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의 문 | [주일설교(19.06.23)] / 요한복음 강해(25); ‘나는 양의 문이라'(송태근 목사) 354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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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9.06.23)] / 요한복음 강해(25); ‘나는 양의 문이라'(송태근 목사)
[고화질영상녹화](요 10:1-7)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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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그 세 번째 – 양의 문이신 예수 – 뉴스앤조이

영어 성경에는 양의 문이란 말에, gate for the sheep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양을 위한 문이지요. 양을 위한 문이라 함은, 양의 문, 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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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7/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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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문 되신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10장 1-10절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다시 한번. 맛보기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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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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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다

그리고 목자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목자가 늘 자기들 곁을 지키며 보살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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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rok.org

Date Published: 7/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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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0장7절-8절 “나는 양의 문이라” 2021년 3월25일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양으로서 반드시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양은 절도와 강도의 음성을 들으면 안됩니다.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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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bctl.org

Date Published: 11/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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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0) – 기멀전

이 말의 뜻은 단순한 왕래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크나큰 자유를 의미합니다. 먹고 입는 것만 풍족하다고 축복은 아닙니다. 종으로서 있는 한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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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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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0:1-10) – 뉴스파워

양의 우리는 도둑이나 맹수나 악천후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장소입니다. 옛 팔레스타인에서는 그것이 동굴이거나 아니면 돌로 쌓은 벽이나 혹은 나뭇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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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power.co.kr

Date Published: 4/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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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9.06.23)] / 요한복음 강해(25); '나는 양의 문이라'(송태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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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양 의 문

  • Author: S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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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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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새해를 맞이하여 일월에는 문을 주제로 하여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묵상한 첫 번째 문은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 사도가 옥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게 된 사건을 통해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과 걱정 근심 등 그러한 곳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벗어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여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래야 주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와 같이 거하시며 먹고 마시는 기쁨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묵상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두 가지 문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는데, 오늘은 그래서 세 번째 문입니다.

문이 많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문을 자주 사용하니까, 그런 문쯤은 이제 들고 나고 하는데 이골이 났으니까,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벌써 1절에 문이 등장하지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문이 등장하는데, 어떤 문이냐? 양의 우리, 그러니까 양을 가두어 두고 보호하는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1절부터 5절에 걸쳐 예수님이 말씀을 끝냈는데,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5절까지 기록한 다음에, 이어서 재미있는 말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절).”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이 우리 지금 듣기로는 어려운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이해가 잘되는데, 그 당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듣던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친절한 우리 예수님, 그것을 다시 설명해 주실 수밖에요….

그렇게 7절 이하에서는 1절에서 5절까지 말씀하신 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그 내용이 약간 달라집니다. 뭐가 달라졌을까요? 앞에서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목자’라 하셔서 은근히 예수님이 목자인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또한, 이것은 11절, 14절에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나는 선한 목자라…(14절).”

그런데 유독 7절 이하에서는 다른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앞에서는 예수님은 양 우리를 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오는 목자인 데 비하여, 뒤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양의 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바로 오늘 본문, 즉 10장의 키포인트라 생각합니다. 자, 이제 그 키포인트를 말씀드릴 터인데, 그전에 이것 하나 생각하고 넘어갑시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절).”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고 나오는데 드나드는 문이 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고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다른 데로, 그러니까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다.

그 말은 양을 가두어 놓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사람이 쉽게 넘어갈 정도로 낮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요. 생각해 보면 그 우리는, 그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는 양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사람이 넘어가는 데까지는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 일어나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양의 우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문을 통하여 드나들지 않는 목자 아닌 다른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양은 울타리를 넘어다닐 수 없고, 오직 문으로만 다닐 수 있다. 자, 이런 기초 지식을 가지고 그다음을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

