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균 나이 | 배우 신영균 근황 나이 가족.. 정진우 감독 뿐만 아니라 김지미 황정순 향해 이렇게까지? 대체 왜? 67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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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배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영균 (배우) ; 1928년 11월 6일(1928-11-06)(93세) 일제 강점기 조선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 · 남성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 대한민국 · 대한민국 서울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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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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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나이 아들 부인 아내 와이프 김선희 결혼 자녀 고향 가족 …

신영균(申榮均, 1928년 11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겸 연극배우(연기자)와 가수 분야에서 모두 은퇴한 치과의사 출신의 기업가이자 영화기획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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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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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배우) – 나무위키:대문

대한민국 제15-16대 국회의원 신영균 申榮均 | Shin Young-Kyun ; 배우 신영균 ; 출생. 1928년 11월 6일 (93세) ; 출생 ·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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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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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 태진아, 94세 배우 신영균과 다정샷…건강한 모습에 팬들 …

공개된 사진에는 태진아와 신영균이 나란히 서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특히 1953년생으로 올해 우리나이로 69세인 태진아와 1928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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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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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 기부한 91세 배우 신영균 “내 관에 성경책만 넣어달라”

“이제 내가 나이 아흔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내 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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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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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부인 나이 아내 와이프 김선희 결혼 고향 학력 의대 – 코모두

신영균은 1928년 11월 6일, 황해도에서 태어난 실향민이다. 자라면서 연기에 꿈을 가졌지만 공부도 잘해서 진로를 두고 고민하다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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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modoo.tistory.com

Date Published: 6/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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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아내 아들 부인 김선희 나이 학력 – 이오텍스

신영균 아내 아들 부인 김선희 나이 학력. 알러지요 2020. 6. 3. 22:10. 신영균의 아내는 치과의사 남편의 배우 전업을 반대했었답ㄴ다. 60, 70년대를 풍미했던 치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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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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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신영균 근황 나이 가족.. 정진우 감독 뿐만 아니라 김지미 황정순 향해 이렇게까지?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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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신영균 나이

  • Author: 스타특종마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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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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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표작 마부 1961년 5인의 해병 1961년 연산군 1962년 열녀문 1962년 빨간 마후라 1964년 달기 1964년 갯마을 1965년 물레방아 1966년 대원군 1968년 천하장사 임꺽정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 1968년 삼일천하 1973년

신영균(申榮均, 1928년 11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 가수, 치과의사, 기업가, 영화기획가, 영화제작자 등으로 활동을 한 대학 교수 겸 예술기관단체인, 전직 정치가(재선 국회의원)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대위이다.

이력 [ 편집 ]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평주(平洲)이며 데뷔 초기에는 신일천(申一川)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1947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48년 영화 《검사와 여선생》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그의 아들 신언식은 기업인이며 한국 맥도날드 사장이다.

학력 [ 편집 ]

1938년 황해도 평산보통학교 수료

1941년 경성흥인보통학교 졸업

1947년 경성한성고등상업학교 졸업

1955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사

비학위 수료 [ 편집 ]

1993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정책과정 수료

1995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예술교육자과정 수료

1996년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최고위언론정책과정 수료

명예 박사 학위 [ 편집 ]

2011년 서강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

생애 [ 편집 ]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신태현과 어머니 신순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초등학교 3학년 때 경성부(서울)로 이사해 동대문구 흥인초등학교를 다녔고,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연극부에서 활동했다.[1]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예원좌의 후신인 청춘극장에 입단해 2년 동안 신극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경제적으로 너무 쪼들렸고, 연극은 취미로 하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1]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피란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닐 때도 연극을 해서 생활비에 보탰다.[1]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하여 연극부장으로서 공연활동에 빠져들었다.[2] 1955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미 2년 전인 1953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 해군 중위(군의무장교)로 임관하였고, 1958년 대위로 전역하였다.[3] 29세 때, 7세 연하로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 아내 김선희와[4] 해군 군의관 시절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고, 치과의사 면허자격을 딴 뒤 1958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개업했다.[1]

서울대학교 치대 재학시절 연극을 했던 인연으로 친분있는 연극인들이 찾아오게 되고 연극을 하자는 권유가 늘어갔고, 연극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신영균은 연극 《여인천하》에서 조광조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게 된다.[5] 당시, 영화 《과부》의 주인공을 물색하던 조긍하 감독이 그 무대를 보게 되고 영화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하게 된다.[5] 1960년, 조긍하 영화감독의 제안으로 32세의 늦깍이 나이에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 역을 맡아 영화계에 전격 데뷔하였다.[1] 이어 출연한 《마부》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961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하고,[6]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데뷔 2년 만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국내외 유수의 영화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그의 히트작인 《빨간 마후라》로 제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으로 통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심었다.[7] 1960년부터 1978년 배우 은퇴하기까지 《과부》, 《연산군》, 《열녀문》, 《갯마을》, 《시장》,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삼일천하》등 주옥같은 작품을 비롯하여 총 294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1960~70년대 영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다.

배우 시절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겼던 그는 1963년, 친구와 함께 서울 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극장’을 인수하여 새로 개관하였다.[8][9] 이후 명보극장 바로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하여 이때 부인 김선희 여사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다.[8]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8] 1971년에는 볼링장을 인수하였고, 1973년에는 빌딩관리업체인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부동산임대사업에까지 뛰어들어 영화배우 못지않은 사업수완을 보였다.[10] 1977년 8월에는 명보제과 바로 옆에 있는 명보극장을 7억 5천만원을 들여 사들인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 《별들의 고향 2》,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한국영화를 배급·상영하여 대박을 터뜨렸다.[8][11][12] 198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지상 14층 지하 4층의 빌딩을 건립하고 지하 2,3층에 명보소극장을 차렸다.[13] 1992년에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외식패스트푸드업체인 맥도날드사와 신영균이 함께 49 대 51의 비율로 54억원의 자본금을 투자하여 서울에 합작회사인 ‘맥신산업’을 설립하였다.[14]

1968년 9월 12일, 이신명 감독을 때려 말썽을 빚은 영화배우 박노식의 처리문제를 두고 서울예총회관 회의실에서 한국영화인연합회 감독분과위원회와 연기분과위원회 연석회의가 끝난 뒤, 영화감독 정진우의 뺨과 입언저리를 때려 여섯바늘을 꿰매는 전치 10일의 상해를 입혔고 재떨이를 던져 동료 배우 황정순, 김지미 등을 다치게 한 혐의로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15][16] 서울시경수사과는 9월 16일, 신영균을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하고 영화배우 최성호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서울지검에 송치했다.[17] 한편, 피해자 정진우 감독은 경찰에 고소취하장을 제출하였다.

