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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국민일보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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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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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난해]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바른 해석은? – 다음블로그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이 말씀은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기위해 날마다 죽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면 죽을 각오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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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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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 아이굿뉴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탄식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육을 죽이기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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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goodnews.net

Date Published: 1/10/2022

View: 9798

[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코이네자료실

성격이 급한사람일수록 혈기를 잘내고 실수를 잘하게 되는 것이다.베드로는 성격이 급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을때 칼을 빼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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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inedata.tistory.com

Date Published: 8/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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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장-나는 날마다 죽노라 – 네이버 블로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29-34절 말씀입니다. 말씀의 제목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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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16/2022

View: 1416

[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 Pensées

[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1. 말씀읽기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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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4/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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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29-34) – 기멀전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헬라어로 ‘카트 헤메란 아포트네스코’라는 이 말씀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의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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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1/1/2022

View: 5680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시애틀우리교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분명한 삶의 자세와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제대로충성되게 섬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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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eattlewoori.org

Date Published: 7/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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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 설교 원고(20181111)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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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ykcn.org

Date Published: 4/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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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  - 이찬수 목사 : 갓피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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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는 날마다 죽 노라

  • Author: 갓피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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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4.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NuvWsTIpK0

[오늘의 설교]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국교회가 맘몬주의, 교회세습, 교권주의 등으로 세상 속에서 참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조롱하고 비난합니다.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습에 실망해 교회를 떠납니다. 서글픈 일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높아지려하고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향한 고백을 삶으로 살아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도 매일 죽여야 할 ‘자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듯이 우리도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교회가 삽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목회는 내려놓고 죽는 훈련이다. 성도들을 이기는 것은 내가 지는 것이고, 성도들에게 지는 것은 내가 이기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실천하기까지 사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가 죽어야 성도가 살고, 성도가 죽어야 교회가 부흥됩니다.”

왜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이 어려울까요. 우리 안의 죄성은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겸손이 중요하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머리론 알고 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죽는다’는 이 구절이 자기 삶에서 현실로 이뤄졌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는다고 해서 말씀이 이뤄졌다고 속단해선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자각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낮아지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었던 앤드류 머레이는 “반항은 죄인의 체질이다. 순종은 힘든 학습”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의미는 그의 눈높이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순종은 나의 기준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준에 맞춰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부인이 참된 순종입니다. 나의 바람과 기대를 내려놓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나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은 힘든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셨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낮아지는 훈련을 통해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바울 등이 그렇습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아래 말씀 회복과 영적 회복을 위해 운동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원조는 요시야 왕입니다. 그는 구약 시대에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말씀 앞에서 옷을 찢으며 회개했습니다. 우리도 말씀 앞에서 눈물로 통곡하며 우리의 고집, 교만, 죄악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위해 인간으로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낮아지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삶을 실천합시다.

김현길 목사

god saves us

[난해]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바른 해석은?

고전15장 29절-34절

글/扈一麥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장 31절)

고린도전서 15장을 가리켜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부활장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1절-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임을 논증합니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믿음을 각자가 다 가지고 있는 줄로 압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12절-28절에서 신자의 부활에 관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첫 열매로서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믿으십니까? 아멘! 우리는 장차 있을 우리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과거에 대한 믿음이라면, 신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미래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본래 초대 교회는 매 주일이 부활절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약 시대 안식일과 달리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 자체가 주님이 그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매주일이 부활절이었고, 매일 매일의 삶이 부활을 경험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의 삶은 언제부턴가 부활절은 일년에 한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적인 기념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 당시에 이미 그러한 현상들이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온데 간데 없고, 하나의 맥빠진 의식만 남아있는 절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부활절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부활절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이시간 본문 말씀을 통해 부활절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고, 삶이 부활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두가지 경우 모두 ‘믿는다’는 것은 현재를 의미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을 믿든, 미래에 일어날 신자의 부활을 믿든, 그 믿음의 시제는 항상 현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영원한 현재입니다. 믿음 뿐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삶 자체도 항상 현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부활의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부활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게 배우고, 이시간 이후로 부활의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이 말씀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라는 말은 휘페르 (υπερ) 라는 헬라어 전치사인데, 이것은 ‘위하여’ 라는 말 보다는 “앞에서”, 또는 “위에서” 라고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죽은사람을 위해 대신 세례를 받는 예식을 행하던 것은 당시에 유행했던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자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죽은자를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관련자료보기= [난해]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침례] 받을 수 있는가?