1절에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을 언급하시고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목자다, 라고 말씀하시더니 7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 직접 밝혀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라. 양의 문이라니요? 양의 문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개념이 바로 떠오르십니까? 문이란, 우리가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어느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거쳐 가는 장치, 시설을 말하니까 양의 문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동물인 양으로 들어가는 문,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우리 흔히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문, 차의 문….병원의 문…. 그래서 우리가 흔히 그것을 말할 때엔, 집 문, 차 문, 병원 문, 이런 식으로 줄여 말하는데 양의 문이라면 무슨 뜻일까요? 물론 양의 문을 병원의 문을 병원 문이라고 줄여 말하는 것처럼, 양 문이라 줄여 말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지을 때에 양문 교회, 이런 식으로 짓습니다. 아마 전주에도 양문교회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양의 문이라 할까요? 양이 어떤 장소나 공간이 아닌데, 또 양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다, 하셨으니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데…. 그래서 우리 성경으로는 양의 문이라, 되어 있지만 다른 번역을 찾아보면 무언가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먼저 영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양의 문이란 말에, gate for the sheep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양을 위한 문이지요. 양을 위한 문이라 함은, 양의 문,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양이 들어갈 수 있게 하여 놓은 문, 양을 위하여 만들어 놓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곧 1절에 나오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강도요 절도이지만, 우리의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목자라 했는데, 바로 그 문, 목자가 드나드는 문, 그 문을 7절에서는 예수님이 그 문의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문은 목자만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양도 드나드는데, 내가 바로 그렇게 양이 드나드는 양의 문이다, 그것을 표준 새번역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따라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양이 안전한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이 드나드는 문, 그렇다면 양이 드나드는 문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 문을 통하여 양이 들어가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양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당연히 양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곳은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제 양이 양 문을 통하여 들어간 곳,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것,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바로 9절과 10절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실제적인 필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을 열고 들어가 양 우리에 들어가게 되면 먼저 생명을 얻게 되며, 두 번째로 풍성히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니다.

우리를 벗어난 양은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겨우 목자의 손에 이끌려 다시 양의 우리로 돌아온 사건… 그때 돌아온 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밖을 나가서 맨 처음에는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자와 늑대의 호시탐탐 노리는 죽음의 위협에 어찌 한순간인들 편할 때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하다가 겨우 살아나와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 양의 목숨은 이제 부지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었던 목숨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양이 다시 우리에 돌아온 사건, 그것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풍성하다는 말을 다 아실 줄 믿습니다. 넉넉하고 많다는 의미이지만, 풍성하다는 말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지난번 묵상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묵상에서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였는데, 계시록 3장 17절에 의미 있는 말이 등장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들, 곤고하다 가련하다, 벌거벗었다, 가난하다, 그런 말들이 바로 풍성하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신 다음에 지난주 본문 말씀인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면서 하시는 말씀, 계시록 3장 20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들어가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저는 해석하기를 기쁨에 겨워, 그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해 잔치를 벌이는 그러한 장면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잔치를 벌일 만큼 기쁨이 충만했으며 또한 그래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니만큼 음식이 얼마나 풍성했겠습니까? 그 풍성함이 바로 오늘 본문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오늘 본문 10절 말씀, 내가 온 것은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이 비교급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급이니까 단순히 ‘풍성히’가 아니라 ‘더 풍성히’가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더, 지금까지 얻었던 것보다 더, 양들이 지금까지 우리 안에 있어서 먹고 있던 꼴 그것보다 더, 더 많이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면 생명을 얻게 되며, 꼴 또한 더 많이 더 많이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우리를 뛰쳐나갔다 다시 우리에 돌아온 양을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처럼 그리고 그 양을 애지중지 거두며 보살피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목자로서 양들에게 어떠한 것이 유익한 것인지, 어떻게 해야 양이 생명을 얻고, 어떻게 해야 풍성한 꼴을 먹일 수 있는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양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양의 문이란 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 기억하십니까? 1절을 해석하면서,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 오직 양의 문을 통해서만 우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가 양의 우리에 들어가 푸른 초장을 만끽하며 더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난번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문이라는 것은 여닫는 데 소용되는 것이지, 만일에 그것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문이 아니라, 벽에 불과한 것이다. 문이란 말 자체에 이미 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 앞에 보이는 문은 열려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이 마련해 놓으신 푸른 초장, 풍성한 꼴이 넘치는 그곳으로 들어가십시다.

