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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 땅에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 밖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피 비린내와 짙게 깔린 어둠은 삼킬 듯한 긴장으로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때, 부활의 기쁨은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듯이 새로운 모습으로 그 자태를 드러내었습니다. 막 태어난 갓난아이의 요람과 같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고, 세상을 덮고도 남을 밝은 빛이 초대교회 안에 충만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분이 “그리스도”라는 담대하고도 뜨거운 함성은 죽음도 불사하였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는 말씀과 같이 스데반은 지극히 작은 한 알의 밀이었고, 그의 순교의 피는 교회시대의 첫 번째 씨앗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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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 집사의 순교 설교 가운데 나타난 네 가지 실수 – 기독일보

사도행전의 주요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이다. 스데반은 사도도 아니요 집사인데, 공회에서 긴 설교를 했으며, 그의 설교는 도중에 중단되었고 곧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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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1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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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54-60 / 스데반의 순교 – 네이버 블로그

성령으로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성스러운 모습과 악의에 찬 유대인의 광적인 모습이 빛과 어둠처럼 대조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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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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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최초의 순교, 스데반(행 7:54~60) – KMC뉴스

베드로의 복음증거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룩되고 갑자기 부흥되므로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으므로. 교회에서 펼치는 구제사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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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mcnews.kr

Date Published: 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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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신앙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2015년 가을 사도행전 제 6 강 스데반의 순교신앙 말씀: 사도행전 6:8 – 7:60 요절 : 사도행전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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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angmoolee.tistory.com

Date Published: 5/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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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 3가지 – 기독일보

미 기독교 미디어 사이트 ‘크로스워크(Crosswalk)’의 ‘베키 할링(Becky Harling)’이 사도행전에 돌팔매질을 당해 순교한 집사 스데반의 죽음으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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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9/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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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예배강설 – 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

스데반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늘을 웅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고, 순교를 앞두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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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formch.org

Date Published: 2/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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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0 / 행 7:54-60 / 스데반의 순교 – 새벽공과 – 천성성결교회

스데반의 순교. 행 7:54-60. 첨부파일 20200610.hwp.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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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0/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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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 – 지식인이야기 – 티스토리

스데반의 순교. 변도톨 2020. 8. 4. 06:13. [새벽설교 본문] 사도행전 7장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When they heard th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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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namry.tistory.com

Date Published: 4/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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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스데반 의 순교

  • Author: 성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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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6.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8WGvKTDRYv8

스데반 집사의 순교 설교 가운데 나타난 네 가지 실수

<'확대경으로 본 바이블' 연재를 통해 성경 속 숫자에 나타난 의미를 성경 자체로 깊이 있게 풀어내 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전달하고 있는 김근태 목사의 두번 째 시리즈 '현미경으로 본 바이블(Microscopic Bible)'을 시작한다. 성경 속 이야기를 성경 안에서 마치 '현미경'으로 본 것처럼 한 구절 한 구절 자세히 설명하면서 탁월한 해석을 더하고 있는 '현미경으로 본 바이블' 시리즈는 특별히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도 함께 개제돼 신앙의 성장을 돕고 있다. 또한 영어버전도 준비돼 있어 개인적으로 요청하는 이들에게 매주 전달되고 있다. 자세한 문의나 질문은 김근태 목사의 이메일 [email protected]로 연락하면 된다.>

본문: 사도행전 7:54-60, 제목: 스데반의 순교 설교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생명을 내걸고 복음을 전파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실로 영혼 구원은 인간의 말과 힘과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이기에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한다. 또한 주의 종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믿음의 확신과 담대함으로 설교할 때 불신자들이 믿고 구원에 이르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설교행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설교는 10개가 있다. 베드로의 설교는 2,3,10장에 3번 기록되어 있고, 7장에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 바울의 설교는 13,17,20,22,24,26장에 6번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주요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이다. 스데반은 사도도 아니요 집사인데, 공회에서 긴 설교를 했으며, 그의 설교는 도중에 중단되었고 곧바로 순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데반은 초대교회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 비교하면 차이점을 갖고 있다.

스데반이 왜 이런 최후의 설교를 하게 되었을까?

1. 스데반이 집사가 되고 예루살렘 공회에 서기까지 (행6장)

초대교회는 성화된 무리들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였다. 그런데 초대 교회가 부흥해서 많은 성도를 가진 큰 공동체를 이루게 되니, 그곳에도 문제가 일어난다. 교회에서 구제를 행하는데 히브리파 과부들만 구제의 대상이 되고, 이방에서 태어난 헬라파 유대인(외국에서 태어난) 과부들에게는 구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이 들고 일어나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하기로 하고, 헬라파 유대인 중에 집사 7명을 택하여 저들로 구제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 7명의 집사들 중의 대표가 스데반 집사였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지혜와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니 많은 역사가 일어났다. 이에 반발한 자들이 당을 지어 예루살렘 공회에 스데반을 끌고 가서 ‘그가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며 재판을 받게 하였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 초조함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공회에 앉은 자들의 입으로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고 성경은 말해준다.

2.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실수한 것들 (7:2, 4, 14, 15-16절)

공회에서 대제사장이 스데반을 정죄한 내용을 말하며 “이것이 사실이냐”(1절)고 물었다. 스대반은 “여러분 부형들이여!”라고 말하며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설교를 자주 많이 하는 분들은 나름대로 그 내용에서 실수를 하게 됨을 자신은 알게 되는데, 성경을 계속 공부하다 보면 전에 알고 설교했던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스데반도 외국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그 당시에는 성경을 쉽게 구할 수도 없었기에 전해지는 말로만 알고 있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스데반은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저들은 다 성경에 능통한 자들로 구약의 사건들을 정확히 알고 있던 자들이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에서 그의 잘못을 알고 있었거나 말에 실수한 내용이 몇가지 발견된다.

첫째는 1-2절에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 말했다. 그러나 실제, 메소보다미아를 떠날 때는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가족을 데리고 떠났다(창11:32)고 성경은 말해준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머물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 때에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고 지시하셨다(창12:1).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다시 떠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창12:5)고 성경은 말한다.

둘째로 4절에 아브라함이 그 아비 데라가 죽었을 때 하란을 떠났다고 설교했지만, 아브라함은 데라가 70세에 출생했으며(창11:26), 그가 75세( 창12:4) 때 하란을 떠났으니(창12:4), 아브라함은 그의 부친이 145세에 하란을 떠났고,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창11:31)까지 살았다. 즉, 아브라함은 그 부친이 죽었을 때 가나안으로 떠난 것이 아니요 살아 있을 때 떠났다.

셋째로 14절에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75 사람을 청하였더니’라고 설교했지만 구약은 야곱의 가족 70명(창46:27) 이라고 말해준다.

넷째로 15-16절에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구약은 아브라함 부부, 이삭의 부부, 야곱의 부부가 모두 유다 지역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 묻혔으며, 그 굴은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자기들의 장지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창49:29-33, 50:13-14). 그리고 세겜에 있는 땅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서 금 일백으로 산 땅이었다(수24:32). 그 땅에는 요셉만 묻히게 되었다.

스데반 집사 설교의 이 실수는 공회원들을 격노케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위대한 지도자는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는데,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즉, 요셉 지파의 후손이었으며 갈렙은 유다지파의 후손이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유다의 후손인 갈렙은 요셉의 후손인 여호수아에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부탁하였다. 왜냐면 그 산지에 헤브론이 있었으며 그곳에 자기들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 굴이 있었기 때문이다(수14:12-13). 그런데 여호수아는그의 선조인 요셉의 시신을 세겜(사마리아)에 묻었던 것이다.

그 후 이스라엘은 두 왕조로 갈려졌고 북왕조는 세겜(사마리아)을 중심으로한 나라가 되고, 남왕조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두 나라가 대립하였다. 그 후 북왕조는 앗수르에 망하면서, 그 땅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족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예수님 당시에는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북왕조)들을 업신여기며 상종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에 유대의 교권자들 역시 사마리아인이나 헬라파 유대인들을 아주 업신여겼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를 전파하니 저들의 눈에 가시인 것도 모자라. 그의 설교에서 자기들의 조상들 모두가 세겜(사마리아)에 묻혔다고 하니 공회원들은 설상가상으로 더욱 격분하게 되었다.

3. 스데반 집사의 순교 설교 (37, 48절)

스데반 집사의 서론 부분에 그의 실수가 보였지만 그의 설교의 핵심으로 37절에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37절)고 본론이 시작한다. 실로 그 뜻은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가 “나(모세)와 같은 선지자 한 분을 보내시리라”(참:신18:15-20)고 말한 그 사람이 곧 예수라고 스데반은 증거 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라는 증거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성전에 관하여는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48절)라고 설교하면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으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도다”(51-53절)라고 스데반은 공회원을 향해 비수의 강한 메시지를 선포했다. 이 말을 들었던 모든 자들이 분노하여 이를 갈았으며 그들 중에 사울(바울, 헬라파 유대인)도 있었다. 사울 역시 당대에 구약에 능통했던 자였다.

4. 스데반의 영광의 순교 (54-60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며 영안이 열려 천성의 보좌를 보았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말하니 저들이 귀를 막고 일심으로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로 나가 저들의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을 들어 그를 치니 스데반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서”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며 또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며 최초의 순교자로 영광의 길을 가게 되었다. 성경은 그가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자니라”(60절)고 말해준다.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두 마디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 중에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예수께서 십가가상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주여,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운명하였다.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성경에 능통했던 사울(바울)이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에 잘못 말한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해서 스데반이 알아듣도록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 내용이 “이 죄” 즉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순교의 길을 가는 그의 순진한 회개가 사울의 심령에 박히게 되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내 모든 실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아름답고 영화롭게 하시는 예수

스데반 집사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실수는 오히려 영광의 최초의 순교자의 면류관을 얻게 되었고 복음의 최대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이루었다. 우리도 말에나 행동에 실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를 증거하며 예수를 높이는 삶을 살아간다면 분명 우리 모두는 면류관을 얻게 되는 영광의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성경공부

1. 스데반은 누구이며 어떻게 집사가 되었고 그가 왜 공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는가?

2. 스데반 집사의 설교 중에 실수한 내용이 무엇인가?

3. 스데반 집사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4.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가?

말씀 묵상과 나눔

1. 내가 말과 행동에서 실수 한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그 결과가 좋게 나타난 것이 있었는가 말해보라.

2. 내가 복음을 전하며 전도할 때 큰 반발이나 공격을 당한 적이 있는가 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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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54-60 /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의 순교

사도행전 7:54-60

지난번까지 스데반의 설교를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스데반의 설교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과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수하고 논리 정연한 변증설교는 오히려 유대인의 마음을 격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미움에 불타서 스데반의 변증을 진지하게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성스러운 모습과 악의에 찬 유대인의 광적인 모습이 빛과 어둠처럼 대조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순교의 장면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설교를 듣다가 마음에 찔렸습니다.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을 보면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그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죄인이 찔림을 받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못된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 모범적인 사례가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외쳤을 때입니다.

모인 군중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 “ 우리가 어찌할꼬 ”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 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무려 3천명이나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행 2:42).

