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익 가족 | 장사익형님_아들 결혼식 축가(2008.3.1) 166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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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장사익형님 국민_애국가_아리랑
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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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나이 프로필 결혼 가족 – 알짜배기 뉴스

장사익 가족관계로는 아내 고완선 씨와 자녀론느 아들이 있습니다. 장사익 아들은 모두 결혼을 하였다고 해요. 큰 아들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작은 아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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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aeristar.tistory.com

Date Published: 1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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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나이 와이프 부인 아내 고완선 결혼 자녀 가족 고향 집안

음악인 가수 장사익 프로필. 장사익 나이 학력 고향 가족관계 데뷔 소속사. 출생. 1949년 (72 ~ 73세).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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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ouwin0427.tistory.com

Date Published: 8/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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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프로필 나이 과거 부인 아내 고완선 가족 찔레꽃 노래 …

장사익 프로필 정보 – 장사익은 1949년생으로 올해 나이는 74세라고 합니다.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 출생이고 가족은 아내(부인) 고완선이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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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ucky04.tistory.com

Date Published: 3/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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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철 기자의 인물기행]소리꾼 장사익 – 동아일보

[오명철 기자의 인물기행]소리꾼 장사익 … 우리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씨(61)를 느닷없이 서울 종로구 홍지동 집으로 찾아간 것은 … 가족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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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onga.com

Date Published: 4/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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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사익(張思翼, 1949년 ~ )은 대한민국의 음악가 겸 국악 연주가이다. Picto infobox music.png. 장사익. 기본 정보. 출생, 1949년(72–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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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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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임종 앞둔 친구 1명 위해 노래…그날이 내 인생 …

매일경제 주요뉴스 … “제 가족과 영통 하실래요”직원 묻자…이재용 반응은? … Copyright c 매경닷컴 Corp. All rights Reserved. 개인정보처리방침;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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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k.co.kr

Date Published: 1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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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노래 나이 학력 공연 과거 직업 부인 – 소소랑

장사익 노래 나이 학력 공연 과거 직업 부인 가수 장사익은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출생, 1949년 (74세), 학력은 광천중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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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osorang.com

Date Published: 5/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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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장사익 나이 결혼 자녀 데뷔 불후의 명곡 – GSILVER

임동창은 장사익의 곡 ‘찔레꽃’의 편곡자이기도 합니다. 한편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장사인은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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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jeannie5388.tistory.com

Date Published: 1/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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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소리꾼’ 장사익 “굽이굽이 인생을 곰삭힌 소리죠”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소리꾼 장사익(69)의 인생사는 이미 대중에 ‘전설’처럼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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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na.co.kr

Date Published: 9/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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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나이 프로필 불후의명곡 – 양평맘

오늘은 불후의명곡 544회 출연하는 소리꾼 장사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반응형. 장사익 나이 프로필 고향 가족 학력 데뷔 결혼 자녀 직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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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oneytip2017.tistory.com

Date Published: 3/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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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형님_아들 결혼식 축가(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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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흙섞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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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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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소리꾼 나이 프로필 결혼 가족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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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소리꾼 나이 프로필 결혼 가족 콘서트

장사익

장사익 소리꾼은 최근 불후의 명곡에 출연하였습니다.

장사익 단독쇼로 불후의 명곡 방송이 진행되었는데요. 최백호, 소향 등이 출연해 장사익 가수와 무대를 꾸몄습니다.

참고로 장사익 특집쇼는 2월 7일 녹화 촬영되었어요.

목원대 실용음악과 교수진이 불후의 명곡 장사익 특집쇼에 참여했다고 하더라구요.

장사익 나이는 1949년생으로 74세입니다.

1994년 장사익 소리판 ‘하늘 가는 길’로 데뷔하였는데요. 장사익 소리꾼은 45세 나이에 데뷔하였습니다.

장사익은 작년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선생 10주기 추모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국악) 수상을 받기도 했구요. 안성기와 함께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친선대사 등으로도 활동합니다.

장사익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군입니다.

그래서 충청도 사투리를 씁니다.

장사익 소속사는 행복을 뿌리는 판입니다. 장사익 학력 정보로는 광천중학교, 선린상업고등학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입니다.

장사익 스승은 재즈음악가 김대환 선생으로 알려져 있어요. .

2021.07.06 – [정보] – 혼밥인생 최백호 나이 아내 재혼 가족

불후의 명곡 544회 장사익 단독쇼 봄날인데요. 이미자에 이어 두번째 단독쇼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연이 아니구요.

아이러니한건 2015년 장사익은 이미자와 함께 KBS 공사창립 42주년 특집 콘서트를 진행했었어요.

태평소 연주자로도 알려진 장사익 소리꾼인데요.

국악,재즈 분야의 최고의 세션들로 구성된 장사익 밴드도 함께 했어요.

장사익은 최백호와 백설희 봄날은 간다 노래를 불렀구습니다. 최백호와 장사익은 절친한 사이로 나이 한살차이라고 해요.

소향과 이장희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노래를 불렀습니다.

2021.09.17 – [정보] – 심수봉 나이 공연 남편

앙코르 무대로 님은 먼곳에를 부르기도 했어요. 장사익 노래로는 찔레꽃, 꽃구경, 여행 등이 있습니다. 장사익 노래 가사는 시를 가사로 옮긴 것이 많습니다.

국회 대중문화 미디어대상 국악상과 KBS 국악대상 금상 등을 수상한 장사익이에요. .

장사익 가족관계로는 아내 고완선 씨와 자녀론느 아들이 있습니다.

장사익 아들은 모두 결혼을 하였다고 해요. 큰 아들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작은 아들은 정동극장 단원으로 일했습니다.

손주도 벌써 고등학생이라고 하네요.

장사익 팬카페입니다. https://cafe.daum.net/jangsaik

직장을 15군데 전전하던 장사익인데요. 태평소를 독학으로 배운 장사익은 이광수 사물놀이 패에 합류하기도 했구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민속경연대회 등에 참여했습니다.

그 후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권유로 가수 데뷔를 하였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태평소 파트를 연주한 것이 장사익 소리꾼입니다.

장사익은 드라마 임꺽정 OST에 참여하기도 했구요. 평창 동계올림픽 폐회식에도 참여했습니다.

