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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의 권리, 에서와 야곱\”
성경구절 듣기 (창세기 25:19-34, 27:1-35)
[구약] 창세기 (Genesis) 전체듣기, CBS 박명규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성경
https://youtube.com/watch?v=bQVGohpTBJQ\u0026feature=share\u0026t=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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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 왜 하나님은 에서를 버렸는가?
창세기 25장,야곱과 에서, 하나님은 왜 에서를 버렸는가? 창세기25장 아브라함이 별세한 후 이삭의 시대가 문을 엽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에게서 …
Source: koinespirit.tistory.com
Date Published: 12/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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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모음 –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 대구성서아카데미
에서가 불같이 화를 낼 만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늙어 죽기 전에 장자에게 내려야 할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와 …
Source: dabia.net
Date Published: 9/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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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
야곱과 에서. 두 명의 형제와 하나뿐인 장자의 명분. 이삭과 리브가에게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어요.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2/2022
View: 454
에서와 야곱(창 25:19-34) – 유평교회
‘짓누르다, 으깨다, 산산조각 내다, 학대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만큼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태어난 …
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6/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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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생 에서와 야곱 – 늘푸른교회
오늘은 에서와 야곱의 삶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영적 교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한 배에서 거의 동시에 나왔지만, 그들의 성품과 삶의 …
Source: www.evergreenpromising.org
Date Published: 6/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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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에서 와 야곱
- Author: 알럽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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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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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 왜 하나님은 에서를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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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장,야곱과 에서, 하나님은 왜 에서를 버렸는가?
창세기25장
아브라함이 별세한 후 이삭의 시대가 문을 엽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낳습니다. 큰 아들의 이름은 에서, 작은아들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쌍둥이면서도 외모와 성격 모두 완전 다른 이란성입니다.
큰 아들 에서는 몸이 붉고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기질이 호탕하고, 성격이 급하며, 사냥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사나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집안에 있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세밀하며 말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저보고 둘 중 누구와 친구가 되려는가 묻는다면 당연히 에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하며 기분파이기 때문에 잘만 비위를 맞춰주면 덕볼 일이 많고, 또 의리파입니다. 자기가 손해볼지언정 배신하지는 않는 그런 성격이죠. 물론 단점도 있긴해도 친구가 손해볼 단점은 아닙니다. 하지만 야곱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산적이기 때문에 쉽게 손해를 보질 않습니다. 친구를 잘 믿어주지도 않고, 뒤끝이 있습니다. 속을 알 수 없어서 잘못하다가는 뒤통수 얻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성격이 그들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서는 몸이 붉다는 뜻이고, 야곱은 남의 뒷다리를 잡은 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 좋아하십니다. 심지어 에서를 버렸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작은 에피소드에서 그 실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팥죽 사건이죠.
사냥을 좋아하는 에서가 집에 돌아오니 야곱이 시간을 맞춰 붉은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지역에서는 적갈색의 콩에다 파와 각종 양념을 넣어 끓인 수프가 있다고 합니다. 붉은 색의 스프를 우리식으로 팥죽으로 번역한 것이지만 우리의 팥죽은 아닙니다. 원어에는 붉은을 두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이 죽을 보았을 때 얼마나 먹고 싶어했는가 그 마음이 죽 이름에 담겨 있는 것이죠. 이런 점을 보면 야곱은 의도적으로 에서가 돌아올 때를 맞춰 이렇게 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에서는 야곱에게 죽 좀 달라했지만 야곱은 매정하게 거절하고는 형의 장자의 권리와 죽을 바꾸자고 합니다. 에서는 정말 아무 생각없이 덜렁 이것을 바꾸고 맙니다.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장자 권리가 뭐 소용 있냐는 것이죠. 그리고 장자의 권리는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실 때 재산을 나눌 때나 좀 덕을 보지만 그건 나중일이고 지금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성경은 이런 에서의 생각을 장자의 권리를 경홀히 여겼다고 합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장자의 권리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권리와 집안의 대를 이어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소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받는 축복의 권리를 팥죽 한 그릇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은 그런 에서를 버렸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제임스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선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살아있는 선택과 죽은 선택, 둘째는 피할 수 있는 선택과 피할 수 없는 선택, 셋째는 중요한 선택과 사소한 선택입니다. 죽은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사람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지만 살아있는 선택은 사람의 선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머지는 설명 안해도 아시겠죠. 에서는 자신의 삶의 순간에 자기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선택을 거부하였고, 중요한 것 대신에 사소한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서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야고보서 4장 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엘리제사장을 꾸짖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십니까? 그럼 지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십시오. 하나님께 존중받고 싶다면 하나님을 존중하십시오. 하나님을 최고로 여길 때 하나님은 역시 당신을 최고로 여겨주신답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남편을 속인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방조하는 하나님
처가살이 하는 야곱 부자가 된 비결
처가와의 갈등 야곱은 어떻게 풀어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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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 2020년 7월12일
에서와 야곱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이야기 중에 에서와 야곱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둘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에서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이삭이고 어머니는 리브가입니다. 당시 이삭의 나이는 환갑이었습니다. 산모 리브가의 나이도 상당했을 겁니다. 늙어서 낳은 자식은 더 귀한 법입니다.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은 쌍둥이지만 완전히 달랐습니다. 외모도 달랐고 성격도 달랐습니다. 형은 외향적이고, 동생은 내면적입니다. 에서는 사냥하러 산과 들로 돌아다녔고, 야곱은 집에서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내려오는 이삭의 대는 당연히 형인 에서가 이어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이 이어받았습니다.
