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의 표적 | 요나의 표적에 담긴 2가지 의미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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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셨나요?
아마도 성경을 읽으신 분들은, 요나의 표적 하면,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3일 갇혀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알고 계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구요.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에는 또 다른 의미가 한가지 더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함께 살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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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에 담긴 2가지 의미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에피소드는 총 3개입니다. (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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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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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 브런치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적(기적)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무리가 모였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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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3/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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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 – 요나의 표적 – 네이버 블로그

여기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으신 뒤 사흘 동안 무덤에 갇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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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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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과 니느웨 부흥 – Manna 24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마 16:4) 불순종했던 요나가 폭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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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anna24.com

Date Published: 8/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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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17-2:9) 요나의 표적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기적 대신에 <요나의 표적>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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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4/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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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마 16:1-4)

날씨를 분별하지 못하고 우산을 준비하지 못하면 고작 비를 맞게 될 것이지만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 뜻과 무관한 삶,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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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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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외에는… – 설교원고 – 그리스도의교회선교회

표적은 육에 속한 것인 반면, 영생은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표적 보여 주시기를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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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church.kr

Date Published: 5/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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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을 기억하라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을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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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vhong.com

Date Published: 7/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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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의 올바른 의미? (마태복음강해 #167 – 마16:1-4)

요나의 표적”의 올바른 의미? 마태복음 강해 (#167) http://youtu.be/n9MCTjLOdj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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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hyjesusonly.com

Date Published: 10/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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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에 담긴 2가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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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나 의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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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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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에 담긴 2가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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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셨나요?

youtu.be/WzoZgezzp7Y

아마도 성경을 읽으신 분들은, 요나의 표적 하면,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3일 갇혀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알고 계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구요.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에는 또 다른 의미가 한가지 더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함께 살펴 볼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에피소드는 총 3개입니다.

(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그중 마태복음 16:1-4을 보시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여기서 “표적”이라는 번역된 semeion ( σημεῖον )은 sign, mark 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증거, 곧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특별한 증거,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병자를 치유하신 일입니다.

(요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그런데, 정작 사람들이 찾아와 표적을 구할 때,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는 이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십니다.

(마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0절을 보시면, 요나가 밤낮 사흘동안 큰 물기고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선지자였던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큰 물고기 배에 삼켜졌고, 그 안에서 회개하며 기도했을 때, 3일 뒤에 물고기 뱃속에서 나아와, 말씀대로 니느웨에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인물입니다. 바로 그 요나가 3일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3일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다. 곧 죽은 뒤 3일만에 부활할 것이다. 곧 인자의 죽음과 부활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아마 여기까지는 많이 들어보셨던 내용일 겁니다.

그런데, 요나의 표적과 관련된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1장입니다.

(눅 11: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눅 11: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눅 11: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눅 11: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30절을 잘 보시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요나가 물고기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표적이 되었다는 것일까요? 아니요. 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는 삼일동안 걸어야 하는 큰 성읍 니느웨를 하루만 다니며,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만 아주 간단한 메시지만 선포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를 했었고, 하나님께서는 이에 마음을 돌이키사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이어지는 31-32절의 내용,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찾아 왔었고, 이제 그녀가 심판 때에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는 내용,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는 내용이 “요나의 표적” 다음에 이어지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누가복음에서 요나의 표적은, 니느웨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를 하게 만들었던 메시지, 곧 예수님이 선포하는 메시지라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요나가 선포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런데, 이방 사람들인 니느웨 사람들은 듣고 돌이켜 회개했던 것과 달리, 이 세대 사람들은, 들어도 회개하지 않았으니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 라는 내용이지요.

그런 점에서 “요나의 표적”은 마태복음의 기록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악한 세대들에게 표적을 보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돌이켜라는 메시지가 함께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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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1. 표적 보이기를 요청한 이유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적(기적)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무리가 모였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눅 11:29-32). 여기에서 ‘표적을 요구한다’는 말은 누군가가 예수님께 그것을 요청하였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마태복음 16장 앞에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본 무리는 놀랍게 여기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가 하면 그 일로 모인 수많은 사람을 칠병이어로 배불리 먹이기도 하셨다. 마태는 그렇게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숫자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나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바로 그 일 이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분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청하였다(마 16:1).

그렇다면 그들이 그분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청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비록 그분이 촌구석 갈릴리 출신이고 하찮은 목수의 아들이지만 그래도 범상치 않은 언행을 보고 들으면서, 그분의 정체가 정말 궁금해서 그랬던 것일까? 그래서 혹시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여주신다면, 그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지 예수님을 시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만약 그 시험에 걸려들면 그것을 빌미 삼아 그분을 잡아 들이기 위해서 그분께 표적 보여 주시기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께 표적을 구하기 바로 전에 그분이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일과 칠병이어의 표적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그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은 유대인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성전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그 무리가 이렇게 수군거리는 것을 분명하게 들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요 7:31-32). 그런가 하면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이런 걱정까지 하였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요 11:47).

이렇게 주님이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분을 하나님이 보내신 존재로 믿지 않았다.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이런 마음이 이어지는 걱정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8절).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정치적 이익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서 제거하기 위하여 표적을 요청한 것이었다.

2. 예수님의 반응

이런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에 예수님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셨다. 첫 번째로, 하늘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 날씨를 분별하면서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그들의 영적 무지를 질책하셨다(마 16:2-3). 두 번째로, 그들의 영적 무지에 더하여 오직 예수님을 배척하려고만 하는 그들의 악하고 음란한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셨다(4절). 그리고 그들을 향해 최종적으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선언하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동일 사건을 다루면서 그분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1)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2)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막 8:11-13).