문제는 의식을 행하면서도 실제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앙에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절이 되면 여러 가지 의미있는 행사를 갖고, 의식을 거행합니다. 고난 주간에 금식을 하기도 하고, 특별 새벽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려보기도 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지거나 채찍에 맞거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가운데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삶은 계란을 먹는 것으로 부활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의식들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의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1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장차 있을 성도의 부활, 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의 믿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이 지금 현재도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현재 살아계신 예수님과 내가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생명의 관계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도나무의 진액이 가지에게 공급되어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예수님의 은혜와 생명이 지금도 나에게 공급되고 나를 통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30-32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들의 삶과 비교하여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과 부활의 믿음이 없는 사람의 삶을 대조합니다. 매일 맹수들과 싸워야 하는 검투사들의 삶은 하루 하루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삶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이면 죽을 목숨, 먹고 마시고 즐기자!” 라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들의 삶을 자신의 삶,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대조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들의 삶과 닮은 꼴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당시 로마나 에베소에서 고린도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건이나 풍습 등을 예로 들어서 알기쉽게 설명하였습니다.

특히 바울 자신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카타 헤메란 아포드네스코)라고 하므로써 참 생명의 삶이란 내가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며, 주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감동 감화를 따라 사는 삶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쉴새없이 파도가 덮쳐오듯이 고난과 핍박이 그를 덮쳐왔습니다. 특히 그는 에베소에서 검투사가 원형경기장 안에서 맹수들과 싸우듯이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문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까? 31절을 읽어 보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어떤 면에서 그의 삶은 검투사들과 같았습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눈앞에 일어나는 상황만 보면, 하루 하루가 너무 절망적이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삶,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때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런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어떤 때는 너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고후1:8,9) 이때마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면, 꼭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개입하시고, 성령께서 그를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은 줄 알았는데, 벌떡 일어났습니다. 넘어진 줄 알았는데, 오뚝이처럼 우뚝 섰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검투사로 에베소의 맹수들과 싸웠습니다.

우리의 삶이 원형경기장에 갇혀서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의 삶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상황에 눌려 낙심한 나머지 실컷 먹고 자고 TV나 영화나 보며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신앙생활도 아무 생각 없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럭저럭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다가 죽으면 천국 가겠지 뭐~” 이런 신앙생활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이런 신앙에서 무슨 경건의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무엇보다 부활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현실 도피에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로 도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래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과거를 회상합니다. 잘 나가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왕년에 어쩌구 저쩌구’ 하는 자기 자랑을 하며 위안을 찾습니다. 또한 과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집착합니다. 과거의 문제 때문에 현재 상황이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후자는 미래에 엄청난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꿈은 이루어진다!” 라는 자기 확신 가운데 현실의 절망을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삶은 항상 현재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으로 ‘추억 속에 존재하는 현재’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기대 속의 현재’입니다. 따라서 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가 힘들면 과거의 기억도 어두워지고, 미래도 암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가 잘 나가면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미래의 모습도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은?

왜냐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치열한 삶,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할 마음을 먹고 살았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이 말씀은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기위해 날마다 죽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면 죽을 각오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부활의 믿음으로 살 때 누구든지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 삶이 복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은 만남으로 율법의 죄가 다 용서 되었고, 복음을 전하다가 죽기를 원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를 자기를 왜 쳐서 복종하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도덕적인 죄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요즘 이 말씀을 곡해 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는데 사도바울은 복음 전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어도 좋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검투사가 맹수와 싸우는 것 같이 우리도 세상의 맹수들과 싸워서 승리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성도들이 자기 십자가를 집니까?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드는 마귀에게 잡혀 먹습니다. 지옥갈 죄의 문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 받은 이의 삶은 매일 매순간 우리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맡은바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삶이 매일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루를 잘 사는 것이 곧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탁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 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하루만 죽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만 잘하면 됩니다. 인생의 내일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만 주님 말씀에 잘 순종하면 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요? 주님의 증인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오늘 하루만 참고, 오늘 하루만 헌신하고, 오늘 하루만 희생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일 세상이 폭발하여 없어진다 하여도 밤에 눈을 감을 때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죽는 심정으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부활하는 심정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위해 죽기를 각오 하여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1장 22절-28절에『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날마다 죽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고 복음 전하기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33,34) 악한 동무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은 언제나 동일한 패턴입니다. “오늘은 쉬고, 내일 하라~”는 것입니다.특히 믿음이 아닌 것으로 다가와서 그럴듯하게 복음을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지옥갈 죄를 다 용서 받은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로 인해서는 육신의 생사화복만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는 육신적으로도 잘 살아야만 합니다. 복음전하기 위해서 참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상급이 있습니다. 과거에 잘 한 것 자랑하지 말고, 미래에 잘 하겠다고 맹세하지 말고, 오늘 잘 해야 합니다. 특히 복음 전하는 것을 내일 하겠다고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부활의 믿음으로 오늘 하루만 잘 합시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날마다 죽기를 원합니다.扈ⓗ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 (일맥)

