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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성서학당 십계명 8강 \”간음하지 말라\” (김기석 목사)
본문 말씀 : 출애굽기 20:1~17
1. 자본주의 세상
2. 아름다운 관계
3. 플라톤의 (symposium)
4. 하나님의 관계를 혼인 관계에 빚댐
5 . 음욕을 품은자는 이미 간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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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지 말라’의 적극적인 뜻 – 아멘넷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바로 다음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나옵니다. 이것은 살인 다음으로 인간에게 치명적인 것이 간음이라는 뜻입니다. 7계명도 …
Source: www.usaamen.net
Date Published: 9/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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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지 말라:크리스찬리뷰 ㅣ The Christian Review
제7계명은 두 단어로 되어 있다. ‘간음하지 말라’ 다른 부연 설명이 없다. 이것은 ‘간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Source: www.christianreview.com.au
Date Published: 3/2/2021
View: 3892
간음하지 말라 – 꽃자리
기성세대 눈에 젊은이들은 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니 말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히브리어로 단 두 단어로 이루어진 짧은 계명 …
Source: fzari.com
Date Published: 10/9/2021
View: 7794
간음하지 말라 – 밀톤 한인장로교회
간음하지 말라/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출20:14). 십계명 강해 스물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계명 중에서 일곱 번째 계명으로 …
Source: miltonkpc.com
Date Published: 5/16/2021
View: 2080
로마서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4/2/2021
View: 400
생명의 말씀 – 간음하지 말라 – 광성교회
오늘 본문 27-28절 말씀에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
Source: www.ksch.net
Date Published: 5/27/2021
View: 7558
간음하지 말라 – 설교원고 – 그리스도의교회선교회
주님의 말씀은 모든 사물을 악한 마음으로 보지 않기 위해 장님처럼 되어야 하고 금지된 장난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잘라야 할 만큼 되어야 한다는 것 …
Source: thechurch.kr
Date Published: 7/30/2022
View: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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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간음 하지 말라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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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3. 5. 2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g1DHV-3dWn0
‘간음하지 말라’의 적극적인 뜻 > 지난 오피니언
본문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지켜야 할 의무 중에 가장 먼저 요구된 것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식의 의무요 책임일 뿐 아니라 하나님 공경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모든 인간관계 질서의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인간 상호 간의 질서를 잘 지킨다면 안녕과 행복의 기틀을 든든히 세우는 것입니다. 그 기초 위에 바른 교육과 바른 정치와 정의로운 경제 부흥을 이룬다면 그야말로 복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서 안에서 평안과 행복과 생명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 사회 복지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깨뜨리는 치명적인 몇 가지 악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살인이고 둘째는 간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살인보다 치명적인 악은 없습니다. 그런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살인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어떠한 일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인을 금하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적극적인 뜻은 자신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복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바로 다음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나옵니다. 이것은 살인 다음으로 인간에게 치명적인 것이 간음이라는 뜻입니다. 7계명도 실제적으로 간음하는 것을 금하는 계명이지만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 계명을 온전히 지켰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 계명이 지향하는 적극적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음은 음행과는 다릅니다. 음행은 단순히 음란한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간음은 결혼한 남녀가 다른 여자나 다른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간음이나 음행을 하나님께서 금하셨다는 면에서는 동일한 죄가 되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간음을 음행보다 더 엄한 벌로 다스렸습니다. 즉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처녀를 범했다면 벌금을 내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 평생 버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신 22:28-29). 그러나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하면 그 둘을 다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 22:22). 이와 같이 결혼한 합법적 부부 사이를 벗어난 성적 관계는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하여 살인과 같이 무서운 죄로 취급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에서 역사가 몰락한 원인에는 반드시 성적 타락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고, 이스라엘이 그랬으며, 로마 제국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사회나 국가나 가정이 튼튼하려면 성적으로 건전해야 합니다. 나라와 가정을 지키는 것은 성적 질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살인이 인간에게 최악의 죄가 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라면 간음이 살인 다음으로 악한 죄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혼인제도 때문입니다. 혼인 제도가 없다면 간음이 죄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혼인 제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혼인제도의 참뜻을 예수님께서 밝혀주셨는데,“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4-6). 여기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셋도 아니고 넷도 아니고 둘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일부일처의 신성한 혼인 제도를 말합니다. 