그러나 스데반을 상대하고 있는 자들은 마음이 찔렸을 때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사나운 짐승이 강한 적을 만나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저희들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스데반을 향하여 증오의 불길이 치솟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스데반이 말을 채 끝맺기 전에 종결시킨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스데반의 설교는 더 길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 때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양심의 반응을 자꾸 무시하다보면 점점 양심의 감각은 무디어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강퍅해져서 잘못인 줄 뻔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씨도 중요하지만 밭도 중요합니다. 밭이 좋고 안 좋고는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단단한 길가 밭, 돌밭, 가시덤불 밭이 되지 않도록 회개를 통해 자주 갈아엎어야 합니다.

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들이 이를 갈 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환상을 보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면 스데반이 영광스런 하늘 보좌의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순교를 앞두고 그를 격려하기 위해서 영광스러운 환상을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보면 일반적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마 26:64, 눅 22:69, 엡 1:20, 골 3:1, 히 1:3).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본 환상에서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서 계셨을까요? 많은 주석가들이 이에 대해 ‘순교자를 격려하고 환영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을 환영하는 주님을 바라본 스데반에게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교자를 위하여 하늘 문을 여십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영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순교가 두렵지만 순교자들의 보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환상을 보여주시며 위로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견딜 수 있었고, 고린도후서 4장 17-18절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잠시 받은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즐거움도 잠깐이고, 괴로움도 잠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주목하며 낙망하지 말고 더욱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7-58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유대인들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거의 광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저희들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스데반의 말을 막기 위해 큰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둘째로는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셋째로는 다른 사람들을 충동하기 위함이었고 넷째로는 자기 마음의 고요한 음성을 듣기 겁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성난 짐승이 먹이를 내치듯이 스데반을 땅에 매치고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인을 사형시킬 때 성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성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돌로 치는 것은 신성모독에 대해 율법이 규정한 처벌이었습니다(레 24:16). 처벌 방법은 돌이 많은 낭떠러지기에 죄수를 세우고 증인이 먼저 그의 심장을 향해 돌을 던지고 다음에 둘째 증인, 그 다음에는 군중들이 돌을 던져 돌무더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증인들은 자신들의 옷을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벗어 두었습니다. 시울이라 하는 청년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도 바울입니다. 드디어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될 사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으로 그의 조상 사울 왕의 이름을 딴 것이고,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사울은 로마 통치하에서 당시 국제도시였던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예루살렘에서 당시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하여 이 때 벌써 지도층의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청년이라 하면 25-40세를 가리키는데, 아마 이 때 사울의 나이는 30세 전후였습니다.

당시 유대인 공회는 사형을 언도할 수 있었으나 그 집행은 로마 총독의 권한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공회에서 율법에 따라 재판하지도 않았고, 로마의 인준도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정식 처형이 아니라 군중 폭력에 해당했습니다.

이 때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자들의 옷을 보관하는 일을 맡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이 비천한 일에 깊이 연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울이 그들의 불법적 행위를 변호해 줄 만한 인물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끓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는 여기서 스데반이 순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스데반은 숨기기 전 두 가지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하셨던 두 마디의 기도와 흡사했습니다.

스데반이 마지막에 드린 기도 중 하나는 “ 내 영혼을 받으소서 ” 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스데반은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 내 영혼을 받으소서 ” 는 자신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확고부동한 신앙이 넘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할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 (마 10:28)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육신은 죽일 수 있었으나 영은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주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스데반이 마지막에 드린 또 하나의 기도는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원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여기에는 성스러운 사랑이 넘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중에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마 5:44)고 하신 말씀대로 원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원수를 향한 스데반의 기도는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고, 후일에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대개 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하였으나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는 기도는 간곡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실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 “ 자니라 ”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자는 것으로 언급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사람들에게 “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막 5:40)고 하였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그에게 “ 우리 친구가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요 11:11)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이 잠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잠을 자고 나면 깨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잠으로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죽음 뒤에 부활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일생동안의 슬픔과 수고로부터의 휴식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전제하므로 그것은 파멸이 아니라 오히려 영생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살전 4:13)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마 10:29)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 집사의 죽음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의 제물이 초대교회에 필요함을 아시고 그의 순교를 허락하셨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스데반의 순교는 청년 사울이 나중에 회심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많은 박해가 있었을 때 성도들과 순교자들에게 모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잘 사는 웰빙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웰다잉은 더 중요합니다.

부귀영화 공명을 누리지 못했을지라도 훌륭한 죽음으로 마지막을 장식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기리고 오래 오래 기억합니다.

스데반이 위대한 것은 그가 살았을 때 했던 일보다는 그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위대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영혼을 주 예수께 맡기고, 용서와 사랑으로 인생을 마무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생각하게 되는데 스데반은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인생을 마감하는 몇 가지 유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룟 유다입니다. 처음에 잘 시작하였으나 마지막에 인생을 망쳐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입니다. 처음에 잘못 시작하였으나 인생을 잘 마무리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스데반입니다. 시작도 잘하였고 마무리도 잘 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스데반 집사와 같이 멋있게 살다가 멋있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review.nhn?bid=11055484

47. 최초의 순교, 스데반(행 7:54~60)

베드로의 복음증거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룩되고 갑자기 부흥되므로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으므로. 교회에서 펼치는 구제사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 7명의 집사를 선택할 때 그 중의 한 명이 스데반이었다. 스데반은 이방 태생의 헬라파 유대인으로 가정 배경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없으나 평판 높은 상류 계급 출신으로 집사의 조건을 갖춘 좋은 일꾼이었다.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에 의해 복음이 급속하게 확산되자, 모세의 율법과 전통을 생명처럼 여기던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이 점점 심해지고 있던 때,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스데반이 회개를 촉구하며 말씀을 증거 하므로 이에 분노한 자제심을 잃은 군중들이 흥분하여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잔인하게 죽이고 만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면서 영광스런 기독교 역사에 첫 순교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첫째: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 7:54~60)

1) 믿음과 성령의 충만(행 6:5~8)

믿음(pivsti”)은 설득하다……와 친분을 가지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떤 것의 진실성에 대한 기대와 확신을 뜻한다.

이 세상은 어쩌면 믿음의 관계로 가득 차 있다. 실상 믿음이 없으면 잠시라도 살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믿음의 관계가 점점 형편없게 되어가고 있다. 부부지간에도 신뢰감이 희박해져 가고 있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한다. 검찰이 기업 수뇌들을 줄줄이 불러들여도 성역 없는 수사를 하고 있다고는 믿지 않고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확신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믿음이 사용되고 있다. 믿음으로 구원도 받고 믿음으로 영생도 받는다. 본문의 스데반은 믿음이 강한 자로 인정되어 집사 직분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자였다. 성령은 공기의 움직임, 비물질적 실체, 또는 영혼을 뜻하는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집사였다. 성령은(pneu’ma) 육체와 구분된 것으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를 결정짓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영혼을 가리킨다,

오늘 본문의 스데반은 위의 모든 것을 갖춤으로 7집사 중에서도 특출했고, 믿음과 성령의 충만으로 기사와 표적까지 행하였다. 성령의 충만한 능력까지 받은 스데반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서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신유의 역사도 행사하였다. 지혜와 믿음의 충만함이 인격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라면 권능은 성령의 은사적인 면에서 나타난다. 과연 스데반은 놀라운 평신도 사역자요 주의 종으로도 손색없는 귀한 종이었다.

2) 지혜와 성령으로 증거(행 6:9~10)

스데반이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때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증거하다 겪었던 것 같이, 스데반도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과 변론을 하게 되었는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예수 당시에도 대적자들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웠는데 스데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현상은 악이 득세하는 이 세상에서 주의 종들이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겪는 핍박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면서 압도당해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믿었듯이, 스데반 집사 또한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복음 증거로 인하여 대적자들이 변론을 통해서 이길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주의 종을 통해 증거 되어지는 복음은 반박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증거 되었다.

둘째: 믿음에 의한 최초의 순교자

1) 하늘의 소망을 간직함(행 7:54~56)

예루살렘을 중심 한 초대교회의 부흥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열도를 더해갔고 많은 교민들이 모이곤 했다. 이때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의 활동은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사방에서 모인 사람들과 회당에서 변론할 때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스데반을 공회로 잡아오게 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6:11~13)하는 말을 했다고 거짓 증인을 세워 증거하고 곤경에 처하게 했는데도,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6:15)같이 빛났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대적자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찔린 마음으로 살기등등하여 이를 갈 때에도 스데반은 죽음을 앞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늘에 계신 주를 바라보면서 감격과 기쁨을 표현했다(7:54).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빛나는 얼굴빛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생명과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생명력 넘치는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에게는 어떤 험악한 상황이 전개되어도 전혀 장애를 받지 않고 목숨을 걸고 담대해짐을 보게 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어찌할 수 없는 절대 평안과 신령한 기쁨을 허락해 주신다.

2) 최초의 순교자(행 7:59~60)

스데반은 이를 갈고 있는 유대인을 향해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7:56)고 말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큰 소리 지르며 귀를 막고 성 밖으로 스데반을 끌어내어 돌로 쳤다. 이 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하며 순교 당하였다. 스데반의 이러한 기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아버지께 드린 기도와 같은 내용이다. 만약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맞이할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십자가상의 칠언은 그를 따르는 주의 종들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이에 대한 양편의 강도들의 반응에서도 인간들의 반응을 시사해 준다.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모습이었고. 다른 편의 강도는 믿음으로 자기의 생명을 위탁하므로 예수의 십자가를 중앙에 두고 복음과 저주로 양분되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모든 인간이 누구나 최후에 경험해야 하고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판가름하는 판결을 받게 된다.

어쨌든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최대의 순교자로서 값진 죽음을 당하였고 그가 순교할 때 그 자리의 책임자는 후에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선교사명을 훌륭히 수행한 사울이라는 자였다. 아마도 사울이 기독교인들에게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대장 노릇을 했어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천사의 얼굴 모습으로 죽이는 자들의 죄의 용서를 비는 장면에서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 후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결박하기 위해 가는 도상에서의 경험에서 주의 종으로 탈바꿈된 과정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된다.

