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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 나이 남편 재혼 자녀 딸 아들 – 엔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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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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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 남편 김호경, 심수봉 이혼과 재혼 심수봉 … – 코리안좀비

심수봉 남편 김호경, 심수봉 이혼과 재혼 심수봉 결혼실패와 인생사 대한민국 트로트가수 심수봉을 모르는 사람들은 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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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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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심수봉) 김호경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 다음블로그

심수봉 첫번째 남편 한기석 결별이유. * 심수봉 두번째 남편 … 심수봉 세번째 남편 김호경(심수경 배우자 김호경) … 심수봉 과거 사진(데뷔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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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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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심수봉 남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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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 프로필 남편 아들 딸

심수봉 프로필 남편 아들 딸

가수 심수봉의 최근 근황 소식으로는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 콘서트를 한다고 합니다. 데뷔 26년 만의 단독 TV쇼로 비대면 콘서트라고 하네요. 콘서트에서 즉흥 댄스와 힙합 버전 심수봉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수 심수봉의 아들 딸 남편 등 다양한 정보와 과거 젊은 시절 사진이 궁금해져서 살펴봤습니다. 그럼 밑에서 풋풋하고 앳된 과거 사진부터 아름다운 딸, 훈훈한 아들 사진을 보실까요? 두근두근두근!

먼저 가수 심수봉 프로필부터 보겠습니다. 본명 심민경, 국적 한국, 1955년 7월 11일생으로 만으로 나이 66살이네요. 고향 지역은 충청남도 서산시이며 혈액형 O형이라고 합니다. 가족 관계는 부모님 아버지 심재덕, 어머니 장형복, 남편 김호경, 아들 한승현, 딸 심민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력 사항은 서로은로 초등학교, 인화여자 고등학교, 명지대학교 경영학이며 종교 개신교입니다. 소속사 라이트웨이브 엔터테인먼트로 데뷔 시기는 1978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이라고 하네요.

심수봉 직업 가수로 한국에서 유명한 가수입니다. 심수봉 집안은 음악가 집안으로 큰아버지, 아빠, 고모 등이 음악을 했고 심수봉은 재즈 전공을 했다고 하네요. 과거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수 있는 미8군 무대에서 로콘롤 밴드 ‘논스톱’ 드리머로 로 무대에 올랐다고 합니다. 이후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하여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 ‘그때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 당시 불렀던 ‘그때 그 사람’은 히트를 쳤고 이 계기로 가수가 되었다고 하네요. 심수봉은 대표곡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그때 그 사람, 사랑밖에 난 몰라, 무궁화, 비나리, 미워요, 백만송이 장미 등이 있습니다.

심수봉은 과거 첫번째 남편과 정식 결혼을 하기 전에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을 낳고 헤어졌고 이후 사업가와 결혼을 했습니다. 두번째 남편 사이에는 딸 1명이 있었으나 결혼 6년 만에 이혼을 했다고 하네요. 전남편 분과 이혼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전남편 분과 이혼 후 친딸 심민경과 헤어져 살았는데 딸이 9살 때 갑자기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걸그룹 핑클 사인을 받아 달라는 전화였다고 하네요. 핑클 사인을 받으면서 딸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첫번째 이혼 후 아들에게는 아버지와 단란한 가정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재혼을 했지만 사춘기 시절이었던 아들에게는 상처가 되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아들은 사춘기 시절 방황을 했지만 이후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심수봉은 1995년 지금의 남편 김호경과 세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심수봉 김호경 부부의 러브스토리도 살펴봤습니다. 심수봉이 힘들었고 외로웠던 시기에 지금 남편이 너무 잘해주자 감정이 생겼다고 합니다. 가정이 있는 유부남인 줄 알았는데 자신과 똑같이 이혼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네요. 그걸 알고 감정이 커졌고 남편을 생각하며 작사를 했다고 합니다. 남편을 생각을 하면서 만든 노래가 바로 ‘비나리’라고 하네요. 재혼 후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 리즈 시절 사진을 보니 상큼한 비주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단한 동안 얼굴, 탄탄한 몸매가 돋보입니다.

심수봉 딸은 ‘2018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 참석하여 심수봉 대신 대통령 표창을 대리 수상을 하고 소감을 말했다고 합니다. 심수봉 딸은 연예인 뺨치는 아름다운 비주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수봉 아들은 군대 가기 전까지도 마음의 문이 닫혔지만 2011년부터 조금씩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하네요. 2013년에는 ‘여유만만’ 프로그램에 아들과 함께 출연하여 말하기를 아들 한승현은 컴퓨터그래픽 관련 일을 꿈꿨지만 심수봉 기획사 대표 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광고 모델, 콘서트, 신곡 활동, 화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오늘은 트로트 가수 심수봉의 아들 딸 남편 집안 등 다양한 정보와 과거 리즈 시절 사진을 살펴봤습니다. 유익한 정보가 되셨기를 바라며 이상 오늘의 정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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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 콘서트를 한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심수봉은 데뷔 26년 만의 단독 TV쇼라고 하네요. 그래서 오늘은 가수 심수봉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레전드 가수로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졌습니다. 음악가 집안으로 큰아버지, 아빠, 고모 등이 음악을 했다고 합니다. 심수봉은 재즈 전공을 하였고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수 있는 미8군 무대에 로콘롤 밴드 ‘논스톱’ 드리머로 로 무대에 올랐다고 하네요. 1978년에는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하여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 ‘그때 그 사람’을 불렀고 노래가 대박이 났다고 합니다. 다른 대표곡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에 난 몰라, 무궁화, 미워요, 백만송이 장미 등이 있다고 하네요.

프로필 본명 심민경, 1955년 7월 11일생으로 만으로 나이 66살이네요. 고향은 충청남도 서산시이며 혈액형 O형이라고 합니다. 가족은 부모님 아버지 심재덕, 어머니 장형복, 남편 김호경, 아들 한승현, 딸 심민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력은 인화여자고등학교, 명지대학교 경영학이며 종교 개신교입니다. 소속사 라이트웨이브 엔터테인먼트로 1978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으로 데뷔를 했습니다.