지난 두 주간, 이번까지 세 번에 걸쳐서 우리 앞에 놓인 문을 보면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문을 열어 주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강조하시기 위해, 또한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우리 곳곳에 문을 마련해 놓으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문을 여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양의 문 되신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10장 1-10절

양의 문 되신 예수/ 요 10: 1-10

유대나라 하면 우리는 양들이 초원에서 뛰놀고 목자들이 양을 이끌면서 이 언덕

저 언덕을 넘어 다니는 그런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목

자와 양이 어울려 다니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성지순례를 하면서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것과 같은 그런

정경을 보고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았는데도 차가 다니는 길가가 되어서 그런지 모

르지만 그런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세상이 하도 많이 변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고 계실 당시에는 예루살렘 주변과 갈릴리 일부 지역이 목초

지로서 유명했습니다. 많은 목자들이 자기 양을 끌고 유유히 걸어다니면서 풀을 뜯

기고 물을 먹이는 그런 평화로운 모습들을 어디서든지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에 왜 저런 말씀

을 하실까 하고 그들이 의아해 했을 정도였습니다.

목자들은 하루종일 양을 먹이고 나서는 해가 기울고 어두움의 그림자가 다가오면

자기 양들을 몰고 공동 우리로 온다고 합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자기 개인 우

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자들은 여러 가정이 합해서 공동 우리를 만

들어놓고 양들을 그 우리 속에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돌담을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 만드는데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떼들을 문으로

다 들이고 나면 그 문 옆에는 문지기가 있어 밤새도록 그 양들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하나 둘 나와서 문지기의 확인을 받고 우리

안에 들어가서 자기 양을 부릅니다. 수십 혹은 수백 마리 양 가운데서 눈으로 자기

양을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자기 양들만 알아들을 수 있

는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그 목자가 자기 목자라는 것을 아는 양들은 전부 그 목

자 앞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참 멋있는 풍경입니다. 자기 양의 수가 조금 적은 경

우에는 가끔 양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목자의 소리를 듣

고 그 목자의 양들은 전부 모인다고 합니다. 이제 목자가 문을 나와서 초원을 향해

가면 그 목자의 양들만 우르르 따라 나갑니다. 그러면 또 다른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불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을 알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에다 비

유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은 막연히 짐작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기독

교의 가장 본질적인 진리가 그 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왜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다시 한번

맛보기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

왜 예수님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 하실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생

명을 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9절로 넘어가 봅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렇

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구

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10절은 그 의미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

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왔다.”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은 쉽게 말해 ‘생명

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

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

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칠 팔십 년이면 다 소진해서 없어지고 말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생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

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인 것입니다. 육

신의 생명은 왜 영적 생명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영생으로 이어지지를

못할까요?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이 진리를 간결하고 또 확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

하였느니라.” 한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사람 위에 죽음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

외가 없습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서울 장안에만 해도 하루에 463명의 어린애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매일 500여명

의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

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의 씨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태어

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

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제 아무리 죄인이 아닌 것처럼 가장해도 속이

지 못 합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있다고 해도, 성자나 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해도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 가운데서 갑자기 인물이 예뻐지고 맵시가 나는 사람을 보면

다들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아, 성형수술 받았구나.” 주저앉은 콧대가 우뚝 솟

고, 옆으로 찢어진 실눈에 쌍꺼풀이 예쁘게 드리워진 것을 보면 “성형수술 받았구

나. 어디서 받았니?”하면서 다들 부러워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참 좋은 세상인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아름답게 보이면 그것도 천국의 일면이겠지요.

그러나 이 다음에 태어날 자식이 문제입니다. 자기는 성형수술을 해서 코를 높이고

눈을 똥그랗게 만들고 광대뼈를 깎아내고 해서 아름답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식

만큼은 어쩌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아기가 배속에서

성형수술을 받고 태어날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의 원래 모양을 닮아

납작한 코나 실눈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형수술로 흉한

모습을 감추려해도 자식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배속에서 교양을 배워서 나올 리도 만무하고,

죄인이 아닌 것처럼 특별한 옷을 입고 나올 수도 없습니다. 못 속입니다. 자녀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나쁜 생각들이 그 아이들을 지배하고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

까? 그리고 그들 역시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

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단순

히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값을 하나님 앞에서 받

아야 되는 무서운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 필요

합니다. 여러분의 연세가 얼마인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

관이 없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은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못 받으면 망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천

만의 말씀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불꽃을 훔쳐

올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엡2:5).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시체가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살아납니까? 우리가 시체에게 기대할 수 유일한 것이 있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천만

