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화장품 | 조선 시대 여인들은 어떤 화장품을 사용했을까? / Ytn 사이언스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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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못지않게 다양했던 조선 시대의 화장품!
쌀, 고치, 송화가루 등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연출했던 조선의 여인들.
가꾸되 본래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내면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동일시 한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화장대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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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대는 무엇으로 꾸몄을까? | 월간문화재사랑 상세 – 문화재청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화장품 용기는 대부분 도자기였던 듯하다. 현존하는 유물 중 신라의 화장품 용기로는 향유와 머릿기름을 넣을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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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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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인들의 화장품,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 패션

조선 시대에는 곱고 하얀 피부를 위해 원시 비누라 할 수 있는 ‘조두(澡豆)’를 사용했다. 조두는 곱게 빻은 팥과 녹두를 채로 친 것으로, 세안할 때 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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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fashion.chosun.com

Date Published: 9/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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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의 역사와 미의식 – 우리역사넷

우리역사넷 · 1. 화장이란 화장품을 바르거나 문질러 얼굴을 곱게 꾸미는 것을 말한다. · 2.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과도한 치장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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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8/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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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옹주가 쓰던 화장품 재현, 상품화한다 – 아틀라스뉴스

270년전 조선시대 옹주는 어떤 화장품을 썼을까.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는 영조의 서녀이자 사도세자의 친누나인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1752)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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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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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의 직업 (하)] 화장품 파는 매분구, 남의 재물 받아 …

화장품판매원 `매분구`조선시대 화장품은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왕실뿐 아니라 민간 사대부 여성까지도 화장에 관심이 대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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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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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조선 시대 화장품

  • Author: YTN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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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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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화재사랑 상세 – 문화재청

우리나라 화장의 기원

얇은 눈썹에 수줍은 눈빛, 붉고 매혹적인 입술, 하얀 피부를 지닌 살아있는 듯한 미인. 조선 미인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 등장하는 여인이다. 은은한 연미색 저고리와 풍성한 옥색 치마를 입고 노리개를 살짝 쥐고 있는 자태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과하진 않지만 맑고 단아한 생김새를 잘 드러내는 여인의 화장법은 그녀의 매력을 한층 배가시킨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타고난 아름다움을 중요시 여겨 < 미인도 >의 여인처럼 백옥 같은 피부에 얼굴이 윤기 나는 화장법을 선호했다. 삼국시대부터 현재의 케이뷰티(K-beauty)까지 한국의 화장 스타일은 줄곧 엷은 색조의 은은한 화장이었다. 문화 경제적으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과 같이 얼굴을 밝히는 조명이 없었으므로 하얀 피부는 그 자체로 신비로워 보였을 것이다. 또한 백옥 같은 피부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고귀한 신분임을 드러내 하얀 피부에 대한 선망은 전 시대를 걸쳐 계속되었다.

치장의 역사, 화장법 변천사(삼국~조선시대)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쫓는다. 미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 화장기술과 화장품의 종류를 밝힌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으나 몇몇 문헌을 통해 단정한 용모를 지향한 선조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중국 양나라에 파견된 사신이 그려진 < 양직공도(梁職貢圖) > 속 백제인은 흰 피부에 정돈된 의복을 갖췄다. 쇼토쿠(正德)시대에 출판된 일본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1715)에는 일본인이 백제로부터 화장기술과 화장품 제조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을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어, 백제의 화장기술은 그 당시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공사(公事)에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 금과 은, 주옥으로 치장했다.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처럼 깨끗한 옷 입기를 좋아했다는 고구려인에게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의 기풍이 느껴진다. 신라에는 유난히 미(美)에 관한 묘사가 많은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뭇 사람들이 놀랄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고, 그를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신라인들이 지혜, 용기와 더불어 미모를 골고루 갖춘 자를 지도자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얼굴을 하얗게 만드는 백분(白粉)의 사용과 제조기술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고 불교의 영향으로 향수와 향료가 다수 만들어졌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의 화장문화를 전승하고 이를 발전시켰다. 중국 송나라의 사신으로 1123년 고려에 들어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 귀부인은 향유 바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분은 바르되 연지를 즐겨 바르지 않았다. 눈썹은 넓게 그렸다”라고 하여 한국 고유의 엷고 우아한 화장이 고려시대에도 거의 변함없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도덕관념에 따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신체를 청결하게 가꾸고 단정한 용모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사치풍조를 금지해 과도한 화장이나 치장은 경계의 대상이 됐다. 조선시대의 화장법은 크게 기초화장과 색조화장으로 나눠지는데 먼저 깨끗이 세안을 해 피부를 청결하게 만들었다.