첫번째 남편과 정식 결혼을 하기 전에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고 헤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사업가와 결혼을 했고 두번째 남편 사이에는 딸 1명이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결혼 6년 만에 이혼을 했고 친딸 심민경과 헤어져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딸이 9살 때 갑자기 연락이 왔는데 핑클 사인을 받아 달라는 전화였다고 하네요. 그 계기로 다시 딸과 만나게 되었고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남편 분과 이혼 사유는 공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95년 지금의 남편 김호경과 세번째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요. 과거 힘들고 외로웠던 시기에 지금 남편이 너무 잘해줬다고 합니다. 가정이 있는 유부남인 줄 알았는데 자신과 똑같은 이혼 경험이 있는 사람인것을 알고 감정이 커졌다고 하네요. 남편을 생각을 하면서 만든 노래가 있는데 노래 ‘비나리’라고 합니다. 재혼 후 아들, 딸과 함께 살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딸은 ‘2018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 참석하여 심수봉 대신 대통령 표창을 대리 수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오늘은 트로트 가수 심수봉의 과거 리즈 시절, 젊은 시절 등 다양하게 알아봤는데요. 언제나 즐거운 정보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심수봉 나이 남편 재혼 자녀 딸 아들

심수봉

심수봉의 본명은 심민경이며 1955년 7월 11일생으로 올해 나이 67세 입니다. 고향은 충청남도 서산시이며 혈액형은 O형이라고 합니다. 학력 사항은 명지대학교 경영학 학사이며 가족 관계는 남편 김호경과 슬하 2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현재 소속사는 라이트웨이브 엔터테인먼트 입니다.

과거 집안

심수봉은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사망을 하여 아버지와 사별한 어머니가 재혼후 파경을 맞아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으며 그래서 심수봉에게는 이부 남동생과 이부 여동생이 각각 하나씩 생겼다고 합니다.심수봉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했던 음악인 집안으로 아버지, 큰 아버지, 고모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이런 집안의 환경 속에서 심수봉 또한 음악인의 삶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심수봉은 원래 재즈를 전공했다고 하네요.

심수봉은 당시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수 있다는 미 8군에 로큰롤 밴드 논스톱의 드러머로 서기도 했으며 이때 같은 그룹은 아니었지만 같은 부대에서 함께 활동하던 김수희와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심수봉을 트로트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은 드럼을 치는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하는데 이러한 뒷배경이 있다고 합니다. 심수봉은 흔히 드럼 치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카펜터즈의 캐런 카펜터와 함께 이야기 되기도 한다고 하네요.

심수봉은 어린시절 당초 서산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어머니가 재혼 후 파경을 맞자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 은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합니다. 이후 심수봉은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으나 입원 치료를 위해 또 다시 2년 휴학하게 되었고, 인천 인화여고에 뒤늦게 입학하여 1974년 고교 졸업을 했다고 합니다.

심수봉은 음악적인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여러 악기에 능통했으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일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미 고교시절부터 노래를 잘해 노래 부를수 있는곳이라면 어떤곳에서든 노래를 불렀으며 이런 심수봉의 재능을 누군가가 눈여겨 보았는지 1975년에 박정희가 청와대 연회에 심수봉을 불러서 노래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 연회에는 당대 최고의 가수 나훈아가 함께 있었는데 심수봉은 그 자리에서 나훈아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이 모습에 감탄한 나훈아가 주선하여 앨범 작업을 시작하게 되어 이듬해에 신세계 레코드로 들어가게 되어 음반작업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로 인해 음반 작업은 모두 무산되었고, 대학교육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심수봉은 같은 해 뒤늦게 대입준비를 하여 숙명여자대학교 작곡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을 했다고 합니다.

데뷔 활동

심수봉은 1972년 고등학생 시절에 판소리 국악소리가로 첫 활동을 하였으며 이후 2년 뒤 1974년 미 8군 무대 록 뮤직 드러머로 활동했습니다. 4년 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을 통해 가수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여자이니까’ 라는 노래 작품으로 정식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심수봉의 본명은 심민경이며 이름을 바꾸게 된 이유는 가수로써 성공하려면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권유로 어릴 때 스님이 지어준 법명인 심수봉으로 예명을 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학가요제 때에는 심민경이라는 이름으로 나왔고, 데뷔 후에 개명을 했다고 하는군요.

심수봉은 1978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 MBC 대학가요제에 대학생 자격으로 참여를 하였고, 당시 대부분의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음악적 성향이 포크 아니면 그룹사운드이던 시절이었기에 심수봉은 자신의 주 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장을 던졌다고 합니다. 당시 심수봉은 배철수, 노사연, 임백천 등 쟁쟁한 참가자들과 경쟁을 하였고, 결국 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심수봉은 이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노래 ‘그때 그 사람’이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는데요. 이후 심수봉은 인기 연예인으로 발돋움 하게 되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도 그녀를 좋아해서 궁정동 안가에서 열던 술자리에 심수봉을 불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심수봉은 이날 이후로 온갖 시련에 휩싸이게 되었는데요. 1979년 10월 26일 심수봉은 모델 신재순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박정희의 술자리에 불려갔고, 이날도 평소와 별 다를 게 없었던 술자리일줄로만 알았으나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정희를 총살하면서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합동수사본부가 박정희 암살 사건을 강도 높게 조사하면서 심수봉 역시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요.

당시 심수봉은 단순히 현장에 있던 것 뿐이었던지라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이후 방송활동이 금지되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는 등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심수봉은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의 주연으로 캐스팅 되었고, 영화 주제곡 OST도 직접 만들고 불렀다고 하네요. 당시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는 개봉 후 관객 5만명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홍콩으로 수출까지 성사되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심수봉은 그때까지도 가수로서 활동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심수봉은 1979년 드라마 ‘순자의 가을’ OST를 직접 만들어 부르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이 곡이 문제가 없었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노래 제목에 영부인의 이름 순자가 나온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 조치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 곡은 1983년 후배 가수 방미가 이 노래의 제목을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변경한 뒤 가사 일부를 수정하여 인기를 모으기도 했으며 심수봉은 이후 1984년 방송 금지 조치가 해제되자 그 때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 라는 제목으로 다시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심수봉은 1984년 가요계에 복귀한 뒤 직접 작곡, 작사한 곡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수록된 앨범이 외설시비에도 불구하고 2만 여장이나 팔리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다시 전성기를 누렸는데요. 하지만 1985년 발표한 ‘무궁화’라는 곡 역시 히트하였지만 가사가 시대적 상황에 국민을 선동하는 뜻이 있다고 여겨져 방송 하루만에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심수봉은 다른 가수들에 비해 직접적인 정치적 탄압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을 음악에 표현하면서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슬프고 애절한 곡을 많이 불렀습니다.

