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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위한 불교기초강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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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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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 뜻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한때, 많은 이들이 반야심경의 이 마지막 부분을 신성시하며 만트라는 번역하는 게 아니기에 뜻을 생각하지 말고 반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상 최고의 신비하고 대단한 주문이니 주문 자체에 뭔가 대단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분명 반야심경은 그런 거 없다고 말한다. 혹여라도 그들의 믿음처럼 그런 것이 있었으면 오랫동안 중국이나 한국의 수행자들은 다 헛일한 샘은 아닐까.

산스크리트어를 비슷한 한자 음으로 음역하고 그 한자음을 다시 한글 음으로 옮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정확한 발음이 아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गते गते पारगते पारसंगते बोधि स्वाहा이고 IAST에서 나타내는음운은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이고 IPA에서 나타내는 음운은ɡəteː ɡəteː paːɾəɡəteː paːɾəsəŋɡəte boːdʱɪ sʋaːɦaː이다. 분명 우리가 발음하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랑 비슷하기는 하다. 비슷하다는 것도 이 발음에 익숙한 한국인이 보기에 그렇다. 고대 인도인이 들으면 전혀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혹, 우리가 바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 반대의 말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미국 식당에 가서 보니 나이프는 있는데 포크가 없어서 “포크 좀 갖다 주실레요? Could you give me a pork?”라고 말하면 돼지고기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Folk의 “F” 사운드를 바르게 발음하지 못하고 한국 사람들이 자주 실수하듯 한글 음대로 “P” 사운드로 “포크”로 발음하면 나이프 옆 포크가 아니라 돼지고기가 된다.

나와 너가 점하나 차이지만 정반대의 말이 되는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한국말이 서툰 남자가 한국 여자분에게 “너를 좋아한다.”라고 고백하려 한다. 차마 만났을 때 말은 못 하고 전화를 걸어 용기 내어 말한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여자분이 왜 전화해서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지 몰라 황당해서 “… 응… 그래서?”라 반문한다. 남자는 바로 뭔가 잘 못된 걸 직감하고 전화를 서둘러 끊고 머리를 쥐어 뜯는다.

한국말이 어설픈 외국인이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데 기사분이 이리 가면 되냐고 여러 번 묻길래 택시 기사에게 여러 번 “계속 직진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택시 기사분이 화가 나 보였다 한다. 한국인 친구가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니 “계소키 직진해요.”로 들린다. 한바탕 웃고 나서 외국인 친구에게 욕같이 들렸을 수 있겠다고 일러준다. 자칫 욕 같은 이 말에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택시 기사분이 성질 있는 분이셨으면 가만있지 않으셨을 거라고 덧붙인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한들, 콜라를 모르는 조선시대 수행자가 “콜라콜라 코카콜라 팹시도콜라 모지 사바하”라고 한들 뭐가 다를까.

우스게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뼈 있는 말이다. 흘려들을 소리가 아니다. 여전히 “혹시나.. 그래도..”하는 마음이 있다면 가만히 자신에게 어떤 믿음이 있는지 살펴보라.

아직도 “그래도, 혹시나”하면서 뭔가 얻을 것이 없을까 하며 바라는 찾는 이는 마지막 부분을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행이라 여긴다. 스승은 오늘도 자신의 노력만을 탓하며 뼈 깎는 수행을 이어가는 수행자들이 안타깝다. 그래서 침묵으로 충분할 가리킴이 길어진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주문도 설하게 된다. 이 또한 다 있는 그대로인 것을 스승은 잘 안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수많은 수행에 관한 환상과 믿음을 내려놓고 ‘수행’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한다. 수행은 뭔가를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 피안(彼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표현이다. 이것이 수행의 본질이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아제아제 바라아제

신비한 주문을 번역하면 안 된다는 한때의 믿음을 뒤로한 채 요즘은 이 부분을 한글로 번역해서 알리는데, 한글 위키피디아에 나온 다음 번역이 일반적이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그런데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gone, gone, everyone gone to the other shore, awakening, svaha.”

(일단 직역해보면 “건너갔다, 건너갔다, 모두가 저 너머로 건너갔다. 깨달음이여, 사바하”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라는 한글 번역에는 정확히 반야심경에서 그렇지 않다고 알려주는 믿음이 가득하다. 신비한 주문을 열심히 외워서 깨달음을 얻자는 믿음이 넘쳐난다. 이 말은 “지금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지금은 깨달음이 없다는 말이다. 또 이 말은 “여기는 아니다.”라는 말이다. 여기는 벗어나야 할 삼사라다. 현세상을 부정하고 이데아를 꿈꾸는 플라톤의 철학이다. 괴로운 삶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나온 번역이다. 반야심경의 전체 내용과 맞지 않는 번역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산스크리트어의 영어 번역을 보면 반야심경 전체 내용과 흐름을 같이 한다. “건너갔다, 건너갔다, 모두가 저 너머로 건너갔다.”라는 반야심경의 뜻을 잘 품고 있다. 공하다, 얻을 것이 없다, 갈 곳이 따로 없다고 말하는 반야심경이 가리키고자 하는 바다. ‘나’만 저 너머로 간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이미 도착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말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무무명 역무무명진”에서부터 “일체고진실불허”까지의 내용을 요약한다.

아직 스승의 말이 명확히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이기 힘든 찾는 이는 이렇게 요약된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기다린다. 스승이 왜 이렇게 내용을 요약해서 되풀이하게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일단 되뇌기 쉽게 핵심을 요약한다. 이미 자세한 뜻은 길게 앞에서 설명했으니 찾는 이는 요약된 내용의 본 뜻을 알고 있다. 요약을 반복하면서 가리킴의 본 뜻을 계속해서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풀이하는 까닭은 앎의 본질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반복하면 익숙해진다. 익숙하면 문득 “아하!” 한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들 앎이라고 말한다. 물론 단순한 반복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복할 때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그 뜻에 자꾸자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다. 이것이 만트라다. 이것이 살펴보기다.