111 장사익은 성대결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방송을 보니 정말 멋있게 늙어가는 것 같네요. 장사익 근황은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을 쉬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장사익 취미로는 붓글씨 쓰기가 있어요. 전시회 작품을 팔아 기부를 하기도 합니다. .

대금, 단소 등 국악기를 다룰 줄 아는 장사익 선생이에요. 대표곡 찔레꽃은 아파트 주변 화단을 지나다가 장미꽃 사이에서 핀 것을 보고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일 장사를 비롯해 보험회사 직원, 외판원, 경리과장 등을 경험해 본 장사익 선생입니다. 카센터 일도 해봤다고 하네요.

장사익 노래는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로 평가받습니다. 환경재단이 선정한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도 뽑혔었어요. 장사익 최신 음반은 2018년 정규 9집 앨범 자화상입니다. 윤동주, 기형도, 곽재구 등 시인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장사익 나이 와이프 부인 아내 고완선 결혼 자녀 가족 고향 집안

장사익 부인 아내 배우자 와이프 사진 고완선

장사익 데뷔

1994년 《장사익소리판 하늘가는 길》로 정식 데뷔

1995년 《장사익 1집 하늘가는 길》을 발표

장사익 대중음악 전문 가수. 그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느낌으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인데, 삘이 오도록 내지르는 억센 소리(음색, 창법)가 특징이다. 대표작으로 장사익 찔레꽃이 있으며, EBS 공감 콘서트에서 부른 찔레꽃 후반 2분을 잘라낸 플짤이 디씨에 돌면서 인터넷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장기하와 맥락을 같이한다. 물론 장사익은 온라인상에서 유명해지기 이전에도 이미 충분히 평가를 받아 왔다는 점에서 다르다.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 왔으며, 2006년 국회 대중문화, 미디어 대상 국악상, 1996년 KBS 국악대상 금상, 1995년 KBS 국악대상 대통령상 등 국악 방면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1997년 SBS 드라마 임꺽정 OST, 장사익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타이틀 곡인 하여가 태평소 파트를 연주해줘서 유명해졌다.

장사익 집안 장사익 아버지 직업

장사익 부모님 사이에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장사익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한 장구잡이기도 했다고 한다. 장사익은 아버지에 대해 “아버지는 노래보다도 장구를 잘 치는, 아주 흥이 많은 분”이라며 “무학(無學)이었지만 사람의 도리를 강조하시는 분으로 살아가는데 큰 지침이 되었다”라고 말했다.장사익의 아버지는 장구재비였으며 삼촌은 날라리 태평소 였다고 하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국악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장사익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당시 본인이 직접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러서 빈소 조문객들로부터 공감을 샀다고 한다.

장사익 프로필 나이 과거 부인 아내 고완선 가족 찔레꽃 노래모음 고향 키

장사익은 오늘 방송되는 KBS2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 출연을 한다는 소식입니다. 그럼 장사익 프로필 정보와 나이 아내(부인) 고완선 고향 가족 찔레꽃 노래모음 학력 키 등 여러 정보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사익 프로필 정보 – 장사익은 1949년생으로 올해 나이는 74세라고 합니다.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 출생이고 가족은 아내(부인) 고완선이 있다고 하네요. 학력사항 광천중학교 – 선린상업고등학교 –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학사 졸업이며 1994년 장사익 소리판 ‘하늘 가는 길’로 데뷔하였습니다.

장사익은 가수 겸 국악 연주가로 가장 한국적인 느낌으로 노래를 부르기로 유명하죠. 대표노래로 ‘찔레꽃’이 있으며 EBS ‘공감 콘서트’에서 부른 ‘찔레꽃’ 후반 2분을 잘라낸 영상이 인터넷에 돌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어요. 장사익은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으며, 2006년 국회 대중문화, 미디어 대상 국악상, 1996년 KBS 국악대상 금상, KBS 대통령상 등 국악 방면에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1997년 SBS 드라마 ‘임꺽정 OST’,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 타이틀 곡인 ‘하여가’에서 태평소 파트를 연주해서 유명해졌어요. 그런 장사익은 데뷔 계기가 꽤나 드라마틱한데, 40대가 되도록 직장을 15군데 전전하다 후배이자 피아니스트인 임동창의 권유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사익의 아버지는 돼지 장수였다고 합니다. 농가마다 키우는 돼지를 축산업자에게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를 받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어린 장사익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쓰레기를 얻어다가 겨를 섞어 돼지 밥을 주는 일을 했다고 하는군요. 장사익의 아버지는 노래보다도 장구를 잘 치는, 아주 흥이 많은 분이었다고 하며 장사익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웅변을 해서 뒷산에서 목청을 틔웠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서울로 오면서 소풍 때 노래를 하니까 잘한다고 해서 그때 처음으로 ‘노래를 잘하나 보다’ 생각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졸업하고 노래 학원도 다녔다고 합니다. 장사익은 6.25 전쟁 이후 무역회사, 전자회사 영업사원, 노점상, 카센터, 독서실 운영, 가구점 총무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고 하는군요.

장사익은 1994년 후배였던 임동창이 “형, 공연 딱 한 번만 합시다” 하고 졸랐고 그해 11월 서울 서교동의 100석짜리 극장에 하루 400명씩 이틀간 800명이 몰렸다고 합니다. 간의의자에 입석까지 팔아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 같은 건물 위층에 있는 카페에 대형 모니터를 갖다 놓고 공연을 생중계했다고 하는군요. 그때 ‘생중계 기획’을 한 사람이 장사익의 팬이었고, 이듬해 장사익은 그 팬과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내 고완선이며 이후 장사익의 매니저도 맡고 있다고 합니다. 장사익은 공연 이후 행복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느끼게 되었다고 하네요. 장사익은 가수를 하기 전 사진을 보면 웃는 사진이 없었는데 가수를 시작한 뒤의 사진은 죄다 웃고 있다고 합니다. 2016년 초 성대결절이 생겼지만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가수 활동은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오명철 기자의 인물기행]소리꾼 장사익

열댓 개 직장을 전전하다 나이 마흔다섯에 가수로 데뷔해 우리 소리의 소리꾼으로 우뚝 선 장사익 씨. 평론가 임진모 씨는 “그의 노래는 아주 한국적이면서도 국악 판소리 민요 시조창의 고루함을 벗어나 있다. 미국 유럽 아프리카 어느 곳을 가더라도 먹힐 수 있는 유니버설한 ‘월드 뮤직’이다”라고 평가한다. 서영수 전문기자