기초화장 단계에서는 지금의 로션과 같은 역할을 하는 미안수(美顔水), 크림에 해당하는 면약(面藥), 화장유 등을 발라 피부를 곱고 촉촉하게 정리했다.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희고 옥 같은 피부를 선호해 피부결을 정돈하는 기본단계에 많은 공을 들였다. 이를 위해 꿀 찌꺼기인 밀랍(蜜蠟)을 지금의 팩처럼 펴발랐다가 일정 시간 후에 떼어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피부를 매끈하게 정리하면 비로소 얼굴에 분을 바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미분(米粉)과 연분(鉛粉)을 사용했는데, 미분은 글자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쌀과 서속(黍粟) 가루를 배합한 것이다. 다만 곡식을 원료로 해서 비린내가 날 뿐 아니라 접착력도 떨어져 물이나 기름에 개어 사용해야만 했다. 진수아미( 首蛾眉)는 여자의 용모가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로 조선에서는 정갈한 눈썹 모양을 만들기 위해 눈썹 털을 뽑아 다듬고 미묵으로 선을 그렸다.

눈썹을 그리는 안료인 미묵은 관솔 먹, 달개비꽃잎, 목화꽃을 태운 재 등을 기름에 개어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볼과 입술 및 손톱이 붉은 것을 좋은 미인상으로 간주했기에 일찍부터 연지( 脂)를 바르는 풍습이 있었다. 홍화(紅花)에서 추출한 가루를 환약 형태로 만들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살구씨, 복숭아씨, 유채꽃을 압착해 만든 기름에 개어 사용했다. 연지를 솔로 그리거나 둥근 연지도장을 찍으면 비로소 화장이 마무리됐다.

옛 선인들의 화장품 용기와 화장품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들은 화장품을 어떤 용기에 담아 썼을까?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화장품 용기는 대부분 도자기였던 듯하다. 현존하는 유물 중 신라의 화장품 용기로는 향유와 머릿기름을 넣을 수 있는 작은 도자기 유병과 분이나 연지 등을 담아 썼을 것으로 보이는 뚜껑 달린 합 등이 있다. 고려시대 화장품 용기 중에는 향유 및 머릿기름을 담아두었던 청자 기름병이 가장 많다.

우리나라는 줄곧 머리 치장에 주안을 두었기 때문에 머릿기름을 담는 유병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아한 비색(翡色)이 돋보이는 분합과 분접시 등도 많이 전한다. 우수한 청자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무늬에 조형미가 우수한 청자 화장품 용기가 다수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은기, 백자, 목기 등에 화장품을 담았다. 18세기 초중반 왕실 가족 무덤 일부에서는 화장품이 담겨 있는 소형 화장품 용기가 발견됐다. 예부터 부장품은 피장자의 위격과 직결됐다. 왕실에서는 가족들의 무덤에 당대 최고급 공예품인 화려한 화장품 용기들을 부장해 위상을 세우고자 했다. 화장용 자기는 백자 명기와 크기가 비슷해 껴묻거리로 오인되기도 했으나 화장품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부장자가 생전에 사용한 생활기로 보인다.

특히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이자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홍씨(元嬪洪氏, 1766~1779) 인명원(仁明園)에서는 당시 최고 권세가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화려한 은제 합과 항아리, 수입 청화백자가 출토됐다. 2015년 남양주에서 발견된 사도세자의 동복누이 화협옹주(和柔翁主, 1733~1752) 무덤에는 12건의 화장품 용기가 묻혀 있었다.

미안수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청화백자 모란 넝쿨무늬 항아리’를 포함해 5개의 작은 합에는 다양한 면약으로 보이는 꿀 찌꺼기가 담겨 있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화려한 등나무무늬의 자기에는 백분이, 청나라에서 제작된 ‘분채 풀꽃무늬 잔’에는 연지와 연지도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아마도 얼굴을 곱게 꾸미는 ‘단장’이라는 행위의 성격상, 왕실의 화장품을 담는 용기에는 화려하고 정교하기로 이름 높았던 수입 자기가 선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는 케이뷰티는 화장품 제작 수준뿐만 아니라 화장 기술, 감각적인 화장품 용기까지 하이테크(high-tech) 기술의 집약체다. 본래 타고난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운 피부 표현을 중요시하는 한국의 화장 문화는 전세계 미의 기준을 다시 세우고 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했던 옛 선인들의 마음이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는 케이뷰티의 원류가 된 것은 아닐까.

글. 사진 곽희원(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선시대 여인들의 화장품,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 KBS2 드라마 ‘황진이’ / 야후 이미지

예로부터 희고 윤택한 피부를 으뜸으로 여겨온 우리 민족은 남, 여 모두 백옥 피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고조선 시대에는 피부에 돼지기름을 발라 동상 예방 및 햇볕에 피부가 타는 것을 막았으며, 발해 구성 종족이었던 말갈인은 피부를 희게 만들기 위해 오줌으로 세수했다. 하지만 과거의 화장품의 종류나 화장법에 대한 자료는 조선 시대의 것이 가장 많으며, 조선 후기에 가장 활발하게 나타난다. 우리 조상들은 어떤 재료로 화장품을 만들고, 어떻게 사용했을까? 옛 사람들이 이용한 화장품과 화장 도구를 알아보자.