한사코 자신을 힐난하고 시험하려고만 한 바리새인들의 태도 앞에서, 주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신 후에 그들을 떠나 건너편으로 가셨다. 또 그들에게 지금 당장 표적을 보여줘도 그분의 제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 빤하기 때문에, 주님은 바로 그곳에서 그들이 원하던 표적을 보여 주지 않기로 마음먹으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의 불순한 의도에 지금 당장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장단을 맞추면서 놀아나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분이셨다.

주님은 사람들의 계획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자신이 계획하신 때에 자신이 계획하신 가장 선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다. 요나의 표적에 대한 주님의 예고는, 종교 지도자들이 원하던 때와 장소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표적을 예고만 하셨을 뿐, 정작 실행은 주님이 계획하고 계시던 그때와 그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예수님은 지상의 공생애 사역 끝자락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대속하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또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롬 4:25).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들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달라고 떼를 쓰는 대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그분이 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주시도록 기도하고 요청해야 한다.

3. 요나의 표적인 예수님의 부활

그렇다면 왜 주님은 보여 주실 표적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을까? 다시 말해서, 이전에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그분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결정적인 표적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활’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물론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행하셨던 모든 표적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 주님은 부활 이전에도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표적들을 여러 차례 보여 주셨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병든 왕의 신하의 아들과 38년 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다.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셨고, 풍랑이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고치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셨다(이상은 요한이 제시한 표적들). 이것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는 명백한 표적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까지 여전히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그날 밤 제자들 가운데 빌립은 이런 질문까지 하였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그 질문에 주님은 기가 막히셨고,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에는 한탄이 섞여 있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믿음을 돕기 위하여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니시면 결코 하실 수 없는 일들을 그 능력으로 이미 다 보여 주셨다고 그들에게 항변 아닌 항변을 하셨다.

그 대화 이후에도 제자들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알고 믿었다는 기록이 사복음서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다시 말해서 부활을 통하여 요나의 표적을 보여 주셨을 때, 제자들은 그때에야 비로소 주님이 이전에 예고하신 부활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이 하셨던 말씀을 믿을 수 있었고(요 2:22), 또 그때 비로소 그분을 자신들의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다(요 20:28). 이런 이유로, 주님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결정적인 표적으로 요나의 표적, 즉 부활의 표적을 그 증거로 제시하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부활의 표적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 더이상 논쟁을 벌이지 않고 함구하고 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활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고, 또 그것이 인간의 최종 숙제이자 최대의 적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주는 첫 단추가 되기 때문이다. 부활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승리하셨다는 결정적인 표적이고, 또한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분의 십자가가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주신 것이라면, 그분의 부활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보여 주신 표적이다(롬 4:25).

4. 부활의 윤리학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활이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마 28:20). 따라서 우리가 그분을 주님으로 믿으면 우리도 그분처럼 부활하게 되고,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을 의지하면서 축복 가득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부활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부활을 머나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알고 있던 마르다에게, 그래서 지금 이곳에서 죽어 있는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없던 그녀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 말씀대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은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삶에도 생명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주님과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될 것을 믿는다.

부활이 주는 두 번째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우리 자신이 아닌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윤리학을 제공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삶의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7-9). 우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렇지만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기 원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삶이 아닌 죽음을 선택할 때도 그 동기는 똑같다. 온전히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죽어도 살고 또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에 반대로 행동하는 것은 죄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부활을 경험할 수 없다. 그 사람의 기대와 반대로 죽음과 심판만이 그를 기다릴 뿐이다. 이러한 진리는 ‘생즉필사사즉필생’(生則必死死則必生)이라고 하였던 이순신 장군의 말 속에도 녹아 있다. 이순신 장군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지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버리고 맞는 이치를 따르는 데 있다.

마태복음 19 – 요나의 표적

마태복음 12장 38-42, 16장 1-4절 방월석 목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표적’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σημειον(세메이온)은 ‘결정적인 놀라운 증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sign으로 번역되고 있는 이 단어는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이적적인 사건을 표현할 때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가지 이적들 가운데 특별히 신앙적 의미가 큰 7가지 이적들을 선택해서 ‘표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이적을 시작으로 해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까지 7가지 사건들을 표적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이적적인 사건들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부인할 수 없는 ‘표적’들이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신앙을 “표적을 구하는 믿음”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탄생하는 과정에서부터 저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들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탄생 역사인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10가지 이적들이 등장합니다. 바로의 완악한 마음을 꺾으시기 위해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 즉 10가지 표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애굽 땅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걸을 때도, 40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기적의 떡을 먹고 기적의 물을 마셨습니다. 그 후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도 저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했으며, 이후로도 이스라엘 역사의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은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늘의 표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1.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12:39 ; 16:2,3).

이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많은 표적들을 경험했던 유대인들인지라 예수님께도 표적을 보여 달라 구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표적들을 보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 바리새인 서기관을 향해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12:39)하십니다.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표적들을 보면서도 믿지 않으려는 저들의 완악한 마음이 문제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12장의 말씀과 비슷한 상황에서 주신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에서도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궃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2,3)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늘의 모습을 보면서 천기, 즉 날씨는 곧잘 맞추면서 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3년이란 공생애 기간 동안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낫게 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하늘로서 온 표적이요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사 35:4-6). 그런데 이 많은 표적들을 보고도 저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던 겁니다. ‘하늘로서 온 표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들의 어리석고 완악한 마음이 문제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늘로서 온 표적을 눈앞에서 보여주고,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기에 어둠속에서 헤매다가 결국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하신 겁니다.

2. 시대의 표적(16:3)

예수님은 이미 많은 표적들을 보고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완악한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면서 ‘시대의 표적’(마 16:3)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구속의 역사를 살피면 중요한 시대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시대의 표적’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출애굽 당시에는 모세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재앙들이 바로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보내야 한다.’는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바로 왕이 이 표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10가지 재앙 모두를 다 겪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는 예레미야가 맨 멍에가 바로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이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벨론이라는 멍에를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리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예루살렘 멸망이라고 하는 더 큰 재앙을 겪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증거 하신 말씀들이 바로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 왔다는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표적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종말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시대의 표적들’이 있습니다. 종말과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표적들이 있습니다. 처처에서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온역의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에서 떠나 배도의 길을 가고, 어둠의 세력들이 득세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는 시대의 표적들입니다. 이런 시대의 표적들을 보고 깨닫는 자, 깨닫고 기름과 등불을 예비하는 자들만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겁니다.

