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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복 있는 사람은
원본 설교 : 복있는 사람이 된 증거를 굳게 붙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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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복 있는 사람(시 1:1~6) – 기독신문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의로운 길을 걷는 자는 약속하신 축복의 은혜를 충만하게 입어“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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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3/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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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Blessed is the man) – 아포슬 한인 침례 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 이런 복을 날마다 누려 나가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영감을 받고, 묵상할 때마다 은혜를 누리게 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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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kbchurch.org

Date Published: 11/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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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 복 있는 사람 – 휄로쉽 교회

1)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 것 많이 챙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똑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2) 복 있는 사람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악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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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ellowshipusa.com

Date Published: 4/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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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설교①복 있는 사람(시1:1-6) – 다음블로그

또 물질적인 복을 받았다고 해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신령한 복-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지 않았다면 그 복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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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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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시1:1~6) – 유평교회

제목: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본문: 시편 1편 1절~6절. 설교자: 이병권.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새해 인사를 나누며 서로에게 복을 빌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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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5/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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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설교] 복 있는 사람 – 크리스천투데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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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4/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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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사람들

설교뱅크2(창세기,이집트). 부활 1 초등부 어린이용. 부활 1 유아유치부 어린이용. 킹덤스토리 안내서(소책자). 큐티. 큐티 목록입니다. 큐티키즈. 어린이 복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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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qtland.com

Date Published: 4/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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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설교 – mission –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시편 1편은 시편 150 편 전체의 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는 무슨 내용들이 담겨집니까? 여러분이 논술을 한다고 할 때 서론에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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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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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시1:1-6) – 네이버 블로그

MY메뉴 열기. 주일설교 … 이 아침에 시편 1편의 말씀을 통하여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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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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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 [짧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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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복 있는 사람 설교

  • Author: JOY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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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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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복 있는 사람(시 1:1~6)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의로운 길을 걷는 자는 약속하신 축복의 은혜를 충만하게 입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사람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누가 복 없는 인생을 꿈꾸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아무나 축복하지는 않으십니다.

구약성경에서 복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복입니다. 여기에 쓰인 ‘바라크’라는 말은 전체적으로 415회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하거나 신적권위를 가지고 복을 주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선행이나 공로와는 상관없이 언약관계로 인해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특별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아시와르’라는 단어인데, 구약성경에만 44번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진 삶의 자세와 태도로 인해 주시는 복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받을 수도 있고 혹은 받지 못할 수도 있는 복입니다.

본문 시편 1편이 말하는 복은 ‘아시와르’의 복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시편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줍니다.

1. 복 있는 자리에 머물라

본문 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복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흔히 알고 있는 죄, 악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서 죄를 말합니다. 보통 죄악이라고 하면 율법이나 법률규정을 어기는 행위를 생각합니다. 살인이나 간음 또는 도둑질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시편에서는 죄나 악을 그보다 근본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벗어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꾀를 의지하는 사람’이 악인이며, ‘자기의 길을 스스로 가는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리고 악인과 죄인의 결정판이 오만한 자입니다. 오만한 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삶의 보좌에 자기가 주인으로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일컬어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다”라고 외치는 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그 도움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자기 꾀와 능력,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죄인이며, 악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들은 ‘악인의 꾀’로 대표되는 세상을 따라갑니다. 여기서 ‘악인의 꾀’는 ‘하나님은 없다’라는 사상과 철학을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봤을 때 성공한 사람들 그리고 인간적으로 잘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살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주장에 쉽게 휘둘립니다. 세상에 길이 있다고 믿기에 연신 세상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이 악인의 꾀를 벗어던져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은 하나님께 있다고 굳게 믿기에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2절을 통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길을 찾고 말씀을 따라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즐거워하며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 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 즉 말씀이 옳다고 인정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 귀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식을 믿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왕으로 받아들여 그 말씀 따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악인은 꾀로 살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 즉, 믿음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지침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성경은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의 제품 설명서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든 수명대로 오래 고장 없이 사용하려면 매뉴얼을 숙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대로 살면 건강하고 행복하고 장수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망가지고 힘들어 집니다. 말씀대로 살면 부서진 것들이 고침 받고 회복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바랍니다.

3. 모든 일에 형통함을 누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복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즉,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면 모든 일에 잘 되는 복을 누립니다. 그래서 시인은 3절을 통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나무 은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잘 자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 나무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그 땅이 물길을 찾기에 쉽지 않은 지역이라 할지라도 나무가 물가에 있다면 악조건에서도 잘 자랄 겁니다. 가끔 비가 올 때만 물이 있는 ‘와디’와 같은 메마른 땅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카디안’과 같은 끊임없이 물이 공급되는 수로만 있다면, 늘 푸르고 철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냇가’는 저절로 형성된 시냇가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입니다. 누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마른 땅을 파서 수로를 만들고 물을 흘려보내는 시냇가입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 복 받을 요소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 있는 삶의 태도로 나아갈 때 축복의 물꼬는 터집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와 삶의 원리와 근거가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시냇가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을 뚫고 파셔서 생수를 흘려보내시고 아름다운 열매로 풍성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나의 인생나무가 오늘 옮겨 심겨지기를 기대합니다. 와디에서 악카디안으로 말입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시냇가로 말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해 어떻게 역사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 가치 없는 인생으로 판명됩니다. 심판 견디지 못하며, 의인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길을 걷는 자는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인정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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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Blessed is the man)

“복 있는 사람은” (Blessed is the man)

“복 있는 사람은”

(Blessed is the man)

3-29-20

본문말씀: 시편 (Psalms)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walk in the counsel of the wicked or stand in the way of sinners or sit in the swat of mockers.)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o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He is like a tree planted by steams of water, which yields its fruit in season and whose leaf does not wither. Whatever he does prospers.)