눈썹(아이브로우)

▲ 숯/ 야후 이미지

조선시대에는 ‘가늘고 수나비 앉은 듯한 눈썹’이 미인의 조건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가는 반달 모양의 진하고 뚜렷한 눈썹이 유행했으며, 굴참나무나 너도밤나무와 같이 단단한 나무의 숯이나 버드나무 재를 기름에 갠 ‘미묵(眉墨)’을 이용해 눈썹을 그렸다.

세안제(클렌징)

▲ 팥 / 야후 이미지

조선 시대에는 곱고 하얀 피부를 위해 원시 비누라 할 수 있는 ‘조두(澡豆)’를 사용했다. 조두는 곱게 빻은 팥과 녹두를 채로 친 것으로, 세안할 때 피부에 문질러 주면 묵은 각질과 때를 벗겨주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현재에도 팥과 녹두를 넣은 각질제거제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

미안수(스킨)

▲ 달걀 / 야후 이미지

미안수(美顔水)는 오늘날의 스킨로션과 같은 것으로, 단지에 달걀을 3개 정도 넣은 후 표면이 잠기도록 술을 붓고 한지로 뚜껑을 밀봉해 발효시켜 만들었다. 미안수는 주로 화장 전에 사용했는데, 달걀껍데기에는 미네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바르면 피부를 촉촉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이 외에도 오이, 수박, 수세미 등 수분이 많은 과일이나 채소에 향이 좋은 꽃을 첨가해 스킨을 제조하기도 했다.

분백분(파우더)

분백분은 얼굴색을 보정하기 위해 바른 것으로 오늘날의 파우더와 비슷하다.

분백분은 쌀가루나 보리 등 곡식을 빻아 채에 곱게 걸러 만든 백분과 백분에 백합의 수술 가루나 황토, 적토 등의 고령토를 섞어 색을 낸 색분이 있다. 분백분은 물이나 꿀 등에 개어 사용했으며, 양반이나 왕족들은 진주를 빻은 가루를 사용하기도 했다.

분백분은 접착력이 거의 없어 납이나 식초를 개어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성이 강한 납의 사용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는데, 납독이 오르면 땀구멍이 커지고 살갗이 푸르뎅뎅해지며 심하면 살이 썩고 미치광이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구한말 명성황후의 얼굴이 창백한 이유도 납 성분이 함유된 진주분을 애용한 탓이라는 소문이 회자하기도 했다.

연지(블러셔&립스틱)

연지는 오늘날의 블러셔나 립스틱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붉은색으로 얼굴에 생기를 더하는 역할을 했다.

홍화 꽃잎을 채취해 만든 연지는 꽃잎을 찌어 말린 후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거나, 꽃잎을 말려서 태웠다가 물에 재워 베 수건으로 짠 후 그 즙을 걸러내어 굳힌 것을 사용했다.

즙을 거르는 과정을 두 번 거치면 두번홍, 세 번 거치면 세번홍이라 부르는 등 그 횟수가 많을수록 연지의 품질은 좋아졌지만, 값 또한 비싸 일반인들은 혼례 때에나 사용할 수 있었다.

머리기름(왁스)

▲ 동백꽃 / 야후 이미지

옛날 시대 머리를 길게 땋거나 올리는 데 사용했던 동백기름은 동백나무 씨에서 추출한 기름이다. 접착성이 강하고 머릿결을 윤택하고 반드르르하게 만들어주는 동백기름은 머리치장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화장품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동백꽃이 남쪽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실제로는 산다화 열매를 빻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외에 벌에서 나오는 밀과 기름을 섞어 만든 밀기름도 많이 사용했다.

향수

▲ 향나무과 나무 / 야후 이미지

옛날 사람들은 향기로운 냄새가 몸에서 날 수 있도록 향나무 또는 사향을 향낭에 넣어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중 묘하고 은은한 향기가 나는 백단향은 궁중에서 사용할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화장도구

▲ 과거 화장품 용기 / 야후 이미지

과거에도 분을 담아두는 분용기나 분접시, 연지첩 등 다양한 화장 도구가 존재했다.