정치 분야 입문 [ 편집 ]

1970년대부터는 좋은 학벌과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한국영화인협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의 단체수장 선거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정치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며, 1978년 잠정 은퇴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정치행보를 이어나갔다. 1970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에 당선된 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다.[18] 그리고 공화당 소속으로써 서울 영등포을구의 조직책으로 발탁되어[19] 출마채비를 갖추었으나, 상대방이었던 김수한 민자당 당무위원을 의식해 도중하차하였다.[20] 1979년, ‘영화인 권익을 위해 앞장서겠다’는 포부로 한국영화인협회 회장에 단독 입후보하여 선출되었다.[21] 1981년 2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제15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1984년까지 역임하였다.[22] 1993년 2월 제20대 예총 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23] 1996년에 재선에 성공하여 제21대 예총 회장까지 역임하였다.[24]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25] 제15대, 16대 각각 신한국당, 한나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냈다.[26][27] 2004년, “새로운 정치를 위해 후배들에게 의자를 물려주고 떠날 때가 됐다”며 총선 불출마를 공식 선언, “이제 다시 영화인 신영균으로 돌아가 문화예술사업에 마지막 힘을 쏟으면서 우리 정치와 한나라당을 위해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라고 말하며 정계 은퇴를 시사했다.[28]

영화박물관 건립 [ 편집 ]

1999년 6월 5일, 남제주군 남원읍 바다기슭 2만 4천여평 대지에 사재 100여억원을 들여 한국 최초의 영화박물관인 ‘신영 영화박물관’을 개관하였다.[29] 2010년, 영화 및 예술계 인재 양성을 위해 500억원 상당의 사재인 서울 중구에 위치한 복합공연시설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영화박물관인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하여 화제를 모았다.[30]

연극배우 분야 복귀 [ 편집 ]

2012년, 서울대학교 출신 배우 이순재가 주축이 된 ‘서울대학교 연극동문회’ 소속 선후배 연극인들이 모여 제작한 연극 《하얀 중립국》에 출연하여 65년 여만에 연극 무대 복귀하기도 했다.[31]

출연작 [ 편집 ]

영화 [ 편집 ]

연극 [ 편집 ]

2012년 《하얀 중립국》

텔레비전 드라마 [ 편집 ]

영화 제작 작품 [ 편집 ]

경력 [ 편집 ]

1966년 한국연극영화배우협회 회장

1966년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위원장

1969년 한국영화인협회 부회장

1970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1970년 민주공화당 국민회의 초대의원 당선

1970년 민주공화당 문화예술행정위원

1973년 한주흥산 회장

1977년 명보극장 회장

1979년 ~ 1981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1981년 ~ 1983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1981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체육문화예술분과위원장

1982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

1984년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이사

1984년 신영흥산 대표이사 회장

1985년 평주통상 회장

1988년 민주정의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1988년 민주정의당 성동병지구당위원장

1991년 서울방송 비상임이사

1993년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특별초빙교수

1993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제20대 회장

1994년 SBS 프로덕션 대표이사 회장

1996년 ~ 1998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제21대 회장

1996년 ~ 2000년 제15대 신한국당 국회의원

1999년 ~ 2012년 한나라당 상임고문

1999년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대표

2000년 ~ 2004년 제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2002년 제주방송(JIBS) 명예회장

2008년 대한민국 국민원로회 최고위원

2009년 한국지역민영방송협회 회장

2009년 전국지역방송 회장단체협의회 총회장

신영균예술문화재단 명예회장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2012년 ~ 2017년 새누리당 상임고문

2017년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미래통합당 상임고문

국민의힘 상임고문

상훈 [ 편집 ]

역대 선거 결과 [ 편집 ]

각주 [ 편집 ]

신영균 나이 아들 부인 아내 와이프 김선희 결혼 자녀 고향 가족 린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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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회의원 탤런트 영화 배우 신영균 프로필

신영균 나이 학력 고향 가족관계 종교 데뷔 소속정당 군대 병역

이름

신영균(申榮均)

출생

1928년 11월 6일 (91세)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3

본관

평산 신씨4

가족

배우자 김선희

슬하 1남 1녀

친손주 3명

외손주 2명

학력

서울대학교 치의학과 학사

서강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데뷔

1960년 영화 ‘과부’

종교

개신교(침례회)

출생: 1928년 11월 6일 (91세), 북한 평산군

배우자: 김선희

학력: 서울대학교

자녀: 신언식, 신혜진

저서: 제주신영영화박물관

신영균 영화배우, 전 국회의원

출생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

학력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데뷔

1960년 영화 ‘과부’

수상

2020년 제56회 대종상 영화제 공로상

2011년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경력

2012.02 새누리당 상임고문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출생일 1928년 11월 6일 (91세)

출생지 일제 강점기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

별명 호(號)는 평주(平洲)

연극배우 데뷔 초기 예명은 신일천(申一川)

종교 개신교

정당 무소속

부모 신태현(부)

영월 신씨 신순옥(모)

배우자 김선희

자녀 신언식(아들), 신혜진(딸)