위빠사나(Vipassanā, विपश्यना, 觀, Vipaśyanā)와 만트라는 본질적으로 같다. 같은 수행이다. 관심을 가지고 반복해서 살펴보다 보면 앎이 일어난다.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다.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일어난다.

娑婆訶

사바하

사바하(薩婆訶, svāhā, Sanskrit: स्वाहा)는 산스크리트어로 어떤 주문을 말한 뒤 마무리하는 통상적인 말인데 여러 번역을 통해 나타나는 의미는 간절함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렇게 찾음의 본질과 수행의 본질을 살피며 스승이 반야심경을 통해서 찾는 이에게 무엇을 가리키려 하는지 그 의도를 담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반야심경을 요약해서 찾는 이가 반복하기 쉽게 만든 말이다. 반복으로 오랜 믿음이 씻겨나가고 스승의 가리킴에 가슴이 열리도록 하는 말이다. 그렇게 문득 앎이 일어나게 하는 주문이다.

모든 헛된 믿음을 내려놓고 다시 보면 참으로 신비하게 앎을 일으키는 주문이며 당신의 가슴을 환히 밝히는 주문이며 최상의 주문이며 따로 다른 대단한 비법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이것만 집중하면 되는 주문이다. 그래서 능히 모든 오해와 믿음의 어려움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특정한 문장이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실체가 그렇다. 그렇게 공하다. 이 공을 통해 관자재보살의 실체를 본다.

이 주문을 문장으로 말하면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제목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 알 것이다.)

이미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뭘 얻을 필요도 건너갈 필요도 없다. 이미 모두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모두 있다. 이미 있는 그대로다. 중생에게는 없고 부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모른다고 또, 안다고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미 여기 지금 모두 있기 때문이다. 중생도 없고 부처도 따로 없다. 사물도 사물을 바라보는 ‘나’도 당신이 믿는 모든 다른 세상도, 극락도 지옥도, 모든 신들도, 브라흐마도 비슈누도 시바도, 정말 어떤 예외도 없이 모두 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삼세제불이 정확히 아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눈을 떠라. 이 사실이 관세음보살이다. 이 진리가 관세음보살이다. 그렇게 관세음보살이 드러난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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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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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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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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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무슨 뜻인가?

진언으로 보통 번역하지 않지만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깨달음이여, 아~싸(만세)!’ 정도…

A 한문으로 읽혀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는 음역된 것으로 우리말로는 그대로 번역 할 수 없습니다. 그 뜻을 알고자 하면 인도의 고대 글자인 산스크리트어의 원음을 알아야 합니다.

산스크리트어 원음은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ragate prasam.gate bodhi svh)’입니다. 이 문구는 일반적 문장이 아니라 진언 혹은 주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진언이나 주문은 주로 번역을 하지 않으나 보기 드물게 이 문장은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진언이란 주로 몸과 마음과 호흡이 깊은 명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말합니다. 깊은 명상 속에서는, 마치 물고기가 노니는 투명한 어항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물의 본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 속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진리를 이해하고 세상을 꿰뚫어 본 뒤, 모든 고통을 극복하였습니다. 완벽한 해탈에 이른 그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이 진언입니다.

‘아제(gate)’는 가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괴로움에서 해탈로 가버린 것이고, 혼란스러움에서 고요한 명상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반복어 ‘아제아제(gate gate)’는 가버리고 또 가버린 것입니다. ‘바라아제(pragate)’는 아주 먼 저 곳 끝, 파라다이스(부처님 세계)까지 가버린 것을 말합니다. ‘바라승아제(prasam.gate)’는 완전히 저 먼 곳 피안의 세계에 가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가버리네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로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피안)로 완전히 가버렸네!’라고 번역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모지 사바하(bodhi svh)’는 ‘모지(bodhi)’가 깨달음을 뜻하고, ‘사바하(svh)’는 기독교의 할렐루야처럼 기쁨과 행복에서 나오는 소리를 말합니다.

굳이 표현해 보자면 ‘이루어지이다!’ 혹은 ‘만세!’, 젊은 세대들 표현이라면 ‘아싸!’ 정도로 번역 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모지 사바하’는 ‘깨달음이여, 아~싸(만세)!’가 되겠습니다.

정리하자면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이것은 이 경의 핵심인 ‘공(空)’을 이해하고 깨달은 희열을 외마디 탄성으로 표현한 진언입니다. 굳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번역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피안)로 완전히 건너 가버리게 하네! (공의)깨달음, 아~싸(만세)!’

[불교신문3533호/2019년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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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무슨 뜻인가?

산스크리트 sri sri maha sri su-sri svah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천수경(千手經)의 정구업진언( 口業眞言)이다. 슈리(sri)를 중국인들은 길상(吉祥)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길(吉)은 선비[士]의 입[口]에서 나오는 말은 언제나 선량하다고 하여 ‘좋다’는 뜻을 지니다. [번역] 좋은 일이 있겠구나, 좋은 일이 있겠구나, 대단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지극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아! 기쁘구나.

38.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

38.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http://blog.daum.net/mahatop7/5498

이 부분은 반야바라밀다주를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각 단어의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아제(揭諦) : 가자.

바라(波羅) : 피안.

승(僧) : 완전히.