지금의 화장대에 해당하는 경대는 접거나 펼 수 있는 거울이 달린 화장도구를 넣을 수 있는 상자로, 좌식문화에 맞춰 대부분 좌식형으로 만들어졌다. 이 외에 분은 도자기로 만든 분첩 용기에 채워 사용하고, 화장품을 개는데 쓰는 물은 ‘분수’라는 그릇에 담아 썼으며, 분이나 연지 가루 등을 덜어 물에 개거나 재료들을 섞는데 사용하는 ‘분접시’도 있었다. 분이나 연지분은 실을 켤 수 없는 허드레 고치를 삶아서 만든 솜인 풀솜을 동그랗게 뭉친 ‘연지첩’이나 ‘분첩’에 묻혀 사용했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어떻게 꾸몄나? 화장품 직접 만들었다

[TV 속 핸드메이드] EBS 특집 ‘화협옹주의 마지막 단장’

[핸드메이커 전은지 기자] 요즘은 마스크를 쓰느라 화장을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장품 판매량도 급격히 줄었다. 실제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애경산업의 올해 1분기 연결기준 매출액은 1604억원으로 작년에 비해 10.3% 감소했으며, 그중 화장품 판매량이 10%로 급격히 줄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K-뷰티’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 시즌마다 새로운 화장품을 개발해 출시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 옛날 조선시대는 뭐든 만들어서 쓰던 수공예의 전성기인데, 화장품은 어땠을까? 지난 2016년, 남양주 화협옹주의 묘에서 청화백자합 10점, 분채(粉彩) 1점, 목제합 3점, 청동거울과 거울집, 목제 빗 등이 발견됐다.

비교적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견돼 조선 시대 왕실 여인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귀중한 학술자료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EBS 특집 ‘화협옹주의 마지막 단장’에서는 화협옹주가 남긴 유물을 통해 조선시대 여인들은 어떤 화장품으로 어떻게 화장을 했는지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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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 부장된 화장품 용기와 조선의 화장 문화

지금도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흉터나 점과 같은 얼굴의 집티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화장품을 용기에 담아 보관한다. 요즘은 갖고 다니기 편하게 내구성이 좋고 가벼운 플라스틱을 활용한 팩트나 튜브, 통 형태가 일반적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도자기나 금속, 나무, 대나무, 돌로 제작된 용기가 주로 활용되었다. 화장용기 안에는 피부를 정리하는 용액이나 머리를 정돈할 때 사용하는 기름, 얼굴에 바르는 분, 입술과 볼터치 등에 사용하는 연지 등 다양한 종류의 화장품이 용기에 담겼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일에는 물론 평소에도 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화장용기는 생활의 필수 물품이었다. 이런 이유로 화장용기는 죽은 망자를 생각하며 여러 의미를 담아 무덤에 매장하는 부장품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공개된 화장용기가 부장된 대표적인 무덤을 살펴보면 효종의 딸인 숙신공주(1635-1637), 영조의 딸 화유옹주(1740-1777), 화협옹주(1733-1752), 사도세자의 아들 의소세손(1750-1752)과 딸 청연공주(1754-1821), 정조의 후궁 원빈홍씨(1766-1779),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1782-1786)의 묘 등에서 화장용기가 발굴되었다. 이 중 숙신공주와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화장용기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편이다.

함께 볼모로 가다 죽은 딸에 대한 마음을 담은 부장품: 숙신공주 화장호

숙신공주묘에서 출토된 <은제화장호>(17세기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은으로 제작된 화장용기이다. 항아리 표면을 무늬의 형태로 파낸 후 파낸 홈에 납을 넣어 채우는 납입사(鑞入絲)기법으로 옛 이야기를 담은 문양인 고사인물문을 장식했다. 납입사는 현재 무형문화재 입사장(入絲匠), 조각장(雕刻匠) 등 금속을 다루는 분야에서 전승되고 있는 전통적인 문양 표현 기술인데, 유물이 많지 않아 금속공예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유물로 꼽히고 있다.

화장은 어느 특정 나라의 전유물이 아니라 장식설, 이성 유인설, 신체 보호설 등 보편적인 요인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각 민족의 미의식은 서로 다른 독창적인 화장 문화를 만들며, 꾸준히 변화 발전하고 있다. 한·중·일 삼국의 화장 문화를 비교하면서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미의식을 찾아보자.

1. 한·중·일 화장의 시작 및 유래

우리나라의 화장은 피부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읍루인들은 돼지기름을 두텁게 발라 피부를 보호하였으며, 단군신화에서 볼 수 있는 백색 피부를 선호하는 것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후 백제, 신라에서 분을 발랐다는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는 연지 또는 나뭇가지를 그려 화장한 모습이 확인되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모든 면에서 당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당의 화려한 화장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고려에 이르면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않고 눈썹을 넓게 그리기도 했지만, 너울로 얼굴 전체를 가리는 풍속이 있었으므로 진한 화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조선에 이르면 화장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진다. 부덕이 강조되고 유학적 도덕관념이 팽배한 사회에서 진한 화장이나 과도한 치장은 경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피부를 선호했던 조선 여인들이었기에 미용에 관심이 많았으며, 궁궐 여인이나 기생 등 특수한 여성들은 분을 발랐으며, 일반 부녀자들도 혼례와 같은 특별한 의례 때에는 분을 사용하였다. 이후 개항기를 거쳐 서양 문물이 도입되면서 러시아·중국·일본 등의 분이 유입되면서 1920년 우리나라에서도 분을 생산하였지만 여전히 엷은 분화장과 함께 피부에 중점을 두는 자연스러운 화장을 추구했다.