스데반의 순교의 피는 복음의 열매가 맺혀지는 밑거름이 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역사, 아니 우리나라 선교역사를 보아도 신앙의 선조들의 생명을 내건 복음의 열정과 순교들이 오늘의 부흥을 가져온 밑거름이 되었다.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된 순교자들의 생명을 건 진정한 헌신은 복음이 만방에 증거되어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현대는 스데반이 살던 시대와 같은 핍박의 시대는 아니지만 악의 도전은 시험과 유혹으로 충만해 있으므로 스데반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헌신하며 충성하는 주의 종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너무 안일에 빠지고 어려움을 극복할 능력을 상실한 종의 모습을 자책해야 한다. 목사나 평신도도 마찬가진데 스데반과 같은 복음의 열정으로 믿음, 성령 충만, 지혜로운 말씀으로 무장하여 오늘을 극복하는 종의 자세를 회복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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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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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 사도행전 제 6 강

스데반의 순교신앙

말씀: 사도행전 6:8 – 7:60

요절 : 사도행전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좀 무겁습니다. 제목에 ‘순교신앙’이라는 말을 붙어 있어서,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순교를 준비해야하는가 하는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한창 은혜 받을 때는 ‘주님, 제가 순교하게 해주십시오’하고 일사 각오하며 열정적인 기도를 해보셨을 것입니다. 김모세 목자님도 한때 상당한 기간 동안 제가 순교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겁 많은 자인가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순교를 위해 기도한 것은 후회하시고 ‘주님, 제가 제 자신을 잘 알고 겸손히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가게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기도로 바꾸었다고 하셨습니다. 적지 않은 목자님들이 다 이런 과정을 밟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큰 소리치기 보다는 오늘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이 은혜를 믿음으로 감당하며 사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스데반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잘 배우고 이제는 감사하므로 오직 주님 한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종들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6장 1-7절을 보면 교회 안에 제자들이 많아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문제도 많아집니다. 이런 만큼 사도들의 헨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렸고 또 ‘카톡’, ‘카톡’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교회 안에 이런저런 일을 좇아다니고 접대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말씀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이라고 해서 입만 열면 명설교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원고를 준비하고 리허설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이것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믿음과 성령에 충만한 사람 7명을 선출해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안수하여 구제 등, 교회 안에 많은 일들을 맡겼습니다. 이로서 교회는 말씀 중심의 역사를 잘 이루어갈 수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역할 분담을 하고 사도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전할 때 이런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세워진 일곱 사람 중에 스데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8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뿐 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성경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스데반은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에서 온 사람들과 회당에서 변론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정통 유대인들로서 성경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말로 해도 스데반의 말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고 또 올바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주임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요 교회의 주인이요 양들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참으로 죄악됩니다. 인본주의 사상과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주의 말씀과 은혜와 권능에 충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스데반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많이 세워주셔서 구원역사에 귀하게 사용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능히 당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거짓 증거를 하며 스데반을 공회에 고소했습니다.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면서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율법의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스데반의 말을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곡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렇게 고소했지만 스데반은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은 고소되고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때도 성령에 충만하여 그 얼굴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심령에 은혜와 믿음, 담대함이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충만한 사람은 어떤 위협이나 환경 가운데서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어려울 때 더욱 빛이 납니다.

이제 7장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하며 물었습니다. 이에 스데반은 그들 앞에서 아주 긴 변증적 강론을 합니다. 그의 이 강론은 복음에 대한 역사적 탐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의 강론 내용이 어떠합니까?

첫째, 그는 하나님은 그들 구원을 은혜로 시작하셨지만 이스라엘 조상들은 감사하지 않고 늘 하나님을 거스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에서 시작해 그와의 언약과 축복을 말하며 이어 나타난 이스라엘 조상들의 죄악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친히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이때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우상들과 구별되어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참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을 좇아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고 있는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당대에는 아직 자식도 없고 발붙일 만큼의 땅도 주지 않으셨지만 그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 되어 그 땅에서 종이 되어 400년 동안 괴롭게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조상들은 종 삼고 괴롭혔던 나라를 심판하시어 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고 그가 후에 이삭을 낳았을 때 8일만에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할례는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그 약속을 살에 인친 것입니다. 그 후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언약의 할례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이 땅에 거하게 된 것이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된 것은 모세의 율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위대한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은 이렇게 시작부터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은 율법을 지킨다느니 성전에서 제사들 드린다느니 자기 의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이러게 그들의 시작에 무엇이 있었는가, 곧 부르심과 일방적인 은혜와 언약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음을 말했습니다.

실제 자기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자랑하는 그들의 조상들은 이런 부르심 이후 어떠했습니까? 과연 훌륭했습니까? 스데반은 계속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는데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죽이려고 했는데 르우벤이 막아서 그나마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팔아버리면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아버지 야곱의 고통이야 어떻튼 미운 놈 일단 없애버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조상들은 이렇게 그 근본이 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의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부어주셔서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애굽과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다 굶어죽게 되었을 때 요셉이 그들을 불러 다 먹여 살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그들의 죄악을 다 용서하고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애굽에 들어와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조상들은 이런 악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요셉을 애굽의 총리요 그들의 구원자로 삼으시고 한량없는 긍휼로 그 조상들의 생명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스데반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의 죄악과 함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아무 죄 없는 에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사 영화롭게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은 자랑스럽습니까? 아닙니다. 그 열두 지파 조상은 악했습니다. 그런데 다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17-43절까지의 이야기로서 여기서 스데반은 모세를 키우시고 자기 조상들을 출애굽시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애굽으로 옮겨간 이스라엘 백승들은 크게 번성하여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이 그의 조상들을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노예로 부려먹었습니다. 그리고 사내아이들은 태어나는대로 다 나일강에 던져버리게 했습니다. 이런 때에 태어난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여서 부모들이 석달 동안 집에서 몰래 기르다가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을 때 나일강에 띄워 보냈는데 애굽 공주가 이 아기를 보고 건져내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궁중에서 지도자로서 인간 기초를 쌓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가 나이 40이 되어 그 형제 이스라엘을 돌보고자 했습니다. 하루는 백성 중 한 사람이 애굽 사람들에게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들을 쳐죽여 원수 갚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손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이튿날에서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이들을 화해시키려는데 이때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리면서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어제 애굽 사람 한명 죽이더니 나도 죽이려느냐’ 하면서 배척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큰 충격을 받고 도주하여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다 버리고 동족을 돕고자 했는데 그들은 이런 모세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이것도 그들 조상의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광야에서 키우시고 그 백성의 인도자로 예비하셔서 모세를 불러 그를 통해 조상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이때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 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나님은 애굽의 이스라엘 조상들은 크게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상들이 배척한 모세를 다시 세워 그들을 인도하여 내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열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고 광야에서 40년간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리고 반석을 터뜨려 물을 내면서 그 백성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도 요셉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상들이 죄 가운데서 배척했던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가 어떠했습니까? 출애굽 후 에 이때 조상들은 마음을 완악하고 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춤추며 기뻐하던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대로 된 희생과 재물을 드리기는 커녕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들 등 온갖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아주 죄악되게 하나님을 대적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이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바벨론에게 망하고 그곳으로 다들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하셨겠습니까! 스데반의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렇게 목이 곧고 불순종하며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원수로 갚고 제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다 하고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셨다하며 우리는 이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다며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 속에서 위대한 업적들만 기억하지 그 조상들이 얼마나 죄악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말해 지우고 싶은 흑역사는 감추고 자랑스런 역사, 위대한 역사만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교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상들의 죄를 안돌아보니 자기들이 얼마나 죄악된지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의 이야기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시지만 옛날 조상이나 지금의 이스라엘이나 그 마음이 완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역사 인식이 어떠합니까? 그가 본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어떠합니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의 은혜, 그리고 죄악된 배반의 역사를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된 자기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고 감당하시고 구원하시고 축복해주셨는가를 기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런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정말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배우고 깨달은 것입니다.

얼마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방문해 방명록에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말을 썼다고 합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각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많은 특권을 자랑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서 시작한 것인지 음수사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죄악된 자기들을 발견하고 자기들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질 못해 감사는 없고 자기 주장이나 하고 완악하게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결국에 그리스도를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구원과 영생의 축복이 어디서 왔는가를 잘 기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이 참 죄악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은혜와 축복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죄악을 반면 교사삼고 음수사원하면서 겸손히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고 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 그는 참 성전되신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44-50절까지입니다. 본래 성전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양식을 따라 만든 증거의 장막이었습니다. 이 장막은 텐트입니다. 이 증거의 장막은 하늘에 있는 참된 장막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증거의 장막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가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존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때에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성전은 아름답고 웅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이 지은 이런 곳을 집으로 삼으시겠습니까? 스데반은 이것을 성경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 지적했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하늘을 보좌 삼고 땅을 발등상으로 여기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성전의 한계를 알 수 있고 그것에 매이기보다 성전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성전을 절대시 하여 어찌하든지 성전을 붙들고 여기에 못매달고 자랑하고 자긍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들의 고의적인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스데반이 말한 조상들의 그 완악한 죄악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의 결론으로 스데반은 그들에 담대하게 말합니다. 51-53절을 보십시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의 이러한 말은 성전을 붙들고 있는 대제사장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이제 성전 건물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선지자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그를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오시리라한 의인’ 곧 예수님을 잡아 살인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분해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가는 것은 웬만큼 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극도의 분노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분노의 뚜껑이 열렸습니다. 스데반은 이런 가운데서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데반을 영접하시고자 그 보좌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기가 싫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합심하여 달려들어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 그는 이 말을 하고 잤습니다. 그의 기도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기도와 같습니다. 그가 어떻게 무서운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품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갔습니다.

스데반은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는 그것으로 무의미하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의 교회는 그의 순교를 늘 기억하며 그의 뜨거운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순교에 이어진 대대적인 교회 핍박으로 인해 교회는 세계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이로서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가는 세계선교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가 개척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11:19). 뿐만 아니라 박해자 사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그가 후에 바울로 거듭나는데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순교를 받으시고 복음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스데반의 순교 신앙을 마음으로 잘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토마스 목사는 조선 땅을 밟자마자 대동강변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끝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시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 피신할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양떼들을 지키려 하시다가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다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흘려 목숨을 바치는 순교를 가리켜 ‘적색 순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순교 신앙이란 꼭 피를 흘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란이 있어도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신앙이 순교 신앙입니다. 이렇게 평소에 순교자적 삶의 자세로 사는 신앙을 가리켜 ‘백색 순교’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고 해서 돌에 맞을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감옥에 갇히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표를 얻기 위해서 앞다투어 교회에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안정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느슨해져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지금은 스데반 시대와 같이 비난과 핍박의 돌맹이가 아니라 안일과 쾌락주의, 물질주의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대적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신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안락을 추구하고 편함을 추구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교적 결단과 순교적 자세가 아니면 이러한 시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백색순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나를 끊어버리고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 때, 그 삶이 바로 순교의 삶입니다.

사도바울도 친히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이런 백색순교신앙이 있었을 때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드리게 한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느닷없이 뜬금없이 순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백색순교자의 삶을 산 사람만이 적색순교자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우리에게 먼 단어가 아닙니다. 순교는 우리가 사는 문화이며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음란하고 죄많은 세상에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며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에 깊은 감사가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알고 이런 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 때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 내 인생에 대한 역사 해석을 스데반처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제대로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은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을 알고 자기를 부인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섬겨가면서 참된 순교 신앙을 우리의 삶속에서 조금 조금씩 구현해나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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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

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행7:54-60)

오늘은 지난 주일에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을 마무리하다.”라는 강설을 생각해 보기 전, 경북대학교 김중락 교수님의 글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명백한 한국어: 정말로 걱정입니다>

목사는 사제(제사장)가 아니라 교사(선생)이다.

목사는 자신이 사제가 아님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목사는 모든 사람이 사제임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목사는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사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스스로 죄 고백을 할 수 있는 사제임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목사는 먼저 배운 성도, 즉 선생이다.