이후 심수봉은 1987년에는 ‘사랑밖엔 난 몰라’가 히트를 했고, 이후 꾸준히 음반 발매와 함께 콘서트를 하면서 2011년까지 가수로서 활동하였습니다. 심수봉은 공연 위주로 활동을 하다가 2018년 ‘내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라는 신곡 앨범을 발매했으며 그 앨범 중 ‘엄마 사랑해요’라는 곡을 발표 하였는데 그 곡을 발표하고 1년 후 심수봉의 친모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남편 김호경 재혼 아들 딸

심수봉은 과거 10.26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치료를 받기 위해서 한도사 혹은 심령도사라고 불리는 한기석과 연인 사이가 되어 동거하면서 아들을 낳았는데요. 하지만 이후 심수봉은 아들을 낳고, 한기석과 보름만에 헤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심수봉은 사업가 남편을 만나 재혼을 하였는데요. 심수봉은 두 번째 남편과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결혼 6년 만에 또 한번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95년 지금의 남편 김호경을 만나 결혼을 하였으며 심수봉 남편 김호경 역시 심수봉과 결혼 전에 이혼으로 결혼에 실패를 했고, 심수봉과 재혼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심수봉과 남편 김호경은 김흥국의 주선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심수봉이 라디오 PD였던 남편을 먼저 좋아했다고 하며 당시 라디오 방송 PD였던 남편이 심수봉의 섭외를 위해서 잘해주었고, 이것을 자신을 좋아하는 줄 오해하여 남편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심수봉은 그 마음을 담아서 ‘비나리’라는 곡을 부르며 청혼을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심수봉이 재혼을 할 당시 심수봉의 아들과 딸은 많이 방황을 했다고 합니다. 심수봉이 재혼을 한 후에도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해 재혼한 남편과 9년간 떨어져서 지내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심수봉은 한결같이 기다려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재는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하네요.

심수봉 딸 대리수상

처음에 남편 김호경은 많이 무정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요. 심수봉은 이러한 남편에게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진심을 다해 사랑을 전하면 상대도 분명 마음을 열것이라 여겼다고 하는데요. 이제는 완전히 달라져 남편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는군요.

심수봉은 전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되면서 그 사이에서 낳은 딸과 헤어지게 되었는데요. 딸과 연락이 끊겼다가 어느날 어린 딸이 유모를 통해서 핑클 사인을 받아다 달라는 부탁을 했고, 이것을 계기로 딸과 계속해서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심수봉 남편 김호경, 심수봉 이혼과 재혼 심수봉 결혼실패와 인생사

심수봉 남편 김호경, 심수봉 이혼과 재혼 심수봉 결혼실패와 인생사

대한민국 트로트가수 심수봉을 모르는 사람들은 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때 그 사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등과 같은 인기 트로트 곡을 많이 불렀기 때문인데요. 개인적으로도 심수봉 특유의 목소리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심수봉 프로필

심수봉은 본명이 아닙니다. 심수봉 본명은 심민경으로 요즘 이름과 무척 잘 어울릴 정도로 세련된 이름이었지요. 그러나 임팩트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심수봉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당시 임팩트를 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심민경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더 촌스러운 이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수봉 나이는 1955년 7월 11일생이며, 심수봉 데뷔는 1978년 제 2회 MBC 대학가요제입니다. 심수봉 학력은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이며, 소속사는 라이트웨이브입니다.(심수봉 나이)

심수봉 집안

심수봉의 본관은 청송이며, 증조부, 조부, 백부, 숙부, 부친, 고모 등이 모두 유명한 음악가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음악 명문가에서 태어났지요. 음악적 재능을 발휘해서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배웠으며 재즈 음악을 공부하여 로큰롤을 주로 연주했던 보컬 그룹 논스텁의 드럼 연주자로 미8군 부대 전용 클럽 무애에 섰지요. 심수봉은 1975년 처음으로 청와대 연회 초청받아 대통령 박정희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가수 나훈아 앞에서 그의 노래를 멋지게 불러 그녀의 노래에 감탄한 나훈아의 주선으로 1976년 신세기 레코드와 50만원에 음반취입 계약을 맺고 녹음을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훈아와의 인연으로 가수에 데뷔를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수봉 박정희 10.26사건

심수봉은 데뷔와 동시에 그 때 그 사람으로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게 됩니다. 심수봉 데뷔 전 청와대의 초청되었던 인연으로 대통령 박정희는 연회 때마다 심수봉을 초청하여 한동안 청와대 연회가 주무대가되었지요. 하지만 1979년 궁정동 연회장에 초청되어 노래를 부르던 심수봉은 10.26 궁정동 사태에 휘말려 1981년까지 방송 출연 금지조치를 당했습니다. 1984년 방송에 복귀를 하고 가정문제로 침체기에 빠졌던 상황에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수록된 앨범이 외설시비에도 불구하고 2만 여장이나 팔리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심수봉은 다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심수봉 결혼과 심수봉 이혼(첫번째 남편)은 이 시기에 있었습니다.

심수봉은 10.26사건으로 정신적 충격을 치료받기 위해서 만난 심령학자와 결혼을 했지만 아들을 낳고 보름만에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심수봉 재혼을 했는데요. 심수봉 두번째 남편은 사업가와 결혼을 했고, 두 사람 사이에 딸을 낳았지만 결혼 6년만에 파탄이 났습니다. 그리고 1995년에 드디어 지금의 남편 김호경과 결혼을 했습니다. 심수봉 남편 김호경 역시 심수봉과 결혼 전에 이혼으로 결혼에 실패를 했고, 심수봉과 재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혼을 할 수 있었던 주선자가 김흥국이었다고 하지요. 심수봉의 정확한 결혼식 일자와 이혼일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심수봉 전남편, 심수봉 현재남편)

심수봉 재혼(심수봉 결혼)

심수봉은 라디오PD였던 남편을 자신이 먼저 좋아했다고 합니다. 심수봉은 방송에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라디오 방송 PD였던 남편이 심수봉의 섭외를 위해서 잘해주었고, 이것을 자신을 좋아하는줄 오해하여 남편에게 자신도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심수봉 남편 직업 라디오PD) 심수봉은 그 마음을 담아서 <비나리>를 부르며 청혼을 했지요.

심수봉 재혼 역시 쉽지 않았는데요. 단란한 가정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재혼을 했는데, 심수봉 아들과 심수봉 딸은 많이 방황을 했다고 합니다. 재혼을 한 후에도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해 재혼한 남편과 9년간 떨어져서 생이별을 해야 했다고 하지요. 이 때문에 심수봉은 한결같이 기다려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표현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재는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요. 심수봉 남편이 처음에는 많이 무정한 사람이었지만, 심수봉은 이러한 남편에게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다며 남편에게 사랑을 주면서 항상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심수봉은 진심을 다해 사랑을 전하면 상대도 분명 마음을 연다며 이제는 완전히 달라져 남편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심수봉은 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딸과 이혼으로 헤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했는데요. 이후 연락이 끊겼는데 어느날 어린 딸이 유모를 통해서 핑클 사인을 받아다 달라는 부탁을 했고, 이것을 계기로 딸과 계속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재회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요.