[설교 요약]

제가 개인적으로 사랑하고 늘 묵상하는 성경말씀의 하나가 <시편 1편> 입니다. 총 150편에 달하는 시편의 첫 시작인 <시편 1편>은 시편의 서론일 뿐 아니라, 시편과 성경전체의 주제가 된다는 점에 많은 성경학자들은 동의합니다. 그 주제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진정한 복” 입니다.

또한, 시편 1편의 특성은 ‘단순함’ (simplicity) 속에서 ‘영원함’ (eternity)으로 이어지는 깊은 영성이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성도의 심령속에 넘쳐 흐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 과연 누가 복 있는 자일까요? ” (Who is a blessed man?) 그것은,

첫째, ‘ 악인의 삶을 살지 않는 자 ’ (The man is who does not live as the wicked) 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는 먼저 ‘무엇 무엇을 하지 않는 자’ 라는 소극적인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v.1) 그 이유는 <성경은 현실을 직시하는 진리의 말씀>이요, 또한 <우리 인간은 본질상 선함과 의로움 보다는 악한 생각과 죄인의 교만한 유혹을 더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둘째, ‘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 ’ (The man is who delights in the law of the Lord, and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입니다: 두번째로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개념은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v.2)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늘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자인 이유는 바로 그 생명의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사람 심령에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 시냇가에 심기운 자 ’ (The man is who was planted by steams of water) 입니다: ‘시냇가에 심기웠다’ (being planted by steams of water)는 뜻은 누군가가 그를 심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성령님을 통해 나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심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겸손과 감사함으로 허락하신 축복된 구원의 은혜를 누려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이런 복을 날마다 누려 나가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영감을 받고, 묵상할 때마다 은혜를 누리게 되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바로 <시편 1편> 말씀입니다. 이 <시편 1편>의 저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다윗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시편>은 총 ‘150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신. 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방대한 성경 책 입니다. 이 시편의 첫 시작이 되는 오늘 본문의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 될 뿐 아니라, 총 150편의 시편전체를 망라하는 ‘시편의 주제’가 됨을 성경학자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편 1편에서 어떻게 인간은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근거를 분명하고도 본질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부터 복된 자라고 인정함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또한 그렇게 그 복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시편’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 (테힐림)에서 보면, ‘노래’ (songs) 혹은 ‘찬양’ (praise) 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시편 1편>은 ‘지혜의 시’ 또는 ‘여호와의 말씀 안에서의 기쁨’이라는 소제목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시.1편>은 마치 방대한 교향곡과 같은 시편 전체를 시작하는 ‘서곡’ (=전주곡)의 역할을 하면서, 인간의 진정한 지혜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지” 그리고 우리 인간의 참된 기쁨과 행복은 어떻게 발견 되어지게 되는 것인지를 아름답고도 선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시편 1편>을 묵상하면 할수록 더욱 깨닫게 되어지는 위대한 영적 진리는 그 ‘단순성’ (simplicity) 와 ‘영원성’ (eternity)에 있음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말씀은 결코 이해하기가 어려운 난해한(=어려운) 교리를 다룬 것도 아니고, 여러가지 영적인 상징과 비유로 인해 깨닫기 힘든 그런 말씀도 아닌 것입니다. 반대로 지극히 평범한 단어와 단순한 비유를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 속에 포함된 영적 진리의 깊이와 넓이는 너무도 커서 앞서 말씀 드린데로 시편전체를 대표할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진리’ (=핵심)을 꿰뚫고 지나가고 있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을 포함한 <시편 1편>을 통해 그 말씀의 단순함 가운데 우러나오는 위대한 영적 진리가 영원함으로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집중해서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 과연 누가 복 있는 자인가? ” (Who is a blessed man?)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 악인의 삶을 살지 않는 자 ’ (The man is who does not live as the wicked) 입니다: 오늘 시편 1편 말씀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는 먼저 ‘부정적인 개념’ 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시편기자는 우리 인간의 진정한 복은 3가지를 행하지 않는 자가 복된 자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1)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2)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3)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라고 기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참된 행복에 이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시면서 ‘부정적인 것’을 먼저 밝히시는 것일까? 하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 그리고 ‘오만한 자의 자리’을 좇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는 3중의 부정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확히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삶이 결코 피터팬의 소설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환상적인 삶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죄와 악한 환경 가운데 부딪히며 살아가야 하는 실존의 삶인가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이 3가지의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진술은 우리 인간이 의로움과 선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얼마나 죄와 불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존재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악인의 삶을 추구하는 패턴>이 있음을 오늘 말씀을 가만히 보면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악한 꾀’에 유혹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죄 짓게 하는 것은 언제나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악인의 꾀’는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 다음은 ‘죄인의 길’입니다. 그 꾀에 이끌려서 이제는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인의 길은 필연코 ‘교만한 자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이 육신의 악한 꾀에 이끌려 출발했기에 그 결과는 잘 되면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교만함 이든지, 혹은 잘못되면 스스로 침체에 빠지는 열등감이라는 열매를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기자를 통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먼저 영적으로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을 이해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개념에서 시작해야 할 것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시편 기자는 ‘악인의 형통’에 대해 낙심하고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가 악인의 결국을 알고자 하여 하나님의 전에 들어 갔을 때, 그는 악인들이 졸지에 망하여 사라지게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 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 하였나이다” (시편 73:18~19) 라고 그는 심히 놀랐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악인의 혈통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악한 유혹과 가르침을 거부하고 참된 행복을 누리길 소망합니까? 만약 이것을 진정 원한다면, 우리는 2번째로 누가 복된 자인지? 에 대해 오늘 말씀이 선언하는 바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은,