모지(菩提) : 깨달음(보리)

사바하(娑婆訶) : 뿌리내리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위를 잘 살펴보면 계속 첨가되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엔 아제아제..

그다음엔 바라아제…

그다음엔 또 바라승아제입니다.

그러므로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제아제(揭諦揭諦) : 가자 가자.

바라아제(波羅揭諦) : 피안으로 가자.

바라승아제(波羅僧揭諦) : 피안으로 완전히 가자.

모지(菩提) : 깨달음에

사바하(娑婆訶) : 뿌리를 내려라.

이 반야바라밀다주는 산스크리트어로 외우는게 좋습니다.

그게 원어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토말 :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 억양을 부드럽게 했을 때 한국말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영 어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해 석 : 가라. 가라. 피안으로 건너가라.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라.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라. 반야심경 전체를 외우는 게 좋습니다. 만약 전체를 못 외우시는 분들은 이 반야바라밀다주만큼은 꼭 외우시기 바랍니다. 짧아서 외우기 쉽습니다. 반야바라밀다주는 여러 번 많이, 항상 외워도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좋습니다. 아래는 반야마라밀다주 동영상입니다. [반야심경 HD - 산스크리트어] https://www.youtube.com/watch?v=aMKDBDHTT24 <테야타 옴>이 앞에 붙습니다.

굉장히 감미롭습니다.

스와하를 소하로 발음합니다.

한국어로는 사바하=스와하=소하

https://ko.wikipedia.org/wiki/%EC%98%B4_%EB%A7%88%EB%8B%88_%ED%8C%8C%EB%93%9C%EB%A9%94_%ED%9B%94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 육자대명왕다라니(六字大明王陀羅尼), 옴 마니 파드메 훔(산스크리트어: ॐ मणि पद्मे हूँ, 한국 한자: 唵麼抳鉢訥銘吽) 및 옴 마니 반메 훔은 불교의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진언이다. 밀교를 비롯하여 불교에서 사용되는 주문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어에서는 성철스님이 50년 전에 ‘옴 마니 반메 훔’이 아니라 ‘옴 마니 파드메 훔’이라고 고쳤으나 현재 전자쪽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1]

대승불교의 경전인 ‘육자대명왕다라니경'(六字大明王陀羅尼經) 및 ‘불설대승장엄보왕경'(佛説大乘莊嚴寶王經) 등에서는, 이 진언을 부르면, 여러가지 재앙이나 병환, 도적 등의 재난에서 관세음보살이 지켜주고, 성불을 하거나 큰 자비를 얻는다고 주장하며, 이 주문의 효과가 적혀있다.[2][3]

문자적인 뜻은 “옴, 연꽃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으로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주문이다. 티베트인들이 특히 많이 외운다. 보통 티베트인들은 이런 뜻과 상관없이 그냥 많이 외우기만 하면 그 자체로 영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4]

<테야타>가 앞에 붙습니다.

<테야타>는 ‘즉설주왈(卽說呪曰)’ 이라는 뜻 입니다.

반야바라밀다주만 반복됩니다.

남녀가 같이 독송합니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 無得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 무득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가테가테 빠라가테 빠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가테가테 빠라가테 빠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가테가테 빠라가테 빠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https://kydong77.tistory.com/18295?category=600741

불보살 관련 진언

http://www.libportal.co.kr/addon/saAddSutraCont.asp?kind=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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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미타불 관련진언 2. 약사여래 관련진언 3. 관세음보살 진언 4. 관세음보살 사십이 수주 5. 지장보살 진언 6. 문수보살 진언 7. 보현보살 진언 8. 미륵보살 진언 9. 기타 불보살과 경전의 진언 10. 대불정수능엄 신주 11. 백팔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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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빗나간 예언

예언은 기본적으로 미래전망이다. 미래는 글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일이기에, 사실 알아맞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예측에 목이 말라한다. 그런데 정녕 중요한 것을 하나 잊어버리고 있는 것같다. 맞았다거나 틀렸다거나, 이런 평가에 대한 후일담이 없다. 그저 말해버릴 뿐, 그 뒤의 사후검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문제들 중에서 종교와 관련해서 이루어진 것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의 지식수준이 높아지면 종교는 사라질 것이다.” 이런 전망은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대개 20세기 초에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아마도 진화론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던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종교 고유의 영역이 확보되고 있지는 않은가. 죽음이 있기에 종교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유한을 극복하고 무한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 종교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틀린 예언 중의 하나로 주문(呪文)의 운명에 대한 것도 있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비합리적인 주문과 같은 것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해졌다. 미래는 합리주의의 시대라고 높이 노래 불려졌다. 그렇긴 했다. 합리주의의 시대가 왔다. 하지만 종교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문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주문 역시 종교를 구성하는 중요한 하나의 측면이 아니었던가 싶다.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말씀하신 뒤에, 그 “반야바라밀이야말로 위대한 신주(神呪)이고 위대한 명주(明呪)이며 위없는 주문이고 어디에고 견줄 데가 없는 주문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 자리가 어디인가? 가장 진실한 최고의 지혜를 설하는 곳이 아닌가.

주문의 정체

“반야바라밀이야말로 위대한 신주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 볼 때, 주문의 정체는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앞에서 말했던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범주)은 곧 존재하지 않는다(空)”라고 하는 인식,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이는 종래의 관점을 전복하는 것이 아닌가. 종래 우리는 많은 주문을 들어왔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은 주문이 아니라고 말이다. 진실한 주문은 바로 반야바라밀 그 자체라고 말이다. 이러한 논리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 뒤에 나오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것은 무엇인가? 없어도 되는 사족(蛇足)일까? 그렇게 보는 관점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분명히 반야바라밀이 곧 주문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에 나오는 주문이 없어도 되는 것일까? 있어야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할까? 왜 “반야바라밀이 곧 위대한 신주”라고 말씀하시고서는, 다시 또 “곧바로 주문을 설한다”라고 하셨던 것일까? 그 주문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말했던 것일까?