그러니 성도는 목사를 사제로서가 아니라 선생으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500년이 지났는데 아직 ‘만인사제주의’에 이견을 제시하는 성직주의자들이 있다니 한국교회 정말로 걱정입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뿌리에 도끼를 들이대는 이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김중락 교수님의 글을 보면서 한국교회에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현실의 목회를 보면 목회자의 영향력 즉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모든 일에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스데반은 사도들과 성도의 교제를 하면서 교회의 일꾼에 충실했습니다. 사도가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주의 일꾼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목사는 종교개혁을 하기전 사제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목사사제주의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를 잘 읽어보십시오. 목사를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장로교가 신앙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를 보십시오. 그리고 개혁교회가 공인한 신앙고백서를 보아도 목사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벧전2:9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목사이든, 집사이든, 신자이든 성도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교에서는 “만인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만인제사장은 구원론에서 평등한 구원의 초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도 그들이 탁월하거나 거룩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성도도 탁월하거나 거룩해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평등한 구원의 초대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처럼 충실하게 일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특별한 행위와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거룩하게 하심으로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생각하면서 거룩한 공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강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한 강설을 통해 교회가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팡이교회에 있어서 예배당이 중요하듯이 출애굽을 한 유대인들에게 “성막”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영광스러운 역사를 지닌 의미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만들었고, 그곳 “두 돌판”에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십계명) 보관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한 후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다윗은 하나님께 성전을 짓도록 요구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성전을 짓도록 허락을 받지만 완전한 건축은 솔로몬이 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성전에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고 전능하신 분이신데 성전이 건축됨으로 그 안에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성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모형일 뿐입니다. 성전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당신님께서는 요2:19절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만 알아도 성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이든 성전이든 그 안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처럼 집이 필요한 피조물이 아니라 신 그자체입니다. 스데반은 공회와 거짓 증인 자들이 알 수 있도록 이사야가 말한 예언을 가지고 와 인용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라고 함으로 성막도 성전도 영원히 지속되도록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말입니다.

성막과 성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너희와 언제나 함께 하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순종과 신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요 성전입니다.(고전3:16) 우리도 스데반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에 대한 역사적인 것을 말한 스데반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강한 책망을 합니다. 이런 용기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회 앞에서 너희들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라는 것입니다. 현대판으로 말하면 판사와 검사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놀라운 책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랑할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들은 참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순종이 아닌 멸시와 천대 그리고 십자가에 죽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직설적으로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라고 함으로 너희들이 누구인가를 추궁하면서 회개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이 고발한 나는 율법을 준수한 자라는 것으로 긴 강설을 마무리합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너희들은 율법을 주신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나는 믿음으로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스데반의 긴 강설을 4주 동안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우리만 들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과 자유민들도 들었습니다. 스데반의 최후진술을 들었던 그들은 회개하기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오늘은 참된 일꾼이었던 스데반의 최후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분이라면 스데반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순교일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면서 가장 위대한 일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순교를 당할 것을 각오하면서 담대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율법과 성전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이런 스데반을 예수님께서도 신실한 종으로 심판대 앞에서 변호하여 주시고 시인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스데반과 같은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님께서 변호하여 주시고, 시인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스데반으로부터 긴 강설을 들은 자들은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을 했습니까? 스데반으로부터 강한 책망을 들은 자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를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함으로 스데반이 말한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회개를 강조하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참 구주로 믿음으로 고백하도록 전하는 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소식을 들으면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공회에 모였던 자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더욱 완악하여 짐으로 그들의 반응은 ‘이를 갈면서’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던 공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때에 스데반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55절을 보시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하나님의 영광과 당신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마지막 순교를 아시기 때문에 그가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누가는 공회에 모인 자들과 스데반을 대조함으로 그들의 완악함과 성령 충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한 것이라 믿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완악한 자들이었지만 스데반에게 믿음을 주시고 일꾼이 되게 한 것을 생각하면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 아실 줄 믿습니다. 지팡이교회가 가는 길을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안위하여 주는 것처럼 스데반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공회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스데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편에 서신 것을 스데반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고백하고 시인함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의 법정에서는 정죄를 당하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예수님께서 변호하시고 시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훗날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공회에 모인 자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형통한 것 같지만 스데반은 성공과 세상적인 형통을 위한 믿음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성공한 사람으로 주님과 동행을 하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대함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공회 앞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강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회개하기 보다그들은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히 스데반은 성령 충만함으로 오히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56절을 보시면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늘을 웅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고, 순교를 앞두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이 지금 어떠한 일을 당할 것을 아시고 너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눅12:8절을 보시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예수께서는 고난 받는 스데반을 하늘의 법정 앞에서 옹호해 주며 또한 순교 당할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와 반대로 악한 자들은 어떠한 모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57절을 보시면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스데반의 증거에 대한 강렬한 저항은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귀를 막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제히 스데반에게 마치 돌격 앞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강설로 들은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 즉 빌라도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공회에서 스데반에 대한 사형 집행은 불법입니다. 공회는 로마법에 따른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정적으로 죽이고자 하는 것을 보면 스데반의 강설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강설이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회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은 것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가 절정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합법적인 절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을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 58절을 보시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어디입니까? 성 밖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레24:14절을 보시면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를 보시면 그들이 머물고 있던 장소에서 진영 밖으로 즉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아가서 죽이라는 구약의 법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마치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가신 거리와 스데반이 공회에서 성 밖으로 이동한 거리를 보면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을 그냥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예수님처럼 학대를 하면서 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끌고 가면서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한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강퍅함으로 분노가 가라앉기 보다는 너를 반드시 죽이리라고 하면서 간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강설을 들으면서 오히려 증오와 적개심으로 끌고 가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성 밖으로 나아와서는 스데반을 돌로 치고 있는 가운데 어떠한 행동을 합니까? 돌로 치는 자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묵시적으로 스데반을 죽이도록 승인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 시민을 이용하는 것은 사악한 자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돌과 무기 등으로 맞으면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됩니까? 자신을 보호하고자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보시면 그것도 돌로 맞고 있는 가운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59절을 보시면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시인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우편에서 자기를 맞이하려고 서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님을 하나님께 부탁한 것처럼 스데반도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죽으시면서 우리를 위해 용서와 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스데반도 사도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희생정신을 알기 때문에 스데반도 사랑의 정신이 그대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인생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60절을 보시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처럼 스데반도 용서를 위한 기도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된 일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돌로 죽이도록 한 배후 즉 사울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 위대한 사도요, 제자요 복음의 일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저도 스데반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저도 연약한 목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가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스데반하면 최초의 순교자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장에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최초의 순교자이니 너희들도 순교자가 되어라가 아닐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생활에서 복음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통해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보이는 성전과 신약의 예배당 안에 매여 있지 않고 신자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이 확장되는 전환기에 발생한 것으로 그의 증거는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루살렘에만 있던 복음을 이제는 땅끝까지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에게 ‘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회는 강퍅한 마음으로 돌로 치지만, 스데반은 정반대로 평안과 고요하다는 의미로 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감당하고 부활을 소망하면서 편안한 잠을 청하면서 주님께서 자신을 낙원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 행복을 비전으로 둔 자가 아니라 이미 죄를 이긴 행복자로서 자신이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행복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믿음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나를 자랑하기보다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의 긴 강설과 순교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대 교회는 구약의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고 구약의 종교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역사적인 믿음의 조상과 율법 그리고 성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 알고 있던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나 임재하시고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을 스데반의 순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핵심 증거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듣고 어떠한 반응을 합니까? 이런 현실 속에서 스데반이 보여준 믿음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며 죽음의 자리에서도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살아 있을 때만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도 스데반은 우리에게 마치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신자들이 받는 박해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케 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3장에서 주의 종이 당하는 박해가 많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한 구원 사역이라는 것처럼 스데반도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제는 온누리로 확장될 것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세상에서 죄악에 항거하거나 동화되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고백 하는 성도라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시대적인 환경에 있습니다. 스데반처럼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핍박받을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안 후 참된 제자가 됨으로 이처럼 스데반이 참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로 양육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양육 받음으로 스데반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교회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20200610 / 행 7:54-60 /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의 순교

행 7:54-60

20200610.hwp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4-60 / [스데반의 순교] 유대인 지도자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부드득 갈았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시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다. 56) 그가 소리쳐 말하였다. `보시오! 하늘이 열리고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십니다!’ 57) 그러자 사람들은 손으로 귀를 틀어 막으면서 스데반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58) 그러고는 돌로 쳐죽이려고 그를 성밖으로 끌어냈다. 공증인들, 곧 사형 집행인들이 겉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놓았다. 59) 그러나 돌들이 우박처럼 날아오는 속에서 스데반은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말을 남긴 뒤 그는 눈을 감았다.

스데반이 논리정연하게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을 꿰뚫어 설교하면서 그들의 죄악을 지적했을 때 그들은 시기와 분노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54) 당시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모였던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때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 마음에 찔림을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습니다. 같은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대적하기도 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5-56)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유대인들(51)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모습이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그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서 외쳤습니다. 같은 장소에 있었음에 불구하고 스데반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지만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막혀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57-60)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은 스데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스데반은 다시 무릎을 꿇고 더욱 크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잔다’는 단어는 평화로운 죽음의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적용: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강병화 교수는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생 들풀을 채집했습니다. 그 결과 4,500여 종의 씨앗을 모을 수 있었고 혼자의 노력으로 종자은행을 세우는 큰일을 해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언론에서 취재를 왔는데, 강병화 교수는 말했습니다.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 세상에 ‘잡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그게 바로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그 역시 잡초가 됩니다. 산삼이라 해도 엉뚱한데 나면 잡초가 됩니다. 잡초란 단지 뿌리를 내린 곳이 다를 뿐입니다. 들에서 자라는 모든 풀은 다 이름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 설 교 >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

문기태 목사

장마가 지고 난 후 강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물살을 따라 떠내려 옵니다. 뿌리가 뽑힌 나무도 떠내려 오고, 수박도 떠내려 오고, 수해를 만나 물에 잠긴 가재도구도 떠내려 오고 심지어 돼지새끼도 떠내려 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물이 불어나고 물살이 세게 흘러도 떠내려 오기는 커녕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물고기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조류에 따라 흘러가지만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헤치고 맘대로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세대의 풍조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행따라, 세상의 풍조에 밀려, 세상의 가치관 따라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세상 사람들이 춤 바람이 나면 같이 춤추러 다니고, 세상 사람들이 땅 투기해서 돈 벌면 같이 돈 될 땅 찾아 전국을 누비고, 세상 사람들이 컨닝하며 시험을 보면 같이 컨닝하고, 세상 사람들이 가정을 외면하고 바람피우면 같이 한눈을 피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으면 안됩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풍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갖 악한 영향을 끼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뒤집어 놓을 큰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옥과 같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며 사는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사도 바울을 제사장 아나니아가 벨릭스총독앞에서 고소하며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괴수입니다.(행 24:5)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이 사는 도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염병과 같이 강하게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세상을 소요케하고 있습니까? 단 몇 사람만 있었어도 그로인해 온 도시가 시끄러웠는데 오늘 우리는 천 만이 넘는 그리스도인을 자랑하는데 무슨 영향을 나라와 민족에 우리가 살고 잇는 도시에 끼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향력이 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대, 이세상의 사람들 꽁무니만 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따라가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이런 기도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주님 저에게 이 세상 이 세대의 물결을 따라 흐르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며 사는 사람 열 명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들과 함께 주님께 만 명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단 열 명만이라도 이세대의 조류를 거슬러 사는 사람만 있으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렇게 살 사람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세상 사람이 다 돈을 하나님처럼 섬겨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주님만 섬기며 사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쾌락만을 쫓으며 죄의 길을 따라 걸어도 단호하게 거기서 나와 유행을 거부하며 사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어도 모두 비난해도 혼자만이라도 의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가난해도 좋다. 고생해도 좋다.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되어도 좋다. 나는 오직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겠다.’ 하는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예루살렘교회의 스데반은 아주 짧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집사 안수를 받고서 일년도 사역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사도들도 하지 못한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완악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큰 해를 입힌 사울이라는 청년을 회심시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게 쓰임받게 한 인물이 바로 스데반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죽고 난 후에도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스데반은 어떻게 그런 강력한 능력을 보일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항상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니까 강력한 영향력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습니다. 성령충만하니까 죽어가면서까지 그의 원수까지도 변화시켰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충만하니까 누가 뭐라고해도 요동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가 성령충만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1. 성령 충만하면 영안이 활짝 열립니다. (55)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잇는데 스데반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앗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영안이 열리고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중에 마게도냐 사람들이 손짓하며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3층 천국까지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앞에서 앉은뱅이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육안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갑니다. 영안이 닫혀 있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일어서셨는지 앉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삶을 살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지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육안에만 의지하여 살지 않고 또 다른 눈 즉 영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며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다보면 하늘 문이 열리는 것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2. 성령충만하면 용서가 쉽게 됩니다. (60)