반면에 중국에서의 화장은 오랑캐와의 구분을 위한 문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중국인들은 선진시대부터 눈썹과 얼굴 전체, 입술 등에서 화장의 흔적이 보인다.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특이한 화장을 했던 시대는 단연 수·당 시대이다. 꽃, 보조개 등의 장식은 물론 눈썹 색도 비취색과 검은색을 사용하고 눈썹의 굵기를 다양하게 그렸다. 심지어 당대 여인들은 화장하는 순서를 정해놓을 정도로 화장의 종류가 많았다. 이후 송과 명은 여성미를 강조하는 화장이 유행했으며, 청대가 되면 창백한 느낌을 주는 병폐적인 미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은 눈썹과 입술에서 기본적인 변화를 주고 화전, 액황, 면엽, 사홍 등 색조화장을 발달시켰다.

그렇다면 일본의 화장을 어땠을까? 일본은 얼굴에 점토를 바르면서 화장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분화장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의 화장은 중국 수·당으로부터 불교문화와 함께 연지와 분, 머릿기름, 향 등의 제조법이 전래되었지만 헤이안시대 이후에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백분(白粉)’을 사용하였다. 백분은 귀족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납을 원료로 한 ‘경백분(京白粉)’과 수은을 원료로 한 ‘이세백분(伊勢白粉)’, 그리고 쌀가루로 만든 분이 있었다. 이후 에도시대가 되면 얼굴뿐 아니라 목덜미까지 하얗게 백분을 발랐으며, 빨간색의 입술과 검은색의 눈썹, 흑치 등 세 가지 색상을 이용한 화장 문화가 발달하였다.

2. 한·중·일 화장의 종류 및 화장도구

조선을 중심으로 동시대에 있었던 중국의 명·청이나 일본의 에도시대 화장 종류를 비교해 보면, 각 민족마다 가장 집중했던 화장이 무엇이었는지 그 특징을 알 수 있다. 삼국의 공통된 화장법은 하얀 피부에 있지만 각 민족의 미의식에 따라 집중하는 화장의 종류가 달랐으며, 이때 사용하는 화장도구는 새로운 화장 문화를 이끌었다.

우리나라는 색조 화장보다는 백옥 같은 피부를 미인으로 인식했다. 백옥 같은 피부는 기미, 주근깨, 잡티가 없는 투명한 피부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청결이었으며, 그 위에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기초화장에 주안점을 두었다.

피부 세정제로는 녹두와 팥, 쌀겨, 밀기울을 비롯해 쌀뜨물 등이 사용되었다. 충분한 수분공급을 위해서는 박, 수세미, 오이, 유자 등이 이용되었으며,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계란을 활용한 면지법이 사용되었다. 피부에 광택을 주기 위한 식물성 기름도 활용하였다. 물론 하얀 얼굴을 만들기 위해 분을 발랐지만, 이는 왕실의 여성이나 기생 등 특수계층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물론 일반인들도 결혼 등의 특별한 의례에서는 분과 함께 연지를 발랐지만, 이는 혼례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색조 화장으로 일상적인 화장은 아니었으며, 눈썹도 자연스럽게 그렸다.

한편 왕실에서 사용한 화장도구로는 분을 담는 합(盒), 기름을 담는 호(壺), 분을 바를 때 사용하는 첩 등이 있다. 효종의 딸인 숙신공주, 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협옹주, 영친왕비 등이 사용한 화장도구가 남아있으며, 화장 용기에는 화려한 장식과 무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숙신공주 묘에서 출토된 화장용기에는 뚜껑 안쪽에 작은 숟가락이 붙어 있어 화장품을 뜨는 데 사용하였을 것이다. 화장품은 물론 화장 용기에도 관심이 쏠린다.

반면에 중국은 색조 화장에 치중했다. 심지어 명이 망한 원인 중 하나가 사치였으며, 그 중심에 화장이 있었다. 하얀 얼굴을 만들기 위해 중국 여인들은 쌀가루로 만든 미분보다는 납 성분이 들어간 백분을 선호하였으며, 인공 안료까지 사용하였다. 송대에는 익모초, 석고분으로 만든 옥녀도화분이 인기가 있었으며, 명대에는 진주분의 인기가 높았다. 또 청대에는 활석 및 광석으로 만든 석분이 유행함으로써 시대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분을 통해 밝고 환한 얼굴을 만들기도 하고 창백하고 퇴폐적인 얼굴을 만들기도 했다.

