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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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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

제 29 장. 포로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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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0/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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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예레미야 29 · 9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10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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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2/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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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4(화) “예레미야 29:1-32” / 작성

본문 예레미야 29:1-32 찬송가 375장 ‘나는 갈길 모르니’ …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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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8/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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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 – 교사용]

예레미야 29장. 1. 포로로 옮겨간 자 중에 남아 있는 자란? ‘남아 있는’이 아니고 ‘속해 있는’ 아닌가? 포로로 잡혀간 자 중에 살아 남은 자란 뜻이다: 나중에는 어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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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ong.org

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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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레미야 29장 주석

예레미야 29장 주석. =====29:1.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보내었는데 – 본장은 긴 산문체 단락인데 주로. 예루살렘과 바벨론 간의 편지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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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ntiochministry.tistory.com

Date Published: 6/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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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을 …

예레미야 29장.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 1)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 2) 아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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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unmill.tistory.com

Date Published: 8/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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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 11절, 가장 잘못 인용되는 구절 – 기독일보

존 목사는 “기독교인들이 예레미야 29장 말씀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상황의 유대 공동체에 이 말씀을 전하셨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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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5/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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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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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

포로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2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

16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과 이 성에 사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

18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낸 나라들 가운데에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22 바벨론에 있는 유다의 모든 포로가 그들을 저줏거리로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23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라 나는 알고 있는 자로서 증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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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었는데 2 때는 여고니야왕과 국모와 환관들과 및 유다와 예루살렘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위탁하였더라 일렀으되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 선지자들에게와 복술에게 혹하지 말며 너희가 꾼바 꿈도 신청하지 말라

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므로

16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18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19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0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을찌니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22 너희 바벨론에 있는 유다 모든 포로가 그들로 저줏거리를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로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23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행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니라 나는 아는 자요 증거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였더라 24 너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라

2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네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26 여호와께서 너로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여호와의 집 유사로 세우심은 무릇 미친 자와 자칭 선지자를 착고에 채우며 칼을 메우게 하심이어늘 27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28 대저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때가 오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29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 들릴 때에 30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019/05/14(화) “예레미야 29:1-32” / 작성: 정한조

본문 예레미야 29:1-32

찬송가 375장 ‘나는 갈길 모르니’

포로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1-23절)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를 왕래한 편지들을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70년 후에 돌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1-23절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바빌로니아 제국은 B.C. 605년 여호야김이 왕위에 있을 때와 B.C. 597년 여호야긴이 왕위에 있을 때, 2번이나 굉장히 많은 유다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발강 근처에 유다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유다 백성들은 어느 정도 자유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편지는 그들 중에서 장로들, 제사장들, 선지자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보내어 졌습니다.