‘사실상 백수’가 400만 명을 넘어선 나라. 6·25전쟁 직후 태어난 전후 ‘베이비 부머’ 1세대의 본격 은퇴가 이미 시작된 사회. 직장 없고 벌어 놓은 것 없이 가르치고 결혼시켜야 할 자식들만 혹처럼 달려 있는 이들은 어디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2주 앞으로 다가온 설날은 또 어떻게 치러야 할까.우리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씨(61)를 느닷없이 서울 종로구 홍지동 집으로 찾아간 것은 그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환한 웃음을 대하면 어느 정도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가 겪은 인생 전반기의 신산(辛酸)한 삶과, 들을 땐 슬프면서도 듣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지는 그의 노래에 얽힌 사연들을 듣고 싶어서였다. 그의 노래에는 ‘슬프면 더 슬프게 하고, 기쁘면 더 기쁘게 해서 사람들의 맺힌 한과 숨겨진 신명을 풀어주는’ 살풀이 같은 힘이 있다. 그는 2층에서 양말도 신지 않고 달려 내려와 “아이고, 지가 뭔 그런 얘기에 보탬이 될 게 있겄시유. 차나 한잔하시고 놀다 가시면 되지유”라며 방문객을 맞는다. 나는 그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선한 얼굴을 정말 좋아한다. 그에게는 토종 한국인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10분 이상 대화를 나누면 소탈, 순박, 고지식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사는 것이 즐거우십니까.“그냥 맘 편히 사니께유. 인생 뭐 별거 있겄시유. 그냥 일하고 놀다 가는 거지유.”―장례식장에서도 망자(亡者)를 위해 노래를 부르셨다던데….“엄니가 돌아가셨을 때 상주인 지가 ‘비 내리는 고모령’을 선물로 불러 드렸시유. 경제학자이자 언론인인 정운영 선생의 영결식에서는 ‘봄날은 간다’를 불렀고, 신영복 선생 출판기념회에서는 ‘동백아가씨’를 불렀시유. 작가 이청준 선생 장례식에서는 미당의 시에 곡을 붙인 ‘황혼길’을 불러 드렸지유. 원래 장례는 돈만 내고 공허한 대화만 나누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한바탕 푸지게 놀다 가는 것이지유.”늘 웃는 얼굴로 천하태평인 것 같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은 결코 간단치 않다. 새우젓으로 유명한 충남 홍성군 광천읍 농가에서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시골 생활을 견디다 못해 상경했다. 선린상고 3학년 2학기 때 처음 취직한 보험회사 사무직을 시작으로 25년 동안 무역회사 사무직, 가구점 직원, 독서실 주인, 카센터 사무장 등 열댓 개 직장을 전전했다. 그의 말처럼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인생이었다.―왜 그렇게 직장을 전전하셨습니까.“지가 원래 자발(참을성)이 없시유. 학벌도, 능력도 없구. 술 담배도 못해유. 근데 꿈은 많아유. 지 이름이 생각 사(思)에 날개 익(翼)이니 생각이 날아다니지 않겄시유.”나이 마흔세 살이 지나던 1992년 말 그는 제2의 인생에 도전해 보기로 작심한다.“이건 아니여. 열심히 산다고 했지만 최선을 다해 산 것은 아니잖여. 이제부턴 증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봐야 할 티여.”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10가지를 죽 적어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맨 마지막에 쓰인 ‘태평소’를 찍었다. 1980년대 초부터 거의 독학으로 배워둔 태평소를 한 3년간 죽기 살기로 불어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한 푼도 돈 달라는 소리 안 할 테니 시켜만 달라”고 졸라 평소 팬으로서 인연이 있던 이광수 사물놀이 패에 합류했다. 태평소는 사물놀이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악기였지만 얼마 안 가 그의 태평소는 ‘화룡점정(畵龍點睛)’ 격 악기가 됐다. 전주대사습놀이와 전국민속경연대회 등에서 대상을 휩쓸었다. 그의 진가는 특히 사물놀이 끝에 벌어지는 뒤풀이에서 드러났다,“‘봄비’ 그게 18번이구, ‘님은 먼 곳에’ ‘동백아가씨’ 등을 신명나게 불러 제꼈쥬. 아주 끝내줬슈. 무대에선 내가 주인공이 아니지만 뒤풀이에선 내가 완전 스타여.” 첫 직장이 서울 종로2가여서 근처인 낙원상가 학원에서 3년 동안 노래를 배운 것이 ‘가수 수업’의 전부였던 그다.1994년 여름 ‘괴짜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그를 찾아왔다. “형. 세상에 나가.” “아이구 내가 나이가 몇인데….” “형 걱정 마. 우리가 한번 뒤집어지게 놀아 보자고.” 그해 11월 그는 서울 신촌의 소극장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그리고 단박에 가요계를 뒤집어 놓았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대표곡 ‘찔레꽃’이 수록된 첫 음반 ‘하늘 가는 길’ 이후 ‘기침’ ‘허허바다’ ‘꿈꾸는 세상’ ‘사람이 그리워서’에 이어 지난해 6집 음반 ‘꽃구경’까지 냈다. 어느새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우리 시대의 소리꾼’으로 우뚝 섰다.그는 단순한 가수(歌手)가 아니다. 소리꾼 또는 민중 딴따라라고 해야 한다. 단순히 한국적이고 서민적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제도권 안에 있지 않으면서 제도권을 압도하는, 또 그 이상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그의 노래에는 있다. 조용필이 국민가수 또는 가왕(歌王)이라면 그는 토종가객(歌客) 또는 가혼(歌魂)이라고 불러야 옳다.