3. 요나의 표적(12:39,40 ; 16:4).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16:4)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완악한 자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표적’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요나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12장 39, 40절에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12:39,40)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으신 뒤 사흘 동안 무덤에 갇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부활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시대에 주신 ‘요나의 표적’ 즉, ‘마지막 표적’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표적인 ‘부활의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표적’은 예수님의 시대 뿐 아니라,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표적이 될 겁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이 실현되는 그 많은 사건들을 지켜보면서도 이 표적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요나의 표적’인 ‘부활의 표적’을 보여주실 겁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성도들의 부활 사건 즉, ‘휴거의 사건’이 이 세대에 주시는 마지막 표적, ‘요나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주의 오심이 임박했다는 많은 표적들을 보면서도 이를 인정치 않고, 마지막 표적인 요나의 표적까지 보아야 믿겠다는 자들이 있습니다. 휴거의 사건이 일어나야 비로소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들은 이 어리석음으로 인해 7년 대환난이라고 하는 환난의 때를 겪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이 기간 동안 진정한 회개를 하고 구원을 얻는다 할지라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슥 3:2)와 같이 많은 고난을 통과해야 비로소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환난성도(참고, 계 7:14)’라 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까지 보아야 믿겠다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표적을 보지 않아도, 말씀 자체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처럼 믿음이 없을 땐 보고라도 믿어야 하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된 것입니다(요 20:29). 요나의 표적을 보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을 믿을 수 있는 자가 복된 자라는 겁니다.

4. 심판 때에 니느웨 백성들과 남방 여왕의 정죄하리라(12:41,42)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표적이 아닌 말씀 자체를 믿는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시면서 니느웨 백성과 남방여왕을 본받으라 하십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12:41,42)하십니다.

a. 요나서 3장을 보면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 선지자가 마지못해 대충 전한 말씀을 듣고도 회개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가 물고기 뱃속에 갇히는 고초를 겪은 요나가 마지못해 니느웨로 돌아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삼 일 길을 걸어야 다 돌아다닐 수 있는 니느웨 성을 하루 만에 돌아다니며 대충 전했습니다(욘 3:3,4). 그런데 이런 요나의 성의 없는 외침을 듣고도 니느웨 백성들이 왕으로부터 짐승들까지 모두 굵은 베를 입고 금식하며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니느웨를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요나와 같은 주의 종들을 통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 왔다” 외치고 계십니다. 이 외침을 듣고 우리로 니느웨 백성처럼 회개해야 한다는 겁니다. 롯의 사위들처럼 이 경고의 외침을 농담으로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b. 두 번째로 예를 드신 남방여왕은 열왕기상 10장에 등장하는 스바의 여왕을 말하는데, 스바의 여왕은 먼 곳에서 많은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했습니다. 솔로몬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스바, 지금의 에디오피아에서 찾아와 그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았다 했습니다(왕상 10:1-13).

먼 곳에서 예물을 가지고 찾아올 만큼 남방 여왕은 지혜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였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살펴보아야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기에 성경의 예언들이 실현되는 시대의 표적들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남방여왕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살펴보는 자들은 요나의 표적을 보지 않아도 지금이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때임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겁니다.

5. 결 론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완악하고 어리석은 마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남방 여왕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펴보는 자들은 ‘요나의 표적’을 보지 않아도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을 알 수 있는 겁니다. 마지막 때인 것을 알았으면 니느웨 백성처럼 회개함으로 구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이 시대의 마지막 표적인 ‘요나의 표적’ 즉 ‘휴거 사건’의 주인공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요나의 표적’ 뒤에 펼쳐질 환난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12:39)하십니다.