메모 :

“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57.이정기 목사와 함께하는 새신자를 위한 성경공부

로마서 7장을 보면 우리 안에 두 마음이 공존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영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육은 악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두 마음이 우리 안에서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웁니다. 서로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롬 8:6절 이하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 육체의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상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며 탄식합니다.(롬 7:24)

그러나 사도 바울은 탄식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육을 죽이기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라.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갈라디아서 5:16절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8: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 4:8절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새벽기도도 훈련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 묵상도 훈련해야 합니다. 나누고 베푸는 일도 훈련해야 합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도 훈련해야 합니다. 마음 지키는 것도 훈련해야 합니다. 잠언 17: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단련하십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때에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골리앗과 맞서 싸우려는 다윗에게 형 엘리압은 쓸데없이 까불지 말라고 화를 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은 형에게 따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만 집중했습니다. 만약 다윗이 형에게 화를 내느라 진짜 싸워야 할 상대를 잊어버렸다면, 골리앗을 이길 기회를 놓쳤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기에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 도망자로 살다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기에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해 주시기를 구하며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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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세상에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힘들고 세상을 사는것도 힘들지만 더욱 힘든것은 죽는것이 제일 힘듭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을때 잘죽는것도 큰 복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때 마귀가 와서 끌고가려고 하는데 따라가지 않을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땀을 뻘뻘흘리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우지 모릅니다. 세상사람들은 살려고 발버둥치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안에서 죽고 새로 내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왓습니다. 예수님은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느니라 고하셨습니다,내가 죽는것만큼 내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고 그리스도께서 연사하시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신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습니다. 함께란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실때 우리도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나혼자 죽은것이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자살하는 연습을 하라는것이 아닙니다. 자살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끊는것이기 때문에 자살하면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가롯우다는 예수님을 은30냥에 팔고 나무에 목에서 자살했기때문에 지옥에 갔습니다. 어던 사람은 예수믿는 사람도 살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는데 분명히 자살은 살인아니 같기 때문에 지옥간다는 것을 알고 마음대로 죽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사람은 육과 영이 있는데 육이죽으면 영이 살고 육이살면 영이 죽게 되어잇습니다.롬8;5-6 육신을 좃는자는 육신의일을 영을 쫏는자는 영의일을 하나니 유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샌자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햇습니다.우리육신은 자꾸 세상으로 끌고갈려고 합니다, 그래서 영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롬8;13에도 너희가 육신대로살면 반듯이 죽을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니라 고 햇습니다.

그러면 육체에 속한 일이란 어떤 것이 잇습니까?

갈5;19보면 육신이 일은 현져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맺는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짖는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한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힁에게 경계한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일을 하는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 햇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어야할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혈기가 죽어야 합니다.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도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성격이 급한사람일수록 혈기를 잘내고 실수를 잘하게 되는 것이다.베드로는 성격이 급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을때 칼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이 귀를 잘라서 떨어뚜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충만하고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했지만 인내하면서 끝까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혈기가 한꺼번에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매일매일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잘해 놓고도 혈기를 부리면 열심히한일이 아무 가치가 없게됩이다. 다된 밥에 재뿌리다는말이 있듯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경우가 잇습니다.

마5;5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당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이요 .

혈기를 죽이게되면 온유한자가 됩니다. 배가고파서 화가나있는 사자를 보세요 얼마나 무섭습니까? 구러나 잠들어있는 사자는 얼마나 순합니까? 두얼굴가진 사나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이 같은 얼굴인데 두얼굴이 될수있다.어던때는 천사의 얼굴이 된;도 하고 어떤때는 악마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정말 은혜 충만하고 웃으면서 말할때는 천사의 얼굴 같은데 화가나서 싸우는 얼굴을 보면 악마의 얼굴과 같습니다.

너희는 어데게 한 우물에서 쓴물과 단물을 내겠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게서 만드신 얼굴을 가지고 천사의 얼굴과 마구의 얼굴을 해서는 안되겟습니다. 일곱 집사가운데 한사람인 스데반 집사는 마지막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났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지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의 얼굴을 볼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화가나서 마귀의 얼굴이되어서 싸울려고할때 내앞에 예수님이 얼굴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절대로 혈기를 부리거나 화를 낼수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욕심을 죽여야 합니다.

