원래 ‘땅, 흙’이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님은 흙에 뿌려지는 소금을 비유로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의도로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흙에 비료로 소금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농사와 관련해서 뿌렸다면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메마른 땅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소금을 뿌린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실제 흙에 소금을 두면 아침저녁의 이슬을 흡수해서 땅의 건조를 감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소금 비유는 짠 맛을 내는 조미료나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의 특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땅을 비옥하게 중화시키기 위한 소금의 역할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여기서의 땅은 우리의 선교의 대상인 사람과 사람의 활동 영역인 이 세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을 비옥하게 가꾸는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나. 맛을 잃으면 가치가 없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13절).

성도는 땅을 비옥하게 하는 소금 같은 존재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라고 하시며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맛을 잃다’(모라이노)는 ‘어리석게 되다, 오염되다, 쓸모없게 되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리석다는 것이고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순전한 소금 결정체는 그 자체로 맛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라고 하신 것은 사람을 대체할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타락한 세상에 오염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잘못된 세상 논리와 법에 물들어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다. 소금의 진정한 맛을 드러내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13절).

그러면 예수님 말씀의 의도인 소금이 진정한 맛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소금’으로 쓰인 ‘할라스’는 ‘조미료나 비료로써의 소금’도 되지만 ‘지혜나 분별력’을 나타낼 때도 쓰입니다. 여기서는 소금을 지혜 있는 사람에 비유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며 내세를 준비하는 자를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마7:24참조). 시편 14편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한다”라고 하였습니다(시14:1).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기적이고 탐심으로 가득 찬 부자 비유를 들면서 내세를 생각하지 못하는 이 부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눅12:20).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순종하는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시19:7).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이웃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내세를 준비하는 존귀한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라. 맛을 드러내는 사람이 존귀하다.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절).

본문은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쓸 데 있지만 그 맛을 드러내지 못하면 아무 쓸모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여기서 ‘쓸모 있다’(익수오)는 ‘힘이 세다, 유용하다, 가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자녀답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고, 그렇지 못하면 가치도 없고 쓰임 받지도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치 없는 소금은 밖으로 내버려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버려지다’(발로)는 분사형이고 수동태로 쓰여 자녀의 사명을 잃어버리면 쓰임 받지 못하는 인생으로 끝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밟히다’(카타파테오) 역시 수동태인데 ‘발로 짓밟히다, 거절당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예를 들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25:30). 이 땅에서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인생의 종말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녀들은 이 세상에 좋은 열매를 나타내는 소금 같은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윤택하게 만드는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소금 같이 지혜로운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무슨 뜻인가? 성도는 부패한 세상에 부패를 방지하고, 희망이 없는 세상에 살 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바쳐 헌신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무슨 뜻인가? 성도는 부패한 세상에 부패를 방지하고, 희망이 없는 세상에 살 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바쳐 헌신해야 한다.

2016.6.3(금) 오늘의 묵상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무슨 뜻인가? 소금은 우리가 잘 알듯이 음식물이 부패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데 사용된다. 또한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의 특성이 있다. 음식에 소금이 없으면 맛이 없어 먹을 수 없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은 보다 높은 도덕성과 세상에 대해 특별한 책임과 사명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부패한 세상에 소금의 사명, 살 맛 나지 않은 세상에 살맛나게 하는 소금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독교는 이 말씀을 완전 잊어버린 것 같다. 한국은 불교가 22.8% 1,072 만 명, 기독교가 18.3% 861만 명, 천주교가 10.9% 514만 명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교회는 55, 427개, 편의점 22, 851개, 중국집 25,003개, 치킨 37120개, 통신기소매업 27,800개라 한다. 우리나라는 편의점보다 교회가 더 많은데 왜 사회는 점점 타락하고 사람들은 ‘헬조선’이라 아우성인가?

바다는 3.5% 남짓의 소금만으로도 그 넓은 바다가 썩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 세상의 소금인 기독교인과 천주교인들 인구의 약 30% 있어도 세상은 날이 갈수록 타락하고 있는가?

그것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가르친 예수의 말씀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가?

한국 교회 신앙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강조하는 타계주의 신앙과 성공주의 신앙 때문이다. 타계주의 신앙과 성공주의 신앙은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가르친다.

타계주의 신앙은 종교인은 세상의 정치 사회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목사가 정치 사회에 관심을 가지면 도리어 정치 목사로 낙인 찍어버린다.