둘째, ‘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 ’ (The man is who delights in the law of the Lord, and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입니다: 만약 내가 <1절>말씀에서 선언하드시 진정한 행복은 악인의 꾀와 죄인의 가르침에서 떠나는 것에서 시작됨을 인정한다면,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어떻게 이런 악에서 떠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시편기자가 간명하면서 본질적으로 대답한 것이 <2절>말씀인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v.2)라고 시편기자는 선포합니다. 이것은 앞절에서 먼저 3가지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요소를 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인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오늘날 크리스챤들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성경을 통독하고, 매일 큐티를 통해 말씀을 묵상하고 그 깨닫은 바를 삶 속에 적용하여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드러난 행위보다도 더욱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는 성경구절이 있다면 저는 <신명기서 6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명하신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여호와의 율법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뜻은 그 무엇보다도 그 말씀의 주인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전한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언제나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온 힘과 목숨을 다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분의 입에서 나오신 생명의 말씀 또한 신뢰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뿐 아니라 세계의 여러 크리스챤들에게 많은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챨스 스탠리목사>는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받은 잠언 말씀을 통해 자신이 평생 동안 인도받고 있음을 성도들에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s) (잠. 3:5~6) 라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생명을 즐거워하고 순종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묵상하고 순종해 나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전부일까요? 그렇치 않습니다. <3절>에서 우리는 또 한가지의 중요한 복 있는 자의 조건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셋째, ‘ 시냇가에 심기운 자 ’ (The man is who was planted by steams of water) 입니다: <시편 1편>에서 기자는 ‘복 있는 자’와 ‘악한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 (a tree planted by steams of water) 와 ‘바람에 나는 겨’ (chaff that the wind blows away)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행복한 자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복된 자, 즉 진정한 크리스챤의 존재라면 이것을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 구원받은 성도는 ‘심기워진 존재’ (being planted)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가 결정해서 물가에 뿌리를 내리 것이 아니라, 나무와 같이 심기움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심으셨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 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나의 선한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시냇가에 심기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선한 농부와 같이 생명의 강가에 우리를 나무와 같이 심으심으로 그 뿌리를 내려 푸른 잎사귀와 계절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생명과 은혜의 강가에 심기움을 받게 되었다는 영적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겸손하고 진지하게 주어진 삶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세상의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같이 악한 꾀에 사로잡히거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리에 앉아서는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들은 조금만 바람에도 흩날리고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뭔가 돈을 움켜잡는 것 같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 같고, 자신의 자랑을 따라 교만을 뽐내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속히 다가옵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속히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15:1)고 말씀하시고 나서, 이렇게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도전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과연 복 있는 사람일까요? 그는 자신이 ‘농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의 강가에 심기운 나무’임을 겸손히 깨닫음으로 악인의 꾀와 교만한 자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생명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그 뜻에 따라 결단하며 살아가는 자일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시절을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입니다. 이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 딸 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 (4/30/17)

시1:1-3

·세상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그 복을 세상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다니면 세상에서 잘되는 일만 생기나 싶어서 교회도 나오고 예배도 드려보지만, 결국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다시 교회를 떠나게 된다.

1)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 것 많이 챙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똑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복이란 ‘똑바른 길로 간다’ 라는 뜻을 가진 ‘아솨르’의 명사형인 ‘아쉬레이’이다. 따라서 ‘복’이란 그저 세상 것 많이 챙기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인생에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똑바로 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 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온 우주와 우리 인생들을 창조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떠난 삶은 결국 죽음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씀한다.(요14:6)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여호와 증인들의 하나님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창2:3)도 결국 ‘복’이란 ‘거룩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본성이 있어서 스스로는 거룩해 질 수 없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게 하신 것이다.

·결국 현재 돈을 많이 벌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육신이 건강하든지 건강하지 않든지,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다 복있는 자이다.

2) 복 있는 사람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악인의 꾀를 좆지 않고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다.(1절)

·악인들(‘레솨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자’를 말한다. 죄인(‘핫타임’)은 그 뜻이 ‘길을 잘못 들어서 옆길로 빠진 자’를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이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본주의적인 삶의 태도는 결국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 줄 뿐이다.

·복있는 자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들을 이루실 것을 믿고, 악인의 꾀를 동원해서 까지 그것들을 이루어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선한 목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야곱이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결과

·또 혹시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이 연약해져 있는 사람들이 악인의 꾀를 꾸미고 있을 지라도 그런 것들을 무서워해서도 안된다. 악인의 꾀 때문에 분을 내고, 불평하고 있으면 그것이 또 다른 악을 만들 뿐이다. 악인들이 아무리 꾀를 내어도 결국 하나님은 그 일들이 선한 뜻 이루어지는 데 사용되게 하실 뿐이다.(시37:7-9)

·복있는 자는 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오만한 자(‘레침’)는 그 뜻이 ‘조롱하는 자, 비웃는 자’라는 말이다.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려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다.

·젊은 시절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서 돈 좀 벌어놓으면, 그래서 집이라도 몇 채 장만해 놓으면, 그거 보면서 든든하다고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다 허사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에 반드시 종말은 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있는 자는 스스로의 한계를 알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산다. *자신의 한계를 알게 해달라는 다윗의 기도(시39:4,5)

3) 복있는 자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사는 가운데 열매 맺는 자이다.(2,3절)

·아무리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삶을 돌아보지 않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죄악된 본성을 이겨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악인의 꾀를 쫒게 된다. *다윗이 신하의 아내를 범하게 된 이유

·‘즐거워하다(해페추)’는 뜻은 ‘기뻐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사랑해서 어떻게 하면 그 말씀을 들을까 온통 마음이 쏠려 있음을 가리킨다.