약1;14 오직 각사람이 시험을 받는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돔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욕심은 결국 죄를 낳게되고 죄가 싸이면 결국은 사망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사람이 시험을 받는것은 그랬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느것은 욕심때문에 시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반듯이 나보다 낳은 사람을 바라볼대 생기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은 절대로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5자평짜리 집에 살고있어도 100자리 집에 사는 사람다을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속옷하나에도 몇십만원짜리 옷이있다고 하는데 글쎄요 그런옷을 입으면 목욕을 안해도 되는 옷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욕심다이 물질에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같습니다.

인가의 자가심은 끝이 없습니다. 얼마난 깊은 지 아무리 채워도 차지를 않습니다.평새채워도 차지를 않습니다. 밑빠진 독에 물붙는것과 같습니다.아파트 한채 가지고 있으면 한채도 없는 사람도 있는데 두채 가지고 싶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신청을 합니다. 별로 필요도 없는데 차도 두세대씩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것들은 모두 욕심이 가득차게됨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필요 없는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욕심을 부려도 좋은 욕심을 갖어야 합다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욕심 은혜를 많이 받겠다고화는 욕심 신앙생활을 좀더 잘해 보겠다고하는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일년에 우리교회에서 전도를 제일 많이할가하는 욕심을 가져야합니다. 어더게하면 하나님게 좀더 많이 드릴가하는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돈을 벌어도 내 배만 채우기 위해서 버는것은 잘못된 욕심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 나라를위해서 쓰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스기위해서 돈을 벌겠다고하는 욕심은 잘못된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하는것도 높은자리하나얻어서 목에다 힘주고 다른 싸람들을 부리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많이 배워서 하나님의 영광을위해 쓰고 억울하고 배우지 못한사람들을위해 쓰고자 배우는 욕심은 좋은 욕심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욕심은 날마다 죽여야 합니다.

셋째;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잠언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햇습니다. 인가이 교만하여 하나님과 같이되고자 선악과를 먹다가 저주를 받게되엇습다다.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실은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은 절대 쓰지질 않습니다. 쥐고리만한 돈조금 있다고 교만한사람 얼마나 보기 실은지 모릅니다.

별것도 아닌 지식좀 있다고 , 자기집좀 가지고있디고 , 자기가 좀 잘생겼다고, 교만한사람 얼마나 보기 추한지 모릅니다. 요즈음은 별것도아닌 말단 공원자리하나 앉아있어도 얼마나 목에 힘을주는 사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는 절대 겸손해야 합니다. 수양버들처럼 부드러운 너무는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불어지지 않지만 포플러처럼 곧게 서있는 나무는 허리가 독 부러지고 맙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간는 하나님께서 부러드려 놓게되면 얼마난 아픈지 모릅니다. 하나미앞에는 아무리 세상에사 가진 것이 많이있다 할지라도 마우리 많이 배웠닥 할지라도 하나님앞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라야 합니다.

이 교만도 날마다 죽여야 합니다. 항상 교만이 생길수있기대문에 날마다 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찬송가 330장 3절에 보면 교만한을 내버리고 예수게로 나옵니다. 라고 되어잇습니다. 우리가 주님게 나오가때는 교마난 마음을 내버리고 나와야 합니다.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물리치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햇습니다.

넷째;정욕을 날마다 죽여야 합니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셧으니 가고 하셨습니다….마음속에 정욕이 부타게되면 육신을 더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얼마난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위해서 술집으로 캬바레로 호텔로 찾아다니는지 모릅니다. 사실 육신의 정욕도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먹고 마셔도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편을 다섯이나 바꿨어도 육신의 정욕을 채울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을 죽여서 절제할줄 알아야 합니다.

정욕을 죽이지못하면 짐승과 같이 됩니다. 짐승은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하는것이 짐승입니다.

약4;3 너가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스려고 잘못구함이라고고 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우리가 구해도 육신의 정욕을위해 쓰려고 구하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기 대문에 우리는 날마다 육신의 정욕을죽이는 연습을해야합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면서 자싸기 자신을 철저히 죽이는연습읗했습니다.어제까지의 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깡패나 살인강도가 오늘 예수믿었다고 금방 성자가 되는 것으 아니다 날마다 옛사람이 죽는 훈련을 통해서 주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날마다 옛생각,성품이,습관이 죽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말마다 죽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by 코이네자료실