야곱의 운명은 극적이었습니다. 야곱만이 아니라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의 운명도 대서사라 부를 만큼 대단했지만, 그중에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그에게 기원한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네 명의 여자에게서 낳은 열두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형성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두 곳입니다. 하나는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판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이 20년에 걸친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야곱이 20년 전 고향을 떠나게 된 이유는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펄펄 뛰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불같이 화를 낼 만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늙어 죽기 전에 장자에게 내려야 할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늙은 이삭이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게 한 사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창 27장에 나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일가를 이룬 뒤에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형이 자기를 용서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에서는 4백 명의 젊은이를 데리고 야곱을 맞으러 왔습니다. 야곱은 초긴장 상태에 떨어졌습니다. 만약 에서가 옛날에 당한 일에 앙심을 품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듯이, 야곱을 죽였다면 야곱의 운명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도 달라졌을 겁니다. 다행스럽게 에서는 동생을 형제애로 품어주었습니다. 야곱이 장자에게 내릴 축복권을 가로챈 사건이 벌어진 계기의 단초는 일종의 에피소드처럼 묘사된 팥죽 사건입니다. 팥죽 사건이 나비효과를 일으켜서 야곱의 운명과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바꾼 것입니다. 그게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팥죽 이야기
늙은 부모와 두 아들, 이렇게 네 명이 단란하게 살던 어느 날입니다. 동생 야곱은 평소처럼 어머니 리브가를 도와서 특식을 준비했습니다. 그 특식은 붉은색의 팥죽이었습니다. 냄새도 구수했겠지요. 마침 형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왔습니다. 그가 얼마나 피곤하고 배고팠을지 상상이 갑니다. 집에 들어서자 팥죽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습니다. 동생 야곱에게 팥죽을 빨리 달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들은 한 가족입니다. 한 사람은 집안일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바깥일을 했습니다. 주로 밖에서 활동하던 에서에게 야곱은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동생은 오빠가 일하다가 들어오면 오빠가 말하기 전에 먹고 마실 거리를 준비해놓아야 합니다. 에서가 사냥한 고기는 특히 아버지 이삭이 좋아했습니다. 어머니와 야곱도 고기를 먹었을 겁니다. 그들이 부리는 일꾼들도 고기를 좋아했겠지요. 에서는 집안일을 하던 야곱보다 더 열심히 가족을 위해서 일한 겁니다. 그날도 얼마나 야생동물을 사냥하느라고 식사 때를 놓쳤습니다. 이제 집에 들어왔으니 빨리 허기를 채워야 합니다. 야곱은 엉뚱한 말을 합니다. “형님, 팥죽을 드릴 테니 저에게 장자의 명분을 파십시오.”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말을 야곱이 했습니다. 에서가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야, 인마, 장난치지 말고 빨리 팥죽이나 가져와. 배고파 죽겠다.” 이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오늘 본문 32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말을 얼핏 들으면 야곱과 에서의 대화는 ‘개그’처럼 들립니다. 야곱의 요청도 장난처럼 들리고 에서의 대답도 그렇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팥죽 한 그릇으로 사거나 팔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에서와 야곱 중에서 누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르게 질문해야겠군요. 에서와 야곱 중에서 누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봐도 야곱의 잘못이 큽니다. 형의 배고픈 상태를 이용해서 장자의 명분을 손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인간성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정확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에서는 팥죽에 얽힌 에피소드를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죽을 때가 다가오자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에서가 축복 의식에 필요한 짐승을 잡으려고 사냥을 나간 틈을 이용해서 야곱이 축복을 가로챈 겁니다. 만화처럼 들리는 그 이야기가 창 27장에 매우 세부적으로 그려졌습니다. 거기서 핵심은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권을 얻어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잘못입니까? 야곱의 인간성이 정말 얄팍해 보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20년 후에 돌아올 때 형을 생각하면서 벌벌 떨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야곱 스스로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에서는 동생의 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대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왜 인간성 좋고, 형제애도 극진하고, 생활력도 강한 에서를 편들지 않고 술수에 능해 보이는, 별로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은 야곱을 편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합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의 대답에 무조건 동의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생각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과 다른, 훨씬 근원적인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33절과 34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이 에서의 치명적인 잘못이라는 게 창세기 기자의 가르침입니다. 에서의 인간성이 나쁜 게 아닙니다. 그는 불효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에서의 다른 단점을 짚지 않습니다. 다만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의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은 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만 짚습니다(창 26:34,35). 이방인 여자와의 결혼이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서 이집트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요셉 역시 이방인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더구나 에서의 결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완성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기에 더더욱 문제는 아닙니다. 에서를 향한 성경의 비판은 그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장자의 명분
성경의 이런 판단은 거꾸로 야곱이야말로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야곱의 인간 됨됨이를 보는 게 아닙니다. 그의 인간성은 에서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은 점이 없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얻은 뒤에 아버지마저 속인 인간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인간적 술수를 써서 외삼촌의 재산을 대부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 중에서 열한 번째인 요셉과 막내인 베냐민을 편애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야곱의 편애로 형제들 사이에 비극이 벌어집니다. 형들이 요셉을 거상에게 팔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야생동물에게 희생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이 야곱의 인생살이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못 볼 꼴 많이 보면서 한평생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구한 운명이 야곱 개인의 인생에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야곱 서사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야곱은 노년에 이집트로 가서 파라오 앞에 섰습니다. 파라오가 “당신 나이가 어떻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마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야곱의 인생은 험악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에서와 달리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근거하여 야곱을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믿음의 가계에 올려놓았습니다. 지금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우리는 기도합니다. 성경의 이런 평가는 정당할까요?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아브라함부터 내려온 하나님 신앙전통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자신들을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 산다는 사실을 압축해서 말하면 장자의 명분입니다. 야곱이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으로 얻어냈다는 이야기는 형제간의 소꿉장난처럼 보이나 그 내면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어지는 선민사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선민사상에 근거하여 그들은 다른 민족을 배척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 사는 남녀노소를 전멸시켰습니다. 그들의 배타적인 선민사상으로 인해서 그들은 다른 민족에게서 미움을 받았습니다. 히틀러에 의한 아우슈비츠 대학살 사건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저는 유대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서 특별한 선하다거나 특별히 악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한 그들의 박해를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지난날 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서 받은 박해를 당연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선민사상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압니다.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서 그들이 지난 역사에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일으켰지만 그들의 선민사상이 위대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예수가 그들의 역사에서 출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인류 역사에서 그 어느 민족도 하지 못한 큰 역할을 한 겁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런 구원의 긴 역사 과정에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얻어낸 야곱 이야기가 삽화처럼 자리합니다.
