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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목사 요한복음 13강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요한복음 4:16 – 26
성경읽기는 지루하다? 성경공부는 어렵다? No!\r
\r
좋은 선생님과 좋은 학생들이 함께 하는 즐거운 성경공부시간!\r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CBSBible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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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뜻은(요 4:23~24)? – 기독일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그래서 십자가에 실현된 대속구원의 은혜로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신자가 그 구원에 감사하고 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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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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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하다 < 일반칼럼 < 칼럼 < 기사본문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영과 진리란 두 가지를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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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scoramdeo.com

Date Published: 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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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1) < 신앙의 기초 ... - 크리스찬저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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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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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린 예배자 (1)

먼저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in spirit, 영적인 예배를 뜻한다. 헬라어로 프뉴마. 프뉴마는 영, 영혼, 성령을 뜻하는 단어다. 그래서 영으로 드리는 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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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review.com.au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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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Faithlife Sermons

우리가 기존에 영과 진정으로 예배하다’라고 말할 때는 주로, 예배의 태도과 관련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신령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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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ermons.faithlife.com

Date Published: 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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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실제” – 에큐메니안

우선 영으로 드리는 예배, 영은 단순히 마음을 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영은 아무 영이나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 영은 특별히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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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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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개혁정론

따라서 요한복음 4:23-24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삼위일체적인 예배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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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formedjr.com

Date Published: 2/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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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교 – 다국어 성경 Holy-Bible

개역개정,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원문보기. 개역한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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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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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 당당뉴스 모바일 사이트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어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고 그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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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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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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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5.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z5pCEriZi8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뜻은(요 4:23~24)?

[질문]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한 신학자는 ‘영 따로 진리 따로“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신학자는 영과 진리는 히브리 원어로 뗄 수 없어서 ”진리 안의 영“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뭐가 정답인지 몰라 여쭙니다.

[답변]

질문은 두 가지로 나눠지네요. 우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부차적으로 영과 진리가 각기 다른 뜻인지 연결된 뜻이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의 뜻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다가 지금도 또 다른 남자랑 사는 한 불쌍한 여인을 만나서 천국복음으로 전도했습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오셨다고 전파함으로써 주님께 받은 은혜에 반응했습니다. 상기말씀은 그런 전도과정 중에 참된 예배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이 내린 결론입니다.

여인이 자기 과거는 물론 현재의 형편까지 꿰뚫어 아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평소에 궁금해 하던 예배에 관해 질문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만 한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드리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21절)고 대답했습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했으니 지금껏 사마리아나 유대에서 드려졌던 예배는 둘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열납하는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둘 다 율법이 규정하는 최소한의 의무사항만 채우는 형식적 가식적 예배였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절) 예수님이 마치 유대의 예배는 옳은 것처럼 이어서 말씀하셨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북왕국은 자기들만의 율법으로 따로 오경을 저작했으며 그리심 산에도 별도의 성전을 세웠기에 구약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성전 한곳에 모여서 예배드리라고 명령했고, 또 메시아가 유대 다윗 가문을 통해 나온다고 약속했습니다. 남왕국은 그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설명한 것뿐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며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했으니 현재 남왕국의 예배도 참된 예배가 아닌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마리아든 유다든 그때까지 드려진 예배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한마디로 동물 제물로 죄 사함을 받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용서로 죄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럼 새롭게 드려야 할 예배는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시작되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장소, 인종, 나라, 문화, 종교 등의 구별 없이 모든 열방으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대속구원이 완성된 후에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참 자녀가 된 자들이 드리는 예배에 대해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또 그런 예배만 열납하실 것입니다.(21-24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1-14)

영과 진리란?