고린도전서15장-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29-34절 말씀입니다. 말씀의 제목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신의 이미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했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신앙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으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성도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었을 뿐 아니라 세상의 왕이 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신의 삶이 어떠한지를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먼저 부활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당시 한 풍습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9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당시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서 세례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받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받는 것은 부활을 전제함을 말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죽은 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라면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받는 것은 무의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음으로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바울은 어떻게 산다고 말합니까? 바울은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의 새 창조를 시작하셨고, 새 시대가 시작되어 바울은 현세와 내세를 같이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첫째, 바울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때마다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0절을 보십시오.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And as for us, why do we endanger ourselves every hour?) 우리, 곧 고린도전서를 쓰는 바울은 때마다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영어로는 every hour 매 시간마다 위험을 무릅썼다는 말입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일반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danger-oriented life를 살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언제나 위험을 회피하는 삶, 위험을 최대한 줄이는 삶을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생명을 움켜쥐고 생명을 최대한 아끼고 보존하는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만약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목숨을 움켜쥐고 위험을 최대한 회피하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을 믿기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전도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위험을 무릅쓰며 살고 있는가를 말했습니다. 자신의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며 살고 있는가를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1-27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1.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22.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실제 때마다 every hour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었다는 것은 그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새 시대가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며 육체의 생명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부활의 생명을 살아내었다는 듯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는 데에는 이유는 그런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삶을 통해 부활생명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을 체험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위험을 무릅쓰는 이상한 삶을 살았습니다.

둘째, 바울은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자랑합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글자 그대로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그는 날마다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는 삶, 날마다 기꺼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삶, 날마다 고난을 받는 삶, 날마다 손해를 보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날마다 자기의 육체의 생명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의 생명을 움켜쥐고 안일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렸습니다. 그는 날마다 기꺼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손해보는 쪽, 날마다 희생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목자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기적이고 자기를 이용하는 양들에게 기꺼이 이용을 당하고 끝없이 양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비량하면서 돈을 벌면서 양들을 섬기면서 그들을 자녀와 같이 여기고 그들을 여러 모양으로 섬겼습니다. 바울은 ‘아비가 자녀를 위하여 물질을 저축하는 것이지 자녀가 아비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의 시간을 양들에게 내어주었고, 자기의 물질로 양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날마다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고, 시간적인 손해를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사는 삶이 날마다 죽는 삶이요, 날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삶이요, 날마다 죽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죽는 삶은 날마다 예수님의 못박힌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요,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이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날마다 실제적인 고난을 받고 실제적인 고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란 극심한 고통을 말하는 것이며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날마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뜻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사람들은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받는 것 외에는 어떤 고문이라고 다 감수할 정도였습니다. 로마시대에 어떤 한 성이 로마군에 항복했는데 ‘남자 한명을 십자가에 못박겠다’는 협박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생각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는 고통이었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날마다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양들을 위한 고난을 받으며 날마다 그런 고통을 받길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길 원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으로 예수의 생명이 자기 육체에 역사하길 원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기를 원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 살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사람을 역설적으로 날마다 죽는 삶으로 초청합니다. 부활신앙은 사람을 놀랍게도 날마다 고통을 당하는 삶, 날마다 희생하는 삶, 날마다 손해보는 삶으로 초청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여 고통을 당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우리는 다 남이 알지 못하는 고통을 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게 하시고 이를 통해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이런 고통을 감당하는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 가운데 부활신앙으로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살을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바울처럼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셋째, 부활신앙으로 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바울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2-34절을 보십시오. “32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바울은 부활신앙이 없다면 그렇게 맹수와 싸우는 것같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향락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지만 부활이 있기에 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저에게도 남이 알지 못하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통해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삶을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부활의 생명을 체험하는 그런 삶을 살길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게서 나에게 부활신앙을 허락하시고 부활생명을 허락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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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1. 말씀읽기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2. 묵상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버렸습니다. 엄밀하게 그리스도와 맞바꾸었습니다. 오늘은 앞선 묵상에 포함된 9절을 포함하여 11절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

딕 루카스는 9절을 주해하면서 그가 포기한 의와 그가 바라는 의로 명징하게 구분했습니다. 그가 버린 의는 ‘율법의 의’입니다. 율법은 육신에 속한 것이며, 거룩하고 의롭지만 결코 하나님을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 본다면,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육체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육체에 속한 것을 가톨릭의 공로와 비교했던 것입니다. 그럼 그가 바라는 의는 무엇일까요? 루카스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그것은 육체 속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의 문제로 넘어가야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것을 신자의 것으로 만드는 수단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그럼 어디서 났는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이 표현은 깊이 사색하지 않아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나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과 그리스도가 하는 것을 동시에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불가피하게 빅딜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고민은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혼의 변화, 세계관의 변혁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내 안의 우상인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 그리스도로 인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전인격적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랄드 호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련의 명제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신뢰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예”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전인격적으로 예라고 긍정하는 것, 이것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는 것입니다.