일부일처의 또 다른 성경의 가르침은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말 2:15). 이러한 일부일처의 신성한 혼인 제도는 일부다처제로만 범하는 것이 아니고 간음을 행하므로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일부다처의 혼인 제도를 비웃지만 간음이 바로 일부일처의 신성한 혼인의 질서를 깨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 질서가 깨어지는 것을 재난이라고 합니다. 지진, 홍수, 허리케인, 쓰나미, 가뭄 이 모두가 재난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한 세상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 이런 것들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두려워합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연재해를 막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 질서가 깨어지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혼인 질서가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어느 나라보다 많은 미국에서도 혼인 질서가 형편없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미국에서는 간음이 죄가 아닙니다. 간음이 이혼 사유는 되지만 간음했다고 해서 달리 처벌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음한 자를 죽이라고 하셨는데 미국인들은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워서인지 죽이기는커녕 아무런 벌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한 자는 죽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보다 사랑이 많아서인지 사형제도도 폐지해 버립니다.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운 체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너그러운 체 하다가 이지경이 되었습니다. 성적 타락의 과정은 처음에는 간음, 그 다음은 동성애, 그 다음은 혼음, 그 다음은 근친상간, 그 다음은 수간입니다. 반드시 이런 순서대로 타락하는 것은 아니지만 혼인 질서가 무너지자 인간의 질이 곤두박질치는 경향이 점점 더 역겨운 형태가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고 하였고,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2:19)고 하였으며, 여러 경우의 근친상간도 금하였습니다(레 18장). 성적인 타락은 오늘날이라고 더 나빠진 것이 아닙니다. 죄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악합니다. 간음, 동성애, 혼음, 근친상간, 수간이 이미 옛날부터 행해져왔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그런 것이 있었고, 노아 시대에도 있었고, 바벨론 제국 안에도, 애굽과 헬라와 로마제국 안에도 있었고, 지금 미국 안에도, 한국에도 있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교회 안에도 간음이 있고 동성애가 있고 혼음이 있습니다. 성적인 범죄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된 비교적 풍족한 사회에서 더욱 기성을 부립니다.
얼마 전에 뉴욕 주도 동성결혼을 합법화 하였습니다. 남자와 남자가 혼인을 하는 것이나 여자가 여자와 혼인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일 뿐 아니라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해괴한 짓입니다. 그것은 결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인 제도를 세우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남자끼리 여자끼리 만나서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수가 있겠습니까. 남자끼리 만나고 여자끼리 만나면 에이즈만 생깁니다. 미국의 에이즈 환자 12,067명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보았더니 그 중 남성이 92%인데, 그 중에 78%가 동성애자였다고 합니다. 유엔 에이즈 계획(UNAIDS)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2년에 에이즈 바이러스(HIV) 감염자 수는 세계적으로 4천여만 명인데, 그 때로부터 향후 20년간 약 7천만 명이 에이즈로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테러와 전쟁과 자연재해로 죽는 수를 다 합친 것보다 에이즈로 죽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신성한 혼인의 제도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어서 더 없이 소중하고 고귀한 수단으로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간음을 신성모독에 해당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혼인 제도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여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820 –
간음하지 말라
한종호
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8)
간음하지 말라
–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 –
일부다처제 사회에 주어진 계명
“요즘 젊은이들은 성에 대해서 너무 자유분방해서 큰일이야.”라고 걱정하며 혀를 차면 그 사람은 기성세대에 속한다고 왕따 당한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기성세대만 이런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전, 아니 수백 년 전에도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함을 염려했을 터이다. 기성세대 눈에 젊은이들은 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니 말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히브리어로 단 두 단어로 이루어진 짧은 계명으로서 설명을 달 필요도 없이 자명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진 않다. 언뜻 보기보다는 생각할 점들이 많다는 얘기다. 우선 계명이 주어졌던 시기 사회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계명이 뭘 규제하려 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 시기에 이스라엘은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이게 요즘 기준으로는 비윤리적이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여러 아내를 뒀다고 비난받았나? 그렇지 않았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은 철저한 가부장사회로서 여자는 남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지위에 있었다. 이 계명은 남자에게 주어졌다. 손뼉도 마추져야 소리 나듯이 간음도 남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명이 남자에게 주어진 것은 여자는 자유분방하게 간음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계명의 규제조차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처벌은 남녀가 똑같이 받거나 여자가 더 심하게 받았다. 요즘 이런 사고방식이 통용되는 문명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계명의 주된 목적은 혼인관계를 보호하는 데 있었으므로 그걸 깨뜨리지 않는 혼외정사는 간음죄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나 약혼녀와 관계했을 때만 간음죄에 해당됐다. 여기 해당되지 않는 혼외정사는 남자가 관계한 여자와 결혼하거나 부모에게 돈을 주면 해결됐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엔 유부녀가 남편 아닌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가졌다면 상대방이 유부남이든 약혼남이든 총각이든 모두 간음죄로 처벌받았다. 혼인을 하거나 돈을 줘도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계명은 남녀를 차별하는 불평등한 계명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그랬다는 얘기다.