영과 진리의 의미에 대해선 질문하신 대로 원어의 문법적 구조부터 살펴봅시다. 우선 ‘영’과 ‘진리’는 등위접속사로 연결되었기에 각기 다른 뜻입니다. 영어성경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in spirit and in truth” 혹은 “in spirit and truth”로 번역되었지 “in spirit of truth”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확대해서 “진리 안에서 영”이라고 해석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예배를 드릴 자는 당연히 십자가 복음의 참 진리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으로 예배드려야 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영과 진리로”라는 문구도 두 가지 뜻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먼저 본문대로 “영과 진리로”는 그 둘이 예배의 수단 내지 통로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영과 진리 안에서”로 번역해도 되는데 예배드리게 된 근거와 범주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쨌든 본문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할 주체를 사람이라고 밝혀 놓았으니까 둘 다 예배자가 예배드리는 마음의 자세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일차적인 뜻은 사실은 단순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유일한 청중인 그 여인은 아직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모르고 있고 설명해주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그녀가 질문한 의도와 영적수준에 맞춰 대답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때’는 지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성령의 권능으로 공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당시이지 십자가에 죽으신 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율법의 진리를, 성전예배를 어떻게 드려야하는지도 포함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제정한 정신과 목적에 비추어서 정확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마5:23,24 7:21,22 막7:11 등) 실제로 당신께서 온전히 준행하는 본도 보여주었습니다.(성전정화 사건)

따라서 당시의 형식적 외식적 예배를 당장 중지하고 지금이라도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영으로 즉, 진실한 마음의 중심(원어로도 성령이라고 보기 어렵고 단순히 이런 뜻임)을 다 바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로 즉, 율법 특별히 제사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정확히 아는 차원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의 신약 신자에겐 그 의미가 조금 더 확장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순전한 관계를 맺고서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와 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그래서 십자가에 실현된 대속구원의 은혜로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신자가 그 구원에 감사하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기로 헌신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수로 인해서 새로워진 영으로만 교제는 물론 예배가 가능합니다. 십자가 구원 진리를 모르고 그 은혜로 영이 변화되지 않은 자가 드리는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고 당연히 하나님에게 열납되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모든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렇듯이 종말론적으로 확대 적용해도 됩니다. 예수님 오신 이후의 모든 예배에는 히브리서 기자가 선포한 대로(앞에 인용한 말씀)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천국의 영원한 성소가 예표 상징 구현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드리는 예배는 물론 모든 신앙 행위에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으로 실제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요컨대 예수와 연합한 신자가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바치면서 음란한 이 세대와는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2021/9/17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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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호

영과 진리로 예배하다

▲ 정현구 목사 /서울영동교회

성경은 우리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합니다. 이 구절이 이전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 내용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령’(종교적 분위기)과 ‘진정’(우리의 정성)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주님이 예배에서 강조하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을 바로 알고 예배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예배하는지를 잘 모르고 열심히 예배하는 것이나, 참 하나님을 그릇되게 예배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의 대상이 아버지이시며 또한 영이시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인격적인 아버지시요, 특정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시는 분이시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분께 어떻게 예배하는 것이 ‘참되게’ 예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요 4:23-24)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영과 진리란 두 가지를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진리로 이끄시는 영 안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로 이끄십니다. 그 하나님께로 이끌림을 받는 예배라면, 우리는 참된 회개를 드리게 됩니다.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 예배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는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 이끄시는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마음입니다. 왕에 대한 경배가 진정한 경배가 되려면 순종의 태도가 필수입니다. 이것이 없는 경배는 경배가 아니라 왕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회개하는 예배, 순종하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1)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3-24).

예배의 기준

요한복음 4:23-24은 신약시대의 참다운 예배에 관한 예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위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는 말씀을 교회 주보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개역성경에는 “영과 진리” 대신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배할 때 정성을 다하고 엄숙하게 드리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그 본래의 의미를 왜곡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된장찌개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해 주일마다 정성스레 된장찌개를 끓여 드렸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김치찌개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허무한가? 아무리 정성과 노력을 다해도 하나님의 뜻과 다르면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기에, 그분의 뜻을 따라야만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즉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며 기준이기에, 여기에 맞추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

요한복음 4:24의 “예배할지니라”는 “예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어로 “must”로 표현되어 있을 만큼, 반드시 그렇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영과 진리에 대한 예배를 정확히 알고 이해해야만 한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예배할 때”를 언급하시며, 참된 예배는 어떤 장소에서 행해지는 희생제사가 아니라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가르쳐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대속 제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가 필요치 않고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고 하며, 당시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할례파들을 향해 성도의 참다운 특징들을 말했다. 참다운 성도는 첫째, 성령으로 봉사(예배)하는 자이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이며,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이다. 바울이 언급한 “성령으로 봉사하며”는 헬라어 원어성경에선 라트레우오(latreuō, 하나님께 봉사하다, 즉 종교적인 경의를 표하다, 섬기다, 예배하다)로 “성령으로 예배하며”를 뜻한다. KJV 영어성경에는 “worship God in the spirit,” ESV에는 “worship by the Spirit of God”로 번역되어 있다. 즉 참다운 성도는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를 뜻한다.