2)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믿음으로 받는 것이 전인격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라면, 이제 행위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전인격적이라함은 지적인 동의를 너머 삶의 변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존 칼빈은 이 본문에 대해 ‘경건한 자의 실 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적 동의, 의지의 변화는 다시 삶이라는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종착역인 ‘부활에 이르는 것’(11절)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바울의 믿음이 체계적이며 반복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육체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의 영광을 바라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존 칼빈의 탁월한 주해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써 성경이 보통 육신을 죽이는 것, 또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것인데 겉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십자가를 참고 견디는 것인데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취급하고 있는 애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귀절에서도 취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우리가 재난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주를 따르게 되는 것은 그의 부활의 능력을 깨달은 이후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기를 우리가 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죽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자들은 이 땅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이와 같은 묵상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계속’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계속 죽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죽음을 묵상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우리가 참된 빛을 받아서, 마음의 온갖 눈먼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본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묵상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며,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다시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정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자기를 부정하게 됩니다.

3)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은 결연한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εἴ πως καταντήσω)’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얻기 위하여’가 됩니다. ‘카탄테소(καταντήσω)’라는 단어는 약간의 의심과 걱정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사용된 구절을 살펴보면 이 단어는 ‘경외감과 경이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 구절을 살펴보십시오.

행 27: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καταντήσω)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롬 1:10 어떻게 하든지(καταντήσω)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1: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καταντήσω)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곳에 나타난 단어들은 한결같이 갈망이나 염원, 그리고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다는 말이 됩니다. 바울은 부활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섭리에 대한 경외인 것입니다.

제랄드 호돈 적절하게 이 단어를 해석하면서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과, 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 때문인 듯하다’고 말합니다.

나가면서

부활로 가는 길은 험난합니다. 자기를 부정해야하고, 고난과 수모를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전인격적 삶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아니 그리스도가 살아서 그의 삶을 주관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내적인 가치관의 변화, 외적인 삶의 변화까지 일어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갑시다. 바울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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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29-34)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한 성도가 세상을 떠나 제가 장례식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산에 올라가서 하관을 합니다.

일생을 통하여 가장 비장한 순간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던 사람이 었습니다마는 생명이 떠난 시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땅을 깊이 파고 광중(壙中)으로 관을 달아내립니다. 이제 관뚜껑을 열어놓고 마지막 예배를 드립니다. 하관 예배라고 합니다. 이때에는 주로 부활에 관한 성경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권면의 말씀을 드린 다음에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이렇게 헤어집니다마는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슬픔으로 헤어집니다마는 주님 앞에 가서 영광스럽게 만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먼저 가고 뒤에 가고 합니다마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공중에서 부활하여 다 같이 함께 만나 하나님을 찬송하게 해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를 드린 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예배를 마칩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전혀 낯선 분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마는 모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심각하게 두 가지의 질문을 저에게 합니다. 그 하나가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가 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추상적인 진리요 관념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생명으로 믿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둘은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부활할 것으로 믿는가보다’라는 것입니다. “부활할 것을 믿지요.” 이 말을 들은 그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심각해졌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질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내가 부활할 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까 생명의 문제는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생명의 문제로부터 가치관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자로 사느냐, 가난하게 사느냐-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공평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는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늙지 않고 가난한 사람만 늙는다고 해보십시다. 억울해서 못삽니다. 제 아무리 좋다는 약을 먹고 마사지를 하여도 늙기는 일반입니다. 도리 없이, 누구나 늙어간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평성입니다. 가령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죽지 않고 무식한 사람만 죽는다고 하면 억울해서 못 죽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생명문제 앞에서 사람은 공평합니다.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명문제를 크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여타의 문제를 작게 여길 수 있습니다. 잘살면 어떻고 못살면 어떻습니까 잘입으면 어떻고 못 입으면 어떻습니까 명예를 가지면 어떻고 못 가지면 어떻습니까 잠깐 사는 세상입니다. 사람마다 이 중요한 생명의 문제는 등한히 하고 오히려 별로 중요치도 않은 시시한 문제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보면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죽음을 재촉하면서까지 명예를 얻겠다고 아등바등합니다.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등산을 좋아하여 산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비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산에서 비를 만나면 큰일입니다. 경사가 가파른 산이고 보면 삽시간에 계곡 물이 붇습니다. 마구 흘러내리는 물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무 아래로 거센 물살이 지나갑니다. 밤새도록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나무가 부러질까 걱정하면서 밤을 지새우는데 춥기도 하고 배도 고프고 참으로 괴롭습니다. 더욱이 잠까지 옵니다. 여기에서 졸면 죽는다 싶어 허리띠를 풀어 나무에 몸을 붙들어매고 밤을 새웁니다. 물이 다 빠진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 죽을 뻔한 이야기를 주욱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가 이렇게 묻습니다. “얼마나 춥고,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어려울 때에 내 생각 좀 했습니까” 그러자 그 남편이 대답합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소. 단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소.”

