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의 주일 설교 | [김동호 목사] 좋은 스승, 2016년 주일설교 상위 113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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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 설교 아카이빙
2016년, 주일설교
‘좋은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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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 mission – 가장 훌륭한 스승이십니다. (요 13:12-15)

스승의 날의 유래는 1958년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 적십자날을 맞이할 때마다 병중에 계시거나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던 것을 1982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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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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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설교 – 예수님은 우리의 참 스승 ( 스승의 주일 설교 )

‘글쎄 한 달 만 더 기다리라니까요. 그때 다시 오십시오.’ 다시 한 달 후 모자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비로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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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jin2nul2.tistory.com

Date Published: 8/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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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주일] 최고의 스승은? (엡 6:4) – 다음블로그

스승의 날이 겹쳐진 주일 이 시간 최고의 스승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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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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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16. 주일 설교: 나는 스승이다(요13:12~15). 양은익 목사. |

오늘은 스승의 주일로 지키면서 스승의 뜻을 새기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1. 스승은 바르게 이끌어 주고, 가르쳐 주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무엇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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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rassch.com

Date Published: 6/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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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가치-스승의 주일 설교 < 설교자료 < 게시판 - 코람데오닷컴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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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scoramdeo.com

Date Published: 1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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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 스승을 기억하라 (고전4:10-16) – 썹목사

교회의 절기 중에 공식적으로 “스승의 주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의 날’에 맞춰서 ‘스승’에 관한 설교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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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sub2.tistory.com

Date Published: 9/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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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주일 설교, 열왕기하 2장 1-15절, 스승과 제자

그것을 알았던 엘리사는 혼자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엘리야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험난한 여행 과정을 함께 따라가는 것을 볼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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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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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 좋은 스승, 2016년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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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스승 의 주일 설교

  • Author: 김동호 목사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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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1.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08Fiiv9szIc

가장 훌륭한 스승이십니다. (요 13:12-15)

가장 훌륭한 스승이십니다. (요 13:12-15)

매년 5월 15일은 스승의 날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스승의 날의 유래는 1958년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 적십자날을 맞이할 때마다 병중에 계시거나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던 것을 1982년에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스승에 대해서는 각별한 존경심을 가져왔고 군사부일체라고 해서 스승의 권위를 임금님과 부모님의 권위와 동일시 해왔습니다.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처럼 아름다운 사제관계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공교육이 추락하고 사교육이 성황을 이루고 있고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으나 제자는 없다는 말이 입에 오르고 있고 교실붕괴, 학교붕괴라는 말까지 나오는 안타까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나라가 부강하여지려면 무엇보다 교육이 잘되어야 하고 교육이 잘되려면 교육을 담당하고 계시는 선생님을 소중히 여기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의 학교교육은 지식교육만이 아니라 인성교육까지 감당해 왔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참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깨우쳐 왔습니다. 가르침이 없이 성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신대학교 총장이셨던 김재준 박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단에서 10년 봉직하셨으면 그분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머리에서 모자를 벗고, 20년을 봉직하셨으면 허리를 굽혀라. 30년을 봉직했으면 무릎을 꿇어라 하셨습니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참된 제자입니다.

오늘날 나의 나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가르치는 스승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스승을 존경하라 했습니다.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슴을 가르치기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가르치기에 수고하는 이들은 신상생활을 지도하는 목회자와 교사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자기를 가르치는 스승에 대하여 존경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교육이 바로 서게 됩니다. 학교에서 우리 자녀들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또한 자녀들에게 스승을 존경하도록 가르쳐 주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영적인 스승에 대하여도 존경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인격이 바로서고 신앙이 바로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스승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살전 5:12-13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은 너희가 알고 사랑안에서 귀히 여기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스승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스승에게 배운 가르침이 바로 실천하게 됩니다. 스승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스승에 대하여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로 하여금 이것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근심하게 라는 말에는 탄식하고 원망토록 괴로워한다는 뜻입니다. 스승에게 불순종하고 거역하면 탄식하여 괴로움을 가지게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할 때 조금 어려운 일을 당하면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제 고집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살았습니다. 모세는 탄식하며 괴로워 했습니다. 영적지도자에게 순종하라. 불순종하고 거역하면 탄식하고 괴로움을 당하게 만듭니다.

4) 스승과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것을 함께 하리라

마음 속으로만 스승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스승에 대하여 잘 대접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도리를 세밀하게 가르쳐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승에 대한 존경과 순종없이는 교육이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승에 대한 바른 자세없이는 신앙이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승이 존경을 받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날을 지나면서 아름다운 사제간의 윤리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인류의 참된 스승이 한분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시고 훌륭하신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13절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세상에는 교육지도자들, 정치지도자들, 경제 지도자들 등 수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고 유일하게 하늘에서 오신 인류의 참된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국과 지옥의 비밀을 알고 오신 스승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3: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참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축복의 길로, 영생의 길로 확실하게 인도해 주시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인생의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수천억만 인생들이 생의 변화를 받고 새출발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인생을 산 것처럼 이 지구촌안에 인류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생의 변화를 받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촌 땅끝까지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인류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회개하고 변화받아 새로운 인생길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15절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참된 스승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닦아 주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배웠다고 교만하고 높아지고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탐욕을 버리고 겸손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으로 섬김의 삶에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으로 친히 본을 보여주신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또한 우리들의 스승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위대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삭개오도 변화시키었고 창기였던 마리아도 놀라운 변화를 주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지식만 전달하는 교사들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사랑을 쏟아주는 교사들은 제자들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삽니다.