(2)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여고니야왕은 여호야긴왕으로 유다 왕국의 20명의 왕 중 19번째 왕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유다 왕족과 고위관리들, 목공 기술자들, 철공 기술자들 등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한 나라를 점령하고서 사람들을 끌고 갈 때에 아무나 끌고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 나라의 경제, 교육, 문화 등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데리고 갔습니다.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이 유다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빌론으로 사로잡혀가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에서 ‘만군’은 ‘땅과 하늘의 모든 군대’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은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군인들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은 대장(大將)이고, 모두 8명이 있습니다. 그들의 별을 모두 합쳐도 32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있는 별은 셀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론에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바빌론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으라입니다.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거짓 선지자들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이 2년 만에 끝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70년이 지나야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론에서 집도 짓고,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거기서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대를 이어서 살라고 하십니다.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바빌론으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에게 거기서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길러서, 그 자녀들이 또 결혼을 시켜서 거기서 번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심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이 일찍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바빌론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빌론의 평안을 빌라고 말하며, ‘평안’이라는 단어를 3번이나 사용합니다. 원수와도 같은 바빌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서 오래 살아야 하는데, 바빌론의 평안이 유다 백성들의 평안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빌론에 있는 유다 백성들의 불안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9)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은 ‘(거짓) 선지자’, ‘점쟁이’, ‘꿈쟁이’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점쟁이’는 다양한 점의 결과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꿈쟁이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사람들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이런 무속적인 것이 판을 치는 이유는 유한한 사람들 속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고, 또 사람들에게는 욕망이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합니다. 또 우리가 원하는 결과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수용하는 사람이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의 포로기간이 70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결코 짧은 기간도 아니지만, 영원히 포로로 살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기에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바빌로니아 제국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있으면, 해방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100년 전에 3.1운동이 있었을 때, 이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때 해방이 되기를 얼마나 갈망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때로부터 26년이 더 지나서 이루어졌습니다. 또 유다 백성들이 포로생활에 지쳐 절망에 함몰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포로생활에 마침표를 찍어주신 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망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70년이 되면 유다 백성들을 ‘돌보고’, 이 곳(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돌보다(파카드)’는 ‘방문하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옴은 제2의 출애굽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11-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은 ‘평안’이고, ‘미래와 희망’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현재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미래가 보이고, 희망이 있으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반면에 현재가 평안해도 미래가 불안하고, 절망의 구름이 끼여 있으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르짖을 수 있고, 그것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소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만약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면 공기의 진동이나, 대답 없는 메아리에 불과할 텐데,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쉼 없이 말씀하셨지만, 유다 백성들은 조상 때부터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현재의 삶이 자신들이 상상하는 것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대의 불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 그리고 크고 작은 바위가 많은 바다에서는 그 빛을 따라서 가야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만 불빛을 비추어 달라고 하면 이내 좌초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데로 등대가 비추어주지 않는다고, 등댓불을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스마야에게 보낸 편지와 하나님이 말씀(24-32절)

바빌론에 있는 두 거짓 선지자, 아합과 시드기야의 비참한 죽음에서 대해서 선포하신 하나님께서는 24-32절에서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유다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스마야가 거짓 예언 편지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것과 그에 대한 예레미야와 논쟁,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바빌론에 있었던 ‘스마야’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스바냐를 비롯해서 여러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왜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해서 ‘미친 자’와 ‘자칭 선지자’라고 격하게 폄훼하는 말을 했습니다.

(28)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오래 지내야 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셨다 하니라

스마야가 격한 말을 써가며 보낸 편지 내용인 즉, 예레미야가 바빌론에서 오래 살아야 하니 거기서 집도 짓고 밭과 과수원을 일구어 그 열매를 먹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이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금방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 되기에, 예레미야의 말은 거짓이라 우겨야 했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가짜라고 우기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짝퉁이 진품을 향해서 아무리 짝퉁이라고 우겨도, 언제나 짝퉁은 짝퉁이고, 진품은 진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내용을 정확하게 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스바냐 제사장이 스마야가 보낸 편지를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읽어 주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32) 너는 모든 포로에게 전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를 두고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스마야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에게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을 한 스마야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벌하다’는 단어와 10절에 있는 ‘돌보다’가 같은 단어로, ‘방문하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위로와 건져내심도 있지만, 책망과 심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잘못을 하게 되면, 그 영향력은 온 가족에게 미치게 됩니다. 스마야가 거짓 선지자가 됨으로 그 영향력을 가족들과 가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스마야를 따른 사람들은 동일하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 두 갈래의 길을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가 하면, 아합, 시드기야, 스마야와 같은 ‘자칭 선지자’, ‘거짓 선지자’도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는 불의하고도 진실하지 못한 청지기와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바르지 못한 삶으로 인해서 신실하지 아니한 사람이 받는 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진실한 청지기와 같아서 때를 따라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며, 주인이 올 때에 문을 열어주는 청지기와도 같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며, 예레미야 선지자가 걸었던 진실한 청지기와 같은 삶을 살아, 내일과 미래를 위한 디딤돌로 오늘을 신실하게 사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갔을 때, 그들은 빨리 조국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까지 거기서 살아야 했습니다. 바라옵나니 우리의 삶이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주어진 삶에 신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삶의 자리가 어떠하던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저 우리의 기분을 맞추어주려고 하는 거짓 선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의 삶이 진실한 청지기의 삶, 우리 인생과 영혼의 주인이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러간 유다 백성들에게 거기서 집도 짓고, 텃밭도 만들고, 심지어 바빌론을 위해 기도까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당신의 생각과 달랐지만, 지나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뜻이었던 일이 있었습니까? 그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미래와 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당신의 삶에 이루어진 적은 언제이었습니까?