아담이 동물들 중에 자기에게 맞는 배필을 찾지 못하자 하느님은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를 하나 취해서 그걸로 하와를 만드셨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봤을 때 그에게서 터져 나온 외침은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감정의 폭발이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세기 2:23).
하와를 자기의 뼈요 살이라고 부른 아담의 말에는 성적인 냄새가 노골적으로 풍긴다. 성서는 ld와 같은 아담의 감정과 탄성을 추하게 보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감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하느님은 아담의 반응에 만족하셨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둘은 ‘한 몸’이 됐다(24절). 이렇듯 부부의 성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렇다고 너무 좋아만 할 일은 아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모두 그렇듯이 ‘성’이란 선물도 잘 쓰면 축복이지만 잘못 쓰면 해(害)가 되기 때문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사건이다. 이 때문에 다윗 집안에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었느니 여기서 ‘성’은 축복 아닌 ‘저주’의 씨앗이 된 셈이다.
오늘날 성에 대한 생각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남자와 여자의 지위도 계명이 주어졌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라졌다. 간음죄의 정의도 달라졌다. 계명이 주어졌을 때의 윤리기준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거다. 이렇듯 세상이 달라졌으니 계명에 대한 이해와 적용방식도 달라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계명을 새롭게 이해하고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계명의 본래 정신은 고수해야겠지만 말이다.
이 계명을 두고 하느님이 남녀의 침실 문제까지 간섭해야 하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가정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이고 부부관계는 가정을 이루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임을 감안하면 이 계명의 중요성을 낮춰볼 수는 없다. 하느님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한 축으로 하고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십계명에 부부관계에 대한 계명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기억할 사실은, 계명의 목적이 남녀관계를 구속하고 속박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계명은 부적절한 성관계를 금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부부관계를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고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성’을 바르게 누리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간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계명의 근본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
토멕(Tomek)은 열아홉 살 먹은 고아로 친구 집에서 살면서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는데 그가 사는 아파트 맞은편에 마그다(Magda)라는 매혹적인 독신여성이 살고 있다. 토멕은 매일 밤 망원경으로 그녀를 훔쳐보는 게 일과처럼 되어 있다. 그는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그녀에게 가짜통지서를 보내서 그녀를 우체국에 오게 만들기도 하고 우유배달부가 되어 매일 그녀의 집 앞에 우유를 갖다 놓으면서 그녀를 보려고 한다.
그는 마그다가 남자친구를 수시로 바꾸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동침하는 자유분방한 여자란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토멕이 그녀를 우체국으로 불러내려고 가짜통지서를 보냈는데 그만 들통이 나고 만다. 결국 그는 전후사정을 그녀에게 고백한다. 자기가 가짜통지서를 보냈고 밤마다 그녀를 엿본다고 말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지만 그가 자기의 행동거지를 소상히 알고 있음을 확인하고 마구 화를 낸다. 그날 밤 토멕이 자기를 엿보고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남자친구를 침실로 불러들여 커튼을 열어놓은 채 보란 듯이 같이 잠자리에 드는 엽기적인 행동을 한다. 더욱이 그녀는 동침하는 남자에게 토멕이 엿보고 있음을 알려주기까지 한다. 그러자 그 남자는 밖으로 뛰어나가 토멕을 불러내서 그를 때려눕힌다.
다음날 토멕은 그녀에게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가 어이없어 하면서 뭘 원하느냐고 묻자 토멕은 데이트를 신청한다. 데이트 후에 마그다는 세상에 ‘사랑’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고서 그를 끌어안으며 “이런 게 바로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놀란 토멕은 그녀의 방을 뛰쳐나와 집으로 와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해서 병원이 입원한다.