학력 1955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사

1956년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복무 대한민국 해군

복무 기간 1953년 3월 ~ 1958년 3월

최종 계급 대한민국 해군 대위

근무 군의관

지휘 군의관 군의무장교 공중보건의

주요 참전 한국 전쟁

서훈 내역 은관문화훈장

신영균(申榮均, 1928년 11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겸 연극배우(연기자)와 가수 분야에서 모두 은퇴한 치과의사 출신의 기업가이자 영화기획가 겸 영화제작자이고 예술기관단체인을 지낸 대학 교수 겸 前 정치가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대위이다. 그의 현재 주요 거주지는 제주도 제주이다.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평주(平洲)이며 데뷔 초기에는 신일천(申一川)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1947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48년 영화 《검사와 여선생》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신영균 아들 신언식 직업 아버지 아빠

그의 아들 신언식은 기업인이며 한국 맥도날드 사장이다.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신태현과 어머니 신순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초등학교 3학년 때 경성부(서울)로 이사해 동대문구 흥인초등학교를 다녔고,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연극부에서 활동했다.1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예원좌의 후신인 청춘극장에 입단해 2년 동안 신극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경제적으로 너무 쪼들렸고, 연극은 취미로 하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1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피란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닐 때도 연극을 해서 생활비에 보탰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하여 연극부장으로서 공연활동에 빠져들었다. 신영균 군대 병역 1955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미 2년 전인 1953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 해군 중위(군의무장교)로 임관하였고, 1958년 대위로 전역하였다.

서울대학교 치대 재학시절 연극을 했던 인연으로 친분있는 연극인들이 찾아오게 되고 연극을 하자는 권유가 늘어갔고, 연극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신영균은 연극 《여인천하》에서 조광조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게 된다. 당시, 영화 《과부》의 주인공을 물색하던 조긍하 감독이 그 무대를 보게 되고 영화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하게 된다. 1960년, 조긍하 영화감독의 제안으로 32세의 늦깍이 나이에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 역을 맡아 영화계에 전격 데뷔하였다. 이어 출연한 《마부》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961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하고,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데뷔 2년 만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국내외 유수의 영화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그의 히트작인 《빨간 마후라》로 제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으로 통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심었다.7 1960년부터 1978년 배우 은퇴하기 까지 《과부》, 《연산군》, 《열녀문》, 《갯마을》, 《시장》,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삼일천하》등 주옥같은 작품을 비롯하여 총 294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1960~70년대 영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다.

배우 시절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겼던 그는 1963년, 친구와 함께 서울 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극장’을 인수하여 새로 개관하였다. 이후 명보극장 바로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하여 이때 부인 김선희 여사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다.8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 1971년에는 볼링장을 인수하였고, 1973년에는 빌딩관리업체인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부동산임대사업에까지 뛰어들어 영화배우 못지않은 사업수완을 보였다.10 1977년 8월에는 명보제과 바로 옆에 있는 명보극장을 7억 5천만원을 들여 사들인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 《별들의 고향 2》,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한국영화를 배급·상영하여 대박을 터뜨렸다. 198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지상 14층 지하 4층의 빌딩을 건립하고 지하 2,3층에 명보소극장을 차렸다. 1992년에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외식패스트푸드업체인 맥도날드사와 신영균이 함께 49 대 51의 비율로 54억원의 자본금을 투자하여 서울에 합작회사인 ‘맥신산업’을 설립하였다.