그렇습니다. 생명의 문제, 그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시한 걱정은 안하고 살아도 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문제는 현실적입니다 마는 신비롭습니다. 곧 종말론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현재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나이많은 사람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는 날마다 죽음 앞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스럽다느니, 평안하다느니, 행복하다느니, 불행하다느니, 명예롭다느니, 수치스럽다느니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가 최우선적임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생명을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신분에 따라 죽음을 일컫는 말이 각기 다릅니다. 다섯 가지의 명칭이 그것입니다. 왕이 죽으면 붕(崩)이라고 합니다. 제후가 죽으면 몽(蒙)이라고 합니다. 우리말에도 몽거(蒙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벼슬아치가 죽으면 졸(卒)이라고 합니다. 선비가 죽으면 불록(不祿)이라고 합니다. 이제 녹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통사람이 죽으면 사(死), 곧 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죽음에 대한 명칭이 다른 것입니다. 알건 모르건 우리 한국사람들의 표현에도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면 보통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윗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개 어른이 돌아가셨다, 나보다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어야 마땅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괴롭히다가 죽으면 뭐라고 합니까 잘 뒈졌다고 합니다. 죽었다고 하지 않고 뒈졌다고 그럽니다. 자, 여러분은 어느 쪽이 될 것 같습니까 그런가하면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요새 와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소천했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죽음과 삶은 항상 곁에 있습니다. 서로 맞서 있습니다.

생명의 문제가 곧 죽음의 문제요, 죽음이 있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사람에게 명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17절).” 무슨 말씀입니까 살라고 생명을 내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생사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 때에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의 법에서 떠날 때에 죽음으로 간다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과 싸우며 살아갑니다.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는 중에도 얼마나 많은 죽음이 내 앞을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가는 것, 오는 것, 이 모든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삽니다. 어찌 생각하면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그 과정을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죽음을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죽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제일 마음이 아프고 듣기 괴로운 말이 있습니다. 임종이 가까운 사람을 방문합니다. 인간적으로는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아주 심각하게 중요한 말씀을 드립니다. ‘당신은 이제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말씀을 다 드리고 나면 맨 마지막 반응이 어떤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목사님, 이러한 시간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왜 욕심을 부렸겠습니까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고 마는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왜 미워했겠습니까 왜 쓸데없는 일을 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니 후회가 막급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있는 줄 알았으면 과거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다시 내게 생이 주어진다면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생을 살아볼 마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싶습니다. 오늘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그것 하나 몰랐다니 말이나 됩니까 인간이 죽는다는 일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몰랐습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미련한 사람입니다. 천치요 바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죽음을 남의 이야기로만 듣지 마십시다. 나는 그 시간에 과연 무슨 말을 하게 될 것입니까 이대로 죽어도 되는가 여기에서 끝내도 문제가 없는가 나의 생 전체를 죽음 앞에서 재평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죽음을 잊고 살려 합니다.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폭력을 씁니다.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리려고 일부러 역설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술과 마약, 폭력과 방탕으로 살아갑니다. 깊은 곳에 있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려고 하는 역작용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억지로 부인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로마사람들이나 헬라사람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 소위 지성인들은 만나면 서로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메멘토’는 ‘리멤버(remember)’라는 말이요 ‘모리’는 ‘죽음(to die)’이라는 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리멤버 투 다이(remember to die)’라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나도 당신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사십시다. 혹 부부싸움을 하십니까 둘 다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아마 휴전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더는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이대로 끝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이것이 인사였습니다. 아침인사요 저녁인사입니다. 죽음을 잊지 말고 살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 믿게 되자 이제 인사말이 바뀝니다. ‘마라나타(Maranatha)’성경에도 나오는 유명한 인사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번역이 됩니다마는 좀더 자세히 살피면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임을 기억하고 사십시다. 우리가 다 주님 앞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십시다’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로써 서로 유무 상통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순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오렌지카운티에 그 유명한 척 스미드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이름이 갈보리 채플(Calvary chapel) 입니다마는 교회에 직접 가보면 갈보리 채플 글자 옆에 괄호하고 ‘마라나타 커뮤니티 (Maranatha community)’라고 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아주 생명력 있는 교회입니다. ‘마라나타 커뮤니티’–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거기에 중심이 있고, 거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신앙 안에 사는 생명,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혹자는 어느 성경말씀대로 죽음을 의식하기에, 다시 말하여 내일 죽을 것이기에 오늘 먹고 마신다고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온 것을 의식하며 가장 신령한, 가장 경건한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를 지칭해서 종말론적 윤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확증하며 살아갑니다. 시인 괴테는 말하였습니다. ‘죽고 다시 사는 도리를 알기까지 나는 처량한 나그네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죽고 사는 이치를 깨닫기까지는 누구나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생명의 문제부터 해결하여야 합니다.