만약에 경전의 마지막 결구(結句)로 제시되어 있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하는 주문을, 경전의 제일 앞에 제시해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그 뒤에 이어질 말씀들은 결국 그 주문에 대한 해석이 되었으리라.

이는 결국 〈반야심경〉에는 반야바라밀의 정체성을 두가지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顯敎)에 의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앎의 세계를 떠난 언어(密敎)에 의해서이다. 오히려 보기에 따라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하는 밀교의 입장을 더욱 중시하면서, 〈반야심경〉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가 없어도 좋을 군더더기로만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종권의 ‘도서관’ 아카데미

231. 能(능) 할 수 있다. 능하다. 能力

232. 除(제) 덜다, 없애다. 버리다

233. 一(일) 하나

234. 切(체) 온통, 끊다.

235. 苦(고) 괴로움, 고통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

모든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236. 眞(진) 참되다.

237. 實(실) 열매,

238. 不(불) 아니다.

239. 虛(허) 비다. 공허하다.

眞實不虛(진실불허)

진실하여 공허하지 않다.

240. 故(고) 까닭, 그러므로

241. 說(설) 말하다. 설명하다.

242. 般(반) 일반

243. 若(야) 만약

244. 波(파) 물결

245. 羅(라) 벌리다.

246. 蜜(밀) 꿀, 꿀벌

247. 多(다) 많다.

248. 呪(주) 주문

249. 卽(즉) 곧

250. 說(설) 말하다.

251. 呪(주) 주문

252. 曰(왈) 가라사대,

故說般若 波羅蜜多呪 卽說呪曰(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러므로 반야바라빌다의 주문을 말하니 주문은 곧 다음과 같다.

253. 揭(게) 높이 들다. 걸다. 걷다.

254. 諦(제, 체) 살피다. 자세히 알다. 울다(체)

255. 揭(게) 높이 들다. 걸다. 걷다.

256. 諦(제, 체) 살피다. 자세히 알다. 울다(체)

257. 波(파) 물결

258. 羅(라) 벌리다.

259. 揭(게) 높이 들다. 걸다. 걷다.

260. 諦(제, 체) 살피다. 자세히 알다. 울다(체)

261. 波(파) 물결

262. 羅(라) 벌리다.

263. 僧(승) 중, 스님. 마음이 편한 모양

264. 揭(게) 높이 들다. 걸다. 걷다.

265. 諦(제, 체) 살피다. 자세히 알다. 울다(체)

266. 菩(보) 보살

267. 提(제) 끌다, 이끌다.

268. 娑(사) 사바세상. 춤추다. 너풀거리다.

269. 婆(파, 바) 할머니, 늙은 여자, 춤추는 모양

270. 訶(가, 하) 꾸짖다. 혼내다. 책망하다.

사바하 : ‘원만 성취’라는 뜻. 주문의 끝에 붙여 그 내용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는 말.

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娑婆訶(게체게체파라게체파라승게체보리사바하 : 범어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의 음역. 사찰에서는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로 발음이 굳어짐)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모두 함께 지혜의 세계로 갈지어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위대한 지혜의 피안에 이르는 핵심 경전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깊은 지혜(반야)의 바라밀다(6바라밀 :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실천할 때

照見 五蘊皆空 (조견 오온개공)

오온(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보고

度一切苦厄 (도 일체고액)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서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사리푸트라여 물질은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는 것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은 곧 빈 것이고, 비어 있는 것이 곧 물질이다.

受想行識 亦復如是(수상행식 역부여시)

받아들여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의식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비어 있는 모양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이런 까닭에 비어 있는 가운데에는 물질이 없으며 받아들여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의식하는 것이 없다.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눈, 귀, 코, 혀, 몸, 뜻도 없고,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진리도 없다.

無眼界乃至無意識界(무안계내지무의식계)

눈의 경계도 없고 내지 의식의 경계도 없으며

無無明亦無無明盡(무무명역무무명진)

무명도 없으며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다.

乃至無老死亦無老死盡(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내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

괴로움, 괴로움의 집합, 괴로움의 사라짐, 깨달음의 길도 없다.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으며 따라서 아무것도 얻는 바가 없다.

故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그러므로 보리살타(보살)는 반야바라말다에 의지한다.

故 心無罣碍(고 심무괘애)

그러므로 마음에 걸리는 장애가 없다.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무괘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걸리는 장애가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지고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究竟涅槃(구경열반)

끝까지 연구하여 마침내 극락에 도달한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삼세제불 의 반야바라밀다)

삼세(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다.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고 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

그러므로 아누다라삼막삼보리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故知般若波羅蜜多(고 지반야바라밀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가 (다음과 같음을) 알라.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이는 크고 신비한 주문이며, 크고 밝은 주문이며, 더 이상 높은 것이 없는 주문이고, 같은 것이 없는 주문이다.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

모든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眞實不虛(진실불허)

진실하여 공허하지 않다.

故說般若 波羅蜜多呪 卽說呪曰(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러므로 반야바라빌다의 주문을 말하니 주문은 곧 다음과 같다.

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娑婆訶(게체게체파라게체파라승게체보리사바하 : 범어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의 음역. 사찰에서는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로 발음이 굳어짐)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모두 다 함께 저 지혜의 세계로 갈지어다.