교회가 이 세상의 문제에 무관심한 타계주의 신앙이 되다보니 교회의 본래의 선지자의 사명, 저항정신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결과 나라의 지도자가 부패하고 사회가 무너져 내려도 전혀 관심이 없다. 철저한 이기주의 신앙이 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가? 이명박근혜 정권 7년 동안 부패인식지수 OECD 34개국 중 27위'(2013년 기준), 한국의 언론자유 순위는 노무현 정권 때 31위에서 이명박 정권 말년인 2011년 42위로 떨어지더니 박근혜 정권 2년째인 2014년에는 57위로 추락했다.

삶의 질은 OECD 34개국 중 한국 30위로 최하위권이다. 삶의 질이 최하위는 자살이 말해주고 있다. 지난해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만4천427명으로 하루 39.5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작년에 하루 평균 40명 자살…OECD 최고 수준이다.

일하다가 목숨 잃는 노동자 산재사망자는 한국 산재 사망자 10만 명당 18명으로 세계 최고이다. 한국은 긴 노동시간과 함께 산재가 많은 나라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연합뉴스) 이제 날마다 일터에서 죽어가는 안타까운 죽음을 보고 애도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가계·국가·공기업·민간기업의 부채를 모두 더하면 나랏빚은 5000조원에 육박한다. 이는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 우리나라 경제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명박근혜 정권 7년 동안 나라는 경제 안전 환경, 다 무너졌고 나라가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제 이명박근혜 정권 7년 채 나라는 수출은 막히고 한국의 주력산업은 중국에 밀리고 먹고 살 길도 막막해지는 상황이 되었다.(경향신문)

그럼에도 교회는 언론에 세뇌되어 박근혜 정권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친일세력이 교과서를 친일로 바꾸겠다고 해도 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과 속을 구분하고 거룩한 삶은 마치 세속을 떠나는 것 인양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님은 믿는 제자들은 세상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주며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계(他界)주의 신앙에 젖어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것을 정치적이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종교인은 세상의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한다. 중세교회는 수도사의 아버지 안토니의 영향을 받아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극단적인 고행을 하는 수도사 운동 금욕과 고행으로 세상을 등졌다.

이것이 바로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중세 교회사상이다. 종세교회는 헬라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성과 속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이 이원론적인 헬라사상이 중세교회 천년동안 지배했다. 그로인해 중세교회는 타계주의 신앙으로 역사의식이 사라졌다.

그 시대의 가장 큰 문제인 농노문제를 눈감고 교회가 도리어 농노를 거느리는 대주주가 되었다. 단지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는 것이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며 교회가 권력자의 논리를 대변하는 단체가 되어 가장 타락한 어둠의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성과 속을 나누지 않는다. 세상은 속된 것이므로 초월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세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거룩한 삶이 아니라 세속 속에 들어가 헌신하며 소금처럼 부패를 막고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것이 거룩이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세상 속에 들어가 세상의 죄와 싸우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이다. 사람이 소금 없이 살 수 없듯이 세상은 기독교인이 없으면 살 맛 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가 세상에 눈을 감고 자기 영혼의 문제만 관심을 갖게 되므로 교회는 소금의 사명을 버렸고 더불어 부패하여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마치 길가에 버려진 소금처럼 현대 사람들에게 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지만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사명을 버린지 오래되었다. 단지 믿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끼리끼리 집단이 되어 버렸다.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성도는 부패한 세상에 부패를 방지하고, 희망 없는 세상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바쳐 헌신해야 한다.

소금이 녹지 않고 부패를 막을 수 있는가? 소금이 녹지 않고 맛을 낼 수 있는가? 기독교인이 자신이 시간과 물질을 들여 이 사회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고칠 수 있겠는가?

플라톤이 말하길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가장 저질스러운 세력의 지배를 받아야한다” 고 했다. 나는 부패한 세상에 관심이 있는가? 나는 부패한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나는 살맛나지 않는 세상에 맛을 내는 사람인가?

오늘 나는 우리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웃의 고통과 절망에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삶의 문제에만 골머리를 앓고 있는가?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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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리데오G 작은사랑