중국 여인들의 색조 화장은 볼과 입술을 붉게 칠하는 연지는 물론 이마에 화전이나 화황을 붙이기도 하고 뺨에는 사홍이라고 하는 면엽이 발달하였으며, 뺨과 보조개 쪽에 점을 찍기도 했다. 눈썹화장도 길이와 넓이에 따라 버들잎 모양의 유미, 유엽미, 월미, 활미, 계엽미 등이 발달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색조 화장이 존재했던 만큼 분, 연지, 눈썹 등을 그릴 수 있는 도구가 선진시대부터 발달하였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땠을까? 일본 역시 청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민족이지만 흰색 분을 얼굴 및 목덜미까지 하얗게 바름으로써 피부를 은폐하고 얼굴의 이목구비를 소거하고자 했다. 입술에는 붉은색을 바르기도 하고 먹을 발라 검붉은 색을 만드는 등 왜곡된 화장을 하는가 하며 눈썹을 밀거나 새로운 위치에 눈썹을 그림으로써 감정까지 소거하는 화장이 발달했다.

일본의 화장도구는 흰색, 빨간색, 검은색의 3색 화장을 기본으로 농도에 따라 변화를 주었으며, 이를 위해 여러 개의 분합을 겹겹이 쌓아 사용하였다. 눈썹을 밀기 위해서는 체도를 사용하였으며, 분첩이나 솔도 크기와 굵기를 달리하면서 여러 개의 화장도구가 사용되었고 이를 보관하기 위한 포장 문화로까지 발달하였다.

3. 한국인의 미의식

화장은 궁극적으로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공통된 미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삼국 모두 흰 얼굴을 선호하는 공통된 미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공통 미의식 위에 각 민족마다 추구하는 미의식이 추가되면서 각기 다른 독창적인 화장 문화를 탄생시켰다.

삼국 중 한국의 화장이 가장 소박하다. 그러나 화장이 소박했다고 해서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나 미의식이 약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선의 여인들이 추구한 미의식이 화려한 화장이 아니라 기미, 잡티, 주근깨가 없는 맑고 깨끗한 백옥 같은 피부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분이나 색조 화장보다는 깨끗한 피부를 만드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오히려 현대에서 추구하는 자연스럽고 친환경적인 화장 문화의 선두주자로서 K-beauty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깨끗한 피부를 강조하며 기초화장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의 미의식에 자리 잡은 ‘미인의 기준’이 얼굴이 아닌 머리카락에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얼마나 검고 길며 풍성한가가 미인의 기준이었기에 머리를 돋보이기 위해 얼굴은 깨끗한 백옥 같은 피부면 충분했던 것이다.

다행히 현대 여성들은 색조 화장보다는 깨끗한 피부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백옥 같은 피부를 만들고자 피부에 집중했던 한국의 화장이 전 세계 여성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앞으로도 화장 문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바뀌든지 근본적으로 피부에 대한 관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피부에 대한 관리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다양한 화장법을 찾아내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아 독창적인 화장 문화를 만들었던 작업들이 궁극적으로 K-beauty를 선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앞으로도 화장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연구가 지속되길 기대한다.

조선왕실 옹주가 쓰던 화장품 재현, 상품화한다

화협옹주묘 출토 화장품과 용기 재현…‘프린세스 화협’으로 출시

270년전 조선시대 옹주는 어떤 화장품을 썼을까.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는 영조의 서녀이자 사도세자의 친누나인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1752)의 무덤이 있다. 2015~2017년에 무덤을 발굴했더니, 화협옹주가 생전 사용한 빗, 거울, 눈썹먹 등 여러 화장도구와 화장품, 화장품이 담겨있던 소형 도자기가 묶음으로 발견되었다. 화장품은 청화백자에 담겨져 있는채 발견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내용물은 기초 화장품인 면약에서 립스틱용 연지와 개미 수 천마리가 들어간 불가사의한 용액까지 다양했고, 놀라웠다. 그러면 당시 왕족들이 쓰던 화장품은 어땠을까. 국내의 화장품회사가 화협옹주의 화장품들을 도전해 조선시대의 제품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화협옹주묘 출토 화장품 유물 53건 93점은 보존처리와 분석과정을 거쳤다. 연구 결과, 화협옹주의 무덤에서 나온 화장품에서 갈색고체 크림류(밀랍성분), 적색가루(황화수은), 백색가루(탄산납과 활석), 액체류(개미가 나온 것) 등 8건의 성분이 확인되었고, 2019년 국제학술대회와 특별전시에서도 공개되었다.

조선시대 화장법(재현) /EBS

국립고궁박물관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화장품회사 코스맥스가 9월 22일 박물관 강당에서 화협옹주 출토유물 연구를 기반으로 제작한 현대식 화장품을 공개하고, ‘ 전통화장품 재현과 전통 화장문화 콘텐츠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식을 체결했다.

이들 기관은 앞으로 4년 간 ▲ 다양한 전통화장품 개발, ▲ 전통 화장문화 관련 프로그램 개발 ▲ 화장품과 콘텐츠의 활용 및 홍보를 단계별로 진행할 계획이다.