소명의식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일종의 소명의식이라 할 수 있는 그 부르심을 야곱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에서처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소명의식,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소명의식,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바로 야곱처럼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소명의식을 오늘의 현실에서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서는 장자의 명분보다 팥죽이라는 실리가 더 높이 평가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분보다는 경제적 실리가 우리의 삶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에서의 투덜거림이 현대인의 가장 절실한 기도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신앙은 말 그대로 허울만 그럴듯한 명분에 떨어지고 실제로는 실리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이며, 예수의 제자라는 소명의식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영적인 공명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어릴 때 할머니에게 들었던 옛날이야기처럼 아련한 감흥만 불러일으키지 실제 삶의 능력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둘째, 소명의식과 관련해서 여러분과 저는 다음의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명의식, 또는 선민사상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에 걸맞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현실적인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이 왜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육 간에 모범적으로 살지 못하는지 답답합니다.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얻었으나 여전히 이기적이었고, 실수도 잦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인류 역사에서 오점을 많이 남겼듯이 말입니다. 우리도 야곱과 마찬가지입니다. 늙어 일생을 마칠 때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외칠지 모릅니다.
이런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몰두하였던 장자의 명분은 우리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소중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소명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소명의식이 씨앗처럼 남아 있다면 그 어떤 거친 인생살이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역사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발아하고 싹을 틔워 결실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 희망없이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른 셋째 말씀인 마 13장에는 씨가 떨어진 네 가지 땅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씨가 길가에, 돌밭에, 가시떨기에,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씨는 하늘나라 말씀입니다. 길가는 악한 자에게 말씀을 빼앗긴 사람이고, 돌밭은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어려움을 만나면 곧 넘어지는 사람이고,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의 결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고,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결실을 내는 사람입니다. 소명의식을 안고 산다는 것은 좋은 땅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당장은 다른 땅과 비슷해 보이나 씨가 떨어지고 때가 되면 본질에서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설교자로서 경제적 실리가 압도하는 이 현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으로 뚫고 나가라고 여러분에게 설교하기가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그게 생명의 길이니 다른 말씀은 전할 수가 없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즉 예수의 제자라는 소명의식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 소명의식이 우리의 영혼에 씨앗으로 남아 있는 한 여러분과 저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신비로운 구원 역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야곱과 에서
“야곱과 에서”, 구약전서 이야기 (2022)
“야곱과 에서”, 구약전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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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리브가에게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어요. 에서는 실력 있는 사냥꾼이었어요.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고 주님을 따랐어요.
창세기 25: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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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맏이였어요. 대부분 첫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았어요. 장자의 명분을 받은 사람은 가족을 이끌고 가족을 부양하는 데 도움이 될 더 많은 땅과 동물을 가지게 되요. 하지만 에서는 가족보다는 자신에게 더 신경을 많이 썼고, 부모와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어요.
창세기 25:25, 32; 26: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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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그는 매우 배가 고파서 야곱에게 음식을 달라고 했어요. 주님께서는 에서가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셨어요. 야곱은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과 음식을 서로 바꾸자고 했어요. 에서는 동의하고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주겠다고 했어요.
창세기 25:23, 29~34; 히브리서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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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와 이삭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어요. 그들은 에서가 계속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서 슬펐어요.
창세기 26: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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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은 나이가 들어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그는 죽기 전에 에서에게 동물을 사냥해서 자신이 먹고 즐길 요리를 해달라고 했어요.
창세기 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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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는 이삭이 장자의 축복을 주려는 것을 알았어요.
창세기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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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는 야곱에게 동물 두 마리를 가져오면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음식을 요리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면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을 터였어요.
창세기 27: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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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에서처럼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음식을 드렸어요.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었어요. 돌아온 에서는 야곱에게 매우 화가 났어요. 하지만 장자의 명분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에서가 아닌 주님의 계명을 지킨 야곱이 받게되었어요.
창세기 27:18~29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야곱과 에서의 형제갈등
장자권, 상속권 놓고 다툼…20년 후에 재회하면서 화해
성경 창세기에 형제 갈등은 카인과 아벨에 이어 이삭(Isaac)의 쌍둥이 아들 에서(Esau)와 야곱(Jacob)에서 재현된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카인과 아벨과 달리 화해로 끝난다는 점에서 앞의 형제갈등과 다르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Rebecca)는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쌍둥이는 태내에서부터 서로 싸웠다. 형 에서는 살결이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였고, 동생 야곱은 형의 발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창세기 25:26)
형 에서는 날쎈 사냥꾼이 되었고, 동생 야곱은 차분한 사람이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에서를 아꼈고, 어머니는 야곱을 사랑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파는 그림 (James Tissot, 1896–1902) /위키피디아
두 형제의 첫번째 갈등은 장자권(first-birth right)이다.
어느날 야곱이 죽을 끓이는데, 에서가 샤냥에서 돌아와 배가 고프다며 죽을 좀 달라고 했다. 에서는 죽을 주기 앞서 맏아들의 권리를 팔라고 했다. 에서는 맏아들 권리가 무슨 대수냐며 야곱에게 그 권리를 준다.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을 받는 야곱 (Horst, Gerrit Willemsz) /위키피디아
두 번째 갈등은 상속권이다. 성경에서는 축복(blessing)으로 표현했다.
아버지가 늙어 눈이 어두워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이삭은 맏아들 에서에게 들에 나가 동물을 잡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오면, 마음껏 축복을 주겠다고 했다.
어머니 리브가가 그 말을 듣고 에서가 사냥 나간 틈에 동생 야곱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줄 터이니, 그것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축복을 받으라고 했다. 리브가는 집에 기르던 가축을 잡아 음식을 만들고 형이 입던 털옷을 야곱에게 입혔다.
에서가 오기 전에 야곱은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아버지에게 들고 갔다. 아버지는 눈이 침침해 야곱이 입은 털옷을 만지며 에서인줄 알고 속는다. 어머니 리브가와 둘째 야곱이 이삭과 에서를 속인 것이다.
이 속임수를 모른채 아버지는 야곱이 건네준 음식을 맛있게 먹고 둘째에게 축복을 내린다. 그 축복은 야곱이 가장이 되어 집안을 다스리고, 모든 곡식과 포도주 등 재산을 상속받는 내용이다.
뒤늦게 돌아온 에서는 어머니와 야곱에 속은 것을 알고 아버지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요구한다. 아버지는 뒤늦게 속은 사실을 알게 되지만 한번 내린 축복을 번복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에서에게 말하기를,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은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겨야 한다.”고 했다.