제 목 : 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6)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많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오늘날은/ 교회가 아닌 세상이/ 이 말씀으로 교회를 질타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렇치 못하니까 욕을 먹는다’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한번쯤 들어본 소리 아닌가요. 그리고 이렇게 비판하는 소리에 가슴이 뜨끔한 적은 없으신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모순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세상이 읽고 듣고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세상이 이해하고 공감할 내용이었다면 성경을 읽고 들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핵심진리를 세상이 알아듣던가요? 절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성경말씀은 인간적인 논리나 이성과는 다른 시선으로 기록된 말씀이 이니까요. 그래서 성경말씀은 인간 스스로의 지혜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들을 귀를 주셔야 보고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인간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으로 세상이 교회를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의 소금과 빛을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인 삶’으로 알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소금같이 빛같이 살아야 한다’는데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역할이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데 방점을 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에 내포된 진의가/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와 도덕 정도라면 성경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시간을 통하여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이/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과 윤리라는 프레임에 매여 있는 착한 행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의를 함께 살피고자 하오니 부디 명심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잠깐 졸거나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은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 집중하셔야 합니다. 부디 여기 모인 길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듣고 깨달아지는 은혜가 넘쳐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알고 있었던 고정관념이나 지식과는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대다수 분들이 오늘 본문을 ‘착한행실을 통하여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는 율법식 설교를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그동안 들었던 세상적인 관점의 설교는 깨끗하게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게 말씀하시는 올바른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상의 의’라는 옛 프레임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라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진의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의는 인간들의 논리와 관점으로 선악을 판단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선악의 기준과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항상 한 문장만으로 그 본문의 진의를 파악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의 내용은 항상 앞뒤 문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한 문장에 포함된 진짜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앞뒤 문맥도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는 말씀을 확인하려면 앞에 나오는 팔복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오늘 본문의 내용을 확인하기에 앞서서 팔복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팔복의 내용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마 5:3-10 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제가 읽었던 본문에서 전반부의 내용만 한번 잘라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그리고 이것을 축약하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라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복 있는 사람들로 보이십니까? never~ 복 있는 자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은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복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이 팔복의 내용은 각 어절마다 전반부는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후반부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후반부의 내용만 보면 복이 맞는 것 같은데/ 전반부의 내용은 전혀 복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렇게 살면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 있는 자는 이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복 있는 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인 것이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은 결국에는 팔복의 내용과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여기까지만 듣고도 ‘아~ 오늘 설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소금과 빛에 대한 내용과는 많이 다르겠네’라고 추론했을 것입니다. 네 당연합니다. 만약 빛과 소금의 역할이 착한행실과 이어져 도덕과 윤리로 결말을 내린다면 제가 이렇게 설교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본문의 내용이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내용과 어떻게 다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성경해석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소금이 어디서 어떻게 기록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소금언약이라는 말씀으로 소금이 등장합니다.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이지요.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이란 말씀은 민18장과 대하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같이 찾아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민수기 18:19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다음은 역대하13:5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기록된 두 말씀은 모두가 소금을 ‘영원불변성’과 ‘세상과 구별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레위기 2장에서도 소금이 등장합니다. 소제에 대한 규례를 언급한 곳이지요. 구약의 모든 제사는 피 제사입니다. 피 흘림이 동반된 제물을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소제입니다. 오직 소제만은 피 흘림이 없는 제물/ 즉 빻은 곡식을 제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이 소제를 드릴 때 제물(곡물)에 소금을 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소금이 하나님의 언약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우리들은 창세전 언약을 확인해야 하지요. 왜냐하면 모든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바로 언약의 후손들에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란’ 우주가 창조되기도 이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은 언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여/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는 것이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하신 은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값없이 구원해 주시는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창조된 이유도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소금은 제물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는 ‘생명의 피’와 동일한 효력으로 의미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는 진짜 생명의 피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말씀하지요. 그러니까 진짜 소금은 예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소제물을 드릴 때 치는 소금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예수님의 피, 생명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의미는 ‘너희는 세상과는 구별된 생명의 피를 가진 자’‘언약의 백성’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소금언약과 창세전 언약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세상과는 다르다는 의미이니까요.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씀 뒤에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금이라는 그 자체로서의 본질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소금에 대한 정체성의 이야기이지 부패방지나 어떻게 세상을 개혁하는지와 같은 역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많은 교회나 세상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오해해서/ 오늘 본문을 ‘교회가 세상에서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교화시켜야 하고/ 구제와 복지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들의 논리는 소금과 빛의 의미를 세상 속에서 도덕적, 윤리적 역할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구제나 복지를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오늘 본문은 소금의 정체성 즉, 그 고유한 짠맛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지/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소금은 그 자체로 소금의 맛을 냅니다. 열심을 내고 노력해서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니까 소금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이지요. 크리스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 모습이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 짠맛으로 인하여 비난과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는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소금의 짠 맛으로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지요.