마그다는 토멕이 보이지 않자 그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그녀는 토멕의 친구 어머니에게 묻는데 어머니는 토멕이 그녀를 엿봐왔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가 자살하려 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녀는 뜬금없이 자기 아들은 늘 어디론가 떠난다며 자긴 이제 늙었고 외롭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방으로 토멕을 찾아다니다가 우체국에서 그를 발견하지만 토멕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마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엿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성’은 ‘인격’의 문제
교회에서 ‘성’에 대한 얘기를 드러내놓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성은 공개적으로 얘기할 성격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혹 간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얘기는 하지만 대체로 성에 대해서 쉬쉬하는 분위기다. 이와 같은 관행이 옳다면 계명에 대해 더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게다. “기혼자들은 절대로 혼외관계를 갖지 마십시오. 간음죄를 저지르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면 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성에 대해 얘기할 때 인용되는 성서구절은 “‘간음하지 말라.’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라는 구절일 거다. 교회 내에서의 성 담론은 대부분 이 구절을 밑바닥에 깔고 진행된다. 이 구절 다음에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29-30절)는 구절이 이어지는데 이 둘을 연결하면 간음한 사람은 죄를 짓게 만든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뜻으로 읽힌다. 간음죄는 생식기라는 신체의 일부가 짓는 죄라는 인상을 준다는 얘기다.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일체의 욕망에서 해방된 극소수의 사람들을 빼고 모든 남자가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예수님은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하니 여자는 동성애자만 아니면 간음죄와 무관하다는 강변도 가능하다. 십계명이 주어졌을 때 그랬듯이 예수님도 계명을 남자들에게만 적용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말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사람이 있겠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랴.
예수님은, 사람은 누구나 몸 또는 마음으로 간음하며 살아가므로 간음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씀한 게 아니다. 이 말씀은 모두에게 간음죄의 굴레를 씌우려는 뜻이 아니라 간음죄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전인격이 관계되는 죄라는 뜻이다. 성문제의 자리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마음이요 전인격이란 얘기다. 성은 몸에 표현된 인격이다.
왜 사람은 간음을 할까? 사람은 본래부터 정욕으로 가득한 동물이기 때문일까? 정복욕과 지배욕 때문일까? 남의 아내가 더 예뻐 보이기 때문일까? 정욕, 정복욕, 지배욕이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이라면 왜 어떤 사람은 간음하고 어떤 사람은 안 할까? 본성을 억누를 만큼 자제력이 강하지 않은 사람만 간음죄를 저지르나?
‘외로움’이란 병
성서와 영화는 모두 ‘외로움’을 중요한 문제로 든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느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와를 창조하셨다고 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하느님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거다. 사람은 혼자 있지 말고 누군가와 같이 지내게 되어 있다.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상태라는 얘기다.
영화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토멕, 마그다, 토멕 친구의 어머니가 그들이다. 친구 어머니는 등장하는 장면은 적지만 중요한 뜻을 담은 말을 던지는데 그게 ‘외롭다’는 말이다. 그녀는 마그다에게 자긴 늘 외롭다고 말한다. 토멕을 데리고 있는 이유도 그거라고 짐작된다. 이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간음을 포함, 비정상적이고 부적절한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에는 욕정이나 정복욕, 지배욕, 질투심 못지않게 ‘외로움’이란 병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18절을 들지 않아도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다.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든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외로움은 우울증 같이 무서운 병으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과 관계 맺도록 몰고 간다. 하지만 그 관계가 늘 정상적이고 건강하지는 않다.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든지 다른 문제가 있어서든지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맺는 경우가 있다. 영화는 ‘외로움’이란 병 때문에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라고 하겠다.