·‘묵상하다(하가)’라는 단어가 뜻이 ‘말하다, 중얼거리다’라는 뜻이다. 결국 율법을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입술로 중얼거리면서 깊이 생각해 본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찔림이 있게 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된 삶인지 분별하게 하고, 그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찔림 받기가 싫어서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게 되면 결국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죄인의 길에 들어서고 나도 모르게 오만한 자리에 앉아 있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게 되면, 비록 그 말씀들이 내 마음에 찔림으로 다가올 지라도, 어느 순간 마음 속의 어둠을 밝히고 결국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게 된다.(히4:12,13)

·율법을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에 열매가 맺어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3절)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어떤 가뭄에도 결코 마르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복있는 자들도 마르지 않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요15:5,8) *연탄의 사명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악인의 꾀를 좇는 것이 잘못된 삶인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오히려 열매를 맺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준다.

학습 및 적용 문제:

1)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원어적 분석을 통해 설명해보라.(창2:3)

2) 복있는 자의 모습을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에서 설명해보라.(1,2,3절)

3) 나는 스스로 복있는 자라고 생각하며 또 복있는 자의 삶을 살고 있는 지, 어떤 면에서 그렇지 못하는 지 나누어보자.

시편설교①복 있는 사람(시1:1-6)

한국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찌개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찌게가 어떻게 끓습니까? 보글보글 끓습니다. 보글 보글/복을 복을/그래서 찌개를 제일 좋아한다고 합니다. 한국사람만 아닙니다. 중국에 가면 온 통 복 복자가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글지가 거꾸로 써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이 위로부터 온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이름에 “서”자가 많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옛날이름에는 복복자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복조, 복실 복태, 만복, 복만 등등/숫가락에도 복복자, 이불에도 복복자가 써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다 복을 좋아합니다. 요즘 제가 복에 대해서 한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남들이 복 받고, 잘 되면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복 받고, 잘되면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도 복을 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이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때도 “창1: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때도 “창12: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민6장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이와같이 우리 인간만 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이와같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복에 대해서 여러 가지 형태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복이라는 단어가 복수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을 많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령한 복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소유보다 우리 마음의 복, 즉 인격의 복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성경을 보면서 또 한 가지 보게 되는 복은 자녀의 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당대에서 복을 받는 것도 복이지만, 그 복이 자녀에게 내려가야 그것이 참된 복입니다. 또 성경에서는 나와 우리 자녀만 복을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를 통해서 우리 이웃이 복을 받는 것을 참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한가지의 복이 아니라 온전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복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을 말할 때 한가지씩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복만 있으면 무조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 즉 인격이 문제가 있으면 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요즘 민들레 가족이라는 주말 드리마가 있습니다. 주일 저녁에 잠시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엄청나게 부자인 의사 사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 의사 사위는 인격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만 있고, 인격이 갖추어져 있지 아니하니까 너무나 불행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 드리마를 보면 아무리 돈이 않고 지위가 높아도 저런 사위에게는 절대 딸을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물질적인 복을 받았다고 해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신령한 복-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지 않았다면 그 복도 헛된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의 당대에서 복을 받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자녀에게도 그 복이 내려가야합니다. 박영돈교수님의 딸 은경이가 올해 연말에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할 사위가 누구냐? 무엇보다 신앙이 너무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다니다가 예수를 믿지 않는 부모님을 전도하기 위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박교수님이 계시는 교회로 인도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님들을 예수믿게 하고, 지금은 작은 교회를 섬기는 신실한 청년이라고 합니다. 이와같이 자신만 아니라 자녀가 복을 받아야 온전한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만 복을 받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통해서 이웃이 함께 복을 받아야합니다.

//물론 이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복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 제일 중요한 축복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우리 인격이 예수님을 받는 축복입니다. 또 그것만 아니라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 잘 되는 복도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한쪽으로 치우쳐진 한 가지의 복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온전한 축복들을 다 누리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옆사람에게-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을 받기를 원하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 복을 주기를 원하시지만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온전한 복을 받으며 살아가느냐입니다.

—우리는 복이라 생각할 때 자주 요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저절로 오는 복을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말씀하는 복은 그런 복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복이란 단어를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라크란 단어인데 이 복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을 말합니다. 창세기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이런 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이란 단어는 아솨르라는 단어로 하나님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이란 아무렇게나 살아가면서 요행으로 주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받으며 살수 잇습니까?

오는 말씀에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 가지를 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 그것이 무엇입니까 ?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나오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악인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악인들이 이 땅에서 복을 받고, 형통하며, 잘 될 수도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악한 사람들도 복을 받고, 형통하며 잘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에 보면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시37편—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악한 자)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악인의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이 말씀에 보면 악한 꾀를 도모하는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73편기자는 현실가운데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시73편–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4절에 보시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가 무엇입니까? 겉모양은 분명히 벼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금방 날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렘17장에서는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사막에 떨기나무와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막의 떨기마무는 평소에는 입사귀가 무성합니다. 그래서 그 밑에 사람이 쉬기도 하고 새가 긷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막의 떨기나무는 한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면 입사귀들끼리 부딪혀서 불이나면 곧 사라지게 됩니다. 악인의 복, 형통함이 이와 같습니다.