―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렬하게 장사익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시나요.“노래는 정성인데, 지가 기를 쓰고 피 토하듯 정성을 다해 노래하는 것을 좋게 봐주시는 것이겠지유.”―노래는 슬프지만 얼굴은 태평합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됩니다. 즐겁고 슬픈 얘기들 엮어 노래를 부릅니다. 세상이 참 아름답고 살 만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더군요. 진면목(眞面目)은 무엇인가요.“전 늘 즐거워유. 노래를 부르기 전엔 얼굴을 찡그렸지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후 얼굴이 펴졌슈. 아무래도 웃는 사람이 복 받고 일거리도 생기는 게 아니겄시유. 지 노래가 대부분 슬픈 건 사실이지만 슬퍼서 짜증나는 게 아니라 울고 나서 후련해지는, 뭐라나 카타르시스가 된대유. 그걸 ‘생산적 슬픔’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유.”―자신의 음악적 미래를 낙관하시나요.“예. 지는 아흔까지 노래를 부르겄시유. 지금은 힘과 테크닉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그때는 저만의 ‘노인네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생각만 해도 즐겁구먼유.”―데뷔 무대를 마련하고 첫 음반에 반주를 맡았던 피아니스트 임동창 씨와는 그 후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결별한 건가요.“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지유. 지 노래의 길을 터 준 참 고마운 친굽니다. 길을 가다 보니 견해도 생각도 달라 각자의 길을 가게 됐지유. 비틀스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 사이먼과 가펑클도 그랬잖아유. 요즘은 1년에 한두 차례 정도나 연락이 됩니다. 뭐니 뭐니 해도 피아노 연주는 동창이가 최고지유.”―가족 관계는…. 자녀들은 뭘 하나요.“나이 차이가 좀 있는 사랑스럽고 무던한 마누라와, 결혼한 두 아들이 있지유. 아들 둘이 모두 대금을 하는데 큰애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작은애는 정동극장 단원으로 일하고 있시유.” 그의 집에는 부부의 자필 사인이 새겨진 백년가약서가 있다. ‘하늘 고완선과 땅 장사익은 금후(今後) 100년 동안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늘 행복함을 유지시킨다는 약서(約書)를 씁니다. 단, 100년 후에는 영원(永遠)으로 계약조건을 변경합니다’라는 내용이다. 결혼 때 장 씨가 직접 쓴 글이다. 이 집에서는 아내가 하늘이고 남편이 땅이다. 하지만 부부는 기자 앞에서 서로를 “산만하고 정신이 없다”고 공격한다. 귀엽다(?).―공연 표 구하기가 어렵다, 개런티가 비싸다, 스케줄 잡기가 힘들다는 불만도 나옵니다.“지가 그런 일에 참 서투르구먼유. 친한 사람이 많고 거절을 못해서 일정을 관리하는 집사람이 지 때문에 욕을 많이 얻어 먹지유….”―국내 가수 중에는 누구를 치나요.“생존해 기신 분 중에는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선생님이지유. 돌아가신 분 중에는 배호 선생님이 최고여. 그분이 스물아홉에 돌아가셨는데 그 나이에 부르신 노래를 지금 내가 이 나이가 돼서 불러도 그 필(feel)이 안 나오는구먼유.”―직장을 잃거나 은퇴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지 경험에 비추어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유. 만약 지가 처음부터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했으면 오늘의 지는 없을거구먼유. 절박할수록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넉넉하게 생각해야 해유. 사람은 누구나 꽃을 피울 때가 있다구 믿어유. 그게 인생이여유.”그의 고음을 따라가기 힘든 것처럼, 그의 생애를 본떠 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날은 온다.오명철 기자 [email protected]▽찔레꽃=지 인생이 제일 밑바닥일 때 만든 노래라 특히 애착이 가는구먼유. 아파트 주변 장미꽃이 활짝 폈는데 기막힌 향기가 나기에 냄새를 맡았더니 아무 냄새도 안 나. 주변의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은 꽃에서 기막힌 향기가 나는 거예유. 이 꽃이 바로 나구나 하는 심정으로 만들었쥬.▽하늘 가는 길=외국 사람들이 ‘한국의 레퀴엠’으로 치는 노래쥬.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벚꽃 터널 속으로 상여를 몰고 가면서 “야, 나도 이런 계절에 꽃상여 타고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하셨던 것을 기억하며 만들었슈.▽국밥집에서=인생에 회한을 느끼는 심정을 담았쥬. 요즘도 가끔 인사동에서 작사를 한 친구와 마주치는데 꼭 노래처럼 그곳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지유.▽아버지=허형만 선생님의 시를 보니 완전 우리 아버지가 지한테 하시던 얘기여. 그래서 만들었쥬. 우리 엄니 아버지는 그래도 지 잘되는 것 보고 가셨어유.▽동백아가씨=우리나라 대중가요 중 최고의 노래쥬. 외국 가서 동포들 앞에서 그 노래 부르면 다 끝나 버려유. 앙코르곡으로 많이 불러유.▽봄비=신중현 선생님은 천재예유. 리듬 멜로디가 지금 불러도 시대를 앞서가는 노래가 아닌가 생각해유.▽님은 먼 곳에=멜로디 전개가 죽이쥬. 김추자 씨의 가창력과 모션도 기맥히구.▽대전 부르스=기맥히쥬. 보통 2부 첫 번째 노래로 부르는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완전 나이트 분위기로 바뀌쥬. 블루스 대표곡이랄 만하쥬.