3. 우리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을 찾고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아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또 언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아보셨습니까?

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진실한 청지기의 삶을 살며,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스크랩] 예레미야 29장 주석

예레미야 29장 주석

=====29:1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보내었는데 – 본장은 긴 산문체 단락인데 주로

예루살렘과 바벨론 간의 편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네 통의 편지

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는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보낸 것이고(1-14,

21-23절), 다른 하나는 바벨론에 있는 스마야가 스바냐에게 보낸 것(26-28절), 그리고

또 하나는 예레미야가 스마야에게 보낸 것(24절), 마지막 것은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

레미야의 두 번째 서신(30-32절)이 그것이다. 정확한 연대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본

장의 역사적 상황은 바벨론의 2차 침입(B.C. 597년, 왕하 24:8-16) 직후인 것으로 보

인다(Thompson). 그리고 본절의 ‘남아 있는 장로들’이란 표현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장로들 중에 일부가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처형의 이유는 본장

에서 언급될 바벨론에서의 선동과 폭동 때문이었을 것이다(Nicholson).

=====29:2

여고니야 왕과 국모와 환관들과…떠난후라 – 예레미야의 서신이 바벨론으로 보내

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왕하 24:12-16). ‘환관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리심'(* )은 아마도 궁정 내에서 활동하던 관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52:25;삼상 8:15 등 참조). 창 39:1에는 보디발이 이 단어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내시와 같은 결혼할 수 없는 관리를 뜻한다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사리심’으로 명명되고 있는 직책이 원래는 왕궁의 내실을 관리하는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가서 차츰 그 기능이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방백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레'(* )는 아마도 왕가의 귀족들을 포

함한 관리들의 또 다른 명칭이었을 것이다.

=====29:3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 어떤 학자는 본절의 엘라사

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26:24) 사반의 아들 그마랴의 형제였을 것으로 설명한다. 그

리고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는 요시야 왕 때의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대하 34:9-22)의

아들일 것으로 설명하나 분명한 증거는 없다(Bright). 아무튼 예레미야가 편지를 보낸

경로는 외교적 임무를 띤 자들의 손에 의해서였다. 이들 사신들은 요시야의 개혁 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호의

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설교에 아마 큰 감동을 받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느부

갓네살에게 보내진 임무는 단순히 연례 행사로 바치는 조공 문제 이상의 보다 더 복잡

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여호야긴이 유다 주변 국가들과 반바벨론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조기에 실패로 끝나고 만 일이 있은 다음에 느부갓네살에 대한 시드기야

의 충성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보내졌을 공산이 더 크다(27장). 그렇지 않고 다른 시

각에서 본다면, 그들은 봉신과 군주 간의 통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보내졌을 수도 있

을 것이다. 아무튼 고대 세계에 비교적 먼거리에 떨어져 있었으면서도 외교적 문서가

자주 왕래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기록되어 애굽의 바로 왕에게 전

달된 B.C. 14세기의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은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Thompson).

=====29:4

만군의 여호와…이같이 이르노라 – 이것은 이 서신의 서두였다(Clarke).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종 느부갓네살을 대행자로 사용하여서 포로들을 그곳으로 옮겨놓으셨

다는 내용이 다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3인칭에서 1인칭으로 화법이 바뀌는 것은 예

언적 서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Thompson).