//또 이런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서 5절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6절에 보면 악인의 형통함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겉으로 볼 때는 다 같은 볍씨가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만져봅니다. 그래서 곡식이 있으면 비벼서 알곡을 찾아내지만, 곡식이 없고 빈 껍대기만 있으면 비벼서 바람에 날려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복을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때가 있습니다 . 그래서 이 땅에서 아무리 잘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없어지게 됩니다 .

// 그런데 이것은 최후의 심판만 아닙니다 .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을 손으로 만지고 계십니다 .

//지금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복들이 하나님이 손으로 만지실 때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 수 있는 복입니까?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재벌가요 기업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수 있습니다. 사막의 무성한 떨기나무와 같을 수 있습니다.

//// 그러면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악하게 살면서도 복을 받고 형통한 사람이 아닙니다 .

오늘 말씀에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살아가는 사람이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 이런 사람을 6 절에서는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잘못 오해를 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을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한자도로 빼지 않고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또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한 규칙들을 만들어 놓고, 그 규칙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하루 종일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듯이 매일 성경을 보는 사람도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야로 말씀 묵상하는 사람은 말씀을 즐거워하여 ,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왜 그 말씀을 즐거워합니까? 단순한 글자 때문이 아닙니다. 말씀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그 말씀을 즐거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밤낮으로 그 말씀을 묵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가장 쉽게 말하면 연애편지를 읽듯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거의 연애편지가 없지만 옛날에는 연애편지를 썼습니다. 연애편지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절대 글자를 먼저 읽지 않습니다. 그 편지를 읽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먼저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리고 글자보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마음을 읽습니다. 그래서 밤낮 그 편지를 마음에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은밀하게 숨겨놓은 애인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

//또 이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펼치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 마음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월드컵경기를 보고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즐기십니까?

여러분들은 스펄전이 말하듯이 마치 죄인이 심문을 받는 장소에 가듯이 교회에 가고 있지 않습니까? 왜 교회 가는 것이 부담이 됩니까? 왜 성경을 보는 것이 부담이 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이 세상에 그 어떤 즐거움보다 하나님을 더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

그러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

/

/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심장을 읽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장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매일 하나님의 심장을 읽어나가야겠습니다 .

출22장을 읽어보겠습니다.

출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여기서 우리가 보게 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저 하늘위에 계시지만, 늘 이 세상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당신의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68편 5절에 보면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가난하고 도움에 필요한 자를 매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돌아보아야할 고아와 과부는 누구입니까?

저는 요즘 특히 연세드신 분들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요즘 금요예배는 거의 경로예배가 되었습니다(70-80세). 또 우리 교회에 연세드신분들이 많습니다. 저희 부모님들도 점점 연세가 드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그분들을 잘 섬기며 돌아볼까 고민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이런 마음으로 내일 실버목회세미나에 참석하려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삶입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인의 삶입니다. 복받지 못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복을 받는 삶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심장(마음)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요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저를 믿는 자마다 멸명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고계십니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이 세상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가운데 밤낮으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는데 우리의 모든 마음을 집중해야합니다.

또 렘17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렘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시편1편에서는 말씀을 즐거워하며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렘17장에서는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날마다 그 말씀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말씀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삶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

이런 이렇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묵상하며,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서 복이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나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 또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는 사람이 철을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복이 있는 사람이 철을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매 철마다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까?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철을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때가 차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만일 봄에도 열매를 맺고, 여름에도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가짜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열매는 때가 차서 가을에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복이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 다 형통한다 말이 시작부터 항상 그러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고, 날마다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당장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형통의 열매를 맺히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열매가 없어도 우리의 삶을 뿌리를 하나님에게 두기를 바랍니다. 입사귀만 무성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악인들도 형통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복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아니십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사람은 당장 열매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을 때도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수액을 공급받기에 언젠가는 형통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열매들을 풍성해 맺으며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시1:1~6)

제목: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본문: 시편 1편 1절~6절

설교자: 이병권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새해 인사를 나누며 서로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새해에 나누는 인사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말하는 복에 대한 의미를 따져보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엄청난 차이입니다. 똑같이 복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과 세상에서 말하는 복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복은 진짜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걱정 없이 살면서 돈 많이 벌고 재산을 늘리고 부를 누리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고 성공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 이런 것들을 복이라고 생각하면 복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물론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그런 것들이 훨씬 더 좋은 것 같고 복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사람들이 원하는 복과 성경이 말하는 복의 차이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끝에 가서는 정말 절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인해 누가 진짜 복 있는 사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차이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5-6)