소리꾼 장사익 “임종 앞둔 친구 1명 위해 노래…그날이 내 인생 최고 공연”

소리꾼 장사익(68)의 공연장은 눈물바다가 되기 일쑤다. 절규하는 듯한 그의 탁성에 얹힌 가사를 음미하노라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형영 시인의 시에 음을 붙인 그의 대표곡 ‘꽃구경’을 떠올려보자.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늙고 병든 어머니를 산속에 버리러 가는 길이던 아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어머니의 답이 처연한 가락으로 이어진다.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그늘진 구석에서 향 뿜는 꽃의 슬픔을 노래한 ‘찔레꽃’, 돌아가신 아버지를 묻고 온 날 생전 얼큰히 취해 대문을 두드리던 아버지의 환청을 듣는 내용의 ‘아버지’ 등 그의 노래는 끈질기게 한(恨)을 외쳐댄다. “제가 유난히 많이 얻어터지고 깨지고 넘어져본 놈이라 그런 게 아닐까요? 힘든 사람을 위로하려면 같이 한바탕 울어젖혀줘야 해요. 그게 치유죠.”지난 9일 서울 홍지동 자택에서 만난 장사익은 “최근 또 한 번 ‘돌부리에 걸려’ 제대로 넘어졌다”고 말문을 열었다. “작년 12월부터 목에서 모래 섞인 소리가 났어요. 가래도 끼고 시도 때도 없이 컥컥거렸죠. 아는 병원에 가봤더니 의사가 털썩 주저앉으면서 성대에 혹이 생겼다더군요.” 청천벽력 같은 진단에 순간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노래할 수 없는 나는 참 쓸데없는 사람이더만요. 허리가 안 좋아 경비일도 택시운전도 못 할 테니까요. 노래 없는 세상에 살기보단 죽는 게 낫겠지 싶었죠.”수술을 받고 재활에 온 힘을 다한 덕에 다행히 석 달여 만에 목소리를 되찾았다. 다음달 5~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간만에 여는 콘서트 제목은 “꽃인 듯 눈물인 듯”. 김춘수 시인의 ‘서풍부(西風賦)’에 가락을 입힌 그의 노래 중 일부다. “아파보니 알겠더군요. 노래는 제 삶의 꽃이고 눈물이라는 걸요.” 공연은 마종기·허영자 시인 등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노래들로 구성된 1부와 ‘님은 먼 곳에’ ‘동백아가씨’ 등 한 시절을 풍미한 대중가요를 그만의 소리로 재해석한 곡들로 짜인 2부로 나뉜다.1994년 46세 나이에 가수로 데뷔(1집 ‘하늘 가는 길’)하기 전까지 무역회사, 전자회사, 가구점, 카센터 등 15개 직업을 전전한 그의 삶은 화려한 장미 옆 한 귀퉁이서 의연히 제때를 기다리는 찔레꽃 한 떨기와도 같았다. “국민학교 때 국회의원이 되고픈 마음에 매일 산에 올라 고래고래 소리치며 웅변 연습을 했어요. 그때 틔운 목청을 아직도 써먹고 있죠, 허허.” 생계를 위해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음악을 향한 갈망은 이어졌다. 다니던 회사가 망하고 형편이 어려워지는 와중에도 사물놀이패를 쫓아다니며 태평소를 배웠다. 카센터 시절 우연히 찾은 가수 서태지 매니저와의 인연으로 서태지 콘서트에서 반주로 태평소를 불기도 했다.”제 공연에 매번 오는 팬들은 모두 소소한 분들이에요. 잘나가는 사람도 없죠. 한 푼 두 푼 어렵게 모아 절 보러온 그분들을 위해 전 광대가 되고, 그들의 슬픔을 치유해드려요.” 그는 16년 전 암 말기로 죽어가던 일본인 팬을 위해 일본 나고야에서 단 한 명을 위한 무대를 꾸몄던 순간을 일생의 공연으로 꼽았다. 일어서기도 힘든 와중에 지팡이를 짚고 기어이 공연장에 와서 그의 노래를 듣고 간 친구는 공연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났다.음악인생을 국악에서 시작해 ‘가수’ 대신 ‘소리꾼’으로 불리는 그이지만 장사익의 음악을 특정 장르로 규정짓기란 불가능하다. 곡 하나에도 판소리부터 오페라, 트로트, 유럽의 전통가요인 칸초네, 샹송, 불교의 범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적 특성을 품는 그의 노래는 말 그대로 ‘장사익 스타일’이다. “제 노래는 정체성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어느 칸에 우겨 넣으려고 하더군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는 시기가 매년 일정치 않듯, 자연스러운 호흡 같은 게 제 노랩니다.” 그는 세계 최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자신의 ‘큰 선생’이라고 했다.장사익의 취미는 서예다. 물 흐르듯 써낸 그의 아름다운 한글은 디자이너 이상봉의 옷에 무늬로 들어갔을 정도다. 긴 인터뷰를 끝내고 아쉬운 발걸음을 떼는 기자를 위해 그 자리서 종이를 꺼내 “하늘처럼 높고 푸른 사랑”이란 글을 써서 건네줬다. 맑고 순박한 그의 음악 여정은 쭉 계속된다. 공연은 10월 5~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02)396-0514[오신혜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사익 노래 나이 학력 공연 과거 직업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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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노래 나이 학력 공연 과거 직업 부인

가수 장사익은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출생, 1949년 (74세), 학력은 광천중학교 (졸업),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 학사), 1994년 장사익 소리판 ‘하늘 가는 길’로 데뷔했습니다. (소속사 : 행복을 뿌리는 판)

장사익은 고교 졸업 후 15가지 직업을 전전하다 45세이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며 한국 최고의 소리꾼 중 하나로 ‘가장 한국적인 창법의 소리꾼’으로 불리며 강력한 티켓파워를 갖고 있는 가수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합니다.

장사익은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장사익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한 장구잡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장사익은 아버지에 대해 “아버지는 노래보다도 장구를 잘 치는, 아주 흥이 많은 분”이라며 “무학(無學)이었지만 사람의 도리를 강조하시는 분으로 살아가는데 큰 지침이 되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어린 시절 국회의원이 꿈이었던 장사익은 웅변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학교 가기 전 새벽에 뒷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며 뱃심을 길렀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발성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사익은 학교 다닐 때 노래를 하면 목청이 좋아 주변에서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요.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첫 직장을 다니며 낙원동 가요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며 군대에서도 노래를 3년 동안 배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제대 후 가수에 대해 생각했지만 집안 형편도 좋지 않고 스스로 자질도 없다고 생각해 꿈을 접었다고 합니다.

장사익은 가수로 데뷔하기 전 15개의 직장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첫 직장은 고려생명보험회사 내근직을 시작으로 무역회사, 동생이랑 강릉에서 딸기 장사, 가구 외판원, 연구소 경리과장, 청계천 전자상가, 독서실 운영, 마지막에 매제가 하던 카센터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고 합니다.