요나의 표적과 니느웨 부흥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마 16:4) 불순종했던 요나가 폭풍가운데 심판의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배속에 있다가 사흘만에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께서 심판의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한 사건의 예표이며 이 세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표적은 바로 요나의 표적, 즉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가운데 무수한 기적을 행하셨지만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려주는 사인으로서의 표적이며, 이 시대, 우리가 믿어야 할 가장 절대적인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상으로 현재의 이 시대도 악하고 음란합니다. 니느웨 이상으로 악독이 가득한 시대입니다. 진정 이 시대 우리는 더욱 강력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니느웨 회개와 아울러 언급하셨습니다. ( 마 12:40-41) 요나가 물고기 배에서 살아난 이후,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다시한번 주셨고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라는 성읍에 가서 앞으로 40일 이내에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는 하나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요나의 이야기는 꽤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고 당연히 니느웨에도 알려졌을 것입니다. 요나가 폭풍가운데 바다에 던져졌고, 그가 바다에 던져지자 즉시 바다의 폭풍이 멈추어졌고, 그런데 놀랍게도 사흘 만에 그의 육체가 해변에 던져졌는데, 그가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 알고 보니 요나가 그 동안 물고기 배속에 있었다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그의 영혼이 살아서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이지요, 물고기 배 안에서 호흡도 불가능하고 물고기 배에서 나오는 소화액 가운데 육체는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요나의 표적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표한다면 예수님께서 숨지셨듯이 요나도 죽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스올에 갔었다고 기록되는데 (욘 2:2),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지옥과 유사한 음부로 성경가운데 해석됩니다. (눅 16:23) 그런데 그가 물고기 배에서 토해내어지는 순간 생명이 육체에 돌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여간 니느웨 사람들은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난 요나가 전하는 메시지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거국적인 회개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킵니다. 더구나 요나가 푹풍가운데 던져진 이유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니느웨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후 왕에서부터 심지어는 가축에 이르기까지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과 함께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니느웨를 향한 진노를 멈추셨던 것입니다. 이 니느웨에 일어난 영적 각성 부흥은 앗수르라는 나라 전체에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이후 역사는 앗수르라는 나라가 힘있게 부상하며 정치적 패권을 가지 세계 정치의 구심점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이렇게 강력해진 앗수르에게 결국 이스라엘도 정복됩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과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를 언급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요나보다 큰 자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요나가 사흘만에 살아나온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건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그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시지만 이 세대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들의 입을 통하여 전하시는 메시지를 듣고 우리도 니느웨 백성처럼 금식하고 회개함으로 개인과 가정과 국가에 영적 각성 부흥이 임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요나 1:17-2:9) 요나의 표적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기적 대신에 <요나의 표적>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마 12장, 눅 11장)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난 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유일한 기적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것뿐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보여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님의 명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이나, 또 하나님은 큰 고기를 보내서 요나를 살려주심과 같이 기적으로 통해서 사람을 구하신다는 것이나, 아니면 니느웨의 사람들의 생명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설명하시고자 하는 의(의도)가 표현된 사건, 곧 형식인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자기가 뜻한 곳으로 가려고 탄 배는 풍랑을 만났고, 요나로 인한 풍랑임이 드러나자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낯, 곧 하나님의 정체성을 피하면 스스로 ‘고난’이라 탄식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빠져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는 외면하고, 삶 그 자체를 영화롭게 하려고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니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해서 요나를 삼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거짓말처럼 물고기 뱃속에서 육지로 나와서 다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요나가 체험한 기적인데,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것을 예수님이 보이실 유일한 기적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이 그뿐 만은 아니었습니다. 오병이어는 물론이고 죽은 사람을 살려낸 것만 3명인데 그런데 왜 요나의 기적 밖에는 없다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예수님의 언급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것만이 하나님이 보실 때 기적다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모든 기적들은 그 기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기적’을 신앙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봅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적의 하나인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경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신비한 일=좋은 신앙 or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적이란 요나의 기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은 결국 요나의 기적에 수렴되는 것, 요나의 기적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어떤 이적이나 기적이나 신비한 일을 경험했거나 또 일으킨다고 해도 요나의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의 기적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풍랑 이는 바다에 빠지면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데 사람을 삼킬 만큼 큰 물고기가 와서 요나를 삼키고 삼일이나 뱃속에 있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본질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 중에서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이 요나의 기적의 본질일까요? 그것을 사실로 믿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된다는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 요나의 기적에 비유되는 사실적인 사건인데 그 사건의 본질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즉 <요나의 기적>이라는 기적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자기 뜻대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이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생각하면서부터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관철시키려 살다가 인생이란 조성하신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뜻을 자기 존재의 이유와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영이 심령 안에 생명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삶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육신의 삶이 삶의 본질이라 여기기에 하나님께 육신이 필요한 것과 삶이 풍요해지는 것을 복으로 알아 늘 그것을 구합니다. 삶을 사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지 않고 삶, 그 자체가 목적이라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그런 사람들에게는 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기대하시고 목적하시는 것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름을 넣어주기 위하여 자동차를 산 사람과 같이 인생 자체를 풍족하게 하려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 인생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 여기며 살며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주신 인생을 자기 맘대로 살다가 그런 삶이 세상(바다)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자신을 돌이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베푸시므로 바다에서 살아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망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자리로 사람이 그 자리를 옮기는 것, 그것이 요나의 기적이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시는 유일한 기적인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Jonah 1: 17-2: 9) The sign of Jonah

To the Pharisees who ask Jesus for a miracle, Jesus tells them that there is nothing to show but a miracle instead of a sign of Jonah (Matthew 10, Luke 11). This is what Jesus said about the crucifixion . And this is what Jesus said about the event that Jesus was the Son of God. Therefore, the only miracle in the world is not different, but that the life with the flesh is only born again as the Son of God.

The story of Jonah’s fairy tale is not merely to break the command of God, but God loves the life of Nineveh, or he saves people through miracles as he sent Jonah to live. Is not. It is an event, or form, in which God’s intention is to be explained through Jonah.

When Jonah rebelled against the command of God, and the boat that was about to go to his place met with a storm, and Jonah was revealed to be a storm, Jonah was thrown into the sea. This means that when a person avoids the identity of God, the identity of God, he or she will fall into the values ​​of the world sighing as ‘suffering’. It is the folly of God that people turn away from what God has given to man and live to glorify life itself.

Jonah was thrown into the sea, and God prepared a great fish to swallow Jonah. Then, on the third day, like a lie, we come out of the belly to the land, and go to Nineveh and tell the word that God has told me to do. This is the miracle Jonah experienced, and Jesus said that Jesus was the only miracle that Jonah had survived in the belly of the fish.

But when you think about it, it was not the miracle that Jesus showed. Of course, there are only three who saved the dead, but why is it that there are only miracles of Jonah? This is a very important mention of Jesus. It is a miracle-like miracle when man sees God as the Son of God. In other words, all the other miracles are meant to explain the miracle.

Many believers see ‘miracles’ as a very important element of faith. So there are some who claim that there is no salvation if they do not receive the tongue, which is one of the miracles. People think that ‘mysterious work = good faith or God’s will’. But Jesus said that miracles are miracles of Jonah.

This is the word of Jesus who performed many miracles. In other words, many of the miracles Jesus has done are meant to converge on Jonah’s miracles, miracles of Jonah. Therefore, even if you have experienced any miracle, miracle, or mysterious thing in the world, or if you can not cause miracles of Jonah, it is nothing.