밤마다 마그다의 방을 엿보는 토멕의 행위는 타인과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그는 분명 그녀를 좋아하지만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녀의 행위를 엿보는 것으로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하니 누가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는 것은 엿봐서 아는 것 밖에 없고 맺은 관계라고는 일방적으로 엿보고 혼자 좋아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밖에는 없는 여자에게 하는 사랑고백은 아무리 좋게 봐도 건강하지 않고 비정상적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 사랑이 거절당했다는 느낌이 들자 손목을 그어 자살시도까지 했다. 이 모든 결정을 그는 혼자서 내렸다. 그에게는 얘기 나눌 사람이 없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 그는 늘 혼자다. 타인과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그다는 외양적인 성격에 남자친구도 여럿이지만 그녀가 타인과 맺은 관계 역시 건강하다로 불 수는 없다. 남자는 많지만 그들과는 단지 잠자리를 같이 할 뿐이고 그 이상의 관계는 맺지 않는다. 사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가 토멕이 안 보이자 혼란에 빠지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여기저기로 토멕을 찾아다니지만 왜 그러는지는 자기도 모른다. 그녀 역시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성은 ‘사랑’이라는 존엄한 가치의 표현
성은 사람이 외로움을 극복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성은 관계맺음과 소통의 통로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하와를 만들어 ‘더불어’ 살게 하신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성’이었다. ‘성’은 사람의 신체 일부에 깃든 선물이 아니라 인격 전체에 새겨진 것으로서 전 인격과 전 영혼으로 소중히 다루고 꽃피워야 할 선물이다. 따라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생각할 때 어떤 종류의 성행위가 계명을 어기는 죄이고 어떤 성행위가 계명에 부합하는 행위인지 따지기 전에 하느님의 선물인 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상대방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 그리고 행위가 충동적인 욕구에서 비롯됐는지 순수하고 절제된 사랑에서 비롯됐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하겠다.
또한 계명은 남녀평등이라는 전제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계명이 처음 주어졌을 때는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지 않았다. 계명도 여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세상이 달라졌다. 아직 완전하게 남녀가 평등하진 않지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남녀관계는 평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계명은 남녀가 평등하게 누려야 할 인격의 존엄성과 가치라는 기본전제 위에서 오늘의 상황에 맞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남녀평등의 문제는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론적으론 대부분 당위로 받아들여진다. 몰라서 실현되지 않는 게 아니라 전통적인 관습과 남자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에 대한 향수가 끈질기게 사람들 발목을 잡고 있어서 실현이 지체되고 있다. 평등은 기득권을 누리던 쪽을 불리하고 불편하게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을 떳떳하게 만들어주는 가치이자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능케 하는 기본전제다.
마지막으로 계명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하는 현상은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성’이 상품으로 대규모로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의 상품화는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어서 해결을 위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난감할 정도다. 미국 남쪽 국경선 너머로 팔려오는 어린 여자들이 한 해에 1백만 명이 넘는단다. 미국 한 나라에서만도 이 정도인데 전 세계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매매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런 현실을 표현한 영화는 극영화, 다큐멘터리 할 것 없이 다 챙겨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도 여러 편 봤는데 볼 때마다 치 떨리고 가슴 터질 것 같아 볼 수 없을 정도다. 한국에서 동남아 여인들을 데려와 결혼했다가 버리고 심지어 죽였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부끄럽기만 하다. 이걸 과연 ‘결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결혼이 아니라 성매매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나.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간음죄는 개인들 간에 벌어지는 죄에 그치지 않는다. 성매매, 인신매매, 낙태, 미혼모,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아이들, 에이즈 문제까지 모두 성의 상품화와 뗄 수 없이 관련된 사회문제다. 덜 자란 소녀들을 ‘걸그룹’이란 가수로 만들어 놓고서 섹시한 춤을 추게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나 그걸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성의 상품화에 한 몫 거들고 있다. 이런 걸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범죄’다. 이게 범죄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모든 걸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간음죄 저지르는 사람을 성의 ‘소비자’로 둔갑시켰다. 자본주의는 이들을 공급자와 소비자로 둔갑시켜 도덕심과 윤리의식을 마비시키는 묘한 재주를 갖고 있다.
무엇이 ‘속박’이고 무엇이 ‘자유’인가?
키에슬롭스키는 혼외관계를 비난하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신비로움과 놀라움과 생명을 북돋워주는 힘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고 명상할 것을 권한다. 사랑과 결합된 성은 몰래 엿볼 수도, 조작될 수도 없으며 시니컬하게 웃어넘길 수도 없다는 거다. 진정한 사랑과 결합된 성에는 외로움으로 병든 영혼과 왜곡된 관계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할 힘이 있다.
성은 사랑과 관계되어 있고 사랑은 또 결혼과 관계된다. 성과 사랑과 결혼, 이 셋이 반드시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떼어낼 수도 없다. 무관하다고 할 수는 더더욱 없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법칙을 무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사랑과 결혼은 속박으로 여긴다. 성은 가볍고 자유롭게 누리지만 사랑과 결혼은 자유로운 성을 속박한다는 이유로 피하고 싶어 한다. 사랑과 결혼은 진정 속박일까? 그것은 인간관계를 제한하고 제약하는 족쇄인가?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상대방에 대해서 진실해지는 관계를 어디서 만나는가?”