=====29: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 예레미야가 제시하고 있는 충고는 바벨론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곧, 집을 짓고 열매를 심

으며 포로지에서 정착하라는 권고이다. 에스겔서에서도 암시되고 있다시피, 그들에게

는 정착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

들의 공동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겔 8:1;14:1). 어쨋든 정착 생활에 대한 예레미야의

권면은 포로기가 2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였던 낙관적인 선지자들의 말과는 엄

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유다 땅이 아닌 포로지에서라 하더라도 정착

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했고 성전과 희생 제사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7:1-15, 21, 22).

=====29:6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 예레미야의 이 같은 당부의 말은 포로로 잡

혀 간 곳에서 그들이 이제 오랫동안 체재(滯在)할 것이므로 그에 대해 준비를 갖추라

는 의미이다. 그리고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땅에서 번성하여 강한 민족이

되라는 뜻이었다(Clarke). 그런데 비교적 자유가 보장된 포로 생활이었지만 이에 대한

예외도 있었다. 예컨대 여호야긴은 갇혀서 지내야 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에윌므로닥의 즉위 때, 곧 B.C. 562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2:31-34;왕하

25:27-30, Nicholson).

=====29:7

본절에서는 또한 그들이 체재하고 있는 나라 바벨론의 번영과 평안을 위해 노력하

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바벨론 왕권의 번영을 구하고 또 그들의 평안을 기도

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는 포로민들에게 납득되기 힘든 말이었다. 이것은 유다 민족이

자신들의 행복과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 다시 말해서 국가, 왕권, 군

대, 국경, 성전 등을 내버리고 표류하라는 것과 사실상 동일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더라도 여호와에 대한 바른 신앙을 확보한다면, 여호와께서 이 민족에게 새

로운 비전을 제시해줄 것이며 그들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

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곳에 있는 자들은 바벨론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끌려왔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충고에 대해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만했다. 그러나 이 충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였으나 실제적이고 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사건의 결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어떤 과정을 거치게 한 다음에 회복시키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

을 확신할 수 있었다(Thompson).

=====29:8,9

어떤 주석가들은 본 두 구절이 7, 10절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15절 다음

에 놓이는 것이 적절하게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이 앞 구절들에 대한

보다 확대된 강조 설명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불필요하다. 거짓

선지자들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머무는 것이 잠시 잠깐일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예언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아니

며, 그들이 주장하는 예언이 거짓임을 확신시켜주고자 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앞

장에서 살펴보았던 하나냐와 같은 자들로서 그는 이들 부류의 대표자였었다. 그들은

꿈꾸는 자, 복술, 술사, 요술객들과 접맥이 되어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어떤 헛된 예언

의 정보를 받았던 것 같다(27:9 참조). 이러한 선지자들 중에 몇몇은 반란을 주도하였

으며, 민족에게 재앙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본장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21-23절).

=====29:10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와 의도가 무엇인지가 언급되고 있다. 바벨론에서의 70년이란 기간

이 차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한편, 근동

의 패자로 급부상하였던 바벨론 제국의 권세가 불과 70년만에 몰락하게 될 것을 암시

하는 본절의 예언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믿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70년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굳이 엄밀하게 계수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25:11 주석 참조). 니

느웨의 멸망이 B.C. 612년에 일어났고 이때로부터 바벨론 권세가 시작된 것으로 한다

면 바벨론 멸망이 B.C. 539년이기 때문에 그 기간은 73년간이 된다. 그리고 느부갓네

살의 즉위하던 때(B.C. 605년)로부터 바벨론 멸망 때까지 66년간이란 기간이 된다.

=====29:11

너희 장래에 소망(* , 아하리트 웨티크와) – 이에 대한 직

역은 미래와 희망이란 의미이다. 이는 두 개의 비슷한 말을 겹쳐 씀으로써 그 내용을

강조하는 증언적 표현법이다. 따라서 이 말은 결국 너희가 바라던 미래, 대망하던 미

래,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란 뜻이다(Bright, Feinberg).