에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영적 생명을 얻습니까? 천만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찾아와야 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 문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 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고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심어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우리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드디어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

듣게 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너무나 고귀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때 이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

다. 할렐루야!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 확실히 믿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오늘 귀한 말씀을

바로 여러분에게 들려주셨다고 봅니다.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나에게 오면

내가 영생을 주겠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

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데 여러분이 돌아서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 다 구원

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 주

변 서초동 일대만 해도 90 퍼센트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이 필요한데도 예수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들

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생명을 그들도 값없이 얻는

축복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

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

도밖에 없습니다. 양의 우리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

지 아니하고 담을 넘어가면 그는 강도요 절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보다 앞에 온

모든 사람은 강도요 절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오해하면 안됩니다. 구약 시대에 온 모든 선지자들을 두고 절도

와 강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눈을 뜨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귀한 형제를 유대

나라 사회에서 축출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강도요 절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자칭 ‘메시야’ 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던 사

람들을 두고 강도요 절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 우리의 문은 하나 뿐입니다. 누구든지, 심지어 목자라 해도 그 문으로 들어와

야 됩니다. 양이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문 말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담을 넘어가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니라 강도

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

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데, 세상사람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독선주의니 배타주의니 하며 기독교를 욕하고 비방합니다. 그들 생각에는 다원주의

사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따

라서 어느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좋겠

는데, 기독교는 유달리 타종교를 배척하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주장

하니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중에는 이런 독선이 싫어서 예수를 믿

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이만재 씨가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앙케트 조사한 것을 토대로 <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가 다 아는 상식적인 것들인데,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소개해 드리

겠습니다. 교회 가기 싫은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인 것 같다. 타종교, 타 종파를 존중할 줄 알아야 내 종교 내 종파도

존중받는다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말씀에서 그 이웃

은 이웃 종교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특유의 종교 이기주의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교회 안 간다.”

그러나 우리는 존경한다는 것과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한

다는 것과 진리를 혼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타종교의 지도자들도 존경합니다. 우

리는 불교 믿는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또 나름대로 각 종교에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수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하

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억지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존경하느니, 사랑하느니 하는 이런 값싼 이론 때문에 진주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돼지에게 던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 아내가 내 아내이고, 내 아내가 당신 아내이니, 기분 좋은 대로 삽

시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존경한다, 사랑한다, 관

용한다 하는 말 때문에 뒤섞어 놓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아무도 안 합니다. 진리

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

니다.

지난 성탄절에 불교 방송에서 머리를 깨끗이 깎은 스님 아나운서가 “세계의 성인

중의 하나인 예수가 탄생한 것을 축하합니다.” 하고 축하 방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흥분해 가지고 카톨릭의 어떤 얼빠진 신부는 감사의 답례를 한다고 요란을

떨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또 어떤 뉴스 앵커는 “드디어 모든 종교의 벽이 무너지

고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시발점이 시작되었습니다.”하고 흥분해서 소개를 했습니

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말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창시

자들을 보십시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은 분이 예수님 외에 누

가 있습니까? 날 위해서 피 흘려 죽었다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당당하게 인도할 권한을

가진 권한을 가진 구원자가 예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양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바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말하는 것이 바른 진리

라면 설혹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이나 미움을 받는다 해도, 심지어 순교

를 당하게 된다 해도 우리의 주장을 굽히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훌륭한 장로였

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

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솔직하게 말하라.” 이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 뜻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못된 놈, 참

람하고 건방진 놈.” 하고는 야고보를 끌어다가 저 높은 벼랑에서 집어 던졌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 할 지라도 굽혀서는 안될 진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분명

히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말만 들으면 비위가 상하는

분이 계십니까? 관용이 많고, 너그러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닙

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 손에 있는 보석은 가짜요.”라고 말하면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내 것은 진짜”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주장해도 지나친

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라고 우리가 주장한다

고 해서 속이 좁은 것도 아니고, 배타적인 것도 아닙니다. 바른 것을 말할 뿐인 것

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자

입니다.