신영균 영화 드라마 연극 제작 출연작 작품활동

출연작

영화

1948년 《검사와 여선생》

1960년 《과부》 … 성칠 역

1960년 《꿈》 … 조신 역

1961년 《마부》 … 수업 역

1961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외삼촌 역

1961년 《당쟁비화》

1961년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 온달 역

1961년 《상록수》

1961년 《서울의 지붕 밑》

1961년 《어부들》

1961년 《5인의 해병》 … 오덕수 소위 역

1961년 《일편단심》

1961년 《임꺽정》

1961년 《정부》

1961년 《정조》

1962년 《연산군》 … 연산군 역

1962년 《화랑도》 … 어진랑 역

1962년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

1962년 《동경서 온 사나이》

1962년 《동학난》 … 순구 역

1962년 《부라보 청춘》

1962년 《붉은 장미의 추억》

1962년 《비밀 통로를 찾아라》

1962년 《사랑과 미움의 세월》 … 오 사장 역

1962년 《사랑을 다시 하지 않으리》

1962년 《사랑의 동명왕》 … 동명성왕 역

1962년 《산색시》

1962년 《상한 갈대를 꺾지 마라》

1962년 《신입사원 미스터 리》

1962년 《12인의 야도》

1962년 《아카시아 꽃잎 필 때》

1962년 《악인은 없다》

1962년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

1962년 《여자의 일생》

1962년 《열녀문》

1962년 《원한의 일월도》

1962년 《인간 만세》

1962년 《인목대비》 … 능양군 역

1962년 《잊을 수 없는 애정》

1962년 《전쟁과 노인》

1962년 《주유천하》 … 양녕대군 역

1962년 《천하일색 양귀비》

1962년 《태양을 등진 사람들》 … 인성 역

1962년 《평양 기생 계월향》

1962년 《폭군 연산》 … 연산군 역

1962년 《흑두건》

1962년 《칠공주》

1963년 《로맨스 그레이》

1963년 《쌀》

1963년 《강화도령》 … 이원범 역

1963년 《나는 비밀이 있다》

1963년 《보은의 구름다리》

1963년 《사랑은 주는 것》

1963년 《쌍검무》

1963년 《5인의 독수리》

1963년 《정복자》

1963년 《죽도록 사랑해서》

1963년 《철종과 복녀》 … 철종 역

1963년 《한양에서 온 성춘향》

1963년 《혈맥》 … 형 역

1963년 《횃불》

1964년 《가야금》

1964년 《석가모니》

1964년 《나는 속았다》

1964년 《남이 장군》 … 남이 역

1964년 《단장록》

1964년 《달기》 … 주왕 역

1964년 《목숨보다 더한 것》

1964년 《벽오동 심은 뜻은》

1964년 《빨간 마후라》 … 나관중 소령 역

1964년 《사자성》 … 황포 역

1964년 《십년세도》 … 홍국영 역

1964년 《아편전쟁》

1964년 《여장부》

1964년 《월급봉투》

1964년 《잉여인간》

1964년 《진성여왕》

1964년 《처녀성》

1964년 《천안삼거리》

1964년 《평양 감사》

1964년 《형부와 새언니》

1964년 《황금벌판의 혈투》

1964년 《모녀 기타》 … 남편 역

1965년 《모녀봉》

1965년 《갯마을》

1965년 《남과 북》 … 장일구 역

1965년 《가시나이》

1965년 《광야의 호랑이》

1965년 《남아 일생》

1965년 《막내딸》

1965년 《명동 44번지》

1965년 《불나비》

1965년 《빗 속에 지다》

1965년 《사르빈가에 노을이 진다》

1965년 《살아야 한다》

1965년 《살인 명령》

1965년 《상해 55번지》

1965년 《성난 독수리》

신영균 가족사진 부인 아내 배우자 와이프 김선희 사진 신영균 자녀 딸 아들 사진 어린시절

1965년 《슬픔이여 잘 있거라》 … 중길 역

1965년 《시장》

1965년 《압록강아 말하라》

1965년 《언제나 그날이면》

1965년 《예기치 못한 사랑》

1965년 《왕과 상노》 … 만강 역

1965년 《용사는 살아있다》

1965년 《인천상륙작전》

1965년 《잃어버린 세월》

1965년 《무관의 제왕 장보고》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 … 김동식 역

1965년 《정조성》

1965년 《제3의 운명》

1965년 《처가살이》

1965년 《청계천》

1965년 《태조 이성계》

1965년 《피어린 구월산》

1965년 《해병특공대》

1965년 《홍도야 울지 마라》

1966년 《군번 없는 용사》

1966년 《꽃가마》

1966년 《무명초》

1966년 《물레방아》

1966년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1966년 《비밀 첩보대》

1966년 《산유화》

1966년 《순애》

1966년 《악몽》

1966년 《여자이기 때문에》

1966년 《이별의 강》

1966년 《잘 있거라 일본 땅》

1966년 《적선지대》

1966년 《죽은 자와 산 자》

1966년 《청춘행진곡》

1966년 《탈출 명령》

1966년 《평양 기생》

1967년 《고별》

1967년 《공주 며느리》

1967년 《꿈》 … 조신 역

1967년 《내 몫까지 살아주》

1967년 《냉과 열》

1967년 《네 자매》

1967년 《단발머리》

1967년 《돌지 않는 풍차》

1967년 《두 나그네》

1967년 《뜨거운 안녕》

1967년 《마적》

1967년 《마지막 요일》

1967년 《망향천리》

1967년 《문정왕후》

1967년 《방콕의 하리마오》

1967년 《비서실》

1967년 《산》

1967년 《산불》

1967년 《상감마마 미워요》

1967년 《서울 아줌마》

1967년 《수라문의 혈투》

1967년 《암행어사》

1967년 《애인》

1967년 《애하》

1967년 《인조반정》

1967년 《장렬 509 대전차대》

1967년 《종자돈》

1967년 《천도화》

1967년 《철면 황제》

1967년 《청사초롱》

1967년 《칠부열녀》

1967년 《통금 5분전》

1967년 《풍운 삼국지》

1968년 《대원군》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 … 신호 역

1968년 《철부지 아씨》

1968년 《과도의 검》

1968년 《규방》

1968년 《낮과 밤》

1968년 《독수공방》

1968년 《로맨스 마마》

1968년 《맨발의 영광》

1968년 《목가》

1968년 《무숙자》

1968년 《바람 같은 사나이》

1968년 《방랑대군》

1968년 《방울대감》

1968년 《사랑》

1968년 《사랑했는데》

1968년 《소라의 꿈》

1968년 《언니의 일기》

1968년 《여마적》

1968년 《순정》

1968년 《일본인》

1968년 《자주댕기》

1968년 《찬란한 슬픔》

1968년 《천하장사 임꺽정》

1968년 《칼맑스의 제자들》

1968년 《탈출 17시》

1968년 《파문》

1968년 《팔도강산 2》

1968년 《풍랑객》

1968년 《풍운아》

1968년 《하얀 곰》

1968년 《랑》

1968년 《효자문》

1969년 《미워도 다시 한번 2》 … 신호 역

1969년 《이조 여인 잔혹사》

1969년 《검은 야회복》

1969년 《남 몰래 흘린 눈물》

1969년 《내시 2》

1969년 《내실》

1969년 《눈물을 감추고》

1969년 《당신》

1969년 《당신의 뜻이라면》

1969년 《목메어 불러봐도》

1969년 《못잊어》

1969년 《별은 멀어도》

1969년 《봄 봄》

1969년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아》

1969년 《사랑이라는 것은》

1969년 《서울 야화》

1969년 《성녀와 마녀》

1969년 《세월이 흘러가면》

1969년 《여진족》

1969년 《요화 장록수》

1969년 《울고 가는 외기러기》

1969년 《유혹》

1969년 《육군 김일병》

1969년 《250조》

1969년 《잊혀진 여인》

1969년 《잔혹한 청춘》

1969년 《저 눈밭에 사슴이》

1969년 《젊은 여인들》

1969년 《정과 애》

1969년 《천년호》

1969년 《청춘을 다 바쳐》

1969년 《한 목숨 다 바쳐》

1969년 《형》

1970년 《세조대왕》

1970년 《거북이》

1970년 《결혼 대작전》

1970년 《그 분이 아빠라면》

1970년 《기러기 아빠》

1970년 《두 여인의 집》

1970년 《떠나야 할 사람은》

1970년 《명동 가시나》

1970년 《무영탑》

1970년 《버림 받은 여자》

1970년 《벽 속의 여자 2》

1970년 《비운의 왕비》

1970년 《세상만사 뜻대로》

1970년 《숨겨논 여자》