=====29: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 자기 백성을 위한 여호와의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

었다. 곧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고통과 재앙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래에 이 백성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여 이전에 누리던 특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아마 예레미야가 이 편지를 기록

할 당시에는 여호와를 향한 원망과 그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또 그에게 기도하며 그에게 나아갈 때에는 여호와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다(암 5:4-6;호 2:16-20). 반면에 여호와는 패역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는 언약의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겔 2:3-5;33:17-20).

여호와의 축복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에는 순종과 충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

통이 우선적으로 요청되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

에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겔 33:10)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

백성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죄악을 깨닫는 백성에 대해서 여

호와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 여기서 ‘전심으로'(* , 베칼

레바브켐)라는 말은 ‘네 마음을 다하여’란 뜻으로서 감정적인 면보다는 의지적인 측면

에 더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29:14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돌아오게 하리라 – 13절에 제시된 약속이 여기서도 계

속되고 있다. 즉 언약의 축복이 유용하게 될 것이란 내용으로서 신 30:3-5에 언급된

약속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Delitzsch).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우

선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결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여호와를 거부하고

그의 언약을 저버리는 자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저절로 허용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29:15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 메시지의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은 15절에

서 21절로 넘어간다. 본절만을 가지고 살펴보면 16-19절은 회복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

가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유다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

다. 한편 70인역에서는 16-20절의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29:16

다윗의 위(位)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 본절에서는 메시지의 대상

이 바벨론으로 잡혀가지 않고 유다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여호와

께서는 그 당시 다윗 계통의 왕인 시드기야와 이들 백성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설사

그들이 B.C. 597년의 심판에서 벗어나고 화를 모면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은 여전히 심

판 아래에 놓여있었던 것이며, 그들에게 임할 비참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29:17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 여기 언급된 징법 수단들은 본서의 다른 곳에서도

누차 발견된다(17, 18절;15:2, 3;24:10;42:17;44:12 등). 그리고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란 표현은 24장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 24장과 이곳은 둘

다 아직 유다에 살고 있는 자들을 공격하는 논쟁이며 그와 함께 B.C. 597년 이후 포로

로 잡혀간 자들을 격려하는 내용의 말씀이다(Thompson). 또한 선지자는 현재 다윗의

왕자에 앉아 있는 시드기야를 부러워하지 말고 더군다나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의 운

명을 부러워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왜냐하면 현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자들

은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형편보다 더 참혹한 운명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9:18,19

B.C. 597년 이후에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종을 통하여서 말씀

하셨던 것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행위를 고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끊임없이 그들을 설득하고 재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

들의 죄악된 고집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심판은 불가피했던

것이다(Thompson).

=====29:20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 – 여기서는 다시 화제가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블레이니 박사(Dr. Blayney)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가 두 개였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게 사신으로 보낸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가 귀환했을 때 예레미야

는 자신의 충고가 그들에게 적절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바

벨론의 포로들이 예레미야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포로들 중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허황된 설교에 속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두

번째 서신을 기록해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21-23절 내용을 14절에 이어

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

=====29:21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 이 두 사람은 바벨론

의 포로들 중에 있었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예레미야의 설교에 반기를 들고서 유다의 번영과 평안을 주장하였던 허황된 예언이

B.C. 597년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인한 파멸에도 불구하고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낙관주의는 엄청난 고통을 자초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계속해서 거짓을 예언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생활 역시 악하고 죄악에 물들어 있었다(23:9-15). 그들은 동료, 이웃의 아내

들과 간음을 행하였다(23절).

=====29:22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아 아합 –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불살라 죽였는

데, 이러한 화형은 바벨론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시행되었던 처형법이었다(함무라비

법전 25, 110, 157;단 3:6). 이 두 거짓 선지자의 죽음은 저주를 나타내는 하나의 속

담같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저주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로 바

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을 것이다

(Thompson).