사단에게 사로잡혀 잇는 사람은 미움과 원망으로 충만합니다. 살기가 등등합니다. 본문에서 사울과 따르는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너 나 가릴것 없이 돌을 들어 쳤습니다. 죽이기로 결심하고 사람을 돌로 쳐서 목숨을 끊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어 가면서까지 원망하지 않습니다. 복수심으로 불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죄값을 찾지 않으시도록 죽어가면서까지 돌을 던진 사람들을 예수님께 부탁하고 잇습니다.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죽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감정의 상처를 많습니다. 그리고 보복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가 조금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싸우려고 덤벼듭니다. 용서할줄을 모릅니다. 사소한 실수까지도 보복하려고 합니다. 미움과 원망, 증오등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끌려 다닙니다. 사실은 그 감정 배후에서 사단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실상은 심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가장 심각한 것이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줄 아십니까? 성령충만하지 못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서로 감정을 품습니다. 오해하고 미워하며 저주하고 눈을 흘깁니다. 그러나 스데반처럼 성령충만해지면 다 이해가 됩니다. 용서가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이 풍성하게 주시니까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도 ‘쯔쯔 은혜를 모르니 저렇지 저러다 멸망당하면 얼마나 비참할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3. 성령충만하면 늘 기도가 나옵니다. (59)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를 합니다. 조용한 공간도 아닙니다. 기도할 분위기도 아닙니다. 몸은 돌에 맞아 으스러지고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마귀처럼 일그러진 사람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스데반은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무엇을 간구합니까?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대제사장도 사울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주님게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주를 위한 열심이었다면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자기의 편협한 선입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없애려고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기도했다면 하나님게서 깨우쳐 주셨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게서 얼마나 안타갑게 여기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임을 잘 압니다.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도 들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주어지고 문제가 해결됨을 알면서도 기도를 잘 못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하고 잇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먼저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쉽습니다. 기도하니까 천사처럼 변합니다. 기도하니까 용서도 절로 됩니다. 기도하니까 영안이 열려서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며 삽니다. 기도하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살게 됩니다.

모노 뉴클레오시스란 병이 있습니다. 피에 단핵을 가지고 있는 세포들이 많아지는 전염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입맞춤을 하면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모든 병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린 사람과 있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인해 감기에 걸린 사람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립니다.

올바른 소수가 잘못된 다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며 바른 사상이 잘못된 사상을 바꾸기가 힘듭니다. 좋은 말 열 마디보다 나쁜 말 한 마디가 더 힘이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한 사람보다 몇십배,몇백배 더 건강해야 하고 영적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어두운 세상에 빛의 영향을 줄 수 있기 바랍니다. 부패한 세상에 소금의 영향을 끼치기 바랍니다. 문제 많은 세상에 불행한 세상에 행복을 확산시키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능력이 아닌 성령 충만하여 위로부터 부어진 강력한 능력을 큰 영향을 끼치며 살기 바랍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죽음을 이긴 사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죽음을 이긴 사람” 여러분? 지금 잠깐 본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의 압권은 누가 뭐래도 8인조 오케스트라가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음악을 끝까지 연주하는 장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 중 악단의 단장인 웰레스 하틀리는 실재 인물이고, 그는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배에 승선했다고 합니다. 찬송가 364장 ‘내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여러분? 이 찬송을 천천히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배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승선한 한 사람이 있었으며 배가 침몰하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 분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죽음 앞에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위로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 타이타닉이 세계에서 가장 큰 배이며 가장 안전한 배라고 소개하는 모습은 자연의 위엄 앞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무용지물임을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우리의 삶 또한 지금 제아무리 잘나가고 풍요롭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죽음의 문제를 결단코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주신 분이십니다.

사도행전은 이 예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 약속대로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임하시는 이야기가 처음 나옵니다.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 그리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가 확산되려 할 때에 커다란 장벽이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주저했으며, 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쉽게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결코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의 발걸음이 내딛어 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뜻밖의 한 사람을 소중한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은 이방인들이 공용어로 사용하던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아예 예루살렘 교회에 머무르면서 신앙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열심이 두드러져 7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는 집사로써,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중 마침내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심문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을 뛰어넘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 세계로 힘 있게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둑이 무너진 뒤 물이 밭으로 논으로 집으로 시내 한 복판으로 가리지 않고 밀려들어 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밀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스데반 집사는 복음 전파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복음 전파사역의 귀한 길목에서 너무나도 소중한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예수 믿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를 위해 봉사한 기간 또한 정말로 짧습니다. 그러나 그는 짧으면서도 굵게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짧고 굵게, 여러분? 그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주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 집사의 충성된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쓰실 때 그가 어떤 자세로 쓰임 받았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도구로 온전히 쓰임 받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교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특별히 세 구절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다같이 5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여러분?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스데반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데반은 교회 밖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사람들이 변론하자고 덤벼들었습니다. 변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저들은 거짓 증인을 내 세워 스데반을 종교 재판 대에까지 서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54절을 보면 스데반의 변론을 들은 사람들이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더 이상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바로 그 때 그가 보인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여러분? 고사성어 가운데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온다는 말로써, 사방이 빈틈없이 적에게 포위된 고립무원의 상태,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지금 스데반이 바로 이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자기를 돕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맞아 주십니다.

그러자 두려움에 흔들리던 믿음이 이내 굳건해 집니다. 절망의 파도가 요동치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듭니다. 다시금 주님이 주시는 새 힘이 솟구칩니다. 때론 우리도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 빠져들 때가 분명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보이는 건 온통 적들뿐입니다. 초나라 왕 항우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두려워 도망치다 자결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아직 쳐다볼 곳이 한 곳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방이 꽉 막혀 있다할지라도 하늘은 뚫려 있습니다. 고개를 들고 저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벌써 일을 시작하고 계신 우리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땅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를 도울 손길은 없습니다.

오직 한 곳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입니다.

스데반이 이 위기 상황 속에서 바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그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나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 바로 그들만이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전후좌우 사방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리는 이 사방을 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은 우리에게 하늘을 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시력을 밝혀 주셔서 저 하늘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방은 다 막혀 있을지라도 하늘은 온전히 열려 있습니다. 무시로 주의 전에 나아와 예배를 통해 성령 충만한 자 되셔서, 늘 언제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맛보며,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날 지켜 보호 인도해 주셨노라, 기쁨으로 간증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부르짖어 가로되

59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미 처형이 시작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종교재판에서 제대로 판결 절차도 다 끝나기 전에 성난 사람들에게 성 밖으로 끌려가 내던져 졌습니다. 그리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로부터 돌팔매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공포가 밀려드는 시간입니다. 견디기 힘든 육체적인 고통이 온몸에 넘쳐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데반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기도의 줄을 결단코 놓지 않습니다.

아니 더 굳게 기도의 줄을 잡았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대화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간절한 기도로 그 위기의 순간을 끝내 이겨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사명을 다 완수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결단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기 스데반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십자가상에서의 우리 주님의 기도와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아시고 영혼을 부탁드린 기도를 드린 것처럼, 스데반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금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이 상황에서 끝까지 자기 목숨을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건져주신 것처럼, 지금 자기를 이 위기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내 뜻과 내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결단코 아니 됩니다.

여러분? 언제나 병 낫기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성공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도 안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병중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패하기를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용서와 사랑과 축복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상황에서 저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던지는 돌에, 저들이 맞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저들을 용서했습니다.

저들도 모두다 예수 믿고 축복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영혼 구원과 영혼 축복에 있어야 합니다.

저주의 기도, 복수의 기도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축복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사람은 진정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맞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처럼 아니 스데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부르짖으면서, 진정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자니라.”

다같이 6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스데반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장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통 중에 운명하신 것처럼, 스데반 또한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스데반이 죽었는데 잔다고 표현했을까요? 여기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담겨져 있습니다.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뒤 첫 번째 운명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의 죽음과는 다른 죽음입니다. 그래서 다른 죽음과 같이 죽었다고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잠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것처럼, 부활의 시간을 기다리며 잠시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잠을 잔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장차 부활 후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코 죽음 때문에 무너질 수 없고, 죽음에게 질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의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8:1절을 보시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적들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차제에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박멸할 태세로 거세게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8:4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로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저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이 죽은 것을 똑똑히 지켜본 자들입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두려워서 도망쳐 숨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스데반의 순교에 진정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 또한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이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까지 퍼져가게 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8:1절을 보면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가 왜 이 이야기를 구지 여기에 써 놓았을까요? 사울이 표면적으로는 변화되지 않았지만, 바로 이 때 그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9장에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순간 마음의 동요를 주님께서 보시고 그를 전격적으로 만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의 회심에 지극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 결과 사울이 바울이 되어 이방 세계 곧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산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은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스데반은 단지 복음을 제시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이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 설교했지만 베드로처럼 수 백명, 수 천명이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단 한 명도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토록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피를 토하며 말씀을 선포했건만, 저들은 오히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데반은 저들의 돌팔매질 속에서 그렇게 죽어간 한 사람의 이단자에 불과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토록 잔인한 하나님이셨습니까? 이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신의 뜻만 내세우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다 치고, 이러함에도 왜 스데반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56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이생을 넘어서 펼쳐져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었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완전 종결시켜 주시는 곳,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곳, 기갈이 없고 목마름도 없고 오직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은 결단코 그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라는 위대한 전도자가 탄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처럼, 절대로 허무한 죽음이 아닌 놀라운 영향력을 드러낸 가치 있는 죽음이 된 것입니다.