칼빈의 예배 핵심 역시 성령의 임재였다. 그는 언제나 예배를 시작하기 전과 성경을 낭독하기 전, 그리고 성찬을 집례하기 전에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다. 예배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 때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시편을 통한 예배를 드리고 강조했다. 시편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이다. 즉, 성령께서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부흥과 예배에 관련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부흥』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을수록 예배는 형식화되었다. 반면 신앙이 회복될수록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었다.”고 말했다. 예배에 형식이 필요하지만, 예배 형태가 형식적이고 의식적이 된다면, 성령의 역사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예배는 형식적이 되고 영적 침체기에 빠져들지만, 부흥이 일어나면 성령께 속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쇠퇴하는 20세기 영국교회들을 향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예배에서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참고로, 2005년 England Church Censu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사람이 전체 인구의 71%였지만, 실제로 주일마다 교회 나간 사람은 1979년에는 12%, 1989년에는 10%, 2005년에는 6.3%로 계속 감소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교회에서 부흥이 떠나면 성가대를 강조합니다. 돈을 주고 성가대를 사 오기도 합니다.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 찬양 좋았어,라고 평가합니다. 성가대가 성도들을 위해 노래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안 합니다. (…) 더 나아가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시점을 향해 모든 일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지 모두 짜여져 있습니다. (…)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순서지에 적힌 대로 하라고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한 다음 12시에 축도를 합니다. (…)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이처럼 묶어 놓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는 당시 영국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형식적이지 않았다. 성령에 의해 예배가 드려졌기 때문에 즉흥성이 있었고, 사람들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배가 형식적이 되면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게 된다. 형식적인 예배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와는 거리가 멀다.

존 파이퍼 목사도 그의 책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예배의 의식적인 부분이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배는 절하고, 손을 들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암송하고, 설교하고, 먹고, 정결하게 하는 의식들”이라며, 파이퍼 목사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헛된 일이 될 수 있다.”라고 우려한다.

성령에 의한 예배는 저절로 드려지지 않는다. 그런 것이라면, 칼빈이 예배 중에 성령의 임재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세 번이나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배의 형식과 의식이 성령님보다 우선할 수 없다. 성경은 예배의 순서대로 예배하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실제”

19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20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2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22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23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복음 4:19~24/새번역)

수없이 들었고 외울 만큼 익숙한 말씀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어떻게 드린다는 뜻입니까? 너무 익숙한 말이지만, 익숙한 만큼 뜻이 명확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대략, 진심을 다해 드리는 예배 정도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맥락 안에서 영과 진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뜻을 깨닫고 몸으로 익힐 때, 참 예배는 피어날 수 있습니다.

우선 영으로 드리는 예배, 영은 단순히 마음을 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영은 아무 영이나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 영은 특별히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악한 영, 미련한 영, 세속의 영을 따라 마음을 다해서야 어찌 예배이겠습니까. 두려움의 영, 집착와 욕망의 영에 붙들려 최선을 다한다면 어찌 참된 예배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순간, 자신의 영이 어떤 상태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야 합니다. 옷을 살피고 머리스타일을 살피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마음과 영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으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주신 성령께 오롯이 맡기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 단해감리교회 앞에 뜬 쌍무지개 ⓒ하태혁