어차피 세상은 인간적인 판단과 논리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다른 자신들만의 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보는 안목은 하늘 시선과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이 종교, 저 종교를 모두 인정해 주는 종교다원주의가 선(善이)고/ 동성애도 성소수자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본주의자라고 칭찬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라는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종교다원주의는 타락이고 동성애는 추악하고 가증한 죄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기독교는 독선적이라고 한다면 그 독선이 바로 소금이 맛을 내고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다수가 옳다고 해서 그것이 의로울 수 없으며/ 세상에서 선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의의 길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모든 판단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는 것이 선이고/ 악이라고 하는 것이 악이다’가/ 바로 선악과 사건에서 주는 교훈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것만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품고 살아가는 존귀한 자들이라는 것과/ 성도로서의 짠맛은 세상의 그 어떤 논리나 유혹으로도 바꿀 수 없는 성도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야만 진짜 소금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다름/ 즉, 세상과 구별되는 그 짠맛을 통하여 세상의 죄악을 드러내고 정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소금이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면/ 빛은 창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빛은 첫 창조가 시작되는 창세기 1장과 새 창조가 시작되는 요한복음 1장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창조의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지요.

그래서 빛은 의(義)와 하늘(天)을 상징하고 어둠은 죄(罪)와 땅(地)을 상징합니다. 빛은 생명이고 어둠은 사망이지요. 따라서 빛은 하늘과 생명에 속해 있습니다. 반면에 어둠은 땅과 사망에 속해 있지요. 그래서 빛이 비치면 어둠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빛이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가 드러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참(眞) 빛이시며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런데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창조의 역사를 진행하십니다. 바로 어둠에 속한 세상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을 구별하시고 불러내어 교회를 탄생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창세기의 첫 창조와 요한복음의 새 창조의 모습이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창세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교회탄생의 모습이 온전히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천지창조입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듯이/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불러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셨듯이/ 둘째 날에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궁창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궁창의 히브리원어는 ‘라키아’는/ ‘(금속을) 두들겨 펴다’를 뜻을 가진 ‘라카’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하늘과 땅을 십자가로 연결해 화목케 하신 모습이 궁창을 만드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져(할례, 세례) 죽으셨듯이/ 셋째 날에는 흑암의 깊음의 저주의 바다에서 뭍(육지)가 올라옵니다. 뭍이 어떻게 바다에서 올라올 수 있었나요? 예수님께서 저주의 바다 속에 들어가 생명을 품은 뭍(육지)을 끌어 올리시고/ 당신께서 대신 빠져 죽으심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하신 죽음으로 교회가 생명으로 살아났듯이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라는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탄생한 교회는 생명이며 빛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넷째 날 밤하늘에 광명체를 만드시어 땅을 비추게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천지창조와 예수님의 새 창조 사역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일치하는 모습으로 포개어지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일맥상통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죽음으로 교회가 탄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들에게 ‘빛이 되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은 그 자체로서 어둠을 드러내고 정죄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 다음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산 위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산은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시온하면 바로 떠오르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율법으로 제사지내면서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예루살렘이 바로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키고 있었던 형식적인 제사와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차 없이 부정해 버리십니다. 너희들이 드리는 제사, 너희들이 지키는 율법의 행위/ 모두 가짜라고 말입니다. 진짜가 오면 가짜는 일언지하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위폐는 진짜 화폐와 비교해 보면 금방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성도들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삶으로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는 자라는 의미이지요. 빛이 비치면 어둠은 드러납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그 빛으로 인하여 드러나듯이 말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을 통하여 어둠에 속한 세상은 정죄되고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 하면 어떤 이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이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고요. 많은 성도들이 헷갈리는 것이 바로 ‘착한 행실’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 원문에서 ‘착한’이라는 단어 ‘칼로스’는/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나 도덕이 아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를 뜻하는 ‘토브’를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행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행위 즉, 예수님의 의로 행하는 행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착한 행실은 ‘소금의 맛을 내고 빛이 어둠을 드러냄’으로서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제 말씀이 좀 이해가 되시나요? 진리의 말씀은 세상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논리도 다르고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지요. 그러다보니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신 분들에게만 믿음으로 들릴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매 맞고 구덩이에 갇혔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진리는 결코 변질되거나 숨겨지지 않습니다. 비진리가 모방하고 흉내 내어도 세상이 감추려고 아무리 덮어도/ 진리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 그래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그 말씀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길 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분들은 거룩을 세상에서 규정하는 도덕이나 윤리, 선하고 착한 모습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세상기준을 쫓아서 세상으로부터 칭찬받기 위해서 소금과 빛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이미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소금은 그 자체로 맛을 냅니다. 굳이 맛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그 자체로 비치므로 어둠을 드러냅니다. 빛을 비추려고 열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성도들마저도‘우리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밝히게 해 달라’고 잘못된 지식으로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하고 열심을 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이미 빛과 소금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빛과 소금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노력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시면서 우리들은 빛으로 소금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냅시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세상이 자신들과 다름을 발견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결과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이 오고 멸시, 천대가 찾아오더라도/ 성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세상과 구별되는 바로 그 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정체성을 통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근거를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부디 길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께 붙어 있어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솔리데오G 목사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태복음5:13-16)/홍종일목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마태5:13-16)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이들이 모를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이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도 충분히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좌우명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도 항상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해달라고