[불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해설

1.《반야심경》의 마지막 주문 구절.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娑婆訶)’. 이것은 싼스끄리뜨인 ‘가떼 가떼 바라가떼 바라상가떼 보디 스바하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를 한역한 음 그대로 읽고 번역하지는 않는다. 굳이 번역한다면 흔히 ‘가자, 가자,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모두 함께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오, 깨달음이여, 축복이어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또 다른 해석을 싣는다: 건너 가자, 건너 가자. 넘어서 건너 가자. 모든 것 넘어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자. 그곳에서 깨달음 얻으리라.

2. 대한불교 조계종 한글 반야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사리불이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그러하니라. 사리불이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임과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이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눗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아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노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세번)

3. The Heart Sutra (The Prajnaparamita-Hrdaya Sutra): English Translation

When Bodhisattva Avalokitesvara practised the deep Prajnaparamita, he saw that the five skandhas were empty; thus he overcame all ills and suffering. “O Sariputra! Form does not differ from the void, and the void does not differ from the form. Form is the void, and the void is form. The same is true for feelings, conceptions, impulses and consciousness. ㅣO Sariputra, the characteristics of the void is not created, not annihilated, not impure, not pure, not increasing, not decreasing. Therefore, in the void there are no forms and no feelings, conceptions, impulses and no consciousness: there is no eye, ear, nose, tongue, body or mind; there is no form, sound, smell, taste, touch or idea; no eye elements, until we come to no elements of consciousness; no ignorance and also no ending of ignorance, until we come to no old age and death; and no ending of old age and death. Also, there is no truth of suffering, of the cause of suffering, of the cessation of suffering or of the path. There is no wisdom, and there is no attainment whatsoever. Because there is nothing to be attained, a Bodhisattva relying on Prajnaparamita has no obstruction in his heart. Because there is no obstruction he has no fear, and he passes far beyond all confused imagination and reaches Ultimate Nirvana. All Buddhas in the past, present and future have attained Supreme Enlightenment by relying on the Prajnaparamita. Therefore we know that the Prajnaparamita is the great magic Mantra, the great Mantra of illumination, it is the supreme Mantra, the unequaled Mantra which can truly wipe out all suffering without fail.” Therefore, he uttered the Prajnaparamita mantra, by saying: “Gate, Gate, Paragate, Parasemgate Bodhi-svaha!”

4. 나의 경험

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사찰에서 가장 많이 염송되는 불경중의 하나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불경중의 하나이다. 그 뜻이 대단히 심오하여서 이해하기 불가능에 가깝다. 현상계를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만, 존재와 비존재가 둘이 아니고 하나란 가르침 역시 가장 난해한 대목이다. 내가 고2 때 였다. 어느 여름 밤에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정신이들어보니, 잠든 게 아니고, 누나 의원의 환자 진찰대위에 누워서 창문밖에 하늘을 보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때가 1955년 아니면 1956년 여름이니 공기 맑고, 물 깨끗했던 Good old days 였다. 그때 창문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별빛을 보고 있었다. ‘저 빛이 그곳 즉 광원으로부터 오는 거리가 백만 광년 즉 One million light years라면, 백만년전에 그 별을 떠난 빛이 백만은 동안 달려온 후 방금 내 시야에 즉 내 망막에 이르러 다음 순간 나로하여금 그빛을 그리고 그 별을 보게 하였다’는 심오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음 순간 ‘그렇다면 저 별이 바로 이 순간에도 저렇게 존재하고 있을까? 아마 그동안에 충돌 혹은 폭발같은 것으로 없어졌을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것을 나는 실제로 (이순간에) 존재하는 걸로 착각하고 있다.’하는생각을 하고, 다음 순간 내 주위를 둘러보며 거기있는 물체를 보니, 내가 방금 하였던 생각이 그 먼 별에서부터 내가 보고, 만지고, 듣고하는 나의 감각을 통한 감지력으로 알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감각이 없다면 이 모든 존재가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통념에 심각한 회의를 갖게 되었고 그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혼자서 사색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더 전진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끝났던 소년시절의 방황중의 하나였다.

5. 色卽是空 空卽是色

상기의 가르침을 처음 알게 된 건 스님이나 사찰 법문이 아니었고, 1958년 문리대 예과 2학년 ‘논리학’시간에서였다. 그 교수님의 함자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헤걸의 변증론 설명 때 ‘즉자와 대자’ 설명 때 불교에서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인용하였다. 여기서 정립(定立), 반정립(反定立), 그리고 합(合)·총합(總合)으로 제3단계 즉 모순의 통일을 이룬다. 다시 말하여 정(正)·반(反)·합(合)의 과정이며, 다른 용어로 즉자(卽自, an sich), 대자(對自, fur sich), 지양(止揚, aufheben)이다. 이것은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며 다시 말하면 내재(內在)가 초월(超越)이고, 초월이 내재라는 설명이었다. 그 얼마 후에 어머니께서 다니셨던 연화사 스님으로부터 반야심경의 설법에서 여기에 불교의 정수가 있다고 듣고 또 읽게되었다.