풍성한 생명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

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꼴을 얻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 초장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로 출입하는 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더 다른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10절입니다. 10절 중간을 보십시오. “내

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

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놓고 손을 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에서 건져 주고는 “이제 당신 맘대로 하시오.”하고는 일어나지도 못하

는 사람을 그대로 눕혀 둔 채 그 자리를 떠나는 냉혹한 구조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 지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고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몸에

포도주와 기름을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이 알아서 집으로 돌

아가시오.”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내팽개치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약대에다가 그 환자를 싣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간호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공무상 부득불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어 자기

대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간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습니다. 그 사

마리아인은 곧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는 손을 털고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십

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풍성하도록 계

속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마음속에 양의 문을 드나들면서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양의 행

복한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다윗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나를 초

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2). 날마다 목자를 따라 푸

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생명이 터질 것 같이 풍성해지는 것

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말을 오해하고는 예수님께서 만사

형통케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단보다도 더 큰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그런 해석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

십시오. 예수를 믿었다고 만사 형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예

수님을 믿고 만사 형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은

절대 안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만사 형통하게 되

면 영적인 생명이 건강해 지기보다 병들어 버릴 가능성이 십중팔구로 큽니다. 그래

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사 형통하게 해 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하면 어떤 분은 이런 찬송도 있지 않느냐고 말할 지도 모릅니

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

라.”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찬송의 원래 가사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찬송가

를 작사한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라는 부인은 맹인으로 일생 동안 수천 개의

찬송시를 쓴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라고 칭송을 받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사를 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문을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잘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바꾸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번역

하는 사람이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교에서 자주 말하는 식으로 “만사

형통 하리라”하고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가사는 빨리 고쳐야 됩니다.

고쳐야 되는데 안 고치니까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예수 믿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기만을 바라는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

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세상에서 만사 형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병원에 가서 보면 오랫동안 병상에서 고

생하는 환자는 숨만 빨딱빨딱 쉬고 있습니다. 분명히 생명이 붙어 있긴 하지만 그

들에게서 생명의 활력이나 풍성함, 능력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지칠 줄 모르고 뛰는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생명은 숨

만 빨딱빨딱 하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일하고, 창조하는

모습 속에서 활화산같이 타오르는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집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엄마가 주는 대로 잘 먹고, 또 힘있게 뛰놀고 하니까

그 애가 자라면서 생명이 터질 것처럼 풍성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이런 생명입니다. 그저 숨만 발딱발딱 쉬다가 천당이나 들어갔으

면 좋겠다 하는 그런 빈약한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을

때 잠깐 기도하는 것 말고는 생명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주님

은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으면 그 생명의 풍성함을 맛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서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먹고 성령의 생수

를 맘껏 들이키며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받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숨만 빨딱빨딱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생명이 과연 풍성한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스로

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까? “주여 믿

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불안이나 두려움이 떠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의 마음에 자유함이 없습니까? 번번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게 끌려 다닙니까?

그런 대로 살고 있는데도 만족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아직 어린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이 어리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얻어야만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이 더 풍성해지면 우리는 이팔 청춘의

젊은이들과 같이 약동하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생명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 역시

매우 풍성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설혹 내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도 우리 마음에서 평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족합니다.

어느 제자 반에서 저에게 카드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제자 반을 대표해서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들 모두의 생각을 담은 것 같습니다. 그 카드에 이런 글

귀가 있어서 제가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아직도 많이 부족하

지만 이제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생겼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

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하루하루를 살게 되었답니다.

한 때 가시로 생각되었던 고통까지도 이제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영적 생명이 풍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이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아도,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는 고통

이 떠나지 않아도 그것이 그 사람을 억압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의 불을 끄지 못합

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는 늘 불안이 없습니다. 주님이 잘해 주실 것이라고 믿으니

까 마음이 평안해합니다. 절대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서 모자라는 것도 많지만 자족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명이 풍성해져서 사십대의 성인처럼 믿음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가진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몽땅 내어놓아도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

끼게 됩니다. 무엇을 얻어서가 아니라 내 것을 다 주님께 드리고도 오히려 더 기쁨

이 충만하고 평안하고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믿음의 최고 경지라고

할 것입니다.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목사님.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라고요? 옥 목사님도 그러지 못하면서 왜 그러세요?” 그

말이 옳습니다. 저의 믿음도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의 수준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습니

다.