이론적으로만 가르치는 머리로만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일일이 어린이들을 보살펴주고 안아주는 가슴으로 대하는 사랑만이 오랫동안 어린이들 가슴속에 남아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게 될 것입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는 땅위에서 가르침을 주셨던 스승님들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영혼을 인도하며 가르치는 영적 스승을 존경하라 순종하고 복종하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인류의 참된 스승.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 되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류의 참된 스승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으로 구원과 영생의 길로 인생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박용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예배 설교 – 예수님은 우리의 참 스승 ( 스승의 주일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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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의 참 스승/요13:12-17

사람이 어떤 스승에게 어떤 교육을 받느냐는 것은 그 사람의 장래를 결정짓는 중대사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된 우리의 최고의 스승은 누구일까요? 또 여러분의 최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최고의 스승인 예수님을 찾는 것이 인생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됩니다. 예수님을 바로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한결같이 목숨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받칠만한 인생의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로부터 위대한 가르침과 위대한 생활을 배웠다는 증거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받은 좋은 제자들이 많습니다. 세상역사를 바르게 바꾼 사람들을 살펴보면 모두 예수님의 위대한 교훈을 배운 자들입니다.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사회 변혁가들은 거의 대다수가 충실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서 수고하신 스승의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의 스승과 온갖 무술을 가르치는 스승과 학원에서 각가지 기능을 가르치는 스승 그리고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대 스승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참사랑과 생명을 주신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스승이 되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받은 은혜를 가지고 우리 교회에서 교회학교에서 가르치는 작은 선생인 교사들을 돌아보는 일은 참으로 헛되지 않고 보람과 기쁨과 축복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Ⅰ. 모본이 되신 선생님

(요13:12-15)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그들을 섬기며 행동으로 모본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높으신 아들이시면서도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7). 주와 선생이 되면서도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시고 본을 보였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말로만 스승 노릇을 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이 소경이 되어 사람들을 어두움으로 인도하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근본이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은 깨끗하지만 주님께 지적받기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방패니'(막7:2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이 더럽혀진 인간이 참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23:7-8)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스승이요, 영원한 스승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스승이 있지만 참된 스승을 찾아보기란 힘든 세상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는 참 인격을 가진 스승이 적으며 그 가르치는 것도 제한된 지식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며 또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스승을 알아야 하며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서 참된 스승을 얻을 수 있습니까? 참된 스승은 성경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참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생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 모본을 보여준 어느 선생 이야기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사회적으로 덕망이 높은 스승을 찾았다. ‘선생님, 아무리 타일러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모두 썩었는데도 제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이애는 선생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듣거든요.’

스승은 소년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한 달 후에 다시 오너라.’

스승의 뜻밖의 태도에 소년의 엄마는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원망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될 텐데 한 달 후에 다시 오라는 이유가 대체 뭘까. 스승님은 매우 지혜로운 분으로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척척 풀어 주시는데 이렇게 사소한 일을 한 달씩이나 미루다니 이해할 수 없어. 한 달 후에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스승을 찾았다. 스승은 말했습니다. ‘한 달 만 더 기다려라.’

소년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또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합니까?’

스승은 말했다. ‘글쎄 한 달 만 더 기다리라니까요. 그때 다시 오십시오.’

다시 한 달 후 모자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비로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소년은 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지금부터는 절대로 사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소년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사탕을 먹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습니까?’

스승은 말했습니다. ‘실은 나도 사탕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처음 한 달 동안 사탕을 끊으려 노력해 봤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지요. 그래서 다시 한 달을 연장해서 더 시도해 본 것입니다. 이제 나는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떳떳이 말할 수 있습니다. ‘소년아, 너는 사탕을 끊을 수 있다. 늙은 나조차 사탕을 끊었는데, 아직 어린 너는 사탕을 끊는 것 말고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말보다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이 선생은 제자에게 본을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선생은 본을 보여준다면 이는 진정으로 선생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스승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삶으로써 본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유대 사회에서는 주인과 스승이 종의 발을 씻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종들이 주인을 받들어 먼지 묻은 발을 씻기는 일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종의 자리로 내려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섬김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기 위해서 오셨으며 자신의 목숨을 주려고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막10:4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스승이십니다.

주님은 고난에도 본을 보이셨습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苦難)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봉사의 본만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순전히 우리를 위한 고난입니다. 특히 죄인을 위한 고난입니다. 자신은 죄가 없는 의인으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통해서 속죄의 죽음을 당하신 분입니다(사53:5). 일반 사람들이 남을 위해 봉사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의인으로서 고난을 몸소 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인류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그 고난을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弟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고 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눅9:23).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어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했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 그 영광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롬8:17)

Ⅱ. 길을 인도하신 선생님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路)이요 진리(眞理)요 생명(生命)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인생의 근본 된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치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라야 그 길을 알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일반 스승은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학문을 가르치지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 길을 가장 정확히 알고 제시하신 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눅2: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요1:14). 인생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곳에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도마는 주님께서 가는 길을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그 길을 확실히 알고 주를 위해서 살았습니다(요20:27).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생명의 길입니다(마7:13).

⑵ 자신이 친히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길이심을 밝혔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창3:24).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생명나무의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길이심을 확증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길을 모르고 방황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행16:17)이시며 생명의 길(행2:28)이시며 평강이 길(눅1:79)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인생은 길 되신 그리스도에게로 나가야 합니다. 모든 왕들도 그리스도를 찾아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길 되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天國)의 백성(百姓)이 될 수 있습니다.