1970년 《슬픔을 외면할 때》

1970년 《약속은 없었지만》

1970년 《어느 소녀의 고백》

1970년 《아빠 엄마 오래 사세요》

1970년 《여인의 종착역》

1970년 《왜 여자만이 울어야 하나》

1970년 《울고 간 여인》

1970년 《유정무정》

1970년 《이별의 15열차》

1970년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

1970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 2》

1970년 《처와 처》

1970년 《청춘무정》

1970년 《태조 왕건》

1970년 《한 많은 남아 일생》

1970년 《호피 판사》

1970년 《미워도 다시 한번 3》 … 신호 역

1971년 《미워도 다시 한번 4》 … 신호 역

1971년 《무정의 네온가》

1971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1971년 《청산에 우는 새야》

1971년 《암흑가의 공포》

1971년 《대감신랑》

1971년 《늦기 전에》

1971년 《형 2》

1971년 《죽도록 사랑했노라》

1971년 《친정 아버지》

1971년 《내실 사모님》

1971년 《미워도 정 때문에》

1971년 《처복》

1971년 《짚세기 신고 왔네》

1971년 《빗 속에 떠날 사람》

1971년 《잠들면 떠나주오》

1971년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

1971년 《세 남매》

1972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1972년 《집을 나온 여자》

1972년 《아빠라 부르는 연인》

1972년 《사랑하는 아들 딸아》

1972년 《여선생》 … 채화 부 역

1972년 《궁녀》

1972년 《이 밤이여 영원히》

1972년 《인생은 나그네길》

1972년 《기로》

1972년 《인간 낙제생》 … 송달준 역

1972년 《헤어져도 사랑만은》

1973년 《딸부잣집》

1973년 《해벽》

1973년 《삼일천하》 … 김옥균 역

1973년 《천사의 메아리》

1973년 《잡초》

1973년 《고향에 진달래》

1974년 《캐서린의 탈출》

1975년 《애수의 샌프란시스코》

1976년 《아라비아의 열풍》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79년 《화조》

연극

2012년 《하얀 중립국》

텔레비전 드라마

1973년 TBC 동양방송 드라마 《북간도》

1995년 SBS 서울방송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

영화 제작 작품

1988년 《그 마지막 겨울》

1988년 《둥지 속의 철새》

신영균 고향

대한민국의 배우, 정당인이다.1928년 11월 6일, 황해도에서 태어난 실향민이다. 자라면서 연기에 꿈을 가졌지만 공부도 잘해서 진로를 두고 고민하다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지원해 합격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현재의 배우자를 만나고, 개인 병원을 개업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연극무대에 섰고, 이어서 영화에 출연해 오늘날의 레전드가 되었다고 한다. 남성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 덕분에 주인공으로 감독들이나 제작자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아 다소 무리를 감수하면서도 다작을 하게 되었다고. 선이 굵은 미남형 얼굴에다 당대의 인기 배우로서는 드물게도 거의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연기자로 전향할 당시 부인에게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썼다는데, 서약서를 썼다고 다 그 내용대로 행동하지는 않으므로 원래 성품 자체가 그러한 듯하다.

원로 영화배우 중 김지미와 더불어 배우 생활은 물론이고 개인 사업으로도 굉장히 성공한 인물이다. 1977년에는 명동의 랜드마크 격인 명보극장을 인수했고, 1991년에는 맥도날드의 한국 법인인 신맥을 설립하는 등 현금으로만 500억을 상회하는 개인 재산을 보유하고 있고, 원로 배우 상당수가 그러했듯이 예총 회장을 거쳐 연예계 몫으로 신한국당, 한나라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두 차례 지내기도 했다. 다만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통일민주당 박용만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0년, 당시 500억 원 상당의 가치를 가진 명보극장과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해 모처럼 영화계의 좌우합작을 이끌었고,서울대에 발전기금으로 100억 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2012년에는 이순재, 심양홍 등 서울대 연극동아리 출신 후배들과 함께 ‘하얀 중립국’이라는 연극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모처럼 배우로써의 존재감을 보였다.

신영균 재산 기부

원로배우 신영균(91)이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화제다.신영균은 12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계 지원과 후배 육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겠다”며 이 같은 의사를 전했다.1960~70년대 대스타로 활약을 펼쳤던 그는 앞서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 원 규모의 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내놓은 바 있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 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1960~70년대에는 내 영화를 맘껏 틀 극장이 너무나 갖고 싶었지만 이제는 욕심이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갈 것은 40~50년 손때 묻은 이 성경책 하나”라고 말했다.신영균의 기부를 토대로 지난 2011년에는 신영균영화예술재단이 출범한 바, 이 재단은 수익금으로 영화인 자녀 장학금을 지급하고, 단편영화 제작 지원을 하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을 통해 연극·영화계 인사들의 공로나 선행을 격려하고도 있다.

서울대 치의학과를 졸업한 신영균은 배우로 전향해 영화 ‘과부’로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상록수’, ‘연산군’,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300 여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신영균 스캔들 전여친? 불륜 이혼 과거 재혼 여자친구 린다이 사망

신영균 린다이 스캔들

195-60년대 홍콩 최고의 여배우였던 임대(林黛, Linda Lin Dai)5가 1967년 갑작스레 자살했을 당시 신영균에게 고백한 사랑이 거절당하자 괴로워하다 죽음을 결심했다는 소문이 몇몇 미디어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무근이다. 임대와 신영균은 홍콩의 쇼 브라더스와 한국의 신필름의 합작 영화 달기에서 같이 연기했던 적이 있다. 다만 신영균은 촬영 중 린다이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60년 영화인생의 유일한 스캔들이 있었다. 홍콩의 유명 여배우 린다이(林黛)와의 염문설이다.1964년 3월, 나는 ‘빨간 마후라’의 엔딩 장면(적탄에 맞아 죽는 장면)을 찍고 곧장 공항으로 달려갔다. 한국과 홍콩의 합작영화인 ‘비련의 왕비 달기’ 촬영차 홍콩으로 날아갔다. 나는 중국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 역을, 린다이는 주왕의 애첩 달기 역을 맡았다. 달기는 희발(남궁원)을 사랑하면서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주왕의 후비가 되고, 감언이설로 주왕을 더욱 포악하게 만든다는 캐릭터였다.