Then what is the essential meaning of Jonah’s miracle? If a man walks in the sea, he will die. Is it true that a fish that was large enough to swallow a man came and swallowed Jonah and was alive for three days, even though he was in the womb? Or is it the nature of Jonah’s miracles that Jesus rose from the dead three days? Is it true to believe in God?

The fact that Jesus was resurrect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is a realistic event compared to Jonah’s miracle. The essence of the event is that the people who cried out that Jesus was crucified and that he should crucify Jesus because of it, This is what happens. In other words, the miracle essence of “Miracle of Jonah” is to say that the man who lived by his own will escapes the face of God and becomes the Son of God.

It is the most important miracle for a person to live by knowing that there is a person who has created life and living his life for the reason and purpose of his existence. I will. It is because the life of God’s will is the Son of God. This is because the spirit expressed by the righteousness of God is the life in the soul because the will of God has become a life.

Because many people think that the life of their flesh is the essence of life, they are blessed to know that God needs the flesh and that life is abundant. I do not think there is purpose in life, but life itself, and purpose itself. This, however, is the avoidance of God. God does not lift his face to such people. Because God builds, expects, and has a purpose. God is not loving people to enrich life itself, like those who bought cars to feed oil.

That is the way that life itself is the purpose of life and that we can not know the purpose of our existence and live our life as we wish, and to turn ourselves by knowing that life belongs to the world, It is miraculous in miracles that we are saved from the sea because we are good. It is the miracle of Jonah that man moves to a place where God can see and be seen in the midst of death and live when God sees it, and that is the only miracle that Jesus shows to man.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마 16:1-4) – 새벽기도 설교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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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등장했으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분리된 자들)’과 ‘사두개인(의로움)’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교는 ‘바리새파’, ‘에세네파’, ‘사두개파’가 3대 분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사두개인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부활과 영혼 불멸 그리고 영적 세계를 부인하고 율법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분파는 항상 심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처럼 많은 이질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득권에 도전한다고 생각되었던 예수님을 대항하는데 에는 협력한 것입니다.

1. 먼저,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했습니다(1절).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요청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요청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동안 수없이 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표적을 보았다고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표적을 표적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분명하고 확실한 표적을 보아도 그것을 표적으로 여기지 않고 의심거리를 찾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표적으로조차 여기지 않는 작은 은혜에서도 진리를 깨닫고 그것으로 인해 더욱 큰 믿음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눅 16:31).

여러분,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표적이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표적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히 11:1).

그러므로 표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며, 그것은 한낱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믿음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믿음이 없기 때문에 표적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의 눈으로 표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신앙이 견고하고 온전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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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표적 보이기를 청한 것은 반드시 잘못된 일인 것은 아닙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확고한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꼭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표적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행위가 잘못된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표적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표적을 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의 차이는 바로 ‘동기와 목적의 차이’입니다.

확고한 믿음을 갖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그저 악한 행위일 뿐인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며 책망하셨습니다(2-3절).

이 말씀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이 ‘날씨’를 분별하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이 아니라,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이 ‘날씨’를 분별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일상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하찮은 이치들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인간의 역사 전체를 좌우 할 수 있는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는 말씀입니다.

날씨를 분별하지 못하고 우산을 준비하지 못하면 고작 비를 맞게 될 것이지만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 뜻과 무관한 삶,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역시 일상사와 관련된 하찮은 이치나 표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기 예보, 주가 동향, 경제 전망’ 같은 일상사와 관련된 일에는 열심이지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시대의 표적’을 아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아니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도 이와 같은 사람들에 속해 있지는 않습니까?

관심이 오직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관련된 것을 분별하는데 집중되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속히 관심을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시대의 표적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시대는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입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우리 또한 이 세상과 함께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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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어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여기서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 일간 들어갔다 나와서 이방 땅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던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무덤에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므로 마침내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증거되게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허영심에 빠져 무언가 신비한 표적 보여주기를 청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십자가 대속만이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2-24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복 신앙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스스로 지식과 지혜가 있다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실상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을 본받는 자만이 진정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을 본받아, 악하고 음란하여 소망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성령의 권능으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음을 기억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나의 표적을 기억하라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을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고자 할 때 요구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모세의 표적이나 엘리야의 표적을 기대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든지 하늘에서 불이 내리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표적을 보이면 그들이 믿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 39). 그들은 믿으려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을 핑계를 찾으려고 표적을 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싫어서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고 물고기 뱃속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기적으로 살아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이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진노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큰 지진으로 니느웨 성읍이 무너질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알면서도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바다에 빠뜨리셔서 다시 살리신 후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며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십니다.” 요나는 아무런 표적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 말만 듣고서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을 믿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다는 것 외에 더 큰 중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더군다나 그분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며 무슨 표적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고통과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가난한 부부가 여섯 자녀를 어렵게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절친한 부자 친구가 한 아이를 자기에게 양자로 주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습니다. 그날 저녁 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어간 다음에 남편과 아내는 그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 어떤 아이를 양자로 보낼까? 그들은 첫째 아이인 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맏아들을 남 주기에는 너무나 귀하고 아까웠습니다. 둘째 아이는 딸이었습니다. 이번에 역시 첫 딸이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셋째 아이도 딸인데 너무나 몸이 약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넷째 아이는 장모님과 너무 닮아서 보낼 수 없다고 부인이 거절했습니다. 다섯째 아이는 또 할아버지와 너무 닮아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애기 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 부인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며 “우리 애기, 귀여운 것 남 줄 수 없어요”하며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여섯 자녀가 있었지만 그 하나라도 기꺼이 내어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독생자밖에 없었지만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롬8:32).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 요나의 표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롬 8:38-39).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표적은 바로 사랑의 표적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을 주위 사람들에게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나와 같이 영혼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야 할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의 올바른 의미? (마태복음강해 #167

“요나의 표적”의 올바른 의미?

마태복음 강해 (#167)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마16:1-4)

성경 사건에 자신을 대입하라.