심수봉은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을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가수로서는 성공을 했지만, 아내이자 어머니로서는 성공을 하지 못했던 것 같네요. 아무튼, 심수봉은 이제는 중년 트로트 가수를 데뷔하는 인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심수봉 그녀를 응원하며, 앞으로도 좋은 앨범 좋은 노래 많이 들려주었으면 좋겠네요.

심수봉 )김호경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심수봉 전남편 한기석 이혼사유-3번 결혼과 2번 이혼

심수봉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자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10.26사건의 현장에서 모든 것을 목격했고, 그 충격과 뒤이은 정치 탄압으로 가수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죠.

결국 이런 영향으로 3번의 결혼(1번의 사실혼 포함)을 했고 2번의 이혼을 했는데,

현재 남편의 10.26과 아내 심수봉에 대한 언급이 놀랍네요.

10.26이 아내에게 미친 영향을 담담하게 언급합니다.

(왼쪽부터) 심수봉, 심정순(할아버지, 중고제의 최고수_, 심상건(5촌 당숙, 가야금 명인 사진)

가수 심수봉(본명 심민경)은 1955년 7월 11일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납니다(심수봉 고향).

(심수봉 종교) 원래 불교였다가 기독교로 개종

(심수봉 학력 학벌) 인화여자고등학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심수봉 프로필 및 경력) 1978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자작곡)’로 데뷔

사실 1976년 ‘여자이니까’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실질적인 데뷔곡입니다.

이후 아낌없이 바쳤는데,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무궁화, 사랑밖엔 난 몰라, 비나리, 백만송이 장미, 여자라서 웃어요 등의 주옥같은 명곡들을 발표하며 국민가수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본의아니게 정치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이런 성과를 냈다는 게 정말 놀랍네요.

# 목차

* 심수봉 어린 시절과 아버지

* 심수봉의 신인시절과 청와대 술자리 접대

* 심수봉과 나훈아의 인연

* 심수봉과 박정희의 죽음

* 심수봉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 3차례

* 심수봉 첫번째 남편 한기석 결별이유

* 심수봉 두번째 남편 박진섭 결별 이유

* 심수봉 세번째 남편 김호경(심수경 배우자 김호경)

* 심수봉 재혼 가정의 문제점

* 재혼 가정 문제점의 해결

* 심수봉 음악성에 대한 비판과 평가

* 심수봉의 인생

심수봉 사진

* 심수봉 어린 시절과 아버지

심수봉은 어린 시절부터 무척 기구합니다.

원래 심수봉의 어머니 장형복(이름)는 이북 출신으로 월남한 후 1951년 민속학자 심재덕과 결혼합니다.

심수봉 어머니 나이가 27살이었고, 아버지는 환갑이 다 되었을 때였죠.

참고로 심수봉 집안은 4대째 내려오는 음악 명문입니다. 심수봉 증조부가 피리와 가야금 명인인 심팔록이고,

친할아버지 심정순은 중고제의 최고수였습니다.

(중고제는 서편제, 동편제 등과 판소리의 한 갈래임)

당숙, 숙부, 고모와 이복 형제 자매들 대부분이 판소리 등에 종사하며 많은 수가 무형문화재

혹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죠.

하지만 심수봉은 이런 집안 내력을 전혀 모른채 성장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1957년 이혼을 하고는 심수봉을 혼자 키웠기 때문이죠.

(당시 심수봉이 3살이었고, 심수봉 아버지는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남)

심수봉 사진

심수봉: “저는 아버지 있는 사람이 가장 부러웠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태어나서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다.

무의식적으로 학교 앞으로 친구를 데리러 온 친구 아버지를 따라간 적도 있었다.”

심수봉: “하지만 어머니가 (새아빠와) 재혼하길 바라지 않았다.

사춘기 때 모략을 해서라도 어머니의 재혼을 가로막으려 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한테 누가 접근하는 게 정말 싫었다.

지금은 어머니가 혼자 계시는 걸 볼 때마다 정말 후회된다.”

이런 심수봉이지만 훗날 자신의 아이들에 의해서 같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인생이란 참 묘한 것 같네요(밑에서 추가 설명).

* 심수봉의 신인시절과 청와대 술자리 접대

어쨌든 심수봉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딸의 음악적인 재능을 알아차리고 피아노를 공부시킵니다.

전남편 집안의 국악은 멀리한 것이죠.

심수봉: “당시 국악이 대접받던 시대가 아니어서 어머니가 그쪽은 생각을 안 하셨던 모양이에요. 시집과의 교류도

없었던 것 같고요. 하지만 제가 네 살 때 음악적 재질이 있는 것을 보고는 가만 놔두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하더라고요. 국악은 오히려 최근에 배웠어요.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얼마 전까지도 집안 내력에 대해 몰랐어요. 그 사실을 알고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피내림이 있었나 봐요.”

심수봉 어머니는 딸이 피아니스트나 대학교수가 되기를 바랬지만,

심수봉은 가장이 되어서 일찍부터 밤무대에서 드럼을 치면서 생계를 꾸리게 됩니다.

심수봉: “그때 정말 고마운 분이 계셨어요. 공연에서 드럼을 치기 전에 제가 피아노를 치는 걸 듣더니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치는데 왜 드럼을 치냐. 드럼은 여자가 하기 힘들다’면서

재즈피아노라는 게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그 말이 제 인생을 바꾼 거죠. ”

심수봉 과거 사진(데뷔 무렵)

그리고 심수봉은 1975년 21살의 어린 나이로 청와대 술자리에 불려갑니다.

심수봉: “고교 졸업 후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 ‘어느 특별한 파티’에서 ‘대타(代打)’로 히바리

노래 한 곡을 불렀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박종규(朴鍾圭) 대통령 경호실장의 맘에 들었나봐요.

그러고 나서 대통령 만찬 자리에 불려갔어요.”

심수봉: “너무 어려서, 어린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겁도 없이 쭐레쭐레 따라간 거예요.

그런 자리인지도 모르고. 운명이라는 게 순간적인 잘못으로 인해 너무나 큰 고통 속에 살게 된 거죠.”