이 말씀을 보면 서로 대조가 되는 두 길이 나옵니다. 의인의 길이 있고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길은 단순히 사람이 다니는 길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적인 비유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생을 길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배낭여행을 떠나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주어진 여정에 따라 목적지를 향해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서 보는 대부분의 인생의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복 있는 사람은 바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지만 그 끝에는 사망이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고, 자신이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그냥 걸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니까 따라가고 그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 참 다양한 길들이 있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세상에는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있을 뿐입니다. 시편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모든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악인의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의인의 길 외에는 모두 다 심판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의인의 길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인정하신다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 ‘알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길을 가는 자는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기에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악인들은 하나님이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인생에 대한 두 가지 길, 그 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의인과 죄인의 차이, 구원과 심판의 차이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시편은 악인을 알곡에서 분리해서 버리는 껍데기 겨에 비유합니다(4). 수확된 곡식은 타작한 다음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던져서 껍데기들은 날려버리고 더 무거운 알곡을 분리했습니다. 마치 바람에 날려가는 겨와 같이 악인은 아무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제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악인과 의인은 분리 될 것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함께 하겠지만 악인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결론이 이것입니다. 진정으로 복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복 있는 사람은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 특별히 먼 길을 갈 때, 그것도 오랫동안 먼 길을 갈 때, 쉽게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먼 길을 가다보면 정작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깜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만나는 여러 가지 일들, 여러 가지 상황들이 나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계십니까? 내가 가고 있는 길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을 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가고 있다면 계속해서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새해에도 정말 복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더 힘 있게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복 있는 사람의 구체적인 특징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의인의 길을 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을 가는 자는 첫째로 세상과 다르게 삽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자들은 모두 같은 종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말씀에 벗어난 삶을 살면서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 삶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악인이며 죄인이며 오만한 자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복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씀에 벗어난 조언과 충고를 했을 때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복 있는 사람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을 거절합니다. 다른 길을 갑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지 않습니다. 죄를 따라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1절 말씀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거절하며 사는 경건치 못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과 다르게 삽니다.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세상에게서 영향을 받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고 따라합니다. 그들처럼 사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고 이방 나라들이 하는 것을 본받아서 우상을 섬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복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거절합니다. 그들처럼 사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들과 다르게 삽니다. 그들의 결국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가는 길의 끝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다른 길을 가고 다른 방식으로 살고 다른 것을 선택합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길과 다릅니다. 계속해서 그들과 다른 길을 가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의인의 길을 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을 가는 자는 둘째로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를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합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고 되새긴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냥 한번 쓰윽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기고 또다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이 기록될 당시와 지금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시편기자가 이 시를 쓸 때에는 개인이 성경을 갖는 것은커녕 개인이 자유롭게 성경을 읽는 것도 쉽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읽어주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외웠습니다. 말씀을 외우고 또 외우고 그렇게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긴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 즐거워하며 계속해서 묵상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정말 복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찾아서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교훈과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길을 걸어가십시오. 말씀의 원리를, 하나님의 방법을 삶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나님 말씀이 우리 인생의 안내자임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말씀에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원리가 담겨 있음을 믿으십니까? 말씀이 사람을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신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시간을 내셔서 말씀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서 이렇게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길을 밝히 비춰주는 빛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 길을 가는데 필요한 힘과 지혜와 용기를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되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해부터는 말씀을 더 가까이 하겠다고 다짐하시고 그러기 위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복 있는 사람으로 의인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을 것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

시냇가에 심겨져서 그 모든 필요를 공급받으며 때마다 열매를 맺는 나무, 이 나무는 부족함이 없는 정말 복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면 이 나무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우연히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자라게 된 걸까요? 아닙니다. 여기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말은 이 나무가 저절로 시냇가에 자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주인이 계획을 가지고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주인이 가장 좋은 장소에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늘 푸름을 나타내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 시냇가로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냇가나 물이 흐르는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인공적으로 사람이 만든 수로를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나무는 사람이 나무를 위해 인위적으로 물을 공급하고 있는 그런 그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무에게 가장 좋은 장소는 나무가 아니라 주인이 압니다. 나무에게 부족함이 없고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시련과 어려움에도 마르지 않고 자랄 수 있는 것은 주인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복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형통할 것이고 주님이 그 삶을 인정하시기에 형통한 것입니다.

형통한 삶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복 있는 삶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이어서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커다란 책임을 맡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여호수아가 그의 삶을 복된 삶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복 있는 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그 말씀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할 때, 말씀을 찾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말씀을 묵상할 때 그럴 때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며 의인의 길을 계속 걸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복 있는 자로서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계속해서 말씀을 읽으면 우리가 계속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면 우리가 계속해서 말씀을 우리 마음에 집어넣으면 말씀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역사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님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충만을 통해 성령 충만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때 성령님이 우리를 움직이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되어서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2019년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올 한해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세상은 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올해도 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고 우리 생각과 다른 일들을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낙심시키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힘겹게 느껴지는 일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유혹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정말 복된 길이고 이 길을 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젠가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님 안에 있는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고 영원한 심판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부여잡고 나에게 주어진 의인의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복 있는 사람은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세상과 다르게 삽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루에 TV나 인터넷 하는 시간을 조금 더 줄이고 하루에 30분이라도 그것도 안 되면 10분이라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십시오. 바이블 타임이나 성경읽기 표를 참고해서 성경 읽기를 시작해보십시오.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내가 읽은 말씀 중에 순종할 말씀을 기억하고 수시로 묵상해보십시오.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나 경건 서적들도 읽어보십시오. 교회 도서실에 좋은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정말 복 있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가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새해에도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가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도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여러분의 삶은 주님 안에서 늘 푸르게 꽃피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의인의 길이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는 꽃길입니다. 새해에도 그 꽃길만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시편 1편은 시편 150 편 전체의 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는 무슨 내용들이 담겨집니까? 여러분이 논술을 한다고 할 때 서론에서는 어떤 내용들을 씁니까? 서론에서는 왜 내가 이 글을 쓰는가 하는 목적과,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와, 그리고 이런 동기와 목적에 의해서 어떤 내용들을 다룰 것인가를 쓰게 됩니다. 시편 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편은 시편 가장 처음에 위치하여 시편 전체의 방향을 지시하는 서론입니다. 시편 1편은 시편을 쓰게 된 동기와 이 150개의 시편을 통하여 어떤 교훈을 주려 하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1편을 읽었습니다. 이 시편 1편이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시편 전체가 바로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행복은 모두가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학교 공부하고, 미래의 꿈을 설계하느라 이 행복이라는 것이 우습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이를 먹어 갈수록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행복이란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것이며, 인간의 목적은 행복에 이르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상태를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돈으로 채우면 만족합니까? 인기로 채우면 만족합니까? 공부로 채우면 만족합니까?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해 강하게 ‘아니오’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것들이 결코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만들 때 그 영혼의 한 쪽을 공백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이 공백을 오직 하나님으로 채울 때만 우리 영혼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행복은 달러순이 아니다