신자들이 성경에서 본문 같이 어떤 사건을 기록한 내용을 접하면 자신과는 크게 상관없는 옛날이야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지성과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재의 형편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사건이 시사(示唆)하는 도덕적 교훈과 종교적 깨우침만 얻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원히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라는 진리를 떠나서도 너무나 불합리한 사고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기록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한 것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경의 모든 사건은 당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자기 말과 행동이 성경기록으로 남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결국 성경은 후대인들이 읽으라고 기록된 것이다. 후대가 특정한 시기의 세대만 아니다. 모든 후대에는 또 다른 후대가 있기에 성경은 모든 세대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을 그 등장인물에 대입하여서 당시 상황을 가상하여 묵상해야 한다. 그 이유도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이 인간과 그 역사를 주관하는 원리가 영원불변하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성정(性情), 특별히 그 죄의 본성이 항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어야 할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의 본문이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신자들도 예수님께 하늘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예수님도 그런 신자들을 악하고 음란하다고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 자신을 대입하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자기 안에 본문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모습을 발견하라는 뜻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기대했던 내용과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과 우리의 것이 동일함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나에게 야단을 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왜 그런지 이유도 깨달아야 한다. 또 그 깨달음에 따라 철저히 회개하여 고쳐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더더욱 당시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본격화되는 대립과 갈등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의 이방 땅을 떠나선 헬라 이방인들이 사는 데가볼리 쪽 갈리리에도 잠시 들렀다. 그곳에서 초자연적 치유와 7병2어의 이적을 베푸신 후에 유대 쪽 갈릴리 즉, 완전히 유대 땅으로 넘어 왔다. 마태복음 16-18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갈릴리에서 마지막으로 사역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말로 유대사회 지도자들과의 갈등과 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산헤드린에서 이단 조사단이 왔을 때에 주님은 그들더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였고 하나님이 심지 아니했기에 마지막 날에 뽑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자들이 그들의 미움을 산 줄 아느냐고 염려한 그대로 상황은 진행되어갔다.

그 갈등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1절이 증명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라고 말한다. 이 두 종파는 평소에 종교적 정치적으로 아주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런데 함께 왔다. 말하자면 어제의 원수가 공통의 더 큰 적을 만나자 하루아침에 동지로 돌변한 셈이다.

예수님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유대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게 되자 자기들의 기득권과 특권이 잠식당하고 상실 될 것을 함께 염려한 것이다. 예수님의 표적을 정말로 보길 원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꼬투리를 잡을 심산이었다.

이미 마음에 정죄하고 덤비는 자들에게는 어떤 이적을 보여줘도 의미가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법적, 종교적 하자를 얼마든지 덮어씌울 수 있다. 사두개인이 바리새인과 함께 나타났을 때부터 그들의 속셈을 훤히 꿰뚫고 있던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줄 리 만무했다.

하늘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청은 당신이 메시아인 것을 증명해 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5병2어, 7병2어의 기적은 물론, 나면서 불구자들을 초자연적으로 허다히 치유해주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베푼 모든 치유와 이적이 지금껏 주술사, 요술사들이 행했던 것과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바리새인들도 기도하여 축사하는 등(마12:27) 하나님으로부터 초자연적 응답을 받아봤기에 예수님의 표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름을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사역을 통해 당신의 당신 되심을 충분히 드러내었다. 침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을 때에도 주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고하라”고 했지 않는가?(마11:3,4)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례를 치르러 관에 누어있을 때에 죽음에서 일으켜 세운 사건도 들었을 것이다.(눅7장) 그렇다면 이젠 당신이 십자가에 스스로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표적 말고는 보여줄 것이 남지 않았다.

주님은 그들의 요청을 완전히 묵살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요나의 표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그 때는 너희가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또 너희가 기대했던 메시아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어떻게 다른지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요나의 표적은?

요나는 고래 뱃속에 삼키어져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흘 만에 살아났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우리의 모든 죄 값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당신께서 세상 죄인들의 구주임을 만천하의 모든 세대에게 공표하셨다. 그 십자가 은혜를 믿고 당신께 겸비하게 엎드리면 누구든지 구원해주신다는 것이 바로 요나 표적의 의미였다.

지금은 예수님의 공사역의 후기였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수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보이셔야만 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당신의 제자들뿐 아니라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미리 예고할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그들이 당신을 유대 종교법을 위반한 잘못을 범한 죄인이기에 십자가 사형에 처했다고 말하겠지만, 주님은 그들마저도 불쌍히 여기어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음을 사전에 그들에게도 가르쳐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 당신께로 나오라는 뜻이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할 한 가지 중요 이슈가 발생한다. 요나의 표적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소지하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오늘 날의 신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과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 당시에 그렇게 이해했을지 따진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정답이다. 유대인들은 그 때는 물론, 그 한참 후에도,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직접 복음을 배웠던 제자들마저 스승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십자가에 달리는 마지막 날 밤에도 베드로는 혁명을 기대하며 칼 들고 설쳤지 않는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도 자기 생명에 위험이 닥치자 혼자 살려는 비겁함이 주원인이었지만, 스승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었던 면도 있었던 것이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눈앞에 서있는데도 의심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선 요나의 표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연상했을 수는 없다. 특별히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끝이기에 이 땅이 전부라고 믿는 현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본문이야말로 현대의 신자가 사건 당사자의 입장으로 읽어야할 대표적인 기사라고 말한 까닭이다.

그럼 그 현장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본문이 우리에게 2천 년 전 사건이듯이, 그들에게는 요나가 그때부터 8백 년 전의 이야기였다. 우리처럼 그들 또한 요나 이야기 안에 자기를 당사자로 대입하여 이해해야만 했다.