에서와 야곱의 화해 (Francesco Hayez, 1844) /위키피디아
에서와 야곱의 대립은 무릇 인간세계의 형제갈등을 대변한다. 장자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가부장제도에서 야곱은 어머니와 공모해 태생적 장자와 아버지에게 거짓 행위를 한다. 하나님은 야곱과 어머니의 사기적 행동에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에돔 왕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두 형제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지시로 외삼촌 라반(Laban)이 사는 하란으로 가서 지내다가 아내 넷을 얻고 아들 열하나를 낳아 20년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그는 형 에서가 자신과 가족을 죽일 것을 두려워 한다.
야곱은 자신의 재산 가운데 큰 부분을 떼어 형에게 주며 화해를 모색했다.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낙타 3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 여기에다 종들을 나눠 에서에게 상납하기로 하고 먼저 보냈다.
뜻밖에 에서는 쾌히 야곱을 용서한다. 동생이 주는 선물도 받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동생의 간곡한 부탁에 형은 동생의 선물을 받았다. 두 사람은 마침내 화해한다.
야곱은 유인인의 조상이다. 주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Israel)이란 이름을 준다. 에서는 에돔 왕국의 한 종파가 된다. 에돔은 이스라엘 남부에 있던 고대 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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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거나 교활하거나
< 1 >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특별히 에서를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성서는 사냥꾼인 에서가 잡아온 고기를 이삭이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남을 더 귀하게 여기는 관습이나, 고기를 좋아하는 그의 특별한 취향 외에도 어쩌면 숨은 이유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송봉모 신부는 이삭의 그런 특별한 편애의 배경에는 이삭의 열등감을 두 아들에게 투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삭과 그가 편애하는 에서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낳은 유일한 적자라는 이유로 어쩌면 지극한 보호와 사랑 속에서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갈등을 피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고, 집 안에만 있는 야곱보다 사냥꾼인 에서의 대범하고 외향적인 기질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삭이 이런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모리야 산에서 가졌던 공포와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혼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삭이 몇 살 때에 이런 경험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모리야 산으로 이삭과 함께 갈 때,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은 것으로 보아 아주 어린 아기가 아닌, 소년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놓은 아버지가 갑자기 날카로운 칼을 빼들고 자기를 잡으려고 했을 때, 이삭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성서는 이삭의 반응을 전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삭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어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진정한 장자이자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인 자신을 그동안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변한 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했을까요? 아버지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 야훼는 장자를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신(神)인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과연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믿음 있는 사람이 할 짓인가?
물론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해피 앤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숫양 한 마리를 예비해 두셨고,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 숫양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행복하게 모리야 산을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요청을 듣고 그 일을 그의 아내 사라와 상의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사라의 반응은 어떠했을지도 우리는 단지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지요. 아마 기절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몰래 이삭을 데리고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 아닐까요?
그런데 성서는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일 후에 곧바로 ‘사라는 백 년 하고도 스물일곱 해를 더 살았다. 이것이 그가 누린 햇수이다. 그는 가나안 땅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눈을 감았다. 아브라함이 가서, 사라를 생각하면서, 곡을 하며 울었다.’(창 23,1-2)고 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어땠을까요? 아버지를 이전처럼 대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로 마음이 향하게 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삭은 마마보이로 자랐을지 모릅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혼인한 것이 마흔 살이었다는 성서의 보도로 미루어, 그리고 혼인할 여자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에서 구해와 연애결혼이 아니라 일종의 중매결혼을 하게 된 것도, 이삭의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삭이 왜 쌍둥이 아들들 가운데 특별히 에서를 더 사랑했는지, 그 이유를 심리적으로 설명하는데 그쳐야 할 것 같습니다.
< 2 >
에서와 야곱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사십 세에 맞이한 아내 리브가에게서 60세에 얻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이미 태속에서부터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우리 말 ‘싸우다’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는 ‘두개골을 부수다’(판관기 9,53; 시편 74,14) 또는 ‘갈대를 찢다’(이사야 36,6)는 매우 거칠고 잔인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속에서부터 이렇게 에서와 야곱이 싸웠으니,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갔다고 합니다(창 25,22).
▲ Jan Victors(1619-1679), 「Jacob blessing Isaac」 ⓒGetty Image
그러자 야훼 하나님은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 25,23)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장자가 아니라 차남인 야곱이 야훼의 구원사의 주역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어쨌든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큰 아들은 몸이 붉고 전신이 털 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에사오: 털이 있는)라고 했고, 후에 나온 동생은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야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창 25,25-26). 그러나 에서의 신체적 특징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에서라는 이름과 사실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살결이 붉다’에서 ‘붉다’를 가리키는 ‘아드모니’는 에서의 왕국 ‘에돔’을 준비시키고, ‘온몸이 털투성이다’에서 ‘털투성이’를 가리키는 ‘세아르’는 에돔 땅에 있는 산악지역 ‘세이르’를 준비시킵니다. 그러므로 에서라는 이름은 아마도 에돔과 세이르를 합성 축약시키면서 생겨난 이름일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민중적 어원에 의하면 야곱이라는 이름을 ‘발 뒤꿈치를 잡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아켑’에서 유추하기도 하지만, 사실 ‘야곱’은 ‘야아코벨’의 약자로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장성한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조용한 성격의 야곱은 장막에 거주했다고 합니다(창 25,27). 송봉모 신부에 의하면, 야곱이 천막 안에 살면서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는 것은 야곱이 ‘마마 보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천막은 여성의 세계, 어머니의 세계를 표현한다면, 들판은 남성의 세계, 아버지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성격이 차분하고 주로 집에서 살았던 야곱을 어머니 리브가가 사랑했고,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인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고 합니다(창 25,28).