=====29:23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 예레미야는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의

처형을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거짓 예언에 대한 징벌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느

부갓네살이 그들을 처벌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범죄 때문이 아니라 국가 반란과 선동

죄로 처벌하였을 것이다.

=====29:24

본절을 26-28절에 포함시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예레미야가 스마야

개인에게 보낸 경고 서신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에레미야의 서신을 보고

서, 포로지에서는 심한 반발이 일었으며 그 반발을 부추킨 중심 인물이 바로 스마야였

던 것 같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스마야에게 경고조로 개인 서신을 보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서신의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되어 있으며, 곧바로 스마야가 예레미야를

고발하는 내용의 편지가 이어진다(26-28절). 한편 스마야란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사

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스마야를 수식하는 말인 ‘느헬람 사람’에 대해서는 (1)출신지

로 보는 견해(Calvin, Thompson), (2)가계명(family name)으로 보는 견해(Harrison),

(3)’꿈꾸는 자’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으나 (1)이 보다 무난한 듯하다.

=====29:25

네가 네 이름으로…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 예레미야는 여기서 스마야가 스마

야 자신의 이름으로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유사이기도 하였던 마아세야의 아들 제

사장 스바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비난한다. 스마야가 마치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

는 것처럼 가장했지만 실상은 자기 임의대로 편지를 썼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Delitzsch). 이런 비난은 31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그 뒤에는 이곳에서는 언급되

지 않고 있는 결과가 언급되고 있다(Thompson).

=====29:26,27,28

여기서부터는 스마야의 편지의 내용이 요약되어 설명된다. 스바냐는 당시 여호야다

의 직위를 물려받은 성전의 제사장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 자리를 바스훌이 차지하고

있었다(20:1-6). 이 사람은 B.C. 597년에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것이 분

명하다. 한편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는 시드기야의 특사로서 예레미야를 방문하여 두

번씩이나 그의 조언을 구한 바 있다(21:1;37:3). 그는 예루살렘 멸망 후인 B.C. 586년

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52:24-27;왕하 25:18-21).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들이 확실하게 발생되었고 또 성취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는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여전히 ‘미친자’로 취급당하고 있다.

=====29:29

스마야의 지적은 스바냐가 아나돗사람 예레미야를 자유 상태로 내버려 둠으로써 성

전 유사로서 해야 할 바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이며 미쳤고 또 자칭 선지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착고에 채워져야 하며 칼을 씌

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 드러난 스바냐의 행동으로 볼 때 그는 예레미야에

게 오히려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Delitzsch). 스바냐가 예레미야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는 어떤 경고 조치를 취했는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예레미야가

스마야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던 점에서 어떤 특별한 경고 조

치는 없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29:30,31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 스마야에 대한 여호와의 메시지를 포로민들에게 써 보낸

내용이 소개된다.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 예레미야는 하나냐

를 상대로 했던 말과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여 거짓 선지자 스마야에 대한 예언을 포로

들에게 편지로 써 보냈다(28:15, 16). 즉 스마야는 거짓을 예언하였으며 또 그것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는 그를 처벌하실 것이고 또 그의 후손

들도 징계하실 것이다.

=====29:32

스마야에 임할 저주로 끝맺고 있는 본장의 마지막 절은 본장의 끝일 뿐만 아니라

26-29장에 달하는 하나의 단락의 결말이기도 하다. 26-29장의 각각의 장들은 여호와의

종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이 백성이 거부하고 있다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장 내에서는 이러한 거부에 대한 심판 선언의

내용이 뒤따랐다. 당신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고 또 언약에 순

종치 않는 것은 언약의 파기였으며, 그 결국은 언약에 명시된 저주 조항의 가동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 대우인력 김진규

메모 :

조금씩 성경 알아가며 나도 변하려고 :: 예레미야 29장.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 한장 정리]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1)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2) 아내를 맞이하고 자녀를 낳아 자녀들로 결혼하게 하여 너희가 줄어들지 않게 하라.