저는 요즈음 저를 방문하는 선교사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분들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다 배울 만큼 배운 지라 이 사회의 어느 분야에 가서도 제 몫을 할만한 사람

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위 말하는 세상에서의 출세도, 자녀를 공부 잘 시켜

일류대학에 들여보내겠다는 꿈도, 자가용도 굴리며 온 가족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다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아프리카나 중동 아시아, 혹은 동남아 오지

로 가서 말라리아와 모기와 싸우면 서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며 하나님의 말씀

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아직 30대 중반밖에 안된 사람

인데도 그 얼굴에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가 있습니다. 한국에 와 가지고 안식년을

하면서 살집이 없어서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도 그들의 눈빛이나 말에 범할 수 없

는 기쁨의 광채가 서려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너무나

크게 때문에 자기 것을 다 주님 위해서 포기 한 다음에 누리게 된 마음의 평안이

요, 자유함이요, 만족이었습니다.

우리의 찡그린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주여 주옵소서. 주옵소서.” 하다가 보니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안 준다고 조르고 있으니 그 마음이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

까? 그 마음이 무슨 자유함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많이 받아먹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생수를 밤낮 없이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매일매일

받다보면 주님이 나에게 심어주신 생명이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

에는 내가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도 “할렐루야” 하고 춤추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

다. 그 사람을 누가 범하겠습니까? 그 사람을 누가 꺾어 놓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

는데도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자유 하는 사람을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습

니까?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으로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

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풍성함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좀더 멋지게 한해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

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0)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7-9)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10)

10장의 말씀은 9장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로써 하신 교훈입니다. 1절에 ‘진실로 진실로’란 귀절로 시작되는데 이 말은 대개 앞선 이야기를 부연 설명할 때 나타납니다. 바로 앞서서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의 결과로써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은 전체적으로 양과 목자의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개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양의 문이고, 둘째는 양의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와 절도 강도, 예수께 속한 양과 다른 목자에 속한 양,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와 담 넘어 들어오는 자, 선한 목자의 목적과 도적의 목적 등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 이런 비유를 하셨을까요? 눈을 뜬 맹인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게 되었는데, 오히려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참 목자를 알고 따르는 것이 인생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문으로 들어가는 자와 담 넘어 들어가는 자

첫 번째 비유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 온 자와 담 넘어 들어 온 자의 비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본문의 핵심은 지도자의 정당성 여부입니다. 정당한 경로를 통해서 온 목자와 부당하게 나타난 지도자를 비유한 것입니다.

당시에 양을 치는 사람들은 공동으로 양의 우리를 만들고 밤이 되면 각 사람의 양들을 한 우리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문지기를 세워 밤새도록 지키게 했습니다. 이런 양의 우리는 대개 동굴이나, 나무나 돌로 높은 울타리를 쳐서 만들었습니다. 대개 문은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문지기가 지키는 문을 통과 해야만 합니다. 만일 양 우리에 문을 통과하지 않고 넘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도둑놈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가리키는 바가 무엇일까요? 양의 우리는 유대 사회입니다. 문지기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입니다. 반대로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는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가 지도자로 세운 적도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를 스스로 지도자 위치를 차지했을 뿐입니다. 정당성이 없는 지도자일수록백성들을 부당하게 탄압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1-7)

그러나 실상 거짓 지도자들의 문제는 지도자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양들에게 있습니다. 거짓 지도자들이 많든지 적든지 속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양들이 속고, 약탈당하니까 문제입니다. 우리는 현명한 양들이 되어야만합니다. 정당하게 오신 예수님과 담 넘어 들어온 거짓 종교인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이시며(창3:15),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이시며(창12:3,삼하7:), 유월절 양이시며(출12:), 속죄 제물이시며(레), 성전이시며(히),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시며(민), 처녀에게서 나셨으며(사7:1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요1:),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과 안나가 증거했으며, 세례 요한과 제자들의 입으로 증거를 받으신 메시야십니다. 이 예수님과 거짓 목자를 구별치 못한다면 양은 목숨을 지킬 수 없습니다.