새생명 전도축제에 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스데반처럼 죽어야 진정 다시 사는 진리를 온전히 체득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것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맞이하시기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스데반을 기뻐 맞아 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 또한 우리 주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기뻐 맞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진정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주를 가까이” 이 찬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던 타이타닉호의 웰레스 하틀리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들의 돌팔매질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가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았던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 안에서 영원토록 변치 않는 사랑과 참된 행복을 누리며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스데반처럼 승리하게 하소서

이윤재 목사

여러분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흑인 부부가 아브라함 링컨을 너무 존경했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해서 자기들도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아이를 임신했는 데 존경하는 링컨을 닮은 아이가 나오라고 방안에 링컨 사진을 걸어 놓고 매일 바라 보았답니다. 태중의 아이에게는 매일 링컨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링컨을 사모하고 링컨만 생각하며 열 달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아이를 낳고 보니 흑인이 아니고 백인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외토픽감입니다. 그만큼 좋아하고 존경하면 닮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두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는 좋아하고 하나는 존경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구약의 야곱입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합니다. 슬슬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그러다가 급하면 천사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야곱은 저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테반입니다. 그 논리정연한 믿음과 그 장열한 죽음이 어린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스테반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2천년 교회사를 보면 딱 하나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교자가 역사를 다스린다는 진실입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카타콤을 찾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것은 로마의 황제가 아닙니다. 순교자입니다. 그 중에 순교자 세바스티안이 있습니다(그림1). 세바스티안은 3세기, 로마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에 의해 순교당했습니다. 군인이었던 그는 예수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수없이 화살에 맞습니다. 그래도 안 죽자 황제가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하수구에 버렸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죽었으나 카타콤에 살아 2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순교의 역사는 로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도 있습니다. 1919년 4월, 당시 일본 경찰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수원 제암리 교인 21명을 교회에 가뒀습니다(사진2). 그리고 교회를 못질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습니다. 그때 교회안에서 21명, 교회 밖에 2명이 죽었고 동네 집도 33채가 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급히 달려갔더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교회안에 있었던 교인 21명은 동그랗게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 밖으로 피하지 않고 모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최후 승리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다 순교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인생은 둘중의 하나로 판가름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전도를 하든 선교를 하든 자녀를 기르든 직장생활을 하든 성공이냐 실패냐 둘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날마다 승리하는 것이고 차선은 최후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저는 스테반을 통해서 승리의 세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이번 주에도 이 말씀을 여러번 읽고 그 원리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기뻣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스테반처럼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라

첫 번째 원리가 2절에 나타납니다. 행7:2, “스테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여기에 “영광의 하나님”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스테반은 유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을 죽이기 위해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유대교로부터 이탈하여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스테반이 언제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행6장에 보면 스테반은 당시 훌륭한 믿음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행6: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7집사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예수님을 증거하자 유대인은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이 자기만 믿을 뿐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을 예수믿도록 영향준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스테반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유대인이 스테반을 핍박한 첫 단계는 논쟁이었습니다. 행6:9절 마지막,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테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변론은 요즘 말로 하면 공개토론입니다. 공개적으로 누가 옳으냐 그르냐 논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개토론을 통해 스테반을 당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말로 안되자 그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중상모략입니다. 중상모략의 내용은 스테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행6:11절입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결국 유대인들은 스테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결국 그것으로 스테반을 체포했습니다. 12절입니다. 행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처음에는 말로 공개토론합니다. 그것으로 안되자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중상모략합니다. 그래도 안되자 그것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잡아 가두고 불법 재판을 통해 죽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이 과정을 거쳐 공회까지 왔습니다. 행6:15절입니다. 행6:15, “공회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테반을 주목하여 보니”. 자, 지금 스테반이 공회앞에 섰습니다. 공회는 72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사법기관입니다.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독일에 갔습니다. 독일 보름스에 가면 루터가 제국의회에서 심문받은 장소가 있습니다. 수많은 카톨릭 신부들앞에 루터가 섰습니다. 그때 했던 루터의 기도가 그가 섰던 자리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도와 주소서”. 그 심정이 바로 스테반의 심정일 것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유대인 대적자들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섰습니다. 유대인들이 스테반에 대하여 제기한 죄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테반이 성정을 헐자고 했다, 또 하나는 스테반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신앙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 성전신앙과 ”하나님이 율법을 만드셨다“. 율법신앙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어기는 것이 가장 큰 죄였습니다. 이에 대해 스테반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것이 행7장입니다.

먼저 스테반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의 역사를 개관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성전은 솔로몬 시대에 지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때부터 일하셨다”. 그 하나님이 2절,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부터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인도했고 이삭, 야곱, 요셉을 세웠습니다. 때가 되자 영광의 하나님은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에 잠시 광야교회를 이루다가 가나안땅에 들어와 다윗을 통해 나라를 세우시고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영광의 하나님”이 다스린 역사였습니다.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시대와 공간에 제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History is the His story,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입니다. He is everywhere, 그는 어디나 계십니다. He lives anytime, 그는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이요 우주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는 성전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말씀하시지만 성전에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셨지만 율법에 매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하나님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7:51절, 성령의 하나님, 7:52절,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은 곧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 믿음 때문에 여기 서 있습니다. 내가 그 믿음 때문에 죽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영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스테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되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을 믿습니까? 모든 인생은 결국 두 가지로 결판납니다. 첫째 하나님을 믿느냐? 둘째 믿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나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젊은 루터가 그랬습니다. 루터가 어느날 친구와 함께 집에 다녀오다가 들에서 벼락을 맞았습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루터는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전전긍긍,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하나님이 벼락을 내리지 않나 공포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25장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을 남기고 두 달란트받은 사람은 둘을 남겼는 데 하나 받은 사람은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다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하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마25:24,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알았습니다. “굳은 사람”,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굳은 분입니까? 감정표현도 없고 항상 딱딱하고 무섭습니까? 저도 어릴 때 그렇게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아버지 이미지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 이미지는 아버지 이미지 따라갑니다. 아버지가 좋으면 대부분 하나님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나쁘면 하나님도 나쁩니다. 아버지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자녀에게 하나님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셔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아버지가 누구든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루이스 앤더슨이 말한대로 “모든 노력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렇습니다. 모든 능력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모든 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하늘의 예수님을 바라보라

스테반이 보여준 승리의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55절입니다. 행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절입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자, 지금 스테반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죽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억울하게 죽어 갑니다. 그러면 누구를 바라 보겠습니까? 자기에게 돌던진 사람들을 바라 볼 것입니다. “너희들 두고 보자. 내가 하늘 나라 가면 너희들에게 천벌을 내릴거야”. 그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스테반은 사람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스테반은 또한 자기 자신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죽어가는 자기가 안쓰럽고 불쌍하고 또한 대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자기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스테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늘도 어떤 하늘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늘의 구름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를 바라본 것도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다시 55절을 보십시오. 행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이면서도 또한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바라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젊고 유능한 은행 간부인 앤디가 아내의 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하는 내용입니다.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고자 애를 쓰지만 부질없는 일임을 알고 탈출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탈출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감옥의 벽돌을 보면서 싫어했지. 그것은 우리를 미치게 했지. 그런데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에 점점 익숙해지고 어느 날부터는 그것이 편하게 느껴지는 거야. 마치 감옥이 없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 거야. 그때 깨달았지. 진짜 감옥은 내 안에 있다고. 그때 나는 결심했지. 탈출하기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감옥이 자꾸 보니까 편안해 지고 집같이 여겨지고 그것 없으면 못 살 것 같게 됩니다. 위기는 내가 감옥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보는냐가 문제입니다. 자꾸 보면 그 사람이 됩니다. 자꾸 감옥을 보면 내 마음도 감옥이 됩니다. 건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건물은 처음에 사람이 짓습니다. 그러다가 그 건물에 오래 살면 나중에는 건물이 사람을 짓습니다. 자꾸 보니까 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모양과 형태가 만들어진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 봅니까? 본대로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브라함과 롯도 그들이 본대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둘이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양과 소가 많아졌습니다. 분가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롯,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그때 롯이 눈을 들어 바라 보았는 데 소돔쪽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 당시 소돔은 아무 비옥한 곳, 물좋고 정자좋은 곳이었습니다. 마치 애굽들처럼 물이 넉넉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롯이 떠나고 나니 아브라함은 갈 데가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광야가 보였습니다. 광야에 무엇이 있습니까? 풀이 있습니까? 물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창13:14,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롯은 소돔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광야를 바라보았습니다. 롯은 물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얼마후 소돔은 불과 유황으로 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받았습니다. 본대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스테반처럼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바라보면 닮습니다. 스테반이 예수님 바라볼 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59-60절입니다. 행7:59-60, “그들이 돌로 스테반을 치니 스테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무릎를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테반은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기전 겟세마네동산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를 더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스테반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으나 죄는 사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죄는 예수님만 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표현했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죽음의 순간,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처럼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패트릭 존스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패트릭 존스톤) . 고난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무 이유없이 핍박당하고 무시당했습니까? 가끔 나만 당하는 슬픔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눈은 지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신 분, 그 분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자기를 버려야 세상을 살린다

스테반이 보여준 세 번째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60절입니다.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테반은 아무 죄없이 죽었습니다. 참 억울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긴 역사를 보십시오. 죽은 자가 세상을 다스립니다. 역사의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 자기를 버린 자입니다. 억지로 버리면 타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버리면 희생입니다. 계란도 자기가 스스로 깨지면 부화가 됩니다. 그러나 남이 깨뜨리면 후라이가 됩니다. 마5:13-14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아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니”. 소금과 빛이 무엇입니까?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여 맛을 냅니다. 녹지 않으면 맛도 낼 수 없습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빛은 올리브 기름으로 밝힙니다. 해마다 9월이면 이스라엘 농부들이 올리브를 땁니다. 올리브를 따면 그것을 씯고 찧어 부숩니다. 아주 옛날에는 올리브를 돌위에 올려 놓고 사람이 일일이 발로 밟거나 절구를 이용하여 찧었습니다. 그 후에는 무거운 돌로 눌러서 짯습니다. 올리브 열매위에 무거운 돌을 덮고 누르면 기름이 나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라는 뜻을 눌러서 짠다는 말입니다. 빛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올리브를 찧고 부숴서 나옵니다.

영어 단어에 “영향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influence”라고 합니다. 이 말은 ”flu” “흘러가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in flu 하니까 “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flow in”, “안으로 유입되는 것”입니다. “독감”이란 단어가 그래서 나왔습니다. “influenza”. 무엇이 안으로 흘러갔느냐? 감기 균이 안으로 흘러갔습니다. 감기균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influence”, 영향력은 안에 들어간 것이 다시 나온 것입니다. 누가 세상을 살립니까? 자기를 버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남에게 들어가 다시 나옵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영향력이 됩니다. 스테반의 죽음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입니다. 7:58절을 보십시오. 행7:58,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당시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테반이 죽는 장면을 옆에서 다 지켜 보았습니다. 사울은 그때 유대교 신자였기 때문에 스테반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행8:1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니라”.