사냥꾼인 에서와 목자인 야곱의 삶은 오랫동안 병존한 두 삶의 방식이었지만 언제나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방랑하는 야성적인 사냥꾼은 정착하여 보다 개화된 거주상태에서 사는 목자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야곱을 차분하고 얌전하다고 평가하는 시각은 정착한 농부와 목자의 시각입니다. 목자와 농부는 사냥꾼보다 잘 짜여진 도덕적 규율을 지닌 공동체적 삶을 산 것이지요. 이 이야기가 전해진 시대는 떠돌아다니는 수렵생활보다는 정주해서 가축을 치거나 농사를 짓는 것에 더 가치를 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죽을 정도로 허기져서 들어온 에서는 동생 야곱이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에서는 그 붉은 죽이 선지국인 줄 착각합니다. 나중에 그것이 선지국이 아니고 불콩죽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에서가 속았다고 생각했지만(창 27,36), 그 때는 따질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배고픈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불콩죽에 팔 것을 요청하고 야곱은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 것을 맹세하게 합니다.
에서가 왜 장자의 직분을 불콩죽과 떡과 교환했는지 그 이유가 한 문장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창 25,34). 맹세는 맹세하는 당사자에게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 것을(여호수아 9,19 참조) 에서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흔쾌하게 맹세하고, 죽과 떡을 ‘먹고 마신 후 나갔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에서의 성급하면서도 무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이 왜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사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장자상속권 때문이었는지, 선조들의 약속이 장자에게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장자 상속권을 팔고 살 수 있었던 당시 풍습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장자를 통해서 상속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장자권에 집착했다는 것은 히브리 성경 원문에서 드러납니다. 허기진 에서가 팥죽을 요구했을 때, 새번역 성경은 야곱이 ‘형이 먼저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파시오’(창 25,31)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형이 오늘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파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33절도 새번역은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라고 했는데, 히브리 성경은 ‘오늘 나에게 맹세하시오’라고 하여, 야곱이 오랫동안 장자직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에서와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의 편애입니다. 왜 같은 배 속에서 그것도 쌍둥이로 태어난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인 에서보다 차남인 야곱을 리브가가 더 사랑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거친 사냥꾼으로서 집을 거의 떠나 사는 에서보다 목축과 농업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야곱을 더 사랑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창 26,34-35).
마찬가지로 이삭도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성서는 이삭이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 맛을 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이삭의 아버지 컴플렉스가 작용했을지 모릅니다. 자기를 희생 제물로 바치려던 아버지 아브라함을 이삭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 후, 어쩌면 이삭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약하고 소심한 성격의 이삭이었기에 어쩌면 자기의 반대 모습, 자기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거칠고 통이 큰 사냥꾼인 에서에게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마마보이 같은 야곱보다 더 사랑했을지 모릅니다.
< 3 >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장자권을 산 야곱과 장자권을 판 에서의 그 이후의 삶입니다. 형에게서 장자권을 샀다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다고, 마치 큰 일이라도 벌인 양 호들갑을 떠는데도, 야곱은 현실에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평생을 험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에 동생에게 두 번이나 속임을 당한 듯이 보였던 에서는 사실상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고,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땅에 삽니다. 아버지의 귀중한 유산인 우물들 덕분에 그는 더 이상 족속을 이끌고 유랑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에서의 성격을 우리는 더 잘 파악하게 되는데, 그는 동생에게 속임 당한 것을 곧바로 잊어버립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에게 유화의 제스처를 보이기 위해 재산을 미리 보내고, 만난 후에도 재산을 주겠다고 하지만, 에서는 전혀 야곱의 재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형제가 만났을 때 껴안고 우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오히려 에서가 통이 크고, 장남으로서의 기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를 놀라고 당황스럽게 합니다. 장자이며 사냥꾼으로서 건장한 체격에 선한 마음을 가진 에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모순덩어리이고 교활하고 매우 이기적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잔머리를 굴리는 비열한 야곱을 왜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의 계승자로 증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이 참으로 비열하고 교활하며 이기적이고 매우 현실적이며 모순으로 가득 찬 야곱의 인격을 전혀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품이나 인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누가 하나님을 찾느냐는 데 있습니다. 누가 과연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느냐는 것입니다.
에서가 축복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이유를 성경은 그가 장자의 권리를 가볍게 여긴데서 찾지만(창 25,34), 우리는 에서가 꼭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장자직이라는 것이 도대체 판다고 팔아지는 것인가? 또 판다고 약속했다고 해서 팔려지는 것인가? 장자직이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질서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장자로서의 기득권은 생득적으로 결정된 운명이었고, 에서는 그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으며, 굳이 지켜야 할 것으로, 또는 쟁취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운명으로 보장된 자신의 삶을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은 사실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주어진 기득권 안에 머물러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사람, 세상이 나를 바꾸는 대로 순응하기는 하지만,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 운명에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세상이 물결치는 대로 휩쓸려 떠내려가기는 해도, 결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에서가 축복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선하게 인격적으로 산다는 것이 아무 쓸모없는 일이란 말일까요? 야곱처럼 교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스럽게 이기적으로 살아도, 마지막에 하나님만 찾고 믿으면 결과적으로 복 받은 삶을 사는 것이 된단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은 인격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이었고, 야곱은 그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야곱은 기도 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이 모든 은총과 온갖 진실을, 이 종은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창 32,9-10).