■ 어느 젊은 벤처회사 사장

이분은 너무나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열 살 때 아버지가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공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연히 학벌 배경도 없습니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겨우 밤에 야간 공고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공부가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3년을 직장생활 하다가 퇴직을 했습니다. 그때 퇴직금 50만원을 받아서 그것으로 가게를 얻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10여 년 만에 사업이 대성해서 정부가 인정하는 벤처기업인으로 선정되었고 코스닥시장에 등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10여 년 만에 사업규모가 1천억 규모의 사업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이분에게 “왜 사업을 시작했는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주일을 내 마음대로 지키고 교회학교 교사를 마음껏 하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까 주일날도 출근해서 예배에 출석을 못하고 그때마다 아이들을 교회에 맡기고 출근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안 되겠다싶어서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교회학교 교사를 마음껏 하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 그 동기가 참 중요합니다.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가?” 하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동기가 분명하고 자신이 있으면 이미 반은 성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참 길을 찾는 다는 것은 쉽게 찾아질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길을 찾았다면 혼자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찾은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사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살기는 살되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를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의 길과 구원의 길을 찾았습니다. 이 길로 함께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일하는 교사들을 돌아보는 아름다운 신앙의 덕을 쌓기를 바랍니다.

Ⅲ. 희생하신 선생님

(요13:13-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도 자신은 희생할만한 신분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자신이 희생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운데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자신이 희생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알로 범죄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마27).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없는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대신하여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신 스승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나눠 주신 분입니다. 그 생명은 또한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요1:4).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십니다(요6:35).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자는 생명의 주를 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생명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 자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원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희생을 하신분입니다.

(요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의 목숨은 그 누구의 강압에 이끌려 버린 목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순순히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8)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를 위하여 자원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값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자원하여 오셨으며 자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자원하여 잡히시고 자원하여 죽으신 것입니다(마27장). 이러한 사실을 볼 때에 그리스도는 인류의 참된 스승이십니다. 이러한 스승은 세상에는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봉사해야 하며 기꺼이 마음과 몸을 드려야 합니다.

■ 아우그스트 프랑크의 이야기

17세기에 할레라는 곳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아우구스트 프랑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고아들 먹일 돈이 없어 고민하는데 한 거지 과부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돈 좀 달라고 하는데 마음은 아팠지만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도와줄 여유가 없어요.”

그러자 그 과부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모든 희망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너무 가슴 아파서 프랑크는 골방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곧 신비한 평화가 그의 마음속에 임했습니다. 한 끼 정도는 굶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방에서 나가서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금화 하나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프랑크는 아이들에게 한 끼만 금식하자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굶지 않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날, 그는 한 부자로부터 금화 12개와 스웨덴의 친구로부터 금화 2개를 받았고 곧 이어 그의 필요를 들은 근처의 한 영주로부터 금화 500개를 기부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프랑크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희생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이 세상에 희생이 없는 성공이란 없습니다. 희생이 없었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우리 앞에 있던 누군가가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실망하지 맙시다.

맺는 말

진정한 우리의 스승은 그리스도입니다.

1) 본을 부여주신 스승입니다.

2) 길을 가르치신 스승입니다.

3) 희생을 보여주신 스승입니다.

오늘날은 배움의 시대입니다. 많은 선생에 수요를 느끼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많지만 스승이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비탄스러운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처럼 본을 보여주시며 길을 가르치며 희생하는 스승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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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함께

스승의 날이 겹쳐진 주일 이 시간 최고의 스승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러시아 장군이 이스라엘의 한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장군은 자신의 환영식에 나가 인사말을 했습니다.“훌륭한 도시를 방문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도시에서도 많은 현인들이 태어났으리라 믿습니다.”그러자 한 랍비가 말했습니다.“글쎄요, 내가 알기로는 이 도시에는 아기들만 태어나는데요.”라고 했습니다. 이는 훌륭한 사람은 선천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교육입니다.

一. 인간을 교육하는 최고의 스승은 누구일까요?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최고의 스승은 어디에 있는 누구이겠습니까? 이에 대한 해답을 이야기로 대신하겠습니다. 한 소년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소년은 깊은 숲과 황량한 사막을 헤맸으나 위대한 스승을 찾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너무 지쳐서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흰 수염과 맑은 눈동자를 지닌 한 노인이 나타나 소년에게 물었습니다.“소년아 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소년이 대답했습니다.“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마. 지금 곧 너희 집으로 돌아가 보아라. 그리하면 한 사람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분이 바로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란다.”소년은 위대한 스승을 빨리 만나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년이 대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와 그 소년을 맞았습니다. 그“위대한 스승”은 다름 아닌 소년의 어머니였습니다.

부모님이 곧 최선의 교육자이며 이 세상에서 최고의 스승입니다. 1차대전 후 처칠(1874-1965)은 대독강경책을 인정받아 연립내각의 수상이 되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냄으로써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영국에서 그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런던의 한 신문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쳤던 교사 교수들을 취재하여“위인을 만든 스승들”이란 제목으로 보도해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기사를 본 처칠은 신문사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귀 신문의 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 한 분이 빠졌습니다. 그분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어머니의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의 성장 과정의 특성을 본다면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태어나서 0살~4살 사이에 인간의 기본 인격의 50%가 형성되고, 4살~6살 사이에 30%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6살까지의 기간에 기본인격 80%가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기억되는 것이 지, 정, 의 혹은 희, 로, 애, 락 등의 기본 인격요소들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두뇌가 형성되는 것도, 태어나서 3세까지 65%가 형성되며, 3세에서 10세 사이에 30%, 10세에서 20세 사이에 5%가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태어나서 10세까지 두뇌의 95%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뇌에서 맨 먼저 기억하는 것이 지,정,의 또는 희,로,애락 등의 기본 인격요소들이라고 합니다. 어린이가 성장하는 이 기간에 가장 가까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이 어머니나 아버지입니다.