그러나 막상 스테반이 기도하며 죽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죽어가는 스테반의 모습을 통해 엄청난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신앙은 달랐지만 “야, 대단하다. 무엇이 저로 하여금 저렇게 죽게 하는가?”. 그 후 사울이 하나님께 돌아와 바울이 된 후 스테반의 영향력이 그에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의 정신이 그 속에 들어가 in flu 했습니다. 평생 스테반의 정신으로 선교했고 마지막에 로마에서 스테반처럼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장면입니다(그림3). 손을 뒤로 묶이우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아마 죽어가면서도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주여 저들의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복음 전파에 불을 붙였습니다. 8장에 보면 스테반의 일로 인해 핍박을 받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을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를 전도해 에티오피아를 지상에서 가장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또 그 영향으로 안디옥교회가 생깁니다. “아, 한 사람이 죽어 세상을 살렸습니다”. 바울 한 사람을 살려 그리스, 로마를 살리고 전도자들을 일으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스테반 자신은 죽어 예루살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그로 인한 영향력은 민들레 홀씨처럼, 태평양의 파도처럼, 전 세계로 퍼져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 한 사람만 죽이면 기독교는 끝난다 생각했지만 스테반이 죽음으로 오히려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믿는 우리의 삶을 한마디로 오스왈드 샌더스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얻는 것으로 살고, 잃는 것으로 살린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얻는 것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무엇이나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더 구해야 합니다. “주여, 나로 인해 잃는 것도 있게 하옵소서”. 그동안 우리는 너무 얻는 것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이제 무엇을 좀 버릴까 무엇을 좀 잃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스테반처럼 꼭 순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피흘리는 순교말고 희생하는 순교는 불가능할까요?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좀 버릴까요를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이 그래야 하고 교회가 그래야 하고 한국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시간을 조금 버릴 수 없습니까? 선교를 위해 물질을 드릴 수 없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 지식, 몸, 충성을 드릴 수 없습니까? 그래서 얻는 것으로만 살아온 우리가 조금 잃는 것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까?

누가 최후 승리자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누가 고난속에서도 끝까지 승리합니까? 하늘의 예수님 바라보는 자, 보좌에 앉으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역사를 새롭게 하는 승리자입니까? 자기를 버려 남을 살리는 자, 얻는 욕심으로 살지 않고 잃는 기쁨으로 사는 자, 몸도 물질도 희생도 시간도 사랑으로 잃고 잃고 잃어 예수님처럼 스테반처럼 사는 자, 그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승리자들 되시기 바랍니다.

순교의 신앙을 본받아

양인순 목사

지금까지 교회는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랐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진 이후 교회는 수많은 고난을 믿음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1866년 27살의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쪽 복음을 뿌리며 순교했습니다. 양화진에 가보시면 이름 모를 수많은 선교사들이 낯설고 물설은 이곳에 와서 뼈를 묻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산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도 있습니다. 6.25 공산치하에서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피 흘림을 통한 고난의 순교의 흔적이 오늘 우리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순교는 신앙을 지키거나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피 흘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적색순교라고 부릅니다. 피를 흘리고, 생명을 던짐으로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어쩌면 신앙인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일 수 있습니다. 일제치하나 공산치하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순교의 결단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주후 2세기에는 순교자들은 모두 숭배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순교자들의 유품이 제단 위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공격의 대상이 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순교자들을 성자로 추앙하여 성자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자를 숭배하고, 성자들이 지금도 우리에게 무슨 공로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잘못된 행위입니다.

적색순교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백색순교가 있습니다. 비록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바치지는 않지만 날마다 예수 정신을 가지고, 십자기를 지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 때문에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의 자유 속에서 마음껏 신앙고백을 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순교의 신앙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적색순교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순교는 그 상황과 조건 속에서 결단하면 됩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오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백색순교는 더욱 힘들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순교는 어떤 특정한 시대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는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교회가 가진 신조 중에 가장 유명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에 순교신앙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 곧 성자들은 추모를 받아야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강건해질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이 받은 은혜가 무엇이고 어떻게 신앙을 지켜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순교자들은 마땅히 추모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우상시해서는 안됩니다. 그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지켜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간 우리가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은 가장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그는 설교한번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데반 그 이름의 의미대로 “면류관”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성령충만한 자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충만하여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본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매수합니다.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체포합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여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거슬렀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천사의 얼굴은 무엇을 말할까요? 성령충만, 지혜충만, 능력충만한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은 스데반을 고발한 자들을 향하여 고소 내용이 사실인가를 묻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7장 2절부터 53절까지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내용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무소부재한 분이심을 역설합니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우상시 여기는 그들의 잘못을 질타합니다. 스데반은 성전 안과 밖에서 표리부동한 자신들의 삶을 책망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한 유대인들의 잘못을 질책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고수하기 위해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그들의 죄과도 책망합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미명아래 자신들의 종교적 관행과 전통, 이기심과 욕망, 기득권은 철저하게 고수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그들의 이중성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7:54)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잘못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 ‘찔리다’는 ‘디아프리오(diaprio)’인데 ‘마음이 온통 분노로 이글거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갈다’로 번역된 ‘브뤼코(briko)’는 ‘물어뜯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닌 짐승에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분기탱천하여 짐승처럼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짐승수준으로 이를 갈면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최고의 법정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자기들의 모든 치부를 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 있는 스데반은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속히 그 자리를 떠나 도망쳐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본문 55-56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여기서 우리는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스데반의 모습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충만함을 지속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성도는 결코 순교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순교자의 길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용기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마음속에 결단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절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자 분노하는 유대인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영광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백색순교자로 살아가는 비결은 다름 아닌 성령충만함을 날마다 덧입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야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상황이나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삽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로움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고,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기 원하십니까? 날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날마다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고 주께로 돌이키십시오. 날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 앞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을 쳐보십시오. 성령충만하면 우리는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위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나타냅니다.

그 속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칩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자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분기탱천하여 이를 갈고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을 본다는 것은 땅에 것에 매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지금 상황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지만 그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위를 바라보는 동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늘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면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보입니다. 땅을 보면 우리는 낙심하거나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에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었다가 살아난 우리들은 위에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곳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영광의 보좌에 계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생깁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뚫고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은 위기상황에서 땅을 보지 않고, 위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봤습니다. 그 결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은 오직 땅만을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기심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욕망이나 이기심에 매여 있으면 땅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속에 희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안식이 있습니다. 놀라운 평강이 있습니다. 날마다 땅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 가기시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기도와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교자의 길은 아무나 걷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하고, 위에 것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난 후 분노가 극에 달한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지릅니다. 분을 참지 못하는 격앙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듭니다. 성 밖으로 내던지고 돌로 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내는 거룩한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처형할 때는 반드시 성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돌로 그를 칩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돌로 사람을 쳐서 죽일 때는 세 단계를 거쳤다고 합니다. 먼저 증인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잡고 돌로 머리를 내리칩니다. 두 번째로 돌로 가슴을 내리찍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졌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지금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가슴이 터졌습니다. 수없이 날아오는 돌에 맞아 그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깨지고 부숴집니다. 그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바로 그 순간 스데반은 부르짖으며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

죽음의 상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쳐와도 머릿속이 하얗게 됩니다. Why Me? 하필이면 왜 접니까? 원망 불평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아보였던 사람도 고난과 시련 앞에 무참하게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데반은 그 죽음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드렸던 십자가의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사모했던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도 언젠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때 나도 이렇게 기도해야지 늘 주님의 기도를 품고 있던 자입니다.

우리는 어떤 위기상황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보면 평소에 그 사람의 모습을 압니다. 위기상황에 봉착하면 무의식적으로 그 마음속에 담겨있는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언제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올지라도 스데반처럼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고통 속에서도 무릎을 꿇습니다. 크게 주님을 부르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이 기도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패역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언젠가 저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의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이 시간 스데반이 지녔던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증인으로 지켜보던 자가 있습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죄인들을 향한 용서를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백으로 스데반의 순교현장에서 지켜본 그의 모습이 얼마나 놀라웠던가를 고백합니다.

순교는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습니다. 비록 스데반은 죽었지만 그 죽음은 핍박자 사울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 바울로 만드는 출발점이 됐습니다. 그의 죽음은 예루살렘 공동체에 머물던 복음을 이방 안디옥으로, 로마로 흩어지게 하는 선교의 폭발점이 됐습니다. 그는 순교의 제물이었지만 그 이름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됐습니다.

경기도 ‘능내’라는 곳에 가면 미재 부락에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전도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 되었습니다. 신유박해 때 고난을 받고 사형장으로 가면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영원한 길로 가고 있다.”

그리고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할 때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면서 말했습니다. “땅을 보고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낫다.” 이 말에 겁을 먹은 망나니가 자신 없이 칼을 쳐서 목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어 십자 성호를 긋고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 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성령충만함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땅을 보며 살아가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배임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서 조차 주님을 생각하며 용서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 순교의 신앙이 우리 삶 속에서 이뤄질 때 미천한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주님 앞에 영원히 별과 같이 빛나는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십자가의 길> 찬양을 주님께 드립니다.

♫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

천사의 죽음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첫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자신의 죽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그의 설교를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맨 끝에 있는 말을 주목합니다.

즉 15절에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말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주석가들이 그것을 스데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밝고 환하게 빛났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 충만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얼굴이 어두울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말을 그저 그의 얼굴이 빛났다는 뜻으로만 보는 것은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 그의 얼굴이 빛났을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때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및 소아시아에서 온 소위 자유민들, 즉 노예였다가 풀려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스데반에게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이 논쟁에서 말로 스데반을 당해낼 수 없자 사람들을 매수해서는 그가 하나님과 율법을 모독했다고 고발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또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붙들어 공회에 세우게 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스데반의 혐의를 확인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십중팔구 그 악랄한 고발자들과 모든 공회원들 앞에서 긴장해 있거나 겁에 질려 사색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분기에 차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환한 얼굴을 하고 있을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겠습니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천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계획과 할 일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는 늘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집행하는 도구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듯 그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였음을 뜻하는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또 그가 그의 할 일과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지혜와 능력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행했을 뿐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예수가 참으로 영광 중에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그의 아들이심을 영안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행7:55-56은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자기가 서있다는 사실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하며 살아야 함을 의식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가 하는 하나님의 일로 인한 어떤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사실들이 그의 얼굴로 하여금 천사의 얼굴 같이 보이게 했던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6:5)으로 인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집사의 한 사람으로 택하여 세움을 받았지만 단지 구제하는 일과 교회의 재정을 출납하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이적기사를 행했고 특히 병든 이들을 고쳐주는 권능을 행사했습니다. 그렇게 충만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주신 은혜와 권능은 그로 하여금 또한 뛰어난 사고능력과 언변을 구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본문 9-10절에 보면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와 더불어 논쟁하던 사람들이 그를 당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공회에 붙들려 가서 그를 고발하는 자들과 온 공회원 앞에서 행한 설교는 참으로 훌륭한 설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신 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내신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바를 적시할 때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을 만큼(행7:54) 그의 설교는 웅변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돌로 스데반을 칠 때에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간구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도들과 다름없는 주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얼굴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로 천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 같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로 스데반과 논쟁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으며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 스데반이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순교인 것입니다. 죽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없이 죽을 때 그것이 순교가 됩니다. 악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진리와 믿음과 의를 지키며 살 때에 순교의 위험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순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명하시는 그의 일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로 인하여 벌어질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그에게로 받아주시리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순교입니다.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스데반이었기에 그 어느 사도들에 앞서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순교는 자랑스러운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죽음, 한 천사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위로를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믿음과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 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순교적 삶의 자세를 요구하는 일은 늘 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적 삶의 자세를 항상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그 천사와 같은 얼굴을 우리도 늘 지니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두려운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돌을 맞아야 할 일이 없는데 돌을 맞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은 악한 사람을 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을 칩니다. 거짓된 세상은 거짓된 자를 정죄하지 않고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러기에 악하고 거짓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순교의 위험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처럼 스데반의 죽음도 매수와 충동질과 거짓 증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악한 세상은 매수와 충동질과 거짓 증언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순교적 상황 속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은 사실은 그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반성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바른 말로 깨우쳐주는 사람을 향해 이를 간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이 하는 말을 막으려고 일제히 큰 소리를 질렀으며, 바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향해 계속 돌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며 진리를 말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부끄럽게 여겨서도 안 되고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천사 같이 사는데도 고난을 당한다고 탄식할 것이 아닙니다. 천사 같이 살기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순교적 삶을 사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순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한 순교자를 만드는 핍박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순교자를 만드는 일은 악한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서지 못한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바로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실하게 살며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사적인 감정과 이해관계 때문에 남을 비방하고 모함하며 거짓말로 인격의 흠집을 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른 소리에 귀를 막고 바른 소리 하는 입을 막으려 하거나 그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마음에 찔리는 말을 해주면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얼른 자기 자신을 고치려 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감정을 품고 그 사람을 죽이려 한다면 그런 자보다 더 딱하고 불쌍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순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같은 믿음의 사람을 부당하게 죽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쓴 본문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서 들었겠습니까? 누가는 끝까지 바울을 동행했던 그의 동역자였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바울에게서 스데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행7:58에 보면 사람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했습니다. 이 사울 자신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음을 보았으면서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리면서도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던 사람들 중에 사울도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돌에 맞으면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던 스데반에게 계속 돌을 던지도록 사람들의 겉옷을 받아 지켜준 사울이었습니다. 나중에 다메섹을 향해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바울 자신이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행22:20)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은 자신이 흘리게 한 스데반의 순교의 피를 자신의 생명으로 갚을 또 하나의 순교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아 순교적 삶을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를 해야 할 때에는 순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그러나 먼저 그 누구도 순교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이들로 가득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천사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나 고통을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