그리고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인 죄과에 대한 벌을 죽을 때까지 받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속임수에 빠져 7년의 노동 착취와 20여 년의 종살이를 감수해야 했고, 천사와 씨름하다가 불구가 되었습니다. 세겜에게 자기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고(창 34,2), 베냐민을 낳다가 자기 아내 라헬은 목숨을 잃었으며(창 35,18),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노예상인에게 잃고(창 37,28), 기근 때문에 굶어죽게 되자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자식들을 보내야 하는(창 42,1-2),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는 이집트 왕 바로 앞에서 한 고백에서 드러납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묻는 바로 왕에게 야곱은 이렇게 말 합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그렇습니다. 야곱은 130여 년 동안 진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죄에 대한 보응을 그는 충분히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불안하고 왜곡된 인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인격의 심층부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했고, 그의 삶의 깊이에서부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기에게 호소하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번뇌에 몸부림치며, 불안해하고, 도피하고 싶어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살아야만 하는 생의 과제를 부둥켜안고 고민하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와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 하나님의 은총 없이도 스스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숨은 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야곱의 얼룩진 인격을 전혀 감추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은 도덕적 완전과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 삶을 사는 인간,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운명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도전하여 운명을 바꾸는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사가 계승된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의 인격은 그의 생애의 가장 위기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변화됩니다. 그 변화는 환도 뼈가 위골되는, 그리하여 절름발이가 되고, 남자로서의 힘의 근원이 무너지는 것을 대가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닙니다. 새 이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듯이, 야곱을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 같은 현실에 도전한 것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도저히 바뀔 수 없는 것 같은 현실, 운명을 변화시킨 것은 야곱 자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기도할 때, 옷을 찢고 재를 뿌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야곱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 그 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고, 또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었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목숨을 잃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창 32,30). 그래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붙였고, 야곱이 절뚝거리며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 그를 비춥니다(창 32,31). 천사와 목숨을 건 투쟁에서 바뀐 것은 야곱 자신만이 아닙니다. 해가 솟아올라 밝아진 세상도 이미 옛 세상이 아닙니다. 운명을 이긴 사람에게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 아닙니다. 현재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가능성입니다. 이 약속을 의지하여 자신의 삶과 현실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야곱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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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
<스톰 마티아스 작품 : 야곱과 에서 >
<태중에서 싸운 야곱과 에서> 창세기 25장
1. 스토리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40세에 결혼한 리브가로부터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을 낳는다. 그 때 야곱의 나이 60세였다(창25:20, 26). 창세기 25장 21절을 볼 때, 이삭은 잉태하지 못하는 리브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리브가로 하여금 잉태케 하셨다.
그런데 리브가의 태 속에 있는 두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하나님은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다”며,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고 얘기하고 있다(창25:23). 이와 함께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을 덧붙이고 있다.
결국 해산날에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붉음을 뜻하는 ‘에서’(에싸브)라 지었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의미의 ‘야곱’(야아코브)이라 지었다(창25:22-26).
2. 야곱과 에서의 장자권 다툼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 쌍둥이가 복중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태어나기도 전인 복중에서부터 쌍둥이가 싸웠던 이유는 바로 ‘장자권’을 먼저 취하려는 것 때문이다. 야곱과 에서는 ‘누가 장자가 될 것인가’를 두고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에서가 장자이고 야곱이 차자이다. 하지만 창세기 25장 23절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은 ‘맏아들인 에서가 아우인 야곱을 섬기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이면적으로 볼 때, 에서보다는 야곱이 장자의 권한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본문과 관련해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 10~13절에서 야곱과 에서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야곱은 사랑하시는 자인 장자 격이며, 에서는 미워하시는 자인 차자 격이라는 얘기다.
3. 장자의 명분을 회복한 야곱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것은 참 진리인 말씀에 속한 자를 가리키며, 미워하시는 자라는 것은 거짓인 어두움에 속한 자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쌍태 속에서 먼저 난 자였던 에서는 거짓 진리의 상징인 차자였으며, 나중에 태어난 자인 야곱은 참 말씀의 상징인 장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장자와 차자의 순서가 뒤바뀌면서 에서가 먼저 나옴으로 이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 복중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싸움은 결국 ‘팥죽’ 때문에 결론이 난다. 익숙한 사냥꾼이었던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 피곤해 있을 때, 조용한 성격의 야곱은 팥죽을 쑤고 있었다. 피곤했던 에서가 팥죽을 먹고자 했을 때,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자신에게 팔라’고 요구한다. 이때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며,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넘겼다(창25:27-33).
창세기 25장 34절에 야곱이 에서에게 건네준 것은 ‘떡과 팥죽’이다. 야곱은 떡과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 곧 장자권을 회복한 것이다. 참고로 붉은 팥죽과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한다. 말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통해서만이 완전한 장자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캄캄한 밤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야곱은 밤새 그와 씨름을 한다. 얼마나 야곱이 죽을힘을 다했는지, 천사는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를 치게 되고, 야곱은 환도 뼈에 상처를 입는다.(내포 의미는 무엇일까? 환도 뼈의 상처는 어쩌다 입었을까?)
4.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에서의 행동은 결국 아비인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할 때에,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삭에게 줄 별미를 만들기 위해 사냥하러 간 틈을 타서 야곱이 그 축복을 대신 받게 된다(창27:1-4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에는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9)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반면 에서에게는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는 차자의 복을 이삭은 빌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예언했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을 이삭은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야곱은 장자권을 회복하게 된다는 예언과 축복인 것이다.
5. 승리자가 회복하는 참 장자권
야곱이 참 장자권을 회복하게 된 시점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종노릇을 하고 난 뒤였다고 볼 수 있다. 라반에게서 벗어난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시작된 씨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이름을 얻음으로 회복됐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32:27-28).
일반적으로 사람은 영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씨름하고 있다. 이 씨름에서 영의 소욕이 야곱처럼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창세기 32장은 보여준다. 그러나 육의 소욕이 이기면 육이 장자가 되고 영이 차자가 되어 타락한 인간이 된고 만다. 영의 소욕이 야곱처럼 승리하면 이는 곧 내 마음 안에서 생명나무의 말씀이 승리하였음을 뜻한다. 이처럼 넉넉히 이기는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참 승리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완전히 믿는 것으로 가능하다(요16:33, 롬8:37, 요일5:3~4, 계3:21).
6. 제주도 구전 신화 <천지왕 본풀이>와 비교해보자
대별왕과 소별왕의 인세 다툼에서 결국 소별왕이 거짓말과 술수로 대별왕을 이긴다. 저승을 차지하게 된 대별왕과 이승을 차지하게 된 소별왕 이야기에서의 꽃가꾸기 경쟁과 더불어 야곱의 지략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동양적 희생과 양보의 사고와 달리, 구약시대의 보편 윤리는 무엇을 강조하고 있었는가? 왜 신은 장자인 에서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는가? 나가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에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인세 경쟁에서 진 대별왕은 사실 져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신화적 상징 체계는 인간세의 사이즈를 초월한다. 대별왕의 저 자애로운 양보심은 어쩌면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행위의 강력한 내적 모티프와 연계선 상에서 이해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닐까?