하나님 주시는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진리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때 진리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철학이 이 단어의 의미를 어렵고 부담스럽게 만든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있는 그대로를 진실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흰색을 하얗게, 검은 색을 검게 보면 그 역시 진리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마음에 찾아오면,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진실을 바라보며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리를 해도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와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오늘 본문 말씀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는 언제라고 하셨습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고 있는 “지금”,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성전에 찾아가는 어느 특정한 날이 아닙니다. 지금 이 만남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일주일의 하루, 주일날 예배시간만일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 칠 일, 365일의 모든 지금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마주한 바로 지금, 주님께서는 성령의 가득하십니다.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말을 섞지 않았습니다. 이방민족과 피가 섞인 그들을 천시했습니다. 게다가 랍비가 여자와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사마리아인, 그것도 여인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눕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신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가득하신 주님의 눈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다르게 보인 것입니다. 상종 못할 부정한 사람,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하는 한 영혼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눈이 열린 신앙인의 보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지금 그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유대인들의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정한 사람, 부정한 사람을 나눠 차별하지 않습니다. 죄의 많고 적음을 저울질 해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보여주시는 진리 그대로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보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바로 이 모습이 아닐까요? 언제든 바로 지금, 앞에 있는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영이 보여주시는 진리 그대로 사랑하는 예배가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구별하여 드리는 예배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그리심산과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다 폐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구별된 하루, 특별한 공간의 예배를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일상이 모든 공간, 모든 시간으로 확장시키신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라면, 일주일의 하루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월~토요일 모든 날로 흘러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이 곧 예배가 되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 찾으시는 예배자입니다. 그렇게 예배드리는 신앙이라면, 교회에 나와서 특별한 날에 드리는 예배 형식에 갇힐 리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영이 보여주시는 진리를 따라 자유롭게 드릴 것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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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우병훈 교수

(고신대, 신학과)

(요 4:23-24)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서 한 여인을 만나 대화를 하신다. 그 여인은 벌써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사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닌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잘못으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아니면 남성위주 사회의 희생으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여인은 분명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고(6-7절. 대낮에 물을 길으러 감), 또한 내적인 갈급함이 있는 사람이었다(15절.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이 여인과 대화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어떤 이는 전도, 어떤 이는 대화의 기술, 어떤 이는 치유라는 측면에서 이 대화를 주목한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에 하나는 바로 예배에 대한 것이다. 대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참된 예배에 대해 주제가 좁혀진다. 사실 예수님은 예배라는 주제가 나올 때까지 대화를 계속 이어가다가 그 주제가 나오자 일종의 강설을 베푸신다(21-24절).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참된 예배자와 참된 예배, 바로 그것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가능해졌다. 이것이 이 본문의 참주제이다.

그렇게 본다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3-24절이고, 그 중에서도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한 말씀이 핵심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된 것을 보더라도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구절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래의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참된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예배드리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 우선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1)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한다(요 4:24). “영”이라는 말은 “빛”(요일 1:5)이나 “사랑”(요일 4:8, 16)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구절에서 “영”이라는 말은 설명하기 힘든 용어이다. 그것이 “인간의 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성령”과 동일시 할 수도 없다. 분명히 성령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성령이다.”라고 성경은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영”을 부정신학의 방법으로, 즉 “무엇무엇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곤 했다. “영”은 물질이 아니며, 복합물이 아니며, 보이지 않으며, 육체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영”은 몇 가지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영”은 인간과 대비되며(요 3:6), 생명을 주는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분이시다(요 1:18). “영”은 바람처럼 보이지 않으나 소리는 들리며 그 효과는 확실하다(요 3:8). “영”의 가장 중요한 작용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며,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살도록 하는 사역이다(요 3:5, 7:38-39).

따라서 “하나님이 영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을 분명히 알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참된 예배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2)

둘째로,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도 역시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진리 안에서”라는 말이 “영 안에서”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본다.3)

참된 예배는 성령의 은사로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진리를 알 때에 가능하다. 그렇기에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에 성경은 종종 “진리의 성령”이라는 표현을 쓴다(요 14:17; 15:26; 16:13; 그리고, 요일 4:6; 5:6; 살후 2:13 참조).4)

참된 예배는 사마리아 여인이 오해했듯이 예배 장소나 예배 방식에 그 본질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참된 예배의 본질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중심의 문제이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5)

셋째로, 이러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다.