독일에 ‘슈피겔’ 지라는 유명한 주간지가 있습니다. 이 주간지에서 ‘국가별 국민 행복감 순위’ 라는 것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잘 사는 나라와 가난한 나라 모두 합쳐 54개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자기의 삶에 대해 만족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드려 그 만족도를 평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들이 나왔습니다. 행복 만족도 1위를 차지한 나라가 어딘 줄 아십니까? 바로 방글라데시였습니다. 우리는 텔레비전으로 방글라데시가 어떤 나라인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연중 홍수로 고생하는 나라,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들이 많은 나라, 굶주려 죽는 사람이 많고 파리가 득시글거리는 나라. 바로 그런 나라가 방글라데시인데, 이 나라 국민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 가장 만족해한다는 것입니다. 나이지리아가 3위, 인도가 5위를 차지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미국은 꼴찌에서 열번째인 45위, 가까운 나라 일본은 44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스위스는 41위, 예술의 나라 프랑스는 37위였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우리 나라는 선진국들을 제치고 23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런 결과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것은 행복이 달러 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행복이 성적 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질과 명예는 일시적으로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 같지만 얼마 못 가서 사람을 다시 곤고하게 만듭니다. 물질과 명예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더할 뿐입니다. 물질과 명예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그것을 좇아가면 물이 있을 것 같지만 가면 갈수록 저만큼 멀어지고 맙니다. 선진국들이 물질의 부를 쌓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였지만 얻은 것은 영적인 빈곤이었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그러면 악인의 길에서 떠나세요, 여러분이 행복해 지고 싶습니까? 그러면 당신의 영혼을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세요.”

악인의 길에서 떠나라

1절에서 시편기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말라, 죄인의 길에 서지 말라,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악에 빠져드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좇는다, 곧 따르기만 합니다. 마음을 악인에게 주지 않고, 가끔 가서 그의 지혜만을 빌릴 뿐이며 곧장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복되면서 사람은 악인의 길에 점점 들어서게 됩니다. 두번째 단계는 그 길에 서 있게 됩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놀다가 해질녘이 되어야 돌아옵니다. 세번째 단계는 아예 자리를 잡고 주저앉는 단계입니다. 아예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악을 피하는 것입니다. 악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악을 대적하지도 말고 그것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근주자적이요,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붉은 것을 가까이 하면 자기도 붉어지고, 먹을 가까이 하면 자기의 손도 검어지기 마련입니다. 악은 피하십시오. 가까이도 하지 마십시오. 악한 말을 들었습니까? 귀를 씻으십시오.

그렇다면 도대체 악인이 누구고, 죄인이 누구고, 오만한 자가 누구입니까? 도둑입니까? 인상이 험한 깡패입니까? 아니면 남을 험담하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입니까? 교만한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겉으로 명확히 드러나니까 구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더 큰 악인은 우리를 교묘히 속여 하나님의 길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신사복을 입고 우리를 유혹하는 악인이 정말로 무서운 악인입니다. 이 악인은 물질이 당신을 행복하게 합니다. 인기가 당신을 행복하게 합니다. 성적이 당신을 행복하게 합니다 하며 당신을 유혹합니다.

물론 재물, 명예, 지식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이것이 하나님인 것처럼 속이는 데 있습니다. 이것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들의 위력을 자랑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는 데 있습니다. 돈의 위력을 의지하여, 권력의 위력을 의지하여 “보아라,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하나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신사복을 입은 악인들을 피하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

두번째로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악한 길에서만 떠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악한 길에서 떠난 사람은 이제 그 영혼을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악한 길에서 떠났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않으면 다른 악한 것이 찾아와 그 공백을 메우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우리는 편지를 읽으면서 상대방의 뜻과 마음을 알 듯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지를 압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편지를 통하여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듯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사랑의 끈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시편이 쓰여지던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모세오경으로 대표되는 율법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119:103) 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제 이 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주어졌고, 신약 성경이 여러분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배나 더 갖춘 사람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묵상은 말씀을 읽는 것과는 다릅니다. 묵상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그냥 눈으로 쭉 읽는 것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악인은 누구입니까?’ 질문하며 읽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고 하니 주님 저의 영혼이 그렇게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며 기도하며 읽는 것입니다. 읽는 것은 밀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묵상하는 것은 밀을 타작하여 방아를 찧어 빵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읽는 것은 소가 풀을 뜯어먹는 것과 같고, 묵상은 그 풀을 되새김질하여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영혼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묵상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암송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하였는데 일을 하면서 어떻게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까? 전기 시설도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의 깜깜한 밤중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비결은 말씀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전철을 타고 지나가면서, 걸어 가면서, 잠자리에 누워서 암송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솟아 나올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시편기자는 의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인의 길을 피하는 사람,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요, 의인입니다. 이런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이 예배에 모인 여러분은 의인이며,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평소에도 보기가 좋고 열매가 많지만, 가뭄 때에는 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가뭄 때에는 모든 나무들이 말라죽지만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그러하지 않습니다. 가뭄 때에도 늘 푸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기 때문에 결코 여러분의 영혼이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푸른 듯하고,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가뭄이 오고 고난이 오면 다 시들고 메말라 버립니다. 외로움의 바람이 불고, 곤고함의 바람이 불고, 빈곤함의 바람이 불면 다 날라가 버리고 맙니다.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덧없이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더구나 견딜 수 없는 것은 우리 영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는 자식은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인의 길입니다. 하나는 복 있는 사람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복 없는 사람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기도 드리겠습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시1:1-6)