거짓 목자의 문제는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정당히 보내신 목자들인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 주님의 목장에 담 넘어 들어 와서, 양들 위에 군림하는 절도나 강도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구별할 줄 아는 눈이 있다면 여러분은 평생토록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눈이 어두워 담 넘어 온 자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구별치 못한다면 평생 거짓 목자의 채찍 아래서 영적으로 신음할 것입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

두 번째 비유는 양과 목자와의 관계입니다. 양과 목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3-5)

첫째로,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분별할 만 한 관계입니다. H. V. Morton이라는 분이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베들레헴 근처에서 매우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목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떼들과 함께 동굴에서 밤을 새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양들은 모두 섞여 있었고 목자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 시간이 됐습니다. 둘 중의 한 목자가 양 무리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서서 양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이름을 부르니까 댓 마리의 양이 그들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의 양들을 다 불러냈습니다.”

George Adam Smith란 사람도 서너 명의 목자가 이런 방식으로 양들을 구별해 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있습니다. 양떼들은 서로 섞여 있다가도 자기 목자가 부르면 그 음성을 알아듣고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불러냅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내셨고, 양들은 각자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모시고 교통하기 때문에 피차 모르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예수님을 모르고도 단체로 천국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맺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의 옷자락을 잡고 천국의 일원이 되려는 생각은 당장에 버려야만 합니다. 부모형제가 교회 장로 권사라고 덩달아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천국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로 천국에 들여보내는 일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개별적인 교제 관계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서로 알고 대화 할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 내가 속한 교회의 목자와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요즘은 상업주의 물량주의의 흐름에 따라서 교회도 대형화의 추세를 밟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도 사이의 횡적인 유대관계도 없고, 목자와 양 사이의 유대관계도 없는 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천국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성도를 모르고 성도가 예수님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꾼’이 아닙니다. 교인들 역시 설교의 ‘청취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마다 목회 철학이 있고, 인생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습니다. 양들을 돌아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 교회의 목자가 어떤 사상과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지 알고 따르면 복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와 좋은 훈련을 다 받고도 배반자가 돼버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설교자와 청취자의 관계에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먼저 예수님과 일대 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다른 사상가들의 음성과 구별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목자와 이름을 주고받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분별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양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둘째로, 목자는 앞서 가고 양은 뒤따라오는 관계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수만 마리의 양떼들을 개를 동원하여 뒤에서 몰고 가는 목동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그렇게 많은 양들도 없거니와, 양떼를 뒤에서 몰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양들의 이름을 외울 만큼의 양들을 내어 놓고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뒤따라갑니다. 목자가 양떼들의 길을 안내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이 가는대로 따라가지 않고 목자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해 갑니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목자보다는 양이 앞서갑니다. 간혹 잘 나가는 교회가 있어서 보면 개가 양 몰 듯이 몰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든 것이 알려지고 공개되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목회 방식, 교회 형편 등등. 교인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교회를 선택할 기회가 있습니다. 상업주의, 소비자 중심 사회에 익숙해진 교인들은 교회도 얼마든지 쇼핑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쇼핑하고, 교회도 쇼핑합니다. 좋으면 택하고 싫으면 떠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인들은 아주 똑똑합니다. 목자보다 잘난 양들이 많아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목회자는 전반적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저나 제 동역자들이나 다 모자랍니다. 두뇌도 모자라고, 지식도 모자라고, 인품도 모자라고, 능력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자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면 모자라는 목회자에게 순종하며 따를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자라고 부족한 지도자를 통해서, 모자라는 방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문제는 양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양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양을 목자 위에 세우시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원리를 바로 알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앞서가는 목자를 따라가는 교회, 그것이 양들의 축복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본문의 세 번째 비유는 주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 주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문의 개념에 대해서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

그래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의 말씀으로 다시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7-9)

앞서서 주님은 자기를 양 우리에 문으로 들어온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자기 자신이 곧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예가 많지요? 주님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이시요 동시에 진리 자체십니다. 주님은 생수를 주시는 분이시요 동시에 생수 자체시고, 영생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생명의 떡 자체십니다. 예수님은 정문으로 양 우리에 들어오신 유일하신 분이시며, 동시에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신 것은 교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문의 위치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통하는 문인가 하면 바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십니다. 주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종말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주님을 통해서이고, 현재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도 주님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보물섬’이나 ‘십오 소년 표류기’, ‘톰 소여의 모험’, ‘헉클베리핀’ 같은 모험 소설을 즐겨 읽었습니다. 내 형편이 그랬습니다. 형제자매도 없고 가족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항상 freelancer였습니다. 그런 책을 읽고 나면 항상 망상에 빠집니다. 나도 뗏목을 타고 강을 내려가다가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살면 어떨까? 거기에 혹시 실버 선장이 감춰둔 보물 상자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보물 상자가 있는 동굴로 가는 길을 어디일까?