참된 예배는 삼위일체적이다. 참된 예배란 그 대상이 영이신 하나님이시며, 그 시작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에 있고, 그 성격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것으로 특징 지워지는 예배이다.6)

이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게 되며 새 생명의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사모하며, 그 진리를 들을 때에 기뻐한다. 그들은 성령의 활동적인 역사를 그 영혼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 4:23-24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삼위일체적인 예배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가능해졌다(요 4:25-26).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러한 특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공예배에서 가정예배에서 개인예배에서 그런 특권을 감사히 누려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성도들을 간절히 찾고 계신다(요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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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성경 Holy-Bible

개역개정 하나님은 영이시 니 예배하는 자 가 영과 진리로 예배 할지니라 원문보기

개역한글 하나님은 영이시 니 예배하는 자 가 신령과 진정으 로 예배 할찌니라 원문보기

공동번역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 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 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 원문보기

새번역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 은 영과 진리로 예배 를 드려야 한다.” 원문보기

현대인의성경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원문보기

新共同譯 神は 靈である. だから, 神を 禮拜する 者は, 靈と 眞理をもって 禮拜しなければならない. 」 원문보기

NIV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원문보기

KJV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원문보기

NASB “God is spirit, and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truth.” 원문보기

新改譯 神は 靈ですから, 神を 禮拜する 者は, 靈とまことによって 禮拜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 원문보기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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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 홈 > 영성 > 김기석 설교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당당뉴스 | [email protected] 입력 : 2020년 05월 10일 (일) 13:17:01 [조회수 : 2167]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요4:19-26

(2020/05/10, 부활절 제5주)

음성으로 듣기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여자가 예수께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길고 긴 격절의 시간을 건너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얼싸안고 정을 나누진 못하지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신경림 선생은 ‘파장罷場‘이라는 시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으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지금부터 50년 전의 풍경이긴 합니다만 왠지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0주 동안 영상예배를 인도하면서 제 마음에 늘 떠올리던 광경이 있었습니다.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던 다니엘입니다. 그는 왕 이외의 신들에게 간구하는 자들을 사자굴에 던지겠다는 왕의 지엄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가정에서 화면을 열어 드리는 예배를 다니엘의 기도와 연결시키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비감스러웠습니다.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시137:1)고 고백했던 이스라엘 포로민들의 처지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속으로 ‘왜? 서둘러 교회 오지 않아도 되고, 편안하게 집에서 예배드리니 좋기만 하더구만’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어느 해외 신문 만평은 격리생활에 익숙해진 아무개 여사가 모처럼 예배당에 참석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푹신한 슬리퍼를 신은 그는 헐렁한 잠옷을 입고, 머리에는 그립을 말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예배당에 들어서다가 ‘아차’ 싶은지 당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그런 분이 안 보여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예배드리는 마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독일말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Gottesdienst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뜻의 ‘Gott’와 ‘섬기다’라는 뜻의 ‘dienen‘이 결합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예배라는 말일 겁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님은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향성’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터가 이해하는 고테스딘스트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Gott)이 일하신다(dienen)는 뜻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적 예배란 은총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것으로 출발하여, 인간이 그 은총에 기도와 찬송과 감사로 반응하는 상호 소통의 과정”(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옮김, 복 있는 사람, 2017년, p.89에 나오는 역자 주35)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자 선물입니다. 물론 온전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와 찬송과 감사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쿵’ 하는 장단에 우리가 ‘더쿵’ 하고 반응하는 것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때의 문제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마을 공동체로부터 따돌림 당하며 살던 한 여인과 예수님의 마주침과 대화,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열린 사마리아 선교의 가능성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아무도 우물을 찾지 않는 정오 무렵 여인은 홀로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은 늘 우연처럼 찾아옵니다. 존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아도 우리 삶도 그런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을 통해 변전을 거듭합니다.