진실보다는 거짓이 지배하고 양보와 자기희생보다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익을 얻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경우가 흔한 오늘날, 우리네 삶에서 진실과 양보와 자기희생이 밑받침된 관계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사랑과 결혼에서 그런 진실한 관계를 본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랑과 결혼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이고, 족쇄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믿는다. 거짓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에게 진실해질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래서 “마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엿보지 않습니다.”라는 토멕의 말에서 이젠 진실한 사랑을 찾겠다는 토멕의 결심을 보고 박수를 보낸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간음하지 말라 – 밀톤 한인장로교회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로마서 13:9 KRV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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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지 말라
2011. 5. 22.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17)
본문 : 마 5:27-32
제목 : 간음하지 말라.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성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심을 읽다가 보면 이중적인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로 무서운 분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랑이 넘치는 분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정말로 엄격하십니다.
살인을 해야 꼭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거나 욕을 하거나 미련하다고 멸시하는 것도 지옥 불에 들어가는 큰 죄라고 하셨습니다.
간음을 해야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도 이미 마음에 간음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실행해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타락한 성품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죄를 범하면 뽑아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손이 죄를 범하면 찍어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까지 철저하게 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산상보훈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보면 그렇게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고 결국 우리는 다 지옥에 가야하는 신세라고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렇게 하셨음에도 예수님은 너그럽게도 그런 죄를 많이 지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셨습니다.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과 함께 잡수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잡아서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죄를 지은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모든 사람이 돌로 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이 상산보훈의 교훈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율법의 원래 정신이요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 때 정말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가졌고 세상이 너무나 완악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만 바르게 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죄에 노출된 채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십자가의 복음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죄 사함을 받는 길을 마련해 주셨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몇몇 가지 선한 일을 하고 그 의를 내세워서 의인이 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시고 노력을 해도 어쩔 수 없을 때 부족하고 연약한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1.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지 말라
오늘 본문 27-28절 말씀에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의 제 칠 계명이 간음하지 말라. 입니다.
여기 간음이란 결혼한 남자나 여자가 다른 남자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남자들이 권리가 강했기 때문에 간음은 남의 아내를 도적질 하는 차원에서 생각을 했습니다.
임자가 있는 즉 남편이 있는 여자를 훔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아내 남의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이웃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넓은 의미로 확대를 하셨습니다.
결혼한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라고 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대를 하셨습니다.
또 결혼을 한 여자이든지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이든지 다 성적인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인 성행위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욕을 품는 것까지도 간음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옛날성경(개정한글)에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예쁜 여자를 보면 이상한 마음이 생길까봐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눈을 가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로 번역된 성경(개역개정)에서는 의도적인지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이상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미리 이상한 마음을 품고 즉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사람을 마음에 이미 간음한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든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든지 어쨌든지 음욕 그 자체가 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적당한 욕심들일 것입니다.
식욕이나 성욕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적당한 것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식욕이 없다면 밥을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데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지나친 식욕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사람도 있지만 식욕은 좋은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도 조금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돈에 대한 욕심이 없이 놀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돈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문제점이 많이 있지만 적당한 욕심은 좋은 것입니다.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욕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자녀를 낳아서 가정을 이루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이 지나친 욕심입니다.
특별히 성적인 욕심이 강한 것은 우리가 바르게 사는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모든 것 다 잘하고도 이 이성 관계에 잘못되어서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가 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요즘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의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성폭행 미수’라는 죄 때문에 국가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고 그의 앞날도 끝이 나 버렸습니다.