스스로 “저는 배운 것도 없고 성격도 차분하지 못해서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했거든요”라며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카센터에서 서태지와의 인연이 생기게 되는데요. 당시 차를 고치러 자주 오던 서태지의 매니저가 ‘하여가’에 들어갈 태평소의 연주자가 필요하다는 말에 장사익은 ‘내가 좀 분다’라며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장사익의 아버지는 장구재비였으며 삼촌은 날라리(태평소)였다고 하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국악을 들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1980년부터 거의 독학으로 태평소를 배웠던 장사익은 죽기 살기로 3년간 태평소에 매달렸다고 하는데요. 마지막 직장인 카센터를 그만 둔 후 이광수 사물놀이패에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해 전주대사습놀이와 전국민속경연대회 등에서 대상을 휩쓸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사물놀이패 공연 뒤풀이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며 당시 피아노를 쳤던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장사익의 노래를 듣고 함께 공연을 하자는 권유로 소극장 공연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100석 규모의 소극장은 이틀간 무려 800명이 관람하면서 큰 화제가 되었고 이를 지켜본 가요관계자들이 권유해 그동안 틈틈이 만들어놓은 ‘찔레꽃’ ‘꽃섬’ 등을 엮어 첫 음반을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1994년 46세에 신촌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며 늦은 나이에 가수로 데뷔를 하여 현재까지 총 9장의 앨범을 발표,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참여, 1995년 KBS 국악대상 대통령상, 1996년 KBS 국악대상 금상, 1997년 SBS 드라마 임꺽정 OST, 2006년 국회 대중문화 미디어 대상 국악상 등을 수상, 평창 동계올림픽 폐회식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등 현재까지 뛰어난 실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특히 장사익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당시 본인이 직접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러서 빈소 조문객들로부터 공감을 샀다고 하는데요.

이후 경제학자이자 언론인 정운영의 영결식에서 ‘봄날은 간다’, 신영복 출판기념회에서는 ‘동백아가씨’, 작가 이청준 장례식장에서는 미당의 시에 곡을 붙인 ‘황혼길’을 헌창했다고 합니다.

굉장한 티켓파워를 자랑하고 있는 가수 장사익은 데뷔 2년 만인 1996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매진시켰으며 이후로도 장사익의 공연은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어 2015년 3월 KBS 1TV에서 방송한 ‘공사창립 특집 콘서트 이미자-장사익’은 지상파 3사 인기 드라마를 제치고 시청률(20%) 동시간대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팬과 결혼한 장사익은 1994년 소극장에서 가수로 데뷔할 당시 ‘생중계 기획’을 맡은 사람이 장사익의 팬인 고완선 씨였으며 이듬해 고완선 씨와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현재까지 아내 고완선 씨는 장사익의 매니저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이어 결혼한 두 아들 모두 대금을 하고 있다고 하며 각각 국악관현악단, 정동극장 단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시골생활을 견디다 못해 상경한 장사익은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다 46세의 나이에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아 한국 최고의 소리꾼이 되었는데요.

관객들과 호흡을 중요시하며 라이브만을 고집하면서도 강한 힘이 깃든 노래 실력만으로 일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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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장사익 나이 결혼 자녀 데뷔 불후의 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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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에서는 가수 장사익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6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에서 가왕의 클라스를 보여준 장사익은 다시 한 번 화제로 떠오르게 되었는데요. 지금부터 그의 프로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후의 명곡

46세에 데뷔한 장사익은 1994년도에 데뷔하였고 1949년생이라고 합니다. ‘불후의 명곡’에서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변함없는 성량과 기량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였는데요.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한국적인 느낌이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요. 실제로 장사익은 국각을 알리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왔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남다른 데뷔 스토리도 새삼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40대의 나이에 데뷔하게 된 계기가 그의 친구인 피아니스트 임동창 씨 덕분이라고 합니다. 임동창은 장사익의 곡 ‘찔레꽃’의 편곡자이기도 합니다. 한편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장사인은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두 아들과 며느리 모두 국악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장남과 차남 모두 각각 국립극장과 정동극장의 단원으로 있으며, 두 명의 며느리 또한 가야금 연주가, 한국무용 전공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번에 불후의 명곡에 등장하면서 가수 최백호와의 절친한 우정을 보여주었는데요. 둘은 1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마치 장사익이 아버지, 최백호가 자식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끈끈한 사이라는 사실이 공개되며 훈훈함을 자아냈습니다.

지금처럼 알려진 가수가 되기 전 10개가 넘는 직업을 전전하기도 했고, 성대결절을 겪으면서 고생을 해왔던 그가 우리나라 최고의 소리꾼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마치 한편의 영화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 곧 3월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번 봄 특집으로 진행된 불후의 명곡에서 심금을 울리면서도 따뜻하게 감싸는 그의 무대를 보면서 힐링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더 건강하시고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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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소리꾼’ 장사익 “굽이굽이 인생을 곰삭힌 소리죠”

11월부터 전국투어…자화상 주제로 인생사 노래

인터뷰하는 장사익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소리꾼 장사익이 지난 9월 21일 서울 종로구의 자택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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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소리꾼 장사익(69)의 인생사는 이미 대중에 ‘전설’처럼 자리매김했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상고를 졸업한 이후 보험회사 직원을 시작으로 가구점 점원, 독서실 운영, 전자회사 영업사원, 딸기 장수, 카센터 등 대략 열댓 개의 직업을 거쳐 마흔 중반에 가수로 늦깎이 데뷔했다.

이후 지금까지 8장을 음반을 내며 그는 ‘가장 한국적인 창법의 소리꾼’으로 우뚝 섰다.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애국가를 부른 것도 그다. 그의 음악은 대중가요와 재즈, 국악, 트로트 등 특정 장르로 구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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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인생 고갯길을 돌고 돈 그의 소리에는 독특한 힘과 애수가 가득하다. 무명의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찔레꽃’은 그의 애끓는 듯한 특유의 창법을 잘 드러낸다. 그가 힘껏 노래하는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그래서 울었지/목놓아 울었지” 부분에 이르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관객들이 많다.

최근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자신을 “촌놈”이라고 불렀다. “그 촌놈의 정서가 날 지탱하는 정서”라는 그는 인터뷰 내내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따뜻한 차와 굵은 포도알을 권했다. 꾸밈없이 널찍한 자택 2층 거실 통유리로는 북한산과 인왕산이 그림같이 펼쳐졌다.