늘 헛헛함에 시달렸던 그 여인은 예수를 만나 가슴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여인은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범상한 분이 아님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메시야라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탐색의 과정 가운데 여인이 주님께 여쭙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4:20)

여기서 말하는 ‘이 산’은 요단강 서안 나블루스 지역에 있는 그리심산을 가리킵니다. 해발 800미터 쯤 되는 산으로 에발산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 두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이 지역은 또 야곱에 대한 기억이 새겨진 장소인 베델과 세겜에서 가까웠습니다. 베델은 야곱이 형을 피해 달아날 때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고, 세겜은 근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정착생활을 했던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 성전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질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문화적·종교적 관습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바른 예배 장소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장소’를 묻는 질문에 주님은 ‘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4:21)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때’입니다. 때를 나타내는 헬라어 호라hora는 자연법에 따른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결정적 시간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혹은 마음과 만나는 그 결정적 시간이야말로 예배의 순간입니다. ‘예배하다‘는 뜻의 프로스키네오proskyneo는 ‘누구의 손에 입을 맞추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거룩함과 만났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털썩 무릎 꿇다

나찌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가 종전과 더불어 석방된 오스트리아 의사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한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 지옥과도 같은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에 벌어진 일을 들려줍니다.

석방이 된 며칠 후의 어느날 나는 꽃이 만발한 꽃밭을 지나 시골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가까운, 장이 서는 읍을 향해 몇 마일을 걷고 또 걸었다. 종달새가 푸드득하니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기뻐서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주위 몇 마일 안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땅과 드높게 보이는 푸른 하늘, 그리고 종달새가 즐겁게 부르는 노랫소리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문득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갑자기 나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 순간, 나는 내 자신이나 이 세상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마찬가지였지만 ─ 있다면 내 마음 속에 울려나오는 한마디뿐이었다.

“저는 저의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리고 주님은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저에게 응답을 하셨나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또 그와 같은 한 마디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이제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 시간부터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충선 옮김, 청아출판사, 2001년, p.149-150)

정경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그는 호젓한 들판을 홀로 걸었습니다. 몇 년 동안은 꿈에도 생각해볼 수 없었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두려움의 먹장구름이 걷히자 세상이 온통 아름답고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인간은 그리도 슬프고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자연은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득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무릎을 털썩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비좁은 수용소에서 바쳤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신 것만 같았던 하나님이 그를 감싸 안고 계셨고, 그의 든든한 설 땅이 되어 주셨음을 자각하는 순간, 뭔가 신령하고 압도적인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체험 이후 그는 고단한 현실을 딛고 일어설 힘을 얻었습니다.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털어내며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에 오를 힘 말입니다. 예배의 ‘때’란 이런 것입니다. 그런 체험은 인위적으로 노력하여 얻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조장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어느 순간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이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체험이 예배당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주님은 여인에게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4:23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번역은 이것을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옮겼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배를 드리는 이가 가져야 할 진실하고 애틋한 태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이 본문에 대한 오해에 불과합니다.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영’은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셨던 생수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과 접속시켜줍니다. 그 마음에 감득된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어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고 그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참된 이치’를 뜻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기 욕망을 내려놓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예배를 잘 기획하고, 각본에 따라 정밀하게 수행하는 것이 참 예배가 아닙니다. 물론 예배는 잘 준비되어야 하지만 본과 말을 뒤집으면 안 됩니다. 모처럼 현장에서 속개되는 이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끼리 즐겁고 반가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그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는 예배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말귀를 알아들었을까요? 아직도 미심쩍은 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인은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아직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볼 눈이 없습니다. 메시아의 현실은 저 먼데 어디 있는 것이지 자기 눈앞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즉각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는 사람들을 속박에서 풀어주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과 동행하는 이들입니다.

예배당에서의 예배는 구체적 삶의 자리로 이어져야 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성화하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등불 하나가 천년의 어둠을 밝힌다(一燈可破千年暗)는 말이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하늘빛을 가져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이러스는 소리 없이 퍼져나가 우리 삶을 제약하지만, 우리의 선한 뜻과 의지가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퍼져나가 세상 구석구석을 채울 때 삶이 아름다워질 겁니다. 주님이 앞서 가시니 우리가 뒤따라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의 우리 삶이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당당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18 의견나누기 ( 1 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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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웅석 (175.223.14.123) 2020-05-15 18:41:22 한국교회가 이렇게 썩었어요?

놀랬습니다.

살아 남으시길 기도하고 원합니다.!!! 리플달기 ▼ 0 0 신문사소개ㆍ기사제보ㆍ광고문의ㆍ불편신고ㆍ개인정보취급방침ㆍ청소년보호정책ㆍ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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