연예인들이나 정치인이나 유명한 사람들이 이런 섹스 스캔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모든 명예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런 성욕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건전한 스포츠나 오락을 통해서 그런 나쁜 생각에 바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과 몸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신앙심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 성에 건전한 마음을 가지고 순결을 지키도록 노력을 하고 그런 성적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기도하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2. 결혼의 중요성을 알라
본문 31-32절에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자가 원하면 언제나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24: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결혼을 하고서 상대방에 하자가 있으면 이혼을 해도 된다는 말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상대방의 하자를 어디까지 인정을 하는가가 서로 이견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혼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하여 여자들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아무렇게나 여자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의 중요성을 알고 한번 결혼한 여자를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여자에게 결정적인 하자가 있을 때는 이혼증서를 써주고 보내라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하자 즉 “수치 되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할 때 두 가지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법을 어기거나 성적으로 부정한 일을 저질렀을 때 이혼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는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의 주장에 가까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상대방에게 성적인 부정이 있을 때라고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혼은 타락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될 수 있는 대로 결혼의 중요성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인륜지대사라고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하는 일 중에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겉만 보고 결혼을 해서 한평생을 고생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 심중하게 생각하고 기도도 많이 해서 서로 맞는 짝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서 잘 살펴보고 결혼을 했는데 도저히 뜻이 맞지 않아서 못살겠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참고 살아야지요. 참고 사는 것도 어지간해야 참고 살지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지옥 같은 데 남의 이야기니까 참고 살라고 쉽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려고 미워하고 욕하는 죄를 날마다 짓는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못된 남편 못된 아내를 보면서 귀신은 뭐하나 저런 것 안 잡아가고 라고 하면서 만날 미워하고 욕하고 흉보고 그렇게 죄를 지으나 차라리 이혼하고 죄를 지으나 그것이 그것입니다.
죽을 때 까지 미워하고 욕하고 그래서 살인죄를 짓는 것 보다는 서로 죄짓지 않도록 갈라서는 것도 오히려 죄를 줄이는 방법도 될 것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냥 조금 참으면 살만한 사람들보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아도 참아도 노력해도 노력해도 도저히 방법이 없을 때 그로 인해 더 큰 죄를 지어야 할 때 그런 죄 속에 있지 않고 바르게 사는 방법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결혼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부부관계는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너무나 귀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관계입니다.
가정의 자녀들을 보면 가정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이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낳은 어머니는 자녀를 떠나면 안 됩니다.
자녀가 장성할 때까지는 죽어도 안 됩니다.
목숨을 걸고라도 가정을 자녀를 지키려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마음입니다.
3. 내 육신이 나를 실족하게 내버려 두지 말라.
본문 29-30절 말씀에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오른 눈이 우리를 죄 짓게 만들면 빼어 내버리라고 했습니다.
두 눈 다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 한 눈이 없어도 천국에 가는 것이 유익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죄를 짓게 만들면 그 오른 손도 찍어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두 손 다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이 없어도 천국에 가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노름꾼이 이 말씀을 들었는가봅니다.
너무 노름에 빠져서 집 팔고 논밭 팔아서 노름으로 다 날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번만 하고 그만해야지 다시는 안 해야지 마음을 먹지만 중독이 되어서 도저히 끊지 못해서 재산을 다 팔아서 노름판에 다 바친 것입니다.
다시는 안 해야지 하고 오늘 말씀대로 오른 손을 찍어버렸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왼손 한 손으로 그 짓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왼손마저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발에다가 화투를 끼고 그 짓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한번 중독이 되면 거기서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중독이 되지 않도록 미리 예방을 해야 합니다.
술이든지, 담배든지, 노름이든지, 마약이든지, 성적인 중독이든지, 중독만 되면 정말로 빠져나오기가 힘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죄에 물이 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 금하고 있는 음행한 일에 중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냥 우리 눈이 가는대로 우리 손발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면 우리도 그런 죄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잘 지켜야 합니다.
무엇을 보면서 사는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보는 것에 다라서 행동이 결정이 되고 인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음란한 영화 음란한 서적 음란한 것들은 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싸움이나 하고 나쁜 짓이나 하고 사람의 목숨을 비참하게 죽이는 책이나 영화를 멀리 해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좋은 것을 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영화를 보더라도 아름답고 선한 영화를 많이 보고
책을 읽더라도 성경이나 유익한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사람들의 모습 좋은 일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가도 참 중요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우리의 발로 가는 곳이 어디인지가 참 중요합니다.
우리의 발이 아무데나 가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합니다.
눈을 뽑아 가면서 손을 잘라 가면서 말씀대로 한번 살아보시겠습니까?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말씀대로 살 자신이 있습니까?
그러시다면 염려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서 실천하지 못하고 사시는 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립니다.
열심힌 노력을 하시고 그래도 잘 안되실 때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실수하고 넘어지고 바르게 살지 못하는 나를 아시고 미리 대신 죄 값을 치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마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율법을 바르게 해석을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더 철저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율법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 형식적으로 지키면서 마치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자신의 죄를 깨달으라고 하신 말씀이 산상보훈의 말씀의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죄를 짓지 않아 나는 바르게 살아 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죄에 대한 의식이 우리에게 더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음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을 뽑고 손을 자르는 심정으로 철저하게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안 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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