‘찔레꽃’의 주인공 장사익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소리꾼 장사익이 지난 9월 21일 서울 종로구의 자택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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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년 빙 돌았지만…노래는 내 운명”

충남 홍성군 시골 마을 출신 장사익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안 해 본 일 없이 떠돌다가 45세 무렵 소리 길을 붙들게 됐다. 장사익은 “25년간 빙 돌아왔지만 결코 헛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바로 무친 얼거리도 맛있지만, 푹 익힌 김치 맛은 또 다르잖아요. 요즘 가수들은 어릴 때 데뷔를 하고서 그 뒤에 인생을 배우지만, 저는 인생을 배운 뒤 가수가 됐어요. 누가 더 할 이야기가 많겠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슬프고 기쁘고 달고 짠 이야기를 노래하는 거예요. 굽이굽이 돌아서 여기까지 왔지만 인생을 곰 삭힌 소리, 된장 같은 소리를 내라는 운명이었던 것 같네요. 허허.”

되돌아보면 먹고 살기 힘든 형편 탓에 가수의 길을 엄두 내지 못했을 뿐 노래를 향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학창 시절 웅변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5년간 산에 올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뱃심을 길렀고, 고등학교 졸업 후 첫 직장에 들어가서도 퇴근 후에는 낙원동 가요 학원에 다녔다. 그 힘으로 군대 생활도 31사단 문선대에서 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는 평탄치 않은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아마추어 국악 단체에 가입해 단소, 피리, 태평소 등을 익혔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웅변부터 군대 생활, 국악기 취미까지 노래라는 집을 짓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며 말했다.

“만일 낙원상가 근처에서 노래를 배우던 시절 가수가 됐으면 지금처럼 되지 못했을 거예요. 노래를 부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공력을 켜켜이 쌓을 수 있었죠.”

가수로 데뷔한 계기도 극적이다. 틈틈이 국악기를 익힌 장사익은 농악대와 사물놀이패 등을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불었는데, 정작 사람들은 그가 뒤풀이 때 뽑아내던 구성진 소리에 넋을 놓았다.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긴 그는 ‘딱 한 번’이라는 생각으로 1994년 11월 신촌의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당시 100석의 공연장을 이틀 동안 800명이 찾았다. 이듬해엔 ‘찔레꽃’이 담긴 데뷔 앨범 ‘하늘 가는 길’을 냈다.

◇ 관객 폐부 찌르는 탁성…성대 수술 위기 겪기도

장사익의 노래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대중가요, 월드뮤직, 재즈, 국악 등이 묘하게 뒤섞였다. 한국적 서정을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다. 토해내듯 부르는 그의 소리에는 박자도 따로 없다.

그는 “초반엔 전문가들이 ‘당신 장르가 뭐냐’면서 규정을 짓고 싶어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면서 “젓가락을 치면서, 울면서, 자연스럽게 부르는 노래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찔레꽃’도 그렇게 탄생한 곡 중에 하나다. 그는 우연히 집 앞 화단을 지나가다가 화려한 장미꽃 뒤에 초라하게 핀, 그러나 은은한 향기를 뿜는 찔레꽃을 보고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찔레꽃이 꼭 자신처럼 느껴졌다.

“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뒤에 숨어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렇게 눈물을 쏟아낸 뒤 그냥 가사가, 노래가 툭툭 튀어나왔죠. 마치 무당들이 접신하는 것 마냥요. 그 노래가 지금의 절 만들었죠.”

그의 노래는 그래서 힘든 사람과 함께 한바탕 울어주는 노래고, 기쁜 사람과 함께 덩실덩실 춤추는 노래다.

그는 주로 시에 노래를 얹는 방식을 택해왔다. 자신을 “시 도둑놈”이라 말하기도 했다.

“시가 인생사와 세상살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니까요. 저는 거기에 곡조를 붙이고 감정을 담을 뿐이죠. 제가 그렇게 멋진 글을 지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되니까 시인들의 시를 훔치고 있습니다.(웃음)”

그의 시 같고, 동화 같은 인생은 최근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16년 1월 성대에 혹이 발견돼 영영 노래를 못 부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결과를 믿고 일주일 만에 수술을 결정했고, 음성 훈련과 재활 치료에 매달린 결과 복귀에 성공했다.

그는 “노래하는 제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밝게 웃는 장사익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소리꾼 장사익이 지난 9월 21일 서울 종로구의 자택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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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종반전 향해”…11월부터 ‘자화상7’ 공연

그는 오는 11월부터 ‘자화상7’ 공연으로 전국 투어를 한다. ‘자화상’은 윤동주 시에서, ‘7’은 칠 학년(70대)을 맞은 그의 나이에서 따왔다.

“우리의 인생과 비슷한 야구 경기가 9회전을 치르잖아요. 요즘 수명이 80~90세라고들 하니까, 제 나이도 어느덧 인생이란 경기의 종반전을 향하고 있는 셈이죠. 기력도 감각도 느슨해진 지금 힘을 빼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노래를 하려 합니다.”

그는 일흔 이후에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보살피고 싶다고 했다.

“이번 공연들을 준비하면서 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쓰고 그린 자화상을 봤어요. 다들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더라고요.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만 봐도 그래요. 우물을 홀로 들여다보던 시인은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라고 말하거든요. 물론 시를 해석하는 방향이 다 다르겠지만 전 이 시에서 제가 보이더라고요. 힘들고 가엽고 부끄러운 제 인생이지만 남은 시간을 멋지게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어쩐지 미워졌던 우물 속 사나이’를 무대 위에 올린다. 1집 ‘하늘 가는 길’ 발표 이후 그가 걸었던 노래 인생사를 선보인다.

프로그램은 주로 이번 가을 발매 예정인 9집 음반 수록곡들로 구성된다. 동명의 타이틀곡 윤동주의 ‘자화상’과 허영자 ‘감’, 기형도 ‘엄마 걱정’, 곽재구 ‘꽃길’ 등 신곡을 비롯해 그만의 소리로 엮어낸 흘러간 가요들도 함께 올려진다.

그는 인생도, 공연도 결국 거울 같다고 말했다.

“내가 100으로 노래하면 관객도 100으로 들어주고, 1로 노래하면 1로 듣죠. 한 사람이든, 3천명이든 내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부르려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후련해질 때까지 울고 웃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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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나이 프로필 불후의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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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나이 프로필 불후의명곡

안녕하세요. 오늘은 불후의명곡 544회 출연하는 소리꾼 장사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장사익은 충남 광천의 시골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어린시절 상여 소리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란 영향 탓일까 그의 노래에는 유독 <죽음>에 관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가 소리꾼으로 이름을 드높이던 시절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빈소에서 모친이 막 시집와서 자주 부른 노래 <비내리는 고모령>을 불렀고 경제학자이자 언론인 정운영 영결식에서 <봄날은 간다>를 열창했습니다.