알다시피 요나서의 두 주인공은 요나 선지자와 니느웨 사람들이다. 우선 니느웨 사람들과 자신들을 일체화 시켰을 리는 만무하다.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그들을 구제와 기도에 열심이었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기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었다. 그럼 요나에 자신들을 비추어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극심한 죄악의 도성인 니느웨에 가서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소명을 주었다. 그러나 요나로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악하고 음란한 이방인들이 유황불의 심판을 받아도 부족할 판인데 왜 구원을 주시려는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기야 당시로선 땅 끝인 다시스로 도망갔지만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손에 다시 붙들려 니느웨로 가게 된다.

그는 도무지 본심이 내키지 않아 억지로 회개하라고 외쳤는데도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은 물론 육축까지도 아끼며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었다. 그는 더 심통이 나서 하나님께 불평만 털어놓았다.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더러 너희가 바로 이런 요나 같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셈이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기적의 미묘한 차이

성경의 기록은 정말로 오묘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모든 사건을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인간 구속의 사역이 태초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완벽하신 섭리에 따라 진행되었기에 성경에는 인간 이성을 뛰어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으니 그 의미가 일반적인 도덕이나 종교와는 차원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5병2어 기적을 일으켰을 때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즉,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이단여부를 조사하러 나왔다.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안 씻고 밥 먹는 것을 문제 삼았지만, 사실은 그 기적 때에 2만 가량의 사람들도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떼었다는 것이다. 유대교 규정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할 유대 랍비가 오히려 위반케 만들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유전을 우위에 두니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고 있다고 야단치며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금은 예수님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7병2어의 기적을 일으킨 직후다.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함께 정치 지도자인 사두개인들이 따지러 왔다. 약 만오천 명의 사람들이 손을 안 씻고 떡을 떼었다는 사실을 떠나 예수님이 이방인들과 식사 교제를 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뜻이었다.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것은 거룩한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규정이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과 한참 교제를 했고 심지어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까지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5병2어 후에는 유대 랍비로서 예수님의 자격 여부를 문제 삼았다면, 7병2어 후에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주체성마저 버렸지 않느냐는 것이다. 유대사회 구성원으로서 최소 조건마저 갖추지 못했으니 자기들 사회에서 추방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으로서 예수님이 깨우쳐주고 싶었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이 니느웨 이방인을 구원해주는 것이 싫었듯이, 너희도 유대 선민사상에 완전히 고착되어있다는 것이다. 유대 특권주의에 사로 잡혀서 마치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독점적으로 구원을 허용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달으라는 것이다.

요나는 그나마 니느웨에 죄악이 극심하므로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그분의 공의를 붙들고 씨름했지만, 너희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유대사회에서 영향력이 감소하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존경을 덜 받고, 사회적 경제적 특권이 줄지 않나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입이 줄고 밥그릇이 떨어질까 목을 매단다는 것이다.

모세 율법을 세밀히 지키려 노력한 것 까지는 좋지만, 겨우 손 씻고 밥 먹고 또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는 것으로 한 사람의 인격과 영성이 우월하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차원마저 넘어서 만약 그렇지 못하면 아예 죄인 취급하고 구원에서 소외되는 양 정죄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작 모세의 율법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다. 하나님은 또 당신의 공평과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가장 우선적 방식으로 이스라엘더러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와 압제 당하는 자들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천대하다 못해 정죄까지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방 지역에서 초자연적 치유와 7병2어의 이적을 보이자마자 유대지도자들이 찾아와 메시아 되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다. 겉으로는 그들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유대인의 메시아라면 모세의 계명과 유대의 유전을 잘 지켜야하므로 그런 점을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속내는 요나처럼 사악한(?) 이방인에게 구원은 있을 수도 없고 또 무조건 싫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를 대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야단쳤는지 다시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물론 모세오경을 다시 제대로 공부해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과 대화하면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고 쌀쌀맞게 대답했다. 지금 유대 지도자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상기해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이전의 그 말이 절대로 당신의 본심이 아니었음을 또 다시 확실하게 입증한다.

나아가 예수님으로선 의도적으로 꼭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셔야만 했다. 그녀와 대화 마지막에 가선 오히려 너희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하기 위해서 말이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을 다 합쳐도 이 여인의 믿음만큼 못함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5병2어와 7병2어의 기적이 서로 다른 사건이라는 단순한 이유보다는, 그 은혜의 대상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다른 가운데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음을 잘 찾아보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이처럼 성경 기록을 죽 연결해서 읽고 묵상해보면 그 배경에 흐르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관되고도 통일된 뜻을 반드시 발견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요나의 표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5병2어, 아니 그 이전의 기록까지 포함하여 종합하여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의 모든 사건은 물론, 그 등장인물의 행동과 말과 심지어 생각까지도 사전에 마련된 어떤 완벽한 각본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다는 감을 느낄 수 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선지자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죄인을 구속하는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끝까지 주도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만이 모든 인간의 알파요 오메가인 진리를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택한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모세의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받기 직전에 하나님 스스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다고 한다. 니느웨의 악인이든 가나안의 천한 여인이든 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입어 마땅한 자로서 당신의 긍휼밖에 버려둔 적이 없다는 것이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더러는 율법대로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이방 백성들 앞에 보여 그들로 당신을 알고 믿게 하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육신적은 물론 종교적으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비록 아내를 누이라 속이거나 아버지마저 속이는 인간적 잘못을 저질렀으나 이들은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았다. 여호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뢰하고 따랐다. 그래서 애굽의 왕 바로, 그랄 왕 아비멜렉,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했고 최소한 그 이방 왕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여호와를 증거하기는커녕, 예수님이 사흘 굶어 기진한 데가볼리 이방인들이 불쌍해서 떡을 나눠주었고 또 흉악한 귀신 들린 딸에 시달리는 가나안 여인을 위로해준 일마저 문제 삼으려 들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는 자기들이 정한 규정을, 위반하였으므로 메시아가 아니라고 유대 백성들에게 선포할 작정이었다.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뜻은 너희들이 그러고도 어찌 모세 율법을 소유하고 알고 실천하고 있다고 감히 자랑할 수 있느냐고 지적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붙들고 씨름한 요나와도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회개하여 구원 얻은 니느웨 백성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다. 회개 이전의 그 악하고 음란했던 니느웨 백성과 같다고 야단친 것이다. 너희야말로 하나님의 심판 날에 뽑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바로 그래서 너희 같은 자들을 위해서라도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중에 요나의 표적을 확실하고도 온전하게 보여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너희들이 죽음의 덫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조금 있으면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골고다 언덕까지 아무 말 없이 올라가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거룩한 율법대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영적 실상마저 이런 형편이니 그들부터 먼저 참 하나님을 알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가나안 여인에게 매정하게 여겨졌을지라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먼저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보여줄 표적이라곤 십자가 죽음과 부활만 남았는데 그 십자가를 통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참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듣고, 보고, 만지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내 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발견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볼 질문이 남았다. 내 속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가? 요즘으로 치면 바리새인은 목사 내지 장로이며, 사두개인은 국회의원이나 장관 격인데 일반 신자에 불과한 나와 크게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신자는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들 앞에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서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불려나왔다. 세상 사람들 앞에 진정한 요나의 표적을 보여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본문과 동일한 꾸중을 듣게 될 것 같다. 목사는 신자들이 교회와 당신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성령께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훼방을 한다고 야단치고 정죄하기 일쑤다. 교회 안에 하나님보다는 인간에 불과한 당신에게 충성하는 자들로만 일꾼으로 세우기 바쁘다. 양적으로 성장한 큰 교회의 목사는 무조건 큰 믿음을 가진 큰 주의 종이라고 대접한다. 그런 큰 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그 교인들도 자기 믿음이 아주 큰 양 착각하고 있다.