현대의학에 의하면 인간이 먹는 음식과 인격은 큰 함수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열 살 이전에 우유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도덕성이나 두뇌발달에 모유를 먹고 자란 아이들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밝혀졌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언행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어버이 주일에 유치부 어린이들의 성경 암송 발표가 있었습니다. 성도들 앞에서 유치부 어린이들이 성경구절을 한절씩 암송하는데 한 아이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 어린이가 외울 성경 구절은 에베소서 6장 1-3절 부분이었습니다.“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그런데 “공경하라.”는 말의 뜻을 잘 모르는 채 큰 소리로 씩씩하게 암송하던 이 아이는 그만“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요즘 자녀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소처럼 공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는 대신, 소가 먹는 우유를 먹고 자란 것도 한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어른들이 간과하는 어린이의 특성은 말은 못하지만 어른들의 말을 다 알아 듣는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흔히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유치부 어린이가 알아듣는 어휘 수가 2,487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거의 다 알아듣는 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끼치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영향은 지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二. 최고의 스승이 가르칠 교육방법은 무엇입니까?

1.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어린아이의 성장과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최고의 스승은 부모입니다. 최고의 스승들에게 하나님은 교육방법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본문인“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하신 것입니다. 주의 교양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교양”에 대해 국어사전에는“교육을 받거나 사회 규범예절 등을 익힘으로써 이뤄지는 고상한 품성이나 품행”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교양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나 인품을 몸에 익혀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삶의 교양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교양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낮아진 모습니다.

빌립보서 2:5-8에 기록하기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하나님과 동등 됨을 떠나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높고 높은 보좌에서 낮고 추한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되 탄생하신 자리가 어디입니까?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되 당시 최고 권력의 산실인 로마 황실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가장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의 저택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지혜자의 도시로 알려진 아테네의 지혜자의 집에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되 사람이 생활하는 방이 아닌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자리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인품이며 교양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님의 겸손한 모습을 보면서 자라도록 하는 것이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지혜자의 삶입니다. 겸손은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8:12에“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하셨으며, 잠언 16:18 말씀에는“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넘어지지 아니하고, 패망하지 아니하고, 성공하여 존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실패하여 천대받으며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성공하여 존귀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교육시켜야 합니다. 부모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삶을 몸에 익혀 교양이 되도록 하므로, 자녀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고 자라도록 실물 교육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일본 수상으로 8년 가까이 수상직을 역임했으며,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사또 전 수상에 대한 이러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분이 수상 재임기간 중에 손자가 초등학교에 4학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손자의 담임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오셨는데 그 수상이 현관에서 무릎을 꿇고 선생님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잘 대접을 해서 보냈던지 그 손자가 어리둥절해서“할아버지, 선생님이 높아요? 수상이 높아요?”하고 물었습니다.“물론 선생님이 더 높지, 초등학교 때 우리 선생님이 나를 잘 가르쳐 주셔서 오늘 내가 수상이 된 것 아니냐. 그러므로 가장 높은 이는 선생임이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어린 손자에게 본을 보인 할아버지의 겸손에 대한 교양교육이었습니다.

둘째, 섬김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양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섬김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겨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가정에서는 부모님을 받들어 섬기셨습니다. 부모님을 섬기시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극한 고난의 순간에도 어머니 마라아의 앞날을 걱정하시며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밖에서는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셨습니다. 죄인과 병든 자, 가난한 자, 천대받던 이방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신 섬김의 교양 교육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실천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2-15)하셨습니다. 섬김은 아름답습니다. 섬김의 모습 앞에서는 모두가 머리를 숙입니다. 섬김은 신앙성숙의 최고봉입니다. 그래서 섬김을 가리켜 신앙생활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섬김은 존귀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섬김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3-45)하셨습니다.

섬김은 낮아짐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 으뜸의 자리에 이르는 삶의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이 사회에서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머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섬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섬김에 있어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주의 교양인 섬김의 삶으로 자녀들에게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셋째, 희생의 삶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보이신 삶의 교양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죄사함 받고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희생이란 무엇입니까?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희생이 없는 이기적인 삶은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예언하시기를“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디모데후서 3:1-2)라고 하셨습니다.

뉴욕 퀸즈에서 한 여자가 깡패에게 구타당하여 죽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5층 아파트들이 사방에 둘러서 있는 한복판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비명이 연거푸 들렸기 때문에 여러 창문에서 사람들이 구타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얼른 알리거나 밖으로 나와서 도와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15분이 경과했고 이 여자는 죽었습니다. 죽은 여자의 이름이 키티 제노비즈였기 때문에“제노비즈 사건”이라고 하면 무관심한 방관자를 뜻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제노비즈 케이스를 여러 종류로 분석했습니다. 깡패에게 겁먹은 자, 이익 없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 자, 구경만 즐기는 잔인한 자, 남의 일에 전혀 무관심한 자 등 여러 종류인데 결국은 이기적이며 사랑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녀들을 양육하되, 부모가 먼저 희생의 삶을 실천하면서 교육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희생을 모르는 삶, 사랑이 메마른 삶을 보고 자란다면 그것은 훗날 그를 낳고 기른 부모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디모데후서 3:1-2)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설교학 교수인 블랙우드는 그리스도인이 부모들이 남겨야 할 세 가지 유산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기쁜 기억의 유산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정에서 좋은 기억을 가지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기억이 있으면 죄악 가운데서도 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모들의 주일 성수하는 모습, 예배드리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어른 존경하는 모습, 남을 돕는 모습 등은 아이들에게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습관의 유산입니다. 아이들의 생일날 음식점에서 낭비하는 모습보다 아이들 과 함께 보육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가 추억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높은 생의 목표의 유산입니다.“우리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지만 돈을 위해 산다.”는 등의 기억을 남겨주는 것은 불행이라고 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고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유산이라고 했습니다.

3.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 하셨습니다.