우리는 70일간 촬영하면서 동료 배우로서 가까워졌다. 린다이는 당시 톱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남편 문제였다. 한 주먹 하는 남편의 폭력성 때문에 힘들어하더니 영화 촬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홍콩과 한국 언론에서 그녀의 죽음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급기야 나와 관련이 있다는 기사까지 터졌다. 나를 사모해서 사랑 고백을 했지만 거절당하자 삶을 비관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고인에게 누가 될까 봐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은 이랬다. 한창 영화를 찍던 중에 린다이와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상대방 언어는 몰랐지만 영어와 보디 랭귀지를 섞어서 소통하곤 했다.

린다이=“저는 정말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나=“이봐 린다이, 나는 가정을 가진 사람이야. 와이프가 있어.”

린다이=“무슨 상관이에요. 홍콩에선 관계없어요. 그분은 한국 와이프이고 여기서는 제가 당신 와이프를 하면 되잖아요.”

영화 촬영 내내 아내는 홍콩에서 내 스케줄 관리 등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가정불화를 겪던 린다이로서는 다정한 우리 부부가 적잖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나만큼이나 린다이와 가깝게 지낸 아내는 이런 해프닝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아내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촬영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린다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국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 저도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래요, 잘 대접할 테니 언제든 오세요.”

이런 말을 주고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를 영영 볼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타깝고 비통했지만 나는 린다이의 장례식조차 가보지 못했다. 나중에 만난 그의 동료 배우 리리화(李麗華)는 “린다이가 당신을 얼마나 생각했는데 장례식조차 안 왔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나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녀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다는 오해를 받는 상황이었기에, 섣부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혹여 내 아내가 상처를 받진 않을까 걱정됐고, 그녀의 남편을 비롯한 유가족의 얼굴을 보기가 두렵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정말 나 때문에 가정불화가 심해진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저세상에서 그녀를 만나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신영균 결혼 부인 아내 와이프 배우자 직업 김선희 직업

신영균 결혼 29세 때, 7세 연하로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신영균 부인 아내 직업 김선희) 아내 김선희와 해군 군의관 시절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고, 치과의사 면허자격을 딴 뒤 1958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개업했다. (신영균 부인 아내 나이 차이 신영균보다 7살 연하) 신영균 자녀 자식 아이 아기 딸 아들 1남 1녀를 두고 있다.아들 신언식은 기업인이며 한국 맥도날드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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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 태진아, 94세 배우 신영균과 다정샷…건강한 모습에 팬들 흐뭇

태진아와 신영균/태진아 SNS © 뉴스1

가수 태진아가 배우 신영균과 함께한 인증샷을 공개했다.태진아는 지난 7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신영균 선배님과, 항상 건강하세요”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게재했다.공개된 사진에는 태진아와 신영균이 나란히 서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특히 1953년생으로 올해 우리나이로 69세인 태진아와 1928년생으로 94세인 신영균은 해당 사진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줘 팬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한편 태진아는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아 지난 5월 기념 앨범을 발매했다. 신영균은 1960년 데뷔해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대표작을 남긴 60~70년대 영화계 명배우로 유명하다. 이후에도 영화계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서울=뉴스1)

500억 기부한 91세 배우 신영균 “내 관에 성경책만 넣어달라”

“이제 내가 나이 아흔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함께 묻어 주면 됩니다.”

91세 배우 ‘남기고 싶은 이야기’ 이번주 시작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연재 신영균씨

평생 술·담배·도박 멀리하고 살아

연예인 남편 결사반대했던 아내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 설득

은막서 잘 나갈 때 가족 생각뿐 전성기 땐 한 해 집 열채 값 벌어

차곡차곡 모아 사업 밑천 만들어

성공 비결? 절대 무리하지 않는 것

7억원에 산 명보극장 500억 가치

원로배우 신영균(91·사진)씨가 인생 말미에 띄우는 편지다.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끈 그는 최근 중앙일보와 만나 “앞으로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아직 구체적 계획까지 세우진 않았지만 “영화계 지원과 후배 육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겠다”고 말했다. 연예계 최고의 자산가로 이름난 신씨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꼽힌다.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해 화제가 됐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배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60~70년대에 많게는 1년에 30편씩 영화를 찍어 가며 모아 온 재산이다.

“91년 영화 같은 삶 후회는 없다, 남은 것 다 베풀고 갈 것”

아름다운 마무리가 ‘주고 가는 삶’이라고 보시나요.

“크진 않지만 내 노후생활을 위해 조금 가지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걸 베풀고 싶은 거죠. 자식들은 다 먹을 게 충분하고….”

신씨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술·담배는 물론 여자와 도박도 멀리해 왔다. “제가 조금 재미없게 살았죠. 그래도 원칙 하나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구순의 신씨는 지금도 규칙적으로 산다. 오전 10시 서울 명동 호텔28 사무실에 출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호텔28은 영화 촬영장 분위기가 물씬한 부티크 호텔로, ‘28’은 이곳 명예회장인 신씨가 태어난 해(1928년)를 가리킨다. 그의 삶을 돌아보는 첫 인터뷰도 이곳에서 진행됐다. 1m72㎝에 68㎏, 회색 재킷 정장에 중절모를 쓴 신씨의 첫인상은 ‘28년생’보다 ‘28청춘’에 가까웠다.