신자들도 불신자와 타종교인들을 배척하고 매도하기 일쑤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사랑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종교 간의 교세를 다투는 경쟁상대로 여긴다. 혹시라도 게이나 전과자가 교회에 출석하면 심판 받아 마땅한 자로 취급하여 목사에게 교회 출석을 금지시키라고 요구한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신자들도 은연중에 싫다는 신호를 보내어 결국은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교회가 비슷한 수입, 신분, 학식의 사람끼리만 모여 교제하는 모임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요나의 표적 즉, 예수님의 십자가 표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죄는 당신께서 죽기까지 저주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죄인들은 당신이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당신이 지으신 자녀들로 너무나 사랑하기에 당신께서 대신 죽으시고 살려주시는 긍휼을 베푼 것이다.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

작금 이런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조차 무시되고 있다. 심지어 모르기까지 한다. 대표적 예로 미국의 동성애 문제를 들 수 있다. 동성애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할 너무나 불쌍한 자들이다. 십자가 복음으로 얼마든지 그들 자신과 그 잘못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반면에 동성애는 성경의, 아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에 그분이 저주하는 분명하고도 절대적인 죄다.

그런데도 미국의 목회자들마저 이런 구분을 하지 못한 채 애매모호하게 타협하고 있다. 미국의 각 주들은 동성 결혼의 합법화가 대세다. 심지어 동성애자를 목회자로 세우기까지 한다. 바리새인들도 이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들은 구제, 금식, 기도에 열심이었고 율법도 철저하게 준수하려고 노력은 했다. 예수님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셨지 않는가?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는 것이 일차적 의미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것인데 영적으로 무지한지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는 원리를 완전하게 계시한 신구약 성경 66권을 소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죄인을 구속하는 경륜에 관해 일목요연한 전체 그림을 충분히 그릴 수 있다.

동성애자를 목사로 세우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정도를 넘어 죄인이 죄인을 인도하는 짓이다. 그것도 현행범이 강단에서 교인더러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는 셈이다. 이 어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닌가? 이 세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는 결단코 없을 것이다. 성경을 정말로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고 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본문 사건 현장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의 요나에게만 자신을 대입하면 되었다. 현대의 신자는 요나 외에 본문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도 자신을 대입하여야 한다. 나와 이 세대 안에서 요나, 바리새인, 사두개인 모두를 발견하여야 한다.

물론 예수님의 복음은 신자 모두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된다. 아무리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면 구원해주신다. 이전에 지었던 죄와, 지금 짓고 있는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해주신다. 그러나 그 용서는 그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받을 영원한 형벌에서 제외시켜 준다는 것이지,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개별적인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언젠가는 반드시 따른다. 죄 지을 때마다 일일이 벌주지 않아도 하나님 인자의 한도가 차면 반드시 무엇이 잘못인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하고도 엄하게 징계하신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더 거할 수는 절대로 없다.(롬6:1) 현대의 신자들은 죄에 대해서 너무나 무감각해졌고 타성에 젖어 있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을 주변 이웃에게 증거할 시도는커녕 그런 의사조차 없다. 요나 같이 하나님의 공의와 씨름하며 죄인과 죄를 미워하는 정도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내 가족이 안일하고 형통하는 데만 모든 신앙의 초점을 모은다. 이미 믿은 자로서 특권만 구하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 같은 목회자들부터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에 관해 진짜로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온전히 제대로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요나의 표적이 정말로 요나의 표적답게 보이게 해야 한다. 모든 이에게 처음이요 끝인 예수님을 교회 안으로 다시 모시고 들어와야 한다. 실종되거나 퇴색되어가는 십자가 복음을 온 천하에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당당하게 선포해야 한다.

세상에선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며 조롱하게 된지 오래다. 다시 기독교로 개명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 안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날마다 깨트리고 새롭고 깨끗케 되어야 한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목숨 걸고 싸우면서 세상 사람들 앞에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서야만 한다. 그러는 것이 단순히 기독교와 교회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틀어지고 신자가 신자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참된 복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4/21/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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