주의 훈계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중심하여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5-17)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녀들을 가르치면 세계 속에 우뚝 선 성공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28:1에“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 대해 성경은 말씀하시기를“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편 119:98-10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정확함을 증명하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국시는“자녀에게 땅을 물려주지 말고‘이 교육’을 물려주라”고 말합니다.“이 교육”이란 구약 성경 신명기 28장 1절-24절과 신명기 6장 6절의“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는 사상을 주제로 한“어린이 선교원”교육입니다. 그들은 자녀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받는 교육이 아버지는“진실교육”을“어머니는 신앙 교육”“선교원에서는 신앙적 전인격 교육”을 중점 실천하여 세계의 뛰어난 민족으로 키웠습니다.

유대인들의 유아기의 전인격 교육에 사용되는 그들의 교과서에는 호랑이, 사자, 늑대, 곰, 바둑이, 토끼, 병아리 등 동물을 교육의 교재 및 교과서로 다루지 않습니다. 동물들을 교육교재로 다루는 일은 유대인의 지혜 교육서 인“탈무드”15만장 속에 단 1절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린이에게 동물견학보다 거룩한 성전견학으로서 그들의 자녀를 더러운 동물적 본능으로부터 격리시킵니다. 동물로 세뇌되는 교육보다는 벧하세퍼드(어린이 선교원)라는 유아학교를 세워“신앙적 전인격”으로 인간의 기초를 바르게 놓아줌으로써 세계인류 가운데 자녀교육에 가장 성공한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국제유대인 연구소의 발표를 참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세계 100대 재벌 중 85명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록펠러 재단, 포오드 재단, 로스와일드 재단, 몰건 재단, 류랑 재단, 카네기 재단, 듀봉 재단, 리이맨 재단, 알베르 재단, 오나시스 재단 등 세계의 모든 부를 누리고 있는 수많은 재벌들은 그들이“뱉하세퍼트 즉 어린이 선교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 세계과학의 두뇌발명가들의 거의가 유대인입니다.

T.N.T 발명가 와이즈만 박사, 상대성 원리와 원자탄 발명자 아인슈타인 박사, 결핵균 발견자 코호 박사, 스트렙토마이신 발견자 세이빔 박사, 수소폭탄 발명자 오펜하이머 박사, 아폴로 13호를 달에 착륙시킨 브라운 박사,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 24%가 유대인이며, 미국대학의 유명 교수 대부분이 유대인이며, 미국 하버드 대학 창설자,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등 셀 수 없는 많은 과학의 두뇌들이“어린이 선교원”에서 자랐습니다.

셋째, 세계적인 철학자, 교육자, 문인의 대다수가 유대인입니다.

헤겔, 칸트, 스피노자, 데칼트, 훗세르, 니이체, 파스칼, 프로이드, 에릭프롬, 루소, 부버, 하이네, 어윈쇼 등 수많은 사상철학, 교육의 두뇌들이 배출된 것은 역시“어린이 선교원”에 어렸을 때 양육되어 졌다는 것입니다.

넷째,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입니다.

베토벤, 헨델, 슈만, 모차르트, 멘델스존, 바그너, 차이코프스키, 알렌코프랑, 피사로, 세잔느, 피카소 등 인류를 깜짝 놀라게 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어렸을 때“어린이 선교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섯째, 정치가 중에서도 유대인은 뛰어납니다.

루즈벨트, 아이젠하워, 존슨, 키신저, 드골, 퐁피두, 미테랑, 처칠, 에딘버러경(영국 옐리자베스여왕 부군), 프랑코 등 해아랄 수 없이 많은 정치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유아교육을“어린이 선교원”에서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기타 분야에서도 성공적인 유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희극배우 채플린, 코메디안 크로마로프, 엘리자베스테일러, 몽고메리 그리고 헐리우드사, 폭스사, 걸프 오일, 스탠다드로이얼 석유, 디지셀 석유, 필립스 오일, 워싱턴 포스트지, 뉴욕타임지 등 소수 유대민족이 이 지구상의 상권, 금융권, 경재권, 과학권, 교육권, 철학, 예술, 사상, 외교정치, 모든 분야를 석권하는 유대인들의 두뇌는 어디서 키워지는 것일까?

독일의“카이젤”은 하나님이 존재해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할 때 그는“지구상의 유대인들의 존재”를 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러시아의 피터대제에게 신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했더니“유대인의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지혜와 총명, 지식, 넘치는 축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유대인의 교사인 랍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어린이 선교원”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의 신앙교육은 무엇보다도 소중하여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느껴지는 엄숙한 분위기 귀에 들리는 찬양은 어린아이들의 인격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의 신앙교육은 더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최고의 스승은 어린아이의 부모입니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됨됨이의 근본을 세워주는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교육교재는 성경이며, 부모가 전수받을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방법은 말이 아닌 몸에 배인 그리스도의 교양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5-9에 말씀하시기를“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되 입으로만 가르치지 말고 부모가 먼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하셨습니다. 그 다음 자녀들에게“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본문인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하신 말씀과 의미가 같습니다. 부모가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의 교양과 인격을 내 것으로 한 후 삶의 본을 보이므로 자녀들을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자녀들이 주의 교양을 닮은 부모님의 삶을 보고 듣고 본받게 됩니다. 이렇게 자라난 자녀들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인도함을 받는 복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자녀들에게 최고의 스승이 되고자 기도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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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16. 주일 설교: 나는 스승이다(요13:12~15). 양은익 목사.

2021.5.16. 주일 설교: 나는 스승이다(요13:12~15). 양은익 목사.

나는 스승이다(요13:12~15)

오늘은 스승의 주일로 지키면서 스승의 뜻을 새기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1.

스승은 바르게 이끌어 주고, 가르쳐 주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무엇을 하든 배우고, 자라기 위해서는 가르쳐 주는 이, 스승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친구 아니면 스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는 위로하라고 보내 주신 사람이고, 스승은 배우라고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입니다. 둘 다 삶의 동반자고,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스승이 스스로를 이긴 사람이라면 스승은 자기를 이기고, 극복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승이 될만한 사람입니다.