천국이 그렇습니다. 그 천국에는 자유가 있고, 온갖 보화가 가득합니다. 생명, 건강, 먹고 입고 거하는 아름다운 거처, 가장 멋진 경치, 영원한 평화, 사랑, 신뢰,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보화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천국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은 에덴으로 들어가는 문을 폐쇄하셨습니다. 천사들을 세워서 사람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창3:24) 하나님은 인간과 단절하셨습니다. 그 막혔던 천국의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게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에 빈들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잤습니다. 그는 꿈에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이 죄악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하늘의 문이요, 축복의 문이십니다.

둘째로, 문의 유일성입니다. 9절 말씀 중에 ‘나로 말미암아’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Murray나 Bultmann같은 신학자들은 이 귀절은 예수의 문으로서의 ‘독점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 이외에 이 세상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또 다른 문이 있는가? 없습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의 문입니다. 물론 자칭 사람들이 만들어 낸 길은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바른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소위 ‘선한 사람들’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 많다. 선한 남자, 선한 여자, 정직한자, 율법의 준수자, 부모를 공경하는 자, 간음치 않고 도적질 않고 거짓 증거 하지 않는 자,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조항들을 준수하는 자 등등. 그렇다고 해도 이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은 아니요, 이방인이라 할 수밖에 없다. 정당하게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데, 소위 말하는 선행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열어 주신 문을 거절하고 각자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께 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문이 있는데도 그리로 들어가지 않고 굳이 다른 문을 찾아 헤매는 것이 바로 부패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께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능력 있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하나님의 ‘하’字도 모르고 주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스스로 찾는다거나 혹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시14:1)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는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문을 통하여 당당하게 드나드시기 바랍니다.

도적이 오는 목적과 주님이 오시는 목적

본문의 네 번째 비유는 주님의 목적과 도둑의 목적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첫째로, 도적이 오는 목적입니다. 도적은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10) 도적은 양을 정당하게 소유하지 않고 훔칩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본문에 죽인다는 말은 단순히 죽인다(kill)는 의미가 아니라, 양식을 삼기 위해서 희생시키는(to sacrifice, or to kill for food) 것을 의미합니다. 도적에게는 양을 위한 목적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이익을 챙길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양떼를 멸망시키고 맙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 앞서서 온 자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원문상에 보면 ‘they were’라고 하지 않고 ‘they are’라고 했습니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왔던 지도자들이 절도요 강도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입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이용하여 재산을 모으고 로마 정권과 적당히 결탁해서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양들의 형편은 전혀 생각지 않고 지킬 수도 없는 법을 만들어 백성들 위에 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명령만 내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요, 천국 문을 가로 막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남들도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23장) 이들은 다 참 목자 예수에 앞서서 불법으로 우리에 넘어 들어온 강도들입니다.

둘째로,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목적은 생명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9)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저는 10절의 말씀을 읽을 적마다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그런데 그 생명은 겨우 숨 쉬고 연명하는 정도의 생명이 아니라 갈수록 더 풍성해지는 생명입니다. 살아 있다고 다 생명은 아닙니다. 병상에서 인공호흡기로 연명한다면 살아 있으나마나 입니다. 힘차게 일하고 뛰는 생명력, 죄를 이기고, 악의 영들을 이기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힘차게 뛰는 생명력, 바로 그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주님은 오셨습니다.

둘째 목적은 꼴을 먹이시는 일입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무한한 꼴을 얻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꼴’이란 말은 단순한 육의 양식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크고 중요한 꼴, 우리에게 날마다 주시는 영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혼을 구하지 못하는 인간의 사상과 지식들이 많습니다. 썩는 양식입니다.(6장)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평강과 기쁨! 육신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심은 물론, 영혼에게 필요한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시23:1)

셋째 목적은 자유입니다. 주님은 진정한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9절에 있는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집니다. 이 말의 뜻은 단순한 왕래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크나큰 자유를 의미합니다. 먹고 입는 것만 풍족하다고 축복은 아닙니다. 종으로서 있는 한 행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오가면서 축복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과, 꼴과, 자유를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10:1-10) :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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