3) 사로잡혀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그 성읍의 평안함으로 너희 도 평안할 것이다.

4)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라.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않았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5) 바벨론에서 70년이 차면 너희를 돌보아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6)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다. 재앙이 아니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너희가 내게로 와서 기도하고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너희가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도리 것이라.

* 이 때는 시드기야 왕의 때로 1,2차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이 있고 아직 완전한 멸망(시드기야 9년)은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이다.

*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그 올무를 벗어나려고 하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곳으로 보내신 것이고 70년이면 마치고 돌아오게 될 것이니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가정을 이루며 번성할 것을 말씀하신다. 70년 이후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국적인 발언이며 비신앙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마치 예레미야가 친바벨론적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당시에 느헤미야의 이 발언을 그렇게 믿어 줄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2. 너희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해 선지자를 일으키셨구나 말하게 될 것이다.

* 바벨론에 있는 포로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시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선지자이면서도 동시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동포들의 선지자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도 예루살렘의 운명(완전히 멸망한 상황은 아직 아니기에)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했다. 예레미야는 그 역할까지 했다.

1)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닌한 너희 형제(유다에 남은 형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2) 하나님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고 쓸모없는 무화과 같게 하셨다.

3) 하나님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서 학대를 받게 하겠다. 그들은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4)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언급한다. 그래서 남아 있는 자에게(자신들은 재앙으로부터 피해갔다고 생각했을텐데) 완전히 멸절될 수 밖에 없는 재앙을 내리고, 오히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을 선포하며 70년간 그 땅에서 잘 살아 남아서 번성하라고 말씀하신다.

가나안에 있는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을 따라 애굽의 고센 땅에 머물면서 400여년간 번성하였던 것처럼, 바벨론에서도 그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3. 바벨론에 살고 있던 스마야가 예레미야에 있는 제사장 스바냐에게 편지를 보내어 예레미야의 활동에 대해서 질책함

1) 스마야가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글을 보냈다.

2) 여호와께서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해서 너를 성전의 감독자로 세운 것은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하는 자들을 목에 나무 고랑과 쇠 고랑을 채우게 하기 위함이거늘 어찌하여 예레미야에게 그와 같이 하지 않는냐?

3)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여 ‘너희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고 선동하고 있다.

4)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가 쓴 글’을 예레미야에게 읽어 주었다.

*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을 넘어 바벨론에까지 유대인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스마야는 반대한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스바냐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있지 못함을 질책했다. 예레미야처럼 거짓된 말을 하여 유대인들의 마음을 흐트러놓는 자를 막도록 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인데 왜 예레미야를 방치함으로 여기에서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냐는 책망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도, 포로로 잡혀간 바베론 현지에서도 모두 인정받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그랬다. 그 당시 누구에게나 불편함을 주는 메시지였다. 심지어 애국적 인사들에게도,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인사들에게도 또한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도 그의 메시지는 불편함이 되었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4.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임하셨다.

1)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구나’

2) 그래서 내가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라. 그의 자손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복된 일을 보지 못하리라.

3)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손을 들어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누가 그것을 믿어 주었을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따라 소신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묵상 한모금]

1. 이 시대는 유다의 운명이 이미 확정되었다. 멸망이다. 아직 완전한 멸망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례미야는 헛된 희망을 불어넣지 않는다. 회개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바벨론으로 가서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열매를 거두어 먹고 살 것을 말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길러서 번성할 것을 말한다. 그곳에 정착하라는 것이다. 이런 냉정한 메시지는 유다의 멸망이 확정된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기회가 있지는 않는다. 일생의 대부분은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기회가 없는 시기가 온다. 회개할 수조차 없는 기회가 오고야 만다. 그 때는 운명을 돌이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돌이킬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털퍼덕…