시141:5에서 시편 기자는 이런 기도를 합니다.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 주시고, 악인들에게 대접을 받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새번역). 악인의 길로 갈 때 꾸짖어 주는 그런 의인, 그런 사람, 그런 스승을 달라고 합니다. 이런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수의 기도고, 삶을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스승을 가지고 사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스승의 권위는 시대와 상관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없어야 하지만 권위는 있어야 합니다, 권위가 사라지면 가르침이 사라집니다. 아쉬운 것은 권위주의를 없애려다가 권위까지 없어지고 있습니다. 스승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기대하지 않고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스승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선생님들, 스승들은 그냥 쌤 아니면, 꼰대가 되 버렸습니다.

18세기 성해응이라는 사람이 쓴 [師說](교사의 말)이라는 글에 나온 한 대목 읽어 드리겠습니다.

‘백 년 사이에 풍속이 나날이 떨어져서 꼭 제 집에다 스승을 데려와 먹여 살리면서 그 자제를 가르치게 한다. 저 자제들은 평소에 교만한 데다 그 먹여 살린다는 위세를 믿고 스승에게 군림하려 든다. 스승도 또한 이 때문에 권위를 세울 수가 없으니, 꾸짖거나 책망할 수도 없고, 종아리를 치거나 회초리를 들 수도 없으며, 다만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다. 자제들도 이미 스승을 낮추어 보면서 가르침을 받게 되니 학업에 진전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또 이에 대해 스승이 힘쓰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있다. 이것은 썩은 고삐를 주고서 사나운 말을 길들이는 것과 다름없다. 이 때문에 현명한 이들은 스승이 되려고 하지 않고, 스승 노릇 하는 이들은 다만 무언가 바라는 사람만 있을 따름이다’(성해응, 1760-1839, 師說)

조선은 군사부 일체의 시대인데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스승의 권위가 바닥입니다. 우리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스승이 필요하다면 스승의 권위는 살아있어야 하고, 세워줘야 합니다. 존중하고, 따를 때 배우고 가르칠 수 있지, 고용인 처럼 하대하고, 군림하면 망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2.

우리에게는 확고하게 따라야 할 권위있는 스승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선생 또는 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호칭이 맞다고 하신 후에 자신이 선생이요, 주님이심을 강조하십니다.

13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나는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선생이시기도 합니다. 선생됨을 강조한 예수님의 의도와 뜻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스승이니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스승이니,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담고, 따라야 하는 것이겠지요! 스승을 따르는 이들, 스승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스승인데 그 스승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으면, 스승이라 할 수 없고 스승을 따르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이 바로 스승이 있는 곳’(道之所存 師之所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처럼, 진리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습니다. 진리가 말씀이라면 말씀이 있을 때 스승이신 예수님이 계신 것이지, 말씀이 없고,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스승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제자가 되야 하는가? 제자에 대한 색다른 정의가 있습니다. ‘제자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어제 알고 싶었던 것과 오늘 알고 싶은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스승에게 가르치는 사람. 어제 알고 싶었던 것을 오늘 가르치면 제자들이 다 도망간다는 사실을 스승에게 가르치는 사람. 새로운 접근, 새로운 태도를 고민하지 않으면 도망간 제자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승에게 가르치는 사람. 스승은 더 이상 존경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아픈 현실을 스승에게 가르치는 사람. 제자는 스승의 스승’ (정철)

스승을 안주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따르는 제자가 좋은 제자고, 발전이 있는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이 꼰대셨다면 이런 당돌한 도전은 거부하셨을텐데 예수님은 꼰대가 아니셨습니다. 꼰대는 ‘라떼’(나때) 밖에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과거 경험과 생각에 묶여 있는 게 꼰대고, 꼰대질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막혀 있지 않고 열려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경계를 허무는 유연함이 있습니다. 스승 예수님에게서 놓치지 말고 봐야 하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카리스마 넘치는 가르침에 놀랐지만 정작 예수님은 창녀들, 간음하는 여자들, 일급 죄인이라 여기는 세리들, 만나서는 안되는 병자들에게 경계를 풀고 다가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 발 씻어 주는 모습 보십시오. 제자들의 권력 다툼 욕망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슬쩍 와서 정권 잡게되면 한 자리씩 달라고 요구했던 것(막10:35-37), 기억해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이 이를 알고 화를 냅니다. 이같은 높음을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딴 말씀 하지 않고 스승되신 자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제자들이 스승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있어도,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목적하는 바가 있기에 고정 관념에 묶이지 않고 기꺼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는 주님의 부드러운 손만큼 유연한 모습입니다. 유연함으로 가르치시는 것이고,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꼰대의 모습이 아니고, 스승의 모습입니다. 15절에 보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가르침 중의 최고의 가르침은 ‘자기 반성’입니다. 자신을 돌아 보며 반성하다 보면 묻게 되고, 묻다 보면 고민하게 되고, 고민하는 마음 가운데 내압(내적인 압력)이 생겨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서 성장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무릎 꿇고 발을 씻기는 스승을 위에서 바라보는 제자들은, 정상이라면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었고, 부족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4.

진짜 스승은 창조를 원하지 모방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반성하고, 새롭게 보면서 새로운 삶과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원하는 게 스승입니다.