작가 이청준 장례식장에서는 시에 곡을 붙인 <황혼길>을 헌창하는 등 애환이 절절한 소리꾼의 목소리 탓일까 유독 그러한 점이 눈에 띄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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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나이 프로필 고향 가족 학력 데뷔 결혼 자녀 직업

장사익 나이는 1949년 생으로 올해 72세 입니다. 고향은 충남 홍성군 광천의 시골마을 입니다. 장사익 데뷔 1994년 소리판 1집 <하늘 가는 길>이며 소속사는 행복을 뿌리는 판 입니다.

장상익 학력 광천중학교 졸업,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학사 졸업 했습니다.

1970년 곡을 발표한 사회 초년생 장사익

소리꾼 장사익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데뷔는 그의 나이 45살 무렵 1집 <하늘소리>로 알고 있지만 그보다 앞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다니면서 동시에 낙원동에서 노래를 배웠습니다.

당시 그는 장나신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는데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1970년 당시 여러 가수들의 곡이 담긴 컴필레이션 LP 앨범 B면에 <대답이 없네>를 녹음했다고 합니다.

45살 나이 늦깍이 데뷔한 소리꾼

장사익은 고향 광천 뒷산에서 5년간 소리 질러 목청을 튀우고 노래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채 취직을 하고서도 서울 종로에 있는 작곡가 사무실을 드나들며 꾸준히 음악공부를 했습니다.

작곡가 한동훈 선생에게 가요의 가르침과 당시 유행하던 샹송 등을 3년간 배우기도 했습니다. 군 입대 당시에도 문화선진대 오디션에 합격해 제대할 때까지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이후 생계를 위해 직장생활에 전념하게 됩니다.

장사익 직업 15개를 바꾸다

사실 직장생활을 하게된 주 된 이유는 데뷔를 하려면 몇 천만원이 들고 PR도 해야하고 상납하는 돈도 필요해 결국 고려생명보험에 입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를 제대하자 회사고 동해생명이라는 회사로 인수 합병돼 그만두게 된겁니다.

장사익은 이후 갈데가 없어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더니 이듬해 1차 오일쇼크가 오면서 1년만에 잘렸고 여우목도리에 꽂는 핀을 만드는 회사에 갔지만 잘렸습니다. 외판원, 연구소 경리과장, 청계천 전자상가, 독서실 등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동호회와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단소, 피리, 대금을 배우는 열정만큼은 남아있었습니다.

장사익은 결국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태평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합류해 태평소를 불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에서 흥이 오르면 곧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본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무대에 서보라고 권했고 1994년 11월 홍대 근처 10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장사익 공연이 열렸습니다.

장사익 비로소 꿈을 이루다

장사익의 공연은 이틀동안 열렸고 이 기간동안 800명이 몰리고 매스컴에서도 소개가 되면서 화제성을 갖추게 됩니다.

대중가요 전성기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신승훈 같은 20년 후배들이 가요계 정상을 주름잡던 시기에 등장한 장사익은 트로트풍 대중가요, 판소리, 재즈 등이 혼합돼 있는 독특항 장사익 창법을 만들어 자신만의 음악을 시도합니다.

노래를 하면서도 태평소를 놓치 않더니 한대 태평소 연주자로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라이브 무대에서 태평소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카센터 일을 할 때 서태지 매니저가 차 고치러 왔다가 그의 태평소 실력에 공연에 올랐다고 합니다.

사실 소리꾼이라는 호칭은 국악 쪽에 남아있지만 사람들은 장사익에게 <소리꾼>이라는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1993년 전주대사습 공주농악, 금산농악에서 장원, 한국방송 국악대제전 뜬쇠사물놀이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국악인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때는 태평소를 불었기에 그러했지만 어느덧 국악 공연 이후 뒷풀이를 하면서 반주삼아 신나게 소리판이 벌어지면 어느덧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고 합니다.

찔레꽃으로 국악 대상을 받으며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를 낸다고 평가받는 장사익은 어느덧 95년에 발매한 <하늘 가는 길> 이후 기침, 허허바다, 꿈꾸는세상, 사람이 그리워서, 꽃구경, 역, 꽃인듯 눈물인듯 등 2년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타이틀을 바꿔 공연을 하는 위치에 오릅니다.

이미 단단한 마니아 층을 형성한 장사익은 한 때 가왕 조용필 부럽지 않다는 말을 할만큼 강력한 티켓파워를 갖고 있을만큼 단단한 입지를 굳혀나갔습니다.

장사익 성대 결절

장사익은 2015년 말부터 조금씩 성대에 무리가 생겨 2016년 초에 처음으로 성대결절이 생겼다고 합니다. 가수에게 목소리가 생명인데 겁부터 났다고 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됐고 꾸준히 관리해 현재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장사익 가족 집안 자녀 직업

장사익 아버지는 돼지 장수 였습니다. 농가마다 키우는 돼지를 축산업자에게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를 받는 일을 했습니다. 어린 장사익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쓰레기를 얻어다 겨를 섞어 돼지 밥을 주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부모님 모두 무학인데 아버지는 성냥개비로 즉석 주판을 만들어 셈을 할만큼 상술이 뛰어났고 어머니를 떠올리면 ‘먹으라’는 말만 생각난다고 합니다. 볼 때마다 밥 먹어라해서인데요.

장사익이 서울로 유학길을 떠나고 어느날 어머니가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합니다. 기억나는 대목은 ‘볍모가지가 나풀나풀한데 건강 조심허구 맛난 거 사먹어라’며 용돈을 함께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내는 장사익이 서울 소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방송 생준계 기획을 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장사익을 팬이 었고 그 공연이 인연이 되어 장사익을 매니저를 맡으며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자식을 아들이 둘 있는데 큰 아들과 작은 아들 모두 대금을 연주 합니다. 국립극장과 정동극장 단원으로 있으며 큰 며느리는 가야금을 연주하며 안산시립국악단에서 활동했습니다. 둘째 며느리 역시 한국무용 전공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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