6. 논란

도대체 있는 것을 있지 않다, 또는 없다고 함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사람들이 받아 드릴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하여 여러 스님들의 설명을 들어보았다. 여기 있는 나무나 돌이 세월이 가면 썩고 분해되고 부서져서 결국 없어진다. 그러니 있었던 게 세월과 더불어 없어진다. 이게 올바른 설명일가? 우리 눈이나 기타 오관으로 감지되는 물체이외에 입자, 소립자 등등은 우리가 의식계에서 감지할 수 없으니, 이를 공이라고 하셨다고 주장도 한다. 그렇다고 눈에 안 보인다고해서 공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내가 내 앞에 화분에서 피어있는 꽃을 보았는데, 그꽃이 내가 감지한 바로 그 꽃인가? 아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꽃 영상이 내 눈 망막까지 여행하여 도달 후 거기서 다시 대뇌까지 가서 감지하게 될 때에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비록 millisecond 혹은 microsecond일 지언정) 경과되었기에 내가 본 꽃이 바로 그 순간의 꽃이 아니기 때문이란 논리다. 하지만 이는 시간적 변화이지, 그 본체가 없다고는 할 수없지 않은가? 몇년전에 Time Magazine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어떤 철학자와 신학자사이에 전개된 열띤 논쟁의 한토막이다. 신학자, “우리 앞에 놓인 저 바위가 없다고 당신이 하는 주장이 사실이요?”, 철학자, “그러합니다. 이 바위는 없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신학자는 무엇을 하던지 이 혼돈한 철학자를 구원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철학자에게 다짐하였다. “내가 이 바위가 있다고 증명하면, 당신은 내게 수긍하겠소?”, 철학자, “증명만 하십시오. 그러면 하란대로 하겠습니다.” 이 신학자는 불쌍한 철학자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고귀한 행동을 하였다. 구두를 벗고 맨발로 바위를 힘껏 차니, 발 뼈가 부러지며 그 고통으로 신학자는 고함소리와 함께 기절하여 쓰러지고, 옆 사람들이 그를 구하였더니, 그철학자를 불러서 부러진 발을 보이며 말하기를, “바위와 내 부러진 발을 못 보는가?”하니, 이 구제불능의 철학자는 태연히, “이 부러진 당신 발도, 부러뜨린 바위도, 당신도, 나도 있는 게 아닙니다.”하고 떠났다. 불교학자도, 도인도 아닌 내가 누구든지 수긍할 수있는 설명을 어찌 할것인가? 여기에 그치겠다.

7. 자구 해석

五蘊(오온): 물질(色), 느낌, 생각, 행동, 의식(受想行識)의 다섯가지 집합체를 말한다. 無明~老死(무명~노사): 십이연기설의 시작에서 끝까지 나온다. 이들은 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십이가지의 연기를 뜻한다. 여기서 육처란 육근과 육경을 말하니, 전자는 색경, 성경, 향경, 미경, 촉경, 법경이며, 후자는 안색, 이성, 비향, 설미, 신촉, 의법을 의미한다. 四聖諦(사성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 즉 참된 모습이다. 阿縟多羅三邈三菩提(아뇩디라삼먁삼보리 혹은 아누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 일체의 진상을 모름이 없고, 세상에서 덮을 것이 없는 부처님의 마음 또는 그 지혜를 의미한다.

8. 십이연기설(十二縁起説):

(一) 무명은 범어의Avidya(아비디아)로서 불생불별의 실상을 모르는 인식을 말한다.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무명이라한다, 잘못된 감각을 말한다, 밝은 지혜가 없다는 뜻이다. 행은 무명에 의해서 행동이 계속되는 것이다. 식은 행에 의해서 다시 새로운 육체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업식(즉 영혼)이라 한다. 명색은 명은 수상행식의 4온이고 색(色)은 육체를 의미한다. 명색은 5온으로서 완전히 정신과 육체가 결합되어 새로운 생명체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육입은 6근(육근이란= 눈,코,입,귀.몸 ,뜻 즉 정신)의 인식 작용에 의하여 밖의 사물에서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촉은 좋고 나쁜 촉감을 완전히 구분하는 것을 뜻한다. 수는 촉에서 더 발달하여 좋은 것을 즐거워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는 것을 뜻이다. 애는 좋은 것에 더욱 애착을 느끼고 자기 것으로 하고자하는 것이다. 취는 좋은 것은 언제까지나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는 다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업식능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 생은 다시 태여 나는 것을 말한다. 노사(老死)는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늙어서 죽어 가는 것을 말한다.

(二) 다시 십이연기설 설명해보면:

십이 인연은 일체중생이 다 같이 이것을 가지고 있어, 또한 안(内)이요, 또한 밖(外)이라, 어떤 것을 십이라 하는가? 과거의 번뇌를 이름하여 무명(無名)이라 하고 과거의 업은 이것을 이름하여 행(行)이라 하며 현재세중에서 처음 비로소 태(胎)를 받는 것을 이름하여 식(識)이라 한다. 태(胎)에 들어가서 오분(五分= 두손, 두발, 머리)과 사근(四根)이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을 이름하여 명색(名色)이라한다. 사근이 구족하였으나 아직 촉(触)이라 이름하지 않을 때 이것을 육입(六入)이라 이름한다. 아직 고(苦)와 락(樂)을 가르지 않는 이것을 이름하여 촉(触)이라 한다. 애(愛)에 물드는 것을 이름하여 수(受)라 한다. 오욕을 익히는 것을 이름하여 애(愛)라 한다. 내의로 탐하여 구하는 것을 취(取)라 한다. 내의(内意)의 일 때문에 신(新), 구(久)의 업을 일으키는 이것을 이름하여 유(有)라 한다. 현재세(現在世)의 식(識)을 미래의 생(生)이라 이름하고 현재의 명색(名色)과 육입(六入)과 촉(触)과 수(受)를 미래세(앞으로 다가올 세상)의 노(老), 병사(病死)라 이름하나니 이것을 십이 인연이라 한다.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모든 종교는 인간의 생존상황에서의 개별적인 이익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한다.