심수봉: “처음 본 박 대통령(박정희)은 의외로 늙어 보였다. 내가 ‘눈물젖은 두만강’ ‘황성옛터’를 부르자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러고 나서 히바리의 ‘슬픈 술(가나시이 사케)’을 부르니까 어디서 왜년을 데려왔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이어 내가 ’눈물 젖은 두만강’과 ’황성 옛터’를 부르니 그제야 박 전 대통령이 내가 한국 가수인 것을 알고 좋아했다.”

심수봉 젊은 시절 사진

* 심수봉과 나훈아의 인연

이후 운명의 10.26 사건은 1979년에 발생하는데, 그동안 심수봉은 청와대 만찬(술자리)에 불려나갔고,

그외에도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당대 최고의 가수 나훈아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죠.

나훈아: “(심수봉을 보며) 이 사람 아니면 누가 가수를 하겠느냐?”

그리고 심수봉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 심양의 팬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후 나훈아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1976년 듀엣 음반을 준비하지만,

신세기 레코드 음반사와 문제가 생겨서 중간에 녹음 작업이 취소가 됩니다.

* 심수봉과 박정희의 죽음

이후 위에서 언급한대로 심수봉은 1979년 10.26의 현장에 있게 됩니다.

(당시 심수봉외에 여대생 광고 모델 신재순도 같이 불려감.

현장에 정치인으로는 박정희, 김재규(중앙정보부장 겸 저격범), 차지철(경호실장), 김계원(비서실장) 등)

이때 김재규가 심수봉을 향해서 총을 겨누기도 합니다.

심수봉: “(1차 충돌이후 총이 격발되지 않자 김재규는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옴)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온 김재규가 화장실에서 나온 차지철에게 총을 쐈고, 다시 박대통령의 머리를 쐈어요.

그리고는 당시 대통령을 부축하고 있던 저에게도 총을 겨눴어요.

하지만 총은 격발되지 않았어요. 아마 총알이 떨어졌을 거에요.”

박정희의 사망 이후, 심수봉은 전두환(당시 합동수사본부장)으로부터 강도높은 수사를 받게 됩니다.

심수봉: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당시 계엄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나는 심령에 씌워서 그렇다고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냥 나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심수봉: “당시 유명한 H모 심령학자가 조사에 입회를 했는데, 심령에 씌어 헛 것을 보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심령학자 그 분도 계엄사로 끌려들어와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심수봉: “당시 우리 엄마도 (10.26 사건에 내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계엄사에서 내가 심령에 씌였다고 하도 몰아가니까 엄마도 그 말을 믿었던 거다.

그래서 엄마와 계엄사 사람들에 이끌려 그렇게 이상한 곳(정신병원)을 들어가게 됐다. ”

정신병원에 들어간 이후에도 심수봉의 고초는 계속됩니다.

심수봉(모자를 쓴 여인)과 신재순(오른쪽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사진

* 심수봉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 3차례

심수봉: “결국 서울 한남동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한 달간 감금당했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들이 강제로 수면제 같은 주사를 놓았다.

약이 얼마나 독했는지 2주일 만에 깨어나 화장실 거울로 쌍꺼풀이 짙게 진 퀭한 얼굴을 보면서

‘이대로 있다간 여기서 처참한 꼴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한달 후 심수봉은 정신병원을 나갈 수 있었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그 후유증을 겪게 됩니다.

심수봉: “중추신경이 수면제에 중독되는 바람에 정신병원을 나온 후에도 한참 동안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의 조언으로 불면증이 있을 때마다 위스키를 한잔씩 마시고 잠이 들곤 했다.

지금도 술을 일절 하지 않는데 당시에 못먹는 술을 억지로 마셨다.”

이렇게 정신병원을 나온 심수봉이지만, 본업인 방송 복귀는 하지 못하게 됩니다.

심수봉: “1980년 방송 정지 조치를 당했다. 내

가 TV에 나오면 국민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10.26 사건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는

신군부의 생각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후에도 심수봉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은 계속됩니다.

방송 금지가 계속되는 동안 심수봉은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주제곡 OST인 ‘순자의 가을’을 직접 부릅니다(이 노래는 영화 외에 드라마 주제곡으로 쓰였음).

그런데 제목에 순자(전두환의 마누라 이순자)라는 이름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방송 및 판매금지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가수 방미가 제목을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바꾸어 불러서 빅히트를 침)

1984년 방송 출연 금지 조치가 해제되고, 심수봉은 동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그대와 탱고를’ 발표하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듯하지만, 1985년 발표한 ‘무궁화’가 문제가 되어서 다시 방송 금지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무궁화란 노래가 박정희 대통령을 연상시키고 국민을 선동한다고 생각함)

심수봉: “나의 노래 가운데 ‘무궁화’는 유일하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두환 정권에 저항한 것은 아니다.”

심수봉: “10·26 직후 조사를 받고 방송 활동을 금지당하면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박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그때 첫아이를 낳았고, 아이 얼굴을 보면서 ‘이 아이가 행복할까’를 생각했다.

밖에서는 끊임없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피기 전에 지는 꽃이 있다.

사회에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다. 그때 한국의 국화, 무궁화가 떠올랐다.

피고는 지고, 그리고 또 몇 번이고 피는 꽃을….”

결국 심수봉은 다시 정치적인 탄압을 받고 가수 활동을 접게 됩니다.

이후 정권이 바뀔 무렵인 1987년 “사랑밖엔 난 몰라”,

“이방인”등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합니다.

특히 ‘사랑밖엔 난 몰라’는 자신에게는 정치색이 없다는 것을 하소연하는 심수봉의 외침이 아니었나 합니다.

* 심수봉 첫번째 남편 한기석 결별이유

어쨌든 심수봉은 이렇게 굴곡 많은 가수의 삶을 살았는데, 그녀의 인생 역시 비슷합니다.

아니 10.26과 이후의 정치적인 탄압때문에 개인사가 영향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죠.

심수봉: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씨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곧 저에 대한 방송출연 금지가 내려졌어요.

제가 나오면 국민이 박정희 대통령 생각을 하게 된다는 이유였죠.

처음엔 어리둥절했다가 정말로 방송출연이 막혀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자 분노가 치밀더라고요.”

당시 심수봉은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간 모습을 직접 목격했고, 김재규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기도 했습니다.

가혹한 조사와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했죠.

아마 정신적인 고통이 상당했을 것 같네요.

이런 시기에 그녀에게 버팀목이 생겼죠.

바로 심수봉 전남편 한기석(일명 한도사)입니다.

심수봉: “우연히 지인들에게 10·26 사건을 예언한 심리학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그분으로부터 정신 치료를 받았고, 상태가 많이 좋아지기도 했어요.