성경/시1:1-6 제목/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 가치관과 복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살아갑니다. 그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데 그 가치관을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Having의 가치관입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소유에 가치를 두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 두 번째는 Doing의 가치관으로 ‘어떤 일을 했는가? 어떤 일을 이루었는가?’로 업적에 가치를 두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

세 번째는 Being의 가치관입니다. 존재 자체에 가치를 두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 Being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얼마만큼 가졌든, 어떤 일을 어느 만큼 이루었든 상관없이 존재 자체에 무게와 가치를 두는 사람 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 복 ’ 의 개념도 어떤 가치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

이 아침에 시편 1편의 말씀을 통하여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마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 중에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어릴 적에 충남 합덕에 사셨던 할아버지 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할아버지 집에는 똑같이 생긴 글자들이 곳곳마다 있었습니다. 대문에도 있었고, 장롱에도 있었고, 마루 기둥에도 있었고, 저녁에 덮고 자던 이불에도 있었고, 심지어 밥을 먹는 숟가락과 젓가락에도 같은 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할아버지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옆집에 놀러 가도 그 글자가 있었습니다. 그 글자는 ‘복’이란 글자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입니다.

학창시절 대만에 단기 선교하러 갔을 때입니다. 대만에 대한 첫인상은 온통 빨간색으로 물든 모습입니다. 집마다 빨간색이 없는 집이 없습니다. 심지어 결혼식 축의금을 내는 봉투도 빨간색입니다. 빨간색은 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대만에서 식사하러 식당에 들어갔는데, 제 키만 한 글씨를 보았습니다. 빨강 바탕에 노란색으로 크게 쓰여 있었는데, 조금 이상하게 생긴 글자였습니다.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복이 쏟아지라고 한문으로 ‘복’을 거꾸로 써 놓은 겁니다. 인천 북성동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가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합니다.

▶ 그럼,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중국 고대 《상서(尙書)》 홍범편(洪範篇)을 보면 오복(五福)을 말합니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인데, ‘오래 사는 것’, ‘부유하게 사는 것’, ‘몸과 마음이 평안한 것’, ‘덕을 좋아하는 것’, ‘제 명대로 살다 죽는 것’을 오복이라고 말합니다.

● 복 있는 사람 = 하나님 편에 있는 자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시편 1편은 시편 23편과 더불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말씀으로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 시편 1편이 제일 먼저 말씀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까?

본문 1~2절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런데 1~2절을 가만히 보면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이 취할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흥미로운 것은 ‘복 있는 사람’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이 ‘악인’입니다. 4절 말씀‘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나아가 5절에서는 ‘죄인’으로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복 있는 사람’의 반대 개념이라면 ‘불행한 사람’, 혹은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텐데, ‘복 있는 사람’의 반대 개념으로 시편 1편 기자는 ‘악인’과 ‘죄인’을 ‘복 있는 사람’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편 후반부에 가면 ‘복 있는 사람’ 대신에 쓰인 단어가 ‘의인’입니다. 결국, 시편 1 편 기자의 관점은 ‘ 복 있는 사람 ’ 은 ‘ 의인 ’ 이고 , ‘ 복이 없는 사람 ’ 은 ‘ 악인 ’, ‘ 죄인 ’ 이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인과 악인 혹은 의인과 죄인의 구분을 선행과 악행의 기준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기준으로 의인과 악인 , 죄인을 구분함을 볼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시편 1편이 말씀하는 ‘복 있는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복은 무언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이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이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 그렇게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신 사람이 ‘복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 편에 있고,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 1~2절이 말씀합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 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 하며 오 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 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도다.’ 한마디로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은 말씀에 순종하여 악한 생각을 하지 않고, 악한 일을 행하지 않고, 악한 것에 지배받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3절에 나타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 형통함이란 = 하나님이 함께 계심

반면에 악인의 모습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본문 4~5절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다’라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까? 형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고, 하나님 편에 서 있고,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형통(亨通)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불통(不通)합니까? 세상 사람들의 삶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 중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보다 잘되고, 잘살고, 사전적 의미의 형통함을 누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왜요? 복의 개념과 형통의 개념이 이 세상 물질적인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살고, 부자가 되고, 내가 하는 일들이 잘되고, 성공해야 전도해도 떳떳하고, 나를 보고 예수님을 믿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 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그런 바울은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전도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시편 1편 기자가 말하는 형통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 같이 하신다는 의미의 형통입니다 .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 놓인다 해도 하나님은 복 있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고 , 같이 하심으로 결국에는 약속하신 대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란 의미의 형통을 말씀합니다 .

우리가 창세기 성경공부를 하면서 보았던 인물 중에 아브라함과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에 도착하지만, 그가 만난 것은 극심한 가뭄이었습니다(창 12:10). 요셉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형통하였다.’(창 39:2)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현실은 죽임의 위협 속에 놓이고,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한 누명을 쓰며,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도 그렇고 요셉에게도 그랬듯이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셨고, 같이 계셨고, 결국에는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입니다.

▶ 반면에 복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적으로 잘되고, 잘살고, 사전적 의미의 형통함을 누린다 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으로 그 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겨는 다 날아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때가 되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서게 되고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의 기자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

● 우리는

이러한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을 신약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복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고, 우리가 의인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형통함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 있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고, 같이 계시고,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왜요?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복 있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본문 1~2절의 말씀처럼‘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바울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교훈도 받고, 책망도 받고, 교육도 받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서고, 하나님의 일을 할 능력도 갖추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가 복 있는 사람으로서, 형통함을 누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더 가까이하고, 하나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잘 교육받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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