‘사랑’이니 ‘자비’니 하는 것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상적 세계이며 개인적 욕구의 최종단계인 구원이나 성불(成佛)을 중요시하게 된다. 그것은 누가 대신해서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모든 문제는 우리가 살아있을 때의 논의에 불과하다. 불교라는 것도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는 게 목표인데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 모양새로 변질 되고 있으니 무척 당황스럽기도 하다. 기독교의 예수도 불교의 석가모니도 욕심을 버리라고 했는데, 우리는 거기다 대고 자기의 욕심대로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한 빌고 있으니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예수나 석가는 인간들의 행복과 바른 자각을 깨우치기를 바랐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신격화해서, 극락왕생한다느니 천국으로 간다느니 하는 말 같지도 않은 허황된 논리로 교인들을 세뇌시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반야심경을 요약정리하면 “관자재보살이 오묘한 ‘반야바라밀다’를 닦으실 때 몸과 마음의 욕망이 모두 공(空)한 것임을 비추어 보시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의 바다를 건너셨느니라. 사리자여, 물질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空)이요, 공(空)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 또한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空)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空)한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이 ‘반야바라밀다(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공(空)에 대한 지혜’ 혹은 공(空)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통해 도달한 열반의 상태 즉 지혜의 완성을 의미)’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완전한 깨달음)’를 얻느니라. 잘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아무것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며 허망 되지 않느니라.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 대신주, 시 대명주, 시 무상주, 시 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 大神呪, 是 大明呪, 是 無上呪, 是 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설 반야바라밀다 주 즉설주왈,(故說 般若波羅密多 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요약해서 풀이하면) 이것은 가장 큰 신비로운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다. 이보다 더 높은 주문은 없으며 이와 비교하여 견줄만한 주문도 없다. 모든 괴로움을 완전히 없애주는 진실하고 거짓 없는 주문이다. ‘이제 반야바라밀다(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공(空)에 대한 지혜’ 혹은 공(空)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통해 도달한 열반의 상태 즉 지혜의 완성을 의미)’ 주문을 말하노라. 가자, 가자 피안으로. 피안으로 아주 가자, 영원한 깨달음으로.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고지(故知:그러므로 알라.)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시 대신주(是 大神呪:크게 신묘한 주문이며), 시 대명주(是大明呪: 크게 밝은 주문이며), 시 무상주(是 無上呪 : 위없는 주문이며), 시 무등등주(是無等等呪: 비교할 대상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최상, 최고의 주문)이니라. 대명(大明)할 때, 명(明)은 지혜라고 하는 뜻이에요. 경에 보면, 우리가 지혜라고 붙여 쓰지만 지혜 지(智)자와 지혜 혜(慧)자를 따로 분리해서 이야기하기도 해요. 밝을 명(明)자도 쓰고, 빛 광(光)자를 쓰기도 하고. 무상(無上)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뜻이며 ‘아뇩다라’를 번역하면, 무상(無上)이 된다. 여기에서 ‘반야바라밀다 주’(般若波羅蜜多 呪)를 찬탄하는 게 아니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찬탄하는 것이다. 왜 ‘반야바라밀다’를 주(呪)에 비유했을까? 이 주(呪)를 최고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신주(大神呪)라는 것으로, 크고 신비로운 주문이라는 것이다. 대명주(大明呪)로서, 크게 밝은 주문이며, ‘무상주(無上呪)’로서, 이 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최고의 경지의 주문이고, ‘무등등주(無等等呪)’라 하여, 비교될 만한 것이 없는 최상의 주문이라는 의미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 眞實不虛)는 이 주문이야말로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주며, 진실하여 조금도 헛됨이 없다는 의미다. 텅 비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며, 집착할 바가 없는 반야 공(空)의 이 도리야말로 위대한 주문인 까닭에, 일체의 모든 고통과 불안,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다 소멸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고 본래 텅 비어 무소득이며, 무자성이고, 공(空)이요, 무아, 무분별인 본바탕에 또 다시 어떠한 허망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세계(수상행식:受相行識)와 물질세계(색:色)가 모두 공(空)하였으니, 따로 허망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로 본래 나고 죽음이 없으므로 생멸에 따른 온갖 괴로움도 여의었고, 불구부정(不垢不淨)으로 더럽고 깨끗한, 부귀하고 천한 등의 관념을 여의었기에 상대세계의 모든 분별을 타파할 수 있으며,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더하거나 줄어들 것이 없으므로 ‘내 것, 네 것’ 하며 나누어 서로 많이 소유하고자 다투고 투쟁하는 이 모든 분별을 여의게 된, 더없이 맑고 밝아 허망하지 않은 진실한 주문이라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반야심경의 핵심 구절인 ‘조견오온개공(照見 五蘊皆空)도일체고액(度 一切苦厄)’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일체고액(度 一切苦厄)’의 경지, 즉, 일체의 고통과 액난을 뛰어넘었으므로 진실하여 조금의 헛됨도 없는 경지를 다시 한 번 설함으로써 지혜의 완성을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이다. 지혜의 완성된 경지는 직접적으로 공의 이치, 반야의 이치를 설한 도리이기에 진리로서 허망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지(故知)는 ‘그러므로 알아라.’는 뜻이다. ‘반야바라밀다’가 어떻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시(是)는 ‘이것은’ 이라는 말로 ‘반야바라밀다’를 가리킨다. 대(大)는 ‘크다’는 말인데, 대(大)와 소(小)라는 관념을 초월한 절대의 대(大)를 말한다. 신(神)은 ‘거룩하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영역이라서 측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주(呪)는 범어로 한역(漢譯)하면 주문(呪文), 이라 한다. 중국의 주(呪)와 같은 뜻으로 쓰였기에 주문(呪文)이라 한 것이며 가장 신비한 주문이라고 한 것이다. 대명주(大明呪)는 범어로 밝고 수승한 지혜라는 뜻이다. 대명(大明)은 무명(無明)을 멸하여 내외명철(內外明徹)하고 일체가 확연(廓然)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는 거울과 같은 마음자리가 지혜 광명으로 가득함을 말한다. 광명으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주문의 뜻이기도 하다. 무상주(無上呪)는 무엇 가운데 최상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을 초월한 절대최상이니 위없는 진언(眞言)이라는 의미에서 가장 높은 주문이라 한 것이다. 무등등주(無等等呪)는 범어로 등(等)은 평등의 뜻인데 무등등(無等等)이라 함은 같음이 없으면서도(無等) 평등(等)하다는 말이다. 이는 일체와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초월한 일체와 둘이 아님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무등 등주(無等等呪)는 비교할 데가 없는 주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라 한 것이다. 주(呪)는 진언(眞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진리 자체라는 말이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 주(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 呪)의 의미는 능히 일체의 고(苦)를 제거하며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한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의 의미는 능히 일체의 고(苦)를 제거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반야바라밀다의 주문(呪文)은 주문 가운데 거룩하고 불가사의한 영역이라 측량할 수 없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라 하여 대신주(大神呪)요, 지혜광명으로 가득한 가장 밝은 주문이라 하여 대명주(大明呪)라 하며, 이 보다 더 수승하고 높은 것은 없다는 절대최상의 가장 높은 무상주(無上呪)이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주문인 무등등주(無等等呪)인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는 최상최고(最上最高) 유일무비(唯一無比)한 주문으로 언어를 떠나 있어 언어로서는 어떠한 설명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주문인 것이다. 주의할 점은 ‘반야바라밀다’를 중요시 한 것이지 ‘반야바라밀다 주’를 중요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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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ㅣ산티데바 지음ㅣ하도겸 편저ㅣ시간여행 펴냄ㅣ256쪽ㅣ1만 4000원