당시 세간에선 그분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사기꾼이나 그런 분은 아니었어요. ”

심수봉: “다만 같이 살아보니까 저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죠.

그 분은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한 1년 정도 살다 큰아들을 낳고 보름 만에 갓난 아이를 데리고 그 집을 나왔죠.”(심수봉 전남편 이혼사유, 이혼이유)

한기석은 1949년 3월 17일생으로, 심수봉보다 6살 연상이었죠(심수봉 첫남편 한기석).

당시 세간에는 심령으로 사람을 미혹시킨다는 루머가 많았는데,

심수봉은 나중에도 그에 대하여 상당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네요.

심수봉은 첫번째 남편 한기석과 1980년 동거를 했고, 이것이 대중에 알려진 이후에 약혼을 합니다(사실혼 관계임).

그리고 심수봉 한기석 사이에 큰아들 한승현(1981년생 7월 9일)이 태어납니다.

(심수봉 자녀 자식)(심수봉 가족 관계)

당시 한기석은 전처와 1남 1녀가 있었는데, 서둘러 이혼하고 심수봉과 동거를 하게 되었고,

심수봉의 어머니는 이들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심수봉이 많은 심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또한 10.26 사건 이후 심수봉은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에, 때때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합니다.

심수봉: “10·26사태 이후 계속 감시를 받아왔는데, 심령학자였던 첫 남편이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심수봉: “(내가 갇혀 있던) 바로 옆방에서 남편이 전기 고문을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잘 알고 있는 분이 고문을 당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돌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결국 심수봉의 고백처럼 심수봉은 1981년 그와 이혼하게 됩니다.

* 심수봉 두번째 남편 박진섭 결별 이유

그리고 1983년 심수봉은 사업가(유흥업소 사장) 박진섭(1952년생)을 만나서 재혼합니다

(심수봉 두번째 남편 직업 사업가)(심수봉 재혼).

심수봉이 출입하던 밤무대의 사장이었는데,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다가 서로 인연이 만들어진 것이죠.

심수봉은 1984년에 딸 박성희(이름)을 낳게 됩니다.

이후 심수봉은 박진섭과 9년을 같이 살았지만, 성격차이로 1992년 다시 이혼하게 됩니다

(심수봉 두번째 결혼 이혼사유, 이혼이유).

심수봉: “9년을 살았지만 한달에 서너 번 정도만 집에 들어올 정도로 바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부부의 잔정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 심수봉 세번째 남편 김호경(심수경 배우자 김호경)

이후 혼자 살던 심수봉은 1993년 현재의 남편 김호경(1953년생으로 심수봉보다 2살 연상)과 다시 재혼하게 됩니다.

당시 김호경의 직업은 MBC 라디오 ‘심수봉의 트로트가요 앨범’의 PD였는데, 이 둘의 인연은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심수봉: “재혼한 남편을 내가 먼저 짝사랑했어요. 아니, 처음에는 나의 착각이었죠.

PD로서 MC를 굉장히 자상하게 보살펴주고 신경 써줬는데 그걸 제가 오해했던거죠.

남편이 자기가 맡은 프로그램의 MC가 양지 위에 있어야지 음지 위에 있으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양지 위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 건데….”

심수봉: “그걸 착각해서 <비나리>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아휴, 말하자면 착각에서부터 시작된 게 처음엔 비극이었다가…(나중에는 결혼까지 하게 된 거죠.)”

심수봉: “비나리(노래)는 원래 가사가 부정적이었는데 친구가 그렇게 하면 사랑이 이뤄지겠냐고 해서 뒤에 ‘

하늘이여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라는 가사를 더 붙였어요.”

심수봉: “당시 친한 친구가 나 대신 남편에게 고백했었어요.

친구가 남편에게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남편이 나를 찾아왔죠.”

심수봉: “다행히도 남편은 제가 부르는 ‘비나리’를 듣고서 마음을 열었던 것 같아요.

남편이 이 노래를 다시 듣고 싶다고 해서 8번이나 다시 불러주었다.

남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뻑이 간 것 같았어요.”

심수봉 남편 사진은 공개하지 않음

처음에는 착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해피엔딩이어서 다행이네요.

어쨌든 ‘비나리’라는 명곡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흥미롭네요.

사랑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심수봉의 감수성과 음악적인 재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심수봉은 현남편 김호경과 1993년 재혼하게 되는데, 원래 김호경 역시 재혼이었습니다.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이름은 김규현(1983년생)이 하나 있었죠.

(심수봉 친자식은 1남 1녀이지만, 자녀(자식)는 2남 1녀라고 표기를 하죠.)

* 심수봉 재혼 가정의 문제점

이렇게 겨우 짝사랑을 이룬 심수봉이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가 않습니다.

바로 자녀 문제때문이죠.

심수봉: “전 남편(두번째 남편 박진섭)과 낳은 딸과 이혼 후 헤어지면서 연락이 끊겼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딸이 유모를 통해 연락을 했다. 핑클 사인을 받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 1998년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원래 심수봉 큰아들 한승현은 심수봉이 쭈욱 키우지만, 딸이었던 박성희는 그렇지가 못했죠.

그러다가 2001년부터 심수봉은 딸도 함께 살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심수봉: “딸아이와의 이별은 제 입장에서 봤을 땐 아이를 빼앗긴 거였어요.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딸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며 자랐죠.

자신이 가장 엄마를 필요로 할 시기에 옆에 있어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미움이 컸던 것 같아요.”

심수봉: “처음 왔을 때 ‘저 남자(현재의 남편 김호경) 나가라고 하고 나랑만 살면 안되냐’고 하더라고요.

남편도 딸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고요. 둘 사이에서 제가 못살겠더라고요.

오죽하면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겠어요. 미국으로 갈 때의 참담한 심정이란 말도 못하죠. ”

결국 심수봉은 현재의 남편과 9년 정도 떨어져서 지내게 됩니다.

심수봉 아들 한승현 역시 재혼 가정의 문제점을 겪게 됩니다.

심수봉: “당시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가 재혼을 했다(1993년).

그런데 나는 이상형을 만나 행복하고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꿈꿨지만 아들은 아니었다.”

심수봉 아들 사진(심수봉 가족 사진)

한승현(심수봉 큰아들): “어머니가 재혼 후 막내 여동생이 아버지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다.

때문에 9년 정도 헤어져 살아야 했다. 반면 둘째 동생(김호경의 아들 김규현)은 새 아버지가 데려오신 자식이다.

지금은 정말 친해졌지만 어릴 땐 배다른 동생이라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던 것 같다.”