7. 이스라엘의 신민의식
야곱은 선택받은 민족의 시조인가. 인용한 성경의 스토리에 따르면 그렇다. 하느님은 야곱을 이미 이스라엘의 시조로 점지해두지 않았는가. 그 역시 자신의 죄를 괴로워하면서 광야를 떠도는 벌을 감래한다. 아니 자청해서 떠돈다고 해야할까? 그러다 그 괴로움은 꿈으로 드러나고, 꿈속에서 천사를 만나 신의 음성을 듣게 되면서 보속을 받게 된다. 성경은 말하고 있다. 태중에서 이미 야곱이 장자권을 받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 에서의 힘에 의해 그 순위가 바뀌게 되었다고. 그렇다면 신은 자신의 예정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길 바란 바, 에서에게 가혹하게 군다. 성경의 구절에 의하면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믿음직한 힘 좋은 아들이요, 그에 비하자면 차자인 야곱은 약골로 나온다. 약골인 만큼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는지 모르나, 그 어머니는 왜 야곱이 형을 내치게 되도록 공조했을까? 나로서는 이부분이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이 장자 에서에게 주는 사랑이 못마땅했을까? 이건 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도 불가능하고. 큰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이유 불명의 미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손가락도 물면 특별히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막내 아들(쌍둥이인데 막내아들이라니 이상하다)에 대한 자신의 편애를 통해, 그녀가 얻는 것은 뭐가 될까? 그녀야말로 어떤 조력자일까? 나는 이 성경의 스토리를 읽고 혼란에 빠졌다.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친모는 어째서 낳은 자식 중 유독 한 자식을 편애했을까? 왜 그녀는 자신의 편애를 받고 있는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남편과 큰 아이를 감쪽 같이 속이도록 했을까? 그녀는 인간 남자의 아내라기 보다, 신의 아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녀는 그러니까, 천상과 지상계를 이어주는 천사 같은 존재. 혹은 신화적으로 환원해서 보자면, 무당 같은 존재. 예언의 실행에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절대적 조력자 아닐까?
성경에 대해 이렇게 평하면 기독교 광신자들이 파르르 들고 일어나겠지만, 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을 납득할 수 없다. 그 자폐적인 우월감과 기만적 행위들. 그들에게 종교는 곧 정치이다. 이번 가자에서의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 어머니의 존재를 규명해야 할 것 같다. 도대체 이 미친 이스라엘아, 너희들의 어머니는 과연 누구이기에?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이다. 그들의 부모는 이삭과 리브가이다.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약속의 아들이다. 에서와 야곱은 믿음의 조상의 삼대 손으로 태어났다. 그들은 보통 아이들인데 쌍둥이였다. 그런데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미 복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이 두 민족이 되겠고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계시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 예언의 말씀대로 에서는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고 야곱은 이스라엘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미리 예정하심에 관하여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겠다. 그들이 아무 일도 하기 전에 이미 그들의 미래가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미리 그들을 아시고 택하셨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항의를 불러 일으키는 주제이다.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데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에서가 쓰임을 받았다면 그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하다는 논리이다 (롬 3:5).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가 없다 (롬 3:6). 그러면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할 것이다 (롬 3:8).
사람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가 없다. 계시를 받은 이삭과 리브가도 쌍둥이 아들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처음과 끝이 되신다. 뿐만 아니라 계시하여 주신대로 다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기계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 아담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실과를 먹지 않을 수도 있고 불순종하여 먹을 수 있는 선택이 주어졌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나서 믿음의 가정에서 보통 아이들처럼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장자의 명분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에서는 경홀히 여겼다. 사냥 후에 배가 고픈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유익인가 반문하고 맹세까지 하며 팥죽 한 그릇과 거래하였다. 또한 약속이 없는 가나안 여자와 함께 멍에를 매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그는 가나안 여자를 얻어 결혼하여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야곱은 아비 이삭을 속이고 그의 축복을 받았다. 그는 두번이나 형 에서를 속였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장자의 복을 빼앗아갔다.
에서와 야곱은 모두 허물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주께서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말 1:2,3).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에서나 아비를 속인 야곱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야곱은 회개하고 돌이켰으나 에서는 거부하였다. 쌍둥이 형제는 가나안 땅에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견디며 동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야곱은 시간이 흐를수록 여호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로 이끄신 것이다. 이에 야곱은 하나님의 이끄시는 사랑에 화답하여 순종하였다. 벧엘에서 사닥다리 환상을 보고 하나님 앞에 서원하였다. 그는 고비마다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는 속이는 자에서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고 그의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는 수모를 겪었다. 아들들에게 속임을 받아 요셉이 짐승에게 물어 뜯겨 죽은 줄로 알고 애통하였다. 그는 후에 바로 왕 앞에 서서 말하기를 그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에게 동일한 말씀과 약속을 주셨다. 한 집안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다. 그런데 에서는 그의 말씀대로 준행하지 아니하였다. 야곱도 자기 뜻대로 한동안 살았다.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여겼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속이는 자요 도망자가 되었다. 그는 쓸쓸하고 외롭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진정 이기는 길로 인도하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같이 그가 죽는 것이었다. 얍복강 가에서 그는 천사와 씨름하다 환도뼈가 위골되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되었다. 처음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은 이와 같이 야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주의 의의 길에 서서 걷도록 연단하셨다. 그는 조부 아브라함과 아비 이삭의 하나님의 말씀에 준행하여 열국의 아비로 빚어졌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야곱을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베푸셨다. 그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에게까지 자라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인생 여정의 실수와 아픔과 좌절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갔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다.
2020.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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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창 25:19-34)
제목 : 에서와 야곱
본문 : 창세기 25장 19-34절
설교자 : 이병권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며 이삭을 통해서 그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실 것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이삭에게 전달되었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을 때 이삭의 나이가 육십 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160세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살아있을 때의 일이고,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후에도 15년을 더 살며 손자들의 재롱과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간순서로 따지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죽음 이전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저자는 마치 이 일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이미 죽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앞에서 마무리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제부터 새로운 세대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삭의 생애가 기록될 것 같았는데, 그런 예상과는 달리 막상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이삭보다는 야곱입니다. 실제로 창세기의 저자는 이삭과 그의 첫째 아들 에서 보다 둘째 아들 야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26장에서 짧게 다루어지고, 그 후로 독립된 이삭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며,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의 가정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삭보다는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에 대한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사건이고, 둘째 부분은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파는 사건입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20). 특별히 저자는 리브가를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인 브두엘의 딸이며 아람 족속인 라반의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야곱이 자신의 외삼촌인 라반을 찾아 갈 일을 염두에 두고 미리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해서 어머니인 사라가 죽은 후에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런 이삭에게 문제가 있다면, 오랜 시간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러했었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그러합니다. 훗날 야곱의 아내들도 그러한 일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집안의 여자들이 임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면,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일은 그냥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약속이 성취될 때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십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약속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비록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약속의 상속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다음 상속자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이 이삭의 간구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1)
이삭의 기도가 응답되어 결혼하고 20년 만에 리브가가 임신합니다. 그런데 임신으로 기뻐했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리브가에게 근심이 생깁니다. 자신의 뱃속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심한 요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들이 뱃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정작 리브가는 영문도 모른 채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한 후 처음으로, 그것도 어렵게 경험하고 있는 임신입니다. 요즘처럼 초음파로 검사해서 태아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아마도 리브가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자신의 뱃속에 두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입니다.