세상이 썩는 것을 방지하는 소금 같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그렇지만 우리는 과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항상 하고 듣고 있지만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먼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자들이 누구냐 하면 제자들입니다. 그냥 기적이 좋아서 뭔가 얻는게 좋아서 주를 따라 다니는 무리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그대로 좇아 행하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누구나 이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음을 우리 주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산상수훈에서 복있는 사람으로 불리는 이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이런 자들에게 주께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십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깜짝 놀랄 일이 있습니다. 잘보세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다른 말로 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란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이 이제까지 막연히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뭡니까?

‘소금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소금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떻게 하면 소금이 될까를 걱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우리들보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너희는 소금이야, 그러니 변하지마.

소금이 되어라가 아니고 소금이야, 그러니 변하지마.

여러분,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소금이랍니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세상의 썩음을 방지하는 역할을 할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소금이다’는 말을 현재직설법으로 사용했는데요 이것은 이 말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절대 변경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 성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오늘은 소금이었는데 내일을 소금이 안되는게 아니고

어제까지는 소금이었는데 오늘부터는 소금이 안되는게 아니고 영원히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주께서 당부하신 것은 소금의 짠맛을 잃지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음식에 짠맛을 더해서 간을 맞추는 것? 당연히 그렇지요.

그러나 소금의 기능은 보다 더 중요한데에 있습니다. 소금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바로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단순히 맛을 내는 것에서 나아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 물이나 불같이 가장 필수적인 물품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역할을 하는 성도는 이 세상을 존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의인 열이 없어 망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오늘날의 세상 속에서 성도가 사라진다면 이 세상도 역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소금인 것입니다.

소금의 기능에서 두 번째가 썩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의 기능입니다. 고기나 생선을 저장할 때도 당연히 소금에 저리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역시 세상의 썩음을 막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요소 요소에서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성도가 있어야 사회가 유지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소금은 맛을 냅니다. 맛을 내되 소금은 스스로 짜기도 하지만 자신이 녹아서 맛을 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맛을 볼 때에야 만이 ‘아 , 여기에 소금이 들어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바다소금에만 해당하고 암염에는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암염은 마치 돌멩이같습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를 핧아 보면 짠맛이 느껴집니다. 이 암염은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광물처럼 캐내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소금은 단지 썩는 것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치료제의 역할도 합니다. 소금은 세균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썩어진 세상을 회복시키는 역할도 감당하는 것이지요. 편도선염이 있을 때 목을 소금물로 헹구는 일은 바로 소금의 치료제 기능을 잘 나타내주는 실례입니다.

우리네 성도는 바로 이런 소금처럼 이 세상의 썩음을 방지하고 이미 썩어진 세상을 바로 살리고 삶의 활력을 주며 삶의 재미를 주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썩어빠진 세상이 싫다고 스스로를 격리하여 혼자서만 거룩하고자 한다면 이는 성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우리가 하늘의 소금이 아니라 이 땅의 소금이라고 하셨지요.

주님의 준엄한 말씀은 이어집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그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가 아닙니다. 바로 그 뒤에 있는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우리말 성경을 보면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라고 되어있습니다. 당연히 별로 심한 저주는 아니고 그냥 보통의 경고 같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는 그냥 삽입구의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뒤에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에 더 큰 강조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보면 소금이 그 짠맛을 잃어버리면 , 잃어 버리자마자 즉시, 짠맛을 잃어버리면 예외 없이 즉시 밖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되어있습니다.

‘짠맛을 잃어서 어쩔거야? 혹시라도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수도 있을텐데!’ 의 온건한 의미가 아닙니다.

너희가 성도로서 소금으로 살아 가고 있는데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어 버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소금은 사해에서 얻거나 아니면 땅에서 캐어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금은 암염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암염은 보관을 잘못하면 짠맛이 빠져버리고 그러면 그냥 평범한 돌멩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굳게 하기 위해 길바닥에 버려지고 이 쓸모없어진 암염을 사람들은 밟고 다니게 된답니다. 어차피 돌멩이니까 당연하게도 길에 버리워지고 그러면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되고…

우리 성도가

세상의 소금인 성도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세상의 쓰레기가 되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조롱거리가 되며 비난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까지 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게 만드는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성도가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기능하기 위해서 성도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성도기 때문에 세상에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의 삶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성도들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거창하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그런 멋진 존재란 말이 아니라 사람들 눈에 잘 띈단 말입니다.