죽음을 알고 부활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부활신앙, 부활에 대한 열망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죽고, 예수 부활과 함께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증받고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부활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부활신앙이라는 그 분명한 틀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헬라어로 ‘카트 헤메란 아포트네스코’라는 이 말씀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의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매일 죽으면서 삽니다, 나는 매일 죽음에 노출되어 삽니다,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이 그러했습니다. 보장할 수 없는 나날입니다.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죽음을 무릅쓰고 삽니다. 핍박이 그렇고, 환난이 그렇고, 건강이 그렇습니다. 사실 날마다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삽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예수의 죽음을 날마다 수반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는다지혜의 근본입니다. 어제 죽었다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하여 오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그리스도인의 오늘의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수님의 죽음을 수반하여 그는 그 옛날 다메섹 도상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는 생을 마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마침내 순교로 그 생을 끝내고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그는 늘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자나깨나 그 시간을 마음에 그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것은 잠시 주님의 뜻과 경륜 속에 사는, 덤으로 사는, 은사로 사는 사명적인 생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옛사람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삶입니다. 옛 생각, 세상 것, 세상 욕심을 계속적으로 부정하고, 동시에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생을 계속적으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부정하고 새사람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완전히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계속적으로 확인하며 사는 것입니다. 확인, 확증하는 생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끔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비행기표를 바로 컨펌(confirm)하는 일을 합니다. 잘못해서 큰 실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늘 이 나라 저 나라 다닙니다마는 토요일에는 꼭 돌아와야 하는 사람이 제가 아닙니까 한번은 중국 타이베이에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여행사에 부탁을 해놓았는데 여행사 측에서 컨펌하는 것을 잊었던 모양입니다. 공항에 나가보니 컨펌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좌석을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좌석이 없는 것입니다. 비행기에 입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돌아오는 데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간신히 돌아온 일이 있어서 이후로는 컨펌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를 않습니다. 제가 꼭 확인을 합니다. 직접 전화를 걸어서 몇 시 몇 분에 내가 컨펌을 했다고, 잊지 말라고 다짐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는 티켓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컨펌이 되지를 않아서 문제가 됩니다. 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재확인해야 합니다. 시간 시간 확인을 하여야 합니다. 확증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다시 한번 확증을 하십시다. 옛사람이 깨끗이 죽었는가 새사람으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이 날이 끝난다면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 재확인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사랑의 확증을 받아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일리 다이(daily die)’라고 한 반면에 루터는 데일리 뱁티즘이라고 한 것입니다. 날마다 세례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으로 행하여 죽고 은혜로 살고, 나로 향해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죄로 죽고 의로 살고, 절망으로 죽고 소망으로 사는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세례 받는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죽어야 할 부분인데 죽지 못하였습니다. 죽여야 할 부분인데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못 끊고 있습니다. 끝내 끄나풀을 못 끊고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한,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한, 부득불 끊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끊도록 비상조치를 취하십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 가운데 가끔 쓰는 말이 있습니다. ‘저 사람 하나님 앞에 혼났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번씩 혼나고야 정신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겸손해야 될 사람인데 교만하고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립니다. 예수는 믿는데 뭔가 좀 부족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딱’ 치시면 꼼짝못하고,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본체를 향하여 다듬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수련 과정, 생명을 정확히 하는 그 역사는 그야말로 정확한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놀라게 하여 겸손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하십니다. 마침내 그렇게 되어 주님 앞에 불려 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나는 이길 힘이 없습니다마는 주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나는 끊을 힘이 없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기어이 끊게 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죽이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납니다. 죽음을 부득불 당하는 사람이 있고, 죽음을 깨닫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나를 죽여가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생명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I am crucified with christ”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생명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알기에 나를 죽이고, 생명을 믿기에 우리는 모든 고난을 무릅씁니다. 이 생명을 알기에 기뻐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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