이중표 목사

우리 주님께서 한신교회를 1977년 6월 5일 창립케 하셨습니다. 한국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속에서 한신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한신교회의 창립과 함께 항상 기억되는 서정주씨의 시가 있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밤새도록 울었나 보다”

청계산에 들어가 6개월을 울고서 한신교회 창립 비전을 이 종에게 주셨습니다. 한신교회 비전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우러러 보는 그리스도인을 스데반이라고 합니다. 스데반은 이름 자체가 위대하고 이름대로 산 사람입니다.

예수교 사제이며 심리학자인 헨리 나우엔은 “목회 사역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스데반 교회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이 가장 복된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살다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을 닮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증인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땅끝까지 예수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순교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죽는 것입니다. 영광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감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최고로 인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실로 스데반은 짧게 살았으나 굵고 크게 산 자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까지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죽었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있었다”(행 22:20)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사도 바울은 땅끝까지 증인으로 이어가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증인입니다. 스데반이 없었으면 사도 바울이 없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령과 은혜가 충만했는지 그에게 능력과 기사와 표적이 따랐습니다. 그가 얼마나 지혜가 충만하였는지 입을 열면 그의 설교에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사랑이 넘치는 집사였습니다. 스데반은 구제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랑의 손을 폈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비의 손을 펴서 언제나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 스데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죽었다’는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 것은 스데반이 죽을 때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신앙이 바울 사역으로 꽃이 피었습니다. 스데반에 있었던 가능성이 바울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대교회 큰 타격이었으나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중대한 섭리였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1-53)

이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은 이때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 그때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5-58) 라고 하였습니다. “저희가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같은 사건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공통으로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은 예수님께 배웠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무리가 있을 때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심으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막 6:41).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요 11:41).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다락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이나 인격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그 모습을 닮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자세는 닮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배워야 합니다.

스데반의 믿음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그 믿음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본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을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행전 7장 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능력을 간구합니다. 또 우리는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자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좋으신 하나님으로 임재하셔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다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 중심적인 소원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고 영광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자나깨나 영광의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리들이 이를 갈며 달려들 때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저 원수의 무리에게서 나를 보호하소서.” 하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주여, 나는 죽어도 좋사오니 영광을 받으소서.” 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나깨나 영광의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자는 가난해도 영광이 나타납니다. 실패해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환난중에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 영광은 성공이나 부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고 그를 찬양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목적이 고상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간의 실패 가운데 최고의 실패는 사는 목적의 실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사랑했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6절)

스데반은 ‘인자’를 보았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영광스러운 인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보는 그 믿음 위에 섰던 것입니다.

인자 예수는 죽으러 오신 예수였습니다. 죽으러 온 예수는 희생하며 산 예수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인자 예수를 믿엇고 그 예수를 바라보았기에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은 인자 예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으로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 스데반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닮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며 용서하고 죽습니다.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원수들이 이를 갈고 달려들 때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원수들은 이를 갈며 달려들었으나 성령이 충만하고 스데반은 입을 열고 저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는 사랑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사랑은 원수 사랑입니다. 구제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랑은 비교적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해하고 죽이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사랑입니다.

소설가 정연희 씨는「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명의순 씨의 숭고한 삶의 일생이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의순씨는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관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방 후에 월남한 그는 한신대학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을 만나 북한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했고, 모진 고생 끝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던 중 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북한군 첩자로 오해를 받게 되고 결국 포로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2년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중환자들을 돌보면서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주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밤새워가며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거룩한 나날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만명의 포로 수용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주변 사람들이 미군당국에 진정한 결과 석방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같은 포로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성 프랜시스의 사상적 영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 프랜시스의 기도를 인용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가 없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남아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나이다.”

이러한 프랜시스의 기도를 그는 실천하려 했던 것입니다.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담담하게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 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네. 내가 이 곳에 남아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닐세. 이 곳에 있는 형제들 중에는 나 같은 것이나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밥 한 톨을 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려야 했던 그 살벌한 포로 수용소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오래 하고 또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 온갖 병자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그의 몸은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중공군 포로들은 이렇게 통곡하면서 추도문을 썼습니다.

“1952년 8월 11일 새벽 3시, 우리는 맹선생의 죽음을 통곡합니다. 애통합니다. 선생님께서 환자를 다 씻긴 다음에는 언제나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시던 음성이 귀에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외치시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 잃은 어린 양처럼, 어머니를 잃은 고아처럼 슬픈 포로민으로 이제 누구를 바라보며 살 것인지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곡합니다. 맹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우리는 맹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이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는 저희 한신대학교 선배로 위대한 생을 살다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간간히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모아져서 그의 생애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 ‘사랑의 잔이 넘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잔을 포로 환자들에게 사랑의 잔으로 부었던 것입니다.

천국 소망으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소망은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영혼은 주님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영혼이 가야 할 곳을 알았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드린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산 것입니다.

경기도 ‘능내’라는 곳에 가면 미재 부락에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전도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 되었습니다. 신유박해 때 고난을 받고 사형장으로 가면서 “나는 영원한 길로 가고 있다”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할 때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면서 “땅을 보고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겁을 먹고 망나니가 자신없이 칼을 쳐서 몸이 끊어지지 않아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어 십자 성호를 긋고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살아서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스데반의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요, 예수 안에서 산 자입니다.

증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이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며,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서도 웃고 소망 중에 기뻐하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사랑하는 맘 변치 못해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순교자는 산자의 신앙을 가졌기에 산자의 행복을 최후로 증거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평소에 가진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이름의 사람

스데반은 참으로 위대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스데반이라고 하는 말은 그 이름 자체가 ‘스테파노스'( )라고 하는 헬라어로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면류관은 왕이 쓰는 것으로 영광의 상징이며 충성된 자나 사랑하는 자가 받는 영광의 상징입니다. 면류관은 ‘자랑스럽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면류관이요, 자랑스러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스데반은 어디에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스데반이요, 면류관입니다. 사회나 직장이나 교회 어느 곳이든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그 모임의 자랑이며 면류관입니다.

오늘 이 교회에서 스데반은 누구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언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사는 별세의 성도입니다. 그 사람이 스데반이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성도입니다.

스데반은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되어야 됩니다. 스데반 목사, 스데반 장로, 스데반 권사와 집사, 스데반 성가대, 스데반 구역장, 스데반 성도가 되십시오. 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오, 스데반아! 어서 오라”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감고 스데반과 같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믿음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사랑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소망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은 살아도 스데반이요, 죽어도 스데반입니다. 예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 때문에 죽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으면서 스데반과 같이 불멸의 웃음을 지어야 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죽이는 자를 용서하며, 그리고 괴롭히는 자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마지막 죽으면서도 그 얼굴에 환희를 가지고 죽어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죽으면서 천사처럼 빛이 났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별세의 증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게 증거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변도톨

[새벽설교 본문]

사도행전 7장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When they heard this, they were furious and gnashed their teeth at him.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But Stephen, full of the Holy Spirit, looked up to heaven and saw the glory of God, and Jesus standing at the right hand of God.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Look,” he said, “I see heaven open and the Son of Man standing at the right hand of God.”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At this they covered their ears and, yelling at the top of their voices, they all rushed at him,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dragged him out of the city and began to stone him. Meanwhile, the witnesses laid their clothes at the feet of a young man named Saul.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While they were stoning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Then he fell on his knees and cried out, “Lord, do not hold this sin against them.” When he had said this, he fell asleep.

[화요 새벽설교 박대용 목사]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의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순교합니다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 회개하는 것이 정상인데 공회원들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찔려 이를 갑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으면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다고 합니다

스데반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들어야 정상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유턴하려면 내려 놓을 것이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유지한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고 예수를 죽였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백한다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만약 돌아왔다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또 다른 길을 열어주셨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돌아와야 축복입니다

스데반이 선포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죽였다” 목숨을 내놓고 한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속에서 말씀하시니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목사님이십니다 교회는 가야한다는 절대적 신앙으로 살았는데 99년 군대를 갑니다

이등병이 종교행사를 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교회갈 사람 손들라고 해서 손을 들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작업이 있었지만 손을 들고 교회 갔습니다 찬송도 열심히 부르고 말씀을 듣고 초코파이를 먹고 내무반에 들어 왔는데 분대장이 관물대로 밀어넣더니 성경책을 던집니다

그 때부터 인생이 꼬였습니다

수개월간 갉음을 당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운게 있어서 불침번을 서면서 분대장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일병이 되고 분대장이 전역할 때가 되었습니다

분대장이 전역할 때는 저는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피고한 일입니다

세상은 싫어해도 하나님은 대견스럽게 생각합니다

스데반은 그냥 조용히 지내도 존경받는 집사님으로 남았겠지만 순교의 자리까지 갑니다 스데반은 위태로운 순간에 말씀을 전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위기 가운데 말씀을 전하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성령을 받기 전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었지만 성령을 받고 나서 담대한 말씀 선포자로 달라집니다

에베소서 5장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스데반 집사처럼 성령 충만하여 은혜를 흘러보내기 바랍니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가 보좌 우편에서 서신 것을 봅니다

영의 세계가 열려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보통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주님이 일어서 계신 것을 봅니다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 왜 서셨을까요?

앉아 있다 일어나는 것은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이거나 축구에서 골을 넣었을 때 등..놀라운 일을 목격할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섭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순간까지 충성을 다하는 장면을 보시고 일어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순교를 위대한 일로 여기십니다

이는 보좌를 움직이는 일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상 이변으로 홍수가 넘칩니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징조입니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손해볼 수 있고 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으나 그 현장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비겁하지 말고 용기있게 손해를 감수하면서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하루가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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