한승현: “사실 당시 새 아버지와 많은 갈등을 빚었다.

아버지에게 혼이 나면 어머니에게 SOS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그러한 것들을 겪어야 할 과정으로 여기고 한 발 뺐었다.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친구들과도 거리를 두게 됐고, 그러다보니 집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결국에는 게임 중독 상태에 빠져서 일주일 내내 잠도 안 자고 게임만 했었다. 3

년이 지나서야 게임중독을 겨우 고칠 수 있었다.”

심수봉 자식들이 어머니의 재혼으로 정신적인 방황이 컸던 것 같습니다.

특히, 딸의 모습은 심수봉이 어렸을 때 어머니의 재혼을 반대했던 모습과 겹쳐 보이네요.

(현재 심수봉 큰아들은 모 회사 CEO이고, 둘째 아들은 대학교에,

막내 딸은 첼로를 전공했다가 다시 연기를 공부하고 있음)

* 재혼 가정 문제점의 해결

이런 재혼가정의 문제점을 심수봉은 시간을 두고 해결합니다.

심수봉: “전 아이의 상처를 완전히 씻어주려면 떨어져 있던 기간 만큼 걸릴 거라고 생각해요.

계속 노력하면 딸아이도 제 마음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죠.”

심수봉: “결국 2002년 유학을 겸해 딸과 함께 미국으로 가 2년 동안 생활했어요.

거기 가서도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아이가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아이의 마음이 열리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아이도 제가 가족과 떨어져 자기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이렇게 엄마의 사랑을 받게 되자, 딸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 같네요.

* 심수봉 음악성에 대한 비판과 평가

일각에서는 심수봉에 대해서 10.26으로 먹고 사는 가수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심수봉의 음악성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죠.

심수봉은 자신의 대표곡 대부분의 직접 작사 작곡한 싱어송 라이터입니다.

또한 시대가 막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화려한 명성을 구가할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였죠.

심수봉: “저는 데뷔 때 말고는 화려하게 떠본 적이 없어요. 상도 데뷔 때 10대가수상을 받은 것 외에는 못받았죠.

항상 노래 외적인 일로 시련을 겪어 대중들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 노래를 많이 부른다는 건 알았지만 인기를 실감하진 못했어요.

솔직히 저도 전성기라는 게 있어봤으면 좋겠어요.”

또한 광고 역시 종종 좌절됩니다.

심수봉: “예전에 어떤 CF 섭외가 진행되다가 엎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우리 신랑이 그러는 거예요.

‘그럴 거야. 10ㆍ26에 대한 게 너무 강해서 어떤 CF도 그걸 뛰어넘을 수가 없을 거야.

10ㆍ26이 딱 가리고 있는데 (광고에서 심수봉을 보는 것이) 얼마나 께름칙하고 찜찜하겠어?’라고요.”

심수봉: “그동안 몰랐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그제서야 사람들이 그걸(10.26사건) 굉장히 안 좋게 생각하겠구나 싶더군요.”

즉, 대중들은 심수봉을 볼때마다 10.26을 연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수봉 남편이 이런 점을 냉철하게 잘 짚었네요.

아마 오랫동안 라디오 PD를 하면서, 다져진 시각인 것 같습니다.

사실 심수봉이 노래를 부를 때 10.26사건을 떠올리는 사람은 심수봉 노래의 진가를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죠.

딴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수봉이 대단한 것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러 주옥같은 명곡들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 심수봉의 인생

심수봉의 인생은 평가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개인적인 문제는 개인의 노력이나 가족의 도움으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심수봉의 경우는 개인의 힘을 훨씬 뛰어넘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이죠.

다만 이 때문에 처음에는 좌절과 방황을 많이 한 심수봉이지만, 후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심수봉: “예전에는 10ㆍ26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요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내가 왜 이렇게 희생자가 돼서 어려움을 겪나 괴로워했는데,

지금은 이런 경우가 나니까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즉, 견딜 수 있는 사람에게 일어난 거라고 생각해요.”

심수봉: “그날 같이 있었던 신재순씨라고 있잖아요(1983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감).

미스 신이 미국 LA에 살아요. 미국으로 공연 갈 때마다 분장실에 나타나는데, 늘 눈이 빨개져서 와요.

재순씨만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언니 언니, 해가며 옛날 얘기를 하죠.

지난해 10월에 LA 공연을 갔을 때도 둘이 호텔에서 시간을 갖고 그 얘기를 했어요.”

누구나 불가항력적으로 큰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수봉처럼 담담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네요.

물론 그녀도 이런 마음의 평안을 찾기까지 무척 많은 시간을 고통속에서 보냈죠.

앞으로는 행복한 일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출처 : 희나리 7080 Live

글쓴이 : 희나리 삐삐 원글보기 : 희나리 삐삐

메모 :

심수봉 재혼, 9년 기다린 남편 누구? MBC PD출신의 차도남?

심수봉 재혼

심수봉 재혼 후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심수봉 남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11일 KBS‘여유만만’에 출연한 심수봉은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이혼한 후 현재의 남편과 재혼을 했으나, 어머니의 재혼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던 아들, 딸이 많이 방황을 했었다며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 놓았다.특히 심수봉은 재혼한 후에도 아이들이 적응을 하지 못해 재혼한 남편과 9년 간 떨어져서 생이별을 해야 했던 사연도 털어놓았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엄마의 재혼을 이해하기엔 아이들이 한창 예민한 나이였던 때문이다.하지만 심수봉은 끝까지 기다려준 남편 덕분에 현재는 남편과 아이들 모두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처럼 심수봉의 재혼 이후 힘들었던 사연이 알려지면서 심수봉 남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심수봉 남편은 지난해 2월, 심수봉이 KBS’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해 애틋한 마음을 털어놓은 바 있다.심수봉은 이날 방송에서 재혼한 남편을 자신이 먼저 짝사랑했다며, 히트곡 ‘비나리’가 바로 “남편을 사로잡기 위해 만든 노래”라고 밝혀 깜짝 놀라게 했다.심수봉 남편은 그녀가 지난 1993년 진행했던 MBC ‘심수봉의 트로트 가요 앨범’의 담당 PD였다.심수봉에 따르면 그때 남편이 일 때문에 심수봉에 잘해줬는데, 심수봉은 남편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라 착각했다고 고백했다.이어 심수봉은 “외로운 마음으로 비 오는 밤에 홀로 만든 노래가 바로 ‘비나리'”라며, “원래 가사가 부정적이었는데 친구가 그렇게 하면 사랑이 이뤄지겠냐고 해서 뒤에 ‘하늘이여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라는 가사를 더 붙였다”고 덧붙였다.또 심수봉은 “당시 친한 친구가 나 대신 남편에게 고백했었다”며 “친구가 남편에게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남편이 나를 찾아왔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다행히도 심수봉의 남편은 그녀가 부르는 ‘비나리’를 듣고서 마음을 열었다. 이에 대해 심수봉은 “남편이 이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길래 들려줬더니 8번이나 다시 불러달라고 부탁하더라”며 “남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뻑이 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어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한편 심수봉 재혼 후 힘들었던 사연과 남편에 관한 에피소드를 접한 네티즌들은 “심수봉 남편 멋있다”, “재혼했는데 아이들이 잘 컸네요”, “심수봉도 아이들도 마음고생 심했을 듯” 등의 반응을 보였다.