자기 반성을 하게 만드는 스승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봤습니다. 사명에 대한 확신, 흔들리지 않는 믿음,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가는 추진력, 난관을 돌파하는 힘과 담대함, 섬세한 사랑, 모든이들에게 열려있는 개방성과 친화력, 편견에 매이지 않는 포용력, 죄에 대한 단호함과 용서에 대한 뜨거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늘 아비지을 향하는 기도자의 모습. 자기 반성을 하게 만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은 보면서 배우기 원하고,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난제와 어려움을 풀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스승이다’ 하신 스승 예수님께 좀 더 집중하십시다. 막막할 때마다, 막힐 때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道之所存 師之所存)고 했으니, 말씀을 보면서 스승 예수께서 주시는 해법, 꼭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 아이디어, 길 발견하게 하셔서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녀들과 가정과 교회와 세상의 제일 스승, 최고의 스승이 예수님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꼰대가 아니십니다. 여전히 시대와 호흡하는 참신하고, 깨어있는 열려있는 스승이십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배우고-익히고-기뻐하고. 스승 예수를 따라가는 여러분의 길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스승의 날 : 스승을 기억하라 (고전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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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기억하라

2012.5.20

고전 4:10~16

교회의 절기 중에 공식적으로 “스승의 주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의 날’에 맞춰서 ‘스승’에 관한 설교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로부터 배웠고,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누군가로부터 배웠고 배우고 있고, 앞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니까 교회에도 “가르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 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행8:30~31)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 내용을 “지도해주는 사람”, 즉 스승이었다.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가르치는 자”는 존경을 받아 왔다. “군사부일체-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다”는 말처럼, 스승을 임금과 아버지의 위치로 높게 보았다. 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마라”는 말도 있는데, 그만큼 스승을 존경하고, 신뢰하라는 의미이다.

“스승”이 뭐 길래 그런 존경과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스승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승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가르치는 사람, 둘째, 인도하는 사람.

단순히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은 스승이 아니다. 그렇다고 앞길을 인도해주기만 하는 사람도 스승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아무리 가르치고, 인도한다고 해도, 나쁜 것을 가르치고 나쁜 길로 인도하는 하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욕 잘하는 방법”, “도둑질의 노하우”, “컨닝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스승”이 아니다.

이렇게 “스승”의 자격은 까다롭다. 좋은 것을 가르쳐야 하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고, 격려하고, 삶 전체를 지도하는 사람, 나의 인생 전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다”고 한탄하는게 아닐까?

이런 스승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사랑받고 존경받는 위대한 스승 바울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지도했는지, 스승으로서 어떤 충고를 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고린도 교회에 대해 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라는 상업 도시에 세워진 교회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그 문제들을 이 시간에 다 언급할 수는 없고, 오늘 설교와 관련된 문제점을 이야기 하자면, 성도들 간에 “팬덤”으로 인한 분열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좀 유치 할 수도 있지만, 고린도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성도들이 다투는 이유 중에 하나는 누가 진정한 스승이냐는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바울이 갑(甲)이다”, 반대편에서는 “무슨 소리냐 아볼로가 진리다” 이렇게 누가 최고냐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3장의 주된 내용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누가 최고의 스승이냐”는 문제로 다툰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바울과 아볼로)는 그리스도의 일꾼-종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당신들한테 인정받고 존경받고, 팬을 확보하려고 이 일을 하는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는 의미다.(4:1~2)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바울은 “사람들(성도들)”의 인정을 받고, 인기를 끌기 위해서 일 하는게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바라고 기대하는게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인정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바울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종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인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판단하는 사람이 누구든, 어떤 판단을 하든, 판단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자기가 바울의 주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바울은 심지어 자기도 자기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4:3~5) 왜냐면, 자기를 판단하는 그 순간, 자신이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바울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을 좋게 판단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성도들은 바울을 판단(평가) 하면서, 자기들이 마치 바울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행세했다. 이는 곧 자신이 바울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뜻이 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바울과 아볼로를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 하는게 아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아볼로의 가르침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은혜를 깨달아야 했다. 바울은 말한다. “누가 너희를 구별했느냐?”(4:7),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를 구원한 분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구원한 분이 누구인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이시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치 자기가 잘나서 구원 받은것 처럼 우쭐하고, 교만에 빠져서는 안된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바울과 아볼로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전락하고(4:9),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고, 약해지고, 비참해지고(4:11),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정처 없이 떠돌고, 수고하고, 모욕을 당해도 축복하고, 박해를 받아도 참고 견디고 있다.(4:12~13)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말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배부르고, 풍성하고, 왕 노릇한다(4:8),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4:9),

웃기지 않은가? 고린도교회에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한 “스승” 바울은 모진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참고 견디고 있는데, 정작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다른 말로 하면 바울의 도움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이 바울보다 나은 사람인 것처럼 바울을 평가하고, 이러쿵 저러쿵 점수를 매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 바울을 평가할 정도로 대단한 것일까? 아니다! 정 반대다. 실상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고, 가볍다.(3:1)

그러면 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입방아에 오르면서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것일까?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성도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기 위해서이다(4:14)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고린도교회와 성도를 사랑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영적인 자녀였다.(4:15)

바울은 스승으로서, 아니 스승의 차원을 뛰어넘어, 아버지의 마음으로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를 쓴 것이다. 이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과, 사명, 하나님을 위한 책임감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끝까지 돌보고, 잘 가르치겠다는 처절하도록 뜨거운 가슴 때문에 편지를 썼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한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4:16) 바울이 잘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흠잡을 데가 없어서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하는 것일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무한한 헌신을 했기 때문에?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모습! 예수님을 닮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을 본받으라는 의미다.

은석교회의 바울은 누구인가? 중고등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가 여러분을 위해 고난당하고, 자존심 상하고, 남몰래 눈물 흘리고, 상처 받고, 속 썩고, 그러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여러분을 지도하고 가르치고 있는가?