어둠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죄악을 저질러도 그냥 묻혀 버립니다. 컴컴한 세상에서 시커먼 죄를 저질러도 잘 표시가 안납니다. 어둠에 속한 세상사람들은 죄를 저질러도 별로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범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도 하고

또 너무 많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별로 눈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신문에 수많은 기사가 나온다고 해도 이 땅의 범죄에 대한 기사가 모두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도나 교회나 목사가 범죄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얼씨구나 하면서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도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어두운 , 캄캄한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착각하는 구절인데 자세히 보시면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서 이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결코 너희가 숨겨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드러날 것을 잘 알아서 제대로 행동하라고만 하십니다.

여기서 세상은 단순히 이 세상을 말하지 않고 우주를 말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우주의 별들 사이에 숨어도 결코 숨겨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빛은 어디서나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은 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서 보셔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과연 여기서도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뭐 특별히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알기 쉬운 비유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의 도시는 언덕과 같은 고지대에 건설되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처럼 전등이 없는 밤에 언덕위의 도시에서 밝게 흘러나오는 빛은 멀리서도 잘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표현인 것입니다.

사실 상 우리 믿는 성도들의 삶은 정말 조심스럽습니다. 우리가 다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나쁜 행실은 훨씬 더 비난받기 쉽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착한 행실 역시 우리에게만 칭찬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게 하고 영광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만 대표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대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삶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큽니다.

15절 역시 똑 같은 비유입니다.

역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등경위에 둔답니다.

‘말’이란 곡식을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한말 정도를 되는 됫박을 말합니다. 한되짜리가 아니라 한말짜리, 그러니까 훨씬 클겁니다. 그 말아래 두면 등불을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빛이 가두어 지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등불을 온 집안에 다 비취도록 등경위에 두는 것과 같이 믿는 성도의 행실도 그렇게 온 집에서 다 보이듯이 모든 이들이 다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불을 쉽게 얻지 못하기 때문에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 평소에는 등불을 등경위에 두다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는 등잔을 등경위에서 내려 말 아래 두는 풍습이 있었답니다. 이는 동물들이 등잔을 잘못 건드려 불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랍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자리를 비울 때 불을 보호하고 빛을 차단하는 방법

‘등불을 말아래 두는 방법’을 평소에는 전혀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삶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뭔가 잘못되지 않고서는 우리네 삶이 말아래 들어간 것처럼 감추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빛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세상을 밝혀야 되는 것은 아닌데 우리가 빛이므로 사람들 앞에서 결코 감추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며 평소에 어떤 삶을 사는지가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언덕위의 도시에서 불빛이 흘러나와 먼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마치 등경위에 있는 등불과 마찬가지라서 온 방안에 빛이 비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행동이나 삶을 알아 챌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때 우리의 행동이 착해야 우리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아 이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참 진실되게 사는구나!’라고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가 없다면 남에게 좀 강짜도 부리고

적당히 욕심도 부리고

보는 사람이 없으면 슬쩍 슬쩍 속이기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법이나 규칙을 어기기도 하고 그렇게 살 터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네 삶과 행동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영광스럽게 여기시고 영광을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하는 아들이 돼서는 안되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조롱거리고 만드는 아들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이기 때문에 이 어둔 세상에서 우리네의 행동과 존재자체를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전도가 뭡니까?

본을 보여서 저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바른 삶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시키는 것입니다.

‘아무개가 그렇게 착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던데 알고 보니 예수 믿는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한 것이 될 겁니다. 빛처럼 세상에서 다 알게 되어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의로운 행실로 빛이 된게 아닙니다. 다만 빛되신 아버지의 빛을 반사하여 빛이 된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빛은 하나님이 주신 빛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네 삶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된 우리는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전혀 숨길 수가 없기에 항상 우리는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살아야 합니다. 너무 힘들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보면 하나님의 굉장한 위로와 은혜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숨어서 죄짓고 쾌락을 누리는것보다 훨씬 의미있고 보람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훨씬 큰 보상도 주어집니다.

소금처럼 우리를 녹여서 짠맛을 주고는 우리네 삶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온 세상천지간에 영향력을 가득하게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비취는 빛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미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하십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소금이 되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는 이미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다만 그 짠맛을 잃어버려서 세상의 조롱거리와 길바닥에 버려지는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사람인고로 일순간에 완벽하게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네 삶을 업그레이드하기위한 목표와 범위를 정합시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네 삶을 멋지게 바꾸어 봅시다.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감사한 일을 당하면 감사합니다.

미안한 일을 했으면 미안합니다.

그리고 아는 이들을 만나면 방긋이 웃으면서 인사합시다. 이 세가지만 제대로 지켜도 이 세상이 훨씬 멋있는 세상이 될겁니다.