심수봉 남편 김호경 나이 직업 키 학력 고향 프로필 이혼 재혼 10.26 사건 그 후 피어나라 대한민국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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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가수이며, 트로트와 발라드 그 중간의 간극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운 트로트 발라드의 선구자인 심수봉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심수봉은 1955년 7월 11일에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하던 집안인데요.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도 전부 음악을 할 만큼 음악가 집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환경 안에서 심수봉도 음악인의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요. 전공은 재즈를 하였지만, 그 당시 최고 가수들만 무대에 설수 있다는 미 8군의 로큰롤 밴드 <논스톱>의 드러머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수봉을 트로트 가수만으로 알고 있는 팬들은 그녀가 드럼 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하는데요. 그 이유는 이런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럼 치는 여성 보컬>이라는 카펜터즈의 캐런 카펜터와 동시에 언급되기도 합니다.

심수봉은 당시에 서산초등학교에서 입학을 하였으나 어머니가 이혼 후에 이사를 하면서 어머니를 따라서 2학년 때 서울 은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됩니다.

그 후에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을 하였지만 입원 치료를 위해서 다시 휴학을 2년 하였습니다. 훗날 인천의 인화여고에 입학을 하였고 만 19세인 1974년에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75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청와대 연회로 심수봉을 불러 노래를 했던 것을 계기로 해서 음반을 내게 됩니다. 심수봉은 음악적인 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서 여러 가지 악기를 사용하는것에도 다재다능 했기에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가서 일을 하였고, 청와대 연회 역시도 이런 일의 한 종류였던 것인데요.

심수봉은 이 연회에서 그 당시에 나훈아의 노래를 불렀으며, 나훈아 본인이 듣고 감탄하면서 음반 작업을 주선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듬해인 1975년에 신세계 레코드를 통해서 음반을 진행했으나 여러 이유로 결국 음반 작업은 취소되었습니다.

같은 해 만 20세로 대입 준비를 하면서 숙명여대 작곡과에 응시하였지만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재수 끝에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1978년에는 명지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일 때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대학가요제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보인 음악적 성향이 폭이나 포크였던 시대에 심수봉은 본인의 전공 분야인 재즈가 아니라 트로트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수상을 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들이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은 이유는 <너무 프로스러워서>였기 때문이라는데요. 지금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평가이지만 그 당시의 대학가요제 심사기준에서는 대학생들이 보여주는 풋풋함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심수봉이 보여주는 음악과는 간극을 많이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심수봉은 이 대학가요제를 통해서 불렀던 <그때 그 사람>이 히트를 치면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는데요. 그 당시 심수봉과 함께 출연했던 가수들이 배철수, 노사연, 임백천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당시 대상은 받지 못했지만 이후에 모두 가수로 데뷔를 하였습니다. 대상에는 부산대의 중창단 썰물이 받았으며, 노사연이 금상, 배철수가 소속된 그룹 활주로가 은상을 받았습니다.

운명의 소용돌이 10.26 사건과 그 이후 1979년 10월 26일은 심수봉, 모델 신재순이 함께 궁정동 안가에서 열렸던 박정희 술자리에 불려 갔는데요. 그날도 다른 날과 유사하게 별반 다를 게 없었던 술자리였는데요.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면서 사태는 엄청난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마는데요.

그 당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했던 합동수사본부가 박정희 암살 사건에 대해서 강도 높게 조사를 시작하면서 심수봉 역시도 조사를 받았으며 단지 현장에 있던 것이었지만 시대는 그녀를 파란으로 몰고 가고 맙니다.

방송 활동 자체가 금지되었고 정신병원에도 강제로 입원을 시키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심수봉은 잠시 동안 영화배우로도 활동하면서 <아낌없이 바쳤는데>라는 영화에서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하였으나 가수 활동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84년이 되어서야 방송 금지가 풀리게 되면서 심수봉은 또 다른 그녀의 대표 노래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로 인기를 얻으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 발표된 <무궁화>가 사람들을 선동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방송고 나서 단 하루 만에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사태를 겪기 됩니다.

1987년에는 <사랑밖엔 난 몰라>로 역시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음반발매와 콘서트를 지속하면서 2011년까지 활동을 하였습니다.

1993년에는 SBS의 <주병진 쇼>에 출연해서 10.26 암살 당시 상황에 관해서 이야기를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수봉은 KBS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을 통해서 <아리랑> 무대를 방송에서는 최초로 선보이게 됩니다.

이번 KBS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은 세대를 아우르고 대한민국이 좋아하는 심수봉 26년 만의 단독 TV쇼입니다.

올해로 나이 67세인 심수봉이 방송에서 지금까지 공개한 적 없는 히든곡을 이번 KBS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에서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공개된 무대에서는 2009년에 발표된 <아리랑>으로 청춘 심수봉에서 여인 심수봉, 어머니 심수봉까지 <심수봉의 43년 음악 인생>을 모두 보여줍니다.

이날 총 6곡의 무대를 최초로 선보이면서 방송을 통해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얼과 한이 서린 음색으로 감동을 보여주는 심수봉의 공연은 9월 19일 일요일 밤 8시 KBS2에서 방송됩니다.

심수봉 프로필

▲본명 : 심민경 (沈玟卿)

▲출생 : 1955년 7월 11일 (66세), 충청남도 서산시

▲혈액형 : O형

▲가족 : 아버지 심재덕, 어머니 장형복의 무남독녀

▲학력 : 인화여자고등학교, 명지대학교 (경영학 / 학사)

▲직업 : 가수, 아티스트

▲배우자 : 남편 김호경, 직업 MBC 라디오 PD

▲자녀 : 슬하 2남 1녀

▲소속사 : 라이트웨이브 엔터테인먼트

▲데뷔 : 1978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

▲종교 :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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