너무 젊어 보입니다. 건강 비법이 있나요.

“한창 촬영할 때는 피곤하니까 초콜릿·사탕을 많이 먹었어요. 40대 중반쯤 되니 당뇨가 왔어요. 그래서 단 음식은 주의하고 하루 5000보 이상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매일 오후 헬스장에 가서 한 시간 이상 가벼운 근육운동과 러닝머신을 해요.”

당뇨 말고는 달리 불편한 곳은 없나요.

“배우 시절 너무 소리를 질러서인지 기관지가 좀 안 좋은 것 빼고는 다 괜찮아요. 나이 먹으니 체중이 자꾸 줄어서 68~70㎏ 왔다 갔다 하는데 한창 시절엔 85㎏까지 나갔어요.”

신씨가 2010년 사회에 내놓은 명보극장은 그의 보물 1호였다. 1977년 8월 당시 7억5000만원에 인수했던 극장의 자산가치가 40년 새 60배 넘게 뛰었다.

비싸게 받고 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누가 500억원 줄 테니 팔라고 하긴 했었는데 내가 거절했죠. 지금 이렇게 좋은 일에 쓰면서 오래 보존할 수 있으니 훨씬 좋지 않나요.”

“다시 태어나도 배우의 길 가겠다”

신씨의 기증 재산을 토대로 2011년 신영균영화예술재단이 출범했다. 재단은 건물 임대료와 기부금 등 각종 수익금으로 9년째 영화인 자녀 장학금 지급, 단편영화 제작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제9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연극·영화계 인사들의 공로나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상인데, 이 분야의 상금(5개 부문 총 1억원)으로는 최고 액수다.

마치 자식 같은 극장을 내놓으셨는데.

“60~70년대에는 내 영화를 맘껏 틀 극장이 너무나 갖고 싶었죠. 하지만 이제 욕심이 없어요. 그저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갈 거는 40~50년 손때 묻은 이 성경책 하나예요. 혜진아(딸을 보며), 이걸 나랑 같이 묻어 다오.”

신씨는 가죽이 다 해어진 성경책 한 권을 만지며 말했다. 딸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소리 내 읽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에요.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런 말씀 때문에 오늘날 신영균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허허.”

한국 영화 전성기로 꼽히는 60년대는 배우 신영균에게도 황금기를 안겼다. 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하면서 그간 연극으로 다져온 연기 실력을 단박에 인정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벼락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상록수’ ‘연산군’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19년 동안 300여 편에 출연했다.

또 기회가 온다면 맡고 싶은 역할은.

“글쎄요…. 머슴, 왕, 군인, 사장 뭐 안 해본 캐릭터가 거의 없어요. 주로 상남자 스타일이었죠. 심지어 예수, 석가모니도 했다니까요.”

다시 태어난다면 왕, 머슴 중 뭘 고르실까요.

“신영균을 선택하겠어요. 배우 하며 이런 인생, 저런 인생 다 살아봤으니까요. 허허허, 정말 후회 없이, 유감 없이 살았습니다.”

“윤정희와 마지막 영화 … 알츠하이머 안타까워”

선뜻 믿기지 않았다. 일생을 정리하는 단계에서 후회 없이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 후회가 없느냐”고 여러 번 재차 물어도 대답은 언제나 “그렇다”였다.

신씨는 78년 ‘화조’를 끝으로 충무로에서 은퇴했다. ‘화조’ 등 40여 편에서 그와 호흡을 맞춘 배우 윤정희(75)씨 얘기가 나오자 “참 아까운 사람이에요”라는 말부터 나왔다. 윤씨가 10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 알려져 안타까움을 사고 있지만 신씨는 이미 윤씨의 투병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난해까지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하면서 행사에도 자주 왔어요. 남편 백건우 피아니스트 공연이 있으면 우리 부부를 빠뜨리지 않고 초청했었죠. 우리 집에서 종종 식사도 함께 했는데 치매라니 정말 안타깝게 됐어요.”

‘빨간마후라’ 촬영하며 생사 오가

왕년의 두 스타는 부산국제영화제 등 각종 영화 행사에서 나란히 레드 카펫을 밟으며 돈독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신씨는 2010년 윤씨가 주연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VIP 시사회에도 참석했다. “윤정희씨는 어떤 여배우인가요?”라는 당시 취재진의 질문에 “멋진 여배우!”라고 대답했다.

“윤정희씨는 나만 보면 ‘우리 같이 영화 한번 해야지, 해야지’ 항상 그랬어요. 이창동 감독을 만나서는 우리 둘이 함께 나오는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도 했죠.”

신씨는 60년대 엘리트 배우로 주목을 받았다. 서울대 출신의 잘나가는 치과의사에서 배우로 인생 항로를 바꿨다. 무엇보다 연기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연극 무대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신발을 던져가며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2년 동안 지켜본 연극판은 불안정하고 무질서했어요. 연극만으로는 생활이 안 될 거라고 보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55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2년 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열었어요.”

치과의사로도 먹고살 만하셨나요.

“근근이 생활은 됐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배우 김혜자씨도 고등학생 때 환자로 온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허장강·최무룡 등 연극하며 인연을 맺은 배우들도 자주 왔어요.”

어떻게 배우를 택하게 됐나요.

“어느날 조긍하 감독하고 영화평론가 허백년씨가 찾아왔어요. 치과의사를 하면서도 연기에 굶주려 국립극단에 입단해 활동하던 때였는데, 내가 ‘여인천하’에서 조광조 역을 맡아 하는 걸 보고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 역을 시키면 딱 맞겠다 생각한 모양이에요. 머슴 역이다 보니 머리를 빡빡 깎으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환자 볼 일이 좀 걱정이긴 했는데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대진 의사를 고용해 1년 정도 치과 일을 병행했는데, 저한테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이 늘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치과를 그만두게 된 거죠.”

아내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요.