우리는 빛되신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우주의 빛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존속시키고 삶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소금입니다.

그렇게 사십시다. 그렇게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산증거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키고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도 또한 받게 될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5년 설교 원고 / 2019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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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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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작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이야기 하고, 그 사람에게 칭찬을 전하고, 할 수 있다고 응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감을 가지고 빛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기를 응원합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일상이 바쁜 이유로! 오늘은 여기까지 매우 짧게 씁니다! / 2019. 따스한 가을날에 시북

어떻게 하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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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율법하에서는 소제물로 사용될 고기에 미리 소금을 쳐 놓아야 했다.(레위기 2:13 참조) 소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고기에 소금을 치듯이, 우리도 “세상의 소금”이 되어(제3니파이 12:13) 주님을 위해 세상을 준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그러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세상을 짜게 하리요? 후에는 그 소금이 아무 쓸데가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 아래 밟힐 뿐이니라.”(제3니파이 12:13; 강조체 추가)

세상의 소금: 예수 그리스도와 성약을 맺을 때,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위해 세상을 준비시키겠다고 약속한다.(교리와 성약 34:5~7 참조)

그 맛을 잃으면: 우리는 “세상을 위한 빛”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도록 도와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될 수 있다.(교리와 성약 103:9~10)

아무 쓸데가 없어: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우리는 “어느 때에나 무슨 일에나, [우리가] 있게 될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증인이 [될]” 때 세상의 소금이 된다.(모사이야서 18:9)