22절에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싸우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강한 의미를 가집니다. ‘짓누르다, 으깨다, 산산조각 내다, 학대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만큼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태어난 후에 싸워도 충분히 싸울 날이 많은데, 그것도 부족했는지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아이들로 인해 그녀의 뱃속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두 아이가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둘 사이에 있을 갈등과 다툼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반복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은 가족 간의 갈등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시기하여 살인을 저지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재산 때문에 같이 살 수 없었고,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하다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속고 속이는 갈등을 겪게 되고, 뿐만 아니라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도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이런 일은 단순히 성경 속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오는 갈등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오히려 더 많이 싸우는 걸까요? 가장 친밀한 부부사이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갈등이 만날 때 “어떻게” 와 “왜”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어떻게 저러냐?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겁니다. “5-3=2” 어떤 오해도 세 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가정에서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영적인 가족인 교회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로 협력하여서 한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서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와 “왜”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 이렇게 해야 돼’, 이런 면에서 우리의 관심이 모아집니다. 그리고 그 ‘어떻게’를 달성하기 위해 때로 부딪히기도 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의견 차이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 안에서 뭔가를 할 때 ‘어떻게’ 보다 ‘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 이것을 하는지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여러 부서가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하고, ‘어떻게’ 더 좋은 행사를 만들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왜’ 우리가 이것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만 생각한다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고 하는 일에 대해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종교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어떻게’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만 몰두한 나머지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어떻게”를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왜”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는 물론, 성경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한 번 더 참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자신의 뱃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길이 없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3)
리브가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응답은 네 마디의 간략한 시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녀의 뱃속에 함께 할 수 없는 두 민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가 요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두 민족이 그 힘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강한 민족이 형이 아니라 동생입니다. 그래서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합니다.
어찌되었든 때가 되어 리브가는 두 아이를 출산합니다. 첫째 아이는 붉고 온몸에 털이 많아서 에서라 이름 지었고, 둘째 아이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에 야곱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 당시 문화에서 이름 짓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름을 지을 때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거나 출생에 관련된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을 읽다보면 이름 짓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이름 짓는 게 장난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이름을 지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털이 많아서 에서이고, 발꿈치를 잡아서 야곱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좀 황당한 이름들이지만, 당시의 문화 안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이삭과 리브가는 특이한 아들 둘을 얻었습니다. 하나는 붉고 털 많은 자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은 성장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달랐던 두 아들은 자라면서 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이 되어서 주로 들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인데 정말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아들의 다른 점이 아니라 그 다른 점으로 인해서 부모의 사랑이 갈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이삭과는 달리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빠는 형을 사랑하고, 엄마는 동생을 사랑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부모의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랑은 가정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가 자신과 더 잘 맞는 자녀를 사랑하고, 다른 자녀를 덜 사랑하는 정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문제이기보다 부부의 문제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축복을 얻기 위해 속이고 속는 일이 전개되는 27장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녀 양육의 최선은 건강한 부부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부사이가 좋지 못하면 그 안 좋은 영향이 그대로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잘 양육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만큼, 서로에 대해서 나의 남편에게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삭의 가정에 드디어 사건이 벌어집니다. 27절에 에서를 가리켜 익숙한 사냥꾼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단어의 표현 그대로 말하면 사냥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 사냥을 잘 아는 능숙한 사냥꾼인 에서가 사냥에 실패했는지 심히 피곤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사냥꾼이었던 에서는 사냥에 실패하고, 오히려 에서가 야곱의 사냥감이 되어서 야곱의 미끼를 덥석 무는 것입니다.
마침 야곱은 죽을 쑤고 있었고 에서는 그 죽을 먹기 원했습니다. 에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30) 에서는 팥죽을 가리켜 ‘그 붉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 같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야곱은 형에게 말이 안 되는 거래를 요구합니다. 죽을 주는 대신 장자의 명분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대해서 에서는 맹세까지 하며 장자의 명분은 야곱에게 팝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야곱이 어떻게 장자의 명분을 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의 권리, 그 가치를 알고 자신의 세속적인 형으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경솔하고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는 피곤하여 지쳤고, 굶주려 있었고, 장자의 명문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은 34절에 그의 행동을 말해주는 연속되는 동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감’으로써 자신이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에서는 들에 사는 야생 동물처럼 자기 배를 채우는 일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능숙한 사냥꾼이기보다 형편없는 미끼에 넘어가 붙잡힌 짐승 같습니다.
에서가 정말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분의 섭리 안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형이 동생을 섬길 거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두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쉽게 장자권을 내어주었고, 야곱은 필사적으로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곱이 자기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에서가 장자가 될 만한 자격이나 의지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본문의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12:16)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서의 세속적인 성품과 행동을 통해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욕구를 위해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하는 것, 일시적인 만족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에 대한 교훈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일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망령된 자가 되지 않도록, 정말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당장 얻을 수 있는 잠깐의 만족을 위해, 더 가치 있고 더 소중한 것을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깐의 쾌락을 위해 정말 귀중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깐의 달콤함을 얻기 위해 더 유익한 것을 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일시적인 것과 바꾸지 마십시오. 반대로 일시적인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보고 제대로 구별하며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순간의 편안함을 위해, 더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합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에서는 훗날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지만 기회는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때 날아가 버린 기회는, 그 소중한 가치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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