세 기관은 화협옹주묘 출토화장품의 분석연구 결과를 반영해 현대적으로 제작한 화장품(크림제품과 입술보호제 등), 화협옹주의 화장품이 담겨있던 청화백자를 실용화해 제작한 화장품 용기들, 화협옹주 캐릭터를 함께 공개했다.

화협공주 묘 출토 화장품 성분을 연구하는 모습 /EBS

이번에 제작한 현대식 화장품은 유물분석ㆍ문헌조사를 통해 확인된 전통재료 성분(유해성분 제외)을 함유하고 있으며, 인체 적용실험을 거쳐 제작한 백색크림과 전통재료 성분을 포함한 파운데이션, 입술보호제 등이다.

또 화협옹주묘에서 출토된 청화백자 화장품 용기 10점의 크기와 형태를 수정하고 문양을 단순화시켜 실용성 있게 현대식으로 제작한 화장품 용기를 제작했고, 기록으로만 남겨져 있던 ‘맑고 침착하고 효성이 깊은’ 화협옹주를 상상으로 구현한 캐릭터도 만들어서 공개했다.

세 기관은 추가 연구를 통해 다양한 화장품과 화장품 관련 문화 콘텐츠 등을 제작할 계획이며, 화장품은 올해 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학교기업에서 ‘프린세스 화협, Princess Hwahyup’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앞서 EBS는 7월 16일에 ‘ 화협공주의 마지막 단장(丹粧)’이란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조선시대에 쓰이던 화장품과 조선시대 화장품 판매원 매분구에 대해 설명하고, 오늘날 K-뷰티의 성공비결을 짚었다.

실용화하여 제작한 청화백자 화장품 용기 및 화장품 /문화재청

화협옹주 이미지 캐릭터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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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의 직업 (하)] 화장품 파는 매분구, 남의 재물 받아 조정 관리에 청탁하다 처벌 받기도

제주 어촌 여성들 10세 되면 잠수 익혀 미역 따고 전복 캐는 것 업으로 삼아

개성 사람 김사묵, 선죽교 옆에 채소밭 일구고 채소 판 돈으로 쌀·고기 사서 온 식구 먹여 살려

연회 자주 즐겼던 연산군은 보염서 두어 왕실에 필요한 의복·화장품 공급 전담하게 해

화장하는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화장품판매원 ‘매분구’

조선시대 화장품은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왕실뿐 아니라 민간 사대부 여성까지도 화장에 관심이 대단했다. 1506년 9월2일자에 쓰인 ‘중종실록’에 따르면 기생들을 왕실로 불러들여 연회를 자주 즐겼던 연산군은 보염서를 두어 왕실에서 필요한 의복과 화장품 공급을 전담케 했다. 정조 때 지어진 ‘홍재전서’에는 풍속이 사치해지면서 생긴 병폐 중 하나로 예단과 화장품을 갖추지 못해 때를 놓쳐 혼인하지 못하는 일을 거론했다. 안정복이 지은 ‘여용국전’은 여자의 얼굴(국가)에 각종 이물질(적군)이 침입하자 화장 도구와 화장품(군사)으로 물리치는 내용이다. 빙허각이씨는 ‘규합총서’에서 ‘장대록’이라는 제목으로 조선 여성의 미용 실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는데 머리 모양, 눈썹 화장, 얼굴 화장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때 화장품의 수요가 적지 않았으며 활발하게 유통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화장품 판매업자를 ‘매분구’라고 불렀다. 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고려말 이색의 ‘매분자’라는 시는 중국에서 수입한 화장품의 판매업자 앞에서 늙고 병들어 화장을 할 수 없게 된 아내를 언급했다. 1488년 ‘성종실록’에는 매분구이자 로비스트인 망오지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화장품 판매업자로 일하면서 남의 재물을 받아 조정의 관리들에게 뇌물로 청탁하다가 발각돼 처벌을 받았다.

조귀명은 ‘동계집’에서 한 남성에 대한 정절을 지킨 여인의 이야기를 남겼다. 아름다운 여인과 이웃집 남자의 애틋한 사랑, 실패, 상사병, 죽음, 정절이 어우러진 짤막한 러브 스토리다.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이 생계를 위해 선택한 직업이 바로 매분구다. 그녀가 판매한 화장품은 주로 연분(흰가루로 된 화장품)이었다. 이 이야기를 글로 남길때 그녀의 나이가 일흔쯤이었으니 17세기부터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행이 지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한승부’에 따르면 서울에는 영희전(지금의 서울 중부경찰서 앞) 동쪽 안팎에 두개씩 총 네 개의 화장품 판매점이 운영됐다. 여성용품이어서 판매 담당자는 모두 여성이며 상설 매장을 운영하는 동시에 방문 판매도 이뤄지고 있었다. 따라서 매분구는 매장 직원과 외판원으로 구분됐거나 동일인이 두 역할을 번갈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1901년 만전회춘당과 국영당약국은 황성신문에 백분과 함께 사용해 얼굴의 잡티를 제거하는 연녹향이라는 수입 화장품 광고를 모두 14차례 실었다. 이처럼 19세기말을 전후해서 화장품 판매업은 약방의 형태로 상설 매장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015년부터 생산된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이 1918년 특허국에 정식 상표로 등록되면서 화장품 생산은 기업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잠녀 바닷속을 누비다