2012-07-29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20120729본문 / 마태복음 5:13~16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그리고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성품도 완전하시고, 말씀도 완전하십니다. 계획도 완전하시고, 뜻도 완전하시고, 행하심도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주 완전하신 분입니다.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 되셔서 저와 여러분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후, 제일 먼저 축복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축복하시고, 만물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잘 되기를 원하시고, 복 받기를 원하시고, 복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복 있는 사람,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여덟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장 3절 이하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10).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억울하게 욕먹고,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때, 고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마 5:11~12).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복 받을 자들인 줄 믿습니다.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존재, 빛과 같은 존재로,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에 대해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고, 빛의 역할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이 더럽고 타락했기 때문에 더러운 세상에 살기 싫다고 하며 세상 사람들과는 가까이하지 않고, 되도록 교회에서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직장생활을 해보니 죄악이 얼마나 많고, 죄 지을 일이 많이 생기는지, 그래서 직장생활을 그만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러운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취직하여 먹고 살게 된 것은 좋은데, 주일에도 출근하라고 하고, 술을 마시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신앙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직장생활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런데 본문에 보면,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을 떠나거나 세상에서 도피하려고 하지 말고, 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의미입니다.세상을 피하려고 하고, 세상에서 도망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세상이 더럽고, 악하고, 우리를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될 때,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이 세상은 우리로 말미암아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어 소금처럼 살라는 의미입니다.소금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소금이 꼭 필요합니다.예수님 당시 아랍 사막에서는 바위 같은 소금 덩어리 암염을 곳곳에 쌓아놓고, 지나가는 양이나 낙타들이 그것을 먹도록 했다고 합니다. 낙타나 양이 먹는 소금의 양은 적지만, 그것을 먹지 않으면 낙타나 양이 죽기 때문입니다.밀림에서 사는 코끼리도 염분을 꼭 섭취해야 합니다. 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살지 못합니다.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소금이 너무 흔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소금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여기기 쉬운데,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했습니다. 의인 10명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여러분과 같은 성도들이 있는 한, 이 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여러분이 소금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집안이 망하지 않고,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이 사는 부산이 망하지 않고, 이 나라가 복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소금은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우리가 먹는 음식 가운데 소금으로 절인 음식이 많습니다. 왜 음식을 절여서 먹는가 하면, 소금에는 방부제 역할을 하는 성분이 있기 때문에 소금에 절이면 썩지 않습니다. 소금이 부패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지 그곳에서 방부제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성경에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아주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부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점점 더 썩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부패하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7장 9~11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이 세상 만물이 점점 부패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만물보다 더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 부패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은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인간의 마음이 왜 그렇게 부패합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떠날수록, 멀리할수록 인간은 더 타락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인류 역사를 보면, 군사력이 아무리 강하고, 부강한 나라라고 할지라도 부패하기 시작하니 여지없이 망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로마는 전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부패하기 시작하니 마치 썩은 나무가 부서져버리는 것처럼 망하고 말았습니다.썩은 나무가 힘이 없듯이 부패한 나라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지없이 망하고 맙니다.창세기 6장 5~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노아가 살았던 시대에는 죄악이 꽉 차있어서 땅에 더 이상 둘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노아의 여덟 식구 때문에 하나님이 그동안 참고 계셨습니다.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기 때문에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그동안 노아의 여덟 식구 때문에 멸망하지 않고 있었지만, 더 이상 내버려두면 노아의 여덟 식구마저 위험했습니다. 노아의 식구마저 살아남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홍수로 심판하게 되었습니다.살아있는 물고기 여덟 마리와 썩어서 냄새가 나고, 벌레가 꼬이는 생선 백 마리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살아있는 물고기를 왜 택합니까? 살아있는 물고기는 계속 알을 낳아 번식하여 나중에는 엄청나게 많아질 수 있습니다.그러나 썩은 생선은 냄새만 날 뿐,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빨리 치워버려야 합니다.이 세상이 타락할수록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귀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악해질수록 부패할수록 여러분들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성도들은 부패한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영국이 점점 혼란에 빠지고, 부패해졌을 때, 요한 웨슬레와 친구들이 ‘홀리클럽(Holyclub)’ 라는 기도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서너 명이 모여서 항상 기도했습니다.기도하는 자리에 성령이 임하시고, 기도하다가 능력 받고, 기도하다가 마음이 뜨거워져서 공원에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후에 이 사람들은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국을 변화시키고, 미국에까지 가서 전도하고 영향을 끼쳤습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속화되면 안 됩니다. 바다에 떠있는 배가 물속에 들어가면 안 되고, 물 위에 떠가듯이,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 속에 빠져서 세속화되지 않고, 세상에서 방부제 역할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소금은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납니다. 예를 들어 설렁탕에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소금을 적당히 넣어서 먹어야 제 맛이 납니다.어느 임금이 세 명의 딸을 불러놓고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큰 딸은 “금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둘째 딸은 “보석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딸은 “소금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임금은 “흔한 것이 소금인데, 소금이 뭐 그리 귀하냐?”라고 다시 질문하니, 셋째 딸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그 날 저녁, 셋째 딸은 임금의 밥상을 준비하는 요리사에게 모든 음식에 소금을 집어넣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임금이 식사하는데, 진수성찬이 차려졌지만, 맛이 없었습니다.셋째 딸이 임금에게 “아버지, 하찮은 것이지만, 제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여드릴까요?”라고 하며, 음식에 소금을 넣었습니다. 그때서야 임금은 “금이나 보석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소금은 없으면 못 살겠구나.”라고 말했습니다.맛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맛없는 세상을 맛있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면 맛이 나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 때문에 살기 좋은 세상이 되고, 맛있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마가복음 9장 50절에 보면,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소금이 맛을 내는 것처럼, 너희들은 소금 역할을 해서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음식을 맛있게 해주는 소금처럼, 너희들이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서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골로새서 4장 6절에 보면,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우리가 말을 할 때, 은혜로워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말도 은혜롭습니다.우리가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려면첫째,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 녹아져서 사라져버리듯이 저와 여러분이 죽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녹아져야 합니다.혈기가 살아있으면 안 됩니다. 이기심이 살아있으면 안 됩니다. 옛사람이 살아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언제나 나를 세우고, 나를 유익하게 하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희생할 때, 내가 녹아질 때, 맛을 내게 되는 줄 믿습니다.둘째, 소금처럼 변함없어야 합니다.소금은 뜨거운 음식에 들어가든 찬 음식에 들어가든 짠 맛이 변하지 않습니다.소금이 어떤 조건에서도 변치 않는 짠 맛을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도 영원히 변함없기 때문에 ‘소금언약’이 있습니다.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소금이 변치 않는 것처럼, 영원히 변함없는 언약입니다.민수기 18장 19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역대하 13장 5절에 보면, 유다 왕 아비야가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과 전쟁할 때 유다의 40만 군대와 이스라엘의 80만 군대가 맞붙어 싸우려고 할 때, 유다 왕 아비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자손에게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약속하신 소금 언약을 알 것이 아니냐고 하며 전쟁했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2배나 되는 군사와 싸우면서도 승리했습니다.그 날 북이스라엘 군대 중 죽은 사람이 5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항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땅을 찾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소금이 변함없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잘 하려면, 변함없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본문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성도들은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다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게 되고, 조롱받게 됩니다. 짓밟히게 됩니다.세상과 타협하고, 그들과 손잡으면,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들과 타협하여 그들이 하자는 대로 다 하면, 나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버림받게 됩니다.그러나 욕을 먹으면서도 그들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 존경받게 됩니다. 오히려 빛이 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세상에 나아가서 타협하지 말고, 소금의 역할을 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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