“아내는 ‘내가 치과 의사랑 결혼했지 딴따라랑 결혼한 거 아니지 않냐’면서 결사 반대를 했죠. 그 당시 배우들은 스캔들이 워낙 많다 보니 아내도 그걸 걱정한 모양이에요. 나는 ‘절대 그럴 일 없게 하겠다’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겠다’고 설득해 허락을 받았고 그 약속을 지켰어요. 실은 아내도 내 연극을 보면서 ‘이 양반은 하나님이 주신 탤런트가 있으니 연기를 해야 된다’ 생각은 했다고 그래요.”

60년대 영화배우들은 사실 목숨을 걸고 일했다. 수준 높은 컴퓨터 그래픽 기술도 스턴트맨(대역 배우)도 없던 시절이다.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신씨도 여러 번 생사를 오갔다. ‘5인의 해병’ ‘빨간마후라’ 촬영 때는 실탄이 날아들었고, ‘나그네’ 촬영 때는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윤정희, 나만 보면 같이 영화하자고 해”

그는 상복도 많았다. ‘연산군’(1961), ‘열녀문’(1962)으로 1, 2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상록수’(1961), ‘빨간마후라’(1964)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등을 받았다. 그가 받은 각종 트로피들은 호텔28, 신영영화박물관 등 곳곳에 전시돼 있다.

신씨는 충무로의 ‘바른생활 사나이’로 유명하다. 화려한 스크린과 함께하면서도 가장의 책임, 가정의 행복을 삶의 1순위에 올려놓았다. 60년대 사생활 관리 소홀로 재산·가족 등을 잃은 많은 스타 배우들과 차별화된 지점이다. 그는 “다른 배우들보다 영화를 늦게 시작했고,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컸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60년대 주연 배우들의 수입은 어땠나요.

“집 한 채 가격이 200만~300만원 하던 시절인데 나 같은 경우 편당 70만원 정도는 받았던 것 같아요. 1년에 20~30편씩 ‘겹치기 출연’을 할 때도 있었으니까, 이때 차곡차곡 모아둔 돈이 나중에 사업 밑천이 됐죠.”

신씨는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60년대 초 이름난 빵집이었던 명보제과를 600만원에 인수했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태극당·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점으로 인기를 끌며 25년간 성업했다.

사업마다 성공한 비결이라도 있나요.

“노후를 생각하고 사업을 시작한 거라 절대 무리를 하지 않습니다. 돈이 좀 있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말들이 많지만 난 모험은 하지 않고 안전한 투자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빚을 안 지고 나름 안정되게 살 수 있었네요.”

짠돌이·구두쇠 소리도 듣지 않았나요.

“바쁘게 살다 보니 마음과 달리 혹시 제대로 베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명보극장을 기부했을 때 정말 기뻤고, 가족들도 적극 지지해 줬어요. 충무로의 자취를 살릴 수 있었잖아요.”

신씨는 68년부터 한국영화배우협회장·한국영화인협회장·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 등을 역임하며 충무로의 권익 향상에도 앞장섰다. 15, 16대 국회의원(1996~2004년)을 지내면서 국내외 문화예술 진흥에 힘썼다.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인데.

“그럼요. 내 나이를 보세요. 한국영화 100년 지킴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허허. 앞으로 100년이 더 기대됩니다.”

신씨의 90년 영화 같은 인생은 앞으로 매주 두 차례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다. 신씨는 ‘빨간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한마디로 자신의 긴 여정을 압축했다.

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email protected]

신영균 부인 나이 아내 와이프 김선희 결혼 고향 학력 의대

신영균의 아내는 치과의사 남편의 배우 전업을 반대했었다. 60, 70년대를 풍미했던 치과의사 출신 배우 신영균은 9월 25일 방송된 KBS 2TV ‘여유만만’에서 “치과의사로 안정적인 삶을 살던 남편의 배우전업을 반대했었다”고 밝혔답니다.

신영균은 병원을 개업하고 의사를 하면서도 연극단체에서 연기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때 신영균의 선 굵은 외모와 중저음의 목소리에 매력을 느낀 작가와 영화 감독들의 러브콜이 쏟아졌고 신영균 역시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느껴 배우로서의 삶에 뛰어들었답니다.

이에 신영균의 아내 김선희씨는 “반대했었다. 내가 당신이 치과의사라 결혼한거지 배우라면 결혼안했다”고 으름장을 놨다. 하지만 신영균은 당시 아내를 필사적으로 설득했답니다.

신영균은 아내에게 “혹시 내가 바람이라도 피울까 걱정하나? 절대 바람 안 피울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신영균 아내 김선희씨는 남편이 오른 ‘여인천하’ 연극무대를 보고 반대하는 마음을 접었다. 김선희씨는 “내 남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멋지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답니다.

결국 배우의 삶을 살게 된 신영균에게 가장 큰 지지자는 아내 김선희씨였다. 훌륭한 내조로 남편 신영균의 성공을 이끌어 낸 아내 김선희씨와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신영균. 중년 부부의 사랑이 훈훈함을 자아냈답니다.

신영균은 1928년 11월 6일, 황해도에서 태어난 실향민이다. 자라면서 연기에 꿈을 가졌지만 공부도 잘해서 진로를 두고 고민하다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지원해 합격했답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현재의 배우자를 만나고, 개인 병원을 개업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연극무대에 섰고, 이어서 영화에 출연해 오늘날의 레전드가 되었다고 한답니다.

남성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 덕분에 주인공으로 감독들이나 제작자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아 다소 무리를 감수하면서도 다작을 하게 되었다고. 선이 굵은 미남형 얼굴에다 당대의 인기 배우로서는 드물게도 거의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았답니다.

일설에 따르면 연기자로 전향할 당시 부인에게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썼다는데, 서약서를 썼다고 다 그 내용대로 행동하지는 않으므로 원래 성품 자체가 그러한 듯 하답니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신영균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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