여러분들 옆에 앉았다. 바로 “선생님”이다. 여러분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선생님들을 두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선생님들의 주인, 선생님들의 하나님이라는 말 밖에 안된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선생님과,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선생님들이 원하는 것도 오직 그거 하나뿐이다. 여러분 잘 가르쳐서 과외비 받는거 아니다. 존경받고 인정받으려고 하는거 아니다. 인기 끌고, 칭찬 받으려고 그러는거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일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불살랐듯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몸부림쳤듯이, 우리의 선생님들도, 여러분들을 위해 헌신하고 땀 흘리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여러분들의, 임무는 “판단”이 아니다. 판단은 오직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맡기라! 우리는 선생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면 된다! 그 일을 위해 힘쓰자!

우리를 위해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의 헌신과 은혜, 수고를 기억하며, 선생님을 위해 기도하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문자에 답문도 잘하고, 때로는 먼저 안부를 묻기도 하고, 공과공부 시간 때 집중해서 잘 듣고, 같이 밥도 먹고, 그런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만 명이나 되는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러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 때문에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고전4:15 ver.쉬운성경)

스승을 넘어 영적인 아버지가 되시는 선생님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중고등부가 되자. 그때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선생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참 뜻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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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주일 설교, 열왕기하 2장 1-15절, 스승과 제자

스승의 주일 설교, 열왕기하 2장 1-15절, 스승과 제자 설교문 / 목회자료 https://blog.naver.com/angellotte/221932508114 스승과 제자 본문 : 열왕기하 2장 1절~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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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본문 속에는 지연이와 선생님처럼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가 나옵니다.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엘리야 선생님은 참으로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많아 자신의 예언자 직분을 계승해 줄 후계자를 찾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후계자가 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예언자 생도 학교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벧엘과 여리고의 여러 학생들 가운데 오늘 특별히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선지자 학생 한 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바로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의 후계자로 엘리야보다도 두 배나 더하는 영력을 얻게 된 놀라운 인물입니다. 오늘 저는 본문에 나타난 엘리사가 어떻게 하여 이러한 위대한 예언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면서,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올바른 두 가지의 자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엘리사는 엘리야 선생님을 끝까지 동행하여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녀야 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엘리야의 여행은 길갈에서 시작되어 벧엘에서 여리고를 지나 요단까지 이어졌습니다. 옛날에는 교통이 불편하여서 여행을 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연로한 엘리야 선생님이 걸어서 여행을 하는 일이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던 엘리사는 혼자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엘리야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험난한 여행 과정을 함께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엘리야는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리라”라고 말합니다. 이 때에 엘리야는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대범하게 말하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길갈에서 벧엘로 갈 때뿐만 아니라, 벧엘에서 여리고로 갈 때에도, 여리고에서 또다시 요단으로 갈 때에도, 항상 스승이신 엘리야 선생님을 따라갔던 충직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심 많은 제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도마를 통해서도 엘리사처럼 스승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제자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실 때에, 다른 모든 제자들은 유대인과 랍비에게 돌을 맞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유대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직 도마만이 유일하게 죽음을 무릅쓰고 주를 따르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요한복음 11장 1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스승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갈 수 있는 제자, 이 제자는 진정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을 섬기는 자일 것입니다.

요즘 들어,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나 사랑이 너무나 쉽게 무너져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 엘리사의 경우는 스승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느껴질 정도로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너무나 무례하게 혹은 무관심하게 선생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선생님이 나를 향해 쏟는 애정과 관심과 수고를 감사한 마음도 없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엘리사처럼 그리고 도마처럼 스승이 가는 험난한 길을 함께 가겠노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선생님을 사랑하고 걱정하고, 그를 따를 줄 아는 멋진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엘리사에게 주어진 갑절의 영력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학교뿐만 아니라 이곳 교회에도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하며 땀 흘리는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헌신하고 계신 것을 여러분들은 이해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그렇다면, 가장 좋은 것을 가르침을 베푸시는 선생님과 먼저 나눌 줄 아는 귀한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엘리사는 배움의 열정이 강한 제자였습니다.

스승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는 배움의 열정이 강한 제자입니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푸른 색이 쪽빛에서 나왔다”라는 뜻으로서, 쪽빛에서 나온 푸른 색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스승보다 제자의 학문이 더 뛰어난 경우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엘리사의 경우도 청출어람에 해당됩니다. 어느 날 엘리야 선생님은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때에 엘리사는 한 마디의 주저도 없이 거침없이 엘리야에게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능력의 두 배를 갖길 원합니다.” 엘리사는 제자로서의 최대의 역할이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사는 엘리야 선생님의 뒤를 잇는 후계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갑절의 영적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학교나 교회에 선생님이 계십니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여러분들은 배우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선생님으로부터 배울만한 것을 모두 배우려고 노력할 때에 선생님들은 가장 기뻐하십니다. 선생님을 기쁘게 하고 싶다면, 열심히 질문하고, 배우고, 공부하는 제자기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들께 말씀드립니다. 엘리사 같은 제자를 두었던 엘리야 선생님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요? 여러분에게도 엘리사와 같은 제자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물려 줄 수 있는 후계자가 있습니까? 만일 엘리야가 선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선생으로서 올바른 지식과 덕과 영력을 바르게 갖추지 못했다면, 엘리사와 같은 제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선생님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하여, 가르치는 본분에 모든 노력을 다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학생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사랑을 쏟고 헌신을 다하여, 엘리사와 같은 위대한 제자를 배출해 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마도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험난한 여행 가운데에서도 스승을 믿고, 묵묵히 스승의 길을 따르며, 스승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보였던 것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제자로서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되려고 했던 열망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학생 여러분 이렇듯 갑절의 영적 능력을 얻을 수 있었던 엘리사처럼 뜨거운 배움의 열정을 가지고 스승을 따르는 길이 하나님의 뜻이며, 곧 성공의 비결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을 가르치느라 수고하시는 학교 선생님, 그리고 교회 선생님들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할 줄 아는 아름다운 00교회 학생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또한 참된 스승으로서 모든 본을 보일 수 있는 귀한 스승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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