나는 50대 후반이다. 30대 초반부터 주말이면 등산을 즐겼다. 지리산 종주도 했고 눈 덮인 태백산, 설악산, 한라산에도 올랐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힌 산악회도 여러 개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등산의 취향이 변했다. 등산객들로 붐비는 명산을 찾아 온갖 장비를 갖추고 새벽 길을 나서지 않는다. 늦은 아침밥을 먹고 가벼운 차림으로 집에서 바라다보이는 동네 산으로 걸어간다. 그다지 높은 산이 아님에도 굳이 산정(山頂)에 발자국을 찍으려 하지 않는다. 숨을 헐떡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는 것보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숲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앉을 만한 곳이 보이면 주저 앉아 멍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다. 반나절이 넘는 산행에 그저 숲에 앉아있기가 절반을 넘는다. 사람들과 대오를 이뤄 저 높은 고지에 오르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탐하는 대신 홀로 자유롭게 부유하는 동네 산이 심신의 건강에 크게 불리하지 않다. 그런 확신이 생겼다.

10여 년 전 어느 출판기념회에 갔을 때 흰머리에 구레나룻 덥수룩한 초로의 저자가 통기타를 치며 음유시인처럼 노래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 즉시 기타를 샀다. 나도 10년 후에는 그런 모습이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기타를 익히며 노래를 부를 마음은 동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랬다. 오늘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생각했던 게으름이 아니었다. 나의 정신이 동(動)이 아닌 정(靜)을 원했던 탓이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그 시간에 나는 종이를 펴 먼산의 풍경을 침묵의 수채화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시간이 나면 종이를 펴 가까운 혹은 먼 곳에 자리한 사물들의 생각을 연필로 그리려 할 것이다.

일부러 그리 되려 한 것은 아닌데 50대 후반의 나이가 그리 되게 한 것 같다. 조용히 혼자 생각에 빠지는 것이 좋다가도, 그 따위 생각은 일체 버리고 무념무상 갈지자로 걷는 것이 또 좋다. 그러다 목향 품은 바람 한 줄기 만나면 단전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깊은 숨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뿜으며 번잡하고 삿된 삶의 찌꺼기들도 함께 날려보내는 것이다. 기도가 따로 있고 명상수행이 따로 있다 하는데,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하는데 정신은 아직 ‘그곳’에 이르지 못해 나는 여전히 잡념으로 괴롭고 걷다가 길을 잃어 망측하다.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팔대지옥(八大地獄) 고통스런 윤회 속에 어렵게 한 번 얻은 인간의 몸,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돌아가 깨달음을 만나기가 어렵다. 내 이웃을 고통에서 구하려는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것을 원하는 마음, 보리심(菩提心)을 가져야 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 보리행(菩提行)에 들어야 한다. 불타정각(佛陀正覺 모든 것의 참된 모습을 깨닫는 부처의 지혜)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1500년 전 인도에서 불타정각에 이른 산티데바가 불렀던 깨달음의 노래 “입보리행론”에 그 첫걸음이 들어있다.

불자(佛子) 교수 하도겸의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이 대중들에게 쉽게 읽히도록 현대판으로 재창작하는 공을 들인 책이다. 단순 번역을 넘는 ‘친절과 정성’이 넘쳐 번역이 아닌 편저(編著)다. ‘하도 겸손해서’ 이름도 하도겸인가! 열반에 든 부처보다 무지한 중생과 함께 하는 보살이 더 반갑다. 종교가 다르다고 이 책을 무작정 금서 목록에 올리면 하수 중 하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삶으로 통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전에 없이 힘든 나날에 마음의 평화를 얻어볼 모처럼의 기회다.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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