제주도의 문화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해녀다. 지금은 산소를 공급하는 보조 장치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조류와 패류를 채집하는 여성을 해녀라고 한다. 그런데 ‘숙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해녀는 어촌에 살면서 어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해녀를 잠수하는 여자, 잠녀라고 불렀다. 제주의 어촌 여성들은 육지 여성들이 하는 누에치기와 솜타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양태를 들고 망사리를 맺어 미역 따고 전복 캐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겨우 열살이 되면 잠수 기술을 익히는데 그때부터 바닷속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기술이 족쇄가 되어 삶을 억압했다.

바닷속에 들어가 수영과 잠수를 하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포작’이라고 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따르면 포작에 종사하는 남성은 적었고 여성은 많았다. 따라서 원래는 잠업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02년 ‘숙종실록’에는 바닷가에 배를 소유하고 고기잡이에 직접 종사하는 격군의 아내를 잠녀라하고 격군은 아내에 비해 두 배 정도 되는 포작을 관아에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남사일록’ 1680년 기록에 제주에는 남자의 무덤이 매우 적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세 배 정도 많다는 증언이 있다. 딸을 낳으면 부모에게 효도할 아이를 낳았다고 하고 아들을 낳으면 고래와 자라의 먹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관아의 무리한 요구에 못이긴 격군과 잠녀들이 도망갔다는 기록이 많은 것을 보면 당초 남녀 모두 잠업에 종사했지만 남성들이 죽거나 도망하면서 남아있는 여성들이 이를 모두 떠맡은 듯하다.

해녀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잠녀가 바다에서 채취하는 상품은 전복을 비롯해 어패류와 미역 따위의 해초류, 오징어 등이다. 어촌에 사는 사람의 경우 남편은 1년 내내 진상할 전복과 미역 등을 마련하여 관가에 바쳐야 했다. 이형상이 1702년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는 목동보다 열배는 어렵다고 했으니 노동 강도와 수탈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어촌에 살던 사람들은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과도한 수탈에 따른 참혹한 실상을 알리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그 결과 포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감소했다. 이익태의 ‘지영록’에 따르면 1695년까지 전복잡이 잠녀는 9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미역을 캐는 잠녀는약 800명이 있었다. 일이 너무 힘들어 도망가 버리거나 나이가 들어 전복잡이 잠녀의 수가 점점 감소하자 관리들은 조정에 진상할 상품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대안으로 미역 잠녀들에게 전복 채취 기술을 익히게 해서 한두 개씩 할당하는 식으로 전복잡이 잠녀의 수를 유지했다.

우측 상단부터 가지, 오이, 죽순, 석류, 조개가 보인다. 강세황 ‘채소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성 경영인의 채소전

조선시대에 아무리 먹을 것이 귀했다지만 채소 정도는 실컷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농부들은 채소를 심지 않았다. 채소를 심을 땅도 없고 재배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벼농사와 채소농사는 병행하기 어렵다. 채소심을 땅이 있으면 곡식을 심는 게 낫다.

전국의 큰 고을 주변에는 늘 채소밭이 있었다. 개성 사람 김사묵은 선죽교 옆 채소밭을 일구었다. 먹고 남은 것을 내다팔았는데 채소가 귀해서 잘 팔렸다. 이렇게 번 돈으로 쌀과 고기를 사서 온 식구가 먹고살았다고 하니 제법 수지맞는 장사였던 모양이다.

채솟값은 결코 싸지 않았다. 조선 후기 국가 조달 물자의 가격을 기록한 ‘물료가치성책’에서 50여 종의 채솟값을 확인할 수 있다. 배추 한 단 가격이 쌀 두 말, 파 한 단이 쌀 한 되, 상추 한 단이 쌀 다섯 홉이다. 지금처럼 크고 좋은 것도 아니었을텐 데도 이 정도면 귀한 음식이라고 하겠다. 채소 종자도 귀했다. 최덕중의 ‘연행록일기’ 중 1592년 12월22일자 기록을 보면 “궁중에 채소를 납품하는 내농포의 채소 종자는 중국가는 사신들이 진자점(지금이 허베이성 탕산시)에서 구입해 온 것이었다”라고 적시돼 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온실을 설치해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채소가 귀하다 보니 염장이나 건조 기술도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유수원은 자신의 저서 ‘우서’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보관하는 채소는 무김치가 고작이다. 산나물은 산골 사람 외에는 보관하는 사람이 거이 없다. 조선에도 중국처럼 전업으로 채소를 말려서 파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선태기자 [email protected]

출처=조선잡사(강문종 등 공저·민음사)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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