2. 유다의 멸망을 전하는 그리고 유다를 정복하는 바벨론에 들어가서 그들의 평안을 빌면서 그들 안에서 일상적인 삶을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라고 말하는 예레미야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유다에 남겨진 자들에게도 거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다에 남은 자들도 안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재앙이 따라와서 흩어질 것이라는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바벨론에 잡혀가 수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그 삶을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그들의 평안을 빌며 살아가라는 것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메시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나라를 등지고, 하나님을 등진 채 그곳에서 평안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 같으니, 누가 예레미야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예레미야와 비슷하다. 누구에게도 인정받거나 환영받지 못하셨다. 친로마적인 사두개파에게도, 민족적 독립을 꿈꾸던 열심당원들에게도… 종교적 근본주의작인 바리새인들에게도…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셨다. 모든 그리스도이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늘 이런 오해를 삶의 한 부분처럼 여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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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 11절, 가장 잘못 인용되는 구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을 암기한다. 마치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먼저 시인인 제퍼슨 버스케(Jefferson Bethke)는 최근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 대학에 가고 싶어요’, ‘이 남자친구(여자친구)는 내가 원하던 사람이에요’, ‘이 일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고 내 계획이에요. 하나님께서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세요’라고 말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버스케는 “성경을 읽는 이들은 항상 성경구절의 역사적·문학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먼저는 우리가 원하는 한 구절만을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때에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신 구절을, 문맥에서 뽑아내 개인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이 구절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6세기 경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낸 서신”이라고 설명했다.

이 서신은 과거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심판을 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복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70년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버스케는 “무엇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장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70년 동안 포로 생활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는 70년까지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고 했다. 이어 “‘너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나는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산타클로스나 지니와 같은 존재로 바꾸어 놓는지 모른다……. 우리의 계획을 세워놓고, ‘하나님께서 이뤄주신다’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이에 앞서 존 파이퍼 목사는 이 약속에 대한 적용이 기독교 공동체로 옮겨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고 했다. 침례교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파이퍼 목사는 지난 5월 29일 ‘존 목사에게 물어보세요’라는 코너에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를 자신들에게 적용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존 목사는 “기독교인들이 예레미야 29장 말씀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상황의 유대 공동체에 이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 기독교인들, 특히 우리 이방인들은, 이 말씀이 멸망이 아닌 소망과 기쁨의 삶에 대한 전망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이를 사랑한다. 우리가 이를 붙들 수 있는 이유는,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잔을 들어올리신 후, ‘이 잔은 내 피로 인한 새로운 언약’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이퍼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에 나온 약속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취됐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의미를 두셨던 모든 것은, 지금 신약의 그의 백성들에게 성취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약속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린도후서 1장 20절 말씀과 로마서 8장 32절 말씀을 들어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레이스패밀리 침례교회 목사이자 강사인 보디 보챔(Voddie Baucham)은 기독교인들이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을 3가지 방식으로 왜곡한다며 “먼저, 우리는 이것이 특별한 때에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상황 가운데 특별한 사람들에게 직접 전해진 약속인데, 우리에게 직접 적용하면서 이를 왜곡한다”고 전했다. 두번째로 “이것은 실제적으로 다양한 세대들을 위한 약속인데, 우리는 이를 지금의 약속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우리를 위한 약속인데 나를 위한 약속으로 왜곡한다”고 했다. 그는 이 말씀을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인들 개개인의 건강과 부귀에 대한 약속으로 가르치는 데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다.

구약학 교수이자 ‘God Behaving Badly : Is the God of the Old Testament Angry, Sexist and Racist?’의 저자인 데이비드 램도 보챔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했다. 램 교수는 “우리는 예레미야 29장 11절을 신실하게 적용하기 위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11절을 인용할 때 29장에 대해 최소한 2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먼저는 이 말씀이 우리 대부분이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믿을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쓰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사망을 슬퍼하고, 이동 중이었으며, 일시에 노예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희망을 말씀하실 수 있다. 이것이 놀라운 것”이라고 전했다.

두번째로 “이들은 ‘나’에 대한 계획이 아닌 ‘우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서신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들은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나 여전히 공동체를 갖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방법”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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